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빙화 카르페디엠 2
중자오정 지음, 김은신 옮김 / 양철북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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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하나 68 ― ‘천재 화가’가 아닌 ‘그림을 사랑한’ 아이인데
 : 중자오정, 《로빙화》



- 책이름 : 로빙화
- 글 : 중자오정
- 옮긴이 : 김은산
- 사잇그림 : 장호
- 펴낸곳 : 양철북 (2003.8.16.)
- 책값 : 9000원



 (1) 여름벌레 소리와 도시


 지난밤 드문드문 세찬 바람이 불다가 잦다가 비가 오다가 그치다가 하더니, 깊은밤에는 비가 뚝 멎었습니다. 모기장을 쳐 놓았어도 모기는 모기장 안으로 어떻게든 들어와서 피를 빨아먹으려고 하고, 우리는 피를 빨리면서도 모자란 잠을 이루려고 바둥바둥입니다. 새벽 어스름이 조금씩 걷힐 무렵, 모기장 안쪽에 있는 모기가 눈에 뜨여서 한 마리 두 마리 …… 열 마리 남짓 잡습니다. 희뿌윰이 밝아오는 창밖을 보며, 이제 일어날까 하다가, 오늘 낮 부지런히 다녀야 할 일을 생각하며, 아니다 잠깐이라도 몸을 푹 쉬고 하루를 맞이하자며, 생각을 고쳐먹습니다.

 여느 날보다 퍽 느즈막한 일곱 시 반쯤 일어납니다. 낯과 몸을 씻고 빨래 한 점을 하는데, 씻는방 창밖으로 매미소리 들립니다. 나무도 없는데 무슨 매미가 우나 하고 내다보니, 이웃한 빈 건물 벽에 붙어 있는 듯합니다. 어디께 있나 두리번두리번하는데 매미소리 뚝 끊깁니다. 사람 냄새를 맡았나 봅니다. 몸을 다시 웅크리며 빨래를 합니다. 아까보다 가늘어진 매미소리 울립니다. 다시 몸을 움직여 슬그머니 내다봅니다. 또 끊깁니다. 그래, 미안하다, 애써 세상으로 나와서 시원하게 울어 보려는 참에 내가 괴롭혔구나, 난 살며시 나갈 테니 마음껏 울어라.

 다 한 빨래를 탁탁 털고 씻는방에서 나오니 이윽고 매미소리 다시 들립니다. 굼벵이가 고이 깃들며 지낼 만한 흙이 마땅하지 않은 도심지요, 온통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발려진 동네인데, 저 매미는 어디에서 몇 해 동안 웅크리고 있다가, 이처럼 때맞춰 깨어나서 큰소리로 울어댈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 정말 아명의 그림이 좋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막내 아생은 아명이 그린 그림들을 벽에 붙였다. 벽에 건 그림만도 이미 열 장이 넘었지만, 한 장 한 장 모두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는 괴상한 것들뿐이었다. 게다가 학교에서 그린 그림들 위에 선생님이 찍어 준 ‘미’라는 도장은, 보는 사람들을 오히려 민망하게 했다 ..  (22쪽)


 엊저녁, 옆지기는 매듭엮기를 하고 저는 책을 읽습니다. 옆지기가 심심하다며 책을 소리내어 읽어 보라고 합니다. 무슨 책을 읽을까 하다가 《잃어버린 소년들》이라는 책을 읽는데, 마침 펼쳐서 읽는 대목이 꽤 지루합니다. “이거 원, 읽는 사람부터 재미가 없네.”

 엊그제 헌책방 나들이를 하며 장만한 《이경희-현이의 연극》(1973)이라는 퍽 묵은 수필책을 집어듭니다. 〈여치〉라는 글이 보입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여치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어제 점심때, 친구와 같이 어느 식당에 갔더니 그 식당 입구 양쪽에 대로 만든 여치 둥우리가 걸려 있었다. 시원한 울음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나는 무의식중에 ‘어마!’ 하고 감탄의 소리를 질렀다. 한참 동안 잊고 살아온 여름벌레! 그리운 것을 만난 것같이 반갑고 정이 갔다(98쪽).”는 첫 대목.

 응, 여치 울음소리? 음, 여치 울음소리.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어떤 소리였지? 메뚜기며 여치며 방아깨비며 풀무치며 여름벌레 울음소리는 모두 다른데, 어느 소리가 어느 벌레 울음인지 가려낼 수 없으려나? 하긴, 이제 이 여름벌레를 아예 찾아볼 수도 없는데, 울음소리를 어찌 가려내나.

 듣느니 참새와 비둘기와 까치 울음소리일 뿐인데, 소쩍새와 왜가리와 갈매기와 새매와 어치와 콩새 울음을 가릴 수 있는 도시내기가 다문 몇 사람이라도 남아 있으려나. 이 새소리를 가려낼 수 있다고 하여도, 이이는 도시에서 알맞는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까. 한 번 들여놓고 살아가는 이 도시라는 데에서는 벌레소리며 새소리며 짐승소리며 바람소리며 모두 잊어야만 하지 않나.

 《현이의 연극》을 쓴 아주머니는 “언젠가 들은 얘기지만, 도오쿄오 중심지에서는 나비를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어쩐지 사실 같지 않았으나, 요즘 서울에서도 나는 나비를 본 기억이 까마득한 것 같다(100쪽).”고 적습니다.

 나비를 볼 수 없는 서울, 아니 나비를 볼 수 없는 한국. 산에 가야 볼 수 있을 텐데 산이라고 해 봐야 케이블카 놓고 아스팔트길 닦고 굴을 뚫고 갖가지 밥집에다가 호텔 모텔 지어대고 스키장 무슨 장 우격다짐으로 때려넣는데 …….


.. “교장 선생님이 현에서 여는 미술 대회에 참가한다고 하셨어요.” “그래? 그럼 네가 대표로 뽑혔다는 말이냐?” “예! 누나도 대표예요. 앞으로 날마다 남아서 연습을 해야 돼요.” “네 누나도 연습을 한다고? 그건 안 된다. 네 누나는 엄마 일을 도와야 해.” …… 차매는 갑자기 자신이 그림에 아주 관심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술 지도 시간에 대한 미련을 쉽게 버릴 수 없었지만, 엄마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래! 엄마는 그렇게 바쁘신데……. 나라도 일찍 집으로 가서 조금이라도 도 도와 드려야지. 아마도 이렇게 하는 것이 그림을 그리는 일보다 가치 있는 일일 거야 ..  (45, 72쪽)


 지지난달, 옆동네 화평동으로 골목마실을 갔다가 배추흰나비를 보았습니다. 그 비슷한 무렵, 서울에 있는 ㅇ출판사로 나들이를 갔다가 그 출판사 앞마당에서 노니는 배추흰나비를 보았습니다.

 골목길 한켠 빈자리를 그냥 놀리지 않고 흙을 일구고 갈고 거름을 치면서 땅심을 돋워 준 다음 여러 가지 푸성귀를 심으니, 벌과 나비가 찾아듭니다. 조금만 벗어나면 자동차 우악스럽고 시끄럽게 내달리는 서울 한복판이었으나, 출판사 앞마당에 자라는 나무와 꽃을 밀어내지 않고 그대로 간수했기에 외로운 나비 한 마리가 이곳에서나마 날개를 접고 쉴 수 있습니다.

 옆동네 율목동 할머님도 걱정을 하지만, 온 인천을 재개발을 한다며 갈아엎으면, 그나마 골목이 어우러져 있는 조용한 동네에서 마음좋은 사람들한테 밥술이나마 얻어먹던 길고양이와 길개는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싶습니다. 우리들 사람도 그 비쌀 뿐더러 메마르고 매몰찬 시멘트 성냥갑에 들어갈 수도 없고 들어가기도 힘들지만, 여태껏 뿌리내리며 조용히 살아오던 나무와 꽃과 풀도 싹 목아지가 잘리며 쓰레기 대접을 받아야 하나요. 서른 해를 묵은 동네 감나무가, 쉰 해를 묵은 동네 느티나무가, 스무 해를 묵은 동네 앵두나무가, 마흔 해를 묵은 동네 은행나무가, 해마다 새로 줄기를 뻗는 담쟁이와 나팔꽃과 호박꽃과 해바라기가, 한 줌 재로 바뀌며 제 삶터를 내어주고 숨을 거두어야 하나요.


.. “주사? 하하하! 아니 무슨 주사를 놓는다는 거냐?” “쥐약을 먹었으니 해독제를 맞으면 금방 나을 거예요.” “흥! 그깟 한 푼 값어치도 없는 고양이 한 마리 살리자고 귀한 돈을 날리자는 말이냐?” 분명 맞긴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아명은 아버지가 고양이와 돼지를 차별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 같이 사랑스러운 동물이 아닌가? 게다가 돼지에 비하면 고양이가 훨씬 더 사랑스럽지 않은가. 사랑하는 고양이의 생명을 돈으로 계산하는 것을 아명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노기 띤 그 말에 아명은 희망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더는 기댈 데가 없어진 아명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런, 쳐죽일! 왜, 뭐 때문에 울어? 당장 그치지 못해?” ..  (100∼101쪽)


 요사이, 서울이나 인천이나 웬만한 도시마다 자동차 물결이 조금 수그러들었다고 합니다.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달리노라면, 예전과 견주어 차가 꽤 줄었음을 살갗으로 느낍니다. 차가 줄어 널널해지니 짓궂고 거칠던 버스기사도 자전거한테 조금 더 마음을 기울여 주지 않나 하는 느낌도 듭니다.

 그런데 ‘줄어든 자동차 물결’은, ‘이 땅 이 나라 자연 삶터가 무너지는 일을 걱정’하면서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기름값이 부쩍 치솟아서 돈 나가는 일이 걱정’되어서 줄어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대중교통을 타는 까닭은 ‘자가용 끌고 가 보았자 막히기만 하니 늦어질 뿐더러, 차 댈 데가 마땅하지 않아서’입니다. 조금이라도 지구자원을 덜 쓰면서 이웃과 우리 모두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사람뿐 아니라 자연 목숨붙이를 아끼거나 돌보려는 마음이 아닙니다. 돈, 돈, 오로지 돈 때문입니다. 돈 때문에 일을 하고, 돈 때문에 사람을 만나며, 돈 때문에 처세와 자기계발서라는 뚱딴지 같은 이름을 달고 나오느 책을 부지런히 읽습니다. 돈 때문에 자가용을 끌면서 다니려 하고, 돈 때문에 내키지 않는 술자리 대접을 할 뿐더러, 돈 때문에 검은돈을 봉투에 담아서 선물로 바칩니다.

 돈을 바라보며 대학교에 보내려 합니다. 돈을 생각하며 아이들한테 영어와 한자를 가르칩니다. 돈을 꿈꾸며 아이들한테 책을 읽힙니다. 돈 나와라 뚝딱 하는 마음으로 아이들한테 ‘논술시험 대비 글쓰기 교육’을 시킵니다. 돈이 구르기를 바라면서 아파트를 장만하고, 내 주머니에만 돈이 차기를 꾀하니 주식을 하고 펀드를 놓습니다.


.. 임장수의 외아들은 임지홍은 어려서부터 부모의 끔찍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불면 날아갈세라 쥐면 꺼질세라, 날씨가 조금만 추워도 옷을 껴입혔고, 비타민을 비롯해 몸에 좋은 것이라면 억지로라도 먹일 정도였다. 하지만 임지홍은 창백한 얼굴에 몸이 쇠약한 아이로 자랐다 …… 이번에 임지홍에 맞설 만한 강적이 나타난 것과, 그 주인공이 자신의 차밭 가운데 아주 일부를 부치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라는 것을 안 뒤, 그는 끓어오르는 노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임장수는 그런 빈농의 아들에게 자신의 아들이 밀려나는 것은 가문의 수치라고 생각했다 ..  (123∼125쪽)


 매미소리는 우렁차게 들렸다가 끊어졌다가 되풀이됩니다. 힘들어서 쉬는가 싶기도 하고, 어쩌면 저처럼 어디서 매미가 우나 하고 들여다보려는 사람이 있어서 옹크리면서 살피느라 그러는구나 싶기도 합니다.

 새벽나절 잠깐 일어나서 기지개를 켜고 하늘가를 바라보았을 때, 오늘은 구름 한 점 없겠구나 싶었는데, 아침 여덟 시를 넘기고 아홉 시를 넘기니 밝은 햇살이 우리 집으로도 내리쬡니다. 바람도 알맞게 살랑거립니다. 엊저녁처럼 끈적거리지 않습니다. 이만한 볕과 바람이라면, 이불 빨아서 널면 좋으련만, 밀린 이불 빨래는 없으니 조금 아쉽습니다. 그러면 지금 덮고 자는 이불이라도 햇볕에 말려 볼까나.


.. 사실 임지홍은 이미 전통 미술 교육의 포로가 되어 있었던 탓에, 한순간의 노력으로는 지금까지의 습관을 버릴 수가 없었다. 아주 총명해서 모방 실력이 남달리 뛰어난 덕에 선생님들의 사랑과 관심을 한몸에 받았으니, 지홍이 갖고 있는 결점들이 유달리 깊고 많을 수밖에 없었다 ..  (137쪽)


 우리 집에서 십오 미터쯤 떨어져 있는 전철길은 새벽 다섯 시 십 분부터 자정을 넘겨서까지 기차와 전철이 다닙니다. 하루에 두 번쯤, 무거운 짐을 실은 짐기차가 지나가는데, 온 건물이 부르르 떱니다. 이때마다 생각합니다. 저 기차를 모는 분은, 자기가 기차길을 지나갈 때마다, 기차길과 이웃한 집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줄 알까 하고.

 우리 집이 깃든 골목 앞에는 차가 거의 안 다니니, 어쩌다 지나가는 차도 아주 싱싱 내달립니다. 마치 내기 달리기라도 하듯. 차는 천천히 달려도 소리가 크지만 빨리 달리면 훨씬 큽니다. 오토바이는 더 시끄럽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동차를 모는 이들은 자기가 달리는 길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기가 탄 차에서 내는 소리’ 때문에 고달픈 줄을 알까요. ‘자기가 탄 차에서 내뿜는 매연’ 때문에 숨이 막히는 줄을 알까요. 자기는 자기 돈 주고 자동차를 샀으니 그만이라고 여길지 모르나, 이 자동차 하나를 만들기까지, 또 자동차가 굴러다니는 동안, 얼마나 많은 환경파괴가 이루어져서 이웃한테 나쁘게 피해를 끼치는 줄 생각할 수 있을까요.

 담배꽁초와 빈 담배곽을 길에 버리면서, 침을 퉤퉤 뱉으면서, 껌을 툭 뱉으면서, 과자 껍데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면서, 빈 병과 깡통을 아무 데나 얹어 놓고 지나가면서, 그나마 쓰레기봉투도 아닌 까만 비닐봉투에 쓰레기 담아 남의 집 앞에 내놓으면서, 마음에 조금이나마 꺼려지기라도 하는가요. 돈을 쓰든 찢든 버리든 ‘내 마음’인지요. 매미가 저렇게 울어대고 있는데.


 (2) 그림 한 장과 삶


.. “별말씀을요. 오히려 다른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잘못 선별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그림은 너무 ……, 너무 진부하다고 할까요. 저 그림들은 어린 학생들이 그릴 그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어른들 그림에 가까우니까요. 아니, 꼭 어른들 그림이라고도 할 수 없어요. 사실 저 또한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 하지만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고아명 같은 아이야말로 아이다운 그림을 그린다는 것입니다. 그런 아이들은 자연스러운지 부자연스러운지에 상관없이 자신의 느낌을 숨기지 않고 그려 내지요. 그래서 가끔 우리 어른들의 잣대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선생님들 자신도 그림이라면 실제 사물과 아주 비슷하고 자연스럽게 그려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하고 있지요. 사실 그런 게 바로 부자연스러움의 극치인데 말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자신의 눈으로 보고 느낀 그대로를 화폭에 옮겨 놓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 아닐까요?” ..  (35∼36쪽)


 그제 저녁, 좋다는 소리를 듣는 어린이책을 꾸준히 펴내는 ㅅ출판사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ㅅ출판사에서 얼마 앞서 낸 어린이책 하나를 읽다가, 몇 가지 궁금한 대목이 있는 한편, 사잇그림 몇 가지가 영 잘못되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돌 던지기’와 ‘물수제비(또는 물팔매)’가 어떻게 다른가를 이야기한 다음, 책에 실린 그림 몇 가지 이야기를 합니다. 먼저, 아이가 앉은 걸상 다리하고 밥상 다리 길이가 똑같이 보인다는 대목. 그림 그리는 분들이 사람이 밥걸상에 앉은 모습을 눈으로 가만히 들여다보듯 그리지 않고 머리로만 그릴 때 흔히 이런 잘못을 저지릅니다. 밥상 다리와 걸상 다리 길이가 같거나 비슷하면, 사람은 걸상에 앉아서 밥상 밑으로 다리를 넣을 수 없습니다. 걸상 다리는 절반 남짓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만화처럼 그리는 그림이라고 해도(하물며 만화 그림이라고 해도), 기하학 그림도 아니고, 무언가 일부러 비트는 그림이 아니라 한다면, 손가락을 넷으로 그리거나 눈을 셋으로 그리거나 발가락이 손가락보다 길게 그려서는 안 된다고 느낍니다. 아이 그림을 흉내낸다고 해도, 아이들도 걸상 다리와 밥상 다리를 다른 높이로 그립니다. 그렇지만 ㅅ출판사 분은 ‘자기가 보기에는 밥상 다리가 안쪽으로 들어가 있어서 괜찮아 보인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가요? 그렇게 느끼신다면 할 수 없지요.’

 다음으로 1949년 겨울 일본 변두리 조그마한 기차역 앞 모습을 그린 그림. 이무렵 안경 쓴 사람이 아예 없지는 않으나 아주 드문 일입니다. 그리고 이무렵 남다른 서양 옷차림을 따르고 돈이 많다고 하더라도 ‘패딩 잠바’ 차림을 할 수야 없을 테지요. ㅅ출판사 분도 한눈에 ‘어머나, 패팅 잠바는 안 어울리네요.’ 하고 이야기합니다. 우리 나라도 그렇지만 일본 또한, 이무렵 1940년대에는 ‘잠바라는 옷’은 없다고 해야 옳습니다. ‘겉옷(또는 두툼한 겉옷)’이나 ‘외투’일 뿐이고, 때때로 ‘코트’일 뿐입니다. 모르지요. 서양 군인들이 입는 ‘잠바’가 벌써부터 사람들 사이에 퍼졌을는지도.

 설마 하는 마음으로, 사진책 《김기찬-역전 풍경》(2002)과 《木村伊兵衛-街角》(1981)을 책꽂이에서 꺼내어 펼칩니다. 1968년부터 1983년까지 서울역 둘레 모습을 담은 한국 사진책 어디에도, 또 1945년부터 1974년까지 북적거리는 일본 도심지 길거리 모습을 담은 사진책 어디에도 ‘ㅅ출판사 어린이책 사잇그림’에 나오는 옷차림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ㅅ출판사 그분한테 이 그림에 나오는 ‘배경이 되는 사람’ 모습이 잘못되어 있음을 알려주기는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그림 하나가 얼마나 제대로 되었는가를 헤아리고자 1940년대 끝무렵 일본 시골 기차역 모습 사진을 찾아보기도 어려울 터이나 그렇게까지 애쓸 듯하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찾아본다고 해서 가슴으로 느낄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출판사 편집자가 알아채서 그린이한테 알려주기 앞서, 그림을 그린 분 스스로 ‘일본이 전쟁에 지고 아주 고달프던 1949년 겨울날 시골 기차역 앞 모습’을 그림으로 그릴 때 어떻게 담아내야 할까를 생각하고 알아보고 그림에 담아야 했습니다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 자신이 갖고 있는 어른의 눈빛을 버리고 아이들의 눈으로 느끼고 아이들이 하는 것을 함께 하자, 아이들은 어느새 자신 가까이로 몰려들고 있었다. 이것은 바로 곽운천이 며칠 안 되는 시간에 얻은 교훈이었다 ..  (82쪽)


 ‘앞으로도 꾸준히 좋은 책 만들어 주셔요’ 하는 인사를 남기고 전화를 끊지만, 쓰린 속은 달래지 못합니다. 마땅한 대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전화를 걸지는 않았지만, 꽉 막힌 속이 더 엉겨 버린 듯해 괴롭습니다.

 아무렴, 매미에도 여러 갈래가 있고, 또 같은 갈래 매미라 해도 저마다 생김새가 다르고 크기가 다르며 날갯짓과 울음소리도 다른데, 이 다름을 느끼면서 그림으로 담아내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갈매기를 그리든 기러기를 그리든, 수십 수백 수천 마리가 하늘을 수놓는 모습은 ‘똑같은 새로 이루어진 모습’이 아니라 ‘다 다른 새로 이루어진 모습’이건만, 수십 마리 기러기를 그릴 때, 다 다른 이름을 불러 가며 그릴 분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수백 마리 갈매기를 그리며 저마다 다른 이름을 되뇌이며 그림으로 담을 분을 우리 나라에서 찾을 수 있을는지요.

 똑같은 민들레가 없으며, 한 민들레에서 자라는 잎이라 해도 다 다르게 돋아나고 다 다른 크기입니다. 이 다름을 잡아챌 뿐더러, 마음눈으로 알아보고서 붓질에 녹아낼 그림쟁이란, 한국에서 일감을 찾아서 아름다움을 선사해 줄 수 없을 노릇일까 모르겠습니다.


.. “아이들에게는 아이들만이 볼 수 있는 눈이 있기에, 느끼는 것을 그대로 그리면 그만입니다. 어떤 식으로 표현하든 그냥 하는 대로 내버려 두면 훌륭한 그림이 됩니다. 사물의 생긴 모양과 비슷하고 안 하고는 사실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 어린이가 자신의 주장을 가진 후에, 그것을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해야만 좋은 작품이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지 않고 형식에 얽매여 사물을 그대로 베껴는 그림은 창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예술이라 할 수도 없고요. 이런 점만 보아도 임지홍의 그림은 사물을 잘 베낀 작품이지만, 창작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  (147∼150쪽)


 돌이켜보면, 중학교와 고등학교 여섯 해 동안, 학교에서 배운 ‘그림그리기(미술)’는 하나도 없습니다. 시험문제에 나올 이론을 외우고 이름난 작가와 작품 이름 외우기로 그쳤습니다. 우리 나름대로 세상을 보고 부대끼고 느낀 이야기를 그림에 담도록 이끌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석고상을 놓고 그림자 똑같이 그려내기를 하고 자와 제도기를 써서 ‘반공 푯말 그리기’ 따위는 했을지언정, 어머니 아버지 얼굴 그리기나, 형 누나 모습 그리기조차도 해 보지 못했고, 자기가 사는 동네 그리기마저도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3) 《로빙화》라는 이야기책


 영화로도 나오며 더 이름을 날린 《로빙화》라는 이야기책을 덮습니다. 진작부터 읽어야지, 읽어야지 생각만 하다가 뒤늦게 읽고, 금세 책에 빠져서 다른 일에 곁눈을 팔지 않으며 끝까지 달음질을 칩니다.

 그림을 좋아함을 넘어서 사랑하는 ‘고아명’이라는 아이는, 그림만 사랑하지 않고 뭇 목숨붙이를 사랑하고, 누나를 사랑하며 어머니와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자기가 사는 시골마을을 사랑하고 이웃 모두를 사랑합니다. 이 깊고 너른 사랑이 바탕이 되어서 자기 나름대로 자기 사랑을 폭 바칠 만한 그림을 담아냅니다.

 그러나, 아명이 둘레에서 아명이 그림을 알아보는 사람은 오로지 한 사람, 아명이 누나 ‘고차매’뿐. 아명이와 차매를 가르치는 ‘곽운천’ 선생은 아명이가 그리는 그림 껍데기는 읽어내지만, 그림에 담은 속내까지는 읽어내지 못합니다. 아명이가 시골마을에만 머물지 않고 더 큰 꿈을 품을 수 있게 도와주려고 하지만, 곽운천 선생도 아명이를 ‘천재화가’라는 틀에서만 바라보았을 뿐, ‘모든 목숨을 사랑하면서 자기 삶을 사랑한 어린이 아명이’를 있는 그대로 껴안지 못합니다.

 가난한 가운데에도 부모님과 누나한테 보살핌과 아낌을 받으면서 살아가던 고아명은, 자기 삶에서 새로운 길을 그림그리기로 시나브로 느껴 가지만, 아명이 둘레에 있는 어른들은 하나같이 섣부른 다짐과 가벼운 어김으로 깊디깊은 생채기를 남깁니다. 아명은 사랑을 받으면 사랑을, 아픔을 받으면 아픔을 그림으로 담습니다. 그리고, 아버지한테서 버림받은 고양이와 함께 자기도 조용히 아파하다가 숨을 거둡니다.


.. “이제 그만 울어……. 아명이도 만족하고 있을 거야. 천재 화가였잖니, 그치? 천재 말이야…….” 곽운천은 자신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의 머리속은 텅 비어 있는 듯했다. “그깟 천재가 무슨 소용이 있어요? 사람이 죽으면 다 끝나는 것 아니에요?” ……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왜? 어린 소녀(고차매)의 눈빛이 왜 이렇게 변했는지 곽운천은 그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어차피 사람은 한 번 태어나서 한 번 죽는 것 아니겠니? 사람들 모두 아명이가 천재인 것을 알았고, 또 교훈도 얻었으니까 그것으로 된 거야.” “사람들 모두라고요? 사람들이 누가 아명이더러 천재라고 했는데요? 저는 선생님 말고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한 번도 못 들었어요!” 눈물이 멈춘 차매의 눈에서 강한 열기가 쏟아져 나왔다. “방금 전에 향장님도 아명이가 천재라고 하셨잖니?” “그게 무슨 소용 있어요? 살아 있을 때는 다들 모른 체하더니 죽으니까 찾아와서 천재니 뭐니 떠들고…….” ..  (281∼282쪽)


 천재라는 이름이, 부자라는 이름이, 정치꾼이라는 이름이, 또 대통령이라는 이름이, 공무원이라는 이름이, 교사라는 이름이, 부모라는 이름이, 화가라는 이름이, 작가라는 이름이, 과학자라는 이름이, 또 소작인이라는 이름이 무슨 뜻이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무슨 값, 쓸모, 이야기가 될까 생각해 봅니다. 왜 이런 이름에 우리 삶을 매어 놓아야 하는지, 왜 우리 삶을 이런 이름에 굴레처럼 묶어 놓아야 하는지 생각해 봅니다.


.. 고석송은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후우, 아무리 어려워도……, 그래도 병원에 갔어야 했는데……. 감기쯤은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다 원수 같은 빚 때문에, 그놈의 빚을 지기 싫어 그런 것이 아니던가? ..  (269쪽)


 아명은 죽었습니다. 머지않아 아명이 아버지와 어머니도 늙어서 죽겠지요. 그러고 나서 어린 동생을 안타까워하며 괴로워하는 누나 차매와 막내 아생도 늙어서 죽겠지요. 또는 가난에 허덕이다가 굶어서 죽거나, 사고나 병들어서 죽거나.

 이렇게 죽어서 떠나게 되면,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고 나면, 빚이건 돈이건 무엇이 될까요. 무엇으로 남을까요. 죽은 이와 남은 이한테 어떤 뜻이 있을까요. (4341.8.3.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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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희의 여행 - 아오지에서 서울까지 7,000km
최금희 지음, 임양 그림 / 민들레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59 ― 한국사람 스스로 잊은 남녘과 북녘
 : 최금희, 《금희의 여행, 아오지에서 서울까지 7000km》


- 책이름 : 금희의 여행, 아오지에서 서울까지 7000km
- 글 : 최금희
- 그림 : 임양
- 펴낸곳 : 민들레(2007.8.28.)
- 책값 : 9000원


 (1) 숱하게 죽을 고비 넘기고 찾아온 남녘땅에서


 《통일로 가는 길》(1999), 《사람답게 살고 싶소》(1999), 《북한사람들이 말하는 북한 이야기》(2000), 《1999 민족의 희망찾기》(1999), 《두만강을 건너온 사람들》(1999), 《고난의 강행군》(1999), 《정말이지 살아남는 것이 목표입니다》(1997) 같은 책들이 한동안 꾸준히 나왔으나, 요즈음은 소식이 뜸합니다. 눈씻고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북녘을 떠나는 사람이 수없이 늘고 남녘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나날이 늘지만, 이들 이야기가 책으로 엮이는 일은 드물 뿐더러 속깊은 이야기가 나오는 일은 더욱 드뭅니다.

 오히려 새로운 이야기가 꾸준히 나와야 하고, 북녘 사람과 삶터와 사회를 거의 모르는 남녘 우리들로서는 이와 같은 이야기를 찾아서 읽어야 할 테지만, 세상은 거꾸로 흐릅니다.


.. 어느 날 초등학교에 다니는 남동생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왜 그러니?” “아니다.” “왜? 한국 애들과 싸웠니?” “아니! 내가 왜 그들과 싸우나? 통일도 바라지 않는 애들인데.” “뭐?” “학교에서 선생님이 통일을 원하는 사람 손들라고 했는데 두 명밖에 없더라. 나머지는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더라.” “왜?” “통일 되면 한국이 못 산다고, 그리고 북한사람들 무섭다고…….” 그들은 만나 보지도 못한 북한사람을 무서워하고 있었습니다. 탈북자인 우린 그들에게 경계의 대상이었고, 함께하지 못할 사람이었습니다 ..  (213쪽)


 ‘먹고살기 힘들다’는 소리가 끊이지 않기 때문일까요. 1950년대나 1960년대나 1970년대나 1980년대나 1990년대나 2000년대나 ‘먹고살기 바쁜데 그딴 데에 무슨 눈길을 둬’ 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기 때문일까요.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 하면서 이웃사람하고 콩알 한쪽 나누는 마음을 가꾸는 문화나 삶을 우리 스스로 내동댕이쳤기 때문인가요. ‘그리 넉넉하다고 할 수 없어도 온 식구 끼니 제때 챙길 수 있으니 즐겁다’는 마음으로는 좀처럼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인가요. 천만 원을 벌면 일억이 보이고, 일억을 벌면 십억이 보이며 십억을 벌면 백억이 보여서 자꾸자꾸 돈버는 일에만 마음이 끌리기 때문인가요.

 오늘날 남녘 삶터는 지난날과 견주어 ‘먹고살기에 대단히 나아졌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한뎃잠을 자야 하는 분도 꽤 있고, 일자리 못 얻는 분도 퍽 많으며, 일자리를 얻어도 비정규직에서 헤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어디에 돈을 쓰고 마음을 빼앗기고 몸을 움직이는가를 헤아려 본다면. 한 번쯤 걸음을 멈추고 옆과 뒤를 돌아볼 수 있다면.


.. 내가 생각했던 한국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머리속에 그리던 동포의 느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한국사람들은 우리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말투, 생활, 사고방식, 모두가 너무 낯설었기에 자연히 경계심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조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조사실에 먼저 다녀온 언니는 울고 있었습니다. “언니야, 왜 우니?” “금희야, 저것들 사람 아니다. 진짜로 화가 난다.” “왜?” “글쎄, 어머니 아버지가 가짜란다.” … 나는 언니를 울린 그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았습니다. 깔끔한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하얀 피부에 매서운 눈을 가진 남자였습니다. 한국에 대한 환상이 이미 깨어진 나는 그 사람을 쏘아보듯 바라보았습니다. 경계하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사람은 씨익 웃으면서 자리에 앉으라고 했습니다. “이름은?” “최금희입니다.” “나이는?” “열여덟 살입니다.” “부모님은?” “최○○, 이○○입니다.” “진짜 네 부모 맞아?”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따졌습니다. “선생님은 눈이 없습니까? 선생님 자식에게도 이런 식으로 묻겠습니까?” … 한 사람으로 존중받길 원했는데 무리였나 봅니다 ..  (206∼207쪽)


 오래된 저잣거리로 푸성과나 열매를 사러 가면, 할머니나 아주머니들은 으레 한두 줌 더 집어줍니다. 우리는 아직 500원어치를 따로 살 수 있습니다. 젊은 부부를 걱정해서 더 얹어주는 분들이 ‘잘살면 얼마나 잘살’며, ‘많이 벌면 얼마나 많이 번다’며 그렇게 마음을 써 주실까요. 우리는 저잣거리에 나들이를 가서 여태껏 한 번도 흥정을 해 보지 않습니다. 흥정을 해야 할 까닭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두 식구는 ‘배부르게’ 사는지 모릅니다. 은행에 다문(?) 몇 백만 원이라도 돈을 모아 놓으며 뒷날을 걱정해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그 젊은 나이에 막일판에라도 가서 돈 좀 벌어 놓으라는 소리도 듣습니다만, 이런 소리를 한귀로 흘립니다. 꼭 벌 만큼만 벌고, 우리가 우리 몸으로 겪거나 부딪히는 세상을 느끼고 싶으며, 곧 태어날 아이한테 온마음 쏟아서 함께하고 싶습니다. 아이를 병원에서 낳고 병원에서 몸풀이할 돈을 버느라 뼈를 깎기보다는, 집에서 아이를 낳고 집에서 몸풀이를 하도록 이웃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여쭙고 앞선 이들 책을 찾아 읽으며 스스로 배우며 집을 손질해 놓으려 합니다. 아이를 보육원에 넣거나 밥어미를 두어 돌보게 하고 두 사람이 밖으로 돈벌러 나가기보다는, 우리가 우리 아이와 하루 내내 함께 지내면서 ‘벌지도 않지만 쓰지도 않는’ 삶으로 아이한테 어머니와 아버지 사랑을 듬뿍 나누어 주려고 합니다.

 더 많은 돈을 벌어서 더 맛난(?) 밥집을 자가용 몰고 찾아다니면서 바깥밥을 사먹는 일이 그럴싸할는지 모릅니다만, 우리들은 우리 깜냥껏 번 돈으로 저잣거리에서 날푸성귀 장만해서 꼭 두 사람 먹을 만큼만 밥을 해서 버려지는 쓰레기 하나 없이 맛나게 밥그릇을 비우려고 합니다.


.. 한국 가는 길은 점점 불투명해지기만 했습니다. 선교사님을 만날 때마다 부모님은 한국에 갈 방법이 없겠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어느 날 한 선교사님이 집에 찾아오셨습니다. “금희, 성경 공부 잘해?” “네.” “금희는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될래?” “돈 많이 벌고 싶습니다.” “돈보다 선교가 좋은 거야. 여기서 성경 공부 잘해서, 북한에 가서 전도해야지.” 한국에 가는 것보다 북한에 가서 선교하는 게 먼저라고 말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어머니는 이국땅에서 고생하며 공부도 제대로 못하는 자식들 걱정에 날이 갈수록 몸도 마음도 지쳐 가고 있었습니다 ..  (158쪽)


 대중교통을 거의 안 타고 자전거를 타는 뜻도 여기에 있습니다. 찻삯을 아끼는 일은 ‘자전거 타기에 뒤따르는 덤’일 뿐입니다. 몸이 튼튼해지는 일 또한 ‘자전거 타기에 얹혀지는 선물’일 따름입니다. 자전거 타기를 하면서 내 몸을 느낍니다.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누비고 골목을 걷다가 계단에서는 어깨에 짊어지고 낑낑 오르면서 내 삶터를 느낍니다.

 자전거를 세우고 구멍가게에 들러 보리술 한 병 사서 마시며 길바닥에 앉아 있으면서 하늘도 올려다보고, 지나다니며 저를 쳐다보는 사람을 마주보며 싱긋 웃고 인사도 하지만 저 또한 그이들을 구경합니다. 찻길을 싱싱 달리기보다는 거님길에서 아기들 아장걸음에 맞추어 아주 느리게 달리곤 합니다. 좁은 골목길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면서 슬슬 달리곤 합니다. 때때로 큰자전거 뒤에 짐수레를 붙여 짐을 나르기도 합니다. 이때만큼은 찻길 하나를 떠억 하니 차지하면서 신나게 달립니다.

 우리 앞집에서 일하는 헌책방 아주머니는, 요사이 자전거 짐칸에 푯말 둘을 묶어서 시청 앞으로 가십니다. “배다리, 우리가 지켜야 할 인천의 역사입니다”라는 글을 적은 동그란 푯말을 들고 서서, 우리 사는 이 골목마을 무너뜨리는 ‘산업도로 반대한다’는 뜻을 시청에서 일하는 공무원들한테 알리려고 하십니다.


.. (대사관 앞에서) 한참을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카메라를 든 아저씨 두 명이 우리 쪽으로 왔습니다. 그러더니 무작정 카메라를 들이대고 우리 모습을 찍는 것입니다. 뭇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도 괴로웠는데 동물원의 동물 찍듯 우리 가족을 찍고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울면서 한국으로 보내 달라고 애원했고, 나는 머리를 무릎에 묻고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습니다. … 우리가 어떤 기분일지는 그들에게 전혀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우리는 그저 먹이를 찾던 하이에나의 먹잇감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카메라를 부숴 버리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원망스러워 계속 소리를 질렀습니다. “찍지 마요! 찍지 마요!” ..  (154쪽)


 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문득문득 느낍니다. ‘그래, 요사이는 꽃제비 이야기를 다루는 책도 나오지 않고, 새터민 이야기를 차근차근 풀어내면서 남북이 한겨레로 어우러지자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정작 알고 보면, 남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끼리도 서로를 사랑하고 보듬자고 하는 목소리 또한 안 들리잖어? 수수하게 살아가는 여느 사람들 이야기를 다루는 책은 보이지도 않잖어?’

 ‘머나먼 유럽을 그리워하는 책은 나오고, 미국과 남미를 가로지르는 자전거여행을 한다는 책은 나오며, 일본 문화를 둘러본 이야기책은 꾸준하게 나오지만, 정작 우리 사는 이 땅을 두 발로 튼튼히 밟고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책은 하나도 안 나오잖아. 게다가, 한국땅 구석구석 찾아다니면서 ‘구경꾼 아닌 한겨레’로 느낀 마음을 담아내는 이야기책도 안 나오고.’





 (2) 떠날 수밖에 없던 북녘땅에서


 지난주 일요일 낮, 인천 논현동 아파트마을로 자원봉사를 갔습니다. 이날 이곳에서는 ‘새터민 노래잔치’가 열렸고, 노래잔치를 잘 치를 수 있도록 돕는 일꾼으로 저녁까지 움직였습니다. 자원봉사자가 적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고, 새터민한테 도움이 될 일을 할 수 있다면 좋겠구나 싶어서 함께 가는 분 차를 얻어타고 갔습니다.

 새터민을 한곳에 모아 놓은 마을 가운데 하나인 인천 논현동은 대중교통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퍽 외딴 아파트마을입니다. 여기에서 시내로 나가기에 만만치 않구나 싶은 한편으로, 자가용을 모는 사람한테는 딱히 어려움이 없을 테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새터민을 이 동네 한쪽에 주욱 몰아놓고 살게 하는 일이 이분들을 남녘땅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돕는 일이 될까 싶어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그리고 왜 아파트에서만 살게 해야 하는지, 여느 다세대주택이라든지 골목집에서 다른 주민하고 어울리도록 할 때가 낫지 않느냐 싶은 생각이 듭니다.


.. 나는 아버지의 눈을 보며 말했습니다. “아버지, 장군님 버려 두고 어떻게 갑니까?” “아버지, 굶어죽어도 사회주의 지킵시다!” 작은언니까지 가세했습니다. 아버지는 답답한 듯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내가 너희들에게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다. 일단 건너가서 보여주마. 내가 먼저 건너갈 테니 내 뒤를 따라와라.” ..  (136쪽)


 노래잔치에 나오는 새터민들은 모두들 남녘나라에서 사랑받는 대중노래를 부릅니다. 초등학교를 다님직한 어린 계집아이들은 ‘섹시’와 ‘남자친구’라는 말이 되풀이 나오는 어느 여자 노래패 노래를 춤까지 곁들이면서 부릅니다. 말씨에 함경도나 평안도 높낮이가 남아 있습니다만, 쓰는 말투는 남녘사람하고 다를 바 없습니다. 아이들 말씨에서는 북녘 말씨를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이들 옷차림이나 어른들 옷차림은 자원봉사를 온 사람들 옷차림과 견주어 퍽 고급스럽게 보입니다. 아파트마을 아이들이 타는 자전거는 제가 타는 자전거(20만 원)보다 비싼 녀석들이 심심찮게 보입니다. 우리 여느 이웃이 입는 옷, 우리 여느 이웃이 쓰는 물건이 퍽 초라하거나 후줄근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고개를 끄덕거리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빨리 ‘남녘사람들 물질주의에 쉽게 빠져드는구나’ 싶어 고개를 젓습니다. 똑같은 새터민인 《금희의 여행》을 쓴 최금희네 아버지는 “책도 많이 읽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하나원 나와서 가장 먼저 책장을 만들어 주”었고, “책을 산다고 하면 서슴없이 돈을 주시지만 옷을 산다고 하면 입던 옷을 입으라고 하”였다고 하며, “가끔 외식을 해도 될 텐데 아버지는 ‘그 돈이면 집에서 맛있는 거 며칠을 해 먹을 수 있어.’하(249쪽)”셨다고 합니다.


.. 1996년, 북한의 식량 사정이 더 나빠지면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는 교시가 내려졌습니다. 강냉이 뿌리와 배추 뿌리를 주식으로 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김정일이 선포한 것입니다. 강냉이 뿌리뿐 아니라 벼 뿌리, 나무 껍질, 심지어는 강냉이 대까지 가루 내어 먹었습니다 ..  (125쪽)


 저녁 여섯 시 무렵, 노래잔치는 끝나고 잔치 연 쪽에서 마련한 선물을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자원봉사 하러 온 사람들은 곳곳에 널린 쓰레기를 주워서 나누어 담고 상자와 종이를 차곡차곡 따로 모읍니다. 큰 비닐에 페트병과 깡통을 따로 나누어 놓았으니, 이곳 분리수거 쓰레기통 옆에 놓고 가도 됩니다. 그렇지만 아파트 지킴이 할아버지는 못마땅해 합니다. 뒷자리는 말끔하게 치워 놓고 쓰레기는 깨끗이 나누어 놓고 쓰레기봉투까지 사서 담아 놓았는데. 몇몇 분들이 머뭇머뭇하다가, 쓰레기봉투는 남구청 것이니 여기에 둘 수밖에 없고, 상자와 깡통 들은 우리 동네로 가져가서 동네에서 재활용품 모으는 분들한테 드리기로 합니다.

 자리를 치우고 쓰레기를 가르는 동안, 노래잔치에서 노래를 부른 아주머니 한 분이 ‘나는 다른 일도 빠지고 나와서 그렇게 노래를 잘 불렀는데, 노래도 못 부른 그런 꼬맹이들한테는 선물도 다 주고 왜 나한테는 안 주느냐’며 목소리를 높입니다. 모든 참가자한테 퍽 값나가는 다리미를 하나씩 주었지만, 그 아주머니한테는 참가상 다리미만 돌아갔던 터. 잔치 연 사람들하고 한참 실랑이를 합니다만, 더 내어 드릴 선물은 없는 노릇.

 자원봉사를 하는 우리들은 조용히 뒷갈무리 마친 다음, 물건을 짐차에 싣고, 차에 나누어 타며 집으로 돌아갑니다. 집에 닿은 우리 두 사람은 밥을 해 먹을 힘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저 혼자 집으로 올라가 밥통에 남은 식은 밥을 도시락에 담습니다. 가까운 닭집으로 갑니다. 닭 한 마리 시켜서 보리술 석 잔 마십니다. 말없이 술잔을 비우고 닭고기를 반참 삼아 밥을 먹습니다.


.. 사형 집행은 계속되었고 사형 당하는 사람들의 죄명도 다양해졌습니다. 강냉이 이삭을 훔쳐서 사형 당하고, 고위급 간부 자식이 도박을 했는데 그 누명을 써서 사형 당하고, 길 가는 여자 시계를 빼앗아 사형 당했습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무조건 공개 처형 장면을 보게 했습니다 ..  (118쪽)


 이튿날 아침, 찌뿌둥한 몸으로 일어나 부랴부랴 서울 나들이를 갑니다. 살림살이가 어렵게 된 서울 대학로 인문사회과학 〈이음책방〉 아저씨한테 이야기를 듣기로 했기에.

 〈이음책방〉에 가기 앞서 성균관대 앞 〈풀무질〉을 잠깐 들릅니다. 책방 〈풀무질〉을 찾아가는 길에 보니, 아스팔트 길바닥 한쪽을 죄다 뜯어내고 무슨 돌을 깔아 놓는 공사가 한창입니다. 〈풀무질〉에 닿아 아저씨한테 이야기를 들으니, 구청에서 ‘올해 예산을 다 소비해야 해서 하는 일’이라며, 육십 몇 억을 들이는 공사를 한다는군요.

 한쪽은 대학로에 문화를 심으려고 자기 돈 다 털어가며 빚을 지면서 일을 하고, 한쪽은 서민들 세금을 받아서 꾸리는 행정 예산을 빨리 써서 없애야 한다면서 길바닥 뒤집고 있고.


.. 보지도 못한 증조할아버지가 지주였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뿌리깊게 박힌 성분제도 때문에 큰언니는 십 년 넘게 운동과 함께 키워 온 꿈을 버려야 했습니다 … 그렇다고 대학에 갈 수도 없었습니다. 졸업할 때까지 운동만 해 온 언니는 간직했던 꿈을 고스란히 접고 아버지와 함께 탄광에서 일을 했습니다 ..  (84쪽)


 먹고살 길이 없어서 고향을 등지고 나라를 등지는 북녘사람이라면, 먹고살 길이 많으나 이웃과 나누지 않거나 나누기 싫어서 나라밖으로 떠나는 한편 고향땅을 마구잡이로 파헤치거나 무너뜨리는 남녘사람인가 싶습니다.

 성분에 따라서 자기 꿈을 펼치지 못하는 북녘 사회라면, 학벌과 이름값에 얽매여 자기 꿈을 펼치기 어려운 남녘 사회인가 싶습니다.

 배 굶는 주민이 있어도 배 굶지 않는 간부가 있는 북녘 정치라면, 마음 굶는 주민이 있어도 마음굶이가 무엇인지 깨닫지 않으면서 자기 스스로 마음 굶으며 똑같이 나뒹굴고 있는 남녘 정치인가 싶습니다.

 배우고 싶어도 배우기 어려운 북녘 땅이라면, 배우고 또 배워도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돌아보지 못하면서 가방끈만 길어지는 남녘 땅인가 싶습니다.


..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우리 아버지가 만들어 준 썰매가 제일 좋았습니다. 우리 남매는 감기 한 번 안 걸리고 겨울을 지냈습니다. 남쪽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추운 곳에서 자랐지만 가끔은 지금 이곳이 더 춥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아마 고향에서 느꼈던 훈훈한 정을 느낄 수가 없어서 그런 듯합니다 ..  (29쪽)


 틀림없이 배를 곯다 못해 뛰쳐나오는 북녘사람이라지만, 배만 채우면 모든 일이 끝나는 삶은 아닐 텐데요.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남녘 사회는 ‘정착금’과 ‘아파트’는 나누어 줄 수는 있으나, ‘돈에 담는 넋’과 ‘집에 들이는 얼’은 나누어 주지 못합니다.

 돈을 바라보며 그렇게 부지런히 뛰었으니 돈은 움켜쥐었습니다만, 돈만 바라보고 사람 넋은 바라보지 않았기에 따뜻한 손길로 돈을 건네지 못합니다. 착한 마음씨로 돈을 베풀지 못합니다. 겉보기에 번들거리는 아파트를 짓는 솜씨는 키웠지만, 오래오래 사는 집이 아닌 돈굴리기 건설업으로 나뒹굴고 있기에, 아파트 한 채 걱정없이 나누어 주기는 하지만, 이 집에 깃들이며 이웃사랑과 이웃믿음을 함께하지 못합니다.





 (3) 《금희의 여행》이라는 책을 덮으며


.. 북한에서는 한국사람을 ‘미군앞잡이’로, 남한에서는 북한을 ‘빨갱이’로 부르면서 서로가 서로를 왜곡된 눈으로 바라보며 증오의 싹을 키운 지 50년 … 왜 북한과 남한은 서로를 비방하기에 바쁘고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는지 안타깝습니다 … 부산사람이 부산사람이고, 서울사람이 서울사람인 것처럼, 나도 함경북도에서 자라난 아오지사람입니다. 14년을 살아온 고향을 잊고 부정한다면 그건 나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살아온 곳이 좋인지 나쁜 곳인지 판단하기 전에 내가 자란 곳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은 것입니다 ..  (233, 237쪽)


 책방 〈풀무질〉 아저씨는 책방 잘 보이는 자리에 《금희의 여행》을 여러 권 쌓아 놓고 사람들한테 ‘이 책 꼭 읽어 보셔요’ 하고 말씀하곤 합니다. 당신 스스로 먼저 읽은 다음 느낌글까지 한 쪽 써서 책손님들한테 나누어 주기도 했습니다. 처음, 《금희의 여행》이 나왔을 무렵, 좀 시큰둥하게 느꼈고, 책겉에 적힌 ‘아오지’라는 말이 껄끄러웠습니다. 글쓴이가 아오지사람이었기에 아오지를 적었을 뿐임은 나중에 책을 읽으며 알았고, ‘아오지를 팔아먹는 글월’이 아니냐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 그러나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서울이라는 마을에는 아이들이 없습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숨바꼭질 하는 아이도 말뚝박기 하는 아이도 없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에 왜 아이들이 없을까? … 그러다 서울마을에는 아이들이 모여서 놀 만한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끔 보이는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만나곤 하지만, 그 놀이터는 답답할 정도로 작아 보입니다.사방에는 자동차들이 득실거립니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찾는 일은 고향마을에서 불 꺼진 저녁에 골목에서 아이들을 찾는 것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렇게 눈에 띄지 않던 아이들을 볼 수 있는 곳이 딱 한 곳 있었습니다. 마을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다 보면 큰 학원을 지나게 되는데, 밤 11시가 넘은 시간에 아이들은 무거운 가방을 메고 학원 어귀에서 쏟아져 나옵니다 … 이곳 아이들의 몸은 종이로 된 교과서처럼 변해 가고 있어서, 경험을 통해서 느끼고 깨닫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교과서와 참고서를 외우기 바쁜 아이들이 다른 것을 생각할 시간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  (240∼241쪽)


 《금희의 여행》을 덮은 다음,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 다시 훑습니다. 책을 읽으며 밑줄을 그었던 대목을 다시 읽습니다. 새터민 가운데 이 책을 읽어 본 사람이 있으려나 생각해 봅니다. 새터민 이야기를 하는 분 가운데 이 책을 읽어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헤아려 봅니다. 새터민을 좋게 이야기하건 얄궂게 비틀건, 새터민을 돕건 새터민을 뱀눈으로 바라보건, 이 책 《금희의 여행》이나 지난 1999년에 나온 《사람답게 살고 싶소》나 1997년에 나온 《정말이지 살아남는 것이 목표입니다》 같은 책을 한 번이나마 들추어본 사람이 몇 사람쯤 될까 궁금합니다. 일찌감치 판이 끊어진 《정말이지 살아남는 것이 목표입니다》는 헌책방에서 드문드문 눈에 뜨이기에, 보일 때마다 한 권 더 사서 선물해 주곤 하는데, 이 책을 받는 분 가운데 반가운 빛을 보여준 분은 아직 없습니다. 다 알고 있어서 꺼리는지, 굳이 알고 싶지 않아서 꺼리는지, 새터민 이야기를 몰라도 남녘에서 사는 데 아무 걱정이 없어서 꺼리는지 …….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에서 대학입시에 목매이며 살지 않을 수 있으면, 저 같은 사람이 주머니돈 털어서 《금희의 여행》 같은 책을 사서 선물해 주지 않더라도 사람들 스스로 찾아서 읽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더 많은 돈과 더 큰 집과 더 빠른 차에다가 더 눈길받는 이름값에 발묶인 채 살지 않을 수 있으면, 사람들 스스로 책방 나들이를 즐겁게 하면서 《금희의 여행》 같은 책을 밝은 눈으로 알아보고 맑은 마음으로 새겨 읽지 않으랴 싶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큰 한겨레’이고 ‘민주주의 나라’라고 내세우면서 ‘大韓民國’이라는 나라이름을 쓰고 있지만, 얼마나 ‘큰’ 나라이고, 참말 ‘한겨레’인가 모르겠으며, ‘민주주의’는 어디에 있고, ‘나라’ 꼴은 얼마나 나라 꼴다운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4341.7.2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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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충의 왕 장수풍뎅이
구리바야시 사토시 지음, 히다카 도시다카 감수, 고향옥 옮김, 김태우 / 사파리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잡지 <북새통> '이달 추천 어린이책'에 보내는 비평]


 이달에 받아 본 책 다섯 가지를 놓고 오래도록 망설이게 됩니다. 지난달에는 어느 책을 고르면 좋을까 하며 즐겁게 걱정을 했는데, 이달에는 마땅히 어느 하나를 가릴 수 없었습니다. 차마 이 책을 좋은 책이라고 추천하기도 껄적지근하고, 그렇다고 이 책을 칭찬하고 싶지는 않고.

 망설이고 망설이며 ‘이 책은 안 되겠어’ 하고 하나씩 덜어내다 보니 《곤충의 왕 장수풍뎅이》(사파리)가 남습니다. 지금 한국땅에서는 ‘장수풍뎅이’를 본다는 일은 아주 드물 뿐 아니라 운이 억세게 좋지 않고서는 꿈을 꿀 수 없는 일입니다. 그만큼 우리들은 장수풍뎅이며 하늘소가 살아갈 터전을 마구 무너뜨리고 깎아 버리면서 고속도로와 아파트와 공장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판이니, 우리 땅에서 살아가는 장수풍뎅이 이야기는 엮어내지 못하고, 이웃 일본에서 자라는 장수풍뎅이 이야기를 옮겨서 펴낼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사람들이 엮은 《곤충의 왕 장수풍뎅이》는 일본이 어린이책을 얼마나 잘 만들며, 부지런히 엮어내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고이 담아내고 있는가를 잘 살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번역글이 그런지 일본사람이 쓴 글이 그런지 몰라도, 사진 아래에 달린 풀이말 가운데에는 장수풍뎅이를 ‘사람과 함께 사는 이웃 목숨’으로 바라보기보다는 ‘한낱 연구대상이나 보호대상이나 노리개’쯤으로 여기는 듯한 풀이말이 자주 보입니다.

 자연 삶터와 목숨붙이를 살펴보는 데에 《곤충의 왕 장수풍뎅이》는 틀림없이 도움이 됩니다. 그렇지만 ‘산 목숨’이 아닌 ‘죽은 목숨’ 같은 느낌이 드는 사진과 풀이말은 달갑지 않습니다. 죽은 목숨을 가까이하는 아이들은 이 책으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장수풍뎅이와 얽힌 지식? 그러면 이 지식을 얻은 아이들은 이 땅에서 무엇을 하고 어울리며 살아야 할까요? 지식과 정보를 담아서 보여준다고 하는 자연도감 갈래 책이라고 해서 ‘지식과 정보’만 담아낸다면 속 빈 강정이 되고 맙니다. 별 하나 반을 줍니다. (4341.7.2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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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쟁이 톨로키
자케스 음다 지음, 윤철희 옮김 / 검둥소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58 ― ‘차별(인종분리)’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만 있지 않다
 : 자케스 음다, 《곡쟁이 톨로키》



- 책이름 : 곡쟁이 톨로키
- 글쓴이 : 자케스 음다
- 옮긴이 : 윤철희
- 펴낸곳 : 검둥소(2008.6.17.)
- 책값 : 1만 원



 (1) 법이란 누가 누구한테


 ‘국립공원’에는 함부로 찻길을 낼 수 없을 뿐더러, 굴도 뚫어서는 안 됩니다. 국립공원 안쪽 자리에 집이 있는 분들은 집고치기도 거의 못하면서 살아갑니다. 법에 이렇게 새겨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한민국 도로공사와 개발업자와 산업자원부 공무원 분들께서는 법그물을 요리조리 빠져나가고 특별법을 만들고 어쩌고 하면서 ‘북한산 관통도로’를 뚫으려고 했습니다. 이런 서울시와 정부 정책에 맞서서 환경운동에 뜻을 둔 이들이 막아서려고 했고, 이렇게 막아서려던 이들을 정부는 고발로 맞받아쳤습니다. 법원에서는 정부 손을 들어 주며 어마어마한 벌금을 물리도록 했습니다. 가난한 환경운동 활동가들 몸과 입과 손을 꽁꽁 옥죄려는 짓이었지요.

 2004년으로 떠올립니다. 그때 서울 종로 뒷골목 술집 한 곳에서는 ‘기금 모으는 하루술집’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들, 가난한 환경운동 활동가한테 내려진 벌금을 서로서로 조금씩 보태어 보자는 뜻으로 마련한 하루술집이었습니다. 술값을 아껴서 돈을 모으면 더 좋을 텐데, 그냥 돈을 내는 사람은 없고, 이렇게 술이라는 이음고리를 거쳐서 돈이 모아지게 됩니다. 어쩌면, 어차피 그리 벌금을 물어야 할 판이라면, 식 웃으면서 내주자는 마음으로, 속풀이도 하고 할 말도 다하는 자리로 술잔치를 마련하는 셈 아니냐 싶기도 합니다.


.. 노리아는 앞날이 두려웠다. 아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는 여유를 도대체 어떻게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수업료도 내야 할 것이고, 선생한테 구박받고 쫓겨나지 않으려면 교복 살 돈도 필요할 것이었다. 책도 사야 하고, 선생들이 항상 학부모에게 요구하는 학교 건축 기금도 내야 한다.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  (112쪽)


 지난 대통령선거 때, 인천에서 애쓰는 시민단체 분들은 ‘대통령 후보자 비방’이라는 죄목에 따라 법원에서 벌금 조치를 받았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BBK와 한미FTA투쟁 집회’를 열고 있었음에도, 다른 어느 곳에서도 ‘명예훼손 고발’이라든지 무어니 없었는데, ‘꼭 한 놈만 잡아서 팬다’는 잣대(?)에 따라서 인천 쪽 시민단체 활동가한테 쇠몽둥이가 내려졌어요. 지난해까지 50만 원 남짓 받으며 일하던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올해는 60만 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한테 내려진 ‘후보자 비방 명예훼손 벌금’은 자그마치 1200만 원.

 벌금을 내지 못하면 징역을 살면서 깎아나가야 하는데, 하루에 3만 원씩 쳐 준다고 하니, 400일입니다. 문득, 엊그제 ‘죄없음’ 판결을 받은 큰 재벌 ㅇ 할아버지가 떠오릅니다. 그래도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에 벌금이 1100억 원이라던데. 1100억 벌금을 헤아린다면,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집회를 하다가 물게 된 벌금 1200만 원은 껌값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풋.


.. 톨로키와 노리아는 택시 승강장에 다다를 때까지 말없이 걸었다. 그녀의 눈은 젖어드는 눈물 때문에 흐릿했다.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잃어요. 톨로키 오빠, 아이들은 어머니들을 잃고요.” “죽음은 매일 우리랑 같이 살아. 정말이지 우리가 죽어 가는 방법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들이야. 아니,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들이 우리가 죽어 가는 방법들이라고 말해야 옳은 걸까?” ..  (131쪽)


 그러고 보면, 저도 ㅈ일보 기자 명예를 더럽혔다는 죄목에 따라서 벌금 200만 원을 문 적이 있습니다. 올 2월에. 그분 이름을 더럽힌 대목에서는 참으로 죄송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삶터를 빼앗기고 사람된 권리와 인격을 송두리째 짓밟힌 분들한테는 어느 누가 ‘명예훼손죄’를 받거나 배상이나 보상을 해 주지요?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하는 할머님들한테는 누가 잘못했다고 말을 하거나 뉘우치거나 갚음을 하지요?

 제가 살고 있는 동네를 놓고, 인천시장을 비롯해서 개발업자와 개발부서 공무원, 더욱이 문화 담당 공무원들마저도 ‘낙후된 도심지’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습니다. 하나도 둘도 셋도 아닌 수천 수만 사람이 깃들여 살고 있는 동네인데, 어느 누가 무슨 잣대로 함부로 ‘낙후’라느니 ‘지저분하다’라느니 ‘비위생’이라느니 하는 말을 뇌까릴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우리 동네가 ‘낙후’되었다 한다면, 우리 동네사람들이 여태껏 내 온 세금이 우리 동네를 북돋우는 데에 제대로 쓰인 일이 없기 때문이 아니온지요? 우리 동네가 ‘지저분하다’면, 우리 동네를 좀더 깨끗이 다스리는 데에 우리 세금이 알맞게 쓰인 일이 없던 탓이 아니온지요? 우리 동네가 ‘비위생’이라 한다면, 우리 동네가 ‘위생’을 찾도록 시설과 문화와 복지에 찬찬히 마음을 기울여 본 적이 없는 정책에 책임이 있지 않은지요?


.. 정착촌에 있는 판잣집 중에 닫혀 있는 판잣집은 하나도 없었다. 훔쳐 갈 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샤드락처럼 부유한 사람들만이 둥지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는 새들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그들은 도둑질을 하러 자기 집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닌지 항상 경계를 해야만 했다 ..  (198쪽)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이 나라에서 정치권력을 움켜쥔 분들께서는 ‘새마을’ 운동을 하면서, 도심지 달동네를 허물어 변두리로 내쫓았습니다. 1980년대로 접어들고 1990년대까지, 뒤이어 이 나라 정치힘을 휘두르는 분들께서는, ‘新도시’라는 이름으로 도심지 달동네에서 변두리로 내쫓긴 이들을 다시금 더 먼 바깥자리로 내몰았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를 맞이한 오늘날, 엎치락뒤치락 정권을 뺏고 빼앗긴 분들께서는 ‘new town’이라는 이름으로, 또 한 번 사람들 삶터를 까뒤집으면서 돈없는 이들을 갈 곳 없는 떠돌이나 떨꺼둥이가 되도록 닦달하고 있습니다.

 이름만 ‘새마을’에서 ‘新도시’를 거쳐 ‘new town’이 되었을 뿐, 하나같이 ‘철거와 재개발’을 가리키는 다른 소리였을 뿐입니다. 또한 이 ‘철거와 재개발’은 돈있는 사람들 집터는 건드리지 않는 가운데, 돈없는 사람들 삶터를 깎아내려서 ‘그나마 낮은 집값’을 더 낮추어 내쫓은 다음 아파트를 세우며 집값을 껑충 올려서 서민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정책을 꾸려 갑니다.


 (2) 발붙여 사는 곳은


 자전거를 타고 이웃 동네 마실을 합니다. 저녁 여섯 시로 접어드는 때임에도 햇볕이 뜨겁습니다. 땀이 비오듯 흘러내립니다. 손등으로 땀을 훔치며 자전거를 몰아 언덕길을 오르다가, 자전거에서 내려 골목 계단을 사진으로 찍다가, 그늘자리에서 해바라기를 하는 아주머니나 할머니나 할아버지한테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합니다. 동네 어르신들은 말없이 살짝 웃고 “그려 그려” 하면서 인사를 받아 줍니다.

 벌써 방학을 맞이했는지, 아니면 학교 끝난 뒤인지, 동네 아이들은 셋씩 넷씩, 또는 대여섯씩, 또는 둘이 짝을 이루어서 골목을 가득 채웁니다.

 저는 창영동에 살고 아이들은 창영동과 맞닿은 이 송림동과 숭의3동과 금곡동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이웃한 동네임에도 모두들 자기 동네에서만 노닐 뿐 옆동네까지 가지는 않습니다. 어르신도 아이도 낯선 사진쟁이를 구경하면서 빤히 쳐다보고, 빤히 쳐다보는 눈길이 쑥스러워서 사진기를 차마 들지 못하고 우물쭈물 인사만 하며 지나갑니다.


.. 호상은 경찰이 쏜 총알이 벽에 맞고 튀어나오는 바람에 안마당에서 소꿉장난을 하고 있던 아이가 맞았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그런 경우를 많이 봐 왔다. 경찰이 쏜 총알은 타운십에 있는 집들 벽에만 맞으면 이상한 궤적을 그리며 튀어나왔고, 그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총알들은 조금도 빗나가지 않고 아이들을 향했다 … 그래서 (부모는) 경찰서로 갔지만 이런 말을 들었다. “아이들은 날마다 실종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당신들은 나가서 찾아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을 거라는 말입니까?” “어디를 살피라는 거요? 이 아이들은 테러리스트 집단에 가담하려고 집에서 도망친 건데.” “그 애는 여섯 살밖에 안 됐어요.” “아주머니, 여섯 살짜리들이 우리한테 돌하고 화염병을 던져요.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말이라고는 당신네들이 좀더 규율 있게 자식 키우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게 전부요.” 어린 사내아이의 시체는 초원 지대에서 발견됐다. 그 애는 거세되어 있었다 ..  (60쪽)


 옆지기하고 함께 거닐었다면 좀더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걸었을까 생각하다가는, 아직 한두 번 낯익히기를 했을 뿐이니, 더 다니면서 인사를 하고 만나야 자연스레 말문이 트이지 않으랴 생각합니다. 어르신이나 아이들한테 이야기를 걸며 동네 삶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곧 밀어닥칠 재개발 바람을 어떻게 맞이하며 앞으로 어떻게 삶을 꾸려 나가실는지 여쭙고 싶기도 하지만, 공무원이며 통반장이며 개발업자 사람들이며 기자들이며 또 사진 찍는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며 번거롭게들 하기에, 여기에 한몫 거들고 싶지 않습니다.

 건너편으로 재능대학교가 보이고, 이 앞으로 골목집을 싹 쓸어낸 다음 아파트를 올려세우고 있는 공사터를 내다봅니다. 저곳 공사를 채 끝나지 않고 이곳까지 밀어내고 아파트를 짓는다고 하려나. 저렇게 높이 아파트를 올려세우면 아파트 수십만 채가 새로 지어지는 셈인데, 이 동네에 깃들일 수십만 사람이 있을까. 깃들일 사람이 있다손 치고, 그러면 비싼 분양값을 댈 만큼 주머니가 되는 사람은 누구일까. 골목골목마다 크고작은 가게를 차리고 저잣거리에서 좌판을 깔고 서로서로 장사하는 사람들이 온통 아파트숲으로 바뀐 데에서는 무슨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까. 아파트값만큼이나 비싼 상자나 쇼핑센터에 자리를 얻을 돈이 될까. 지금 이 골목에 깃들인 사람들은 돈있는 사람들 가정부나 밥어미로, 또는 운전수나 뒤치다꺼리 하는 사람으로, 골프장 심부름꾼이나 풀뽑는 사람으로, 대형마트 계산원이나 점원으로 일하는 자리에서 ‘봉사’만 해야 하나.


.. 경찰관이 호통을 쳤다. 남자는 도난당한 옥수수 자루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고 했다. 그러자 경찰관이 화를 내면서 그의 불알을 걷어찼다. 그러고는 그를 의자에 묶고, 그의 손가락과 목에 전선을 부착했다. 경찰관은 벽에 있는 콘센트에 이 전선들을 연결했고, 남자는 고통의 비명을 지르면서 자기도 모르게 똥을 싸고 말았다. “그 농사꾼은 누구고, 그놈들이 묵고 있는 데는 어디야?” “솔직히, 나리, 저는 그 사람을 모릅니다.” “네가 그놈한테 옥수수를 팔았잖아. 그러고도 그놈을 모른다고?” “저는 옥수수를 판 적이 없습니다, 나리.” ..  (81쪽)


 한참 골목을 거닐고 자전거로 달리면서 대문 안쪽에 퍽 우람하게 자란 대추나무를 봅니다. 대추나무는 가지를 집 바깥 골목 복판까지 드리웁니다. 푸르게 맺힌 열매가 보입니다. 한 달쯤? 두 달쯤? 얼마쯤 있으면 대추가 익으려나. 대추가 익을 무렵, 이 골목 사람들은 한두 알씩 맛을 볼 수 있으려나. 아무렴 나무임자 혼자서 다 따 버리지는 않을 테지.

 뒷날, 이 동네를 죄 개발해야 한다고 하면, 이 대추나무도 베어내 버릴까. 얌전히 파내어 고이 옮겨심어 주려나. 파내어 옮겨심기까지 돈이 많이 든다며, ‘대추야 돈 주고 사먹으면 되지’ 하면서 차갑게 꺾어버리려나.


.. 밤에는 부둣가나 기차역 벤치에서 잠을 잤다. 공중 화장실에서 몸을 씻었다. 그 시절에는 그와 같은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이 도시 해변에 들어가는 일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때에는 요즘 그가 하는 것처럼 바닷가에서 몸을 씻을 수가 없었다 … 정부는 사람들에게 집을 주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대신 자격이 있음을 입증하는 서류를 갖춘 사람들은 도시에서 팔십 킬로미터도 더 떨어진 타운십으로 이사를 해야만 한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팔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어떻게 일터에 올 수 있겠는가? 그런데 사람들의 직장과 가까운 곳에는 사방에 땅이 있었다. 그 땅들은 모두 백인 주민들을 위한 개발 지역으로 계획된 곳이었다. 사람들 대부분은 자격을 입증하는 필수 서류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 존재 자체가 불법이었기 때문에 정부는 그들의 고향이라고 정해진 곳들로 그들을 돌려보내는 일에만 열심이었다 ..  (163∼164쪽)


 우각재13길을 지나면서, 얕은 대문간 위로 촘촘히 박아 놓은 ‘깨진 병조각’을 봅니다. 대문간 바로 옆 담벽은 그리 높지 않은데, 여기에는 ‘깨진 병조각’을 심어 놓지 않았습니다. 도둑이 넘어오려 한다면, 대문간 위가 아닌 담벽을 타고 넘을 텐데, 이 동네에 뭘 훔치려고 찾아올 도둑이 있을까, 헤아려 보다가, 도둑은 많건 적건 돈만 볼 뿐, 이웃사람들 삶을 돌아보지 않지, 하는 생각이 뒤따릅니다.

 도둑이 걱정스러워 집집마다 자물쇠를 단단히 채우고, 창문에도 쇠로 된 창살을 붙입니다. 새로 지은 아파트는 단추 비밀번호를 눌러야 들어갈 수 있고, 첨단경비장비에 경비원까지.


.. 보석으로 몸을 장식하고 있는 여자가 노리아에게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노리아는 조용히 듣고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멀리 떨어졌다. 그녀는 할 수 있는 말이 한 마디도 없다고 느꼈다. 지도자들은 그녀를 향해 얘기만 했지, 아들의 죽음에 대해 그녀하고 논의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  “당신들, 우리 존경스러운 지도자 분들께 빵하고 양배추를 대접한다는 게 말이나 돼?” “당신들은 우리가 뭘 대접해 주기를 바란 건데요?” “우리 지도자 분들께 어울리는 음식이지. 너무 게을러서 고기랑 감자랑 쌀은 요리를 못하겠던가? 샐러드 만드는 것도 못하겠고?”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에요. 우리가 먹는 음식들만 그들에게 줄 수 있어요. 그들은 우리가 겪는 가난을 두 눈으로 목격해야만 해요. 저녁으로 팝하고 물만 먹는 처지인 우리가 고기에 쌀을 먹고 사는 사람들인 척 꾸밀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요. 정말이지 우리는 그들에게 잘 대접했어요. 평소에 우리는 빵도 못 먹잖아요.” ..  (237∼238쪽)


 어둑어둑해질 무렵, 자전거머리를 돌려 집으로 달립니다. 가는 길에 정보산업고등학교 뒷문 가에 자라는 해바라기 앞에 멈춰서 손짓으로 인사를 한 다음, 금곡슈퍼 앞에서 자라는 꽃들한테 눈짓으로 인사를 합니다.


 (3) 남아프리카와 《곡쟁이 톨로키》


 집으로 돌아와 후다닥 씻고 빨래 담가 놓은 다음 시민모임 회의에 가려고 서두릅니다. 손가방에 책 하나 챙겨듭니다. 여러 사람이 부지런히 이야기를 하는 동안 한귀로 이야기를 듣고, 눈으로는 책을 읽습니다. 이야기는 길어져서 두 시간을 넘깁니다. 뒤풀이 자리가 있어 소주 한 병 들이키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비누질을 해서 몸을 씻고 빨래 한 점을 한 다음, 책상맡에서 책 세 권을 집어서 잠자리에 놓습니다. 한 권 한 권 조금씩 펼치자니 졸음이 쏟아지고, 이내 잠듭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어제 읽던 책을 다시 들춥니다. 여러 해 앞서 사두고 읽다가 그만둔 책을 다시 펼치는데, 읽는 내내 물음표를 자꾸 찍습니다. 이런 철없는 책을 낸 출판사 일꾼들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으며 무엇을 느끼기를 바랄까, 하는 생각이 잇따릅니다. 그러나, 아프리카사람들을 ‘야만인’처럼 여기는 이야기를 ‘뒤로 가면 글쓴이 스스로 자기가 철이 없었다고 깨달으며 달라지려나’ 하고 생각하며 꾸역꾸역 읽는 저도 참 철이 없습니다.

 내가 참 철없는 책에 돈을 쏟았군, 하고 생각해 보았자 어쩔 수 없는 노릇. 읽던 책을 덮고 다른 책을 집어서 펼칩니다. 삼백 해쯤 앞서 우리 나라 어느 지식인이 적바림한 글입니다. 양반집 사람이라 한문으로 쓴 글을 요샛말로 옮긴 책입니다. 훈민정음이 있던 때에 한문으로 글을 썼으니, 한문을 아는 사람한테 읽히려고, 또는 한문을 아는 뒷사람한테 물려주려고 썼겠지요. 이분은 뒷사람한테 어떤 이야기를 남기고 싶어서 이와 같은 글을 남겼나, 생각하면서 읽는데, 지루해서 하품이 나옵니다. 그때로서는 훌륭한 선비였다고 하지만, 그때로서 훌륭했던 분이라 해도 세월이 흐른 뒤까지도 우리가 훌륭함을 느끼기는 어렵기도 하군요.


.. 톨로키는 그들이 방문하는 모든 판잣집에서 여자들이 가만히 있는 경우는 결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자들은 항상 손으로 뭔가를 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요리를 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바깥에서 아이들을 야단치고 있었다. 수도꼭지에서 물을 긷고 있었다. 빨래를 하고 있었다. 판잣집 바닥과 땅을 쓸고 있었다. 마분지와 플라스틱으로 판잣집에 난 구멍을 막고 있었다. 빨래를 빨랫줄에 걸면서 이웃들과 시끌벅적하게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아니면 자기네 아이를 때린 아이들 때문에 이웃과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또는 그들의 일자리인, 주인마님의 주방이 있는 도시행 택시를 잡기 위해 택시 승강장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항상 움직이고 있었다. 여자들은 끊임없이 몸을 놀리고 있었다. 반면 남자들은 시시하고 공허한 자존심으로 자신들의 머리를 흐리멍덩하게 만들어 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 그러고 나서 밤이 되면 음식이 저절로 집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처럼 저녁이 차려져 있기를 바랐다. 아이들이 다 잠들었다는 믿음이 생기면, 남자들은 쾌락을 얻고 싶어했다 ..  (239∼240쪽)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태어났으나 고향나라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더는 발붙이지 못하고 미국으로 망명을 가야 했던 사람이 쓴 《곡쟁이 톨로키》를 읽어냅니다.

 책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글쓴이는 고향나라로 돌아가고 싶을까. 고향나라에서는 자기처럼 떠나간 사람을 다시 불러 줄까. 지금 깃들여 사는 나라에서는 자유나 평화나 평등을 누릴 수 있을까. 고향나라에서 따돌림과 푸대접과 괴롭힘이 사라진다면 글쓴이는 고향나라로 돌아가고자 할까.


.. 캠프에 사는 사람들은 유대 관계가 돈독한 공동체다. 그들은 서로를 알았다. 한편, 그는 사람들이 ‘불법 거주자’라고 불리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은 종종 물었다. “우리 땅, 우리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불법 거주자일 수 있는가? 바다를 가로질러 우리 땅을 빼앗은 자들이야말로 불법 거주자다.” ..  (62쪽)


 남아프리카공화국에는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에 따른 차별)’가 있었으나, 이 ‘아파르트헤이트’보다 무서운 것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돈, 힘, 무리.

 돈은 마을사람 사이를 쪼개 놓을 뿐더러 같은 겨레나 식구나 동무를 갈라 놓습니다. 힘은 살갗 하얀 사람과 검은 사람 사이를 나눌 뿐 아니라, 살갗 같은 사람들끼리도 계급을 나누며 푸대접받는 이는 또다른 굴레를 뒤집어쓰게 합니다. 무리는 사랑이 아닌 욕심을, 나눔이 아닌 빼앗음을 불러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아파르트헤이트’를 떨쳐낸다고 한들, 돈을 떨치지 못하고 힘을 떨치지 못하며, 무리를 떨치지 못한다면, 허울좋은 이름으로 ‘인종분리 차별’은 없다고 외칠 수 있을지 모르나, 사람들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습니다.


.. “나머지는 말이야, 노리아! 네폴로브호드웨가 제안한 대로 팔아 버려야 할까 봐. 마딤브하자의 하치장(고아원)에 돈을 줄 수 있게.” “그냥 여기 놔둬서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 주고 웃게 해 주는 것도 괜찮을 거예요. 이것들 주위에 커다란 판잣집을 지어서 아이들이 마음에 내킬 때면 언제든 와서 웃을 수 있게 해 주는 거예요.” ..  (289∼290쪽)


 나이든 분들은 으레 ‘한국이 배고픔에서 벗어난 데에는 박정희 대통령 각하가 경제개발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만, 경제개발을 했다고 하더라도(참말 했는지 안 했는지 알 노릇은 없습니다만) 우리 스스로 사랑을 버리고 돈을 좇는다면, 나눔을 내팽개치고 힘을 바란다면, 믿음을 깔아뭉개고 무리를 따른다면, 한국 사회는 ‘먹고살기 팍팍하던 때’하고 조금도 달라질 대목이 없습니다.

 옷차림은 번듯해졌는지 모르나 옷값 대느라 쩔쩔매고, 반찬 가짓수가 늘었는지 모르나 밥값 대느라 힘겨우며, 넓고 시설 갖춘 아파트에 살는지 모르나 관리비에 학원비 버느라 등골이 휩니다. ‘좋아졌네 나아졌네’ 하지만, 끝없이 서로 겨루고 다투어 올라서야만 하는 노릇이라면, ‘나빠졌네 죽겠네’ 꼴입니다.

 희망? 꿈? 앞날? 아이들? 글쎄, 좋아서 그리도록 하지 못하고 입시미술만 있는데. 좋아서 글쓰도록 하지 못하고 입시논술만 있는데. 좋아서 가르치지 못하고 입시교육만 있는데. 쓸모가 있어서 배우지 못하고 입시영어만 있는데.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라 돈을 벌려고 하는 일인데. 좋아서 만나는 사람이 아니라 아랫도리 흐뭇하려고 만나는 사람인데. 좋아서 마시는 술이 아니라 그저 퍼넣는 술인데.

 무엇이 사람이고 무엇이 삶이며 무엇이 목숨인지를 잊어버린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사람과 삶과 목숨을 가르치지 못합니다.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믿음이며 무엇이 나눔인지를 내팽개친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사랑과 믿음과 나눔을 물려주지 못합니다. 무엇이 착함이고 무엇이 아름다움이며 무엇이 맑음인지를 팔아치운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착함과 아름다움과 맑음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오늘날 아이들이 어른한테 배우고 물려받으며 보는 것이란, 오로지 돈벌기와 돈굴리기와 돈쓰기입니다. 계급과 차별과 겉치레를 낳는 돈만 배우고 물려받고 바라봅니다. (4341.7.18.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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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 폭발 뒤 최후의 아이들 동화 보물창고 4
구드룬 파우제방 지음, 함미라 옮김, 최혜란 그림 / 보물창고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하나 56 ― 지식은 많으나 빛줄기는 없는 가난뱅이 한국
 : 구드룬 파우제방, 《핵 폭발 뒤 최후의 아이들》


- 책이름 : 핵 폭발 뒤 최후의 아이들
- 글 : 구드룬 파우제방
- 그림 : 최혜란
- 옮긴이 : 함미라
- 펴낸곳 : 보물창고(2005.1.25.)
- 책값 : 9500원



 (1) 서울사람


 사진기와 렌즈를 잃어버렸습니다. 잊고 있었던 우체국 보험을 손해를 무릅쓰고 깬 다음, 어머니와 형한테 도움을 얻으면서 겨우 새 사진기와 렌즈를 장만합니다. 인천에서는 물건을 살 곳이 마땅하지 않아서 서울로 나들이를 갑니다. 혼자 자전거 타고 후딱 다녀오려고 했으나, 옆지기가 함께 가자고 해서 전철을 타고 갑니다. 누가 보아도 배가 불룩 튀어나온 옆지기는 걸어다닐 때에는 그럭저럭 낫지만, 전철처럼 시끄럽고 흔들리고 딱딱한 자리에 앉을 때면 몹시 고달파 합니다. 더구나, 전철이나 버스라는 대중교통은, 이 대중교통을 타는 사람이 걱정없이 다니도록 하는 데까지는 마음을 기울이지 못합니다. 끊임없이 광고방송이 나오고, 눈 둘 데가 없도록 광고판으로 어지러운 한편, 쉴새없이 이 칸에서 저 칸으로 옮겨다니면서 밀치는 사람, 시끄럽게 전화를 받고 거는 사람, 다리 쩍 벌리고 앉는 사람, 내리지 않으면서 문가에 버티고 있는 사람, 내리면서 뒤에서 미는 사람, 앞에서 먼저 타겠다고 헤치는 사람 …….

 우리들은 모두 어머니 배속에서 열 달을 머물다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어느 누구도 안 소중한 사람이 없고, 어느 누구도 사랑 안 받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자기 목숨 하나 소중하다고 느끼는 만큼 이웃 목숨 하나도 소중하다고까지 깨닫거나 헤아리는 사람은, 어인 일인지 퍽 드뭅니다.


.. 우리는 많은 집에 지붕이 없어진 것도 알게 되었다. 다락방들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누나와 내가 엄마 아빠를 기다리며 서 있을 때였다. “롤란트, 너 저 비명 소리 들리니?” 누나가 물었다. 물론 들렸다. 나도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시내에서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처참한 소리였다. 그러나 난 모든 것이 마치 꿈속같이 느껴졌다. 그림처럼 많은 꽃들이 있던 작고 아늑한 도시 쉐벤보른의 원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빨리 악몽에서 깨어나야 할 것 같았다 ..  (31쪽)


 볼일을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신촌에서 인천으로 가는 터라 신도림역을 거치게 됩니다. 앞차를 코앞에서 놓치고 한참 기다렸다가 타서 그런지, 북적거리는 칸에서 우루루 내리고, 우루루 내린 사람은 이윽고 들어오는 ‘동인천 가는 급행’을 타려고 우루루 뛰며 계단을 오릅니다. 뜀박질로 계단을 오르는 사람은 걸어서 올라가는 사람을 치면서도 미안하다는 말이 없습니다. 다른 이가 자기를 치고 지나가도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프지 않을지 모릅니다. 자기도 그이를 치고 앞지르거나 다른 이를 치고 앞지르면 될 테니까요.

 하늘이 도와주셨는지, 꽤 많은 사람이 우루루 몰려서 탔는 데에도 조금 빈자리가 보여서 우리가 살짝 마지막으로 탑니다. 이번 차를 보내고 뒷차를 탈까 생각했는데.

 등에 진 가방을 내려서 짐칸에 올려놓습니다. 몸이 홀가분해지기는 했으나, 어린 목숨을 부여안고 있는 옆지기는 힘들어 합니다. 한참 서서 가다가 조금 자리가 비니, 자리를 내어주며 앉으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리에 앉는다고 아기엄마 몸이 나아지지는 않습니다. 쭈그려앉을 때가 한결 낫습니다. 또, 자리에 앉는들, 좁은 틈바구니에서 몸을 옴짝달싹 할 수 없으니 더 고달플 뿐입니다. 모로 엎드릴 수 있다면 모르되, 전철 걸상은 너무 좁을 뿐더러, ‘노약자나 임산부 지정석’이라는 말이 부끄러울 만큼, 어르신한테도 아기엄마한테도 아늑하지 못합니다.


.. 아빠는 빵과 우유를 구하러 시내에 나가 보았지만, 물건을 살 수 있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먹을 것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정말 힘겹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게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살 곳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 갈기갈기 찢어지고 불에 탄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선뜻 구호품을 건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52쪽)


 종로3가에서 사진관에 들른 다음 270번 시내버스를 타고 신촌으로 갈 때에는, 용케 문낮은 버스를 탈 수 있었습니다. 문낮은 버스는 서는 자리가 조금은 넓어서 몸이 무거운 사람한테는 그럭저럭 아늑합니다. 버스기사가 여느 버스보다 천천히 몰아서 고맙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빨리 달리기는 빨리 달렸고, 멈출 때에도 확 멈춥니다. 빠르기를 좀더 늦추어도 괜찮을 테고, 다시 움직일 때에도 좀더 느긋할 수 있을 텐데.


.. 나는 누나의 모습에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곧 나는 비명을 지른 것을 후회했다. 내가 놀랐던 것이 누나에게 얼마나 큰 마음의 상처를 주었는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몸 색깔이 변하고 반점이 나타난 다음, 누나는 죽었다. 불평 한 마디 없이, 아주 조용하게. 누나는 그냥 그렇게 가 버렸다 …… “운동화 좀 벗겨. 태워 버리기엔 너무 아깝구나. 이제 운동화 같은 건 구할 수도 없는데. 나중에 네가 신어도 되겠어.” 한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  (112쪽)


 버스에서 내릴 때, 앞자리에서 내리는 사람과 뒷자리에서 내리는 사람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뒷자리에서 내리는 사람들은 저희만 먼저 내리려고 제 앞으로 끼어들고, 어느 한 사람도 잠깐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앞자리와 뒷자리에서 한 사람씩 내릴 수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하며 기다렸지만, 기다리는 사람만 바보입니다.

 신촌 나들목에서는 건널목으로 건너가기가 까다로워서 땅밑길로 들어갑니다. 옆지기가 뒷간에 들른다고 합니다. 조금 뒤 나옵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못 쓰겠다고 합니다. 하긴. 신촌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뒷간은 고작 몇 칸밖에 안 되고. 그러고 보면 종로3가역도 다르지 않고 동대문역도 다르지 않습니다. 어느 전철역도 뒷간은 고작 몇 칸만 놓았을 뿐입니다. 게다가 뒷간 찾기는 보물찾기마냥 어렵습니다.


.. “분유가 무슨 소용이 있어?” 엄마가 물었다. “나는 희망이 필요해요. 희망 없이는 아기가 살아서 세상에 태어날 수 없어요.” ..  (158쪽)


 사진기 대리점에 들어갑니다. 미리 부탁한 렌즈를 삽니다. 미리 부탁하는 물건을 사건만, 대리점 사람들이 일을 잘못해서 우리는 그제 왔다가 허탕을 치고 오늘 다시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제때 연락을 해 주지 않아 하루를 버리기도 했습니다. 지지난해에 바로 이곳에서 ‘지난주에 잃어버린 사진기를 사면서 회원등록도 했’으나, ‘입력이 되어 있지 않았다’고 해서 손해까지 봅니다. 입으로는 ‘미안합니다’, ‘그때는 저희가 일하지 않아서’ 하고 말하는 직원들이지만, 속으로도 미안하다고 느끼고 있는가는 모르겠습니다. 아쉬운 놈은 아쉬워하지만, 아쉬움이 없을 사람들로서는 ‘수많은 일처리’ 가운데 하나로만 여기는구나 싶습니다.


.. 사람들은 찾아낸 물건들을 몰래 숨겨 두려고 했지만 헛수고였다. 온 쉐벤보른 사람들이 통조림을 얻기 위해 온통 난리를 쳤다. 그 가운데 남아 있는 것들이 지금도 인기 있는 교환 물품으로 거래되고 있다. 가장 힘들었을 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서로 죽이기도 했다 ..  (208쪽)


 사진기 대리점을 나와 뒷길로 빠져서 샛골목으로 접어듭니다. 똑같은 서울바닥이고 신촌거리이지만, 샛골목은 퍽 조용합니다. 샛골목에도 우락부락 오토바이를 몰고 우격다짐으로 자동차를 쑤셔대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큰길을 걸을 때보다 낫습니다.

 노고산동 골목길 안쪽에 자리한 헌책방 앞에 닿습니다. 한숨을 쉬고 땀을 들이고 가방을 내려놓습니다. 새로 장만한 사진기로 사진 몇 장 찍어 봅니다. 퍽 오랫동안 손에 익고 길이 들던 사진기가 아니라 어쩐지 낯섭니다. 예전보다 떨어지는 렌즈를 붙이고 사진을 찍다 보니, 느낌이나 맛이 떨어집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떨어지는 렌즈로 처음 사진을 배웠고, 떨어지는 렌즈로도 내 마음에 드는 사진을 담아내 왔음을 떠올립니다. 더 나은 장비를 쓰면 더 낫습니다만, 덜 떨어지는 장비를 쓴다고 하더라도, ‘장비가 있음’에 기뻐하면서, 이 모자란 장비로 펼칠 수 있는 사진을 생각해야지, 하고 다짐합니다.


 (2) 인천사람이 벌인 시국미사


 지난 7월 2일, 인천에서도 ‘시국미사’를 열었습니다. 우리 나라 문화재이기도 한 답동성당에서, 인천에서 일하는 신부님 마흔 분 안팎이 모이고, 삼백쯤 되는 신도와 백쯤 되는 여느 사람들이 모여서 미사를 올린 다음, 답동성당부터 동인천역까지 500미터 거리를 느린걸음으로 오가면서 촛불을 들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인천에서 나오는 신문에서 이 소식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궁금해서 400원을 주고 사서 펼칩니다. 끝까지 펼치는데 아무런 소식이 보이지 않고, 사설이나 논설에서 한 마디도 안 다룹니다. 그렇다고 인천에서 굵직굵직하게 터지거나 일어나는 소식을 다루지도 않습니다. 그러다가 맨끝 사진 한 장 넣어 귀퉁이에 조그맣게 실린 ‘시국미사와 촛불행진’ 기사를 봅니다. 기사에는 신부님이 스무 사람쯤 모였고, 미사를 드린 시민이 이백 사람쯤이라고 나옵니다.

 서울 광화문에서 촛불모임을 한 지 한 달이 훌쩍 넘었을 뿐더러, 인천 쪽에서 크게 촛불모임을 안 한다고 하더라도 부평역이나 인천시청 앞에서 조촐하게 하는 줄 알고 있는데, 인천에서 나오는 신문에서는 ‘서울 쪽 촛불모임’ 기사도 거의 안 다루지만, ‘인천 쪽 촛불모임’ 기사도 거의 안 다룹니다. 그래도, 이날 미사와 행진 때 둘러보니 사진 펑펑 찍는 기자 분들 꽤 많이 보이던데.


.. “누나, 여기도 전부 오염되었다면 어떡하지?” “그렇다면 우리도 머지않아 죽게 되겠지…….” 유디트 누나가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누나, 우리가 죽는 거 상상할 수 있어?” “아니, 아직은 못하겠어.” ..  (44쪽)


 미사를 보신 신부님 가운데 한 분도 말씀을 하셨고, 인천에서 시민사회운동을 하는 한 분도 말씀을 하셨는데, 두 분은 인천에서 촛불모임을 꾀하기보다는, 전철을 타고 서울로 나들이를 떠나서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고 함께 움직인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다가오는 주말에 서울에서 크게 촛불모임이 열린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때 함께하며 힘을 보태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마땅하고 옳으신 말씀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가슴 한쪽이 시립니다. 틀리지 않고 바른 말씀이라고 느끼면서도, 팔다리 한쪽이 저립니다. 반갑고 좋은 말씀이라고 들으면서도, 두 눈을 질끈 감게 됩니다.


.. “하지만 만약 내가 저 사람들처럼 구걸을 하러 다니면요? 아니, 그게 바로 케르스틴이라면요?” 내가 물었다. “나도 이럴 수밖에 없는 내 자신이 밉단다. 하지만 너희들을 희생시켜 가면서 다른 사람을 구해 줄 수는 없잖니?” 엄마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  (57∼58쪽)


 인천에서 이래저래 환경운동을 한다는 분이 앞에 나와서 ‘경부운하’ 못지않게 ‘경인운하’가 큰 골칫거리라면서, 이에 따른 환경파괴와 자원낭비와 끔찍한 재앙이 어떻게 닥치는가 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서울과 부산을 이으려 하는 이명박 대통령 꿈은 아직 삽질을 하지 않았습니다만, 서울과 인천을 이으려 하는 지자체 우두머리 꿈은 일찌감치 삽질을 하며 밀어붙이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퍽 문제거리로 기사가 되기도 했는데, ‘서울과 부산을 잇는 물길’과 견주면 ‘서울과 인천을 잇는 물길’은 코딱지만큼으로 여겨지는지, 요사이는 기사가 되어 나오는 소식을 듣기가 무척 어려워졌습니다. 워낙 나라 곳곳에 터무니없는 막공사와 날림공사가 넘쳐나다 보니까, 이만한 막공사나 날림공사는 그다지 마음을 안 기울여도 되고, 눈길을 안 두어도 될 만하다고 여기는지 모르겠습니다.

 ‘시민 자유발언’을 해도 된다고 하는 소리가 들려서, 우리가 사는 배다리 골목집 한복판을 꿰뚫어 놓으려고 하는 ‘너비 50미터 넘는 산업도로’ 문제를 이야기하는 한편, 우리 스스로 아름다운 줄 못 느끼면서 내다 버리고 있는 ‘골목길 문화’를 외쳐 볼까 하다가 그만둡니다.


.. 할머니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부모님을 이해해 드려라.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기 전엔 모두들 너무 잘 지내서 아무도 도와줄 필요가 없었지.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 돕고 사는 걸 잊어버렸단다. 그리고 정말로 도움이 필요하면 국가가 맡아서 해결했거든. 그랬기 때문에, 요즘 사람들은 그저 저만 생각하는 거란다. 너희 엄마, 아빠도 바로 정 없는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이고.” ..  (81쪽)


 아기들 아장걸음과 맞먹을 만큼 느리게 느리게 걸어서 동인천역으로 가는 동안, 또 동인천역에서 길을 거슬러 답동성당으로 돌아가는 동안, 이 길, 지금은 자동차만 다니도록 되어 있는 이 언덕길은 ‘자동차가 없는 사람’한테도 열려 있던 길이었고, ‘자동차가 있는 사람’이 아니어도 오가던 길이었음을 떠올려 봅니다.

 신호등이 없던 나라인 중국에 신호등이 생기고, 건널목이 굳이 없어도 되었던 중국땅 곳곳에 건널목이 그려집니다. 차가 다녀도 사람과 섞이며 다녔고, 차가 아무리 바삐 길을 가야 해도 사람 걸음을 헤아려야 했던 문화가 그리 먼 옛날까지가 아니라 가까운 앞서까지 있던 중국이었음을 헤아려 봅니다. 우리 나라도 중국과 마찬가지가 아니었던가 하고, 이렇게 두 다리로 걷는 사람은 길 구석 좁은 자리로 내몰릴 뿐 아니라, 그 좁은 거님길 한쪽도 길바닥 장사를 하는 사람들한테 막히고, 길거리 가게에서 내놓는 물건에 막히며, 아스팔트길을 밝히는 거리등불과 전봇대 들한테 막히는 데다가 함부로 세워 놓은 자동차한테 막히는 모습을 맞대어 봅니다.

 우리한테는 무슨 권리가 있는지요. 우리가 져야 하는 의무만큼은 아니더라도, 무겁게 지고 있는 의무 모서리 하나만큼이라도 어떤 권리를 누리고 있는지요. 국방 의무라면서 남정네면 죄 군대에 끌려가서 ‘살인기계 훈련’을 받고 ‘멍텅구리 되어’ 피끓는 젊음을 버린 우리들한테 이 나라는 무슨 평화를 베풀어 주고 있는지요. 직접세보다 무서운 수많은 간접세들이 넘치는 이 나라는 우리들 사회보장과 문화복지와 교육예술에 얼마만큼 돈을 들이고 정책을 펼치고 있는지요. 법은 얼마나 사람을 아끼고 있으며, 규칙은 얼마나 자연을 사랑하고 있는지요.


.. 아직 추수할 게 남아 있는 농가들도 어려움을 겪었다. 이제는 콤바인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들은 낫으로 짚단을 베어야 했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낫질이라곤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터였다. 사람들은 다시 노인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러나 큰 낫은 거의 구할 수 없었다 …… 우리는 잎사귀가 다 떨어진 앙상한 가지에 매달려 있는 사과와 배를 땄다. 자두는 흔들어 떨어뜨렸는데, 설탕이 다 떨어져 조림을 만들 수 없었다. 말려 보려고도 했지만 곰팡이가 피기 시작했다. 전쟁도 겪었고, 전쟁 이후의 삶도 다 겪은, 경험 많은 할머니가 우리 곁에 있었더라면! ..  (120∼122쪽)


 시국미사를 이끈 마니산성당 신부님은 “저는 한겨레21을 창간호부터 구독하고 있습니다만, 제가 있는 강화도 마니산성당 마을에는 조선일보 한 가지만 들어와요. 그곳에는 신문이 조선일보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조선일보를 보게 되었는데, 조선일보를 한 여섯 달쯤 보니까 어느새 조선일보 논조에 따라 생각하고 말을 하게 되더군요. 그래서 성당에 조선일보를 끊고 한겨레21만 봅니다.” 하고 말씀했습니다.

 신부님 말씀이 아니어도 조선일보라는 신문이 사람들한테 끼치는 힘은 대단하다고 느낍니다. 사람들 마음을 크게 휘어잡고 움직이는 힘이 있구나 싶습니다. 이 힘이 슬기롭고 아름다우며 튼튼하다면 더없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슬기로운 쪽보다는 어리석은 쪽으로, 아름다운 쪽보다는 밉살스러운 쪽으로, 튼튼한 쪽보다는 더러움에 찌들어 몸을 망가뜨리는 쪽으로 흐르는구나 싶어요.

 더 많은 사람들한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이 큰힘을 슬기로운 쪽에 쏟으면 참으로 나을 텐데, 하고 생각합니다만, 이런 생각은 허튼 생각인지요. 더 널리 읽히며 사람을 이끌 수 있다면, 이 큰힘을 아름다운 쪽에 바치면 그지없이 기쁠 텐데, 하고 생각합니다만, 이런 생각은 꿈같은 생각인지요. 더 깊이 파고들면서 사람들 몸에 스며들게 한다면, 이 큰힘을 사람들 스스로 마음과 몸을 튼튼하게 북돋우도록 모으면 대단히 훌륭할 텐데, 하고 생각합니다만, 이런 생각은 부질없는 생각인지요.


.. 그러나 아빠에게, 아빠 세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핵폭탄이 터지기 전 여러 해 동안 인류의 멸망이 준비되고 있었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심하게 바라보기만 했다고 비난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아빠는 항상 “도대체 우리가 그 문제를 두고 뭘 할 수 있겠니?”라고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했었다. 또 핵무기의 무시무시함 때문에 평화를 보장해 준다는 사실을 지치지 않고 이야기했었다. 아빠에겐 대부분의 다른 어른들처럼 편리함과 안락함이 가장 중요했고, 아빠와 그들 모두 위험이 커지고 있는 것을 보았으면서도 그것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  (216∼217쪽)


 인천시장과 개발업자가 2013년까지 마무리지으려고 하는 어마어마한 ‘인천 갈아엎기’ 재개발과 재생사업을 보면, 성당이나 교회 자리를 건드리지 않습니다. 성당이나 교회를 둘러싼 골목집, 그러니까 성당과 교회를 나가고 있는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은 죄 건드립니다. 학교와 관공서도 건드리지 않습니다. 여느 사람들 살림집, 그러니까 학교로 아이들을 보내고 관공서로 민원을 넣으려 찾아가는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은 남김없이 건드립니다. 공장과 전철역은 조금도 손대지 않습니다. 돈없는 사람이 모여 지내는 동네, 그러니까 공장에 일하러 가고 서울로 일하러 가고자 전철을 타야 하는 사람이 사는 집은 어느 곳이나 건드립니다.

 인천시장과 개발업자는 ‘인천 갈아엎기’ 재개발과 재생사업이 돈이 되는 일이라고 힘주어 이야기하고 푸른사진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이 돈은 누구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이며, 누구 주머니로 들어가는 돈이온지요. 어디에서 나와 어디로 흐르는 돈인가를 따지기 앞서, 우리 삶에서 돈이 얼마나 크거나 아름다운지요. 자본주의 사회라서 돈이 없으면 굶는다지만, 굶지 않으면서 넉넉히 나누며 살아갈 만한 돈크기는 얼마쯤인지요. 우리는 돈버는 일이 아니면 해서는 안 되고, 돈을 쓰지 않으며 즐기는 놀이는 해서는 안 되는지요.


 (3) 《핵 폭발 뒤 최후의 아이들》이라는 이야기책


 1928년에 체코에서 태어나 남아메리카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는 ‘구드룬 파우제방’이라는 분은 수많은 이야기책을 써냈습니다. 한국말로 옮겨진 책이 제법 많습니다. 제가 읽은 이분 책을 손꼽아 보아도 《평화는 어디에서 오나요》, 《나무 위의 아이들》, 《그리운 자작나무》, 《할아버지는 수레를 타고》가 있습니다. 아직 읽지 않은 이분 책을 살펴보면, 《하느님, 한 번 더 기회를 드릴게요!》, 《엘린 가족의 특별한 시작》, 《산적 학교》, 《두브스키와 거리의 악사》, 《그냥 떠나는 거야》, 《강물소리가 들리니 엘린》, 《구름》, 《통조림 속의 인어 아가씨》 들이 있습니다.

 그동안 읽은 책으로 헤아려 본다면, 구드룬 파우제방이라는 분은, 입으로만 평화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분이 아니라, 몸으로 평화사랑을 보여주며 살아가는 분입니다. 글로만 자연 삶터를 아낀다고 말하는 분이 아니라, 마음을 바쳐 자연사랑으로 살아내는 분입니다. 생각으로만 가난한 이웃을 걱정하는 분이 아니라, 말씀과 몸 움직임을 함께 어우러내어 슬기로운 길을 찾으려고 하는 분입니다.


.. 흰 피부 니콜이 말했다. “비열한 놈! 폭탄이 떨어진 건 당신들 책임이야. 당신들은 아이들이 무슨 일을 겪든지 상관없었던 거야. 중요한 건 당신들이 편하게 사는 거였지. 지금 당신들이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거고, 그건 당신들이 벌인 일이야. 하지만 우리까지 불행에 빠뜨렸어! 뒈져 버려라!” ..  (144쪽)


 말마디마다 뼈가 담겼는데 딱딱하지 않습니다. 이야기가 술술 읽히는데 잊히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든 자본주의가 아니든, 한 사람이 사람다움을 추스르면서 삶을 가꾸는 매무새를 다독이도독 손길을 내밉니다.


.. 쓰레기더미 근처에 있는 겨울 호밀을 심은 들을 지나가게 되었다. 가을에, 그러니까 폭탄이 떨어지고 난 뒤에 씨를 뿌린 것이었다. 처음에 우리는 눈을 의심했다. 녹고 있는 눈 속에 자그맣고 파란 싹이라니, 온 들판을 가득 채운 파란 새싹이라니! 우리에겐 그것이 꼭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이 황폐해졌는데도 해야 할 일을 해 놓았구나. 믿기 힘든 일이야.” ..  (177쪽)


 어쩌면, 구드룬 파우제방 님은 마흔둘이라는 늦깎이 나이에 아이를 낳아서 기르게 되었기 때문에, 당신 아이한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빛줄기가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하게 되면서, 무지개빛 작품을 하나둘 내놓게 되었을까요. 끔찍한 전쟁통을 겪고, 한겨레(동독과 서독)이면서 남남처럼 나뉘어 으르렁거리던 아픔을 견디어 냈기에, 더 크게 껴안는 어머니품을 작품마다 고이고이 담아내게 되었을까요.

 우리 한국사람들도 식민지를 겪었고 전쟁을 치렀으며 독재를 견디었고 가까스로 선거민주주의를 얻었습니다. 그렇지만 계급과 신분 푸대접은 오래도록 끊이지 않고, 돈과 이름과 힘에 따른 괴롭힘과 따돌림은 여태껏 스러지지 않습니다. 방송은 즐거운 소식과 올바른 이야기를 펼치기보다 상업주의에 찌들거나 물들어 버리고, 끝끝내 권력을 붙잡아 더 큰 잇속을 챙기려는 정치꾼이 넘치는 가운데, 우리 스스로 못난 정치꾼을 솎아내거나 털어내는 데에 힘을 들이지 않습니다.


.. 나는 아이들에게 반드시 가르쳐 주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읽고, 쓰고, 계산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  (218쪽)


 대학생이 늘고, 유학생이 늘며, 지식과 상식 넘치는 여느 시민이 늡니다. 학교는 넘치고 영어학원과 영어교재는 불티나며 거리마다 양복으로 차려입는 사람이 늡니다. 번쩍거리는 자동차는 기름값이 치솟아도 줄어들지 않는 가운데, 값싸고 작은 집을 새로 짓는 일이란 없이, 비싸고 큰 아파트만 올려세웠다가 스무 해쯤 지나면 허물고 새로 올려세우는 일만 되풀이됩니다. 원자폭탄 피해자도 없는 체코이고 독일이고 남아메리카인데, 《핵 폭발 뒤 최후의 아이들》이라는 문학작품이 태어납니다. 원자폭탄 피해자도 있을 뿐더러, 많은데다가, 원폭 2세 환우도 있고 원폭 3세 환우까지도 있는 한국입니다만, 원자폭탄과 핵개발 문제를 다루는 사랑스럽고 뜻깊고 아름다운 문학작품은 태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른문학으로도, 또 어린이문학으로도. (4341.7.4.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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