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우루공화국의 비극 - 자본주의 문명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를 어떻게 파괴했나
뤽 폴리에 지음, 안수연 옮김 / 에코리브르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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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가 아름다운 나라를 망가뜨렸나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37] 뤽 폴리에, 《나우루공화국의 비극》



 우리 나라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나라입니다. 우리 나라는 사회주의 나라가 아니요, 공산주의 나라도 아닙니다. 우리 나라는 자본주의 나라입니다.

 돈이 없고서는 살아갈 길이 없는 우리 나라 대한민국입니다. 돈이 없을 때에는 사람 구실을 못한다고 여기는 우리 나라 대한민국입니다.

 국민소득이 꽤 높은 우리 나라 대한민국입니다. 몇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은 아니지만 국민소득이 제법 높은 우리 나라 대한민국입니다. 그런데 국민소득은 높을지라도 복지와 문화와 교육은 꽤 뒤처진 우리 나라 대한민국입니다. 이번 2010년 6월 2일 지방선거를 들여다보면 적잖은 후보자들이 ‘친환경 무상급식’을 내걸고 있었습니다. ‘무상급식’은 정치 후보자가 공약으로 내세울 이야기가 아니라, 나라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만, 우리 나라에서만큼은 이런 마땅히 나라가 할 일을 나라가 마땅히 안 하면서 정치 후보자들이 선거철마다 공약으로 되풀이해서 내놓고 있습니다.

 어김없이 우리 나라는 자본주의 나라입니다. 우리 나라는 자본주의 나라이면서 공업국이요, 토목국입니다. 공장이 온 나라에 넘치는 한편, 숱한 토목공사가 끊이지 않습니다. 너무 우악스러운 이름이라 여겼는지 사라진 ‘경부운하’와 ‘경인운하’ 토목공사는 저마다 ‘4대강 사업’과 ‘아라뱃길’이라는 새 이름으로 갈아타고 끝도 모르게 내달리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대한민국은 농업국이 아닙니다. 농업을 북돋우지 않는 우리 나라 대한민국입니다. 우리 나라 대한민국에서는 환경을 살리는 유기농을 북돋우지 않습니다. 아니, 유기농을 북돋울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온통 도시에 바글바글 모여들어 살아가고 있는데, 이 많은 사람들을 모조리 ‘유기농’ 곡식으로 먹여살릴 수 없습니다. 흔한 말로 ‘남녘땅에서 쏟아지는 음식물쓰레기 부피’는 ‘북녘땅 사람들을 모두 먹여살리고 아주 많이 남을 만큼 되는 부피’라 할 만큼 남녘땅에서는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버리는 먹을거리가 많습니다. 이런 형편이기 때문에 제아무리 훌륭한 유기농 곡식을 일군다 하더라도 버려지는 쓰레기가 잔뜩잔뜩 있으니 농사짓는 보람이 없을 뿐 아니라 참된 농사를 지을 수조차 없습니다. 그러니까, 정치꾼 공약으로 ‘무상급식’은 마땅히 이루어질 수 있으나, ‘친환경’ 무상급식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 19세기에 나우루는 여전히 야자나무로 뒤덮인 땅이었다 … 나우루인들은 대개 해변에서 하는 여러 가지 놀이와 즐겁게 낚시하기를 좋아했다. 저녁이 되면 나우루인들은 함께 음식을 먹고 불가에서 밤을 지새웠다 ..  (26, 33쪽)


 자본주의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쁘다면 어떤 ‘주의’를 섬기든 착하지 않고 참답지 않으며 곱지 않은 사람들이 나쁩니다. 우리가 자본주의를 섬기든 사회주의를 섬기든 공산주의를 섬기든 민주주의를 섬기든 독재정권을 섬기든 착하고 참되며 곱게 살아갈 수 있으면 나쁠 일이란 없다고 느낍니다. 우두머리란 사람이 백 살까지 살며 백 해 동안 나라를 다스린다 할지라도, 우리 스스로 착하고 참되며 곱게 살아간다면 우두머리가 누구이건 말건 아랑곳할 일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일본 배우 미야자와 리에라는 분이 한창 젊고 사랑받으며 일하던 어느 날, 일본 총리가 마련한 잔치에 초대되어 가 있던 자리에서 “난 일본 총리가 누구인지 몰라요”라 말한 적이 있다고 했다는데, 대통령 이름을 모르든 시장이나 구청장 이름을 모르든 군수나 면장을 이름을 모르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가 뿌리내린 동네에서 아름다이 살아가고 있으면 넉넉합니다. 좋은 정치꾼이 있건 몹쓸 정치꾼이 있건 우리 동네를 우리 힘과 슬기로 알뜰살뜰 가꾸고 있으면 넉넉합니다. 신동엽 님 시 〈산문시〉에 나오듯이 정치하는 사람들은 할 일이 너무 없어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꽂고 시인한테 찾아가 술 한잔 마시자고 굽신거릴 수 있도록 우리들은 ‘정치 생각’이 아닌 ‘삶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면 됩니다.

 언제나 말썽거리란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사회주의도 민주주의도 아닙니다. 바로 우리 사람이 말썽거리입니다. 아무리 좋은 제도가 있다 한들 이 제도를 다루는 사람이 말썽거리이니 나라가 무너지고 사회가 엉망이 되며 교육이 흔들립니다. 아무리 몹쓸 제도로 짓눌려 있다 한들 이 제도에 허덕이거나 휩쓸리지 않으면서 우리 스스로 아름답고 사랑스레 살아가고 있으면 착하고 참된 훌륭한 일꾼이 태어납니다.


.. 인산염은 1907년에 채굴되기 시작했다 … 20세기 초 몇 해 동안 나우루는 노천 광산이나 다름없었고, 모두가 이익을 챙겼다. 영국인들은 채굴에 대한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고, 독일인들은 여전히 섬을 지배하면서 채굴 이익에 대한 배당금을 받았다 … 인광석은 평화로운 시기에는 농업 발전을 가져오지만, 전시에는 폭발물 제조에도 쓰였다. 태평양 지역은 2차 세계대전의 전략지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 1948년, 나우루인들은 인산염 채굴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가운데 그 총수입에서 고작 2퍼센트만을 받았다 ..  (31, 36, 41쪽)


 《나우루공화국의 비극》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유럽(서구) 자본주의가 망가뜨린 평화로운 태평양 섬나라 삶을 보여주는 작은 책입니다. 평화로이 살아가는 태평양 섬나라 사람들은 ‘식민지를 넓히려는 꿈’을 키운 유럽사람 때문에 평화에 금이 갑니다. 그 뒤로는 ‘돈을 얻으려는 꿈’을 키우던 또다른 유럽사람과 일본사람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평화에 얼룩이 집니다. 그러고 나서는 그동안 당신들을 해코지하던 사람들이 남기고 간 총칼과 술과 돈 때문에 스스로 평화를 허물고 맙니다.

 《나우루공화국의 비극》이라는 책은 온누리 사람들이 나우루공화국에서 콩고물을 빼앗아 먹으면서 나우루공화국 몇 천 사람들을 엉망진창으로 갈기갈기 찢어 놓은 모습을 남김없이 보여줍니다. 자본주의란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란 얼마나 끔찍한가를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사랑을 잃은 사람이 얼마나 불쌍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이 얼마나 가여우며, 나눔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슬픈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나우루공화국 사람들은 흰둥이들이 가르쳐 준 대로 당신들 나라를 이룬 ‘인산염’을 캐면서 당신들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이렇게 당신들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면서 어마어마하게 큰돈을 거머쥐었습니다. 고작 1만조차 안 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작은 나라에서 1억이 넘는 사람들 나라보다 커다란 돈을 움켜쥐면서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손 한 번 놀리지 않으며 놀고먹는 삶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아무 근심걱정 없이 ‘쓰고 버리는’ 삶을 서른 해 동안 넘실넘실 펼치다가 폭삭 주저앉습니다. 돈으로 뜨고 돈으로 내려앉습니다.


.. 자기 땅에서 나는 인산염이 오스트레일리아나 뉴질랜드 들판에 양분을 제공하는 동안, 나우루는 부서지고 구멍이 난 자국 땅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 … 나우루 지도자들의 행태는 유명 스타들의 변덕과 비슷했으며, 장관들은 때로 자기네 금고와 국고를 혼동하기도 했다 … 사람들은 정치권력에 대해 비판할 수 없었는데, 어느 가족이건 정부에 한 발씩은 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 독립 이후 나우루가 이리저리 뒤얽힌 여러 건의 해외 투자와 결실을 맺지 못한 프로젝트 때문에 얼마나 손실을 입었는지 확인할 길은 거의 없다. 사실 돈은 결코 나우루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고, 제대로 그런 손실을 계산해 본 적도 없었다. 일부 오스트레일리아 전문가들은 누적 손실액이 20억 달러에 이른다고 했다. 섬에 사는 거주민이 7000명을 조금 넘는데 말이다 ..  (65, 69, 108쪽)


 2010년 6월 2일 지방선거가 끝났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인천에서는 시장이 바뀝니다. 예전 시장님은 지난 여덟 해에 걸쳐 인천땅 모든 곳을 ‘재개발-재정비-도시정화’라는 이름을 붙여 갈아엎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갈아엎으며 2014년에는 아시안게임을 치른다 하고, 갯벌을 메운 땅에 151층짜리 건물을 세우고 있는 한편, 우리 나라에서 동대문운동장보다 역사가 깊던 가장 오래된 야구장(건물 나이는 동대문운동장이 더 많았으나 역사는 동대문운동장보다 깊던)을 손쉽게 허문 데다가, 앞으로는 더 큰 돈을 들여 아파트숲을 일구는 꿈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새로 시장이 되신 분이 유세를 하면서 우리한테 나누어 준 공약자료집을 들춥니다. 이분은 30조 원을 들여 참된 재개발을 하겠다고 밝힙니다(예전 시장님은 10조 원을 들여 당신이 밀어붙이던 재개발을 마무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새 시장님은 예전 시장님이 내세운 ‘뉴타운’은 모두 엉터리라 하면서 당신은 ‘웰타운’을 세우겠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2024년에 인천에서 올림픽을 치르도록 하겠다고 붙입니다.

 예전 시장님은 ‘문학월드컵축구장’ 하나만 갖고 2014년 아시아경기대회 유치를 이끌어 냈습니다. 다른 모든 경기장은 새로 짓는다고 하면서 2014년에 아시아경기대회를 치른다고 밝혀 왔습니다. 다가오는 2014년에 아시아경기대회를 치를 경기장이 다 만들어지면, 경기를 치른 뒤에는 이 경기장들이 쓰일 데 거의 없이 놀고 있을 테니까, 2024년에 올림픽을 치를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은 노릇이겠지요. 그러면 2024년 올림픽을 내다보며 인천과 부산이 서로 다툼질을 해야 할까 궁금하군요.


.. 나우루에서는 당뇨가 위험할 정도로 널리 퍼져 있으며, 이 병의 근원은 잘 알려져 있다. 바로 돈이다. 인산염으로 돈을 번 사람들은 더 이상 일할 필요가 없었으며, 집에서 배달 음식만 시켜 먹고 차로만 움직이는 등 신체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던 것이다 … 채 30년도 안 돼 나우루인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 버렸다 … “섬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비디오 가게에 가서 비디오 한 편 빌리면 그만인데, 굳이 다 같이 모여 전통 축제를 준비하는 데 누가 관심이나 있었겠어요?” ..  (143, 150∼151쪽)


 운동경기장 하나를 짓는 데에는 수천 억원이 듭니다. 운동경기장 몇 개를 짓고 큰 세계경기대회를 치르면 일자리라든지 홍보관광이라든지 무어무어니 하면서 수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바로 자본주의 이야기입니다.

 운동경기장 하나를 지을 돈이면 ‘무상급식’뿐 아니라 ‘무상교육’과 ‘무상복지’를 이룰 수 있습니다. 세계경기대회를 치를 운동장을 짓는 어마어마한 돈이라면 인천이라는 도시 하나뿐 아니라 나라를 통틀어 무상급식과 무상교육과 무상복지를 이루고 남습니다. 급식과 교육과 복지를 나라돈으로 아름다이 뒷배하는 동안 ‘좋은 일자리 만들기’는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애써 돈을 들이지 않아도 좋은 일을 이루고 좋은 꿈을 이루며 좋은 삶을 이룹니다.

 우리 나라가 자본주의이기 때문에 반드시 돈으로만 모든 일을 꾸리려 한다든지, 더 커다란 돈을 쏟아부어 뭔가를 꾀한다든지 해야만 하지 않습니다. 돈에서 홀가분하면서 자본주의를 펼칠 수 있고, 돈을 들이지 않으면서 자본주의를 꽃피울 수 있습니다. 돈이 없이 자본주의가 뿌리내리도록 할 수 있으며, 돈벌이 아닌 일을 하면서 자본주의를 살찌울 수 있습니다.


.. 두바이는 겉으로 보기에 낙원이나 다름없다. 돈, 호화 관광, 그리고 거대한 규모 … 돈에 압도당한 나우루인들은 결코 자신들의 땅과 문화를 보존할 줄 몰랐다 ..  (172∼173쪽)


 평화로운 섬나라 나우루는 대통령이 없던 지난날 참으로 평화로웠습니다. 사랑스러운 섬나라 나우루는 장관이고 국회의원이고 없던 지난날 더없이 사랑스러웠습니다. 살기 좋은 섬나라 나우루는 공장이고 회사이고 학교이고 없던 지난날 그지없이 살기 좋았습니다. 아름다운 섬나라 나우루는 돈이 없던 지난날 해맑게 아름다웠습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 대한민국은 대통령이 있고 장관이며 국회의원이 있으며 공장과 회사와 학교가 수두룩하고 돈 또한 넘치도록 많습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 대한민국은 얼마나 평화롭거나 사랑스럽거나 살기 좋거나 아름다운 나라일는지 궁금합니다. (4343.6.3.나무.ㅎㄲㅅㄱ)


 ┌ 《나우루공화국의 비극》(에코리브르,2010)
 ├ 글 : 뤽 폴리에
 ├ 옮긴이 : 안수연
 └ 책값 :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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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를 팝니다 - 브래드 피트가 심은 나무는 기후변화를 막을 수 있을까
케빈 스미스 지음, 이유진.최수산 옮김 / 이매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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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끗한 삶터는 돈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36] 케빈 스미스, 《공기를 팝니다》



 다가오는 2010년 6월 2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선거를 생각할 때마다 슬프고 괴로운 나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몇 달 앞서부터 선거하는 날을 코앞에 둔 오늘까지 ‘후보자가 내놓는 공약’이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동네에서 듣는 이야기라든지 신문과 방송에 가득 넘치는 이야기라든지 선거운동원이 내미는 이름쪽에 담긴 이야기라든지, 어느 대목을 보더라도 이이는 무엇을 이루고자 하며 저이는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무슨 정당 후보가 뽑혀야 한다거나 안 뽑혀야 한다는 이야기가 가장 많습니다. 무슨 연합이니 대연합이니 하는 이야기가 이 다음으로 많습니다. 연합을 한다면 왜 연합을 하고, 연합을 하며 내놓으려는 정책이 무엇이며, 이 정책은 우리들한테 어떻게 도움이 되거나 피와 살이 될는지를 밝힐 노릇입니다. 하다못해 ‘4대강 반대’를 하더라도 ‘그러면, 4대강을 반대한 다음 무얼 하려고?’ 하는 생각조차 듣기 어렵습니다. 4대강 반대를 이룰지라도, ‘4대강 사업과 맞먹는 또다른 큰돈 들일 토목공사 계획’만 춤을 추고 있습니다.

 머나먼 다른 동네보다 제가 살고 있는 인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시장 후보로 네 사람이 나왔는데 5월 28일까지 후보자 공약집이 집으로 오지 않고 있습니다. 동네 골목길 담벼락에 후보자 포스터가 붙은 지 며칠 되지 않습니다. 시장 후보자 운동원이든 구청장 후보자 운동원이든 정당에 따라 수십 사람이 줄을 맞춰 늘어서면서 노래를 틀고 춤을 추면서 ‘기호 몇 번’만 외치고 있습니다.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이름쪽하고 정책홍보지를 주워서 들여다봅니다. 지난 여덟 해에 걸쳐 시장이 된 분하고 새롭게 시장을 맡겠다고 하는 분하고 정책이 똑같습니다. 다른 대목이라면 예전 시장님은 ‘뉴타운 재개발’을 외치고, 새로 시장이 되고자 하는 분은 ‘웰타운 재정비’를 외칩니다. 두 분 모두 수십 조에 이르는 돈을 어딘가에서 뽑아내어 ‘동네를 온통 아파트로 바꾸는 토목공사’를 벌이려는 꿈이 당신들 공약이라고 내세우고 있습니다. 예전 시장님은 인천이 교육성취도가 3위라고 내세우며 당신이 교육을 아주 잘 이끌었다고 밝히고, 새로 시장이 되고자 하는 분은 인천이 교육성취도가 뒤에서 2등이라고 말하며 당신이야말로 인천 교육을 책임질 사람이라고 밝힙니다. 그런데 이런 수치이든 저런 통계이든 두 분 모두 다시금 몇 조를 들여 사교육을 뜯어고치고 교육지원금을 마련하며 ‘학력성취도’를 높이려는 데에만 눈길을 둡니다. 그러니까, ‘전국 일제고사 성적’이 인천이 1등을 거머쥘 수 있도록 모든 뒷배를 아끼지 않겠다는 이야기가 두 분 공약집에 실려 있습니다.


.. 오늘날, 시장에는 탄소 상쇄라는 새로운 면죄부가 등장했다. 현대의 면죄부 판매인인 클라이미트케어, 카본뉴트럴컴퍼니, 카본클리어 같은 탄소 상쇄 기업들이다. 스스로 자신을 ‘생태자본주의’라고 부르는 이 기업들은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거나 막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프로젝트로 ‘착한 기후 보호 행위’를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도매로 발생한 배출권은, 다시 말해 상쇄 기업이 만들어낸 ‘착한 행위’는 돈은 있지만 온실가스 감축에 책임질 시간과 여유가 없는 오늘날의 죄인들에게 소매가격으로 팔려 나간다 ..  (14∼15쪽)


 요즈음 도시 초등학교는 한 반 아이들 숫자가 서른∼서른다섯쯤이라고 합니다. 아직 아이들 숫자가 더 줄어야 하지만 이만 한 숫자라 하더라도 고작 열 몇 해 앞서를 헤아리면 대단히 발돋움한 셈입니다. 우리는 얼마 앞서까지 한 반에 쉰 예순 일흔 여든을 때려넣고 몽둥이찜질로 아이들을 닦달해 왔습니다. 터무니없이 많은 숙제와 성금걷기와 체벌로 아이들이 아이들답지 못하게 짓눌러 왔습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지난날과 견주면 몽둥이찜질과 손찌검에서 홀가분합니다. 그러나 지난날에는 드물었던 갖가지 과외와 학원과 영어와 한자와 방과후수업 따위로 놀 겨를이 없습니다. 그나마 집안일 거들기에 짬을 낼 수조차 없습니다. 초등학교라면 초등교육을 할 노릇이지만, 뒷날 더 나은 일류대학에 들어갈 예비 수험생이 되도록 내몰기만 합니다. 중학교라면 중등교육을 하고 고등학교라면 고등교육을 할 노릇인데, 어김없이 대학교만 바라보는 수험생이 되도록 들이밀고 있습니다.

 이른바 일류대학교 학생이 되어 졸업장을 움켜쥐도록 등을 미는 까닭이란, 나중에 대학교를 마치고 나서 연봉 많이 받는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착하고 참되고 고운 어른으로 크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1등이 되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대통령을 뽑든 시장을 뽑든 국회의원을 뽑든, 우리들은 늘 ‘1등만 생각하는’ 틀에 맞추어지고 맙니다. 반드시 1등이 되어야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는 듯 생각합니다. 1등이 안 되어 떨어지더라도 ‘생활정치’를 알차게 하면서 ‘정치꾼이 제몫을 하도록 지켜보는 민주주의’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허울좋은 사탕발림처럼 들먹이는 ‘아름다운 꼴찌’입니다. 좋은 사람이 우두머리가 되어야 사회가 나아질 줄 알고 있는데, 좋은 사람이 우두머리가 되면 나쁘지는 않으나, 우리가 정작 해야 할 일이란 우두머리보다 바로 우리들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도록 거듭나는 일입니다.


.. 영국의 연간 온실가스 배출량을 흡수하려면 해마다 새로운 플랜테이션이 1만 제곱킬로미터나 필요하다 … 북반구가 이산화탄소 배출을 ‘중립화’하려고 남반구에 대규모 단일 조림 플랜테이션을 조성하는 것을 두고 ‘탄소 식민주의’라고 꼬집었다. 이것은 마치 북반구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물질적 풍요를 유지하려고 남반구를 착취하는 것하고 같다 … 기후변화에서 가장 정의롭지 못한 일은 기후변화 책임이 작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사람들이 가장 큰 고통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 불평등한 세계 경제 구조 안에서 북반구 기업들은 남반구 프로젝트를 수행해 수출 보조금 같은 더 큰 재정적 인센티브를 얻을 수 있다. 또 값싼 토지와 노동력, 원자재도 이용할 수 있다 … 결국 탄소 상쇄 프로젝트는 덜 ‘개발된’ 남반구를 ‘개선’시킨다고 선전하는 동시에 ‘착취’하는 것으로 보인다 ..  (53, 58, 64∼65, 66쪽)


 《공기를 팝니다》라는 책을 읽습니다. 자그마한 이 책에는 “브래드 피트가 심은 나무는 기후변화를 막을 수 있을까” 하고 적혀 있습니다. 한마디로 갈무리하자면, 브래드 피트가 심은 나무는 미친날씨를 막을 수 없다는 소리입니다. 이명박 씨가 대통령이 되었기에 나라가 더 망가지는 듯 보이지만, 이명박 씨 아닌 다른 분이 대통령이 되었어도 ‘4대강이라는 이름이 아닐 뿐 수많은 토목공사 재개발 계획이 공약으로 가득 넘치고 있는 탓’에 이 나라는 언제나 망가지는 길을 걷습니다. 우리 스스로 탐욕을 부리고 있으니까요. 우리 스스로 욕심을 줄이지 않으니까요. 우리 스스로 더 많은 연봉을 꿈꾸고, 나 홀로 정규직이 되기를 바라고 있으니까요.

 브래드 피트한테 ‘나무심기 쇼’나 ‘환경사랑 퍼포먼스’ 같은 잔재주를 부리라고 등을 떠밀 노릇이 아니라, 브래드 피트한테 당신이 살고 있는 동네에서 당신 스스로 조용하면서 아름다이 할 만한 참된 ‘나무심기(또는 텃밭 일구기)’를 하거나 ‘자가용 덜 타기나 안 타기’를 하는 데부터 올바르게 살도록 손을 맞잡을 노릇입니다.

 우리 삶은 ‘쇼’도 아니고 ‘퍼포먼스’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삶은 하루하루 더없이 아름다운 나날입니다. 언제나 고마움과 기쁨을 듬뿍 느끼면서 내 둘레 터전을 곱게 가다듬을 일입니다. 온실가스와 지구온난화를 걱정하며 ‘탄소 상쇄’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를 골머리 앓지 말고, 내 삶에서 ‘쓸데없는 탄소 만들기’를 안 하자면 내 삶을 어떻게 바꾸고 내 이웃과 동무 삶을 어떻게 껴안아야 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 탄소 상쇄처럼 가짜 해결책에 스타가 동원되면서, 효과적으로 기후변화에 대응하려면 사회 변화가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이라고 인식하는 의식의 전환이 지연될 수밖에 없다. 탄소 상쇄에 스타 마케팅을 활용하는 것은 기후변화에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축소해 버리는 것이다 … 탄소 상쇄 프로그램이 스타 마케팅을 활용하면서 발생하는 문제 중 하나는 정부와 기업이 져야 할 책임을 아주 쉽게 희석시키면서 시종일관 개인의 책임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 기업이나 개인이 스스로 에너지 효율을 높이고 탄소 배출을 줄이는 노력을 기울였다면, 의심스러운 ‘숫자 놀음’과 ‘상쇄’를 통한 그린워시가 아니라 에너지를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제공하는 활동에 직접 지원하는 것이 훨씬 낫다 ..  (104, 107, 125쪽)


 열 해쯤 지난 일인데, 지난날 ㅁ방송국에서 ‘책을 읽자’는 교양홍보 방송을 하면서 ‘기적의 도서관’을 만들어 주곤 했습니다. 참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적 같은 도서관’은 방송국이 시청율을 높이고 우리 주머니에서 돈을 거두어들여서 세울 시설이 아닙니다. 지자체마다 엉뚱하게 ‘보도블록 갈아엎기’를 하지 않아도 이 돈만으로 넉넉히 도서관을 세울 수 있습니다. 보도블록 갈아엎을 돈이면 해마다 온 나라에 도서관 수천 곳을 세울 수 있어요. 자전거길은 마땅히 내야 하지만 인천시처럼 잘못된 계획을 얄궂게 밀어붙이며 수백 억을 길바닥 갈아엎기에 쏟아부으면 안 됩니다. 수백 억이란 돈(500억이 조금 넘는 줄 압니다)은 도서관뿐 아니라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을 어느 만큼 이룰 수 있는 몹시 큰돈입니다. 게다가 이런 끔찍한 토목공사를 하면서 새롭게 생겨난 ‘환경 무너뜨릴 탄소’는 얼마나 많았을까요. 환경사랑을 외치며 밀어붙인 ‘자전거길 토목공사’는 외려 환경을 무너뜨립니다. 4대강 사업이 큰 말썽거리라면, 겉으로는 환경사랑이요 일자리 만들기라고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어느 한 구석 환경사랑이 아닐 뿐더러 올바르지 못한 일자리 만들기인 데다가 일자리란 고작 ‘삽 들고 땅 파헤치는’ 일뿐이기 때문입니다. 땅을 살리지 못하고 사람을 살리지 못하며 사랑을 살리지 못하면서 어마어마한 돈을 들이붓기 때문에 4대강 사업이 아주 몹쓸 짓거리입니다.

 《공기를 팝니다》라는 작은 책은 바로 이 대목을 짚는 살뜰한 읽을거리입니다. ‘탄소 배출권’이라는 새로운 장사거리만 만드는 자본주의 얼거리에서는 우리 삶과 삶터와 사람이 하나도 아름다워질 수 없음을 까밝히는 읽을거리입니다.

 다만, 아쉬우면서 어쩔 수 없는 노릇일 텐데, 《공기를 팝니다》라는 책은 ‘탄소 배출권’ 장사를 하는 미국과 유럽 기업들 장난질을 찬찬히 파헤치며 보여주기는 하지만, 이러한 사회 지식을 얻은 우리들은 우리 삶을 어떻게 돌보거나 가꾸면서 착하고 참되며 고운 사람으로 거듭나야 하는가를 일깨우지 못합니다. 거짓스러운 ‘환경사랑 장사꾼’ 검은 속셈을 보여주는 데에서 그치기 때문에, 이 읽을거리 하나에 매여서는 안 되고, 이 읽을거리를 덮고 나서 내 터전을 헤아리고 내 동네를 살피며 내 나라를 돌아보도록 눈길을 틔워야 합니다. 나 스스로 ‘1등주의 경쟁’에 파묻히지 않도록 내 삶을 다스리면서, 다가오는 선거에서라도 한 표 권리를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표 권리를 쓴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여느 때 여느 자리에서 올바른 민주주의 길을 걸어가도록 내 삶부터 뜯어고쳐야 합니다.

 깨끗한 삶터는 돈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올바른 가르침은 돈으로 베풀 수 없습니다. 좋은 사랑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돈으로 키울 수 없습니다. 착한 책은 돈으로 엮을 수 없습니다. 몸에 알맞을 밥 한 그릇은 돈으로 장만할 수 없습니다. 풀과 꽃과 나무는 돈으로 심거나 가꿀 수 없습니다. 맑은 물과 바람은 돈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4343.5.28.쇠.ㅎㄲㅅㄱ)


 ┌ 《공기를 팝니다》(이매진,2010)
 ├ 글 : 케빈 스미스
 ├ 옮긴이 : 이유진, 최수산
 └ 책값 : 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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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국립공원에서 배운다 (양장) - 왜 미국의 국립공원에는 케이블카가 없을까?
이지훈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골프장이 있는 까닭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33] 이지훈, 《미국의 국립공원에서 배운다》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제주 삼다수’ 먹는샘물 회사는 한 해에 31만 톤쯤 땅속물을 길어서 쓴다고 합니다. 제주섬에 있는 골프장들은 한 해에 1812만 톤쯤 땅속물을 퍼내어 쓴다고 하고요. 제주 삼다수 먹는샘물 회사에서 쓰는 물보다 제주섬 골프장 한 곳이 쓰는 땅속물이 훨씬 많다는군요. 그렇지만 이런 물씀씀이를 제대로 살필 줄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만큼 매우 드뭅니다.

 어제 낮에 헌책방마실을 하려고 동인천역에서 빠른전철을 타고 용산역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우리 식구 옆에 나란히 앉은 젊은 두 사람이 ‘지구온난화’와 ‘물 부족 국가’ 이야기를 조곤조곤 나누더군요. 칭얼대는 아이를 보느라 바쁘면서도 용케 옆자리 젊은이들 목소리가 귀에 하나하나 들렸습니다. 젊은이들은 물이 그렇게 모자라다는데 제주 삼다수는 그렇게 물을 퍼올리면 어떡하느냐고 걱정을 합니다. 이런 이야기 다음으로 골프장에 가는 이야기를 합니다. 젊은 당신들이 가는 골프장에서 물을 어느 만큼 쓰는지, 또 농약이나 풀약을 얼마나 많이 쓰는지를 하나도 모를까요. 아마 하나도 모르니 이런 이야기를 조곤조곤 주고받지 않느냐 싶습니다.

 물 이야기를 좀더 살피고 싶다면 《지구를 살리는 빗물의 비밀》(그물코,2009)이라는 훌륭한 책이 하나 있고, 《주식회사 물》(달팽이,2007) 같은 속깊은 책이 하나 있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에 살짝살짝 나오는 겉핥기 이야기로는 우리를 둘러싼 물 이야기를 찬찬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지구가 차츰 뜨거워지는 까닭이 어디에 있고, 우리 나라에 물이 모자라는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를 옳게 살피고 바르게 읽으며 슬기롭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 요세미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는 국립공원을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려놓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애써 설치해 놓은 공원의 자동차 도로를 뜯어내고 숲속에 그림처럼 지어 놓은 숙박시설을 공원 밖으로 이전했다 … 국립공원의 존재 의미가 ‘국민이용 편의’에서 ‘자연보전 중심’으로 분명하게 옮겨간 것이다 … 국립공원청의 책무가 “손상되지 않은 자연/문화자원의 ‘보존’”이기에 그들은 이를 훼손하는 어떠한 인공시설물도 용납하지 않는다. 이 중 보존해야 할 대상에는 생태계도 있지만 ‘경관’도 있다. 그렇기에 국립공원에 케이블카를 설치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다 ..  (14, 19쪽)


 우리 집 아이는 고기를 안 먹습니다. 엄마나 아빠가 아주 잘게 씹어서 주면 때때로 받아먹기는 하지만, 아이는 김치를 가장 좋아합니다. 애 엄마와 애 아빠가 따로 고기를 즐겨먹지 않을 뿐더러 고기를 마련하여 밥을 차리는 일이 없기도 하지만, 어쩌다 바깥에서 고기를 먹어야 하는 자리에서조차 아이는 고기는 아예 쳐다보지 않습니다.

 둘레 어른들은 아이가 튼튼히 자라려면 고기도 먹어야 할 뿐 아니라 많이 먹어야 한다고들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고기다운 고기가 있는지를 살피는 어른은 없습니다. 뭍고기들이 얼마나 많은 항생제를 먹으면서 좁아터지고 지저분한 시멘트 우리에서 끔찍하게 길러지는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항생제 중독》(시금치,2005)이나 《우리 안에 돼지》(숲속여우비,2010) 같은 책들을 찾아서 읽으면 좋으련만, 이런 책을 읽은 분들이라 할지라도 우리 입맛을 달짝지근하게 꼬드기는 먹을거리가 얼마나 몹쓸 먹을거리인지를 느끼지 않습니다. 요즈음은 ‘엠에스지’를 안 넣는다고 다들 크게 써붙이고 있으나, 이런 딱지를 써붙이기 앞서는 모두들 엠에스지를 써 왔으며 갖가지 첨가물과 화학색소를 잔뜩 집어넣고 있습니다.

 자연 그대로인 먹을거리란 가게에 없고, 자연 그대로를 받아먹을 터전이란 도시에 없습니다. 이리하여 자연스러울 수 없는 도시에서 살아가며 이것저것 꼬치꼬치 어떻게 따지느냐면서 항생제이든 농약이든 사료이든 첨가물이든 화학색소이든 무어든 혀끝에 따라 낼름낼름 사먹거나 사먹이는 우리들 살림살이입니다. 옳게 마련하여 내다 파는 생협 물건이 비싸다고 하지만 이제는 여느 공산품 물건하고 거의 같은 값일 뿐더러 우리 스스로 옳게 마련하여 내다 파는 생협 물건을 사랑하고 아낄 때에 비로소 여느 공산품 물건 또한 허투루 아무렇게나 만들지 않음을 살피지 않는 우리들 생각밭이요 매무새입니다.


.. (우리 나라는) 1986년 12월 ‘자연공원법’이 개정되면서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설립 근거가 마련됐으나 관리공단은 ‘건설부’ 산하에 마련됐다. 정말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일이다. 국립공원을 관리하는 주무부서가 ‘건설부’라니. 1991년에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주무부서가 ‘건설부’에서 ‘내무부’로 바뀌었다가 1998년 들어서야 비로소 ‘환경부’로 이관됐다 ..  (28쪽)


 ‘왜 미국의 국립공원에는 케이블카가 없을까?’라는 작은이름을 달고 나온 책 《미국의 국립공원에서 배운다》를 읽습니다. 글쓴이 이지훈 님은 미국에 있는 대학교에 방문연구원으로 한 해 다녀온 나날을 밑거름 삼아 미국땅 국립공원을 요모조모 살펴보았고, 그동안 한국땅 국립공원을 돌아본 나날을 견주면서 우리네 국립공원이 나아갈 올바른 길을 밝히고자 애씁니다.

 책에 붙인 큰이름과 작은이름을 읽는다면 이 책 고갱이는 한 줄로 또렷하게 나타납니다. 첫째, 한국 국립공원은 미국 국립공원을 보며 배워야 합니다. 둘째, 한국이 우러러 마지않는 미국은 국립공원에 케이블카가 하나도 없으나 우리 나라에는 많이 있고 많이 새로 놓으려고 아둥바둥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미국과 한국은 이토록 다를까요. 미국을 섬기고 받든다고 하는 한국사람들은 왜 미국이 훌륭히 잘하는 모습만큼은 터럭만큼이나 배울 생각을 안 할까요. 왜 한국사람들은 한국에 도움이 되는 미국사람 정책은 돌아보지 않으면서, 한국에 도움이 안 되는 미국사람 정책만을 두 손 받들어 모시려고 할까요.

 정치하는 사람과 공무원이라는 사람들 탓인지요? 배운 사람들 탓인지요? 기자들과 광고지 같은 몇몇 신문들 탓인지요? 썩어문드러진 기득권과 수구 무리들 탓인지요?

 케이블카를 놓을지라도 아무도 안 탄다면, 한국땅 공무원이나 개발업자나 국립공원관리공단이나 건설부나 ‘있던 케이블카도 없앱’니다. 그런데, 한국땅에서 생각있는 사람이나 생각없는 사람이나 케이블카가 ‘짠!’ 하고 놓이면 ‘입으로는 나무라지만 몸으로는 케이블카를 탑’니다. 여느 사람이든 지식인이든 운동가이든 활동가이든, 입과 몸이 따로 놉니다.

 정치를 배우든 경제를 배우든 문화나 예술을 배우든 미국으로 비행기 타고 날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가운데 국립공원을 배우고자 미국으로 날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미국에서 애써 배운 좋은 이야기들을 우리 땅 우리 이웃하고 알뜰살뜰 나누고자 힘쓰는 분은 얼마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무라야 할 미국이라면 옳게 나무라고 배워야 할 미국이라면 옳게 배울 일입니다.


.. 현재 이 골프장은 공인된 ‘오듀본 협력 조수 보호구역 프로그램’에 가입되어 있으며, 미국의 몇 안 되는(1% 미만의) ‘유기농 골프 코스’ 중 한 곳이다. 여기서는 재활용 물만을 사용하며 어떤 종류의 비료와 농약, 제초제도 사용하지 않는다. 잡초는 순전히 제초기와 맨손만을 사용하여 제거한다. 업자가 18홀로 확대시키려 했으나 공원 당국은 허가해 주지 않았다. 이 정도면 어떠한 생태적 위험도 없는 골프장인 셈이다. 이러한 역사를 모른 채 국립공원에 골프장이 있는 모습만 보고 이것이 보존과 이용의 조화라는 실용주의적 보존정책에서 비롯됐다고 해석한다면 요세미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로서는 여간 황당한 일이 아닐 것이다 ..  (48쪽)


 《미국의 국립공원에서 배운다》를 쓴 이지훈 님은 2008년 3월에 교육방송에서 보여준 ‘세계의 자연 : 미국의 국립공원’이라는 ‘특집 다큐프라임’을 보았다고 합니다. 국립공원 공부를 할 뿐 아니라 미국에 찾아가서 미국 국립공원을 배우고 있던 글쓴이로서는 아주 반기면서 기쁜 마음으로 이 ‘특집 다큐프라임’을 보았다는데, 참으로 대단한 품과 돈과 사람을 들인 놀라운 작품인 이 방송이 외려 사람들한테 엉뚱한 생각을 불러일으킬까 걱정스럽다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교육방송 풀그림은 ‘이용과 보존’이라는 두 가지를 들먹이면서 그릇된 정보와 어설픈 취재로 뚱딴지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미국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있는 골프장은 요세미티가 국립공원이 되기 앞서부터 있던 골프장이요, 더욱이 우리 나라 골프장들처럼 갖가지 농약과 풀약을 잔뜩 치는 골프장이 아닌 ‘유기농 골프장’임을 헤아리지 않았거든요.

 우리 지식사회를 보여주는 모습이라 할 텐데, 올바르고 알맞게 좋은 길을 함께하자고 나서는 자리에서조차 좀더 속깊이 파고들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다큐멘터리이든 다큐프라임이든 그럴싸한 그림으로 그럴싸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에 눈길을 둘 노릇이 아니라, 올바른 그림으로 올바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에 눈길을 둘 노릇입니다. 시청자가 10만이 되어야 보람이 있는 방송이 아닙니다. 시청자가 9만이어도 되고 5만이나 1만이어도 됩니다. 아니 1천이나 1백이어도 괜찮습니다. 시청자가 100만일지라도 100만 가운데 내 삶을 바꾸며 거듭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부질없습니다. 시청자가 1천 사람일지라도 이 가운데 열 사람이나 백 사람이 스스로 내 삶을 바꾸며 거듭나려 했다면 더없이 보람있습니다.

 많이 팔리거나 잘 팔리는 책이 뜻있는 책이 아니라 제대로 읽히거나 잘 읽히는 책이 뜻있습니다. 이름난 사람이 좋은 삶이 아니라 아름다운 사람이 좋은 삶입니다. 크고 많은 돈이 즐거운 삶이 아니라 살갑고 넉넉하며 따뜻하여 사랑스러울 때에 즐거운 삶입니다.

 국립공원이란 ‘여기만 지키자’는 다짐이 아닙니다. 국립공원이란 ‘여기부터 건사하자’는 다짐입니다. 국립공원부터 올바로 건사하여 우리 둘레 모든 삶터를 슬기롭고 아름다이 건사하자는 첫머리 다짐입니다.


.. 특정 지역이나 공간을 관리하는 공무원들은 그곳이 마치 ‘자신의 소유지’라는 생각을 하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 주인 의식을 갖고 관리에 만전을 기하겠다는 책임의식의 발로에서 비롯됐으리라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것도 ‘지나칠 경우’ 문제가 된다. 국립공원만 하더라도 국민들의 공적 자산인데, 그곳을 관리하는 기관의 직원들이 스스로가 마치 회사 주인이자 주주인 양 행세하는 경우도 나타난다. 이러다 보니 국립공원의 ‘주인’은 국립공원관리공단이나 사무소(직원)가 되고, 탐방객은 ‘객’으로 취급되어 버린다. 이 ‘주인’은 객이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지, 소중한 자연환경을 훼손하지는 않는지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는 데 주력한다 ..  (149∼150쪽)


 《미국의 국립공원에서 배운다》를 한 번 읽고 나서 차근차근 한 번 더 되새겨 봅니다. 처음 읽을 때에 밑줄을 그은 대목을 살피니 몇 군데 없습니다. 밑줄을 그은 대목을 찬찬히 거듭 되읽으니 책 한 권을 통틀어 똑같은 이야기를 두어 차례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글 첫머리부터 맺음말이 다 나와 있기 때문에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구나 싶습니다. 좀더 많은 자료와 정보를 보여주고자 애쓴 땀이 엿보이지만, 국립공원 이야기는 더 많은 자료와 정보가 없이도 얼마든지 알차고 훌륭히 선보일 수 있을 텐데, 글쓴이는 이 대목을 놓치고 있습니다.

 글쓴이 이지훈 님이 미국땅 모든 국립공원을 좀더 오래 두루 돌아다녔다고 해서 책이 더 알찰 수 있지는 않습니다. 딱 한 군데 국립공원만 찾아보았다 할지라도 이 한 곳에서 당신 가슴을 싸하게 적신 모습을 적바림할 수 있으면, 당신 마음밭을 넉넉히 북돋운 모습을 조곤조곤 들려줄 수 있으면, 국립공원이 있기에 당신 넋이 새롭게 거듭날 수 있었음을 지식조각이 아닌 삶으로 보여줄 수 있으면 됩니다.

 꼭 국립공원이라는 이름이 붙을 때에만 지켜야 할 아름다운 터전이 아닙니다. 반드시 국립공원만 알뜰히 지켜야 할 자연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터전 어디나 아름다이 건사해야 합니다. 우리 삶터 어디나 알차게 가꾸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아름다운 목숨빛깔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 누구나, 푸나무 모두, 자연 터전 어디나, 제 결을 고이 보듬을 때에 살기 좋은 이 나라로 다시 태어납니다. (4343.5.6.나무.ㅎㄲㅅㄱ)


 ┌ 《미국의 국립공원에서 배운다》(한울,2010)
 ├ 글 : 이지훈
 └ 책값 : 1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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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0-05-06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덕분에 책 2권이 보관함에 추가되네요.
 
환경 가계부 - 지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습관
혼마 미야코 지음, 환경운동연합 환경교육센터 옮김 / 시금치 / 2004년 12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148 ― ‘가정주부’란 가장 아름다운 ‘직업’
 : 혼마 미야코, 《환경 가계부》


- 책이름 : 환경 가계부
- 글 : 혼마 미야코
- 옮긴이 : 환경운동연합 환경교육센터
- 펴낸곳 : 시금치 (2004.12.10.)
- 책값 : 9000원



 (1) 집일 하는 사람 책읽기


 새벽 세 시 삼십사 분부터 깨어난 아이는 아침 열한 시 삼십오 분까지 칭얼거리다가 잠이 듭니다. 요 며칠 바깥마실을 하는 동안 바깥사람들하고 신나게 어울리며 졸음을 잊은 채 뛰어놀던 아이였는데, 몸이 고단하면서도 새벽 일찍 어김없이 일어납니다. 새벽에 일어난다고 걱정이라거나 힘들다기보다, 아이는 도무지 낮잠을 안 자려 하면서 투정과 짜증이 더해 가기 때문에, 아이한테나 어버이한테나 부디 아침에 늦잠을 자면 얼마나 기쁘랴 생각합니다. 잠은 자면서 놀고, 밥도 먹으면서 놀면 오죽 좋을까요.

 칭얼거리는 아이와 함께 방을 쓸고 닦고 치운 다음에 빨래를 하면서 씻깁니다. 빨래를 하는 동안 밥을 안쳤고, 다 된 밥을 먼저 아이한테 먹이면서 다른 찬거리를 마련합니다. 새벽바람으로 청소하고 빨래하고 씻기고 밥하고 밥 먹이고 하기까지 꼭 네 시간이 걸립니다. 아이와 살아온 스물한 달 동안 날마다 으레 하는 일이라 새삼스럽지 않지만, 하루라도 느긋하게 숨을 돌린다거나 마음을 놓을 수 없으니 집일을 빼고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아이를 어린이집이나 보육원에 맡기는 마음을 알 만합니다. 그러나 이토록 닦달하고 들볶던 아이가 잠든 모습을 바라볼 때에는 이 얄미운 녀석이 달디달며 곱게 그릉그릉거리고 있어, 내가 너한테 무엇을 더 바라며 똑같이 짜증을 부리고 큰소리를 치며 힘들다고 한숨을 푹푹 내쉬느냐 싶습니다.

 엊그제 동네 헌책방에 마실을 가서 소설쟁이 오정희 님 산문모음을 하나 장만했습니다. 1994년에 나온 《허리굽혀 절하는 뜻은》(창)이라는 책인데, 오정희 님은 머리말에 “이 책은 가정이라는 울 안에서 밥짓고 빨래하고 아이들 때문에 애태우고 사는 재미, 사는 걱정으로 나이들어 가는 평범한 한 여자로서의 입장에서 쓴 작은 글모음이다. 가정주부로, 아이들의 어미로 삶의 결과 세상살이를 바라보기, 내 속에서 끓어넘치는 열정과 넋두리가 들어 있어 내가 쓴 어느 소설보다도 자신의 모습이 솔직하게 드러나 있다. 자잘한 근심걱정으로 한숨 쉬고 답답해 하고, 기뻐하기도 하는 …… 그러나 그러한 일상사가 또한 구원이 됨을 모르지 않기에 이런 글모음으로 책을 펴낼 용기를 내어 본다”고 밝힙니다. 여느 글쟁이 여느 글모음은 넘쳐도, 여느 살림꾼 여느 글모음은 드문 우리 나라입니다. 이 땅에서 한 어버이한테서 한 아이로 자라지 않은 사람이 없건만 이 땅 글쟁이 가운데 ‘한 어버이한테서 한 아이로 자라 온’ 이야기를 글로 만나기란 몹시 힘들고, ‘한 어버이로서 한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이야기를 글로 만나기란 더욱 힘듭니다. 그나마 오정희 님은 소설을 쓰는 분이었으니 글을 쓸 겨를을 내거나 글을 써 달라고 바라는 곳이 있어 당신 살림살이 이야기를 글로 여밉니다. 그렇지만 숱한 어머니들 이야기는 글로 여미어지지 않습니다. 숱한 어머니와 세월을 함께 보내는 숱한 아버지들 이야기 또한 글로 묶이는 일은 좀처럼 없습니다.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혼인을 해서 복닥복닥 살아가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은 꽤 있습니다. 아이와 어우러지는 고단한 아름다움을 밝히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제법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여느 살림꾼 삶자락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은 몇 없습니다. 글로 쓸 만한 이야기가 못 된다 여길 수 있겠으나, 글로 쓸 만한 틈을 못 낸다 할 테고, 애써 글로 썼다 하더라도 실어 주는 자리가 없습니다. 맛깔스럽다는 온갖 요리를 다루는 책은 있으나, 날마다 먹는 밥이나 국이나 찌개나 김치나 반찬을 다루는 책이 한 가지라도 있습니까. 궁중요리라느니 무슨무슨 요리라느니 하는 책은 넘치지만, 여느 사람이 여느 자리에서 살아가며 늘 먹는 가장 밑바탕이 되는 밥하기와 얽힌 ‘살림책’은 없습니다. 예쁘장하게 지어 입는 옷이나 사서 입는 옷 이야기를 다루는 책과 잡지는 넘칩니다. 그러나 바쁘고 고단한 살림에 수수하게 지어 입히거나 마련해 입히는 옷 이야기를 다루는 책과 잡지는 없어요.

 아마 돈이 안 되는 살림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제아무리 남녀평등이니 여남평등이니 소리높여 외쳐도 정작 ‘집안일(가사노동)’을 돈셈으로 치는 사람은 없잖아요. 나라에서 돈을 줍니까, 회사에서 돈을 줍니까. 동사무소에서 돈을 줍니까, 누가 돈을 줍니까. 그런데 돈셈으로 치지 않는 집안일이야말로 사람을 살리는 일이요, 예부터 집일을 ‘살림’이라고 일컬었습니다. 아이를 키우며 살림하는 사람으로서 날마다 느끼지만, 저는 제가 하는 일을 ‘가사노동’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냥 ‘살림’입니다. 많이 어수룩하고 모자라고 어줍잖은 살림이기는 하나, 저는 살림살이를 하는 살림꾼입니다. ‘가사노동’을 하는 ‘가정주부’는 아니에요. 그래서 제 살림살이를 돈셈으로 치고 싶지 않습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으니 다달이 50만 원쯤 아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이한테 엄마젖을 먹였고 천기저귀를 제가 손빨래로 갈아 채웠으니 이래저래 돈을 얼마쯤 아겼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자가용을 안 몰고 아기수레를 장만하지 않았고 옷은 모두 얻어서 입으니 또 돈을 어느 만큼 줄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픈 옆지기를 잘 보살피지 못해 언제나 미안한데, 넘치는 집일을 짐지지 못해 누구한테 맡긴다면 돈을 얼마 내야 하니까, 이만큼 또 돈을 안 쓰고 있다고 느끼지 않아요.

 치고 볶아도 내 사랑이고 내 살림이니까요. 부딪히고 쓰러져도 내 삶이고 내 살붙이이니까요.

 다만, 하루하루 눈알 돌아가도록 어지럽고 손이 떨리도록 힘겨우며 코피가 터지도록 일이 넘치는 삶이기 때문에 여느 책 하나 손에 쥐지 못합니다. 웬만큼 곰삭이거나 되씹는 가운데 풀어낸 이야기책이 아니라면 지루해서 졸음이 쏟아집니다. 아무래도 아이 키우고 살림 하느라 머리가 굳어 돌이 된 까닭인지 모르겠는데, 지식만 넘치는 책은 저한테는 참 재미없습니다. 실용책이든 처세책이든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사타구니 부여잡는 문학이나 머리 굴리는 예술이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고단하고 힘겨우며 바쁜 살림꾼이 졸리고 떨리는 손으로 애써 붙잡아 펼칠 만한 눈이 번쩍 뜨이는 책이 아닐 때에는 하나같이 책상에서 멀찌감치 내팽개치곤 합니다. 사람이 옹근 한 사람으로 살아가며 참사랑과 착한 믿음과 고운 손길을 추스르도록 돕는 책이 아닐 때에는 눈길이 가지 않습니다.

 지난 스물한 달에 걸쳐 날마다 되씹고 곱씹습니다만, 아이를 낳아 키우던 날부터 ‘이제까지 해 오던 책읽기는 할 수 없다’고 느꼈는데, ‘이제까지 해 오던 책읽기를 그대로 하지 못하는 아쉬움’으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제까지 해 오던 책읽기는 그예 배부른 책읽기였다고 느낍니다. 속속들이 살림꾼이 되지 못한 채 저부터 지식조각을 주워섬기는 책읽기를 했다고 느낍니다. 오늘까지는 스물한 달째이고, 앞으로는 더 기나긴 달수와 햇수에 걸쳐 살림꾼다운 책읽기를 새롭게 익힐밖에 없다고 느낍니다.


 (2) 여느 가계부로는 살찌울 수 없는 살림


 여느 가계부로는 살찌울 수 없는 살림을 이야기하는 책 《환경가계부》를 읽습니다. 2004년에 처음 나온 이 책은 거의 사랑받거나 눈길받지 못한 채 사라진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온누리에 사랑받지 못하는 책이 한두 가지이겠습니까만, 이 나라에 손꼽히는 환경운동 시민단체 회원 숫자를 생각한다면 씁쓸한 일입니다. 이 땅에서 눈길받지 못한 채 스러지는 책이 한둘이겠습니까만, 생태와 환경과 웰빙과 그린 따위를 외치는 목소리를 헤아린다면 다른 책이 아닌 《환경가계부》가 이토록 막대접을 받고 조용히 묻혀 버린 일은 더할 나위 없이 슬픕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은 저부터 2004년에 이 책이 나온 줄 몰랐습니다. 2004년부터 여섯 해가 지난 2010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 책이 예전에 나왔음을 알았고, 책을 다 읽은 다음 둘레에 소개하려고 알아보니 판이 끊어져 더는 장만할 수 없는 책이 되어 있더군요.

 책을 덮고 생각합니다. 남들보다 환경책을 좀더 샅샅이 살피고 꼼꼼히 읽는다고 밝히는 사람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책이었다니 부끄럽습니다. 그나저나, 우리 나라 도서관에 이 책이 몇 권쯤 남아 있을는지 궁금하고, 사람들이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책은 헌책방에 거의 나오지 않는데 이 책을 헌책방에서 찾아볼 길이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사진책이 참 안 팔리지만 사진책보다 더 안 팔리는 책이 환경책입니다. 앞서 여느 살림꾼 이야기는 책으로 나오는 일이 거의 없다고 했는데, 환경책이나 여느 살림꾼 이야기책이나 어슷비슷합니다. 두 가지 모두 한 번 책으로 묶이기 힘들고, 애써 책으로 묶여도 사랑받기 어렵습니다. 어려운 책이 아니고 딱딱한 책이 아닌데, 참 안 읽힙니다. 바른 사람으로 살아가자면 생각하고 받아들이며 새롭게 돌아볼 이야기입니다만, 참 뒤로 처지기만 합니다.

 아무래도 ‘자가용을 버리자’라는 외침은 꿈도 꾸지 못하는 우리들인 탓이기 때문이겠지요. ‘자가용을 버리자’는 못하겠다면 ‘자가용 홀짝수 타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이마저도 못할 테지요. 아니, 한 주에 한 번 자가용을 쉰다거나 열흘에 한 번 자가용을 쉬기조차 못하고 있는 우리들 아닌가요. 대중교통을 타지 말고 자전거나 두 다리를 쓰자고 한다면, 이를 받아들여 내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촐퇴근하는 거리가 너무 길다고 하지만, 스스로 일자리를 집과 가까운 데에서 얻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합니다. 영어로는 ‘로컬푸드’라고 하지만, 내가 사는 마을에서 얻는 먹을거리를 나 스스로 찾아 먹어야 내 몸과 내 마을이 튼튼합니다. 내가 내 마을에서 내가 즐거이 몸담을 일자리를 얻어서 일해야 나와 내 마을과 내 일터가 튼튼합니다.

 서울이 고향이라면 서울을 사랑하여 서울에서 일자리를 찾고, 안성이 고향이면 안성을 사랑하며 안성에서 일자리를 마련할 노릇입니다. 대구사람은 대구에서 슬기로운 길을 찾고, 나주사람은 나주에서 아름다운 길을 찾아야겠지요.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로 보내라는 옛말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사람은 제 뿌리내린 고향에서 커야 할 노릇이요, 말이건 다른 짐승이건 제 삶터에서 튼튼하게 살아야 할 노릇입니다. 강릉은 강릉다움을 건사하고 인천은 인천다움을 지켜야 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야 나와 내 집안과 내 마을과 내 겨레와 내 나라와 내 누리가 튼튼할 길이란 없습니다.

 일본사람 혼마 미야코 님이 쓴 《환경가계부》라고 하는 책은 바로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람들과 중앙정부와 기득권과 정치꾼과 지식인과 운동가들 모두 가장 얕보거나 낮잡는 여느 ‘살림꾼’이 여느 마을에서 여느 모습으로 여느 삶을 꾸리는 이야기야말로 가장 작은 집안부터 가장 큰 온누리까지 살릴 수 있음을 조용히 밝히고 보여줍니다. 돈을 더 버는 삶에도 남다른 뜻이 있겠으나 아름다운 뜻이란 없음을 찬찬히 알려주고 일깨웁니다. 착하고 참되며 고운 삶이야말로 나와 내 동무와 살붙이 누구한테나 도움이 되며 사랑스러운 길임을 또렷이 드러내고 가르칩니다.

 한꺼번에 정권을 뒤집자는 책이 아닌, 차근차근 내 집안을 바꾸고 내 집안에 앞서 내 삶을 바꾸자고 하는 《환경가계부》입니다. 내가 내 삶을 슬기롭게 바꾸지 못하는데 썩어빠진 정권을 갈아치울 수 없음을 온몸으로 깨우치는 《환경가계부》입니다. 대학교에 간들 배울 수 없고, 대학원뿐 아니라 로스쿨이건 대기업이건 가르쳐 주지 않는 이야기를 담은 《환경가계부》입니다. 나라밖으로 배우러 나간다 한들 배울 수 없는 깊은 이야기를 실은 《환경가계부》입니다. 바로 이 땅 이 자리에서 이 사람들, 그러니까 나와 내 살붙이와 내 이웃과 내 동무하고 살가이 얼크러지는 눈물과 웃음이 얼마나 빛나고 애틋한가를 적바림해 놓은 《환경가계부》입니다.

 우리 나라가 아름답지 못해서 아름다운 책이 제대로 태어나지 못할 뿐 아니라 제대로 읽히지 못하니 《환경가계부》라는 책 또한 새책방 책시렁에서 사라졌는데, 사라진 책을 되살리기는 어렵고, 이 나라에서 아름다운 삶을 건사하며 아름다운 넋을 가꾸는 이들이 새로운 아름다운 책 하나 선보이며 다 함께 기쁘게 어깨동무할 새로운 환경책 하나 빚어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꿈을 꿉니다.


 (3) 아쉬우나마 곱새겨 읽기


 오늘날 도시 사회에서는 터무니없는 소리라 하지만, 냉장고 없이 얼마든지 잘 먹고 잘 살 수 있습니다. 세탁기 없이 얼마든지 깨끗하고 보송보송한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청소기가 있어야 할 만큼 지나치게 커다란 집에 살고 있지는 않나요? 우리는 자가용을 왜 몰고 있을까요.

 툭 까놓고 이야기하자면, 냉장고며 세탁기며 전기밥솥이며 머리말리개며 텔레비전이며 전기를 아주 많이 먹습니다. 이런저런 녀석을 집에 들이지 않는다면 ‘원시인’이 되라는 소리냐고 따지는 분이 많은데, 그리 멀지 않은 1980년대까지 이런 전기제품을 집에 갖춘 사람은 그리 안 많았습니다. 1970년대에는 훨씬 적었고 1960년대에는 거의 어느 누구도 이런 전기제품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환경가계부》는 우리들한테 원시인이 되자고 말하는 책이 아닙니다. 우리가 놓친 대목이 무엇인지 느끼자고 하는 책입니다. 우리가 깨닫고 느끼며 되새겨야 할 이야기가 무엇인가 생각하자고 하는 책입니다.

 비록 이 책을 여느 책방에서 만나기란 몹시 힘들지라도, 다문 몇 줄이나마 함께 읽고 곱새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저한테 새롭게 가르치고 일깨우는 대목을 여러 차례 거듭 읽으며 한 글자 두 글자 천천히 옮겨적어 봅니다. (4343.5.5.물.ㅎㄲㅅㄱ)


[22, 47, 136∼137쪽] 아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에너지를 소비했는가, 이것 또한 귀중한 데이터가 됩니다. 일본의 아기들이 아프리카 아기들보다 약 80배나 많은 에너지를 쓴다니 말입니다 … 전기밥솥 안의 남은 밥은 보통 보온 상태로 두는데 의외로 보온은 전기가 많이 듭니다. 6시간 보온할 경우 밥을 새로 한 번 짓는 만큼 전기를 소비합니다 식사 때마다 그때그때 지어먹는 밥이 맛도 좋고 경제적이며 친환경적입니다 … 아이들의 옷을 항상 바자회에서 사서 입힌다는 젊은 여성도 있습니다. 자신 역시 30엔에 산 티셔츠와 100엔에 산 청바지를 입고 발랄하게 유치원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역에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지역에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뿌리를 내린 지역에서 옷이나 일용잡화를 재활용하고 물건과 정보를 교환하는 사이에 언젠가는 전체 쓰레기의 양은 줄어들어 있을 것입니다.

[24, 44, 131, 132쪽] 절전은 처음부터 100퍼센트 완전하고 빈틈없이 실행되지 않습니다. 너무 꼼꼼히 하려다 보면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단 하나라도 좋으니 일 년 365일 계속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에어컨보다 선풍기를 쓰면 전기사용량은 훨씬 더 줄어듭니다. 최근에 선풍기가 다시 잘 팔린다고 하더군요. 또 선풍기보다 부채를 쓰면 당연히 훨씬 더 절전이 됩니다 … 포장을 거절해서 오히려 좋은 소리도 듣고 이익을 가져올 뿐 아니라, 인력과 쓰레기를 줄이는 이점이 있습니다. “포장 필요 없어요.” “봉투 필요 없어요.” “책 안 싸 주셔도 됩니다.” 이런 단 한 마디로 말입니다. 이 말 한 마디를 하기 어려운 사람도 계십니까? … 포장용기를 받아 오지 않으면 쓰레기는 늘어나지 않습니다. 그걸 처리하느라 수고를 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42∼43, 89쪽] 카탈로그를 면밀히 훑어보는 습관을 익히다 보면 눈에 띄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소비자에게 가장 중요한 정보를 왜 이렇게 읽기 어려운 작은 글씨로 적어 놓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 겉모습과 가격만 선전하게 된 현실은 지금까지 소비자가 그것을 기준으로 선택을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일본 전국에서 계획되고 있는 댐이 모두 불필요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정말로 필요한 댐이 있을지 모릅니다.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으므로 일반 주민이 판단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51, 53, 54쪽] 화력발전에서 전기가 되는 열은 40퍼센트 정도에 불과합니다. 60퍼센트의 열은 버려지고 있습니다. 또 원자력발전은 35퍼센트가 전기가 되고 65퍼센트를 버립니다 … 지금 가장 에너지 절약 노력을 하지 않고 전기 사용량은 날로 늘어가는 곳이 바로 ‘가정’입니다 … 많은 양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석유와 석탄을 쓰는 화력발전을 우리는 언제까지 의지해야 할까요. 또 먼 곳에 화력발전소를 세우고 길고 긴 송전선을 통해 생산한 전기를 버리는 것이 이치에 맞는 걸까요. 전기를 쓰는 생활을 당연히 여기는 우리들로서 지금까지 상상하지 않았던 것이 있습니다. 세계에서 전기가 있는 생활을 하는 사람보다 전기 없는 채로 생활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125∼126쪽] 유기 농산물을 재배하려면 쌓아 놓은 풀과 똥을 몇 번씩이나 뒤섞어 퇴비를 만들고 농약을 치지 않는 밭에서 잡초와 씨름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굉장히 힘든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소비자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벌레 먹은 흔적이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벌레가 먹어도 아무런 독이 없다는 증거가 됩니다. 가게에 진열된 채소는 맛이나 질과 관계없이 그저 겉모습만으로 선택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연에서 자란 채소는 크기가 큰 것도 있는가 하면 작은 것도 있고 똑바로 자란 것도 있고 구부러진 것도 있고 가지각색입니다. 크기나 형태로 선택을 하면, 선택되지 않는 것들은 버려지거나 아주 싼 값의 떨이로 팔립니다 … 식탁에 오르는 채소에서 소비자는 여러 가지를 보게 됩니다. 채소를 생산한 사람들의 얼굴들, 그 가족의 얼굴들, ‘그 사람이 먹고 있다’는 생각으로 생산자는 재배를 하고, ‘그 사람이 기른 것’이라는 생각으로 소비자는 채소를 먹습니다.

[139쪽] 인구가 집중되고 대량으로 소비하며 대량의 쓰레기를 발생시키는 대도시야말로 리사이클의 효과가 가장 크지만, 바로 그 대도시가 가장 쓰레기 문제를 해결하는 데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얼굴을 볼 수 있는 인간관계’가 희박하기 때문입니다.

[140쪽] 쇼핑한 물건은 언젠가는 모두 쓰레기가 됩니다.

[141쪽] 자연식품 위주로 식사를 하지 않는 몸은, 영양의 균형이 깨져서 생리적으로 욕구 불만이 되기 쉽습니다. 인스턴트 가공식품에 포함된 화학첨가물은 그러한 욕구불만과 초조함을 더해 줍니다.

[195쪽] 젊은 시절은 한 번 지나가고 마는 것이므로 너무 잔소리하지 말고 따뜻하게 대해 주세요. 아이들이 진학과 취직 때문에 집을 나가는 순간 전기요금이 반으로 줄어든 예도 있습니다. 혼자서 자취생활을 시작한 아들과 딸이 곧바로 에너지 절약, 자원 절약 도사가 되었다고 말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왔을 때 엄마가 만들어 주는 요리의 가치를 깨닫고 ‘맛있다’를 연발합니다. 친구들과는 인스턴트 식품만 사먹고 저녁은 자주 걸러 왔다는 것을 곧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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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미래 - 사슴부족 이누이트들과 함께한 나날들
팔리 모왓 지음, 장석봉 옮김 / 달팽이 / 2009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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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은 다섯 붙였지만, 장석봉 번역이 엉터리라서 내 점수는 9점이다) 

 
 이 책 하나 136 ― 묻힌 삶, 묻힌 사람, 묻힌 터
 : 팔리 모왓, 《잊혀진 미래》


- 책이름 : 잊혀진 미래
- 글쓴이 : 팔리 모왓
- 옮긴이 : 장석봉
- 펴낸곳 : 달팽이 (2009.11.12.)
- 책값 : 15000원


 (1) 아이를 키우는 힘든 삶이란


 아이와 함께 마실을 다니면 아이를 귀엽게 바라보는 어르신들을 때때로 만납니다. 어르신들은 아이한테 아무 거리낌이 없이 사탕이나 과자를 쥐어 줍니다. 생각해 보면 저 또한 아이였을 때에 둘레 어른들한테서 사탕이나 과자를 곧잘 얻어먹었지 싶습니다. 이때마다 어머니는 몹시 안 좋아하셨고, 둘레 어르신들한테 아이한테 사탕이나 과자를 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로서는 집에서 먹지 못하는 사탕이나 과자를 받아먹고 싶었고, 어머니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제가 아이였을 나이에서 서른 해가 훌쩍 지난 오늘날은 지난날과 뒤집어진 일이 나타납니다. 우리 아이가 둘레 어르신한테서 사탕과 과자를 받아먹고, 저는 아버지 된 몸으로 이런 사탕 선물과 과자 선물이 못마땅하고 힘겹습니다. 잘 모르는 분들은 ‘사탕 하나 준다고 뭐 어때서?’이고 ‘사탕 때문에 이가 썩을까 봐 걱정하나?’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바깥에 나와 사람들한테서 자꾸 사탕이나 과자를 받아먹어 버릇하면 무엇보다 ‘밥을 잘 안 먹으려’ 합니다. 다음으로, 바깥에 나오면 으레 누군가 무엇을 먹으라고 준다고 생각합니다. 밥때에 맞추어 한창 밥을 부지런히 먹고 자라야 할 아이가 밥을 안 먹으면 아이가 얼마나 땡깡을 부리는지를 사람들이 옳게 느껴야 하고, 선물받는 고마움을 제대로 익히도록 하면서 무언가를 쥐어 주든 해야 할 줄을 어른들은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그깟 사탕 하나인데 뭐?’ 하고 생각하는 어르신이 있다면 ‘아니거든요. 당신 같은 어르신을 한 사람만 만나지 않거든요. 어느 날은 사탕만 자그마치 열 알이나 받아야 한 적이 있거든요.’ 하고 대꾸를 하지만, 늘 이렇게 대꾸를 하자니 고단하고 지칩니다.

 어제는 아침부터 짐을 꾸려 서울로 마실을 나왔습니다. 아픈 옆지기가 조용히 명상 수련을 다녀오고 속 다스리는 약을 먹을 수 있게끔 아이는 아빠가 데리고 아빠 볼일 보러 가는 자리에 갑니다. 계단만 보면 꼭 저 스스로 하나씩 디뎌야겠다는 아이는 아무리 힘들어도 계단 끝까지 올라가거나 내려가겠다고 합니다. 다 오르거나 내려가면 아휴 하고 한숨을 쉬면서도.

 사탕 한 번 과자 한 번 받아먹은 아이는 밥때가 되어도 밥을 먹으려 하지 않습니다. 속으로 젠장 제기랄 하고 구시렁댑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떠오릅니다. 아이는 제 아빠가 사탕이나 과자가 아닌 밥을 주니까 고개를 도리질하거나 홱 돌리는데, 다른 사람이 밥술을 떠서 냠냠 하고 말하면 새끼 새들처럼 입을 쩍 벌립니다. 아주 말괄돼지인 녀석이 이때만큼은 고분고분 날름날름 잘 받아먹습니다. 함께 밥을 먹는 출판사 분들한테 말씀해서 한 숟갈씩 아이한테 내밀어 달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아이가 먹을까요?’ 하고 궁금해 하던 분들이지만, 막상 숟갈을 아이한테 내미니 도리질 한 번 없이 곧바로 밥을 낼름낼름 먹으니 놀라 합니다.

 다시금 생각을 가다듬습니다. 어쩌면 저 또한 아이였을 때에 어머니가 떠 주는 밥술은 잘 안 먹고, 둘레 다른 어른들이 떠 주는 밥술은 낼름낼름 받아먹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말도 안 되는 심통이지만 심통을 부리고, 둘레 어른들한테는 귀여운 척을 떨지 않았느냐 싶어요. 어머니가 골을 내거나 힘들어 할 만큼 미운 짓을 했달까요. 그러면서 집에 돌아오면 이번에는 젓가락질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나 스스로 밥을 먹겠다고 했을 테고요. 깔작깔작거리면서.

 낮잠을 넘기고 졸음을 참아 가며 놀던 아이는 저녁 여섯 시가 넘어서야 비로소 꾸벅꾸벅 졸다가 잠이 듭니다. 팔이 저릴 무렵 잠든 아이를 자리에 살며시 내려놓으려 하니 스르르 눈을 뜹니다. 좀 누워서 잠을 자 주면 아빠가 서울 마실 나와서 볼일을 마저 보고 얼른 돌아갈 수 있을 텐데. 어쩌는 수 없구나 싶고, 늦게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아빠가 아이한테 미안한 노릇이며, 이래저래 일을 얼추 마무리짓고 저녁 여덟 시 오십 분쯤에 서울 홍대앞에서 전철을 탑니다. 삼십 분쯤 일찍 일어설 수 있었으면 신도림역에서도 한결 느긋했을 터이나 이때를 놓쳐 꽤 북적이고 미어터집니다. 이런 ‘반쯤 지옥철’에서는 어느 누구도 어린이한테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아마 ‘뭐야, 이런 때에 왜 아이를 데리고 타고 법석이야?’ 하고들 여깁니다. 그렇지만 누군들 좋아서 미어터지는 때에 아이와 함께 전철을 타겠습니까. 제가 뭔 부자라고 인천까지 택시를 타거나 자가용을 몰겠습니까. 아이 옷가지와 기저귀 담은 가방은 겨우 짐칸에 올렸지만, 아빠 책과 다른 짐이 든 무거운 가방은 등에서 내리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아이한테 자리 하나 내어주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만, 어르신 아닌 분은 장애인노약자영유아동반자 자리에 앉아서 눈을 감고 있고, 여느 자리에 앉은 젊은 사람들은 손전화로 텔레비전을 보거나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습니다. 저한테 자리를 내어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 사람들 아이나 조카나 아는 사람 아이가 앞에 있다면 이렇게 모른 척하거나 남 일로 여기지 않았겠지요. 생각하기를 잊은 사람들이고, 마음쓰기를 잃은 사람들입니다.

 어른들도 지옥철이나 반쯤 지옥철이 갑갑하고 괴롭습니다. 갓난아이나 어린이라면 훨씬 갑갑하고 괴롭습니다. 더구나 아이는 키가 작으니, 바닥에 서 있으면 캄캄한 우물에 갇혀 옴쭉달싹 못하는 꼴입니다. 내내 안겨야 해서 더 답답한 아이가 바닥에 서고 싶다며 하도 찡얼거려 내려 주니, 바닥에 서 있기가 훨씬 괴롭다며 다시 안아 달라 해서 안습니다. 틀림없이 아이 찡얼거리는 소리를 아이 둘레에서 ‘밀치는’ 사람들이 듣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이 쪽으로 ‘안 밀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른인 저한테 밀치면 그저 그럴 수밖에 없이 받아들여야 하지만, 아이한테 밀치면 어떻게 될까요.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전철만큼은 맨앞과 맨뒤가 출퇴근 시간에 맞추어 ‘여성 전용칸’이란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이제는 이름만 남았다고 느끼는데,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전철에 ‘여성 전용칸’이 생긴 까닭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여성 전용칸’을 마련하는 움직임만큼 ‘어린이 칸’을 마련해야지 싶습니다. 자전거를 실을 칸을 마련한다 하고, 바퀴걸상 타는 자리는 일찌감치 마련했습니다. 그러나 갓난아이이든 어린이이든 아이를 데리고 타는 어버이가 아이 기저귀를 갈거나 아이 오줌을 누이거나 잠든 아이를 눕히거나, 또는 힘든 아이를 안고 어버이 한 사람이 앉아서 쉴 만한 자리를 마련해야지요.

 집으로 돌아와 아이를 씻기고 빨래를 합니다. 고단한 두 사람은 먼저 잠들고 아빠는 좀더 깬 채 책 한 권을 읽고 잠자리에 듭니다. 잠자리에 누워 거듭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서울 마실을 나와 만난 책마을 일꾼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도 말을 했지만, 아이키우기란 참 힘들고 참 힘든 하루하루가 보람입니다. 힘들게 아이를 키우며 늘 새롭게 배우고 늘 고맙게 고개를 숙입니다. 저 스스로 아이를 낳아 키우기 때문에 지옥철이 아이한테 얼마나 안 좋은가를 새삼스레 깨닫는 한편, 허울좋은 장애인노약자영유아동반자 자리라고 하는 긴 이름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몸으로 느낍니다. 이런 이름표를 붙인다 한들, 지옥철에서 시달리는 여느 도시사람들은 장애인한테든 노약자한테든 영유아한테든 아이를 돌보는 어버이한테는 마음을 쓰지 못합니다. 이런 딱지를 붙지지 않고서는 이웃사람을 살피지 못하는 도시사람이란 소리입니다. 이런 딱지를 붙인다 한들 가난하거나 힘든 이웃을 헤아릴 줄 모르는 도시사람이란 뜻입니다. 도시란 삶터는 한 사람이 고운 목숨 선물받은 아름다운 삶임을 헤아리기 어렵다는 셈입니다. 이웃을 이웃으로 바라보거나 느끼기 어려운 도시라면, 이웃에 앞서 나 스스로 내 목숨이 얼마나 고운지를 느끼기 어려운 노릇입니다.

 자연을 밀어내고 시멘트와 쇠붙이만 가득 채운 도시이기에 자연스럽지 못하고 자연이 깃들 틈이 하나도 없습니다. 도시에서 제아무리 자연이 어떠하고 생태가 어떠하며 환경이 어떻고 저떻고 떠든들, 도시에서 사람이 사람다이 살기란 힘듭니다. 아니, 도시사람은 ‘자연스럽게(생태적으로)’ 살 수 없어요. 자연이 없는 곳에서 어찌 자연스레 살겠습니까. 자연이 있는 곳에서조차 숱한 공장과 농약과 비료와 항생제로 얼룩져 있는걸요. 게다가 한국땅에 골프장이 좀 많습니까. 한국땅 국립공원에조차 하늘차와 주차장과 기차길 구멍과 고속도로 고가도로 따위가 오죽 많습니까. 곰곰이 살피면, 이 나라에서는 도시에서고 시골에서고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도 용을 쓰는 꼴이고 몸부림을 치는 판입니다. 좀더 밝은 앞날을 생각하자고, 더욱 따뜻한 터전을 일구자고 애쓰는 흐름이 얕게나마 있습니다.

 다만, 일찍 눈을 뜬 분들 말마따나 입으로는 진보를 외치는 분들마저 당신 아이들을 학원에 넣고 입시지옥에 내몰아 일류대학 졸업장을 거머쥐도록 내몹니다. 권정생 할아버지 책을 읽은 사람치고 이이를 우러르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 막상 권정생 할아버지 말씀을 귀기울여 들으면서 ‘자가용을 버려서 이라크 파병을 막는’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촛불만 든다고 이라크 파병을 막겠습니까. 자가용을 버려야 이라크 파병을 막지요. 우리들은 촛불은 들었어도 자가용을 버리지 못해 이라크 파병을 막지 못했고, 한미자유무역협정이든 국가보안법이든 막지 못합니다. 더욱이 경부운하이든 4대강이든, 진보나 개혁이나 보수나 무어나 외치기 앞서 내 삶터에서 자가용을 버려야 막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자가용을 버리고, 다음으로는 아파트를 버리며, 차근차근 졸업장과 명예와 권력과 은행계좌를 버려야 합니다. 자가용부터 버리지 못한 사람한테 ‘자전거 타는 즐거움’을 나눌 수 없습니다. 아파트를 버리지 못한 사람한테 ‘좋은 책 읽는 기쁨’을 나눌 수 없습니다. 졸업장을 버리지 못한 사람한테 ‘호미질하여 푸성귀 얻는 보람’을 나눌 수 없습니다. 은행계좌를 놓지 못하는 사람한테 ‘아이 똥기저귀를 손빨래하는 재미’를 나눌 수 없습니다.

 도시에서 살거나 도시와 가까이 맞닿거나 도시 둘레에서 복닥이는 삶자리로서는 잃어버린 하루로 머뭅니다. 잃은 어제요 잃는 오늘이요 잃을 앞날입니다. 처음에는 잃지만 차츰차츰 잊는 어제가 되고 잊는 오늘이 되며 잊는 앞날이 됩니다.


 (2) 묻힌 삶을 아로새겨 놓은 《잊혀진 미래》


 1921년 캐나다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캐나다 이곳저곳을 마실하면서 자랐다고 하는 팔리 모왓 님은 1940년부터 1945년까지 두 번째 유럽전쟁에서 총을 들었고, 전쟁이 끝난 뒤 북극땅에 머물며 글쓰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무렵 처음 쓴 책이 《잊혀진 미래》입니다. 당신 스스로 흰둥이이면서 당신과 같은 흰둥이들이 북극땅을 비롯한 온누리 토박이 삶을 어떻게 헤집고 토박이 삶터를 얼마나 일그러뜨리거나 무너뜨리는가를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면서 자연과 생태를 사랑하는 마음을 글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팔리 모왓 님 책이 2003년에 《울지 않는 늑대》(돌베개)라는 이름으로 처음 옮겨졌습니다. 2005년에 《걸어다니는 부엉이들》(북하우스)과 《개가 되고 싶지 않은 개》(북하우스)가 옮겨졌으며, 2009년에 《안 뜨려는 배》(양철북)가 옮겨졌습니다. 《잊혀진 미래》는 다섯 권째 옮겨진 팔리 모왓 님 책입니다.

 당신 책을 즐겨읽거나 더없이 사랑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는 않은데, 한 권 두 권 꾸준히 우리 말로 옮겨집니다. 흔한 말로 잘 팔리는 책은 아닌 팔리 모왓 님 이야기인데, 잘 팔리지는 못할지라도 제대로 읽히고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더 많이 읽히지 못하는 팔리 모왓 님 이야기이지만, 다문 천 사람이든 만 사람이든 당신 이야기에 깃든 깊은 넋과 너른 얼을 고맙게 받아먹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 아니랴 싶습니다.

 팔리 모왓 님이 태어난 1921년을 헤아려 봅니다. 이무렵 아버지를 따라 ‘학교 아닌 곳’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부대끼면서 세상을 배울 수 있는 어린이가 얼마나 되었을까 궁금합니다. 1921년이 아니라 2010년을 돌아보았을 때에도 ‘학교에 안 넣고’ 세상을 넓고 깊게 배우도록 이끌어 줄 어버이란 몇이나 될는지 궁금합니다.

 지난 2007년에 제 고향 인천에 돌아온 뒤로 가끔 학교(고등학교) 후배를 만납니다. 학교 후배들은 대학 입시를 걱정합니다. 어느 대학에 가야 할지, 무슨 학과에 가야 좋을지를 걱정합니다. 그런데 무슨 꿈을 이루고 싶은지는 제대로 걱정할 줄 모릅니다. 아주 드물게 한두 젊은 넋들은 ‘학교 아닌 꿈’을 이야기합니다. 거의 모든 젊은 넋들은 ‘꿈 아닌 학교’를 이야기합니다. 아니, 꿈이란 없이 학교에 매여 있다고 할까요. 젊은 넋 스스로 너희가 얼마나 아름다운 젊음이요 어느 만큼 사랑스러운 넋인 줄을 깨닫지 못한다고 할까요. 스스로 못 깨닫기도 하고, 둘레에서 일깨우지 못하기도 한달까요.

 후배들을 만날 때면 으레 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대학교에 가고 싶으면 가고 안 가고 싶으면 가지 말며 꿈이 있으면 대학교에 가든 말든 네 길을 찾으라고. 대학에 가든 안 가든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이면 어디에서든 알바를 하거나 일자리를 얻어 네 살림돈은 네 스스로 벌라고. 대학교에 들어간 다음에는 한 해쯤은 길게 휴학을 하며 한 해치 등록금만큼을 너희 어버이한테 얻어서 ‘나중에 갚을게요’ 하고 말씀드리며 한 해치 등록금 천만 원으로 자전거 한 대를 장만하여 우리 나라 곳곳을 한 해 동안 샅샅이 누벼 보라고.

 어른이나 어린이나, 학부모나 청소년이나, 누구라 할 것 없이 오늘날 우리 나라 사람들은 참으로 바쁩니다. 참으로 바쁜 나머지 이웃이고 살붙이이고 동무이고 나 스스로이고 돌아보지 못합니다. 팔리 모왓 님은 당신 이름과 돈과 힘을 내려놓고는 추운 땅 사슴겨레 사람들하고 어울리며 살았습니다만, 오늘 이 나라에서 내 이름과 돈과 힘을 이렇게 고이 내려놓고 지내고자 하는 분이란 거의 없습니다. 더 붙잡으려 하지 더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더 거머쥐려 하지 더 나누려 하지 않습니다. 시험을 치를 때에 내 앎을 살핀다는 마음이 아니라 남보다 나은 점수를 받겠다는 마음입니다. 나한테 살기 좋은 집이면서 내 이웃하고 어우러지는 집을 찾지 않는 매무새입니다. 좁은 골목길에서 자가용을 씽씽 내달리는 사람은 저 혼자만 살겠다는 몸짓입니다. 좁은 골목길에는 처음부터 자가용을 들이밀지 말았어야 했고, 어쩌는 수 없이 자가용을 들이밀었다면 골목사람 발걸음 빠르기에 맞추어 아주 느리게 달려야 합니다. 학교 앞에서는 30킬로미터 넘게 달리면 안 된다고 못박아 놓고 있는데 학교 앞에서 30킬로미터 밑으로 자가용을 모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골목길에서는 30킬로미터가 아닌 15킬로미터쯤으로 달려야 옳습니다. 학교 앞에는 아이들만 있으나 골목길에는 아이들과 어르신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못한다는 우리들이기 앞서 생각을 버린 우리들이라고 느낍니다. 생각을 잃은 우리들이요, 그예 생각을 잊고 마는 우리들이구나 싶습니다.

 생각을 못하는 동안 우리한테 아름다울 삶을 차츰 멀리합니다. 하루하루 멀리하다가는 이내 멀어지고, 이내 멀어지면서 저절로 등을 돌리며, 등돌린 채 지내다가는 아예 파묻습니다.

 착한 마음밭을 파묻습니다. 참된 마음결을 파묻습니다. 고운 마음씨를 파묻습니다.

 듣기 좋아 무슨무슨 공동체인데, 공동체이기 앞서 착한 사람 참된 사람 고운 사람이어야 합니다. 몇 해마다 돌아오는 선거철이 되면 무슨무슨 정책이나 반대이다 무어다 하고 떠들썩한데, 스스로 얼마나 착하거나 참되거나 고운 사람인가를 드러내는 후보를 아직 본 적 없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착하게 살면 돈을 못 벌겠지요. 참되게 살면 이름을 못 얻겠지요. 곱게 살면 힘을 늘릴 수 없겠지요. 돈도 좀 벌고 이름도 좀 얻고 힘도 좀 키우고 싶으니, 우리 스스로 저절로 착하지 않고 참되지 않으며 곱지 않은 길을 걷겠지요.

 1940년대까지는 어찌저찌 살아남아 있었다는 사슴겨레 사람들이 2010년대에 살아남아 있을는지는 모릅니다. 한국땅에서는 이런 소식을 알아낼 수 없습니다. 조금은 살아남았을는지, 다시 살아났을는지, 그예 씨가 말라 버렸을는지, 아주 박물관 유물처럼 목숨만 가까스로 이으면서 구경거리가 되고 말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슴겨레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며 어떻게 어깨동무를 하는 가운데 당신들 살림살이를 그토록 추운 땅에서 수천 해에 걸쳐 이어왔는가 하는 이야기 한 자락은 살아남았습니다. 도톰한 책 《잊혀진 미래》에 잊혀질 수밖에 없던 ‘착하고 참되고 고운 사람’ 이야기가 눈물겨이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이 책을 덮으면서, 한국땅에서도 우리들 착하고 참되고 곱게 살아갈 이야기를 눈물겹거나 웃음짓도록 아로새길 만한 슬기로운 글쟁이 하나 만날 수 있으면 더없이 좋겠다고 꿈을 꿉니다.


 (3) 못내 아쉬운 번역인 《잊혀진 미래》


 《잊혀진 미래》를 내놓은 ‘달팽이’ 출판사는 지난 2003년부터 생태환경책과 인문책을 바지런히 펴내고 있는 1인 출판사입니다. 요사이야 1인 출판사가 꽤 늘었지만, 2003년 즈음부터 1인 출판 외길을 걷는 곳은 드뭅니다. 이무렵 1인 출판사를 꾸린 달팽이 출판사는 책마을에서 ‘저러다 그만두겠지’라든지 ‘미친 짓이지’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도 출판사 이름 ‘달팽이’마냥 느릿느릿 책살림을 꾸리면서 생태환경책과 인문책을 한 권 두 권 내놓고 있습니다. 달팽이 걸음 출판사이기 때문은 아닐 테지만, 달팽이 출판사 책은 꼭 달팽이 걸음만큼 팔리고 읽히며 받아들여지는구나 싶습니다. 홀로 온갖 일을 다 해내야 하는 만큼 벅차기도 할 텐데, 이래저래 헤아린다 하여도 이번에 나온 《잊혀진 미래》는 번역이 몹시 엉성합니다. 아무래도 번역하신 분이 애벌 원고를 거의 손대지 않은 채 넘기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틀림없이 한글로 된 책인데 앞뒤 흐름이 엉성한 글월이 대단히 많습니다. 출판사에서 이런 엉성한 번역을 제대로 건드리지 못한 채 책을 내놓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와 함께 오탈자가 꽤 많습니다. 출판사 살림이 많이 힘들다고 해도 이러면 안 될 텐데 걱정스럽습니다. 많이 힘들면 둘레에서 자원봉사를 받아 교정교열을 한 번쯤이라도 더 거쳐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그래도 워낙 줄거리가 탄탄하고 아름다운 책이기 때문에 제 마음속으로는 ‘애벌 번역 책’을 ‘두벌 번역’ 하면서 읽습니다. 종이에 찍힌 글월 그대로 읽지 않고 이 글월이 무엇을 말하려 했는가를 곱씹으면서 더욱 더디게 읽습니다.

 말끔하고 정갈하게 추스른 책이었다면 이 놀라운 이야기 《잊혀진 미래》를 금세 읽어치우고 덮었을 수 있겠다고 봅니다. 꽤 엉성궂은 애벌 번역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탓에, 더욱 더디게 곱씹으며 읽고, 몇 번 읽은 글월을 다시금 새로 읽고 거듭 읽으면서 지난날 사슴겨레 사람들 슬기와 삶을 제 마음자리에 찬찬히 아로새길 수 있구나 싶습니다.

 좋은 번역이었다면 좋은 번역대로 고맙고, 얄궂은 번역일 때에는 얄궂은 번역대로 고맙습니다. 그래도, 애써 읽는 책이라면 얄궂은 번역보다는 좋은 번역이기를 바랍니다. 책을 낸 출판사 사장님과 번역을 한 분께서 아무쪼록 우리 말과 글을 새삼스레 뒤돌아보며 새로 배우시면 기쁘겠습니다. 서툰 번역일지라도 이런 책 하나 묻히지 않고 우리 말로 나온 일은 대단히 반갑습니다. (4343.4.29.나무.ㅎㄲㅅㄱ)


[12, 27, 56쪽] 대략 1960년대부터 우리는 에스키모들의 생존을 보증하기 위한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을 정신적으로 파괴하는데 아주 효과적인 정책을 추구해 버렸다. 옛날부터 내려온 에스키모만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을 빼앗아 버리고는 우리의 근대적 기술사회의 틀로 억지로 끼워맞추는 데 가혹하고 획일적인 노력을 해 온 것이다 … 분명 이들은 배런스의 무자비한 자연에 대항하여 힘들게 투쟁하며 사는 데 온힘을 쏟아부어온 사람들이어서, 서로를 해치는 데 그 힘을 사용하려는 결심이나 바람은 가져 본 적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내게 스쳤다 … 눈보라는 단지 하루 동안 불었지만, 스텔라가 캠프로 돌아오는 데는 보름이 걸렸다. 이 소녀가 거의 아무 음식도 없고 침구도 없이 2주 이상을 지내며 툰드라의 한겨울을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그 아이들이 이 땅의 한 부분이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진정한 척도다.

[24, 67, 311쪽] 공부를 해 가면서, 북극이 얼어붙은 강의 세계이기도 하지만 살아 있는 강과 호수의 세계여서 그곳의 푸르고 깊은 물 양 옆으로 여름철 꽃과 넓게 뻗은 푸른 풀밭이 펼쳐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 북극이 얼음 덮인 세계의 꼭대기이기도 하지만, 한여름 더위 속에서는 생명으로 우글거리고 수없이 많은 만개한 식물의 빛깔로 빛나는 거의 200만 평방마일에 달하는 완만한 평원지대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 ‘이누이트’는 이 사람들이 자기 부족을 가리켜 붙인 고유한 이름이다. 이를 번역하면 ‘인간’이라는 단순한 뜻이다. ‘에스키모’라는 용어는 이들이 사용하지 않는 말로써, 인디언들이 날고기를 먹는 사람이란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 그제야 나는 배런스에서는 부식과 부패가 거의 드물다는 것을 기억했다. 깨끗한 태양과 바람이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는 돌무더기 속에서 영원한 안식을 하게 된 순간의 모습 그대로 수세기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도록, 나무와 뼈가 영속성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71, 93, 105∼106, 150쪽] 교역자들은 자신들의 수익을 보장받는 기간에만 짧게 머물다가 이 땅을 버리고 떠나면서도, 자신들이 어떤 파괴도 일으키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 나는 아직 ‘사슴 부족’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지만 이제 그 사슴 무리들을 보고 나니, 내가 사슴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 그러나 이제는 그 거대했던 사슴강은 사라지고 졸졸 흐르는 작은 사슴 시내만 그 지역을 통과한다. 사슴이 그들의 길을 바꾼 것이 아니라, 간단히 말해 사슴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사슴을 멸망시킨 소총은, 마치 자기 자신들에게 총구를 겨냥한 듯 그 소총을 사용했던 인디어들마저 멸망시켜 버렸다 … 이드텐 부족은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고기 무역을 위해 사슴을 살육하도록 부추겨졌고, 대규모로 살상되는 사슴은 필연적으로 버펄로에게 일어난 과정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112, 115, 140, 216쪽] 이할미우트 부족은 가볍게 여행하기 때문에 그 부족 사람이 여름에 평원지대를 건널 때면 칼, 담배 파이프, 그리고 카미크라 불리는 가죽부츠 여벌만 챙긴다. 먹을 것은 찾아서 먹는다 … 기계에 대한 본능에 의해 조종되는 백인은 모터로 가는 배처럼 바람과 파도를 뚫고 나가지만, 자신이 타고 있는 복잡한 장비가 완벽하게 기능을 다했을 때만 성공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의 환경과 항상 불화하며 산다 … 이할미우트 부족은 사슴의 모든 부분을 먹어야만 더할 나위 없이 충분히 음식을 섭취한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심장, 콩팥, 내장, 간, 그리고 다른 장기도 중요하다 여기며 종종 먹는다 … 그들의 삶 속에는 실용적인 가치가 없는 물건을 창조할 공간이 없기 때문에, 이할미우트 사람들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캔버스를 채우거나, 돌 위에 모양을 파 넣지도 않고, 돌이나 진흙에다 새겨 넣지도 않는다. 배런스 땅을 길고 힘들게 여행해야 할 때마다 아름다운 것을 내버려야 한다면, 그것을 창조하는 데 무슨 목적이 있겠는가?

[118, 135, 163쪽] 그들을 보고 냄새를 맡은 내 첫 반응은 일종의 역겨움이었다. 내 눈에 그들은 너무나 더럽게 보여, 도대체 왜 입을 옷 하나 깨끗한 걸로 찾지 못했는지 의아해 하며 속에서는 백인의 자존심이 본능적으로 솟구쳐올랐다 … 내가 조금은 까다롭게 고기를 먹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스쳤다. 그래서 나는 칼을 도로 칼집에 넣고, 크게 한 번 숨을 들이쉬고는 내 두 손으로 고기를 잡아 이빨로 물어뜯어 먹기 시작했다. 맛있었다 … 이할미우트 부족의 언어에는 ‘사슴’을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데 수십 개의 단어가 있는 것이다. 하나의 의미가 지닌 엄청나게 많은 미세한 차이를 내 충분치 못한 기억력에다 과도하게 집어넣는 것을 현명하게 자제한 우테크는 내가 사슴에 대해 말해야 할 때 가능한 모든 경우에 사슴의 총칭만을 사용하도록 해 줬을 뿐만 아니라, 그들도 나와 대화할 때는 다른 구체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자제해 줬다.

[166, 200, 215쪽] 우테크의 설명으로, 영구적인 캠프 장소를 선택하는 데는 우선 세 가지 주요사항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첫 번째 조건은 ‘우리의 생명인 사슴이 찬성할 것인가?’이다 … 그녀의 바느질은 바라보고 있으면 경이로운 작업이다. 여름용 부츠는 반드시 방수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바느질 솜씨로 꿰맨 솔기 부분 틈에 완벽하게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만들어야만 한다. 이렇게 꿰맨 부분이 너무나 섬세해서 육안으로는 전혀 바느질 땀수를 셀 수가 없는 경우도 있는데, 어떻게 호우미크가 이렇게 바느질을 할 수 있는지는 어느 누구도 말할 수 없는 부분이다 … 그들에게 가장 오랫동안 즐거움을 주는 것은 창조의 노동이다. 새 카약을 만들기 위해 작업하는 나이 많은 헤크와우는 자신의 일 속에 빠져 무아지경이 돼 버린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창조해 낼 때 누리는 미묘한 즐거움을 그는 알고 있다.

[206∼208쪽] 이할미우트 아이들은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절대로 체벌을 받지 않는 사실에 내가 놀라움을 나타냈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무심코 말한 것이었지만, 아이들을 결코 때려서는 안 되는 이유를 내가 모른다는 사실에 정말로 곤혹스러워하는 듯 그는 격렬하게 응수했다. “미치광이가 아니고서는 누가 자신의 피를 지닌 생명에게 손을 들어올릴 수가 있습니까?” … 그 아이는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을 결코 배운 적이 없다. 그저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러는 것처럼 관찰하고 흉내를 내는 그 아이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지켜보며 스스로도 그렇게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 것뿐이다 … 어떤 지배나 엄격한 일과도 아이들에게는 부과하지 않는다. 졸리면 잔다. 배가 고프면 음식이 있는 한 언제나 먹는다. 말이나 훈련으로 배우는 것보다 놀이를 통해 인생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에 아이가 놀고 싶어하면 아무도 막지 않고 할 수 있는 소일거리를 준다 … 아이는 부모의 반대라는 그림자나 두려움 속에 갇히는 것 없이 놀면서 배우는 것이다.

[245, 255, 368쪽] 이할미우트 사람들은 나를 용서해 주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내 어린애 같은 이기성의 폭발로 나를 판단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로는 나란 사람이 암컷 늑대가 자기 새끼를 소중히 지키듯 내 물건에 몹시 집착하는 불행한 미개인쯤으로 이해되었다 … 장로회도 경찰도 없다. 입법 기관 같은 것도 없으며, 엄밀히 말하면 이할미우트 부족은 무정부 상태로 산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법이라는 경직된 규약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부족은 서로 사이좋게 사는데, 이것의 비결은 인간의 의지와 인내의 힘에 의해서만 제한 받는 협동이다 … “당신들의 신들이 가진 법은 그들의 백성의 마음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426, 428, 439쪽] 구호품을 통해서가 아닌 자신들이 직접 먹고살 수 있는 방법으로 도와야만 한다. 문명화된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원시 부족들에게도 자선은 파멸을 초래한다 … 우리는 반드시 원주민들에게 그들의 땅에서 나오는 자신들의 음식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을 줘야 한다 … 북쪽 원주민들에게 그들의 식단을 바꿔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먼 지역에서 수입한 이상한 식품을 위해 우리 땅에서 생산되는 기초 생산품을 버려야 한다고 제안하는 것처럼 몰상식한 이야기다 … 우리의 극지방처럼, 그린란드 땅 대부분이 유럽인이 거주하기에는 불리한 자연 그대로의 땅이다. 그러나 그린란드 사람들이 그 땅의 일부인 까닭은, 그 황폐한 지역에서 어떻게 살아남아 번성하는지 오래 전 배웠던 에스키모의 육체적, 정신적 유산을 그들이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린란드 원주민들은 백인의 경제적 욕심을 위한 농노가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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