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짓기 아나스타시아 4
블라지미르 메그레 지음, 한병석 옮김 / 한글샘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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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짓기·집짓기·옷짓기는 사랑짓기·삶짓기·사람짓기
 [환경책 읽기 33] 블라지미르 메그레, 《아나스타시아 (4) 함께 짓기》

 


- 책이름 : 아나스타시아 (4) 함께 짓기
- 글 : 블라지미르 메그레
- 옮긴이 : 한병석
- 펴낸곳 : 한글샘 (2008.11.28.)
- 책값 : 1만 원

 


 (1) 밥짓기


 밥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생각하는 삶이 달라지는구나 하고 퍽 예전부터 느낍니다. 쌀을 사다가 먹는지, 쌀을 손수 논에 심어서 먹는지, 가을걷이를 할 때에 낫질을 한 번이라도 해 보았는지, 모내기를 할 때에 곁에서 지켜본 적 있는지, 한여름 뙤약볕에서 김매기를 해야 한 적 있는지, 텃밭에서 돌을 고른 적 있는지, 아이하고 밭에 씨를 뿌리거나 심은 적 있는지, …… 내 먹을거리를 마련하는 길은 여러 갈래이며, 내 먹을거리를 내 몸뚱이 어떻게 움직이며 마련하는가 하는 길도 여러 갈래입니다. 그런데 나날이 사람들 밥상은 가게에서 돈을 치러 먹을거리 장만하는 흐름으로만 바뀌어요. 더구나, 가게는 더욱 커지고, 가게로 가는 길은 더 멀어지며, 가게에서 한꺼번에 사들이는 먹을거리는 훨씬 늘 뿐 아니라, 먹고 버리든 먹지 못해 버리든 하는 쓰레기는 끝이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사람들 스스로 생각할 겨를을 내지 못해요. 밥상에 무엇을 올려야 좋을는지를 생각하지 못해요. 너무 바쁘거든요. 생각할 일이 아주 많거든요.

 

 정치도 걱정하고 문화도 생각하고 경제도 근심하고 예술도 헤아리고 하다 보면, 운동경기 들여다보고 사건사고를 신문과 방송으로 살피다 보면, 아이들 낳아 학원에 넣거나 학교에 보내다 보면, 그야말로 내 삶이 어디에서 비롯해 어디로 가는가를 읽거나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 “모든 증거와 우주의 모든 진리는 사람 모두의 마음에 영원히 간직되어 있어. 부정확이나 거짓은 오래 살 수 없어. 마음이 그것을 저버리지. 여러 해석이 나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야. 거짓은 계속 새 옷을 갈아입어야 해.” … “하느님은 꿈 에너지를 갖고 있었어. 그는 모두를 자기 내부에 받아들이고, 모두를 균형잡고, 화해할 수 있었어.” … “아름다움을 따라잡으려는 자들은, 아름다움을 알기 위해서는, 자기 내부에 그와 똑같은 것을 지녀야 함을 알지 못한 거야.” ..  (8, 18, 95쪽)


 시골에서는 스스로 먹을거리를 마련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시골집을 얻어 지내는 우리는 아직 우리 텃밭이나 빈땅에 무엇을 심을 만하지 않습니다. 무얼 심으려고 얻은 빈땅이 아니다 보니, 이 땅을 어떻게 골라서 어떻게 무얼 심어야 할까를 가누기가 살짝 벅찹니다. 좋은 이웃 어르신들이 김치를 주시고 무랑 배추랑 베풀어 주셔서 크게 도움을 받아요. 생각해 보면, 우리들이 이 시골집에서 오래오래 뿌리를 내려 살아갈 뒷날에는, 이웃 어르신들처럼 우리가 밭에서 일군 푸성귀를 다른 이웃한테 넉넉히 나눌 만큼 거두겠지요. 아직 이루어지지 못한 일, 아직 이루지 않은 일이지만, 그날 그 느낌이 어떠할까 하고 떠올리면, 참 신나며 즐겁습니다.

 

 읍내 장마당에서 사다 먹는 감자랑, 우리 밭에 심어서 거두어 먹는 감자랑 같은 맛일 수 없어요. 씨가 난 감자를 알맞게 잘라 깊이 잘 묻어 거두어서 이 감자알을 익혀 먹으면, 그렇게 달디달 수 없어요.

 

 내 땀을 흘렸기에 달디단 감자일까요. 어쩌면 이와 같을는지 몰라요. 그리고, 내 땀뿐 아니라 내 땀에 서린 내 몸과 마음이 어떠한가 하는 이야기가 흙으로 스며들면서, 우리 집 감자알이 ‘내 몸을 살찌우는 기운’을 조금씩 키워서 좋은 밥으로 나한테 찾아오는지 모릅니다.


.. “사람이 지금 숨쉬는 공기로는 정말로 영양을 채울 수 없지. 지금 공기는 죽어 있고 때론 몸과 마음에 해로워.” … “사람의 육은 그의 영과 마음이 원하는 해만큼 살 수 있었어 … 당신이 담배를 피우거나 음주할 때, 공기가 역한 냄새로 자욱한 도시로 들어갈 때, 죽은 음식을 섭취할 때, 그리고 화로 자기 자신을 갉아먹을 때, 블라지미르, 말해 봐, 당신 스스로가 아니면 누가 죽음을 가까이 부르는 거지?” … “모든 여자들이, 전투를 벌인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고, 그래서 후손을 낳지 않는다면, 어떤 남자가 전쟁을 하려 하겠어. 전쟁을 일으키는 자는 결론적으로 자기는 물론이고 자기의 모든 후손까지 죽이는 셈이잖아.” ..  (32, 35, 72쪽)


 누런쌀을 날로 씹어 먹든, 오래 불려 밥으로 지어 먹든, 입안에 침을 모아 천천히 씹으면, 이 쌀알이 어느 땅에서 어떤 햇살·물·바람·비·흙·지렁이·거미……들 기운을 고루 받았는가 하고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저절로 그림을 그릴 수 있어요.

 

 그러나, 내가 너무 바쁜 나머지 헐레벌떡 밥그릇 비워야 한다면, 제대로 씹지 않을 뿐더러 어떤 그림조차 그리지 못해요.

 

 집식구랑 다 함께 바깥밥을 사다 먹어야 할 때면, 이 대목이 퍽 아쉽습니다. 사람들 복닥거리는 밥집에서는 자꾸 빨리 먹어야 하는 듯 내몰립니다. 빨리 먹고 일어서야 하는 듯 몰아세워요. 그래야 장사가 될 테니까요. 이때에는 내가 손에 쥐는 그릇에 담긴 밥을 고마이 여길 틈이 없습니다. 천천히 느끼고 차근차근 사랑할 겨를이 나지 않아요.

 

 집에서 식구들이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꽃 피우며 밥을 먹는 일이란, 이 밥을 마련한 사람한테 고마움을 느끼는 일뿐 아니라, 이 밥에 서린 모든 기운을 천천히 받아들여 내 기운을 새로 북돋우려는 일이라고 느껴요. 밥을 한두 시간에 걸쳐 천천히 먹는다면, 이렇게 얻는 기운이 아주 크며 빛나리라 느껴요.


.. “마음이 꿈에서 무엇인가를 지향하면, 그건 모두 반드시 실현돼.” … “그 편리함들이란 허상이야. 짧아진 자기 수명으로, 고통으로, 인류 모두는 매일 그 비용을 지불할 수밖에 없어. 생명이 없는 기기들을 얻으려고 사람은 마치 노예처럼 싫어하는 일을 일평생 할 수밖에 없어. 생명 없는 기기들이, 삶의 우주적 본질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의 정도를 나타내기라도 하듯 주변에 나타나지. 당신은 사람이야! 주변을 좀더 유심히 살펴봐. 또 하나의 기계 장치를 얻기 위해서 죽음의 매연을 뿜어대는 공장이 지어지고 물은 생명을 잃고 있어. 그리고 당신, 사람인 당신은 그것을 위해 일평생 재미없는 일을 해야 해. 기계가 당신에게 봉사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기계한테 (봉사)하는 거야.” … “처음부터 모든 것을 잘 계획하면 따로 일꾼들이 필요치 않을 거야. 주변의 모든 것이 기꺼이, 사랑으로 당신과 자식들과 손자들에게 봉사할 거야.” ..  (99, 102∼103, 226쪽)


 아이를 낳아 살아가는 어버이는 밥술 제대로 뜰 겨를이 없다고 합니다. 참 그렇습니다. 집에서 할 일이 매우 많으니까요. 그런데, 어쩌면, 집일이 매우 많다는 틀에 사람들 마음과 생각을 가두지 않을까요?

 

 집일이 적지 않아요. 집일이 적을 수 없어요. 그러나, 이 집일에 사람이 매인다는 생각을 사람들마다 잘못 받아들여 엉뚱하게 바라보도록 가두지 않나요? 그래서, 젊은 사내이고 가시내이고, 집에서 일하기를 꺼리며 자꾸자꾸 집 바깥으로 나돌도록 내몰지 않나요?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가를 잊도록 몰아세워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를 잃도록 밀어붙여요. 내 몸을 살피지 않고 돈벌이를 살피는 밥을 할밖에 없는 밥집에서 비싼 값을 치르면서 내 몸을 살찌우지 못하는 굴레에 스스로 허덕이고 말아요.

 

 아무리 값싼 것들로 차린 밥이라 하더라도, 밥을 차리는 사람 손길과 마음길과 사랑길과 생각길에 따라 새롭게 태어납니다. 소시지이든 라면이든 좋을 턱이 없겠지요. 어묵이든 두부이든 가게에서 파는 먹을거리는 뭐가 좋겠어요. 그런데, 이런 먹을거리로 밥상을 차리면서 손길·마음길·사랑길·생각길마저 어둡거나 바빠맞는다면 어떡하나요. 달걀부침을 하든 감자볶음을 하든, 내 온 사랑과 숨을 불어넣을 수 있어야 하고, 내 사랑하는 사람들하고 오붓하게 나눌 수 있어야 해요.

 

 밥이란, 목숨이 차려진 먹을거리이니까요. 밥먹기란, 목숨을 먹어 목숨을 잇는 아름다운 일이니까요.


.. “당신에겐 속세의 지위가 중요하지.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진리잖아.” … “지구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가문의 나무를 길러야 하느니라. 그가 죽으면 그 나무는 후손들에게 좋은 기념이 될 것이야. 그건 또한 후손들이 숨쉬고 살 공기를 정화할 것이니 우리 모두는 좋은 공기를 숨쉬어야 한다.” … “우선은,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 중에서 자기 마음에 드는 곳을 골라. 당신이 살고 싶은 곳을 말이지. 자기 후손들도 살았으면 하는 곳으로.” … “다양한 색의 나무들을 심는 거야. 자작나무, 단풍나무, 참나무, 잣나무. 불타는 색의 빨간 열매가 송이송이 달리는 마가목을 덧심고, 그 사이에 까마귀밥나무를 사이심기 할 수 있지. 벚꽃과 라일락에도 장소를 할애할 수 있겠지. 처음부터 모든 걸 잘 계획하는 거야. 무슨 나무가 높이가 얼마나 자라는지, 봄에 꽃은 어떻게 피는지, 어떤 향이 나는지, 어떤 나무에 어떤 새가 모이는지 모두 다 관찰해야 해. 당신의 울타리는 새들이 노래하고 좋은 향이 넘치고 매일 색조가 조금씩 변화하는 아름다운 그림이 될 거야. 봄에는 꽃이 만발하고 가을에는 황금 색채로 불탈 거야.” ..  (205, 212, 220, 224쪽)


 사람들 누구나 밥짓기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 누구나 어린 나날부터 밥짓기를 곁에서 지켜보며 물려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손맛을 어머니와 아버지가 물려받고, 어머니와 아버지 손맛을 딸아들 함께 물려받아야 합니다. 아름다운 사랑을 물려받고, 따사로운 믿음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2) 집짓기


 사랑스레 마련해서 사랑스레 즐길 밥이듯, 사랑스레 지어서 사랑스레 살아갈 집입니다. 높다란 층층집에서 살든, 여러 식구들 빼곡하게 들어차는 다세대 골목집에서 살든, 나 스스로 내 살림집이 될 보금자리를 사랑스레 돌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삶을 돌아보면, 나는 아직 내 살림집을 살림집다이 건사하는 길을 걷지 못합니다. 아주 어릴 적부터 내 좋은 살림집 그림을 그리지 못했거든요.

 

 다만 두 가지 그림은 그렸습니다. 하나는 열다섯 동 오층짜리 층층집에서 살던 어린 나날 살림집입니다. 층이 낮고 동과 동 사이가 넓어 아이들 놀이터이자 동네사람 쉼터가 무척 넓었어요. 모래밭 놀이터는 두 군데 널따랗게 따로 있었고, 층층집 둘레로 층층집 높이만 한 나무가 우람하게 자랐어요. 층층집 옆으로는 인천 신흥동3가 제일제당 공장에서 날마다 엄청나게 뿜어대는 쓰레기물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층층집 동네를 둘러싼 나무들이 이 냄새를 막아 주었구나 하고 요즈음 깨달아요. 나무는 동네 할아버지들이 스스로 잘 돌봐 주었어요. 우람한 나무 곁 울타리로는 까마중이 잔뜩 열려 동무들이랑 입에 새까매지도록 따먹었습니다. 국민학교 오학년인가 육학년에 처음 알았는데, 우람한 나무 곁에는 딸기가 자라기도 했습니다. 어머니하고 식물채집 숙제를 하며 풀을 모으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어머나, 딸기가 여기에서도 자라네!” 하면서 놀라셨어요. 식물채집 표본을 되돌아보는 요즈음 생각하자니, 이때 본 딸기는 덩굴딸기가 아닌 나무딸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으레 먹는 딸기였으나 딸기가 어떤 풀로 자라는가를 몰랐어요. 어머니는 금세 알아보셨고, 나는 오래도록 딸기풀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고는 생각했지요. 이 딸기풀을 캐서 표본으로 삼느냐, 아니면 이 자리에 딸기풀이 있구나 하고 여기며 날마다 들여다보느냐.

 

 끝내 캐서 신문종이 사이에 눌러 표본을 만들고, 나중에 이 표본을 들고 다니며 딸기풀이 또 자라는가 하고 살펴보지만 똑같거나 비슷해 보이는 풀을 찾지는 못합니다.

 

 그나저나, 내 어린 나날을 보낸 5층짜리 층층집은 바로 코앞이 경인고속도로 들머리요, 바로 옆이 인천 부두가 줄줄이 늘어선 곳인데, 동네 안쪽에서 가만히 해바라기를 하는 동안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나 짐배 소리를 듣지 못했어요. 아주 크게 울리는 뱃고동 소리만 들었어요.


.. “블라지미르, 지금 아이들한테 외국어로 쓰고 말하도록 가르치고, 지금의 언어로 표현하는 걸 금지한다면, 당신의 후손들은 무엇을 통해서 오늘에 대해 알까? 과거의 지식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새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주입하기는 쉬워. 이들에게는 부모에 대한 어떤 말이라도 할 수 있지. 말이 없어지면 그와 함께 문화도 없어져. 그런 속셈이 있었어. 하지만 그 목적을 추구하던 자들은, 진리의 새싹이 사람의 마음 안 보이는 곳에 항상 남아 있다는 걸 몰랐어. 깨끗한 이슬방울을 흠뻑 마시기만 하면 새싹은 쑥쑥 자라서 크는 거야.” … “오직 부모만이 자식의 능력이 자기를 뛰어넘도록 진실로 원해.” … “자기의 딸들이, 아들들이 신성한 길을 가도록 하느님은 매일매일 희망을 잃지 않아. 지시가 아니라, 공포가 아니라, 자유 의지로서 사람들이 함께 짓고, 부활하고, 또한 그걸 바라보며 기뻐할 수 있는 길을 택하기를 고대하고 계셔.” … “아이에게 어떤 세계관을 주입할지, 배움이 아이들에게 어떤 운명의 멍에를 지울지 종종 알지도 못한 채, 자기 자식을 학교에 맡기고 말아. 알지 못하는 것에 자기 아이를 맡김으로써 자기 자식을 스스로 잃어버리는 거야. 그렇게 맡겨진 아이는 또 자기 엄마를 잊게 되는 것이고.” ..  (11, 26, 93, 270쪽)


 어린 나날 그린 두 번째 집 그림은 100층을 넘는 건물입니다. 이 그림은 서울에 63빌딩이 섰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렸어요. 아시아에서 가장 높다라나 하며 내세우는 63빌딩은 고개를 들어 층 숫자를 세며 목이 빠지곤 했어요. 서울에 사는 작은아버지 댁을 찾아가며 버스나 택시나 전철로 지나가며 으레 층수를 세 보는데, 끝까지 옳게 센 적이 없습니다.

 

 멀리에서는 아무것 아닌 듯싶으나 곁에서 지나치면 참 높았어요. 그렇지만 속으로 생각하기를 ‘칫, 그렇게 높이를 자랑하고 싶으면 딱 100이라는 숫자를 채워야지, 어설프게 63이 뭐람?’

 

 학교에서 동무들이랑 그림놀이를 하며 100층짜리 집을 그립니다. 이 100층짜리 집 밑에는 사람들이 오글오글 몰려다니면서 노는 널따란 지하놀이터가 있습니다. 예나 이제나 인천은 지하상가가 꽤 많아서 이 지하놀이터를 생각하며 그려 보았는데, 내가 꿈을 꾸어서라기보다 나 말고 누군가도 꿈을 꾸었을 테니, 서울 삼성동 밑자락 널따란 지하놀이터 같은 터가 생겼으리라 봅니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앞으로 살아가면 좋을 살림집은 그리지 못했어요. 내가 내 살붙이나 이웃이나 동무하고 어우러질 보금자리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 “사랑하는 부모는 자기 자식을 결코 집에서 내쫓지 않아. 사랑하는 부모는 스스로 고뇌하면서도 자기 자식이라면 어떤 죄도 용서해 줘.” … “살랑이는 나뭇잎과 새들의 노래로, 하느님은 자기의 딸과 아들이, 일어나는 사건을 반추하고 다시 동산으로 돌아오도록 여전히 호소하셔 … 아버지가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이용하여 우리 스스로 삶을 짓는 거야.” … “사람은 지금까지도 모두 분해하고, 꺾고, 모든 구조물을 알려 하고, 순간 멈춘 생각으로 조악한 것들을 만들고 있지 … 블라지미르, 사람은 원래 지어지기를, 하나도 분해하지 않아도 돼. 사람한테는. 어떻게 말해야 알아듣기 쉬울까? 사람한테는 마치 암호화된 형태로 모든 것의 구조가 이미 저장되어 있어.” … “학과나 과학에 대한 지식이 목표를 위한 목표가 돼서는 안 돼. 행복해지는 법, 이게 최고 중요한 거야. 그것은 부모들만이 자기 예를 보여 가며 가르쳐 줄 수 있어.” ..  (59, 60, 66, 256쪽)


 옆지기를 만나고 아이 둘을 낳고 새 시골마을에 새 터를 이루면서 우리 보금자리를 비로소 생각합니다.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고픈 살림집 그림을 이제 그립니다.

 

 늦었을까요. 가장 알맞춤하다 싶은 때일까요. 그동안 이런 생각을 안 했다는 대목에서 할 말이 없고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제도권학교 탓만 할 수 없고, 왜 내 어버이는 이러한 그림을 그리도록 돕지 못했느냐고 아쉬워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나 스스로 이러한 길을 찾으려고 마음을 기울이지 않았으니까요. 나 또한 내 보금자리나 살림집을 전세 얼마 월세 얼마 하는 돈셈으로만 생각했으니까요. 이 집에서 살아갈 내 마음밭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고, 이 집에서 얼마나 오래오래 뿌리내리며 우리 아이들이 사랑스레 자란 다음, 아이들이 어버이 곁에서 살든 어버이 곁을 떠난 다음 나중에 놀러오든, 이런저런 이야기밭 일굴 만한 터가 되도록 하는 보금자리인가를 생각하지 않았어요.


.. “생각해 봐. 당신의 딸 뽈리나가 갑자기 당신 앞에서 뭔가를 단조롭게 말하는 걸. 문장에는 자기도 모르는 단어들을 섞어 쓰고. 아버지인 당신한테 딸의 그런 대화가 마음에 들어?” … “육신만의 합체에서 얻은 만족은 충만하지 못하고 순간일 뿐이야 … 육신의 재미와 그 슬픈 결과로 아이들이 태어났어. 이 아이들에겐 신성한 꿈을 이루기 위한 사려 깊은 열의가 없었어. 여자들은 고통 속에서 아이를 낳기 시작했어. 그리고 아이들은 자라며 고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거야.” … “텃밭의 오이와 차이가 나는 것은 자라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섭취했기 때문이야. 텃밭의 조건에서는, 식물을 다른 종의 것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막고, 또 식물의 성장을 비료로 촉진하니까, 식물은 필요한 모두를 자기 안에 담지 못해. 그래서 스스로 충분하지 못한 거야.” ..  (79, 90, 110∼111쪽)


 내가 살아가며 얻는 목숨(밥)은 흙에서 얻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흙으로 집을 지어서 살아야 내 목숨을 옳게 건사할 만합니다. 그러면 나는 내가 밥을 삼을 터를 이루는 흙하고 같은 흙으로 집을 지어야 합니다. 쓰레기를 파묻는 흙땅이 아니라, 목숨이 살아숨쉴 흙땅이어야 합니다. 내 하루하루 살림에서 쓰레기를 내는 삶이 아니라, 꿈을 낳고 사랑을 피우는 삶이어야 합니다.

 

 덜 쓰고 아끼는 삶이 아닙니다. 아름다이 누리며 착하게 꾸리는 삶입니다.

 

 물질문명을 내다 버리는 삶이 아닙니다. 물질이나 문명에 매이지 않으면서 아름다이 누리며 착하게 꾸리는 삶입니다.

 

 우리 식구는 자가용을 사귀지 않습니다. 자가용 사귈 돈이나 자가용 굴릴 돈이나 자가용 모실 돈이 하나도 없으니 안 사귄달 수 있으나, 자가용을 사귀면 돈벌이에 바삐 움직일 테니, 자가용을 몰 돈구멍이 아예 없지는 않으리라 느껴요. 다만, 우리 식구가 자가용을 사귀지 않는대서 버스나 기차나 전철을 아예 안 얻어타지 않아요. 타야 할 때에는 타지만, 애써 즐겨타거나 찾아서 타지 않아요.

 

 네 식구 함께 두 다리로 풀숲길을 거닐고 멧길을 걸으면 즐겁습니다. 아직 몇 차례 못 했으나, 앞으로 기쁘게 늘 누리며 즐거우리라 생각해요. 관광이라든지 삼림욕이라든지 이런저런 구실을 붙이는 마실이 아니에요. 그저 흙을 밟고 햇볕을 쬐며 바람을 마시는 나들이가 좋아요.


.. “블라지미르, 당신은 지금 타이가 속에 있어. 주변을 봐. 나무들이 얼마나 커. 그 기둥은 얼마나 육중하냐고. 나무들 사이에는 풀이 있고 관목이 자라지. 산딸기도 있고 구즈베리도 있어. 그 외에도 타이가에는 수없이 많은 좋은 것들이 사람을 위해서 자라지. 그런데 지난 수천 년간 단 한 번도 그 누구도 타이가에 비료를 준 적이 없어. 그런데 땅은 비옥하거든. 누가 어떻게 비료를 주었다고 생각해? … 타이가에서는 당신 세상 사람들이 사는 곳만큼 그리 심하게 하느님의 생각과 시스템이 망가지지 않았기 때문이야. 타이가에서는 나무에서 잎이 떨어져 지고, 바람에 잔가지가 부러지지. 나뭇잎과 잔가지 그리고 벌레들이 타이가 흙을 비옥하게 하는 거야 … 낙엽은 우주의 많은 에너지를 담고 있으니까. 별도 보고 해도 보고 달도 본 낙엽이야.” … “자기 자식을 키워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야 할지는 우선 부모들이 마음을 정해야 하니, 단일 교육제도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어 … 내가 먼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해. 스스로 행복하지 않다면 무엇이 방해가 되는지 알아야 해. 난 진정으로 행복한 아이들 얘기를 하고 싶어. 자기 훈육이 바로 아이 훈육이야.” … “부모가 손수 가꾼 숲에 그가 묻히고 그 몸에서부터 풀이 나오고 꽃이며 나무 그리고 관목이 솟아나지. 당신은 그걸 보고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어. 부모의 손으로 가꾼 생지의 조각과 매일 접촉을 하게 되고, 또 무의식적으로 부모를 부르고 부모는 화답하는 거야.” ..  (227, 239, 246쪽)


 집짓기는 삶짓기입니다.

 

 밥짓기는 사랑짓기입니다.

 

 그러면 옷짓기는 어떤 짓기가 될까요.

 

 날마다 아이들과 옆지기 옷가지를 빨래하면서 노상 느껴요. 나한테 옷짓기라면 사람짓기가 되겠구나 싶어요.

 

 밥을 지으며 내가 일구며 아낄 사랑을 짓습니다. 옷을 지으며(옷을 기우며, 옷을 빨래하며, 옷을 손질하며) 나하고 같은 보금자리에서 뒹구는 사람들 꿈과 몸을 어여삐 짓습니다. 집을 지으며(집을 건사하며, 집을 돌보며) 내 삶을 짓고 내 살붙이들 삶을 나란히 짓습니다.

 

 나는 고등학교도 중학교도 일찌감치 그만두고 싶었으나 남우세스럽게도 그만두지 못했어요. 그나마 대학교는 다섯 학기를 다니고 그만둘 수 있었어요.

 

 중·고등학교에서는 집짓기도 밥짓기도 옷짓기도 가르치지 않았어요. 대학교에서도 아무런 짓기를 가르치지 않았어요. 중·고등학교 교사나 동무들 누구도 삶짓기랑 사랑짓기랑 사람짓기를 생각하지 않았어요. 대학교에서는 더더욱 어느 누구도 이 대목을 돌아보거나 살피거나 깨달으려 하지 않았어요.

 

 옆지기와 나는 우리 아이들을 학교에 넣을 까닭이 없다고 느껴요. 그러나, 시골 초등학교에서 아이들한테 삶짓기·사랑짓기·사람짓기를 가르치려 한다면, 조금이나마 건드린다면, 아이들이 이 대목을 생각한다면, 우리 집 두 아이는 이곳 시골 초등학교로 나들이를 다닐 수 있겠지요.

 


 (3) 아나스타시아가 함께 짓고 싶은 꿈


 짓고 지으며 또 짓는 꿈을 이야기하는 책 ‘아나스타시아’ 넷째 권 《함께 짓기》를 읽습니다. 넷째 권은 책이름 그대로 우리가 함께 지으며 즐거울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내가 먼저 스스로 짓고, 내가 사랑하며 아끼는 살붙이나 동무나 이웃이랑 함께 짓는 꿈이란 무엇일 때에 그야말로 즐거운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줘요.


.. “이거 봐, 블라지미르, 작은 씨앗이지. 하지만 땅에 심으면 우람한 잣나무로 자라. 참나무도 아니고 단풍도 아니고, 장미도 아닌 바로 잣나무가 자라나지. 잣나무는 다시 자그마한 씨앗을 낳고, 그 씨앗엔 처음 씨앗과 똑같이 태초의 정보 전부가 들어 있어.” … “사람의 시선은 다정할 수 있고, 동시에, 살아 있는 모두를 파괴의 차가운 시선으로 덮어버릴 수도 있어.” … “상점에 들어가서 당신은 물론 선택을 하지. 하지만 그 상점이 권하는 테두리를 절대 벗어날 수는 없어 … 정말로 당신의 몸이 필요로 하는 식품이 상점에 구비된 것일까? … 당신한테 필요한 모든 것이 제공되었나 생각해 보는 것까지 잊어버렸어.” … “사랑은 누구를 놀리지도 놀이를 하는 것도 아니야. 누구와도 영원히 살고 싶어 해. 하지만 사람은 자기만의 생활양식을 선택하게 되고, 그 생활양식이 사랑의 에너지를 놀라게 하는 거야. 사랑은 파괴에 영감을 선사하지 못해. 사랑의 열매는 고통 속에 살 수 없어.” … “사랑은 신성한 창조를 바라는 거야. 사랑의 공간을 지으려는 사람을 영원히 따뜻하게 해 줘.” ..  (9, 25, 114∼115, 236, 237쪽)


 사람은 작습니다. 사람은 큽니다. 곧, 사람은 작지도 크지도 않고 그예 사람입니다.

 

 씨앗은 작습니다. 씨앗은 우람한 나무로 자랍니다. 곧, 씨앗은 작지도 크지도 않고 그저 씨앗입니다.

 

 아나스타시아는 수수하고 자그마한 아가씨입니다. 아나스타시아는 수수하고 자그마한 아가씨이기 때문에 거룩하며 놀라운 하느님입니다. 곧, 아나스타시아는 그대로 아나스타시아라는 한 사람입니다.

 

 사랑을 할 줄 알기에 사랑을 나눌 줄 압니다. 사랑을 받을 줄 알기에 사랑을 물려줄 줄 압니다. 사랑을 먹을 줄 알기에 사랑을 빚습니다.

 

 사람들 숨을 살리는 흙은 먹을거리를 빚고 똥오줌을 받아들여 예쁘게 삭힙니다. 사람들 몸을 살찌우는 햇살은 하루 반토막을 따사로이 내리쬐고 하루 반토막을 고요히 잠재웁니다.


.. “모두 알고 있었지. 사랑 에너지는 따지는 일이 없다고.” … “그가 무얼 바라는지 내게 말해 줘.” “함께 지어서 모두가 같이 바라보는 기쁨이야.” … “너는 그것들을 보되, 쪼개지는 말거라. 온 우주의 그 누구도 이성으로는 그걸 풀 수 없단다.” … “블라지미르, 현대의 여러 가지 상황이, 지상의 여신들을 매일매일 부엌에 묶어 두는 거야. 당신이 그랬지, 내가 짐승 같고, 나의 생활방식이 원시적이고, 당신이 사는 곳의 사람만이 문명인이라고. 그럼 왜 당신이 사는 문명사회의 여자들은 좁은 부엌에서 삶의 일부를 보내지? 방바닥을 닦고, 상점에서 무거운 것을 날라야 하지? 당신 세상의 문명을 그리 자랑하면서, 그곳은 왜 그리 지저분하지? 지상의 아름다운 여신들을 왜 청소부로 전락시키지?” … “손자들이 세울 집의 재료는 할아버지가 심고 또 엄마 아버지가 사랑한 나무들이야.” ..  (39, 48, 56, 73, 233쪽)


 나는 밥을 먹고 살아가듯 꿈을 먹고 살아갑니다. 나는 밥을 먹으며 기운을 차리듯 꿈을 마음으로 먹으며 기운을 차립니다.

 

 책을 읽어 마음밥을 먹지 않습니다. 나 스스로 내 마음에 고운 생각씨앗 뿌리고 생각꽃을 피운 다음 생각열매를 거두기에 마음밭 살찌우며 흐뭇합니다. 수많은 좋은 책은 어김없이 마음밥이라 할 만하지만, 나 스스로 내 마음밭을 옳게 다룰 줄 모른다면, 어떠한 책도 마음밥이 되지 않아요.


.. “점령자들이 그 전투에서 얻은 만족은 순간이었어. 그래서 또 다른 정벌에 나섰고 전쟁을 계속했어. 한 나라를 취하고 또 다른 나라가 넘어갔어도 돌아오는 건 기쁨이 아닌 걱정이었어. 전부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함께.” … “지구의 사람들은 왜 추구해야 할 목적을 갖지 않는지, 이것도 외계인들에게는 큰 비밀이고 풀리지 않는 문제인 것이지.” …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수확을 얻어서 팔려고 애쓰지. 땅보다는 돈에 대한 생각이 더 많아. 자기가 태어난 둥지에서 행복할 수 있다고 스스로 믿지 않아.” ..  (105, 186, 228쪽)


 아나스타시아가 《함께 짓기》에서 들려주려는 말은, 나 스스로 착하게 사랑할 삶을 생각하도록 이끄는 기운입니다. 지식으로 내 삶을 덮어씌우거나 괴롭히거나 내팽개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정보로 내 사랑을 가리거나 숨기거나 모른 척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나부터 스스로 짓지 않는 사랑이라면, 내 곁에서 아무도 사랑을 지어서 나누지 못합니다. 나부터 스스로 짓지 않는 꿈이라면, 내 둘레에서 어느 누구도 꿈을 지어서 베풀지 못합니다.

 

 밥이든 집이든 옷이든 이와 똑같습니다. 나부터 스스로 밥을 짓고 집을 지으며 옷을 지어야 해요. 누가 맡아서 해 주는 짓기가 아닙니다. 내가 스스로 배우고 익히며 가다듬을 짓기입니다. 내 어버이한테서 배우고 내 이웃과 동무한테서 배우며 푸나무랑 뭇짐승이랑 햇볕과 흙한테서 배웁니다.

 

 착한 길을 배우고 참다운 길을 배웁니다. 고운 길을 배우며 포근한 길을 배워요. 억지스레 가르치지 못하고, 엉뚱하게 배우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면, 그야말로 사랑스레 가르치면서 배워요. 아이가 어른을 가르치고 어른이 아이를 가르친다고 말하는 까닭은 오직 하나예요. 참말 사랑스레 가르치면서 배우기 때문입니다. (4345.1.2.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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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1-02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서재에서 말씀하신 '아나스타시아'가 이 시리즈군요.
코알라 읽기에는 어렵겠는데요. 사실 제게도 만만치 않네요.

된장님, 거기 너무 춥지 않으세요? 오늘부터 다시 추워진대요.
따스하게 불넣고 지내세요.

마음을 옳게 다스리지 않는다면, 어떤 것도 마음밥이 되지 않는다는 문구
담아갑니다. 새해 건강하시고 즐거운 일 가득하시기를. 옆지기님 몸 빨리 추스리시고
예쁜 따님의 건강한 깡총임을 계속 보기 바라며 둘째 아드님의 피부도 빨리 좋아지기를.

숲노래 2012-01-02 18:34   좋아요 0 | URL
전라남도 고흥은 따스하답니다.
얼음이 얼지 않으니까요 ^^;;;;;

아나스타시아는 사람들 마음 읽기를
좋아하거나 즐길 줄 아는 이라면
초등학교 높은학년도 읽을 만한 책이에요.

좋은 마음밥이 있을 때에는
한번 도전해 보시면 기쁘리라 믿어요~
 
조복성 곤충기
조복성 지음, 황의웅 엮음 / 뜨인돌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환경책을 왜 읽는가
 [환경책 읽기 34] 조복성, 《조복성 곤충기》

 


- 책이름 : 조복성 곤충기
- 글 : 조복성
- 엮은이 : 황의웅
- 그림 : 이제호
- 펴낸곳 : 뜨인돌 (2011.8.19.)
- 책값 : 15000원

 


 (1) 《파브르 곤충기》와 ‘자연책 읽기’


 《파브르 곤충기》라는 대단하다 싶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무척 널리 읽힙니다. 아이들한테는 ‘필독 추천 명작 도서’로 손꼽히고, 온갖 판으로 많이 옮겨지기까지 합니다.

 

 《파브르 곤충기》와 함께 《파브르 식물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벌레 이야기요, 하나는 푸나무 이야기입니다. 으레 벌레 이야기만 알려졌으나, 푸나무 이야기를 나란히 읽어 보면, 파브르라 하는 사람이 지구별 어여쁜 목숨붙이를 얼마나 사랑하면서 아끼려 했는가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동물학이고 식물학이고 무슨무슨 학문이고를 떠나, 가장 크게 돌아보면서 가장 깊이 살필 대목이란 바로 사랑이에요. 크고작은 벌레들 표본을 많이 모았대서, 벌레들 한살이를 두루 꿰뚫는 논문을 많이 내놓았대서, 대학교에서 강의를 한대서, 이런저런 책을 숱하게 내놓았대서, 벌레를 비롯한 숱한 목숨붙이를 제대로 알거나 올바로 안다고 할 수 없어요. 사랑하지 않는다면 알지 못하는 셈입니다.
 

.. 우리 나라에 사는 소똥구리 세 종류는 전부 이른아침부터 늦은저녁까지 멈추지 않고 소똥을 빚는다. 열심히 일하다가 가끔 쉴 때는 소똥을 한 조각 떼어먹기도 하는데, 마치 어린아이가 초콜릿을 먹듯 달고 맛있게 먹는다. 녀석이 똥을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가만히 보고 있으면 쩝쩝거리는 소리가 실제로 귀에 들리는 듯하다 … 이렇듯 매서운 탓에 말벌의 성질이 포악하고 독단적일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로 말벌은 애정이 넘치는 화목한 집단을 이루며 일을 매우 조직적으로 분업화해 조화롭게 살아간다 ..  (20, 62쪽)


 학자는 학문을 하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그런데 이 학문이란 책을 파헤치거나 책을 쓰기만 하는 학문일 수 없어요.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생각하며 사람을 사랑하는 학문이어야 합니다. 살리고 생각하며 사랑하는 결·흐름·무늬가 없다면, 학문할 뜻이 없습니다.

 

 이는 학문 자리뿐 아니라, 공무원 자리에서도 똑같습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자리에서도 이와 같습니다. 아이를 낳아 집에서 보살피는 어버이도 이와 매한가지예요. 어디에서나 언제나 삶·사람·사랑을 생각해야 합니다. 삶을 살피고 사람을 돌아보며 사랑을 생각하면서 해야 할 학문이요, 행정이며, 교육이고, 아이키우기입니다.

 

 《파브르 곤충기》와 《파브르 식물기》는 무엇보다 이 삶·사람·사랑을 알뜰히 눈여겨보는 이야기를 담습니다. 벌레 지식이나 푸나무 정보를 다루지 않아요. 벌레와 푸나무를 찬찬히 바라보고 살피며 헤아리는 까닭은, 벌레와 푸나무를 더 잘 알고 싶기 때문이 아니에요. 벌레와 푸나무를 참다이 아끼고 사랑하는 길을 찾고 싶기 때문이며, 이 벌레와 푸나무하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 착하고 예쁘게 어우러지는 길을 열고 싶기 때문입니다.


.. 녀석(바퀴)은 책 표지에 침을 뱉어 놓는 이상한 습성이 있는데, 이 또한 표지를 만들 때 바른 풀을 부풀게 해서 먹어치우려는 교활한 꾀다. 아무리 아름답게 장식된 책이라 해도 이놈한테 한번 걸렸다 하면 순식간에 형편없이 변하고 만다 ..  (38쪽)


 아이들한테 책을 더 읽혀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굳이 초등학교이건 어린이집이건 유치원이건 학원이건 다니지 않아도 됩니다. 아이들은 중·고등학교를 안 다녀도 됩니다. 아이들은 대학생이 될 까닭이 없고, 자격증이나 면허증을 가져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자가용을 몰지 못한대서 아이답지 못하겠습니까. 아이들이 영어를 못한대서 사람답지 않겠습니까.

 

 아이들은 언제나 아이답게 자라야 합니다. 아이들은 늘 사람다이 살아야 합니다.

 

 참다게 살아갈 수 있으면서 해야 하는 학문입니다. 착하게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를 사랑할 수 있으면서 맡는 공공기관 행정직, 이른바 공무원입니다. 아름답게 어깨동무하는 길을 열면서 정치를 하든 교육을 하든 문화를 하든 예술을 하든 과학을 하든 할 노릇입니다.

 

 아이들은 회사원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전문가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어른 또한 회사원으로 살아야 하지 않아요. 어른 누구나 전문가가 될 까닭이 없어요.

 

 사람다운 사람이어야 하고, 아름다운 보금자리를 즐거이 누려야 합니다. 고운 꿈을 멋지게 이루면서, 맑은 말과 밝은 눈빛으로 사랑을 꽃피우면 넉넉합니다.


.. 옛날부터 늘 우리 곁에서 함께 살던 나방이 요즘에 와서야 화제가 된 사실은 우리 나라 사람들이 그만큼 우리 땅에 사는 곤충에 관심이 없었음을 말하는 것 같아 애석하기도 하다 ..  (98쪽)


 아이들이 《파브르 곤충기》를 읽어야 한다면, 아이들이 벌레들 살아가는 지구별을 사랑하는 길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벌레들 살아가는 지구별이란 바로 사람들 살아가는 지구별이요, 사람들이란 ‘너와 나와 우리’가 서로 얼크러지는 사람들입니다. 너와 나와 우리가 모여 사람들이 됩니다. 너와 나와 우리가 다 함께 아름다운 삶을 참말 아름다이 여미도록 북돋우는 길이 참살길입니다.

 

 사람을 아끼는 사람은 벌레를 아낍니다. 사람을 아끼는 사람은 푸나무를 아낍니다. 푸나무를 아끼기에 사람을 아끼고, 벌레를 아끼기에 사람을 아껴요.

 

 《파브르 곤충기》를 남긴 사람이든, 《시튼 동물기》를 남긴 사람이든, 그리고 《조복성 곤충기》를 남긴 사람이든, 서로서로 한동아리로 흐르는 넋이자 얼이요 꿈이고 빛입니다.

 

 지식이 아닌 삶입니다. 정보가 아닌 사랑입니다. 학문이 아닌 살림입니다. 권위나 권력이 아닌 어깨동무요 두레예요.

 

 지식을 쌓자며 책을 읽는다면, 스스로 바보가 되겠다는 소리입니다. 학문을 이루겠다며 책을 파고든다면, 스스로 얼간이가 되겠다는 셈입니다.

 

 서로를 사랑하는 꿈을 열고 싶으니까 책을 읽습니다. 나와 너와 우리가 이어지는 고리를 살가이 깨달아 착한 빛줄기를 드리우고 싶기에 책을 펼쳐요. 아이들한테 《파브르 곤충기》를 읽히고 싶다면, 아이들을 낳거나 아이들하고 함께 지내는 어른들부터 이 책을 찬찬히 새겨읽은 다음, 아이들한테는 ‘종이책’ 아닌 ‘흙책’과 ‘풀책’을 이야기보따리로 들려주며 함께 부대껴야 합니다.

 


 (2) 《조복성 곤충기》는 환경책


 《파브르 곤충기》는 1800년대 끝무렵부터 나와서 1907년에 마무리되었다고 합니다. 1907년이라 한다면 한국에는 서양책이 거의 옮겨지지 않던 때입니다. 일본에서는 《파브르 곤충기》를 언제부터 일본말로 옮겨서 읽었을까요. 일제강점기에 교사로 일하고 학문을 파헤치던 조복성 님은 이무렵 《파브르 곤충기》 같은 책을 읽을 수 있었을까요. 이 책이 한글이나 일본글로 없다 하더라도, 일본사람이 일본 벌레붙이를 살핀 책을 읽을 수 있었을까요.

 

 2011년에 오랜만에 빛을 본 《조복성 곤충기》는 1948년에 나온 《곤충기》와 1975년에 나온 《조복성곤충채집여행기》를 간추려 한데 모은 책입니다. 1948년에 나온 《곤충기》와 1975년에 나온 《조복성곤충채집여행기》는 도서관에서는 거의 찾아볼 길이 없고, 헌책방에서도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책입니다. 이 땅에서 이 나라 이 겨레 벌레붙이를 살피고 파헤치며 다룬 아름다운 책이지만, 이 책들을 눈여겨보거나 되살리거나 보듬으려는 손길이 너무 얕았어요.


.. 파리가 낳은 구더기는 자연에서 온갖 쓰레기와 썩은 것들, 심지어 배설물까지 마다하지 않고 말끔히 청소해 준다 … 사람들이 더럽다고 욕하고 혐오스러워 하는 곤충들도 저마다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겪어 내야 하는 고충이 이만저만 아니다 … (사슴벌레는) 악착스럽게 다른 곤충을 잡아먹지도 않는다. 단지 참나무에서 스며 나오는 진액을 빨아먹고 둥치에 구멍을 뚫어 새끼를 치며 즐겁게 살아가는 평화주의자다 ..  (35, 47, 73쪽)


 새로 붙인 그림이 실린 《조복성 곤충기》는 예쁘장합니다. 조복성 님은 당신 이야기책이 이렇게 되살아날 줄 알았을까요. 조복성 님한테서 학문을 배운 이들은 당신 스승 책을 되살리려고 꿈꾼 적이 있었을까요.

 

 예쁘장한 책을 천천히 읽습니다. 앞으로도 이 책이 예쁜 손길을 받으면서 예쁜 사랑을 고이 이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바라면서 읽습니다. ‘필독 추천 명작 도서’ 가운데 하나로 이름을 올리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사람들한테 좋은 사랑을 두루 나누는 길잡이 구실을 한다면 참으로 기쁘겠다고 빌면서 읽습니다.

 

 《조복성 곤충기》는 환경책입니다. 이 나라 생태·환경을 한눈에 알아보도록 돕는 책입니다. 이 나라 생태·환경이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좋을까를 돌아보면서 적바림한 책입니다.

 

 우리 가까이에 흔하게 있으나, 흔히 알아채지 못하는 이야기를 차근차근 깨달으면서 올바로 알아차리자고 이끄는 책입니다. 삶을 슬기로이 일구면서 내 땅 내 마을 내 터전을 슬기로이 보살피자는 뜻을 널리 나누려는 책이에요.


.. 놈은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오랫동안 살 수 있다. 벼룩과 이가 한 달 동안 먹지 않고 사는 데 비해 빈대는 무려 반년이나 버틸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추위에 견디는 힘이 뛰어나 영하 33℃의 추운 날씨에도 얼어죽지 않는다. 요즘처럼 춥고 배고픈 때, 우리 나라 사람들도 이런 저항력을 지녔다면 얼마나 좋으랴! … 곤충들의 외모는 자연스럽고 순진함과 고상함을 겸하고 있다. 또한 모든 기술이 인간을 초월하니, 그것을 이해하고 그들을 본받으면 어떨까? ..  (48∼49, 89쪽)


 동짓날 추운 바람을 따스한 집에서 몸을 녹이며 긋습니다. 이 추운 날 한국땅에는 틀림없이 한뎃잠을 자야 하는 사람이 있어요. 작은 보금자리가 있으나 따순 이불 한 장 없어 고단한 사람이 있어요. 값비싼 보금자리에서 따스한 사람이 있고, 아무런 보금자리 없이 슬픈 사람이 있습니다. 멀디먼 나라까지 생각하지 않더라도, 내 곁에 있는 고단하거나 아프거나 슬픈 사람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이러면서 내 삶이 얼마나 참답고 사랑스러운가를 살피면 좋겠어요.

 

 나는 무엇을 누려야 즐거운 하루일까요. 나는 어떤 밥을 어떻게 차려서 먹어야 고마운 하루인가요. 나는 어떤 옷을 입으며 뽐내야 예쁜 모습일까요. 나는 어떤 돈벌이를 하면서 얼마나 은행계좌를 늘려야 넉넉한 삶일까요.

 

 아이들이 《파브르 곤충기》를 읽든 《조복성 곤충기》를 읽든 쇠똥구리나 개똥벌레나 사슴벌레를 만날 일이란 없습니다. 깊은 멧골이나 시골로 놀러가더라도 요사이는 항공방제라는 이름으로 수목원에까지 농약을 마구 뿌립니다. 흙을 밟을 만한 데는 온통 농약투성이입니다. 흙이 없는 데는 온통 시멘트바닥이거나 아스팔트바닥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땅에서 잘도 경제개발을 하고 경제활동을 한다는데,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는 국회의사당에서는 한미자유무역협정을 참 그럴듯하게 밀어붙이는데, 나무 한 그루 심지 않는 지식인과 공무원과 건설회사 일꾼은 어마어마하게 큰 돈을 들여 온나라 물줄기를 시멘트로 발라대는데, 《파브르 곤충기》를 읽든 《조복성 곤충기》를 읽든 무엇을 바꾸거나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요.

 

 내 살림집에서 벌레붙이 하나 만나기 힘든데, 아이들 다니는 학교나 학원에서 바퀴벌레나 개미 몇 마리 말고는, 더러 나방 조금 아니면 마주치기조차 힘든데, 이런저런 책을 읽는들 얼마나 값지거나 뜻있거나 사랑스러울는지요.

 

 개똥벌레가 어떻다느니, 개똥벌레랑 반딧불이는 같은 이름이라느니, 파리가 알을 몇 개쯤 낳고, 이 가운데 몇 개쯤 까며, 애벌레는 얼마만에 어른파리가 되는지를 지식이나 정보로 안다 한들 스스로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요. 한미자유무역협정과 4대강사업을 지식과 정보로 아는 이들 가운데 ‘당차게 자가용을 버리고 시골로 살림집 옮겨 흙을 파먹고 살겠다’고 외치는 이는 몇이나 되는가요.


.. 꿀벌은 유용한 꿀을 주는 덕에 아끼다가도 독침이라도 한 방 잘못 쏘는 날에는 곧바로 상대 못할 버러지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또 인간은 흰개미를 자연의 분해자로 존중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가도 정작 자신의 물건을 갉아대기라도 하면 나쁜 곤충이라며 학대를 서슴지 않는다 ..  (166∼167쪽)


 대통령과 국회의원으로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을 뽑도록 지켜보고 한 표 권리를 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일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거나 이 다음 생각을 하지 못한다면 크게 잘못입니다. 《파브르 곤충기》나 《조복성 곤충기》를 읽는 일은 아름답습니다. 즐겁고 기쁘며 신납니다. 그러나, 지식과 정보를 베푸는 책읽기로만 그친다면 아름답지 않습니다. 아이들한테 독후감 쓰기 숙제를 내주거나 독후표창을 해 준들 부질없습니다.

 

 설명서를 읽고 빨래기계를 돌려 빨래를 해내는 일이 나쁘지 않아요. 다만, 식구들 옷가지를 내 손으로 조물조물 주무르고 비비면서 빨래하는 일보다 아름답지 않습니다. 늙고 아프며 힘 못 쓰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큰도시 넓은 아파트 방에 모시는 일이 나쁘지 않아요. 다만, 시골 흙집에서 늘 흙을 만지고 파란 빛깔 하늘 맑고 시원한 물을 마시는 터전에서 언제나 곁에서 보살피며 함께 흙을 파먹고 살아가며 모시는 일처럼 아름답지 않습니다. 자가용 타고 할인매장에서 물건 값싸게 사들이는 일이 나쁘지 않아요. 다만, 식구들 다 함께 시골 논둑길을 거닐며 장마당 천천히 오가며 이야기꽃 피우는 일만큼 아름답지 않아요.

 

 조복성 님은 학문하는 길을 씩씩하고 당차게 걸었습니다. 다만, 학문만 하는 길은 안 걸었습니다. 사람이 되고자 하는 길을 걸었고, 벌레붙이를 바라보며 당신 한삶을 늘 되새기는 한편, 사랑스레 지구별을 돌보는 꿈을 빚으려고 땀흘렸어요.

 

 사람 하나 태어나서 죽기까지 책은 손수레로 다섯 차례 나를 만한 부피면 넉넉합니다. 넉넉할 뿐더러 넘칩니다. 《조복성 곤충기》는 다섯 수레 책 가운데 하나로 놓으면 즐겁습니다. 책은 다섯 수레만큼만 읽으면서 삶을 아리땁게 일굴 수 있으면 즐겁습니다. (4344.12.23.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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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숲은 깊다 - 도시에서 찾은 자연과 생태
강우근 지음 / 철수와영희 / 2011년 11월
평점 :
품절




 아이들과 흙 만지며 숲에서 놀아요
 [환경책 읽기 32] 강우근, 《동네 숲은 깊다》


- 책이름 : 도시에서 찾은 자연과 생태, 동네 숲은 깊다
- 글·그림 : 강우근
- 펴낸곳 : 철수와영희 (2011.11.25.)
- 책값 : 13000원


 어버이한테서 땅을 물려받지 않고서야 흙을 일구며 살아가기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어버이가 시골에서 흙을 일구며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흙일꾼으로 푸른 날과 젊은 날을 누리기는 어렵습니다.

 시골자락 논이랑 밭이랑 멧자락 사들이는 값은 그닥 비싸지 않습니다. 서울이 아니더라도 웬만한 도시에서 땅 한두 평 사들이는 값이면 시골자락 너른 논밭과 살림집을 장만할 수 있어요.

 그러나 오늘날 삶흐름을 돌아본다면, 오늘날 아이들은 도시에서건 시골에서건 어린이집부터 대학원까지 ‘흙 일구는 땀’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아이들 스스로 흙을 일구는 보람을 가르치지 않아요. 아이들한테 교과서를 가르치는 어른들은 흙을 일구는 뜻을 헤아리지 못해요. 교사나 교수 가운데 흙삶을 스스로 누리는 사람이 거의 없는 나머지, 아이들하고 흙을 만지며 일하는 즐거움을 나눌 수 없습니다.

 농업고등학교가 몇 군데를 빼고 몽땅 사라집니다. 학교이름에 농업이라는 낱말이 남더라도 농사일을 힘껏 가르치지 못합니다. 흙을 일구는 일보다는 교과서를 훨씬 오래 많이 자주 깊이 가르쳐요. 흙을 일구는 나날을 늘 느끼도록 이끌지 못해요.

 농업고등학교에 앞서 농업중학교가 없습니다. 농업중학교에 앞서 농업초등학교가 없어요. 농업초등학교에 앞서 농업유치원이나 농업어린이집이 없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시골마을에서 태어나더라도 어린이일 적부터 흙을 가까이 사귀지 못합니다. 시골 어린이집조차 영어를 가르치지, 호미질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뜻있다는 어린이집이더라도 낫질을 가르치지 않아요. 한글과 영화와 그림책 지식에 얽매입니다.
 



.. 냉이 하나 캐려고 구덩이까지 파지만 뿌리는 절반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나물 캐는 걸 흙 파는 놀이마냥 재미있어 한다 … 텃밭 둘레에서는 심지도 않았는데 자라나는 들나물을 언제나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 텃밭은 아이들에게 좋은 놀이터다. 텃밭 가꾸기를 시작한 것도 흙장난을 좋아하는 아이들 때문이었다 … 목련 풋열매는 낙서하기에 딱 좋다. 풋열매를 산딸기 열매 담았던 통에 가득 채워 아파트 옆 옹벽으로 가서 신나게 낙서를 했다 ..  (17, 39, 92쪽)


 오늘날 한국땅 시골마을에는 어르신들이 흙을 일굽니다. 한국땅 시골마을 어르신들은 당신 딸아들을 알뜰히 가르쳐 박사를 만들고 학자를 만들며 교수를 만듭니다. 의사랑 판사랑 검사를 만듭니다. 대통령을 만들고 국회의원을 만들며 군수를 만들어요.

 박사랑 국회의원을 만든 시골마을 어르신들은 일흔 여든 나이에도 흙을 일굽니다. 구부정한 허리를 다시 펴지 못해 그예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하는 마지막날까지 손에서 호미를 놓지 않습니다. 손으로 흙을 만집니다. 손톱 밑에는 흙때가 박힌 채 빠지지 않습니다.

 흙일꾼 할머니 할아버지가 키운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한미자유무역협정을 맺으려 합니다. 흙일꾼 할머니 할아버지가 키운 박사와 석사와 기술자와 교수들은 한강·낙동강·금강·섬진강뿐 아니라 온 나라 모든 물줄기에 삽질을 해서 물길을 똑바로 편 다음 물가에 시멘트를 들이부어 ‘걷는 길이랑 자전거 타는 길이랑 운동기구 갖다 놓는 일’을 합니다. 흙일꾼 할머니 할아버지가 키운 기자들은 서울로 몰려들어 신문을 만들고 방송을 만듭니다. 흙일꾼 할머니 할아버지가 키운 교사랑 교사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몸담으며 아이들한테 교과서를 가르칩니다. 흙일꾼 할머니 할아버지가 키운 공무원은 공공기관이라는 곳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키면서 돈을 법니다.

 언제나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흙을 만지는 흙일꾼 할머니 할아버지인데, 흙일꾼 할머니 할아버지가 키우며 함께 살아가는 흙일꾼 딸아들은 더더욱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한국사람은 용케 굶어죽지 않습니다. 흙일꾼 할머니 할아버지가 곡식을 거두고 짐승을 치며 물고기를 낚으며 김을 말리지만, 모두들 도시로 몰려들어 아파트를 빼곡하게 올리고 자동차를 뛰뛰빵빵 몰면서, 용케 굶어죽지 않고 돈만큼은 알뜰살뜰 벌어들입니다.
 



.. 냉이 잎은 크기도 모양도 참 여러 가지다. 어떤 것은 지칭개 같고 어떤 것은 망초 같고 또 어떤 것은 개갓냉이 같기도 하다. 스스로 적응하면서 살아가야 하기에 냉이는 이렇듯 다양한 모습을 갖게 되었을 게다. 나물을 한 봉지쯤 캐다 보면 꽃다지와 망초와 냉이쯤은 어느덧 자연스레 가릴 수 있게 된다 … 도룡뇽은 어항 바닥에 깔아 줄 모래를 쓸어 담으면서 휩쓸려 들어왔나 보다. 모래에 쓸려서 깔따구 애벌레도 잔뜩 딸려 왔다. 하루살이 애벌레, 날도래 애벌레도 쓸려 왔다. 물달팽이, 물벼룩도 보이고, 히드라도 보이고, 모래에 쓸려 온 게 참 많다. 개울 속 모래는 물속 생물이 살아가는 터전이구나. 그러니 강바닥 모래를 마구 파내는 것은 얼마나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인가 ..  (18, 60∼61쪽)


 흙일꾼 할머니 할아버지는 당신 어머니 아버지한테서 흙일을 배웠겠지요. 흙일꾼 할머니 할아버지는 당신 딸아들한테 흙일을 안 가르쳤겠지요. 당신 딸아들한테 흙일을 가르치지 않으며 허리가 구부정해질 무렵, 군사쿠테타와 함께 찾아온 새마을운동 바람에 휩쓸리면서 풀약과 비료를 듬뿍 치고 비닐을 덮어씌운 다음 기계로 휘휘 밀고 닦는 농사짓기를 새로 배웠겠지요.

 풀약과 비료를 치고 비닐을 덮으며 기계로 밀고 닦는 농사짓기는 굳이 딸아들한테 가르치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이런 농사짓기는 농협 공무원이 훨씬 잘 가르치겠지요. 이만 한 재주라면 대학교 농업과학과 같은 데에서도 얼마든지 가르치겠지요.

 즈믄 해인지 만 해인지 알 길 없는 기나긴 나날에 걸쳐 흙일꾼 아버지 어머니가 흙일꾼 딸과 아들을 낳았습니다. 쉰 해가 채 안 되는 짧은 오늘날 참말 흙을 일구는 길이 꽉 막히면서 송두리째 사라집니다.

 풀약을 치면 풀이 죽습니다. 풀약을 쳐도 벼나 옥수수나 콩이나 보리나 밀이나 서숙은 죽지 않는다지만, 이들 곡식에는 풀약이 배어듭니다.

 풀약을 치면 사람들 즐겨먹는 곡식 둘레에서 스스로 씨를 퍼뜨려 돋는 숱한 나물이 죽습니다. 포도나 능금이나 배 같은 열매는 아주 풀약에 찌들며 알이 굵고 달콤해진다지만, 칡이나 쑥이나 냉이나 씀바귀는 풀약을 한 번 맞으면 그대로 말라죽습니다.

 그러고 보면 배추나 무나 당근이나 토마토나 오이는 풀약을 듬뿍 쐽니다. 그래도 용케 안 죽습니다. 풀약을 듬뿍 먹은 곡식이랑 푸성귀를 먹는 사람들 또한 용케 안 죽습니다.

 다만, 용케 안 죽을 뿐, 오늘날 여느 사람치고 병원 문턱 뻔질나게 드나들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나이들어 보험 걱정 않는 사람 꼽기 힘듭니다. 요즈음 아이들치고 아토피 없는 아이나 젊은이는 아예 없다 할 만합니다. 새로운 병은 자꾸 늘고, 새로운 예방주사 자꾸 생기지만, 아픈 사람은 끊이지 않아요. 아프며 고단한 사람은 그치지 않아요.
 



.. 아파트와 다세대주택이 빽빽하게 들어찬 동네에서 걷기 좋은 길은 드물다. 풍경도 삭막하다. 걷다가 쉴 만한 곳도 찾기 힘들다 … 아파트 둘레 풀들은 대개 다 귀화식물이네. 이런 잡초들은 쓸모없고 성가신 풀 같지만 벌레들한테는 밥이 되고, 집이 된다 … 낙엽 속에서 겨울잠 자는 벌레처럼 낙엽 이불을 덮고 조용히 숲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누워서 본 숲의 모습은 색다른 느낌이다 ..  (52, 73, 122쪽)


 그림쟁이 강우근 님이 빚은 이야기책 《도시에서 찾은 자연과 생태, 동네 숲은 깊다》(철수와영희,2011)를 읽습니다. 북한산 밑자락에서 살아가며 그림을 그린다는 강우근 님인데, 강우근 님은 서울에 깃든 아파트에서 두 아이랑 옆지기랑 살아가며 그림을 그립니다. 으레 자연을 그리고 으레 아이들 삶을 그림으로 옮기는데, 강우근 님 집자리랑 살림자리는 도시요 아파트입니다.

 아파트에서, 게다가 서울자락 아파트에서 살아가며 어떻게 자연 그림이랑 어린이 그림을 그리나 아리송합니다. 그렇지만, 서울에서 살든 시골에서 살든, 아파트에서 살든 숲속에서 살든,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며 생각을 어찌 가누느냐에 따라 그림결이 달라지리라 믿습니다. 자연을 품에 안는 사랑을 곱게 건사할 수 있으면, 아파트로 빼곡한 곳에서도 냇물 흐르는 소리를 듣고 풀벌레 노래하는 소리를 들으며 바람이 이파리 흔드는 소리를 들어요. 구름이 흐르는 소리와 빗물이 아파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햇살이 슬퍼하는 소리와 무지개가 끙끙 앓는 소리를 듣겠지요.

 《동네 숲은 깊다》는 책이름처럼 도시자락 동네에 사람이 애써 만든 숲 또한 사랑스러운 자연이요 깊은 자연이며 아름다운 자연이라는 이야기를 담아요. 꼭 시골땅을 장만하고 시골집을 일구어야 자연사랑이 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를 보여줘요. 메마르고 팍팍한 도시에서 한결 씩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꿈을 들려줘요. 텔레비전에 휘둘리고 부질없는 쇠삽날 막공사 정책에 길드는 사람들이 애틋하게 어루만지고 싶은 사랑을 나눕니다.
 



.. 개울을 뚝딱뚝딱 도로 만들 듯이 만들려고 한다. 개울에 사는 벌레 한 마리 삶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니 포클레인으로 파내고 물만 흘리면 개울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숲도 만들고 개울도 만들고 강도 만들고 … 집에 돌아오면서 비로소 알게 된 것, (우리 아이) 나무하고 단이가 텃밭에 가지 않으려고 버틴 것은 그 시간에 텔레비전에서 하는 스포츠 중계를 보고 싶어서였다. 아이들은 커서 이제 마음대로 할 수 없다 ..  (87, 142쪽)


 도시에서 태어나 살아가더라도 숲을 사랑하는 어버이는 아이한테 숲을 사랑하는 넋을 심습니다. 이 아이 어버이는 도시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도시에서 일거리를 찾더라도, 이 아이는 홀로서기를 할 나이가 꽉 찰 무렵 제 어버이보다 한결 씩씩하게 흙땅을 찾아 흙집을 짓고 흙일꾼이 되는 흙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도시에서 태어나 살아가더라도 푸나무를 아끼는 어버이는 아이한테 푸나무 아끼는 얼을 물려줍니다. 이 아이 어버이는 도시에서 얽매이며 도시에서 떠돌더라도, 이 아이는 제금날 나이가 될 무렵 제 어버이는 생각으로만 품던 꿈을 아이 삶으로 이루면서 어려운 가시밭길이든 힘겨운 자갈밭이든 다부지게 걸어가며 싱그러운 흙내음 살가이 들이마실 수 있어요.
 



.. 요즘 아이들은 놀 줄을 모른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런데 아이들은 놀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놀지 못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놀지 못하는 것은 어른들이 아이들을 놀게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다 ..  (머리말)


 《동네 숲은 깊다》처럼 도시에서 동네를 사랑하는 길을 슬기로이 다스릴 줄 알면 좋겠습니다. 도시에서 동네를 사랑하는 길을 아름다이 닦으면 반갑겠습니다. 서른 해나 마흔 해 뒤 다시 허물어 짓는 아파트는 부디 끝장낼 수 있으면 고맙겠습니다. 아파트에서 사느냐 마느냐는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어떤 사랑을 어떤 사람이 되어 어떤 삶터에서 어여삐 꽃피우는 보금자리를 이루며 즐기어 나누느냐 하는 대목이 대수롭습니다.

 《동네 숲은 깊다》에서 한 가지 아쉽다면, “낙엽이 많이 졌다(121쪽)”, “낙엽은 이쪽으로 떨어질 듯하다가(122쪽)”, “낙엽이 떨어져 쌓이는(122쪽)”처럼 ‘낙엽(落葉)’이라는 낱말을 자꾸 쓰는데, ‘낙엽’ 씀씀이가 올바르지 않습니다. “나뭇잎이 떨어져 땅에 앉으면” 이때에 ‘낙엽’이라 일컫습니다. “길에 낙엽이 많다”처럼 쓸 수 있을 뿐입니다. 게다가, 한국말은 ‘낙엽’ 아닌 ‘가랑잎’이에요. 나무에 달릴 때에는 나뭇잎이요, 나무에서 똑 하고 떨어질 때에는 가랑잎이 됩니다. ‘네잎클로버’ 아닌 ‘네잎토끼풀(56쪽)’을 이야기할 줄 아는 강우근 님인 만큼, 아무쪼록 ‘가랑잎’과 ‘나뭇잎’을 알맞게 가려쓸 줄 알면 더 기쁘겠습니다. (4344.11.21.달.ㅎㄲㅅㄱ)
 

 

(마지막 사진은 여섯 달짜리 둘째가 잡아 주었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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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공간 아나스타시아 3
블라지미르 메그레 지음, 한병석 옮김 / 한글샘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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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스레 살아갈 터는 어떻게 얻는가
 [사랑하는 배움책 1] 블라지미르 메그레, 《사랑의 공간》(한글샘,2007)



- 책이름 : 아나스타시아 3, 사랑의 공간
- 글 : 블라지미르 메그레
- 옮긴이 : 한병석
- 펴낸곳 : 한글샘 (2007.10.20.)
- 책값 : 1만 원


 (1) 우리 식구 살아갈 보금자리


 인천과 충주에서 살 때에 늘 다른 사람 집에 얹혀 지냈습니다. 내 집이 아닌 다른 사람 집에서 살더라도 내 하루는 달라지지 않는달 수 있으나, 내 마음껏 내가 바라는 대로 꾸미거나 보살피지 못해요. 우리 식구한테 맞추어 고치거나 손질할 수 없습니다.

 내 집을 마련해서 살아야겠다고 느끼며 고흥으로 옮깁니다. 아직 짐을 옮기지 못했고 계약만 합니다. 더 일찍 계약하고 더 일찌감치 손질해서 짐을 옮기려 했으나, 우리가 들어가서 살아가려 하는 마을 집임자는 당신 고향마을을 떠나 도시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깊은 시골로 들어가지만, 집임자는 깊은 시골을 벗어나 도시에서 살림을 꾸립니다.

 우리는 97평에 1000만 원 하는 집과 땅을 장만해서 오래오래 뿌리내려 우리 아이들도 앞으로 저희 아이들을 낳아 살아갈 수 있는 터를 닦을 생각입니다. 이웃한 74평에 500만 원 하는 땅을 얻어서 두고두고 책을 건사하는 작은 도서관을 일구어 우리 아이들이 언제나 책누리를 즐길 수 있도록 할 생각입니다.

 가난한 살림에 목돈 1500만 원이란 몹시 빠듯합니다. 이만 한 돈은 누군가한테서 얻어야 합니다. 그런데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헤아리면, 여느 도시사람한테 1500만 원 돈은 참 작아요. 전세를 놓아 집 빌리는 돈만큼도 안 된다 할 자그마한 돈입니다. 웬만한 자가용 한 대 값조차 안 될 뿐더러, 요즈음 대학교 등록금 한 해치하고 반밖에 안 되는 돈입니다.

 그러니까, 시골에서 집과 땅을 장만해서 살아가려 하는 사람이라면, 아주 적은 돈을 들이면서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기쁜 보금자리를 일굴 수 있다는 뜻입니다.


.. 강물아! 너는 대도시들이 중요하다 생각하니? … 강물아! 너는 그 도시의 크기를, 그 위대함을 느낄 수 있니? … 네 물을 따라 과거에는 소리 없이 조각배가 다녔지만 지금은 디젤 증기선이 다닌다 … “사람들 모두가 한 가지 같은 목적을 갖도록 시스템 전체가 요구했지, 그런 식으로 사람들 모두에게 폭력을 가한 거야. 꺾으려 한 거지.”..  (14∼15, 159쪽)


 시골 어른들은 우리가 어떻게 먹고살려 하는지 걱정합니다. 올 2011년 10월 13일, 미국 의회에서 한미자유무역협정을 통과했다지요. 한국 의회에서도 한미자유무역협정을 통과하도록 한다지요. 마을 이장님 댁에 머물며 집 계약을 하는 동안, 이장님 댁 텔레비전에서 한미자유무역협정 이야기가 흐릅니다. 한미자유무역협정을 다 맺고 국회 결의까지 끝내면, 자동차와 전자제품 수출은 관세가 없어져 아주 좋아진다지만, 한국땅 농어업은 깡그리 무너진다고 합니다. 시골 흙일꾼과 고기잡이 말이 아니라, 텔레비전에서 새소식을 들려주는 사람들 말입니다.

 곧,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정치꾼 모두 ‘한국 시골마을 깡그리 죽이는 줄 뻔히 알’면서 한미자유무역협정을 맺는다며 부산을 떠는 셈입니다. 왜냐하면, 돈벌이가 되는 일이란 자동차 팔아먹기라고 여기기 때문이에요.

 밥을 안 먹는 도시사람은 없습니다. 시골사람은 풀과 쌀을 먹을 뿐 고기 먹을 일이 거의 없습니다. 흙일꾼이 일구는 곡식을 사다 먹는 사람도 도시사람이요, 흙일꾼이 키운 돼지와 소와 닭을 사다 먹는 사람도 도시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들 도시사람은 ‘좋은 곡식’과 ‘좋은 고기’를 마땅한 값을 치러서 사다 먹으려 하지 않아요. ‘더 값싼 곡식’과 ‘더 값싼 고기’를 돈 조금 치러서 사다 먹으려 할 뿐입니다. 한쪽 입으로는 유기농과 친환경을 외치지만, 정작 유기농과 친환경으로 일군 곡식과 고기를 제값을 치러서 사다 먹으려 하지 않아요.


.. “책은 소리를 내지 못해요. 책은 악보 역할을 하는 거예요. 독자는 마음속으로 읽는 소리를 자기도 모르게 발음하게 돼요 … 사람이 만든 기계는 마음속에 소리를 내지 못합니다.” … “당신에게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건 당신의 사고가 충분히 깨끗하지 못해서 그래요.” … “과학을 모든 사람이 함께 누리지 못하고 있어요. 과학의 업적은 처음엔 한정된 소수가 점유하죠. 자기들만의 사사로운 이해를 위해 사용하고요 … 사람은 누구나 자기 주변에 사랑의 공간을 지어서 자기 자식에게 선사해야 합니다. 자식에게 줄 사랑의 공간을 마련하지 않고 아이를 낳는 것은 죄악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점을 깨닫고 행한다면 온 지구가 사랑이 환히 빛나는 우주의 한 점이 될 것입니다.” ..  (45, 46, 66, 72쪽)


 여든이 가까운 마을 어른 한 분은 한미자유무역협정 새소식을 들으면서 이제 소는 그만 키워야겠다고 말씀합니다. 다른 어른들은 맞장구를 치면서 형님 이제 소 그만 하셔요 하고 말씀합니다. 마을 어른은 소 사료 한 푸대에 만육천 원이라 하면서, 소를 안 하고 싶어도 소를 팔려 하면 도무지 값을 안 치니 팔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틀림없이 팔려고 키우는 소라 할 텐데, 마을 어른은 소가 좀 예뻐야지 소가 예쁘니까 키우지 하는 말을 덧붙입니다. 시골살이를 하며 목돈을 얻는 소라 할 테지만, 딸아들이 무럭무럭 자라던 지난날이든 딸아들이 도시로 떠난 오늘날이든 마을 어른한테 소는 일소이자 한식구입니다.

 나는 우리 네 식구 살아갈 시골마을로 전라남도 고흥을 꼽았습니다. 다른 ‘좋다 하는’ 마을이 많다 하지만, 굳이 전라남도 고흥을 찾았습니다. 둘레에 아는 사람이 없고, 내 어버이나 다른 살붙이 가운데 이곳에서 살아가는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아무런 줄도 끈도 없는 터입니다. 오직 한 가지 있다면, 나와 옆지기가 이곳에서 늙어 죽을 때까지 예쁘게 살아갈 만하다고 느끼고, 우리 딸아들이 무럭무럭 크기에 좋은 터라고 느끼며, 딸아들이 저희 어버이랑 내내 함께 살든 도시로 나가서 살든, 딸아들이 나이들고 힘들 무렵 언제라도 고이 안겨 예쁘게 삶을 돌볼 만한 터라고 느껴요. 두 번째 고향이나 세 번째 고향 같은 데가 아니라, 앞으로 우리 집안 사람들 누구나 일하며 쉴 좋은 보금자리가 될 터라고 느껴요.

 고속도로 안 지나가고 기차길 없으며, 이 나라에 흔하디흔한 골프장이 한 군데도 없어요. 공장은 눈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던데, 시멘트 만드는 공장이 아주 외진 데에 한 군데 보였어요. 읍내가 있고 면내가 있으나, 이곳 분들은 너나없이 흙과 바다와 하나되어 살아가요. 자동차가 어지러이 다니는 데가 없어요. 제주나 해남이나 남원이나 보성처럼 관광지로 이름나지 않아요. 여수나 목포나 거제나 광양처럼 커다래지며 시끌벅적하지 않아요. 조용하게 폭 싸인 작은 시골이고, 오붓하게 자연을 어깨동무할 수 있는 예쁜 시골이에요.


.. “더러워진 곳은 누가 청소하고? 다른 사람이? … 자기 주변을 더럽히는 자가 깨끗한 곳에 오면 쓰레기도 같이 가져올 거야. 더럽힌 곳을 먼저 치워. 그러면 자기 죄도 씻을 수 있어 … 러시아에서 탄 냄새 나는 굴뚝의 공장들이 일 없이 멈춰 서 있는 건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우연히 그런 게 아니야 … 당신이 살던 곳, 지금 사는 곳도 옛날엔 창조주가 보살피던 숲이었지. 그 복된 낙원 오아시스를 오늘 어떻게 만들어 버렸지? 숲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큰 의미가 없어. 오히려 황폐한 버려진 땅에 자기 손으로 채소를 가꾼 다츠니키들. 이들을 알아줘. 밭의 풀 한 포기 한 포기가 다 그들을 사랑하고, 우주의 따스함을 선사하려 애쓰지 … 당신 곁에 사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비추세요.” ..  (225∼226쪽)


 지난 석 달 동안 고흥군 군내버스를 타고, 또 고흥군 군립도서관 계장님 자동차를 얻어 타며 이곳저곳 돌아다녔어요. 요 며칠은 제 자전거를 몰며 이곳저곳 둘러보았어요. 읍내이든 면내이든 더없이 차분하면서 갖출 것을 알뜰히 갖추어요. 놀러 오는 사람이 드문드문 있을 테지만, 우리 식구처럼 살러 오는 사람이 쏠쏠히 있어요. 흙과 바다를 껴안고 살아가는 고흥땅 어버이 품을 떠나 큰도시 학교와 일터를 찾아 떠나는 젊은이가 훨씬 많기는 하지만, 큰도시 학교와 일터를 찾는다면서 떠나고 나면 시끄러운 소리와 매캐한 바람을 마시며 지내는 이들은 머잖아 깨달을 수 있겠지요. 어쩌면 못 깨닫고 말아 고향마을로 못 돌아올는지 모르는데, 비가 오면 빗소리를 듣고, 풀벌레가 울면 풀벌레 노랫소리를 들으며, 가을날 나락이 익는 소리와 길가 가득 나락을 말리는 내음을 느끼는 터에서 숲과 바다와 들을 헤아리며 몸과 마음이 맑아져요. 몸과 마음이 맑아질 때에 내 삶이 살아나요. 싱싱하게 살아숨쉴 수 있어요. 싱그러이 꿈꿀 수 있어요.

 올가을 어김없이 감이 주렁주렁 맺혀요. 올가을 지난해와 똑같이 가을걷이를 해요. 마을 할매들은 품앗이로 마늘을 심어요. 밭자락에 한 가지 푸성귀만 심을밖에 없지만, 내 식구 먹을 텃밭에는 온갖 푸성귀 골고루 자라요. 아이들이 도시에 나가 살도록 학교에 보내느라 애써야 했기 때문에 논이든 밭이든 한 가지 곡식과 푸성귀만 심어 돈을 벌어야 하겠지요. 이렇게 흙을 일구며 아이들을 ‘도시사람 되도록’ 가르쳤겠지요.

 우리 식구는 집을 마련하고 도서관 새로 열 건물을 짓고 나면 다른 논밭을 장만할 돈이 없어요. 우리 식구는 이곳 시골마을에 들어오더라도 흙을 일구는 살림은 꾸리지 못해요. 그래도 집 둘레로 집보다 넓은 텃밭이 있고, 도서관 둘레로 도서관보다 넓은 흙땅이 있어요. 아이들하고 이 자리에 푸성귀를 심고 나무를 심을 수 있어요. 그냥 풀밭으로 두고는 아이들 흙놀이터로 삼ㅇ을 수 있어요. 고마운 마을이고 고마운 집이며 고마운 흙이에요. 고마운 선물인 흙이며 바람이며 햇볕이며 이웃이며 천천히 느끼면서 받아들이는 나날을 한 해 두 해 꾸리다 보면, 언젠가 짚 앞 논배미 하나 얻어서 나락을 꽂아 볼 수 있을 테고, 집 둘레 다른 빈집을 얻어 밭으로 돌본다든지, 울타리 빙 둘러 나무를 심을 수 있겠지요. 좋은 터에 보금자리를 닦을 수 있으면 좋은 꿈이 잇달아 피어납니다.


 (2) 사랑스레 살아갈 터


 블라지미르 메그레 님이 아나스타시아한테서 이야기를 듣고 찬찬히 생각을 받아적은 책 셋째 권 《사랑의 공간》(한글샘,2007)을 읽습니다. 진작에 다 읽을 수 있었으나, 우리 네 식구 새 보금자리를 어떻게 어디에서 꾸려야 좋을까를 곰곰이 헤아리면서 아주 천천히 삭이며 읽습니다. 몇 쪽을 읽은 다음 오래도록 생각에 잠깁니다. 몇 쪽을 더 읽고 나서 차분하게 내 삶을 돌아봅니다. 내가 사랑할 삶을 돌아봅니다. 한식구로서 모두 아끼며 좋아할 삶을 헤아립니다. 아이들은 어떤 삶을 사랑할 만한가를 가눕니다. 옆지기가 아끼면서 좋아할 삶을 생각합니다.

 《사랑의 공간》은 책이름 그대로 ‘사랑스레 살아갈 터’를 말하는 이야기책이면서, 사람들마다 다 다른 곳에서 태어나 다 다르게 살아가는 동안 다 다르게 일굴 아름다운 사랑이 깃들 보금자리란 무엇인가를 스스로 깨달아 찾을 수 있다고 들려주는 길동무책입니다.


.. 아나스타시아는 말했다. 내가 아들과 어울리려면 나 스스로 일정 수준의 깨끗한 생각을 가져야 하고 속내가 정화돼야 한다고 했다 … “모든 사람들이 받는 교육의 틀로 그 아이를 몰아넣으면서 어찌 그 애가 불운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부모들은 모두 자기 아이들이 커서 행복하길 바라지만 아이들은 커서 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져. 그리 행복하지 않아 … 블라지미르, 주변을 더 주의깊게 살펴봐. 풀, 나무, 꽃들이 자라지. 여기에 물 주는 시간을 미리 날짜 별로 시간 별로 정할 수 있을까?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데, 누군가가 물 주는 날짜와 시간을 지혜롭게 미리 처방했다 해서, 당신은 꽃에 물을 주지는 않겠지.” … “아이들을 방해하지 말고, 하느님이 바라시는 모습으로 그들을 생각해야 해 … 부모의 의무는 그 창조의 빛을 온갖 꾸며낸 독선의 지혜로 가리지 않는 것이야 … 문이 닫힌 방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맹이 없는 논쟁은 무한히 계속할 수 있어. 그러나 문을 열기만 하면 모두가 다 훤히 알게 되고 논쟁의 여지가 없어져. 모두 각자의 진리를 볼 수 있으니까.” ..  (18, 152, 153쪽)


 나부터 스스로 예쁜 어버이로 살아갈 때에 아이들 또한 예쁜 아이들로 저희 어버이를 맞아들입니다. 나부터 스스로 착한 어버이로 지낼 때에 아이들 또한 착한 아이들로 저희 어버지를 바라보아요.

 바란다면 꿈을 꾸고, 꿈을 꾼다면 그대로 살아갈 노릇입니다. 바라는 나날을 꿈꾸며 천천히 이루면 됩니다. 싱그럽고 푸른 먹을거리를 바라기에 싱그럽고 푸른 먹을거리를 어디에서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하고 꿈을 꿉니다. 이 꿈을 이룰 수 있는 길을 신나게 걷습니다.

 좋은 책 하나 읽고 싶다면 좋은 책 하나란 어떤 줄거리를 어떻게 담은 책인가를 곰곰이 꿈을 꿉니다. 곰곰이 꿈을 꾸고 나서 책방마실을 할 때에 내 눈길과 손길과 마음길을 사로잡는 책한테 다가갑니다. 내 지갑을 기쁘게 열어 내 가슴이 벅차오르도록 이끄는 사랑스러운 책을 장만합니다.

 좋은 집을 바라는 우리들은 좋은 마을에서 좋은 마을사람으로 뿌리내릴 길을 헤아립니다. 좋은 마을에서 우리부터 좋은 사람으로 지내며 좋은 보금자리가 되도록 일구자고 꿈을 꿉니다. 바라면서 꿈이 생기고, 꿈이 생기면서 하루하루 새롭게 살아낼 기운을 얻습니다.


.. “고마워. 착하다. 넓은 마음, 사랑 감사해. 사람들은 알게 될 거야. 반드시 가슴으로 느낄 거야. 지구에서 푸른 빛, 사랑의 빛을 절대 거두지 마.” … “우선은 노랫말 없이 해 보거라, 아네츠카. 새소리를 듣고, 졸졸거리는 물소리, 나뭇잎의 살랑임, 그리고 바람이 세차게 나뭇가지에서 우는 소리를 목소리로 따라해 보거라. 풀에서도 여러 가지 소리가 나지. 원하기만 하면 사방에서 여러 가지 깨끗한 소리를 들을 수 있어.” ..  (85, 100쪽)


 아이들을 학교에 넣어야 한다면 아이들한테 무엇을 바라는가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어떤 어른으로 자라나며 아이들 스스로 씩씩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가부터 찬찬히 짚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회사원 되기를 바라나요. 아이들이 예술쟁이가 되기를 바라나요. 아이들이 의사나 판사가 되기를 바라나요. 아이들이 저희 삶을 사랑하며 저희 어버이를 아끼고 저희 이웃을 보살필 줄 아는 예쁜 젊은이로 살아가기를 바라나요.

 나는 우리 아이가 흙과 햇볕과 물과 바람과 푸나무를 사랑하면서 아이 삶을 마음껏 누리기를 바랍니다. 아이 먹을거리를 아이 손수 기르고, 아이가 지내는 나날을 아이 스스로 글이든 사진이든 그림이든 마음껏 담아서 펼칠 수 있기를 꿈꿉니다. 사랑스러운 마을에서 사랑스러운 몸가짐으로 사랑스러운 삶을 일구는 나날을 고스란히 아이 글과 그림과 사진으로 꽃피우는 한편, 아이 춤과 노래와 이야기로 여미면 넉넉하다고 느낍니다.

 좋은 삶을 누리면서 좋은 사랑을 길어올리면 돼요. 좋은 꿈을 북돋우면서 좋은 빛줄기를 나누면 돼요. 좋은 밥을 먹으면서 좋은 삶을 보듬으면 돼요. 어버이 된 나는 아이들한테 돈을 물려줄 수 없어요. 아이들이 씩씩하게 디디면서 흐뭇하게 어우러질 보금자리 하나 마련해서 지킬 수 있어요.


.. “새싹은 잘 보이지 않아. 모두한테 바로 보이는 게 아니야. 마음에 튼 싹이라면 더더욱 그렇지.” … “영혼이 건강하고 풍부한 사람은 어떤 부와도 비교할 수 없어요.” … “때가 되면 인류는 깨달을 거야. 대학자들이 할머니를 찾아 채소밭으로 올 거야. 배고픔에 지쳐 토마토를 좀 달라고 애원하게 될 거야. 학자와 그가 만든 것들은 오늘 할머니에게 필요없어. 노인은 학자들이 만든 것들을 알지 못하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아. 노인은 학자 없이도 잘 살 수 있지만 학자는 노인 없이는 못 살아. 그는 허상의 껍데기 세계 속에, 곽 막힌 세상에 사는 거야. 할머니는 자연의 흙에, 삼라만상의 모두와 함께 하는 거야. 우주에게 할머니는 필요하지만, 그는 필요없어.” ..  (178, 188, 213쪽)


 아이는 아직 참 작고, 어버이인 나는 아직 몸뚱이가 크니까, 나는 아이를 안거나 업으며 시골길을 거닐 수 있습니다. 이제 첫째 아이는 네 살을 지나 다섯 살이 될 테니, 이 아이를 안거나 업으며 길을 거닐면 등허리와 팔이 꽤 저립니다. 아이가 더 크면 더 힘들거나 더 저릴 테지요.

 힘들 때에는 힘들다고 느끼면서 좋습니다. 가뿐할 때에는 가뿐하다고 느끼며 좋아요. 내 몸뚱이에서 솟는 따스함을 아이한테 주고, 아이 몸뚱이에서 피어나는 따뜻함을 어버이가 받습니다. 삼백 살이 넘은 굵직한 느티나무를 살며시 껴안습니다. 아버지가 느티나무를 가만히 껴안으며 숨소리를 느끼려 하니, 아이도 느티나무를 가만히 껴안으며 귀를 댑니다.

 어버이가 마시는 물을 아이가 마십니다. 어버이가 마시는 바람을 아이가 마십니다. 어버이가 디딘 땅에서 아이가 살아갑니다. 어버이가 손에 무엇을 쥐느냐에 따라 아이가 손에 쥘 무언가는 늘 바뀝니다.


 (3) 아나스타시아 집안이 아이와 살아가는 길


 《사랑의 공간》에서는 아나스타시아 집안이 예부터 아이를 어떻게 낳고, 아이와 어떻게 살며, 아이 스스로 어떤 길을 걷도록 돕는가 하는 이야기를 살포시 나눕니다.

 아이를 낳으려 하는 어버이는 어떻게 살아가고, 아이를 낳은 어버이는 어떤 일을 하며, 아이와 살아가는 어버이는 어디에서 보금자리를 사랑스레 일구는가 하는 이야기를 조곤조곤 나눕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트는 새벽동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깁니다. 아나스타시아는 예부터 당신 집안이 이렇게 흘러왔다고 느끼면서 깨달은 이야기가 있으면, 나와 옆지기와 아이들은 우리 집안이 예부터 어떻게 흘러왔다고 느끼면서 깨달을까 하고 생각에 잠깁니다. 내 어버이는, 내 어버이를 낳은 어버이는, 내 어버이를 낳은 어버이를 낳은 어버이는 먼 옛날 어디에서 어떤 일놀이를 누리면서 당신 아이들하고 어우러졌을까 하고 생각에 잠깁니다.

 아이들 옷가지를 빨래하며 생각에 잠깁니다. 아이들 먹을거리를 마련해서 함께 먹으며 생각에 잠깁니다. 아이들 잠자리에서 생각에 잠기고, 아이들과 시골길을 거닐거나 첫째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마실을 다니며 생각에 잠깁니다.


..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 누구도 왜 다름아닌 그 사람을 사랑하는지 설명하지 못해요. 사랑에 빠진 여자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고 중요한 사람은 단 한 명, 자기가 선택한 사람입니다 … 블라지미르는 과거의 자신을 멋지게 치장하려 하지 않았어요.” ..  (36, 43쪽)


 내 어버이들은 무엇을 할 때에 즐거웠을까요. 내 어버이들은 어떤 일을 즐겼을까요. 내 어버이들은 먼 뒷날에 새로 태어날 아이들을 얼마나 헤아렸을까요.

 내 어버이들은 고속도로를 생각해 보았을까요. 내 어버이들은 공장을 꿈꾸어 보았을까요. 내 어버이들은 운동경기나 정치제도나 제도권교육이나 수출이나 토목공사나 관광단지 들을 헤아린 적이 있을까요.

 내 어버이들은 돈을 얼마나 바랐을까요. 내 어버이들 손에는 굳은살이 어느 만큼 박혔을까요. 내 어버이들은 이웃을 어떻게 사귀었을까요. 내 어버이들 살던 집은 누가 어떻게 짓고 손질했을까요.


.. “부탁입니다. 여러분들! 직업을 하루 빨리 바꾸세요. 창조주의 위대한 조물인 지구를 해치는 모든 직업을. 부탁입니다. 여러분! 지구에 계속 해를 가하면 지구상의 누구도 행복할 수 없어요.” ..  (252쪽)


 사랑을 누릴 만한 일을 해야 사랑을 누립니다. 사랑이 꽃피울 만한 일을 해야 사랑이 꽃피웁니다. 사랑이 자랄 만한 놀이를 함께 해야 사랑이 자랍니다. 사랑이 무르익을 만한 보금자리를 돌보아야 사랑이 무르익습니다.

 돈을 바라며 한미자유무역협정을 맺는다면 돈이야 벌겠지요. 경제성장이야 이루겠지요. 그리고, 돈을 벌고 경제성장을 이루는 만큼 우리 삶 한구석이나 우리 삶 구석구석이 와르르 무너지겠지요. 고속도로를 새로 깔면 자동차야 더 빨리 싱싱 달릴 테지만, 그만큼 자동차 배기가스와 고무바퀴 먼지가 날릴 뿐 아니라, 싱그러운 숲자락이 사라져요.

 이야기책 《사랑의 공간》은 아나스타시아 집안 사람들이 무엇을 사랑하면서 살아왔는가를 보여줍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한테 어버이 두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가를 온몸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4344.10.26.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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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10-28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특히 감기가 심해서
멍하니 된장님의 글을 읽다가 갑자기 울컥해버렸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요즘 지쳤나봐여, 살아갈 터에 대한 글이 유난히 뭉클하게 다가오네요.

숲노래 2011-10-28 16:34   좋아요 0 | URL
좋은 터에서 살아가면서
어른과 아이가 모두
몸이랑 마음을
사랑스레 쉴 수 있으면 넉넉하리라 믿어요.

차근차근 마녀고양이 님네
보금자리를 돌보아 보셔요~

차츰차츰 기운 차리시리라 믿어요~
 
- 문명이 앗아간 지구의 살갗
데이비드 몽고메리 지음, 이수영 옮김 / 삼천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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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흙을 만져야 내 몸이 살아난다
 [책읽기 삶읽기 77] 데이비드 몽고메리, 《흙, 문명이 앗아간 지구의 살갗》(삼천리,2010)



 혼자 책을 짊어지며 살아가던 지난날에는 언제나 ‘책을 둘 곳’을 헤아리면서 내 살림집을 찾았습니다. 책을 둘 만한 넉넉하고 볕 잘 드는 곳인가를 생각했고, 여러 책방을 가까이 찾아가기에 괜찮은 목인가를 돌아보았습니다. 내 몸이 느긋하게 쉴 곳인가는 거의 살피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살 만한 집인가보다 책이 깃들기에 좋은 데인가를 보았습니다.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는 요즈음은 달리 생각합니다. 책은 어떻게든 곰팡이가 피지 않는 데에 둘 수 있기를 바라면서, 네 식구 깃들 사랑스러운 터전을 헤아립니다. 네 식구가 먼저 사랑스레 살아갈 만한 터전이어야 좋은 보금자리로 여겨 옮기지, 네 식구가 살가이 지내기 힘든 데라면 마음이 가지 않습니다.

 없는 살림으로는 꿈처럼 바라는 곳으로 가기 힘듭니다. 짐차를 불러 옮기는 값부터 만만하지 않으나, 좋은 시골자락 터란, 땅과 집을 장만해서 옮겨야지, 빌려서 들어가면 애써 잘 꾸며 살 만하게 고치면, 금세 집임자나 땅임자한테 쫓겨납니다. 이러다 보니 선뜻 꿈을 꾸지 못하고, 마음을 열지 못해요.

 어찌해야 좋을까를 놓고 여러 달 망설이고 알아봅니다. 이곳으로 우리 깜냥껏 옮길 만한지 가늠하고, 저곳에서 우리를 불러 주는데, 우리가 옮겨도 될 만한가 어림합니다. 어느 쪽이 되든 마땅한 집터와 책터를 찾기까지는 퍽 품을 들여야겠지요. 오래오래 눌러살 생각이라면, 네 식구가 모조리 가볍게 짐을 싼 뒤 ‘우리가 좋아할 만한’ 마을로 찾아가서 방을 하나 얻은 다음, 좋은 살림집을 찾기까지 눌러지내야겠지요.


.. 흉작일 때 아무런 구제책이 없는 소작농들은 기근 동안 음식을 구경할 수 없었지만, 시중에는 먹을거리가 많았다. 생계 수단을 잃은 농민들은 시장에서 먹을거리를 살 수 없었다 … 기근이 이어지는 동안 정부들은 곡물을 수출했고, 그렇게 20세기로 접어들었다. 소비에트 농부들은 1930년대에 굶주림에 시달렸다. 중앙정부가 농부들이 수확한 것으로 도시를 먹이고 해외시장에 내다 팔아서 번 돈으로 산업화의 비용을 댔기 때문이다 … 기근이 이어지는 동안 19세기 말 무렵에 유럽 나라들은 대개 수입 식품으로 국민들을 먹였다 ..  (154∼155쪽)


 옆지기와 함께 읽는 ‘아나스타시아’를 떠올립니다. 러시아 타이가 잣나무숲에서 살아가는 아나스타시아는 식구들이 살아갈 보금자리는 ‘스스로 가장 좋아하는 곳’으로 삼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둘째로 좋거나 셋째로 좋은 데가 아닌 가장 좋다고 여기는 곳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해요.

 첫째로 좋다고 여길 만한 데라기보다 둘째나 셋째로 괜찮다고 여길 만한 데로 옮기려고 생각하던 매무새를 가다듬습니다. 넷째나 다섯째 자리라 하더라도 마음을 느긋하게 내려놓을 데라면 되리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첫째가 아니고서는 안 될 노릇입니다. 한 번 받은 고마운 목숨을 살아가는 나날인데, 돈 걱정이나 집 걱정에 앞서, 아름다운 삶이 되는가 아닌가를 따져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하루하루 자라면서 보고 들으며 부대낄 좋은 보금자리인가 아닌가를 아로새겨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서 늘 즐거운 터전이어야 합니다. 낮에 신나게 뛰놀고 밤에 새까만 별하늘을 올려다볼 터전이어야 합니다. 흐르는 물을 마실 수 있고, 너른 멧자락과 파란 바다를 이웃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길이 잘 뚫린 데라든지, 이름나거나 훌륭하다는 학교가 가까이 있다 한들 부질없습니다. 아이 삶을 보건대, 이런 물질과 문명은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아이한테는 지식이 덧없습니다. 아이 삶이 가장 대수롭습니다. 날마다 숨쉬고 마시며 먹는 자연이 가장 대수롭습니다.


.. 흙의 침식이 고대사회들을 무너뜨렸고 오늘날의 사회도 심각하게 뒤흔들 수 있다는 무시 못 할 증거 앞에서도 지구적인 흙의 위기와 식량 부족이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경고는 허공으로 흩어진다. 이미 1980년대 초반에 농업경제학자 레스터 브라운은 현대 문명이 석유보다 먼저 흙을 다 써 버릴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지난 몇 십 년 동안 이어진 그런 불안한 예측들을 한귀로 흘려 버리면서 전통적인 자원경제학자들은 흙의 침식이 식량 안보를 위협할 가능성을 지나쳤다. 그러나 침식 탓에 농경지에서 흙이 만들어지는 속도보다 빠르게 흙이 사라지는 현실에서 그런 관점은 먼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는 것이다. 흙의 유실이 중대한 문제로 떠오르는 때가 2010년이냐 2100년이냐 하는 논쟁은 핵심을 벗어난 것이다 ..  (246쪽)


 이야기책 《흙, 문명이 앗아간 지구의 살갗》(삼천리,2010)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서양사람들은 흙을 하찮게 여겼습니다. 오늘날에도 아직 하찮게 여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동양사람들은 흙을 거룩하게 여겼습니다. 오늘날에는 동양사람들 가운데 퍽 많은 이들이 서양사람들처럼 흙을 하찮게 여깁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흙을 하찮게 여깁니다. 도시에서 보금자리를 얻어 지낸다고 할 때부터 흙을 하찮게 여기고 맙니다.

 흙은 문명도 물질도 과학도 아닙니다. 흙은 오로지 자연이고 삶이며 목숨입니다.

 사람은 문명이나 물질이나 과학이라는 옷을 입으면, 몸을 덜 쓰거나 땀을 안 흘리면서 돈은 넉넉히 벌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느 사람이라 하더라도 밥을 먹어야 하고 숨을 쉬어야 하며 물을 들이켜야 합니다. 밥·숨·물이 없이 어떤 사람이 몇 초나 살아숨쉴 수 있겠습니까. 밥·숨·물이 없는데 돈·힘·이름으로 무얼 할 수 있는가요.


.. 우리는 우리 두 발과 집, 도시, 논밭을 떠받치고 있는 땅에 대해서 그다지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  (8쪽)


 이야기책 《흙》은  수많은 보기를 오랜 발자국을 더듬으면서 하나하나 알뜰히 짚습니다. 바보스레 살아온 서양 문명 사회를 낱낱이 꼬집거나 나무랍니다. 384쪽에 이르는 줄거리는 한결같습니다. 머리말에 한 줄로 적은 말마디처럼, 《흙》은 예나 이제나 “우리 두 발과 집, 도시, 논밭을 떠받치고 있는 땅에 대해서 그다지 깊이 생각하지 않는” 슬프며 안타까운 사람들 근심스럽고 안쓰러운 삶자락을 이야기합니다.

 사람은 흙을 먹고 흙을 입으며 흙에 몸을 누여 살아가는 목숨입니다. 흙을 잊는다면 사람은 사람 구실을 못 합니다. 흙하고 멀어지면 몸은 자질구레한 못난 것들이 스며들어 무너지기 때문에 자주 아프고 오래 앓습니다. 흙을 만져야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습니다. 적어도 텃밭을 돌보거나 조그마한 꽃그릇을 건사해야 사람다움을 살포시 잇습니다. (4344.9.10.흙.ㅎㄲㅅㄱ)


― 흙, 문명이 앗아간 지구의 살갗 (데이비드 몽고메리 씀,이수영 옮김,삼천리 펴냄,2010.11.26./1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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