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풍경 - 죽음을 은폐하는 사회에서 생명을 만나다
후쿠오카 켄세이 지음, 김경인 옮김 / 달팽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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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과 죽음은 선물, 일과 놀이는 보배
 [환경책 읽기 25] 후쿠오카 켄세이, 《숨겨진 풍경》


- 책이름 : 숨겨진 풍경
- 글 : 후쿠오카 켄세이
- 옮긴이 : 김경인
- 펴낸곳 : 달팽이 (2010.1.21.)
- 책값 : 12000원


 (1) 어린이와 삶


 어린이문학을 하면서 한삶을 바친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이 내놓은 이야기책 가운데 ‘삐삐’ 이야기가 아주 많이 읽히거나 팔렸습니다. 다른 이야기책도 많이 읽히거나 팔렸는데, 이모저모 헤아리면 ‘삐삐’만큼 사랑받은 이야기는 없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삐삐는 ‘말괄량이’라는 이름이 앞에 붙습니다. 말괄량이 삐삐입니다. 삐삐가 하는 일을 떠올린다면 말괄량이라 할 만합니다. 말괄량이에 주근깨투성이가 맞습니다. 그러면 삐삐는 말괄량이요 주근깨투성이이기만 할까요.

 삐삐네 이웃에서 살아가는 토미와 아니카는 삐삐하고 둘도 없는 동무입니다. 셋은 배를 타고 멀디먼 마실도 다니고 풍선비행기를 타고 날아다니기도 합니다. 돈 한푼 없이 ‘딸기밭 매기 싫어’ 먼길을 나서기도 하는데, 삐삐는 늘 토미와 아니카를 잘 챙겨 줍니다. ‘빌라 빌라 콜라’에서 살 때에도 토미와 아니카가 놀러오면 과자를 구워 주거나 밥을 차려 주기도 해요. 삐삐는 마을 아이들 모두 먹을 만큼 과자를 잔뜩 굽기도 합니다. 집안도 혼자서 잘 치우고 말과 원숭이도 잘 먹입니다. 그렇지만 토미나 아니카는 아직 빵이나 과자를 구울 줄 모릅니다. 날씨가 아주 좋으니까 딸기밭 김매기가 싫다고 하지만, 삐삐처럼 집안일도 잘하면서 놀기도 잘하기까지는 하지 못해요. 삐삐는 갓난쟁이도 잘 돌보고 할머니하고도 이야기를 잘 나눕니다. 씩씩할 뿐 아니라 사랑스럽지요. 튼튼하면서 굳셉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린드그렌 님 이야기책에 나오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집일을 잘 하거나 잘 거듭니다. 스스럼없이 집일을 하고, 또 신나게 밖에서 뛰어놉니다. 풀과 나무와 새와 벌레를 곱게 사랑합니다. 동무를 아낄 줄 알며, 이웃과 어른을 섬길 줄 알아요. 착하면서 참답습니다. 예쁘면서 귀엽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착하면서 참다운 아이들 가운데에는 가난에 찌들리거나 시달리는 가여운 아이가 있어요. 못되거나 못난 어른한테 들볶이거나 꾸중듣는 아이가 있어요. 아이가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이 마음을 읽지 않을 뿐더러, 아이 삶을 사랑하지 않는 어른들이기에, 아이들이 슬프거나 힘듭니다.


.. 누군가가 죽기 때문에 앞으로 태어날 새 생명이 살아갈 여지가 그 자리에 생겨난다. 아무도 죽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머잖아 살아 있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결국은 파괴되고 말 것이다 … 셀 수 없이 많은 ‘죽음’이 있으므로 우리의 ‘생명’이 있다 … ‘죽음’과 생활 속에서 가까이 만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을 계기를 사람들로부터 빼앗아버린 것은 아닐까? ..  (19쪽)


 우리 어린이문학 가운데 이원수 님이 빚은 이야기책을 읽으면, 씩씩하며 당찬 아이들이 늘 나옵니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안 계셔도 씩씩하게 살아가는 아이들이 나옵니다. 어린 동생을 혼자 일해서 먹일 뿐 아니라 가르치는 형이나 누나가 나옵니다.

 오늘날 잣대로 보자면 ‘이렇게나 어린 아이들한테 일을 시킨다구?’ 하면서 ‘아동 노동 착취’라 할는지 모르지만, 어버이가 안 계시거나 몸져누웠는데, 어린이라 해서 마냥 팔짱 낄 수 없습니다. 아홉 살이든 열한 살이든 일을 해야 합니다. 구두를 닦든 신문팔이를 하든 어린이로서 할 만한 일거리를 찾아야 해요. 집에서 밥을 차리고, 그 작은 손으로 겨울날 찬물로 빨래를 합니다. 찬물로 걸레를 빨아 방바닥을 닦습니다. 가녀린 팔뚝일지라도 이불을 잘 들어 탁탁 텁니다. 조그마한 몸뚱이로 조그마한 아기를 등에 업고 달래며 자장노래를 부릅니다.

 이원수 님 이야기책 뒤를 이은 권정생 님 이야기책에도 아이들은 일을 합니다. 일하지 않는 아이는 드뭅니다. 아마, 도시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은 일을 안 하거나 덜 하겠지요. 그러나 도시에도 가난한 살림집이 많아, 이들 가난한 살림집 아이들은 어김없이 제 어버이와 함께 일을 합니다. 물건을 떼어 저잣거리나 길거리에서 팔면서 제 어버이와 나란히 살림을 꾸립니다.

 너무 어린 나이부터 일을 해야 한다면 애늙은이가 될까 걱정스러울 수 있습니다. 참말, 애늙은이나 애어른이 되는 어린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이다움을 고스란히 건사하면서 속깊은 아이로 크기도 합니다. 속이 깊을 뿐 아니라 마음이 넓으며 사랑이 따스한 아이로 자라기도 해요.


.. 동물을 죽이는 행위를 보지 않아도 되게 된 지금, 우리는 그 행위와 더불어 느끼지 않으면 안 되었던 마음의 고통을 전혀 느끼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 고통을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에, 타인의 입장에 서서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상상력까지도 상실한 인간을 낳고 있다 … 보다 저렴한 것을 보다 많이, 싫은 것은 더 멀리 보이지 않는 곳으로. 그 끝에 우리가 구축한 것은, 어떤 고통도 위로의 감정도 느끼지 않고 내키는 대로 다른 생명을 낭비할 수 있는 사회다 ..  (58, 60, 126쪽)


 예나 이제나 참다우며 착하고 어여쁜 아이들은 ‘일하는 아이들’입니다. 이오덕 님이 밝히기도 한 ‘일하는 아이들’이 사랑스러우면서 귀엽습니다.

 일하는 아이들은 놀이하는 아이들, 곧 ‘노는 아이들’이기도 합니다. 비싼 놀잇감을 갖고 놀아야 놀이가 아닙니다. 흙바닥에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려도 놀이입니다. 아기를 등에 업고 노래를 불러도 놀이입니다. 방아를 찧거나 켜를 까부르며 밥을 지어도 놀이입니다. 마당에서 비질을 하면서 더 어린 동생이랑 노래놀이를 할 수 있습니다. 어버이가 빨래하는 곁에서 빨래를 헹구며 놀 수 있어요. 바느질이나 뜨개질을 배우며 함께 일하는 동안, 어버이한테서 이야기를 듣는 이야기놀이를 할 수 있겠지요.

 일로만 동떨어지지 않습니다. 놀이로만 나뉘지 않습니다. 일하고 놀이는 함께 어우러집니다. 일놀이요, 놀이일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어여쁜 목숨이고, 함께 어깨동무하는 좋은 벗입니다.

 요즈음 아이들은 일을 잊고, 놀이를 하더라도 일하고는 사뭇 갈라지고 만 놀이만 해대기에 아이답지 못할 뿐 아니라, 사람답지 못하지 않느냐 느낍니다. 요즈음 아이들은 일을 안 하는데다가, 일이 무언지를 모르고, 어버이나 어른이 일을 옳게 안 시키기 때문에, 나중에 무럭무럭 자라 푸름이가 되거나 어른이 되어도 일다이 일을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말지 싶습니다. 어린 나날부터 일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일하는 어른’이 못 될 뿐 아니라, 둘레 ‘일하는 어른’을 동무로 삼지 못하고, 일하는 동무 어른이 고달프거나 괴로울 때에 함께 아파하면서 고달픔과 괴로움을 씻어내도록 손을 맞잡지 못한다고 느껴요.

 지식만 쌓는 아이들이야말로 애늙은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나날부터 교과서와 교재와 ‘좋다는 책’에만 둘러싸인 채 지식만 가득가득 집어넣는 아이들이 되고 마니까, 이 아이들은 머리로만 보면 아이큐가 높거나 똑똑하달지라도, 사람다움을 잊거나 모르며, 사람다움을 잊거나 모르니 삶을 삶다이 일구지 못하고, 삶을 삶다이 일구지 못하는데, 넋이나 말이 넋답거나 말다울 수 없습니다. 제 밥그릇 하나 손수 흙을 일구면서 거두지 못하고, 제 마음그릇 하나 몸소 사랑을 나누면서 다스리지 못합니다.


.. 내가 읽은 유서의 주인들도 사실은 죽고 싶었던 것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달리 편안해질 방법을 찾지 못하고, 말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  (153쪽)


 아이들은 일을 해야 하고, 일다이 일을 해야 합니다. 어른들은 아이한테 일을 시켜야 하며, 일다운 일을 시켜야 합니다. 아니, 어른들은 아이들하고 함께 일해야 합니다. 어른들은 아이들과 함께 살며 함께 일하고 함께 놀다가는 함께 잠자야 합니다. 어른들 일터는 아이들 놀이터가 되어야 하고, 어른들 놀이터는 곧바로 아이들 일터가 되기도 해야 합니다.


 (2) 어른과 삶


 도시물질문명이라 하는 요즈막에 큰도시에 아옹다옹 모여서 복닥이는 어른들 삶을 들여다보면, 그닥 재미나지 않습니다. 이 나라 어른들이 논다는 모습은 놀이라 하기 참 어렵습니다. 아이들에 앞서, 어른들은 무얼 하며 노는가요.

 아이들은 구슬치기도 안 하고 고무줄놀이도 안 하며 금긋기놀이나 소꿉놀이나 술래잡기조차 안 합니다. 돌치기나 숨바꼭질이나 눈싸움을 하는 아이를 만날 수 없습니다.

 어른들은 술마시거나 담배피우는 놀이 말고 무슨 놀이를 하나요. 색시집에 가서 살꽂이하기가 놀이인가요. 술에 절어 해롱거리면서 싸움박질하기가 놀이인가요. 골방에서 인터넷을 누비며 제 이름을 숨긴 채 낄낄대거나 못된 글을 남기는 짓이 놀이인가요. 아니, 그냥저냥 인터넷게임을 한답시고 ‘사람 죽이는 게임’만 해대는 모습이 놀이인가요.

 자가용을 싱싱 모는 일이 놀이인가요. 비싼 사진기를 자랑하듯 내보이며 ‘출사’ 다니는 나날이 놀이인가요. 비행기 타고 나라밖을 다녀온다든지, 스키장을 드나들거나 ‘겨울에도 후끈후끈한 워터파크’ 마실을 하는 모양새가 놀이인지요.

 백화점이나 마트 나들이가 놀이가 되나요. 뭐가 놀이이지요? 오늘을 살아가는 이 나라 이 땅 이 도시에서, 또 시골에서, 어른들은 무슨 놀이를 하나요? 텔레비전 보기가 놀이인가요? 운동경기장에 가서 소리 빽빽 지르는 짓이 놀이인 셈인가요?


.. 그들 애완동물 산업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개고양이는 대량으로 팔리지 않으면 안 된다 … 동물들이 처분되어야 하는 원인은 사람에게 있지 동물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  (55쪽)


 어른이라는 사람들부터 놀이를 잊었다고 느낍니다. 놀 줄 모르는 어른이라고 느낍니다. 놀 줄을 모르니까 아이들을 놀릴 줄 모릅니다. 놀 생각을 안 하니까 아이들이 놀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놀지를 않으니 아이들이 놀도록 지켜보지 못합니다.

 놀지 못하는 어른은 일하지도 못합니다. 어른이 하는 일이란 무엇인가요.

 설마 ‘돈벌기 = 일하기’라고 생각하지 않나 궁금합니다. 돈벌기란 돈벌기입니다. 돈벌기는 일하기가 아닙니다. 일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으나, 일하기는 돈벌기가 아닙니다.

 일이란 놀이와 같은 일입니다. 일이란 내 삶이라 할 만한 일입니다. 쉰다섯에 정년퇴직을 하거나 예순다섯에 정년퇴임을 하는 일은 일이 아닙니다. 그냥 돈벌이입니다. 일이라 할 때에는 내 몸이 굳으며 스르르 눈을 감아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온몸으로 붙잡아서 할 때에 일이라 합니다. 일흔이나 여든에도 즐겁게 해야 비로소 일입니다. 아흔에는 못한다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모든 일은 다섯 살부터 백다섯 살까지 누구나 언제라도 즐거이 할 때에 일입니다. 어릴 적부터 늙을 때까지 신나게 할 수 없으면 일이 아니라 ‘돈벌이’입니다.


.. “난 고기를 구워먹을 때면 상당히 까다롭다우. 제 손으로 한 조각 굽고, 그걸 먹은 다음에 다른 고기를 구우루고 말이야. 한꺼번에 몽땅 석쇠에 올려놓고 구우려고 하면, 내가 절대 용서 안 하거든, 허허. 한꺼번에 올리면 너무 타서 못 먹게 되는 것이 꼭 나오게 마련이거든. 고기는 하나씩, 자기 먹을 것은 자기가 구워먹어라. 다들 귀찮다고 하겠지만, 난들 어쩌겠나, 말 않고는 못 배기겠는걸, 허허허!” ..  (도축업자 후지모토/114∼115쪽)


 일을 잊은 어른은 놀이를 잊을밖에 없습니다. 놀이를 잊으니 일도 제대로 모르지만, 삶부터 엉망입니다. 뒤죽박죽이 되겠지요. 어수선할 뿐이겠지요.

 밥하기란 일하기입니다. 아이돌보기란 일하기입니다. 빨래란 일하기입니다. 쓸고닦기는 일하기입니다. 설거지란 일하기입니다. 흙을 일구는 농사짓기는 일하기입니다.

 사람들은 일을 해야 합니다. 사람이 되었다면 일을 해야 합니다. 곰곰이 돌이킨다면, 이 땅에서 살아온 뭇 여자들은 집이라는 울타리에 갇힌 채 살았다지만, 집은 감옥이 아니에요. 집은 수많은 일거리가 가득한 곳이에요. 언제나 일이 기다립니다. 이 일을 끝냈다 해서 참말 끝나지 않습니다. 하루에도 끊이지 않고, 날마다 되풀이되며, 노상 이어집니다. 집일은 그예 일입니다. 그러니가, 예부터 할머니와 어머니는 늘 ‘일을 하며’ 살았어요. 여기에 남자 어른들이 농사를 지었다면 여자 어른과 마찬가지로 ‘일을 하며’ 살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던 우리들이 차츰차츰 돈벌이에 눈이 멀면서 일을 놓거나 버립니다. 어른들이 차츰차츰 일을 버리고 돈을 좇으면서 놀이를 함께 버렸고, 놀이를 버릴 때에는 삶을 버립니다. 어른들이 삶을 버리면서 일놀이가 저절로 버려질 때에, 아이들 또한 일과 놀이와 삶이 가뭇없이 사라집니다. 아니, 아이들은 어른들 때문에 모든 일과 놀이와 삶을 빼앗겨요.

 골목길에서 아이들이 사라지고 아이들 놀이가 사라진 까닭은 아이들 때문이 아닙니다. 어른들이 돈벌이에 눈이 먼 탓입니다. 돈벌이에 눈이 먼 어른들이 자꾸 늘어나다가는, 이제는 이 커다란 도시를 가득 채우며 누비는 어른들이 거의 몽땅 돈벌이에만 얽매였기 때문입니다.


.. 우비를 입고 닭 모가지를 자르던 사람은 페루에서 온 일본계 3세라고 한다. “이런 더러운 일은 아무도 하고 싶어 하지 않거든.” ..  (83쪽)


 어른들은 하루 빨리 일을 찾아야 합니다. 돈벌이가 아닌 일을 찾아야 합니다. 여자 어른들은 여자 어른대로 일을 찾아야 하고, 남자 어른도 남자 어른대로 일을 찾아야 합니다.

 집에서 살림하는 사람은 남자이든 여자이든 아름답습니다. 왜냐하면 ‘살림꾼’이니까요. 사랑스러운 사람인 살림꾼이기 때문에, 살림을 여자가 하든 남자가 하든 어여쁩니다. 살림을 여자한테만 맡기거나 떠넘기는 남자는 스스로 사람됨을 내팽개친다는 뜻입니다.

 조금이라도 눈을 뜨거나 생각을 열었다면, 서둘러 내 일을 찾아야 합니다. 내 일을 찾을 때에 바야흐로 내 놀이를 찾습니다. 내 놀이를 찾아서 즐기면 시나브로 내 삶이 새로우면서 싱그러이 피어납니다.

 어른들이 스스로 땀흘리며 일할 줄 알 때에 아이들 또한 땀흘려 일하는 보람과 값과 뜻을 배웁니다. 아이들이 땀흘려 일하는 보람과 값과 뜻을 배우면, 이제부터 아이들은 놀이가 얼마나 신나며 즐거운가를 깨닫습니다. 놀이를 깨닫고 일을 배우면, 하루하루 놀라운 삶이요 대단한 기쁨이자 멋진 웃음입니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 ‘삐삐’이든, 이원수 님과 권정생 님 숱한 이야기책이든, 바로 이 일과 놀이와 삶이 하나로 모이는 자리에서 태어났습니다.


 (3) 삶을 잊었기에 “숨겨진 풍경”


 《즐거운 불편》을 썼던 후쿠오카 켄세이 님 다른 책 《숨겨진 풍경》을 읽었습니다. 《숨겨진 풍경》은 《즐거운 불편》 못지않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 어른들은 《즐거운 불편》이 왜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았고, 《숨겨진 풍경》은 어떻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실었는가를 옳게 읽지 못하리라 느낍니다.

 두 가지 책은 한결같은 목소리입니다. 누구보다 후쿠오카 켄세이 님 스스로 ‘내 삶이 무엇이지? 내가 하는 일은 뭐지? 나는 무얼 하면서 놀이를 한다고 여기지?’ 하고 끝없이 되물으면서 살았습니다. 이렇게 되묻고 찾아나서면서 살아온 발자국이 두 가지 책, 《즐거운 불편》하고 《숨겨진 풍경》에 스며들어요.


.. 키우기 시작한 지 나흘째, 사마귀가 알을 낳았다. 그것을 발견한 둘째아이는 좋아라 날뛰었다. 하얀 거품 같은 알은, 만지니 아직 부드러웠다. 그리고 알을 낳은 이틀째가 되는 날 아침, 어미사마귀의 시체가 흙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임무를 다 마친 뒤의 편안함 같은 것이 엿보이는 모습으로 ..  (9쪽)


 후쿠오카 켄세이 님이 《즐거운 불편》이랑 《숨겨진 불편》에서 밝히는 이야기는 꼭 한 가지입니다. ‘너무 늦기 앞서 내 삶을 찾아, 살아가는 동안 즐기고, 죽음을 앞둔 자리에서는 고마워 하자.’예요. 살아가는 나날이 얼마나 즐거운가를 헤아리면서, 이제 몸이 딱딱하게 굳으며 흙으로 돌아가야 할 때 얼마나 고마운가를 알아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 닭을 죽일 때 눈물을 흘리고 한 번에 닭의 목숨을 끊지 못해 닭에게 몇 번이나 공포와 고통을 주고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다’고 쓴 전형적인 현대인이라 할 수 있는 고교생들도, 아마 굶주리면 닭이 됐든 소가 됐든 돼지가 됐든 그들의 생명을 빼앗아 먹게 될 것이다. 그리고 들개가 횡행하여 자신들의 신변이 위험해지면 퇴치에 나설 것이다 ..  (137쪽)


 지식이란 참 부질없습니다. 그래서 후쿠오카 켄세이 님은 지식을 다루지 않습니다. 지식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지식을 밝히지 않습니다. 그저 삶만 밝힙니다. 삶이란 곧 죽음이고, 죽음이란 바로 삶이며, 일하고 놀이하는 나날이 고스란히 삶이면서 죽음이라고 알아내면서, 이렇게 알아낸 기쁜 이야기를 책으로 갈무리합니다.

 먹는 즐거움과 함께 똥오줌을 누는 즐거움입니다. 베푸는 즐거움과 나란히 얻는 즐거움입니다. 가르치는 즐거움과 같이 배우는 즐거움이에요.

 외길이란 없고 외통수란 없어요. 산울림이 아닌 메아리입니다. 삶과 죽음은 하늘이 내려준 선물입니다. 일과 놀이는 땅에서 베푸는 보배입니다. 돈을 많이 벌었거나 이름값 드날리거나 권력을 휘두른다고 웃어 보았자 그리 오래 끌지 않습니다. 밥 한 끼니는 한 나절입니다. 날마다 밥끼니 여러 그릇을 비우며 채워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과 즐길 놀이란 밥그릇을 바지런히 비우며 채우기를 되풀이하는 수수한 여느 나날입니다. 수수한 여느 삶이 선물이면서 보배입니다. (4344.2.1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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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니아가 떠나던 날 어린이 생각나무 1
카롤 잘베르그 지음, 하정희 옮김, 엘로디 발랑드라 그림 / 숲속여우비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내 아이를 아끼는 예쁜 살림살이
 [환경책 읽기 26] 카롤 잘베르그, 《라니아가 떠나던 날》



- 책이름 : 라니아가 떠나던 날
- 글 : 카롤 잘베르그
- 그림 : 엘로디 발랑드라
- 옮긴이 : 하정희
- 펴낸곳 : 숲속여우비 (2009.12.5.)
- 책값 : 9000원



 (1) 즐겁게 살아갈 터전


 얼핏설핏, 경상도 창원시는 야구장 새로 짓는 데에 3000억이라는 돈을 쓰겠다 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큰돈을 기꺼이 들여 좋은 야구장을 짓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는 우리 식구가 굳이 마음을 쓴다거나 눈길을 둘 만한 일은 아닙니다. 다만, 창원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보금자리는 어떠한지 궁금합니다. 2014년 아시아 경기대회를 앞둔 인천시를 돌아보아도 매한가지입니다. 경기장 새로 짓는 데에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을 쏟아부어야 합니다. 그런데 경기장 하나로 그치지 않습니다. 경기장을 비롯한 온갖 다른 시설을 마련해야 해요.

 경상도 창원시이든 인천시이든 어린이집을 비롯해 초·중·고등학교 시설이나 제도나 문화가 얼마나 잘 닦였는지 궁금합니다. 창원시 사람들이든 인천시 사람들이든, 이곳 사람들이 먹을 곡식을 일구는 농사꾼들은 농사지으며 흘리는 땀방울에 값할 만큼 보람을 거두는지 궁금합니다.

 이 나라 어디이든 지역사람이 지역사람으로뿐 아니라 나라사람으로서 즐거이 어울려 살아가도록 뒷배하는 틀은 어설프거나 모자라다고 느낍니다. 돈없는 사람이 게으르기 때문에 힘겹지 않을 뿐더러, 돈없는 사람이 살기 좋아야 할 뿐 아니라, 돈있는 사람 또한 서로 어울리면서 즐거울 터전이요 틀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새로운 시설 뛰어난 경기장도 나쁘지 않을 테지만, 우리는 무엇을 먼저 갖추며 나누어야 할까 궁금합니다.

 논과 밭과 들판과 숲과 갯벌과 바다와 산과 냇물을 밀거나 깎거나 없애며 마련하는 경기장과 아파트와 공장과 놀이공원은 얼마나 아름답거나 뜻있거나 훌륭할는지 궁금합니다.


.. 라니아가 좋아하는 것이 또 있는데, 그건 바로 밭까지 이어지는 길입니다. 그 길은 짙은 황금색 언덕들 사이를 구불구불 지나가지요. 맨발에 느껴지는 땅의 감촉은 참으로 부드럽습니다 … 밭에 이르면 모두들 할 일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힘껏 일을 돕습니다 … 라니아는 늘 바쁘고 튼튼한 여자들만 보고 자랐지요. 라니아가 살던 마을의 사람들은 언제나 뭔가를 나르고, 자르고, 천을 짜고, 수를 놓고, 뒤섞고, 땅을 파고, 열매를 주워 모으고, 아기를 품에 안아 재우고, 끈을 엮습니다. 특히 여자들은 하루 종일 움직입니다 ..  (14∼15, 45쪽)


 아이가 잠들고 옆지기도 새근새근 자는 때에 비로소 조용히 일어나서 글을 씁니다. 어느 한 사람이라도 깨었거나 움직일 때에는 좀처럼 글을 못 씁니다. 깬 사람, 그러니까 나와 함께 눈을 뜬 살붙이가 복작복작 돌아다닌다면, 여기에 마음을 쓰거나 빼앗기느라 글을 쓸 수 없습니다. 때때로, 밀린 일이 있어 ‘놀아 달라는 아이’한테 “미안해. 아빠가 이 일을 해야 하거든. 기다려 줘. 벼리는 혼자서 놀아 주라.” 하고 얘기하지만, 이렇게 얘기해야 할 때는 슬픕니다. 참으로 무슨 일 때문에 아이하고 놀아 줄 겨를이 없어야 할는지요. 우리 어른들은 아이를 낳아 사랑스럽다 말을 하면서, 왜 내 아이하고 살가이 놀거나 신나게 어울릴 겨를을 마련하지는 못하는지요.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길 수 있게끔 제도와 시설을 잘 갖추어야 할 나라요 사회이며 지자체입니다. 나라와 사회와 지자체는 어린이집뿐 아니라 초·중·고등학교 얼거리를 알맞고 올바로 닦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한테서 이모저모 갖은 세금을 거둬들이기 때문입니다. 쌀 한 말을 사든 얼음과자 하나를 사든 붙는 세금이 있고, 일삯을 받을 때에 떼는 세금이 있습니다. 세금이란 동사무소나 구청이나 시청이나 세무소나 공공기관 건물을 높이 올려세운다든지 기관 광고비를 낸다든지 하는 데에 쓸 돈이 아닙니다. 세금을 낸 사람들이 걱정없이 살아가도록 제도와 시설을 다스리는 데에 쓸 돈입니다.

 그러나 나라나 지자체에서 세금을 옳게 쓴들 옳게 못 쓴들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내가 내 보금자리에서 옳고 바르게 살아간다면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가게에서 비닐봉지를 내어 줄 때에 20원을 받아야 한다느니, 가게에는 비닐봉지를 두어서는 안 된다느니 하고 법으로 세우거나 따진들 안 따질들 마음쓸 까닭이 없습니다. 내 가방에 언제나 천 장바구니를 넣으면 되고, 가게로 마실을 갈 때에 천 장바구니를 여럿 챙기면 되니까요. 물건을 담는 비닐봉지를 가게에서 못 쓰도록 한다지만, 커다란 마트라는 데가 아닌 작은 가게에서조차 공산품이든 푸성귀이든 비닐이나 랩에 씌워 놓기 일쑤입니다. 어차피 비닐이나 랩은 곳곳에 수없이 많이 씁니다. 물건 담는 비닐봉지는 안 쓴다지만 ‘천 장바구니 젖지 않도록 비닐이나 랩을 한 번 더 씌운다’면, 물건 담는 비닐봉지를 안 쓰도록 하거나 말거나 똑같아지거나 더 나빠집니다.


.. 라니아는 아주 잠깐이지만 아직도 자기가 세 걸음 만에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소박하고 작은 집에서 식구들과 누워 있는 듯한 착각을 하곤 합니다. 고향 집에서는 일어나자마자 살갗에 닿는 햇살을 느낄 수 있었지요. 또 뜨거운 기운이 서서히 깨우기 시작하는 자연의 온갖 냄새를 들이마시곤 했어요. 비에 젖어 수프처럼 변해 버린 땅에서 올라오는 그 특별한 향기도요. 눈을 꼭 감고 있으면 조금은 붙잡을 수 있는 그 향기를. 여기(도시)서 라니아는 감기를 달고 삽니다 ..  (63쪽)


 아이하고 읍내 장마당에 나갈 때이든 도시로 볼일 보러 다닐 때이든, 아빠와 엄마는 가방에 천 장바구니를 꼭 여럿 넣어 다닙니다.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비닐봉지도 잔뜩 챙깁니다. 아이는 제 어버이가 천 장바구니를 늘 쓰니까, 저도 이 장바구니를 손에 들거나 어깨에 걸고 싶어 합니다. 집에서 혼자 놀면서 이 장바구니를 손에 쥔 채 그림책을 펼치기도 합니다.

 어버이는 아이를 가르치면서 키운다지만, 가르치면서 키우는 어버이가 아니라, 어버이 삶이 그대로 아이 삶으로 옮습니다. 아이는 제 어버이가 하는 양을 가만히 살피며 받아들입니다. 어버이가 옳게 살아가면 아이도 옳게 살아가는 나날을 즐기고, 어버이가 짓궂게 살아가면 아이 또한 짓궂게 살아가는 나날을 즐길밖에 없습니다.

 나라나 지자체에서 훌륭하며 멋진 어린이집을 마련해 준다면 아주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는 하지만 고맙기도 할 텐데, 애써 우리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낼 뜻이 없습니다. 어린이집 교사들이 착하거나 참답다 할지라도, 아이가 훌륭한 어린이집 교사한테서 착하거나 참된 삶과 넋을 배운다 할지라도, 어린이집 교사한테서만 배우거나 받아들이는 내 아이가 되도록 할 수 없습니다. 바깥에서 어린이집 교사만 훌륭하고, 집안에서 어버이는 어설프거나 못날 수 없습니다. 바깥이야 어떠하든, 아이가 살아가는 터전인 제 보금자리에서 제 어버이부터 아름답거나 알차거나 고운 삶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함께 놀고 함께 일하며 함께 어우러지는 수수한 살림살이요 집안이며 보금자리로 가꾸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시골마을에 워낙 아이들이 없다 보니까, 다른 동무를 사귀고 싶다면 갈 만한 어린이집이지만, 아이한테 일찍부터 영어를 가르쳐야 한다느니, 아빠 엄마가 돈벌이나 다른 볼일 때문에 바빠서 맡겨야 한다느니 하면서 어린이집에 보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이상한 일이지만, 라니아는 부인을 원망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작별 인사를 한 것은 아닙니다. 라니아는 활짝 웃는 얼굴로 부인 옆을 지나가면서, 뒤를 돌아보지도 손을 흔들지도 않았습니다 ..  (91∼92쪽)


 집안에서 즐겁게 살아갈 때에 집 바깥에서 즐겁게 살아갑니다. 집안부터 따스해야 집 바깥에서 이웃과 복닥이면서 따스한 사랑을 나눕니다. 집안을 아름다이 일구는 손길로 집 바깥에서 내 마을과 고향과 삶터를 아름다이 일굽니다.


 (2) 즐겁게 사귈 마음동무


 2011년 오뉴월 무렵에 둘째를 낳습니다. 둘째가 태어나면 첫째는 둘째를 잘 보살피면서 무럭무럭 크도록 돕고, 나중에는 둘이 함께 신나게 놀겠지 하고 꿈을 꿉니다. 너무 많은 사람한테 치이는 도시가 아니요, 시끌벅적 어수선한 나머지 마음을 느긋하거나 넉넉하게 다스리기 힘든 도시가 아니니까요.

 몸마음 아픈 옆지기는 도시로 볼일 보러 나갈 때에 함께 마실을 하면 늘 어지러워 하고 힘들어 합니다. 아이는 이것저것 볼거리 많다며 이리 뛰고 저리 달립니다. 애 아빠는 아이 건사하랴 아픈 사람 돌보랴 벅차기도 하지만, 시외버스를 달려 도시하고 가까와질 무렵이면 똑같이 어질어질합니다. 마시는 바람과 받아들일 햇볕부터 다르거든요. 게다가, 어느 한 사람도 아름답지 않거나 소담스럽지 않을 목숨이 아닌 사람들인데, 이 아름다운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이 복작대다 보니, 서로가 서로를 아끼지 못합니다. 아니, 서로서로 나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해요.

 내 몸을 아낄 때에 내 이웃을 아낍니다. 내 삶을 사랑할 때에 내 동무 삶을 사랑해요. 도시에서는 살아남기와 겨루기와 피튀기기에 시달리거나 길든 나머지, 참사랑을 잊고 참사람됨하고 멀어집니다. 바람이 좀 더럽다든지 햇볕 쬘 빈틈이 없다든지 하는 걱정보다, 이 많은 사람들이 사람다움을 빼앗기거나 스스로 잃은 모습이 슬퍼서 몹시 고단해요.


.. 도시사람들은 시시때때로 천이며 연고 그리고 이상한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가지고 마을을 찾아와 채소와 닭과 바구니, 모자 따위와 바꿔 가곤 합니다. 마을사람들은 바구니며 모자 들을 짜고 꾸미는 법을 아주 잘 알기 때문이죠 … 거기서 좀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부모들이 자신들의 맏이를 도시로 보내기로 허락하는 광경이 보였습니다. 모두 딸들이었습니다. 낯선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딸들은 돈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찾기가 아주 수월하기 때문이었지요 ..  (26, 29쪽)


 삶은 겨루기가 될 수 없습니다. 삶은 이름값이 될 수 없습니다. 삶은 등수매기기가 될 수 없습니다. 삶은 돈벌기가 될 수 없습니다.

 한 번 선물받은 삶이란 한 번뿐입니다. 어쩌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지만,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달지라도 예전에 어떤 사람으로 살았는지를 떠올리거나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언제나 바로 오늘 꾸리는 내 한삶이 보배와 같습니다.

 돈이 아주 많은 집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 즐겁거나 멋진 삶을 보내지 않습니다. 돈이 하나도 없는 집에서 태어나 가난하고 동무한 사람이 슬프거나 고단한 삶을 보내지 않습니다.

 마음이 없다면 슬픈 삶입니다. 마음이 있다면 기쁜 삶입니다. 사랑이 없기에 괴로운 삶입니다. 사랑이 있어서 즐거운 삶이에요.

 몸이 아파 제대로 못 걷는다 하더라도 서운하거나 슬프지 않습니다. 몸이 튼튼해 온누리를 자전거나 두 다리로 돌아다닌다 하더라도 놀랍거나 기쁘지 않아요. 조그마한 텃밭을 앙증맞게 일굴 때에는 조그마한 텃밭을 일구며 보람찹니다. 널따란 논밭을 기운차게 일군다면 널따란 논밭을 기운차게 일구며 보람차겠지요.

 책을 백만 권 읽는 사람은 백만 권을 읽어서 기쁘리라 봅니다. 책을 백 권쯤 읽은 사람은 백 권쯤 읽은 책으로 기쁘리라 봅니다. 책을 한두 권 읽은 사람이라면 한두 권 읽은 책으로 기쁠 테고, 책을 한 권조차 못 읽은 사람은 책 아닌 삶자락에서 책읽기와 같은 기쁨을 누리리라 봅니다.


.. 그 말이 라니아의 마음을 안심시켜 주지는 못했습니다. 라니아에게는 6층도, 승강기도 상상조차 해 보지 않은 것들이었으니까요 …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뭔지 모를 물건들이 곽 들어찬 작은 방에 혼자 남겨진 라니아는 매트리스 위에 놓인 검고 흰 옷들을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화려한 옷감에 익숙한 라니아에게는 그 옷들이 매우 슬프게 느껴졌어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라니아는 그 옷들을 어떻게 입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 늘 동생들 사이에서 꿈과 입김과 움직임이 정신없이 뒤섞이는 가운데 잠을 자곤 했던 라니아에게는 여기서, 시끄러운 소리는커녕 뒤척이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 이 깜깜한 작은 방에서 혼자 누워 잠을 자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 라니아의 하루는 슬프지도 즐겁지도 않았고, 기계처럼 돌아갔습니다 ..  (34∼35, 40, 58, 62쪽)


 삶은 숫자가 아니기 때문에, 가까이 사귈 동무 또한 숫자가 아닙니다. 돈이 더 많아야 좋은 삶이 아니기 때문에, 동무가 더 많아야 좋은 삶이 아니에요.

 도시사람들은 우리 아이를 보며 흔히 “어쩜, 이 시골에 동무도 없을 텐데, 불쌍하네.” 하고 말합니다. 도시사람 아닌 시골사람도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합니다. 그러면 도시에서는 동무로 사귈 사람이 많아서 안 불쌍할까 아리송합니다. 사람은 많은데, 그토록 많은 사람이 모두 다 동무로 사귈 만한 삶을 꾸리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참다운 마음동무가 얼마나 많은지 알 길이 없을 뿐더러, 맑지 못한 바람과 하늘에다가 햇볕과 달빛을 받을 수 없는 터전이 아이한테 얼마나 좋을는지 모를 노릇입니다.


.. 라니아는 자기가 글을 깨치는 것을 사람들이 달가워하지 않으리라는 것, 그리고 부인이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틀림없이 야단을 맞을 것임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습니다 … 라니아가 부인과 주인님의 집에 온 이후로, 라니아는 마치 가구나 기계처럼 살았습니다. 두 사람이 라니아를 구박하지 않는다는 것은 라니아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라니아는 마치 그 집에 없는듯이 살았습니다. 부인과 주인님은 라니아에게 예를 들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요즘 지내기가 어떤지 같은 것을 결코 물어 보지 않습니다 ..  (75, 78∼79쪽)


 책이라면 참다운 책 하나, 참책을 읽으면 됩니다. 백만 권이나 십만 권이나 만 권이나 하는 숫자는 부질없습니다. 돈이라면 참다운 돈 한 푼, 참돈을 벌면 됩니다. 백억 원이나 십억 원이나 일억 원이나 하는 돈크기는 덧없습니다. 동무라면 참다운 마음동무 한 사람, 참동무를 사귀면 됩니다. 동무가 즈믄이니 백이니 열이니 한다 한들 더 반갑지 않아요.

 지식을 쌓자고 읽을 책이 아닙니다. 참다이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자면서 읽는 책입니다. 은행계좌를 두둑히 하자며 벌어들일 돈이 아닙니다. 참다이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자면서 알맞게 벌어 알맞게 쓰는 돈입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참다이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랑을 나눌 마음동무 한 사람이면 넉넉합니다. 괜히 허파에 바람을 넣지 않아도 됩니다. 한 사람이면 넉넉하고, 둘이 되면 고맙습니다. 숫자로 사귀는 동무가 아니라 마음으로 사귀는 동무입니다. 얼굴이나 몸매나 이름값이나 학벌 따위로 따질 옆지기가 아니라, 마음으로 헤아리며 부둥켜안는 옆지기입니다.

 한 사람한테는 백만 평이나 만 평이나 천 평이나 하는 땅이 없어도 먹고살기에 넉넉합니다. 한 평짜리 텃밭에서 거두는 푸성귀만으로도 한 사람이 다 먹을 수 없습니다. 네 식구라면 네 평짜리 텃밭으로도 넘치겠지요. 쌀을 거두는 논은 네 식구일 때 몇 평이면 넉넉하겠습니까.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자면 돈이 아주 많아 크디큰 논밭과 전원주택을 사들여야 하지 않아요. 작은 논밭과 작은 집이면 알맞춤합니다. 작은 사람으로서 작은 보금자리를 작은 손길로 가꾸면 조촐합니다. 애써 큰사랑을 펼치려 하기보다, 작은사랑을 오붓이 나눌 수 있으면 됩니다.

 곧, 시골에서 살든 도시에서 살든 똑같습니다. 작은 한 사람으로서 작은 집에서 작은 꿈으로 작은 믿음을 나눌 수 있으면 어느 곳에서 살든 아름답습니다. 내 마음을 따사롭게 돌보고, 내 사랑을 너그러이 감쌀 수 있어야, 누구하고 어깨동무하든 나부터 좋은 마음동무로 살아갑니다.


 (3) 《라니아가 떠나던 날》이라는 작은 책이란


 크기가 작고 이야기도 작은 책 《라니아가 떠나던 날》을 읽습니다. 《라니아가 떠나던 날》에 나오는 라니아는 여러 차례 떠납니다.

 맨 먼저, 고향마을에서 떠납니다. 다음으로, 착하며 넓었던 마음에서 떠납니다. 그러다가, 도시를 떠납니다. 이때에, 갑갑하며 와르르 무너져내렸던 마음에서 떠납니다. 마지막으로, 라니아를 옭아매던 낡은 쇠사슬에서 떠납니다.


.. 라니아는 학교에 다니지 않습니다. 라니아는 학교가 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동생들이나 마을 아이들도 라니아에게 학교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 없어요. 아무도 학교에 가 본 적이 없으니까요. 라니아에게는 주변의 모든 것들이 바로 학교입니다. 이를테면 새벽부터 동물들을 그늘로 몰아넣는 눈부신 해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라니아는 해가 은혜이자 위험임을 알고 있습니다. 해가 없다면 아무것도 살지 못합니다. 해가 없다면, 덤불이 무성한 주변의 풍경은 라니아가 무척이나 사랑하는 황토색과 적갈색이 감도는 그 빛을 잃어버립니다 ..  (12쪽)


 돈이란 따로 없고 권력이나 학벌 따위조차 따로 없는 시골마을 시골아이 라니아입니다. 학벌 없는 마을에서는 권력 또한 없을 뿐 아니라 돈 또한 없습니다. 자동차라든지 비행기라든지 텔레비전이라든지 인터넷이라든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저러한 여러 가지가 있다면 이러저러한 여러 가지를 더 누리겠지요. 그런데 이러저러한 여러 가지를 누리는 만큼 내 삶을 누리지는 않습니다. ‘물질문명’을 누린다 해서 ‘삶’을 누리지는 않아요.

 라니아한테는 시골마을이 학교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시골마을은 시골마을이지 학교가 아닙니다. 라니아한테는 제 어버이와 이웃 어른이 교사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어버이와 이웃 어른은 제 어버이요 이웃 어른이지 교사가 아니에요.

 시골마을은 라니아한테 수많은 삶과 이야기를 가르쳐 줍니다. 다만, 지식으로 가르치지 않고, 몸으로 가르칩니다. 꽃과 풀과 나무란 꽃과 풀과 나무로 라니아 삶으로 스며들지 꽃이름 풀이름 나무이름으로 외우지 않아요. 이름이란 몰라도 되고, 이름을 붙여도 되지만, 이름에 앞서 꽃과 풀과 나무가 어떤 목숨이요 어떤 자연인지를 몸뚱이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라니아네 어버이와 이웃 어른은 라니아한테 지식을 물려주지 않습니다. 돈도 물려주지 않습니다. 그예 함께 살아갈 뿐입니다. 함께 웃고 울며 떠들고 밥먹으며 살아가는 살붙이입니다. 교과과정에 발맞추어 성교육을 할 까닭이 없고, 학과과정을 살피며 사회정보를 알릴 까닭이 없습니다. 나이와 몸에 걸맞게 일거리를 주고 제몫과 제구실을 하게끔 가만히 지켜봅니다. 대통령 이름이라든지 미국에서 무슨 영화가 나왔다든지 하는 정보가 아니라, 라니아네 마을을 이룬 자연이라든지 라니아에 마을을 살아온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흙을 알려주고 햇볕을 알려주며 물을 알려줍니다.


.. 적당한 시기가 찾아오자, 라니아는 고향 마을에 학교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마을 주변의 모든 아이들을 다 받아들였습니다. 벽도 없고, 책상도 없고, 의자도 없는, 작은 학교입니다. 비가 내리는 날, 비를 피할 수 있는 지붕만 있습니다. 그리고 라니아가 아이들에게 가르칠 내용을 적는 칠판 하나하고요. 아이들은 무릎 위에 판판한 돌을 올려놓고 땅바닥에 앉아서 공부를 합니다. 도시에 살지 않는 아이들에게는 자연스런 모습입니다 … 어떨 때면 라니아는 수업을 하는 대신에 아이들과 함께 산책을 합니다. 라니아가 어렸을 때 여기저기 걸어다니면서 주변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죠 ..  (97, 99쪽)


 줄거리로 보자면, 《라니아가 떠나던 날》은 ‘시골 아이들 노동력을 울궈먹는 나쁜 도시사람’ 이야기를 담은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신매매범이나 성매매를 일삼는 못된 어른들만 시골 아이들을 괴롭히지 않음을, 그저 수수하게 살아간달 수 있는 여느 도시사람 또한 알게 모르게 시골 아이들이 제 삶과 꿈과 뜻을 펼치지 못하도록 가로막거나 짓누르는 모습을 보여주는 책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책이란 줄거리로 읽지 않습니다. 책이란 삶으로 읽습니다. 《라니아가 떠나던 날》이라는 작은 책에 담은 삶을 들여다보면, 라니아로서는 ‘아름다움’과 ‘아름답지 않음’ 두 가지를 또렷하게 느낍니다. 라니아로서는 착하게 사랑하고 싶고 참다이 살아가고 싶습니다. 라니아로서는 아파트 열쇠를 가진다든지, 자동차 열쇠를 흔든다든지, 은행계좌를 여럿 거느린다든지 하는 삶을 사랑하지 않을 뿐더러 알지조차 않습니다. 라니아로서는 ‘눈부신 햇살’과 ‘귀여운 동생’과 ‘좋은 엄마 아빠’하고 어우러지는 고향마을이 즐겁습니다.

 책을 덮으면서, 《라니아가 떠나던 날》은 무척 어여쁜 환경책 하나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내 터전을 돌아보도록 이끌고, 내 보금자리를 사랑하도록 거들며, 내 마을을 살뜰히 보듬도록 돕습니다.

 환경책은 환경운동 지식을 다루는 책이 아닙니다. 환경책은 지구환경이 무너진다는 걱정스러운 외침을 담는 책이 아닙니다. 이런 책도 환경책 갈래 가운데 하나라 하겠습니다만, 참다운 환경책은 내 삶터(환경)를 옳게 느껴 바르게 아끼는 마음결을 내 손으로 추스르도록 도와주는 길동무 같은 책입니다. (4344.1.2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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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위대한 소리들 작고 위대한 소리 시리즈
데릭 젠슨 지음, 이한중 옮김 / 실천문학사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착한 마음으로 시골을 사랑하기
 [환경책 읽기 24] 작고 위대한 소리들


- 책이름 : 작고 위대한 소리들
- 글 : 데릭 젠슨
- 옮긴이 : 이한중
- 펴낸곳 : 실천문학사 (2010.4.16.)
- 책값 : 16000원



 (1) 고마운 삶


 아이는 어김없이 아침 일찍 깨어납니다. 아이 몸으로 보았을 때 너무 일찍 깬다 싶은데, 아이는 쉬가 마렵다 한 번 깨고 물을 마시겠다 두 번 깹니다. 쉬를 누인 뒤 다시금 자리에 눕히고 물을 마시도록 한 뒤 거듭 자리에 눕힙니다. 아이를 눕히고 아이 오줌을 치우려고 마당으로 나오니 온통 하얀 빛깔입니다. 밤새 새롭게 눈이 내렸습니다.

 오줌을 거름통에 붓고 빗자루를 듭니다. 집식구가 뒷간에 갈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집부터 뒷간까지 가는 길이라도 쓸고 들어가자 생각합니다. 장갑을 끼지 않은 손으로 비질을 쓱쓱 합니다. 장갑을 안 끼었으나 손이 시리지 않습니다.

 하품을 하면서 눈을 씁니다. 오늘은 엊그제 눈을 쓸 때보다 비질이 무겁습니다. 엊그제는 온통 꽁꽁 얼어붙은 눈이라 가볍게 쓸렸으나, 오늘은 눈이 바닥 쪽은 솔솔 녹는지 무겁습니다. 살짝 질척한 눈은 비질을 할 때 꽤 힘겹습니다. 조금만 쓸면 그리 힘들지 않으나, 우체국 일꾼이나 택배 일꾼이 들어설 자리까지 길을 쓸자면 허리가 시큰합니다.

 마음은 ‘나도 조금 더 자고 이따가 더 쓸어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몸은 ‘이따 쓸 때에 조금 덜 쓸도록 몇 미터만 더 쓸자’면서 자꾸 움직입니다. 어둑살이 아직 깔린 조용한 멧골자락 길을 꾸벅꾸벅 비틀비틀 하면서도 신나게 씁니다. 쓸다가 허리를 토닥이며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설마 조금 뒤에 눈이 더 내리지는 않으려나. 애써 쓸었는데 눈이 다시 오면 다시 쓸어야 하잖아.

 하늘을 믿자(?)고 생각하며 마저 씁니다. 한참 바깥에 있으나 손은 안 시립니다. 따뜻한 눈이구나 하고 새삼 느끼며 군대살이를 하던 나날 눈하고 얼마나 오래도록 씨름했는지를 떠올립니다. 쓸고 또 쓸어도 다시 쓸어야 하던 눈이라 지겹도록 쓴다기보다 그냥 밥 먹고 쓸고 근무 서다 쓸며 자다 쓸던 눈이었습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쓸고 또 쓸어야 하던 눈이었어요. 그때를 떠올리면 이런 눈쯤이야 아무것 아니지 하고 되뇝니다.


.. 우리 아닌 모든 생물종과 생태계는 그들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거예요. 내가 벨리즈에 가서 재규어를 봤을 때, 그 재규어는 자기 자신이 관찰될 만한 야생동물이라거나 내 기쁨의 원천이 된다는 의식이 없었어요 … 어떤 식으로든 산처럼 생각하는 법을 기억해 내야 하고, 어떻게든 늑대를 대신해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지배문화는(식민화된 정신은) 자연과 전쟁을 벌이고 있으며, 모든 자연의 민족들과 전쟁 중일 수밖에 없습니다 ..  (22, 30, 167쪽)


 여러 날째 물이 녹지 않습니다. 눈을 쓸고 들어왔으나 손을 씻지 못합니다. 어제 길어 놓은 물로 한손만 살짝 씻고는 쌀을 냄비에 붓습니다. 물을 아껴 쌀을 씻은 다음 불립니다.

 10리터들이 물통을 들고 멧중턱에 자리한 이오덕학교로 날마다 물을 길러 오르내립니다. 물이 녹을 때까지는 하는 수 없이 길어서 써야 하고, 설거지나 빨래도 가방에 짊어지고 가서 해야 합니다. 아이를 씻길 때에도 고단하고 집식구 또한 몸을 씻기 어렵습니다. 물을 살짝만 틀어 놓는다고 하다가 그만 얼어붙었습니다. 물 아깝다는 생각이 아니라 물 얼지 않을 걱정으로 더 틀었어야 했으니, 아빠가 잘못했습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생각이 아직 글러먹었습니다. 마음이 어설프니 몸을 고단하게 움직일 노릇이지만, 혼자만 고단하면 좋으나 다른 식구들까지 고단하게 하니 참 형편없습니다.

 형편없는 아빠는 빨래거리와 설거지거리를 잔뜩 짊어지고 날마다 멧길을 오르내리며 생각합니다. 형편없는 살림살이 때문에 모두들 힘들게 하지만, 이렇게 힘든 일을 겪으면서 물씀씀이를 다시금 돌아봅니다. 몸으로 뼈저리게 여러 날 복닥이면서 우물에서 물을 길어 쓰던 지난날 삶을 되짚습니다. 수도물 아닌 우물물 쓰던 예전 달동네 사람들도 빨래며 설거지며 밥하기며 씻기며 몹시 힘겨웠겠지요. 참말, 우리들은 언제부터 수도물을 이리도 홀가분하며 가뜬하게 쓰며 지냈으려나요. 집에서 느긋하게 물을 써서 좋은 일이기는 한데, 집에서 느긋하게 물을 쓰면서 물 고마운 줄을 얼마나 헤아리려나요.


.. 환경문제에 관한 이미지를 다른 속셈으로 이용하여 우리를 흡수하려는 것이지요. 그게 우리 소비사회의 천재적인 능력입니다. 소비사회는 로큰롤을, 민권을, 노동운동을 다 그런 식으로 흡수하여 맥주를 팔아먹기 위한 수단으로 바꿔 버렸어요 … 소비사회는 대규모 인구의 행동을 통제하는 데 대단히 효과적입니다 … 돈이 사람의 가치를 나타내는 유일한 지표가 되게 하고 바람직한 것을 하기 위한 수단이 되는 위계구조를 만드는 것이지요 ..  (36, 40, 41쪽)


 어제 읍내 마실을 하면서 언명태 한 마리 이천 원에 샀습니다. 미더덕도 함께 사려 하니 미더덕은 덤으로 얹어 주었습니다. 아이가 잘 먹는 새우살도 한 봉지 오천 원에 삽니다. 오늘 아침에는 언명태와 새우살과 무를 넣고 조개살이랑 새우젓으로 간을 내는 찌개를 끓일 생각입니다. 애 엄마 먹을 찌개는 나중에 김치국물을 부어 매운맛이 돌도록 따로 차리려 합니다. 아이랑 아빠가 먹을 찌개는 맑은국으로 합니다.

 날마다 거의 똑같은 찌개나 국만 끓이는 아빠 살림살이란, 그닥 미덥지 못한 살림살이인데 좀처럼 다른 찌개나 국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익숙한 대로 끓이기도 하지만, 나 스스로 내 몸과 식구들 몸을 더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부터 내 몸을 더 사랑하거나 생각한다면 내 몸이 바라거나 내 몸에 좋을 밥거리를 장만하려고 힘쓸 테니까요.

 장마당 아주머니가 큰칼로 언명태를 툭툭 끊어 봉지에 담는 모습을 아이랑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무뚝뚝한 듯 볼 수 있으나 무뚝뚝하지 않은 칼놀림처럼, 나 또한 집에서 아침을 차리고 저녁을 마련할 때에 일 분이나 십 분을 아까워 할 노릇이 아니요, 일 분이든 십 분이든 한 시간이든 기꺼이 쓸 노릇입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하루요, 고마운 나날을 선물받아 보내는 삶이라면, 더 흐뭇하고 기쁘게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며, 빨래를 하고 아이를 씻길 노릇입니다.


.. 이라크전쟁을 보십시오. 거기엔 인간이란 없었다는 듯 보도가 되었어요. 20만 명이 죽었는데 그에 대한 정보는 거의 뉴스가 되지 못했어요 …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는 이미지를 흉내내는 건 지당한 일이지요. 그건 인류가 지금까지 언제나 행동하는 법을 배워 온 방식 중 하나이니까요 … 텔레비전을 볼 때 그 경험은 자연의 유기적인 시간을 느끼는 것처럼 차분한 게 절대 아니에요 … 자연에 흐름을 맞추기 위해서는 아주 느리고 조용해질 필요가 있어요 … 이제 사람들은 말 그대로 자연의 세계보다 빠릅니다 … 사람들이 기계적이고 기술적인 세계와 친화적인 존재가 되어 가고 있어요. 그래서 내 생각엔 사람들의 모습도 더 단순해지고 폭력적으로 변해 가고 있는 것 같아요 ..  (117, 120, 121∼123쪽)


 집일이란 끝이 없습니다. 날마다 새롭게 해야 하는 집일을 하다 보면 하루해가 꼴딱 넘어갑니다. 그렇지만 집일은 사랑이기 때문에 끝이 나지 않습니다. 언제나 고스란히 되풀이하는 일입니다.

 내 한 목숨 어느 날 고이 잠든 채 다시 깨어나지 못할 텐데, 깨어나지 못할 마지막 날까지 즐겁게 꾸릴 삶입니다. 사람이란 죽음을 바라보며 꾸리는 나날이 아닌 삶을 헤아리며 꾸리는 나날이니까요. 고단하면서 좋은 삶이고, 홀가분하면서 좋은 삶입니다. 슬프기에 고마운 삶이고, 기쁘기에 고마운 삶입니다.


 (2) 즐거운 삶


 집식구하고 큰방을 치웁니다. 바닥에 불이 들어오는 자리에 따라 책꽂이를 옮기고 깔개와 담요를 새로 옮겨 깔아 놓습니다. 그동안 이리 바쁘고 저리 힘들다는 핑계로 제대로 거느리지 못하던 집살림을 추스릅니다. 겨울이라 큰방 바닥이며 작은방 바닥이며 담요와 깔개를 잔뜩 깔고 이불을 얹었는데, 하나하나 더 털며 숫자를 헤아리니 열여섯 장입니다. 홀로 깔개 담요 이불을 다 털자니 팔이 후덜덜합니다.

 낮에는 눈을 두 번 더 쓸고 밀었습니다. 애써 쓴 눈이지만 다시금 눈이 내려 더 쓸어야 했습니다. 아침 아홉 시 무렵부터 저녁 여덟 시 즈음까지 옴팡 집일로 빙글빙글 돕니다. 저녁에 자리에 누우려니 온몸 구석구석 안 쑤시는 데가 없습니다. 불을 끄고 아이랑 마지막 부대낌질을 하다가 어느새 새근새근 잠듭니다. 애 아빠도 아이도 집식구도 어느덧 곱게 잠듭니다. 몇 시간을 내처 잤을까 알 수 없는 깊은 새벽에 깹니다. 쉬를 하러 바깥으로 나옵니다. 오늘 밤도 날은 차기만 하니 얼어붙은 물이 녹자면 까마득합니다. 반토막에서 홀쪽하게 기운 달을 올려다봅니다. 초승달이지만 꽤 밟습니다. 하늘에 걸린 뭇별도 밝습니다. 구름 하나 보이지 않으며 꽁꽁 언 하늘이고 땅이며 바람이자 숲입니다. 오슬오슬 떨며 한동안 앞마당에서 서성이다가 집으로 들어옵니다.

 작은방 온도가 13도가 되어 보일러가 돕니다. 물은 얼었다지만 보일러까지 얼면 큰일이니 겨우내 틈틈이 보일러를 돌려야 합니다. 12월 3일에 300리터를 넣었는데 얼마쯤 이 기름으로 버틸 수 있나 어림합니다. 한 달을 버티면 하루에 10리터씩 쓰는 셈이요, 하루에 만 원 즈음 쓴 셈입니다. 두 달을 지내면 하루에 5리터씩 쓰는 셈이면서, 하루에 오천 원 즈음 나가는 셈입니다. 기름을 다른 여느 집보다 많이 쓰는지 적게 쓰는지 잘 모릅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 살림에 걸맞게 기름을 쓰며 겨울나기를 합니다.


.. 우리는 아이들을 정해진 길로만 가도록 훈련시키기 때문에 어느 연령이 지나면 다른 무언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지점으로 되돌아간다는 게 도무지 어려워지지요 … 도대체 왜 이끼가 풀이 자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고, 풀은 작은 나무들이 자랄 여건을 만들어 준다는 식으로는 말할 수 없는 걸까요. 그것들은 정말 그렇게 하고 있잖아요 … 아이들은 경기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 자체를 즐기며 친구들과 함께 운동을 하게 되어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폭력단원처럼 행동하도록 학대를 당하게 됩니다 ..  (57, 64, 65쪽)


 펑펑 내리는 눈을 집에서 온식구가 내다보며 생각합니다. 집식구는 눈이 참 멋스러이 내린다고 말합니다. 저도 눈은 우리를 멧골자락에 꽁꽁 가두어 놓도록 내린다고 느끼지만, 다른 눈길로 보면 더없이 멋스럽습니다.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조용히 쌓이고 바람에 따라 이리 날거나 저리 춤추는 눈결은 무슨 그림이고 무슨 사진이려나요. 어떠한 그림과 사진이 눈내리는 결을 담을 수 있으려나요. 흩날리는 눈송이 결을 춤이나 가락으로 옮길 사람이 있으려나요.

 눈이 솔솔 내리던 한낮에 아이하고 마당에 나오고 집 앞쪽 길에 나왔습니다. 아이는 마음껏 이리 달리고 저리 뛰며 눈길을 즐깁니다. 아빠는 함께 눈길을 즐기지 않습니다. 어른이 눈을 밟은 자리는 쓸거나 치우기 어렵거든요. 아빠는 목에 사진기를 걸고 손으로는 비질을 합니다. 언제쯤부터였나 잘 떠오르지 않으나, 스물아홉 달째 함께 살아가는 아이는 “아빠, (사진) 찍어 줘.” 하는 말을 합니다. 눈밭에서 뛰어다니다가 문득 멈춰서는 이 말을 읊습니다.

 아이는 하얀 눈에 제 발자국을 이리 남기고 저리 남깁니다. 발자국 남기기가 재미나는가 봅니다. 아빠는 아이가 발자국을 남긴 데를 슥슥 씁니다. 제 발자국이 지워지자 다른 데에 또 남깁니다.

 요 장난꾸러기라고 할 만하지만, 그냥 놀이라 하겠지요. 어른이야 길이 미끄러울까 걱정이지, 아이야 길이 미끄러우면 미끌미끌 놀면 됩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고, 넘어져서 다치면 며칠 기다려 낫기를 바라면 됩니다.

 눈이 내린다며 우체국 일꾼도 안 오고 택배 일꾼도 오지 않습니다. 여느 면내나 읍내라든지 여느 시골마을까지만 해도 우체국 일꾼이나 택배 일꾼은 바지런히 돌아다니겠지요. 딱히 찾아드는 사람이 없고, 애써 찾아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참으로 조용하면서 참으로 호젓합니다. 이 둘레에 우리 땅은 한 뼘조차 없으나, 이 멧자락과 숲과 눈길은 온통 우리 놀이터입니다.


.. 사람들이 자기 신체로부터, 자기 체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제국의 건설자들은 그 빈자리를 소비재나 군사적인 승리로 채울 수 있지요 … 환경이 피폐해지면 사람이 안정감을 잃게 돼요. 그리고 환경이 그곳에 머물러 살기에 부적절하면 환경을 가꾸고 살거나 그렇게 사는 사람들과 어울려 지낼 이유가 없어지지요 … 길들인 식물만 있는 잔디밭, 가로세로로 쭉쭉 뻗어 있는 도로, 공간을 가려 버리는 건물들 같은 경관만 보다 보면 우리가 세상을 창조한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지게 되지요 ..  (96, 201, 212쪽)


 물을 긷거나 눈을 쓸러 이오덕학교를 오르내리자면, 우리 집 있는 자리에서 볼 때하고는 사뭇 다른 눈나라입니다. 그리 안 높은 산이랄지라도 멧골로 더 깊이 들어서면 가없다 싶을 눈밭 눈꽃 눈나무 눈하늘입니다.

 옆지기가 몸을 조금 더 다스릴 수 있으면 함께 이 눈나라를 바라보고 싶습니다. 읍내로 돌고 돌아 가는 시골버스라도 탈 수 있으면 읍내 가는 멧길을 구비구비 돌며 또 다르게 펼쳐진 눈나라를 즐기겠지요. 얕은 산인 탓인지 이곳으로 산타기를 하러 오는 사람도 없고, 산자전거를 즐기겠다는 사람 또한 없습니다. 사람들은 더 크거나 깊은 산으로 찾아들 뿐입니다. 충청북도 음성으로 산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이 누가 있으려나요. 강원도로 가든 속리산으로 가든 지리산으로 가든 하겠지요. 그러니 이 멧자락이며 멧길이며 온통 우리끼리 즐깁니다. 마을 할매랑 할배를 빼면, 젊은이는 우리 식구만 타는 시골버스는 노상 우리 식구끼리 차지하는 큼직한 택시 같습니다. 읍내에 뭔가 볼 만한 구경거리가 있지는 않으나, 읍내로 오가는 이 길이 좋습니다. 나무를 보고 비탈논을 보며 큰 못물을 보는 길이 좋습니다. 나무숲 사이를 달리는 길이 좋습니다.

 추운 겨울 지나고 새봄을 맞이하면 이제 이 길을 아이는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신나게 오가야지요. 오뉴월에는 둘째 아이를 맞아들여야지요. 둘째는 백일을 보내고 제 두 다리로 막 서고 싶어할 즈음 제 언니랑 마찬가지로 시골버스에서 창밖을 내다보면서 ‘이야, 눈이다.’ 하고 외치며 방방 뛰겠지요.


.. 사랑받지 못한 과거 때문에 스스로를 증오하는 사람들은 자기 증오에 희생될 대상을 찾아야 합니다 … 최고위층 인사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자아 훈련은 공감하는 능력을 마비시키는 것이에요.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엘리트가 그렇게 공감하는 능력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법을 배우는 게 대단히 중요해요 ..  (232, 250쪽)


 애 엄마는 잠자리에서 아이한테 노래를 불러 줍니다. 애 아빠는 눈을 쓰는 마당과 한길에서 아이한테 노래를 불러 줍니다. 애 엄마는 여러 날 걸려 뜨개질로 아이한테 양말 한 켤레 마련해 줍니다. 애 아빠는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밥을 차려 아이한테 내어주고 날마다 아이 옷을 갈아입히며 살아갑니다.


 (3) 《작고 위대한 소리들》 즐기기


 데릭 젠슨이라는 미국사람이 미국땅에서 생태·환경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열두 사람을 만나서 주고받은 이야기를 갈무리한 책 《작고 위대한 소리들》을 읽습니다. 번역에 더 마음을 쏟아 한결 쉬우며 살갑도록 가다듬는다면 얼마나 좋았으랴 싶지만, 이만 한 책을 우리 말로 옮긴 일로도 고맙습니다. 언제나 그러한데, 창작을 하든 번역을 하든 이 책을 ‘열두어 살 내 아이’나 ‘여든 고개에 접어든 내 어버이’한테 읽힌다고 생각할 수 있으면 참말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린이와 어르신하고 함께 읽을 책이라 할 때에는 어떤 눈높이로 어떤 글을 쓰겠습니까. 아이 앞에서 “야생의 자연이 지배하는 천연적이고 마술적인 세상이 부활하는 비전을 갖기 시작했습니다(39쪽)” 같은 말투를 내뱉아도 되겠습니까. “인간만이 할 말이 있다는 생각은 너무나 어처구니없고 우스꽝스런 관념이어서(45쪽)” 같은 겹말 투를 버젓이 써도 되겠습니까. “뉴턴적인 사고방식(87쪽)” 같은 말투를 아이들이 배울까 두렵습니다.

 ‘작으면서 거룩한’ 소리는 따스하면서 넉넉한 소리입니다. 작으면서 거룩한 소리는 사랑스러우면서 아름다운 소리입니다. 작으면서 거룩한 소리는 착하면서 참다운 소리입니다.


.. 진보는 신화입니다. 앞서 언급한, 사회적 행동을 정당화하는 관념들 가운데 하나이지요 … 지금 우리는 오로지 지식을 위해서만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너지와 돈과 시간과 땅과 아름다움을 소진시키고 있습니다 … 지금 환경운동가들은 들을 줄을 몰라요. 우리는 이른바 반대편만큼 강고하고 공격적인 언사를 구사하고 있어요. 저는 그 모든 대립의 관념이 해체되고 더 이상 ‘우리’와 ‘그들’ 사이의 그림자 춤이 없어지면 좋겠어요. 서로의 말을 들어주며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면 좋겠어요. “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당신은 무얼 원하십니까? 우리가 아끼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걱정거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떤 미래를 꿈꿔야 할까요? 우리는 자기 삶터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요?” ..  (48, 91, 269쪽)


 《작고 위대한 소리들》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미국에서 살아가는 미국사람은 예부터 미국땅에서 뿌리내렸던 토박이를 총칼로 죽이고 술담배로 녹여내면서 몇몇 살아남은 사람들한테서 ‘작고 거룩한’ 소리를 귀기울여 듣고는 책으로 엮곤 했습니다. 이제 더는 미국 옛 토박이한테서 작고 거룩한 소리를 들을 길은 없으리라 봅니다. 미국사람 스스로 작고 거룩하게 살아내면서 작고 거룩하다 싶은 소리를 일구어야 합니다.

 이 나라에도 작고 거룩한 소리가 있습니다. 이 나라 곳곳에서 작고 거룩한 소리를 내며 조용히 살아가는 아리땁고 예쁜 사람이 퍽 많습니다. 이름 하나 나지 않고, 힘 하나 없으며, 돈 한 푼 없는 아리땁고 예쁜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그렇지만 한국땅에서 한국터에 걸맞게 작고 거룩한 소리를 내는 사람을 알아보는 사람은 썩 드뭅니다. 지식인은 지식인끼리 사귑니다. 대학생은 대학생끼리 어울립니다. 도시내기는 도시내기끼리 만납니다. 기자는 취재원을 찾아다닐 뿐, 사람을 부대끼지 못합니다. 공무원은 민원인을 대접할 뿐, 사람을 마주하지 못합니다. 교사는 학생을 가르칠 뿐, 사람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나부터 작은 사람이고 작은 삶입니다. 나 스스로 작은 목소리이면서 작은 꿈입니다. 나와 매한가지로 작은 이웃이고 작은 동무요 작은 살붙이입니다. 작은 목숨이자 작은 발걸음이자 작은 살림살이입니다.


.. 자본주의는 본래 즐거움을 인정하지 않으니까요 … 알도 레오폴드, 게리 스나이더, 로빈슨 제퍼스, 에드워드 윌슨 같은 철학자나 시인, 생태주의자의 글을 읽음으로써 그런 성스러움을 다시 일깨우는 게 가능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들의 글을 읽지 않지요 … 시가 산문이나 다른 유의 문학과 다른 점은 말이 우선이라는 사실이에요. 고립되고 고답적인 문자적인 고급문화가 되는 건 시의 목적이 아니지요. 자기만의 작고 외로운 방안에 고립되기보다는 우리를 한데 묶어 주는 게 시지요 ..  (100, 172, 213쪽)


 《작고 위대한 소리들》은 한결같이 이야기합니다. 《작고 위대한 소리들》은 오롯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자본주의 나라 사람들이 너른 생각을 펼치는 《작고 위대한 소리들》은 자본주의야말로 사람맛과 사람내음과 사람결이 조금도 없는 무시무시한 얼거리라고 이야기합니다. 맨앞에서 자본주의를 온누리에 퍼뜨리는 미국땅 사람들인데, 이 책에 나오는 열두 사람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자본주의를 좋아하지 않을 뿐더러, 아예 자본주의는 생각조차 않으면서 살아갑니다. 이들 열두 사람이 생각하는 삶이란 ‘나와 내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를 사랑하는 삶’일 뿐입니다.

 손을 놀리는 삶을 사랑합니다. 손을 내밀어 도와주고 도움받는 삶을 사랑합니다. 손으로 서로를 얼싸안거나 부둥켜안는 삶을 사랑합니다.

 따순 손길 따순 손마디 따순 손아귀 따순 손끝입니다. 투박하면서 수수한 손입니다. 거칠면서 조촐한 손입니다. 고요하면서 끈기있는 손입니다. 차분하면서 정갈한 손입니다. 단단하면서 씩씩한 손입니다.


.. 안다는 게 뭔지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안다는 게 어떤 대상을 일방적이고 지적으로 마스터하는 행위라면, 대상을 기계처럼 낱낱이 분해하는 것이라면 그런 과학자들처럼 알 수 있겠지요. 그러나 어떤 사람과 같이 살면서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할 때 드디어 그녀를 철저히 다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면 무슨 뜻이 될까요? ..  (254쪽)


 착한 마음으로 시골을 사랑할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착한 마음으로 시골에서 살아가면 그지없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북중미 토박이는 하나같이 시골사람이었지 도시사람이지 않았습니다. 아름답게 살다가 죽었다는 니어링 부부는 시골사람으로 삶을 꾸렸지 도시사람으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작고 위대한 소리들》에 나오는 사람들은 시골사람다이 살아갑니다. 도시에서 일거리를 붙잡아도 ‘시골에서 수수하게 살아가는 동네사람’ 매무새로 일을 합니다.

 시골에서 흙과 하늘과 물과 햇볕과 바람과 나무를 사랑하는 몸가짐을 알뜰히 건사하면서 도시에서 살아갈 때에 아름답습니다. 그저 도시내기로서 도시사람으로 지낸다면 아름답지 못합니다. 착한 마음씨를 곱게 다스리면서 도시에서 지낼 때에 아리땁습니다. 그냥저냥 도시내기인 굴레에서 쳇바퀴를 돌듯 돈벌이만 한다면 너무 슬프며 안타깝습니다.

 사랑해야 할 내 삶입니다. 아껴야 할 내 목숨입니다. 돌봐야 할 내 터전입니다.

 착한 내 삶을 사랑하고, 참다운 내 목숨을 아끼며, 고운 내 터전을 돌봐야 합니다.

 커다란 소리에 흠칫 놀라 쳐다볼 수 있겠으나, 커다란 소리가 제아무리 뻥뻥 터져나오더라도 자그마한 소리를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대단하다 싶은 소리에 귀가 쫑긋할 수 있을 테지만, 대단하다 싶은 소리가 시끌벅적 춤추더라도 수수하다 싶은 소리를 아끼는 삶으로 이어가면 좋겠습니다. 가녀린 이웃을 돌보고, 애틋한 살붙이를 보듬으며, 싱그러운 내 몸뚱이를 쓰다듬으면 좋겠습니다. (4343.12.2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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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 - 식량전쟁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본질
월든 벨로 지음, 김기근 옮김 / 더숲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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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많은 사람은 왜 서울로 몰려드는가
 [책읽기 삶읽기 27] 월든 벨로, 《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



 《어두운 승리》(삼인,1998)와 《탈세계화》(잉걸,2004) 같은 책이 한국말로 옮겨진 월든 벨로 님 새책 《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를 읽다. 지구 사회와 경제와 정치를 읽는 눈썰미가 남다르면서 깊다 할 만한 월든 벨로 님이기 때문에, 이분이 쓴 책을 찬찬히 헤아리며 받아들인다면, 올 2010년 12월 5일에 흙으로 돌아간 리영희 님이 쓴 책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내 어리숙하거나 모자란 생각밭을 일구는 데에 도움이 된다.


.. 자본가들은 식량이냐 사료냐 연료냐를 따지지 않는다. 그것은 수익성에 따라 언제든 바꿔치기할 수 있는 투자 대상의 하나에 불과하다. 따라서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 한 세계 대다수 인구의 궁핍한 상황을 해소시키는 일 따위는 자본가들에게 있어 이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 갈수록 줄어드는 농토에서 보다 많은 것을 짜내기 위해 분투하는 이들 플랜테이션 임시 노동자들의 기본적 생계 문제를 자본가들이 도외시하고 있다는 것 ..  (30∼31, 43쪽)


 《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라는 책은 참 잘 짰고 잘 엮었으며 잘 쓴 글이라고 느낀다. 오늘날 한국사람들이 이런 책 하나쯤은 곁에 놓고서 찬찬히 읽으며 생각해야 한다고 느낀다.

 사랑하는 짝꿍이랑 혼인을 해서 아이를 낳은 젊은이들이 거의 아무런 생각을 않고 예방접종을 맞히는데, 스스로 예방접종과 병의학과 병원 얼거리를 살피거나 익힌다면, 삶과 넋이란 크게 달라진다. 그러나 스스로 예방접종 흐름과 성분을 헤아리는 일이란 거의 없다. 한미자유무역협정이든 4대강사업이든 어슷비슷하다. 숱한 사람들이 비판을 하거나 편들기를 하거나 하면서 쏟아내는 말마디를 읽는 일도 나쁘지 않다만, 이런저런 ‘딴 사람 생각들’만 읽어서는 고갱이를 캐내지 못한다. 나 스스로 몸으로 부딪히면서 살피거나 배우거나 알아보아야 비로소 고갱이를 짚는다. 나부터 고갱이를 제대로 알아내고 나서야 숱한 사람들이 떠드는 목소리를 듣고 새겨야지, 고갱이를 제대로 모르는 채 숱하게 떠도는 소리만 듣는다면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린다. 방송꾼 손석희 님이 이끄는 토론 풀그림이 퍽 사랑받기는 하지만, 우리는 이런 토론 풀그림을 볼 까닭이나 값어치가 없는 줄 옳게 깨닫지 못하기 일쑤이다. 왜냐하면 ‘마무리(결론)’는 처음부터 다 나왔으니까. 어떤 말썽거리 하나를 놓고 이야기(토론)를 해야 한다면,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 하는가는 진작에 뻔하니까. 이리 해야 옳거나 저리 해야 맞다는 말을 얼마나 슬기롭거나 또박또박 밝히느냐는 부질없는 놀음놀이이다. 옳거나 맞는 길을 조용히 깨닫고 받아들이면서 내 삶자리에서 옳거나 맞는 일을 하면 된다.

 이리하여, 《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라는 무척 괜찮은 책은 오늘날 사람들한테 널리 제대로 읽혀야 하는 책인 가운데, 책이름으로 모든 이야기를 다 읽어낼 수 있다. 자, 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 우리 코앞에 있다. 우리 밥상에 있다. 그러면 뭐가 말썽거리이느냐고? 바로 우리 코앞에 그 많던 쌀과 옥수수가 놓였기 때문에 말썽거리이다. 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우리 코앞이나 밥상에 놓이면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한테는 우리가 그날그날 비울 밥그릇 부피에 걸맞는 만큼만 쌀과 옥수수가 있으면 넉넉하다. 우리 스스로 다 먹지 못할 만큼 지나치게 많은 쌀과 옥수수가 우리한테 있으면 하나부터 열까지 뒤틀린다. 나 때문에 굶는 사람이 수두룩하고, 나 때문에 지구 사회는 전쟁과 푸대접과 따돌림으로 춤을 춘다. 사람들이 제아무리 ‘수치와 지식’에 따라 ‘남녘나라 사람들이 버리는 밥쓰레기 부피만으로도 남녘땅과 북녘땅에서 굶거나 가난한 사람을 모두 먹여살리고도 남는다’는 이야기를 알면 뭐 하는가. 삶을 스스로 안 바꾸는데. 삶을 스스로 안 고치는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안다지만 ‘무엇’이라는 일을 안 하는데.


.. 최초로 옥수수를 재배했던 멕시코인이 어찌하여 미국으로부터 수입되는 옥수수에 기대어 살게 되었는가? … NAFTA 협약 당시 옥수수에 대한 보호관세를 향후 15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없애 나간다는 합의가 있었지만 미국산 옥수수가 밀려들면서 가격이 반으로 폭락함에 따라 이후 멕시코의 옥수수 농업은 계속해서 위기를 맞게 되었다 ..  (69∼70, 77∼78쪽)


 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바로 우리 코앞에 있지만, 이 쌀과 옥수수는 미국 재벌이나 한국 재벌이 갖다 놓지 않았다. 우리 코앞에 있는 너무 많은 쌀과 옥수수는 바로 우리 스스로 갖다 놓았다. 미국과 한국 재벌은 이런 일을 우리들 스스로 하도록 내몰면서 뒤에 앉아 조용히 큰돈을 벌어들인다. 돈 놓고 돈 버는 사람은 손이나 몸을 쓰지 않는다. 입으로 말 한 마디 벙긋 하면서 모든 일과 갈무리를 우리들이 하도록 시킨다. 일도 우리가 하고, 돈도 우리가 잃으며, 삶도 우리가 망가뜨리는 얼개이다.

 주식으로 정작 돈을 버는 재벌들은 주식시장에 다리품을 팔며 나온다든지 주식시세표를 보지 않는다. 아니, 주식시세표 따위는 볼 까닭이 없으며, 볼 일이 없다. 주식시장이 흔들리거나 움직일 일만 조용히 하면 그만이니까. 이러는 가운데 문어발 회사 얼거리에 걸맞게 온갖 곳에서 곁다리로 돈을 번다. 곁다리로 돈을 벌 때에는 이런저런 ‘일자리를 만들’어서, ‘자잘한 일’을 바로 우리 같은 여느 사람이 하도록 시키면서 적잖은 연봉을 품에 안긴다. ‘스스로 흐뭇하게 여겨 깊은 골이나 속살을 굳이 들여다보거나 캐내거나 알아채지 않도록’ 사로잡는다. 이른바 ‘사랑놀이·운동경기·영화(sex·sports·screen)’ 같은 놀이거리를 ‘곁다리 장사판’으로 마련해서 여느 사람인 우리들한테 선물보따리처럼 내놓는다. 돈을 주고 이름값을 베풀며 힘부리기를 봐주면서 다람쥐 쳇바퀴 놀이에 빠져들도록 붙잡는다.

 《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를 차근차근 새겨서 읽는다면 이와 같은 흐름과 이야기를 잘 짚을 수 있으리라 본다. 그렇지만, ‘세계 경제와 자본과 사회와 정치가 어떤 본질인가’ 하는 ‘지식읽기’로 이 책을 들여다본다면 아무것도 읽지 못한다. 고작 지식조각을 얻고 그친다. ‘세계화 본질 알기’라든지 ‘신자유주의 본질 파헤치기’는 부질없는 지식놀음이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밑삶(본질이 되는 삶)이란, 나 스스로 내 삶터에서 내 삶을 얼마나 바보스레 망가뜨리는가를 얼마나 빨리 깨우쳐서 나부터 내 삶을 아름다우며 즐거운 길로 접어들도록 거듭날 수 있는 길을 어떤 매무새와 몸가짐과 땀방울로 열어젖힐까 하는 한 가지이다.


.. 농촌을 떠나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 들어간 사람들은 일단 그곳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지면 농촌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 대기업가들이 너도 나도 농업연료 산업에 몰려드는 이유는 1980년대에 생명공학이 그랬던 것처럼 이 분야가 미래에 커다란 수익을 가져다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  (88, 189쪽)


 우리 식구들 살아가는 곳은 행정구역으로는 충북 충주시이지만, 충북 음성군에 9/10가 둘러싸인 멧자락이다. 모든 볼일은 음성읍에서 본다. 충주시 면사무소로 가는 길은 음성읍 어느 면사무소로 가는 길보다 두 곱은 멀다. 충주 시내로 가는 길이나 서울 시내로 가는 길이나 얼추 비슷하다. 언제나 음성읍으로 가서 볼일을 보고, 음성 장마당에 찾아가서 먹을거리를 장만하곤 한다. 지난달께였나 우리 식구들은 처음 알아보았는데, 음성 읍내에 가면 곳곳에 “음성읍 인구 9만 돌파 축하”라 적힌 걸개천이 나풀거린다. 참 사람이 적기는 적구나 싶은데, 9만에서 10만이 될 수 있을는지 없을는지 알 길은 없다. 음성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마치면 으레 음성에 머물지 않고 서울로 흘러나가리라 본다. ‘좁은’ 시골‘구석’에서 무슨 일자리를 찾겠는가. 그렇다고 오늘날 아이들이 시골자락에서 농사짓기를 하면서 농사꾼 삶을 아기자기하게 꾸리겠다고 꿈을 꾸겠는가. 이제 한국땅에는 홍성 풀무농업고등학교를 빼고는 ‘농사짓기 가르치는 고등학교’는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시골 고등학교 가운데 시골학교다운 매무새를 건사하는 데는 없다. 시골사람이면서 시골살이를 즐기려는 매무새를 아이들한테 보여주면서 이어주는 어른은 너무 적다. 서울 시내를 닮으려 하는 시골 읍내인데, 이런 작은 시골 읍내에서 무슨 재미로 놀겠는가. 땅 넓고 물 좋으며 사람 많은 서울로 몰려들어야지.

 멧골집에서 아이 손을 잡고 시골길을 걸어 하루 여섯 대 오가는 시골버스를 한참 기다려서 타노라면, 이 시골버스를 타는 젊은 사람은 우리 식구뿐이요, 이 시골버스를 타는 아이 또한 우리 아이뿐이다. 시골버스를 타는 사람은 모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인데, 가끔 이주노동자가 탄다. 시골 젊은 사람이나 시골에서 아이 키우는 사람은 한결같이 자가용을 몬다. 자가용을 몰고 더 큰 마트로 가서 더 값싼 물건이나 먹을거리를 산다.

 시골에서 살아가며 시골사람 삶을 사랑하기에 만만하지 않고 만다. 시골에서도 도시에서와 똑같이 텔레비전을 바라보면서 똑같은 연속극이랑 연예인 이야기에 젖어든다. 똑같은 운동경기를 ‘똑같은 결과(우리 편만 이기기)’가 나오기를 바라면서 들여다보고, 똑같은 회사일에 똑같은 돈벌이에만 사로잡히면서 살아간다. 삶을 꾸리는 나날이 아니라, 돈만 버는 나날이기에, 사람들은 시골에서 살아갈 까닭을 느끼지 못한다. 삶을 꾸리는 나날이 아닌, 돈만 벌면 좋은 나날인 나머지, 서울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드글드글 몰려들밖에 없으며, 드글드글 몰려드는 이 많은 사람들이 ㅅㄱㅇ(서울대·고려대·연세대) 같은 대학교를 마쳤든 다른 대학교를 다녔든 책읽기를 거의 하지 않을 뿐더러, 책읽기를 삶읽기로 여미지 못한다.

 알맞게 먹어야 알맞게 배가 부르며 알맞게 일을 할 수 있는데, 지나치게 배불리 먹으면 지나치게 배가 불러 일이고 뭐고 흐트러진다. 지나치게 벌고 쓰며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다 보니, 서울이나 부산처럼 큰도시는, 또 인천이나 대전이나 광주처럼 꽤 커다란 도시는 살가우며 사랑스러운 터전으로 뿌리내리는 길을 잊거나 잃는다. 사람이 사람을 아끼며 사랑해야 비로소 보금자리이면서 마을인데, 보금자리이면서 마을로 발돋움하거나 한결 튼튼하게 서려는 곳은 한국땅에서 어디가 있다 할까. 시장이든 군수이든 구청장이든 면장이든 모조리 ‘경제발전 숫자’에 목매달지 않는가. 시골학교이든 도시학교이든 교장과 교감은 몽땅 ‘더 손꼽히는 대학교에 더 많은 숫자를 넣는’ 데에 얽매이지 않는가.

 일다운 일을 잃고, 배움다운 배움이 없으며, 사랑다운 사랑이 자리하기 힘들지만, 돈이 넘치고 이름값이 높으며 힘부리기 좋은 도시요 큰도시요 서울이다. 도시내기 삶이 바보스러울밖에 없다고 깨닫고 싶다면 《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 같은 책을 읽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내 삶이 얼마나 바보스러운가를 깨닫기만 할 뿐 아니라, 아름다운 삶으로 고치고 싶으면 나중에는 《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 같은 책을 애써 읽지 말아야 한다. 척 보아도 무슨 이야기를 담았는가 알아채야 하고, 숫자와 통계와 지식과 정보와는 다른 자리에 있는 삶과 사람과 사랑을 받아들여야 한다. (4343.12.11.흙.ㅎㄲㅅㄱ)


― 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 (월든 벨로 글,김기근 옮김,더숲 펴냄,2010.3.8./14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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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도시 볼로냐를 가다 - 약부터 집까지 협동조합에서 산다
김태열.김현경 외 지음 / 그물코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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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 도와 아름답게 살아갈 길이란
 [환경책 읽기 23] 협동조합도시 볼로냐를 가다


- 책이름 : 협동조합도시 볼로냐를 가다
- 글·사진 : 김태열, 김현경, 우미숙, 전홍규
- 펴낸곳 : 그물코 (2010.10.1.)
- 책값 : 4000원



 (1) 살아가는 터전


 읍내 마실을 하면서 쥐끈끈이를 삽니다. 끈끈이 둘 든 봉지는 500원 합니다. 이 봉지를 둘 삽니다. 우리 멧기슭 집에 기어드는 쥐들이 파 놓은 구멍을 여기 막고 저기 막고 하지만 아직 찾지 못한 어느 틈을 파고들며 자꾸자꾸 들어오고 또 들어옵니다. 오늘 새벽까지 아홉 마리째 잡습니다. 쥐들은 잡히고 거듭 잡히지만 집 바깥으로 나갈 생각을 않습니다. 방으로 나와 돌아다니다가 저들이 판 구멍 앞에 놓은 끈끈이에 붙들려 숨을 거둡니다.

 쥐는 사람 때문에 살 자리를 잃어 자꾸 사람 사는 집으로 기어드는지, 아니면 쥐는 처음부터 사람 사는 집 한켠에 기어들어 밥거리를 얻는지 궁금합니다. 여느 멧짐승이나 멧새는 멧자락에 보금자리를 마련하여 살면서 사람이 일구는 논이나 밭으로 먹이마실을 나온다지만, 쥐만큼은 사람 살림집 안쪽까지 파고들려고 합니다.

 시골집이니까 쥐가 있고 거미가 있으며 갖은 벌레가 있겠지요. 도시에 머물던 때에도 거미가 있었으나, 거미보다는 개미와 바퀴가 훨씬 많았습니다. 도시에서는 골목마다 골목고양이가 많아 쥐가 살아날 틈이 얼마 없었을까요. 시골자락에서는 집마다 고양이를 섣불리 못 기를 뿐더러, 길러도 집에서 목줄을 해 놓아야 하니 쥐들이 살 판 난 셈일까요. 시골마을에서 고양이를 목줄 안 하고 길렀다가는 마을 닭을 모조리 잡아 죽인다 해서 기를 수 없습니다.

 쥐는 쥐대로 흙땅에서 굴을 파고 살 때에 가장 아름답고, 사람은 사람대로 이 흙땅에 집을 지어 살 때에 가장 곱다고 생각합니다. 서로서로 제자리를 잘 지키며 건사할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살붙이가 자가용을 안 몰고 온갖 전기 제품을 안 쓴달지라도 둘레 숱한 사람들은 갖은 물질문명을 누릴 뿐더러, 더 커다란 시멘트 아파트에다가 땅장사를 그치지 않습니다. 끔찍한 토목공사에 쓰라는 세금을 내고 싶지 않아도 이 나라는 간접세가 워낙 커서, 우리 살붙이가 뭐 하나만 해도 4대강사업뿐 아니라 거님길 돌을 갈아엎는 데까지 부질없는 돈이 자꾸 쓰이고 맙니다.

 사람들은 사람 스스로 사람 삶터를 아기자기하게 돌보거나 아리땁게 여미지 않아요.


.. (볼로냐는) 주요 관광지가 아니다 보니 도시 전체가 번거롭지 않다 ..  (9쪽)


 인천 골목동네에서 태어나 자라는 동안, 동네가 복닥복닥 시끄럽지 않아 좋았습니다. 그렇지만 공장이 지나치게 많고, 바닷가로는 나가 보기 까다로워 꽤 못마땅했습니다. 인천 골목동네에서 옆지기를 만나 아이를 낳으며 살던 동안, 호젓한 안골에서 살뜰한 이웃하고 사귀며 수수하게 살림을 꾸릴 수 있어 기뻤습니다. 그러나 인천 또한 도시인 까닭에 달삯을 많이 치러야 할 뿐더러, 이곳에서 먹고살자면 더 많은 돈을 끝없이 벌어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터라 몸과 마음이 느긋이 쉬기 힘들었습니다.

 시골 살림집으로 옮겨 살아가면서 생각합니다. 벌써 여러 해 앞서 시골로 살림을 옮긴 ‘그물코’라는 출판사가 있는데, 서울에서 다달이 80만 원 달삯을 내고 일꾼을 둘 두면서 책을 펴낼 때에는 책을 더 많이 팔기도 하고 이렁저렁 버티기는 했으나 빚이 늘기만 했다는데, 시골로 옮기고 나서는 빚이 차츰 줄면서 그렁저렁 먹고산답니다. 우리 살림집도 그러한데, 시골에서 지내는 동안 달삯 걱정을 안 합니다. 술 마실 일도 드물지만, 술 사러 읍내나 면내로 나다니기 벅찹니다. 아이를 자전거에 태우고 마실을 다녀올 때에 가끔 보리술 한두 병을 장만하곤 하지만, 이제는 이렇게 장만하고픈 마음이 딱히 들지 않습니다. 한 병에 기껏 1600원인데, 이 돈으로 아이가 먹을 밥거리를 하나 더 장만한다든지, 능금이나 귤이나 묵을 사 오든지 하자고 생각합니다. 어제는 읍내 장마당에서 밤이랑 두부랑 조개젓이랑 사들였습니다. 한창 밤이 익어 톡톡 떨어질 때에는 산에서 줍기도 하지만, 밤철이 지난 뒤에는 읍내 장마당에 나가 사서 먹습니다.

 읍내 장마당은 닷새에 한 번 섭니다. 장마당이 열릴 때마다 꼬박꼬박 찾아가지는 않습니다. 우리 세 식구는 하루에 두 끼니를 먹을 뿐더러, 감자랑 고구마랑 밥이랑 무랑 김치랑 해서 얼마든지 배부릅니다. 아이가 까까 노래를 할 때에 늘 못 들은 척하고 있다가 가끔가끔 자전거에 수레를 붙여 아이랑 마실을 하며 한둘쯤 사 옵니다.

 아마 우리한테 자가용이 있다면, 아이가 까까 노래를 부를 때마다 부릉부릉 몰아 휭 하고 읍내이든 면내이든 시내이든 찾아가서 잔뜩 사들였을는지 몰라요. 우리가 도시에서 그대로 남아 지낸다면 아이는 아빠 손을 잡아끌면서 ‘저기 가게에 가자’고 졸라댔을 테고요. 가게 하나 보자면 걸어서 두 시간 남짓 가야 하고, 자전거로도 삼십 분은 달려야 하니까, 집 바깥으로 마당에만 나온다든지 산에 간다든지 하면 아이는 까까 노래를 더 안 부릅니다. 아마, 못 부르지 않나 싶어요.


.. 겉으로 보기에 도시 미관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풍경이지만, 낡고 더러워도 허물고 다시 짓지 않으며, 오래된 것을 있는 그대로 간직하는 모습에서 국가에 대한 자긍심과 옛것에 대한 고집이 보인다 ..  (10쪽)


 저는 일찍부터 헌책방마실을 즐기면서 우리 나라 곳곳 헌책방을 찾아다니며, ‘헌책방이 깃든 동네 골목’을 요모조모 누비곤 했습니다. 나라안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헤아려 보면, 멋스럽기는 부산 골목이나 목포 골목이 참 멋스럽다 할 만하지만, 살내음 짙기로는 인천 골목만 한 데는 못 보았습니다.

 제가 인천에서 태어나 자라 이렇게 느낀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고개를 갸웃갸웃했지만, 옆지기랑 아이랑 함께 살아가며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흙 한 줌 없이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꽉꽉 막힌데다가, 인천은 ‘서울과 경기도 곳곳으로 올려보낼 물건을 만드는 공장’이 수두룩합니다. 일본이 이 나라를 식민지로 내리누를 때에는 조선 나라 물건을 빼내는 항구요, 나라밖 물건을 서울로 들여보내는 길목이었습니다. 인천사람이 인천에서 뿌리내리며 옹기종기 살도록 북돋우던 적이란 없고, 늘 서울로 보내거나 서울로 갈 물건과 사람이 거치는 자리이다 보니, 시설이든 문화이든 터전이든 엉망진창이거나 아예 없곤 합니다. 그야말로 빈터요 빈몸이에요. 이런 데에서 살림을 꾸리는 사람들은 도시에서는 더 밑바닥 가난쟁이요, 시골에서 살기 벅차 도시로 흘러온 또다른 밑바닥 가난쟁이입니다. 서로서로 힘들고 빠듯한데, 좀처럼 햇볕 쬘 틈이 없습니다. 이런 나날을 수없이 보내고 거듭 보내면서 작은 땅뙈기 하나 소담스러운 줄 온몸으로 깨달으며 손바닥 텃밭을 일구고, 꽃그릇 농사를 짓습니다. 집 안쪽이든 골목이든 어디이든 땅 한 뼘 놀리지 않아요. 푸성귀 씨앗을 뿌리고 나무를 심습니다. 때로는 꽃씨를 함께 심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집이든 다 아이를 낳아 키우잖아요. 아이를 키우는 집은 꽃씨를 심어 함께 키웁니다. 나중에 아이가 커서 제금을 난 뒤에도 꽃씨를 심어 키우는 버릇은 그대로 이어집니다. 할마시 할아바시가 되어도 골목골목 꽃잔치가 이루어지는 밑바탕은 이런 데에 있어요. 오래되었다는 인천 중구와 동구 골목골목에 아기자기한 꽃내음이 조촐히 펼치지는 뜻은 이런 뿌리에 있습니다.

 비거나 헐린 집터마다 곧바로 돌을 골라 텃밭을 일구는 데는 인천뿐입니다. 이들, 돌을 골라 텃밭을 일구는 동네사람은 ‘빈 집터 땅임자’가 아닙니다. 그러거나 저러거나 집이 하나 비며 무너지면, 이 무너진 집 나무를 땔감으로 쓰든 기둥으로 삼든 뭐로 하든 알뜰히 쓰고, 돌은 돌대로 바닥을 다지는 데에 쓰든 울타리를 쌓든 하고, 바로 이 집자리 바닥을 갈고 일구어 씨를 심습니다. 동인천북광장을 만든다며 집을 잔뜩 밀어버린 한켠에서는 ‘제대로 보상하며 목숨줄을 지켜 달라’ 외치는 분들이 천막농성을 하는데, 이분들 천막 앞 빈터에도 어김없이 텃밭이 있습니다. 어느새 건물 부스러기를 모조리 (손수) 치운 다음 돌을 고르고 흙을 갈아 배추며 무며 상추며 잔뜩 길러내요.


.. 도시에서 구하기 힘든 지역 특산물과 친환경 먹을거리를 구입할 수 있고 책도 읽을 수 있으며, 조합원 할인가격으로 책을 구입할 수 있는 곳. 가까운 사람들과 커피와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색다른 문화공간인 암바시아토리 ..  (117∼118쪽)


 ‘에버랜드’라는 이름을 쓰는 곳이 예전에 ‘자연농원’이지 않았나 싶은데, 이곳 용인땅 에버랜드라는 데에서는 해마다 튤립잔치이니 장미잔치이니 벌입니다. 하나같이 큰돈을 들여 튤립이니 장미이니 어마어마하게 심어 놓고 숱한 일꾼이 땀흘려 돌보며 예쁘장하게 꾸밉니다.

 저는 이 꽃잔치에 한 번도 가 보지 않았습니다. 내 살림집하고 너무 멀기도 할 뿐더러, 하루하루 먹고살기에 빠듯하기도 하지만, 아이를 돌보고 키우면서 엄두를 내지도 못하는데, 구태여 그토록 먼 데까지 꽃마실을 갈 까닭이 없기도 합니다. 서쪽 바다 꽃지라는 데에서도 무슨 꽃잔치를 해마다 벌이는 듯한데, 이런 데에도 애써 찾아가지 않아요. 왜냐하면 인천 골목동네에서 살던 때에는 몇 걸음만 거닐면 골목골목 꽃잔치였거든요. 인천 중구 내동 붉은벽돌집 2층에 깃들 때에는 1층에 사는 집임자 할매와 할배가 온 집안을 꽃누리로 돌보았습니다. 2층에 사는 우리가 조그마한 앞마당에 빨래나 이불을 널 자리가 없을 만큼 온통 꽃누리였어요. 어느 골목을 가든 이 같은 꽃누리를 쉬 마주합니다. 자동차가 들어서지 못하는 골목이라면 더 놀랍고 어여쁜 꽃누리예요. 흔히들 ‘차가 못 들어가는 골목’에 어떻게 사느냐고, 짐을 어찌 나르거나 옮기느냐 걱정하지만, ‘차가 안 들어가는 골목’에서 살아가는 분은 굳이 당신 살림집을 옮기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곳이 그예 좋으며 넉넉한 살림자리인데 차가 들어오느니 마느니가 아니라, 살아가기 좋도록 꾸미느니 마느니를 헤아립니다.


 (2) 일하는 터전


 엊저녁, 아이 아빠는 아이랑 잘 안 놀아 주었습니다. 아이 아빠는 몸이 고단하기도 했으나, 식구들 먹여살릴 밥벌이 글을 쓴답시고 아이가 심심해 하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아이 아빠가 이렇게 하면 안 되는 줄 알지만, 새로 써내려 하는 책 밑틀을 다져야 하기 때문에 여러 시간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글을 쓰며 마음 한켠으로는 ‘내가 아무리 좋다 할 만한 글을 쓴달지라도 이렇게 아이하고 놀지 못한다면 이런 글이 무슨 보람이 있는가?’ 하고 뉘우칩니다. 잠자리에 누우면서 아이한테 미안하다 말합니다.

 아이를 겨우 재워 놓고 아빠 또한 힘들게 잠들면서 다시 생각합니다. 이런 매무새라면, 아이랑 적게 놀고 아빠 일만 더 붙잡는 매무새라면, 도시에서 살든 시골에서 살든 똑같이 바보스러운 삶이 아니겠느냐고. 새벽에 더 일찍 조용히 일어나 후다닥 글을 쓰든, 아이하고 실컷 놀아 주고 나서 아빠가 따로 글을 쓸 말미를 얻든 할 노릇이 아니겠느냐고.


.. 협동조합 안에서는 어떤 경제위기 상황에서도 심각한 고용불안이 일어나지 않는다 … 이들의 공통점은 혼자 할 수 없는 일을 여럿이 함께 하는 것이다 … 산업화 이전에는 다른 사람들을 물리치고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개인과 사회가 발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지만, 이제는 서로 협동하는 것이 모두가 고르게 발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  (13, 23쪽)


 골목에 깃드는 살림이라면 골목을 넉넉히 품에 안아야 즐겁습니다. 바다에 깃드는 살림이라면 바다를 넓게 가슴으로 맞아들여야 기쁩니다. 멧자락에 깃드는 살림이라면 멧길과 멧기슭과 멧자락을 곱게 온마음으로 얼싸안아야 사랑스럽습니다.

 논농사를 지을 수 있고 밭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다. 논밭농사 다 할 수 있고, 한 가지만 하면서 다른 한 가지는 둘레 농사꾼한테서 얻을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몫을 다 해내기는 어렵고, 한 가지씩 차근차근 하면 됩니다. 아마, 아이 아빠인 저부터 이렇게 차근차근 한 가지씩 해야겠지요. 아직 시골집으로 옮긴 지 다섯 달째이니, 서두르지 말되 너무 늘어지지 않도록 다스려야겠지요. 어제도 콩알을 깠어야 했는데 못 까고 지나갔어요. 그제는 조금 깠으나 아직 까야 할 콩이 퍽 많습니다. 늦여름에 시골집에 깃드느라 텃밭 하나 알뜰히 일구지 못했는데, 엎친 데 덮친다고 우리 살림이 시골로 옮기고 나서부터 큰비가 끊이지 않고 몰아치면서 텃밭 푸성귀를 제대로 건사하기 힘들었어요.

 그래도, 이웃 농삿집 살림을 들여다보면, 이런 말은 핑계입니다. 큰비가 끊이지 않건 비바람이 쉬지 않건, 참다이 농사짓는 이들은 이런 날씨에도 얼마든지 곡식과 푸성귀를 거둡니다.


.. “이익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협동조합을 하는 것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주식회사 만드는 것이 더 쉽지요. 행정업무나 자본과 조직을 컨트롤하기가 더 쉽기 때문입니다. 협동조합은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닙니다. 자기 삶을 걸고 (진정한) 사업가 정신을 가진 사람이 협동조합을 만듭니다. 협동조합을 선택한 것은 경제적인 면을 본 것이 아니고, 개인이 생각했던 목표를 이루는 것과 함께 문화적·사회적·정치적인 면도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협동조합을 해서는 부자가 될 수 없습니다.” ..  (33쪽)


 그나저나 시골에는 다 늙은 사람만 가득합니다. 좀 젊다 싶은 사람은 참 드뭅니다. 젊다 싶은 사람도 드물고 어리다 싶은 사람도 드물어요. 읍내로 나가 보면, 어린 중·고등학교 남녀 학생들이 짧디짧은 치마에 허벅지에 꼭 끼는 바지를 입고 주머니에 두 손 쿡 쑤셔박은 채 낄낄깔깔 떠들어대며 돌아다니는 모습을 곧잘 보지만, 스무 살부터 서른 살 나이에 이르는 젊은이는 웬만해서는 찾아보지 못해요. 어린이도 참 보기 힘들어요. 시골 읍내에서도 학원에 가랴 집안에서 셈틀놀이를 하랴 바쁠는지 모르지만, 마음껏 뛰노는 어린이를 마주하기란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인천에서도 엇비슷했어요. 제주에서도 다르지 않았어요. 부산에는 사람이 아주 많으니 이렇게까지 느끼기는 힘들지만, 부산에서도 부산에 깃들며 뿌리를 내리기보다 서울로 나아가려는 사람이 꽤나 많습니다. 온나라 어리거나 젊은 사람은 모조리 서울로만 몰려드는 듯해요. 저마다 제 고향마을을 살찌우지 못하거나 고향마을에서 아름다이 살아갈 꿈을 보듬지 못해요. 좁디좁은 서울에서 서로 아웅다웅하거나 툭탁질을 합니다. 더 올라서려 하고, 더 움켜쥐려 하며, 더 악착같이 굽니다.

 키 161센티미터인 사람이 있으면 161.1센티미터인 사람이 있고 170센티미터나 150센티미터인 사람이 있어요. 다 다른 대로 좋거나 나쁠 구석이 따로 없습니다. 다 다른 대로 그예 예쁜 사람입니다. 다달이 200만 원쯤 벌어야 할 까닭이란 없고, 다달이 190만 원을 벌든 180만 원을 벌든 170만 원을 벌든 …… 100만 원을 벌든 90만 원을 벌든 …… 50만 원을 벌든 40만 원을 벌든 무엇이 다르려나요.

 우리는 저마다 어느 만큼 사람답게 살아가느냐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하지 않으려나요. 서로서로 어느 만큼 착하고 참다우며 어여삐 얼크러지느냐를 느낄 줄 알아야 하지 않으려나요.

 겨루기·점수내기·돈내기·힘내기·이름내기·장사내기·집내기…… 들을 하는 곳에서는 사랑이 씨를 내리지 못합니다. 이런 데에서는 믿음이 줄기를 올리지 못합니다. 이런 자리에서는 아름다움이 꽃피우지 못합니다.

 생각해 보셔요. 사람이 가장 많다는 서울에 ‘생활협동조합’이 얼마나 되나요. 부산에는? 대구에는? 인천에는? 대전에는? 울산에는? 광주에는? 이런 큰도시에 생협이 얼마나 있나요. 아니, 생협을 알기나 아는가 궁금합니다. 스스로 진보라 생각하는 분들은 얼마나 생협 운동을 하는가요. 스스로 보수라 여기는 분들은 얼마나 생협 운동을 아끼는가요.


.. “우리는 작기 때문에 서로에게 힘이 되는 가족이나 마찬가지이고, 일을 하면서 생기는 위험도 함께 나눌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  (55쪽)


 한국땅에서는 전기자동차이든 물자동차이든 ‘기름 안 먹는’ 자동차는 나오기 어렵고 팔리기 힘들다고 느낍니다. 아니, 처음부터 자동차를 장만하지 않으면서 살림과 삶을 가꾸기는 힘겹다고 느껴요. 자동차 한 대를 만들기까지 자원을 어떻게 쓰는지 살피는 사람이 드물고, 자동차를 굴릴 기름을 얻기까지 어떠한 길을 거쳐야 하는가 헤아리는 사람이 드물며, 자동차가 오갈 길을 닦는 동안 이 나라 삶자락이 어떻게 무너지는가를 돌아보는 사람이 드물어요.

 고속도로가 새로 뚫려 시원시원 빨리빨리 달리니 좋은가요. 그렇다면 이 고속도로 닦는 데에 돈이 얼마나 들었고, 이 돈은 어디에서 나왔으며, 이 길을 닦느라 이 나라 자연은 얼마나 시름시름 앓아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았는가요. 자동차가 더 빨리 씽씽 달리는 만큼, 이 나라 공기는 얼마나 더러워지는지 헤아려 보았는가요. 자동차가 달리거나 서 있을 자리는 늘어나지만, 아이들이 뛰놀 자리는 사라지고, 어른들이 어울릴 자리 또한 없어지는 줄 알기는 하나요. 자동차 달리는 고속도로랑 자동차 서 있는 주차장 자리를 ‘내 논밭으로 삼아 조그맣게 농사를 지으’면 우리 삶과 삶터가 어떻게 달라질는지 꿈이나 꾸어 보았는가요.


 (3) 《협동조합도시 볼로냐를 가다》라는 작은 책


 4000원짜리 작은 책 《협동조합도시 볼로냐를 가다》를 읽습니다. 쪽수는 딱 130쪽, 사진이 꽤 많이 실렸기에 글은 한결 적어 한 시간은커녕 삼십 분조차 안 들이고도 후딱 읽어치울 만한 작은 책 《협동조합도시 볼로냐를 가다》를 가볍게 읽습니다. 웬만한 소설책 하나 만 원 이만 원 오락가락하는 판에, 값이 아주 싸다는 만화책조차 이제는 한 권에 4200원을 하는 판에, 에계계 값이 고작 4천 원밖에 안 하네, 하는 책 하나 기쁘게 읽습니다.

 김태열·김현경·우미숙·전홍규, 이 작은 책에 글을 쓴 네 분이 당신 글을 조금 더 알차게 여미었으면 훨씬 좋았겠구나 싶지만, 좀 덜 여문 글일지라도, 이분들은 이탈리아 볼로냐까지 다녀오며 그곳 협동조합 삶자락을 들여다본 그대로 이야기 하나로 엮어 꾸밈없이 나누어 줍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협동조합 이야기이니까요. 아주 잘난 사람만 이런 이야기를 할 만하겠습니까. 글 아주 빼어나게 잘 쓰고, 생각 무척 깊다는 사람이어야만 이런 이야기를 책으로 엮을 만하겠습니까.

 아직 어리숙하거나 모자라다지만,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좋은 넋과 사랑을 얻었으니, 이 좋은 느낌을 이 나라 이웃하고 동무하고 나누면 한결 즐거워요.


.. 협동조합이 이곳(이탈리아 볼로냐)에서 번성하게 된 주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전통적으로 계급문화가 뿌리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  (22쪽)


 《협동조합도시 볼로냐를 가다》에 담긴 ‘이탈리아에서 협동조합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찬찬히 귀담아듣다 보면, 협동조합이란 조금도 어렵지 않을 뿐더러, 어려움하고는 동떨어진 채, 참으로 즐거운 일이요, 협동조합이란 무엇보다 즐거움하고 맞닿은 일이구나 싶습니다. 어떤 꿈 하나 뚜렷하게 이룬다든지, 이를테면 사회나 정치를 뜯어고치겠다는 부푼 꿈으로 협동조합을 할 수도 있습니다만, 협동조합을 이루는 바탕힘은 다른 데에 있구나 싶어요.

 바로 ‘사랑스럽게 어깨동무하며 울고 웃는 삶’입니다.

 나와 내 아이 사이에 계급이나 계층을 둘 수 있겠습니까. 나와 내 어버이 사이에 계급이나 계층으로 울타리를 세울 수 있는가요. 내 살가운 동무하고 나 사이에 높다란 울타리를 쌓을 수 있습니까.

 서로 예쁘게 어울릴 길을 찾아야지요. 서로 살갑게 손잡는 길을 걸어야지요.

 돈이 있다고 협동조합을 잘 꾸리지 않아요. 사람이 더 많다고 협동조합을 알차게 꾸리지 않아요. 거룩한 뜻이나 훌륭한 값을 바라보기에 협동조합을 힘차게 꾸리지 않아요.

 작지도 않고 크지도 않은 ‘삶’과 ‘사랑’과 ‘사람’을 아끼는 매무새로 협동조합을 일굽니다.


.. “다른 공연을 하면 돈도 많이 벌고 얼굴도 알릴 수 있지만, 어린이를 위한 공연을 하고 싶습니다.” ..  (47쪽)


 내 아이를 사랑하겠다는데 돈이 더 많아야 할 까닭이 없어요. 내 짝꿍을 사랑하겠다는데 더 큰 돈으로 큼지막한 선물을 사다 주어야 할 까닭이 없어요. 내 어머니와 아버지를 사랑하겠다는데 집이나 자동차나 외국여행 따위를 바쳐야 할 까닭이 없어요.

 서로 도와 아름답게 살아갈 길을 생각하면 됩니다. 서로 어깨를 겯고 한 걸음씩 나아갈 길을 찾으면 됩니다.

 품앗이도 좋고 두레도 좋아요. 울력도 좋고 도리기도 좋아요. 대단하게 할 생각이 아니면 돼요. 시끌벅적 할 생각이 아니면 돼요.

 나를 사랑하는 참길을 생각해 주셔요. 내 벗을 사랑하는 착한 길을 살펴 주셔요. 내 살붙이를 사랑하는 고운 길을 씩씩하게 걸어 보셔요. (4343.12.3.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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