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 가방 일공일삼 8
리지아 보중가 누니스 글, 에스페란자 발레주 그림, 하윤신 옮김 / 비룡소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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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하나 91 ― 가난한 사람만이 책을 읽고 사랑한다
 : 리지아 누네스, 《노랑가방》



- 책이름 : 노랑가방
- 글 : 리지아 누네스
- 그림 : 하윤신
- 옮긴이 : 길우경
- 펴낸곳 : 민음사 (1991.3.20.)



 (1) 나는 빈민입니다


 국어사전에서 ‘빈민(貧民)’이라는 낱말을 찾아보면 “가난한 백성”이라고 나옵니다. ‘영세민(零細民)’이라는 낱말도 찾아봅니다. 이 낱말은 “수입이 적어 몹시 가난한 사람”이라고 나옵니다.

 사람들이 빈민과 영세민을 말할 때에는 조금 다른데, 빈민보다는 영세민을 조금 낫게 사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느냐 싶고, 빈민이라 하면 꼭 구질구질하거나 꾀죄죄하거나 변두리로 내몰려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그러나 빈민이든 영세민이든 자기도 모르게 세금을 냅니다. 세무서에 대놓고 내는 세금은 거의 없다고 할 터이나,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크고작은 간접세를 엄마 배속에 있을 때부터 땅속에 묻힐 때까지 끊임없이 내게 됩니다.

 예부터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고 했습니다만, 가난한 사람들 누구나 “나라를 먹여살린다”면서 세금을 내고 있는데, 세금을 받아먹은 나라가 세금을 내는 사람을 살리지 못하면 어딘가 잘못된 일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그치지 않습니다. 가난이야말로 나라가 먹여살리거나 보듬어야 할 대목이고, 나라살림 북돋우기란 바로 가난한 사람들 살림살이를 어루만지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 “그렇담 왜 여자 친구가 아니라 남자 친구를 생각해 냈지?” “왜냐면 여자보다는 남자인 게 훨씬 더 좋기 때문이에요.” 오빠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나를 보더니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정말이니?” “그래요, 정말이에요. 오빠 같은 남자들은 나 같은 여자들이 할 수 없는 것도 많이 할 수 있잖아요. 보세요. 학교에서 어떤 놀이를 할 때도 대장을 뽑으면 늘 남자애들이에요. 집안의 가장도 남자고요. 내가 좋아하는 축구를 하고 싶어도 사람들은 나보고 남자애들 운동이래요. 내가 연을 날리고 싶어해도 마찬가지고요. 나 같은 여자애들은 바보가 될 때까지 어리석게 굴 수밖에 없어요. 모두들 늘 오빠만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하고 책임을 짊어지게 될 사람이라고 하고― 간단히 말해서 오빠가 모든 걸 갖게 될 거예요. 모든 걸. 결혼하는 것까지도. 식구들은 오빠가 스스로 결정하기를 기다리죠. 식구들은 늘 오빠가 우리 대신에 모든 것을 해결해 주기를 바래요. 한 가지 알려 드릴까요? 난 소녀라는 게 힘든 거라고 생각해요.” ..  (20∼21쪽)


 엊저녁, 서울 나들이를 마치고 인천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빈민’으로 꾸리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곰곰이 되뇝니다. 저 스스로 도시에서 빈민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빈민인 주제(?)에 글도 쓰고 사진도 찍습니다. 그러나 빈민이기 때문에 글을 쓰고 사진을 찍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부자인 사람은 글을 쓸 일도 사진을 찍을 일도 없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배가 부르니 배 두들기며 놀게 된다고 느끼며, 배가 고프니 책을 펼치게 된다고 느낍니다.

 가난하게 배우는 학생이 책을 펼치고, 넉넉하게 배우는 학생이 술잔을 붙듭니다. 가난하게 사는 어른이 좁은 방구석에서 아이와 함께 이불을 뒤집어쓰며 제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주고, 넉넉하게 사는 어른이 아이 손을 잡고 고기집에 가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자가용 타고 아파트로 돌아옵니다. 가난하게 태어나 젊음을 보내는 동무가 세상을 곰곰이 들여다보고, 넉넉하게 태어나 젊음을 누리는 동무가 사랑놀이를 신나게 하고 또 합니다. 가난한 마음이기에 절집에 가고 예배당에 갑니다. 가난한 생각이기에 부처님이든 하느님이든 고운 말씀을 차근차근 받아먹습니다. 가난한 넋이기에 누구 앞에서라고 허리 숙여 인사를 하면서 말을 낮춥니다. 가난한 몸이기에 두 발을 땅에 디디고 두 손으로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칩니다.


.. 난 집으로 돌아와서, 노랑가방 속에 물건들을 정리해 넣었다. 나의 이름 주머니를 정리해서 아코디언 주머니 속에 넣었고, 긴 주머니는 그 안에 숨겨 둘 날씬한 것을 찾을 때까지 비워 두기로 했다. 애기 주머니 속에는 내가 길가에서 주운 옷핀을 넣었고, 단추 있는 주머니 속에는 집 정원을 그린 그림과 다른 그림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넣었다. 지퍼 달린 주머니 속에는 어른이 되고 싶은 욕망을 집어넣고 잘 잠그었다. 또 하나의 지퍼 달린 주머니 속에는 작가가 되고 싶은 욕망을 더 깊숙히 넣어 두고 잘 잠그었다. 마지막 남은 단추 달린 주머니 속에는 소년이 되고 싶은 욕망을 넣었다(그 욕망은 너무 커서 단추 닫는 데 애를 먹었다) ..  (39쪽)


 옆지기와 함께 밥을 먹고 아기한테 옷과 밥과 집을 내어주면서 우리 살림살이로 이 동네에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돌아보면 늘 아찔합니다. 그러나 용케 살아갑니다. 동네 도서관도 용케 열어 놓고 있으며, 없는 살림에도 새롭게 사들이는 책은 꾸준합니다. 없는 살림에도 몇 군데 시민모임에 뒷배하는 돈을 내고, 없는 살림에도 이웃한테 책 선물을 하며, 없는 살림에도 생협에서 먹을거리를 장만합니다.

 그러나, 없는 살림이었기 때문에 더 알아보게 됩니다. 없는 살림이기 때문에 가림 없이 먹어대지 못합니다. 없는 살림이라서 아무하고나 어울리지 않습니다. 없는 살림은 돈 한푼 함부로 못 씁니다. 이 한푼을 어디에서 써야 할는지, 이 한푼으로 무엇을 해야 할는지, 이 한푼을 손에 쥐기까지 어떤 땀을 흘려야 했는지를 곱씹게 됩니다.

 있는 살림이었다면 틀림없이 책을 펼치지 않았습니다. 있는 살림이었다면 반드시 자전거를 타지 않았습니다. 있는 살림이었다면 꼭 고등학교만 마칠 생각이 아니었을 터입니다. 있는 살림이었다면 굳이 한국이라는 나라에 뿌리내리며 살 까닭이 없습니다.

 없었기에 책방을 찾고, 없었기에 더 바지런히 책을 넘겼으며, 없었기에 더욱 두 다리와 자전거에 기댄데다가, 없었기에 대학교육이 내 삶에 도움될 일이 없다고 느껴 선선히 멀리할 수 있었습니다.


.. “내가 이기는 걸 너에게 보여주려고. 그것도 쉽게 이기는 걸.” “그럼 우리가 벌써 한 판 대결해서 네가 이긴 걸로 하자.” 그는 맹렬이의 날갯죽지를 쳐들고 소리쳤다. “챔피언! 챔피언! 챔피언!” 맹렬이는 어리둥절해 있었다. “넌 져도 괜찮아?” “물론이지.”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지?” … “맹렬이는 싸움밖엔 생각하는 게 없어. 정말로 사람들이 맹렬이의 다른 생각들을 꿰매 버린 걸까?” ..  (72, 76쪽)


 “최종규 씨는 영세민이 아니에요. (철거민도 아니고) 빈민이에요.”

 이 말을 듣고 제 삶터를 가만히 돌아봅니다. 제가 사는 골목동네는 ‘재개발’이 아닌, 그리고 ‘재생사업’조차 아닌 ‘도시정화사업’이라는 이름을 달고 헐리게 됩니다. 아마도. 2013년까지.

 2009년까지 우리 골목동네를 허물고 싶던 인천시 공무원과 개발업자였으나, ‘2009 세계도시축전’을 치를 돈이 모자라 어영부영 ‘도시정화사업’이 늦춰지게 되었습니다만, 2014년 아시아경기를 치를 때까지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저를 비롯한 이웃 빈민을 싹쓸이하듯 인천에서 내쫓고 싶다고, ‘도시재생국장’이 주민설명회 자리에서 또박또박 힘주어 말합니다. 이런 말을 들은 저나 이웃 빈민은 얌전히 있지 않습니다. 큰소리로 외치면서 따집니다. 도시재생국장은 조용히 우리들 빈민 외침을 듣다가, 도시정화사업이 끝나면 처음 이곳에 살던 사람이 다시 들어와서 살 수 없음은 잘 알고 있으나 그렇다고 영세한 주민이 재정착을 할 수 있게 돈을 쓸 생각이 없다고 다시금 또박또박 힘있게 말합니다.

 그 거침없는 또박또박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렇구나, 저 도시재생국장이라는, 이름도 참 그럴싸하게 잘 지은 ‘도시재생국’이라는 관공서 부서 우두머리인 저분은, 책을 안 읽는 분이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면서, 책을 안 읽는 사람하고는 아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없겠다는 생각이 잇따라 듭니다.

 너무 배부르게 살고 있기에, 너무 넉넉하게 살고 있기에, 너무 모자람이나 아쉬움 하나 없이 살고 있기에, 너무 넘치게 살고 있기에, 너무 많이 벌고 너무 많이 쓰며 살고 있기에, 자기가 우리들이 낸 세금으로 달삯을 받고 있는 줄을, 그리고 우리 골목동네 허무는 돈을 바로 우리 주머니에서 나온 세금으로 하는 일임을, 하나도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고 깨닫습니다. 톨스토이 님이 왜 소설쓰기를 하다 말고 《국가는 폭력이다》와 같이 무시무시한 이름을 붙인 책을 썼는가를 비로소 깨닫습니다. 새삼 깨닫습니다.


.. “넌 전에는 뭘 했니?” 그는 핀 끝으로 헝겊 위에 금을 그으며 대답했다. “난 아무것도 할 시간이 없었어.” “그래?” “난 공장에서 나올 때 포장이 잘못되었어. 그래서 남들과 같이 있으려고 온힘을 다해 끝을 붙잡고 있었지만 결국은 길가에 떨어졌어.” “그런데 넌 다시 일어나지 않았어?” “내가 몸을 일으켜세울 때마다 사람들이 내 위를 밟고 지나갔어.” “아무도 널 보지 못했단 말야?” “사람들이 날 알아보았을 땐, 난 이미 온통 녹슬어 있었어. 그래서 아무도 날 가지려고 하지 않았어.” ..  (56쪽)


 믿음이 없으니 절집을 크게 짓고 탑을 높이 세웠음을 바야흐로 깨닫습니다.

 믿음이 없으니 예배당을 크게 짓고 십자가를 높이 올림을 바야흐로 깨닫습니다.

 성철 스님 법어집을 읽다가, 성경책을 읽다가,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라는 대목에서 눈시울이 붉어지곤 했는데, 믿음이 여리니 우찌무라 간조라는 이가 무교회주의를 말하고, 가가와 도요히코라는 이가 빈민굴에서 어깨동무하는 삶을 진보 지식인한테 말할 때, 제대로 알아들은 이가 없었다고 깨닫습니다.

 지난날 절집은 오늘날 문화재가 되는데, 오늘날 예배당은 앞으로 백 해쯤 뒤에는 멋들어진 우리네 문화재가 되겠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벌써부터 수많은 성당은 ‘백 년 역사’를 자랑하면서 지역문화재가 되어 가고 있어요.


.. “아주머니는 알베르토가 하는 건 뭐든지 재미있다고 생각하시죠? 그애가 세상에서 가장 바보스런 짓을 해도 재미있다고 생각하시겠죠.” 언니가 눈을 찌푸렸다. “아주머니께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 말아라.” “아주머니는 알베르토가 내게 무슨 짓을 하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데, 내가 왜 아주머니께 신경을 써 드려야 해요?” “라켈!” “언니는 왜 늘 아주머니께 그렇게 많은 신경을 쓰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마, 라켈!” “가방 안에 뭐가 들었는지…….” “왜 아주머니에게 늘 아첨을 떨지?” “라켈, 그만두라고 말했잖아!” “가방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아주머니가 부자이기 때문이지. 그렇지?” “그만두지 못하겠니.” “가방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아주머니가 늘 선물을 주니까 그런 거지, 그치?” “그∼만!!!” ..  (95쪽)


 둘레에서 저보고 ‘돈 좀 많이 벌어야 아기도 나중에 커서 아빠 미워하지 않지.’ 하고 이야기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때마다 싱긋 웃으면서 아무 말을 않곤 하지만, 때때로 ‘돈은 나중에 벌어도 되고 안 벌어도 돼요. 지난번에 춘천에 나들이 다녀올 때 그곳에서 뵌 분이 우리보고 당신은 당신 아이가 어릴 적에 많이 안아 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후회가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우리는 아기를 품에 안고 어르는 기쁨이 그 어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보람이라고 느끼고 있어요.’ 하고 낮은 목소리로 대꾸하곤 합니다.

 저로서는 좋은 하늘나라에 갈 마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살아가는 지금 저지르는 잘못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죽어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다시 태어날 때에는 첫째로 짐가방으로 되고, 둘째로 자전거로 되고, 셋째로 고무신이 되고, 넷째로 빨래비누가 되고, 다섯째로 연필이 되고, 여섯째로 수첩이 되고, 일곱째로 사진기가 되고 …… 지금 무척이나 애먹이는 님들한테 갚음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가난한 사람만이 하늘나라에 간다고 해서 걱정입니다. 저로서는 마음도 생각도 말도 살림도 집도 책도 그 무엇도 넉넉해지고픈, 그러니까 부자가 되고프지 않은데, 그예 가난을 둘도 없는 벗이나 님이자 옆지기자 이웃이자 어버이자 아이자 제 사랑으로 어깨동무하면서 살아왔고 살아갈 뿐이고 살고픈데, 가난하지 않은 삶을 꿈꾸지 않는데, 가난한 헌책방 나들이를 좋아하고 가난한 골목길 나들이를 즐기며 가난한 동무와 이웃하고 사귀면서 재미가 쏠쏠한데, 하늘나라 문은 가난한 이한테만 열려 있다고 하니, 어느 모로나 근심입니다.
 





 (2) 어린이문학 《노랑가방》이 들려주는 세상


 어린이문학 《노랑가방》을 헌책방에서 찾아내어 읽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왜 이 책이 판이 끊어졌을까 궁금했으나, 틀림없이 어느 출판사에선가 다시 냈을 테야 하고 생각했습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기를 하니, 제 생각대로 다시 나왔으며 무척 사랑받고 있는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민음사에서 1991년에 처음 냈다가 1995년에 문예공간에서 다시 냈고, 1996년에 비룡소에서 고침판으로 해서 새 그림을 담아 거듭 펴냈습니다. 새판을 내놓으면서 글쓴이 이름을 ‘리지아 누네스’에서 ‘리지아 보중가 누니스’로 고쳐 적습니다.


.. “왜 너의 아빠가 요리를 하고, 엄마가 냄비를 고치는 일을 하는 거니?” “왜냐면 오늘 엄마는 벌써 요리를 많이 했구, 아빠는 꽤 많은 것들을 수선했기 때문이야. 그리고 난 벌써 공부를 많이 했고, 할아버지는 냄비 때우는 일을 많이 했거든. 그래서 시간이 됐으니까 이제는 일을 서로 바꾸는 거야.” “왜?” “누구도 한 가지 일을 너무 오래 하지 않기 위해서지. 아무도 자기가 하는 일이 남이 하는 일보다 더 지겹다고 생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지.” “할아버지는 그럼 공부를 한단 말야?” “응.” “그렇게 나이가 드셨는데도?” …… “할아버지는 겉모습만 늙으셨어. 할아버지 마음은 늘 젊고 새로운걸.” “어떻게?” “늘 공부하시기 때문이지. 아빠나 엄마보다도 더 많이.” “부모님도 공부하시니?” “우리 집에선 누구나 공부를 해.” “언제나?” “응, 언제나 배울 게 있거든.” “각자 어떤 공부를 하라고 누가 결정하니?” “무슨 말이야?” “누가 그런 것들을 결정하니? 누가 대장이니?” “대장?” “응, 집의 대장, 가장 말이야. 그게 누구지? 아빠니, 할아버지니?” “왜 가장이 있어야 하는데?” ..  (140∼141쪽)


 《노랑가방》에 나오는 주인공 ‘라켈’은 가난한 집에서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는 계집아이입니다. 왜 천덕꾸러기이느냐 하면 ‘사내아이가 아닌 계집아이’이기 때문이고, 형제나 식구들과는 다르게 ‘돈에 크게 욕심이 없고, 겉멋과 겉치레에는 마음을 안 쏟기’ 때문입니다. 꾸밈없는 삶을 좋아하고, 푸대접받는 작고 하찮다 싶은 물건을 아끼며, 다치거나 아픈 목숨붙이를 고이 껴안습니다. 집에서는 어느 누구하고도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눌 수 없기에 홀로 생각에 잠기다가 스스로 소설을 쓰기로 다짐을 하고, 참말 소설을 씁니다. 어쩌면 이 《노랑가방》은 동화에 나오는 라켈이 쓴 이야기가 아닐까 싶고, 글쓴이 어릴 적 삶이 꼭 라켈이라는 아이가 보낸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세상 어디를 둘러보아도 죄다 꽉 막힌 사람뿐인데다가 빛줄기란 하나도 없어 외로움을 느끼는 삶.

 그런데 그 괴롭고 고달프던 삶에서 조그마한 틈을 하나 찾았고, 이 틈에서 아주 조용하고 낮게 살아가는 ‘참멋’을 나누는 이웃을 봅니다. 이제까지는 오로지 슬픔과 어둠뿐이었는데, 이제부터는 한결같은 기쁨과 밝음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면서 이 아이 라켈은 어린이에서 푸름이(청소년)로 거듭납니다. 자기도 모르게 자기 마음에 박혀 있던 선입관과 편견을 하나씩 느끼면서, 자기 삶을 가꾸고 사랑하는 길을 배웁니다. 자기 삶을 가꾸고 사랑하는 길을 배우면서, 이 즐거움을 허투루 흘려버리지 않도록 자기 매무새를 추스르게 됩니다.


.. 기쁨에 대해 말할 것 같으면, 로렐라이의 엄마는 정말로 여자인 것에 기뻐했다. 그리고 로렐라이는 작은 소녀인 것에 기뻐했다. 그 아이는 소녀인 것이 소년인 것만큼이나 좋다고 생각했다. 어쩜 이게 사실일까? ..  (146쪽)


 다 읽은 책을 옆지기한테 건넵니다. 옆지기가 읽고 나서는 도서관 책시렁 아주 잘 보이는 자리에 꽂아 놓을 생각입니다. 앞으로 우리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난 다음 신나게 읽을 책이 또 하나 늘었습니다. 우리 살림이 앞으로도 지금과 같이 가난하다면 아이가 반갑게 맞이하면서 읽을 책이 또 하나. (4342.2.2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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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 작가의 상수리 나무집 사람들 꽃보다 아름다운 우리
공선옥 지음, 이형진 그림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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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 하나 81 ― 아픔을 먹고 사랑으로 나눈 ‘정신대’ 할머니
 : 공선옥, 《상수리나무집 사람들》



- 책이름 : 상수리나무집 사람들
- 글 : 공선옥
- 그림 : 이형진
- 펴낸곳 : 어린이중앙 (2005.5.31.)
- 책값 : 8500원



 (1) 아픔을 먹고 살아가는 할머님들


 한국땅에서 태어나 한국사람으로 살았던, 그러나 한국 여자였기에 ‘성노예’가 되어야 했던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한국 정부에 등록한 ‘성노예 피해자’는 이백서른네 분이라 하고, 이 가운데 백 사람이 채 못 되게 살아 있다고 합니다. 성노예 피해자는 공식 집계로 잡히지 않았고, 또 나라에서 소매 걷고 찾아나서거나 알아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 나라는 강제징용자와 강제징병자 조사도 제대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원폭피해자도 제대로 살피지 않았습니다. 토지조사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땅을 빼앗긴 사람들 아픔을 고이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농사꾼들 쌀을 빼앗아갈 때 굶어죽거나 굶주린 사람들 슬픔을 두루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일본으로 떠나야 했던 사람들을, 또 그 만주와 일본에서 다른 데로 보내진 사람들을 하나도 어루만지지 않았습니다.

 참을 숨기고 거짓을 드러낸다는 새 교과서가 나오는 까닭은 먼 데 있지 않다고 느낍니다. 바로 가까이에서 우리가 몸소 겪은 아픔과 슬픔을 아픔과 슬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껴안지 못했는데, 어찌 참다운 교과서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예 거짓스런 교과서가 나오고 아이들한테는 거짓된 역사와 사회와 문화를 가르치게 되며, 아이들 스스로 참 역사와 사회와 문화를 알아보고자 책방이나 도서관 나들이를 해 보았자, 참 역사와 사회와 문화를 일러 줄 마땅한 책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도서관 가운데 책을 알뜰히 갖춘 곳이 드물 뿐더러, 이런 도서관까지 갈 겨를조차 없이 입시에 매이고 돈벌이 회사일에 얽히는 우리들입니다. 학교를 다니건 학교를 안 다니건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 발자국과 참모습을 알고 느끼고 새기면서 살아가지 못하도록 짜여져 있습니다.


.. 옥주가 서울에서 식모살이를 하고 있을 때, 길거리로 젊은 대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동안 관계를 끊고 살았던 일본하고 다시 왔다갔다 할 수 있는 협정을 맺는 것을 반대한다고 했다 … 일본에서 돈을 받았다고 했다. 소문에는 그 돈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많은 조선사람을 강제로 끌고 가서 일을 시키고, 전쟁터로 내몰아 죽게 하거나 다치게 해서 주는 돈이라고도 했다. 일본에서 받은 돈 중에 얼마를 일본군에 끌려가 전쟁을 치르다가 죽었거나 다친 사람들을 조사하여 위로비로 준다고 했다. 그러나 그때도 정신대에 끌려갔던 여자들에 대해서는 조사하지 않았다. 옥주는 동사무소에 가서 물었다. “혹시 정신대에 끌려갔다가 온 사람들에게도 나라에서 돈을 주나요?” 동사무소 사람은 옥주를 찬찬히 뜯어보다가 말했다. “아줌마가 정신대 갔다 왔소?” “…….” 옥주는 대답도 못하고 얼굴이 빨개져 버렸다. 동사무소 사람이 마치 나무라듯이 물었기 때문이다. “나라에서 조사를 한다 해도 정신대 갔다 왔다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소? 정신대는 솔직히 일본 군인의 노리개가 아니었소. 누가 알까 부끄럽지도 않소?” 옥주는 그만 동사무소 사람을 때려 주고 싶었다. 옥주가 뭘 잘못했다고 부끄러워해야 한단 말인가. 옥주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일본 군인한테 속아서 따라간 것뿐이다 … 동사무소 사람은 제 어머니나, 누나나, 여동생이나, 딸이 정신대로 끌려갔어도 노리개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  (42∼45쪽)


 곰곰이 되새겨 봅니다. 제가 학교를 다니던 1982∼1993년 사이에, 우리한테 역사를 가르쳐 준 분들 가운데 ‘정신대’든 ‘종군위안부’든 ‘성노예’든 한두 마디라도 올바르게 일러 주면서 깨닫도록 했던 목소리가 얼마나 있었는지.

 글쎄, 저로서는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다고 떠올립니다. 스쳐 지나가는 말마디로는 들은 적 있으나 ‘시험문제에 안 나오는 이야기’라서 그랬는지, 또 우리가 그리 재미있어 하지 않을(?) 듯하다고 그랬는지, 학교를 다니는 동안 배운 적은 없습니다. 학교 바깥에서, 그러니까 도서관에서도 못 찾고 인천에서 크고 책 많다고 내로라하는 새책방 어디에서도 정신대 할머니를 다룬 책은 구경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비로소 정신대 할머니들 다룬 책이 흘러나왔을 때 알아보고 깜짝 놀랐고, 그 뒤로 하나하나 살펴보고 알아가면서 읽어 나갔습니다.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부터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는 소설에 이르기까지, 또 《정신대실록》부터 《버려진 조선의 처녀들》까지, 또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부터 《성노예와 병사 만들기》까지, 또 《일본군 군대위안부》부터 《위안부 리포트》까지, 샅샅이 찾고 보면 고작 열 권 남짓밖에 되지 않는 ‘성노예 피해 여성’ 이야기를 다룬 책들입니다. 제 깜냥껏 찾고 살피며 읽고 간직하고 있는 책으로, 이밖에 《증언, 여자 정신대 8만 명의 고찰》(센다 가꼬오), 《위안부》(조지 힉스), 《실록 여자정신대 그 진상》(한백흥), 《자료집, 종군위안부》(吉見義明), 《강제징병자와 종군위안부의 증언》(강용권), 《봉선화에 부치는 고백》(히노 순조, 쯔즈끼 쯔토무), 《종군위안부》(千田夏光), 《나, 내일 데모 간데이》(혜진), 《할머니 군위안부가 뭐예요?》(한국정신대연구소), 《종군위안부》(이토 다카시), 《종군위안부》(노라 옥자 켈러) 들이 있습니다.


.. 옥주는 완전히 정신을 놓아 버렸다. 어둠 속에서 남자의 몸을 닥치는 대로 두들겼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옥주는 안다. 그것은 분노 때문이라는 것을. 어린아이와 여자와 노인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나쁘다. 세상에서 가장 힘없는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쁘다. 옥주는 그런 사람을 보면 분노가 일었다 ..  (92쪽)


 우리 스스로 돌아보자니 너무 괴로워 묻어 버리는지 모릅니다. 우리 스스로 되새기자니 참으로 부끄러워 덮어 버리는지 모릅니다. 우리 스스로 알아보자니 자료가 턱없이 모자라 두 손 드는지 모릅니다. 우리 스스로 가르치자니 성교육조차 제대로 안 되는 가운데 무어라 말하면 좋을지를 알지 못하는 탓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전태일을 추모하고 떠올리듯, 백범을 떠올리고 되새기듯, 우리들은 우리 땅에서 아파하고 괴로워한 가슴을 읽고 슬퍼한 마음을 헤아리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일은 잊지 않을 수 있어야 우리 세상과 삶을 아름다이 가꿀 수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일을 잊으면서 잘못되거나 뒤틀린 쪽으로 마음이 끌리게 되고, 되새길 일을 되새기지 않으면서 엉뚱하거나 비뚤어진 샛길로 눈길이 쏠리게 되지 않느냐 싶어요.


.. “히로시마랍니다. 원자탄이 떨어졌지요. 차라리 그때 다른 사람처럼 죽어 버렸다면…….” 옥주는 혹시 아낙의 입에서 정신대라는 말이 나올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원자탄이 떨어진 히로시마라고 했다. 정신대 갔다 온 사람이건 원자탄을 맞은 사람이건 힘들고 고통스럽게 사는 건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정신대 갔다 온 옥주와 아낙이 다른 건, 그래도 이 아낙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다. 비록 건강하지 못한 아이라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본 아낙이 옥주는 문득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  (123쪽)


 정신대란 지나간 이야기가 아닙니다. 군대위안부란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던 때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노예란 머나먼 다른 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오늘날 이 나라 우리들과 이웃들 이야기입니다. 내가 아니었다면 내 이웃과 동무가 겪은 일이고, 내 이웃과 동무가 아니라면 내 식구와 살붙이가 겪은 일입니다. 우리 마을에서 일어나고 우리 옆마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가 우리다움을 지키면서 살아가지 못하던 때 어이없이 짓밟히면서 겪어야 한 일입니다.


.. “팔자도 내림이라, 듣자 하니 떡장수 할멈이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하더니 그 딸은 또 미군 위안부라. 모녀가 팔자도 기구하네.” 그러면서 사람들은 또다시 왁자하게 웃어댔다. 시장 사람들은 영희가 미군 부대 여자라서 더럽다고 한다. 한국사람과 다른 새까만 아이를 낳아서 영희는 사람들에게 더 손가락질을 받는다. 옥주도 안다. 영희가 말 안 해도 옥주는 이미 영희가 어디서 무슨 일을 했다는 것을 다 안다. 영희가 미군 부대 여자였다는 것을 옥주도 알고 용화도 알고 길수도 안다. 알아도 모른 척했다. 아니, 아니까 굳이 묻지 않았다. 그렇지만 영희가 왜 더러운가. 영희는 절대로 남한테 못살게 굴거나, 남에게 해코지를 하거나, 남을 욕하거나, 남을 속여먹거나 하지 않았다. 영희는 비록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송희를 낳았고, 송이를 키우려고 노력하고, 송이를 누구보다 사랑한다 ..  (139∼140쪽)


 한미자유무역협정은 하루아침에 터져나오지 않았습니다. 한반도 대운하나 4대 강 정비라는 토목일은 갑자기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일본이 한다는 역사왜곡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 저지르는 역사왜곡은 몇몇 사람 손으로 일으켜지지 않았습니다. 이어지지 않은 일이란 없으며, 얽히지 않은 일이란 없습니다.

 성노예 피해자를 지켜 주지 않는 나라에서는 원폭피해자 1세뿐 아니라 피해 2세와 3세도 끌어안지 못합니다. 원폭피해자를 끌어안지 못하는 나라에서는 재일조선인과 재러조선인과 재중조선인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재외국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라는 이 나라로 들어오는 이주노동자를 돌보지 못하며, 이주노동자를 돌보지 못하는 나라는 노동자를 보살피지 못합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갈라 보금자리를 흔들리게 합니다.

 나라를 일구는 노동자(와 농사꾼 모두)를 땀흘리는 보람으로 갚음하지 못하는 나라에서는 교육이 교육답게 이루어지지 않기 마련이고, 교육이 교육답게 이루어지지 않는 마당에 정치가 정치답거나 경제가 경제다울 리 없습니다. 정치가 정치답지 않은데 신문이 신문다울 턱 없으며, 방송이 방송다울 턱 없습니다. 신문방송이 옳은 목소리를 내지 않는 가운데 사람 삶터에다가 자연 삶터는 제다움을 잃고 무너지게 되고, 사람과 자연이 사람 그대로 자연 그대로 뿌리내리지 못하는 판에 책이 책다울 바탕은 서지 못합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 성노예 피해 여성 이야기를 살피지 못하는 뿌리는, 또 이와 같은 이야기책이 제대로 나오지 못하는 바탕은, 또한 이런 책이 가까스로 한두 권 나와도 거의 알려지지 못할 뿐더러 읽히지도 못하는 흐름은, 오늘날 우리 나라를 아주 단단히 휘어감고 있습니다. 정신대 할머님들이 850번째 수요집회를 넘기고 900번째 수요집회를 넘기며 1000번째 수요집회에 이르도록 목숨을 다부지게 이어나가면서 목소리를 낸다 하여도, 우리 사회 틀거리는 이분들과 우리들 모든 밑바닥 사람들 목소리를 귀담아듣거나 받아들일 만한 매무새를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이런 매무새를 갖추고자 애쓰지 않습니다.


 (2) 어린이책으로 읽는 ‘정신대 할머니’ 이야기


 소설쓰는 공선옥 님이 《상수리나무집 사람들》이라는 이름으로 이야기책 하나 써냈습니다. 써낸 지 벌써 네 해가 되었습니다. 세상 사는 아픔이란 아픔은 빠짐없이 온몸으로 겪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는 상수리나무집 이야기입니다.

 상수리나무집 임자는 젊은 나이에 홀몸이 된 점쟁이 할머니입니다. 점쟁이 할머니는 참으로 오랫동안 혼자 차려 먹는 밥상이 외로워, 자기마냥 외로운 정신대 할머니인 옥주 할머니를 받아들입니다. 점쟁이 할머니와 정신대 할머니 두 분은, 아프고 힘든 나날을 함께 겪어내다가 자기들과는 사뭇 다른 아픔을 안고 살던 장님 아버지와 어린아이를 받아들이고, 또 떠돌이 개를 받아들인 다음, 양공주 노릇을 했던 아줌마와 살갗 까만 어린아이를 마지막으로 받아들입니다.


.. 아이 엄마는 마음이 많이 다쳐서 이제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 것이다. 다친 사람의 마음의 문을 열게 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다친 사람 스스로 열기 전에는, 다친 사람이 마음의 문을 여는 데 다른 사람은 그저 도와줄 수 있을 뿐 ..  (67쪽)


 있이 살아도 모자란 판에 없이 살면서 밥숟가락 하나 더 얹으며 꾸리는 상수리나무집 살림살이입니다. 없이 사니 맨손으로 세상과 부딪히면서 저마다 다 다른 밥벌이를 제 깜냥껏 하는 가운데 서로서로 돕습니다. 이웃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여 산다’고 손가락질이지만, 이런 손가락질은 ‘더는 흐르지 않는 눈물’로 삭이면서, 당신들보다 마음이 더 다친 또다른 이웃을 걱정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옆에 가까이 있으면 이웃이라 할 수는 있을 테지만, 눈물나는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없다면 이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상수리나무집’ 이웃이라는 사람들은 이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동떨어진 사람들입니다. 바가지를 씌우는 사람, 속여먹는 사람도 이웃이라 하기 어렵고, 달삯을 너무 높게 올려받으려는 집임자도 이웃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쓰레기를 아무 데나 휙휙 던져 버리는 사람도 이웃이라 하기 어렵고, 아는 체 모르는 체 없이 살아가는 사람도 이웃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 이웃을 사귀지 않습니다. 아니, 우리 스스로 옆집 사람한테 이웃이 되려 하지 않습니다. 단단한 쇳덩어리로 되고 빈틈없는 열쇠로 잠긴 문을 빠꼼히 열고 승강기로 씽하고 내려가 자동차에 열쇠를 꽂고 부릉 하고 내달리면서 집과 일터, 또는 놀 곳으로 움직이는 거의 모든 우리들입니다. 승강기에서 마주치면 고개를 까딱이기는 하겠지만 서로 무슨 일을 하고 이름은 어찌 되며 나이는 얼마인지 식구는 누가 있는지 하나도 모릅니다. 모르는 일이지만, 서로서로 가슴에 품은 기쁨과 슬픔을 하나도 함께 나누지 못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서로 모르는 채 따로 떨어져 지내니 서로를 더 모르게 되고, 서로를 더 모르게 되니, 이웃사람 삶에도 눈길을 안 두고, 우리 둘레 사람 모두한테 눈길을 못 둡니다. 나라에서 무슨 짓을 하건 말건, 정치꾼이 무슨 공약을 내놓다가 무슨 일을 하건 눈길을 안 보냅니다. 학교에서 아이들한테 무엇을 가르치고, 시험문제가 어떤 지식을 다루고 있거나 말거나 마음을 안 씁니다. 그예 아이들이 시험점수 잘 받으면 그만이고, 그저 내 은행계좌에 일삯이 많이 들어오면 장땡입니다.


.. 일어나서 미음을 한 숟갈 떠먹으려는데, 눈에서 뭔가 핑글 돌면서 죽그릇 위에 투둑, 하고 떨어졌다. 눈물이다. 지금껏 마음껏 흘리고 싶어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지금, 영희가 끓여 준 죽그릇에 투둑, 보석처럼 떨어지고 있다. 사실 옥주도 누군가가 자기를 위해 만들어 준 음식을 너무도 오랜만에 먹어 보는 것이다 … 어느새 영희는 울음을 멈추었다. 좋은 사람이라는 옥주의 말에 수줍게 웃는 영희는 지난봄 처음 봤던 그 영희가 아니다. 옥주는 서서히 변하는 영희 모습이 마치 자신의 모습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갑자기 용기가 생긴다. 슬픈 사람에게는 오히려 슬픔이 위로가 될 수도 있다. 옥주는 생각했다. ‘내 얘기를 하면 영희가 힘을 얻을 수 있을까. 예전에 내가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듣고 그랬던 것처럼.’ ..  (107, 110쪽)


 우리 모양새를 돌아볼라치면, 《상수리나무집 사람들》은 퍽 지루하달지, 뭔 소리인지 모른달지, 구태여 이런 책까지 왜 읽어야 하느냘지 하는 소리가 나올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우리 이웃뿐 아니라 바로 우리 스스로한테 생채기를 입히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개나리는 개나리이고, 별이는 별이입니다. 잘한 일은 잘한 일이고 옳지 않은 일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옳지 않은 일이나, 돈을 많이 벌게 해 주면 할 만한 일이 되겠습니까. 옳지 않은 짓을 하는 사람이나, 얼굴이 잘생겼다든지 이름값이 높다든지 하면 괜찮은 사람이 되겠습니까.


.. “별이야, 지금만 울고 나중에는 울지 마라. 별이가 울면 송이도 운단다.” “할머니, 내가 왜 우냐면요,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분해서 울어요.” “별이가 강해지면 분하지도 않단다. 별이는 강해져야 한다. 몸과 마음이 다 강해지면 누가 아무리 뭐라고 해도 괜찮단다. 저기 예쁜 개나리꽃이 피었구나. 개나리꽃이 예쁜 건 추운 겨울을 이겨내서 그렇단다. 강해지면 꽃처럼 예뻐진단다. 예쁜 것들은 모두 강하단다. 예쁜 사람을 보고 누가 뭐라고 하겠니. 개나리를 보고 아무리 개나리가 아니라고 해도 개나리는 개나리란다. 별이는 별이가 되어라.” “알았어요, 할머니.” ..  (173쪽)


 그런데 한 가지, 이야기책 《상수리나무집 사람들》을 읽으면서 아쉬움 한 가지가 걸립니다. 이야기 끝에, 상수리나무집이 헐리며 아파트가 새로 지어지는데, 상수리나무집에 살던 정신대 할머니와 ‘장님 아저씨와 양공주 아주머니네’가 따로따로 임대아파트를 얻어 이웃집으로 살아가는 모습으로 마무리가 돼요. 그렇지만 참말 오늘날 우리네 임대아파트란 집이 이렇게 쉽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한테 군말없이 주어지는지 궁금합니다.

 이제까지 고되고 고달프게 살던 사람들이 마지막에 가서 비로소 빛을 구경하는구나 싶어 마음이 놓이면서도, 어쩐지 우리 세상살이하고는 잘 안 맞는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이 책을 읽을 사람이 초등학교 높은학년이나 중학생 나이임을 헤아린다면, 이렇게 살며시 웃음을 띠면서 끝을 맺는 일이 썩 나쁘지는 않다고 봅니다. 자꾸자꾸 이야기 마무리가 아쉽고 허전하고 어딘가 바람이 피식 빠져 버린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지만. (4342.2.3.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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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 살 하영이의 스웨덴 학교 이야기 - 창의.다양.여유를 배운다 양철북 청소년 교양 8
이하영 지음 / 양철북 / 2008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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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하나 86 ― “꿈만 꿔도 괜찮은” 스웨덴 아이
 : 이하영, 《열다섯 살 하영이의 스웨덴 학교 이야기》


- 책이름 : 열다섯 살 하영이의 스웨덴 학교 이야기
- 글ㆍ사진 : 이하영
- 펴낸곳 : 양철북 (2008.10.27.)
- 책값 : 9800원



 (1) 한국이란 나라에서 학교라는 곳은


 카지노이든 도박장이든 가 본 일이 없습니다만, 사람들 이야기로는 이런 곳에는 시계와 거울과 창문이 없다고 합니다. ‘지금 내가 어디에서 무얼 얼마 동안 하고 있는가’를 잊도록 해야 도박에 흠뻑 빠져들면서 자기 모든 것(돈이든 집이든 집식구이든)을 내버리게 되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우리 나라 학교와 군대와 감옥을 헤아려 보면, 시계도 있고 거울도 있고 창문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 학교나 군대나 감옥, 여기에 회사와 관공서까지 더해 놓고 보면, 그 어느 곳에서도 ‘지금 내가 어디에서 무얼 얼마 동안 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게끔 홀가분하게 풀어놓고 있지는 않은 듯합니다. 창문은 있어도 바깥을 내다볼 수 없습니다. 거울이 있어도 제 얼굴이든 몸매이든 제 마음대로 가꾸거나 꾸밀 수 없습니다. 하다못해 머리 길이조차 제 마음대로 간수하지 못하지요. 시계가 있으나 시간에 따라서 제 하고픈 일과 놀이를 즐길 수 없습니다. 있기는 있어도 시늉일 뿐이고, 외려 없을 때보다 답답하거나 꽉 막힌 데가 우리네 사회 얼거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 비록 한국에서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했지만 일등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을 돕지 않고 나 혼자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만으로 부족하면 때로는 교활한 방법을 써서 다른 사람이 열심히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법도 터득해야 했다 … 내가 일등을 함으로써 얻어지는 것들을 포기하고 나니 일은 훨씬 쉽게 풀렸다. 아이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리고, 스웨덴어 때문에 여의치 않다면 다른 친구를 불러와 통역을 부탁했다 … ‘우리 모두 똑같이 잘하자’는 스웨덴 학교의 교육 방침은 한국 학생이나 부모님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발상일 것이다 ..  (52∼55쪽)


 텔레비전이 있는 옆지기 부모님 사는 일산집에 와 보면, 이곳 집식구들이 보는 텔레비전을 함께 보곤 합니다. 때때로 저 혼자서 텔레비전을 볼 때도 있습니다. 무슨무슨 케이블이다 해서 백 가지가 조금 못 되는 갖가지 풀그림이 스물네 시간 쉴새없이 흐릅니다. 텔레비전만 들여다보아도 하루 내내 지루하지는 않겠구나 싶으면서도, 1번부터 99번까지 한 칸씩 죽 움직여서 들여다보면, 어느 풀그림이든 거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연속극도 영화도 우스개도 노래도 다큐도 만화도 게임도 …… 비슷한 눈길과 어슷비슷한 줄거리와 겹치기 배우와 끝없이 다시 보여주는 풀그림입니다. 가짓수는 많지만 많은 가짓수만큼 다르다는 느낌이 없고, 수많은 풀그림을 볼 사람들도 모두 다른 사람들일 텐데 어떻게 모두들 똑같은 눈길로 똑같은 이야기를 즐기며 똑같은 생각을 하도록 하는 데에 그예 빠져들 수 있을까 놀랍다는 생각뿐입니다.

 어릴 적부터 길들기 때문일까요. 어릴 적부터 모두들 유치원에서 영어를 배우고 한자를 익히고 영어동요를 부르고 영어책을 펼치면서 크다가, 초등학교에 들고부터는 똑같은 교과서로 똑같은 수업에 똑같은 글짓기에 똑같은 시험에 똑같은 책걸상에 똑같은 음악 체육 미술에 똑같은 교과과정으로 똑같은 지식을 집어넣고 있으니, 생각도 마음도 넋도 얼도 매무새도 똑같이 맞춰져 버리고 말까요.

 제 어릴 적 국민학교에 다니던 일을 떠올려 봅니다. 1987년 10월 어느 날, 한가위와 주말이 겹치며 아주 오래도록 쉬는 때가 이어져 있었는데, 그때 우리 담임 되는 분께서는 ‘산수 깜지 50장’이라는 엄청난 숙제를 내어주었습니다. 뭐, 산수 숙제만 이만큼이었고, 다른 과목은 그 과목대로 다른 숙제가 한가득이었습니다. 그때나 이제나 다르지 않지만, 명절이라고 우리가 마음껏 놀 수 있지도 않은데(어느 집에서나 부모님을 거들며 명절 준비를 해야 하니까), 앞뒤로 빽빽히 ‘산수 깜지 50장’을 32절지도 16절지도 아닌 8절지에다가 해 오라고 하는 일은 한 마디로 폭력이었습니다. 이 폭력은 산수 깜지를 해 온 아홉 아이를 뺀 쉰한 아이한테는 ‘끝까지 산수 깜지를 다 마칠 때’까지 ‘안 해 온 장수만큼 매질을 받는’ 또다른 폭력으로 이어졌습니다. 담임 되는 분께서는 지치지도 않는지, 산수 깜지 숙제를 안 해 온 아이들 매질에다가, 일기를 안 쓴 아이들 매질에다가, 다른 숙제를 안 해 온 아이들 매질에다가, 아침에 학교에 늦은 아이들 매질에다가, 학교모자와 이름표를 안 차리고 온 아이들 매질에다가, 반장과 부반장이 적은 ‘떠든 아이 쪽지’에 적힌 아이들 매질에다가, 다달이 치르는 학력고사 점수 떨어진 아이들 ‘떨어진 점수만큼 휘두르는’ 매질에다가 …… 매질 매질 매질을 이어나갔습니다. 매질은 팔뚝이나 종아리에 때리는 회초리가 있지만, 엉덩이와 허벅지에 때리는 야구방망이가 있었고, 옆 반 교사한테 각목을 빌려 오기도 했고, 어느 반 교사한테 당구채를 빌려 오기도 했습니다. 교무실에 가 보면 출석부 있는 자리 옆으로 갖가지 몽둥이가 나란히 줄지워 서 있곤 했습니다.

 몽둥이 크기와 가짓수는 국민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가서도 달라지지 않았고, 대학교라는 곳에 잠깐 들어가서 보았을 때에는 몽둥이는 보이지 않았으나 선배 되는 분들께서는 후배 되는 우리들한테 얼차려나 주먹다짐으로 새로운 매질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 한국 학교에서는 예체능 수업이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내가 다닌 학교는 미술실이나 음악실이 따로 없었고, 피아노도 각 학년에 한 대밖에 없었다. 피아노 치는 것을 좋아하고 리코더도 곧잘 연주했지만 하모니카, 멜로디언, 리듬악기처럼 몇 번 쓰고 처박아둘 것들을 계속 사야 했다. 크레파스와 물감, 붓 같은 것을 들고 다녀야 하고(스웨덴은 학교에서 모든 학용품과 준비물을 챙겨 준다), 일 주일에 한 번씩 수수깡이며 지점토, 색종이를 계속 사들여야 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미술 수업이 부담스럽고 싫었다. 내 침대 밑에는 언제나 쓰다 남은 미술 재료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선생님들은 툭하면 ‘과학 상상화’를 그리게 했다. 공상을 하거나 책 읽기는 좋아했지만, 그것을 그림으로 옮기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결국 나는 몇 년 동안 똑같은 그림을 색깔과 구성만 조금씩 바꿔서 그려 왔다. 그러고도 교내 과학 상상화 그리기 대회에서 상을 받았으니 참 신기한 일이다. 체육 수업 역시 즐겁지만은 않았다. 땡볕에 운동장에 나가서 하는 달리기는 거의 고문에 가까웠다. 게다가 체육이 다른 수업 중간에 끼어 있어서 모두가 땀 냄새를 풀풀 풍기며 나머지 수업을 듣는 것은 보통 괴로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대한민국의 평범한 중학생이라면 이런 불평불만은 쏙 들어갔을 것이다.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예체능 과목이 그리워질 만큼 공부에 시달려야 했을 테니 말이다 ..  (70∼71쪽)


 한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얼마나 넓은 땅이 있어야 하느냐는 말이 있습니다만, 우리 나라에서 제도권 학교를 다니던 열두 해 세월은, 한 사람이 제도권 학교를 벗어날 때까지 얼마나 매질에 시달려야 하느냐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두드려맞고 욕지꺼리를 듣고 선생들 잔심부름을 해야 하고 선물(또는 돈봉투)을 갖다 바쳐야 하고 방위성금과 공과금과 폐품과 평화의댐성금과 국군위문편지와 학교발전기금과 무어무어를 가지고 학교에 가야 ‘학생 딱지를 떼고 사회인이 될’ 수 있는지 까마득했습니다. 죄수가 아님에도 왼쪽 가슴에 이름표를 늘 달고 다니도록 하고, 북녘나라처럼 독재가 아니라고 하지만 학교배지를 언제나 이름표 위에 달고 다니며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다가, 학교가 끝난 뒤 운동장에서 놀면 불량학생 대접을 받아야 하고, 교내 시험을 치러 몇 손가락 등수에 들면 무슨 잘못을 저지르건 가볍게 풀려날 수 있으며, 골마루에서 선생한테 인사를 안 하면 뺨따귀나 주먹이 날아오는 일이 왜 ‘학교’라는 데에서 이루어지는지 알 노릇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느낍니다. 이렇게 어릴 적부터 우리들을 묶어 놓고 푸릇푸릇할 때에조차 생각을 가두어 놓아야, 나라나 정치나 지역에서 뭔가 하나를 시키기에 좋을 뿐더러 정치와 행정을 붙잡은 이들이 잘못을 저지르고 뒷돈을 챙겨도 우리 스스로 아뭇소리 안 하게 되는 사회 틀거리가 만들어지게 되더군요. 나날이 정치를 못미더워 하면서 우리 스스로 투표권을 버리도록 하는 가운데, ‘이 정치인이나 저 정치인이나 다 똑같지 뭐’ 하고 생각하도록 이끌어요. 우리 스스로 우리 마음밭을 살찌울 책을 찾아서 읽는 버릇을 익히지 못하게 했으니, 우리 스스로 세상을 꿰뚫어보는 눈은 기르지 못하게 되면서 우리가 겪은 그대로 우리 아이들이 똑같은 길을 걷도록 하고 맙니다.


.. 한국에 있을 때 동네 도서관은 지대가 너무 높은 곳에 있어 자주 가기 힘들었고, 미국에서는 운전을 하지 않고는 갈 방법이 없어서 자주 찾기 힘들었다. 하지만 스웨덴 도서관은 아파트 세탁실 가는 것만큼 편한 위치에 있어서 좋았다 … 혹시나 싶어 아동ㆍ청소년 도서를 담당하는 사서에게 물어 보았다. “한국어 책도 볼 수 있을까요?” 사서는 의외로 시원시원하게 10권에서 15권 정도를 들여놓고 편지를 보내겠다고 했다. 간단히 전화나 문자 메시지로 연락하면 될 것을 스웨덴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 우편으로 대부분의 업무를 해결한다. 한국 책을 가져오겠다고 너무 쉽게 말해서 믿기가 어려웠는데, 얼마 뒤 책을 들여놓았으니 가져가라는 편지를 받았다. 정말 감동이었다. 스웨덴의 도서관 시설과 운영은 스웨덴이 복지국가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실감했을 만큼 훌륭했다 ..  (81∼82쪽)


 우리 나라가 유럽 어느 나라들처럼 복지가 넉넉할 수 있으면 더없이 좋겠지만, 꼭 복지가 넉넉한 나라로 거듭나기만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다만, 학교는 학교 구실을, 사회는 사회 구실을 할 수만 있으면 하고 바랍니다. 학교는 한 사람이 차츰차츰 커 나가는 동안 몸과 마음에 익힐 힘과 깜냥과 슬기를 받아들이는 자리입니다. 높은학교에 들어갈 시험지식을 외우는 자리가 아닙니다. 햇볕 한 줄기 쬐지 못하도록 좁은 책걸상에 하루 내내 붙잡혀 지내야 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어릴 때나 풋풋할 때나 교과서 몇 가지와 참고서와 문제집 몇 가지로 우리 눈을 가득 채우게 하는 자리 또한 아닙니다. 날마다 쏟아지는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훌륭한 책이 얼마나 많은데, 왜 우리 아이들이 그 수많은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훌륭한 책이 아닌, 오로지 교과서 하나에만 매여서 자기 꿈과 뜻을 못 펼치게 가로막혀야 합니까.


.. 한국은 수업이 끝난 뒤에 그 자리에 앉아서 가만히 기다리면 선생님이 들어오지만, 여기서는 10분 동안 발에 땀이 나게 ‘교실 찾아 삼만리’를 해야 한다. 마치 대학처럼 자신이 들어야 하는 과목의 교실을 직접 찾아야 하는 것이다 … 스웨덴에서는 교과서를 학교에서 무료로 지급한다. 매년 새 교과서를 나눠 주는 것이 아니라 선배들이 쓰던 것을 물려받는다. 한 번 쓰고 버리기에는 종이의 질이나 인쇄 상태가 상당히 좋기 때문이다(백과사전 같은 미국의 교과서보다 좋은 것 같다). 예를 들어 내가 쓰는 수학 교과서는 320쪽짜리 올 컬러인데, 종이가 매끌매끌하고 질이 좋은 편이다. 이런 책을 한 번 사용하고 버리는 것은 자원 낭비이기 때문에 공책을 사용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다 ..  (182∼183쪽)
 





 (2) 우리 스스로 만드는 학교


 지난밤, 아기도 잠들고 옆지기네 식구들도 모두 잠든 때, 옆지기하고 나란히 앉아서 〈친절한 금자씨〉라는 영화를 텔레비전으로 봅니다. 잘 만든 영화라는 소리는 익히 들었지만 영화로 보기는 처음입니다. 보려고 본 영화는 아닌데, 용케 처음 흐를 때부터 보게 되어 내처 끝까지 봅니다.

 영화를 보며 줄거리를 헤아리는 동안, 이 영화는 그저 영화로만 담기는 이야기는 아니겠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다른 생각이 있어서라기보다 ‘요트’를 사고 싶어서 아이들을 꾀어 죽이고 돈을 뜯어냈다는 영어학원 강사 모습은, 오늘날 우리 나라 수많은 욕심쟁이 꾀쟁이 떼쟁이 심술쟁이 모습하고 다를 바 없습니다. 그 영어학원 강사 혼자서 잘못되거나 비뚤어졌기 때문에 그와 같은 짓을 저질렀을까 생각해 보면,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 우리네 학교는 모든 아이들을 ‘〈친절한 금자씨〉에 나오는 영어학원 강사’ 마음이 되도록 길들이고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무엇엔가 억눌리고 찌들리고 꽉 막혀서 고리타분하면서 바보짓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멍청이가 되도록 하는.


.. 이제는 8시 30분에 등교해서 1시 30분에 하교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한국처럼 학교가 끝난 뒤에도 이 학원 저 학원으로 달리는 생활은 상상할 수도 없다. 요즘에는 너무 바쁘게 사는 것보다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사는 것이 훨씬 좋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쾌적한 도서관이나 햇볕이 좋은 공원 잔디밭에서 한가롭게 책을 읽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한국 친구들도 잠시 공부와 컴퓨터 게임을 잊고 경험해 보라고 꼭 권하고 싶다 ..  (112쪽)


 영화에서 아이를 잃은 어버이들을 보면, 떵떵거리듯 잘살든 찢어지게 못살든, 당신들한테 소담스러운 한 가지는 당신들이 낳아서 기르던 아이들 ‘해맑게 웃던 싱그러운 모습’이었습니다. 당신 아이들이 지니고 있던 작은 물건 하나를 늘 간직하면서 떠나고 없는 아이를 떠올리고, 당신 아이를 죽인 영어학원 강사를 찢고 쑤시고 죽이기까지 했어도 아픔이 풀리지 않습니다. 풀릴 수 없었을 테지요. 누구라도 풀릴 수 없어요. 그러나, 그렇게 당신 아이들이 당신 품을 떠나기 앞서까지는, 당신들은, 아니 우리들은 깨닫거나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가 우리 아이들을 사랑하고 믿고 아끼면서 돌보는 길은 ‘영어학원 따위에나, 또는 수많은 학원 따위에나, 또는 한국에서 손꼽히는 잘난 대학교 따위에나 보내는 일’이 아님을 깨닫지 못합니다.

 떠나고 없으니 비로소 ‘대학교에 못 가도 좋’고 ‘영어를 못해도 좋’으며 ‘돈 잘 버는 사람이 아니 되어’도 좋은 한편 ‘이름 날리는 사람이 안 되어’도 좋습니다. 그저 곁에만 있으면 좋은 아이입니다. 마냥 우리 둘레에 함께할 수 있으면 좋은 집식구입니다.


.. 이번 현장학습은 책상 앞에 앉아서 글만 읽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게 스톡홀름에 관해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한국의 친구들도 자신이 사는 지역을 돌아다니며 역사와 지리를 배우는 기회를 자주 가지면 좋을 것 같다(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서울 테마’ 같은 것이 없었다). 넓은 세계를 경험하고 배우는 것도 좋지만,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나 마을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것도 아주 재미있고 유익한 일이다 ..  (138쪽)


 곰곰이 따지고 보면, 존 테일러 개토 님이나 이오덕 님처럼 깨인 분들이 말하듯, 나라나 정부가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어서 다스리기 좋도록 하고자 제도권 학교가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나라나 정부만 ‘바보 만들기’를 하지 않아요. 우리 스스로 나라와 정부가 ‘바보 만들기’를 하도록 돕습니다. 우리 스스로 나라와 정부가 ‘바보 만들기’를 해도 그저 따라가면서 낮은자리 사람을 밟고 올라서서 더 많은 돈과 힘과 이름을 누리고자 합니다.

 법과 제도가 뒤틀려 있기도 합니다만, 뒤틀려 있는 법과 제도를 고치지 않는 사람은 다름아닌 우리들이에요. 교육악법이 태어나고 방송악법이 태어나도록 한 사람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이명박 정부가 잘못해서 태어나려는 나쁜법이 아닙니다. 이명박 정부가 못난이라서 국가보안법을 안 없앨 뿐 아니라 더 끔찍한 법을 만들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길들고 있으니, 우리 스스로 이 뒤틀린 틀거리에서 잇속을 챙기면서 제 밥그릇만 튼튼하면 된다고 여기고 있으니, 더 나빠집니다. 참된 길을 걷고자 애쓰지 않으면서 사회와 나라와 문화와 경제와 교육이 참되게 나아가기를 꿈꿀 수 없어요. 






.. 나는 스웨덴에 온 이후로 또래 친구들보다 선생님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더 즐거웠다.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이 없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학생이 일방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사람 대 사람으로 존중하는 점에서 보면 그것은 확실하다 … 스웨덴의 시험 문제나 교과서의 문제 중 특이한 점 하나는 하나같이 서술형이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수학마저도 그렇다. ‘왜?’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곳이 없다. 단답형으로 대답할 수 있는 문제는 거의 없다(나는 여태까지 본 시험에서 객관식을 본 적이 없다). 교과 과정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어야 생각하고 분석하고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 숙제나 시험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매번 숙제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그것은 정해진 시간 동안 억지로 끝내야 하는 지긋지긋한 골칫거리가 아니라, 나만의 개성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  (154∼159쪽)


 아직까지 우리 나라 구석구석 ‘새마을운동 깃발’이 펄럭입니다. 지난달이었나, 인천에서는 ‘전국 새마을운동 대회’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독재자 박씨는 새마을운동으로 온나라를 휘어감으면서 ‘잘살아 보세’ 하는 노래를 퍼뜨렸지만, ‘잘살기’가 무엇인지를 말하지 않으면서 사람들 전통문화를 깡그리 짓밟고 없앴습니다. 새로 가르쳐야 한다면서 새마을연수원을 짓고 사람들한테 새마을교육을 시켰지만, 새로 배운 사람이 늘어날수록 ‘서로돕기’와 ‘어깨동무’는 나날이 자취를 감추고 ‘혼자하기’와 ‘홀로놀기’만 자꾸자꾸 퍼져나갔습니다. 영어를 더 많이 가르치고 영어마을을 큰돈 들여 짓고 모든 회사 모든 시험에 영어 지식을 따지며 가게와 관공서 간판과 서류에 영어가 함께 적히고 있으나, 이렇게 한다고 ‘세계화’가 이루어질까 궁금합니다.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숱한 장사가 판치고 있을 뿐임을 느끼면서 자기부터, 또 자기 아이들한테 껍데기 가르침이 아닌 알맹이 가르침을 베푸는 분이 몹시 드뭅니다. 한국에서 살아남자면 어쩔 수 없다지만, 어쩔 수 없다기보다 우리 삶터를 더 나은 길로 고쳐 나가고픈 마음이 없기 때문이 아니랴 싶습니다.


.. 억지로 스웨덴의 교육 방식을 찬미할 생각은 없다. 또한 한국의 현실적인 교육 환경을 모조리 부정하며, 스웨덴의 교육 현실과 대입하여 우격다짐으로 트집 잡을 생각도 없다. 다만 내가 느끼기에 스웨덴의 교육 방식이 보다 인간적이고, 그런 교육을 받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이기에 오랫동안 건강한 복지국가가 유지되는 게 아닐까 생각할 뿐이다. 내 주변의 사람들은 그 꿈이 무엇이든 나의 꿈을 존중할 것이다. 돈을 많이 벌고 떵떵거릴 수 있는 직업이 아니라고 침 튀겨 가며 말리지도 않을 것이다. 선생님들은 날 도와주고, 친구들은 날 응원할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2년 뒤 내 적성과 능력, 그리고 소질에 맞는 진로를 정하는 데 아무런 망설임이 없을 것이다 ..  (191쪽)


 한손에 평화를 든다면, 다른 한손에 전쟁을 들 수 없습니다. 한손에 군대를 두면서 다른 한손에 사랑이나 믿음을 둘 수 없습니다. 군대와 사랑은 다른 세상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전쟁무기로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손에 제도권입시만 떠받치는 한국 교육이니, 다른 한손에는 매질과 끝없는 학원 교육이 올려집니다. 한손에 돈을 들면 다른 한손에는 이웃사랑이 아닌 이기주의가 올려집니다. 한손에 권력을 들면 다른 한손에는 이웃나눔이 아닌 소비물질만능이 올려집니다.
 





 (3) 《열다섯 살 하영이의 스웨덴 학교 이야기》를 읽으며


 아버지 일 때문에 스웨덴에 옮겨 살면서 학교를 다니는 열다섯 하영이가 쓴 《열다섯 살 하영이의 스웨덴 학교 이야기》를 읽습니다. 하영이는 스스로 바라면서 미국 학교도 다녀 보고 스웨덴 학교도 다녀 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일터 때문에 ‘한 학교를 오래 못 다니고 여러 학교로 옮겨 다니는’ 이 땅 많은 아이들처럼, ‘한 나라 학교를 내처 다니지 못하고 여러 나라 학교를 옮겨 다니’게 되었어요.

 이렇게 세 나라 학교를 다니면서, 지식이 아닌 몸으로 저마다 다른 모습을 느낍니다. 꼭 어느 한쪽이 좋거나 훌륭하다기보다, 학교에서 무엇인가 배우며 무럭무럭 자라는 자기 삶을 돌아볼 때, 자기는 어디에서 무엇을 배우면 좋은가를 저절로 깨닫습니다.


.. 학생들이 직접 참여해서 불도 붙이고 음식도 만들어 먹는 일은 좋은 체험인 것 같다. 한국에서는 위험하다고 손도 대지 못하게 할 불과 칼을 직접 다루게 하는 것은 학생들이 다쳐도 상관없다는 뜻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신뢰감을 보여줌으로써 자립심을 키우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숲도 마찬가지다. 도심에 이런 숲이 남아 있는 것이 신기했다. 한국 같았으면 주택가 한가운데에 있는 이런 숲 따위는 싹 밀어버리고 높은 건물을 지었을지도 모른다. 스트레스 받을 때 상쾌한 곳에 와서 뒹굴다 가면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을 텐데…… ..  (35쪽)


 숲 하나 없이 아파트만 가득한 우리 나라입니다. 서울도 부산도 제주도 춘천도 대전도 익산도 매한가지입니다. 손바닥 만한 나무그늘 있는 쉼터란 없고, 길을 거닐다가 다리쉼을 할 걸상 하나 마련되어 있지 않기로는 어디를 가든 똑같습니다. 아이들은 몸으로 자연을 느낄 수 없습니다. 자연을 다루는 책은 많아 책을 펼치면 자연이 넘실넘실 한다지만, 초등학교를 마치고 나면 마땅한 청소년책이 없어서 더는 자연을 느끼지도 문학을 느끼지도 따스한 사람품을 느끼지도 못합니다. 이렇게 중고등학생 때를 거치고 대학교를 다녀 회사원이 된다면, 먼 뒷날 제 어버이와 같이 아이를 낳아 기를 때에는 어찌 될까요. 제 어버이가 했듯 책으로만 자연을 보여주거나 가르치되 초등학교 마치면 ‘이제부터는 대학입시만 바라봐!’ 하며 윽박지를는지요. ‘대학, 이 가운데 일류대학만 가면 그만이야!’ 하고 가르칠는지요. 세상 수많은 일거리와 놀이감을 아이 스스로 받아들이고 즐기며 누릴 수 있게 하지 못하면서, 재미없고 따분한 사람이 되도록 할는지요.


.. [하영] 한국 경찰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는지요?
[스웨덴 경찰 카레] 솔직히 말하면 잘 모릅니다. 당신이 말한 대로 길거리에서 언제든지 경찰들을 볼 수 있다면, 그런 멋진 모습을 꼭 한 번 보고 싶기는 합니다. 각 국가의 정책에 따라 다를 것이고, 그 나라의 범죄율이나 기타 많은 기준들이 있겠지만, 원칙적으로 경찰이 쉽게 눈에 띄는 것을 꼭 좋다고만 말하기는 어렵군요. 스웨덴 사람이 한국에 가면 자칫 범죄가 많은 국가라고 오해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 스웨덴의 방식이 다 옳다고 할 수는 없게씨만, 원칙적으로는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는 있으나, 경찰이 눈에 뜨이지 않아서 느끼는 불안감보다 내 주변에 항상 경찰들이 보이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더 클 수도 있을 겁니다.
[하영] 만약 한국 경찰에서 초청하면 한국 경찰을 보고 싶은지요?
[스웨덴 경찰 카레] 당연히 그렇습니다. 당신이 말한 것처럼 정말 경찰에 전화를 걸면 어김없이 3분 이내에 도착하는지 꼭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웃음) 내가 가 보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지만, 한국 경찰을 스웨덴으로 초청하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군요. 한국 경찰들이 볼 때 스웨덴 경찰들은 전부 일을 하지 않는 것처럼 비칠 수 있으니까요. (웃음) ..  (241쪽)



 어쩌면 하영이는 어버이를 잘 만나서, 한국땅 얄궂은 제도권 교육에서 벗어나면서 아름답고 멋진 스웨덴 교육을 받는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스웨덴 교육이 훌륭하고 아이들 삶을 널리 헤아려 준다고 하더라도, 이런 교육을 받아먹는 아이 마음이 넉넉하면서 살가워야 고이 받아먹을 수 있습니다. 빈가슴한테는 제도권 교육이나 스웨덴 교육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열린가슴한테는 고단한 제도권 교육에서도 빛줄기를 찾으면서 살 길을 열고 이웃과 동무를 찾을 테지만, 닫힌가슴한테는 스웨덴 학교에서도 혼자살기만 하면서 엇나가기 마련입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 우리 제도권 교육이 어떤 모습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앞으로도 이 모양 이 꼴로 우리 아이들을 억누르거나 괴롭혀야 하는지를 느껴야 합니다. 언제까지 ‘대학바라기’만 하면서 아이들을 들볶으려 하는지 되새겨야 합니다. 아이들이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지 생각해야 하고, 아이들이 무슨 일을 하기를 바라는지 곱씹어야 하며, 아이들이 어떤 보람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가 되뇌어야 합니다. 하루하루 쑥쑥 크는 이 땅 모든 아이들을 생각하며, 우리 아이를 비롯해 이웃 아이들이 아름답게 자랄 수 있는 배움터 삶터 쉼터 나눔터가 되도록 우리 터전을 가꾸어야 합니다.

 하영이가 스웨덴살이를 글로 적어 띄워 놓는 블로그 이름은 “꿈만 꿔도 괜찮아(http://blog.hani.co.kr/leehayoung)”입니다. 이 나라와 이웃나라 아이들 모두 “꿈만 꿔도 괜찮”을 수 있어야 합니다. (4341.12.31.물.ㅎㄲㅅㄱ)

http://blog.hani.co.kr/leehayoung (이하영 블로그 : 꿈만 꿔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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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슬기 한 봉지 낮은산 너른들 8
강무지 지음, 이승민 그림 / 낮은산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우리 둘레 ‘낮은자리’ 돌아보는 고운 눈길을
 [잠깐 읽기 21] 강무지, 《다슬기 한 봉지》



- 책이름 : 다슬기 한 봉지
- 글쓴이 : 강무지
- 그린이 : 이승민
- 펴낸곳 : 낮은산 (2008.11.20.)
- 책값 : 8800원



 (1) 입벙긋 삶과 꾀꼬리 삶


.. 한국사람들이 집 없는 고양이를 ‘도둑고양이’라고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또뚜야는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집 없는 동물에게 먹을 것을 좀 나눠 주면 도둑질을 안 할 텐데, 이름까지 아예 ‘도둑’이라고 붙여 버리면 어떡하나. 진짜 도둑밖에 더 될까. 또뚜야와 쪼쪼는 이 도둑고양이들에게 ‘바람’과 ‘별’이라는 뜻을 가진 미얀마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리고 가끔 놀러 오는 고양이들에게 멸치나 밥을 조금 나눠 주었다. 비가 많이 올 때는 고양이들이 또뚜야네 부엌에서 자고 가기도 했다 ..  (150쪽)


 우리 세 식구가 옆지기 부모님이 살고 있는 일산까지 가자면 몇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째, 자전거 뒤에 짐수레를 달고 달려가기. 둘째, 자가용을 몰고 고속도로와 외곽도로 타고 가기. 셋째, 택시 타고 가기. 넷째, 전철 타고 종로3가까지 간 다음 3호선으로 갈아타고 간 다음 버스를 타고 들어가기. 다섯째, 전철로 부평역까지 가서 시외버스 타고 들어가기.

 아직 아기가 어려서 첫째는 할 수 없고, 둘째부터 다섯째까지 있는데, 우리는 자가용을 몰 생각이 없습니다. 이리하여 셋째와 넷째와 다섯째가 남는데, 셋째는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웬만하면 할 수 없습니다. 거의 넷째만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다섯째, 시외버스 타기를 해 봅니다.

 부평역까지는 널널합니다. 인천 맨 왼쪽에서 타는 전철이니 사람도 적고 조용하고 한갓집니다. 그러나 부평역에서 내려 시외버스 타는 데까지 지하상가를 빠져나가는 길은 몹시 어수선합니다. 나가는 문구멍이 제대로 적혀 있지 않을 뿐더러, 숫자가 잘못 적혀 있기도 해서, 여러 번 왔음에도 그만 길을 잃고 헤맵니다. 가게마다 번들번들 내거는 광고판이며 간판에 가려서, 또 옆을 스치는 수많은 사람들에 가려서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짚기 어렵습니다. 그저 어림으로 느낍니다. 땅밑길을 걷는 우리들이 땅위로 치면 어디쯤일까를 헤아려 볼 뿐입니다.

 아기 기저귀와 옷가지를 바리바리 챙겨든데다가 일산 부모님한테 드릴 왕만두가 가득한 무거운 가방을 지고 들고 아기 안고 하면서 땀을 뻘뻘 흘린 끝에 소방서 앞으로 나오는 문구멍을 겨우 찾습니다. 밖으로 나와도 어수선함은 그리 달라지지 않습니다. 길섶에 차를 대놓아도 자리가 모자라서 사람 걷는 길로 차를 끌고 올라와서 세우는 사람들은 우리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걱정없이 걷지 못하게 막고, 가게마다 길에 내놓은 물건이며 온통 어지럽습니다. 그러나 이런 어수선함은 부평역에만 있지 않아요. 인천 어디를 가고 서울 어디를 가며 전국 어디에서나 다르지 않습니다.

 시외버스를 코앞에서 놓치는 바람에 40분 가까이 힘겹게 서서 기다립니다. 버스가 오기까지 서 있는 동안 담배 냄새와 화장품 냄새와 지난밤 술 체한 이들 게워낸 메스꺼운 냄새에 어질어질합니다. 버스가 들어오니 서로 먼저 타려고 밀어대는 사람들 때문에 아기가 다치지 않게 안기 힘겹습니다. 젊거나 늙거나 아기 머리께를 밀치면서 먼저 타려는 사람들이 무섭습니다. 이 사람들 누구한테나 아기였을 때가 있었을 텐데, 모두들 까맣게 잊으셨는지 궁금합니다.


.. “오빠야, 나는 커서도 우리 마을을 지킬 거다. 아나?” “아아……. 그 말이가……. 근데…… 삼촌 숙모도 아시나, 니 꿈을?” “아, 답답하네. 내 꿈을 내가 꾸는데 우리 엄마 아빠가 무슨 상관이고?” “…….” 기윤이는 판사, 대학교수, 외교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늘 들어왔던 터라, 솔직히 은정이의 소박한 꿈이 걱정이 되어 물었거든요. “미안, 은정아.” “뭐? 뭐가 미안하다고?” “아아니, 그냥 …….” “고속철도가 우리 마을 한가운데를 지나가면 어떻게 된다는 거를 어른들이 진작 몰랐나 말이다. 잘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봤어야지. 보상금만 먼저 받으면 어떡하노. 뚝방 철도가 마을을 와넌히 망친다는 걸 알고 진작에 반대를 했어야지, 바보같이 이기 뭐꼬!” ..  (30∼32쪽)


 기차에서는 잘 자던 아기인데, 버스에서는 좀처럼 잠들지 못하고 뿌루퉁해 있습니다. 뭔가 속이 안 좋다는 얼굴입니다. 덜컹덜컹 흔들흔들 하기 때문인지, 버스라는 탈거리가 영 안 맞다는 뜻인지. 하긴. 버스는 우리처럼 갓난쟁이를 안고 타려는 사람한테는 너무 좁습니다. 가방 둘 자리가 마땅하지 않아서, 다리를 제대로 못 뻗고 짐을 한손으로 누르는 가운데 아기를 안고 있어야 하고, 기저귀 갈아 줄 때에도 진땀을 흘리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창밖에 볼 만한 모습이 없습니다. 어디나 똑같고 언제나 한결같은 가게와 아파트와 자동차 물결만 눈에 들어옵니다. 때때로 공장이 나오고 드문드문 고가도로와 지하도로가 나와서 새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지만, 인천부터 일산까지 잿빛 시멘트 건물만 줄줄줄 이어져 있습니다. 높낮이가 조금 다르고, 바깥에 바른 페인트 빛이 살짝 다르며, 간판 모양과 글씨가 얼추 다를 뿐입니다.

 문득 몹시 고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눈이 아픕니다. 시외버스를 처음으로 타는 우리 아기는 창밖으로 펼쳐지는 모습을 보면서 무엇을 헤아리게 될는지, 어떤 모습이 두 눈을 거쳐 가슴에 아로새기게 될는지 궁금합니다. 아니, 걱정스럽습니다. 오로지 돈을 치르고 사서 써야 하는 물건만 늘어서 있는 도심지 거리를 지나야 하는 아기한테는, 돈하고는 아랑곳하지 않고도 싱싱하고 푸른 느낌을 선물받을 수 있는 시골길을 달릴 때하고 사뭇 다를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 방앗간 할머니는 이제 물에서 나와 집으로 걸음을 옮겼어. 산에서는 소쩍새가 소쩍소쩍 먼 데서 우는 것도 같고 가까이서 우는 것도 같애. “모 심으라고 소쩍새 운다.” 아무리 먼 산에서 험한 소리가 나도 소쩍새 소리는 분명하게 가려들을 수 있지. 평생을 들어왔던 소리인데 그렇고말고 … 다이너마이트 소리. 멀쩡한 산속으로 자동차가 들락날락할 정도로 큰 구멍을 뚫어야 하니 얼마나 많이 폭파를 시켜야겠어. 사람 사는 집도 통째 흔들리는 판에 말 못하는 짐승이 얼마나 놀랐겠냐고. 에미가 진저리를 치는데 배속에 있는 새끼는 말해 무얼 해 …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작고 조용한 마을은 일 년 열두 달 공사에 시달리고 있어 ..  (78, 94, 96쪽)


 그러고 보니, 전철이며 버스며 길이며 부대끼는 사람들 매무새가 ‘둘레 사람을 아랑곳하지 않는’ 까닭을 알 만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마음으로 만나고 어우러지는 도시 삶터가 아니라, 오로지 돈과 돈으로만 얼키고설킨 도시 삶터입니다. 마음을 고즈넉하게 쉴 자리는 없고, 바쁘게 돌아치기만 합니다. 노약자보호석이란, 우리들이 스스로 우러나와 나이든 이와 힘여린 이를 지켜 주지 못하니 마련된 자리입니다. 이런 자리를 따로 마련해 놓지 않더라도 우리 둘레 어렵고 고달픈 사람을 돕거나 힘을 나누려는 마음을 우리 스스로 품지 않아,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 막나가고 맙니다.

 아니, 노약자석, 이제는 이름이 ‘노약자 장애인 영유아동반자 보호석’이라는 기나긴 이름이 붙은 자리를 따로 만들었으나, 이렇게 따로 만들어 놓아도 ‘노약자와 장애인과 영유아와 영유아 보호자’를 살가이 헤아리지 않습니다. 사회평등과 남녀평등과 노동평등이라는 말은 외칠 줄 알지만, 우리 스스로 참다이 평등으로 걸어가려 하지 않습니다. 이웃보다 더 많이 벌려 하고, 이웃보다 더 빠른 차를 가지려 하며, 이웃보다 더 큰 집에서 살려고 합니다.


.. 외할머니는 왜 엄마가 새아빠를 만나 행복하게 산다는 생각은 못하고 새아빠가 가난한 것만 생각할까 … 따지고 보면 오늘 일도 외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새아빠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런데 왜 어른들 때문에 내가 피해를 봐야 하지? 왜 내가 지금 친구들을 못 만나고 있지? 억울하다. 정말 억울해서 미칠 것 같았다. 왜? 왜 나는 친구들 앞에서 행복해지면 안 되나? … “할머니, 저는요, 화가가 꿈이에요. 꼭 되고 말 거예요.” 힘이라고는 하나 없어 보이는 할머니께 왜 이런 말을 했는지 나도 모르겠다 ..  (118, 124, 128쪽)


 초중고등학교 모두 도덕을 가르치지만 우리들 마음에는 도덕이 자라지 못합니다. 초중고등학교 어디에서도 ‘환경을 더럽히라’가 아닌 ‘환경을 사랑하고 지키라’고 가르치지만 우리들 마음자리에는 환경사랑이 깃들지 않습니다. ‘책에는 길이 있다’는 뻔한 말이 아니더라도 책을 읽자는 움직임이 드높지만, 정작 어른이고 아이고 스스로 책을 가까이하거나 즐기지 않습니다. 전쟁이 끔찍하다고는 생각하여도 아이들한테 전쟁무기인 총과 칼을 사 줄 뿐더러, 소비 문명을 멈추지 않습니다. 대학입시가 말썽이라 하면서 제 아이들을 대학교육에 빠지지 않도록 한다거나 스스로 졸업장을 찢어버리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입벙긋’ 노래꾼마냥, 우리들 삶도 ‘입벙긋’입니다. ‘입벙긋’ 노래꾼은 노래꾼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으나, 우리 스스로 ‘입벙긋’이 아닌 삶으로 바꾸려고 하는 매무새가 보이지 않습니다. 꾀꼬리 노래꾼을 바란다면,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꾀꼬리’ 삶으로 바꿀 수 있어야지요. 입벙긋 노래꾼이 우스꽝스럽고 꾀꼬리 노래꾼이 사랑스럽다면, 우리 삶이 입벙긋에 머물지 않도록 다그치면서 꾀꼬리 삶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갈고닦아야지요. 우리 나름대로 자그마한 곳부터 새로워지는 매무새가 있어야 하고, 우리 깜냥껏 가까운 자리부터 북돋우는 손길이 있어야지요. 모든 사회비판은 자기뉘우침과 자기거듭남이 함께하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 아빠는 엄연히 한국 국적을 가졌는데도 회사 사장님들은 아빠를 한국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길수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 직장을 구하다 구하다 못해 반찬 배달통을 든다는 것을요 … 사람들은 길수 가족이 잊어버릴 만하면 꼭 인도니 인도사람이니 들먹이곤 했습니다. 길수 친구도 그중에 하나였던 거죠. 하지만 아빠에게 친구와 싸운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은 백 번 잘한 일 같습니다 ..  (139쪽)


 (2) 남달라 돋보이지만, 아쉬운 습작에 머문 《다슬기 한 봉지》


 어린이책 《다슬기 한 봉지》를 읽습니다. 웬만한 어린이문학이 도시, 이 가운데 서울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에 머물고 있음을 돌아보면, 《다슬기 한 봉지》처럼 변두리 도시 또는 시골마을 아이들이 주인공이 되는 작품은 퍽 돋보입니다. 글감만 잘 고른다고 하여 훌륭한 문학이 되지 않지만, 글감조차 제대로 고르지 못하는 겉치레 문학이 많음을 헤아린다면, 《다슬기 한 봉지》는 아이들한테 즐겁게 읽힐 만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좋은 글감과 푸근하게 펼치는 이야기 사이사이, 좀더 무르익지 못한 글매무새는 아쉽습니다. 우리 세상에서 뒤나 옆으로 밀려나 있는 사람들을 좀더 찬찬히 들여다보는 눈매는 반갑지만, ‘뒤로 밀린 사람들 삶’을 살피는 눈매 못지않게, ‘뒤로 밀렸건 앞에 나와 있건’ 이 사람들 삶을 좀더 속깊이 파고드는 눈썰미로 거듭나야 하지 않느냐 싶어요.


.. 사실 기윤이는 공사도 싫지만 어른들의 시위도 싫습니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시끄러운 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싫은 겁니다 ..  (17쪽)


 모든 어린이 마음을 담아낼 수 없고, 모든 어린이 마음을 구태여 담아내야 하지는 않을 테지만, 어떤 어린이 마음을 담아내어,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한테 이야기 한 줌을 나누려고 하는지 되새길 노릇입니다.

 가벼운 수다가 문학이 될 수 없고, 섣부른 눈길이 어린이문학이란 이름을 걸칠 수 없습니다. 어린이문학이란 어린이만 읽거나 즐기는 문학이 아니라, 어른이 빚어내어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두루 즐기는 문학입니다. 어른문학은 어른 스스로 조용히 읽기만 하고 그치기 일쑤이지만, 어린이문학은 어린이 스스로 또는 어른이 나서서 입으로 읽어서 들려주기도 하는 문학입니다. 입으로 읊는다고 할 때에 어떤 느낌일지, 입으로 읊으면서 스스럼없이 주고받을 이야기란 어떤 짜임새일지를 한 번 더 돌아보아야 합니다. 《다슬기 한 봉지》를 낸 글쓴이는, 처음 내놓았던 작품을 손질해서 새로 묶었다고 하는데, 모든 글이란 나중에 손질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이지만, 앞으로 언제가 되더라도 손질할 생각이 들지 않도록 여미어 내는 이야기가 되도록 한 번 더 추스를 수 있어야 합니다.


 ┌ 이것만 끝냈는데도 시계를 보니 다섯 시 오 분 전이었다
 │→ 이 일만 끝냈는데도 시계를 보니 네 시 오십오 분이었다
 ├ 어쨌든 나는 자동적으로 외할머니의 젖가슴을 찾아 덥석 안겼다
 │→ 어쨌든 나는 저절로 외할머니 젖가슴을 찾아 덥석 안겼다
 ├ 테스가 십사 년 전 처음 한국에 왔을 때 / 일 년 열두 달
 │→ 테스가 열네 해 앞서 처음 한국에 왔을 때 / 한 해 열두 달
 ├ 나의 자랑이었고, 나의 희망이었습니다
 │→ 내 자랑이었고, 내 꿈이었습니다
 ├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습니다
 │→ 부지런히 걸었습니다
 ├ 마을버스도 학원차도 왜 오지 않는 걸까요
 │→ 마을버스도 학원차도 왜 오지 않을까요
 ├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확실하다. 그렇다면 혹시 ……
 │→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틀림없다. 그렇다면 설마 ……
 ├ 최악의 경우였다. 하지만 할머니의 고집을 꺾고 자시고 할
 └→ 너무 끔찍했다. 그렇지만 할머니 고집을 꺾고 자시고 할



 작품에서 글월 여덟 군데를 손질해 봅니다. 군더더기나 엉클어짐이 거의 보이지 않는 《다슬기 한 봉지》이지만, 문학하는 사람으로서, 또 아이들 앞에서 글로 이야기를 나누어 주는 사람으로서, 제대로 여미지 못한 대목이 곧잘 눈에 뜨입니다. 어린이문학은 아이들이 받아먹는 마음밥임을 다시금 되새겨야 합니다. 글 한 줄 낱말 하나까지도 꼼꼼히 살피고 빈틈없이 다독여야 합니다. 재미있고 아름답고 신나고 따뜻하고 멋들어지고 웃음과 눈물을 함께 쏟아낼 수 있기도 해야 하면서, 뿌듯함과 새로움을 함께 선사해야 합니다.


.. 필리핀에서는 친절하게 연인을 도와주었던 남편이 결혼 뒤에는 설거지, 빨래 같은 집안일을 나 몰라라 했습니다. 한국 남자들은 부엌일을 잘 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지만, 테스는 남편의 사랑이 결혼 뒤 식은 것만 같아 혼자 울기도 했습니다.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는 희망이 하루아침에 두려움으로 변해 버렸던 겁니다 ..  (183쪽)


 한 가지 아쉬움을 더 이야기해 본다면, 책에 들어간 그림입니다. 그린이가 넣은 그림은 꼭 ‘사진을 보고 그렸다’는 느낌이 짙습니다. 글이란 자기가 나타내려고 하는 이야기를 눈을 감고도 눈앞에 보고 있는 듯 써낼 수 있어야 하지만, 그림 또한 자기가 보여주고픈 모습을 눈을 감고도 코앞에 두고 있는 듯 그릴 수 있어야 합니다. 지난날 한석봉 어머님이 자기 아이한테 불을 끈 채 글씨를 쓰도록 하면서 당신은 어두운 곳에서 떡을 가지런히 썰었다는 옛이야기는(참인지 거짓인지 모르지만), 그만큼 모든 일이 손에 익고 몸에 배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어린이책 《다슬기 한 봉지》에서 글이며 그림이며 참 훌륭하게 선보이려고 애는 많이 썼는데, 퍽 서툴면서 아쉬운 대목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왜 글다운 글로, 그림다운 그림으로 어린이책 하나를 마무리짓지 못했을까요. 왜 우리 둘레 살가운 이야기들에서 이야기감을 얻어냈으면서도 살가움을 푸근히 빚어내지 못했을까요.

 사진을 보고 그린 듯한 그림으로 그리자면 그냥 사진을 넣을 때가 낫습니다. 아니면 정밀그림을 그리든지요. 사진 냄새가 나는 그림이나, 그림 냄새가 나는 사진이나, 둘 모두 그림도 아니요 사진도 아닙니다.

 설익은 풋능금은 풋능금대로 맛있고, 푸른포도도 푸른포도대로 맛있습니다. 맛이 다릅니다. 다른 맛은 틀리거나 나쁜 맛이 아니라 ‘남다른’ 맛입니다. 그러나, 남다르다고 할 만한 맛이 모두 ‘좋은’ 맛이거나 ‘훌륭한’ 맛이 될 수 없음을 헤아려야 한다고 느낍니다. 남다름을 찾는 일은 만만하지 않을 뿐더러 힘들지만 무척 보람이 있기 때문에 애써 나설 만합니다. 그러나, 남다름에서만 머무는 남다름이 아니라, 아름다움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남다름이 되도록 더욱더 자기 이야기를 되돌아보고 우리 이웃과 어깨동무하며 내 삶터에 단단히 뿌리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지 않고서 섣불리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습작 글을 내놓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다른 사람들 보기에 부끄럽기 앞서, 글쓰는 사람 스스로 얼굴을 부끄럽게 하는 셈입니다. (4341.12.17.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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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양이 방석 사계절 아동문고 71
박효미 지음, 오승민 그림 / 사계절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할 말’ 없는 어린이문학은 문학이 아니다
 [잠깐 읽기 20] 박효미, 《길고양이 방석》



- 책이름 : 길고양이 방석
- 글쓴이 : 박효미
- 그린이 : 오승민
- 펴낸곳 : 사계절 (2008.10.9.)
- 책값 : 8800원



 (1) 믿을 수 없는 사람과 삶터와


 목포에 사는 형이 동생인 저한테 새 셈틀 하나와 외장하드 하나를 선물해 주었습니다. 셈틀이 먼저 오고 외장하드가 나중에 왔는데, 외장하드를 가지고 와 주는 택배기사는 ‘그제 배송완료’로 올려놓고는 오늘 낮 느즈막하게 가지고 왔습니다. 뻔뻔하게 ‘배송완료’라 해 놓고는 전화연락조차 되지 않던 그 택배기사는 물건을 건넨 뒤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저기요, 바쁘시겠지만 ……” 하고는 말문을 열고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따졌습니다. “바쁘면 늦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제 물건을 갖다 주었다고 처리를 해 놓고 아무런 연락이 없이 이틀이나 보낼 수 있습니까?”


.. 엄마가 얼른 고개를 들고 할머니를 쏘아보았다. 할머니가 하던 말을 뚝 멈췄다. “그건 그렇다 치고, 애 다치면 어떡할 건데? 몸도 안 좋은 애를. 그런 생각은 해 봤니?” “어머니, 다 생각했어요. 지명이한테 지금 가장 필요한 게 뭔지. 친구들이에요. 놀 수 있는 친구들. 지금 행복하게 놀 친구가 필요하다고요. 지금 행복이 중요하다고요. 잘 다니고 있는 중이에요.” 퉁명스레 내뱉은 엄마 말 중 하나가 느닷없이 내 머리를 툭 쳤다. 지금 행복한 게 중요하다, 이게 무슨 말이지? … “지은아, 들어가 너 할 일 해.” “응, 근데 사회 숙제 있어. 세계 문화 유산 사진 찾아오래.” “알았어. 넌 공부나 해. 엄마가 찾아 줄게. 어서 방으로.” 엄마 재촉에 쫓겨 내 방으로 들어왔다. 책상 위 시계 옆에 학습지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모든 게 순서대로다. 맨 위에 올려져 있는 건 영어 동화책. 영어 테이프는 벌써 엄마가 꽂아 놓았을 것이다. 그 밑에는 풀다 만 수학 문제집. 내가 풀어야 할 부분에 작은 쪽지가 붙어 있다 ..  (13∼15쪽)


 택배기사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줄줄 늘어놓습니다. 택배회사 본사로 전화까지 해 보니 몇 번이나 미안하다면서 곧바로 물건을 보낸다고 한 때에서도 이틀이나 지났는데, 정작 택배기사는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얼굴이고 몸짓이었습니다. 늦거나 말거나, 아니면 물건이 사이에 사라지거나 말거나 자기하고는 아랑곳할 일이 아닌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쓰겁게 웃으면서, “그래요? 그럼 가세요.” 하고는 그만두었습니다. 자기가 잘못했음에도 잘못했다는 말 한 마디 벙긋하고 꺼낼 줄 모르는 사람한테, 당신이 저지른 잘못을 깨닫게 하기란, 굳이 미안하다는 소리 한 마디 들으려고 하기란, 참 어리석다고 느껴졌습니다.


.. 문득 지명이한테는 허용되는데 나한테는 안 되는 일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명이는 친구랑 실컷 놀면서 집안을 난장판으로 어질러도 되고, 나는 놀기는커녕 친구를 부르는 것조차 해 본 적이 없다.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나 부족하다. 하긴, 우리 집에 오겠다는 애도 없다 ..  (34∼35쪽)


 지난달 어느 날, 인천에 있는 어느 인터넷신문에서 제 사진 두 장을 말없이 훔쳐서 쓴 데다가, 저작권표시마저 ‘자기 것’인 듯 고쳐서 쓴 일이 있었습니다. 지역 소식을 알아보려고 인터넷 글을 뒤적이다가 뜻밖에 보게 되었으니, 그날 어떤 기사 하나 찾으려고 부지런히 인터넷 글을 살피지 않았다면, 제 사진이 도둑질된 줄조차 모르고 지나쳤겠구나 싶습니다.

 너무 어이없는 나머지 화면만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다가는 내용증명 한 통을 썼습니다. 내용증명에는, 저작권자 허락 없이 사진을 쓴 일, 저작권자 표기를 지운 일, 사진에 적혀 있던 저작권자 이름을 지우면서 자료사진이라고 적어 넣으면서 소유권을 빼앗은 까닭을 물으면서, 이와 같은 말썽거리를 하루빨리 고치라고 썼습니다.


.. “야! 빨리 가. 나 학원 시간 늦는단 말이야.” “아이고, 성질하고는. 야, 생각해 봤냐? 학예회.” 나는 되도록 태연하게 말했다. “그날 시험 보러 가야 돼. 영재 시험.” “왜? 그런 걸 왜 신청했어?” “외고 가려면 그런 것도 해야 된대.” 이렇게 말해 놓고 나는 흠칫 놀랐다. 엄마처럼 말하고 있다. 내 안의 엄마가 지금 유리한테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엄마가 대신 시험 신청을 해 놓은 것처럼 말이다. 엄마가 내 속에 앉아 있다. 진짜 나는 뒷방으로 쫓겨나 버렸다 ..  (72쪽)


 그러나 제 사진을 도둑질한 분은 당신한테 무슨 잘못이 있느냐는 투였고, 자기 둘레에 아는 시민사회단체 사람한테 뜬소문을 퍼뜨려 ‘사진 도둑질을 받은 제가 외려 잘못한 사람인 듯’ 내몰리는 처지가 되게 했습니다.

 저는 제가 애써 찍은 사진이건 무엇이건 스스럼없이 거저로도 주고, 따로 제 돈을 더 들여서 종이로 뽑고 사진틀에도 끼워서 선물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된 밑바탕이 그릇된 채 도둑질을 한다면, 그리고 도둑질을 해서 쓰는 매체가 돈이 없거나 가난한 매체가 아닌 바에는, 제대로 된 값을 치르고 가져가서 쓰도록 합니다. 정 형편이 안 닿아서 당신들 스스로 사진을 찍을 수 없다면, 전화라도 한 통 해서 도와 달라고 할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 어떤 연락도 허락도 없이 몰래 쓰고는, 잘못한 줄도 깨닫지 못하니.


.. “뭘?” 수돗물 소리가 다시 뚝 그쳤다. 엄마가 날 보자 어깨가 움찔했다. “그냥 학예회 하고 싶어.” 엄마 표정이 일그러지다가 어색하게 펴졌다. “지은아, 그런 건 나중에 해도 돼.” 엄마가 내 어깨를 잡았다. 심장이 쿵 소리를 내고 눈에서는 덜컥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엄마가 내 등을 토닥토닥 다독거렸다. ‘그런 건 언제 해? 나중에? 미래에? 어른이 돼서?’ 내 마음이 소리쳤다. 엄마가 내 어깨를 감싸며 내 방으로 날 데리고 들어갔다. 내 몸은 순순히 엄마를 따라갔다 ..  (79쪽)


 아기 기저귀를 빨면서 생각합니다. 똥 눈 아기를 씻기면서 생각합니다. 잠깐 눈붙이며 쉴 틈 없이 쌀을 씻고 냄비에 안치면서 생각합니다. 옥상마당에 널어 말린 기저귀를 걷어서 개면서 생각하고, 까르르 웃는 아기를 품에 안고 노래를 부르면서 생각합니다. 오늘날 이 땅 우리들은 무엇을 바라보면서 살고 있는지를. 오늘날 이 땅 우리들은 어릴 적부터 어떤 사람 둘레에서 무엇을 바라보면서 무럭무럭 자랐는지를. 오늘날 이 땅 우리들은 초중고등학교뿐 아니라 어린이집이나 대학교에서 무엇을 보고 듣고 배웠는지를.

 숱한 사회살이와 회사살이를 거치면서 몸으로 받아들이는 지식이나 경험이란 무엇인가요. 숱한 사람을 부대끼면서 가슴으로 받아안는 슬기나 깜냥이란 무엇인가요.

 우리한테 이웃이란 누구이며 동무란 누구이고 식구란 누구인가요. 우리 둘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우리 둘레 사람들은 어떻게 어깨동무하며 지낼 수 있는가요.

 우리한테 소담스러운 일이란 무엇이고, 우리 스스로 아름다이 여길 대목이란 무엇이며, 우리가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자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어떻게 꾸리는 삶이 즐거운 삶이고, 어떻게 이루는 꿈이 신나는 꿈이며, 어떻게 쓰는 돈이 넉넉한 돈입니까.


.. 나는 아무 데로나 걸었다. 그런데 내가 아는 곳이라곤 학교 앞 커다란 상가 몇 개가 다였다. 상가를 지나 곧장 오르면 집이다. 나는 상가 언저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빵집을 기웃거리고, 상가 뒤쪽 문방구 앞도 얼씬거렸다. 시간이 좀 지나자 조금씩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엄마한테 엄청 맞을지도 모른다. 엄마가 펑펑 울지도 모른다.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것들이 날 괴롭혔다. 나는 결국 학교로 돌아갔다 ..  (140쪽)


 서로가 서로를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봐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돈으로 사귀는 사람이 아니고, 돈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며, 돈으로 맺어지는 터전이 아니면 좋겠습니다.

 깊은 사랑으로 함께하고, 너른 믿음으로 같이하며, 포근한 나눔으로 하나가 되면 좋겠습니다. 돈 많은 사람이 되는 일은 나쁘지 않으나, 많은 돈을 알뜰살뜰 이웃과 나눌 줄 아는 돈 많은 사람이 되어 주면 좋겠습니다. 똑똑한 사람이 되는 일은 나쁘지 않으나, 내 지식과 슬기를 이웃과 스스럼없이 나누는 똑똑이가 되어 주면 좋겠습니다. 이름난 사람이 되는 일은 나쁘지 않으나, 내 이름값이 나를 높이는 이름값이 아니라 내 이웃한테 따순 눈길을 건넬 수 있는 이름값이 되어 주면 좋겠습니다.


 (2) ‘할 말’ 없으면 문학이 아닐 텐데


 어린이책 《길고양이 방석》을 읽습니다. 책이름부터 남다르게 느껴지는 《길고양이 방석》은, 장애 있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겪는 아픔을 다루는 한편, 장애 있는 아이와 장애 없는 아이를 다르게 키우는 부모 모습을 다루고, 오로지 돈 많이 버는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일류대학교에 들어가자면 어릴 때부터 영재 교육을 받고 학습지와 학원 공부 말고는 눈길을 돌릴 까닭이 없다고 여기는 부모 모습을 다룹니다.

 주인공 가운데 한 아이(걷지 못하는 어린 동생)는 자기가 아끼는 방석 무늬를 보고 ‘길고양이 방석’이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책이름은 여기에서 따옵니다. 그런데, 책이름으로 쓰이는 ‘길고양이’와 얽힌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저냥 지나가는 생각 한 줌으로 책이름을 《길고양이 방석》이라고 붙일 수 있습니다만, ‘방석’도 아니요 ‘고양이 방석’도 아닌 ‘길고양이 방석’이라고 책이름을 붙이면서, 이와 얽히는 이야기는 한 번도 한 줄도 나오지 않으니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책이름을 이렇게 붙이는 바람에, 이 책을 읽을 아이들은 엉뚱한 데로만 생각이 뻗어나가지 않을까요? 뜻없이 붙인 책이름 때문에 ‘방석’이 말해 주거나 보이는 이야기를 감추어 버리지 않는가요? 방석을 깔지 않으면 다리가 아픈 장애 아이를, 방석 하나가 살가운 동무처럼 되어 있는 장애 아이를 바라보기보다는 ‘길고양이가 어쨌는데?’ 하는 생각을 자꾸자꾸 뻗치게 되지 않습니까? 그냥 꽃이라 하면 되는데 ‘은방울꽃’이나 ‘제비꽃’이라고 부러 예쁜 이름을 붙이면서, 예쁘게만 꾸미려는 마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궁금함은 책이름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길고양이 방석》을 펼쳐 읽는 내내, 글쓴이가 우리한테 참말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하나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문장 솜씨 괜찮고, 이야기 짜임새도 제법 탄탄합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입시공부에 치이고 밟히는 모습을 낱낱이 잘 그려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렇지만 알맹이는 없습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써서 아이들한테 읽히는 까닭을 드러내지 못하고, 이와 같은 이야기를 구태여 종이책으로 찍어서 읽혀야 하는 까닭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줄거리는, 장애 있는 동생이 갑작스레 병이 걸려 죽고 나서 저절로 ‘입시공부에서 살며시 풀려나게 되었다’는 맺음말로 끝납니다.


.. “원하는 걸 내가 다 했다고? 뭘? 공부? 학습지? 학원? 그게 내가 원하는 거라고?” “널 위해서잖아. 지은이 널 위해서.” “그건…… 엄마가 원하는 거잖아.” ..  (146쪽)


 어린이책이든 어른책이든, 문학이 ‘가르침(교훈)’이어야 할 까닭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가르침이 있으면 좋고 없어도 나쁘지 않습니다. 가르침만 지나치면 지루하고 가르침이 하나도 없으면 허전합니다. 가르침이란 교장 선생님 훈시 같은 말씀이 아닙니다. 살아가는 가운데 저절로 느껴지는 이야기입니다. 못 배웠다고 하는 분들이 온몸으로 부대끼는 삶자락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크게 배우는 일이 퍽 많은데, 크게 배우게 되는 까닭은 못 배웠다는 분들이 훌륭한 말씀을 들려주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분들 손바닥을 보고 얼굴을 보고 매무새를 보기 때문에 배웁니다. 환경사랑과 재활용을 따로 배우지 않았어도 할머니 할아버지 들이 추운 겨울날에 실장갑 하나만 낀 채, 또는 맨손으로 헌 상자나 신문지 들을 그러모아서 다문 몇 백 원 벌이를 하는 삶은, 수십 수백 권짜리 환경책과 견줄 수 없이 아름다운 환경 이야기이곤 합니다. 헌책방 일꾼이 버려진 책을 캐내고 손질하여 새롭게 빛나도록 애쓰는 일 또한, 그 어느 출판평론가가 책을 사랑한다고 길게 논문을 쓰는 일하고 견줄 수 없이 거룩한 책사랑이곤 합니다.

 그나저나, 어린이책 《길고양이 방석》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거듭 읽어도 느낌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줄거리는 있으나, 줄거리를 있게 하는 생각 한 줄기가 없습니다. 이야기 짜임새는 있으나, 이런 이야기를 짜넣어서 들려주는 느낌 한 가지가 없습니다. 솜씨 좋은 글매무새는 있으나, 솜씨 좋은 글매무새에 담겨 있는 넋과 얼을 찾기 어렵습니다.


.. 둘레에 있던 아이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선생님이 조용히 말했다. “얘들아, 왜 그러니?” “아줌마, 얘 못 걷지요? 몇 살이에요?” 순간 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머리속에 열기가 가득 찼다. 선생님이 대답하기도 전에 딴 아이가 또 물었다. “왜 안고 다녀요? 두 살이에요?” “에계, 다리가 뭐 저래.” 내 키만 한 아이가 불쑥 나서서 소리쳤다. “야 야, 손도 그렇잖아. 얘 장애인이야.” 지명이가 움찔 움츠러들었다 ..  (121쪽)


 어쩌면 《길고양이 방석》을 쓰신 동화작가는 아직 습작을 쓰는 눈높이가 아니랴 싶습니다. 앞으로 부지런히 습작에 습작을 거듭하면서 차츰 나아질 수 있지 않으랴 싶습니다. 할 말은 없지만 쓸 글은 있는 지금 모습을 씻어내고, 할 말이 있도록 자기 삶을 붙잡고, 할 말이 알알이 여미어지도록 글 하나를 갈고닦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노릇이지만, 아이들이 앞으로 무엇을 배우고 어떤 동무들과 어울리면서 스스로 어떤 일과 놀이를 즐기는 사람으로 크면 좋은가 하는 깨우침이 모자란 가운데, 글쓴이 스스로 바로 지금 어떻게 자기 삶을 다스리면서 가꾸어 나가야 즐겁고 아름다운가를 제대로 못 깨우치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군데군데 톡톡 튀어나오는 ‘아이들이 놓인 끔찍한 형편’ 이야기는 코앞에 벌어지는 일처럼 살뜰히 그려내지만, 이런 ‘상황 보여주기’를 왜 하는지, ‘아이들이 이렇게 입시공부에 갇힌 까닭’은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 ‘아이들을 입시공부에 밀어넣는 부모’들은 어찌하여 이런 부모가 되고 말았는지를 못 헤아렸구나 싶어요.

 주말연속극도 문화이자 재미난 이야기일 수 있기에, 《길고양이 방석》 같은 어린이책도 문학이요 재미난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글쓴이나 출판사나, 또 어린이문학 평론을 하는 분들 스스로 《길고양이 방석》과 같은 작품을 ‘문학’이라고, 더욱이 ‘어린이문학’이라고 이름표를 붙여 준다면, 우리는 우리 아이들한테 너무도 부끄러운 짓을 하는 셈 아니랴 싶습니다. 쭉정이는 쭉정이이고 깜부기는 깜부기입니다. 쭉정이는 벼이삭일 수 없고 깜부기는 보리이삭일 수 없습니다.

 세부묘사와 줄거리 짜기와 문장수련은 훌륭히 하지만, 무엇을 보여주려는 세부묘사인지가 없고 무엇을 들려주려는 줄거리 짜기인지가 없으며 무슨 얘기를 나누고 싶은 문장수련인지 없는 아쉬움을 털어내는 문학을, 어린이문학을 기다려 봅니다. (4341.12.13.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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