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의 아이들 (반양장)
히로세 다카시 지음, 육후연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하나 133 ― ‘서울에 핵발전소를!’ 하고 외치는 마음
 : 히로세 다카시, 《체르노빌의 아이들》



- 책이름 : 체르노빌의 아이들
- 글 : 히로세 다카시
- 옮긴이 : 육후연
- 펴낸곳 : 프로메테우스출판사 (2006.9.6.)
- 책값 : 8000원



 (1) 어린이책을 안 읽는 어른


 아파트에 살지 않을 뿐더러 아파트에서 살 생각이 없이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습니다. 동네 골목을 다닌다든지 이웃 동네를 다닌다든지 하다 보면, 자그마한 집이 송두리째 내몰리거나 사라진 다음 아파트가 들어서는 모습을 봅니다. 큰 도시이든 작은 도시이든 온통 아파트밭이고, 깊이깊이 들어가는 시골이 아니고서야 아파트 자락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이 나라 터전이라고 느낍니다.

 사람들이 아파트에서 많이 살고 있으며, 새 아파트는 꾸준히 올라섭니다. 아파트마다 이름이 다르고, 새롭고 더 멋스럽다고 하는 이름이 나날이 늘어납니다. 환경운동 하는 분들이나 환경정책 내놓는 공무원이나 우리 말보다는 영어를 조금 더 좋아해서 ‘에코’라는 말마디가 나날이 퍼지고 있습니다. 이 ‘에코’를 어디까지 쓰고 있는가를 헤아려 보려고 누리그물에서 찾아보니 에코하우스, 에코샵, 에코뮤지엄, 에코프랜즈가 줄줄이 나옵니다. 그리고 ‘에코메트로’가 나옵니다. 지하철공사가 ‘지하철’이라는 낱말보다 ‘메트로’를 좋아하고 있기에 철도공사가 무슨 환경정책을 내놓았나 싶어 더 들어가 살펴봅니다.

 저야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라 몰랐다 할 테고, 아는 분들은 익히 알고 있었을 텐데, 에코메트로란 아파트 이름입니다. 그리고 이 에코메트로라는 아파트에는 ‘에코 영어마을’이 있고 ‘에코파크’가 있으며 ‘에코브릿지’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세상하고 담을 쌓으며 살아가는 내 하루하루는 아닐 텐데, 세상사람들이 쓰는 말이 너무 어렵습니다. 세상사람들이 즐기는 말이 더없이 골치아픕니다. 세상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는 말이 몹시 어지럽습니다. 우리는 수수하게 살아갈 수 없을 만큼 어떤 물결을 타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꾸밈없이 어깨동무하는 삶이란 머나먼 이야기요 까마득한 이야기라고 해야 할는지요.

 2000년대를 지나 2010년대를 맞이한 요즈음은 책마을에서 어린이책 목소리가 조금 더 높습니다. 2020년을 맞이하면 어린이책 목소리는 더욱 높아지리라 봅니다. 그런데, 어린이책 목소리가 높아지는 다른 한켠에서 보면 푸름이책 목소리는 높아지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생각하고 걱정하고 사랑한다는 분들이 ‘만들거나 읽히거나 쓰거나 옮기는’ 책은 ‘갓난아기부터 초등학교 6학년’ 사이에서 맴돕니다.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 사이에서 읽힐 푸름이책은 몇몇 사람들만 만들거나 읽히거나 쓰거나 옮깁니다. 더욱이, 제도권학교에 깃들지 않는 푸름이를 헤아리는 책은 훨씬 적습니다. 대학생이 되는 아이들한테 맞춘 책은 꽤 있으나, 대학생이 되지 않으며 세상과 부대끼는 젊은이한테 맞춘 책은 거의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어린이책 갈래를 놓고 동시와 동화, 또 판타지와 생활동화, 또 어린이글과 무엇무엇 들을 자잘하게 가르기도 하며, 이제는 웬만큼 눈높이를 다진 어린이문학 비평을 찾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세상 여느 흐름으로는 ‘어린이문학 비평’은 ‘어른문학 비평’에 견주어 낮은 자리이고, ‘어린이문학 이야기나 창작’은 ‘어른문학 이야기나 창작’과 견주어 눈높이가 낮은 듯 여깁니다. 소설책을 읽지 않는다고 소설책 내는 출판사 편집자나 영업자가 되지 말란 법이 없으나, 어린이책을 즐겨읽지 않으며 어린이책 내는 출판사 편집자와 영업자가 많습니다. 아이를 낳아 키우기까지 어린이책 하나 차근차근 살피는 어른이 드물고, 아이한테 어린이책을 읽히려고 할 때에도 스스로 먼저 깊이깊이 읽으면서 옳고 바르고 알맞고 즐겁고 따스하고 사랑스레 골라서 읽히는 어른은 더욱 드뭅니다. 따지고 보면, 초등학교 교사 가운데 ‘어린이책을 즐겁게 읽으며 넉넉히 안다’고 할 만한 분이 얼마나 있습니까. 중고등학교 교사 가운데 ‘청소년책을 신나게 읽으며 두루두루 안다’고 할 만한 분이 얼마나 있는지요.

 저부터 어린이일 때에 마땅한 어린이책을 읽지 못하고 컸던 일을 깨달은 나이는 스물세 살 무렵입니다. 어릴 적에 읽지 못한 좋은 어린이책을 읽자고 다짐한 나이는 스물너덧입니다. 아름답게 여민 어린이책을 스물을 훌쩍 넘긴 나이에 비로소 손에 쥐면서 ‘어린이책을 어린이일 때에 읽지 못하면 마음밭이 이렇게 가난할 수밖에 없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어린이일 때에 어린이책을 읽지 못했다면 어른이 된 다음에라도 읽어야 하는데, 어른이 되었으니 어린이책을 안 읽는다고 하면 ‘어른으로 살면서도 어른다움을 떠올리거나 추스르기 어렵겠구나’ 하고 느낍니다.

 어린이책은 어린이가 읽는 책입니다. 그리고 어린이책은 어린이부터 읽는 책입니다. 또한 어린이책은 어린이를 비롯한 누구나 읽는 책입니다. 어린이책은 누구보다도 ‘어린이 스스로 읽을 수 있도록’ 눈높이를 맞추면서 ‘어린이를 널리 아우르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즐거이 읽을 수 있게끔’ 일구어 낸 문화요 선물입니다.


 (2) 《체르노빌의 아이들》은 우리 아이들


 어린이책 《체르노빌의 아이들》을 읽었습니다. 2006년 가을에 나온 책을 책상맡에 오래오래 올려놓고 지내면서 야금야금 읽었습니다. 히로세 다카시 님이 ‘아줌마다운 힘’으로 원자력발전소 문제를 깊이 파헤치면서 부드럽고 포근하게 감싸안은 어린이문학인 《체르노빌의 아이들》은 환경사랑을 보여주는 훌륭한 작품입니다. 마땅히 가야 하는 바른 길을 마땅히 안 가면서 마땅하게도 깨닫지 못하는 우리들한테 마땅한 사랑과 믿음이란 무엇이고, 마땅한 삶과 사람이란 어떠한가를 따스하고 넉넉하게 보여주는 좋은 작품입니다.

 그런데 번역이 너무 얄궂고 엉성해서, 이 반갑고 좋은 책을 오래오래 묵혀 두었습니다. 아니, 처음 반 해 동안은 엉성한 번역을 한 줄 한 줄 모조리 고쳐쓰면서 읽었는데, 이렇게 반 해 동안 더디더디 글다듬기를 하며 읽자니 힘들어서 두 손을 들었습니다. 2004년에 우리 말로 나온 《잃어버린 숲》(레이첼 카슨)을 읽을 때에도 너무 어설픈 번역 때문에 도무지 책을 읽을 수 없어 한 줄 한 줄 글다듬기를 하며 읽은 적이 있습니다.

 번역이란 나라밖 말을 잘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우리 나라 번역가들은 나라밖 말은 훌륭히 잘할는지 몰라도 우리 말은 너무도 못합니다. 나라밖 문화와 삶터와 이야기도 깊고 넓게 헤아리는 한편, 우리 문화와 삶터와 이야기를 깊고 넓게 헤아려야 하는데, 슬기롭고 따스하게 어우르면서 번역길을 가는 분은 생각 밖으로 많지 않습니다. 더욱이 《체르노빌의 아이들》은 어른책이 아닌 어린이책입니다. 《잃어버린 숲》이야 처음부터 어른책으로 나왔기에, 웬만한 어른들은 어설픈 번역을 읽으면서도 글쓴이 마음을 어느 만큼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설픈 번역으로 어린이책을 옮겨내면 아이들은 어찌해야 하지요? 아이들 눈높이에 걸맞지 않을 뿐 아니라, 아이들 마음밭을 일그러뜨릴 걱정이 있는 낱말과 말투로 번역을 하면 어찌하지요? 쉽고 깨끗한 말을 골라서 쓴다는 테두리로 되는 번역이 아닙니다. 쉽고 깨끗한 말이란 밑바탕입니다. 알맞고 올바르며 슬기로운 말을 찾아야 합니다. 창작을 하는 분들이 글 한 줄을 적바림하면서 들인 땀과 품과 마음과 사랑을, 번역을 하는 분들 또한 한 줄 두 줄 옮겨내면서 땀과 품과 마음과 사랑을 바쳐야 합니다. 이는 책느낌글을 쓰는 비평가한테도 마찬가지인 대목입니다. 창작하는 사람 마음이 되어 번역을 하고, 창작하는 사람 매무새 그대로 비평을 해야 합니다.

 《체르노빌의 아이들》을 쓴 히로세 다카시 님이 ‘아줌마다운 힘’으로 이 책을 써냈다고 적었습니다만, ‘아줌마다운 힘’이란 ‘아이 엄마로서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 보여주는 힘’입니다. 오늘날 우리 터전에서 ‘아줌마’란 말마디는 얄궂거나 나쁜 쪽으로 흔히 쓰이지만, ‘아줌마다운’ 삶이란 더없이 아름답고 싱그러운 삶입니다. ‘어머니다운’ 삶 또한 매한가지입니다. 목숨 하나 보듬으며 지낸 삶에다가 이 목숨 하나를 기나긴 나날에 걸쳐 키워내는 보람이 어머니 삶입니다. 아줌마 삶은 할머니 삶으로 이어지기 앞서 아이 스스로 무럭무럭 크면서 또다른 어른이 되면서 새로 아이를 낳아 키우도록 이끌어 낸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힘이란 바로 목숨을 아끼는 삶이고, 목숨을 사랑하는 삶이며, 목숨을 지키는 삶입니다.

 이오덕 선생님처럼 ‘우리 글 바로쓰기’를 알뜰살뜰 잘 이루어내야만 좋은 문학이나 창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글 바로쓰기’란 글을 쓰거나 말을 하는 사람한테 밑바탕입니다. 때로는 잘못 쓰거나 아직 잘 몰라서 어설피 쓰는 대목이 있을 수 있을 터이나, 말이 말다웁도록 가다듬고 글이 글다웁도록 보듬는 일이란 창작하거나 번역하는 사람한테는 밑바탕입니다. 이 밑바탕이 되면서 작품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밑바탕으로 히로세 다카시라고 하는 아줌마 한 사람이 어떤 넋과 몸가짐으로 《체르노빌의 아이들》을 이 땅 아이들하고 어른들한테 선물로 베풀어 놓았는가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는 분들은 익히 알 텐데, 원자력발전소이든 화력발전소이든 전기를 만들어 내면서 환경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우리가 쓰는 전기를 얻어내자면 그만큼 환경을 망가뜨려야 합니다. 책 하나를 만들 때에도 나무를 베어야 하는데, 나무베기로 그치지 않고 물과 기름을 많이 써야 하며, 벤 나무를 실어나르고 종이공장을 돌리고 또 무엇무엇을 하는 데에 드는 자원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 모두를 하는 공장을 돌리자면 마땅하게도 전기를 써야 합니다. 다 만든 책은 책방에 놓이기까지 짐차에 실려 가는데, 짐차를 만들 때에도 적잖은 자원과 전기를 썼겠지요. 책방에 놓인 다음에도 전깃불을 켜 놓고 우리들을 기다리고요.

 소련 체르노빌에서 원자력발전소가 터졌고, 미국 드리마일에서 원자력발전소가 말썽을 일으켰습니다. 숫자로 치면 몇 안 된다 할 텐데, 몇 안 되는 원자력발전소인데 이 몇 가지만으로도 온누리 사람들이 벌벌 떱니다. 화력발전소가 터졌을 때에도 벌벌 떨 테고, 태안 앞바다에 기름이 흘러넘쳤어도 소름이 돋지만, 원자력발전소 하나 터지거나 말썽나는 일에 견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체르노빌의 아이들》 맨 끝쪽에 글쓴이가 밝히듯, “도쿄에 핵발전소를!”이거나 “뉴욕에 핵발전소를!”이거나 “서울에 핵발전소를!”이어야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 전기를 가장 많이 쓰는 데가 어디이겠습니까. 바로 서울입니다. 서울에 사는 부자들만 전기를 쓸까요? 서울에 사는 가난뱅이들은 전기 없이 살 수 있을까요?

 발전소를 지어야 하면 어떠한 발전소를 지어야 하는지부터, 전기를 쓰며 살아가는 우리 살림살이는 어떻게 가누어야 하는지를 곰곰이 돌아보면서, 우리 스스로 우리 터전인 우리 자그마한 동네부터 ‘지금 이대로 꾸리는 삶이 얼마나 아름답거나 좋은가?’를 되새기자고 하는 이야기책 《체르노빌의 아이들》입니다. 아무런 주의주장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넌지시 푸근한 이야기로 이와 같은 목소리를 들려주는 《체르노빌의 아이들》입니다. 누구보다도 아이들이 함께 깨닫고 아이들로 살아가는 그 나이부터 우리 삶과 목숨과 사랑을 싱그럽고 곱게 되새기면서 푸른 꿈을 꿀 수 있기를 바라는 어린이문학 《체르노빌의 아이들》입니다. 그래서 이 책을 우리 아이가 어느 만큼 큰 다음에 읽히고 싶고, 아이한테 읽히고 싶은 마음에서 한 줄 한 줄 글다듬기를 하면서 읽었습니다. 다만, 저도 아직 글다듬기를 훌륭히 해내지는 못하기 때문에, 앞으로 더 힘껏 애쓰고 마음을 쏟아서, 아이가 열 살이 될 때쯤에는 빈 공책에 이 책을 손글씨로 하나하나 새로 옮겨서 적어 놓고 싶습니다.


 (3) 아쉬운 대로 되읽는 책


 우리 스스로 좀더 나은 삶을 바란다면, 우리 스스로 좀더 나은 말과 글을 주고받을 수 있게끔 애써야 한다고 느낍니다. 우리 스스로 한결 나은 삶을 꿈꾼다면, 우리 스스로 한결 나은 말과 글을 나눌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고 느낍니다. 번역은 여러모로 아쉽지만, 아쉽다고 느끼는 번역이라면 아이들 앞에서 이 책을 ‘어떻게 새로 읽으면 좋을까?’ 하고 생각하며 읽을 수 있지 않으랴 싶습니다. 좋은 이야기를 더 좋은 마음으로 더 오래오래 즐기고 싶어서, 밑줄을 그으며 읽은 대목을 하나하나 적어 봅니다. (4343.1.25.달.ㅎㄲㅅㄱ)


[12쪽] 창밖으로 보이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는 점점 불길이 거세져 일 미터가량 되는 높이의 불꽃이 상공에 커다란 원호를 그리며 계속 세력을 넓혀 가고 있었다. “이게 우리가 믿어 왔던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발전소였단 말인가요?”

[22쪽] 열쇠를 꽂고 시동을 건 안드레이는 가속페달을 밟으려다 문득 땅바닥을 훑어보았다. 땅에 떨어진 새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새는 꿈틀거리며 죽어 가고 있었다. 이반과 이네사가 이 공기 속을 그냥 걸어나온다면 정말 큰일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하늘을 날아다녔을 새가 죽어 가는 것을 보면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35쪽] 이렇게 머리를 쓰다듬어 본 지가 얼마만인가. 이반이 어렸을 때에는 잠들어 있는 얼굴을 바라보며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곤 했는데, 안드레이는 어리석게도 지금에 와서야 이렇게 자식을 끌어안고서 행복을 맛보고 있었다.

[52쪽] “엄마!” 이반의 목소리는 사뭇 진지했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요?” 타냐가 모르겠다고 하자, 이반은 말을 이었다. “혼자 죽는 것은 괜찮아요. 하지만 아빠와 엄마, 그리고 이네사도 모두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참을 수 없어요. 그런데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있다니…….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무서워요. 엄마는요? 어떻게 해야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우린 어디로 가는 거죠? 폭발 이후로 내 방에 있던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졌어요. 아빠도 없고, 학교도 없어요. 전부 사라졌어요. 강해진다는 것, 생각보다 간단하네요. 그리고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도 좋은 일이겠죠. 그러나 우습지 않아요? 숨만 붙어 있는 것이 새로운 인생이라니, 그건 사는 게 아니잖아요. 엄마는 만약 아빠가 …….”

[82, 83쪽] 농민들은 스트레리초프라는 사람을 내세워 군인들에게 격렬히 항의하고 있었다. 그들은 할 말이 많았다. 원자로가 폭발했기 때문에 대피하라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양과 소는 어떡하란 말인가? 온 정성을 기울여 키운 이 가축들은 농민들에겐 자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군인들이 가축들을 모두 버려두고 떠나라고 명령한 것이었다. 그것도 총구를 들이대면서 말이다. 밭은 또 어떡하란 말인가? 마음속으로 ‘올해는 제발 알차게 열매 맺기를’ 기도하면서 불알이 얼어붙는 추위를 무릅쓰고 땅을 갈고, 또 해가 뜨기도 전에 들로 나가 종자를 뿌리고 비료를 주곤 했던 그 밭을 어떻게 두고 떠나란 말인가? 농민들에게 소와 양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었다. 밭작물도 단순한 식물이 아니었다. 스트레리초프와 농민들에게는 생명이자 삶 자체였던 것이다 … 군인들에게는 자신들의 의도대로 군중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이 군인들에게는 최고 능력이자 군인된 보람이었던 것이다. 차 안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몇몇 사람들이 비난하기 시작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농민들의 저항은 무산되었고, 별 수 없이 군인들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114∼115쪽] 사실상, 의사나 간호사보다 아이들의 공포심이 백 배는 더 컸다. 이 병원으로 오기 전에 어떤 아이는 동물의 시체를 밟았고, 어떤 아이는 눈앞에서 부모가 피를 토하는 모습을 보았다. 또 농민들이 강제로 피난하는 모습도 보았고, 검문소에서는 잔인하게도 부모와 생이별을 해야 했다. 한꺼번에 이런 끔찍한 일들을 겪게 된 아이들은 이제 마지막으로 감옥 같은 병원 안에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117쪽] 이네사의 입에서 쥐어짜는 듯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와 병실 안에 울려퍼졌다. 그러나 이네사는 아무리 힘을 주어도 일어날 수가 없었다. 감독관은 탈진 상태로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있는 이네사를 보고 있으면서도 상태가 어떤지 가까이 다가와 살펴보지 않았다. 병실 안에는 이네사와 마찬가지로 생명의 불꽃이 꺼져 가고 있는 아이들만이 누워 있었다. 아이들은 아직 죽고 싶지 않다고 기도했지만,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가 이미 자신의 몸 위에 드리웠음을 느끼고 있었다.

[154, 157쪽] “저도 각오는 돼 있어요.” “어리석은 말은 하지 마라.” 마르쿠츠는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오늘은 몸이 좀 이상해요. 이런 느낌은 처음이에요. 제게 아무것도 감출 필요 없어요, 선생님. 이젠 다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요? 손도 발도 전혀 말을 듣지 않고, 몸이 제 몸 같지 않아요. 괜찮아요, 이렇게 약한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한 번 똑똑히 봐두고 싶었어요. 인간이 죽을 때는 이렇게 되는군요. 이젠 각오가 돼 있어요. 아파서 괴로워할 때는 그래도 아직 살아 있다고 느꼈었는데 …….” … 이반의 시체는 거센 바람만이 불고 있는 황야에 매장되었다. 그곳에는 꽃다발도, 눈물을 흘려 주는 사람도 없었다.

[160쪽] 타냐 역시 아무것도 몰랐다. 남편 안드레이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일했다. 타냐는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 얼마나 무서운 직업이었단 말인가. 자신은 왜 좀더 일찍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을까. 이렇게 끝날 줄 미리 알았어야 했다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이반과 아네사를 지금과 같은 불행한 상황으로 이끈 것이 자신들이라는 생각까지 이르자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글쓴이 말/165∼168쪽] 그제서야 나는 ‘내 생각이 틀림없다’ 확신하고, 팸플릿을 만들어 번화가에서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팸플릿을 받아든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스리마일섬에서 그렇게 큰 사고가 났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원자력 발전소를 염려하지 않았다. 때문에 ‘양식 있는 인간이 일본에는 이다지도 없는가’ 낙심하면서 돌아오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 이 책은 원자력 발전소가 건설될지도 모를 현지에서는 관심과 함께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아쉽게도 여전히 대도시 사람들의 반응은 거의 없었다. 물론 하루하루 일상에 쫓기며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당장의 생계활동과 큰 상관없어 보이는 핵의 위험성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는 건 쉬운 일이 결코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결국엔 에너지 문제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대도시 문제인데, 정작 대도시 사람들이 그런 것에 무관심했던 것이다. 그래서 만든 것이 《도쿄에 핵발전소를!》이라는 책이다. 제아무리 대안 부재를 내세우며 원자력 발전소의 안전성을 논하더라도, 그런 핵발전소를 도쿄에 세울 수 없다면 그것은 거짓말이 될 것이다 …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란 것도 알고 보면 원자ㆍ수소폭탄 산업을 경제적으로 성립시키려는 상당히 무리한 방법일 뿐이다 … 나는 현재의 어른들이 정말로 스스로 어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에 어울리는 행동을 하길 바란다 … 절망적인 상황을 모르고는 참 희망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의 어른들이 주는 허무감은 퇴폐를 향해 간다. “어른들을 본받지 마라”는 것은 그러한 무의미한 허무와 냉소를 거절하고, 현실을 직시하며 새 희망으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 원자력 발전소의 물질적 피해 등은 수치로 나타내면 그뿐이지만, 죽는 것은 어디까지나 단 하나뿐인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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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의 의미 - 어느 재일 조선인 소년의 성장 이야기 카르페디엠 14
고사명 지음, 김욱 옮김 / 양철북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116 ― 아픔과 슬픔이 함께 있어 좋은 책
 : 고사명, 《산다는 것의 의미》



- 책이름 : 산다는 것의 의미
- 글 : 고사명
- 옮긴이 : 김욱
- 펴낸곳 : 양철북 (2007.7.2.)
- 책값 : 8700원



 (1) 좋아하는 책을 사서 읽고 나누며 살기


 제가 더없이 사랑하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저한테 좋다는 느낌이 드는 책을 찾아나서고, 두 손 두 다리 온몸이 고단하도록 책을 살핀 다음, 좋아하는 책을 쥐어들어 기쁘게 울고 웃으며 읽고, 이렇게 읽은 책을 옆지기한테 건넨다든지 느낌글을 쓰고 나서, 둘레에 건네주거나 느낌글을 쓰던 얼거리 그대로 저 스스로 살아내는 일입니다. 좋아하는 책을 찾아나서서 사고 읽고 나누면서 살아가는 일이란 저한테 둘도 없이 애틋하고 사랑스러우며 아름다운 일입니다.

 요 며칠 《매미 울음소리 그칠 무렵》이라는 일본 만화 하나를 보면서 이 같은 생각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이 만화책은 200쪽이 채 안 되는 작은 판이요 2009년에 나왔는데 8000원이나 합니다. 요사이 만화책에서 8000원이란 값이란, ‘애장판’이나 ‘소장판’이라는 이름을 달고 400∼500쪽은 되는 녀석한테나 붙이는 값입니다. 여느 만화책 한 권은 요사이(2009년 첫머리∼2010년 첫머리)에 4200원 합니다. 그러니까, 여느 만화책 두 권 값이요 딱히 애장판이나 소장판도 아니면서 떡하니 8000원입니다. 아무래도 대본소판 만화가 아니라 이러한 값을 붙였다 할 텐데, 그래도 참 비쌉니다. 비싸기 때문에 한참 망설였는데, 책 뒤쪽에 ‘카마쿠라의 바닷가 마을을 무대로 펼쳐지는 봄볕처럼 따스하고 청량한, 네 자매의 속 깊은 이야기들’이라는 소개글이 적혀 있어서 골랐습니다. 책값으로 8000원을 치르고 나서 ‘만화가 그저 그렇다’면 이 돈을 고스란히 버릴 뿐 아니라, 책을 읽던 시간마저 버리는 셈이지만, ‘카마쿠라 바닷가 마을’이라는 말마디와 ‘네 자매 속 깊은 이야기’에 이끌렸습니다. 우리로 치면 ‘보성 바닷가 마을’이나 ‘삼척 바닷가 마을’쯤 되는 터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인 셈이요, 만화책에서 너무도 뻔하게 나오는 사랑타령과 판타지싸움판타령에서 훌쩍 벗어나 있거든요.

 만화책을 펼쳐 읽으며 꽤 괜찮다고 생각하고 느끼고 받아들입니다. 웃어야 할 대목은 신나게 웃도록 그림을 그리고, 울어야 할 대목은 북받쳐 울 수 있게끔 그림을 그렸습니다. 조그마한 동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바닷가 마을에서 수수하게 살아가는 네 사람 애틋한 이야기를 담아낸 줄거리를 곱씹으면서, ‘왜 우리 나라에는 이렇게도 넓고 갖가지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아도 늘 뻔하고 너절한 이야기에 그치는 줄거리밖에 못 만날까’ 싶어 아쉽습니다. 무엇이든 서울로 모이고, 어떤 책이건 영화이건 뭣이건 서울을 다룹니다. 서울에서 서울 이야기를 쓰고 서울에서 사고팔립니다. 한 마디로 하자면, 오늘날 우리네 문화와 사회와 정치는 온통 ‘서울에서 생산하고 서울에서 소비한다’입니다. 서울에서 전철로 한 시간만 달려도 인천골목길이 있지만, 인천골목길을 놓고 ‘골목길이다!’ 하고 여기는 문화예술인이든 여느 사람이든 매우 드뭅니다. 부산사람 스스로 부산골목길을 얼마나 곰삭이고 느끼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강릉에 사는 아끼는 동생은 강릉골목길이 참 예쁘다며 꼭 보러 와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강릉골목길을 이야기한 서울사람은 아직 못 만났습니다. 목포골목길이든 고흥골목길이든 고령골목길이든 진주골목길이든 영월골목길이든 화천골목길이든 …… 도시나 시가지를 이룬 곳에는 어김없이 있는 골목길, 논밭을 이룬 곳에는 반드시 있는 고샅길, 이들 자동차 아닌 사람들이 한복판에 서면서 빚어내는 살가운 삶마디를 알알이 느끼며 나누려는 움직임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합니다.

 옆지기 부모님이 살고 있는 일산에 나들이를 가면 으레 여러 식구가 둘러앉아 연속극을 봅니다. 저는 이때에 비로소 연속극을 구경합니다. 여러 시간에 걸쳐 여러 가지 연속극을 죽 보노라면 늘 뻔하게 맺는 줄거리로구나 싶은 한편, 또 하나 늘 뻔하다 싶은 모습을 찾아봅니다. 바로, 어떠한 연속극이든 ‘역사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이 아니라 한다면 모조리 서울에서만 찍습니다. 역사 이야기도 으레 궁중 이야기를 다룰 때에는 서울이 무대입니다. 원주에서 펼쳐지는 연속극, 청주에서 이루어지는 연속극, 문경에서 펼쳐지는 연속극, 남원에서 이루어지는 연속극은 찾아보지 못합니다. 지역에서 지역사람이 주인공이 되어 이루어내고 전국사람이 함께 즐기는 연속극을 찍으려 하는 몸짓은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나라 곳곳 다 다른 터전에서 다 다른 모양새와 넋으로 살아내면서 부대끼는 이야기를 한 올 두 올 알차게 여미면서 서로 반갑게 껴안으려는 움직임은 도무지 뿌리내리지 못합니다.

 그러고 보면, 제가 좋아한다는 책을 내놓는 출판사는 하나같이 서울에 있습니다. 이제는 땅값이 싼 경기도 파주로도 많이 옮겨 갔다지만(돈이 있는 출판사만 들어갔지만), 모두들 서울에서 돌고 돕니다. 서울에 있는 작가들이 서울에 있는 출판사에서 책을 내어 서울에 있는 책방에서 팔리고 서울에 있는 언론사에서 기사로 다루며 서울에 있는 헌책방으로 흘러든다고 할까요. 하기는, 인천에서 살고 있는 저부터 인천에서는 좀더 넓고 깊게 책을 만나기 힘들어 바지런히 서울마실을 해야 합니다.

 며칠 앞서 서울 용산에 자리한 헌책방 〈뿌리서점〉에서 “20세기 미술의 발견”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묶음책 가운데 하나인 《코코슈카》를 장만했습니다. 코코슈카라는 그림쟁이는 ‘오스카 코코슈카’입니다. 이분은 당신 그림에 ‘OK’라는 이름을 남겨 놓았습니다. 좋은 그림쟁이 좋은 그림을 보면서 좋은 느낌을 선물받아 참으로 좋다고 느끼는 가운데, ‘OK’라는 이름 때문에 한참 웃었습니다. 그저 ‘OK’라서 웃었습니다. 비아냥거리는 뜻이 아니라 재미있어서 웃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알파벳으로는 ‘OK’이지만, 우리 말로는 ‘옥’이겠네 싶어 또 한 번 웃었습니다. 데굴데굴 구르는 나뭇잎을 보며 웃을 때가 있듯, 그냥 웃음이 터져나왔습니다. 저하고 옆지기가 한참 웃으니, 옆에서 지켜보던 아기도 함께 웃습니다.

 지난 2009년 12월 31일에 맞추어 사진책 《윤미네 집》이 나왔습니다. 이 책에 깃들인 사진을 찍은 전몽각 님은 몇 해 앞서 돌아가셨습니다. ‘윤미네 집’에서는 아버지이자 남편 제사를 1월 1일에 함께 지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제삿날 하루 앞서 책이 나왔고, ‘윤미네 집’에서는 새해 첫날 차례상을 올리면서 《윤미네 집》을 두 권 함께 올려놓으며 기쁨과 슬픔을 나란히 느꼈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들으면서 홀로 곰곰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차례상이든 제사상이든 먹을거리만 올릴 수 있지 않구나. 차례상이든 제사상이든 우리 스스로 무엇을 기리고 아끼고 나누며 함께하느냐를 돌아볼 수 있구나. 다가오는 설에 우리 식구가 아무 데에도 갈 수 없다면 우리 깜냥껏 차례상을 차리고 지난해에 내가 써낸 책 몇 가지를 올려놓으며 옛어른한테 고맙다고 인사를 올려도 되겠구나.’

 제가 써낸 책을 제사상에 올릴 수 있습니다. 제가 읽고 그지없이 좋았던 책을 제사상에 올릴 수 있습니다. 제가 찍은 사진 가운데 참 마음에 드는 녀석을 제사상에 올릴 수 있습니다. 격식이나 예절이라고 하지만, 격식과 예절에 앞서 마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격식이든 예절이든 맨 처음에는 마음을 바치거나 나누면서 사랑하려는 흐름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두 눈으로 보여지는 모습이 아닌 가슴팍으로 느끼는 마음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옷차림이나 생김새가 아닌 맨가슴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책을 하나하나 돌아볼 때에, 이 책들은 틀림없이 ‘좋은 줄거리’이거나 ‘훌륭한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줄거리와 훌륭한 이야기를 넘어서면서 ‘따뜻한 마음’이요 ‘넉넉한 사랑’이었으리라 봅니다. 대단하지 못한 줄거리라 할지라도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으면 저한테는 좋은 책입니다. 훌륭하지 못하다고들 일컫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넉넉한 사랑이 실려 있으면 저한테는 좋은 책입니다. 저는 제 두 눈이 아닌 제 마음으로 읽는 책이 좋습니다. 아니, 저는 열여섯 살 푸름이였을 때나 스물여섯 살 젊은이였을 때나 서른여섯 살 애 아빠일 때나 한결같이 제 마음을 톡톡 두드리면서 살포시 어루만지다가는 와락 껴안는 책이 좋습니다. 머리에 담는 지식이 가득한 책은 그저 자료로 책꽂이에 꽂아 놓습니다. 마음으로 나누는 사랑과 믿음이 어우러진 책이라야 비로소 여러 해에 걸쳐 제 책상맡에 올려놓고 수도 없이 되풀이하며 읽고 삭입니다. 새롭게 읽고 삭이기를 거듭합니다.


 (2) 《산다는 것의 의미》라는 책이란


 《산다는 것의 의미》는 오래된 책입니다. 우리 말로 옮겨진 지는 세 해이지만, 일본에서는 퍽 예전에 나왔습니다. 한겨레이지만 한겨레가 살아가는 남녘에서든 북녘에서든 뿌리내리지 못하고 일본에서 뿌리내린 한 사람이 한국말이 아닌 일본말로 적바림한 책입니다. 한국사람도 조선사람도 아니요 일본사람 또한 아닌 떠돌이 같은 넋이 일본땅에서 부딪히고 아파하고 슬퍼하면서 괴로워 뒹굴던 이야기를 아주 차분하게 펼쳐내는 책입니다.

 아무래도 모든 아픔과 슬픔을 딛고 섰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아픔과 슬픔을 겪어야 했으며 이 책을 써내는 그때에도 아픔과 슬픔이 늘 길동무처럼 옆에 나란히 있기 때문일 테지요. 아픔과 슬픔에 짓눌린 사람이 아니니까, 아픔과 슬픔에 얽매인 사람이 아니니까, 아픔과 슬픔이 우리 삶에서 좋음과 기쁨처럼 늘 곁에 있는 벗임을 깨달았다면 아주 차분하게 나 스스로 걸어온 길을 적바림할 수 있다고 느낍니다.

 삶이란 눈물과 웃음이 함께 있는 발자국입니다. 삶이란 괴로움과 싱그러움이 나란히 있는 걸음걸이입니다. 삶이란 고단함과 개운함이 엇갈리는 길목입니다. 삶이란 낮과 밤이 갈마드는 하루하루입니다. 내내 낮이지 않고 노상 밤이지 않습니다. 줄곧 어둠이지 않고 내처 밝음이지 않습니다.

 내내 낮이거나 내처 밝음이라면 눈이 너무 고달픕니다. 우리는 잠을 자야 합니다. 잠을 자지 않고 어찌 삽니까.

 사람은 누구나 밥을 먹고 똥을 눕니다. 사람은 누구나 물을 마시고 오줌을 눕니다. 사람 아닌 목숨도 매한가지입니다. 동물뿐 아니라 식물도 먹은 만큼 내뿜거나 내보내야 합니다. 돌고 돌리도록 해야 합니다. 주고받기입니다. 주기만이 아니요 받기만이 아닙니다. 주기만 하거나 받기만 하면 탈이 납니다. 먹기만 하거나 누기만 할 때에도 말썽이 생깁니다. 낮이 있는 만큼 밤이 있어야 하고, 바지런히 일하는 만큼 신나게 놀아야 합니다. 힘껏 하루를 보냈다면 한갓지게 하루를 쉬어야 합니다.

 이리하여 1932년에 일본에서 태어나 재일조선인으로 살아간 ‘고사명(김천삼)’ 님은 《산다는 것의 의미》라는 책 하나로 ‘도무지 삶이란 뭐지?’ 하는 길찾기를 합니다. 마흔세 살이 당신 외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픔이 어떠한 아픔인가를 돌아보고, 이 세상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가냘픈 목숨은 당신 외아들뿐이 아님을 헤아리며, 아이들과 어른들 누구나 내 삶이 어떠한 삶인가를 짚지 않는다면 삶과 죽음이란 다르지 않음을 곱씹습니다.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이 많고, 죽었으나 살아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버젓이 살아 있다지만 죽었다느니만 못하고, 아련히 죽었다지만 언제까지나 마음속에서 살아남아 빛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땅 아이들한테, 아니 이 땅이 아닌 일본땅에서 일본사람으로 살아가는 아이들과 일본땅에서 일본사람이 될 수 없는 채 살아가는 재일조선인과, 한국땅에서 이웃나라 한겨레와 일본 아이들 모두 얼마나 아픔과 슬픔을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굽어살피지 못하는 모든 아이들과 어른들한테 바치는 책이 《산다는 것의 의미》가 아니랴 싶습니다. 삶과 죽음은 하나요, 삶은 삶대로 아름답고 죽음은 죽음대로 아름답습니다. 살아 있을 때에는 살아 있는 모든 기쁨과 웃음을 슬픔과 눈물과 함께 누려야 합니다. 죽어 묻힐 때에는 흙으로 기꺼이 돌아가면서 내 뒷사람과 뭇 목숨붙이한테 고맙다는 인사말을 남겨야 합니다.


 (3) 수없이 되읽는 말마디


 2007년에 나온 《산다는 것의 의미》를 2008년에 읽었는데, 2009년 한 해 내내 이 책을 끌어안고 지냈습니다. 이제 2010년을 맞이하며 제 마음 한켠에서 살포시 내려놓고 우리 집 책시렁 한쪽에 얌전히 옮겨 놓고자 합니다. 제 어설프고 어줍잖은 마음밭을 일구어 준 고마운 책 하나한테 즐거웠다는 인사말을 남기며, 새로운 책 하나로 이 마음밭을 다시금 일구어 보고자 합니다. 책상맡에서 책시렁으로 옮겨 놓기 앞서, 한 번 더 책장을 뒤적이면서, 그동안 밑줄을 그은 대목을 또박또박 느린 글씨로 적바림해 봅니다. (4343.1.16.흙.ㅎㄲㅅㄱ)


[7, 79∼80, 115, 188쪽] 생명이 얼마나 고귀한지는 아기의 울음소리를 한 번이라도 들어 본 사람이라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입니다 … 비가 오는 날은 나막신을 두 손에 들고 맨발로 뛰었습니다. 나는 비오는 날이 좋았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커다란 우산을 쓰고 가방이나 운동화가 비에 젖을까 봐 쩔쩔맬 때 나는 아무 거리낌 없이 빗속을 뛰어다녔습니다 … 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은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 속에서 스스로를 건져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 인간의 상냥함이란 참된 조선인, 참된 일본인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인종과 상관없이 모두가 인정하는 참된 인간이 되려고 노력했을 때 나보다 힘겨운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힘이 생기는 법입니다.

[18∼19, 46쪽] 어머니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어머니는 처음부터 남길 만한 유품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와 결혼할 때도 결혼사진을 찍을 돈이 없었다고 합니다 … 어머니는 가난에 허덕이다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에겐 어머니의 죽음이 당신 책임처럼 느껴졌을 겁니다 … 아버지와 한바탕 싸움을 끝내면 새엄마는 너무나도 슬픈 눈으로 우리 형제를 바라봤습니다. 그러다가도 금세 독기가 오른 표정으로 아버지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슬픈 눈빛은 고통스런 생활을 온힘을 다해 버텨 내려는 데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20, 24∼25, 200쪽] 우리는 왜 우리의 이름이 떳떳하게 불리는 조선에서 태어나지 못했던 것일까요? 아버지는 언제 일본으로 건너오게 된 것일까요? … 전쟁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무척이나 괴롭혔습니다. 수많은 조선인들이 슬피 울었습니다. 같은 일을 당했다면 분명 일본인도 울지 않고서는 견뎌 내지 못했겠지요 … 특히 어떤 선생님은 내가 아직도 일본식 이름을 쓰지 않고 조선 이름을 쓰고 있다는 데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온 나라가 전쟁에 뛰어든 판국에 정부가 시키는 대로 일본 이름으로 바꾸지 않으니, 눈에 거슬렸을 것입니다.

[26∼27, 74쪽] 일본어에는 일본어만이 지닌 향기가 있습니다. 일본인은 자신들의 언어가 부드럽고 단아하다고 말합니다. 조선인에게는 조선어가 있습니다. 일본인이 일본어를 사랑하듯 조선인은 조선어를 사랑합니다. 조선어에는 조선인만이 느낄 수 있는 향기가 있습니다 … 일본 학교에 다니는 일본인이 일본어를 사용할 수 없다면 일본인들은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아버지에게서 조선어를 배우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아버지는 조선어로 얘기했고, 우리는 일본어로만 얘기했습니다. 부자 간에 마음을 주고받는 언어가 서로 다르다니 기막힌 일입니다.

[49, 66, 127쪽] 우리 집은 천장에도 신문지가 발라져 있었습니다. 동생이 죽기 전까지만 해도 천장은 우리들에게 무척 유용한 놀잇감이었습니다. 나는 천장에 붙여 놓은 신문을 통해 처음 글씨를 배웠습니다 … 입학식 날입니다. 우선 내 또래의 아이들이 그렇게 많다는 데 놀랐습니다. 그리고 아이들 대부분이 새 교복을 입고 있다는 데 놀랐습니다. 마지막으로 나 말고는 전부 어머니가 있다는 데 놀랐습니다 … 시치린마치의 아이들이 바다를 사랑한 것은 맨몸으로 뛰어들어도 거리낌 없이 우리를 받아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영은 옷을 입지 않아도 되기에 옷이 더럽다고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닷물이 온몸을 부드럽게 감싸 주기 때문에 드넓은 바다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나가야의 숨막히는 생활도 멀리 사라집니다.

[61, 64, 75쪽] 그런데 세상에는 우리보다 더 가난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리 집엔 살림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거의 없어서 도둑 걱정은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자물쇠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집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 한편으로는 도둑이 불쌍하기도 했습니다. 나가야의 빈집을 털 정도였으니 찢어지게 가난했을 것입니다. 부리나케 바지를 벗고 똥을 쌀 때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을 것입니다. 똥을 싸고 있을 때 사람이 들어오면 정말 큰일이니까요 … 모두가 가난했으니 가난이라는 말조차 필요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소학교에 입학해 나처럼 가난하지 않은 일본 아이들을 알게 되면서, 내가 가난하다는 것과 내가 아는 조선인 대부분이 가난하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 깨달음이 내 삶에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습니다.

[87, 174∼175쪽] 학교에서 멋대로 날뛰면 안 된다는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이렇게 만든 건 바로 학교였습니다. 나는 아버지에게 그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아버지 말대로 학교는 공부하는 곳입니다. 하지만 내게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학교는 나를 가난하다고 놀리고, 조선인이라고 놀리고, 어머니가 없다고 놀리는 곳입니다. 학교는 나를 괴롭히는 곳입니다. 나를 괴롭히는 곳을 좋아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 사카이 선생님은 모두를 평등하게 대했습니다. 선생님의 마음속엔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이가 없었던 것입니다. 선생님은 내가 조선인이라고 경멸하지도 않았고, 가난하다고 해서 우습게 보지도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내게 화를 낸 것은 내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며, 가난에 짓눌려 눈치나 봤기 때문입니다 … 4학년 때 담임은 나라는 학생보다 학교 규칙이 먼저였습니다. 내가 왜 손톱을 자르지 않고 지저분하게 길렀는지를 궁금해하기보다는 학교 규칙을 어겼으니 혼을 내야겠다는 식이었습니다.

[145, 149쪽] 폭력 속에 갇힌 인간은 폭력에 눈이 멀어 폭력이 명령하는 대로 마구 폭력을 휘두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한마디로 폭력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 나는 모두에게 조롱받았던 말의 폭력에 대해 팔의 힘을 행사하는 폭력으로 맞서 싸웠고, 그 순간 나 자신이 폭력 속에 갇히는 신세가 되어 버린 셈입니다 … 다른 사람의 처지를 함부로 조롱하는 인간은 상대방을 비웃기 전에 자기 자신의 인간성을 비웃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 우리는 매일 아침 학교에 오자마자 세계지도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언제쯤 우리가 만든 일장기 모형을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에 붙일 수 있게 될지를 이야기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만든 일장기를 워싱턴이라고 쓴 곳에 붙일 경우,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워싱턴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얼마나 많은 집이 불타고,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어머니를 잃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234쪽] “이제 겨우 해방됐으면서 뽐낼 틈이 어디 있어?” 그리고 아버지는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일본사람은 조선인을 괴롭혔다. 조선인이 어려울 때도 도와주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세상이 뒤집혀 일본사람들이 어려워졌다. 그럼 조선인은 어떻게 해야겠느냐? 일본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짓밟고 괴롭혀야겠느냐? 남에게 원한을 사면 나중에 그 원한이 나한테 돌아오는 법이다.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는 서로 돕는 게 사람의 도리다. 사람의 도리를 짓밟으면 해방도 머잖아 끝이다. 일본사람이 우리에게 한 짓을 용서해 줘야 그게 진짜 해방이다. 앞으로 좀 살 만해졌다고 일본사람을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또다시 조선을 망하게 할 게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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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로 이야기 1 - 세 어머니
시모무라 고진 지음, 김욱 옮김 / 양철북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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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하나 124 ― 한 해를 통틀며 가슴으로 껴안는 책
 : 시모무라 고진, 《지로 이야기 1》



- 책이름 : 지로 이야기 1
- 글 : 시모무라 고진
- 옮긴이 : 김욱
- 펴낸곳 : 양철북 (2009.4.24.)
- 책값 : 14000원



 (1) 올 한 해 나한테 가장 돋보이는


 한 해에 책을 한 권만 읽은 분들한테 ‘올 한 해 당신한테 가장 돋보이는 책’을 꼽으라고 여쭙기는 머쓱합니다. 그러나, 한 권을 읽든 열 권을 읽든 백 권을 읽든, 그 책 가운데 하나라도 마음을 움직였다면 우리한테는 아름답고 반갑고 훌륭한 책이라고 느낍니다.

 저한테는 어떤 책들이 지난 2000년부터 가슴을 파고들었는가를 곱씹어 봅니다. 지난 2008년에 나온 책 가운데에는 《국가는 폭력이다》(레프 톨스토이 씀,달팽이 펴냄), 《니사》(마저리 쇼스탁 씀,삼인 펴냄), 《지구를 걸으며 나무를 심는 사람, 폴 콜먼》(폴 콜먼 씀,그물코 펴냄), 《도자기》(호연 그림,애니북스 펴냄), 《페르세폴리스 2》(마르잔 사트라피 그림,새만화책 펴냄), 《눈물나무》(카롤린 필립스 씀,양철북 펴냄), 《음주가무연구소》(니노미야 토모코 그림,애니북스 펴냄) 들을 꼽습니다.

 지난 2007년에 나온 책 가운데 한 가지 책을 꼽으라면 저는 망설이지 않고 《슬픈 미나마타》(이시무레 미치코 씀,달팽이 펴냄)와 《이 여자, 이숙의》(이숙의 씀,삼인 펴냄)를 꼽습니다(한 권이 아니고 두 권이군요). 2007년에 나온 그 어떠한 책도 이 두 권보다 제 가슴을 촉촉하게 적시지 못했습니다. 2006년에 나온 책 가운데에는 《장미마을의 초승달 빵집》(모이치 구미코 씀,한림출판사 펴냄)과 《낫짱이 간다》(김송이 씀,보리 펴냄)를 꼽습니다. 2005년에 나온 책에서는 어린이문학 《두 친구 이야기》(안케 드브리스 씀,양철북 펴냄)와 사진책 《섬》(전민조 사진,눈빛 펴냄)을 꼽는데, 이와 함께 만화책 《뚝딱뚝딱 인권짓기》(인권운동사랑방 씀,야간비행 펴냄)가 참 좋았습니다. 2004년에 나온 책에서는 《9월이여 오라》(아룬다티 로이 씀,녹색평론사 펴냄)를 오래도록 곱씹었습니다. 2003년에 나온 책에서는 《말해요 찬드라》(이란주 씀,삶이보이는창 펴냄)와 그림책 《꼬마 인형》(가브리엘 벵상 그림,열린책들 펴냄)이 한 해 내내 가슴을 채웠고, 2002년에 나온 책에서는 사진책 《역전 풍경》(김기찬 사진,눈빛 펴냄)과 환경문학 《수달 타카의 일생》(헨리 윌리엄슨 씀,그물코 펴냄)을 손꼽습니다. 2001년에 나온 책을 돌아볼 때에는 1999년부터 나와서 모두 23권으로 마무리가 된 만화책 《당신의 손이 따뜻할 때》(준코 카루베 그림,서울문화사 펴냄) 열 권과 《신ㆍ엄마손이 속삭일 때》 열세 권이 아름다웠다고 느끼는데, 2001년은 《내 마음속의 자전거》(미야오 가쿠 그림,서울문화사 펴냄) 1권이 막 나오면서 자전거 사랑과 자전거 삶이란 무엇인지를 우리들한테 보여주던 해입니다. 2000년에 나온 책에서는 어린이문학 《안톤 카이투스의 모험》(야누스 코르착 씀,내일을여는책 펴냄)과 환경문학 《블루백》(팀 윈튼 씀,눌와 펴냄)만한 책이 없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올 2009년을 놓고 돌아볼 때에는 《우애의 경제학》(가가와 도요히코 씀,그물코 펴냄)이나 《엄마가 사랑해》(도리스 클링엔베르그 씀,숲속여우비 펴냄)나 《흐느끼는 낙타》(싼마오 씀,막내집게 펴냄)나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필립 퍼키스 말,안목 펴냄)가 돋보인다고 느낍니다. 만화책 가운데 《아돌프에게 고한다 1∼5》(데즈카 오사무 그림,세미콜론 펴냄)과 《리틀 포레스트 2》(이가라시 다이스케 그림,세미콜론 펴냄)과 《현미선생의 도시락 1》(오사무 우오토 그림,대원씨아이 펴냄)가 퍽 좋았습니다. 《민들레솜털》(오자와 마리 그림,북박스 펴냄)이 올해에 3권과 4권이 번역되어야 했을 텐데 나오지 못하는 모습은 무척 안타깝습니다. 가만히 보면, 《내 마음속의 자전거》 또한 13권까지만 번역이 되고 14권부터는 나오지 못합니다.

 2009년에 제 마음속에 파고든 좋은 책을 더 든다면, 여기에 《지로 이야기》 1ㆍ2ㆍ3권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빈센트 반 고흐 글,아트북스 펴냄)를 들고 있는데, 누군가 이 가운데 한 권을 다시 추린다면 어느 책이냐고 여쭐 때에는 《지로 이야기》 한 가지만 말씀드립니다. 628쪽(1권) + 564쪽(2권) + 372쪽(3권)으로 이루어진 긴 소설인 《지로 이야기》는 자그마치 1564쪽이나 되는 두툼한 이야기입니다. 그나마 이 책은 글쓴이 시모무라 고진 님이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숨을 거두는 바람에 이만한 부피로 끝났지, 글쓴이가 조금 더 오래 살면서 이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면 훨씬 길었겠지요.

 무척 긴 이야기라 할 만하지만, 저는 아기 기저귀를 빨고 어르고 달래면서 《지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아기를 겨우 잠재운 깊은 밤에 조용히 일어나서 읽고, 새벽나절 빨래를 하고 나서 읽으며, 아기 죽을 끓이는 부엌에서 읽었습니다. 아기를 안고 소리내어 읽어 보기도 하고, 전철간에서도 이 책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이밖에 《잊혀진 미래》(팔리 모왓 글,달팽이 펴냄)와 《희망을 여행하라》(이혜영과 임영신 글,소나무 펴냄)와 《시타델의 소년》(제임스 램지 울만 글,양철북 펴냄)을 아기를 안고 어르면서 바지런히 읽는 동안 가슴이 뜨거워진다고 느꼈습니다. 제 손이 짧고 머리가 짧으며 생각이 짧은 탓에 더 많은 좋은 책을 더 널리 제 가슴으로 껴안지 못했습니다. 읽거나 훑거나 살핀 책은 천 권이 넘지만, 한 해를 되돌아보면서 다문 한 권이라도 금세 떠올릴 수 있는 책이 있던 해라고 생각하니, 2009년 한 해 책읽기 또한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즐거웠습니다. 지난 열 해를 거슬러 보면서 기쁩니다. 이렇게 가슴으로 읽은 책들을 앞으로 우리 딸아이한테 고스란히 물려줄 수 있다고 생각해 보면, 우리 식구한테 돈은 없으나 좋은 마음밥이 있는 셈이니 괜찮은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식구는 돈벌이가 시원치 못하나 마음나눔은 흐뭇하게 한 셈이 아닐까 싶습니다.

 집안에 텔레비전을 들여놓지 않고 책만 들여놓고 있는 이 터전을 언제까지나 고이 이어가고 싶습니다. 글쓰기와 책읽기를 하느라 말로 이야기를 나눌 겨를을 늘리지 못했는데, 새해에는 옆지기와 아이한테 좀더 말을 걸고 좀더 깊고 오래 이야기를 나누면서, 더 작은 조각틈을 내어 책 하나하나 알뜰살뜰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2) 《지로 이야기》라는 푸름이문학


 2009년 봄에 모두 세 권으로 옮겨 나온 《지로 이야기》는 일본에서는 1부부터 5부까지 따로따로 나온 판입니다. 그러니까, 일본에서는 다섯 권으로 나온 책이요, 이번에 우리 나라에서는 세 권으로 나온 셈입니다. 글쓴이 시모무라 고진 님은 몸이 아파 자리에 드러누운 탓에 뒷이야기를 꾸준히 이어쓰지 못했으며, 모두 7부로 마무리를 짓고자 했던 《지로 이야기》는 그만 5부를 끝으로 더는 쓰지 못했습니다. 5부를 마치고 나서 글쓴이가 숨을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끝이 나지 않은 이야기라고 한다면, 선뜻 이 책을 집어들기 어렵다 말할 수 있지만, 《지로 이야기》는 1부부터 5부까지 모두 ‘독립되어’ 있습니다. 세 권짜리로 나온 우리 나라 판 또한 1권과 2권과 3권이 성격이 사뭇 다릅니다. ‘지로’라고 하는 아이가 어린 나날부터 조금씩 철이 들고 세상을 읽는 눈썰미를 키우면서 새롭게 거듭나는 모습이 권마다 달리 펼쳐집니다. 1권만 읽든 3권만 읽든, ‘한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 살아가는 뜻과 얼’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1부와 2부를 하나로 묶은 《지로 이야기 1》인데, 글쓴이 시모무라 고진 님은 1942년 5월 5일, 2부를 마무리짓고 낱권책으로 펴내면서, “첫 권에서 나는 운명의 아들인 지로의 성장을 그리면서 주로 ‘교육과 모성애’라는 문제를 다루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로는 이야기의 주인공이긴 하지만, 주제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그의 생활 대부분은 오히려 세상의 부모들에게 그같은 문제를 생각하게 만들기 위한 재료로 다뤄졌다. 그러나 제 2부에서 지로는 독립성을 가진 존재로 부각되고 있다. 지로는 여전히 모성애를 갈망하는 운명의 자식으로서 세상 부모들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지만, 문제의 소유자는 어디까지나 지로 자신이다. ‘자기 개척자로서의 소년 지로’, 이것이 이 책의 주제인 셈이다” 하고 이야기합니다(이 글은 번역책에는 실려 있지 않습니다. 일본에서 나온 책에만 실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로 이야기 1》에서는 ‘한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어머니 마음이란 무엇인가’와 ‘나를 낳아 키운 어머니와 둘레 사람과 터전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를 다룬다고 하겠습니다. 이 책을 읽을 푸름이한테는 ‘우리 엄마 아빠란 분은 나를 얼마나 사랑하거나 아끼는가?’ 하는 궁금함과 ‘나는 내 어버이를 어떤 눈길로 바라보면서 내 삶을 꾸려야 하는가?’ 하는 걱정을 돌아보도록 이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을 어버이한테는 ‘나는 얼마나 어버이다운 매무새로 우리 아이를 낳아서 키우고 있는가?’ 하는 돌아봄과 ‘나는 내 아이를 보면서 내가 이렇게 자라서 아이를 낳기까지 나를 돌보고 키운 내 어버이를 어떻게 헤아려야 하는가?’ 하는 되새김으로 지나온 발걸음을 생각하도록 이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책 갈래로 나눈다면 ‘푸름이 문학(청소년 문학)’이 될 《지로 이야기》인데, 갈래는 문학이지만 속에 담은 이야기와 줄거리와 넋은 문학이 아닌 삶입니다.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 살아낸 이야기요, 지은 이야기가 아닌 살아갈 이야기입니다.

 그저 재미 삼아 뒤적거리는 읽을거리가 아니며, 한낱 시간 죽이기로 훑을 읽을거리가 아닙니다. 성장소설이라든지 교육소설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 책입니다. 따로 추천도서나 권장도서로 묶을 만한 책 또한 아닙니다. 글쓴이 시모무라 고진 님은 “자네는 그 나이에 소설을 쓰기 시작했나?” 같은 꾸지람까지 들으며 이 책을 써냈는데, ‘내 삶을 돌아보고’ 싶은 마음일 때에 쥐어들 《지로 이야기》입니다. 한 아이를 키우는 어버이로서 ‘내 삶이 아이 앞에서 아름다운가 아닌가’를 되새기고자 할 때에 읽을 《지로 이야기》입니다. 내 가슴에 따순 사랑이 얼마나 남아 있는가를 생각하고 싶을 때에, 내 가슴에 깃든 따사로운 사랑으로 내 이웃과 동무를 따사롭게 껴안고 싶을 때에 읽는 《지로 이야기》입니다. 내가 걷는 이 한길이 얼마나 나와 내 식구와 이웃을 옳게 북돋우며 곱고 맑은 빛을 비추는가를 살피고 싶을 때에, 내가 걷는 이 한길이 내 밥그릇만 챙기려는 노릇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고 싶을 때에 펼칠 《지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지로 이야기》는 이 책을 읽을 사람한테 길동무와 같은 책이라 하겠습니다. 《지로 이야기》는 이 책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한테 마음동무와 같은 책이라 하겠습니다. 생각동무, 슬기동무, 넋동무, 삶동무로 곁에 놓을 책이라 하겠어요.

 “너희들이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그대로 앙갚음하겠다는 거냐.”

 시모무라 고진 님은 당신 삶을 비춘 좋은 사람으로 세 사람을 꼽고, 이 가운데 다자와 요시하루라는 분이 첫손이라고 꼽습니다. 젊은 날, 다자와 요시하루라는 분이 학교식당에서 ‘혼자 밥을 왕창 먹어 다른 사람이 굶게 되었을 때에, 혼자 밥을 왕창 먹은 동무를 골탕 먹이겠다고 하는 동무들 앞에서 읊은 한 마디’가 시모무라 고진 님한테 오래도록 남았다는데, 앙갚음이란 사람이 걸을 길이 아니겠지요. 사람이 걸을 길이란 앙갚음도 아니지만 미움도 아닐 테며, 내 밥그릇을 홀로 단단히 움켜쥐는 일도 아니리라 봅니다. 사람이 걸을 길이란 내 밥그릇을 깨끗이 비우거나 훌훌 놓는 일이며, 콩 한 알을 두 쪽 세 쪽으로 나누는 일입니다. 돈이 넘쳐나게 있어야 이웃나눔을 할 수 있겠습니까. 돈이 없는 빈털털이라고 이웃나눔을 할 수 없겠습니까. 내 몸이 튼튼하다고 이웃사랑을 널리 펼치겠습니까. 내 몸이 여리고 아프다고 이웃사랑을 하나도 못 펼치겠습니까. 내가 읽은 책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하여 내가 똑똑하고 슬기로와서 내 이웃한테 기쁨과 보람을 두루 나누겠습니까. 내가 읽은 책이 하나도 없거나 몇 권 안 된다고 내가 어리석고 철딱서니없어서 내 이웃한테 아무런 기쁨과 보람을 골고루 나누지 못하겠습니까.

 모든 문학은 이 문학을 일구는 사람 넋이요 얼이며 삶입니다. 늦깎이에 소설을 쓴다고 못난쟁이일 수 없으며 이들을 못난쟁이라고 바라보는 사람이야말로 슬픈 못난쟁이입니다. 시를 쓰든 수필을 쓰든 소설을 쓰든 한동아리입니다. 글을 쓰든 노래를 부르든 춤을 추든 연기를 하든 그림을 그리든 사진을 찍든 한 흐름입니다. 문학을 하건 예술을 하건 농사를 짓건 노동을 하건 한 갈래 길입니다. 대통령이건 기자이건 운동선수이건 고기잡이이건 교수이건 애 엄마이건 한 삶입니다. 높고 낮음이 아닌 곱고 미움으로 들여다볼 삶매무새입니다. 있고 없음이 아닌 맑고 더러움으로 살펴볼 삶자락입니다. 곱고 맑게 살아가는 흐름이라면 세상에 이름 안 난 애 엄마이건 애 아빠이건 거룩하고 훌륭한 사람입니다. 밉고 더럽게 살아가는 흐름이라면 세상에 이름 크게 난 대통령이나 운동선수이건 하잘것없을 뿐 아니라 부질없는 사람입니다.

 우리한테는 사람다운 사람인 이웃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내 이웃 앞에서 사람다운 사람인 내 삶을 꾸려야 합니다. 나 스스로 곱고 맑은 이웃을 찾을 노릇이고, 나 스스로 곱고 맑은 사람으로 늘 새로워지도록 삶을 추슬러야 합니다. 《지로 이야기》는 내가 더욱 나다우면서 사람된 길을 잘 갈무리하도록 곁에서 지켜보고 도와주고 손을 내미는 반갑고 살가운 이슬떨이가 되어 줍니다. 다시 되풀이되지 않는 오직 하나뿐인 내 삶을 더 아끼고 사랑하는 길을 나 스스로 놓지 말라고 다독이고 말을 걸며 웃음지으며 어깨동무를 하는 고맙고 믿음직한 스승이 되어 줍니다.


 (3) 한 줄 두 줄 곱씹어 되읽기


 628쪽에 이르는 《지로 이야기 1》를 여러 번 곱씹어 되읽습니다. 밑줄을 긋고 찬찬히 거듭 읽은 이야기를 다시금 하나하나 옮겨 적어 봅니다. 눈으로 읽을 때하고 소리내어 읽을 때하고 다르며, 밑줄을 그으며 읽을 때하고 손으로 종이에 옮겨 적거나 타자로 옮겨 적을 때하고 다릅니다. 읽으며 가슴에 무언가 울린 책이라 한다면, 이렇게 타자나 손글씨로 옮겨 적습니다. (4342.12.31.나무.ㅎㄲㅅㄱ)


[13, 49쪽] 하지만 좋은 시간에 태어났다고 해서 지로가 행복하게 산 것만은 아니었다 … 다다미방 문턱을 막 넘어서려는데 누군가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오타미(지로 엄마)였다. “너, 정말 …….” 오타미는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조금 뒤 지로는 밥상 앞에 무릎을 꿇고 오타미가 늘어놓는 끝없는 설교를 또 들어야만 했다. “여긴 네가 태어난 집이란 말이다.” 오타미는 지로가 어제 밤새도록 들었던 내용과 똑같은 설교를 했다. “우린 비록 시골에서 살고 있지만 어엿한 무사 가문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돼.” 이 말도 어제 귀가 따갑게 들었다. 지로는 도대체 무사 집안이 어떻다고 오타미가 입만 열면 그 이야기를 꺼내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63쪽] “끈적끈적한 이 녀석 몸이 갑자기 내 몸에 닿아서 깜짝 놀랐어.” 슌스케(지로 아빠)는 지로가 기댔던 자기 옆구리를 부채 끝으로 훑어내렸다. 지로는 이상하게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지로는 누워서 지그시 아빠를 쳐다보았다. 오타미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 정말 어처구니없는 사람이에요.” “뭐가?” “세상에 자기 자식보고 더럽다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더러운 것을 더럽다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하나?” “그러면서도 아버지로서 애정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것과 이것은 다르잖아? 바보 같은 소리하네.” “아빠들은 그게 문제예요. 자기 혼자 아이를 귀여워하는 척하다가도 금방 아이한테 상처를 입힌다니까.” “그런 이치에 맞지도 않는 말 하지 마.” “당신이야말로 억지 이론만 늘어놓고 있는 거 아녜요?”

[108, 120쪽] 새해가 밝았다. 사랑받는 자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자에게도 시간만은 공평하게 찾아왔다 … 친구들 사이에서 지로는 나무를 가장 잘 타는 아이로 이름났다. 돌팔매질도 잘했고, 수영도 물고기처럼 빨랐다. 잠자리 잡는 것과 붕어 낚시, 미꾸라지 낚시도 따라올 아이가 없었다. 동네에서는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한겨울만 빼고 언제나 맨발로 돌아다녔다. 지로는 학교에 다니면서 문명인이 되기보다 오히려 야생의 자연인이 되는 것이 어울리는 아이였다.

[118∼119쪽] “하나만 물어 보지. 지로가 자네 아들이 (이빨로) 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 것 같나?” “어떻게 되다니요? 뭐가요?” “지로 말일세. 지로가 오늘 기타로를 물지 않았다면 지로는 일 년 내내 기타로에게 시달릴 거야. 한번 생각해 보게. 무릎을 물리는 것과 어린 시절의 비겁한 추억을 갖고 평생을 사는 것 가운데 어떤 쪽이 더 큰 상처라고 생각하나? 자네도 두목 소리를 듣고 있는 사나이인데 내가 지금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모른다고는 못할 걸세.” … “매실장아찌만 한 살점이 떨어져 나간 것을 보고 어느 부모가 참을 수 있겠나. 나도 지로가 개처럼 사람을 물어뜯었다는 얘기를 듣고 잘못 가르친 것 같아 부끄러웠네.” 슌스케는 또 개라고 표현했다. 지로는 자기도 모르게 손등으로 입 언저리를 한 번 훑었다. “사실은 나도 기타로가 다쳤다는 것을 알고 자네에게 사과할 생각이었어. 그리고 치료비도 물어 줄 작정이었다네. 그런데 자네 태도가 틀렸어. 우리 집사람한테 돈을 안 주면 가만 있지 않겠다고 했다지? 그것도 좋아. 화가 나서 그런 말을 했다고 치지. 화가 나면 그럴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자네에게 돈을 준 것을 기타로가 알아보게. 또 지로가 그 얘길 들어 보게.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나? 여보게 쇼하치. 자네나 나나 자식들만큼은 돈 때문에 비굴해지지 않는 떳떳한 사람으로 키우세.”

[130쪽] ‘앞으로 엄마나 할머니가 뭐라고 하든지 무조건 무시할 거야. 형에게 덤비는 게 나쁘다면서 슌조가 나한테 덤빌 땐 왜 야단치지 않지? 동생에게 져주는 게 형이라면서 교이치가 나를 때리는 것은 왜 말리지 않지? 엄마랑 할머니는 틀렸어. 엄마랑 할머니는 내가 맞는 것을 봐야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들이야. 내가 좋아하는 일을 했을 때 엄마나 할머니가 같이 기뻐해 준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냐고.’

[149, 157쪽] 그 뒤 지로의 마음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이 솟아올랐다. 물론 지로가 십자가를 짊어질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지로는 아직도 슌조를 사랑하지 않았다. 또 사랑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슌조를 보면서 연민을 느꼈다. 그런데 이 연민은 지금까지 적대적이었던 슌조를 자기보다 한 단계 낮추어 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 때문에 지로는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 그러나 단 한 가지, 차별만큼은 아무리 당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차별을 받으면 받을수록 겉으로는 냉정해지는 것처럼 보여도 그 속에서는 엄청난 분노가 회오리치게 된다.

[203쪽] “지로, 부탁이야. 이제부터 착한 아이가 되는 거야. 알았지?” 하루코의 뺨이 지로에게 다가왔다. 그 순간 지로는 따스한 기운에 휩싸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정신이 멍해졌다. 그리고 기뻐서인지 슬퍼서인지 모를 눈물이 방울방울 무릎 위에 떨어졌다. “오하마 아주머니가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걱정하시겠니?”

[228, 233쪽] 외할아버지는 조금 망설이다가 다시 말했다. “너희 집엔 이제 아무도 살지 않게 될지 모른단다.” 외할아버지의 말은 지로의 가슴을 쿡 찔렀다. 움직이지 않는 별과 타닥거리는 짚신 소리가 자신의 처지를 더욱 처량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지로는 울고 싶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어. 사람이란 마음이 가장 중요하단다. 마음만 올바르면 집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단다.” … 외할아버지는 마을 앞에 다다르자 다시 말을 꺼냈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니? 네 아빠처럼 누구라도 진심으로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이란다. 아빠가 오늘 집안에 보관해 두었던 귀한 물건들을 내다판 것도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느라 돈이 떨어졌기 때문이란다. 너도 아빠처럼 그렇게 훌륭한 일을 할 수 있겠니? 네 마음속에 싫어하는 사람이 많으면 이다음에 커서도 아빠처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단다.”

[314∼315쪽]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든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그런 게 불편하시면 진작부터 병자를 맡아 달라는 부탁은 하시지 말았어야죠.” 마사키 외할머니가 일부러 빈정거려 한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혼다 할머니의 아픈 곳을 정통으로 찌르는 말이었다 … 분위기가 삽시간에 싸늘해졌다. 할머니는 서둘러 마사키 가 사람들에게 듣기 좋은 말을 늘어놓으며 싸늘해진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했다 … “그래도 지로만은 언제나 엄마 곁에 있어 주는구나.” 대여섯 살 때부터 보아 온 엄마의 얼굴은 이제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지로는 자기 앞에 누워 있는 엄마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엄마의 두 눈은 오하마나 하루코, 마사키 외할머니나 외할아버지에게서도 본 적이 없는 깊은 빛을 띠고 있었다. 그 빛은 마치 연못에 잠긴 달빛처럼 조용히 지로를 보고 있었다.

[322쪽] “지로 많이 컸지요?” “예, 아까는 정말 놀랐어요.” “내가 이 아이하고 유모한테 나쁜 짓을 너무 많이 했지요. 나도 다 알아요.” “에그, 무슨 그런 말씀을 …….” “어렸을 땐 그저 귀여워해 주면 되는데 …….” 오하마는 오타미가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오타미의 심정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난 이제야 겨우 알았어요. 헤어질 때가 돼서야 알았으니 …….” “작은 마님, 무슨 말씀을 …….” “죽는 건 하나도 겁나지 않아요. 다만 지로에게 아무것도 해 준 게 없어서 미안해요. 이대로 죽으면 지로에게 …….” “그만 하시래도요!” “날마다 지로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요.” “에구머니나 …….” 지로도 이때쯤에는 고개를 숙인 채 눈물만 뚝뚝 흘렸다.

[407, 421쪽] “지로는 아껴 주는 사람이 많아서 행복하겠구나.” ‘행복’이라는 낱말이 지로는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지금껏 한 번도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주위에서 누가 자기에게 그런 말을 해 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지로는 늘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아이라고 생각했고, 둘레 사람들도 자기를 그렇게 여기는 줄로만 알았다. 하루하루 무사히 버틴다는 심정으로 순탄하지 않은 환경을 뚫고 오늘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철이 들 무렵부터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날들이 모두 그랬다. 지로는 곤다와라 선생님이 말하는 지로는 자기가 아닌 것 같았다. “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구나?” … “나만 귀여워해 주고 넌 귀여워해 주지 않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야? 할머니가 너한테 하는 걸 보면 더 참을 수가 없어.” 하지만 지로는 교이치(지로 형)가 하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교이치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지 의심스러웠다. 지로는 교이치가 자신을 동정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공평한 것이 형제 간의 우애에서 얼마나 중요하고 바람직한 일인지는 자신의 지난날을 떠올리면 충분히 공감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굶주린 사람이 찾아헤매는 정의와 배부른 사람이 말하는 정의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 감정의 괴리는 상대방의 처지가 되어 보지 않는 한 결코 좁혀지지 않는다.

[556쪽] 지로가 중학교에 들어가서 가장 크게 실망한 사람들은 그런 친구들보다 선생님들이었다. 교실에 들어오는 선생님들 가운데 곤다와라 선생님처럼 따뜻한 눈빛으로 학생들을 지켜보는 선생님은 하나도 없었다. 중학교 선생님들은 소학교 선생님들보다 자기 과목에 대한 전문 지식이 좀더 많을 뿐, 인간미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오래전에 배운 지식을 오늘날까지 교실에서 쥐어짜 내야 하는 선생님들이 안쓰러울 때도 많았다. 더구나 점수와 처벌로 학생들을 위협하는 것이 교사의 권위라고 착각하는 선생님들을 볼 때면, 안쓰러움을 넘어 인간적으로 불행해 보였다. 학교에 볼모로 붙잡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지루한 표정을 하고 복도를 서성이는 인간들, 지로는 그것이 중학교 선생님들이라고 생각했다.

[606쪽] 어른들은 자신들이 아이들의 세계를 규정한다고 믿지만 어른들의 세계에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언제나 아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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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01-01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좋은글을 올려주시네요.
된장님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
 
바람드리의 라무 높새바람 22
류은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어린이책은 어떻게 써야 하는가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12] 류은, 《바람드리의 라무》



 우리 나라만큼 말과 탈이 많은 나라가 또 어디에 있을까 궁금하다고 느끼는 하루하루입니다. 나라를 이끈다는 분들이나 수십 수백 조를 벌어들인다는 큰 회사를 이끈다는 분들이나 여느 어른들이나 한결같이 ‘세계 시대’와 ‘지구 시대’와 ‘우주 시대’를 들먹이지만, 2010년을 코앞에 둔 오늘까지도 이 나라 어른들은 아직도 ‘중고등학생 머리길이와 치마길이’에 목매달고 있거든요. 세계 어느 나라에서 아이들 머리길이를 놓고 이러쿵저러쿵 떠들겠습니까. 지구 어디에서 아이들 치마길이나 옷매무새를 놓고 시끌벅적 말이 많겠습니까. 아이들한테 술담배를 하지 말라지만 어른들은 술담배를 즐깁니다. 아이들이 멋모르고 사랑놀이를 하다가 아기를 배는 일이 나쁘다고 하면서, 어른들은 으레 바람을 피우고 두다리나 세다리를 걸치는 한편 성폭력을 일삼는 사람은 바로 청소년이 아닌 어른입니다. 우리가 일컫는 청소년범죄란 하나같이 어른범죄를 시늉하는 꼴인데, 어른범죄 푼수와 견주면 얼마 안 됩니다. 어른 스스로 푸름이 앞에서 옳고 바르게 살아가지 않으니, 푸름이가 보고 배우는 모습이란 범죄요 성폭력이요 욕지꺼리요 돈과 이름값과 주먹힘에 목매다는 꼴입니다. 아이들 앞에서 공자님 말씀을 읊든 하느님 말씀을 읊든, 말로 읊는 매무새가 아닌 몸가짐으로 바르게 서며 살림을 꾸리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옛말에 맹자 엄마가 집을 세 번 옮긴다고 했는데, 맹자 엄마가 집을 옮겨다닌 까닭은 ‘아이들이 엉터리’라서 아니라, 마을 터전을 이루는 ‘어른들이 엉터리’였기 때문입니다. 서울 강아랫마을이 어떻고 어디는 또 어떠하고 같은 이야기는 한결같이 어른들이 빚어냅니다. 어른들이 저지르는 잘못이 고스란히 아이들한테 옮아갑니다. 우리 삶터는 어른들이 오늘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었고, 맑은 물과 깨끗한 바람이 사라진 우리 터전 또한 어른들이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어릴 적에 시냇물을 손으로 떠 마시고 어떠했다고 추억어린 이야기를 들추지만, 우리 아이들한테도 시냇물을 손으로 떠 마실 수 있도록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당신들 추억만 떠듭니다. 아이들한테 자연이 있어야 한다고 외치면서, 우리 자연을 깨끗하고 싱그럽게 가다듬는 데에는 조금도 마음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더 큰 자가용을 뽑고, 가까운 길도 자가용을 끌며, 갖가지 전기제품과 물질문명을 마음껏 누립니다. 아이들이 아닌 어른들이 누립니다.


.. “…… 놓아 줄까요?” “허허허! 네가 잡았으니 결정도 네 몫이지.” 카알은 호탕하게 웃었다. ‘아버지는 알고 계셨던 거야. 먼저 토끼는 내가 잡은 것이 아니라는 걸 말이야.’ 라무의 얼굴이 붉어졌다 ..  (18쪽)


 어린이문학이나 청소년문학이나 어른문학이나, 모두 어른이 빚어내는 문학입니다. 어린이노래나 청소년노래나 어른노래나 매한가지입니다. 어린이가 보는 영화나 연극이나 춤은 어떠합니까? 텔레비전에 나와 어른들 춤과 노래를 따라하는 아이들입니다. 어른들은 아이들 춤노래가 귀엽거나 재미있다고 깔깔거리는데, 아이들이 어른들을 고스란히 따라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아이들을 코앞에 둔 자리에서는 ‘말잘못 하나 함부로 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어렵거나 딱딱한 말을 써서도 안 됨’을 살갗으로 느끼며 다소곳하게 제 몸가짐을 갈무리하는 어른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코앞에 있어도 제대로 갈무리하지 않는 어른이 많고, 아이들이 눈앞에 안 보이면 아주 망나니처럼 막 나가는 어른이 많습니다.

 옳고 바를 뿐 아니라 아름답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어른도 꽤 있습니다. 그렇지만, 옳고 바르게 삶을 꾸리고 생각을 가누며 말글을 나누는 어른은 얼마나 될까 모르겠습니다. 어린이문학을 하는 어른이라서가 아니라, 청소년문학이나 어른문학을 하는 어른들은 삶과 넋과 말이 어떠합니까?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는 어른이라서가 아니라, 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어른이나 여느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어 일하는 어른은 어떠하지요? 인터넷에서 ‘어린이 청와대 누리집’은 쉽고 바르고 알맞게 말글을 가다듬으려 한다면, ‘어른이 보는 청와대 누리집’은 어떠합니까? 아이들 앞에서 ‘문자 쓰기’를 하는 어른이 있겠습니까? 문자 쓰기를 하는 어른을 아이들은 어떻게 바라보겠습니까?

 아이들 밥상에 얄딱구리하거나 화학약품으로 찌든 찬거리를 올릴 수 있습니까? ‘어른은 먹어도 돼’ 하는 마음을 ‘아이들도 한두 번 먹을 때에는 괜찮겠지’ 하는 마음이지는 않습니까?

 말만 예쁘장하다든지, 이야기만 놀랍다든지, 짜임새는 판타지로 꾸민다든지, 줄거리는 웃음이나 눈물이 묻어나는 재미난 글감이라든지 한다고 해서 어린이문학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가르침이 있느냐 없느냐로 어린이문학을 가르지 못합니다. 어린이문학이란, 우리 어른이 아이들한테 물려줄 삶입니다. 우리 어른이 살아가는 모습을 돌아보면서 우리 아이들한테 어떤 삶을 물려주고 싶은가 하는 꿈입니다. 우리 어른이 잘 살건 잘못 살건 꾸밈없이 헤아리면서 뉘우치거나 되씹는 가운데, 우리 아이들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빛줄기입니다.


.. 유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버진 (괴물) 로스를 막다가 돌아가셨어. 우리 모두를 위해서 말이야. 그런데 로스를 조종한 검은 복면이 다시 온다고 했어. 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내가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해.” ..  (145쪽)


 밤새 밀린 일을 하고 새벽에 일어나 마무리를 지을 무렵 아기가 깨어납니다. 아기는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빨래를 하는 아빠 곁을 종종걸음으로 따라 다닙니다. 말이 늦은 아기는 아빠 곁에서 놀고 싶어 합니다. 그렇지만 아빠는 빨래를 할 때에 아기보고 방으로 들어가라고 몇 번이나 다그칩니다. 겨울철이라 빨래하는 씻는방이 춥기 때문입니다. 아기는 춥건 말건 곁에서 빨래하기를 지켜보며 물놀이를 하고파 하는데 못내 서운해 합니다. 아빠 눈에 걱정스러운 모습이 아이 눈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빨래를 마칠 무렵 아기는 잠이 듭니다. 새벽 여섯 시부터 깨어 있던 아기이니 아침 여덟 시 즈음에 잠들 만합니다. 또한, 우리 아기는 낮잠을 살짝 자거나 안 자고 넘긴 다음 저녁 열 시나 열한 시까지 엄마 아빠하고 놀려고 합니다. 엄마 아빠가 함께 아기하고 어울리고 있다 하여도 날마다 지칠밖에 없습니다. 귀엽고 예쁜 아기이지만, 늘 곁에서 돌보고 보듬어야 하니 고단할밖에 없습니다.

 옆지기는 때때로 말합니다. 아기가 이 나이에는 우리 곁에서 잠깐도 안 떨어지려고 하지만, 기껏 열 살까지 이런 삶이 이어가겠느냐고. 어른들이 아기는 열 살까지만 효도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아기(아이)가 효도한다는 일이란, 엄마 아빠 곁에서 안 떨어지면서 지낸다는 모습이 아니겠느냐고.

 잠든 아기와 옆지기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아빠는 오늘 아침 일찍 집을 나서서 바깥일을 해야 합니다. 오늘 낮과 저녁은 엄마 혼자 아기와 씨름을 하며 듬뿍듬뿍 ‘효도를 받’아야 합니다.

 얼마 앞서 읽어낸 어린이문학 《바람드리의 라무》를 곰곰이 돌아봅니다. 바람드리에 사는 라무라고 하는 아이는 둘레 어른들을 바라보면서 나날이 무럭무럭 자라났습니다. 둘레 어른들한테서 좋은 모습도 보고 얄궂은 모습도 보면서 컸습니다. 좋은 모습을 보며 좋은 뜻을 품다가는, 얄궂은 모습을 보며 저 스스로도 얄궂은 쪽으로 기울듯 말듯 갈팡질팡하기도 합니다. 착하고 아름다운 어른들 곁에서 지내며 라무 스스로 착하고 아름다운 목숨으로 단단하게 뿌리내리기도 하지만, 못나고 뒤틀린 어른들 곁에서 시달리고 들볶이면서 자칫 마음이 다치거나 무너질 수 있었습니다. 이때에 라무 앞에 좋은 동무가 나타나 주었습니다. 또래동무로 좋은 동무이든, 나이가 많은 어른동무로서 길동무이든.


.. 수야는 하르진에게 밥이 든 큰 그릇을 건네고 하르진의 손을 잡았다. 수야의 손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이렇게 손이 따뜻한 사람이 그렇게 나쁜 짓을 하다니…….’ ..  (213쪽)


 좋은 어린이문학이란 어떤 작품을 가리킬까 헤아려 봅니다. 널리 사랑받는 어린이문학이란 어떤 작품을 두고 이야기할까 생각해 봅니다. 적어도, 어른이 아이한테 혼자 읽으라고 건넬 만한 작품이 되어야 할 테고, 어른이 아이한테 첫 쪽부터 끝 쪽까지 즐겁게 읽어 줄 만한 작품이 되어야 할 테지요.

 그러나, 읽는 재미나 즐거움에 앞서, 작품에 깃든 어른들 삶자락이 아름다워야 좋은 어린이문학이 아니겠느냐 싶습니다. 읽히는 기쁨과 보람에 앞서, 작품에 서린 어린들 넋과 얼이 싱그럽고 맑고 착해야 비로소 훌륭한 어린이문학이 아니겠느냐 싶습니다.

 예부터 이원수 어린이문학이나 임길택 어린이문학이나 권정생 어린이문학을 높이 여긴 까닭은 다른 데에 있지 않습니다. 이오덕 어린이문학 평론을 알뜰히 여기며 고맙게 돌아보는 까닭 또한 다른 데에 있지 않습니다. 어린이문학을 창작하거나 비평을 하는 어른은, 말재주와 논리와 줄거리에 앞서 말과 넋과 삶이 살갑고 튼튼하며 고운 빛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바람드리의 라무》를 써낸 분께서는 이 대목을 조금 더 깊이 살피고 널리 감싸안아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4342.12.29.불.ㅎㄲㅅㄱ)


 ┌ 《바람드리의 라무》(바람의아이들,2009)
 ├ 글쓴이 : 류은
 └ 책값 : 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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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엄마! 마음이 자라는 나무 21
유모토 카즈미 지음, 양억관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엄마가 내려준 ‘고운 목숨’ 선물을 깨닫기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9] 유모토 가즈미, 《고마워, 엄마》



 어릴 때 어머니한테서 들은 이야기는 그리 안 많습니다. 좀더 오래 많이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 안타깝다고 느끼지만, 어떻게 보면 어머니한테서 들은 이야기가 그리 안 많기 때문에 한 마디 두 마디 오래오래 되새기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한 마디 두 마디 더욱 곰곰이 돌아보고 한결 깊이 가슴에 새기고자 하지 않나 하고도 느낍니다.

 제 고향이며 삶터는 인천이기 때문에 웬만한 볼일을 보자면 서울로 길을 나서야 합니다. 저는 운전면허가 없을 뿐더러 앞으로 면허를 딸 생각이 없고 자동차 장만하거나 굴릴 주머니가 없으니 자전거로 시잉씽 달리거나 전철을 탑니다. 혼자 지낼 때에는 으레 자전거를 달렸고, 옆지기와 함께 살면서는 전철을 즐겨 탑니다.

 옆지기와 전철을 타고 서울을 오갈 때는 으레 출퇴근 발걸음으로 붐비는 때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때에서 살짝 벗어난 때이곤 했습니다. 그렇다 해도 사람은 많기만 했는데, 요 몇 달 아침저녁으로 출퇴근 때에 움직이니 그야말로 옴쭉달싹 못하면서 사람들한테 시달립니다.

 사람들한테 시달리는 일은 고달프거나 괴롭지 않습니다. 제가 시달리는 만큼 제 옆에 선 다른 사람들도 다 다른 느낌과 크기와 세기로 시달리고 있으니, 서로서로 매한가지이거든요. 다만 하나, 서로를 들볶는 사람들 매무새가 고달프고 괴롭습니다. 한 사람으로서 됨됨이가 얕거나 모자란 움직임과 몸짓에 치이고 밟힐 때에 쓰라리고 슬픕니다.

 어릴 때 어머니가 저나 형을 따끔하게 나무라던 말 가운데 하나를 요사이 아주 뼛속 깊이 느낍니다. “사람이 사람 앞을 지나다니면 안 돼.”

 어른이든 어린이이든, 어디로 가려고 할 때 앞에 다른 사람이 있으면 이이 앞으로 지나가지 말고 뒤로 지나가라고 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이를 어기면 따끔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좁은 집에 찾아온 손님이 마루에서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아 있으시면 어디로도 갈 수 없어 안절부절이었습니다. 쉬가 마려도 움직이지 못하고 눈치를 보아야 했고, 제발 어른이 제가 안절부절 어디로도 못 가고 있음을 느껴 주기를 기다리며 애타게 바랐습니다.


.. 나는 물론 아빠의 장례식을 지켜보았으며, 관 속에 누워 있는 아빠의 얼굴에서 살아 있을 때와는 다른 뭔가를 느끼고 겁에 질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빠의 죽음을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아빠는 도대체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 엄마도 나도 언젠가는 아빠처럼 그 어두운 구멍 속으로 빨려들어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친구들이나 선생님들은 너무도 밝고 힘차서, 내가 두려워하는 그런 어두운 구멍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 그럭저럭 학교에 도착하고 나면 엄마가 걱정이었다. 아빠처럼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은 아닌지, 너무 피곤한 나머지 병에 걸리는 것은 아닌지, 혹시 지금 이 시각에 나의 도움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  (22∼25쪽)


 동인천역에서 빠른전철을 탈 때, 사람들은 저마다 먼저 타려고 달려듭니다. 제 뒤에 서 있던 이들이 어느새 달음박질로 빈자리를 하나씩 꿰찹니다. 실랑이를 벌이기 싫고, 갑작스레 새치기하는 사람하고 다투기 싫어 으레 그냥 서서 갑니다. 용산역에서 내려 1호선으로 갈아타야 할 때에도 내리는 사람들은 우르르 쏟아지며 달음박질인데 저 같은 사람은 손쉽게 밀치고 밟으며 ‘먼저 자동계단에 타려’고 애씁니다. 저는 자동계단을 안 타고 돌계단만 밟으니 어차피 자동계단 쪽으로 가지 않으나, 옆이고 뒤고 제 앞으로 휙휙휙 달음박질하는 사람들은 무섭기까지 합니다. 시청역에서 내려 표를 끊을 때에도 똑같습니다. 사람들 매무새는 무시무시합니다.

 이 같은 아침저녁 전철길에 모질게 시달리고 나면, 집으로 돌아가 옆지기와 아기를 다시 만날 때 잔뜩 절고 지치고 힘이 없습니다. 쉬 짜증을 부립니다. 마음이 메말라 가고 차가워지고 쌀쌀맞고 맙니다.

 경쟁을 바라지 않고 경쟁을 하기 싫으며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면서 살고 싶기에, 제아무리 큰돈을 선물로 준다 할지라도 이렇게 뭇사람 물결에 휩쓸리는 일은 힘듦을 넘어 가슴이 아립니다. 왜 이렇게 우리들은 서로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듯 뜀박질을 하며 ‘내가 더 먼저’와 ‘내가 더 빨리’와 ‘내가 더 많이’가 되어야 할까요. ‘나와 네가 함께’나 ‘나와 네가 나란히’나 ‘나와 네가 즐겁게’로 거듭나기는 어려운가요.

 모두들 똑같은 ‘어머니’한테서 아름답고 맑은 목숨 하나 선물로 받은 몸일 텐데, 우리는 왜 내 몸이나 네 몸을 아름답게 여기지 못하나요. 왜 우리 몸을 서로서로 맑게 돌아보거나 건사하지 못하나요.


.. 나는 다림질을 하고 있는 할머니에게 달려가 편지를 내밀었다. “오사무네 엄마, 아기가 새로 태어나니까 오사무는 필요없다고 했잖아? 그런데 아기가 죽었다고 오사무더러 가지 말라니, 정말 너무해. 오사무가 너무 불쌍해.” 나는 세탁비누 냄새와 탕약 냄새가 밴 할머니의 앞치마에 얼굴을 묻고 눈물과 콧물과 침을 묻혔다. 얼마 후, 내가 얼굴을 들어올리자 할머니는 밤이 든 양갱을 주었다. 눈물과 콧물이 마구 뒤섞여 있던 목 안으로 부드럽고 달콤한 양갱이 넘어가자 갑자기 허기가 느껴졌다 ..  (115쪽)


 우리 어머니라고 안 서두르며 살지는 않았으나 ‘괜찮아!’ 하고 짧게 내뱉으며 우리 몫을 덜 가지는 모습을 곧잘 보여주었습니다. 우리 몫이 더 있다고 해서 우리가 더 배부르지 않음을 넌지시 가르쳐 주었습니다. 다른 이가 우리와 견주어 훨씬 배부른 데에도 우리 몫까지 얌체처럼 가로채더라도 ‘괜찮아!’ 하고 아쉬움 없는 한 마디를 뱉어냈습니다.

 우리 옆지기를 돌아봅니다. 우리 옆지기는 ‘괜찮아!’를 꺼내지 않으나 ‘됐어!’를 꺼냅니다. ‘우리가 안 가져도 돼!’를 꺼냅니다. 우리 두 손에 든 몫은 거의 없거나 텅 비었음에도 ‘됐어!’를 꺼냅니다.

 저는 옆에서 허전하다고 느끼며 ‘뭐여? 굶으라고?’ 하고 생각하지만, 이내 ‘그래, 조금 굶는다고 우리는 죽을 일이 없지.’ 하고 생각을 고쳐먹습니다. 우리 살림에 은행계좌 숫자가 늘어날 턱이 없으나 그 밑바닥하고 이마를 맞대는 얼마 안 되는 숫자마저 선선히 털어내어 (우리보다 그 돈푼을 바라는 자리에 있는 고운) 이웃한테 어느새 다 나누어 놓고 있습니다.


.. 예전에 엄마와 내가 살고 있던 그리운 그 방을 보고 나는 놀라고 말았다. 이렇게 좁고 이렇게 천장이 낮은 방에서 살았던가 하고. 그렇지만 덜거덕거리는 덧문을 열자 포플러는 변함없이 이쪽을 엿보고 있었다. 그 순간, 그 시절의 추억이 눈앞에 펼쳐졌다. 창문턱에 자그만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나의 모습과 식탁에서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  (158∼159쪽)


 지난주에 제 새 책을 하나 내놓았습니다. 이주에 또다른 새 책이 하나 나오고, 다음주에 또다른 새 책이 하나 나옵니다. 석 주에 걸쳐 세 가지 책이 나옵니다. 그동안 밀려 있던 책입니다. 이 세 가지 책을 한꺼번에 그러모아 음성에 계신 어머니와 아버지한테 보낼까, 아니면 세 번에 걸쳐 따로따로 보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전화를 자주는커녕 가끔도 잘 안 하는 주제이니, 세 번 따로따로 편지와 함께 책을 부쳐야 옳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체국에 갈 겨를이 거의 없으나, 가방에 책 담은 편지꾸러미를 늘 넣어 놓고는 낮나절에 길을 지날 일이 있으면 얼른 우체국에 가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아니, 이렇게 다짐합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아들내미 새로운 책을 얼마나 기쁘게 맞아들이며 즐겁게 읽어 주실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여태까지 어머니가 아들내미 책을 놓고 이런저런 느낌이나 생각을 꺼내어 본 적이 없으니, 잘 썼다고 여기는지 엉터리라고 여기는지 하나도 모릅니다. 그러나, 즐겁고 흐뭇하게 편지 몇 줄을 적어 보내려 합니다. 따로 말씀이 없어도 저 스스로 잘 쓴 책이라면 잘 썼고, 잘못 쓴 책이라면 스스로 잘못 썼음을 깨달아야 할 노릇이겠지요.

 책에 적힌 이름은 제 이름 석 자이지만, 제 이름 석 자가 책 하나에 새겨지기까지는 내 어버이가 쏟고 들인 땀과 피와 사랑과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땀과 피와 사랑과 믿음을 돌아본다면, 제가 쓴 책은 제가 쓴 책이라기보다 제 몸뚱아리와 손길을 빌어 내 어버이와 내 어버이를 낳은 또다른 어버이와 또다른 숱한 어버이들이 빚은 열매요 보람이라고 느낍니다. 저로서는 이 피와 땀과 사랑과 믿음을 제 책들에 알알이 담았는가 못 담았는가를 헤아릴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 어느 날, 할머니가 나에게 말했다. “나는 나이가 든 다음에, ‘그때는 참 젊었었지.’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았단다. 그러니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그러면서도 자유롭게 살아야 해.” 평소 욕심 많고 질투심 많고 독설가였던 할머니가 그런 가슴 찡한 말을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할머니는 그 외증조할머니의 딸이다. 할머니는 외증조할머니가 정해 준 상대와 얌전하게 결혼하여 자식 넷을 키웠는데, 역시 그 할머니에게도 마음껏 다 살지 못한 자신의 다른 모습이 있었던 모양이다 ..  (글쓴이 뒷말/182쪽)


 이야기책 《고마워, 엄마》를 읽습니다. 어머니가 ‘작품 주인공’ 만한 어린 날부터 겪은 아픔이 고스란히 되풀이되고 있었음을 ‘작품 주인공’은 ‘당신이 어린 날 어머니 나이’가 되면서 비로소 깨닫습니다. 작품 주인공이 보낸 어린 나날에 주인공네 어머니가 ‘어린 주인공이 앓고 겪고 부대끼는 슬픔과 생채기’가 덧나지 않도록 하려고 오래도록 말없이 참고 기다리고 헤아리고 있었음을 ‘주인공이 어머니가 된 다음은 아니고, 주인공이 어머니 나이에 가까워지’면서 시나브로 깨닫도록 마련해 놓고 있는 줄을 깨닫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되어 무엇을 깨닫고 있다 할 수 있을까요. 옆지기는 딸이 아닌 어머니가 되어 무엇을 깨닫고 있다 할 수 있을까요. 우리 두 사람은 우리 딸아이한테 무엇을 느끼거나 깨닫도록 하루하루 삶을 이어간다 할 수 있을까요. 오늘 하루 보낸 삶이 먼 뒷날 우리 딸아이가 ‘제 엄마 아빠 나이’로 다가설 즈음 무엇을 느끼도록 할까요. 우리 삶자락이, 우리 삶자취가, 우리 삶결이 우리 딸아이 앞날에 어떤 이야기로 다가설 수 있게끔 일구거나 가꾸거나 보듬거나 껴안고 있을까요.

 엄마한테는 엄마가 있으며 딸이 있습니다. 딸한테는 엄마가 있으며 뒷날 스스로 엄마가 됩니다. 스무 해이든 서른 해이든 마흔 해이든, 어느 만큼 햇수를 살아내면서 차근차근 ‘목숨 선물’을 사랑과 믿음을 실어 물려줍니다.

 틀림없이 아침저녁으로 지치는 몸이 되고, 지치는 몸에 따라 지치는 마음이 됩니다. 그러나,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고 히유 한숨 한 번 몰아쉬면서 새삼스레 이맛살 주름을 문질러 지우고 곰곰이 되씹습니다. 나를 들볶는 모든 사람들 누구나 누군가한테 ‘아이’요 모두들 ‘어머니’가 있는 고운 목숨임을 느끼고자 합니다. 아직 이이들 스스로 누군가한테 ‘아이’요 ‘어머니’가 있음을 살피지 못하지만, 언젠가 모두들 제자리를 깨닫고 고운 목숨이 무엇인지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믿고 싶습니다.

 엄마는 엄마이기에 고맙고, 나는 나이기에 고맙습니다. (4342.11.25.물.ㅎㄲㅅㄱ)


 ┌ 《고마워, 엄마》(푸른숲 펴냄,2009)
 ├ 글 : 유모토 가즈미 / 옮긴이 : 양억관
 └ 책값 : 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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