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 살의 철학 - 십대를 위한 철학 길라잡이
이케다 아키고 지음, 김경옥 옮김, 현놀 그림 / 민들레 / 200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음으로 살고, 생각으로 사랑하고
 [푸른책과 함께 살기 95] 이케다 아키코, 《열네 살의 철학》(민들레,2006)

 


- 책이름 : 열네 살의 철학
- 글 : 이케다 아키코
- 옮긴이 : 김경옥
- 펴낸곳 : 민들레 (2006.3.15.)
- 책값 : 9000원

 


  나 스스로 느긋하게 가다듬는 마음일 때에는 책을 읽으면서 무척 느긋합니다. 하루하루 온갖 일을 치르며 바쁘다 하더라도 마음이 느긋하기 때문에 스물네 시간 가운데 잠은 서너 시간 쪽잠으로 자고 스무 시간을 일에 매인다 하더라도 십 분이나 이십 분 말미를 내어 책을 읽으며 참으로 느긋하다고 느낍니다. 나 스스로 느긋하게 가다듬지 못하는 마음이라면, 아무런 일이 없고 하루 스무 시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다 하지만, 책을 읽지 못할 뿐더러 책을 읽으면서 가슴이 사랑으로 부풀지 못해요. 마음가짐에 따라 책읽기가 달라집니다.


  내가 무엇을 더 배울 때에도 책을 읽는 눈은 달라집니다. 내가 무엇을 더 겪은 뒤에도 책을 읽는 결은 달라집니다. 그런데, 무엇을 더 배우거나 더 겪는다 할 때에도, 내 마음으로 느끼며 스며드는 이야기가 되는구나 싶어요. 마음으로 느끼며 스며들지 않고서는 배우지 못하고 겪었다고 여기지 않아요. 마음으로 느끼며 비로소 배우는구나 하고 느끼고 겪는구나 하고 여깁니다.


  곧, 마음가짐에 따라 삶이 달라집니다. 마음가짐에 따라 생각이 달라집니다. 마음가짐에 따라 꿈이 달라지고, 이야기가 달라지며, 사랑이 달라집니다.


  마음을 슬기롭게 쓸 때에, 슬기롭게 책을 읽고 슬기롭게 집일을 하며 슬기롭게 이웃을 사귑니다. 마음을 곱게 쓸 때에, 곱게 말을 하고 곱게 웃음을 지으며 곱게 밥을 차립니다. 마음을 정갈히 가눌 때에, 정갈히 편지를 쓰고 정갈히 밭을 일구며 정갈히 걸레질을 합니다.


.. 산다는 게 멋지다거나 시시하다거나 하는 건 스스로 자기 삶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지 … 관념이 현실을 만들지, 현실이 관념을 만드는 건 결코 아이야 … 사회도 바꿔야겠지만 우선 내가 먼저 변하는 게 중요해 … 사회란 사람들 저마다의 관념인 까닭에 각자가 좋아지지 않고서 사회를 좋게 만드는 길은 어디에도 없어 …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어떻게 타인을 사랑할지도 알 수 없는 법이지 … 과학의 발달을 진보라고 한다면, 진보란 편리해지는 걸 뜻하는 건가? 과연 진보를 ‘편리해지는 것’이라고 정의해도 괜찮을까 ..  (10, 92∼93, 113, 163쪽)


  내 마음이 흔들린다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내 삶은 그저 흔들립니다. 내 마음이 무겁다면, 어디에서 무엇을 하거나 내 삶은 그예 무겁습니다. 내 마음이 아프다면, 어디에서 무엇을 하더라도 내 삶은 그대로 아파요.


  마음 한켠에 응어리를 숨긴 채 활짝 웃으며 뛰놀 수 있겠지요. 마음 한쪽에 피고름이 흐르더라도 짐짓 모르는 척 지낼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마음을 숨기지 못해요.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내 얼굴에 낱낱이 드러나요. 내 몸가짐 구석구석에 마음속 이야기와 움직임이 찬찬히 뱁니다.


  그런데 내 마음은 어떻게 피어날까요. 내 마음에 따라 내 몸이 움직일까요. 내 몸이 움직이는 결에 맞추어 내 마음이 바뀔까요.


  몸을 튼튼하게 돌보며 마음을 튼튼하게 돌볼 수 있을까요.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몸 또한 단단히 추스를 수 있을까요. 몸과 마음은 따로라거나 어느 쪽이 먼저라 할 수 없이 함께 흐를까요.


.. 자연이 만들었고 그 자체가 자연인 몸은 새까맣게 잊은 채, 겉으로 보이는 몸만을 몸이라고 생각하게 된 거지 … 어떤 아이가 태어날지, 누가 태어날지 몰랐는데, 바로 너희들이 태어났다는 이 오묘한 만남의 감동을 잊고 있단 말이지. 단지 타인과 타인이 만났을 뿐이라는 사실은 잊은 채 ‘내 아이’라는 생각에 깊이 빠져 있는 거지. 그래서 종종 당신들(부모) 생각대로 너희(아이)들을 만들려고 하는 거야 … (내 몸을) 내다 팔 수도 있다면 진짜로 소중하게 여기는 건 아니지. 그렇다면 그럴 경우 마음은 소중하게 여기고 있느냐 하면, 몸을 팔 수 있다는 그 생각이 바로 마음을 파는 것이어서 이것 역시 같은 거지 … 뭐 때문에 사는지 사유하지도 않고 어쨌든 살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수명을 늘이기 위한 생명 기술만 엄청나게 발전시키고 있지 ..  (59, 81, 123, 168쪽)


  언제부터였나, 나는 늘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국민학교를 다니던 때에는 개구지게 놀며 ‘다른 동무들과 견주어 힘이 모자라는 내가 어떻게 하면 더 잘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야구 놀이를 할 때에 동무들은 홈런을 뻥뻥 치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칠 힘이 없습니다. 방망이를 짧게 잡고 공을 잘 맞추어 수비가 빈틈으로 보내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축구 놀이를 할 적에 동무들은 으레 공이 있는 데로 우르르 몰리는데, 어차피 축구는 골문으로 가기 마련이니까, 나는 사람도 공도 없는 빈 곳에서 어디로 이 공과 사람이 갈까를 미리 헤아려 좋은 자리를 지킵니다.


  중학교로 들어서며 놀이보다는 공부에서 생각을 기울입니다. 국민학교를 마치기 무섭게 중학교부터 저녁 늦게까지 교실에 붙잡아 가두며 입시공부를 시켰어요. 억지로 붙들리며 시험문제만 달달 외워야 하는 시멘트 감옥에서 ‘교과서로 가르치는 지식과 정보가 얼마나 옳으며, 이 지식과 정보가 앞으로 얼마나 오래 갈까’ 하고 생각합니다. 내가 대학입시까지 마치면, 이렇게 외우는 지식과 정보는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합니다. 고작 시험 한 차례 치르려고 여러 해 시멘트 감옥에 꽁꽁 묶인 채 바보스레 지내야 하나 싶어 딱했습니다.


  이리하여 고등학교에 들어서면서 책읽기를 생각합니다. 대학입시에서 논술 공부를 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교과서 아닌 책을 읽으며 내 생각자리를 넓히려 합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은 나더러 ‘생각을 하라’ 하고 말했지만, 제도권학교 교사가 말하는 ‘생각’은 내가 품는 ‘생각’과 달라요.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 생각을 하고 싶지, 시험성적을 잘 낸다거나 바보스레 시험공부에만 매달리는 다른 동무와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아요. 똑같은 옷에 똑같은 머리 길이로 바보처럼 되어, 똑같은 교과서를 달달 외우고는 내 꿈과 사랑을 놓치고 싶지 않아요.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며 교과서보다 교과서 아닌 책을 가방에 더 많이 챙깁니다. 자율학습이나 보충수업을 할 적에도 교과서나 참고서나 문제집보다 다른 인문책이나 문학책을 나란히 펼치고 읽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된 때에도 이런 책읽기는 그대로 잇습니다. 문득문득 돌이킵니다. ‘내가 시험문제 하나를 더 풀어 0.01점을 올리는 일’과 ‘오늘 하루 내 삶을 누리는 책으로 생각을 빛내는 일’하고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울까 하고 돌이킵니다. 나는 새벽 다섯 시 사십 분에 집에서 나섭니다. 새벽버스를 타고 학교로 옵니다. 학교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고요한 시멘트 감옥에서 창가에 앉아 가방에서 ‘교과서 아닌 책’을 꺼내고, 동무들이 오기까지 한 시간 반 즈음 ‘교과서 아닌 책’을 호젓하게 읽습니다. 비록, 창가 자리라 하더라도, 내 고등학교 창문 바깥으로는 화학공장 굴뚝이 가득합니다. 화학공장에서 버리는 쓰레기물을 거르는 처리장 매캐한 연기가 교실로 스며듭니다. 햇살은 조각처럼 쪼개어진 채 들어옵니다. 나는 좋은 햇살 누리는 곳에서 살고 싶다는 꿈을 꿉니다. 나는 좋은 모습 바라볼 수 있는 곳에서 삶을 누리고 싶다는 사랑을 헤아립니다.


.. 다른 사람의 아픔을 알지 못하고, 그 마음도 알지 못하는 건 작은 나로만 보고 있기 때문이야 … 도둑질이나 폭행, 살인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은 그런 법이 필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있어도 그게 자기를 구속한다고 느끼지 않아. 그 사람의 자유는 조금도 규제받지 않는 셈이지 … 현실을 움직이는 건 관념이어서 관념이 바뀌지 않으면 현실도 바뀌지 않는 거야. ‘더 나은 사회에서, 더 잘 산다’는 관념이 진정으로 뭘 뜻하는지 자기 스스로 판단하지 않은 사람들이 무리지어 당을 만들고, 자기 자신이 나아지려는 노력 없이 사회만 바꾸려고 한 셈이야. 설령 그런 사회가 실현됐다 하더라도 내용은 그 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을 거란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 ..  (74, 98, 108쪽)


  고등학교를 마치며 고향이던 인천을 떠납니다. 이제 대학교가 있는 서울에서 지냅니다. 인천에서 서울로 한 해 동안 지옥철을 타고 대학교를 다녀 보는데, 이제껏 왜 ‘지옥철’이라 이름을 붙였는가를 온몸으로 깨닫습니다. 선풍기조차 없이 창문만 열어 더위를 식히는 국철은, 인천에서 잠만 자고 서울에서 일하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날마다 새벽과 밤마다 오징어떡처럼 찡기면서도 손에 책을 꼭 쥡니다. 새벽전철에는 꾸벅꾸벅 조는 사람투성이입니다. 이리 밀리고 저리 밟히면서 나는 책을 펼쳐 꿈누리로 빠져듭니다. 몸은 괴롭지만 마음은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밤전철에는 술에 절은 사람투성이입니다. 여기서 비틀거리고 저기서 시끄럽습니다. 나는 책을 펼쳐 온통 시끄러운 소리와 어지러운 냄새를 잊으려 합니다. 아니, 책을 펼치면 어떠한 소리도 냄새도 나한테 스며들지 않습니다. 나는 책과 함께 사랑누리를 생각합니다.


  서울 이문동에 있는 대학교에서 인천 주안역까지 막전철을 타고 오면 으레 밤 한 시 가깝습니다. 주안역에서 내린 다음 마을버스 마지막차를 기다립니다. 이때에도 가로등 불빛에 기댄 채 책을 읽습니다. 새벽에 전철에서도, 낮에 학교에서도, 저녁에 동아리방이나 과방이나 술집에서도, 밤에 전철과 버스역에서, 어느 누구도 손에 책을 안 쥔다고 느낍니다. 아주 드물게, 이 늦은 막버스 기다리는 주안역에서 누군가 손에 책을 쥔 사람이 보이곤 했는데, 이럴 때면 마음속에서 불이 켜집니다. 나는 외롭지 않다고, 나한테는 이렇게 좋은 이웃이 이름도 낯도 모르지만, 어디에선가 즐겁게 살아가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불이 켜져 환합니다.


.. 사람들은 곧잘 ‘우정이 깨졌다’고 말하곤 해. 하지만 깨지고 마는 우정은 진정한 우정이 아니었을 따름이야. 진정으로 중요한 뭔가로 서로 이어져 있었다기보다 이해 관계에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어 … 내가 사는 이곳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너희들이 알아야만 하는 건, 어느 쪽이 옳은가가 아니라 그 상황에서 나는 얼마나 바르게 살아갈까가 아닐까 … 나와 인류 전체는 다른 게 아니기 때문에 내가 좋아지지 않으면 인류 전체도 좋아지지 않는 거야 ..  (112, 148, 170쪽)


  대학교에 들어간 이듬해에 아주 인천을 떠납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새벽전철과 밤전철로 오가느라 지치기도 지치지만, 찻삯이 아깝습니다. 무엇보다 고단한 전철길에서 시달릴 때에 읽는 책은 마음닦이를 하며 읽더라도 제대로 마음을 가다듬기 힘들다 느낍니다. 더욱이, 서울에서 잠잘 데 얻어 지낸다면, 서울 곳곳에 있는 헌책방을 두루 돌며, 내가 아직 모르는 더 깊고 너른 책바다에 뛰어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어린 날, 내 국민학생 적 내 어머니가 부업으로 하던 신문배달을 떠올립니다. 신문사 지국은 먹고자는 사람이 많다고 했지. 대학교 앞에도 신문사 지국 있지 않을까.


  대학교 과방으로 오는 신문에 끼워진 신문값 고지서에 적힌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겁니다. 신문사 지국으로 갑니다. 국민학생 적부터 신문배달을 했다고 말하며, 이곳에서 먹고자며 신문을 돌리기로 합니다. 이러면서 차츰 학교 전공 과목 수업하고 멀어집니다. 교재 한 권을 내가 먼저 혼자서 하루 동안 읽으면 그만일 텐데, 이 작은 교재로 한 학기나 한 해를 가르치고 배우는 얼거리가 내키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하던 대학교와 몸으로 겪는 대학교가 너무 다릅니다. 고등학생 적을 되새깁니다. 그래, 중학교나 고등학교도 교과서 한 권으로 한 해를 가르치잖아. 그런데, 이때에는 교과서 말고도 문제집과 참고서를 얼마나 많이 보는데. 대학교는 수업도 설렁설렁에다가 교재도 너무 얇고. 이래서 무슨 학문을 하지?


  대학교 옆 헌책방에서 온갖 책을 찾아 읽습니다. 대학교 구내도서관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을 합니다. 내 깜냥껏 50분 일하고 10분 쉬면서 틈틈이 책을 읽습니다. 나는 50분 일한 만큼 내 근무기록일지에 ‘50분 일하고 10분 쉼’이라 숫자를 적는데, 어떤 사람은 일도 안 하면서 근무시간을 되게 길게 적습니다.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람은 어디를 둘러보아도 나 말고 없는데, 근무기록일지를 보면 이름은 적히되 얼굴이 안 보이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게 뭔가?’ 싶어 도서관 일꾼한테 여쭙니다. ‘어머, 학생은 그렇게 안 했어요?’ 도서관 일꾼은 근로장학생으로 이름 올린 학생치고 제대로 일하는 사람이 없어, 늘 그러려니 한다고 말합니다. 구내도서관 근로장학생 일은 석 달만 하고 그만둡니다. 그러고 나서 학교 구내서점에서 일합니다. 학교 구내서점에서는 일하는 티가 금세 드러나고, 일하는 보람을 스스로 뿌듯하게 느낍니다. 그렇지만, 나날이 ‘대학교가 참 싫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합니다.


.. ‘생각한다’는 건 다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일이야 … 그렇게 만드는 건 그 사람일 뿐이지. 자기 스스로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고 생각하니, 이상이 현실로 될 수 없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 누구나 내면을 아름답게 가꿔 가야 해. 겉모습이 아름답게 보이고 싶다면 말이지. 겉만 가꿔서는 안 돼. 전부 얼굴에 드러나니까. 이미 다 드러났는데도 눈치 채지 못하는 이는 바로 자기 자신뿐이야 … 사람들의 삶은 그들 자신이 하고 있는 말 그대로가 아닐까 … 살인을 저지르거나 성매매를 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하는 게 자기한테 좋을 거라고 여기니까 그렇게 하는 거지, 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그러지는 않을 거야 … 나쁜 행귀가 결국은 자기한테도 나쁜 일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니까 서슴없이 나쁜 행위를 연달아 저지르게 되지 ..  (11, 104, 134, 151, 175, 176쪽)


  강의를 제대로 안 듣고, 강의 교재 말고는 스스로 다른 책을 찾아 읽지 않으며, 근로장학생 이름은 거짓으로 올리고, 시험을 치를 적에 훔쳐보기를 일삼는데다가, 화장과 술과 살섞기에만 마음을 기울이는 대학교는 몹시 짜증스럽다고 느낍니다. 대학생이 되면 고등학생 때보다 훨씬 더 넓고 깊이 많이 책을 읽을 줄 알면서, 마음과 생각과 꿈과 슬기를 빛내야 하지 않겠느냐 느끼는데, 막상 이렇게 길을 걷는 동무를 만나기 힘듭니다. 선배라 하는 사람은 학년이 위라 하며 높임말을 쓰라고만 시킬 뿐, 모두들 취업이라는 문 앞에서 또다시 영어 공부에만 빠져듭니다. 대학생 선배 가운데 앞사람다운 모습이나 길잡이 같은 매무새나 이슬떨이 같은 넋을 보여주는 이를 만나지 못합니다.


  이제 나는 생각을 굳힙니다. 이런 대학교라면 비싼 돈을 치르며 다닐 까닭이 없다고.


  생각을 갈무리하고 싶어 일찌감치 군대에 들어갑니다. 군대에서는 스스로 아무 생각을 안 하며 살자고 생각합니다. 살아남고 싶으니까, 총칼을 든 살인무기가 되고 싶지 않으니까, 바보스러운 지식이 깃들지 않기를 바라니까, 군대에서는 생각을 잊기로 합니다.


  그런데, 군대에서 스스로 생각을 잊은 채 살아가노라니, 내 마음속에서 무언가 하나 끈이 끊어진 듯 갑갑합니다. 가슴이 꽉 막힌 채 무언가 좀처럼 이어지지 않습니다. 실타래가 엉킨 듯합니다.


  그래요. 생각을 잊은 채 살다 보니, 나한테 무엇보다 아름다우며 대수로운 ‘꿈’과 ‘사랑’을 찾아볼 수 없어요. 내 눈빛에서 꿈이 사라지고, 내 눈길에서 사랑이 스러져요. 생각을 안 하는 사람한테는 꿈이 없고, 생각을 잊는 사람한테는 사랑이 없어요.


..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바로 마음이 하는 거지. 그래서 진짜인가 가짜인가 하는 건 그걸 만든 사람의 마음가짐, 다시 말하면 ‘그 사람’이 ‘진짜인가 가짜인가’와 다르지 않아 … 누군가가 자기답게 자기 모습 그대로 있다는 사실에 반했다는 걸 가짜는 알지 못하지. 자기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게 뭔지 알지 못해서 다른 사람 흉내를 내거나 인기몰이에만 신경 쓰게 되는 거야 … 우주 전체라는 게 어쩌면 사유하는 정신인 내가 그렇게 사유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건 아닐까 … 누군가 그릇된 사유를 한다면 그것 역시 자기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일 거야 ..  (140, 141, 159, 203쪽)


  이케다 아키코 님이 쓴 푸른책 《열네 살의 철학》(민들레,2006)을 읽었습니다. 열네 살부터 열일곱 살 푸름이들이 생각밭을 키우도록 이끄는 책이라 하는데, 《열네 살의 철학》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청소년이 생각을 키우도록 하기’에 그치지는 않는다고 느낍니다. 푸른 나날을 보낸 어른 가운데 푸르던 그무렵 생각을 못하던 이들한테 이제부터 즐겁게 생각을 빛내자 하는 이야기를 함께 들려줍니다. 푸른 나날을 보내고 어른이 되어 아이들을 낳으며 이 아이들이 푸름이가 된 사람한테도, 아이들한테만 읽히는 책이 아니라 푸름이를 돌보는 어버이 또한 나란히 읽으면서 오늘을 사랑하는 생각을 가다듬자는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줍니다.


.. 자기한테도 타인한테도 좋은 것을 말하기 때문에 언론은 자유로워야 해. 자기한테도 타인한테도 좋은 건 누구한테나 옳은 말이야. 누구한테나 옳은 말을 하는 경우에는 그 말을 할 ‘내 자유’를 굳이 주장하지 않아도 돼. 곧, 사람은 옳은 말을 할 자유를 가지지, 옳지 않은 말을 할 자유를 갖고 있지 않아. 그래서 그런지 세상에서 보면 누군가 옳지 않은 말을 할 때면 꼭 ‘언론에는 자유가 있다. 이렇게 말하는 건 내 자유다.’ 하고 주장하곤 해 … 느끼지 못하면 알았다고 할 수 없어. 머리로 알았을 뿐인 지식이나 어딘가에서 꾸어 온 지식 따위에 어떻게 한 사람의 삶을 바꿀 만한 힘이 담겨 있겠어 ..  (188, 221쪽)


  책을 꼭 읽어야 하지는 않습니다. 영화를 꼭 봐야 하지는 않습니다. 회사원이 반드시 되어야 하지는 않습니다. 돈을 반드시 벌거나, 혼인을 반드시 하거나, 아이를 반드시 낳아야 하지는 않아요.


  다만,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내가 왜 이러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인가 하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내가 이루려는 꿈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나누고픈 사랑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린이책은 왜 어린이책이라는 이름이 붙는가 하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린이책은 누가 읽으라는 책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푸른책은 누가 읽으면 좋을 책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책을 쓰는 넋은 무엇이고, 책을 읽는 뜻은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목숨을 건사하는 밥 한 그릇은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햇살 한 조각을 생각하고, 바람 한 점을 생각하며, 풀 한 포기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각하기에 살아갑니다. 생각하기에 사랑합니다. 생각하기에 꿈꿉니다. 생각하지 않기에 ‘몸뚱이는 어엿이 있어도 죽은 목숨’과 같습니다. 생각하지 않으니 사랑은 메마르고 미움과 시샘과 헐뜯기와 비아냥이 춤춥니다. 생각하지 않는 만큼, 어떻게 내 삶을 빛낼까 하는 꿈은 어디에도 자라지 않아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생각으로 사랑합니다. 마음으로 온누리를 빛냅니다. 생각으로 지구별을 보살핍니다. 마음으로 내 몸을 살찌웁니다. 생각으로 내 이웃과 살붙이와 동무를 어깨동무합니다. (4345.6.11.달.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덴코짱
노다 미치코 지음, 오타 도모 그림, 김경인 옮김 / 양철북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점글책 없는 도서관, 장님 없는 학교
 [푸른책과 함께 살기 96] 노다 미치코, 《덴코짱》(양철북,2011)

 


- 책이름 : 덴코짱
- 글 : 노다 미치코
- 그림 : 오타 도모
- 옮긴이 : 김경인
- 펴낸곳 : 양철북 (2011.10.24.)
- 책값 : 8000원

 


  한국에서 살아가는 나는 도서관을 딱히 싫어하지 않지만 그리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딱히 도서관에 찾아갈 겨를이 없기도 하고, 도서관을 찾아갈 때에 내가 즐길 만한 책이 얼마나 될까 잘 모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도서관은 새벽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열지 않습니다. 도서관에 있던 책들이 적잖이 버려지며 헌책방 책시렁에 꽂히곤 합니다.


  한국땅 도서관은 처음 건물 하나 지을 때에는 무척 번듯하게 짓곤 합니다. 그렇지만, 나날이 새로 나오는 책을 꾸준히 받아들이다 보면 처음 지은 건물로는 모자라니 책 둘 자리를 꾸준히 새로 지어야 하지만, 막상 새 건물 지으며 책시렁 넓히는 도서관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한국땅 도서관은 묵은 책을 버리고 갓 나온 책을 들이며 좁다란 자리를 버티기만 할 뿐이라고 느껴요.


  한국에 있는 도서관이 도서관답지 못하다고 느끼기에, 나는 내 나름대로 서재도서관을 꾸밉니다. 내가 내 돈을 들여 장만해서 읽은 책을 건사하는 내 서재를 누구나 들여다볼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서재도서관입니다. 여느 도서관에서 버리는 책을 헌책방에서 찾아내어 건사하기도 하고, 여느 도서관에서는 갖출 생각이 없으나, 나로서는 좋아하고 바라는 책들을 즐거이 장만해서 건사하기도 합니다. 한국땅 도서관에서는 서른 해나 쉰 해쯤 묵은 책을 찾을 길이 없다 할 수 있는 만큼, 내 서재도서관에서는 쉰 해이건 일흔 해이건 내가 갖추기만 하면 우리 아이들이 언제라도 손으로 만지면서 펼칠 수 있도록 꾸밉니다.

 


.. “제대로 본 거야? 어떤 애였는데?” “완전히 천사 같았다니까!” … 교실로 들어선 설사는, 그러니까 하라이 타로 선생님은 싱글벙글 웃으며 뒤에 서 있는 여자애를 교실로 불러들였다. “들어와. 여기가 4학년 1반 교실이다.” 눈을 감은 아이가 교실로 들어왔다 ..  (13∼14쪽)


  나는 손말을 할 줄 모르고, 점글을 읽을 줄 모릅니다. 그러나, 중학생이던 때에 처음으로 지역 도서관에 찾아가 본 뒤 궁금하게 여겼어요. 나처럼 입으로 말을 하고 눈으로 읽을 수 있는 사람이 펼칠 책 말고, 손가락으로 짚으며 읽어야 할 사람이 펼칠 점글책은 어디를 가야 볼 수 있을까 궁금했어요. 요즈음은 이럭저럭 나아져서 점자도서관이 따로 있다고 하고, 여느 도서관 한켠에 점글책을 두기도 한다지만, 눈으로 읽는 사람이 볼 책조차 넉넉히 건사할 자리가 모자라다는 한국땅 도서관 모습을 헤아린다면, 점글책을 얼마나 갖출는지 아리송해요.


  눈으로 읽는 책은 낱권책 한 권이어도, 점글책은 두툼한 열 권이 되기 일쑤예요. 게다가 점글책은 책시렁에 빡빡하게 꽂으면 안 됩니다. 눕혀도 안 됩니다. 한국땅 도서관마다 ‘새로 나오는 책 사들이는 돈’이 적다고 목소리 높은데, 점글책 만들거나 마련하는 돈은 얼마나 들일는지 또한 알쏭달쏭해요. 아니, 여느 출판사에서 점글책을 내놓아 주기는 할까요. 여느 출판사에서 점자도서관 일꾼이나 자원봉사자가 점글책을 만들기 수월하도록 한글파일을 선선히 나누어 주기는 할까요. 점글책과 함께, 한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즐기도록 말책(녹음책)을 알뜰히 갖추는 도서관은 얼마나 있을까요.


  점글책은 한국땅 도서관에 몇 가지쯤 있을까요. 점글로 된 도감이나 사전은 몇 가지쯤 있을까요. 점글로 된 국어사전이나 영어사전이나 일어사전은 제대로 있을까요.


  말책은 한국땅 도서관에 몇 가지쯤 있을까요. 한글을 모르는 사람도 말책을 듣겠지만, 눈이 어두워진 사람도 글책 읽기 어려우니 말책을 들으면 좋을 텐데, 말책을 알뜰살뜰 갖추는 도서관이 제대로 있기나 할까요.

 


.. “카렌은 지난달에 미국에서 귀국했다. 다섯 살 때까지는 일본에서 살았어. 일본어도 잘하고 영어도 잘해. 점자도 막힘없이 술술 읽을 줄 알지. 못하는 게 없는 친구다. 그런데 눈이 보이지 않는다.” … 귀여운 얼굴은 마치 즐거운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웃고 있는데? 방금 전에 작은 새가 지저귀는 것처럼 맑디맑은 목소리가 우리 머리 바로 위에서 노래했는데? ..  (17∼18쪽)


  입으로 소리를 내지 못하거나 눈으로 읽지 못할 때에는 손말이나 점글을 씁니다. 한국땅에는 입으로 소리를 내지 못하거나 눈으로 읽지 못하는 사람이 퍽 많습니다. 그러나, 한국사람 스스로 제도권학교에서든, 구청이나 군청 같은 곳 문화강의 같은 데에서든 손말과 점글을 가르치는 일은 매우 드뭅니다. 어쩌면, 어떠한 구청과 군청에서도 구민이나 군민한테 손말과 점글을 안 가르칠는지 모릅니다.


  나는 고등학교를 마치기까지 ‘도서관에 점글책 없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막상 ‘왜 손말이나 점글을 제2외국어로 안 가르치는가’ 하는 대목을 궁금해 하지 못했습니다. 적어도 고등학교에서 손말이나 점글 가운데 하나쯤 가르쳤다면, 대학시험에서도 손말이나 점글을 푸는 문제가 나온다면, 온통 대학입시지옥으로 흐르는 한국 삶자락이 조금이나마 달라지지 않겠느냐 싶기도 합니다.


  다만, 손말이나 점글은 시험문제가 되어야 하지는 않아요. 삶이 되어야 올발라요. 삶이 될 때에 아름답습니다.


  그러고 보면, 고등학교가 되어서야 제2외국어로 가르칠 노릇이 아니라, 어린이집부터 가르칠 노릇이라고 느껴요. 다섯 살 아이들한테부터 어린이집에서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손말은 어린이집부터 가르치고, 점글은 초등학교부터 가르쳐야지 싶어요.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옳고 바르게 쓰도록 가르치면서, 한국땅 살가운 이웃하고 어깨동무하는 삶을 사랑하게끔 손말과 점글을 늘 가슴으로 맞아들이도록 이끌어야지 싶어요.

 


.. 덴코짱은 점심시간 동안 계속 두꺼운 책만 읽고 있다. 아마도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을 위한 책인 것 같다. 새하얗고 깨알 같은 점들이 두꺼운 종이 위에 가득 튀어나와 있다. 텐코짱은 고개를 약간 쳐들고 자랑스러운 듯 엄청 빠르게 두 검지로 점들을 짚어 나간다. 가끔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눈물을 닦을 때도 있다 … 그나저나 점자책을 읽을 때 덴코짱의 그 기쁨에 찬 얼굴은,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보물산에 있는 것처럼 반짝반짝 빛이 난다 ..  (35, 38쪽)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나는 국민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열두 해를 다니면서, 같은 반에서든 한 학교에서든 언제나 비장애인 동무들만 만났습니다. 장애인 동무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섯 학기를 다니고 그만둔 대학교에서도 장애인 동무는 하나도 못 보았어요. 언제나 비장애인 동무만 마주했어요.


  더 생각하면, 내가 다닌 학교들 가운데 바퀴걸상을 타고 다닐 만한 건물이던 곳은 없습니다. 목발을 짚고 다닐 만한 건물도 없습니다. 지팡이로 바닥을 짚으며 알아볼 만한 건물도 없습니다. 비장애인 학교와 장애인학교가 뚜렷하게 갈려, 서로 만나거나 사귀거나 이야기를 나누거나 어깨동무를 할 만한 겨를도 자리도 없어요. 장애인학교와 어깨동무를 맺는 비장애인학교조차 구경하기 힘들어요.


  다시금 생각을 기울입니다. 신문이고 잡지이고 책이고 인터넷이고, 온통 비장애인이 쓰도록 만듭니다. 장애인이 읽을 신문이나 잡지나 책은 얼마나 될까요. 장애인이 쓰기 좋도록 꾸민 인터넷은 얼마나 있을까요.


  그러나, 신문이나 잡지나 책이 ‘점글로도 찍어 준다’ 하더라도 장애인 권리와 삶을 헤아린다 할 수 없어요. 점글로 찍기는 찍더라도 ‘신문이나 잡지나 책에 담는 이야기’가 장애인으로 지내는 사람들 꿈과 사랑을 따사로이 어루만지지 않는다면 덧없어요.


  그렇잖아요. 비장애인이 읽는 신문이나 잡지나 책인데, 이런 신문이나 잡지나 책에 ‘도시사람 아닌 시골사람’ 이야기가 얼마나 실리나요. 도시사람 아닌 시골사람이 읽을 만한 이야기를 얼마나 다루나요. 도시 노동자 말고 시골 흙일꾼이 즐거이 읽으며 새길 만한 이야기는 얼마나 짚는가요.

 


.. “미후네, 넌 손가락으로 글자 읽을 수 있어?” ..  (39쪽)


  아이들과 살아가는 전남 고흥 시골마을에서 군내버스를 탈 때면 그리 바쁘지 않습니다. 군내버스 모는 일꾼은 우리 식구가 모두 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다립니다. 시골버스는 자리가 넉넉해, 장날이 아니라면 으레 빈자리 많습니다.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를 다녀올 때 보면, 우리 식구가 탈 때뿐 아니라, 이웃마을 할머니 할아버지 탈 때에도 버스 일꾼은 오래도록 버스를 멈추어 기다립니다. 버스에 타려고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오시든 헐레벌떡 달려오시든 가만히 기다립니다. 어느 할머니가 헐레벌떡 달려오실라치면, ‘어차피 기다리는데 뭘 그리 서두르시느냐’고 얘기하곤 합니다.

  아이들과 어쩌다 도시로 마실을 나가면, 버스를 타든 전철을 타든 무척 애먹습니다. 도시에서는 우리 식구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도시는 어디나 다 바쁩니다. 차를 바삐 몰고 거칠게 몹니다. 도시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여느 버스 일꾼이든 택시 일꾼이든 모두 어슷비슷합니다. 어쩔 수 없겠지만, 도시에서 ‘돈을 벌거나 사회활동 한다는 사람은 으레 비장애인 어른’이거든요.


  시골마을은 일흔이나 여든 넘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많습니다. 그래서 시골버스 일꾼은 아이들 데리고 다니는 어버이가 버스에 타든, 초등학생이나 고등학생이 버스에 타든, 아주 익숙하게 누구라도 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다리고 나서 시동을 다시 겁니다.

 


.. “히로시? 다테노 히로시 말이지? 가까이 오면 고양이 냄새가 나니까 금방 알 수 있어.” 히로시 집에서는 고양이를 다섯 마리나 키우고 있다. “나는?”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물었다. 오줌 냄새라고는 제발 하지 말아 줘∼. “책 냄새가 나. 그리고 아기 냄새도.” 지난해에 우리 집에 여동생이 태어났거든! … “곧 여름이 오려나 봐!” 덴코짱이 이렇게 말했다. “바람한테서 여름 냄새가 나?” “그럼! 바람도 나무도 흙도. 그리고 파도 소리에서도 나는걸.” ..  (46, 81쪽)


  장애인이라는 이름표가 붙는 아이들과 비장애인이라서 이름표가 안 붙는 아이들은 한 학교 한 교실에서 배울 수 있어야 한다고 느껴요. 아이들한테는 숫자로 매기는 시험성적이 대수롭지 않거든요. 아이들은 학교에서 삶을 배우고 사랑을 물려받아야 하거든요. 아이들을 시험점수 기계로 만들자면, 아직까지 안 바뀌는 제도권학교 틀을 그대로 이어야겠지요. 아이들을 대학벌레로 만들거나 대기업벌레로 만들자면, 오직 비장애인 아이들만 한데 몰아놓고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으로 새벽부터 밤까지 때려잡으며 시험공부만 달달 시켜야겠지요.


  아이들이 사랑스러운 넋을 맑으며 슬기롭게 키우도록 북돋우는 배움터라 한다면, 아주 마땅하고 홀가분하게 모든 아이들이 두루 다닐 수 있어야 해요. 어느 아이라 하더라도 배움삯 때문에 골치를 앓으면 안 돼요. 모든 학교는 나라돈으로 대야 해요.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 모두 나라돈으로 대야 해요. 장학금은 따로 없어도 돼요. 나라에서는 군대를 없애야 하고, 부질없는 토목건설을 그쳐야 해요. 나라돈은 써야 할 곳에 아름답게 써야 해요. 아이와 어른 모두 스스로 가장 사랑하는 길을 걷도록 도와야 해요.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 놓은 울타리를 걷어야 해요.


  시골 군내버스 일꾼들이 늘 할머니 할아버지 태우며 마주하면서 ‘오래 기다리고 되도록 거칠게 안 몰기’를 몸으로 익힐 수 있듯, 장애인이건 비장애인이건 학교와 일터와 삶터 어느 곳에서나 서로 살가이 만나고 얼크러질 수 있어야 비로소 이 나라 한국은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으리라 믿어요.

 


.. 촛불이 켜져 있든 꺼져 있든 덴코짱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다. 늘 어두운 세계에 살고 있으니까 … “눈이 보이는 사람은 어둠이 무섭겠지. 근데 내 앞에 있는 건……, 뭐랄까? 어둡지도 밝지도 않아. 그냥 내가 있는 세계일 뿐이야. 그리고 여러 가지 소리가 들리지.” ..  (109∼110쪽)


  노다 미치코 님이 쓴 푸른문학 《덴코짱》(양철북,2011)을 읽습니다. 어린이문학이라 해도 되고 푸른문학이라 해도 됩니다. 그냥 문학이라 해도 좋습니다. 그냥 이야기책이라 해도 좋아요. 아무튼 《덴코짱》은 일본사람 노다 미치코 님이 지난 2009년에 쓴 이야기요, 2009년은 ‘알파벳 점글’을 슬기롭게 빚은 루이 브라유 님이 태어난 지 이백 돌이 되는 해였다고 해요.


.. “내 별명은 덴코짱이라고 해. 점자로 된 책만 읽는다고 친구들이 지어 준 거야.” ..  (22쪽)


  한국땅에서도 ‘점글아이’가 차츰차츰 늘어날 수 있기를 빌어요. 한국땅에서도 ‘손말아이’가 하나둘 늘어날 수 있기를 꿈꾸어요. 아이들부터 점글아이와 손말아이로 거듭나고, 어른들 또한 아이들 사랑을 받으며 점글어른과 손말어른으로 새로 태어날 수 있으면 기쁘겠어요. 따로 점자도서관을 많이 세워도 아름답지만, 이 나라 모든 여느 도서관마다 점글책을 ‘여느 글책’하고 똑같이 알차게 갖출 수 있으면 아주 어여쁘리라 생각해요. (4345.6.9.흙.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보와 저항의 세계사 -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김삼웅 지음 / 철수와영희 / 201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구별 삶자국을 톺아본다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49] 김삼웅, 《진보와 저항의 세계사》

 


- 책이름 : 진보와 저항의 세계사
- 글 : 김삼웅
- 펴낸곳 : 철수와영희 (2012.4.25.)
- 책값 : 13800원

 


  나는 학교를 다니면서 배워야 하던 한국역사나 세계역사가 참 따분했습니다. 교과서에 적히고 시험문제로 풀어야 하던 한국역사나 세계역사 가운데 ‘역사’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이야기는 한 가지조차 없었다고 느끼기에 따분했습니다.


  중학교에서도 고등학교에서도, 또 두 아이 아버지로 살아가는 요즈막 시골집에서도, 역사 교과서나 역사책은 ‘사람들 참삶 이야기’를 오롯이 들려주지 않는다고 느껴요. 교과서이든 여느 책이든 온통 ‘임금님 이야기’나 ‘권력자 이야기’나 ‘땅따먹는 전쟁 이야기’나 ‘서양 신 이야기’에 그칠 뿐이라고 느껴요.


  내 어머니가 살아온 이야기를 교과서에서도 책에서도 찾아 읽지 못합니다. 내 아버지가 꿈꾸던 이야기를 교과서에서든 책에서든 찾아 읽지 못합니다. 이러하니, 나로서는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뿐 아니라, 오늘날 숱한 역사책이 몹시 따분합니다.


.. 이것은 맹자의 폭군방벌 사상의 핵심이다. 인의와 왕도를 저버리고 백성을 학대하는 패도를 행할 때는 천자나 군주라도 서슴지 않고 쫓아내거나 교체해야 한다는 혁명 사상이었다. 조선왕조는 유교를 국교로 삼아 500년 동안 사직을 유지했다. 그러나 유학의 양대 산맥이라 할 공자는 숭배하면서 맹자는 배척했다. 그의 혁명 사상을 배척한 것이다 … 소크라테스는 이에 더해서 “아테네 시민 여러분, 죽음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훨씬 어려운 것은 악을 피하는 것인데, 까닭은 악이 죽음보다 빠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나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 자리를 나감으로써 진리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라고 경고했다 ..  (17∼18, 35쪽)


  중학교 적이나 고등학교 때나, 역사 수업을 할 때면 ‘한문으로 적힌 옛책에 바탕을 두어 캐낸 이야기’라는 말을 듣습니다. 책에 적혀야 비로소 역사가 되어 오늘날 우리들이 배울 수 있다고들 말합니다. 역사 수업을 하는 교사한테 곧잘 여쭙곤 했습니다. ‘책에 안 적힌 역사는 배울 수 없나요?’ 하고.


  교과서에 적힌 역사는 오직 시험문제라고만 느꼈습니다. 교과서에 적힌 역사는 권력자가 백성을 짓밟으면서 비틀거나 꾸며낸 이야기 아닌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학교에서든 교과서에서든 학교 바깥 역사책에서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적힌 이야기는 ‘그무렵 권력자가 바라던 입맛’에 맞추어 적바림했다고 말합니다. 이들 책이름부터 ‘네 나라’ 아닌 ‘세 나라’라고만 적는걸요.


  제도권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칠 때에는 으레 정치·경제·사회·문화로 갈래를 나누어 이무렵에는 어떠하고 저무렵에는 저떠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먼먼 옛날이라던 옛조선이든 고구려이든, 좀 가까운 옛날이라 하는 고려이든 조선이든,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문화도 온통 임금님 둘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만 다룹니다. ‘정치권력 = 역사’인 듯 가르쳐요. 게다가, 임금님 둘레 이야기를 다루더라도, 정작 임금님이 어떤 밥을 먹고 어떤 반찬을 먹었으며 어떤 옷을 입고 궁궐 뒷간은 어떠하며 궁궐에서 겨울에 불은 어떻게 땠는가 하는 이야기는 들려주지 못합니다. 흔한 말로, 예전에는 ‘보일러도 없’는데, 추운 겨울에는 임금님이랑 신하가 어디에서 모여 어떻게 정치 이야기를 했을까 궁금하지만, 딱히 알려주는 교사도 책도 없습니다. 아흔아홉 칸짜리 권력자 집안은 겨울날 불을 때느라 나무를 얼마나 하고, 나뭇짐은 누가 해서 어떻게 때는가를 밝히거나 알려주지 못합니다.


.. 고든 차일드를 비롯한 일군의 인류학자들은 농업을 발명한 것이 여성들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정착 생활을 하면서 곡물 채집이 중요해짐에 따라 여성들은 곡물의 발아와 번식주기에 주목한다. 더불어 여성들은 새로운 기술의 개발을 주도했다. 곡식을 찧기 위한 돌절구 제작, 곡물을 보존하기 위한 용기의 제작 등이 그것이다 … 아나키즘이 아시아에 소개되면서 일본 관학자가 ‘무정부주의’라고 번역하여 마치 정부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처럼 곡해되었다. 하지만 아나키즘의 본질은 강제가 없는 자유사회 ‘무강권주의’로 번역되어야 한다. 아나키즘의 본질은 자연론적 사회관, 개인의 자주성, 권위에 대한 저항이다 ..  (115, 229쪽)


  한겨레 살림집에는 ‘방’이 없습니다. 방(房)은 한국말이 아닙니다. 중국말입니다. 한겨레 살림집에는 방이 없으니 ‘방’이라고 가리킬 낱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중국 사회·문화에서 들어왔기에 방입니다. 안방도 사랑방도 건넌방도 한겨레 문화는 아닙니다. 나중에 천천히 한겨레 나름대로 삭혀 받아들인 삶일 뿐입니다.


  이 대목, 한겨레 살림집에는 ‘방’이 없다는 이야기는 중·고등학교 역사 수업 때에 배운 적 있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방’ 없는 한겨레 살림집에 무엇이 있는가를 뽀족히 다루거나 알뜰히 짚어 주지는 않았어요. 왜냐하면, 이러한 대목은 입시문제에 안 나오니까요.


  오늘날은 이제 서양 문명과 온갖 나라밖 문명이 어지럽게 뒤섞여 한겨레 문화나 삶이라 할 만한 모습을 딱히 그릴 수 없이 되었는데, 그리 멀지 않던 지난날까지, 그러니까 새마을운동이랍시고 온 나라를 들쑤시기 앞서까지, 한겨레 여느 살림집은 모두 ‘칸(간)’이었습니다. 한겨레 여느 살림집은 칸으로 나누었어요. 이른바, ‘뒷간’이나 ‘곳간’이나 ‘정짓간’처럼 ‘간(칸)’을 나누었습니다. ‘초가삼간’이라는 이름처럼, 한겨레 여느 흙일꾼 살림집은 ‘풀로 지붕을 잇고(초가)’, ‘세 칸으로 나눈(삼간)’ 집이에요. ㄱ꼴이든 ㄴ꼴이든 ㄷ꼴이든, 한겨레 여느 흙일꾼 살림집은 칸으로 나누어 삶을 일구었어요.


  주춧돌을 깔고 기둥이 될 나무를 세웁니다. 기둥나무에 홈을 파서 도리를 끼웁니다. 서까래를 얹고 지붕을 잇습니다. 흙을 일구던 이들은 기와를 바랄 수 없고, 바라지 않습니다. 흙을 일구던 이들은 나무와 흙으로 집을 짓습니다. 나무로 기둥을 삼고 뼈대를 이루며, 나무로 불을 때고 밥을 짓습니다. 나무로 베틀을 만들고, 나무와 흙에서 옷감이 될 실을 얻습니다. 흙일꾼 삶에 환경운동도 사회운동도 정치운동도 노동운동도 평화운동도 민주운동도 없습니다. 그예 흙과 한몸이 되고 나무와 한마음으로 얼크러지며 꾸리던 삶입니다.


  나는 중·고등학교 역사 수업을 받는 동안 언제나 꿈을 꾸었습니다. 교과서 지식이야 시험을 치르기 앞서 외우면 그만이요, 내 마음으로는 교과서에 안 실린 ‘지난날 내 옛 어버이’들 삶이 어떤 그림이었는가를 천천히 꿈으로 꾸었습니다. 어떻게 밥을 얻고 어떻게 아이들을 돌보며 어떻게 오순도순 살림을 이끌었을까 하고 꿈을 꾸었습니다.


.. 《백과전서》는 지배계급의 온갖 탄압에도 불구하고 1780년 35권의 초판이 완성되고, 1832년 총 166권으로 완간되었다. 프랑스혁명의 불씨이자, 혁명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 짐승을 잡거나 버들고리를 만들어 파는 일에 종사하는 백정들은 돈을 벌어서 기와집에 살아도 안 되고, 비단옷을 입어도, 갓을 쓰고 예복을 갖추어도 안 되며, 평민들 앞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셔도 안 될뿐더러, 일반 음식점의 출입조차도 거부되었다. 양반은 물론 평민들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강상죄로 다스림을 받게 된다 ..  (135, 280쪽)


  대입시험을 앞두던 고등학교 3학년 때, 나로서는 대입시험보다 ‘대학교에 들어가는 시험에 붙더’라도 이윽고 나한테 날아올 ‘군 입대 영장’이 훨씬 근심스럽습니다. 내 아버지는 국회의원도 시장도 아니요, 내 어머니는 부잣집 딸도 아니며, 이렇다 할 내세울 무엇이 하나조차 없으니, 군대에 총알받이 땅개로 끌려가야 합니다. 한창 어떤 학문을 파고들 만하다 싶을 때에 세 해씩 총칼을 붙잡으며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가장 싱그럽고 가장 푸르며 가장 아름다울 내 젊음을 군대와 전쟁과 바보짓으로 망가뜨려야 합니다. 이리하여, 고등학교 3학년 역사 수업 때에는 ‘조선과 고려와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와 가야와 옛조선 무렵 군역’이 얼마나 무서웠고 힘들었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식구들 힘으로 흙을 일구어야 하는 마당에, 성곽을 쌓느니 이웃나라로 쳐들어가느니 왜구를 막느니 무어니 하며, 젊은 사내는 죄 군대 병졸과 부역자로 붙잡으니까, 지난날 이 나라 여느 살림집 어머니들과 아이들은 얼마나 고된 나날이었을까 돌아봅니다. 정치란 무엇이고 경제란 무엇이며 사회나 문화란 무엇이었을까 되뇝니다.


  예나 이제나 정부는 세금을 그토록 많이 거두면서 어떤 문화나 복지나 교육을 펼치는지 아리송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느 흙일꾼 사내들을 온통 총알받이나 짐받이로 부리는 나라는 얼마나 아름답겠느냐 생각합니다. 작고 힘없는 내가 아름답게 살아가고 사랑스레 꿈꾸자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까 생각합니다. 나처럼 군대에 끌려갈 다른 이웃과 동무를 떠올립니다. 나보다 먼저 군대에 끌려간 숱한 사람들을 되새깁니다. ‘민란’이나 ‘봉기’라는 이름으로 여느 흙일꾼이 똘똘 뭉쳐 낫과 쟁기를 들고 주먹을 흔들었다던 옛이야기를 곱씹습니다. 그래, 권력자가 바라보기에 ‘민란’이나 ‘봉기’였을 텐데, 권력자한테 짓눌리거나 짓밟히던 사람들 삶자리에서 바라보자면 ‘저항하며(맞서 싸우며)’ 살아남겠다는 몸부림이었겠지요.


.. 하지만 민주공화제는 이승만의 12년 장기 독재에 의해 처참하게 유린되고 형태만 남게 되었다. 국민은 도탄에 빠지고 소수의 권력층이 이승만 정권과 결탁하여 귀속 재산을 차지하거나 원조 물자를 착복하면서 특권을 누렸다. 헌법은 이승만의 권력 유지를 위한 장식품으로 전락하고 선거는 관권·금권 부정으로 유린되었다 … 전두환은 박정희 정권보다 더 잔혹한 살육과 탄압으로 민주주의를 짓밟았다. 그러나 국민은 굴복하지 않았다 … 왕조사와 민중사는 달랐다. 이 땅의 민중들은 지배층의 사대와 수탈에도 불구하고 의병·독립군·의열단·광복군·통일국가 수립운동·민주화운동·노동운동·평화운동으로 이어지는 줄기찬 항쟁을 통해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며 경제건설과 민주화를 추진해 왔다 ..  (283, 285, 289쪽)


  김삼웅 님이 쓴 인문책 《진보와 저항의 세계사》(철수와영희,2012)를 읽습니다. 서양, 이 가운데 서유럽에서 이루어졌다는 ‘진보와 저항’ 옛이야기를 갈무리하는 책입니다. 지구별 삶은 권력자가 내리누르려 할 때마다 맞서 싸운 백성이 있었고, 권력자가 고리타분한 정치를 휘두르려 할 적마다 새롭게 거듭나려 힘쓴 백성이 있었다 하는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그렇겠지,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곰곰이 생각합니다. 틀림없이 서양에서든 동양에서든 정치권력자 고리타분한 정치권력 앞에서 떳떳이 고개를 들며 힘차게 맞서 싸운 발자국이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고개들기’와 ‘맞서 싸우기’와 ‘새로 거듭나기’가 얼마나 문화나 역사라 할 만한가 잘 모르겠습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세계사 읽기’를 ‘진보 역사 읽기’나 ‘저항 역사 읽기’로 되새길 수 있을 텐데, 《진보와 저항의 세계사》에 실린 이야기 또한 ‘어떤 권력자나 지식인이 책에 적바림한 이야기’를 간추려 적은 또다른 ‘역사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곧, 이 책에서도 ‘먼먼 옛날부터 슬기롭고 착하며 참답게 삶을 꾸리던 여느 사람들 수수하면서 아름다운 이야기’는 못 다루는구나 싶어요. 왜냐하면, 서유럽에서든 북유럽에서든 남유럽에서든 러시아에서든 아시아에서든 북중미에서든 한국에서든, 흙을 벗삼아 흙하고 어깨동무하던 사람들 삶과 발자국과 이야기는 ‘책에 안 적혔’으니까요.


  책을 덮습니다. 밤하늘 둥근 보름달을 올려다보며 생각을 기울입니다. 지구별 수수한 사람들 삶자국은 어떤 모습 어떤 그림 어떤 이야기였을까 하고 내 생각을 가다듬습니다. 내 삶을 톺아보며 내 어버이 삶을 톺아봅니다. 내 어버이를 낳은 어버이를 낳은 어버이를 낳은 어버이를 낳은 …… 먼먼 옛사람들 삶자국을 하나하나 톺아봅니다. 그 먼 옛날에도 제비는 찾아들었겠지요. 올해 새끼를 깐 제비가 이듬해에 다시 찾아온다 했으니, 먼먼 옛날부터 ‘같은 제비’가 ‘같은 집’으로 날아들었겠지요. 제비들은 제 어미한테서 어떤 이야기를 물려받았을까요. 사람들이 날마다 나무를 하고 땔감을 땠을 적에, 사람들 살림집 둘레에서 자라던 우람한 나무는 사람들 보금자리를 어떤 눈길로 바라보았을까요.


  나는 ‘역사책을 쓴 옛날 권력자나 지식인’ 눈썰미가 아니라 ‘제비 한 마리’ 눈길과 ‘나무 한 그루’ 마음길로 바라보고 싶습니다. 오랜 나날 한결같이 흐르던 ‘냇물 한 줄기’ 손길과 오래도록 꾸준하게 부는 ‘바람 한 가닥’ 생각길로 마주하고 싶습니다. 내 삶은, 지구별 사람들 삶은, 내 아이들 삶은, 내 어버이들 삶은, 어떤 그림이요 어떤 사랑일까요. (4345.6.6.물.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리운 순난앵 열린어린이 창작동화 13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홍재웅 옮김, 일론 비클란드 그림 / 열린어린이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아이들 사랑하는 이야기를
 [어린이책 읽는 삶 21]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그리운 순난앵》(열린어린이,2010)

 


- 책이름 : 그리운 순난앵
- 글 :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 그림 : 일론 비틀란드
- 옮긴이 : 홍재웅
- 펴낸곳 : 열린어린이 (2010.3.30.)
- 책값 : 9500원

 


  새벽 여섯 시에 아이들이 잠에서 깨어 부시럭거리다가 일어나 슬금슬금 돌아다닙니다. 좀 늦잠을 자면 안 되겠니 싶지만, 이때에 잠에서 깨어 부시럭거리다 일어나겠다 하는데 어찌할 길 없습니다. 어제 일찍 잠들었나 돌아보지만, 썩 일찍 잠들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아이들입니다.


  어버이인 내가 늦게 자면서 일찍 일어난다면, 아이들 또한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삶에 맞추어 하루하루 맞이하리라 느낍니다. 어버이인 나부터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난다면, 아이들 또한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 버릇할는지 모릅니다.


  그러고 보면, 시골 아이는 늦게 자도 일찍 일어납니다. 시골은 밤이 일찍 찾아들고 새벽 또한 일찍 찾아듭니다. 먼동이 트는 새벽 네 시 무렵이면 시골 어른들 누구나 잠을 털고 일어납니다. 어둠이 깔리는 저녁 여덟 시쯤 지나면 시골 어른들 누구나 잠자리에 듭니다. 어른도 아이도 자연이 베푸는 선물을 마음껏 받아들이고, 아이도 어른도 자연이 들려주는 소리를 가만히 귀기울여 듣습니다.


.. 순난앵 마을에 살던 마티아스와 안나는 뮈라 마을의 한 농가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아주 영리해 보인다거나 착해 보이는 눈을 가지고 있어서, 혹은 성실하게 일할 것 같은 작은 손을 가지고 있어서 데려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아이들이 힘겨워하자 이를 안타깝게 여겨 데려온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마티아스와 안나를 데려온 농부는 아이들에게 오로지 일을 시킬 생각뿐이었습니다 … 그들(마티아스와 안나)도 짐작했던 것처럼 가난뱅이 잿빛티를 벗어 버리는 일은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눈이 숲길을 덮어 버려도, 추위에 발톱이 갈라져서 아파도, 샌드위치와 팬케이크로 도시락을 싸 올 수 없을 만큼 가난해도, 어린 남매는 거르지 않고 매일매일 성실하게 학교에 나갔습니다 ..  (7, 16쪽)


  어제 하루, 자전거수레에 두 아이 태우고 먼 나들이를 해 보았습니다. 으레 면내까지만 천천히 논둑길을 돌고 돌아 나들이를 했는데, 다음에 옆지기랑 넷이 자전거를 타면 어디로 돌 때에 좋을까 하고 헤아리다가 그만 한 시간 남짓 고흥 시골마을 멧길과 바닷길까지 돌았습니다.


  우리 시골마을에도 자동차 드나들 일이 뜸하지만, 이웃 시골마을에도 자동차 드나들 일이 뜸합니다. 자전거수레에 두 아이를 태우고 달리자니, 이곳도 호젓하고 저곳도 한갓져요. 면 소재지 둘레만 자동차 여러 대 지나갈 뿐입니다.


  자동차도 사람도 없는 조용한 멧길을 자전거로 오르다가 살짝 멈춥니다. 숨을 돌리고 싶다기보다, 찻길로 길게 뻗는 칡덩굴 때문입니다. 새로 뻗는 칡덩굴을 끊거나 잡아뽑으면 집에서 만나게 풀물을 짜서 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천천히 오르막을 오릅니다. 오르막을 지난 다음에는 싱 하고 내리막을 달립니다. 바다가 펼쳐지면 내리막이더라도 자전거를 멈춥니다. 넓은 바다를 바라봅니다. 넓은 바다 품이 있어, 사람도 다른 목숨도 좋은 숨결 누릴 수 있구나 싶습니다.


.. “오빠, 내 발이 그러는데, 보드라운 모래랑 푹신푹신한 잔디가 너무 좋대.” … “아니야, 같이 가면 좋아하실 거야. 어머니는 모든 아이들을 좋아하시거든.” … 비록 말린의 집이 부유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곳은 아름다웠고 재미있는 것이 많았습니다. 상상해 보세요. 봄이 오면 창밖에 서 있는 사과나무가 꽃을 피우는 모습을, 그리고 은방울꽃들이 가득 피어난 숲을 말입니다 … 말린은 밤도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뭇잎과 꽃, 잔디와 나무는 살아숨쉬는 봄의 영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손톱만큼 작은 식물과 지푸라기도 영혼과 생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26∼27, 39, 57쪽)


  나는 좋은 목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좋은 목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칡덩굴도, 봄풀도 여름풀도, 들새도 멧새도, 개구리도 왜가리도, 모두 좋은 목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밤에 두 아이 토닥이며 재우는 동안 생각해 봅니다. 왜가리가 개구리를 잡아 넙죽 먹을 때에는 날것 그대로 삼킬 텐데, 그 작은 목구멍으로 토실토실 개구리가 꾸물꾸물거리며 들어가다가 천천히 삭겠지요. 개구리는 왜가리가 되고, 왜가리는 개구리가 됩니다.


  시골 흙일꾼이 거둔 벼를 깎은 쌀알을 먹습니다. 쌀알은 내 몸으로 들어와 내가 되고, 나는 쌀알을 먹으며 쌀알이 됩니다.


  비트잎을 먹으며 비트잎이 됩니다. 가지를 먹으며 가지가 됩니다. 달걀을 먹으며 달걀이 되고, 과자를 먹으며 과자가 됩니다. 먹는 그대로 내 몸으로 이루어지고, 내 넋이 이루어지며, 내 사랑이 이루어집니다.


.. “문이 왜 닫히지 않은 걸까?” 안나가 물었습니다. “이 문은 한 번 닫히면 다시는 열리지 않는다고 했잖아. 기억 안 나?” 마티아스가 말했습니다. “응, 이제 기억나. 다시는, 영원히 열리지 않는다는 걸…….” 안나가 말했습니다. 마티아스와 안나는 서로를 쳐다보았습니다. 오랫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린 남매는 서로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문을 아주 조용히, 닫았습니다 … 말린은 자신의 손을 조용히 나무줄기 위에 얹었습니다. 바로 그때, 생명도 없이 혼자서 연주하는 것이 라임오렌지나무에게 얼마나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말린은 죽어 있는 나무에게 자신의 영혼을 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 그렇지만 라임오렌지나무 안에 내가 살아 있을 거야 ..  (34, 58쪽)


  아이들 사랑하는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어느 어버이라 하더라도 아이들만 사랑하지 못합니다. 어버이인 내 삶을 사랑할 때에 아이들 삶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한테만 좋다 싶은 밥을 먹이지 못합니다. 어버이 스스로 좋은 밥을 먹을 때에 아이들 또한 좋은 밥을 먹습니다. 어버이 스스로 좋은 옷을 입어야 아이들 또한 좋은 옷을 입어요.


  좋은 밥이란 비싼 밥이 아닙니다. 좋은 옷이란 비싼 옷이 아닙니다. 좋은 사랑을 들여 차린 밥이 좋은 밥입니다. 좋은 꿈을 실어 좋은 손길로 보듬는 옷가지가 좋은 옷입니다.


  곧,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은 보금자리를 이루어야 합니다. 사람이 이룰 보금자리는 ‘회사와 가깝다’거나 ‘나중에 부동산이 될 만하다’거나 ‘편의시설이 가까이 있다’는 대목을 살피며 얻어서는 안 됩니다. 좋은 삶을 누릴 만한 좋은 보금자리를 얻어야 합니다. 내 주머니에 있는 돈에 따라 마련하는 보금자리가 아니라, 내 사랑을 살찌우거나 북돋우거나 보살필 수 있는 보금자리로 마련해야 합니다.


  즐겁게 누릴 삶이지, 돈을 벌 삶은 아니에요. 기쁘게 어깨동무할 이웃이지, 어떤 권력 관계나 잇속으로 사귀는 옆사람이 아니에요.


.. 말린이 부엌에서 부인이 건넨 미음을 먹고 있을 때, 방문이 반쯤 열려 있던 침실에서 어떤 말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말소리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듣고 있노라니 온몸이 떨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가 어린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는 소리였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말소리는 방문을 지나 말린의 귀에 와 닿았습니다 … 그는 손이 뒤로 묶였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꼿꼿했습니다. 그의 눈빛은 오히려 평온해 보였고, 그의 얼굴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  (45, 127쪽)


  아이 둘을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오르막을 올라가기란 참 벅찹니다. 끙끙대는 아버지는 수레에 탄 아이들한테 말합니다. 오르막 올라가기 힘드니까 뒤에서 잘 올라가라 북돋워 주렴. 아버지 말을 들은 첫째 아이는 수레에 앉은 채 신나게 노래합니다. 노래하고 또 노래합니다. 나는 아이들 노래를 받아먹으며 기운을 냅니다. 시골마을 푸른 숲과 파란 바다를 누리면서 자전거를 달립니다.


  누렇게 잘 익은 밀밭 앞 전깃줄에 쉰 마리 즈음 줄지어 앉은 참새를 바라봅니다. 밀밭 건너편에 잘 익은 멧딸을 바라봅니다. 멧딸 몇 알 따서 아이들한테 건넵니다. 나는 작은 알 하나만 먹습니다.


  논 옆을 달리면서 논마다 우렁차게 노래하는 개구리들 이야기를 듣습니다. 개구리들은 무논에서 서로서로 어떻게 얼크러질까요. 무논에서 살아가는 개구리는 얼마나 많을까요.


  우리 집에도 우리 마을에도, 또 이웃 마을에도 이웃이웃 마을에도 제비들이 날아다닙니다. 우리 자전거 앞으로도 날고, 옆으로도 날며, 위로도 납니다. 내가 이름을 알아보는 멧새가 우리 곁을 스칩니다. 내가 이름을 못 알아보는 들새가 우리 둘레에서 지저귑니다. 나는 모든 소리들을 좋게 여기며 맞아들입니다. 바람과 햇살과 흙과 풀과 나무와 벌레와 새가 나란히 들려주는 노래를 곱게 받아들입니다.


.. 그렇지만 남을 아프게 하는 사람은 평생 동안 마음을 편하게 가질 수 없습니다 … 공작의 검은 영혼 속에서 피어난 두려움이 어두운 대지에 뿌린 씨처럼 순식간에 그의 마음을 뒤덮어 버렸습니다. 그저 가난한 악사 하나가 이곳에 왔을 뿐인데 말입니다 … 하지만 망누스 왕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어둠 속에서 왕의 곁에 있었습니다. 그는 볼 수는 없었지만, 그 친구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왕의 생명을 보호하려는 그 친구의 팔뚝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  (97, 101, 119쪽)


  사람은 밥만 먹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사람은 햇볕도 먹고, 바람도 먹습니다. 사람은 물만 마시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물이 흐르는 길도 함께 먹습니다. 물에 서린 기운도 나란히 먹습니다.


  마늘을 먹을 때에는 마늘이 뿌리내린 흙이랑 마늘이 받아들인 햇살이랑 마늘이 늘 쐬던 바람을 함께 먹는 셈입니다. 벼 한 톨 또한 벼 한 톨을 사랑한 흙이랑 햇살이랑 바람이랑 빗물이랑 골고루 먹는 셈이에요.


  목숨이란 아름답습니다. 나는 내 삶대로 아름답습니다. 아이들은 아이들 삶대로 아름답습니다. 참 예쁘구나 하고 방긋 웃으며 바라본 멧딸이니까, 아이들은 빨간 멧딸을 예쁘게 따서 예쁘게 먹고 예쁜 시골 아이로 자랍니다. 나는 예쁜 아이들 예쁜 웃음짓을 바라보며 늘 같이 지내니까, 나도 예쁜 시골 어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흔들릴 때에 내가 손을 내밀어 붙잡습니다. 내가 흔들릴 때에 아이들이 손을 내밀어 붙잡습니다. 서로 믿고 서로 아낍니다. 서로 좋아하고 서로 사랑합니다. 서로 한식구 되기에 저녁에 잠자리에 들 무렵 목청을 가다듬어 자장노래를 부릅니다.


.. 가난한 소작농 오두막집에 다시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들은 모두 닐스의 침대 주위로 몰려들었습니다. 닐스가 세상과 이별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가족들은 모두 기쁨에 겨워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어머니는 블라인드를 위로 잡아당겨 침실로 따스한 아침 햇살이 들어오게 했습니다. 동생들은 숲에서 딴 산딸기를 닐스에게 주었습니다. 아직 설익어서 산딸기가 줄기에 조그맣게 달려 있었지만, 올해 나온 첫 산딸기였기에 동생들은 기쁜 마음으로 닐스에게 선물했습니다. 동생들은 닐스가 깨어나서 산딸기를 먹을 수 있게 된 것이 너무나 기뻤습니다 ..  (135쪽)


  우리 집 처마 밑 둥지에서 드디어 새끼 제비가 고개를 내밉니다. 새끼 제비 울음소리를 때때로 듣습니다. 이제 이 새끼 제비는 날갯짓을 익히겠지요. 제 어미 제비한테서 좋은 날갯짓을 물려받겠지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 이야기책 《그리운 순난앵》(열린어린이,2010)을 읽습니다. 린드그렌 님이 당신한테 사랑스러운 아이들한테 들려주려고 남긴 이야기책입니다. 당신한테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보살피는 여느 어버이한테 함께 들려주려고 남긴 이야기책입니다.


  아이들은 《그리운 순난앵》을 읽으며 따순 사랑을 받아먹습니다. 아이들 어버이 또한 《그리운 순난앵》을 읽으며 따순 사랑을 나누어 먹습니다. 서로서로 새로운 사랑을 빚습니다. 다 같이 맑은 사랑을 키웁니다. 기쁨을 찾는 넋이 서립니다. 즐거움을 꿈꾸는 얼이 담깁니다. 예쁜 웃음과 아픈 눈물이 어우러지며 삶을 이룹니다. 스웨덴 할머니 순난앵마을은 아름답고, 우리 집 두 아이 동백마을도 아름답습니다. (4345.6.3.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원예반 소년들 카르페디엠 29
우오즈미 나오코 지음, 오근영 옮김 / 양철북 / 201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푸른 잎과 환한 꽃 누리는 아이들
 [푸른책과 함께 살기 94] 우오즈미 나오코, 《원예반 소년들》(양철북,2012)

 


- 책이름 : 원예반 소년들
- 글 : 우오즈미 나오코
- 옮긴이 : 오근영
- 펴낸곳 : 양철북 (2012.3.26.)
- 책값 : 9000원

 


  이웃 할머니가 마늘밭 가장자리에서 풀을 뽑습니다. 일손을 거들까 하지만 당신이 혼자 하시겠다며 손사래를 칩니다. ‘지심매기’만 살짝 거듭니다. 할머니가 지심을 맬 때에 ‘부추’가 보이기에 “‘정구지’는 어떡할까요?” 하고 여쭈려다가, 전라남도에서는 달리 가리킬까 싶어 “‘여기’는 어떡할까요?“ 하고 여쭙니다. “응, 그건 놔 둬. ‘솔’이야 솔. 오늘 ‘아’들이 오는데 가져갈랑가 모르겠네.” 하고 말씀합니다.


  첫째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면내 우체국에 들렀다 돌아오는 길에 들딸기를 땁니다. 아이가 집에서 어머니하고 함께 먹으라고 아이 두 손에 가득 담길 만큼 땁니다. 마을 어귀 마늘밭에서 마을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한창 일하시는 모습을 보고는 자전거를 멈춥니다. 아이한테 할머니와 할아버지한테도 조금 나누어 주렴 하고 말합니다. 할머니는 “네가 이걸 나한테 주냐. ‘똘’이네, 똘. 아, 똘 참 맛나다.” 하고 말씀합니다.


.. 문득 ‘학교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전차를 타고 가면 40분 정도 걸린다. 자전거로 가면 두 시간은 걸리겠지만 따듯한 햇살이 등을 떠밀었다 … 흙을 정리할 때 옆을 지나가다가 “뭐 하는 거야?” 하며 아는 척을 했던 같은 반 친구들한테서도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오와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 화단 하나로 입구 느낌이 훨씬 좋아졌는데도 몰라보는 건가. 삭막한 녀석들 같으니라고.” 그러나 나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까지는 나도 그 삭막한 녀석들 중 하나였으니까 ..  (5, 91쪽)


  지난주에 둘째 아이 돌떡을 이웃집 모두 돌며 돌리다가, 돌울타리 타고 곱게 자라는 ‘마삭줄’꽃을 잔뜩 보았습니다. 어느 집은 대문 위쪽으로 마삭줄 울타리를 만들기까지 합니다.


  식구들 다 함께 마삭줄꽃을 바라볼 때에는 마삭줄이라는 이름을 몰랐습니다. 나중에 물어 물어 알아차립니다. 꽃이름은 모르지만 참 어여쁘구나 하고 생각하며 “이 바람개비처럼 생긴 하얀 꽃은 무어라 할까?” 하고 궁금했습니다. 이러다 문득 한 가지 떠오르는데, 꽃이든 풀이든 나무이든 꽃 모양만 놓고 무슨무슨 꽃이라 이름을 붙이는 일이 옳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대로 이름을 붙일 수 있겠다 싶습니다. 그래서, 아이한테 ‘마삭줄’이라는 이름을 가르치면서, ‘흰바람개비꽃’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나한테도 아이한테도, 마삭줄꽃은 그예 하얗게 생긴 작은 바람개비와 닮은 꽃이에요.


.. 옆에 있는 화분을 보니 잎 모양으로 봐서는 같은 종류인 것 같은데 줄기가 쓰러지고 잎은 시들어 축 늘어져 있다. 꼿꼿한 풀은 내가 앉은 바로 옆에 있는 화분뿐이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걸까. 여기만 비가 온 걸까. 그때, 문득 어제 종이컵에 남은 물을 끼얹고 갔던 일이 떠올랐다 … ‘생각해 보면 풀이 축 늘어져 있다가 싱싱하게 살아나는 모습이, 내가 이 학교에 들어온 지 열흘 만에 본 가장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거든.’ … 시미즈라는 머리 긴 아이가 말했다. “흙과 씨름하는 걸 보면서 참 멋지다는 말도 했어.” ..  (17, 27, 124쪽)


  네 식구 밭둑이나 논둑을 다니다가 ‘들딸’을 따서 먹다가 생각합니다. 우리는 멧자락이나 멧등성이 아닌 들판에서 따서 먹기에 ‘들딸’이라고 여기지만, 먼먼 옛날에는 논둑이나 밭둑이 논둑이나 밭둑 아닌 멧자락이었을 수 있습니다. 멧등성이부터 천천히 퍼져 밭둑까지 ‘딸’이 자란다 할 만합니다. 그래서 이 딸, 또는 ‘똘’은 ‘들딸(들똘)’이 아니라 ‘멧딸(멧똘)’이라 해야 바른 이름일 수 있어요.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으레 ‘멧딸’만 말하지 ‘들딸’은 말하지 않습니다. 멧딸 가운데에는 ‘나무딸’이 있습니다. 딸도 숱한 갈래여서, 모든 딸을 멧딸이나 들딸이나 나무딸이라고만 가리킬 수 없습니다. 우리 식구들 지난해 봄 충청북도 음성 멧자락에서 먹던 멧딸이랑 올해 봄 전라남도 고흥 시골자락에서 먹는 들딸이랑 꽃도 열매가 제법 달라요. 꽃빛도 꽃크기도 다릅니다. 꽃잎도 풀잎도 다릅니다. 이처럼 다른 딸을 그냥 멧딸이라느니 들딸이라고만 해도 될까 궁금합니다. 딱히 어떤 이름을 붙여야 좋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자그마한 빨간 열매를 톡 따서 입에 넣을 때 온몸으로 퍼지는 기운을 헤아립니다. 딸은 내 몸속에서 새로운 기운이 되어 내 숨결을 새삼스레 북돋운다고 생각합니다. 딸이 내가 되고, 내가 딸이 됩니다. 딸 목숨은 내 목숨이고, 내 목숨은 곧 딸 목숨입니다.


.. 먼저 오와다가 가져온 스토크 봉투를 열어 보니 아주 작은 씨앗이 나왔다. 씨앗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모래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갖고 온 페튜니아 봉투를 열어 보고는 더욱 놀랐다. 이건 모래도 아니다. 거의 가루에 가깝다 … “여기 있는 식물의 이름이 뭔지, 어떤 방식으로 키워야 할지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만약 정말 꽃으로 가득한 화원으로 만들고 싶다면 조사해 보는 게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 … “BB, 너희 집 꽃가게 하는 거 맞지?” 오와다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어제 원예 책을 한 권 읽었을 뿐입니다.” 쇼지는 정색을 하고 대답하고 나서 오와다를 보았다. “오와다 군은 읽지 않은 겁니까?” ..  (30∼31, 50∼51쪽)


  이제 우리 시골마을이든 면소재지 언저리이든 온통 찔레나무 하얀 꽃잎 잔치입니다. 아이들과 두 다리로 씩씩하게 거닐며 마실을 하든, 자전거를 몰며 천천히 돌아보는 마실을 하든, 어디에서나 하얀 꽃잔치입니다.


  때때로 찔레꽃 하얀 송이 따서 입에 넣으며 잘근잘근 씹습니다. 돌을 갓 지난 아이 입에도 찔레꽃잎 밀어넣습니다. 아이들 모두 입을 낼름 벌립니다. 우리 집 처마에 깃든 제비들이 깐 새끼와 같습니다. 입 참 잘 벌립니다.


  찔레꽃잎을 톡 따서 한 닢씩 넣을 때에 살펴보니, 꽃잎 모양새는 이른바 ‘하트’입니다. 찔레꽃잎은 나무에 달린 모습도 예쁘고 한 닢 똑 딸 때에도 예쁩니다. 한 닢에서도 냄새 그윽하고, 무리진 꽃잎에서도 냄새 고즈넉합니다. 찔레꽃 한창인 곁을 지나가면 온몸에 찔레내음이 감돕니다. 찔레내음이 내 내음이 되고, 내 내음은 찔레내음과 하나가 됩니다. 바야흐로 여름이 코앞인 느즈막한 끝봄자락, 조용조용 찔레잔치를 누립니다.


.. “아니, 오와다 군은 아니지만 그런 불량한 차림새는 다른 학생들에게 불쾌감과 불안감을 느끼게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버젓이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더러 상자를 쓰고 학교에 가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졸업할 때까지 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혼자 공부해서 고등학교에 들어왔습니다.” … “이름이랑 얼굴 때문에 놀림을 당했다고요! 이런 기분을 오와다 군은 모를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너를 놀리는 녀석이 없잖아!” ..  (71, 115쪽)


  우오즈미 나오코 님이 빚은 푸른문학 《원예반 소년들》(양철북,2012)을 읽습니다.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참 재미없겠다고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꼭 도시라서 재미없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만, 온통 ‘더 잘난 학교’에 ‘더 높은 시험성적’ 거두는 데에만 온마음 기울이도록 하는 제도권교육일 때에는, 학교 다니는 재미나 기쁨이나 즐거움이나 보람을 누리기 어렵습니다.


  동무를 밟고 올라서는 일이란 무슨 재미일까요. 동무랑 점수겨루기를 하는 일이란 무슨 기쁨일까요. 더 높은 학교, 또는 더 잘난 대학교에 붙는 일이란 무슨 보람일까요. 모두 똑같은 옷차림에 머리모양에 생각에 가방에 …… 틀에 맞추는 일이란 무슨 즐거움일까요.


  집과 학교 사이를 오가면서, 이 많은 아이들은 무엇을 바라볼까요. 집과 학교 사이를 오가면서, 이 많은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교사는 무엇을 바라보나요.


  아이들은 무슨 삶을 누리는 어른으로 자라야 아름다울까요. 어른들은 무슨 삶을 누리는 푸른 나날을 거쳤을까요.


  사람은 왜 태어나서 살아가는가 생각합니다. 사람은 왜 삶을 누리며 사랑을 꽃피우는가 생각합니다. 사람은 언제 사람다운가 생각합니다. 사람은 어떤 목숨이요, 사람은 어떤 무늬이며, 사람은 어떤 넋인가 생각합니다.


.. 아는 꽃 이름이 늘자 집 근처나 학교를 오가는 길에 갑자기 꽃이 많아졌다. 물론 눈에 띄니까 그런 느낌이 나는 것일 뿐이지, 전부터 늘 있던 꽃이다 … “좋아, 자연을 보러 가자. 누가 뭐래도 우리는 원예반이잖아.” … 초록색이라고 다 같은 초록색이 아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초록색이 산속에 있다. 그 생각을 하면서 숲을 바라보니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  (92, 103, 109쪽)


  아이들이 누구보다 스스로 아끼면서 하루하루 좋아할 수 있으면 참 예쁘리라 봅니다. 아이들이 언제나 스스로 보살피고 이웃하고 어깨동무할 수 있으면 무척 아름다우리라 봅니다. 착한 아이들이 예쁜 아이들입니다. 참다운 아이들이 아름다운 아이들입니다.


  착한 아이들로 살아가며 착한 어른이 됩니다. 참다운 아이들 삶을 빛내며 참다운 어른이 됩니다. 어른이 된다고 할 때에 갑자기 거듭나지 않습니다. 어른이라는 나이에 들어서며 하루아침에 맑은 빛을 뽐내지 않습니다. 갓난쟁이일 적부터 차근차근 사랑을 누리고 빛을 받으면서 시나브로 자라나는 목숨입니다. 아이들은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마을에서나 온갖 사랑을 맞아들이면서 스스럼없이 나눌 수 있을 때에 씩씩하게 큽니다.


  나는 도시가 나쁘다고 따로 생각하지 않으나, 도시에서 태어나 자라고 살아가는 아이들이 높다란 건물과 새까만 찻길과 끝없는 자동차와 형광등 켠 건물과 메마른 옷차림만 늘 바라보아야 한다면, 아이들과 어른들 모두 너무 슬프며 어두운 넋이 되겠다고 느낍니다. 아이들이 푸른 나무 푸른 잎과 마알가니 빛나는 환한 꽃을 느끼지 못한다면 어떻게 사람다운 사랑을 빛낼 수 있겠느냐 싶습니다. (4345.5.25.쇠.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