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화 바로 읽기 - 어머니가 알아야 할 어린이문학 소년한길 어린이문학 3
이재복 지음 / 한길사 / 199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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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린이문학 평론이 싹트지 못하는 한국
 [어린이책 읽는 삶 13] 이재복, 《우리 동화 바로 읽기》(소년한길,1995)

 


- 책이름 : 우리 동화 바로 읽기
- 글 : 이재복
- 펴낸곳 : 소년한길 (1995.7.15.)
- 책값 : 11000원

 


 (1) 어린이책과 이야기


 어린이책이 참 많이 나옵니다. 이제 청소년책도 제법 많이 나옵니다. 어린이책을 펴내는 출판사는 무척 많으며, 해마다 나오는 좋다 싶은 어린이책을 추천한다면 두툼한 책 한 권이 될 만합니다.

 어린이책 많고 청소년책 또한 많은데, 막상 어린이책과 청소년책을 말하는 자리는 그닥 넓지 않습니다. 칭찬과 책소개와 홍보와 추천은 넘치지만, 책과 어린이 삶결을 견주는 이야기나 책과 청소년 삶자락을 맞대는 이야기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어른문학을 다루는 비평이든 평론이든 꽤 많이 나옵니다. 어른문학 비평은 적잖이 책으로 묶입니다. 또 어른문학을 다루는 비평책이나 평론책은 여러모로 소개되거나 이야기됩니다. 이와 달리, 어린이문학과 청소년책 비평·평론은 너무 푸대접이나 따돌림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린이문학 비평과 평론은 아직 너무 적고, 제대로 이야기되지 못하며, 몇몇 전문가만 다룰 수 있는 글인 듯 여기곤 합니다.


.. 이주홍은 〈비오는 들창〉을 통해 어린이의 삶은 어른의 삶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동심천사주의 문학과 계급주의 문학, 양쪽의 한계를 모두 극복하는 전형을 제시하고 있다 … 이주홍은 고통받는 사람에게 그 고통에서 해방되는 전망을 제시한다는 방식이 너무나 안이하게 우연성에 의존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목마 아저씨〉의 감동을 떨어뜨렸다 ..  (168, 176쪽)


 잘 생각해 보면, 아이들은 스스로 책을 찾아서 읽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책방마실을 하면서 책을 사들이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늘 어른들이 사 주는 책을 읽고, 아이들은 언제나 어른들이 내미는 책을 읽습니다. 아이들이 ‘출판사에서 펴낸 책을 저희 깜냥껏 골라서 갖춘’ 어린이책방부터 없고, 어린이책방에서 아이들이 ‘저희 마음결대로 읽고픈 책을 골라서 살’ 돈이 아이들한테 없으며, 아이들이 학교나 학원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마음밥 살찌울 책을 느긋하게 읽을 겨를’이 없습니다.

 

 더구나, 이런 한국땅 흐름에서 어른들이 쓰는 어린이문학 비평은 ‘아이들하고 함께 읽을 비평’이 아닙니다. 어른들은 어린이문학을 만들고 팔고 읽힐 뿐 아니라 비평과 평론까지 몽땅 도맡아요.

 

 비평이나 평론이라는 이름이 붙기 때문에 어린이문학 비평을 아이들이 읽을 만한 높낮이로 맞추어야 할 까닭은 없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린이문학을 말하는 글이라 한다면, 어린이도 함께 읽을 수 있도록 생각하고 돌아보면서 써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어른문학 비평을 하듯 어린이문학을 비평한다면, 어른문학 비평하는 글처럼 딱딱하고 메마르며 따분한 글투로 어린이문학을 이야기한다면, 이러한 어린이문학 비평으로는 참다이 어린이문학을 밝힐 수 없을 뿐더러, 즐거이 어린이문학을 살찌울 수 없다고 느껴요.

 

 예배당에서 신부님이나 목사님이 신학교에서 배운 대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없습니다. 절집에서 스님이 어려운 한문 그대로 이야기를 욀 수 없습니다. 산부인과 의사가 전문 의학용어라면서 당신 혼자 아는 낱말로 이야기를 하려 한다면, 아이 밴 어머니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신부님이나 목사님은 예배당을 찾는 ‘글 모르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말만 들어도’ 깨우치면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열도록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합니다. 절집 스님도 산부인과 의사도 이와 매한가지예요. 누구나 넋·말·삶을 가장 쉬우면서 착하고 아름다운 결에 맞추어야 해요.


.. 이렇게 한 인간에 대한 일방적인 증오의 감정이 드러나는 노래 속에서 어떤 감동을 발견하기는 힘들다 … 요즘 남쪽의 아동문학은 점점 삶을 멀리하고, 공상·귀신·공허한 말장난의 세계로만 빠져드는 듯하다. 감동적인 창작동화를 보기가 하늘에 별을 따기 만큼이나 어렵게 되어 버렸다. 참으로 큰일이다. 모두가 삶에서 이야기를 만들려 하지 않고, 삶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 남한에서 나오는 그림동화를 보면 대개가 서양의 그림동화를 옮겨 놓은 다음에 화려하게 치장하여 아이들의 눈을 끌고 있다. 북한의 작가들은 아이들에게 생활에 필요한 도덕적인 관념을 심어 주려다가 다양하고 새로운 주제를 담아내지 못한 한계가 있었지만, 남한의 작가들은 자본주의 유통구조 아래서 아예 아이들을 상품의 대상으로만 보고 그들을 철저하게 병들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겠다 ..  (204, 224, 241쪽)


 어린이문학을 다루는 잡지가 여럿 있습니다. 다달이 나오거나 철마다 나오는 어린이문학 잡지에 어린이문학을 이야기하는 글이 여럿 담깁니다. 이 글들은 어느 주제에 맞게 어린이책 묶음읽기를 하거나 역사에 따라 비평을 하거나 작가 한 사람 발자국을 톺아봅니다. 작품 하나를 찬찬히 짚는 글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이야기는 아직 좀처럼 찾아 읽기 힘듭니다. 드문드문 찾아 읽기는 하지만, ‘아이와 함께 꾸리는 삶’으로 바라보는 어린이문학 비평이 얼마 없습니다.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나 어른’으로서 헤아리는 어린이문학 비평이 너무 적습니다. ‘글을 쓰는 내가 어른이 아닌 어린이’라 할 때에 어느 작품 하나를 어떻게 느끼며 읽을까 하는 글도 적지만, 한국에서 태어나는 어린이문학 비평은 하나같이 논문 같습니다. 학위를 따려는 논문 같고, 대학교수가 되고픈 마음에 쓰는 논문 같습니다. 어린이 삶을 북돋우는 비평이 되지 못합니다. 어른 삶을 살찌우는 평론이 되지 못합니다.

 

 문학이란 삶을 사랑하면서 아름다이 일구는 길을 찾는 마음밥이라고 느낍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문학을 다루는 글이라 한다면, 문학작품 하나가 내 삶을 어떻게 사랑하도록 이끌고 얼마나 사랑하도록 도우며 아름다이 일구는 길을 어찌저찌 찾게끔 어깨동무하는가를 밝힐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참삶을 밝히고 참길을 여는 글이 바야흐로 비평이나 평론이라고 생각해요.


.. 현덕은 좀더 참을성 있게 아이들에게 자기의 목소리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보여주는 데 만족했던 것이다 … 싸움은 또 다시 싸움을 부를 뿐이라는 사실을 권정생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악을 제거하기 위해서 또 다른 악에 의존하는 현대인의 모순적인 삶의 구조에 몸으로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  (214, 296∼297쪽)


 표현법을 따진다거나 문장분석을 한다거나 주제읽기를 한대서 비평이나 평론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줄거리를 살피거나 재미를 알아보는 일 또한 비평이나 평론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글 저런 글이란 ‘감상평’쯤 되겠지요.

 

 비평, 곧 이야기라면, 어린이문학 비평, 그러니까 ‘어린이문학 이야기’라면, 어린이문학 하나를 둘러싸고 ‘어린이와 어른(어버이)이 어떤 삶을 함께 일구고 서로 사랑하며 같이 돌보는가’ 하는 꿈누리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느껴요. 길을 보여주고 삶을 톺아보며 사랑을 찾을 때에 참다이 ‘어린이문학 이야기’ 자리에 선다고 느낍니다.

 

 작품분석은 말 그대로 분석입니다. 작품해설은 말 그대로 해설입니다. 작품평은 말 그대로 평가예요.

 

 이야기는 분석도 해설도 평가도 아닙니다. 이야기는 파헤치거나 풀이하거나 값매기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사랑하는 삶을 들려주는 보따리입니다. 이야기는 따사로운 넋을 나누는 꾸러미입니다. 이야기는 아름다운 꿈을 여는 실마리입니다.

 

 나라밖에서 돋보이는 숱한 ‘어린이문학 비평·평론’은 어린이문학 작품 하나를 잘 뜯어살피(분석)거나 잘 풀이하(해설)거나 잘 값매기(평가)기 때문에 돋보이지 않아요. 폴 아자르 님, 페리 노들먼 님, 우에노 료 님, 마츠이 다다시 님, 이런 분 저런 분 글은 뜯어살피기·풀이하기·값매기기하고 멀찍이 떨어집니다. 아니, 처음부터 이 세 가지는 헤아리지 않아요. 생각하기·사랑하기·살아가기, 이 세 가지만 찬찬히 짚습니다.

 

 문학도 문학비평도 뜯어살피기·풀이하기·값매기기가 될 수 없습니다. 문학이든 문학비평이든 생각하기·사랑하기·살아가기로 이루어집니다. 문학을 빚는 사람과 문학을 이야기하는 사람, 여기에 문학을 즐기며 누리는 사람 모두 생각하기·사랑하기·살아가기로 어우러져요.


.. 대부분의 일반문학 작가들이 그들의 소설이나 시에서는 우리 민족의 문제·삶의 문제를 깊이있게 다루면서, 동화에서는 그러한 치열한 정신을 버리고 단지 아이들에게 피상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수준에서 스쳐 지나간다 … 아동문학이라고 해서 겉으로 슬쩍 사회 문제를 구경시키는 차원에서 보여주고 넘어가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러한 태도야말로 무책임하게 천사주의적인 환상의 세계로 도피하는 문학과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  (313쪽)


 이제 이 나라에서도 뜯어살피기·풀이하기·값매기기로만 짜인 논문보다는 생각하기·사랑하기·살아가기로 이루는 이야기가 태어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재거나 따지거나 줄세우지 말고, 즐기고 좋아하며 아낄 수 있으면 좋겠어요.

 

 문학작품만 ‘고전’이 있어야 하지 않아요. 문학평론도 ‘고전’이 되어야 해요. 문학작품만 쉰 해 백 해 오백 해를 읽혀야 하지 않아요. 문학평론 또한 쉰 해 백 해 오백 해를 읽히면서 사람들 가슴을 촉촉히 적시거나 울리거나 흔들거나 사로잡거나 어루만지는 글이 되어야 해요.

 

 지식씨앗이나 지식조각을 다루는 어린이문학 비평·평론은 이제 그만 나오면 좋겠어요. 사랑씨앗과 사랑꿈을 돌보는 어린이문학 이야기를 새록새록 나눌 수 있으면 좋겠어요.

 


 (2) 아직 사랑을 담지 못하는 평론


 어린이문학과 어린이책을 찬찬히 다루는 평론책인, 이재복 님이 쓴 《우리 동화 바로 읽기》(소년한길,1995)를 읽습니다. 어린이문학과 어린이책을 찬찬히 다루는 평론책으로는 이오덕 님이 내놓은 《시정신과 유희정신》만 한 책이 아직 없구나 하고 다시금 느끼며 읽습니다. 어린이문학이나 어린이책을 놓고 깊이 돌아보는 비평책으로도 《농사꾼 아이들의 노래》만 한 책을 써낼 만한 분이 아직 없다 할 만하구나 하고 거듭 느끼며 읽습니다.

 

 그러나, 이만큼 애쓰는 분이 있으니 고맙습니다. 이렇게 힘쓰는 분이 있어 반갑습니다. 다만, 짚어야 할 대목을 좀처럼 못 짚고, 느껴야 할 대목을 살가이 못 느끼는구나 싶어 아쉬워요.


.. 그분 말이 내 이야기는 내가 겪은 거니까 쓰겠는데 동화는 도대체 못 쓰겠다는 것이다.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동화라는 게 별 게 아니고 그저 자기가 보고 겪은 이야기를 그대로 아이들의 입맛에 맞게 써 내면 되는 건데 왜 자기 삶의 이야기는 잘 쓰는 분이 동화 쓰기는 그렇게 어려워하는 걸까 ..  (85쪽)


 동화는 “별 게 아닐” 수 없습니다. 어린이문학이든 어른문학이든 “대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할 수 없는” 어린이문학이나 어른문학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어린이문학이든 어른문학이든 “읽는 이 입맛에 맞게 써 내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삶의 이야기는 잘 쓰는 분이 동화 쓰기는 그렇게 어려워하는” 일이란 없습니다. 내 삶을 이야기 한 자락으로 살뜰히 풀어낼 줄 안다면, 이 이야기가 고스란히 어린이문학이나 어른문학이에요. 따로 ‘문학’이라는 틀로 글을 다시 쓸 까닭이 없습니다. 내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동무가 어린이라면 어린이문학으로 태어나고, 내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벗이 어른이라면 어른문학이 태어나요.

 

 곧, 내 삶을 이야기 한 자락으로 살뜰히 풀어낼 줄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문학인가 문학이 아닌가라는 대목이 갈립니다.

 

 이재복 님은 “그저 자기가 보고 겪은 이야기”를 쓰면 동화가 된다고 밝히지만, 스스로 보거나 겪은 이야기를 쓴다 해서 동화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동화 시늉을 낸다고는 하겠지요. 이른바 생활동화라는 시늉을 낸다고 할 만합니다.

 

 참말 요즈음은 생활동화라는 이름을 붙이고 나오는 작품이 적잖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한국 생활동화 가운데 그야말로 ‘삶’과 ‘동화(어린이문학)’라는 이름이 걸맞는 작품이 얼마나 될는지 궁금해요. 너무나 “아이들 입맛에 맞게” 쓰기만 할 뿐 아닌가 싶어요. 할 말을 모르고 나눌 넋을 모르며 물려줄 사랑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이재복 님 평론책 《우리 동화 바로 읽기》를 비롯해서, 한국땅 수많은 어린이문학 평론가들 글과 책이 아직까지 《시정신과 유희정신》하고 《농사꾼 아이들의 노래》랑 어깨를 견줄 수 없다고 느낍니다. 안타깝지만, 이재복 님이든 다른 평론가 분들이든, 아이들과 함께 할 말·아이들과 나눌 넋·아이들한테 물려줄 사랑을 좀처럼 건드리지 않아요. 아이들과 함께 할 말을 따사로이 돌보지 못해요. 아이들과 나눌 넋을 포근하게 보살피지 못해요. 아이들한테 물려줄 사랑을 어떻게 담아야 좋을까를 깨닫지 못해요.


.. 동화는 아이들을 지도하는 문학이 아니라, 단지 아이들 속으로 들어가 아이들에게 겸손하게 이야기를 통해 현실을 보여주는 문학일 뿐이다. 판단은 아이들이 한다. 아이들을 지도한다고 욕심을 내서 뭔가를 자꾸만 알게 하고, 느끼게 하고, 억지로 감동하게 하려고 훈계하는 문학은 그 의도가 지나치다 보면 아이들을 올바른 데로 이끈다는 허울좋은 명분 아래 결국은 더 큰 노예의 나라로 끌고 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  (111쪽)


 이재복 님 말처럼, “판단은 아이들이 한다”고 여길 수 없어요. 아이들은 ‘생각’하기 앞서 ‘느끼’면서 ‘받아들’여요. 아이들하고 어린이문학을 나누는 어른들은 아이들이 무엇을 느끼면서 받아들일까를 깊이 생각하면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이재복 님 또한 이 대목을 모르지는 않구나 싶은데, 이를테면 “북한의 동화는 어떤 것을 읽어 봐도 이런 엉터리 문장은 보기 힘들다. 문장에 멋을 낸다고 비비틀어서 이상하고 의미도 없는 문장을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문장 하나를 이해하려면 이게 무슨 말인지 마치 어려운 외국어 문장을 해독하듯이 한 뒤에야, 아하 그런 말이었구나 하는 문장을 요즘 남한의 동화작가들은 즐겨쓰고 있다. 그래서 그런 문장을 본 아이들은 또 동화를 읽어 보니까 작가들이 이런 문장을 쓰던데 이게 좋은 문장인가 보다 하고 흉내를 내어 아이들까지 그걸 따라가게 되니, 참으로 엉터리 동화 한 편이 아이들을 이렇게까지 병들게 하는 것이다(244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참말, 아이들은 ‘생각’하면서 ‘흉내’내지 않아요. 아이들은 재미있거나 좋다고 ‘느껴’서 ‘흉내’를 냅니다. 그래서 어린이문학을 섣불리 “판단은 아이들이 한다”고 여기면서 내어주지 않습니다. 어느 어버이도 아이가 아무 책이나 골라서 읽도록 하지 않아요. 어느 도서관도 아이한테 아무 책이나 빌려주지 않습니다. 어느 어버이라도 아이들한테 아무것이나 먹으라고 내밀지 않아요. 어느 어버이라 하더라도 아이들한테 아무 데서나 자라 하지 않고, 아무 옷이나 입히지 않아요. 아이들은 아이들 나름대로 ‘생각’해서 저마다 읽을 책을 고르기는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천천히 ‘느끼고 살아가’며 이루어지기 때문에, 퍽 자주, 아니 늘 ‘느끼며 받아들이’며 살아간달 수 있으니까, “아이들에게 겸손하게 이야기를 통해 현실을 보여주는 문학”만 쓸 수 없어요. 아이들이 지식밥 아닌 사랑밥을 먹도록 참다이 일군 ‘마음밥인 이야기책’을 건넬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 앞에서 고개숙이는(겸손) 어른이어서는 안 돼요. 아이들하고 어깨동무하는 어른이어야지요. 아이들을 참다이 사랑하고 착하게 아낄 줄 아는 어른이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사랑스러운 터에서 살아가야 아름답다고 느끼면서, 어른들부터 사랑스러운 터에서 살아가야 아름다운 줄 느껴야 합니다.

 

 어른문학도 이와 다르지 않아요. 어른문학이라고 “생각은 어른들이 한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욕심을 낼” 일이 아니에요. 어른문학이든 어린이문학이든 문학이 될 때에는 이 문학을 읽을 사람(어린이와 어른 모두)이 어떻게 느끼며 받아들일까를 생각합니다. 도덕이나 교훈이나 훈계나 지식이나 정보가 아닌 ‘느끼고 받아들일 문학’을 생각해요.

 

 이러한 생각 알맹이가 없이는 아무런 문학이 태어날 수 없습니다. 이오덕 님이 어린이문학에서 “교훈을 빼면 안 된다”고 거듭 되풀이하며 이야기하는 까닭은 ‘교훈’이라는 낱말을 빌어 ‘생각 알맹이’를 말씀하고 싶기 때문이에요. 억지스러운 도덕 가르침이 아닌, 사람이 사랑하며 살아갈 아름다운 길을 아이들이 배우며 느끼고 받아들이도록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일을 이오덕 님은 그냥 교훈이라는 낱말로 이야기했을 뿐이에요. 지난날에는 사람들이 ‘교훈’이라는 낱말을 써야만 알아들었으니까요. 그러나, 이오덕 어린이문학 비평을 옳게 읽는 어른이 퍽 드뭅니다. 또한, 어린이문학이란 무엇이고 문학이란 또 무엇인가를 찬찬히 생각하며 살아가는 어른부터 드물어요.

 

 이재복 님은 “참으로 엉터리 동화 한 편이 아이들을 이렇게까지 병들게 하는 것이다” 하는 말만 해서는 안 됩니다. 엉터리 동화가 왜 태어나고, 이 엉터리 동화가 아이들한테 어떻게 스며들 뿐 아니라, 어른들은 왜 자꾸 엉터리 동화를 쓰고 팔아치우는데다가 돈을 많이 벌려 하는가를 밝혀야 합니다. 밝히면서 따져야 하고, 꾸짖어야 하고, 바른 길을 들려주어야 해요. 이러한 엉터리 동화를 교사들이 걸러내지 못하는 흐름을 짚으면서, 아이들이 엉터리 동화 아닌 사랑스러운 동화를 받아들이는 길을 들려줄 수 있어야 해요.


.. 어린이들이 이원수 동화를 체계적으로 읽으면 해방 전후의 역사를 그대로 알 수 있다. 이원수 동화를 읽는다는 것은 곧 우리 역사를 읽는거나 마찬가지이다 ..  (255쪽)


 아이들은 동화를 읽는 아이들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동화라는 밥을 마음으로 먹는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차려 주는 밥을 ‘생각(의심)’하면서 먹지 않습니다. 신나게 받아들입니다. 맛나다고 느끼면서 받아들여요.

 

 아이들 앞에 놓이는 어린이책은 아이들 누구나 ‘생각’이 아닌 ‘느낌’으로 저절로 손을 뻗어서 쥐거나 들거나 펼칩니다. 만화책을 읽든 그림책을 읽든 늘 같습니다. 이러한 어린이 삶과 사랑과 몸짓을 더 찬찬히 돌아보면서 어린이문학을 짚을 수 있다면, 이재복 님은 “우리 동화 바로 읽기”라기보다 “우리 동화 ‘즐겁게’ 읽기”나 “우리 동화 ‘따숩게’ 읽기” 같은 이야기밥을 나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재복 님은 ‘바로’ 읽기보다는 ‘즐겁게’ 읽기와 ‘따숩게’ 읽기라는 틀을 살피는 어린이문학 비평으로 나아가야 아름다우리라 생각해요. 아니, 이 나라에서 어린이문학을 ‘바로’ 읽자고 말할 만한지 궁금해요. 어쩌면, 이재복 님으로서도 아직 헤어나지 못하는 울타리나 굴레가 있고, 이재복 님 스스로 넘어서거나 거듭나야 할 사랑길을 찾는 걸음마가 《우리 동화 바로 읽기》일는지 모르지요.

 

 ‘바로 읽기’란 ‘바로 살기’입니다. ‘바로 살기’가 있은 다음에 ‘바로 읽기’와 ‘바로 쓰기’, 이러면서 ‘바로 하기’와 ‘바로 사랑하기’와 ‘바로 말하기’와 ‘바로 생각하기’와 ‘바로 먹기’들이 줄줄이 이어집니다. (4344.12.17.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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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더스의 개 비룡소 클래식 12
위더 지음, 하이럼 반즈 외 그림, 노은정 옮김 / 비룡소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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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흙바닥과 하늘과 마음속에 그림그리기
 [푸른책과 함께 살기 84] 위다, 《플랜더스의 개》(비룡소,2004)



- 책이름 : 플랜더스의 개
- 글 : 위다
- 옮긴이 : 노은정
- 펴낸곳 : 비룡소 (2004.12.24.)
- 책값 : 9000원



 (1) 어린이와 학교


 온누리 아이들은 저마다 싱그러운 사랑을 품에 안으며 우리 어른들 곁으로 찾아옵니다. 백이면 백 아이 모두 다 다른 사랑을 가슴에 안은 채 우리 어른들 품으로 예쁘게 안깁니다.

 다 다른 아이들은 다 다른 삶을 일구면서 다 다른 사랑을 펼치기 마련입니다. 다 다른 아이들이 다 같은 꿈을 품거나 다 엇비슷한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한집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이라 하더라도 어버이한테서 받는 손길은 조금씩 다릅니다. 튼튼한 아이는 믿음을 더 사면서 홀로 마음껏 뛰놀 겨를이 많습니다. 여리거나 아픈 아이는 보살핌을 더 받으면서 집안에서 어버이와 지낼 겨를이 많습니다.

 튼튼한 아이는 제 두 다리로 박차고 뛰놀며 삶과 삶터와 삶자락을 헤아립니다. 여리거나 아픈 아이는 어깨동무를 받으며 삶과 삶터와 삶자락을 곱씹습니다. 먼 데를 두루 돌아다닌 아이는 온몸으로 맞아들인 꿈을 키웁니다. 한 곳에서 오래 머문 아이는 온마음으로 받아들인 사랑을 돌봅니다. 너른 꿈은 아이를 살찌우고, 깊은 사랑은 아이를 북돋웁니다.


.. 넬로와 파트라슈는 세상에 홀로 남겨진 외톨이였습니다 … 살아온 시간의 길이로 치자면 둘은 동갑내기였어요. 그래도 하나는 아직 어렸고, 다른 하나는 이미 늙었지요. 둘은 늘 함께 지냈어요. 둘 다 부모가 없었고, 몹시도 가난했으며 그리고 한 사람의 손에 의지하여 살았거든요 … 둘은 서로를 아낌없이 사랑했지요 ..  (9∼10쪽)


 좋다 하는 책을 아이들한테 잔뜩 선물한대서 아이들이 좋아할 까닭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좋다 하는 책을 즐거이 읽기도 해야 하지만, 좋다 하는 책에 앞서 따순 사랑을 먼저 넉넉하고 보드랍게 받아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따순 사랑을 먼저 넉넉하고 보드랍게 받아먹지 못하는 채 좋다 하는 책만 맞아들일 때에는, 아이들 몸뚱이는 가냘프고 맙니다. 이때에는 아이들 마음 또한 메마르고 말아요.

 좋다 하는 책이란 무엇일까요. 아이들 지능과 재주와 솜씨와 지식을 키우는 책이 좋다 할 만한 책일까요.

 좋다 하는 책에는 어떤 줄거리를 담을까요. 아이들이 언제나 사랑스러이 살아가는 힘을 이끄는 책이 아니고서야 좋다 하는 책이라 손꼽을 수 있을까요.

 좋다 하는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이나 학교 모두 매한가지라고 느낍니다. 어른들은 무엇을 바라보면서 좋다고 여기는가요. 어떤 유치원이 좋은 유치원인가요. 어떤 어린이집이 좋은 어린이집인가요. 어떤 학교가 좋은 학교인가요.

 아니, 어떤 아이가 되어야 내 아이가 좋은 아이인가요. 어떤 아이로 자라야 내 아이가 좋은 아이답다 할 만한가요. 어떤 아이로 키워야 내 아이를 좋은 아이로 생각하나요.


.. 이제 갓 여섯 살이긴 해도, 여러 번 할아버지를 따라다닌 덕에 안트베르펜을 구석구석 잘 알고 있는 넬로가 할아버지를 대신하게 되었어요. 넬로는 우유를 팔고 잔돈을 거두어 우유 주인에게 가져다주는 일을 성실하게 해냈습니다. 그런 넬로를 사람들은 누구나 좋아하게 되었지요 ..  (27쪽)


 어른들은 대중노래를 흥얼거립니다. 온통 사랑 외침만 있는 대중노래를 쉴새없이 주절거립니다. 어른들은 여기에서도 사랑, 저기에서도 사랑이라고 외칩니다. 연속극도 사랑을 다루고 영화도 사랑을 다룹니다. 소설도 사랑을 다루며 시도 사랑을 다뤄요. 어른들은 노상 사랑으로 둘러싸입니다. 그러나 막상 어른들이 사랑을 맺어 낳는다는 아이한테는 참답거나 착하거나 고운 사랑을 물려주지 못해요. 아이들이 사랑을 받아먹도록 돕지 않아요. 아이들한테 사랑을 나누기 앞서, 섣불리 지식을 안깁니다. 아이들하고 사랑꽃을 피우지 않고서, 지식열매만 먹이려 해요.

 학교라는 곳이 생긴 지 얼마 안 된 줄 깨달아야 합니다. 학교라는 곳을 세워 모든 아이들을 집어넣은 지 얼마 안 된 줄 알아차려야 합니다. 학교라는 곳에 모든 아이들이 다녀야 한 뒤부터 이 나라 아이들 삶이 메마르거나 팍팍하거나 차디차거나 슬픈 굴레에 얽히고 만 줄 느껴야 합니다.

 아이들은 무엇을 배우는가요. 아이들은 무엇을 배워야 하나요.

 아이들한테 국어 영어 수학 역사 도덕이 무슨 뜻일까요. 아이들이 우리 말글과 이웃을 느끼지 못한다면, 아이들이 셈과 생각과 마음과 사랑을 키우지 못한다면, 아이들이 살림집과 마을과 자연을 보듬지 못한다면, 아이들한테 주어지는 시험성적과 졸업장은 어떤 값을 하는가요.


.. “그림을 보여주지 않다니 정말 너무해. 가난해서 돈을 낼 수 없기 때문에 그림을 볼 수 없다니! 그분이 저 그림을 그리셨을 때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겠다고는 생각하지 않으셨을 거야. 난 믿어. 그분이 계셨다면 언제든 매일매일 우리가 그림을 볼 수 있게 해 주었을 거야.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림을 천으로 가려 두었어. 캄캄한 어둠 속에 저 아름다운 그림을 가둬 두다니!” … 넬로는 생각에 빠져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배도 고프고 맨발에 나막신만 신어 몹시 추웠을 텐데요 … 넬로는 가난 속에서 자라 운명과 싸웠으며, 글을 배우지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도 못했습니다 … 파트라슈는 항상 넬로와 함께 있으면서 넬로가 길바닥의 돌에 석필로 그린 그림들이 생생히 살아숨쉬는 것을 지켜보았으니까요 ..  (38, 40쪽)


 예부터 큰식구 이루던 조촐한 보금자리가 배움터였습니다. 삶을 배우고 사랑을 배우던 배움터란 바로 큰식구 이루던 조촐한 보금자리였습니다. 스스로 밥을 얻고 스스로 옷을 지으며 스스로 집을 돌보던 보금자리가 늘 배움터였습니다.

 예부터 큰식구 이루던 조촐한 보금자리에서는 밥·옷·집을 낳고 돌보며 건사합니다. 이 보금자리에서는 쓰레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나무를 심던 우리 옛사람입니다. 아이들이 사랑스레 살아갈 보금자리부터 되고, 아이들이 살가이 부대낄 마을이 되도록 했던 어버이요 어른입니다.

 조촐히 이루는 보금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전쟁무기나 싸움무기를 만들지 않습니다. 낫과 쟁기와 보습과 호미면 넉넉합니다. 임금님도 신하도 장군도 사또도 이방도 포졸도 쓸데없는 삶입니다. 스스로 밥을 일구고 스스로 옷을 지으며 스스로 집을 마련하는데, 무슨 임금이나 사또나 포졸이 있어야 하나요. 이웃하고 다투거나 이웃집 논밭을 넘보지 않는데, 어떤 전쟁무기나 싸움무기가 있어야 하나요.

 이웃을 해코지하거나 다치게 하거나 따돌리거나 등치거나 괴롭히지 않으니까, 싸우는 연장은 없습니다. 이웃 또한 쳐들어온다든지 들볶는다든지 바보짓을 하지 않으니까, 서로서로 싸우는 연장을 안 갖춥니다.

 임금이 생기고 신하가 생기며 사또이니 포졸이니 무어니 하고 생기니까 싸움무기가 생깁니다. 권력이 생기고 이름값이 생기며 돈이 생깁니다. 권력이고 이름값이고 돈이고 부질없는데, 이 부질없는 빈놀음을 하자면서 바보짓이 불거집니다.


.. 넬로는 깨끗한 나무판 위에다 숯으로 친구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 그림을 본 방앗간 주인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림은 참으로 신기하게도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외동딸의 모습을 꼭 닮았거든요. 그러나 돌연 방앗간 주인은 집에서 엄마를 돕지 않고 밖에서 빈둥거린다며 어린 딸을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그러고는 겁에 질려 우는 딸을 집 안으로 들여보냈지요. 그런 다음 돌아서서 넬로의 손에서 나무판을 낚아챘습니다. 그리고 소리쳤어요. “너, 이렇게 어리석은 짓 할 게냐?” 방앗간 주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요. 넬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그러고는 들릴락 말락 웅얼거렸습니다. “전 눈에 들어오는 것은 뭐든 그리는걸요.” 방앗간 주인은 한동안 잠자코 있었어요. 그러더니 불쑥 일 프랑짜리 은화를 내밀었지요. “내 장담하건대, 그림 그리는 일은 사악하고 어리석은 일이야. 시간 낭비일 뿐이다. 어쨌거나 이 그림은 알루아를 닮았고 알루아의 엄마가 보면 기뻐할 테니 내게 다오. 대신 은화를 주마.” 어린 아르덴 소년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싹 사라져 버렸습니다. 소년은 고개를 들며 손을 등 뒤로 감추었어요. “코제 나리, 돈하고 그림 다 가지세요.” 넬로는 순진하게 말했습니다. “저한테 이따금 잘해 주셨잖아요.” 그러더니 넬로는 파트라슈와 함께 들판을 가로질러 가 버렸어요. “그 돈만 있었으면 성당의 그림들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넬로는 파트라슈를 보며 중얼거렸습니다. “하지만 알루아의 그림은 팔 수 없었어. 아무리 그 그림들이 보고 싶어도 그럴 수는 없어.” ..  (46∼47쪽)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꿈을 키웁니다. 축구선수가 되든 야구선수가 되든, 한결같이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틀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내 몸을 살찌우는 좋은 밥을 거둔다든지, 내 몸을 아끼는 좋은 옷을 짓는다든지, 내 몸이 살가이 쉴 보금자리를 이룬다든지, 이런저런 꿈을 키우거나 품거나 헤아리지 않는 오늘날 아이들이자 어른들입니다.

 돈을 벌면 무얼 하나요. 돈을 벌면 돈을 쓰겠지요. 이름값 얻으면 무얼 할까요. 이름값 얻으면 이름을 드날리겠지요.

 사랑을 심어 사랑을 거두면 사랑을 나누겠지요. 꿈을 심어 꿈을 거두면 꿈을 나누겠지요.


 (2) 어린이와 집


 시골마을 할머니랑 할아버지가 서숙을 텁니다. 구부정한 허리는 펴지지 않습니다. 너른 길가에 쪼그려앉아 서숙을 털어 빈 껍질을 날립니다. 공장 기계가 있으면 흙일꾼 할매랑 할배 일손을 덜 수 있나요. 공장 기계가 있으면 서숙을 흙에 심을 때에 일손을 아낄 수 있나요. 공장 기계가 있으면 굳이 흙에 서숙을 심어 거두지 않아도 될까요.

 서숙을 이루는 영양소를 낱낱이 밝혀 공장 기계로 ‘서숙하고 꼭 닮은 먹을거리’를 만들면 값싸면서 품이 안 들고 맛날까 궁금합니다. 나락을 이루는 영양소를 하나하나 캐내 공장 기계로 ‘나락하고 똑 닮은 먹을거리’를 만들면 더 값싸고 품 하나 안 들이는 맛난 밥이 나올는지 궁금합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공장 기계와 같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까지 다닌 아이들은 틀에 맞추어 잘 짜인 톱니바퀴 노릇을 합니다. 이 아이들은 회사나 관공서에서 시키는 일을 제때에 제대로 해낼 줄 아는 일꾼입니다. 그렇지만 이 아이들은 스스로 밥을 짓거나 옷을 짓거나 집을 짓지는 못합니다. 이 아이들은 스스로 사랑을 꽃피우거나 내 살가운 짝꿍이랑 사랑열매를 맺는 일은 못합니다.


.. 젊었을 때 군인이었던 할아버지는 황소가 밭고랑을 짓밟듯이 전쟁이 이 땅을 뭉개 버린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어요. 할아버지는 상처 입은 몸만 갖고 빈손으로 전쟁터에서 돌아왔습니다 … 예한 다스 할아버지가 여든 살이 되었을 무렵, 소도시 스타벨로트 근처의 아르덴 지방에 살던 딸이 죽으면서 할아버지에게 두 살 난 아들을 남겼습니다. 할아버지는 자기 한 몸 먹고살기도 힘들었지만 묵묵히 손자를 맡아서 키웠어요. 그리고 이 아이는 곧 할아버지에게 둘도 없는 소중한 기쁨이 되었습니다 … 할아버지와 넬로는 비록 좁고 보잘것없는 오두막에서 살았지만 만족했습니다 … 형편은 어려웠지만 할아버지는 손자를 무척이나 상냥하고 다정하게 대했어요. 넬로는 마음씨가 진실하고 순수하며 고왔지요. 할아버지와 넬로는 딱딱하게 굳은 빵 한 조각, 양배추 몇 잎에도 기뻐했으며 그 이상의 것을 탐내지 않았습니다 ..  (12∼13쪽)


 두 아이랑 살아가는 내 삶을 돌이킵니다. 두 아이한테는 무엇보다 너른 사랑과 깊은 믿음을 물려줄 수 있는 어버이여야 합니다. 두 아이한테 사랑과 믿음을 물려주자면 어버이인 나부터 사랑과 믿음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내 삶을 사랑으로 누리고 믿음으로 즐겨야 합니다. 어버이 스스로 늘 사랑스러우며 믿음직스러울 때에 어버이 둘이 사랑으로 맺은 열매인 아이들은 가장 보드라우면서 싱그럽고 빛나는 사랑을 받아먹어요.

 두 아이 어버이인 나는 아무래도 오래도록 제도권 학교에 길들었습니다. 학교에서는 개구진 짓을 하거나 교과서는 집어치우며 교과서 아닌 책을 읽으며 버틴 아이였습니다. 집에서는 텔레비전 소리가 시끄러웠다지만 국민학생 때에는 텔레비전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동네 동무들이랑 신나게 뛰놀았습니다. 아버지가 주마다 잔뜩 갖다 안기는 문제집이 벅찼습니다. 이제 와 헤아리면 참 작은 집에 참 작은 씻는방에 참 작은 마루에 참 작은 방에 참 작은 부엌인 살림이었으나, 어린 날에는 이런 대목은 하나도 헤아리지 않으면서 너르며 깊은 사랑을 날마다 받아먹었습니다. 어머니는 뜨개옷 뜨개모자 뜨개장갑을 손수 마련해 주었습니다. 이웃 아주머니들은 착하다 예쁘다 심부름 잘한다 하는 말을 끊이지 않고 들려주었습니다. 학교에서 교사들은 무시무시한 몽둥이를 휭휭 휘두르면서 윽박질렀습니다. 중학교 동무들은 툭하면 무리지어 싸움박질이요 힘여린 동무 괴롭히거나 쥐어박기 일쑤이면서, 중학교 교사들은 툭하면 뺨따귀를 갈기고 구두발로 걷어찼습니다. 커다란 아파트숲으로 집을 옮기기 앞서까지 언제나 학교를 걸어서 다녔습니다. 비오는 날은 비를 맞으며 뭉게구름과 무지개를 보았습니다. 맑은 날은 파란 빛깔과 하얀 빛깔이 어우러진 멋진 그림을 손가락으로 휘휘 저으며 그렸습니다.

 깊은 밤에 자꾸 깨는 둘째 갓난쟁이는 요즈음 들어 몸이 퍽 아픕니다. 이 작은 몸으로 참 잘 견디는구나 싶어 대견하면서, 이 몸앓이를 네 어버이가 맡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싶지만, 아이는 아이대로 몸앓이를 견디고 이기면서 무럭무럭 크겠지요. 이 몸앓이가 지나고 아이 스스로 제 두 다리로 흙땅에 우뚝 설 무렵 얼굴에 벌겋게 난 아토피가 시나브로 걷히겠지요.


.. 파트라슈는 태어날 때부터 고통과 힘에 부치는 일밖에 물려받은 것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욕지거리를 먹고 매질 세례를 받으며 자랐어요. 파트라슈의 나라는 기독교 국가였지만 파트라슈는 그저 개일뿐이었거든요. 파트라슈는 강아지 티를 채 벗기도 전에 벌써 짐수레와 멍에의 쓰라린 맛을 알았습니다 … (철물점 사람이 파트라슈를 버렸고, 예한 다스 할아버지가 파트라슈를 길에서 살려서 돌볼 때에) 신기하게도 그렇게 쉬는 동안 한 번도 욕설을 듣지 않았고, 아픈 매질도 당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안쓰러워하는 어린아이의 목소리와 할아버지의 다정한 손길만을 느낄 뿐이었지요 … 파트라슈는 또 할아버지와 손자가 자기에게 어서 일어나라고 욕지거리를 내뱉지도 않고, 빨리 일하라고 매질을 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고 은근히 놀랐어요. 그리고 마침내 파트라슈는 그 크나큰 사랑에 감동했지요 … 파트라슈는 마치 자기를 보살펴 준 데 대한 보답으로 일을 돕고 싶다는 듯 가만히 서 있었어요. 또 그 일을 잘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했지요. 예한 다스 할아버지는 한동안 그렇게 하기를 꺼렸습니다. 할아버지는 대자연의 뜻을 거스르면서 그저 부려먹고자 개를 줄로 옭아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파트라슈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  (15, 22, 23, 24쪽)


 예쁜 아이를 바라보며 예쁜 어버이로 살아야지 하고 다짐합니다. 착한 아이를 바라보며 착한 어버이로 살아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때때로 밉다 싶은 짓을 하는 아이를 바라보며 어버이로서 아이한테 못나거나 모자란 짓을 했으니 이렇게 따라하는구나 싶어 부끄럽고 슬픕니다.

 오늘 하루도 동이 새로 틉니다. 희뿌윰하게 밝는 마당에 차츰차츰 노란 물이 들면서 이내 환한 온갖 빛깔이 살아숨쉬겠지요. 밤새 빛나던 뭇별은 햇빛에 가릴 테고, 추운 날 꽃봉우리 활짝 여는 동백꽃이 우리 살림집 마당에서도 흐드러지겠지요. 동백나무 곁 후박나무는 후박꽃이 필까요. 후박꽃은 언제 필까요. 집 뒤꼍 뽕나무는 이듬해에 어떤 꽃을 피울까요. 우리 집 뒤쪽 흙땅에서 자랄 모과나무에서 모과꽃 피는 모습을 볼 수 있겠지요. 멧골자락에서 주운 도토리를 심으면 이곳에서도 참나무가 자랄 수 있겠지요.


..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린 가난하단다. 우린 신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공손하게 받아들여야 해. 좋지 않은 일도 착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려무나. 가난뱅이는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란다 … 가난한 사람도 때로는 선택을 할 수 있어. 위대한 사람이 되는 길을 택하는 거야. 남들이 함부로 얕보지 못하게 말이야.” … 넬로는 불가능하지만 아름답고 순수하며 아무런 이기심도 없는 꿈에 사로잡혀 걸어갔습니다 ..  (52, 53, 56쪽)


 하나하나 천천히 사랑하고 싶습니다. 하나씩 가만히 아끼고 싶습니다. 모두모두 알뜰히 보살피고 싶습니다. 저마다 해맑게 바라보고 싶습니다.

 햇살이 보듬는 풀과 나무처럼, 아이를 어루만지는 어버이로 사는 기쁨을 누리고 싶습니다. 햇볕이 쓰다듬는 흙과 물처럼, 아이를 얼싸안는 어버이로 지내는 즐거움을 나누고 싶습니다.


.. 넬로는 종이라는 위대한 흰색 바다 위에 자신을 사로잡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환상 가운데 하나를 옮겨 그렸어요. 물론 그림에 대해 가르쳐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물감을 살 수도 없었고요. 몇 안 되는 조잡한 미술 도구를 장만하기까지 넬로는 수도 없이 끼니를 굶어야 했습니다. 그래 봤자 검은색과 흰색으로밖에 사물을 표현할 수 없었지만 말이에요 … 넬로에게 선이나 원근법, 해부학이나 명암에 대해서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넬로는 온갖 고난과 슬픔과 세월의 풍파를 겪은 사람의 말없는 표정을 독특한 느낌으로 그렸습니다 … 넬로는 생각했습니다. 그림을 두고 돌아서니, 왠지 말도 못하게 부끄럽고 쑥스러워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 아무 보잘것없는 가난뱅이가 그림 공부도 제대로 못한 처지에 감히 위대한 화가들, 진짜 예술가들이 자기 그림을 봐 주기를 바랐다는 게 너무나도 주제넘고 경솔하고 어리석게 느껴졌거든요 ..  (60, 62∼63쪽)


 아침부터 파리를 잡습니다. 따뜻한 남녘 날씨에 파리가 아침 일찍 윙윙 날아다니면서 새근새근 자는 둘째 아이 머리께에서 성가시게 구니, 파리채를 들고 아침부터 열 마리 남짓 잡습니다.

 둘째 오줌기저귀를 빨래합니다. 밤새 나온 아이 기저귀를 빨래합니다. 첫째가 갓 태어났을 때에는 늘 첫째 오줌기저귀를 빨면서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이제 첫째는 기저귀를 떼었기에 기저귀 빨래는 없으나, 다른 옷가지 빨래가 많습니다. 첫째를 씻길 때에는 머리를 따로 감깁니다. 새로 빨래한 오줌기저귀는 해바라기하는 마당에 빨래대를 세워서 넙니다.

 둘째가 무럭무럭 자라면 둘째 기저귀 빨래가 사라지면서 옷가지 빨래가 잔뜩 늘 테고, 둘째를 씻길 때에 머리를 따로 감기겠지요. 이때에는 네 식구 함께 풀을 밟고 흙을 누리는 시골집살이를 신나게 누리겠지요.


 (3) 《플랜더스의 개》에서 읽는 넋


 요즈음 아이들 가운데 만화영화를 안 보는 아이는 없으리라 봅니다. 만화영화가 아니더라도 텔레비전을 보지 않으며 살아가는 아이가 몇이나 될는지 궁금합니다. 집에 텔레비전을 모시지 않는 어버이는 얼마나 될까요. 아이를 낳아 어버이로 살기 앞서, 텔레비전을 모시지 않는 젊은이로 지냈던 사람은 얼마쯤 있을까요. 젊은이가 되기 앞서 푸름이나 어린이로 여느 제도권학교를 다니는 동안 텔레비전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살던 사람은 있기는 있나 모르겠습니다.

 영국사람 위다 님이 일군 문학 《플랜더스의 개》(비룡소,2004)를 천천히 되읽으면서 문득 이런저런 생각이 스칩니다.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 《플랜더스의 개》를 어린이 명작동화처럼 읽힌 때는 언제부터일까 하고. 일본사람 요시로 구로다 님이 ‘텔레비전 만화영화’로 〈플란다스의 개〉를 내놓기 앞서까지 이러한 작품이 있는 줄 알던 한국사람은 있기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한국사람한테 아로새겨진 ‘플랑드르 시골마을 아이들과 개’ 이야기는 거의 모두 만화영화로 그려진 모습이라고 느낍니다.

 동화책은 ‘플랜더스’라 적고 만화영화는 ‘플란더스’라 적지만, 둘 모두 틀린 이름입니다. 옳게 적자면 ‘플랑드르(Flandre)’나 ‘플란데렌/플라안데렌(Vlaanderen)’입니다. 영어로 하자면 ‘플랜더스(Flanders)’가 되기는 합니다. 그리고, 이 문학을 빚은 사람은 영국사람이었으니, 영국문학에서는 ‘플랜더스’라 적었겠지요. 이를 일본사람은 ‘플란다스’라 읽었을 테고요.

 《플랜더스의 개》에 나오는 시골마을은 프랑스하고 네덜란드가 맞붙은 자리입니다. 프랑스 이름으로 이곳을 가리켜야 할는지 네덜란드 이름으로 이곳을 말해야 할는지 좀 오락가락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 시골마을 아이들 옷차림이나 버릇이나 삶을 돌아본다면, 프랑스보다 네덜란드에 한결 가깝습니다. 어쩌면, 이 만화영화를 빚은 일본이나 이 이야기를 일본을 거쳐 받아들인 한국이나, 넬로와 파트라슈를 그냥 ‘네덜란드 문화’로 여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 봄과 여름이면 넬로와 파트라슈는 더욱 기쁨에 들떴습니다. 플랜더스는 사실 경치가 그렇게 아름다운 곳은 아니었어요. 어쩌면 루벤스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 중에서 가장 초라한 곳일지도 모르지요 … 시원하게 탁 트인 푸른 자연은 넬로와 파트라슈에게 충분히 아름다웠지요. 둘은 그 이상의 것을 탐내지 않았어요 ..  (28, 30쪽)


 아이들은 영국 아이들이건 네덜란드 아이들이건 벨기에 아이들이건 남녘 아이들이건 북녘 아이들이건 일본 아이들이건 다르지 않아요. 모두 사랑스러운 아이들입니다. 한결같이 씩씩한 아이들이에요. 저마다 맑으며 밝은 아이들입니다.

 《플랜더스의 개》는 사랑스러우면서 씩씩한 아이들 삶을 그립니다. 맑으며 밝게 살아가려는 아이들 꿈을 그립니다.

 이 아이들 곁에는 아이들처럼 사랑스러우면서 씩씩한 어른이 있습니다. 아이들하고 똑같이 맑으며 밝은 어른이 있습니다. 이와 함께, 사랑스럽지 못하고 씩씩하지 못한 어른이 있습니다. 맑으며 밝은 넋을 잃거나 잊은 어른이 있습니다.

 사랑스러움보다 돈을 더 높이 사는 어른이 있습니다. 돈보다 사랑스러움을 거룩히 여기며 아끼는 어른이 있습니다. 맑으며 밝은 넋보다 이름값이나 권력에 휘둘리는 어른이 있습니다. 이름값이나 권력은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맑은 넋과 밝은 얼을 북돋우는 어른이 있습니다.


.. 그때 갑자기 어둠을 뚫고 널따란 복도를 지나 하얗고 눈부신 광채가 흘러 들어왔어요. 찰 대로 찬 달이 구름 사이로 빛을 발한 거였어요. 눈은 그쳐 있었으며 쌓인 눈에 반사된 달빛은 새벽녘의 햇살만큼이나 선명했어요. 빛은 둥근 천장을 통과해서 저 위에 걸린 그림 두 점을 환히 비추었어요. 넬로가 정신이 혼미한 채로 그림들을 가린 천을 걷어 버린 것이었어요 … “마침내 그림을 봤어! 오, 하느님! 이제 됐습니다!” 넬로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팔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넬로는 털썩 무릎을 꿇었지만 그래도 그토록 동경해 온 걸작만은 여전히 우러러보고 있었어요. 얼마 되지 않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신비한 빛은 꿈결과도 같이 신성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비춰 주었어요. 넬로가 그토록 오랫동안 간절히 보고 싶어했지만 결코 볼 수 없었던 그림이었지요. 하늘의 권좌에서 흘러 내려오기라도 한 듯 선명하고 보드라우면서도 강렬한 빛이었어요 ..  (92, 94쪽)


 그림을 그리는 넬로는 아름다운 꿈을 사랑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넬로는 제 가슴으로 스며든 고운 빛줄기를 그림으로 담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넬로는 예한 다스 할아버지랑 파트라슈와 알루아하고 지낸 나날을 그림으로 곰삭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넬로는 천재 그림쟁이는 아닙니다. 그저 한 가지, 하늘이 내린 선물을 곱게 아낄 줄 아는 아이입니다. 하늘이 내린 선물을 저버리지 않은 아이입니다. 하늘이 내린 선물보다 지식에 기울지 않은 아이입니다. 하늘이 내린 선물로만 살다가 하늘이 내린 또다른 길을 걸어가고만 아이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넬로가 흙바닥이나 하늘이나 마음속이 아닌 종이에 그림을 더 남겼다면, 넬로는 더 빛나거나 훌륭하거나 놀라운 그림쟁이로 이름을 드날릴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넬로는 흙바닥 그림은 흙바닥 그림대로 사랑합니다. 하늘 그림은 하늘 그림대로 좋아합니다. 마음속 그림은 마음속 그림대로 아낍니다.


.. 전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여! 그대의 위대한 인물들을 귀하고도 귀하게 여기세요. 오직 그 인물들을 통해서만 미래가 그대의 나라를 기억할 테니까요 ..  (34쪽)


 푸른 들판을 바라보며 푸른 빛깔을 마음으로 그립니다.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파란 빛깔을 마음으로 빚습니다. 콩닥콩닥 뛰는 뜨거운 가슴을 느끼며 뜨거운 기운을 마음으로 일굽니다.

 좋은 사람들과 살아가면서 좋은 사람들 이야기를 그림으로 싣습니다. 좋은 들판을 일구면서 좋은 들판에서 흘린 땀방울을 그림으로 싣습니다. 좋은 바람을 마시고 좋은 흙을 만지는 몸으로 좋은 꿈을 그림으로 싣습니다. (4344.11.16.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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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부름센터 시작합니다
쇼도 가오루 지음, 박재현 옮김, 야마다 우타코 그림 / 가치창조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즐거이 살아가며 즐거이 읽기
 [어린이책 읽는 삶 11] 쇼도 가오루, 《심부름센터 시작합니다》(가치창조,2000)



- 책이름 : 심부름센터 시작합니다
- 글 : 쇼도 가오루
- 그림 : 야마다 우타코
- 옮긴이 : 박재현
- 펴낸곳 : 가치창조 (2010.4.20.)
- 책값 : 8500원


 가을이 깊어지면서 나뭇잎이 하나둘 집니다. 찬바람이 싱싱 불면서 들판과 밭자락에서 끝없이 자라려 하던 들풀이 수그러듭니다. 앙상한 나무는 잎을 모두 떨군 채 겨울나기를 할 테고, 들풀이 수그러든 들판과 밭자락은 이들 들풀이 거름이 되고 이불이 되면서 겨울살이를 하겠지요.

 날이 쌀쌀하니 소매 긴 옷을 챙겨 입습니다. 찬바람에 따라 긴옷입니다. 그런데, 여느 도시에서는 한여름에도 긴옷을 입곤 합니다. 시골에서 도시로 볼일을 보러 마실을 해야 할 때에도 긴옷을 챙겨야 합니다. 버스이든 기차이든 전철이든 온통 에어컨을 펑펑 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와글와글 북적이는 전철이나 버스에 에어컨이 나오지 않는다면 숨통이 막힐 테지요. 그렇지만 언제부터 왜 자동차에 에어컨을 달아야 했을까 궁금합니다. 창문을 열어 바람을 쐴 수 없는 노릇인가요. 지난날에는 기차도 창문을 열어 바람을 쐬었어요. 전철도 땅밑을 오가지 않고 땅위를 달릴 때에는 창문을 열어 바람을 맞아들였어요.

 가만히 돌이키면, 자동차가 부쩍 늘어나면서 에어컨을 써야 합니다. 자동차가 부쩍 느는 바람에 버스를 타며 창문을 열면 매캐한 바람이 잔뜩 몰려들어 재채기가 나옵니다. 자동차를 모는 사람 또한 창문을 열기보다는 에어컨을 틀곤 합니다. 내 자동차를 비롯해 숱한 자동차가 내뿜는 매캐한 배기가스를 들이마시고 싶지 않으니까요.

 여름날 면사무소를 찾아간다든지, 은행에 들른다든지, 우체국에 가 본다든지, 무슨무슨 기관에 발을 디딘다든지 하면, 바깥하고는 너무 다른 차가운 바람 때문에 오슬오슬 떨곤 합니다. 그예 철을 잊습니다. 고스란히 날을 잊습니다.

 바깥 볼일을 마치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시골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합니다. 철을 잊은 터에서 일하는 사람한테는 어떤 철이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날을 잊는 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날을 누릴까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따순 바람과 함께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살아갈 목숨을 텐데, 사람은 따순 햇살과 함께 차가운 물을 마시며 살아갈 목숨일 텐데, 철도 날도 잊는다면 무엇을 아는 목숨으로 살아낼 만한지 모르겠습니다.


.. 이름 있는 고전적인 자동차는 아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좋아했던 부품을 모아서 만든,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자동차다 … “너, 조수가 되어 일해 줄래?” “너라고 말하지 말아요. 나는 ‘미카’예요. 이름으로 제대로 불러 주세요.” … 자세히 들여다보니까 ‘광택, 녹슴, 곰팡이 예방’이라고 쓰여 있었어. 성분은 밀랍, 밍크오일, 부처꽃, 괭이밥의 이파리, 푸조나무의 껍질, 물잠자리의 날개 ..  (5, 32, 57쪽)


 즐거이 살아가는 사람은 즐거이 나누는 사랑입니다. 바삐 살아가는 사람은 바쁜 나머지 잊거나 잃는 사랑입니다. 즐거이 살아가는 사람은 즐거이 읽는 책입니다. 허둥지둥 살아가는 사람은 허둥지둥 앎조각을 쌓거나 자격증을 거머쥐려고 읽는 책입니다. 즐거이 살아가는 사람은 고마이 먹는 밥입니다. 돈벌이에 매여 살아가는 사람은 돈벌이할 틈을 쪼개느라 밥맛을 하나하나 차분히 느낄 틈이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가자면 서로 즐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갈 사람은 바쁠 수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가고 싶기에 꿈 한 자락 즐거이 나눕니다. 서로 사랑할 틈이 없기에 그만 매몰차거나 딱딱한 몸짓과 말투가 되고 말아요.

 아이들이 반드시 대학교에 가야 한다면 아이들 모두 대학교에 갈 수 있도록 대학교 문이 열려야 합니다. 아이들이 굳이 대학교에 가야 하지 않는다면 대학교 문턱은 높아도 됩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이 나라는 아이들이 굳이 대학교에 가야 하지 않아요. 대학교 문턱이 너무 높거든요. 입시지옥 굴레가 너무 모질고, 대학교 배움값이 지나치게 비싸요. 이런 나라에서는 대학교는 부질없어요.

 사람은 누구나 문턱이 낮은 곳으로 가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아낌없이 마음을 여는 이웃이랑 사귀고, 허물없이 마음을 열어젖힌 동무랑 사랑을 나눌 노릇이에요. 문턱 높은 이웃하고는 사귀지 못해요. 허물 많이 뒤집어쓰려는 동무랑 사랑을 나누지 못해요.


.. 꿈을 꾸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꿈이 샘물처럼 솟아오른다고 해요. 먹어도 먹어도 또 좋은 꿈이 쌓인대요 … “엄마는 늘 바쁘니까 귀찮게 굴면 안 돼라고 말해요. 나도 할 수 있는 심부름이 있는데도요.” ..  (22, 33쪽)


 곡식은 좋은 밥입니다. 열매는 좋은 살입니다. 풀잎은 좋은 물입니다. 스스로를 기꺼이 내주어요.

 익은 벼는 스스럼없이 고개를 숙이면서 온몸을 밥으로 내줍니다. 무르익은 열매는 가지가 휘어지도록 열리면서 온몸을 맛난 살로 내줍니다. 갓 돋은 풀잎은 싱그러운 빛을 뿌리면서 고운 내음 번지는 푸른 물을 내줍니다.

 사랑이면서 삶이에요. 삶이면서 사랑이에요. 흙은 누구한테나 밥을 내줍니다. 햇살은 누구한테나 밥을 먹입니다. 물은 누구한테나 밥을 베풉니다. 바람은 누구한테나 밥을 차려 줍니다.

 이야기책 《심부름센터 시작합니다》(가치창조,2000)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할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자동차 하나를 온사랑으로 보듬는 젊은이는 마을 이웃을 따사로이 사랑하는 길을 걸으면서 살림을 꾸립니다. 돈을 더 많이 벌려고 바둥거리지 않아요. 혼자 돈을 거머쥐려고 버둥거리지 않아요. 젊은이 삶을 아끼려고 애씁니다. 젊은이 나날을 사랑하려고 힘씁니다.


.. 장난감 가게에 들어가서 나는 아이코, 하고 생각했다. 주위에는 유모차를 밀고 있는 엄마나 아이들의 손을 잡은 아빠로 가득했다. 여자 아이는 장난감도 보지 않고, 그런 가족들의 모습을 부러운 듯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갈까?” “네.” … 나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나를 지켜봐 준 이가 있었다니! ..  (29, 69쪽)


 다만, 젊은이는 모든 사랑을 빈틈없이 갖추지 않습니다. 젊은이 한 사람이 온갖 사랑을 빠짐없이 건사하지 않아요. 아직 틈이 많아요. 아직 많이 모자라요. 그래, 그러니까 젊은이입니다. 비고 모자란 틈이 많기에 젊은이입니다. 천천히 배우고 천천히 깨달으며 천천히 사랑하기에 젊은이예요.

 새롭게 배우기에 젊은이입니다. 고맙게 맞아들이기에 젊은이입니다. 해맑게 어깨동무하기에 젊은이예요.

 아직 젊은 한 사람은 아이를 낳아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 같은 슬기가 있을 턱이 없습니다. 아직 젊은 두 사람은 쉰 해 예순 해 일흔 해를 살아온 할매나 할매처럼 깜냥을 갈고닦을 턱이 없습니다. 스무 살 젊은이는 스무 살 젊은이답게 여러 가지를 합니다. 스물두 살 젊은이는 스물두 삶 젊은이답게 여러 사람을 만납니다.

 여러 일을 하고 여러 사람을 마주하면서 제 얼굴과 눈길과 마음을 가다듬는 젊은이예요. 젊은이는 “심부름집을 꾸리”면서 사랑을 배웁니다. 심부름집 일을 하면서 사랑을 느낍니다.


.. “태어나는 많은 것들에게는 봄바람과 빛이 필요하거든.” … “나는 젊은 시절에는 늘 정신없이 바쁘게 지냈어요. 그런데 나이가 들고 이 세상에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에 와서, 오히려 시간이 넉넉한 것처럼 생각이 드네요.” ..  (70, 84쪽)


 쇼도 가오루 님 글과 야마다 우타코 님 그림이 보드랍게 어우러진 이야기책 《심부름센터 시작합니다》는 아주 대단한 삶을 담지 않습니다. 아마 이 책 비슷한 이야기는 어렵지 않이 다른 데에서도 찾아 읽거나 들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꽤 되리라 생각해요.

 이야기책 《심부름센터 시작합니다》는 젊은 한 사람이 젊은 한 사람대로 스스로 제 삶을 사랑한 줄거리를 보여줍니다. 이 마을 이 사람은 이 마을 이 사람대로 제 이야기를 들려주고, 저 마을 저 사람은 저 마을 저 사람대로 당신 이야기를 들려줘요. 다 다른 사람들은 다 다른 사랑을 길어올립니다. 다 다른 이웃들은 다 다른 사랑을 오순도순 나눕니다. 다 다른 사랑은 다 다른 삶터에서 다 다른 무지개옷을 입으며 가만히 흙에 뿌리내려 새잎을 냅니다. (4344.10.18.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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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oferry 2011-10-19 0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둘러보아요. 된장님의 서재에서는 긴장이 되요. 쉽게 쓰던 말들도 조심하게 되고......얼마나 많은 우리 말을 잊어가는 중인지 깨닫게 되기도 하고요, 다정한 말투지만 그 안에 단단한 확신과 진정성을 담기위해 꾹꾹 눌러쓴 된장님의 비평을 읽고 있노라면 왠지 재능없고 노력을 게을리 하는 작가이거나, 무지한 독장의 입장이 되어 얼굴이 화끈거리고요. >~<::
동시에 된장님의 생활방식이나 사고방식들이 제 삶에 건강한 자극을 줍니다.:-)

숲노래 2011-10-23 05:11   좋아요 0 | URL
즐거이 살아가며 즐거이 읽고
즐거이 나눌 수 있으면 돼요~ ^^
 
떠들썩한 마을의 아이들 동화는 내 친구 72
아스트리드 린드 그렌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논장 / 199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아이들한테 무슨 놀거리를 베푸는가요
 [어린이책 읽는 삶 5]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불러비의 아이들》(국민서관,1981)


- 책이름 : 불러비의 아이들
- 글 :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 옮긴이 : 이반
- 펴낸곳 : 국민서관 (1991.2.20.)
- 2000년에 ‘논장’에서 《떠들썩한 마을의 아이들》로 다시 나옴


 (1) 어린이삶을 생각한다


 집을 떠나 바깥마실을 다니다가 셈틀방에 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나는 늘 ‘담배 안 태우는 자리’에 앉지만, 이곳에 앉아도 담배 내음을 맡아야 합니다. 내가 또닥거리는 자판에도 담배 기운이 서립니다.

 집을 떠나 바깥마실을 다니다가 여관에서 잠을 얻어 잘 때가 있습니다. 나와 내 살붙이는 담배를 태우지 않지만, 어느 여관에 들어가더라도 담배 기운이 자욱합니다. 한겨울이건 한여름이건 맨 먼저 창문을 활짝 열고 한참 담배 내음을 빼냅니다.

 담배를 태우는 사람 눈높이로 바라보자면 ‘담배를 마음껏 태울 자리’가 줄어듭니다. 그러나, 담배를 안 태우는 사람 눈높이에서 살피자면, 담배를 태우지 못하도록 하는 자리가 늘어난다지만, 어디에나 담배 내음이 흐릅니다.

 자동차를 모는 사람 눈높이로 생각하자면 ‘자동차가 들어서지 못할 곳’이라든지 ‘자전거가 달리거나 사람이 걷는 길’이 늘어난다 여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가용 아닌 자전거와 두 다리로 움직이는 사람 눈높이에서 돌아보자면 좁은 골목에서도 무시무시하게 내달리는 자동차가 너무 많을 뿐 아니라, 사람이 걸어다닐 길에까지 자동차가 떡 하니 올라서서 버티기 일쑤입니다.


.. 나는 ‘리자’라고 하는 소녀입니다. 물론 여러분들도 나를 그렇게 부를 수 있어요. 나는 일곱 살인데, 금방 여덟 살이 될 거여요. 엄마는 곧잘 이렇게 말하곤 해요. “너는 이제 그만큼 컸으니, 청소하는 것쯤은 도울 수 있지 않니?” 그렇지만 라스와 핍은 이렇게 말해요. “우리는 어린애들까지 인디언놀이에 끼워 주고 싶지 않아. 너는 아직 너무 어리단 말야!” … 엄마는, 어린 여자아이들이 창고에서 잠잔다는 일을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고 했어요. 하지만, 내가 남자들이 재미있게 지낼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면 여자아이들도 그래야 되지 않느냐고 말하니까, 승낙해 주었읍니다 ..  (10, 57∼58쪽)


 옆지기 어버이와 동생은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서 살아갑니다. 옆지기랑 두 아이와 함께 경기도 일산으로 찾아가는 길은 퍽 고단합니다. 먼저 서울로 들어서야 하고, 서울에서 지하철로 갈아타서 일산으로 접어들어야 합니다. 이동안 매캐한 배기가스와 담배 내음에다가 시끄러운 소리로 골이 띵합니다. 북적이는 사람들은 핏기 없는 얼굴로 바삐 오가느라, 아이들을 건사하며 사람숲을 헤치기란 좀 고달픈 일이 아닙니다. 이 많은 이웃들이 서로를 따사로운 사랑으로 마주하지 못하니, 서울에서든 일산에서든, 아이들하고 즐거이 마실하기는 참 힘겹습니다.

 우리 식구가 시골에서 살아가니까 이렇게 느낀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든 도시에서 살아가든 늘 매한가지입니다. 어디에서 살아가느냐도 틀림없이 돌아볼 노릇인데, 이에 앞서, 사람들이 바라는 길이 거의 한쪽으로 쏠립니다. 돈벌이와 이름얻기와 힘겨루기, 이 한 갈래 길로만 쏠리고야 맙니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나 학원에 넣으면서, 정작 이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며 어떻게 살아가기를 바라는가를 깨닫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대학교에 넣으려 하면서 막상 아이들이 대학교 졸업장으로 어떤 슬기를 깨우치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를 꿈꾸는가를 곱씹지 않아요.


.. 할아버지는 앞을 잘 보지도 못하면서, 창가에 베고니아 화분을 놓고 참 잘 돌봐 주고 있답니다. 할아버지는 그 꽃들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하곤 했읍니다. 또, 벽 위에는 아름다운 그림들도 걸어 놓았는데, 그 중에서도 나는 특히 두 그림을 좋아해요 … 햇빛 속에 앉으면, 할아버지는 갑자기 ‘좋군, 좋은데!’라고 되풀이하여 중얼거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왜 ‘좋군, 좋은데’라고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것은 할아버지의 젊었을 적 나날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래요. 그때는 보나마나 아주 옛날이었을 겁니다 … “할아버지는 정말 안되셨어요. 눈등을 보실 수 없잖아요. 그 대신 노래를 불러 드릴까요?” 안나가 말했어요. 그녀는 할아버지가 우리의 노래 소리를 듣기 좋아하므로, 그렇게 물은 것입니다 ..  (46∼47, 88쪽)


 아이들은 일을 하지 못합니다.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일을 시키지 않습니다. 아니, 어른들부터 일을 하지 못합니다. 어른들은 돈을 벌 뿐, 일을 하지 않습니다. 어른들은 이름값을 높일 뿐, 일을 즐기지 않습니다. 어른들은 힘겨루기에 얽매일 뿐, 어깨동무를 하는 아름다운 일을 사랑하지 않아요.

 내 손으로 밥을 얻어야지요. 내 손으로 옷을 지어야지요. 내 손으로 집을 살펴야지요.

 밥도 옷도 집도 내 손으로 건사할 수 없다면, 어른인 내가 하는 일이란 무엇이 되나요. 밥도 옷도 집도 온통 돈으로만 마련해서 쓰고 버리는 흐름에 젖어든다면, 내 아이는 어른인 나한테서 무엇을 배우거나 물려받을까요.

 아이들은 일을 못할 뿐 아니라 놀이도 못합니다. 아이들은 일하지 못하는 아이들이면서 놀지 못하는 아이들입니다.

 슬프지만 안타깝지만 아프지만, 어쩔 수 없어요. 어른들부터 놀지 못하는걸요. 어른들부터 일하지 않는데다가 놀지 않는걸요.

 놀지 못하는 어른들이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지 못하지요. 신나게 놀고 즐거이 노는 길을 사랑하지 못하는 어른들이니, 이 어른들이 아이를 낳든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든, 아이들이 홀가분하게 뛰노는 기쁨을 누리도록 돕지 못해요.


.. 집에 돌아오는 길에서도 너무 피곤했기 때문에 썰매에서 소리치는 일은 하지 않았읍니다. 나는 등을 대고 누워서 하늘에 있는 찬 별들을 쳐다보았읍니다. 별은 너무 많고 너무나도 멀리 있었읍니다. 그때, 나는 모피깔개 밑으로 기어 들어가서 라스와 핍이 듣지 못하도록 조용히 나 자신을 위해 노래를 불렀읍니다 ..  (107쪽)


 아이들한테 무상급식을 해 본들 부질없어요. 아이들이 학교에서 먹을 낮밥이든 저녁밥이든 도시락이든 바깥밥이든, 사랑이 깃든 밥이어야 해요. 급식을 거저로 해 준다거나, 도시락을 누가 싸 준대서 아이들이 맛나게 먹지 않아요. 급식이든 도시락이든 사랑이 담겨야 몸을 살찌우는 밥이에요.

 아이들한테 훌륭한 교과서나 교재나 책을 안긴다 해서 아이들이 똑똑해지지 않아요. 교육과정이 빈틈없다고 해서 아이들이 빈틈없이 자랄까요. 원어민 영어강사가 가르친대서 아이들이 영어를 잘 배우나요.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을 나와야 비로소 교사 구실을 하는가요.

 아이들은 놀아야 해요. 아이들은 놀면서 일해야 해요. 아이들은 일해야 해요. 아이들은 일하면서 놀아야 해요.

 그러니까, 아이들은 살아숨쉬는 목숨이어야 해요. 아이들은 펄떡펄떡 뛰는 가슴으로 사랑을 나누는 빛줄기여야 해요. 아이들은 제 어버이한테서 가장 슬기로운 꿈을 물려받으면서 한껏 빛나는 씨앗을 마음밭에 심으면서 하루하루 보람차게 누려야 해요.


 (2) 어린이문학을 생각한다


 2000년에 ‘논장’출판사에서 《떠들썩한 마을의 아이들》로 다시 나온 어린이책 《불러비의 아이들》(국민서관,1981)을 읽었습니다. 1981년 책이든 2000년 책이든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 문학입니다. 옛 번역이든 새 번역이든 아름다운 이야기 감도는 사랑스러운 책이에요.

 헌책방마실을 하면서 1981년 책을 뜻밖에 만났습니다. 이윽고 2000년에 새롭게 옷을 입은 책을 만났습니다. 두 가지 책을 나란히 놓고 곰곰이 살피다가, 2000년 책은 책시렁에 예쁘게 꽂고, 1981년 책에 밑줄을 그으면서 읽기로 합니다. 나한테는 1981년 번역이 더욱 애틋하면서 살갑기 때문입니다.


.. 나는 내가 무엇이 될지 잘 모르겠지만, 작고 귀여운 아이들을 좋아하니까 아마 엄마가 될 것 같아요 ..  (14쪽)


 《불러비의 아이들》에 나오는 어린 가시내가 “작고 귀여운 아이들을 좋아하니까” 나중에 어머니가 되리라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눈시울이 촉촉히 젖습니다. 아, 그렇다면, 아이들을, 작고 귀여운 아이들을, 예쁘며 작고 귀여운 아이들을 좋아하는 사내라면 먼 뒷날 아버지가 되리라 생각하겠지요.

 요즈음 아이들을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요즈음 열두어 살 어린이와 열예닐곱 살 푸름이를 헤아려 봅니다. 스물두어 살 젊은이를 헤아려 봅니다.

 오늘날 어린이와 푸름이와 젊은이 가운데 ‘나는 어머니가 되겠어요’라든지 ‘나는 아버지가 되겠어요’ 하고 꿈꾸는 고운 넋은 얼마나 되려나요.

 운동선수나 연예인이나 학자나 의사가 되겠다는 어린이나 푸름이나 젊은이가 아니라, 어머니나 아버지가 되겠다는 어린이나 푸름이나 젊은이는 몇이나 되려나요.


.. 우리 정원 뒤에는 호도나무·노가주나무들과 또, 많은 종류의 관목들이 빽빽한 과수원이 있읍니다. 나무가 정말 너무 많기 때문에, 아빠는 그것을 모두 베어낸 다음 소 목장이나 더 늘려야겠다고 말하곤 합니다. 나는 아빠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거기에는 숨을 장소가 많거든요 … 나는 다른 곳에서 크리스마스가 언제부터 시작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불러비에서는 우리가 생강과자를 굽는 날에 시작이 됩니다. 우리는 그날을 크리스마스 이브만큼이나 재미있어 합니다 ..  (74, 90쪽)


 나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 어린이문학이 좋습니다. 나는 이원수 님 어린이문학 또한 좋습니다.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갈 길을 차근차근 밝히면서, 수수하고 투박한 길을 느긋하게 걸어가는 이야기를 담는 린드그렌 할머님 문학과 이원수 할아버님 문학을 사랑합니다.

 돋보이는 문장력이나 구사력이나 수사력이나 표현력이 얼마나 담겨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공상이니 환상이니 판타지이니 무어니 하는 실마리를 얼마나 실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모든 어린이문학은 사랑에서 비롯해야 한다고 느껴요. 내 사랑스러운 사람들하고 내 사랑스러운 보금자리를 일구는 내 사랑스러운 나날을 아끼는 이야기를 담아야 비로소 어린이문학이라는 이름이 걸맞다고 느껴요. 그리고, 이러한 어린이문학이 밑거름이 되어 어른문학도 태어나겠지요.

 사랑이 없다면 어린이문학이든 어른문학이든 아닐 뿐 아니라, 문학조차 될 수 없으며, 이야기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어요.


.. “생각해 보셔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도 옛날에는 이 뽑기를 무서워했던 어린애였었잖아요?” … “그렇지만, 너도 알다시피 아이들에게 고함을 치며 무섭게 하는 어른도 있어. 그러면, 아이들은 부모 말을 전혀 듣지 않게 되고,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난폭해지게 돼. 신문에 난 기사야.” 안나가 말했읍니다. “이렇게 귀여운 아기에게 어떤 사람이 고함치고 싶어 할까?”..  (125쪽)


 나는 우리 집 두 아이가 예쁜 어머니와 멋진 아버지가 될 수 있기를 비손합니다. 나는 우리 집 두 아이가 예쁜 어머니가 되는 길과 멋진 아버지가 되는 길을 걷자면 스스로 무엇을 익히거나 받아들이거나 살펴야 하는가를 느낄 수 있기를 꿈꿉니다.

 아이들 가슴에서 싹이 돋아 자라날 고운 꿈과 빛을 기다립니다. 아이들 마음에서 움이 트며 꽃이 필 아리따운 이야기와 넋을 바라봅니다.

 어머니가 될 아이들은 담배 내음을 어떻게 마주할까요. 아버지가 될 아이들은 자가용을 어떻게 맞이할까요. (4344.10.9.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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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1-10-09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얘기를 빌어 어린이 문학에 대한 된장님의 생각을 엿보게 하는 글이네요. 잘 읽고 갑니다. 린드그렌의 저 책은 중고책으로라도 사서 보려고 지금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에 동의하면서도 저는 종종 어떻게 하는 것이 아이들을 진정 사랑하는 것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숲노래 2011-10-10 07:06   좋아요 0 | URL
아이를 낳아 함께 살아가는 어머니가 아이하고 함께 지내며 따사로이 돌보는 마음이 바로 어린이 사랑이 아닌가 싶어요..

마녀고양이 2011-10-10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아이가 시골 놀러가서
메뚜기를 잡고 신나하는 모습에, 트럭 뒷칸에서 방방 뛰고, 천염 염색을 열심히 하던 모습에, 참 기뻤어요............. 아주 건강해보였답니다.

숲노래 2011-10-10 17:53   좋아요 0 | URL
앞으로도 이번 일처럼 딸아이랑
좋은 흙 밟는
좋은 나들이
마음껏 즐기셔요.

그리고, 아저씨도 잠을 깨워
함께 움직인다면
더 좋을 테고요 ^^;;;;;;;;;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 - 발도르프 선생님이 들려주는 진짜 독일 동화 이야기 2
이양호 지음 / 글숲산책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엉뚱한 번역과 바보스런 문화가 빚은 ‘신데렐라’
 [책읽기 삶읽기 80] 이양호,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글숲산책,2009)



 사진책 《다카페 일기》(북스코프)를 보면, 사진을 찍은 사람과 이이 옆지기와 이이하고 함께 사는 개 이름은 ‘일본말’로 적지만, 이이 두 아이 이름은 ‘한국말’로 옮겨서 적습니다. 참으로 뚱딴지 같다 할 노릇이지만, 2010년대에도 이러한 일이 벌어집니다. 《다카페 일기》를 쓴 일본사람은 당신 아이한테 일본말로 ‘바다’와 ‘하늘’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붙였는데, 이를 한국말로 옮겨서 적으면 어찌 되나요. 거꾸로, 한국사람 이름인 ‘최바다’와 ‘최하늘’을 일본책에서 일본말로 옮겨서 적으면 얼마나 엉뚱하게 되고 말까요.

 북중미 토박이 이름을 일컬을 때에 ‘레드 크라우드’처럼 적는 일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이때에는 북중미 토박이들이 쓰는 ‘북중미 토박이 이름’을 써야 합니다. 이 소리값이 남지 않았다면, 영어를 쓰는 미국사람이 붙인 ‘레드 크라우드’가 아닌 한국말로 옮긴 ‘붉은 구름’처럼 적어야 올바릅니다.

 어린이나 어른이나 두루 잘 아는 ‘삐삐’라는 말괄량이가 있습니다. 어린이책과 영화에 나온 ‘삐삐’는 요즈음 번역에서는 ‘삐삐 롱스타킹’이라는 이름으로 적습니다. 그러나, 이 이름 또한 올바르지 않습니다. 삐삐는 미국사람이나 영국사람이 아닌 스웨덴사람이니까요. 삐삐 이름은 ‘스웨덴말’로 적어야지 ‘영어’로 적어서는 안 됩니다. 스웨덴말로 어떻게 적는지를 잘 모른다면, 영어 ‘롱스타킹’이 아닌 한국말 ‘긴양말’로 적어야 마땅합니다. 삐삐는 ‘삐삐 긴양말’입니다.

 이양호 님이 쓴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글숲산책,2009)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신데렐라’는 영어를 쓰는 나라 사람들이 새로 지어서 붙인 이름입니다. 정작 독일에서 ‘옛날 작은 이야기’를 갈무리하며 내놓은 책에는 ‘신데렐라’라는 이름이 없다고 합니다. 한국말로 옮긴다면 ‘재투성이’나 ‘부엌데기’가 될 독일 이름만 있다고 합니다. 곧, 한국에서 이야기하는 ‘신데렐라’란 엉터리로 옮겨서 터무니없이 퍼진 잘못된 이름이요 책인 셈입니다.


.. 우리 발음 체계에서 나오는 ‘신데렐라’란 소리는 아름답고 가볍다. 여기에 쌍드리옹과 아센푸틀의 뜻인 재투성이, 부엌데기가 가지고 있는 슬픔과 무거움이 자리할 곳은 없다. ‘신데렐라’라고 소리를 내는 순간, 슬픔에 젖어 축 가라앉아 있는 인간은 사라져 버린다 ..  (11∼12쪽)


 가만히 생각하면, 이 나라에서는 ‘신데렐라’라는 이름을 비롯해서 ‘신데렐라 얼굴’까지 제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땡볕에서 밭일을 하고 집안일을 도맡을 뿐 아니라 노예처럼 시달리고 들볶이던 찬밥덩어리 일꾼이 ‘재투성이’입니다. 그러면, 이 아이 재투성이는 어떤 낯빛일까요. 팔뚝과 손마디와 허벅지는 어떤 모습일까요. 하루 내내 고단하게 온갖 일을 떠안아야 하던 괴로운 아이는 살빛이 어떠할까요.

 다시금 돌이키면, 나 또한 어릴 적부터 ‘참다운 신데렐라 모습’을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예나 이제나 ‘신데렐라라는 이름은 거짓’이요 ‘재투성이라는 이름이 참’인 줄을 깨달아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이 이야기 속살이나 알맹이를 옳게 들려준 어른은 없었어요.


.. “발뒤꿈치를 조금 잘라내 버려라. 왕비가 되면 걸어다닐 일이 없을 테니까.” ..  (72쪽/재투성이 번역)


 나이를 제법 먹어 곧 마흔 줄에 접어듭니다. 두 아이는 무럭무럭 자랍니다. 이즈음 비로소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야기 번역보다 이야기 비평(또는 풀이)으로 이루어진 책이라 할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를 만나지 않았다면, 퍽 예전부터 잘못 퍼지고 엉뚱하게 알려진 이야기 한 자락에 그대로 휘둘렸으리라 봅니다.

 하기는, 이 나라에 잘못 알려지거나 엉뚱하게 퍼진 이야기는 한둘이 아닙니다. 신데렐라만 이와 같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옛이야기가 오늘날 한국에서 ‘뚱딴지 살’이 붙고 ‘바보스러운 손질’로 얼룩졌을는지요. 나라밖 문학을 제대로 옮기는 분이 몇이나 될는지 아리송합니다.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를 내놓은 이양호 님도 ‘재투성이’ 번역은 영 어설픕니다. 학문으로 파헤치거나 전문지식을 다루는 데에서는 훌륭하다 여길 수 있습니다만, 문학을 문학다이 맞이하면서 살가이 나누는 자리에서는 좀 젬병입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번역하는 분들 발자취를 살피거나, 번역하는 분들을 소개하는 책날개 글을 읽어 보면, 무슨무슨 대학교를 나왔다거나 나라밖 어디로 배우러 다녀왔다는 이야기는 적힙니다. 그렇지만 막상 ‘한국말을 어디에서 누구한테서 배웠’으며 한국말을 얼마나 잘 할 줄 안다든지, 한국말을 옳고 바르게 쓰려고 어느 만큼 힘쓰는가 하는 이야기는 한 줄이나 한 마디로도 적히지 않습니다.

 굳이 안 적어도 될는지 모르지요. 한국사람이니 한국말을 못 하겠느냐 여길는지 모르지요.

 그러면, 한국사람 가운데 한국말을 옳고 바르게 깨달아 옳고 바르게 쓰는 사람은 참말 있기나 있나 알쏭달쏭합니다. 대학교 국문과 교수는 한국말을 옳고 바르게 쓰나요. 중·고등학교 국어 교사는 한국말을 참답고 알맞게 쓰나요.


.. 거죽도 그 대상의 한 부분이기에, 거죽을 핥은 사람이 느낀 맛을 깡그리 틀렸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제대로 맛본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이 이야기의 겉만 만진 데는 여러 까닭이 있겠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깔끔하지 못한 번역과 옛이야기를 어린애만을 위한 것으로 여기는 데에 그 탓이 있는 듯하다 … ‘재투성이’ 이야기를 두고 일반 사람들은 동화라 하고 학자들은 민담이라고 한다. 이러한 문학 장르를 최초로 갈무리한 독일에선 메르헨이라 하는데, 그 뜻은 ‘작은 이야기’일 뿐이다. 거기엔 동화에 있는 아이 동童도 없고, 민담에 있는 백성 민民도 없다 ..  (13, 16쪽)


 어린이문학 평론을 하는 분들은 ‘메르헨’이라는 낱말을 붙잡고 늘어집니다. 그저 ‘작은 이야기’일 뿐인 ‘메르헨’이라지만, 아예 ‘메르헨 장르’까지 만들곤 합니다. ‘판타지’라는 낱말을 붙잡고 늘어지는 모습하고 비슷한 셈인데요, 이양호 님 말마따나 거죽핥기로 그치는 노릇입니다. 알맹이를 건드리지 않고, 속살을 다루지 않으며, 껍데기에 매달리는 모양새입니다.

 곰곰이 따지면, 재투성이 이야기가 신데렐라 이야기로 바뀐 까닭 가운데 하나는, 예부터 ‘한국 어린이 번역 문학’은 으레 ‘일본 다이제스트 판을 살짝 베낀 문학’에서 싹텄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한국땅 어른들은 한국땅 아이들이 한겨레 넋을 아끼며 살아가는 길을 좀처럼 열지 못한 탓이라고 느낍니다. 한국땅 어른들 스스로 한국땅 아이들이 한겨레 얼을 빛내며 자라는 길을 도무지 열지 않은 탓이라고 느껴요.

 삐삐 이야기를 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은 스웨덴사람이지만, 린드그렌 님 스웨덴문학을 스웨덴말을 익혀서 한국말로 옮기는 번역쟁이는 아주 드물거나 아예 없습니다. 으레 독일말로 옮겨진 책을 한국말로 옮깁니다. 네덜란드문학을 네덜란드말을 배워서 한국말로 옮기는 문화가 있을까요. 으레 독일말이나 영어로 옮겨진 네덜란드문학을 한국말로 옮기기만 합니다. 《안네의 일기》가 수없이 많은 판으로 떠돌지만, 시중에 나온 《안네의 일기》 가운데 네덜란드말로 된 책에서 한국말로 옮긴 판은 아예 없습니다.

 끝으로 덧말을 하나 붙이면,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라는 책은 편집을 하며 빈자리를 너무 많이 만들고 판을 아래로 길쭉하게 만드는 바람에 책값이 좀 뻥튀기가 되었습니다. 재투성이 독일말과 영어 자리는 글자를 작게 해도 되고, 한글 밑에 작게 붙여도 됩니다. 쪽수와 부피와 크기를 훨씬 줄여 값싼 책으로 엮을 수 있던 책입니다. (4344.9.20.불.ㅎㄲㅅㄱ)


―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 (이양호 글,글숲산책 옮김,2009.10.31./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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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9-23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몰라서 그러는 건데 영어명 신데렐라(Cinderella)는 원래 재투성이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썽드리용(Cendrillon)를 영어식으로 발음한것이 아닌가 싶군요.
그리고 그림형제는 재투성이를 의미하는 썽드리용(Cendrillon)를 신데렐라처럼 비슷한 발음으로 부르지 않고 재투성이란 의미의 독일어인 아쉔푸텔로 제목을 바꾸지 않았나 싶네요.
제가 위 책을 읽지 못해서 뭐 정확하게 그 내용을 파악하지는 못하겠지만 '우리 발음 체계에서 나오는 ‘신데렐라’란 소리는 아름답고 가볍다. 여기에 쌍드리옹과 아센푸틀의 뜻인 재투성이, 부엌데기가 가지고 있는 슬픔과 무거움이 자리할 곳은 없다. ‘신데렐라’라고 소리를 내는 순간, 슬픔에 젖어 축 가라앉아 있는 인간은 사라져 버린다'란 글은 작가의 오버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아마 작가는 신데렐라는 영어이름보다는 디즈니가 각색한 신데렐라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신데렐라가 밝고 아름답다고 착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물론 디즈니에서 나오는 신데렐라는 원작의 썽드리용보다는 분명 더 밝고 명랑하지만요....

숲노래 2011-09-24 08:58   좋아요 0 | URL
글쓴이가 '좀 지나치게' 생각한 말이라 여길 수 있으나,
디즈니 만화가 꽤 옛날에 나왔을 뿐 아니라,
'신데렐라'라는 '명작동화'를 온누리에 퍼뜨린 곳은
바로 디즈니제국이 있는 미국이었고,
이 신데렐라를 일본을 거친 미국 문화로 받아들였으니,
한국사람들은 '신데렐라라 부르는 소리값과 여러 느낌'을
고스란히 떠안으면서 참뜻하고는 동떨어질 수밖에 없으리라 느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