지구의 미래 - 재앙을 희망으로 바꾸는 녹색혁명
프란츠 알트 지음, 모명숙 옮김 / 민음인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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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에서 살면 도시만 알고 만다
 [책읽기 삶읽기 11] 프란츠 알트, 《지구의 미래》



 《생태주의자 예수》(이레,2003)와 《생태적 경제기적》(양문,2004) 두 권이 우리 말로 나온 프란츠 알트 님 새책 《지구의 미래》(민음인,2010)를 읽다. 이 책은 책값이 적힌 자리에 ‘재생 종이로 만든 책’이라는 글월이 적혀 있다. 환경책을 힘껏 펴내는 출판사에서는 굳이 이런 말을 적어 넣지 않는다. 환경책을 애써 엮는 출판사에서는 ‘되씀종이’ 값이 퍽 비싸 엄두를 못 내기까지 한다. 환경책을 가물에 비오듯 선보이는, 어쩌다 한 번 생각난 김에 펴내는 출판사에서 이런 말을 적어 넣는다. 되씀종이로 책을 만들어야 한결 좋다고 여긴다면, 띄엄띄엄 내놓는 환경책만 되씀종이로 만들 노릇이 아니라, 여느 소설책이나 인문책이나 처세책에다가 참고서와 문제집과 교과서까지 되씀종이로 만들 노릇이라고 생각한다.

 프란츠 알트라는 분이 쓴 책 가운데 세 권째 읽으며 곰곰이 헤아려 본다. 이분은 생태와 환경 이야기를 늘 정치와 경제 이야기하고 이어서 들려준다. 당신이 정치학자이기 때문이라 할 수 있는데, 생태와 환경을 살리는 길이 정치와 경제를 살리는 길이요, 정치와 경제를 살리는 길로 가자면 생태와 환경을 살리는 길로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꾸준히 들려준다.


.. 우리는 앞으로 자연과 함께 살고 일하고 경영하는 법을 배우거나, 아니면 이 행성에서 사라질 것이다 ..  (23쪽)


 오늘날 도시사람은 생각할 줄 아는 머리를 스스로 잃거나 버렸다. 오늘날 도시사람들은 구멍가게이든 커다란 마트이든 찾아가서 물건을 살 줄은 알지만, 이 물건이 어디에서 어떻게 비롯하여 이 자리까지 왔는가를 생각할 줄 모른다. 먹을거리부터 쓸거리까지 어떤 물건을 장만하려 하든지, 땅을 일구는 사람이나 땅을 파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줄 생각하지 못한다. 푸성귀이든 곡식이든 고기이든 햄이든 가공식품이든, 누군가 땅을 일구어야 거두어들인다. 자동차를 굴리는 기름이든 가게와 집과 거리를 밝히든 등불이든 누군가 땅을 파내어야 돌릴 수 있다. 농사꾼과 광부가 없다면, 또 고기잡이와 청소부와 운전기사가 없다면, 그리고 이들 일꾼(거의 모두 남자)한테 밥상을 차려 주는 살림꾼(거의 모두 여자)이 없다면 그 어떤 도시 문명과 문화이든 고작 하루조차 버틸 수 없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도시사람은 몹시 바쁘다. 몹시 바쁜 나날을 숨가쁘게 보낸다. 피가 튀는 싸움판에서 나가떨어지지 않으려고 아둥바둥한다. 피가 튀는 싸움판에는 벗이든 이웃이든 없다. 누구나 나한테는 맞수일 뿐이다. 내 밥그릇을 지키고자 벗이든 이웃이든 아랑곳해서는 안 된다. 흔히 공무원을 가리켜 쇠밥그릇이라 하지만, 여느 회사원과 군인과 교직자나 성직자 또한 쇠밥그릇이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모두 쇠밥그릇이 되고 만다.


.. 몸무게가 보통 70킬로그램에 불과한 인간을 수송하기 위해 1.5톤의 무게가 나가는 자동차를 생산하고 구입한다는 게 정말로 현명한 일일까? … 독일의 도로에서는 날마다 평균 열다섯 명의 사람이 죽고, 1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한다. 예전에 탱크가 전쟁터에서 한 짓을 오늘날에는 자동차가 우리의 도로에서 저지른다 ..  (57, 94쪽)


 《지구의 미래》라는 책을 읽으면 갖가지 숫자와 통계가 춤을 춘다. 이런 숫자와 통계는 으레 경제발전이라는 이름이 붙는 자리에 쓰인다. 그런데 이 책에서만큼은 이런 숫자와 통계가 생태와 환경을 살리는 길을 돌아보도록 하는 데에 쓰인다. 이를테면, “네덜란드에서는 모든 길의 42퍼센트를 자전거로 다닐 수 있다. 독일의 경우에는 이 비율이 7퍼센트에 불과하다(106쪽).” 같은 숫자와 통계인데, 이 나라 한국은 몇 퍼센트라 할 만할까. 한국에서 자전거길 닦기는 온 나라 지자체마다 유행처럼 벌이는 건설사업인데, 자전거로 학교나 일터를 오갈 수 있도록 하는지 궁금하다. 값싼 자전거를 누구나 손쉽게 탈 수 있도록 제도나 행정이나 시설을 마련하는지 궁금하다. 자전거를 손질할 만한 작은 가게가 곳곳에 알맞게 있는지 궁금하다.

 “14년 전, 독일인들은 수입의 약 40퍼센트를 식품에 지출했다. 오늘날에는 그 비율이 11퍼센트이다. 매달 식품비보다 자동차에 돈이 더 많이 든다(189쪽).” 같은 숫자와 통계도 재미나다. 한국사람은 어떻게 될까. 모르기는 몰라도, 한국사람 또한 자동차한테 들이는 돈이 어마어마할 테지. 여기에 새 아파트를 장만하려고 들이는 돈이나 은행에 갚는 빚이 꽤 클 테고.

 잘 모르는 도시사람은 흔히 잘못된 정보로 잘못된 이야기를 나누기 일쑤이다. 이른바 ‘유기농 곡식은 돈 많은 사람이나 먹는 밥’인 줄 잘못 안다. 마땅한 노릇인데, 어마어마하게 비료와 풀약을 써서 어마어마하게 때려짓는 기계농업으로 곡식을 거두면 훨씬 적은 값(적다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으로 더 많이 거두어 더 많이 팔아치울 수 있단다. 나라밖에서 사들이는 쌀은 얼마나 값이 눅은가. 그러면, 이렇게 더 값싼 곡식과 푸성귀를 즐기는 오늘날 사람들은 몸이 얼마나 튼튼하려나. 값싸고 좋은 먹을거리를 즐기면서 ‘병원에 갈 일이 없’는지?

 먼 옛날까지 거슬러 올라갈 까닭이 없다. 지난날 이 나라 사람 가운데 병원을 들락거리던 사람은 거의 없다. 지난날 이 나라 농사꾼은 모두 ‘유기농 곡식’만 먹었다. 똥과 오줌으로 거름을 내어 논밭에 뿌렸고, 이렇게 거둔 곡식을 먹으며 눈 똥과 오줌을 다시 거름으로 내어 논밭으로 돌려주며 살았다. 누구나 언제나 어디서나 이 나라 농사는 유기농이었다. 유기농이 기계농과 화학농으로 바뀐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 우아한 바덴바덴에서 명성이 자자한 병원의 주치의는 나의 항변에 정색하고 말했다. “음식이 건강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씀인가요?” 내가 훗날 조사한 바에 따르면, 독일과 유럽에서는 의사를 양성할 때 건강한 음식과 건강의 연관성에는 관심도 없고 가르치지도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우리의 농업이 화학비료 농업으로 발전할 수 있었고, 예전에 생명을 위한 수단으로 이루어진 식량 생산이 먹는 수단으로서의 식량 생산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  (178쪽)


 프란츠 알트 님이 《생태주의자 예수》와 《생태적 경제기적》에 이어 《지구의 미래》라는 이름을 붙여 내놓은 책을 읽는 사람은 우리 삶과 삶터를 얼마나 잘 헤아리거나 파헤칠는지 모르겠다. 책은 신나게 읽지만, 정작 내 삶은 고치지 못한다면 아무리 잘 읽거나 많이 읽었다 한들 무슨 쓸모일는지 알쏭달쏭하다. 책은 지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책은 삶이기 때문이다. 좋은 책을 읽었으면 나부터 좋은 삶으로 거듭나야 한다. 기껏 70킬로그램밖에 안 되는 작은 몸뚱이를 실어 나른다며 1.5톤짜리 쇠붙이를 끌어야 할 까닭이 있는가 없는가를 살갗으로 느껴야 한다. 무거운 쇠붙이를 사들이는 데에 들인 돈이라면, 도시에서 살면서 네 식구와 함께 스무 해에 걸쳐 유기농 곡식과 푸성귀를 사먹어도 돈이 남는다. 자동차한테 바치는 기름값이나 보험삯, 여기에 환경을 더럽히는 몫까지 헤아린다면, 자동차를 몰지 않으면서 내 살림을 북돋우거나 내 삶터를 살찌우는 값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게다가, 병원이란 어떤 곳인가. 프란츠 알트 님은 더도 덜도 아닌 한 마디로 잘 간추려 보여준다. ‘의사는 밥과 영양을 배우지 않는 지식인’인데, 이런 지식인이 모인 곳이 병원이다. 몸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병원이 아니라, 몸을 자르고 사람을 죽이는 병원이다.


.. 결국 우리는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만 보존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것이다. 아름다움의 상실은 우리의 뿌리가 없어지고 무질서가 생겨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  (295쪽)


 밤에 서울 남산 같은 데에 올라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예쁘다’고 말하는 도시사람이다. 높은 건물 꼭대기에 올라가 시내를 주욱 둘러보면서 수많은 등불이 켜진 모습을 놓고 ‘별이 쏟아진 듯하다’고 읊는 서울사람이다. 하늘에는 별이 한 송이도 없는데, 땅에만 별이 잔뜩 있다면 어딘가 얄딱구리하거나 뒤틀린 삶이 아닌가. 왜 별이 하늘이 아닌 땅에 있을까. 깊은 밤에 잠들지 못하고 땅바닥에 불을 잔뜩 켜 놓는 삶은 땅한테든 하늘한테든 사람한테든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밤에 달콤하게 잠들지 못하고, 새벽에 개운하게 일어나지 못하며, 낮에 신나게 일하지 못한다면, 사람이라는 목숨은 얼마나 목숨답다 할 만한가.

 도시사람은 도시가 예쁜 줄 안다. 예쁘다고 바라보는 눈길이나 마음길이 글러먹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모습만 보아 왔으니, 무엇이 참 예쁜 줄 겪은 적이 없는데, 어떻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도시만 알고, 도시만 생각하며,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를 떠나 본 적 없는 사람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겠는가. 오로지 도시에 파묻히는 삶으로서는 《지구의 미래》 같은 책은 다큐멘터리 방송하고 다를 바 없다. 머리에 차곡차곡 쟁여 놓는 지식덩어리에 머물고 만다.

 삶을 바꾸자고 하는 책인데, 정작 삶을 바꾸자고 하는 목소리를 귀담아듣지 못한다. 숫자와 통계에 사로잡히고 만다. 생태와 환경을 지킬 몫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 해야 하는 줄 알며, 나부터 해서는 이룰 수 없고 정부나 시민단체 같은 데가 나서야 할 몫이라고 여긴다.

 《지구의 미래》라는 책은 시골사람이 아닌 도시사람 눈높이에 맞추어서 썼다고 느낀다. 시골사람은 굳이 이 책을 읽을 까닭이 없고, 시골사람이 읽을 만큼 손쉽게 쓰지도 않았으며, 번역이 퍽 얄궂다. 도시사람이 읽으며 도시라는 얼거리가 얼마나 엉터리이거나 뒤틀렸는가를 깨달으라고 하는 책 《지구의 미래》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사람치고 우리 앞날을 참다이 걱정한다든지, 내 앞날을 옳게 꿰뚫어볼 눈썰미를 얻을 만한 분이 얼마나 될까 모르겠다. 한 사람쯤은 있으려나. 두 사람쯤은 나오려나.


.. 자연과 함께하는 모든 농업 경영, 즉 지속적이고 생태적인 경영은 지역 경제에 기반을 둔 농업을 전제로 한다. 재생되는 농업이 없으면, 지속적인 경제는 존재할 수 없다 ..  (76쪽)


 생각해 보건대, 쉽고 바르며 알맞으면서 고운 말마디로 새롭게 번역을 해서 내놓는다 하더라도 《지구의 미래》를 올바로 헤아릴 만한 분은 몹시 드물밖에 없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프란츠 알트 님 스스로 이 책을 써서 내놓을 때에 당신 삶이 묻어난 이야기는 한 마디도 들려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들 뒤통수를 칠 만한 이야기, 사람들이 제대로 못 깨닫는 이야기, 사람들이 잘못 아는 이야기, 사람들이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슬픈 삶을 일깨우려는 이야기는 쏠쏠하게 담겼다. 그렇지만, 이러한 슬픔과 아픔과 안타까움과 안쓰러움을 고이 껴안으면서 사랑과 믿음으로 살가이 보듬는 삶이야기로 뻗지를 못했다.

 지식이 있다고 이 나라를 바꾸지 못한다. 이명박 대통령께서도 4대강 사업을 밀어붙이며 ‘환경 살리기’를 들먹이지 않는가. 《신갈나무 투쟁기》 같은 책을 쓴 차윤정 교수 또한 ‘환경 살리기’를 이루고자 4대강 사업 홍보본부장 자리를 꿰차며 뜨겁게 숱한 말을 쏟아붓고 있지 않은가. 차윤정 교수께서 홍보본부장을 맡고 있는 ‘4대강 살리기 추진본부’는 2009년부터 2010년 9월까지 홍보비로만 120억 원을 썼단다(2010년을 마무리지으면 올 한 해에만 홍보비로 100억 원이 나가리라 본다). 입과 손으로 홍보를 한다고 해서 죽은 가람이 살아나거나 무너진 메가 일어설는지 아리송한 노릇이다. 어찌 되었든 아직 이태가 되지 않았는데에도 120억 원을 썼고 앞으로 훨씬 많은 돈을 쓸 테니까, 4대강 사업이라는 토목건설이 마무리될 즈음에는 홍보비에만 1000억 원이 넘는 돈을 쏟아붓겠구나 싶다. 1000억이란 어떤 돈일까. 1000억이란 누구 주머니에서 나온 돈일까. 이 돈을 어떻게 쓸 때에 이 나라 생태와 환경과 삶과 문화와 교육을 살찌울 수 있을까. 《지구의 미래》라는 책은 이 실타래와 실마리를 풀 조그마한 오솔길 하나 어떻게 밝히고 있는가. 이 책을 읽어 준 분들은 당신 스스로 당신 삶에서 얼마나 슬기롭게 실타래와 실마리를 풀면서 재미나게 살아가고 있는가. (4343.11.1.달.ㅎㄲㅅㄱ)


― 지구의 미래 (프란츠 알트 글,모명숙 옮김,민음인 펴냄,2010.7.12./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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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山이 낫다
남난희 지음 / 학고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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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난하고 어리숙하며 미련한 사람이 낫다
 [책읽기 삶읽기 10] 남난희, 《낮은 산이 낫다》



 밤에는 늘 몇 차례 잠을 깬다. 아이가 자면서 오줌을 누느라 젖은 기저귀를 갈아 주려고 잠을 깨고, 아이가 오줌을 누지 않았더라도 새벽에는 으레 깬다. 새벽 두 시부터 시간마다 한 번씩 깬다.

 몸이 괜찮다면 새벽 두 시에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글쓰기를 한다. 몸이 조금 무거우면 세 시에 일어나고, 아무래도 찌뿌둥하다면 네 시에 일어난다. 몸이 제법 무거우면 다섯 시에 일어나고, 몸이 퍽 고단하면 여섯 시에 일어난다. 고뿔이 들었다든지 어디가 아프다면 일곱 시에 일어난다.

 오늘은 다섯 시에 일어난다. 어젯밤 아이하고 좀더 신나게 놀면서 일찍 잠들었다면 세 시나 네 시쯤에는 일어났겠지. 쌀쌀해진 바람을 맞으며 아이를 자전거에 태워 살짝 마을을 돈 다음 들어와 책도 읽으며 열 시 즈음 잠들었기에, 네 시나 세 시에 잠을 깨기는 했지만 아이가 오줌을 눈 줄 알면서도 일어나지 못한다.

 도시에서 살던 때에도 이 같은 새벽에 일어나 조용히 글쓰기를 했다. 그런데 도시에서 살던 때에는 희뿌윰히 밝아 오는 빛살을 느끼며 일어난다든지, 하늘에 걸린 달이 드리우는 빛무늬를 받으며 일어난 적이 없다. 고요히 잠든 골목동네에 오토바이를 타고 신문이나 우유를 돌리는 사람들 소리, 웃집 젊은이가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비적비적 섬돌을 밟으며 중얼중얼 올라가는 소리, 깊은 새벽에도 시끄럽게 골목을 내달리는 자동차 소리 때문에 깨곤 한다. 몸이 먼저 날씨와 때를 느끼어 받아들이기 앞서, 갖은 소리와 불빛이 내 몸을 건드린다.

 새벽 두어 시든 서너 시든 조용히 잠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얌전히 깔아 놓는다. 시골집은 많이 추우니까 이불을 바닥에 잘 깔아 놓아 따스함이 날아가지 않도록 해 주어야 한다. 발소리를 죽이며 큰방으로 나오고, 쉬를 누러 바깥으로 나온다. 달빛과 별빛이 앞마당으로 쏟아진다. 깊은 새벽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우는 보름달이 몹시 밝다. 어제도 밝고 그제도 밝더니 오늘 또한 참 밝다. 둘레에 다른 빛이 없기 때문일까. 날이 꽁꽁 얼면 달빛이 더 밝다고 했더니, 오늘은 어제보다 달이 살짝 이울었으나 빛무늬는 훨씬 널따랗게 퍼진다. 올망졸망 별빛 또한 참으로 반짝반짝 밝다. 이렇게 밤빛이 곱고 좋은데, 굳이 한국전력에 전화해서 등불 하나 세워 달라 할 까닭이 없다. 멧기슭 집이라 밤손님이 들까 걱정스럽다는 어르신 말씀이 있으나, 가난한 멧기슭 집까지 뭔가를 얻으러 찾아들 밤손님이라면 얼마나 배를 곪는다는 소리일까. 아니, 예까지 뭔가를 훔치고 돌아갈 생각으로 찾아올 밤손님이라면 얼마나 다리가 아플까. 버스도 전철도 택시도 없는 이런 멧기슭에.

 멧기슭에서 젊은 나날 꿈을 길어 올리다가 그예 멧사람으로 살아가는 남난희 님이 쓴 《낮은 산이 낫다》(학고재,2006)를 읽었다. 이 책에 앞서 《하얀 능선에 서면》(수문출판사,1990)을 읽었다. 《하얀 능선에 서면》은 꽤 팔리거나 읽혔는지 헌책방마실을 할 때에 어렵잖이 한 권씩 보곤 한다. 산을 타는 이야기는 그닥 좋아하지 않아 여러 해 동안 《하얀 능선에 서면》을 들추지 않았다. 어느 날 문득 ‘이 책이 왜 이렇게 자주 보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럼 한번 구경이라도 할까 싶어 처음으로 들추어 보는데, 뜻밖에 이야기가 아주 좋았다. 늘 손에 쉽게 닿는 자리에 있으나 돌아보지 않던 책인데, 생각해 보면 내 곁에서 내 손길이 뻗기를 오래도록 기다리던 책이 아니었나 싶다.

 《낮은 산이 낫다》라는 책을 읽으면 “서구의 알피니즘이 들어오면서 산은 도전의 대상이 되었다. 더 빨리, 더 힘든 곳을 향하여 끊임없이 오르게 되었다 … 아이와 함께 산을 오르면 아이의 동심이 부러워진다. 아이는 온몸으로 산과 만난다. 나무를 껴안기도 하고, 뒹굴기도 하고, 천방지축으로 날뛰기도 한다(11쪽).”는 대목이 나온다. 남난희 님은 ‘겨울 백두대간 걷기’를 여자로서는 꽃등으로 해냈다고 한다. 여자로서는 꽃등으로 하든 남녘에서 꽃등으로 하든 그다지 대단한 일이 되지 않는다. 첫째이건 둘째이건 막째이건 무슨 대수랴. 백두대간을 타든 동네 뒷산을 타든 다를 바 없다. 어떤 길을 얼마나 걷든 똑같이 산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삶이다. 남난희 님 《하얀 능선에 서면》을 읽으면서 ‘이분은 참 멧사람이구나’ 하고 느꼈다. 그래, 헌책방에서 《하얀 능선에 서면》을 한참 서서 읽다가 책값을 셈하자니, 헌책방 할배가 넌지시 한 말씀 했다. “이거, 참 재미있는 책이지? 이 사람 참 재미있는 양반이더구만. 좋은 책이지.” 그 뒤로 이 책을 몇 권 더 장만해서 둘레에 선물해 보는데 이 책을 받은 벗님 가운데 이 책을 읽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한다. 아무래도 ‘그냥 산 타는 이야기’쯤으로 여길는지 모르고, 다른 읽을거리가 많아 바빠기 때문일는지 모른다.

 남난희 님은 《낮은 산이 낫다》에서 당신 삶이 찬찬히 무르익은 한결 고즈넉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 나라 고무신은 참 좋다. 우선 ‘가격이 싸고 어디서나 쉽게 신고 벗을 수 있고 발이 편하고 비교적 질기며 보기도 좋다. 간편하게 세탁하여 빨리 신을 수도 있고, 신다가 버려도 그리 아깝지 않고 재활용도 가능하다’ 등 장점이 무수히 많다(27쪽).”는 대목을 읽으며 피식 웃는다. 아주 맞는 소리이니까. 산을 탈 때에도 고무신이 퍽 좋다. 산을 고무신을 신고 한참 타다가 나중에는 신을 벗어 가방에 넣고 맨발로 타면 더욱 좋다. 모르기는 모르지만 남난희 님도 고무신을 신고 산을 타다가 맨발로 바꾼 적이 잦지 않을까. 나는 2004년에 고무신을 처음 신었는데 이때에 한 켤레 값이 3000원이었다. 2009년까지 이 값이었는데 2010년에 접어드니 장마당에서 고무신을 구경하기 어렵다. 고무신은 플라스틱신과 견주어 딱딱해서 시골에서도 잘 안 신으니까 공장에서 더 안 만든다고 했다. 2004년에 3000원 하던 값은 1000원인가 1500원 오른 값이라고 했다. 남난희 님이 고무신을 처음 신던 무렵에는 한 켤레에 1000원이나 1500원쯤 하지 않았으랴 싶다. 그때에도 웬만한 운동신은 2만 원을 웃돌았을 테니까 고무신 한 켤레를 신어 한두 해 보내면 신값을 얼마나 아끼는 셈일까. 고무신을 신으며 늘 느끼지만, 고무신 생김새가 참 곱다. 고무신은 신는 동안 차츰 닳는데, 닳아 가는 생김새 또한 꽤 곱다. 여느 운동신은 신을수록 모양이 뒤틀리고 망가지면서 볼품이 없다.

 “얼마 전 그 병원에서 출산한 산모는 의사의 퇴근 시간에 맞추기 위해 서둘러 수술을 했다고 한다 … 나는 이 이후로 병원에 가지 않았다 … 산중에서 맞는 봄은 또 얼마나 찬란한지. 새소리에 단잠을 깨고, 일출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만나는 갓 돋아난 잎들, 갓 피어난 얼레지와 제비꽃은 또 얼마나 예쁜지 … 정말 가능하다면 이곳에서 아이를 낳고 싶었다. 이렇게 충만하고, 이렇게 따뜻하고, 이렇게 깨끗한 곳에서 아이를 낳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95∼100쪽).” 하는 글월을 읽는다. 농사짓는 착한 사람이 옹기종기 모인 시골마을도 좋고, 이웃집이 멀찍이 떨어져 있는 멧기슭도 좋으며, 바다랑 이웃하는 마을도 좋다. 꼭 알맞게 모여 마을을 이룬 시골일 때에 살기 좋다. 살기 좋은 마을이라면 아이를 낳기에도 좋으며, 아이를 낳아 키우기에도 좋다. 아이는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풀벌레소리에 귀를 쫑긋한다.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를 느낄 수 있고, 구름이 흐르는 모양을 느긋하게 올려다볼 수 있다. 도시에서 서른 해쯤 살아오는 동안 도시사람 가운데 구름 구경을 느긋하게 하는 사람을 본 적은 다섯 번이 채 안 된다. 도시에서는 구름도 하늘도 바람도 무지개도 별도 달도 해도 느긋하게 올려다보며 마주하는 사람이 몹시 드물다. 아니지. 도시에서는 자연을 가까이할 수 없다. 도시에서 살며 자연을 가까이하려 든다면 돈벌이에 뒤처질밖에 없고 끝없는 다툼과 겨루기에서 밀릴밖에 없다. 도시에서는 자연일랑 까맣게 잊어야 한다. 도시에서는 자연은 어린이한테 읽히는 ‘자연그림책’이나 ‘생태도감’ 같은 책으로만 읽히면 된다. 날마다 몸에 넣는 밥이 바로 자연임을 느낄 수 없고, 언제나 나를 살도록 하는 님이 자연임을 깨달을 수 없다. 가난한 사람들 동네라는 골목동네 사람들이 자그마한 꽃그릇에 자그마한 꽃이나 푸성귀를 기르는 도시농업을 진작부터 해 왔지만, 한국에서 환경운동이니 무어니 하는 사람들은 한국땅 골목동네 ‘도시 생태 농업’을 느끼지 못하면서 으레 쿠바로 가느니 생태도시 아바나라느니 떠들기만 한다.

 “장난감이 넘치는 도시 아이들이 얼마나 가지고 놀지는 모르겠지만, 본인이 직접 만든 물건을 선물하는 기쁨은 받는 기쁨보다 더 클 것이다 …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땅의 위대함을 보고 배운다면 참 살 만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싶다(125, 222쪽).” 하고 읊는 글월을 두고두고 곱씹는다. “이곳에서 살다 보니 농사짓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조금은 알 듯하다. 땡볕 아래서 밭매기를 하지 않고 편하게 잡초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아는데, 땀을 흠뻑 흘리며 풀을 뽑는 고생은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다. 농산물이 깨끗하고 충실해야만 제값을 받을 수 있으니 농약과 화학비료, 제초제를 안 칠 수 없어서 그렇게밖에 못하는 것이다(69쪽).” 같은 글월을 되씹는다. 시골사람은 농사를 지으며 풀약과 비료와 항생제를 써야 한다. 푸성귀나 곡식을 기르든, 고기소나 고기돼지나 고기닭을 기르든 매한가지이다. 도시사람은 먹을거리를 장만할 때에 커다란 마트에서 더 값싸게 파는 물건을 장만할밖에 없다. 시골사람은 오롯이 유기농사를 짓기 힘들고, 도시사람은 생활협동조합을 함께하며 생협 물건을 쓰기 어렵다. 모두 똑같은 걱정을 안고 똑같은 굴레에 빠져 허덕인다. 서로 만날 길이 없고 서로 사귈 틈이 없다. 함께 어깨동무할 짬이 없고 함께 손을 맞잡을 마음이 없다.

 이리하여 남난희 님은 “낮은 산이 낫다”고 말하는데, 이 말을 알아들으며 살아갈 도시사람이나 시골사람은 어디에 얼마나 있으려나. 가난한 사람이 낫고, 적게 배운 사람이 나으며, 못생기거나 키가 작거나(또는 멀대 같거나) 힘이 여린 사람이 나은데, 이 흐름을 알아채며 오순도순 어깨를 겯을 사람은 이 나라에 얼마나 되려나. 글솜씨가 어리숙한 사람이 낫고, 착한 사람이 나으며, 미련한 사람이 나은 줄, 이 땅에서는 얼마나 알아들으며 헤아릴 수 있으려나. (4343.10.27.물.ㅎㄲㅅㄱ)


― 낮은 산이 낫다 (남난희 글,학고재 펴냄,2004.6.28./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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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자전거여행 : 전국편 - 대한민국 자전거 여행지 52 주말이 기다려지는 여행
김병훈 지음 / 터치아트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자전거로 다니는 시골길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41] 김병훈,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자전거여행 (전국편)》


 시골 살림집에서 지내면서 면내나 읍내로 나가자면 시골버스를 타야 합니다. 우리 식구는 자동차를 몰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골 살림집에서 버스를 타는 곳까지 가자면 아이를 안거나 업고 삼십 분 즈음 걸어야 합니다. 시골버스는 한 시간에 한 대 들어오고, 볼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면 한나절이 훌쩍 지나곤 합니다.

 도시 살림집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웬만한 볼일을 볼 곳은 두 다리로 걸어갈 만한 데에 있었고, 전철이나 버스를 타면 어디로든 어렵지 않게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도시에서 지내는 동안 우리한테 자가용이 없어서 고단하거나 힘겹다고 느낀 적은 없습니다. 정 다리가 아프거나 아이가 힘들어 하면 택시를 타면 그만입니다. 도시 택시삯은 참 쌉니다.

 시골 살림집에서 살아가며 써야 할 물건이 있어 장만해야 할 때에는 애 아빠가 자전거를 몰고 면내나 읍내를 다녀와야 합니다. 도시 살림집에서 살아가며 써야 할 물건이 있을 때에는 으레 애 아빠나 애 엄마 아무나 걸어서 다녀오면 되었고, 때로는 세 식구가 함께 마실을 다녀왔습니다.

 도시에서 사는 동안 아이와 함께 움직이거나 아이한테 바깥바람을 쐬도록 하느라 자전거는 거의 탈 수 없었습니다. 아직 많이 어린 아이를 자전거에 태울 수도 없으나, 아이만 집에 놓고 아빠 혼자 재미나게 자전거를 타고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시골로 살림집을 옮긴 뒤로는 가까운 면내나 읍내 모두 십사오 킬로미터 거리에 있기에 자전거로 오가지 않는다면 온 하루를 다 써야 합니다. 시골 살림집에서는 뜻하지 않게 자전거를 탈 일이 자주 생깁니다. 더욱이 짧은 길이 아닌 제법 긴 길을 달릴 일이 생깁니다.

 우리한테는 자가용을 장만할 돈이라든지 자가용을 굴릴 돈이 없습니다. 자가용을 장만하거나 굴릴 만한 돈이 있어도 자가용을 장만하고픈 마음은 없습니다. 애 아빠는 그동안 타고다닌 자전거에 아기 걸상을 하나 붙여야 하고, 애 엄마는 다시 자전거 타기를 익히는 한편, 애 엄마 몸에 맞는 좀더 작은 자전거 한 대를 장만해야 합니다. 시골길은 길섶이 거의 없이 자동차만 오가도록 닦아 놓아 걷거나 자전거를 타며 움직이면 아슬아슬하다 하는데, 길을 닦은 사람이 길을 잘못 닦았다고 우리가 없는 살림에 빚을 내어 자동차를 장만해야 하지 않습니다. 길을 잘못 닦은 사람들은 당신들이 잘못 닦은 길을 손질해야 하고, 우리는 우리 깜냥껏 시골사람이 시골사람다이 길을 오가도록 자전거를 즐거이 타고다니면 됩니다.


.. ‘절경’과 ‘비경’이라는 표현만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 충주호 호반길을 자전거로 달려 보지 않고 알프스와 로키산맥의 아름답지만 살벌한 호수를 동경하는 것은 이 땅에 대한 큰 실례가 될 것이다 … 호남평야를 가로지르는 장쾌한 들길은 이 땅에 희귀한 지평선의 광활함 속에서 역사의 부조리도 체험하게 해 준다. 그래서 내내 평지를 달리는데도 마음속의 일렁임은 결코 작지 않다 … 요란한 볼거리와 왁자한 분위기에 익숙한 관광객의 마음과 눈으로 간다면 이 강변에서는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평범하고 심심한 풍경은 전국에 널렸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거꾸로 본다면, 이 강변길은 실로 감성의 감별자인 셈이다 ..  (25, 71, 103쪽)


 어제는 우리 살림집이 깃든 신니면 광월리에서 이웃한 금왕읍 무극리를 다녀옵니다. 광월리에서 무극리를 오가자면 자전거로는 헐떡고개를 셋 넘어야 합니다. 이 헐떡고개란 꼭대기까지는 헐떡이지만 꼭대기에 닿을 무렵부터는 신나고 시원하게 바람을 쐬는 길입니다. 엊그제는 생극면 신양리를 다녀왔습니다. 광월리에서 신양리를 오가자면 자전거로 갈 때에는 죽 내리막이고 돌아올 때에는 줄곧 오르막입니다.

 예전에는 죽 내리막으로 갔다가 줄곧 오르막으로 돌아오는 신양리를 즐겨 오갔는데 요 며칠 달리고 보니, 내내 내리막이었다가 오르막인 길보다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갈마드는 길을 달릴 때에 한결 재미나지 않느랴 싶습니다. 한 사람 삶을 놓고 볼 때에도 오르막이기만 한 사람이나 내리막이기만 한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오르내리막이거나 내리오르막입니다. 고단하게 오르다가도 개운하게 내리꽂으며 땀을 식힐 수 있습니다. 개운하게 내리꽂으며 땀을 식혔으면 다시금 페달질에 힘을 넣어 새로운 땀을 쏟습니다.

 자전거란 내리막만 선선하게 다니거나 오르막만 고달피 다니도록 하는 탈거리가 아니라고 느낍니다. 내리막은 내리막대로 좋고 오르막은 오르막대로 좋은 탈거리인 자전거라고 느낍니다. 신양리로 가는 길에는 오가는 자동차가 거의 없어 아주 호젓하면서 조용합니다. 무극리로 가는 길에는 오가는 자동차가 제법 많아 그닥 조용하지 않은 가운데 평택부터 충주까지 새로 놓는다는 고속도로 길닦기가 한창이라 둘레 모습 또한 썩 좋지 않습니다.

 2007년까지 이 마을에서 살 때에도 지방도로이든 국도이든 다니는 자동차는 많지 않아 길막힘이란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노릇이었는데, 이때에도 또다른 고속국도 길닦기는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고속국도를 숱하게 깔았어도 새삼스레 고속도로를 다시 닦는다고 하니 놀랍습니다. 아니, 슬픕니다. 아무래도 자전거나 두 다리나 시골버스로 오가는 사람보다 자가용으로 오가는 사람이 훨씬 많은 오늘날일 테지요. 그러나 자동차로 오갈 여느 국도며 고속국도며 여러 가닥으로 곳곳에 촘촘히 놓여 있는데, 또다시 고속도로를 닦아야 할 만큼 나라돈이 넘치는지 궁금합니다.

 틀림없이 자가용으로 오가는 사람이 많지만, 농사짓는 할매 할배 가운데에는 차를 몰지 못하는 분이 많으며, 자전거만 타는 분도 제법 됩니다. 시골버스를 타고 자전거를 모는 농사짓는 사람들을 헤아리며 여느 지방도로 길섶이나마 손질해서 자동차한테 치일 걱정이 없도록 하는 데에 얼마나 큰 돈이 들겠습니까. 요사이는 ‘전국 걷기 여행’을 하는 사람이나 ‘전국 자전거 여행’을 즐기는 사람이 부쩍 늘고 있습니다. 여느 지방도로 길섶을 손질한다면 이 나라와 지방정부 모두 바라마지 않는 ‘관광수요 늘리기’까지 이루리라 믿습니다.


.. 출퇴근 시간의 상주 거리는 유럽이나 일본에 온 것처럼 자전거 물결로 넘쳐난다. 이용자는 남녀노소 구분이 없고, 자동차는 알아서 자전거를 배려해 준다. 각급 학교마다 비를 피하는 자전거 주차장이 기본으로 설치되어 있는데, 여학교도 예외가 없다 … 주암호가 자전거 여행지로 특히 소중한 것은 이처럼 아름답고 조용한 호수를 가까이에서 바라보며 달릴 수 있는 호반길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자동차는 거의 다니지 않고 다닐 필요도 없는 외진 흙길에, 고개 하나 넘으면 고즈넉한 산사도 만날 수 있다 ..  (37, 76쪽)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자전거여행 (전국편)》을 읽었습니다. 읽은 지 꽤 오래되었으나 아직 이 책에 실린 ‘자전거여행 길’에 자전거를 타고 다녀 본 적은 없습니다. 제가 살아온 인천 골목집이나 지난달부터 지내는 충주 시골집에서 전국 자전거여행 길을 찾아가자면 자가용에 자전거를 싣고 먼길을 나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서울사람이라면 기차를 타기에 손쉬울 테고, 전국 어디로든 고속버스 길이 잘 뚫려 있습니다. 그러나 인천에서 ‘후미진’ 골목동네에서는 서울에 있는 기차역까지 자전거를 끌고 가기 벅찰 뿐 아니라 인천 ‘번화한’ 도심에 있는 버스역까지 자전거를 모셔 가는 일부터 만만하지 않습니다. 시골집에서 기차역은 아예 꿈꿀 수 없고, 시골마을에서 버스로 가는 길은 거의 모두 서울로만 뚫려 있습니다. 행정구역은 충주이나 음성읍과 붙어 있는 우리 마을에서 이웃한 대전이나 청주나 홍성 같은 데를 가자면 서울로 고속버스를 타고 갔다가 다시 고속버스를 타고 돌아갈 때가 훨씬 빠르고 돈이 적게 듭니다.

 그러니까,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자전거여행 (전국편)》은 서울에서 자동차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 눈높이에 맞추어 마련한 여행 길잡이책이라 할 만합니다. 또는, 부산이나 대구나 대전 같은 데에서도 도심지에서 살고 있는 사람 삶자리에 맞춘 여행 길잡이책이요, 다른 곳에서 지내는 사람이라면 자동차를 반드시 갖고 있는 사람 흐름에 맞추었다고 하겠습니다. 아쉬움 한 가지를 더 들자면, 모두 쉰두 곳에 이르는 ‘자전거로 여행하기 좋은 곳’을 다루고 있는데, 쉰두 곳을 다루는 이야기 투나 줄거리나 생각이 너무 틀에 박혀 있습니다. 줄줄이 늘어놓는 정보만 있을 뿐, 글쓴이 스스로 이 길을 달리며 이러한 느낌으로 좋았으며, 이렇게 좋은 마음을 얻으며 당신 삶이 얼마나 좋아졌는가를 밝히는 대목이 한 군데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감동을 말하는 책이 아니라 할 만한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자전거여행 (전국편)》이라 할는지 모르나, 제아무리 정보를 보여주는 책이라 할지라도 정보를 들려주는 따스하거나 너른 마음씨가 엿보야야 할 텐데요.

 그래도, 이 책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자전거여행 (전국편)》은 자전거로 이 나라 이 땅을 밟는 기쁨과 놀라움이 얼마나 큰가를 글쓴이 스스로 몸소 먼저 찬찬히 느낀 다음 꾸밈없이 펼치고 있습니다. 한국이 미국보다 더 멋스러운 곳이라고 추켜세운다든지, 전국 골골샅샅 밟아 보지 않고 유럽을 누빈다며 깝죽대지 말라고 나무라지 않습니다. 그저 자전거 한 대에 몸을 싣고 우리 나라 이 산 저 산 이 섬 저 섬을 다니며 맛본 짜릿함과 기쁨과 재미를 조곤조곤 들려줍니다.


.. 여행의 열매는 반드시 땀과 여유(느린 속도)를 먹고 자랍니다 … 이 멋진 해변길의 추억과 감흥을 되새기기 위해 서로 사진을 찍어 주느라 수없이 멈춰야 할 것이고, 혼자라면 풍경을 담기 위해 시선을 빼앗기게 되니 속도는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책머리에, 141쪽)


 글쓴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땀과 느리게 달리기’를 이야기합니다. 자전거는 틀림없이 두 다리로 걸을 때보다 여섯 곱절 넘게 빠릅니다. 그렇지만 글쓴이는 자전거로 달리면서도 느리게 달리라고 이야기합니다.

 하기는, 두 다리로 거닐며 나들이를 하면서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모습을 볼 때에는 하염없이 멈춰서거나 자리에 주저앉아 이 아름다운 모습을 즐기며 받아들이니까요. 자전거를 타며 그저 스쳐 지나가는 모습으로 흘리기만 한다면 굳이 여행을 할 까닭이 없을 테니까요. 시원한 바람을 쐬고 싶다면 자동차에 타고 에어컨을 쐬면 될 일입니다. 예쁜 모습을 옆에 끼고 시원한 바람을 맞고 싶다면 뚜껑 열린 차를 몰면 될 노릇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땅을 사랑한다거나 우리 스스로 우리 둘레 곱고 멋스러운 터전을 맞아들이고자 한다면 자동차를 버려야 합니다. 때로는 자전거까지 버려야 합니다. 어느 때에는 여행이라는 허울까지 버려야 합니다. 참으로 살기 좋으며 아름다운 마을을 만났을 때에는 이 아름다운 마을에 몇 달이나 몇 해씩 묵으면서 내 일거리를 찾아 마을 이웃하고 오순도순 부대끼며 삶을 일굴 수 있습니다.

 하룻밤 뚝딱 갔다 온다고 여행이 아닙니다. 몇 밤 자고 돌아오는 길만 여행이 아닙니다. 우리 한삶부터 여행이요, 우리가 다니는 모든 길은 나들이길이 됩니다. 저는 이웃 면내와 읍내를 자전거로 오가면서 날마다 여행하는 마음입니다. 곰곰이 따지고 보면, 이웃마을 자전거마실이란 다름아닌 자전거여행입니다. (4343.7.7.물.ㅎㄲㅅㄱ)


 ┌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자전거여행 (전국편)》(터치아트,2009)
 ├ 글 : 김병훈
 └ 책값 : 1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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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물병원 쪽빛문고 5
다케타쓰 미노루 글.사진, 안수경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온누리와 사람을 살리는 힘
 다케타쓰 미노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물병원》


- 책이름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물병원
- 글ㆍ사진 : 다케타쓰 미노루
- 펴낸곳 : 청어람미디어 (2007.2.20.)
- 책값 : 8500원


 (1) 4대강 사업에 얽힌 두 사람


 지율 스님은 ‘초록의 공명(http://www.chorok.org)’이라는 누리집 한켠에 당신이 거닐고 있는 삶터 한 자락을 글과 사진으로 띄엄띄엄 올려놓고 있습니다. 지율 스님이 띄엄띄엄 올리는 글과 사진을 ‘초록의 공간’이라는 곳으로 띄엄띄엄 찾아가 하나하나 읽고 살피노라면, 지율 스님이 바라보고 있는 낙동강 줄기란 참 수수하고 정갈하구나 싶습니다.

 돈을 바라보는 개발주의에 따라 나무를 자르고 모래를 파내며 땅을 뒤엎고 있는 모습을 담은 사진일지라도 지율 스님 사진은 더없이 차분하면서 정갈합니다. 윽박지르는 사진이 아니라 포근히 감싸는 사진입니다. 꾸짖거나 나무라는 사진이 아니라 슬퍼 울고 있는 사진입니다. 아직 돈바라기 개발주의 삽날이 닿지 않은 곳을 찍은 사진을 들여다볼 때에는 그지없이 따스하면서 웃음이 묻어나는 사진이구나 싶습니다.

 숱한 글과 사진으로 4대강 사업을 아름다운 개발이라고 알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또다른 숱한 글과 사진은 4대강 사업이야말로 끔찍한 막개발이라고 까밝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마다 당신들 스스로 가장 옳고 바르다 여기는 대로 글을 쓰고 사진을 찍으면서 당신들 생각을 내어놓습니다. 그런데 이들 숱한 목소리와 생각을 글과 사진으로 마주할 때마다 참으로 팍팍하고 메마르구나 싶습니다. 옳고 바른 목소리이기에 따사롭고 맑게 생각을 펼친다든지, 맞고 틀림없는 외침이니까 넉넉하고 밝게 마음을 나누려 하는 글과 사진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멍청한 짓이나 바보스러운 짓을 얄궂게 저지르고 있기 때문에 따끔하게 나무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멍청하거나 바보스러운 사람들은 참을 참으로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착한 일을 모르고 고운 삶을 모릅니다. 알면서 못한다 할 수 있지만, 모르기에 못할 뿐더러, 느끼려 하지 않으니 안 한다 할 수 있습니다. 이때에는 어떠한 따끔한 꾸지람조차 소 귀에 읽는 불경이 되리라 봅니다. 소 귀에 읽는 경인데 꼼꼼하며 올바른 비판이라 할지라도 먹힐 리 없습니다.

 《신갈나무 투쟁기》를 쓰고 《숲의 생활사》와 《숲 생태학 강의》 같은 책을 쓰면서 숲과 자연을 살리는 길을 살펴 왔다는 차윤정 님은 지난 2010년 5월 17일에 ‘4대강살리기추진본부 환경부본부장’이라고 하는 1급 공무원 자리를 꿰찼습니다. 당신은 ‘생명의숲’이라는 모임에서 문화교육위원으로 일하기까지 했는데, ‘생명의숲’이라는 곳은 4대강 사업이 우리 땅에 좋지 않은 막개발이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혀 왔습니다. 차윤정 님은 당신 스스로 ‘4대강 사업은 옳지 않다’고 밝히는 일을 하고 글을 써 왔으나(한국일보 칼럼), 어떤 까닭에서인지 둘레에서 환경사랑을 이루고자 힘쓰는 사람들을 힘겹게 하면서 내동댕이를 쳤습니다.

 이런 소식을 듣고 저런 움직임을 보면서 우리 집 책꽂이에 꽂힌 차윤정 님 책들을 길바닥에 내팽겨쳐야 할는지, 아니면 헌책방에 갖다 주어야 할는지 망설이다가 그냥 집에 두기로 합니다. 차윤정 님은 어느 신문사하고 만난 자리에서 당신 ‘소신이 바뀌지 않았다’고 밝혔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처음부터 ‘자연을 파헤치는 개발을 반대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자연은 사람이 살아가기 좋도록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밝혔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신갈나무 투쟁기》이든 《숲 생태학 강의》이든, 나무와 숲과 풀 모두 자연 그대로 아름다운 목숨이 아닌 사람한테 이바지를 할 때에 아름다울 목숨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왔다는 소리입니다.

 어느 신문에 실린 길디긴 만나보기 글을 읽으며 뒷통수를 쳤습니다. 차윤정 님은 흔히 말하는 변절을 한 분이 아니라, 처음부터 옳고 바른 삶하고는 가까이 지내려 하지 않았던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을 때에 줄거리만 읽을 노릇이 아니라, 글줄마다 깊디깊이 실린 속내를 헤아릴 노릇이었는데, 저를 비롯하여 숱한 사람들은 책 하나 똑바로 못 읽었기 때문입니다.

 차윤정 님은 사랑과 믿음으로 글을 쓰거나 숲 해설을 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개발 편의주의’라는 이름으로 ‘자연 개발’을 하되, 지나치게 편의주의를 내세우거나 개발을 앞세우면 사람한테 도움될 일이 없다는 생각을 당신 책에 알알이 담아 왔던 셈입니다. 착하고 참되며 고운 삶결에 따라 우리들한테 맑고 밝으며 따스한 손길을 나누려 하지 않았던 셈입니다.

 그렇지만 4대강 사업을 두 팔 벌려 반기며, 1급 공무원이라는 연봉 높은 일자리를 얻은 사람은 나쁜 놈이요, 4대강 사업 참모습을 밝히고자 온몸을 바치는 사람은 좋은 분이라고 금긋기를 할 수 없습니다. 어느 자리에 서 있거나 어느 길을 걷든지 부디 사랑을 찾고 믿음을 섬길 수 있기를 비손할 뿐입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가 아닌 ‘사랑으로 어루만지자’를 느낄 수 있도록 도와야 할 뿐입니다. 넉넉하거나 따스한 마음이 아닌 이들을 몽둥이로 두들겨팬다고 넉넉함이나 따스함을 느끼거나 되찾겠습니까. 아름답거나 훌륭한 넋이 아닌 이들을 꽃으로도 때리지 않고 찬찬히 타이른다고 아름다움이나 훌륭함을 고맙게 맞아들이겠습니까. 사랑을 모르면서 살아왔으니 명예와 돈과 권력에 끄달립니다. 믿음을 섬기지 못하며 지내왔기에 스스로 참되거나 착하거나 곱게 살아갈 매무새가 안 됩니다.

 지율 스님 글과 사진을 꾸준히 되읽고 곰삭이면서 생각합니다. 환경운동을 하는 노동운동을 하든 문화운동을 하든 어찌 되었든 ‘운동’을 하면서, 이 낱말마따나 ‘움직이기’를 하겠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목소리 내기’에 앞서 내 삶으로 ‘따순 품과 너른 눈’을 북돋아야겠다고 느낍니다. 지율 스님은 4대강 사업을 두 팔 벌려 반기거나 떠벌이는 사람들을 나무라고자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거나 낙동강 마실을 하지 않습니다.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사람들한테까지 함께 이야기를 건네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또다른 4대강 사업’을 깨달으면서, 우리 스스로 참된 길을 찾기를 바라면서 글을 씁니다. 다시금 되풀이하지만, 4대강 사업은 반대하면서 입시지옥과 학벌주의를 깨지 않으면 부질없습니다. 4대강 사업은 나쁜 짓이라 꾸짖으면서 영어만능에 세계화에 한미자유무역협정에 젖어 있으면 덧없습니다. 4대강 사업은 반대한다면서 더 빠른 자가용하고 더 큰 아파트랑 헤어지지 못한다면 쓸모없습니다. 4대강 사업을 착하게 반대하고 싶다면, 우리는 이 일은 이 일대로 제대로 나무라거나 꾸짖을 줄 아는 가운데 우리 삶을 착하게 일구어야 합니다. 언제나 한결같은 고운 몸짓으로 우리 삶을 보듬으며 우리 이웃과 사랑을 나누는 삶이어야 합니다.


 (2) 사진으로 보여주는 들짐승 삶


 사진책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물병원》을 읽습니다. 이 사진책은 어린이들한테 자연사랑과 사람사랑을 일깨우고자 엮었으며,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골고루 즐길 수 있습니다. 훗카이도라고 하는 일본땅 북쪽 끝에 자리한 동물병원에서 얼마나 많은 들짐승과 멧짐승과 날짐승을 마주하면서 고마운 사랑을 나누어 받는 나날인가를 보여줍니다. 한국땅에서는 씨가 마른 여우인데, 훗카이도 동물병원에서는 들여우를 어렵잖이 만나 보살피고 돌보며 자연에 돌아가 머물 수 있도록 돕습니다. 동물병원 집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은 제 어버이와 함께 ‘다친 짐승을 돕는 일꾼’이 되어 여우를 비롯해 토끼와 딱따구리와 오소리와 참새와 솔개하고 다람쥐랑 좋은 놀이동무로 사귑니다.

 마땅한 노릇일 텐데, 동물병원을 꾸리는 어버이는 아이한테 따로 자연사랑이니 환경사랑이니 동물사랑이니 하는 말을 들려주지 않으리라 봅니다. 따로 자연사랑을 가르칠 일이 없으리라 봅니다. 자연 품에 안겨 자연스레 살아가며 자연을 느끼고 있으니, 무슨무슨 책을 읽힌다거나 어떤어떤 가르침을 베풀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훗카이도 끝에 자리한 동물병원 식구들은 당신들 삶으로 조용히 자연사랑을 맞아들이고 환경사랑을 일구며 동물사랑을 이룹니다.

 그나저나 이토록 아름답고 좋은 이야기를 담은 책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처럼 낯간지러운 이름을 붙이니 머쓱합니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찍은 다케타쓰 미노루 님은 스스로 이런 낯간지러운 이름을 내세운 적이 없을 텐데요? 다케타쓰 미노루 님이 쓴 일본책에는 으레 ‘북쪽나라’라는 말이 보이는데, 동물병원 의사로 꾸리는 삶이라 더 남다르거나 뛰어나지 않습니다. 그저 동물병원 의사일 뿐입니다. 좀더 가까이에서 아픈 짐승을 돌볼 뿐, 온누리에서 가장 아름답다느니 이 땅에서 가장 거룩하다느니 하는 꾸밈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수수한 벗이고 조촐한 이웃이며 살가운 일꾼입니다.

 무엇보다도 북쪽나라 동물병원 사람들은 돈벌이를 하지 못합니다. 아니, 돈벌이를 할 수 없습니다. 당신들이 맡는 아픈 짐승이란 ‘어떤 집짐승을 키우는 임자라는 사람’이 돈을 치르며 맡기는 짐승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눈토끼가 돈을 알겠습니까. 노루가 돈을 갖고 있겠습니까. 큰곰한테 은행계좌가 있겠습니까. 고니한테 지갑이 달려 있겠습니까.

 들짐승을 돌보고 건사하고 먹이를 마련하는 동물병원 식구들은 글을 쓰고 사진을 찍으며 책을 써내어 살림돈을 마련하고 들짐승들이 동물병원에서 아픈 곳을 다스리는 동안 먹을 여러 가지를 장만한다고 합니다. 병원장 아저씨는 말 그대로 당신이 동물병원을 꾸리며 만나는 들짐승이랑 당신하고 함께 짐승들을 어루만지는 집식구들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며 글을 쓰고 사진을 찍습니다. 이 일이 고스란히 당신들 돈벌이가 됩니다.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동물병원장 아저씨를 비롯해서 동물병원 식구들이 더 많이 벌거나 더 이름이 나거나 하는 데에 마음을 내주었다면, 아마 당신들 삶이 담긴 책은 안 팔렸거나 책으로조차 못 나왔으리라고. 당신들은 무슨 대단한 이름으로 동물사랑이니 자연사랑을 외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 훗카이도 들짐승하고 어우러지는 자연 품에 안겨 똑같은 자연붙이 하나로 살아내고 있기에, 이러한 당신들 삶을 담은 책을 사람들이 아끼고 좋아하며 반기고 있다고.

 동물병원 식구들이 꾸리는 삶이란 바로 사랑과 믿음입니다. 이들 동물병원 식구들이 먹고살 뿐 아니라 아픈 짐승들을 돌보는 데에 보탬이 되어 주는 사람들이 보내 주는 손길 또한 사랑과 믿음입니다. 자연을 돌보거나 지키겠다고 한다면 입바른 ‘자연사랑 구호 외치기’가 아니라, 말 그대로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우리 터전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면 됩니다. 짐승들을 돌보거나 지키겠다고 한다면 겉치레 ‘동물사랑 선전 활동’을 할 노릇이 아니라, 온몸 그대로 나와 내 이웃과 내 둘레 모든 목숨붙이와 보금자리를 사랑하며 아끼는 숨결을 간직하면 됩니다.

 사진책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물병원》은 책이름하고는 다르게 ‘온누리에서 가장 어리석은 동물병원’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가장 어리석은 동물병원은 가장 어리석기 때문에 이들 동물병원 식구들한테 늘 웃음꽃이 피고 눈물꽃이 돋는 즐거우며 빛접은 삶을 베풀어 줍니다. 꾸미는 삶이 아니라 즐기는 삶이요, 겉바르는 삶이 아니라 부대끼는 삶입니다. 내세우는 삶이 아니라 내놓는 삶이요, 뽐내는 삶이 아니라 손잡는 삶입니다.

 온누리를 살리는 힘이란 다름아닌 사랑에 있음을 알뜰살뜰 보여줍니다. 온누리를 빛내는 슬기란 다름아닌 믿음에 있음을 차근차근 들려줍니다.


 (3) 살뜰히 되읽는 생각줄기


 글은 적고 사진이 많이 실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물병원》입니다. 얼마 안 실린 글이지만 한 줄 두 줄 되읽는 재미가 남다릅니다. 사진 또한 한 번 보고 두 번 보는 기쁨이 꽤 큽니다.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책을 한 장씩 넘기며 글을 읽어 주다가는, 사진에 함께 실린 숱한 짐승들 이름을 부르며 알려주는 즐거움 또한 새삼스럽습니다.

 우리 땅에서는 찾아보기 어렵거나 자취를 감추기까지 한 짐승들 모습을 참 쉽게 마주할 수 있는 책 하나인데, 그예 지식덩어리 책이 아닌 사랑하고 눈물과 울음이 고루 섞인 살가운 이야기 하나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늘어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4343.6.13.해.ㅎㄲㅅㄱ)


[11쪽] 숲속 동물병원은 병원이라기보다 자연으로 돌아가기 위한 재활 훈련소라고 생각하면 될 거예요. 야생동물에게는 주인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진료비나 입원비를 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의료진은 모두 급여를 받지 않는 저의 가족이 맡았습니다. 저와 아내와 네 명의 아이들이 이 병원의 의료진들이지요. 보통 병언이라면 환자가 많을수록 유명해지고 돈도 많이 벌게 되는데 이곳은 정반대랍니다.

[16쪽] 어느 날 아침, 우리 집 아이가 콩새를 안고 들어왔어요. 그 콩새는 울고 있었어요. 눈에 하나 가득 눈물을 머금고 말이에요. 인간이 아닌 동물은 울거나 웃지 않는다고 배웠는데, 눈앞의 콩새는 마치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나는 열심히 환자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애쓰게 되었어요. ‘틀림없이 아프다고 호소하는 거야.’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은 거지요.

[16∼17쪽] 일본 훗카이도는 풍부한 자연에 에워싸여 있고, 사람들도 그 속에서 생활을 합니다. 그 때문에 인간 생활의 변화가 곧바로 자연에 영향을 미칩니다. 예를 들어 소비자가 싼 것이 좋다고 말하면, 농부는 어쩔 수 없이 화학비료를 자주 사용해 작물을 많이 생산하려고 합니다. 농약도 많이 사용하게 되고요. 그렇게 되면 동물 중에 농약 중독 환자가 늘게 됩니다. 훗카이도에서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생활이 바빠지자 덩달아 차의 속도도 빨라졌습니다. 그로 인해 교통사고를 당하는 동물도 늘어났고요. 한 번 쓰고 버리는 소비 생활이 일상화되어, 여기저기 쓰레기더미가 산을 이루고, 또 버려진 물건에 상처를 입는 동물 환자가 늘고 있습니다.

[82쪽] 새끼 사슴은 우유를 하루에 4리터나 마셔요. 덕분에 병원은 더욱 가난해졌지요.

[85쪽] 여우와 너구리, 참새와 까마귀처럼 사람 곁에서 생활하는 동물에게는, 사람 또한 위협적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장난을 칠 때면 가끔 상대에게 필요 이상으로 과장된 몸짓을 보여주고는 해요. 또한 사람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 등 기계의 위험성도 가르칠 필요가 있어요. 이런 것들을 습득하면 드디어 자연 속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102쪽] 퇴원은 매우 기쁜 일입니다. 환자는 자유로워지고, 의료진은 일이 줄어 한숨 돌릴 수 있지요. 그렇다고 퇴원이 가까워지면 모두 기쁜 얼굴을 하느냐,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기뻐하는 것은 원장인 나뿐, 모두 서운한 표정들이지요. 자기 자식이나 친구와 헤어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일 거예요. 환자 중에서도 그런 기분을 느끼는 동물이 있는 것 같아요. 동물들에게는 자연의 품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의 착각에 불과한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125쪽] 생물들의 환경은 점점 나빠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점을 이해하고 함께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어, 숲속 동물병원도 하나 둘씩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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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을 달래며 살아간다
다이쿠바라 야타로 지음, 박영 옮김 / 북피아(여강) / 1991년 7월
평점 :
절판





 태어나는 책, 살아가는 책, 죽는 책
 [헌책방에서 만난 책 1] 다이쿠바라 야타로, 《티베트 의학의 지혜》



 새로 태어난 목숨은 둘도 없는 기쁨입니다. 어린 나날부터 늙은 나날까지 보내는 삶이란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입니다. 더는 몸을 쓸 수 없는 가운데 조용히 거두는 숨결이란 다시 없는 고마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는 기쁨과 살아가는 즐거움과 죽는 고마움을 누립니다. 어느 한 가지만 맛볼 수 없으며, 어느 한 가지는 맛보지 않겠다며 손사래칠 수 없습니다. 기쁘게 맞이하는 목숨이요 즐겁게 누리는 삶이요 고맙게 멈추는 숨결입니다.

 흔히들 뭍고기이든 물고기이든 꺼리면서 푸성귀만 먹고살아야 한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어려운 말로 ‘채식주의’인데, 고기 아닌 풀을 먹는 사람일 때에는 고기 먹는 사람보다 뱃속이 가뜬하다거나 부드럽기 마련입니다. 고기를 먹는 사람한테 맛있는 고기란 ‘고기를 먹는 짐승을 잡아 마련한 고기’가 아닌 ‘풀을 먹는 짐승을 잡아 마련한 고기’입니다. 풀 먹은 짐승이 맛이 있지, 고기 먹은 짐승이 맛이 있지 않습니다. 풀 먹는 사람이 튼튼하지, 고기 먹는 짐승이 튼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기를 먹든 풀을 먹든 목숨을 먹는 삶입니다. 풀이라 하여 목숨 아닐 수 없습니다. 풀 또한 고운 목숨입니다. 풀을 뜯거나 데치거나 삶을 때에도 짐승을 잡아서 죽을 때하고 마찬가지로 목숨을 끊는 노릇입니다. 꽃이나 나뭇가지를 꺾을 때에 꽃과 나무 또한 아파하거나 죽는다고 말을 하면서, 푸성귀를 밥거리로 삼아 먹는다고 할 때에는 ‘나한테 바쳐진 목숨’을 느끼지 않는다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시는 물 또한 목숨이고 우리가 들이쉬는 바람 또한 목숨입니다. 우리는 목숨 아닌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다른 목숨을 받아들이며 내 목숨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수명은 늘어났으나 순수하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능력은 점점 유실되어 가는 게 아닌가 싶다 ..  (26쪽)


 농사짓는 들판에서 태어나 자라는 사람한테는 무엇보다도 풀과 곡식이 몸에 가장 잘 맞습니다. 고기를 잡는 바다에서 태어나 자라는 사람한테는 무엇보다도 물고기가 몸에 가장 잘 맞습니다. 농사도 짓고 고기잡이도 하는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면 풀이며 곡식이며 물고기이며 골고루 즐길 테지요. 그렇다면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이 태어나서 자라는 도시에서는? 도시라는 곳은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먹고 버리는 터전인 만큼, 아무것이나 닥치는 대로 배를 채우도록 먹고 마시고 쓰고 버릴 때가 내 몸에 가장 알맞을까요?

 틀림없이 제 고향마을 터전에서 나는 먹을거리만큼 내 몸에 알맞으며 좋은 먹을거리란 없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네 도시를 떠올려 보면 너무 끔찍합니다. 스스로 농사를 짓는 일이란 없이 돈만 벌고 돈만 써서 쓰레기를 잔뜩 내보내는 데다가 쓰레기를 자연으로 돌려보내지 않으며 쓰레기가 어찌 되는가를 헤아리지 않는 도시 삶자락이란 참으로 끔찍합니다. 수많은 아이들이 이와 같은 도시에서 태어나 자연이 내려준 선물을 느끼지 못할 뿐더러, 내 몸이 바로 자연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그지없이 끔찍합니다. 도시 아이들은 ‘불량식품’이라는 먹을거리에 군침을 흘리며 손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어른들은 술과 담배에 찌들며 갖가지 스포츠와 쏟아지는 정보덩어리에 파묻힐 수밖에 없습니다.


.. 자연이 준 것을 빼앗고 새삼스럽게 약으로 치료한다는 것은 이상하기만 하다 … 아무리 모유의 성분을 분석ㆍ연구하여 외부에서 배합하려 해도 똑같은 효과는 얻을 수 없다. 그 아기에게 맞는 성분 배합은 아기와 직접 연결되어 있던 모체만이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다 ..  (53, 61쪽)


 도시에서 태어나고 도시에서 살아가는 제 삶을 돌아봅니다. 남 얘기에 앞서 나부터 내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곱씹습니다. 딸아이를 낳아 스물석 달째 함께 살아가고 있는 나날을 돌이킵니다. 나부터 나 스스로 얼마나 아름다운 목숨으로 살아가는가를 헤아린다면 고개를 떨굴밖에 없습니다. 나부터 나 스스로 우리 아이한테 얼마나 고마운 어버이요 좋은 목숨으로 마주하고 있느냐를 살핀다면 고개를 내저을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도시에서는 스스로 먹을거리 입을거리 보금자리를 마련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도시에서는 돈을 마련할 뿐입니다. 그러고 나서 돈으로 먹을거리 입을거리 보금자리를 빌립니다. 사는 사람도 파는 사람도 오로지 돈을 생각하거나 따집니다. 사는 사람이든 파는 사람이든 삶이나 죽음을 느끼거나 깨닫지 않습니다. 사는 사람이든 파는 사람이든 무엇보다 돈을 바라봅니다. 알맞춤한 값인지를 살피고 싸거나 비싼 값인가를 돌아봅니다. 돈이 얼마나 드느냐를 따지고, 돈이 얼마나 있어야 하는가를 생각합니다. 우리 삶에 얼마나 이바지를 하느냐를 느끼지 않고, 우리 목숨에 얼마나 어울리느냐를 헤아리지 않으며, 우리 죽음에 얼마나 따스한 손길인가를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 인도 여성들은 산후 1주일 동안은 외출은 물론 산실 안에서도 계속 누워 있었다. 닷새 정도까지는 변기에도 앉지 않았다 … 인도에서는 산후 3주는 산실을 어둡게 만들어 바깥 빛을 쏘이지 않도록 하는데, 이것은 갓 태어나는 아기의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어머니의 눈을 보호하려는 배려이기도 하다 ..  (71, 75쪽)


 책을 읽으면서 밥을 느끼고 옷을 느끼며 집을 느낍니다. 책이든 밥이든 옷이든 집이든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 한동아리입니다. 나고 살고 죽습니다. 다시 나고 다시 살고 다시 죽습니다.

 제 나이 서른여섯인 오늘에 이르러 비로소 죽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나이 열여섯과 스물여섯에도 죽음을 늘 생각했습니다. 여섯 살 적에는 도깨비를 무서워 했으니 이때에도 죽음을 생각한 셈일까요. 저녁에 눈을 감고 잠들 때에는 이대로 아침에 깨어나지 못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벌써 눈을 감을 수는 없지 않느냐고 생각했고, 잠결에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다가, 새벽에 눈을 뜨면서 이야 오늘 하루도 다시금 눈을 뜰 수 있네 하고는 고맙게 느낍니다.

 문득 돌아보니, 새벽마다 고맙게 눈을 뜨기는 하지만, 이러한 고마움을 땅님이나 하느님한테 비손을 올리지는 못해 왔군요. 그래, 고맙기는 고맙다지만 고마움을 제대로 나타내지 않으며 지내온 삶이라 하겠습니다. 마음으로는 고맙다 하지만 몸으로는 고마운 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셈이라 하겠습니다. 마음과 몸이 하나되어 고마움을 느끼면서 밥을 먹고 똥을 누고 집식구와 살가이 어우러져야 하는데, 좋은 삶을 즐기지 못하는 꼴이라 하겠습니다.

 누가 알아주건 말건 좋은 책이 태어났으면 좋은 책이 태어난 셈이고, 좋은 책을 알아보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면 어김없이 좋은 책이 빛을 본 셈이며, 이 좋은 책이라 하지만 널리 팔리지 못해 새책방이나 도서관 책시렁에서 자취를 감추면 조용히 숨을 거둔 셈입니다. 좋다는 책이라 하여 한결같이 팔리거나 많이 팔리거나 오래도록 팔려야 하지 않습니다. 좋다는 책이라면 외려 알맞춤하게 팔리고 알맞춤하게 사랑받다가 살그머니 잠들어 사라질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 스스로 꾸리는 제 삶이 좋은 삶이라 할 때에도 내 목숨을 살뜰히 받아들여 알맞게 즐기는 가운데 땅에 보탬이 되도록 숨을 거두어야 참 아름다움이요 기쁨이며 보람이 아니겠느냐 생각합니다.


.. 조금씩 병을 앓으면서 원상태로 북귀하는 과정에서 그 아이의 고유한 관성이 붙어 가는 것이다. 몸은 그런 과정을 거쳐 자기 나름대로의 힘과 거기에 맞는 리듬을 만들어 생명력을 키워 가게 된다 … 자연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우리 문명사회에서 생활하는 인간보다 눈이 좋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  (86, 117쪽)


 살아가며 늘 느끼는데, 튼튼한 몸뚱이라고 해서 더 오래 목숨을 잇지 않습니다. 튼튼한 몸뚱이인 까닭에 주먹다짐을 하다가 갑자기 죽음을 맞이할 수 있고, 튼튼한 몸뚱이라서 싸움터에 붙들리는 바람에 난데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으며, 튼튼한 몸이라며 마구 굴리다가 일찍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은 자동차에 치인다든지 어쩐다든지 하며 벼락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여린 몸뚱이라지만 반드시 일찍 죽지 않습니다. 가늘고 긴 삶이란 소리가 아닙니다. 아프고 여린 몸뚱이인 분들 모두 그러하지는 않으나, 아프고 여린 몸뚱이일 때에는 더 아프거나 더 힘든 일은 하지 않습니다. 하려 해도 못하기 일쑤이지요. 언제라도 아프거나 여린 몸에 걸맞을 일을 찾고, 내 주제에 알맞게 놀이를 즐기며, 내 밥그릇에 들어맞도록 밥을 먹습니다. 넘치거나 모자라게 살지 않습니다. 꼭 알맞춤하게 살아갑니다. 넘쳐서도 안 되고 모자라서도 안 됩니다. 아프거나 여린 사람은 아프거나 여린 몸을 노상 느끼는 터라, 아프거나 여린 몸으로 부대낄 삶을 더 깊디깊이 맞아들이곤 합니다.

 이러는 동안 아프거나 여린 마음밭은 내 마음밭뿐 아니라 이웃 마음밭을 살핍니다. 튼튼한 이웃사람 마음밭을 살피고 아픈 이웃사람 마음밭을 살핍니다. 내가 아프니 남이 아픈 줄 일찌감치 깨닫습니다. 내가 힘드니 남이 힘든 줄 미리 헤아립니다.

 아픈 사람은 싸우지 않습니다. 싸움을 불러들이지 않습니다. 싸우는 사람이나 싸움을 불러들이는 사람은 모두 튼튼한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다투지 않습니다. 다툼을 부를 까닭이 없습니다. 다투는 사람이나 다툼을 끌어들이는 사람은 모두 돈있는 사람입니다.


.. 사람은 자신의 고통에 대해 둔감하면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도 둔감한 경우가 많은데, 그런 사람들은 또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고도 죄책감 같은 것을 느끼지 못하기도 한다 ..  (122쪽)


 튼튼한 몸이란 하늘이 내린 선물입니다. 여린 몸 또한 하늘이 내린 선물입니다. 넉넉한 돈이란 하늘이 보낸 선물입니다. 가난한 살림 또한 하늘이 보낸 선물입니다. 잘생긴 얼굴과 매끈한 몸매란 하늘이 준 선물입니다. 못생긴 얼굴과 투박한 몸매란 하늘이 준 선물입니다. 어느 것 하나 선물 아닌 것이 없습니다. 무엇이든 고마운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몸이든 저런 삶이든 그런 마음이든 우리한테는 둘도 없고 다시 없으며 거듭 있을 수 없는 하나 있는 목숨이거든요. 우리는 고마운 목숨을 받아 살아가는 사람이지 ‘튼튼한 목숨’이라거나 ‘돈있는 목숨’이라거나 ‘잘난 목숨’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서울사람이라 더 잘날 까닭이 없습니다. 서울 강남에 비싼 아파트를 갖춘 사람이라 더 뛰어날 까닭이 없습니다. 어느 마을에서 태어나서 자라건 고마운 목숨입니다. 어떠한 일을 즐기든 고마운 일꾼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대서 더 기쁜 날씨가 아니요, 네 철 따로 없이 따스하거나 시원한 날씨라서 더 반가운 날씨가 아닙니다.


.. 다른 나라에서 혈액을 수입하면서까지 의료수준을 높인다는 것은 일본인이 생존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인도나 티벳 사람들은 자신의 몸에 손상을 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남한테도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다 … 늙어빠져서 뭐가 뭔지도 모르는 채 죽어 가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맑을 때 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행복이며 존엄성을 갖춘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 (죽음을 앞둔 사람) 침대는 보통 큰 나무 밑에 놓아 둔다. 죽음을 밖에서 맞는다는 것은 환자에게도 행복하다. 눈을 들면 꽃이 피어 있는 모습이 보이고 새소리도 들려온다. 아침에 하늘이 밝아옴에 따라 자신의 몸도 깨어나고 새들이 날아다니며 여러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려오고 … 죽음을 지켜보는 경험을 쌓음으로써 자신에게도 닥쳐 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죽음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유익한 죽음도 되는 것이다 ..  (204∼209쪽)


 헌책방에서 《티베트 의학의 지혜》라는 묵은 책을 찾아서 읽었습니다. 우리 식구는 이 책을 2008년 6월에 만났습니다. 아이가 태어나기 두 달 앞서 이 책을 알아보았고, 두 달에 걸쳐 바지런히 읽어내며 우리 삶을 다시금 돌아보고 새로 헤아리고자 했습니다.

 새 목숨을 마주하기 앞서 두 달이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나날입니다. 애 엄마한테든 애 아빠한테든 어떻게 마주하느냐에 따라 짧을 수 있고 길 수 있습니다.

 애 아빠 된 저로서는 길게 껴안지 못하고 짧게 손을 잡았습니다. 더 바투 다가서며 더 가까이 어루만질 수 있었다면 우리 식구는 병원이 아닌 집에서 아이를 낳아 예방주사를 한 방도 안 맞히면서 튼튼하고 싱그러운 숨결을 우리 아이가 맞아들이도록 해 줄 수 있었습니다. 애 아빠 된 저 스스로 집식구 먹여살린다는 핑계를 내세워 돈버는 일에 더욱 마음을 쏟는 바람에 고마운 책 하나 뒤늦게 만났으면서 이 고마운 책에 깃든 고마운 앎과 삶과 빛을 제대로 삭이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애 아빠 된 사람은 지난날뿐 아니라 오늘날과 앞날까지 고마운 앎과 삶과 빛을 제대로 삭이지 못할는지 모릅니다. 날마다 애 엄마 속을 썩일 뿐 아니라, “(아이 낳는 자리에서) 남성을 기피하는 이유는 남성은 고압적이고 거칠어 아기한테 자극이 너무 강하기 때문(35쪽)”이라는 말마따나 애 아빠 스스로 부드럽고 따스하며 넉넉한 사람 매무새로는 다가서지 못할는지 모릅니다. 군대에 끌려가기 앞서까지 욕 한 마디 내뱉을 줄 몰랐다지만, 군대에서 아무리 군화발에 짓밟히고 개머리판이나 삽자루로 두들겨맞았다 할지라도 내 마음을 나 스스로 착하고 참되며 곱게 가다듬는 하루하루였다면, 왼뺨을 맞으며 오른뺨을 때려도 좋다고 여기지 않았겠습니까. 내 삶이 예수님이나 부처님 삶처럼 될 수는 없다지만, 내 나름대로 착하고 참되며 고운 결을 놓지 않을 수 있다면, 한결 따스하며 넉넉하고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며 집식구하고 어울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 그들은 부처님의 자비라고 생각하지만 순례생활이라는 것은 아주 적은 양의 야채만을 먹으며 술도 담배도 하지 않고 자고 일어나는 규칙적인 생활이다. 매일 걸어서 기력이 다 떨어질 때까지 체력을 소모한다.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는 몸이 되어 쓸데없는 일에 쓸 기력도 체력도 남지 않아 암이 증식할 곳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구제뿐만 아니라 남을 위해 기도한다는 순례생활을 통해 감정이 제어되어 몸에 기운이 붙게 되는 것이다. 더 살려고 한다거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발버둥이치는 식으로 자기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순수한 기도를 드리며 순례를 달성하려는 마음가짐이 몸에 리듬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려는 힘에서 저항력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이 암의 세력을 잠재우게 되는 것이다 ..  (197쪽)


 헌책방이란 참 고마운 곳입니다. 더 잘 나거나 더 못난 책이 아닌 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책을 있는 그대로 갖추어 주니 고마운 곳입니다.

 헌책방에서 무슨무슨 문화공연을 하거나 이런저런 문화예술을 펼쳐야 남다르거나 기쁘거나 고맙지 않습니다. 헌책방에서는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제 마음을 살찌우며 제 눈을 가다듬는 가운데 제 손을 어루만질 수 있는 착하고 참되며 고운 책 하나 만날 수 있으면 고맙습니다.

 헌책방은 더 밝거나 크게 넓어야 하지 않습니다. 헌책방은 더욱 많은 책을 좀더 골고루 갖추고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헌책방은 여러 일꾼이 더더욱 많은 손품을 들여 책 목록을 셈틀에 집어넣고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내가 바라는 책을 바로 오늘 만나지 못하더라도 괜찮습니다. 바라는 책 하나 찾느라 여러 해를 들여도 좋은 헌책방이고, 바라는 책 하나 끝내 못 찾고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좋은 헌책방입니다.

 헌책방은 책 하나가 있어 좋습니다. 헌책방은 책 하나 만날 겨를이 있어 좋습니다. 헌책방이라는 곳이 1950년대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든, 1970년대 자국이 그예 살아 있든, 1990년대 접어들며 여러모로 달라졌다 하든, 2010년대다운 또다른 모습으로 거듭난다 하든, 헌책방은 그저 헌책방입니다. 헌책방은 다원문화공간이 아니고 다원문화공간은 헌책방이 아닙니다. 헌책방은 새책방이 아니고 새책방은 헌책방이 아닙니다. 헌책방에서 새책을 다룰 수 있고, 새책방에서 헌책을 다룰 수 있겠지요. 그러나 헌책방은 헌책방 구실을 하고, 새책방은 새책방 노릇을 해야 합니다. 헌책방은 헌책방으로서 살아내고, 다원문화공간은 다원문화공간대로 살아내면 됩니다.

 헌책방은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꼭 한 사람 가슴에 빛이 될 책’이 무엇인지 콕 집어서 알아채거나 잡아챌 수 없는 가운데, 언제 어느 곳에서든 알아보거나 느낄 사람이 있으리라 믿는 책 하나를 갖출 수 있으면 되는 곳입니다. 이러한 헌책방 구실을 하며 새책을 다루든 문화공연을 하든 하면 됩니다.

 새책방은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그때그때 새로 나오는 수많은 책을 마진율이 아닌 무르익은 알맹이에 따라 골고루 갖추어 옛책을 바탕으로 새책이 태어난다’는 반가움을 알뜰살뜰 나누어 줄 수 있으면 되는 곳입니다. 이러한 새책방 노릇을 하며 헌책을 팔든 말든 하면 됩니다.


.. 나는 병원에서 분만하는 데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탄생을 거든다’는 사명감보다는 ‘피 보는 일을 한다’는 생각으로 출산을 대하기 때문이다 … 지금부터 앞으로 커 갈 아이들한테도 보통의 일상생활 속에서 어머니가 고통하고 여러 사람이 조용하도록 애써 주는 분위기 속에서 태어나는 것은 귀중한 인생의 첫 경험이기도 할 것이다 ..  (42, 45쪽)


 1991년에 우리 나라에 한 번 옮겨진 《티베트 의학의 지혜》라는 책이 다시 새 목숨을 받아서 태어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2008년 6월 뒤로 이 책을 또 한 번 만날 수 있을까 싶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보지만 이 책을 아직 다시 만나지 못합니다. 이 책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머잖아 아이를 낳을 분들이나 머잖아 시집장가를 갈 분들이나 아이를 키우는 분들한테 선물해 주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반드시 이 책 하나만을 찾아내어 선물해야 하지 않습니다. 다른 책으로도 얼마든지 서로한테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책이 아니더라도 나 스스로 착하고 참되며 곱게 살아간다면 제 삶이 서로한테 빛이 되겠지요. 책 하나로 삶에 빛을 나누어 주어도 좋고, 삶 하나로 책에 빛을 되돌려 보아도 좋습니다. 책을 선물하며 살아가도 좋고, 오순도순 도란도란 어깨동무하며 신나게 살아가도 좋습니다. (4343.6.9.물.ㅎㄲㅅㄱ)


― 티베트 의학의 지혜 (다이쿠바라 야타로 씀,박영 옮김/여강,199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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