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나무의 노래
아와 나오코 지음, 김난주 옮김, 정지현 그림 / 달리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123 ― 아침이슬과 저녁햇살 잊은 우리 삶이라면
 : 아와 나오코, 《바람과 나무의 노래》



- 책이름 : 바람과 나무의 노래
- 글 : 아와 나오코
- 그림 : 정지현
- 옮긴이 : 김난주
- 펴낸곳 : 달리 (2009.8.10.)
- 책값 : 9500원


 (1) 아침이슬과 저녁햇살


 하루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엊저녁, 인천 부개역 앞에 자리한 헌책방 〈책사랑방〉 나들이를 할까 생각하면서 전화를 겁니다. 헌책방 〈책사랑방〉 아저씨는 책을 사러 밖에 나갈 때에는 가게를 비우기 때문입니다. 또르르르 또르르르 …… 퍽 길게 울리는 동안 받지 않습니다. 안 계신가 하고 끊으려 할 무렵 건너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조금 낯선 목소리가 아닌가 생각하면서 인사를 여쭙는데, 생각대로 낯선 목소리입니다. 그러나, “아, 최종규 씨세요? 예전 오○○ 사장님한테서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시를 쓰는 고규태라고 합니다. 열흘 전에 갑자기 책방을 인수하게 되었습니다.”

 전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열흘’이라는 말마디에 움찔 놀랍니다. 꼭 열흘 앞서는 한글날이었고, 한글날 앞뒤로 해서 〈책사랑방〉에 꼭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사이 한글학회에 일을 나오느라 짬을 도무지 못 내고 있던 터에 여러 달째 찾아뵙지 못해 궁금하기도 하고 책도 보고 싶었거든요. 조금 더 바지런을 떨었다면 예전 아저씨가 있을 때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제가 미적미적 바쁘다는 핑계로 어수선하게 살고 있었기 때문에, 헌책방 〈책사랑방〉을 새로 이어받은 분을 만날 수도 있겠지요. 책과 책방과 헌책방을 좋아하는 일하고 헌책방 일꾼이 되어 책살림을 꾸리는 일은 아주 다르기 때문에, 전화로 이날 저녁에 만나자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부랴부랴 전철을 탑니다. 오늘 따라 인천으로 돌아가는 전철이 퍽 늦습니다. 전철을 타니 기사가 안내방송을 합니다. “제 시간보다 많이 늦어지게 되어 대단히 죄송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지금 더 늦어지고 있습니다. 객차가 혼잡하오니 다음 열차를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만 퇴근시간에 십 분이 훨씬 넘도록 늦어 버린 전철을 보내고 다음 전철을 타려는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빠른전철을 용산부터 탔으니 제법 널널하긴 했지만 영등포역에 다다르자니 어느새 미어터지고, 신도림역과 구로역에서는 장난이 아닙니다. ‘히유, 오늘도 이렇게 악다구니로 살아야 하는가? 이렇게 서로 악다구니가 되어 미워하고 밀치고 하면서 짧지 않은 동안을 오징어떡이 된 채로 견디어야 하는가?’ 송내역에서 내려 느린전철로 갈아탈 때까지도 북새통은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이런 북새통에서 손에 책을 쥐고 있는 사람은 제 둘레에 저 빼고 보이지 않습니다. 모두들 귀를 틀어막고 손전화로 텔레비전 보기에 바쁩니다. 아가씨들은 연속극이나 김연아를 보고, 아저씨들은 한국시리즈 야구경기를 봅니다. 손전화로 화투를 치거나 다른 게임을 하는 사람이 드문드문 보입니다. 밀리거나 밀치거나 밟히거나 밟거나 서로 아랑곳하지 않고 두 눈을 손전화에만 박아 놓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지옥철에서는 책읽기로는 마음을 넉넉하거나 너그러이 다스릴 수 없을는지 몰라. 이런 지옥철에서 날마다 시달리는 채 젊음과 늙음을 다 보내야 하는 요즈음 도시사람한테는 유행노래와 연속극과 영화와 운동경기 아니고서는 마음을 달랠 길이 없는지 몰라.’

 찡긴 몸을 송내역에서 가까스로 빼내고 한숨을 돌리면서 북새통 지옥철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길을 고쳐야겠다고 느낍니다. 모두들 더없이 불쌍한 사람이 아니겠느냐고 느낍니다. 다른 사람뿐 아니라 저 또한 불쌍한 님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는 사이가 아니라 매섭게 눈알을 부라리면서 빈자리를 날름날름 노리는 남남이 아닌가 싶습니다. 훌륭하거나 거룩한 책으로 마음을 알뜰하게 채워 놓는다 할지라도, 이 지옥철을 타면서 사랑과 평화와 믿음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는 일이란 하느님이나 부처님한테나 바랄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서울에서 막 전철을 탈 때에는 거의 기울던 해님이 송내역에서 느린전철로 갈아타고 부개역에서 내릴 때에는 어두움으로 바뀝니다. 시간을 살피니, 이즈음은 땅거미가 찬찬히 내리며 도시 골목길에서 뛰놀던 아이들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 저녁밥상을 마주하거나 숨바꼭질 마무리를 짓는 무렵이구나 싶습니다. 제 어릴 적을 돌아본다면, 얼른 저녁밥상 물리고 잽싸게 다시 밖으로 뛰쳐나와서 깊어가는 밤까지 숨바꼭질을 이어가는 저녁나절 첫무렵이구나 싶습니다. 때로는 학교 끝나고 오락실에 처박혀 있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아차차, 이렇게 늦게까지 오락실에 처박혀 있으면 집에서 들통이 나는데.’ 하면서 근심걱정에 가득 쌓인 채 두려움에 덜덜 떨며 집으로 돌아가던 무렵이었고요.

 헌책방 살림을 이어받은 시인 아저씨는 “최종규 씨는 모든 책은 헌책이라고 말하셨는데, 저는 헌책을 읽으면서 사람이 된다”고 생각한다는 말씀을 들려줍니다. “세상에 나오는 책들이 갈수록 지혜는 적어지고 모든 분야에서 처세와 성공에만 초점을 맞춰 놓고 있”다는 생각을 덧붙입니다. “인문학 책에까지도 그래요.” 하고 한 번 더 덧붙입니다. 당신은 이 헌책방이 문닫지 않게 하고 이어받은 일이 참으로 기쁘다면서, “헌책방이란 영원히 다다르지 못할 듯하던 책을 만나는 곳”이라고 생각한답니다.

 시인 아저씨 말이 아니어도, 제 생각은 시인 아저씨와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책이 헌책이기에 어떠한 책을 읽든 우리들은 책을 가까이하며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아니, 참다운 사람이 됩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 새사람이 되었음을 느끼지 못하거나, 새사람이 되었어도 새마음으로 새일을 새롭게 붙잡는 매무새를 간수하지 못할 뿐입니다.

 헌책방 일꾼이 된 시인 아저씨한테 “길든 짧든 헌책방 일꾼으로 지내며 겪고 본 이야기를 일기로 적어 보셔요.” 하고 말씀드립니다. 소주 한 병을 마신 다음 아슬아슬한 막차가 아직 안 끊길 무렵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목포에서 형한테서 전화가 옵니다. 우리 집 고장난 셈틀을 어찌어찌 고쳐 보라고 이야기해 줍니다. 형이 이야기하는 대로 노트북으로 인터넷을 켜고 몇 가지 드라이버 풀그림을 내려받고는 책상셈틀에 옮겨놓고 깝니다. 그렇게 세 가지를 더 깔아 놓으니 비로소 책상셈틀이 예전 모습대로 돌아옵니다. 형한테 고맙다고 말하고는 이제 책상셈틀을 끕니다. 요 며칠 동안 사들인 책을 조금 넘기다가는 스르르 곯아떨어집니다.

 그러고 이튿날 새벽 여섯 시 이 분에 일어나, 여느 날과 같이 아침을 맞이합니다. 아침에 글을 좀 쓸까 하다가 그만두고, 어젯밤 못 다 읽은 책을 마저 펼칩니다. 아침 일곱 시 이십일 분에 집을 나섭니다. 어제 아침과 똑같은 지옥철에 부대낍니다. 오늘은 옆과 뒤에서 그지없이 못난 아저씨들이 팔꿈치로 밀고 신문으로 쑤시고 그럽니다. 어처구니가 없어 뒤를 돌아봅니다. 미어터지는 지옥철에서 억척스레 신문을 쫙 펼치고 읽으려는 아저씨를 노려봅니다. “야, 뭘 째려보는데?” 외려 큰소리입니다. 피식 웃어 주고 고개를 돌립니다. 이게 나이값인가 하는 생각, 이런 나이값으로 당신 집식구한테도 그런 모습밖에 못 보여주느냐는 생각, 참말 안쓰럽고 딱한 삶을 붙잡고 있는 아저씨라는 생각, 이런 사람하고는 말대꾸를 할 값어치가 없을 뿐 아니라, 이런 사람을 윽박지른다든지 꿀밤 한 대 먹일 값어치조차 하나 없다는 생각입니다.

 못났구려 사람들 생각은 잊자고 다짐합니다. 손에 쥐고 있는 책에 좀더 힘을 줍니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보았던 끝물 나팔꽃에 살짝 맺힌 이슬방울을 떠올려 봅니다. 하루하루 쌀쌀해지면서 겨울 들머리에 다가선 하루하루를 살갗으로 차근차근 느끼면서 내 마음자리는 이토록 씁쓸하고 못난쟁이로 고꾸라지지 않도록 힘쓰고 애쓰자고 다짐합니다. 내일부터는 집에서 새벽 여섯 시에 나와야겠습니다. 








 (2) 《바람과 나무의 노래》를 읽을 수 있는 가슴


 1943년에 태어나 1993년에 세상을 떠난 아와 아야코라고 하는 일본사람 어린이책 《바람과 나무의 노래》를 읽습니다. 이 작품은 1973년에 펴냈다고 합니다. 우리 말로 옮겨진 적이 예전에도 있었나 궁금한데, 옮겨진 적이 있든 없든 자그마치 서른 해를 훌쩍 넘은 옛날이야기입니다. 그래도 이 작품에 담긴 이야기는 나라안팎에서 제법 사랑받는구나 하는 느낌입니다.

 문득, 제 고향 인천에서 수채그림을 늘그막까지도 즐기며 동화를 쓰는 할머니가 떠오릅니다. 수채그림 할머니가 쓴 동화를 읽을 때에도 이 작품 《바람과 나무의 노래》를 읽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는데(이 작품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수채그림 할머니가 당신 작품을 책으로 내고 싶어 출판사를 알음알이하니, 출판사마다 하는 말이 “할머니 동화는 참 좋기는 한데, 너무 옛날 옛적 이야기라서 내기가 어려워요.” 하는 대꾸만 돌아왔다고 합니다.

 수채그림 할머니가 사는 동네에서 고개 하나 넘는 곳에 있는 골목동네에는 시와 동화를 쓰는 나이 지긋한 가시버시가 있습니다. 두 분은 예순일곱 나이임에도 시쓰기와 동화쓰기를 꾸준히 이어가는데, 예순일곱 할머니가 쓴 동화 또한 퍽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당신들 오랜 삶과 생각과 땀과 슬기와 사랑이 담긴 동화는 나라안에서 제대로 빛을 못 봅니다. 당신들이 한국사람이 아닌 일본사람이었거나 미국사람이었거나 유럽사람이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요. 비슷한 작품이라면 나라안 작가들 땀방울보다 나라밖 작가들 땀방울을 추켜세우는 우리 나라이니까요. 나라안 창작 작가들은 작품모음을 펴내기 힘들고, 나라밖 창작 작가들은 한국땅에서 큰 어려움없이 작품모음을 쏟아낼 수 있으니까요.

 우리 나라에 훌륭한 작가가 많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나라밖 작가는 안 훌륭하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우리 나라 뜻있고 생각있고 사랑있는 작가들 작품은 제대로 모시지 못하는 우리 삶터라는 소리입니다. 나라밖 좋은 작품이 꾸준하게 옮겨지는 일은 반갑지만, 우리 스스로 우리 터전과 넋에 걸맞는 작품을 일구려는 손품이 몹시 모자라다는 소리입니다.

 다만, 《바람과 나무의 노래》를 쓴 아와 아야코 님 작품은 참 좋습니다. 따순 바람결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고, 향긋한 나무결이 살며시 스며 있습니다. 바람이 들려주는 싱그러운 노래와 나무가 들려주는 고요한 노래가 함께 깃들어 있습니다. 동화란, 아니 동화를 떠나 문학이란, 아니 문학을 넘어 글이란 이렇게 엮어내는구나 하고 가슴을 톡 건드립니다.


 (3) 가만히 들여다보기


 지난 8월 28일에 처음 손에 쥐고는 그날 곧장 읽어 버린 《바람과 나무의 노래》입니다. 좀 쉬었다가 다시 읽으려고 했으나 그리 하지 못했습니다. 한달음에 끝까지 달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이러면 안 돼’ 하고 생각하면서 책상맡에 한 달 남짓 얌전하게 올려놓았습니다. 아무리 반갑다 하여도 이렇게 읽어치우면 속탈이 날 수 있으니 차근차근 삭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비로소 ‘한달음에 읽어치운 책’을 마음으로 삭일 수 있겠다 싶어 다시 한 번 책장을 넘기며, 그동안 내 마음밭에 한 알 두 알 자리잡은 글월을 새롭게 곱씹어 봅니다. (4342.10.20.불.ㅎㄲㅅㄱ)


[9, 19쪽] 나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켰어요. 어디서 어쩌다 길을 잘못 들어 이런 곳에 오게 되었는지. 게다가 이 산에 이런 꽃밭이 있었는지 의심스러웠습니다. ‘곧장 되돌아가!’ 나는 자신에게 명령했어요. 하지만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말이죠 … 참 신기한 일이었어요. 나는 이 산에 대해서는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숨겨진 길이 있잖아요. 그리고 그렇게 멋진 꽃밭과 친절한 새끼 여우의 가게도 있고 말이죠. 나는 신이 나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었어요.

[25쪽] 산초나무는 가난한 농가의 밭 한가운데 서 있었습니다. “이 나무, 거치적거리니까 베어 버릴까 싶어.” 농부가 말했어요. “그래요, 여보. 이 나무가 없으면 채소를 좀더 심을 수 있잖아요.” 농부의 아내가 대답했어요. “하지만 엄마, 이 나무를 잘라 버리면 산초나물은 못 먹잖아요.” 그렇게 말한 것은 이 집의 딸 스즈나였어요. “하긴 그렇구나.” 엄마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산초나물은 정말 맛있지.” 그래요. 산초의 새 잎은 봄의 음식에 향긋한 냄새를 더해 주지요. 하지만 스즈나는 산초나물이 먹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어요. 산초나무를 베어 버리면 산초 아이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죠.

[36쪽] “스즈나가 시집을 간대.” “이웃마을에 사는 부자에게 간다던데.” “광이 스무 개나 있는 집이래.” “듣자 하니, 대단한 집안이라더군.” “그럴 만도 하지. 스즈나는 미인이잖아.” 산타로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그저 먼 산만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스즈나는 부잣집으로 시집을 가니까, 부자가 되겠네.’ 그런데 산타로네 집은 나날이 기울어 갔습니다. 엄마가 몸이 허약해져 산타로가 가게를 운영하게 된 후로는 모든 일이 순조롭지 못했던 것이죠. 손님은 근처에 새로 생긴 가게에 빼앗기고, 지붕은 태풍에 날려가고. 그런데다 산타로는 장사 수완이 하나도 없었지요. 경단에 쓸 팥조차 살 수 없는 형편이 되자 산타로네 찻집의 명물 경단은 끝내 모습을 감추고 말았습니다.

[51, 53쪽] 감자와 우유가 아주 맛있는 북쪽 지방 어느 마을의 이야기입니다. 이 마을 어귀에 의자를 만드는 젊은이가 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지요. 이 젊은이가 만드는 의자는 모두 튼튼하고 앉으면 편안한 느낌이 절로 들었죠. 어느 날, 이 젊은이가 귀여운 흔들의자를 만들었습니다. “어머나, 정말 멋진 흔들의자네. 누가 주문한 거야?” 아내가 감자 스튜를 만들면서 그렇게 물었지요. “주문은 무슨, 우리가 쓸 거야.” “우리가 쓸 거라고! 하지만 누가 앉는데?” “우리 아이가 앉을 거야.” … 젊은이는 혼자서 그렇게 중얼거렸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빨간색을 칠해도 그 아이는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되자 슬퍼서 어쩔 줄을 몰랐죠. 어제 아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아이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어. 꽃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리고 물과 하늘도 그 색을 볼 수 없다고.”

[119쪽] “에이, 겨우 이거뿐이에요?” 설탕은 네모난 종이봉투 속에 겨우 한 숟가락 정도밖에 들어 있지 않았어요. “그래, 이렇게 맛있는 게 집집마다 다 있는 건 아니야. 엄마는 옛날에 먹어 본 적이 있으니까, 이건 네가 다 먹으렴.”

[131∼132쪽] 아기 빗방울은 아주머니의 바지자락에 매달려 떼를 썼어요. “여름 동안 비를 뿌려 주면 설탕을 주겠다고 약속했잖아요. 네, 그랬잖아요?” “이런 멍청이. 비에게 보답을 하면, 해님에게도 바람에게도 보답을 해야 되잖아.” 아주머니는 아기 빗방울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쳤습니다. “우리 집에는 아이들이 많아서 개미들이 핥을 설탕도 없다.” 아주머니는 그런 말을 뱉고는 저쪽으로 가 버렸습니다. 밭 저 너머에 있는 설탕공장의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오르고 있습니다. 그때야 아기 빗방울은 엄마와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 ‘엄마는 이제 없어.’ 그제야 아기 빗방울은 그 사실을 똑똑하게 알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였습니다. 응석받이 아기 빗방울이 응석을 떨쳐 버리고 분노를 알게 된 것이. “어서 어른이 되고 싶어.” 아기 빗방울은 혼자 중얼거렸어요. 훌륭한 어른이 되면 이 마을에 큰비를 내려 주리라고 생각했어요. “집이고 밭이고 다 떠내려 가게 할 거야.” 그런 말을 내뱉은 아기 빗방울은 엄마의 은 물뿌리개를 껴안고 숲으로 돌아갔습니다.

[171쪽] “뭐가 그리 답답하다는 것인가?” 거북은 목을 다시 움츠리면서 물었어요. 어부 료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쉴 틈도 없다더니, 내가 그 꼴이라 하는 말입니다.” “쉴 틈이 없다! 그거 바람직한 일 아닌가.” “하루하루가 바빠서 그물을 손질할 틈도 없는데 바람직은 무슨 바람직이랍니까. 그물에 조그만 구멍이 뚫린 것을 그냥 내버려 두었더니 이 모양이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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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책을 읽는다 - 심리학자가 읽어 주는 판타지 문학
가와이 하야오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비룡소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112 ― 생각씨앗 자라는 판타지 문학이란 무엇인가
 : 가와이 하야오, 《판타지 책을 읽는다》



- 책이름 : 판타지 책을 읽는다
- 글 : 가와이 하야오
- 옮긴이 : 햇살과나무꾼
- 펴낸곳 : 비룡소 (2006.5.4.)
- 책값 : 13000원



 (1) 사람들이 생각하는 힘이란


 자전거를 함께 타는 벗이자 인터넷신문 기자인 ㄱ아저씨가 제 책을 소개하는 글을 하나 써 주었습니다. 바쁜 가운데 이런 글을 써 주니 고맙다고 느끼고 있는데, 오늘 낮 ㄱ방송국(라디오)에서 전화가 옵니다. 저녁에 전화로 ‘생방송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방송작가는 “아직 선생님 책은 읽지 않았는데요……” 하고 말합니다. 아마 오늘이나 어제 인터넷신문 기사를 읽으면서 ‘오늘 저녁에 모실 손님이 없어 애먹고 있었는데 마침 잘되었구나!’ 하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책 하나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정작 그 책을 읽지 않고도 어떻게 ‘생방송 전화 인터뷰’를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오늘날 대한민국 지식 사회 ‘상상력’은 안 되는 일을 되게 하는 힘이 있지 않을까 하고 느낍니다.


.. 병 때문에 오랫동안 쉬어야 할 때, 환자는 자신이 손해를 많이 본다고 생각한다 … 안타깝게도 병을 앓는 봉인들은 그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 병은 마리안느의 성장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었다. 병은 인간의 눈을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게 한다 … 타인의 눈을 의식할 때 우리의 정체성은 ‘나의’ 것에서 ‘모두’의 것이 되고 복제 인간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닐까? … 죽은 자의 눈앞에서라면 우리는 잔걱정을 하거나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다. 그러나 훨씬 깊은 곳에서, 또는 훨씬 높은 곳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 어머니를 잃는 것은 어린이의 성장에 큰 타격을 주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성장하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평범한 사람은 지닐 수 없는 능력이 발달하는 것이리라 ..  (33, 35, 138∼139, 283쪽)


 어제 경기도 파주로 자전거 수업을 다녀왔습니다. 지난 5월부터 다음 7월까지 모두 아홉 차례 하는 ‘야외 실습 교육’으로 하는 특별강좌를 맡았고, 저는 이 자전거 수업을 할 때면(한 시 반부터 세 시 반까지 합니다), 집부터 자전거를 타고 파주로 갑니다. 그러나 새벽 두어 시부터 깨어나 하루치 글을 미리 쓰고 아기 죽과 어른 두 사람 먹을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뭐를 하고 챙기다 보면 금세 열 시가 가까워지는 바람에, 구로까지는 전철을 타고 자전거로 달린다든지, 그냥 대화역까지 전철을 타고 간 다음 자전거를 타고 파주로 들어가든지 합니다. 어제는 구로부터 자전거를 달렸습니다.

 자전거도 찻길에서는 똑같은 ‘차’입니다. 법으로는 그렇습니다. 자전거 또한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끝쪽 찻길 하나를 차지하며 달릴 ‘권리’가 있습니다. 법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찻길 하나는커녕 갓길 이십 센티미터나 내어주고자 마음을 쓰는 자동차는 그리 안 많습니다. 버스는 더욱 짓궂습니다.

 생각해 보면, 자전거를 지켜 주는 법을 자동차 모는 사람이 안 지킨다 하여 어느 누가 붙잡거나 딱지 붙이거나 벌금 매기는 일이란 없습니다. 민증에 빨간줄 그어지는 일 또한 없습니다. 너무 짓궂은 짓을 하느라 자전거 탄 사람이 삿대질을 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렇게 삿대질을 해 본들 미안해 하는 얼굴빛을 하는 자동차꾼은 아직 없었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그러려니 하는 마음으로 멀리 에돌아 다닙니다. 예전에는 ‘저 사람한테도 동무와 식구와 이웃이 있을 텐데, 자전거를 탄 사람이 동무나 식구나 이웃이었어도 이렇게 몰았을까?’ 하고 생각하며 혀를 끌끌 찼는데, 아무래도 이런저런 걱정과 안타까움으로 바라볼 만한 값어치 하나 없는 분들이 아니랴 싶습니다.


.. 소중한 것은 자기 힘으로 지켜야 하는 것이다 … 요나탄의 용기는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지 않고 살아가는 힘 속에서 나온다. 요나탄은 인간의 운명을 존중하는 한 아무리 악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연장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 ‘쓸쓸함’이라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히 따르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필요한 것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  (38, 101, 148쪽)


 대안학교 아이들하고 자전거 수업을 하다가 문득 궁금해져서 물어 보았습니다. “친구들 가운데 집에 자가용 없는 사람 있어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친구들 가운데 집에 자가용 두 대 있는 사람은?” 하니까 거의 모두 손을 듭니다. 친구들 아버지와 어머니가 따로따로 차를 몰아야 하기 때문이라는데, 아이들을 집부터 대안학교까지 데려다 주자면 차에 태워야 할 터이나, 집부터 당신 일터까지도 언제나 자가용을 몬다는 이야기로구나 싶습니다. 친구들이 하는 말도 그렇습니다.

 열세 살부터 열일곱 살까지인 이 아이들이 운전면허를 딸 나이는 얼마 안 남았습니다. 열아홉이나 스무 살쯤 되면 으레 운전면허를 따려 할 테며, 운전면허를 딴 다음에는 아버지나 어머니 차를 물려받게 될 테고, 그러면 한 집에 자가용이 석 대가 되겠지요. 웬만큼 있는 분들은 한 집에 자가용 서너 대쯤은 아무렇지 않게 굴리고 있는 오늘날 우리 나라이니까요.

 하루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자전거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 생각해 봅니다. 우리 나라처럼 한 집에 자가용 두어 대, 또는 서너 대를 굴리는 나라는 몇이나 될까 하고. 기름 한 방울 안 나면서 이렇게 자가용을 많이 몰아대고 있는 나라는 어느 나라가 또 있을까 하고.

 자가용을 굴리면서 기름 걱정을 해 보기나 할는지 궁금합니다. 기름 걱정 없이 돈만 부지런히 벌어대는 사람들이 당신 이웃이 겪는 아픔과 고단함을 어느 만큼 헤아릴 가슴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 ‘물건’에 생명은 없지만 영혼은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지 않을까? … 토티는 마음의 교류를 통해 아이들과 관계를 맺어 간다. 그에 비해 마치페인은 화려한 겉모습이나 옷이나 아름다움으로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한다. 물론 둘 다 사람을 매료시키는 요소임에는 분명하다. 마치페인이 아름다워지고 아이들이 소중히 다룰수록 마치페인은 점점 더 놀이를 싫어하고 오히려 박물관의 장식품이 되고 싶어 한다는 점은 시사적이다. 사람도 훌륭해지고 남들로부터 중요한 존재로 대접받기 시작하면, 남들과 접촉하기 싫어하여 일종의 ‘박물관’(때로는 ‘원로원’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곳)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 ..  (48, 71∼72쪽)


 아기를 낳기 앞서부터 옆지기하고 곧잘 찾아가는 신포시장 야채치킨집에는 할아버지 술손이 많이 찾아듭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느낄는지 모르지만, 우리들은 이곳에서 만나는 할아버지 술손이 퍽 살갑다고 느낍니다. 할아버지 술손은 거의 날마다 출근하듯 이곳을 찾아오시는데, 가볍게 꼭 알맞게만 술잔을 기울이고는 집으로 돌아가시고, 옆지기가 아기를 배었을 때에는 피우던 담배를 하나같이 끄고, 정 피우고 싶으면 밖으로 나가 피우시곤 했습니다.

 지난주에는 아직 손님이 들지 않던 때라 우리들은 느긋하게 앉아서 ‘우리 때문에 담배 안 태운다는 걱정을 안 해도 되겠구나’ 생각하며 있는데, 삼십 분이 되지 않아 한 분 두 분 찾아드셨고, 슬슬 찾아드는 손님들은 언제나처럼 “아기가 있는데 담배 태우면 안 되지” 하고 말씀하며 아기 앞에서 그 나이에 재롱을 떨어 줍니다. 저번에는 “괜찮아요. (아기가 여기에 있는) 덕분에 우리도 담배 끊고 있는 거지. 이런 기회에 담배 안 피워도 되니 좋아요.” 하면서 웃으셨는데, 조금 뒤 보니 밖에 나가서 피우시더군요.

 그렇지만, 이렇게 마음써 주는 할아버지가 있는 가운데, ‘동네사람들 으레 찾는 닭집’에 아이들하고 찾아온 손님이 바로 당신들 옆에 있는데에도 뻐끔뻐끔 담배 연기 내뿜는 젊은이나 늙은이가 있으며, 아기를 안거나 업고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바로 곁에서 담배 연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뿜는 양복쟁이들이 있습니다.


.. 부모와 자식, 보수와 혁신 사이에는 항상 대립이 존재한다. 우리는 둘 중 어느 쪽이 옳다고 쉽게 결정 내릴 수 없다. 자칫하면 어느 쪽이 이기느냐로 변질되어 둘 다 파멸하고 만다 … 아버지는 여태껏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아이들의 고통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어쩌면 조금만 늦었어도 바니가 미칠 지경에 이르고, 가족들은 바니를 정신병원으로 보냈을지 모른다 ..  (196, 227쪽)


 보리술을 사러 가끔 동네 ‘마트’에 가곤 합니다. 마트에 간다 한들 보리술 한 병이나 두 병을 살 뿐이고, 천 원짜리 재활용비누를 사야 할 때에나 가는데, 이렇게 사들고 셈을 치를 때 보면, 꼭 끼어드는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있습니다. 길어야 1분이 되지 않는 틈을 기다리지 못하고 새치기를 하는 분들은 혼자일 때도 있으나 아이를 데리고 있을 때도 있습니다. 언제 한 번 ‘새치기를 해서 당신이 아끼는 시간이 몇 초인가?’를 속으로 세어 보니 20초쯤 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새치기는 동네 마트에서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버스를 타거나 전철을 탈 때에는 언제나 이루어집니다. 다른 자리에서도 으레 일어납니다. 새치기를 하는 사람이 대학교 교육을 받았는지, 어떤 지식 사회에서 일하는지, 또는 공직 사회에서 일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틀림없습니다. 모두들 ‘한 어머니와 아버지’한테서 태어났고 가르침을 받았다는 대목. 그리고 모두 다는 아니지만 웬만한 아주머니와 아저씨들은 ‘한(또는 둘이나 서넛이나 여럿)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와 아버지’ 자리에 있다는 대목.


 (2) 나는 무엇을 생각하는가


 이따가 저녁에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겠다는 ㄱ방송국 작가가 쪽지 하나를 보내 옵니다. 모두 일곱 가지 물음을 적었는데, “언제부터 자전거만 고집하게 됐나요?” 하는 물음과 “자전거뿐 아니라 일상 생활도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같은 말이나 “신발도 고무신을 신으신다구요?” 같은 물음이 껄쩍지근합니다. 같은 물음이라 하여도 “언제부터 자전거를 즐겨타고 있나요?”라든지 “요즈음 사람들처럼 돈벌이에 미친 채 살지는 않는다고 들었습니다”라든지 “운동신이 아닌 고무신을 신으면 자전거 탈 때에 발이 아프지 않나요?”처럼 물어 보면 얼마나 좋았으랴 싶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좀더 깊이 헤아리려는 눈길이요 가슴이었다면 다른 이야기를 물어 보려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를테면, “저는 아직 자전거를 못 타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자전거를 좋아하게 될까요?”라든지, “남들뿐 아니라 저 스스로도 입으로는 지구자원이 어떠하느니 걱정하는 소리를 하지만, 정작 자가용을 못 버리고 텔레비전 안 버리고 있어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든지, “농사짓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구두나 운동화를 안 신고 고무신을 신거나 맨발인데, 우리들은 땅을 잃거나 잊으며 신발이며 옷이며 살림살이며 모두 소비문명으로만 치닫고 있구나 싶은데, 이런 가운데 도시에서 즐겁고 옳게 사는 길이란 있을까요?”라든지 하면서.


.. 이 책을 읽다 보면 인간은 과연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자유 의지를 지니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에밀리와 샬럿은 인형의 집을 손질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런데 이것은 두 소녀의 의지일까 아니면 인형들의 바람 때문일까? … 쉽게 남을 웃기는 방법을 거부했을 때 자기가 만들어 낸 존재의 개성이 발휘되는 것이다. 앞에서 인형과 작중 인물의 유사성을 이야기했지만, 문학작품 속의 작중 인물도 단순히 독자의 흥미에 얽매이기를 거부했을 때 비로소 개성이 발휘되는 법이다 ..  (63, 112쪽)


 저는 자전거를 즐겨타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자전거를 즐겨타기 앞서 즐겨 걸어다니는 사람입니다. 예닐곱 시간을 아무렇지 않게 걷고, 인천에서 서울로 또 서울에서 인천으로 걸은 적이 있으며, 골목마실을 하며 사진을 찍을 때에는 늘 걸어다녀야 합니다. 아기를 안고 다니자면 또 걸어야 합니다.

 돈이 없으니 자가용을 안 굴리지 않느냐 물으실 분이 있을 텐데, 돈이 있으면 그 돈으로 환경책 내는 출판사를 돕는 데에 쓰거나 조그마한 환경모임 살림에 보태도록 돕는 데에 쓸 테니, 돈이 있어도 자가용을 굴릴 겨를이 없습니다.

 제가 동네에서 만나는 이웃들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여느 때에 걷기를 즐기는 분들이 자전거를 즐깁니다. 자전거를 즐기는 분들은 즐겨 걷습니다. 그러나, 자가용을 즐기는 분들은 걷지를 않습니다. 걷지를 않으니 자전거를 안 즐깁니다. 어쩌다가 ‘운동 삼아’ 자전거를 타며 ‘뱃살 뺀다’고 할 뿐인데, 이렇게 ‘운동한’ 다음에는 어김없이 삼겹살에 소주를 걸치거나 튀김닭에 맥주를 걸치시더군요.


.. 나는 스위스 취리히에 갔다가 어린이책 전문서점에 들러 좋은 책이 있으면 추천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가게 점원이 당장 책 한 권을 들고 왔다. 표지에 《레욘예타 형제》라고 씌어 있었다. 순간 ‘아니, 이런 책도 있었나?’ 싶었지만, 이내 그것이 《사자왕 형제의 모험》의 원제임을 떠올리고 이 책은 이미 일본에 번역되어 있어서 읽어 보았다고 말했다. 점원은 “그래요? 역시 좋은 책은 어디서나 즐겨 읽히죠.” 하며 아주 기뻐했다 … 머리로 생각한 ‘꾸며 낸 이야기’는 진정한 의미의 판타지가 될 수 없는 것과 대조적으로, 영혼과 관련된 ‘현실 이야기’는 판타지와 한없이 가까운 것이 아닐까 ..  (81, 255쪽)


 우리 살림에 자가용을 굴릴 겨를은 없지만, 굳이 억지를 써서 굴리려고 한다면 굴릴 수야 있습니다. 그런데 자가용을 굴리면 우리한테 무엇이 좋을는지는 아직 하나도 알지 못하겠습니다. 헌책방마실을 하면서 사들이는 책을 다리 허리 등짝 팔 안 아프도록 나를 수 있어서? 아기 데리고 먼 나들이를 하기에 힘이 안 들어서?

 우리 식구는 빨래하는 기계를 안 쓰고 손으로 빨래를 합니다만, 기계를 쓸 줄 모르기도 하지만(저 혼자) 쓸 줄 알아도 맡기고 싶지 않아요. 내 땀과 내 품과 내 시간과 내 사랑을 담아서 빨래를 하고 싶습니다. 내 모두를 바친 빨래하기로 말끔하게 빨아 놓은 옷을 우리 식구가 함께 입고 싶습니다.

 팔이 떨어지건 등짝이 떨어지건 허리가 휘건, 내 마음에 담을 책이기 때문에 내 가방이 실밥이 터지도록 장만해서 용을 쓰며 집으로 나릅니다. 요즈음은 아기를 가슴에 안고 가방을 등에 메고 나릅니다. 아기를 안고 골목마실을 하며 사진을 찍고 돌아오면 온몸은 땀으로 젖습니다. 그래도, 아빠 가슴에서 새근새근 잠든 아기를 바닥에 살며시 내려놓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칠 때 보람은, 맨몸으로 자전거 타고 휘휘 온 동네를 다니면서 사진을 찍고 난 다음 느끼는 보람하고는 견줄 수 없습니다.


.. 이 책의 9장에 따르면 이 중학교 학생들은 ‘누구나 청바지밖에 입지 않았다.’ 게다가 ‘엉덩이에 걸쳐 입는 나팔바지에 닳아서 빛바랜’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또 ‘그해에 남들과 다르다는 말을 듣고 싶으면 원피스를 입고 교회에 가면 된다. 그것도 다림질한 원피스를.’ 획일화된 제복도 없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보장되는 문화 속에서 복제 인간이 만들어진다. 인간은 무서운 존재다 … 중요한 것은 누가 옳으냐가 아니라 논점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치열하게 대결하면서 양쪽이 얼마나 서로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느냐 하는 점일 것이다 ..  (133, 146쪽)


 제가 고무신을 처음 신은 때는 2003년 겨울이 아닌가 싶습니다. 시골사람은 누구나 고무신을 신으니, 저도 고무신을 신은 셈인데, 그무렵은 충주 산골자락에서 이오덕 님 글을 갈무리하면서 지냈습니다. 이오덕 님 글과 책은 산더미 같아서 이 원고뭉치와 책덩이를 갈무리하느라 바쁘니 농사일을 거든 적은 얼마 없지만, 시골에서 일하며 지낼 때에 어느 누구도 저한테 “고무신을 신네?” 하고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운동신이나 가죽신 차림으로 논이나 밭에 들어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그러다가 시골에서 도시로 나와 책방마실을 하거나 사람들을 만날 때면 모두들 한결같이 “고무신이네? 게다가 깜장고무신? 요새도 깜장고무신을 파나?” 하면서 눈이 휘둥그래집니다. 학교옷을 말끔히 차려입은 중고딩 아이들은 “저 봐, 고무신이야? 깜장고무신!” 하면서 키득거립니다.

 오일장이든 칠일장이든, 시골 저잣거리에서는 모두 고무신을 팝니다. 농사짓는 시골 읍이나 면에 있는 신집에서도 고무신을 팝니다. 도시에서도, 제가 사는 동네에서 가까운 화수시장 신집에서도 고무신을 팝니다.

 값싸고 질긴 고무신이 좋으면 고무신을 신습니다. 조금 비싸도 여러 해 오래 신는 샌들이 좋으면 샌들을 신습니다. 십만 원을 주고 열 해를 신는다는 가죽신이라면 이런 가죽신을 신어도 될 테지요. 다만, 저는 삼천 원(시골에서는)이나 오천 원(도시에서는)을 치르고 한 해에 한 켤레씩 신는 고무신이 돈을 가장 적게 들이는 신발이라고 느끼며, 제 발바닥도 땅을 좀더 가까이 느낄 수 있어서 좋다고 느낍니다.


.. 할머니가 장황하게 늘어놓는 옛길의 장점에 비해 현대의 도로는 얼마나 밋밋하고 멋이 없는가? 현대인은 빨리 목적을 이루려는 일에만 사로잡혀 과정을 음미하는 일을 잊고 있다. 그러나 옛길을 걷는 것은 여간 힘들지 않다 … 할머니가 기억하고 있는 옛집과 가게들은 이미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 마르틴 할머니의 ‘고향’은 황폐해져 있었다. 그러나 파스칼레는 할머니의 마음의 고향에 한 소녀가 살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 아닐까? ..  (270∼273쪽)


 《도시에서 생태적으로 사는 법》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책까지 다로 쓰고 읽고 배워야 할 만큼 ‘자연을 생각하며 자연스레 사는 길’을 잃거나 버렸습니다. 자연을 생각하며 자연스레 사는 길이란, 오늘날 우리들 거의 모두가 잃거나 잊은 일이지만, 조금만 거슬러 생각하면 우리 어버이 또래에, 또 어버이를 낳아 기른 어버이 또래에는 모두 ‘그와 같이’ 살면서 아무도 ‘생태적으로 사는’이라 하지 않았어요. 더 쓰거나 덜 쓰거나가 아닌 알맞게 쓰며 알맞게 나누며 지냈습니다. 나한테 더 있으니 남한테 더 덜어 줍니다. 나한테 더 없으니 남한테 더 얻습니다. 있을 때 나누고 없을 때 받습니다.

 딱히 ‘느림’을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굳이 ‘천천히’를 외치지 않아도 됩니다. 따로 ‘적게’를 들먹이거나 ‘가난하게’를 따지지 않아도 됩니다. 내 마음과 생각과 매무새가 어느 자리에 있는지 돌아보면서 ‘나한테는 돈과 집과 땅과 물건이 얼마나 있으면 될까’를 짚어 나가면 됩니다.

 예배당에 바지런히 나간다고 믿음이 꼭 깊은 사람이 아니듯, 예배당에 안 나간다고 믿음이 꼭 없는 사람이 아니듯, 사회나 모임에 돈을 많이 바친다고 꼭 나눔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듯, 사회나 모임에 돈 한푼 바치지 못한다고 꼭 나눔을 못하는 사람이 아니듯, 우리는 우리 길을 알차게 다스리면서 지킬 슬기를 얻으며 스스로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3) 《판타지 책을 읽는다》라는 책을 읽는 가슴


 심리치료사이기도 하고, 일본 문화청 장관이기도 했던 ‘가와이 하야오’라고 하는 일본사람이 있습니다. 지난 2007년에 세상을 떠난 이이는 1928년에 태어났으니 여든 해라는 삶을 꾸려 나간 셈인데, 나라안에 이분 책이 꽤나 많이 옮겨져 있습니다. 처음에는 심리학과 철학을 다룬 책이 옮겨졌고, 한 해 두 해 갈수록 심리학책보다는 ‘어린이문학을 말하는 책’이 옮겨졌는데, 지난 2008년 9월에는 《울보 하야오》라는 책을 펴내며 당신이 보낸 어린 나날을 수수하게 들려주면서 따스한 아름다움을 베풀어 줍니다.

 뭐랄까요, ‘심리치료는 이렇게 한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까요. 어쩌면, 가와이 하야오 님 이야기를 담은 《판타지 책을 읽는다》며 《그림책의 힘》이며 《하루키, 하야오를 만나러 가다》며 《어린이 책을 읽는다》며 한결같이 심리치료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굳이 심리치료를 한다는 책이라기보다 ‘살아가는 모습’을 꾸밈없이 보여주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로 꾸미거나 덧보태지 않으면서 나 스스로 내 삶을 돌아보도록 한달까요. 《어린이 책을 읽는다》나 《판타지 책을 읽는다》나 매한가지인데, ‘이런저런 책을 읽어야 좋다’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습니다. 그저 ‘이런저런 책을 읽다 보니 내 눈이 트였고 내 마음이 열렸으며 내 생각이 깨쳤다’고 털어놓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나라 지식인들은 ‘수준이 낮다’며 건드리지 않는 ‘애들 책이나 읽으’면서 비평을 하는 ‘한갓진 놀음놀이’나 할 뿐이라 여길는지 모르나, 가와이 하야오 님은, 다른 어느 철학이나 심리학이나 문학보다도 ‘어린이책’에서 빛을 보고 느끼고 껴안습니다. 이 빛을 남김없이 받아먹으며, 냠냠짭짭 즐겁게 받아먹은 다음, 기쁘게 이야기 한 자락을 남깁니다.


.. 이것은 참으로 무시무시한 일이다. 뭔가 ‘유익한 것’, 특히 ‘건강에 유익한 것’이 발견되면 그것이 전체로 퍼져 클론을 제조하는 역할을 한다. 게다가 사람들은 ‘남과 똑같은’ 행동을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 유지되고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과연 진정하게 유지되는 것일까?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존재인 나 자신이 과연 그런 것에 만족해도 좋을까? … 현대인은 일상생활 속에서 바쁘게 움직일 ‘시간’은 있어도, 영혼에 관심을 보일 ‘여유’는 없다 … 충분한 ‘보호’를 뱓는 존재는 영혼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법이다 ..  (144, 165, 235쪽)


 어린이책은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읽는 책입니다. 어린이책은 ‘어린이만’ 읽는 책이 아니기에, 어린이책을 어린이한테만 읽히는 사람은 아주 잘못된 일을 하는 셈일 뿐 아니라, 당신 스스로 좋은 마음밥을 내팽개치는 셈입니다. 어린이책을 어른이 찬찬히 훑고 살피면서 아이한테 ‘가려서 건네지 않는다’면, 아이를 키우는 사람으로서(부모나 교사) 크게 잘못하는 셈입니다. 다만, 아이들이라 할지라도 아이 스스로 읽을 책은 스스로 골라야 하는데, 어버이나 교사 된 사람이 먼저 마음이 뭉클하다고 느낀 책을 보여주면서 건넬 수 있습니다.

 《판타지 책을 읽는다》는 어린이책 가운데 ‘판타지를 다룬 책’이면서 여러모로 손꼽히는 책을 하나하나 파헤치면서, 이 책을 쓴 사람이 얼마나 깊은 마음과 생각을 담았는지 들려줍니다. 이 마음과 생각이 아이들한테 얼마나 아름답고 기쁘게 스며드는 마음과 생각으로 다시 태어나는가를 곰곰이 짚고, 이러한 마음과 생각을 아이들만 받아먹게 하기보다는 우리 어른부터 받아먹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 이 세상에서 쉴 새 없이 일하는 어른들의 눈에는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지만, 사실 어린이나 노인은 그저 존재하고 있는 것, 꿈을 꾸는 것만으로도 어른들이 할 수 없는 중요한 일을 해내는 것이다 … 옛날에는 인간보다 훨씬 더 신비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과학의 힘에 밀려나서 잊혀지고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인간의 영혼이 아닐까? … 교사나 부모 같은 어른들이 어린이를 시험 점수만으로 평가한다면 ‘모든 것이 잿빛’으로 보이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어린이들의 마음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보려 하지 않고 O와 X의 수만 헤아리는 교사가 있다면, 그는 ‘물감의 하늘색과 진짜 하늘색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  (177, 201, 342쪽)


 그러면 ‘판타지 책’이란 무엇일까요. 무엇이 판타지라 할 만할까요. 글쓴이 가와이 하야오 님도 책에 밝히지만, 한자말로 해서 ‘상상’이나 ‘공상’이나 ‘환상’이 판타지가 아닙니다. 생각을 넓히고 넓힌다 하여 판타지라 할 수 없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지 않을 법한 일을 다룬다’고 판타지문학이라 할 수 없다고 못을 박습니다.

 고양이가 하늘을 날든 사람이 하늘을 날든 판타지문학이 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꿈나라를 헤매든 옛날이나 앞날로 날아가서 지낸다고 판타지문학이 될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꿈’이든, 우리가 살아가는 바로 이곳이 있기 때문에 꾸게 되고 생각하게 되고 바라게 됩니다. 현실이 없는 판타지란 없습니다. 현실을 떠난 판타지란 있을 수 없습니다. 현실 때문에 판타지를 빚어내고, 현실이 있기에 판타지를 문학으로 일구며 나눕니다.

 생각날개라 하면 어울릴까 모르겠고, 생각바다라 하면 어울릴까 모르겠습니다. 생각나무나 생각숲, 생각꽃, 생각하늘, 생각나라, 생각구름, …… 또는 꿈날개, 꿈바다, 꿈나무, 꿈숲, 꿈꽃, 꿈하늘, 꿈나라, 꿈구름, ……을 떠올려 봅니다. 터무니없는 일을 바라는 내 삶이 아니라, 나 스스로 바라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길을 여는 내 삶인 판타지를 떠올려 봅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는 누구나 내 삶에 환한 등불이 될 판타지 씨앗을 하나쯤은 품고 있습니다. 우리가 미처 못 느껴서 그렇고, 우리가 제대로 안 알아채서 그러하며, 우리가 스스로 안 돌보기에 그렇습니다만, 우리 마음과 몸에 깃든 판타지는 튼튼히 자라날 밑땅이 거의 없습니다. 우리들 삶은 몹시 돈에 매이고 이름값에 얽히고 권력에 끄달리기 때문입니다. 판타지란, 그러니까 참된 판타지란 나 스스로 홀가분해지는 삶을 깨닫도록 하는 이슬떨이입니다. 나와 함께 어깨동무를 하며 아름다움을 찾고 느끼고 누리고 나누자고 하는 길동무입니다.


..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승이 가르쳐 줄 수 없다. 제자 스스로 체험을 통해 터득하는 수밖에 없다 … ‘○○장관’이나 ‘○○부장’ 또는 ‘○○교수’ 등은 물론 모두 가짜 이름이다. 그것들은 머지않아 덧없이 사라진다 … 그러나 오랫동안 가짜 이름이 지나치게 강한 힘을 발휘하는 바람에 진짜 이름으로 보내는 인생은 사라져 버린 것이다 … 생각해 보면, 결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려운 것은 남녀의 진정한 결합이다. 그 점을 잊고 결혼만 하면 ‘완결’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말썽이 끊이지 않고, 결국 이혼하게 되는 것이다 ..  (287, 318, 328쪽)


 가와이 하야오 님은 당신이 태어나 살았던 일본에서 슬기롭고 빛나는 판타지 씨앗이 자라나기를 꿈꾸었고, 고운 선물을 하나 남기며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와이 하야오 님이 아니더라도 일본에서는 싱그럽고 애틋한 씨앗 하나 남기는 분들이 많습니다. 아쉽게도 우리 나라에서는 우리 스스로 우리 이웃과 우리 아이들한테 고운 씨앗 하나 남기려는 분보다는 큰 돈벌이를 남기려는 분이 많은데, 모쪼록 이러한 책 하나라도 곁에 두면서, 참맛을 알아보고 참멋을 갈고닦을 수 있으면 얼마나 기쁘랴 싶습니다. 판타지 문학은 사랑이며 믿음이며 나눔입니다. (4342.6.24.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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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리족, 하늘과 땅이 낳은 사람들 산하세계어린이 29
세실 모지코나치.클로드 퐁티 글, 조엘 졸리베 그림, 백선희 옮김 / 산하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이 책 하나 107 ― 마오리족이 어른을 섬기고 젊은이는 튼튼했던 까닭
 : 세실 모지코나치, 클레르 메를로-퐁피, 《마오리족, 하늘과 땅이 낳은 사람들》



- 책이름 : 마오리족, 하늘과 땅이 낳은 사람들
- 글 : 세실 모지코나치, 클레르 메를로-퐁피
- 그림 : 조엘 졸리베
- 옮긴이 : 백선희
- 펴낸곳 : 산하 (2009.3.16.)
- 책값 : 9000원



 (1) 옷에 깃들어 길들이는 생각


 2001년부터 즐겨입어 온 반바지 하나가 있습니다. 그무렵은 출판사에 세 해째 몸담고 있던 때라 한 달 일삯을 백만 원 조금 넘게 받았습니다. 이만한 살림이라면 저한테는 돈이 꽤 남아 일삯 2/3를 은행에 집어넣고도 쓸 돈이 제법 남아, 그때까지 꿈으로만 꾸어 오던 ‘조금 값이 비싸더라도 오래오래 입을 질기고 튼튼한 반바지’ 하나 사자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동무 한 사람을 불러(옷을 사러 옷집에 가 보기란 그때로서 아홉 해 만이었니까) 옷집에 찾아갔고, 이만천 원이었든가 만오천 원이었든가 하는 까만빛 반바지를 한 벌 장만했습니다. 웃도리 한 벌까지 해서 이만 원을 조금 더 치렀지 싶군요. 그무렵 입던 반바지는 하나같이 길에서 이삼천 원 하던 녀석이었는데 몇 번 빨래하니 올이 풀리고 법석이 아니라, 제대로 된 반바지 한 벌 갖고 싶었습니다.

 언제나 즐겁게 자주 입고 고이 아끼며 입었는데, 지난 2008년 여름에 허벅지 쪽 실이 닳고 닳아 세 군데가 찢어졌습니다. 그리고 엊그제, 엉덩이 께도 찢어집니다. 어느덧 아홉 해째 입었으니 그럴 만하다 싶습니다. 따로 두꺼운 천을 대야 할까 싶고, 앞으로는 집에서만 입어야 할까 싶기도 합니다. 지난날 이 반바지를 아홉 해 만에 장만했으니, 이번에도 아홉 해를 기려 새로 한 벌 장만해야 할까요.


.. 마오리족은 할아버지들과 할머니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노인들은 말이나 행동에 나무랄 데가 없어야 했다. 젊은이들에게 가르치려면 그래야만 했다 ..  (44쪽)


 날이 따뜻하다 못해 조금 덥습니다. 여름이 코앞이니 마땅한 노릇입니다. 사람들 옷차림은 가볍습니다. 아니, 사람들 옷차림이라기보다 아가씨들 옷차림이 가볍습니다. 젊은 사내나 아저씨들 옷차림은 가볍지 않습니다. 꽤나 많은 남자들은 이 여름에도 긴소매 양복을 입습니다. 속에는 와이셔츠를 받칩니다. 아마 이 양복이나 와이셔츠는 천이 얇고 바람이 잘 들 테지요.

 그러나 서울이든 시골이든 다른 데이든 어디이든 관공서이든 여느 회사이든, 젊거나 늙은 사내들이 한결같이 판에 박은 듯 맞춰서 입는 양복은 제 눈에는 낯섭니다. 양복을 입고 일터를 오가는 분한테는 익숙할 테며 자연스럽겠지만, 저로서는 아직까지 낯설기만 합니다. 더운 여름날 왜 온몸을 이리도 꽁꽁 싸매는 까만 빛 천으로 둘러대야 할는지요. 옷이름에도 나타나듯이 어이하여 ‘서양옷(洋 + 服)’을 입어야만 회사원이 되고 공무원이 되고 사무원이 될 수 있는지요. 서양옷을 입지 않으면 영업을 하러 다니면서 버르장머리가 없는 노릇인가요. 서양옷을 갖춰입고 책상맡에 앉아야 머리가 술술 풀리고 일을 한껏 북돋울 수 있습니까.

 그런데 중고등학교 아이들 옷차림도 ‘어른 서양옷 차림’하고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한테도 어릴 적부터 ‘서양옷이 다소곳함을 지키며 갖춰입는 옷’이라고 못박듯 길들이는 셈입니다. 우리 나라 날씨는 해마다 뜨거워지면서 벌써부터 30도를 오르내린다고 하는데, 그나마 여학생은 치마길이를 줄여 시원하다(여학생들은 시원하려고 치마길이를 줄이지 않습니다만) 싶도록 옷을 입는다 하는데, 남학생은 긴바지를 싹둑 잘라 반바지로 입을 수 없고, 스스로 입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 마오리족은 자연을 사랑하고 존중한다. 자연은 생명과 풍요로운 원천이기 때문이다. 숲은 사냥꾼들에게 사냥감을 주고, 사람에게 카누와 집을 만들 나무를 주며, 새들에게 멋진 깃털을 준다 ..  (67쪽)


 디제이 디오시가 부른 노래가 아니더라도, ‘청바지 입고 회사에 못 갈’ 까닭이 없고, ‘반바지 입고 동사무소에서 일 못할’ 까닭이 없습니다. 중고등학교 아이들이 교실에서 ‘소매없는 웃도리’를 입거나 ‘아예 웃통을 벗은 채’ 공부를 하지 말란 법조차 없습니다. 회사원은 회사일을 잘해야 할 노릇이요, 공무원은 동네사람 일을 잘 다스려야 할 노릇이며, 아이들은 스스로 무엇을 익히고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잘 삭일 노릇입니다.

 고리타분한 울타리에 갇힌 어른들은 ‘보기에 나쁘다’라든지 ‘점잖지 못하다’라든지 ‘버릇이 없다’고들 말씀하지만, 너무도 터무니없는 소리요 웃기는 소리일 뿐입니다. 왜냐고요? 교사가 장님이라면 어떻습니까. 앞을 못 보는 사람이 교사라면 어떻습니까.

 헤엄터에서는 헤엄옷을 입고 알몸헤엄터에서는 알몸으로 있어야 ‘올바름’이듯, 제도권학교에서는 ‘서양옷과 똑같은 학교옷’을 갖춰 입어야 올바름이라고도 합니다. 따지고 보면 이 말이 맞습니다. 왜 그러느냐면, 오늘날 우리네 학교는 자유롭고 평화롭고 평등하며 통일과 민주가 살아숨쉬는 배움터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입시지옥을 코앞에 둔 ‘시험 전투원’이 ‘볼펜이라는 총칼’을 들고 ‘옆자리 짝꿍을 적군으로 삼아 무찔러 쓰러뜨리’도록 길들어 가는 감옥소하고 똑같은 얼거리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이런 감옥소 같은 학교라 할지라도, 아이들 앞에서 ‘창의’니 ‘창조’니 ‘상상’이니 ‘교육’이라는 겉발린 말이라도 읊조리고자 한다면, 더운 여름날에는 더위를 식힐 수 있게끔 ‘반바지 민소매 학교옷’도 만들어야 하지 않느냐 싶을 뿐입니다. 유치원이나 어린이집 아이들 여름옷은 한결같이 반바지인데(때로는 초등학교 여름옷도), 중고등학교부터는 긴바지만 입어야 한다면 앞뒤가 어긋날 뿐더러, 사람몸에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 타네 신이 이 자리에 모인 새들에게 말했습니다. “투이야, 너는 땅으로 내려가기를 그토록 겁냈으니 비겁함의 표시로 목에 흰색 깃털 두 줄을 달아 주마. 발을 적시는 게 싫다고 한 푸케코는 평생 동안 축축한 습지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둥지를 만드느라 바쁘다는 피피와로로아, 너는 앞으로 둥지를 지을 필요가 없을 거다. 남의 둥지에다 알을 낳게 될 테니까. 하지만 키위야, 너는 희생의 대가로 이 나라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사랑받는 새가 될 것이다.” ..  (71쪽)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아이들한테 긴소매 긴바지 서양옷을 갖춰입히려는 분들 스스로 한여름에도 긴소매 긴바지 서양옷을 갖춰입습니다. 대학교수이건 초중고등학교 교사이건 마찬가지입니다. 당신들 스스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긴소매 긴바지 서양옷을 갖춰입습니다. 그래야만 ‘배우는 아이들 앞에서 다소곳함을 지킨다’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남학교 교사들은 런닝셔츠 바람에 긴바지는 무릎 위까지 걷어올린 채 수업을 하는데,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당신들 스스로 견디지 못하면서, 당신들 스스로를 사로잡거나 얽어매는 무시무시하고 무거운 쇠사슬을 끊지 않습니다.

 서양사람은 북중남미 대륙을 식민지로 삼아 영국말, 프랑스말, 스페인말, 포르투갈말만 쓰도록 얽어 놓았으며, 뉴질랜드와 호주 또한 영국사람 문화가 스며들도록 했습니다만, 알고 보면 이 나라 대한민국에도 구석구석 영국 문화, 그리고 영국에서 떨어져 나가며 새로 세웠다는 미국 문화가 뿌리내리도록 했습니다. 다만, 우리들은 한글과 우리 말이라는 지푸라기 하나를 놓지 않았을 뿐입니다. 말마디와 글줄을 빼놓고는 온통 잡아먹혔습니다. 그나마 이 말마디와 글줄조차 아이들이 갓 태어나자마자 영어에 미쳐 버리도록 몰아세우고 있습니다만. 
 





 (2) 삶에 깃들어 길들이는 생각


 동네 골목집이 사라집니다. 하나둘 아파트로 바뀝니다. 아파트로 바뀌지 않더라도 동네 골목집 짜임새와 얼거리는 우리네 살림집은 아니었습니다. 겉모양도 그렇고, 속내도 아니었습니다. 껍데기는 기와 얹은 집이요 풀 얹은 집이라 할지라도 속내에는 서양 살림집 차림이었습니다.

 서양사람이 처음 만들고 이 나라 사람이 고쳐 만든 갖가지 전자제품과 살림살이가 들어차 있습니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쓰고 밥사발을 쓴다지만, 이런 수저와 밥그릇 어디에도 한글이 적히는 일이란 없습니다. 한국사람이 만들어 한국사람한테 팔고 한국사람이 한국땅에서 쓰는 한국 물건이라 하지만, 이런 한국 물건에 한국말이 한국글로 당차게 적히는 일이란 찾아볼 수 없습니다.


.. 하지만 마우이가 등을 돌리기 무섭게 형들은 물고기에 달려들었습니다. 살점을 마구 뜯어내고, 자르고, 토막 냈지요. 가엾은 물고기는 아파서 몸을 비틀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뉴질랜드 북섬의 산들이 일어서고 계곡들이 패인 것입니다. 물고기를 닮은 이 섬을 이곳 사람들은 ‘테이카 아 마우이’, 즉 ‘마우이의 물고기’라고 불렀습니다. 뉴질랜드 전체는 마오리어로 ‘아오테아로아’라고 부르게 되었지요 ..  (35쪽)


 사람들이 몰고 다니는 자동차에 한글이름이 붙지도 않지만, 한글로 적더라도 속살은 서양말입니다. 한국사람끼리 주고받는 이름쪽에 어김없이 알파벳으로도 찍는 한편, ‘손전화’까지는 바라지 않으나 ‘핸드폰’이라고 한글로 적는 사람조차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제는 거의 안 씁니다만, ‘비퍼’ 아닌 ‘삐삐’라는 우리 말로 이름쪽에 글을 박는 사람을 ‘영어도 모르는 시골놈!’이라며 우습게 깎아내리던 일은 먼 옛날이 아닙니다. 회사이름이건 운동경기 선수단이건 오로지 서양말로 제 이름을 갈아치우거나 갈아입습니다. 학교 아이들이 타는 버스이니 마땅히 ‘학교버스’인데, ‘학교버스’라 말하는 학교는 없습니다. ‘스쿨버스’일 뿐입니다. 그러면, 이참에 학교이름도 아예 ‘스쿨’로 바꿀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제발 그만 좀 때려!” “네가 미친 듯이 빨리 하늘에서 돌기 때문에 사람들이 무척 괴로워하고 있어. 그러니 앞으로 천천히 돌겠다고 약속하면, 너를 놓아 줄게. 하루가 길어지면, 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일에 열중할 수 있게 될 거야. 그러면 사람들은 네 친구가 되어 줄 거야.” 기운이 빠지고 상처를 입은 태양은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제야 마우이는 형들에게 태양을 놓아 주라고 말했습니다. 이날부터 태양은 하늘에서 천천히 움직였고, 햇빛은 따스하고 유익한 빛이 되었답니다 ..  (40쪽)


 적잖은 글쟁이와 예술가 들께서 ‘우리 말이 아름답다’고 외치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헛웃음이 나오곤 합니다. 그토록 아름다운 말이라 한다면, 왜 당신들 스스로 ‘그 아름다운 말로 문학을 하건 책을 쓰건 예술을 하건’ 안 하는지 알 노릇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말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돈벌이가 되는 일거리는 아니라서, 돈벌이는 돈벌이대로 서양말로 잔뜩 뽐내면서 하고, 멋부리면서 서양차 한 잔 즐길 때 가끔 시를 읊듯 읊는 소리인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그 아름답다는 말이란 누가 쓰는 말인 줄 모르지 않으랴 싶습니다. 그 아름답다는 말이란 지식인이라든지 많이 배운 사람이 쓰는 말이 아닌 줄을 못 깨달았으리라 봅니다. 요사이야, ‘김수영 시인이 느낀 저잣거리 장사꾼 아지매와 할매가 쓰는 말’마저 텔레비전 연속극과 우스갯소리에 물들고 찌들어 참맛과 참멋을 잃었습니다만, 아름답다고 하는 말이란 바로 저잣거리에서 떠도는 말입니다. 길바닥에서 오가는 말입니다. 논두렁과 밭두렁을 넘나드는 말입니다. 바닷물결을 타고 시냇물결을 타는 말입니다. 새와 함께 지저귀고 들짐승과 함께 우짖는 말입니다.


.. 라타는 가장 좋은 연장들을 가져와서 곧바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라타는 기운은 넘쳤지만 인내심이 부족했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을 깜빡했지요. 조상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신성한 원칙을 잊었던 겁니다. 그건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나뭇잎 하나를 자르더라도 그 전에 식물들에게 왜 그래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나무나 식물의 마음이 다치지 않고, 숲이 평화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지요 … 수많은 새들과 곤충들이 풀밭에 누운 나무 위로 후드득하며 구름처럼 날아올랐습니다. 이들은 숲의 신인 타네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존중하지 않는 라타에게 화가 났던 것입니다. 자기들의 형제를 잘라내면서 허락도 받지 않았으니까요. 이들이 한목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오, 라타, 이 나무를 가만 내버려 둬. 제발 가만 놓아 둬. 나무 부스러기들이 날아오르고 뿌리들이 날아올라 다시금 모여들어 나무가 된다네 …….” ..  (59, 63쪽)


 엄마와 아빠가 살아간 대로 딸과 아들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엄마와 아빠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대로 딸과 아들도 세상을 받아들입니다. 그렇지만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다만, 엄마와 아빠는 딸과 아들한테 오래도록 제 삶을 길들여 놓습니다. 맞추어 놓습니다. 물려주고 이어주고 내려줍니다. 엄마와 아빠가 읊는 말투가 아이들 말투가 되고, 엄마와 아빠가 즐겨먹는 밥이 아이들 즐겨먹는 밥이 됩니다. 집에 갖추어 놓은 엄마와 아빠 책대로 아이들은 책을 만납니다. 자동차마실을 즐기는 엄마와 아빠라면, 아이들은 자동차 타기를 아주 마땅히 받아들이며 저희들도 나중에 스스로 차를 장만하여 몰고자 합니다. 자전거마실을 즐기는 엄마와 아빠라면, 아이들은 스스로 자전거를 즐겨탈 뿐 아니라, 자가용 한 번 얻어탈 때 대단히 고마워할 줄 압니다. 늘 걸어다니고 때때로 버스나 전철을 타는 엄마와 아빠라면, 아이들은 스스로 걷기를 즐기며 걷는 동안 부대끼는 사람과 삶터를 깊이 돌아볼 줄 아는 가운데, 어쩌다가 자가용을 얻어타면 참으로 고맙게 여길 줄 압니다.

 돈으로 살아가는 어버이는 돈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길들입니다. 사랑으로 살아가는 어버이는 사랑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가르칩니다.

 저 혼자 하는 생각인지 모릅니다만, 이 나라에서 예부터 오래오래 살아온 사람들은 돈으로 딸아들을 낳아 기르지 않았다고 느낍니다. 딸아들을 돈을 생각하면서 낳고 기른 어버이는 옛날에도 있기는 있었을 테지만, 오늘날처럼 갑작스레 늘어나지는 않았으리라 느끼고, 또 오늘날처럼 아주 미쳐날뛰듯 돈에만 눈알이 돌아가는 흐름을 키우지도 않았으리라 느낍니다. 서양사람이 북중남미 대륙과 아프리카와 아시아 땅으로 쳐들어오고 난 다음부터라고만 말하기는 뭣하지만, 이무렵부터 아주 크게 돈바람이 휘몰아치면서 우리들은 하나같이 넋이 나가고 얼이 빠지고 있습니다.
 





 (3) 《마오리족, 하늘과 땅이 낳은 사람들》이라는 책


 어린이책 《마오리족, 하늘과 땅이 낳은 사람들》을 읽습니다. 어린이책인 만큼 글씨는 시원시원합니다. 금세 읽힙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뿌듯해진 가슴으로 책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읽는 아이들마다 가슴에 무엇인가 뿌듯하게 남을 수 있다면, 이 책을 손에 쥐도록 이끈 어버이들한테도 가슴에 무엇인가 뿌듯하게 남을까 하고. 어버이 스스로 가슴에 무언가 뿌듯하게 남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책을 스스로 찾아 읽지는 않겠지 하고.


.. 150여 년 전, 뉴질랜드에서 마오리족과 영국인들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마오리족은 이미 오래 전부터 뉴질랜드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국인들이 새로운 땅을 찾아 오랜 항해를 거친 끝에 이곳에 이르게 된 것이지요. 영국인들에게 난데없이 지배받게 된 마오리족 사람들은 몹시 화가 났습니다 … 마오리족의 족장들은 속담을 이용하거나 신화와 전설을 끌어들이면서 걱정과 분노를 표현했습니다 ..  (7∼8쪽)


 우리는 북미 토박이 이야기를 꽤나 찾아서 읽습니다. 중남미 토박이 이야기도 퍽 찾아서 읽고 노래도 제법 찾아서 듣습니다. 아프리카 토박이며, 인도 토박이며, 호주 토박이며, 태평양 섬나라 토박이 이야기며 줄줄이 찾아서 읽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 나라 토박이 이야기는 거의 찾아 읽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 토박이 노래는 한 줌조차 찾아 듣지 않습니다.

 우리네 여느 이야기는, 우리네 살아온 이야기는, 우리네 삶터를 이룬 옛이야기는 조금도 찾아 읽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단군신화’로 두루뭉술하게 엮어낼 뿐이고, 그나마 ‘그리스로마신화’에 단단히 짓눌려 있습니다. 게다가 ‘신화’라는 사슬을 차고 ‘역사’로 자리매김하지 않습니다.

 하기는요, 이 나라에서 ‘역사’라 하면 임금님 이름 외우기하고 땅따먹기하던 발자국을 넘어서지 않습니다. 가야사람이 어느 곡식을 농사지으며 밥상은 어떻게 차렸는지가 역사책에 적히지 않습니다. ‘한국문화사’에도 이러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고구려사람 옷차림과 신발 이야기가 ‘한국문화사’는커녕 ‘한국사’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물레를 잣고 디딜방아를 밟으며 곡식을 까부르는 이야기는 문화로도 예술로도 역사로도 담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물레를 잣고 디딜방아를 밟으며 곡식을 까부르는 ‘북중남미 토박이와 아프리카 토박이와 인도 토박이와 태평양 토박이’ 이야기는 ‘아주 훌륭하고 거룩한’ 이야기로 떠받들면서 사랑하고 아끼고 믿고 보듬습니다.


.. 마법의 잠에서 깨어난 대제사장은 자신이 납치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애처롭게 신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티니라우는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투우루우루가 좋아하는 고래인 투투누이를 죽인 사람이었으니까요. 티니라우는 그 자리에서 제사장을 때려죽인 다음, 그대로 먹어 버렸습니다. 티니라우는 이렇게 투투누이에게 복수했습니다. 이때부터 인간들 사이의 전쟁과 식인 풍습이 생겨난 것이랍니다 ..  (88쪽)


 《마오리족, 하늘과 땅이 낳은 사람들》에 담긴 이야기가 허술하거나 모자라거나 달갑지 않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마오리족, 하늘과 땅이 낳은 사람들》에 담긴 이야기는 대단히 재미있고 눈물겹고 짠합니다. 기쁘고 놀랍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쯤은 우리한테도 얼마든지 있다는 소리일 뿐입니다. 우리 스스로 제대로 찾아내어 적바림하지 않았고, 애써 찾아내어 적바림한 사람들 손품은 거의 보람없이 사라지고 있다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아직 몇 군데 드문드문 살아남아 버티고 있는 ‘오래된 골목동네’를 어떻게 간수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가장 가까운 곁에 있는 살갑고 푸진’ 이야기를 캐내고 가슴으로 느끼면서 고운 보배로 키울 수 있기도 하지만, 가뭇없이 사라지도록 내팽개칠 수 있습니다. 우리 두 손으로 넉넉한 곡식을 거두어들여 기쁘게 이웃과 나눌 수 있는 한편, 알맹이인지 쭉정이인지 알아채지 못하는 가운데 나라밖 사람들 뒤꽁무니만 좇다가 길잃은 사금파리 한 조각이 될 수 있습니다. (4342.5.28.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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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쌀알
민퐁 호 지음, 최재경 옮김 / 달리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이야기로만 놓고 본다면 별 다섯을 주고 싶지만, 번역과 오탈자가 너무 많았고, 책값 12000원짜리로 만들기보다는, 이야기답게 수수하고 가벼운 책으로 엮었다면 얼마나 좋았으랴 싶은 마음에 별 하나를 덜어 넷만 붙인다................ 아쉽다.



 이 책 하나 105 - 밥 한 그릇, 농사꾼, 지식인, 군대
 : 민풍 호, 《아버지의 쌀알》



- 책이름 : 아버지의 쌀알
- 글 : 민풍 호
- 옮긴이 : 최재경
- 펴낸곳 : 달리 (2009.4.17.)
- 책값 : 12000원



 (1) 밥 한 그릇과 내 삶


 어머니한테서도 배우는 삶이요, 아버지한테서도 배우는 삶입니다. 아름다운 삶도 배우며, 얄딱구리한 삶도 배웁니다. 아름다운 삶을 저버리기도 하지만, 얄딱구리한 삶을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밥을 먹으며 밥알 하나 남기지 않습니다. 바닥에 떨어뜨렸어도 주워먹습니다. 옆지기도 밥알을 남기지 않습니다. 바닥에 떨어뜨린 먹을거리를 모두 주워먹지는 않으나, 집에서는 으레 주워먹습니다.

 언제부터 이러했는지는 잘 모릅니다. 다만, 아주 어릴 적부터 밥알 하나까지 다 비워야 비로소 밥을 다 먹은 셈이었으며, 조금이라도 남기면 구두주걱이나 어떤 몽둥이로 맞았다는 일은 떠오릅니다.

 맞으면서 배우는 일이란 좋지 않습니다. 맞으면서 가르치는 일도 좋지 않습니다. 지난날 우리 삶자락은, 어버이가 아이를 손찌검과 몸둥이로 다스렸다고 하더라도 이런 가르침과 배움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집뿐 아니라 학교와 마을에서도 온통 손찌검과 몽둥이질만 있다면, 아이들은 아이 깜냥껏 생각힘을 키우지 못합니다.


.. 그 노래는 벼에 관한 노래였다. 그 노래는 볍씨를 뿌리고, 모판에 모종을 기른 다음 새로 갈아둔 논에 조심스럽게 모를 옮겨 심는 과정을 노래했다. 그 노래는 잡초를 뽑고, 물을 주고, 벼 포기가 높이 자라나 초록빛으로 물들기를 기다리고, 그런 다음 잘 익어 누렇게 말라가는 과정을 노래했다. 또한 추수하고, 타작하고, 키질하고, 쌀을 빻는 나날, 그러니까 한 공기의 쌀밥이 만들어지기까지를 노래했다 ..  (41쪽)


 지난날에는 잘 몰랐습니다. 이제 와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이곤 합니다. 그무렵 그렇게나 손찌검과 몽둥이질이 흔해빠진 까닭은, 다름아닌 군사독재라고 하는 서슬 퍼런 몹쓸 정치가 한몫 단단히 했습니다. 남과 북이 서로 으르릉거린다는, 아니 가난에 찌든 북녘 빨갱이가 남녘을 잡아먹으려고 더러운 침을 질질 흘리면서 노려보고 있다고 하는, 새빨간 거짓말이 거짓말 아닌 참말로 여겨지던 문화가 크게 한몫했다고 깨닫습니다.

 틀림없이 북녘에서는 간첩을 남으로 보냅니다. 간첩배도 보내고 미사일도 쏩니다. 그러면 남녘은 무엇을 할까요. 남녘에는 미국에서 가지고 온 핵무기를 곳곳에 숨겨 두고 있었습니다(저 같은 꼬맹이는 나중에 머리통이 굵어진 다음에 비로소 알았습니다만). 남녘에서도 북으로 간첩을 보냅니다. 다만, 남녘이 보내는 사람은 ‘북파공작원’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지난 정권 때에야 비로소 ‘북파공작원’이 있음을 나라에서 밝혔습니다만, 북녘이 남으로 보낸 간첩 숫자 못지않게, 남녘이 북으로 보낸 간첩이란 대단히 많았습니다. 저는 군대에서 세월을 보내던 1995∼97년에 북파공작원을 처음 알았는데, 그때 제가 있던 강원도 양구 산골짜기 군부대에는 “북파공작원으로 뽑아들여 가르치려 하다가 부적격판정을 받은 ‘무연고 입대차출자’(법에 따르면 군복무예외자이나 배운 것 없고 연고도 없어 말 않고 군대로 뽑아들인 사람)”가 제법 많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운명이라면 운명이고 재수가 없다면 재수가 없는 노릇이겠지요. 저는 눈과 코가 안 좋아, 군입대 신체검사에서 면제를 받았어야 할 몸입니다. 그렇지만 줄을 잘못 선 탓에 군대에 끌려갔고, 군대에 끌려가서도 남녘땅 군부대에서 가장 깊숙한 데로 꼴아박혔으며, 이렇게 꼴아박힌 탓에 ‘어느 책에도 안 나온 갖가지 군대 비리와 잘잘못’을 몸소 부대끼고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릴 적 살던 옛동네 이웃 아저씨가 우리 꼬맹이(국민학생이었을 때라서)를 둘러앉히고 당신이 북파공작원으로서(그때에는 북파공작원이라 하지 않고 유디티라고 말씀했습니다) 몰래 북녘으로 들어가서 평양에도 가고 김일성궁에도 가고 뭐도 하고 했다는 이야기를 입을 쩍 벌린 채 듣던 일이 무엇을 뜻했는가를 군대를 마치면서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북파간첩이건 북파공작원이건 또 알파벳으로 줄여 가리키는 무슨 이름이건, 또 남파간첩이건 남파공작원이건 또 무슨무슨 이름이건, 우리 세상은 더없이 뒤죽박죽이요 숨겨진 것투성이에다가 뒤틀린 얼거리일 뿐임을 차츰 느꼈습니다.


.. 천천히 인톤은 자신의 논 두 군데서 수확한 벼를 탈곡한 쌀더미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자신을 촘촘히 둘러싼 사람들은 전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인톤은 한 줌 가득 쌀을 퍼서는 쌀알을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게 했다. “올해로 50년째야.” 특별히 누구에게 한 말은 아니었다. “내가 이 논에서 벼농사를 지은 지가. 그리고 50년 동안, 내가 키운 곡식의 절반을 빼앗겨 왔어.” 인톤은 눈앞에 펼쳐진, 햇볕 아래 그루터기만 남은 채 메말라 있는 논을 바라보았다. “난 이 논에 대해서라면 구석구석 모르는 게 없지. 내가 갈아엎고, 파종하고, 김을 매고, 비료를 주고, 수확하고, 그 벼를 탈곡해서 쌀을 얻었으니까. 난 이 땅을 내 땅처럼 생각했어.” 인톤의 눈에서 꿈꾸는 듯한 빛이 사라지더니, 별안간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띱.” 인톤이 가장 친한 친구에게 말을 건넸다. “자네의 그 1만 평방미터가 넘는 땅 말인데, 그거 자네 땅처럼 생각하지 않아?” 룽 띱이 고개를 끄덕였다 … “사실은 그렇지 않지. 저기 보이는 저 땅은 우리 소유가 아니라 손가락에 흙 한 톨 묻혀 본 적이 없는 어떤 사람의 것이지. 매년 우리가 수확한 곡물의 절반을 가져가는 작자 말이야 … 왜일까? … 왜 우리가 그렇게 많이 주어야 하지? 우리 자신과 우리 아이들이 먹을 것도 충분하지 않을 때조차 말이야. 왜 우리는 그렇게 용기 없고, 멍청하고, 고분고분해야만 하는 거지?” ..  (126∼128쪽)


 군대라는 곳은 군대 나름대로 저를 여러모로 가르쳤습니다. 어머니는 어머니 나름대로 저를 가르쳤고, 아버지는 아버지 나름대로 저를 가르쳤어요. 아버지는 제가 김치를 안 먹는다고 밥상머리에서 윽박지르기만 하였고, 어머니는 아버지 눈치를 보아 가며 김치를 억지로 먹이려 하시면서도 맵지 않은 김치를 얹어 주시곤 했습니다.

 나이가 들어 이제는 어릴 적처럼 밥상머리에서 꿀밤이나 회초리를 맞지 않아도 된 이즈음 제 밥버릇을 돌아봅니다. 저는 매운 먹을거리를 못 먹습니다. 고추장은 곧잘 즐기긴 했어도 고추는 못 먹습니다. 고추가루 또한 젬병입니다. 이제는 고추장에도 거의 손을 안 댑니다만, 하얀김치는 먹어도 빨간김치는 속이 뒤집어집니다. 찬국수 또한 몸에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런 제 배속인 탓에 찬국수 물뿐 아니라 동치미 물도 몸에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한국사람이 어찌 찬국수나 동치미를 못 받아들이느냐 한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똑같지 않잖아요. 얼굴과 몸매와 목소리만 다른 사람이 아니라, 생각과 마음과 넋만 다른 사람이 아니라, 몸속 얼거리도 다릅니다. 어떤 이는 허파가 좋아 오래 달려도 안 지칩니다. 어떤 이는 팔심이 좋다든지, 어떤 이는 간이나 염통이 안 좋다든지 합니다. 저 또한 배속 얼거리가 여느 사람과 같지 않아 ‘빨간 양념’이 깃든 반찬은 아예 손을 댈 수 없는 몸입니다. 다만, 이런 제 몸을 우리 아버지나 어머니는 조금도 알아채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알아채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군대에서 밥을 어찌 먹었느냐 궁금해 하실 분이 있으리라 봅니다. 네, 군대에서는 참말 아무 걱정 없이 밥을 먹었습니다. 제가 몸담은 군부대는 가장 ‘끄트머리에 처박힌 곳’인 탓에, 언제나 보급품은 ‘윗줄에서 다 잘라먹’어 주시면서, 찌끄레기 가지고 밥을 해 먹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군대란 데가 요즈음도 그리 나아지지 않았고, 예전에는 더 나빴잖습니까. 때때로 ‘빨간 깎두기’나 ‘빨간 배추김치’가 턱없이 모자란 만큼이기는 했지만 배급으로 티끌만큼 오기는 했으나, 우리가 쓸 수 있는 ‘빨간 양념’은 거의 없었고, 이런 까닭에 어떤 반찬도 ‘빨간 물’이 들지 않았으며, 게다가 된장국(찌개 아닌 멀건 국)은 양배추를 숭숭 썰어 때깔만 누런 국물이기만 했습니다. 다만, 군부대는 깊디깊은 산골짜기였기 때문에, 사단장이나 연대장이나 군간부들이 들이닥칠 때마다 ‘취나물 사역’을 해서 몇 마대씩 갖다 바쳤는데, 이러한 일을 겪으며 우리들(군인)은 우리 먹을거리를 산에서 얻는 슬기를 몸에 익혔습니다. 이러면서 저 또한 비로소 제 몸에 맞는 먹을거리란 들과 산에서 나는 나물임을 알았고, 날로 먹는 나물이나 살짝 데친 나물만큼 제 몸이 좋아하는 먹을거리가 따로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 빈민가를 통과하는 동안, 진다는 이상하게 편안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아기 엄마들이 방금 목욕을 시킨 아기들의 얼굴에 하얀 밥풀을 발라 주고 있는 것이 보였다. 늙은 남자들은 시골 사람들이 흔히 하는 방식대로 난초나 레몬그라스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소년들은 남들이 보는 곳에서 샤워를 했고, 머리에는 하얀 비누거품이 덮여 있었다. 이 지역은 방콕에 속해 있지만,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시골 출신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치 그들은 대도시의 한가운데에 자기들만의 임시 마을을 만들어 둔 것 같았다 ..  (218쪽)


 저와 오래 사귀어 온 동무라고 해서 제 몸을 잘 헤아려 주지 않습니다. ‘빨간 물’ 든 먹을거리는 손도 안 대는 제 밥버릇을 모르고, 찬국수 물을 마시면 곧바로 배탈이 나 여러 날 죽은 듯 엎어져야 하는 줄 모르기 일쑤입니다. 우스갯소리를 하자면, 누군가 저를 괴롭히고 싶다면 빨간김치와 찬국수를 하루에 한 번씩만 먹여도 됩니다. 저한테 이보다 더 끔찍한 고문이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밥버릇을 깨닫고 나니, 저 스스로 그리 달갑지 않게 여기던 제 몸을 바로보면서 제 몸을 옳게 사랑하는 길을 찾았습니다. 내 몸이 이러하다면 다른 사람들 몸은 어떠할까 하는 데로 눈길을 뻗칠 수 있었습니다.

 제 몸이 여느 사람들 몸과 비슷하거나 같았다면 깊이 생각하지도 않았을는지 모르고, 그렇다 하여도 깊이 생각했을는지 모르나, 아주 오래 걸려서야 비로소 이웃을 생각하지 않았으랴 싶고, 생각한다고 해 보아야 그지없이 더디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몸이 아플 때 내 몸뿐 아니라 나보다 더 몸이 아플 사람들 마음앓이와 몸앓이를 돌아본다고 하듯, 저 또한 제 몸에 깃든 온갖 모습을 느끼면서 이웃사람 마음앓이와 몸앓이를 살포시 들여다보는 눈을 기를 길머리를 텄습니다. 이 길머리는 어떤 높거나 대단한 학문자리보다는, 우리가 늘 부대끼는 가장 낮으면서 너른 자리에서 터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이를테면, 농촌봉사활동이라는 자리에 가는 동무나 선후배 가운데, ‘몸쓰는 고된 일은 마다 않는다’고 하면서도, 고맙게 받아먹는 밥상에서 밥알과 반찬을 깨끗이 비우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데에서 몸과 마음이 동떨어지거나 생각과 몸가짐이 어긋나는 대목을 느꼈습니다. 입으로는 진보니 개혁이니 떠들어도 술자리나 밥자리에서 젓가락으로 들쑤셔 놓고 다 비우지 않아 ‘밥쓰레기’가 잔뜩 나오도록 하는 분들 모습을 보며 언제부터인가 ‘밖에서 사람을 만나는 날’에는 빈 도시락통을 챙겨 ‘남는 안주나 반찬이나 밥’을 옮겨 담아 제가 집으로 가져가서 먹는 버릇을 들였습니다.


.. “정의라구요!” 진다는 격렬하게 말했다. “오빠는 정의를 맛볼 수 있나요? 평등을 냄새 맡을 수 있나요? 오빠가 말하는 그 모든 멋진 말들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죠? 난 내가 맛볼 수 없고, 냄새 맡을 수 없고, 내 손에 쥘 수도 없는 것들을 위해 내 인생을 걸 수는 없어요. 비 온 뒤의 흙이라면 너무나 촉촉해서 달콤한 냄새를 풍기죠, 그리고 타마린드 순도 우리의 혀에 환상적인 맛을 남기죠. 이러한 것들은 진짜예요. 난 이러한 것들을 위해서만 살 거예요 … 난 오빠가 나와 함께 살았으면 좋겠어요. 아버지가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일하길 바라요. 그래요, 통통한 아기들도 몇 명 함께 낳아서 키우고 싶어요. 난 살고 싶어요. 그리고 곡식을 기르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그게 그토록 잘못됐나요?” ..  (320∼321쪽)


 냉장고를 안 쓰는 삶은 옆지기가 가르쳐 주었습니다. 저한테 있던 작은 김치냉장고는 먹을거리를 담는 통이라기보다 물과 술을 시원하게 마실 수 있게끔 간수하는 통이었습니다만, 물 마시는 버릇을 조금씩 찬물 아닌 여느 물로 바꾸었고, 찬술을 마시고 싶다면 그때그때 구멍가게에서 사 오면 됨을 익혔습니다. 가게에서는 언제나 냉장고를 돌려야 하니, 냉장고를 쓰더라도 하나라도 덜 쓰도록 해야 한달까요. 그리고 우리 먹을거리는 틈틈이 저잣거리 마실을 하면서 꼭 그날이나 그 이듬날까지 먹을 만큼만 장만하고요.

 냉장고에 그득 채워 넣는 삶이 되면 더 싼 먹을거리를 찾을밖에 없고, 더 싼 먹을거리를 찾는다 하여 ‘먹을거리 사는 데 쓰는 돈이 줄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먹을 부피보다 더 사들이게’ 되고, 이렇게 싼값에 더 사들이면서, 나라안 농사짓기로는 부피가 모자라서 나라밖에서 곡식을 사들이는 얼거리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으레 ‘중국산-국산’을 따집니다만, 우리 삶자락은 일찌감치 ‘중국산 없이 못 살게’ 되었습니다. 국산만으로 우리 밥상을 차릴 수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이 나라 농사꾼이 거둔 곡식만큼 밥을 먹자면, 우리 스스로 씀씀이를 줄여야 합니다. 냉장고를 버려야 합니다. 그날그날 먹을 만큼만 알맞게 장만해서 먹어야 합니다. 이러는 가운데 갖가지 농약과 비료를 쓰며 농사꾼 스스로를 괴롭히는 농사가 되지 않도록 하자면 생활협동조합에 한손을 거들어야 하며, ‘돈 많은 이들이 사먹는다는 비싼 유기농’이 아니라 ‘돈 적은 이들 스스로 알맞는 값에 함께 나누는, 이러는 가운데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한테 기쁜’ 틀거리를 더욱 튼튼히 다지는 일을 도와야 합니다.


.. “불쌍한 벼 포기들 … 난 벼 포기들이 계속 초록색이었으면 좋겠어요.” 아버지가 웃음을 터뜨렸고, 그 웃음은 시원한 바람처럼 그녀의 뒤통수를 간질였다. “하지만 계속 초록색으로 있으면 씨를 맺을 수 없단다, 꼬마야. 그리고 씨앗들이 없이는, 벼가 다음해에 곡식을 만들 수 없고, 어른 벼들이 죽어야만 새로운 벼들이 그 뒤를 이어서 다시 자랄 수 있는 거란다.” “왜요?” “삶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란다. 늙은 생명들이 그들의 힘을 포기해야만 새로운 생명들이 자랄 수 있지.” “왜요?” “그게 바로 생명이 이어지는 방식이니까.” “하지만 왜요?” “왜요, 왜요, 왜요!” 아버지는 껄껄거리며 진다를 들어올려 공중으로 몇 번 던졌다 받았다 했다. 심장이 멎을 듯 아슬아슬한 순간 동안, 그녀는 갈색 들판 위로 날아올랐다가, 다시 자신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튼튼한 팔을 향해 날아갔다. “왜냐고? 왜냐하면 아버지가 널 사랑하기 때문이지. 그게 바로 이유란다!” ..  (344∼345쪽)


 그렇지만 꽤 많은 분들은, 이들 가운데 대단히 많은 숫자를 차지하는 ‘스스로 진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나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생협을 가까이하지 않고, 찾아보려 하지 않으며, 어깨동무하려 하지 않습니다. 으레 바빠서 날마다 저잣거리 마실을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왜 바쁜 줄 생각하지 못하고, 그렇게 바쁘도록 매인 일이 무엇인지 헤아리지 못하며, 나 스스로 아름다운 진보를 이루어 내는 삶이 아니라면 세상사람한테도 아름다운 진보를 나눌 수 없음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아마, “밥이 하늘이다”라든지 “밥 한 그릇에 우주가 담겼다”라든지 “밥 한그릇에 담긴 즐거움과 고마움” 같은 말은 누구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밥이 왜 하늘이며, 밥 한 그릇이든 나락 한 톨에든 왜 우주가 담겼는지 깨달아 보고자 나서는 몸짓은 거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가만히 살피면, 다른 사람을 말하기 앞서 저부터 그러하였습니다. 어릴 적부터 몸에 밴 ‘밥풀떼기 하나라도 샅샅이 비우는’ 밥버릇을 왜 들여야 했는지는, 빨간김치를 먹을 수 있도록 다그친다 하여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농사는 온누리 사람이 살아가는 밑바탕”이라는 글월을 외우고 다닌다 한들, 몸과 마음이 하나되어 내 밥그릇을 보듬지 않고서야 깨달을 수 없습니다.


 (2) 아기와 내 삶


.. “저희는 학생으로서, 우리 나라의 농민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더 많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여태껏 아무도, 더욱이 방콕에서 온 대학생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여기서 그냥 살고 싶다고 한 적은 없었거든.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자네들은 여기서 뭘 하려는 거지?” ..  (44∼45쪽)


 아기가 잠들어 있습니다. 아기가 잠들어 주었기 때문에, 아빠는 조용히 일어나서 글을 쓰고 기저귀를 빨고 할 수 있습니다. 아기가 깨어 있을 때에는 엄마이든 아빠이든 할머니이든 외삼촌이든 누구 한 사람 옆에 붙어 함께 놀아야 합니다. 다른 일을 하면서 아기와 놀 수 없습니다. 오로지 아기를 생각하며 아기와 함께 놀아야 합니다.

 아기는 엄마젖을 물어야 비로소 새근새근 잠듭니다. 잠투정도 많고 깊이 잠들지 않고 두어 시간 자고 나면 바로 깨어나며 골머리를 앓게 하지만, 아기는 잠들 무렵에는 언제나 엄마젖을 뭅니다.

 엄마젖은 엄마가 먹는 밥으로 이루어진 젖입니다. 엄마가 제 살을 바쳐서 내어주는 먹을거리입니다. 엄마는 이 땅을 떠도는 바람을 마시고, 이 땅에 뿌리내린 곡식을 먹으며, 이 땅에 내리비치는 햇볕을 머금습니다. 아기가 먹는 젖이란 바람과 곡식과 햇볕이 고루 섞여 있습니다.


.. 닭장이 비고 돼지우리가 버려진 것은 그들(농사꾼들) 잘못이 아니었다. 그들은 가뭄 때문에 키우던 가축을 다 내다 팔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최선을 다했고, 정말이지 부끄러워할 것은 전혀 없었다 … (도시에서 온 대학생) 소리는 봉지를 다 비우더니, 진다가 막을 틈도 없이 봉지를 구겨서 불 속에 던져 버렸다. 진다는 종이봉지에 불이 붙는 것을 보았다. 구멍 하나 없는 두꺼운 갈색 종이가 불타 버리다니, 그건 낭비였다! … 스리는 말끔한 하얀 손수건을 꺼내 팔에 튄 국물을 닦았다. “음식이겠지…… 그렇지?” … “당연히 이것도 음식이죠.” 진다가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스리는 여전히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음식이라고…… 우리가 먹을 거야?” 스리가 물었다. 수치심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진다는 솥을 불에서 내려 구석으로 밀어넣었다. “아내, 돼지들한테나 먹여야죠!” 진다가 소리쳤다. “우리 집 마당에 있는 돼지우리에 새끼 돼지들이 우글거리는 거 못 봤어요?” … 스리는 어찌할 바를 몰라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네드가 그랬어. 태국 대학생들은 손을 잘 쓰지 않는다고.” 스리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거야말로 오늘날 태국 지식인들이 가진 가장 큰 문제의 하나라나. 우리가 이제까지 배운 거라곤 그저 생각하는 것뿐이야.” 스리가 하는 말은 교과서에서 읽은 것을 암송하는 것처럼 들렸다. ‘당연하지.’ 진다는 속으로 맞장구쳤다. ‘그러니 당신들은 우리 돼지우리들을 보고도, 텅 비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겠지?’ ..  (61, 64∼67쪽)


 젖을 먹는 아기는, 엄마가 싱그럽고 시원한 바람을 마시면서 싱싱하고 알찬 곡식을 먹으며 따뜻하고 맑은 햇볕을 머금어야 좋은 먹을거리를 받아들입니다. 아기 엄마가 싱그럽지도 시원하지도 못한 바람을 마셔야 한다면, 싱싱하지도 알차지도 못한 곡식을 먹어야 한다면, 따뜻하지 맑지도 않은 햇볕을 머금어야 한다면, 배는 무언가로 가득 찰는지 모르나, 아기가 아기답게 자라나는 참힘을 얻기란 수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기를 낳아 기르는 어버이라 한다면 마땅히 우리 세상을 읽어야 합니다. 마땅히 우리 세상을 아름다이 가꾸는 일을 해야 합니다. 마땅히 우리 세상을 깨끗하게 돌보는 매무새로 살아야 합니다. 돈만 버는 일이 아니라 돈을 벌되 세상을 맑고 밝게 키우는 일을 해야 합니다. 저 즐거운 놀이를 찾아서 누리되 내 이웃과 함께 아름다워지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내 살림을 알뜰히 꾸리되 우리 세상이 어찌 흐르는가를 꿰뚫으면서 바른 쪽에서 벗어나지 않게끔 다스려야 합니다.

 아기를 낳아 기르지 않는 사람이라 할 때에도, 아기란 내 아기뿐 아니라 이웃 아기가 있고, 형이나 언니네 아기가 있으며 동무나 선후배네 아기가 있습니다. 이웃집 아기가 있고, 우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세계 여러 나라 아기가 있습니다. 이리하여, 나 스스로 혼인하여 아기를 낳지 않는 살림살이라 하여도 세상을 옳게 읽어야 합니다. 우리 세상을 아름다이 가꾸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 세상을 깨끗하게 돌보는 매무새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이라고 할 까닭 없이, 아기가 아기답게 살아가고 자라날 수 있는 터전이란, 어른인 우리 스스로도 더없이 즐겁고 기쁘고 신나고 아름다이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이니까요. 아기가 아기답게 살 수 없는 터전은 어른도 어른답게 살 수 없는 터전입니다.


.. 진다는 두려움에 찬 눈으로 그 족쇄를 쳐다보았다. 양쪽 발목에 각각 두꺼운 쇠고리를 채운 다음, 그 두 개의 고리를 다시 두꺼운 쇠사슬로 함께 연결해 두었다. 그에게만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일개 농부가 마약 암거래상이나 도박꾼들보다 더 위험한 죄수 취급을 받는단 말인가? … “그렇게 놀란 표정 짓지 마, 동생! 요즘엔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니거든. 수많은 나이 어린 농촌 여자들이 똑같은 일들을 하고 있어. 그리고 하나같이 사연은 똑같지. 아버지가 땅을 팔아야 했고, 어머니는 패물들을 전당포에 팔고, 그러고 나서 딸은 가족의 생계를 돕기 위해 자기가 팔 수 있는 유일한 것을 팔게 되는 거지. 바로 자신의 몸.” … “더 숙이라니깐!” 솜분이 꾸짖었다. 훨씬 더 머리를 숙이자 몸이 거의 반으로 접힐 지경이었다. 진다는 마을의 주지스님에게 음식을 공양할 때도 이렇게까지 몸을 숙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이렇게 낮게 몸을 숙여야 한단 말인가? ..  (164, 190, 209쪽)


 아기를 돌보느라 엄마나 아빠는 몹시 고단합니다. 아기가 태어나기 앞서부터 태어난 뒤로 잠 한 번 느긋하게 잔 적이 없습니다. 하루 한때 여태까지 해 온 일에 온힘 쏟아 즐겨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기가 있어 주었기 때문에 잠을 미루면서까지 할 만한 일이 무엇인가를 깨닫습니다. 아기와 함께 살기 때문에 내가 더 힘을 내어 바칠 만한 일은 어디에 있는가를 느낍니다.


.. 진다는 단단하게 움켜쥔 스리의 주먹을 붙잡고는 부드럽게 손가락을 펴 주었다. 진다의 검게 타고 못이 박인 손에 비하면 스리의 손은 하얗고 부드러웠다. 진다는 스리의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이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하고 진다는 생각했다. 스리 언니는 모든 것을 가졌고, 나는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여기서 그녀를 위로해야 하는 건 나라니 …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매일 이렇게 잘 먹었단 말인가? 네드와 소리가, 진다네 집에서 먹는 부서진 쌀로 지은 밥과 생선소스를 그렇게 이상하게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 진다는 그 신발들을 내려다보며 바깥에 서 있었다. 신발들 대부분은 하얗고 깨끗한 캔버스 천으로 된 테니스화였지만, 가죽구두도 있었고, 어떤 것은 고무 슬리퍼였고, 심지어 한 쌍의 반짝이는 하이힐도 있었다. 천천히 진다는 자신의 고무 샌들을 벗어 놓았다. 진다의 신발만 유난히 낡고 때가 묻어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흙이 묻은 자국이 있는 신발도 그녀의 신발뿐이었다 … 스리는 작은 가방에서 열쇠 다발을 꺼내더니 빨간 차의 앞문을 열었다. “내 말 잘 들어.” 그녀가 마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난 지금, 네 가족이 30년 걸려야 벌 수 있는 돈보다 더 비싼 차를 타고 떠나려는 주제에 네 마을에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하고 있어. 어쩌면 까몰이 옳을지도 몰라, 진다야. 나야말로 겁쟁이 위선자인 거야.”..  (214, 232∼233, 242쪽)


 아기와 옆지기와 제가 오늘 하루 머무는 일산 옆지기 식구네 집에서 창밖을 내다보면 새로 올려세우는 아파트가 퍽 많습니다. 인천에서 일산으로 오는 전철길에서도 북한산을 에워싸며 새로 올라서는 아파트를 대단히 많이 구경합니다. 우리 사는 인천에도 곳곳에 새로 올려세우는 아파트를 끝없이 바라보아야 합니다.

 요즈음, 파주에 있는 대안학교 아이들하고 자전거 공부를 하고 있는데, 파주책도시에 있는 대안학교를 찾아가 보면 학교 둘레에 큼직큼직 선 출판사 건물은 많은데, 우리 나라 곳곳에 수없이 올라서는 아파트마냥 ‘자연 삶터를 헤아린 마음결’은 조금도 찾아보지 못합니다. 시늉이라도 햇볕 전지판을 달아 놓고 승강기나 계단 등불을 밝힌다든지, 빗물통을 달아 뒷간 물 내릴 때라도 쓴달지 하는 마음씀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오로지 돈으로 세우고, 오로지 돈으로 사고팔며, 오로지 돈을 들여 관리비 내고 전기 쓰고 가스 쓰고 물 쓰는 아파트요 건물들일 뿐입니다. 이러한 아파트와 건물은 두 다리나 자전거가 아닌 오로지 자가용으로만 오가도록 합니다.

 아파트를 바라보고 건물을 바라보면서 생각합니다. 이런 집이건 저런 집이건 다들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일 테고, 아이로 자라온 사람일 테며, 둘레에 조카나 어린 동생이 있을 텐데, 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는지를. 아이 생각을 넘어 내 생각을 하고 내 집 생각을 하고 내 식구 생각을 한다 할 때에도 이렇게 아파트를 세우고 건물을 세워도 될는지를.


 (3) 어린이책 《아버지의 쌀알》은 어린이책일까


 태국사람 삶과 발자취를 담은 어린이책 《아버지의 쌀알》을 읽습니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는 꾸민 이야기가 아니라, 참말로 있던 이야기라고 합니다. 1970년대에 태국에서 일어났던 일이요, 태국땅 농사꾼이 겪은 아픔이라고 합니다.

 책을 읽는 내내, 이 이야기는 태국땅 농사꾼만 겪은 일이요 아픔은 아니구나 하고 느끼는 한편, 세계 어느 나라 농사꾼이든 똑같은 길을 걸었고 세계 어느 나라 땅임자이든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세계 어느 나라 권력자와 지식인이든 똑같은 몸짓으로 살았다고 느낍니다.


.. 진다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래요. 아버지가 이렇게 침울해 하시는 건 처음 봐요. 올해는 수확이 너무 나빠서 두싯에게 절반씩이나 뺏기고 나면, 우리 먹을 곡식이 충분치 않을 테니까요.” “왜 절반이나 줘야 해?” 네드가 소를 씻기면서 말했다. 진다는 못 믿겠다는 눈으로 네드를 쳐다보았다. 하도 바보 같은 질문이라서 진다는 네드가 그걸 물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대답하려 하니, 마땅한 설명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왜냐고요? 그러니까 왜냐하면…… 왜냐하면 그냥 그렇게 해 왔으니까요. 우리는 농지를 빌리는 조건으로 수확의 절반을 주기로 했거든요. 그게 다예요.” “하지만 왜 절반이냐고?” … “만약 싸움에서 진다면, 우리는 땅과 곡식, 집을 잃고 말 거야. 자칫하면 우리 목숨까지도.” “하지만 이장님, 싸움에서 이긴다면 얻게 될 것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네드가 주장했다. “뭐 말인가? 한두 줌의 쌀 말인가?” “아니죠. 더 나은 음식, 더 건강한 아이들, 더 밝은 미래죠.” “말뿐이야.” 인톤이 콧방귀를 뀌었다. “꿈일 뿐이지.” ..  (99, 103쪽)


 《아버지의 쌀알》에 나오는 마을 어르신 ‘인톤’을 비롯한 모든 농사꾼들은, 당신들이 태어나기 앞서부터 당신들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오늘날까지 어느 한 번도 ‘땅에 바친 땀을 내 배를 채우는 보람’으로 맛보지 못했습니다. 터무니없는 소작삯을 바쳐야 했고, 엄청나게 소작삯을 챙기는 땅임자는 도시에서 떵떵거리면서 살아갑니다. 도시에서 ‘시골마을 문제’를 풀겠다고 생각하는 지식인들은 언제나 책상물림으로 말다툼을 일삼다가 때때로 군중집회를 열지만, 총과 몽둥이와 깡패를 앞세우는 정부마냥 똑같이 총과 몽둥이를 들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평화를 찾는 길을, 아름다움을 찾을 길을, 즐거움을 찾아나설 길을 밝히지 못할 뿐더러 느끼지 못합니다.


.. 다시 정치 이야기잖아. 진다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그건 도시 사람들이나 해당되는 문제다 … “오빠는 총을 쏘고,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그들을 죽일 건가요? … 집회 때 그 사람들이 우리에게 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 사람들을 죽이는 일은 … 절대로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  (174, 319쪽)


 ‘진다’ 같은 농사꾼 아가씨가 태국 방콕에서 느끼는 외로움은, 이 나라 농사꾼들이 서울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매한가지입니다. 태국 농사꾼 삶하고는 동떨어진 채 흐르는 태국 정치 흐름은, 한국 농사꾼 삶하고는 동떨어진 채 굴러가는 한국 정치 흐름과 마찬가지입니다.

 태국은 방콕으로만 이루어진 나라이고, 한국은 서울로만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태국 지식인은 오직 방콕에만 모여들고 있으며, 한국 지식인은 그저 서울에만 모여들고 있습니다. 태국 방콕은 태국 시골에서 젖줄을 빨아들여 머리만 디룩디룩 커지고 있으며, 한국 서울은 한국 시골에서 젖줄을 뽑아들여 머리만 대롱대롱 커지고 있습니다.


.. 마을 사람들도 집 밖으로 뛰어나와 하늘을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은 진흙이 묻은 옷을 벗어 버리고 맨몸으로 따뜻한 빗속을 뛰어다녔다. 아이들의 발가벗은 갈색 엉덩이들이 비에 젖어 번들거렸다. 아낙들은 약초가 심겨진 광주리들을 빗속으로 옮겨 놓았고, 그러는 동안 남자들은 지붕에서 떨어지는 비를 받기 위해 대나무로 만든 배수관 아래에 유약을 바른 항아리들을 밀어넣었다. 한 늙은 남자는 자기 뜰의 구석에 홀로 선 채, 얼굴을 높이 쳐들고서 혀로 빗방울을 받아먹고 있었다 … 할머니가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하던 일이나 계속하려무나 … 빗속을 뛰어다녀. 나도 뛸 수만 있다면, 당장 바깥으로 나가 달리고 있을 거야!” … 달리는 동안 맨발바닥에 밟히는 땅은 부드럽고 유연했다. 진흙을 다시 느낄 수 있다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 비는 얼마나 멋진 선물인가! 이렇게 거의 말라가던 모들도 다시 살아나, 줄기를 꼿꼿하게 위로 쳐들고 있었다 .. (338∼339, 348쪽)


 책을 덮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쌀알》은 어린이책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왔지만, ‘어른책’이라는 이름을 달았으면 ‘그냥 문학’이라 하지 않았겠느냐고. 이러면서 어른들이 먼저 읽고 생각하는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하고.

 어린이책이라면 어린이만 읽는 책이라고 잘못 생각하기 일쑤인데, 어린이책이란 어린이부터 누구나 읽는 책입니다. 작품이건 문학이건 무엇이건 ‘어린이가 함께 읽을 수 있는 눈높이로 다스린’ 책이 바로 어린이책입니다.

 한결 쉬우며 부드럽고, 더욱 살가우며 따스합니다. 좀더 아름답고 눈물겹습니다. 훨씬 사랑스럽고 믿음직합니다.

 아버지가 거두는 쌀알은 어머니가 함께 거두는 쌀알입니다. 어머니가 함께 거두는 쌀알은 할머니가 예부터 거두어 온 쌀알입니다. 할머니가 예부터 거두어 온 쌀알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낳아 기르던 아버지가 나란히 거두어 온 쌀알입니다.

 이 쌀알은 누구 손에서 나와 누구 손을 거쳐 누구 입으로 갈까요. 이 나라 한국에서 우리가 나날이 받아먹는 쌀알은 어디에서 어떤 손길로 나와 어느 자리에서 어느 손길을 거쳐 우리 입으로 들어올까요. (4342.5.27.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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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고양이들 봄나무 문학선
어슐러 K. 르귄 지음, S.D. 쉰들러 그림, 김정아 옮김 / 봄나무 / 200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잘 쓴’ 책이지만, ‘가슴에는 안 남는’ 책
 [잠깐 읽기 34] 어슐러 K.르귄, 《날고양이들》



- 책이름 : 날고양이들
- 글 : 어슐러 K.르귄
- 그림 : S.D.쉰들러
- 옮긴이 : 김정아
- 펴낸곳 : 봄나무 (2009.4.15.)
- 책값 : 1만 원


 (1) 잘 쓴 작품이면서 ‘가슴에는 안 남는’ 작품


 지난날 《날개 달린 고양이》라는 이름으로 나왔으나 모두 나오지는 못했다고 하는 ‘어슐러 K.르귄’ 님 책이 《날고양이들》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옮겨졌습니다. 판이 끊어진 예전 책이 되살아나기를 기다린 분이 많았을 테며, 르귄 님 작품은 널리 사랑받고 있는 터라, 이 책 《날고양이들》 또한 두루 사랑받는 작품으로 우리 품에 안깁니다.


.. 뭔가 생각하던 셀마가 입을 열었습니다. “엄마는 좋은 손을 만나면 다시는 사냥 나갈 필요가 없다고 그랬어. 하지만 나쁜 손은 개보다도 못하다고 했어.” … 해리엇이 오빠 제임스에게 속삭였습니다. “야아, 아이들 손길이 따뜻하고 기분 좋아.” ..  (38, 49쪽)


 어린이책(판타지 동화)으로 갈래를 나눌 《날고양이들》은 책날개에 적힌 소개글을 살피면, ‘르귄은 호기심을 자아내면서도 설득력 있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보석 같은 책을 썼다(퍼블리셔스 위클리)’라든지 ‘이 시대의 것이면서도 시대를 초월하는 이야기, 타인과의 차이에서 오는 자긍심과 소외감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지 부드럽게 일깨워 주는 책(뉴욕타임즈 북리뷰)’이라든지 ‘간결하고 유려한 문체로 쓰여진 매력적인 책이다. 쉰들러는 섬세한 펜선과 수채화 기법으로 아름답고 진지한 판타지 속의 날고양이들을 보여 준다(북리스트)’라는 이야기가 보입니다.

 이렇게 짤막하게 적힌 추천글이 아니더라도 《날고양이들》은 금세 읽어낼 수 있을 만큼 이야기흐름이 빠릅니다. 글은 단출하고 군더더기가 없으며, ‘고양이’를 내세워 우리 삶터를 구석구석 살피거나 훑는 눈매가 따뜻하고 부드럽습니다. 나와 남이 어떻게 다른가를 돌아보는 한편, 서로 오붓하게 어우러질 수 있는 삶터를 어떻게 이루면 좋을까 하는 생각을 살며시 느끼게 합니다. 사람 스스로도 사람 삶터인 도시에서 문을 꽁꽁 닫아걸고 있는 가운데 오로지 돈만 바라보는 얕고 안타까운 발자국을 걱정하는 가운데, 우리가 즐겁게 어깨동무를 하는 길은 누가 어떻게 찾아야 할까 하는 생각을 펼쳐 보입니다.


.. 하늘을 나는 얼룩고양이들을 처음 본 순간, 아이들은 아무에게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이 알게 되면 철창에 가두거나, 서커스나 애완동물 쇼에 내보내거나, 실험실로 보내거나, 돈벌이에 이용하거나, 아예 팔아넘길까 봐 겁이 났거든요 ..  (55쪽)


 틀림없이 《날고양이들》은 우리한테 빛줄기 가득 담긴 구슬 같은 책이 아닌가 느낍니다. 우리 모습을 곰곰이 돌아보면서 우리 앞날을 찬찬히 헤아리도록 이끄는 책이라고 느낍니다.

 그렇지만, 한 시간도 안 되는 사이에 홀딱 읽고 난 이 책을 다시 펼쳐서 살피고프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어, 벌써 이야기가 다 끝났나?’ 하는 생각이 들고, ‘뒤끝이 없는 깔끔한 작품이기는 한데 왜 이리 허전한 까닭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르귄이라고 하는 분이 굳이 ‘날고양이’라는 판타지로 이 작품을 써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날사람’이라는 이름으로 판타지를 쓴다 하여 달라질 대목이 없으리라 느끼고, ‘날아다니는 사람’이 아닌 그예 ‘걷기만 하는 사람’ 이야기를 펼친다 하여도 《날고양이들》하고 똑같은 이야기가 나오지 않겠느냐고 느낍니다.


.. “아아, 우리 아기 고양이는 떠나야 한단다. 아기 고양이가 무사하다는 것도 알았고, 너희들이 잘 돌봐 주리라는 것도 알았으니,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아기 고양이의 안전뿐이란다. 날개 달린 고양이가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곳은 이 도시에는 없어. 얘들아, 그건 너희도 알지?” … 하늘 높이 날던 제인이 개들 가까이로 내려가면, 개들은 펄쩍펄쩍 뛰면서 사팔눈이 될 때까지 짖어댔습니다. 꽤 재미있었습니다만, 제인은 아무 데서도 친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제인은 생각했습니다. ‘날개가 있으면 외톨이로 지내야 하는 걸까?’ 날개 달린 고양이 제인은 친구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새들은 날개가 있었지만, 날개 달린 고양이를 보고는 인사 한 마디 건네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올빼미와 매는 위험했어요 ..  (94, 163∼164쪽)


 문득, 만화책 《기생수》가 생각납니다. 만화책 《기생수》나 동화책 《날고양이들》이나 빼어난 생각힘으로 놀랍게 펼쳐내는 줄거리가 돋보이는 작품이라 손꼽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 마음은 ‘만화 《기생수》는 내 둘레 고마운 분한테 여덟 권 한 질(44000원)을 선물한 적이 있고, 앞으로도 그처럼 선물하고프다’는 쪽이지만, ‘동화 《날고양이들》(1권 마무리, 책값은 1만 원)은 굳이 선물해 주고픈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쪽입니다.

 무엇이 두 작품을 이처럼 다르게 느끼게 하는지, 왜 두 작품을 이렇게 다르게 받아들이는지 스스로 궁금합니다. 내 눈길이 한쪽으로 치우치지는 않았는지, 작품을 바라보는 내 눈길이 외곬로 기울지는 않았는지 곰곰이 되씹습니다.

 다른 이들은 ‘더없이 좋다’거나 ‘더없이 훌륭하다’고 느끼는 책을 나 혼자 ‘그리 시덥잖은데?’ 하고 느끼는 마음그릇은 아닌가 곱씹습니다.

 그러나, 책을 읽는 내내, 또 책을 덮은 다음에 마음 한구석을 쩌렁 울리는 소리가 나지 않는 책이었는걸요. 크게 쩌렁 울리지 않더라도 살짝 통통 울리지도 못한 책이었는걸요.


.. 제인이 말했습니다. “나는 왜 있는지 알아!” 셀마가 물었습니다. “왜 있는데?” 제인이 소리쳤습니다. “하늘을 날라고 있지요!” 제인은 곧장 하늘 위로 날아올라 두 번 옆으로 구르고, 한 번 앞으로 구른 다음, 잠시 날갯짓을 멈추었습니다. 그러고는 알렉산더의 잔등 위로 털썩 내려앉았습니다 … 제인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날 수 있는데, 왜 아무 데도 가지 않지? 어디로든 날아가서 무엇이든 볼 수 있을 텐데?” 오빠 로저가 말했습니다. “에이, 제인, 너도 왜 그런지 알잖아.” 언니 해리엇이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날개 달린 고양이를 발견하면, 동물원 철창에 가둘 거야. 그래서 그런 거야.” 오바 제임스가 말했습니다. “아니면 실험실 철창에 가둘 거야. 그래서 그런 거야.” 맏언니 셀마가 말했습니다. “남과 다르면 살기 어려워. 남과 다르면, 아주 위험할 때도 있어.” ..  (156∼157쪽)


 그러고 보면, 만화 《20세기 소년》을 보다가 뒷권으로 갈수록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짙게 느끼던 때하고 비슷합니다. 좀 묵은 작품이지만 《Z 마징가》를 보던 때에는 참 재미있다고 느끼며 여러 번 다시 보았고, 《초인 로크》나 《바벨 2세》 같은 작품 또한 여러 차례 되풀이해서 보았습니다. 모두들 ‘터무니없다’고 말할 만한 이야기를 다루고, ‘놀랍다’고 느낄 만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그러나 글감이나 만화감을 ‘터무니없거나 놀랄 만한 데’에서 잡아챘다고 해서 ‘훌륭하거나 가슴 찡하거나 아름답거나 재미있거나 멋지거나 좋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이를테면, 뛰어난 붓솜씨를 보여준다고 해서 뛰어난 그림이 되지 않는 셈입니다. 뛰어난 짜임새며 눈길로 잡아챈 사진이라고 해서 뛰어난 사진이라 할 수 없는 셈입니다. 글씨를 곱게 잘 쓴 글이라고 해서 훌륭한 글이라 할 수 없는 셈이고요.


 (2) 가슴에는 안 남으나 ‘되새기는’ 이야기


 그렇지만 글쓴이 르귄 님은 우리한테 아낌없는 사랑과 믿음으로 ‘우리 스스로 쉽게 놓치거나 언제나 잃고 있는’ 삶자락이 무엇인가를 가만히 보여줍니다. 사이사이 톡톡 건드리듯 슬그머니 보여줍니다.


.. 모두 곱게 잘 커 준 아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인 부인은 아이들을 생각하며 남몰래 속을 태웠습니다. 이 동네의 환경은 정말 끔찍했습니다. 그리고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자동차 바퀴와 트럭 바퀴가 온종일 지나다녔습니다. 온갖 쓰레기가 널려 있었습니다. 굶주린 개들이 어슬렁거렸습니다. 신발과 장화가 끝도 없이 걸어가고, 뛰어가고, 짓밟고, 걷어찼습니다. 안전하고 조용한 곳은 점점 사라졌고, 먹을 것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참새들은 오래 전에 다른 데로 이사갔습니다. 시궁쥐는 난폭한 데다 위험했고, 새앙쥐는 비쩍 마른 데다 좀처럼 잡히지 않았습니다 … 도시 비둘기 한 쌍이 먼지 구름을 보고 날아왔다가 한 마디씩 하고 날아갔습니다. “빈민가를 또 철거하는구나.” “이게 발전이란 거야.” ..  (12, 67쪽)


 우리 스스로 우리다움을 지킬 수 있는 길이 무엇이고, 우리 손으로 우리 터전을 가꿀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를 밝힙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다움을 지키는 길이란 아주 쉽습니다. 우리 손으로 우리 터전을 가꾸는 길 또한 참으로 수월합니다. 우리들은 누구나 알고 있기도 합니다. 다만, 쉬워도 안 하는 일이요, 수월하여도 껴안으려 하지 않는 일입니다. 누구나 알고 있다 하여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기도 합니다. 혼자서도 할 수 있고 다 함께 뜻을 모아 할 수 있는데, 혼자서도 안 하고 다 함께 어깨동무하면서 할 마음조차 없는 일이기조차 합니다.


.. 보드라운 땅, 이상야릇한 땅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사 남매가 알던 땅은 포장도로, 아스팔트, 시멘트뿐이었습니다. 마른 흙, 젖은 흙, 죽은 나뭇잎들, 풀, 나뭇가지들, 버섯들, 벌레들, …… 이런 땅은 처음이었습니다. 하나같이 너무너무 재미있는 냄새가 났습니다. 작은 샛강도 있었습니다 ..  (23쪽)


 어쩌면, 아무래도 어쩌면 이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르귄 님 작품은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를 했을 뿐이기 때문에 저로서는 더없이 낯익으면서 쉽게 받아들여 읽을 수 있었는데, 언제나 이와 같은 매무새로 살아가고 있는 터라 굳이 이런 작품을 읽지 않아도 제 마음은 한결같습니다. 또한, 우리 둘레 여느 사람들은 이런저런 일을 알고 있으나 ‘먹고살기 바쁜데 어떻게?’라고 핑계를 둘러대기에 바쁩니다. 그러는 가운데 이런 작품조차 눈여겨보지 않고 가슴에 새기지 않습니다. 아예 읽을 마음조차 없어요.

 그러니, 이 작품이 널리 사랑받고 있다 하여도 허전합니다. 두루 읽히고 팔린다 하여도 씁쓸합니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새책방 책시렁에서 새로운 책손을 만날 수 있다 하여도 허거픕니다.


.. 사라 (할머니)는 제인의 목에 감겨 있던 자주색 리본을 풀어 휴지통에 넣으면서 말했습니다. “너는 저런 거 없어도 예쁘단다.” ..  (195쪽)


 출판사에서는 애써 펴내 주었고, 글쓴이 르귄 님 마음도 가없이 푸근하다고 느낍니다만, ‘판타지 옷’을 안 입어도 괜찮고 ‘이름난 작가 작품’을 우리한테 나누어 주지 않아도 괜찮으며 ‘깔끔하고 예쁘장한 작품’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투박한 글이어도 괜찮고 어설픈 그림이어도 괜찮습니다. 조금 모자라거나 어설픈 작품이어도 나쁘지 않습니다. 아직 어리숙하거나 얕은 눈길이라도 재미가 없지 않아요.

 길은 지름길로만 가야 하지 않으며, 반드시 가장 빨리 거쳐가야 하지 않습니다. 100미터를 10초에 끊어야만 하겠습니까. 초중고등학교를 차근차근 밟아 대학교를 네 해 만에 마무리해야만 하겠습니까. 무슨 자격증이 있고, 어떤 예쁜 얼굴과 몸매가 있어야만 하겠습니까. 우리 스스로한테든 우리 어버이한테든 넉넉한 돈이 있어야만 하겠습니까.

 없어도 괜찮고, 외려 없으니 즐겁기도 할 수 있습니다. 그지없이 깔끔하고 아름답다 할 만한 《날고양이들》가 아닌, 수수하고 곱지 않은 ‘길고양이들’이어도 반갑습니다. (4342.5.17.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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