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태평양의 은빛 영혼 연어를 찾아서
프리먼 하우스 지음, 천샘 옮김 / 돌베개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자동차를 버릴 수 없는 사람들
 [환경책 읽기 29] 프리먼 하우스, 《북태평양의 은빛 영혼 연어를 찾아서》



- 책이름 : 북태평양의 은빛 영혼 연어를 찾아서
- 글 : 프리먼 하우스
- 옮긴이 : 천샘
- 펴낸곳 : 돌베개 (2009.12.21.)
- 책값 : 12000원


 (1) 자동차와 삶


 우리 식구가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간다 했을 때에 둘레에서 들려준 이야기 가운데 하나는 ‘작은 짐차 하나라도 장만하라’입니다. 도시에서 살던 때에도 우리 식구는 ‘작은 자동차 하나라도 마련하라’는 이야기를 으레 들었습니다. 책방마실을 하면서 책을 가방에 잔뜩 짊어지거나 두 손에까지 끈으로 묶어 낑낑대며 들고 다니는 일은 어리석거나 몸이 힘든 일이니, 자가용을 몰라고 했습니다.

 자가용을 모는 사람이 많고, 새 차로 갈아타는 사람이 많습니다. 조금 묵었으나 퍽 괜찮은 헌 차도 꽤 되겠지요. 적은 돈으로도 자가용 한 대 마련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헌 차라 하더라도 50만 원이고 100만 원이고 200만 원이고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다달이 내야 할 기름값은 누가 대 주지 않습니다. 자가용을 몰면 그저 앞만 보며 찻길을 달려야 합니다. 골목동네 한켠을 우리 자가용 한 대가 더 차지하며 서는 일이 썩 내키지 않습니다.

 시골살이를 하면서 작은 짐차 하나라도 있으면 읍내 마실이든 어디를 다니든 퍽 수월합니다. 그런데 짐차 하나는 자가용보다 훨씬 비쌉니다. 집부터 읍내까지 버스삯이 1150원이고, 오가는 거리는 16킬로미터입니다. 버스삯이나 기름값이나 매한가지입니다. 어쩌면 기름값이 더 든다 할는지 모르고, 자가용이나 짐차가 있으면 읍내에 마실을 갔을 때에 졸립다며 잠들려는 아이를 고이 눕히면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그리 힘들이지 않으며 다닐 수 있어요. 아마, 읍내뿐 아니라 조금 먼 시내까지 다닐는지 모르지요.

 그러고 보면, 우리한테 자가용이나 짐차가 없기 때문에 멀리 나다닐 일이 적은지 모릅니다. 우리한테 자가용이나 짐차가 없으니 늘 걷습니다. 자전거에 수레를 달고 아이랑 마실을 다니기도 하지만, 자동차가 없기 때문에 늘 자동차 없는 흐름에 맞추어 하루하루 살림을 꾸립니다.


.. 오늘날 우리 대부분은 풍요로운 자연 양식의 체계 속에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쉽게 이해하지 못하며, 우리가 배우는 학문들로 더욱 혼란스러워지기도 한다. 생물학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자연의 풍요로움과 다양성이 감소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형성되었다 ..  (26쪽)


 우리 집에 자동차가 있다면 책을 장만해도 더 많이 장만했을까 헤아려 봅니다. 어쩌면, 책방마실을 할 적에 한결 느긋하게 책을 장만하겠지요. 백 권이든 이백 권이든 걱정없이 실을 테니까요. 그런데, 책방마실을 하며 책을 백 권쯤 사들이면 이 책을 언제 다 읽으려나요. 아니, 한꺼번에 책을 백 권쯤 장만할 돈이 어디에서 솟아날는지요.

 시골집에서 읍내 나들이를 자주 하면서 과일도 자주 사고 뭣도 자주 산다면, 이렁저렁 사는 돈은 어디에서 샘솟을까요. 자동차가 없다고 찻삯을 적게 쓴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만(때때로 택시를 타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동차를 굴리면서 들어야 하는 목돈은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자동차를 굴리면, 자동차를 굴리는 만큼 들어야 할 목돈을 벌자며 다른 돈구멍을 찾아야 하고, 무엇이든 더 돈이 될 길을 걸으려고 용을 써야 합니다.

 더 많이 누리면서 더 많이 써야 하니까, 더 많이 거머쥐어야 하고 더 많이 벌어들여야 합니다. 더 많이 누리면서 더 많이 쓰는 동안, 더 많이 쓰레기를 내놓고 더 많이 땅과 물과 바람을 더럽힙니다.

 자가용을 몰든 짐차를 몰든, 자동차를 몰면서 이 자동차에서 나오는 배기가스를 살피는 사람이 있기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자가용이나 짐차를 몰면서, 우리 터전 물과 바람과 흙이 나날이 어느 만큼 더러워지는가를 깨닫는 사람이 있기나 있는지 궁금합니다.


.. 인간의 목적 때문에 최근에 급격히 변한 시골에 가 보면 그 전의 풍경을 상상하기가 힘들 것이다. 예를 들면, 완전히 벌목된 숲속에서 누가 예전의 짙푸른 숲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 변해버린 자연환경 속에서 자신들이 없애버린 문화와 견줄 만한 삶의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  (70, 220쪽)


 자가용을 몰지 않기 때문에 아이를 걸립니다. 아이는 다리가 몹시 아프다 할 때에만 안습니다. 아버지는 아이를 안고 가방을 짊어진 채 걷습니다. 사진기는 목에 걸고 어깨에는 천으로 짠 바구니를 맵니다. 따로 하는 운동이란 없습니다. 따로 하는 운동이라면 가방 짊어지기요, 아이 안기입니다. 천천히 걸어다녀야 하는 만큼, 내가 살아가는 마을을 찬찬히 둘러봅니다. 천천히 걸어야 하는 만큼, 도시로 볼일 보러 나올 때에는 골목에서고 큰길 거님길에서고 머리가 어지럽고 어수선합니다. 두 다리로 걸으며 살아야 하는 만큼, 두 다리로 걸으면서 내가 어느 곳에서 어떻게 살아야 즐거울까를 온몸으로 돌아봅니다. 두 다리로 거닐며 사람을 마주하기에, 나는 내 두 다리로 느낀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자동차로 움직이고 자동차로 짐을 나르는 사람들은 따로 ‘자동차 없이 몸을 써서 땀을 빼거나 살을 빼는’ 일을 해야 하기 일쑤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동차를 몰아 골프를 즐기는 곳을 드나드는데, 여느 때에 자동차를 안 타고 살아가는 살림을 꾸린다면, 애써 골프를 하든 달리기를 하든 헬스클럽에 다니든 하지 않아도 됩니다. 여느 때에 두 다리로 걷고, 두 손으로 집일을 하면 골프이든 공차기이든 헬스클럽이든 부질없습니다. 아니, 스스로 집일을 하다 보면 골프라든지 헬스클럽이라든지 할 겨를이 있을 수 없겠지요. 집일과 집살림을 꾸리면서 내 아이를 내 손으로 돌보는 나날을 보낸다면, 집에서 복닥이는 나날로도 기운이 쪼옥 빠져 저녁나절에 그대로 곯아떨어질 테지요.


.. 우리가 정확하게 무엇을 잃어 가고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 슈퍼마켓에서 사람들이 접하는 풍요에 대한 환상을 … 야생의 보존이라는 개념을 저녁식사에 올라온 음식이나 일상과 연관지어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  (119, 123쪽)


 자동차를 얻어서 타야 할 때에는 얻어서 타야 합니다. 자동차를 몰아야 할 때에는 무척 고맙다고 여기며 몰아야 합니다. 자동차 한 대를 만들기까지 어마어마한 자원을 쓰면서 지구별을 더럽힙니다. 자동차 한 대를 굴리자면 어마어마한 자원을 써서 땅밑에서 석유를 뽑아내는 한편, 이 석유를 자동차에 넣기까지 어마어마하게 지구별을 더럽히면서 경유나 등유나 휘발유를 가려야 하는데다가, 자동차에 기름을 넣어 굴리면 배기가스라든지 ‘바퀴가 닳으며 흩날리는 고무 먼지’라든지 어마어마합니다.

 자동차를 스스로 몰든 얻어서 타든, 늘 고맙게 여겨야 합니다. 내 몸을 덜 쓰면서 내 짐을 덜도록 해 주는 자동차인 줄 헤아려야 합니다. 타야 할 때에는 고맙게 여기면서 타고, 안 타도 될 때에는 흐뭇하면서 호젓하게 내 몸을 즐겨야 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땅을 깨닫고, 내가 선 자리를 느끼며, 내가 이웃한 사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땅은 고속도로가 아닙니다. 무슨무슨 고속도로로 이 나라를 나눌 수 없습니다. 크게 보자면 서울이고 인천이고 경기도이고 충청남도이고 충청북도이며 강원도와 경상남도와 전라북도이자 제주도입니다. 작게 보면 서울 은평구이고 인천 동구이며 경기도 평택입니다. 충청남도 예산이고 충북 음성이요 강원 횡성입니다. 더 작게 보면 인천 동구 송림3동이고, 충북 음성 생극면입니다. 더더 작게 보면 인천 동구 송림3동 5번지이자, 충북 음성 생극면 도신리입니다.

 서울부터 부산까지 몇 시간 만에 달릴 수 있느냐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서울과 부산 사이에 어떠한 마을과 자연이 있으며, 이 마을과 자연에는 어떠한 사람과 목숨이 살뜰히 어우러지며 살아가느냐가 대수롭습니다. 한 사람 두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한 목숨 두 목숨이 어여쁩니다.


 (2) 내 마을을 지키려는 땀방울


 이야기책 《북태평양의 은빛 영혼 연어를 찾아서》를 읽습니다. 미국에서도 연어를 살리려고 여러모로 애쓰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한국에서도 연어를 살리자며 여러모로 애쓰곤 합니다.

 연어 한 마리가 냇물에서 알을 깨고 태어나 머나먼 바다를 두루 돌다가 다시 냇물로 돌아오는 흐름을 살리거나 건사할 수 있을 때에 연어를 지키는 일이 마무리됩니다.

 연어가 냇물에서 알을 낳자면 냇물이 깨끗해야 합니다. 연어가 냇물에서 알을 낳자면 둑이나 댐이 없어야 합니다. 연어가 냇물로 돌아오자면 바다에서 한두 해나 여러 해 동안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바다가 넉넉한 삶터이자 놀이터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더 많은 돈을 얻으려는 생각으로 냇물과 냇가를 더럽히거나 망가뜨리면 연어는 알을 낳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아예 씨가 마르고 맙니다. 사람들이 바닷가에 끝없이 공장이나 발전소를 세우고 말면, 연어는 바다에서도 숨이 막힙니다.


.. 토착민들은 더 많이 잡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의 뒤를 이은 통조림공장 소속의 어부들은 더 많이 잡을 수 있는 여건에서, 분명 그렇게 하였다 … 미국 초기의 인공 양식장은, 생산적인 어종은 인간의 소비량을 조달하기 위해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전래되어야 한다는 유럽적 사고에 기초해 있었다 ..  (87, 105쪽)


 연어를 너무 많이 잡아먹을 때에도 연어는 씨가 마를 테지요. 그렇지만 연어가 깃들 냇물을 더럽힌다면, 더욱이 냇물뿐 아니라 냇물이 맑게 흐를 수 있도록 냇물이 깃든 멧자락을 어지럽힌다면, 냇물은 남아도 냇물이 냇물다울 수 없습니다. 멧자락에 나무들이 푸르게 우거지면서 멧짐승이 오붓하게 살아갈 때에야, 비로소 냇물 또한 맑고 시원하게 흐릅니다. 나무 없고 멧짐승 없는 멧자락 냇물에 어떤 연어가 찾아올 수 있겠습니까. 연어를 되살리자면 냇물을 되살려야 하고, 나무와 멧짐승이 되살아나도록 사람이 숲에서 떠나야 합니다. 사람이 숲을 아껴야 합니다. 사람이 아파트나 도시나 쇼핑센터나 자동차를 아끼지 말고, 숲을 아껴야 합니다. 더 많은 학교와 더 많은 공공기관과 더 많은 재개발과 더 많은 고속도로와 더 많은 댐과 더 많은 발전소 따위가 아니라, 더 많은 숲과 더 많은 논밭과 더 많은 작은 집이 있어야 합니다.

 자가용을 몰수록 스스로 살림을 꾸리는 길하고 멀어집니다. 자가용을 몰지 않을수록 나 스스로 내 살림을 꾸리는 길하고 가까워집니다.

 자가용을 몰수록 내 보금자리를 덜 사랑하고 맙니다. 자가용을 몰지 않을수록 내 보금자리를 한결 찬찬히 돌아보며 사랑합니다.


.. 교과서에 찬양하는 국가와 왕국의 역사, 정치경제적 형세 같은 것들은 우리가 장소와 실제적인 관계를 맺는 데 필요한 정보를 주지 않는다. 인간의 공동 선택권을 가치 있게 판단하는 데 필요한 역사는 대부분의 경우, 미국의 경우,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 대한 역사이다 … 물속에 발을 담그고, 파손되어 벗겨진 개울둑이나 그 위의 마른 비탈들을 재무장하기 위해 거대한 바위와 통나무들을 옮기고 조림하는 작업은 인간 공동체가 야생의 과정과 깊게 연관되어 있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  (200, 202쪽)


 《북태평양의 은빛 영혼 연어를 찾아서》를 읽으며, 이 책을 쓴 분이 참으로 ‘북태평양을 빛내는 눈부신 넋’인 연어를 헤아리는가 아리송했습니다. 왜냐하면, 북태평양 연어 이야기보다 ‘연어가 연어답게 살 수 없도록 냇물과 멧자락과 바다를 더럽히는 사람들’ 이야기가 잔뜩 나올 뿐더러, 연어 삶터를 되살리려는 사람들 이야기가 또 잔뜩 나오기 때문입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연어를 쫓아낸 ‘돈에 눈이 먼 사람’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또 연어를 다시 불러들이려는 ‘자연에 눈을 뜨려는 사람’ 이야기를 펼치면서, 얼마든지 북태평양을 빛내는 눈부신 넋이 무엇인가를 밝힐 수 있으리라 봅니다. 우리들이 무엇을 잃으면서 무엇을 얻는지를 살필 수 있습니다. 나 스스로 무엇을 내동댕이치면서 나 스스로 무엇을 거머쥐려 하는가를 톺아볼 수 있습니다.


.. 자연의 치유력을 발견하면서 우리는 위안을 얻었고, 감사하는 마음과 고결한 감동을 느꼈다. 지구는 스스로를 치유한다 ..  (214쪽)


 나는 자전거를 즐겨탑니다. 옆지기는 자전거를 배울 즈음 첫째를 낳고, 이제 좀 첫째가 자라서 아버지가 수레에 태우고 함께 자전거를 탈까 싶더니 둘째를 뱁니다. 둘째가 태어나고 어느 만큼 자라 첫째는 스스로 자전거를 타거나 아버지 자전거 뒤에 안장을 하나 덧붙여 태운 다음 둘째를 수레에 실을 무렵에, 비로소 옆지기도 자전거를 찬찬히 배우며 함께 움직일 수 있으리라 꿈꿉니다.

 자전거라는 물건은 처음부터 공장에서 만들지 않았습니다. 자전거라는 물건도 사람들이 저마다 한 대씩 뚝딱뚝딱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공장에서 만드는 자전거인데, 자동차 한 대를 만드는 품과 자원과 돈을 헤아리자면, 자전거 백 대를 만들고도 더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마 이삼백 대는 거뜬히 만들 수 있겠지요.

 나는 자전거를 혼자서 손질할 수도 있으나, 되도록 자전거집에 가서 자전거를 손질합니다.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자전거집이 자전거를 팔 뿐 아니라 손질해 주면서 먹고살 만큼 살림을 꾸릴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 마을에서 삼사백 집쯤 자전거를 타면서 두어 달에 한 번씩 자전거를 손질하며 손질값을 치르면 자전거집은 그닥 많이 버는 살림은 아닐지라도 그럭저럭 걱정없이 먹고살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자전거 타기가 익숙하지 않다면 걸어다니면 됩니다. 걷다가 힘들면 버스를 타면 됩니다. 버스를 타기에는 짐이 많거나 다리가 아프면 택시를 부르면 됩니다.

 내 살림을 돌보면 됩니다. 내 몸을 살피면 됩니다. 내가 깃든 마을이 작게 작게 예쁘게 이어지도록 가꾸면 됩니다.


.. 그러나 기업은 기업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유지에서 생명을 존중하는 척하지도 않았고, 토지에 기반을 둔 기업들조차도 자신들의 소유지가 다른 생명체에 중요한 의미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대신 주주들에 대한 지급 능력이 떨어지지 않게 유지하는 데만 급급했다. 기업의 경영진들은 개벌지가 훗날엔 다시 자라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런 행위가 유역의 야생 생태계 집단을 영원히 근절할 만한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231쪽)


 북중미에 살던 토박이들은 먹을 만큼만 연어를 잡았지, 깡통에 담아서 팔거나 돈을 잔뜩 벌어들일 꿈으로 연어를 마구 잡아대지 않았습니다. 북중미 토박이는 연어 터전까지 빼앗으며 사람 터전을 늘리지 않았습니다. 곰이나 새나 숱한 들짐승과 날짐승은 연어를 모조리 잡아먹을 듯 달려들지 않았습니다. 배가 부를 만큼만 잡아먹었습니다.

 우리는 자동차를 얼마나 몰면서 살아가나요. 우리는 전기를 얼마나 쓰면서 살아가나요. 써야 할 때에는 써야 할 물건이고, 다루어야 할 때에는 다루어야 할 기계입니다. 우리는 자동차를 비롯한 갖가지 물질문명을 얼마나 써야 하기에 이토록 쓰는지 아리송합니다. 우리는 돈을 얼마나 많이 벌어야 하고, 이렇게 많이 번 돈은 또 어디에서 얼마나 써야 하는지 알쏭달쏭합니다.

 북태평양에서든 한국에서든, 연어를 살리는 길은 과학자나 생태학자나 환경운동가나 공무원이나 지식인이나 전문가나 기자나 교수 손에 달리지 않습니다. 연어를 살리는 길은 책이나 지식이 아닌 내 삶에 달립니다. 자동차가 있으면 대형마트에 가서 연어 몇 마리 값싸게 사들여서 냠냠짭짭 먹겠지요. (4344.4.6.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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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속살 - 도시여행자 김대홍이 자전거 타고 카메라에 담은 우리 도시 이야기
김대홍 지음 / 포토넷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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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사람, 작은 자전거, 작은 이야기
 [책읽기 삶읽기 45] 김대홍, 《도시의 속살》



 인천에 살면서 서울로 마실을 하거나 서울로 일거리를 찾아 떠나는 일은 많습니다. 서울에 살면서 인천으로 마실을 다니거나 인천으로 일거리를 찾아 오가는 일은 드뭅니다. 거의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밀양이나 청도에 살면서 부산이나 대구로 마실을 하거나 일거리를 찾아 떠나기는 할 테지요. 그러나 부산이나 대구에 살면서 밀양이나 청도로 마실을 다니거나 일거리를 찾아 오가는 일은 얼마나 될까요.

 오늘날 웬만한 일거리는 더 커다란 도시에 많습니다. 더 작은 도시나 시골로 들어가면 일거리가 없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돈을 더 많이 벌어들일 일거리라 한다면 더 큰 도시에 많을밖에 없고, 더 많은 사람들이 몰린 커다란 도시에 더 돈 될 만한 일이 많다 할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더 커다란 도시로 몰리다 보니, 조금 더 작은 도시는 볼품을 잃거나 빛이 바랩니다. 더 커다란 도시는 더 커다랗게 되어야 하고, 더 작은 도시는 커다란 도시에 지지 않으려고 아웅다웅합니다.


..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산길은 걷기 좋다. 길은 고둥을 닮았다 ..  (92쪽)


 군 한 곳에 5만이 살든 10만이 살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7만이거나 8만이라면 더 낫다 할 수 없고 좀 모자라다 할 수 없습니다. 5만이면 5만대로 즐겁고 10만이면 10만대로 괜찮습니다.

 군이 굳이 시가 될 까닭이 없습니다. 읍이 반드시 군으로 홀로서야 하지 않습니다. 면이 애써 읍이 되어야 하거나 리를 꼭 면으로 올려야 하지 않습니다.

 아니, 리가 면이 된대서 올라간달 수 없고, 면이 읍이 되니까 올라가는 셈이 아닙니다. 서울이 되어야 할 부산이나 대전이 아닙니다. 광역시가 되어야 할 통영이나 창원이 아닙니다.

 인천에서 태어나 살던 때, 인천보다 작은 곳에서 살던 사람들은 ‘인천이 큰도시라서 부럽다’는 말이랑 ‘서울하고 가까우니 좋겠다’는 말을 곧잘 했습니다. 서울사람은 인천을 시골로 여겼으나, 서울하고든 인천하고든 제법 떨어진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인천만 하더라도 대단한 도시로 여겼습니다.

 인천을 떠나 아홉 해쯤 서울에서 살던 때, 서울에서 살아간다니 인천에 있는 동무들은 부러워 하거나 남다르게 바라봅니다. 다른 곳으로 돌아다니면 ‘서울 깍쟁이’라고 했습니다. 몸은 서울에 있어도 삶은 서울내기가 아니지만, 서울이라면 다 똑같은 서울내기가 되고 맙니다.

 서울을 떠나 충북 충주시 끄트머리 음성하고 맞닿은 멧골자락으로 들어가서 지내던 때, 도민이 되니 이것저것 새롭게 느낍니다. 큰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이제 온나라 어디이든 길이 잘 뚫렸’으니까, 어느 시골에서든 서울로 손쉽게 오갈 수 있으리라 여깁니다. 서울사람은 술자리에서 인천사람이 일고여덟 시쯤이면 자리를 털고 바지런히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줄을 모르고, 서울사람은 한낮부터 시골사람이 얼른 집으로 돌아가려고 발길을 재촉해야 하는 줄을 모릅니다.


.. 3000원짜리 칼국수는 푸짐하다. 익지 않은 김치와 푹 익은 김치, 오징어포 무침을 곁들여 든든하게 저녁을 먹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에 홀려 두부 파는 노점 앞에 섰다. 한 모를 사고, 사진기를 꺼내 찍으려 하니 주인 아주머니가 “이거 비싼 거죠?”라고 묻는다. “쫌요.”라고 하니, “무척 좋은 직장 다니시나 봐요.”라고 말한다. DSLR카메라가 비싸긴 하다. DSLR카메라를 갖고 다닌다는 사실만으로 ‘좋은 직장 다닌다’고 믿는 아주머니와 나는 같은 시대 같은 동네에 산다 ..  (139∼141쪽)


 《도시의 속살》이라는 이야기책을 읽습니다. 누리신문 〈오마이뉴스〉 기자로 일하던 김대홍 님이 남녘땅 여러 도시를 자전거나 기차나 버스를 타고 오가며 마주한 사람과 삶과 터전 이야기를 그러모은 책입니다. 오늘날 신문기자나 잡지기자 가운데 ‘자가용 아닌 자전거’라든지 ‘자가용 아닌 기차나 버스’를 타고 이 땅 곳곳을 두루 돌아다니며 마주한 이야기를 신문에 이어싣는 일은 아직 없다고 느낍니다. 두 다리로 내 고향을 느낀다든지, 자전거로 이웃마을을 만나는 일이란 좀처럼 볼 수 없다고 느낍니다.

 자가용이 오늘날처럼 두루 퍼지지 않던 꽤 예전에는 신문기자이든 잡지기자이든 기차나 버스를 타고 취재를 다녔겠지요. 때로는 취재 자동차를 탔겠지만, 맨몸으로 골골샅샅 다니던 이들이 꽤 있었겠지요.

 나날이 새로 쏟아지는 숱한 여행책을 들여다보면 으레 ‘자동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거쳐 찾아가는 길’을 ‘서울에서 길을 떠나는 틀’로 보여주기 일쑤입니다. 하나같이 판박이라 할 만하고, 한결같이 뻔하다 할 만합니다.

 찬찬히 읽으면, 《도시의 속살》도 여느 여행책하고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남녘땅 도시를 ‘자전거와 기차와 버스’로 만난다는 대목이 다르다 할 뿐, 남녘땅 도시를 만나며 풀어내는 이야기 얼거리는 매한가지입니다. 도시마다 어떠한 발자취였고 어떠한 오늘날 모습인가를 짚는데, 좀 많다 싶도록 ‘지나온 발자취’ 이야기가 크게 차지합니다.


.. 6070거리는 옛날 드라마 세트장 같다. 안성장터 특징이 담겨 있지 않아 아쉽다. 우리는 사라진 것들을 아쉬워하지만 지금도 먼 훗날 아쉬워할 것들을 숱하게 지우는 중이다 ..  (200쪽)


 이야기책 《도시의 속살》이라 한다면, 말 그대로 ‘속살’이란 ‘이름과 힘과 돈이 있던 사람들이 벌인 좀 많이 알려진 옛이야기’가 아니라, ‘이름도 힘도 돈도 없으나 예쁘며 즐거이 살아온 하나도 안 알려지거나 동네에서만 살가이 아닌 삶이야기’에 눈길을 맞추었다면 훨씬 재미나지 않았겠느냐 생각합니다.

 그러나, 《도시의 속살》은 ‘자전거와 기차와 버스’로 한결 천천히, 조금 더 느리게, 값싸면서 호젓한 밥과 술과 잠집을 마주하며 누리던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습니다. 애써 다큐멘터리 영화나 사진처럼 ‘아주 가난하거나 몹시 꾀죄죄해 보이는’ 밑바닥 사람들을 파헤치려 하지 않습니다. 국수장수이건 두부장수이건 스스럼없이 만납니다. 시골 장마당이건 멧길이건 그렁저렁 돌아다닙니다.

 더 돋보여야 할 이야기란 없습니다. 더 뒤처져야 할 이야기란 없습니다. 모두 사람들이고, 모두 삶이며, 모두 이야기입니다.

 요즈음 번쩍번쩍 눈부시다 해서 이야기가 훨씬 많을 도시일 수 없습니다. 이제 많이 기울어졌다 하기에 이야기가 하나도 없는 도시일 수 없어요.

 이야기란 언제나 어디에나 있습니다. 이야기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로 갈릴 뿐입니다.


.. 작은 자전거라 속도가 느린 단점은 곧 도시여행에선 장점이었다. 느리니 그만큼 찬찬히 보고 많이 볼 수 있었다. 웬만하면 옆길로 새고 많이 보자는 여행 목적과는 잘 들어맞았다. 작고 귀여운 자전거라서 사람들이 친근감을 느끼는 것은 큰 장점이었다. 자연스레 사람들이 말을 걸어 왔고, 아이들은 ‘태워 달라’라고 조르며 사진모델이 돼 주었다 ..  (317쪽)


 자가용으로 씽씽 달리면 ‘가려는 곳’까지 거침없이 빨리 갑니다. 자전거로 씽씽 달려도 ‘가려는 곳’에 자가용만큼은 아니지만 무척 빨리 갑니다.

 자가용으로 달려도 느리게 20킬로미터 밑으로 달릴 수 있으면 마을을 조금이나마 느끼겠지요. 자전거로 달려도 20킬로미터 넘게 달린다면 마을이건 동네이건 시골이건 도시이건 느끼기 어렵겠지요.

 작은 사람이 작은 자전거를 타고 작은 마을을 찾아다닐 때에 작은 이야기를 작은 손으로 작게작게 길어올립니다. 큰 사람은 큰 비행기를 타고 큰 나라를 찾아다니며 큰 이야기를 뽑아오겠지요. (4344.3.22.불.ㅎㄲㅅㄱ)


― 도시의 속살 (김대홍 글·사진,포토넷 펴냄,2010.9.15./14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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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투티를 기다리며
송명규 지음 / 따님 / 2010년 6월
평점 :
품절




 아파트 허물어 논밭 일구면 밥이 됩니다
 [환경책 읽기 27] 송명규, 《후투티를 기다리며》


- 책이름 : 후투티를 기다리며
- 글 : 송명규
- 펴낸곳 : 따님 (2010.6.15.)
- 책값 : 1만 원


 (1) 흙을 안 일구는 사람이 빚는 문학


 앞으로 전기를 얼마나 더 오래 쓸 수 있는지 모릅니다. 앞으로 석유를 얼마나 더 오래 쓸 수 있는지 또한 모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전기와 석유를 마음껏 씁니다. 전기와 석유를 마음껏 쓰는 만큼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은 매우 더럽습니다. 온 나라 어디를 가도 비닐판입니다. 이 나라 구석구석 자동차가 흘러넘칩니다. 개신교회는 밤에도 붉은 십자가 불을 켭니다. 가게는 밤에도 불을 밝혀 광고를 노립니다.

 모두들 더 돈을 벌고자 더 돈을 씁니다. 돈을 덜 벌며 돈을 덜 쓰는 길을 살피지 않습니다. 돈을 더 벌어 기름값을 대면 되고, 돈을 더욱 벌어들여 전기를 더 쓰면 됩니다. 돈을 덜 벌며 자동차하고 헤어지는 사람이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돈을 조금만 벌어 전기를 적게 쓰거나 아예 안 쓰려는 사람이란 마주할 수 없습니다.


.. 나는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녀석들은 비좁기는 하지만 어항 속에서 줄곧 다른 물고기들을 덮치면서 자랐다. 그래서 야생에 풀어주어도 곧 적응할 것이라고 지나치게 쉽게 생각했다 … 그러나 이런 것들은 그저 맹꽁이에 대한 나의 단편적이고 검증되지 않은 지식일 뿐이다. 맹꽁이에 대해서는 아직도 풀지 못한 의문이 너무 많다. 현재로서는 가장 궁금한 것이 올챙이의 먹이인데, 큰비로 잠시 생기는 웅덩이에 어떤 먹이가 있을 수 있는지 정말로 의아스럽다 … 사람은 도토리를 심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다람쥐와 도토리를 놓고 경쟁하지만 참나무숲이 울창해져서 도토리가 듬뿍 달리게 된 것이 다람쥐 덕이라는 사실은 전혀 안중에 없다 ..  (21∼22, 52, 157쪽)


 집에서 책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내 마음을 건드리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책으로 나누어 준 이들 가운데 전기를 헤프게 쓰거나 석유를 아무렇게나 써도 된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돈을 더 벌어들이려고 애쓴 사람이 쓴 글은 저로서는 하나도 반갑지 않습니다. 돈뿐 아니라 이름값이나 힘을 거머쥐려고 바둥거리던 사람들 글은 제 마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도시에서 살든 시골에서 살든 똑같습니다. 글쓴이 스스로 당신 삶을 어떻게 건사하느냐에 따라 글쓴이 글이 달라집니다. 글쓴이 스스로 아름다운 삶을 일굴 때에는 아름다운 넋으로 아름다운 글을 낳습니다. 글쓴이 스스로 껍데기 삶을 뒤집어쓸 때에는 겉보기로만 예뻐 보이는 글을 빚습니다.

 나는 돈을 말하는 글은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나는 처세와 경영 따위라는 이름이라든지 자기계발을 읊는 책은 건드리지 않습니다. 이러한 글은 글이 아니요, 이러한 책은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공무원시험을 치르려고 쥐는 교재는 교재이지 책이 아닙니다. 중·고등학생이 들추는 참고서와 자습서와 문제집과 교과서는 교재일 뿐 책이 아닙니다. 수험서는 수험교재라고 해야 마땅합니다. 학습서라는 이름도 걸맞지 않습니다. 학습교재만 있습니다. 아이들한테 읽히는 과학동화나 수학동화나 철학동화 또한 책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동화면 그저 동화이지 앞에 다른 말을 붙일 때에는 ‘학습교재’ 노릇을 합니다. 아이들한테 과학 지식이나 수학 정보나 철학 능력을 키워서 무엇을 하려고요. 과학 지식을 갖춘 아이들이 이 나라에서 얼마나 착하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수학 정보를 일찍부터 익힌대서 아이들이 스스로 제 삶을 참다이 일구는가요. 철학 능력 잘 갈고닦은 어린이가 어른이 되는 동안 온누리를 옳고 바르게 바라보거나 꿰뚫어볼는지요.

 책은 책이어야 하고, 삶은 삶이어야 합니다.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하고, 삶터는 삶터다이 돌보아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책 아닌 교재만 쥐도록 내모는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무슨 짓을 하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삶 아닌 지식만 집어넣는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무슨 끔찍한 짓을 하는지 느껴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밥하기와 빨래하기와 살림하기를 몸으로 받아들이도록 돕지 않는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무슨 슬픈 짓을 저지르는지 알아야 합니다.


.. 갑자기 유람선 타기가 싫어졌다. 호수 위로, 수장된 옛 강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나는 호수 아래 깊이 묻힌 옛 여울과 바위와 모래톱과 미루나무 숲과 초가집들의 영혼을 차마 유람선 위에서는 대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 넋들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 부모님은 핀잔을 덧붙였다. 너는 왜 매사에 그리 삐딱하냐고. 속이 답답했다. 가족들은 진짜 절경을 모른다. 아니, 잊었다. 그것은 충주댐과 함께 세월에 묻힌 빛바랜 흑백사진 같은 촌스런 것이다. 그곳이 고향인 어머니와 외가 식구들마저 그렇게 생각하다니 … 우리 나라 대도시에서 대학생쯤 되는 젊은 여성이 한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고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면 정말이지 우스꽝스럽게 보일 것이다. 모두들 무슨 이벤트 홍보 중이거나 아니면 ‘어찌 된’ 여자라고 여기고 신기하게 쳐다볼 것이다 … 우산을 쓰고 한손으로 자전거를 타는 일은 보기보다 무척 어려웠다. 그러니 일본인들의 자전거 타는 솜씨는 거의 달인 수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자전거 운전 중에도 자유롭게 휴대폰으로 통화를 한다. 아기를 둘씩이나 태운 주부가 가득 찬 장바구니를 매달고 자동차 사이를 누비는 용감무쌍한 광경도 종종 본다 ..  (118, 120, 207쪽)


 나이 스물은 그저 숫자로 나이 스물이 아닙니다. 나이가 차서 주민등록증을 받거나 선거권을 얻는다 해서 어른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혼인하여 아이를 낳아야 어른이 되지 않습니다. 나이 마흔이나 쉰이라 하더라도 모두 어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어른이라 한다면 어른다울 때에 어른입니다. 어른답지 못한 채 나이만 먹은 사람을 일컬어 예부터 ‘철부지’라 했습니다. 때로는 ‘바보’나 ‘멍텅구리’라 했어요. 어느 때에는 ‘밥버러지’라고도 합니다.

 오늘날 이 나라에서 스스로 어른이라 생각하는 사람 가운데 참으로 어른이라는 이름이 걸맞을 사람은 누가 있을까 궁금합니다. 어른다이 살아가지 않으면서 어른 노릇만 하려는 사람으로 넘치는 오늘 이 나라가 아닌가 궁금합니다.

 스스로 어른이라 이름을 붙이려 한다면, 밥과 옷과 집을 제힘으로 건사해야 합니다. 스스로 살림을 꾸릴 수 있어야 합니다. 돈을 잘 버는 일자리를 얻었대서 어른이 되지 않습니다. 밥할 줄 모를 뿐 아니라, 밥을 차려서 내놓을 줄 모르거나, 밥을 치울 줄 모르는데 무슨 어른입니까.

 지난날 우리 어른들은 아이한테 나이에 걸맞게 집일과 집살림을 거들도록 하면서 오롯이 한 사람이 되도록 길렀습니다. 아이 몸과 팔다리에 기운이 붙는 흐름을 살펴 자잘한 심부름부터 시켰고, 군불때기부터 장작패기와 방아찧기나 나무하기를 시켰습니다. 물긷기나 빨래하기나 밥하기는 저절로 뒤따르는 살림살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비질을 어떻게 하고 걸레질은 어떻게 하며 먼지떨이는 어찌어찌 하는가를 찬찬히 가르칩니다. 어른 앞이나 동무 앞이나 동생 앞에서 말매무새를 어떻게 다스리는가를 가만히 이르고, 먹는 풀과 못 먹는 풀을 가린다든지, 풀을 어떻게 캐거나 뜯거나 따서 어찌저찌 손질한다든지, 철에 따라 들판과 멧자락에 무슨 풀이 돋아 무슨 풀을 먹을 수 있으며, 철 따라 풀을 어떻게 다루어 밥거리로 건사하는가를 가르칩니다.

 인터넷을 뒤적여 가장 값싼 데를 알아본다든지 더 값싸게 여럿이 함께 사는 일에 목매달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이끌거나 돌보았어요. 어버이가 맡은 몫이란, 또 마을 어른이나 집안 어른으로서 맡은 몫이란, 한 사람이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을 물려주는 데에 있습니다.


.. 가방을 팽개치고 허겁지겁 차 속에서 쌍안경을 꺼내들었다. 렌즈 한켠에 달걀처럼 생긴 검은 물체가 아른거렸다. 떨리는 두 손을 진정시키며 가까스로 초점을 맞췄다. 부엉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가지에 걸린 채 햇빛을 반사하며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까만 비닐봉지였다. 나는 무엇에 엊어맞은 듯 한참을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나는 내가 사는 시대를 착각했다. 나는 현대인이다. 그리고 현대는 미루나무에 부엉이 대신 비닐봉지가 앉아 있는 게 자연스러운 시대다 … 농업 근대화의 첨병인 화학약품은 논에서 쓸모없는 것들을 모조리 내몰았다. 살충제는 개구리와 뜸부기는 물론 반딧불과 메뚜기와 물방개와 물뱀과 온갖 고기를 쓸어냈고, 제초제는 사초와 골풀은 물론 그 예쁜 가래와 물옥잠까지 모두 말려 죽였다 ..  (126, 138쪽)


 전기와 석유를 쓸 수 없을 앞날에 이 나라에서 스스로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나라 어린이하고 푸름이한테 무엇을 물려줄는지 궁금합니다. 아마, 끔찍하게 더러워진 물과 바람을 물려줄 텐데, 끔찍하게 더러워진 물과 바람은 오늘날 어른한테도 괴롭습니다. 파란하늘 아닌 잿빛하늘을 물려주는 못난 모습을 못 깨닫고, 푸른들이 아닌 시멘트아파트덩어리를 이어주는 어수룩한 모양새를 못 느낀다면 삶은 삶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산 주검입니다. 살아숨쉰다 말할 수 없고, 살림을 꾸린다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삶이 없는 이야기만 가득한 책이 날마다 쏟아지고, 사람들은 ‘예전보다 책을 안 읽는다’ 하지만 ‘예전이든 오늘이든 책다운 책을 알뜰히 찾아서 읽으려 애쓰는 사람’은 참으로 적습니다. 책을 안 읽는 일이 슬플 수 없습니다. 책다운 책을 쓰지 못하는 글쟁이가 슬프고, 책다운 책을 찾아서 읽으려는 사람이 드문 삶자락이 슬픕니다.

 백 권 천 권 만 권에 이르는 책을 읽어야 똑똑할 수 없습니다. 참과 착함과 고움을 슬기롭게 담아 사랑스레 펼치는 믿음직한 책 하나면 넉넉합니다. 굳이 책이 아니더라도 내 몸뚱이로 참답고 착하며 곱게 살아갈 수 있으면 내 삶이 곧 책입니다.


 (2) 흙을 밟지 않는 사람이 하는 환경사랑


 몇 해 앞서까지 온 나라 도시나 시골마다 ‘첨단과학기술도시’가 되겠다고 목청을 높였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온 나라 도시나 시골마다 ‘그린도시’라든지 ‘녹색도시’라는 이름을 높직하게 내겁니다.

 읍내 장마당 마실을 하거나 다른 시골을 지나갈 때면 으레 ‘그린’과 ‘녹색’이라는 말을 적은 큼지막한 걸개천을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푸른도시나 푸른시골은 공무원 걸개천 글월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푸른도시나 푸른시골이 되려 한다면, 논밭을 뒤엎거나 산을 깎아 공장을 닦는 일을 멈추어야 합니다. 앞에서는 푸른도시나 푸른시골이라고 외치면서, 뒤에서는 새 고속도로를 낸다며 논밭마다 높은 시멘트말뚝을 박아 으리으리한 고속도로를 고가도로처럼 닦아 산과 산 사이를 반듯하게 잇는 짓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푸른도시나 푸른시골이 되려 한다면, 모든 발전소를 닫아야 합니다. 집마다 알맞게 전기를 쓰도록 작은 발전시설을 들여야 합니다. 햇볕을 받아들이든 빗물을 받아서 쓰든 바람힘을 껴안든, 집집마다 조그맣게 마련해서 쓰는 발전시설을 두어야 합니다.

 전봇대를 박거나 전깃줄을 드리우거나 송전탑을 세우거나 고압전류탑을 만드는 데에 돈을 쓸 까닭이 없습니다. 원자력발전소는 고작 35%만 전기로 만들고 나머지는 쓰레기로 버려야 하는데, 65%를 버리는 돈과 65% 때문에 망가지는 우리 터전과 35%를 때서 기나긴 전깃줄로 집집마다 잇는 아까운 일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전깃줄을 타고 전기가 흐르는 동안 또 얼마나 많은 전기가 하늘로 날아가며 둘레 논밭이나 푸나무나 사람들한테 나쁘게 될까요.

 나는 수학자나 경제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오늘날 발전시설을 집집마다 스스로 전기를 만들도록 바꾸면 돈을 얼마나 아끼거나 줄일 수 있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작은 빨래는 손으로 하고 텔레비전을 보지 않으며 냉장고 크기를 줄이는 한편 에어컨을 되도록 조금만 쓴다면, 아파트 살림이든 연립주택 살림이든 전기 쓸 일이 얼마 안 됩니다. 스스로 전기 씀씀이를 줄이면서 ‘쓰레기 안 나오고 지구자원 안 먹는’ 작은 발전시설을 누구나 집에서 돌보도록 한다면, 이웃 일본에서 원자력발전소가 터지는 일이 생기든 안 생기든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 놈들은 진눈깨비가 내려 습기를 머금은 시래기가 먹기 좋게 부풀어 올랐을 때를 노린다. 양식이 떨어진 겨울철에 놈들의 식욕은 거의 무한에 가깝다. 그래서 놈들은 이파리 부분은 모두 쪼아먹고 흰 줄기만 앙상하게 남긴다. 할머니는 늘 직박구리에게 시래기를 몽땅 털리고 마는데, 그래도 해마다 같은 곳에 시래기를 거시는 것을 보면 본래부터 새들에게 보시하는 것이 목적인가 보다 … 나는 그곳을 일 주일에 고작 한두 번 들를 뿐이지만 그(뱀)는 한시도 그곳을 떠난 적이 없다. 거기서 얻는 오이가 없어도 나는 굶주리지 않지만 그는 그곳을 잃으면 목숨을 잃는다. 그곳은 내게 객지지만 그에게는 고향이다 … 요즈음의 내 기분은 거의 그날의 날씨에 좌우된다. 밝은 햇살을 받으며 출근하는 날에는 베란다에 남아서 봄의 따사로움을 만끽하고 있을 선인장 생각에 하루가 즐겁다. 그러나 뿌연 황사가 모처럼의 햇빛을 가로채면 나는 봄을 약탈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울화가 치민다. 그래서 조그마한 자극에도 숨겨져 있던 공격적인 본성이 여지없이 드러나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르는 피해자가 된다 ..  (32, 39, 142∼143쪽)


 지자체마다 ‘자전거길 새로 만들기’를 꾸준히 합니다. 자전거만 타면 환경사랑이라도 되는 듯 여길 뿐 아니라, 꽤나 많은 돈을 들여 찻길 한쪽을 덜어 자전거길로 만듭니다. 그러나 시내이든 읍내이든 모든 찻길 한쪽을 덜어 자전거길을 만들지 않습니다. 시늉으로만 보여주듯 몇몇 곳만 자전거길을 만듭니다.

 모든 길이 자전거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자전거를 탈 수 없습니다. 몇 군데 예쁘장하게 마련한 자전거길을 다닐 수 있다 하더라도 다른 찻길에서는 자전거길이 없으면 자전거를 어찌 타겠습니까. 자가용 짐칸에 자전거를 실어서 자전거길 있는 데까지 타고 온 다음, 자전거길만 자전거를 달리면 될는지요.

 살을 빼자는 자전거이든, 동아리 사람하고 어울리는 기쁨을 누리는 자전거이든, 돈있다고 뻐기는 자전거이든, 다 좋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자전거삶을 사람들이 곱게 받아들이도록 힘쓰려 한다면, 여느 자리 여느 길이 자전거로 오가기에 즐거우며 넉넉하고 걱정없어야 합니다.

 자동차가 골목길로 접어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합니다. 자동차를 길가에 세우지 못하도록 막아야 합니다. 이삿짐이 아니라면 수레에 짐을 싣고 나르도록 해야지, 길가에 차를 세우고 짐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사람들 스스로 자가용하고 헤어져야 합니다. 여느 사람들이 자가용하고 헤어지도록 하기 앞서 정치꾼과 공무원과 지식인과 기자 같은 사람들이 자가용하고 헤어져야 합니다. 평화운동을 하든 진보운동을 하든 사회운동을 하든 정치운동을 하든 교육운동을 하든 자가용을 멀리 떠나 보내야 옳습니다. 차를 타야 할 때에는 택시를 불러야 합니다. 짐을 날라야 할 때에는 짐차를 불러야 합니다. 큰 모임이라면 함께 쓰는 차를 하나 두고 사람이 많이 움직이거나 짐을 많이 옮겨야 할 때에 쓸 수 있겠지요. 써야 할 때에만 쓰는 자동차가 되어야 하고, 여느 때에는 누구나 자전거를 타거나 두 다리로 걸어야 합니다. 어린이를 태우는 수레를 자전거에 붙이고, 어르신을 모시는 수레 또한 자전거에 달아야 합니다.

 평화에도 진보에도 사회에도 정치에도 교육에도 눈길을 안 둔다는 사람들이 자가용하고 헤어지든 안 헤어지든, 평화나 진보나 사회나 정치나 교육이나, 여기에 환경을 사랑하거나 아낀다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스스럼없이 자가용하고 헤어져야 하고, 이렇게 헤어지며 자전거와 두 다리로 예쁘게 살아가는 터전을 다스리는 흐름을 살려 ‘찻길 하나를 덜어 자전거길로 바꾸는’ 정책을 펼쳐야 자전거삶이 제대로 자리잡습니다. 평화운동 하는 이들 스스로 자전거를 사랑하지 않는데, 평화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자전거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진보운동 하는 이들부터 먼저 자전거를 아끼지 않는데, 진보를 달가이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자전거를 아낄 수 없습니다. 아이들을 옳고 바르게 가르치려 힘쓰는 사람들이 먼저 자가용하고 헤어지며 자전거하고 사귀지 않는데, 입시지옥이건 말건 대학바라기와 학교끈으로 꽁꽁 이어진 사람들이 자전거하고 예쁘게 사귈 수 없어요.


.. 야생에서 토종 자리공을 마주친 사람은 매우 드물겠지만, 이 서양 자리공은 보지 못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물론 대부분 무심히 지나쳤을 테지만 … 알덩이들이 떠 있는 논바닥 웅덩이는 너무 얕다. 그래서 약간만 가물어도 올챙이들은 모두 말라죽게 된다. 필요할 때마다 비가 와 준다고 해도 모내기철이 다가오면 사방에 제초제가 뿌려진다. 그 위로 트랙터가 지나다니며 땅을 짓밟고 으깬다. 트랙터 뒤에는 온갖 농약과 비료 세례가 기다린다. 설령 그런 지옥에서 살아남는 올챙이가 있다고 해도 물이 얕고 숨을 곳이 없기 때문에 조만간 찾아올 백로들의 예리한 부리에 남김없이 희생될 것이다 … 교토 시내에 반딧불이 산다는 것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어떻게 대도시 한복판을 흐르는 강물에 우리 나라에서 천연기념물로 대접받고 있는 반딧불 같은, 오염에 그렇게도 민감한 생명체가 살 수 있다는 말인가? ..  (56, 102, 189쪽)


 환경사랑이란 삶사랑입니다. 삶사랑이란 사람사랑입니다. 사람사랑이란 사람이 태어나서 돌아가는 흙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람을 사랑한다 할 때에는 사람이 숨이 붙는 동안 디디고 선 흙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흙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사랑이란 거짓입니다. 흙사랑을 바탕에 두지 않고서야 환경사랑이 되지 않습니다. 걸개천을 수없이 건다 한들, 푯말과 알림말을 도시 곳곳에 붙인다 한들, 일본말 ‘綠色’이든 중국말 ‘草綠’이든 영어 ‘green’이든 우리 말 ‘푸른’이든 갖다 붙인다 한들, 슬기로우며 즐거이 환경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먹는 밥이 어느 흙에서 어떻게 나오며, 내가 먹은 밥이 똥오줌이 되어 흙으로 돌아가야 할 때에 어떻게 돌려보내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내 밥과 내 똥오줌이 얼마나 고마운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밥쓰레기나 똥쓰레기가 나와서는 안 됩니다.


.. 거대한 댐이 낙동강 끝자락을 단단히 틀어막고, 경지정리가 게으른 논둑과 도랑들을 시멘트로 발라 영원한 차렷 자세로 벌을 세운 이후로는 뱀장어들도 양식장으로 쫓겨났다 … 친구들한 한참 열을 올리며 친환경농업 운운하는 나를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보다가 가차없이 말문을 막았다. “농약 없이 무슨 농사가 돼!” … 운전사가 몹시 야속했다. 이왕 쉴 것이면 사람들로 북적대는, 매연에 찌든 휴게소나 터미널이 아니고 방금 지나간 그런 곳에서 쉴 것이지! 일이십 분만이라도 멈춰 주었다면 평생을 간직하게 될 숨막히는 풍경들을 마음속에 실컷 담을 수 있었을 텐데! ..  (133, 137, 171쪽)


 매미도 나비도 벌도 개구리도 뱀도 흙에 깃들지, 시멘트나 아스팔트에 깃들지 못합니다. 작은 풀싹은 시멘트나 아스팔트조차 뚫고 자라지만, 시멘트나 아스팔트에서 뿌리내리지는 못합니다. 아니, 풀싹은 시멘트와 아스팔트를 차츰차츰 흙으로 바꿉니다. 더디 걸리지만 열 해 스무 해를 지나고 백 해 이백 해를 지나는 동안 풀싹은 시멘트와 아스팔트를 흙으로 돌립니다.

 한 사람은 백 해 이백 해를 살지 못합니다. 나무는 즈믄 해를 거뜬히 살아냅니다. 사람들이 떠나고 없는 자리에서 나무는 즈믄 해를 거뜬히 살아내면서 사람들이 남긴 쓰레기를 천천히 삭여 흙으로 돌립니다. 숱한 풀싹은 해마다 새로 나고 지면서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를 천천히 곰삭여 흙으로 바꿉니다. 다만, 풀싹이든 나무이든 백 해나 오백 해나 즈믄 해에 걸쳐 어여쁜 흙터를 일굽니다. 지구별을 망가뜨리는 목숨은 사람이지만, 지구별을 살리는 목숨은 풀과 나무, 곧 푸나무입니다.

 환경사랑이란 사람 스스로 푸나무처럼 살아가자는 뜻이며, 사람 스스로 푸나무처럼 살아내면서 흙을 아끼거나 사랑하자는 이야기입니다. 하루아침에 이룰 수 없는 환경사랑이고, 하루아침에 이루려 하는 환경사랑이란 모두 거짓말이거나 눈속임입니다.


 (3) 《후투티를 기다리며》라는 환경책 하나


 환경책 《후투티를 기다리며》를 읽습니다. 《후투티를 기다리며》는 굳이 환경책이라 하지 않아도 되지만, 애써 환경책이라는 이름을 붙여 봅니다. 《후투티를 기다리며》는 여느 수필책이나 문학책이라 해야 걸맞습니다만, 일부러 환경책 갈래로 넣고 싶습니다.

 글쓴이가 환경사랑을 말하기 때문에 환경책이라 일컫지 않습니다. 책에 담은 줄거리가 환경사랑으로 가득하대서 환경책으로 넣지 않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길을 좇으며 흙을 사랑하는 길을 조용히 걸어가기 때문에, 이 책 《후투티를 기다리며》는 환경책이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주먹 불끈 쥐며 외치는 말이 아니라, 몸으로 살아내는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기 때문에, 이 책은 즐거이 나누며 함께 읽을 환경책이라고 느낍니다.


.. 올림픽 개막식이 아무리 찬란하고 국군의날 퍼레이드가 세상 없이 웅장하다고 해도 엄청난 무리의 동물들이 대자연을 무대로 각본 없이 펼치는 야생의 드라마만큼 장려한 것은 없다 … 우리는 내심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도 이 광경을 보아야만 하는데 … 어린아이에게 반딧불에 대한 이론적 설명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실물을 보여주면 간단한 것을! ..  (76, 95, 187쪽)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셈이요, 같은 말을 되풀이할밖에 없으나, 환경책은 지식책이 아닙니다. 환경지식을 다루는 책은 조금도 환경책이 될 수 없습니다. 환경지식을 보여주는 책은 지식책입니다. 이러한 책은 인문책조차 아닙니다. 환경책은 지식이 아닌 삶을 다루는 책이요, 환경책은 지식이 아닌 삶을 일구는 내 이야기를 펼치는 책이며, 환경책은 나 스스로 착하고 참다우며 어여삐 살아가고픈 꿈과 사랑을 나누려는 책입니다.


.. 우렁이농법은 유기농법일 수는 있으나 결코 친환경농법은 아니다 … 집집마다 자동차가 있고 사람마다 개인 전화기를 갖고 다니는 풍요 속에서 우리의 정신세계는 그런 작은 배려조차 외면할 만큼 각박해지고 말았다 … 환경단체들의 끈질긴 반대운동이 내린천을 일반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그 전까지만 해도 강원도 산골짜기의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냇물이 갑자기 전국적인 명소로 떠올랐다 … 일본은 땅값이 비싸서 그런지 특히 시내에 있는 쇼핑센터는 우리의 상식과는 다르게 자동차 주차장이 전혀 없는 것도 있다. 반면, 어디를 가든 자전거 주차장만은 널찍하다 …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은 걷는 것이고, 그 다음은 자전거다. 특히 에너지와 환경 위기의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우리가 걸을 수가 없다면 자동차나 전철은 아무란 쓸모도 없는 물건일 뿐이다 ..  (151, 164, 176, 208∼209쪽)


 날이 갈수록 우리 터전이 무너집니다. 나날이 환경재앙이 커집니다. 만화영화나 만화책 〈바람골짜기 나우시카〉를 보면, 지구별에 살아남는 사람은 몇 없습니다. 사람 스스로 지구별을 무너뜨려, 사람 스스로 거의 모조리 사라집니다. 만화책이나 만화영화 〈우주소년 아톰〉을 보아도 사람들이 지구별을 얼마나 더럽히며 엉터리로 짓밟는가 하는 이야기가 잘 나타납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내가 사는 동안 더 망가진대 보았자 얼마나 더 망가진다구?’ 하고 생각할 뿐입니다. 곧 죽어도 돈이나 다이아몬드나 금을 손에 쥐고파 합니다. 수수한 밥상보다 금조각을 더 사랑합니다. 그런데, 금은보화 가득 담긴 궤짝을 손에 쥐면 뭐 하나요. 어느 누가 금을 먹으며 살아갈 수 있나요. 돈을 씹으며 목숨을 잇는 사람이 있는가요. 가장 흔하디흔한 밥 한 그릇이 없으면 사람은 죽습니다. 참 너르디너른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으면 사람은 죽어요. 영화 〈말괄량이 삐삐〉에 나오는 해적은 삐삐네 보물 두 궤짝을 가로채서 처음에는 좋아라 춤추지만, 외딴섬에 갇힌 채 보물궤짝만 가지고서는 그저 죽을 수밖에 없는 줄을 깨닫고는 보물궤짝하고 도끼 한 자루를 바꿉니다. 아마 천 원짜리 밥그릇 하나하고 보물궤짝을 통째로 바꿀 만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몇 억에 이르는 자동차이든, 아무리 그럴싸하다는 이름값이든, 제아무리 힘센 천하장사라 하든, 또는 권력자하고 맞닿은 줄타기라 하든, 끼니를 굶으면 다들 죽어야 합니다.

 밥을 쫄쫄 굶으면서 몇 억짜리 자동차에 기름을 넣을 사람은 없습니다. 배고파 쓰러질 판에 주식쪼가리를 손에 쥐어 만세 부를 사람은 없습니다.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으면서 비싼 옷을 걸친들 무엇하겠습니까. 깨끗한 바람이 없는 수십 억짜리 아파트나 빌라에서 무슨 삶을 이을 수 있는가요.

 바다를 메우거나 갯벌을 메워 공장을 짓거나 아파트를 올린다 한들 경제성장이 될 수 없습니다. 땅이 너무 모자라면 네덜란드처럼 바다를 메워 논밭으로 일굴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왜 바다와 갯벌을 메우는가요. 이 나라에 논밭이 모자라나요. 있는 논밭은 아파트나 공장이나 고속도로로 바꾸면서, 애먼 바다와 갯벌을 논밭으로 바꾸면 이 나라 터전은 어찌 되지요. 바다와 갯벌을 없애면서 무슨 조개를 먹고 무슨 쭈꾸미를 먹으며 무슨 게장을 담근답니까.

 인천에서 살던 때, 골목동네 할매와 할배는 빈집이 헐려 쓰러질 때에 돌을 손수 치워서 집터에 텃밭을 일구곤 하셨습니다. 젊은 사람은 아무도 빈 집터 돌을 골라 텃밭 일구기를 하지 않습니다. 늙은이들만 텃밭 일구기를 합니다. 그런데 돌을 골라 처음 씨를 뿌려 거두는 푸성귀부터 놀랍도록 잘 자랍니다. 수십 해나 백 해 남짓 집자리에 눌린 흙이었을 텐데, 고작 처음으로 해를 보며 물을 머금고 거름을 받은 흙이 고맙게도 싱싱하고 살진 푸성귀를 선물해 줍니다.


.. 반면에 (일본) 아라시야마의 홍수는 깨끗하기 때문에 차라리 아름답다. 드넓은 수면에 지푸라기 하나 떠내려가지 않는다면 상상이 가겠는가? ..  (213쪽)


 공무원이나 정치꾼이나 개발업자는 논밭을 갈아엎어 아파트를 세워야 돈이 된다고 말하겠지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 논밭을 갈아엎어 아파트를 세우면 돈이 됩니다. 그런데 돈만 되지 밥은 안 됩니다.

 아파트를 허물어 논밭을 일구면 돈이 안 됩니다. 그렇지만, 아파트를 허물어 논밭을 일구면 밥이 됩니다.

 아직까지는 돈으로 밥을 사서 먹는다지요. 그러나 언제까지 돈으로 밥을 사서 먹겠습니까. 앞으로는 밥을 얻으려고 아파트를 헐거나 공장을 치우겠지요. 머잖아 자동차공장 따위 걷어치워서 널따란 논밭을 일구겠지요.

 나는 자동차공장 따위 모조리 쫄딱 무너지기를 바랍니다. 자동차공장 일꾼들이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는 일은 슬픕니다만, 자동차공장 일꾼은 자동차 만드는 일을 해서 돈을 벌어서는 안 됩니다. 똑같이 땀흘려 일할 사람이라면, 자동차 만지는 일이 아니라 흙을 만지는 일을 해야지요.

 널따란 자동차공장을 모두 갈아엎어 흙을 되찾아야 합니다. 자동차 만드는 기계는 낫과 쟁기와 호미로 바꾸어야 합니다. 보습을 만들고 헛간을 지어야 합니다. 두레와 품앗이로 논밭살림을 일구어야 합니다.

 자동차 더 팔아 경제성장 이루거나 딸아들 학원 보내야 한다면서 눈물 흘리지 말아야 합니다. 자동차 그만 만들고 그만 팔며 흙을 손에 쥐면서, 돈 아닌 밥을 내 손으로 마련해야 합니다. 학교에서는 지식인이나 공무원이나 회사원 만드는 교과서를 내려놓고, 아이들 스스로 제 살림을 몸소 일구는 살림꾼이 되도록 교사와 학생이 함께 배우며 가르치도록 바꾸어야 합니다. (4344.3.14.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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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정비법 Outdoor Books 6
니와 타카시 지음, 최종호 옮김, 자전거(MTB) 정비교실 감수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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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전거 설명서’ 안 읽고 자전거 타는 사람들
 [책읽기 삶읽기 20] 니와 타카시, 《자전거 정비법》



 일본사람 ‘니와 타카시’ 님이 쓴 작은 책 《자전거 정비법》은 자전거를 집에서 나 스스로 손질하는 길을 글이랑 사진으로 찬찬히 보여줍니다. 좋은 길잡이책입니다. 다만 한 가지 생각해야 합니다. 자전거를 이제 막 타기로 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자전거 손질을 아주 훌륭히’ 해낼 수 있지는 않습니다. 이 책을 늘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꾸준히 읽는다면, 한 해쯤 지날 무렵에 비로소 ‘내 손으로 내 자전거 손질하기’를 제법 잘 해낼 수 있습니다.

 아는 사람이 거의 드물지만, 새 자전거를 사면, 종이로 된 상자에 자전거가 따로따로 부속으로 나뉜 채 들었고, 이렇게 나뉜 자전거를 하나하나 붙여야 합니다. 자전거집에서 파는 자전거는, 자전거집 일꾼이 하나하나 붙인 자전거입니다. 자전거를 새로 장만하는 이들은 ‘처음 상자에 담긴 자전거’란 ‘몸통이 다 붙은 자전거’가 아니라 ‘부속으로 이루어진 자전거’인 줄을 모릅니다.

 더욱이, 상자에 ‘자전거 설명서’가 함께 든 줄을 모릅니다. 손전화 기계를 사든 사진기를 사든, 새 물건을 담은 상자에는 ‘제품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밝히는 설명서가 듭니다. 가스렌지를 장만해도 ‘가스렌지 설명서’가 들었어요. 텔레비전을 새로 살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약을 사도 작은 약상자에 깨알같은 글씨로 박힌 설명서가 들었어요.

 웬만한 사람들은 설명서를 그냥 버립니다. 설명서를 차근차근 읽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손전화를 새로 장만하면서 손전화 설명서를 꼼꼼히 읽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사진기를 새로 사들이면서 사진기 설명서를 낱낱이 살펴 스스로 ‘내 사진기 잘 다루기’를 해내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사람들이 더 모르는 대목입니다만, 디지털사진기뿐 아니라 옛날 필름사진기를 담은 상자에도 ‘사진기 설명서’가 들었습니다. 수동사진기를 어떻게 다루고, 필름을 어떻게 넣으며, 빛은 어떻게 맞추는지를 차근차근 알려주는 설명서가 들었어요.

 사진을 처음 찍는다는 분들은 으레 사진교실에 나가거나 사진강좌를 듣는다거나 하는데, 이렇게 할 까닭이 없습니다. 사진기를 사면 따라오는 설명서를 혼자서 한두 시간쯤 읽으면서 스스로 사진기를 만지작거리면 됩니다. 어르신들은 당신 아이나 둘레 젊은이한테 설명서를 한 장씩 읽어 주면서 당신 스스로 만질 수 있도록 도와 달라 하면 됩니다. 사진기를 잘 다루는 젊은이여야 설명서대로 따를 수 있지 않습니다. 설명서에 적힌 글을 잘 읽을 줄 알면 됩니다. 어르신 가운데에는 눈이 나쁘다든지, ‘요즈음 사람들이 쓰는 글’을 잘 모르는 분이 많은 만큼, 젊은 사람한테 하루치 일삯을 주면서 설명서대로 도와 달라고 하면 됩니다.

 자전거를 살 때에 자전거집에 찾아가서 산다면, 자전거집 일꾼이 자전거를 ‘완제품’으로 다 맞추어 줄 뿐 아니라, 안장높이를 맞추어 주고, 페달을 살펴 주며, 손잡이가 흔들리거나 어긋나지 않도록 다스립니다. 뒷거울을 달아 준다든지 안전등을 붙여 주기도 해요. 그러나, 이보다 ‘자전거를 걱정없이 잘 타는 길’을 이야기해 줍니다. 페달을 어떻게 밟으며, 안장에 앉을 때에 허리나 머리나 손이나 팔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합니다.

 단골 자전거집에 들러 여러 시간 죽치며 얘기꽃을 피우다 보면, 자전거를 새로 산다든지 고치러 오는 손님을 만나곤 합니다. 자전거를 새로 사는 분들 가운데 ‘자전거집 일꾼이 하나하나 알려주는 대로’ 잘 삭이거나 배우는 분은 좀처럼 없습니다. 자전거집에서는 고개를 끄덕끄덕하지만, 자전거집을 나오면 다들 금세 잊는 듯합니다. 자전거를 손질하러 오는 분들도 매한가지입니다. 스스로 할 줄 아는 ‘손질법’이란 한 가지도 없는 듯해요. 게다가, 자전거를 사면서 ‘바람넣이’조차 안 사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자전거를 타다가 ‘바람이 빠지면’ 자전거집으로 가져와서 넣으면 된다고 여기는 분이 아주 많아요.

 바람 빠진 자전거를 함부로 타다가는 자전거 바퀴 튜브가 눌리며 조금씩 금이 가거나 찢어질 수 있습니다. 바람이 많이 빠졌다면 바큇살이 다칠 수 있어요. 이런 대목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란 얼마 안 되는 듯합니다. 수백만 원에 이르는 자전거에다가 수십만 원에 이르는 자전거옷을 갖추었으면서 ‘바람넣이’ 하나 장만하여 자전거에 붙이고 다녀도 ‘무겁다’고 여기면서 바람넣이를 안 챙기는 자전거꾼마저 있습니다. 바람넣이조차 안 챙기며 자전거를 타고 먼길을 달린다면, 자전거 체인이 끊어지거나 못이나 뾰족한 뭔가를 밟아 튜브에 구멍이 났을 때에 손질할 만한 연장이란 아예 안 챙기겠지요. 자전거 나사를 조이는 연장 하나 무게가 1킬로그램이 되겠습니까, 100그램이 되겠습니다. 요즈음 나오는 자전거 나사는 ‘드라이버로 조이거나 푸는 나사’가 아닙니다. 몇 그램 안 되는 조그마한 연장으로 조이거나 풉니다. 이런 막대연장 하나쯤 지갑에 넣어 다니면, 꽤 알뜰히 쓸 수 있습니다.

 단골 자전거집 일꾼은 이야기합니다. “자전거 설명서요? 아무도 안 가져가서 다 버리지. 처음에는 안 버리고 모아 뒀는데, 너무 많이 쌓여서 버려야 해요. 아무도 안 읽어요.”

 자전거를 사면서 자전거 설명서를 챙기지 않는 사람들이니, 자전거 설명서를 읽을 까닭이란 없는지 모릅니다. 자전거 설명서를 읽지 않으니, 자전거 페달을 어떻게 밟아야 하고, 내 허리와 손을 어떻게 두어야 하며, 자전거로 찻길을 달릴 때라든지 거님길이나 자전거길을 달릴 때 어떻게 해야 좋은지를 모릅니다. 한 마디로 갈무리하자면, ‘자전거를 타는 기본 예의’조차 익히지 않으면서 자전거를 타는 셈입니다.

 자전거를 걱정없이 타는 길이란 ‘안전장구 갖추기’가 아닙니다. 안전장구를 아무리 잘 갖추었어도, 서울 한강 자전거길 같은 데에서 30∼40킬로미터로 싱싱 내달린다면, 앞 자전거하고 부딪히거나 자칫 미끄러져 나동그라질 때에 목숨을 잃을 수 있습니다. 자전거 헬멧은 ‘시속 30킬로미터 넘게 달리는 자전거꾼 머리’를 지켜 주지 않습니다. 아니, 25킬로미터를 넘게 달리는 자전거꾼 머리도 지켜 주지 않아요. 100만 원짜리 헬멧이든 1000만 원짜리 헬멧이든 똑같습니다. 걱정없이 타자면, 자전거를 달리는 기본 예의를 먼저 갖추어야 하고, 자전거란 ‘더 빨리 싱싱 내달리려고 하는 탈거리’가 아닌 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전거대회에 나갈 선수가 되려고 자전거를 타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동차대회에 나갈 선수가 되려고 자동차를 몰지 않아요.

 좋은 탈거리이며 고마운 탈거리라고 깨달아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동무와 이웃을 사랑하면서 자전거를 타는 길을 살펴야 합니다. 내 자전거를 내 몸과 같이 여기면서 아끼는 사람이라면 ‘자전거 설명서’를 즐거이 읽으면서 삭이리라 봅니다. 다만, 자전거 설명서는 한두 번 읽는대서 다 외우거나 알 수 없습니다. 오래도록 꾸준히 들여다보면서 가다듬어야 비로소 내 몸으로 스며듭니다.

 《자전거 정비법》이라는 작은 책은 자전거 설명서에 나온 이야기를 고스란히 되풀이합니다. 자전거를 새로 살 때에 설명서를 알뜰히 챙긴 분이라면, 이 책에 깃든 이야기란 설명서에 나온 이야기를 ‘조금 더 많이 넣은 사진’으로 보여줄 뿐인 줄 알아채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전거 설명서를 차근차근 읽으면, 나 스스로 자전거 부품을 하나하나 맞출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분들은 자전거를 사면서 설명서를 챙기지 않으니까 《자전거 정비법》 같은 책을 따로 사서 읽어야 합니다. 그나마, 이런 책까지 챙겨 읽으려는 자전거꾼은 몹시 드물 텐데, 아마, 일본사람 ‘니와 타카시’ 님은 ‘자전거를 사면서 설명서를 버리는 바보’들이 너무 많다고 느끼면서 이런 책을 썼겠지요.

 그런데, 설명서를 챙기지 않는 자전거꾼이 《자전거 정비법》 같은 책은 제대로 읽거나 알뜰히 받아들일까요. 참 궁금합니다.

 뭐, 설명서를 안 읽어도 손전화 기계로 전화 못 거는 사람은 없습니다. 설명서를 안 읽는다고 사진기 단추를 못 누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설명서를 안 읽었기에 자전거에 못 올라타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렴, 그렇습니다. (4344.3.1.불.ㅎㄲㅅㄱ)


― 자전거 정비법 (나와 타카시 글,최종호 옮김,진선books 펴냄,2007.11.10./7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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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전설
라이너 침닉 지음, 장혜경 옮김 / 큰나무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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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를 심어 함께 살아가는 사람은
 [책읽기 삶읽기 44] 라이너 침닉, 《나무의 전설》


 《나무의 전설》을 쓴 독일사람 라이너 침닉 님은 “나무는 비밀도 털어놓는다. 우리가 나무와 하나라고 느끼고 있다고 가르쳐만 준다면 말이다(9쪽)” 하고 말하면서 책머리를 엽니다. 더없이 마땅한 이야기인데, 독일사람이고 한국사람이고 언제나 이 말마디를 잊습니다. 예전에는 잊었고, 이제는 아예 모르며, 앞으로는 아무도 떠올리지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독일사람 라이너 침닉 님은 《나무의 전설》 책머리에서 “독일인의 정서는 예부터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보다는 숲 전체를 더 좋아하였고, 그마저 그것의 이용가치가 먼저였다. 최근에 와서야 그런 태도들이 변하였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미 국법이 정한 경제정리와 무리할 정도로 심해진 이윤적 사고로 인해 농촌의 풍경은 모조리 망가져 버렸고, 마지막 남은 얼마 안 되는 풍경마저 환경공해로 인해 갉아먹힌 지 오래다(6쪽).” 하고도 이야기합니다. 따지고 보면, 한국사람도 독일사람하고 크게 안 다르구나 싶으며, 이 나라 사회도 독일 사회하고 엇비슷하구나 싶습니다. 나무를 아끼거나 숲을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보기란 몹시 어렵습니다. 나무 한 그루가 얼마나 훌륭한가를 말하면서 환경사랑을 외치던 ㅊ이라는 ‘숲탐방 이야기꾼’은 ‘4대강 사업 홍보본부장’으로 탈바꿈하기도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환경정책은 ‘사람한테 돈이 될 만하느냐 안 될 만하느냐’에서 오락가락합니다.


.. 세월은 흐르고 또 흘렀다. 그 일을 겪었던 목동은 오래 전에 이 세상을 떠났고, 비바람에 썩은 안내판은 폭풍에 날려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그래서 산 아래 계곡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날의 기적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다 … 남편은 아내에게 온갖 선물을 퍼부었고 아내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였지만 재물 못지않게 인간의 삶에 꼭 필요한 마음의 평화를 아내에게 선사해 줄 수는 없었다 ..  (26, 55쪽)


 우리한테 돈이 없다면 아이들한테 과자 한 봉지 사 줄 수 없습니다. 우리한테 돈이 있기에 식구들하고 맛나다는 바깥밥을 사서 먹습니다. 우리한테 돈이 없을 때에는 따스한 집 한 채 달삯으로든 전세로든 얻지 못합니다. 우리한테 돈이 있으니까 책을 사서 읽거나 영화관에 가서 느긋하게 한두 시간 즐깁니다.

 우리는 돈을 벌어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 삶’을 다룬 책 하나 사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우리는 돈을 안 벌어도 ‘나무 한 그루에서 내놓은 씨앗 하나를 땅에 알뜰히 심은 뒤 나무씨앗이 천천히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 줄기를 올리는 기나긴 해를 곁에서 물끄러미 지켜보면서’ 나무를 사랑하는 내 삶을 일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바지런히 회사일을 하든 무슨 일을 해서 은행계좌에 차곡차곡 돈을 쌓은 다음 아이들한테 물려줄 수 있습니다. 힘껏 돈을 번 만큼 늘그막에 나라밖 여행을 다니든 전원주택을 장만하든 하면서 한갓지게 삶마무리를 지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라도 돈벌이보다 내 오늘 하루를 알차게 가꾸면서 즐기는 데에 온삶을 바칠 수 있습니다. 아이한테 물려줄 돈은 한 푼조차 없지만, 아이 마음밭에 ‘내 어머니랑 아버지랑 즐겁게 손 잡고 논 생각과 느낌’을 아로새길 수 있습니다. 어머니가 부르는 노래와 아버지가 그림책을 읽는 목소리를 아이 마음에 곱게 깃들일 수 있습니다.

 돈을 꽤 벌어들인다면 멋지고 빠른 자동차를 장만해서 이 나라 구석구석 골골샅샅 누비면서 ‘아이야, 애써 나라밖으로 나가지 않더라도 이 나라에서 아름다운 사람과 터전과 자연을 두루 만날 수 있단다’ 하고 알려줄 수 있습니다. 돈이 없는 가난한 살림이니까, 자전거 뒷자리에 아이를 태우고 다닌다든지, 또는 함께 손을 맞잡고 길을 거닐면서, 도시에서는 골목길을 느끼고 시골에서는 숲길이나 논둑길을 맞아들이면서 ‘아이야, 천천히 길을 걸으니까 우리는 오붓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마을사람하고 사귀며 다리가 아플 때에는 햇볕 좋은 데에서 나란히 드러누워 파란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단다’ 하고 속삭일 수 있습니다.


.. 대장장이의 바람도 헛되이 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은 대장장이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 아무도 대장장이의 의견을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겐 이제 그와 같은 수만 명의 사람들과 함께 거대한 살육의 현장으로 끌려가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  (69쪽)


 이야기책 《나무의 전설》은 열두 달에 걸쳐 열두 가지 나무하고 부대낀 사람들 이야기를 수수하게 들려줍니다. 잘나지 않으나 못나지 않은, 대단하지 않으나 대수롭지 않다 할 수 없는, 그럴싸하지 않지만 하잘것없지 않은, 이냥저냥 오순도순 옹기종기 도란도란 어울리는 이야기를 가만히 보여줍니다.

 책이름은 “나무의 전설”이라지만, 한 꼭지 두 꼭지 찬찬히 읽다 보면, “나무에 얽힌 옛이야기”이거나 “나무하고 얽힌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멀디먼 옛날 옛적 이야기라기보다 오래도록 우뚝 서서 우리 곁에서 오백 해이고 즈믄 해이고 살아가는 키큰나무들마다 가슴에 살뜰히 담았던 “나무가 살아온 이야기”입니다.

 우리 보금자리 곁에 은행나무가 있으면 은행나무하고 얽힌 이야기가 있을 테고, 우리 살림집 둘레에 살구나무가 있으면 살구나무하고 맺은 이야기가 있을 테지요.

 저는 고향마을 인천 골목동네에서 살던 때, 날마다 골목마실을 아이와 함께 즐기면서 포도나무 감나무 배나무 능금나무 오얏나무 복숭아나무 매화나무 벚나무 석류나무 앵두나무 모과나무 호두나무 밤나무 대추나무 탱자나무 들을 만났습니다. 어쩌면 집집마다 이토록 갖가지 다른 열매나무를 심었는가 싶어 놀라고, 아이한테 이런 나무 저런 나무를 보여주고 잎사귀를 만지라고 번쩍 들며 놀았습니다.

 나무전봇대보다 높이 자란 오동나무 오동꽃 흩날리는 밑에서 아이하고 춤을 추고, 감나무 밑에서 까치밥을 쪼아먹는 직박구리를 올려다보았습니다. 모르기는 몰라도 이 숱한 나무들을 심은 골목이웃은 저마다 다 다른 꿈과 뜻과 넋을 나무 한 그루에 심었겠지요. 골목이웃이 조그마한 골목집에 처음 깃들던 때 가난한 살림이면서도 나무 한 그루를 심어 스무 해 서른 해를 돌보았고, 마흔 해를 웃도는 나무들은 어느새 골목집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새 아이를 낳는 모습까지 바라보겠지요. 이 나무들은 ‘아파트로 재개발’하는 공무원과 건설업자 돈벌이에 따라 하루아침에 싹둑싹둑 베어지겠지만, 이 나무를 심었고 이 나무와 함께 살았던 사람들 마음자리 한켠에는 해마다 마주하던 나무꽃과 나무열매 맛·내음·빛깔·무늬가 살며시 스몄으리라 생각합니다. (4344.2.26.흙.ㅎㄲㅅㄱ)


― 나무의 전설 (라이너 침닉 글·그림,장혜경 옮김,큰나무 펴냄,2007.4.5./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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