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 소년의 용기 창비아동문고 89
최승자 외 엮음 / 창비 / 199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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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책시렁 202


《물고기 소년의 용기》
 프란시스 투어
 최승자 옮김
 창작과비평사
 1985.12.5.


니꼴라는 물고기들을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물고기들이 사는 푸른 바닷속도 사랑했읍니다. 그리고 그는 바닷속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수많은 신기한 것들을 보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집으로 달려가 흥분하여 외쳤읍니다. “엄마, 방금 붉은 카네이션의 소용돌이 속에서 낙지떼들이 춤추는 것을 보았어요.” (9쪽)


“아가씨 혼자 있소?” 하고 가만히 소곤거렸읍니다. “집엔 아무도 없어요. 하지만 난 혼자가 아니에요. 난 하느님과 함께 있으니까요.” (21쪽)

봄이 되자 과일나무들은 꽃을 피웠고, 곡식들은 말 탄 사람만큼 높다랗게 자라났고, 곡식이 무르익어 가는 들판은 젊은 부부가 쓰는 황금빛 왕관보다 더 아름다왔읍니다. (38쪽)

“여긴 저의 집이니까 제가 주인이랍니다. 당신은 내게 가장 사랑하는 물건을 가져가라고 하셨잖아요? 난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도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을 가지고 왔어요. 이제 당신은 내 거예요!” (178쪽)


  어버이가 아이 곁에서 읊는 모든 말은 아이 마음에 씨앗이 되어 깃듭니다. 좋다 싶은 말을 비롯해 궂다 싶은 말까지 모두 씨앗으로 스며듭니다.

  이야기꽃을 펴는 마실을 가려고 고흥을 떠나 순천을 거쳐 아산으로 가는 길에 라디오를 들었습니다. 순천으로 가는 시외버스에서 버스일꾼이 아주 크게 틀어놓은 라디오라 어쩔 수 없이 듣고 마는데, 어느 어버이가 제 아이한테 끔찍한 말을 술김에 했다는 이야기가 흘러 깜짝 놀랍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이튿날에도 그 라디오 그 이야기가 마음에서 가시지 않습니다. 하루 지나서 그 이야기를 떠올리니 눈물이 핑 돕니다. 제 일이 아니어도 그 아이들 어버이가 너무 철없이 뱉은 말이 아이한테뿐 아니라 어버이 스스로 무너뜨리는 말이니 참으로 아파요.


  《물고기 소년의 용기》(프란시스 투어/최승자 옮김, 창작과비평사, 1985)를 읽는데 첫 꼭지부터 아이랑 어버이 이야기가 맞물립니다. 이탈리아 옛이야기를 묶은 책인데, 이탈리아에도 ‘말이 씨가 된다’는 옛말이 있구나 싶어요. 어버이가 아이 곁에서 문득 뱉은 말이 고스란히 씨앗이 되어 아이 마음에 깊이 박힌다고 해요. 아이는 어버이 말에 오래도록 마음이 다치는데, 나중에 어버이 곁을 떠나 스스로 새살림을 짓는 동안 이 아픈 생채기를 가만히 다스려 아물도록 하고, 이녁 어버이가 보여준 화살 같은 말씨앗을 꽃님 같은 말씨앗으로 바꾸어 낸다고 해요.


  새로 어른이 되는 아이는 한결 듬직하며 사랑스러운 숨결이 됩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아이는 모든 모습을 낱낱이 지켜보면서 배우지 싶어요. 따스한 어버이 모습은 따스한 대로 지켜보면서 배워 더 따스하게 북돋아요. 차가운 어버이 모습은 차가운 대로 지켜보고 배워서 찬기운을 풀어내어 새삼스레 포근히 살찌워요.


  우리 아이들 앞에 서는 어버이란 제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제 입에서 흐르는 말이 어떤 씨앗일는지, 제 손에서 피어나는 글이 어떤 꽃씨일는지 곰곰이 생각합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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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말할 수 없는 이야기 시공 청소년 문학 42
카롤린 필립스 지음, 김영진 옮김 / 시공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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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책시렁 143


《차마 말할 수 없는 이야기》

 카롤린 필립스

 김영진 옮김

 시공사

 2011.2.15.



카타리나가 속삭였다. “이제 다들 슬슬 돌아가려나 봐. 너, 우리 집에 있고 싶으면 여기 그냥 가만있어. 내가 가서 잠들었다고, 그냥 우리 집에서 자게 두라고 전할게.” (30쪽)


크리스티안은 창밖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코스프레가 뭔지 아빠에게 설명하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청소년들이 왜 그렇게 요란스럽게 변장을 하는 건지, 전혀 해롭지도 않은 걸 가지고 시비를 거는 고리타분한 어른들에게 벌써 수백 번도 더 설명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130쪽)


선생님을 찾아갈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그리고 지금도 자신을 위해 가는 것은 아니었다. 오로지 토비아스를 위해서였다. 이 일에 마침내 종말을 고하자면 가정을 무너뜨리는 한이 있더라도 가야만 했다. (206쪽)



  사랑을 받으면서 자란 아이가 어른이 되면, 둘레에 사랑을 흩뿌리는 삶을 짓는다고 느낍니다. 사랑을 못 받으면서 자란 아이가 어른이 되면, 저는 사랑을 못 받았어도 둘레에 사랑이 피어나도록 애쓰는 삶을 짓기도 하지만, 그만 사랑이 없는 눈길이나 손길로 둘레를 괴롭히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눈앞에서 마주하는 아이를 어떤 눈길하고 손길로 마주해야 할까요? 우리가 어릴 적부터 사랑을 받으며 자랐든 사랑을 못 받으며 자랐든, 어떻게 하루를 짓고 아이를 마주해야 즐겁거나 아름다울까요?


  《차마 말할 수 없는 이야기》(카롤린 필립스/김영진 옮김, 시공사, 2011)는 책이름대로 차마 말할 수 없는 이야기를 품은 아이가 드디어 입을 떼고 새로 일어서려고 하는 삶길을 다룹니다. 이야기에 나오는 아이는 어릴 적부터 사랑다운 손길이나 눈길을 거의 못 받습니다. 사랑스러운 손길이나 눈길을 거의 받은 적이 없기에 ‘무엇이 사랑이요’, ‘무엇이 사랑이 아니요’ 하는 갈랫길을 몰라요.


  받은 적 없는 사랑을 어떻게 알까요? 그리고 ‘받은 생채기’가 생채기인 줄 어떻게 알아챌까요?


  책에 흐르는 줄거리를 짚어 보면, 둘레에서 이 아이를 멋모른 눈으로 바라보기도 하지만 차분히 기다리면서 지켜보기도 합니다. 다만, 멋모른 눈으로 바라보는 이가 훨씬 많지 싶습니다. 아무래도 겉모습이나 겉몸짓만으로 아이를 바라보기 쉬우니까요.


  차마 말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비로소 입을 떼어 말하도록 하자면, 다그치거나 닦달할 수 없습니다. 더 깊이 아끼고, 더 부드러이 어루만지고, 더 따스히 사랑하는 손길이자 눈길이 되어야 해요.


  입을 다문 아니는 입을 다물고 싶어서 다물지 않아요.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를 배운 적이 없을 뿐입니다.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도 배운 적이 없을 뿐입니다. 누구한테 말해야 하는가를, 그리고 이렇게 말하고 난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도무지 생각할 수 없어요.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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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그렇게 찍으세요 - 사진 작가 최민식 우리 인물 이야기 6
강무지 지음, 한지선 그림 / 우리교육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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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책시렁 197


《뭘 그렇게 찍으세요》

 강무지 글

 한지선 그림

 우리교육

 2006.11.20.



민식은 아궁이에 굵다란 장작을 밀어넣고 나서 방으로 들어와 벽장 문을 열었습니다. 그림물감과 도화지! 아버지가 저번 주에 해주로 도장 재료를 사러 갔다가 민식을 위해 사다 준 선물이었습니다. 여러 화가의 작품이 담긴 그림책까지! (24쪽)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사실을 꾸미거나 부풀리지 않고 그대로 찍는 것이다. 이 볼품없이 일그러지고 불쌍한 사람들은 다름아닌 내 모습이 아닌가. 또한 내 부모형제이지 않는가.’ (76쪽)


‘왜 겉모습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사진 찍는 사람이 사진 찍기 편한 옷을 입으면 됐지, 꼭 신사복에 넥타이를 매야 하나, 참 나.’ (106쪽)


민식은 산동네에 있던 조그만 집마저 은행에 담보로 잡혔습니다. 융자를 받은 돈으로 사진집 《인간》을 이어서 펴냈습니다. 그러나 애써 펴낸 사진집이 잘 팔려서 창작에 보탬이 되기는커녕 정부 감시만 더 끈질겨졌습니다. (118쪽)



  너덧 해쯤 앞서 내로라하는 사진가·사진비평가 들이 모인 자리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이분들은 ‘청소년이 읽을 사진책을 여태 아무도 안 썼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다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청소년 사진책을 스스로 쓸 생각’을 안 하더군요.


  이분들 이야기를 한참 듣다가 “그러면 이런 자리에서 투덜거리지 말고 좀 스스로 써 보세요. 여러 사람이 여러 가지 책을 쓰면 더 좋을 테고요.” 하고 한 마디를 했어요. 이랬더니 한동안 조용합니다. 아무도 말을 더 안 합니다. 이러다가 딴 얘기로 돌리더군요.


  《뭘 그렇게 찍으세요》(강무지, 우리교육, 2006)는 사진님 최민식 님이 걸어온 자취를 돌아보는 이야기책입니다. 글쓴이는 사진을 그리 모르는 분으로 느낍니다만, ‘최민식’이라는 이름을 듣고 이분을 여러 걸음으로 만나서 같이 다니고 말을 섞은 뒤에 ‘취재를 바탕으로 쓴 동화’ 얼거리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이 만한 동화나 위인전도 나쁘지는 않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사진이란 무엇인가를 조금 더 깊이 헤아리거나 살피고서 이 이야기를 쓰거나 가다듬었으면 한결 나았으리라 느껴요. ‘최민식 목소리’하고 ‘최민식 발자취’는 담아내려고 몹시 애쓴 티가 나지만, ‘사진 목소리’하고 ‘사진 발자취’는 거의 못 건드렸거든요.


  왜 이렇게 사진을 찍는지, 이렇게 찍은 사진은 이 삶터에 어떻게 이바지를 하는지, 사진이란 우리 삶에서 어떤 자리에 있는지, 어린이나 푸름이가 손전화 기계로도 얼마든지 사진을 찍고 나누는데, 이때에 어린이나 푸름이가 알아둘 만한 대목은 무엇인지 …… 여러 가지로 짚을 만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짚을 적에 비로소 사진가를 둘러싼 동화나 위인전이라 할 테지요.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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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벨벳 간바라 메구미 시리즈 (너머) 3
온다 리쿠 지음, 박정임 옮김 / 너머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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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45


《블랙 벨벳》
 온다 리쿠 글
 박정임 옮김
 너머
 2018.6.10.


개인이 꾸준하게 정보를 모으고 있는 사이트가 1차 정보에 빠르기도 하고 정확할 때도 있다. 조직이 커지고 관료적인 색채가 강해지면 대량의 정보를 수집할 수 있지만 놓치는 정보도 많아지는 듯하다. (49쪽)

진정해. 진정하고 생각을 해. 천천히 심호흡한다. (93쪽)

“난 몰랐는데 일본 육군 의료관계자 중에서 전범이 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해.” “응. 뭐 솔직히 까놓고 얘기해서 미국의 의도로 그렇게 된 거야.” (169쪽)

“대체 왜 뭐든지 부숴버리는 걸까.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다시 활용하거나 아름다우니까 보존하자거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나?” “신이라는 이름이 붙는 것은 온갖 이유로 파괴를 장려하니까요.” (274쪽)

“확실하게 말할게. 결국 미국, 그것도 네가 소속된 회사야. 위저드그룹이 T공화국에는 비밀로 하고 T공화국 내부에서 특수한 화학무기를 만들고 있어.” “거짓말!” 얼빠진 듯 경박한 목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362쪽)



  무슨 까닭으로 이런 일이 터지는지 여느 사람 여느 자리에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만, 곁에서 아리송한 일이 터지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두 나라 사이에 싸움이 터지는 속내라든지, 사람한테 이바지할 일이 없을 우라늄을 만져서 발전소나 핵무기를 굳이 만들어 내는 속내를 쉬 알 길이 없어요. 이런 데에 세금으로 어마어마하다 싶은 돈을 쏟아붓는데, 이 어마어마한 돈은 그런 일에 쏟아부을 만할까요?

  큰돈뿐 아니라 푼돈조차 들이지 않아도 숲을 푸르게 가꾸면서 전기를 얻는 길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햇볕으로 전기를 얻는다고 할 적에 고속도로나 찻길에 햇볕판을 지붕처럼 붙이면 될 일이지만, 이렇게 하지 않고 외지며 조용하고 아름다운 시골 멧자락을 밀어내어 시멘트를 들이붓고서 햇볕판을 붙이는 정책만 이어집니다. 왜 이렇게 할까요?

  우리 삶터를 온통 더럽히거나 망가뜨려서 맑은 물이나 깨끗한 밥을 먹기 어렵게 하면서, 또 싱그러운 바람을 못 마시게 하면서, 사람들이 몸이 아프다고 할 적에 병원하고 약에 기대도록 해요. 왜 이렇게 할까요? 맑고 푸른 삶터를 누구나 누린다면, 엘이디 전구가 아닌 햇빛으로 하루를 누리도록 한다면, 페트병에 담긴 물이 아닌 마을마다 흐르는 냇물을 손으로 떠서 마시도록 한다면, 아플 사람이 있을까요? 그러나 이런 터전이 되도록 나아가려는 정책은 좀처럼 안 나옵니다.

  《블랙 벨벳》(온다 리쿠/박정임 옮김, 너머, 2018)을 읽으면서 수수께끼를 생각합니다. 나라, 기업, 전문 학자(대학교·연구소), 이렇게 셋이 손을 맞잡고서 뒤에서 벌이는 검은짓을 바탕으로 엮은 줄거리를 살피면서, 학교에서나 사회에서나 늘 거짓말을 보여주거나 가르친 나날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책에 적힌 역사는 참말 역사가 맞을까요? 시사상식은 참말 시사상식이 맞을까요? 우리는 거짓 이야기가 마치 참인 줄 잘못 알면서 휘둘리는 나날은 아닐까요?

  요즈음 나오는 손전화 기계를 보면 ‘블루 라이트 차단 기능’이 있습니다. 이런 기능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이런 기능을 알려주는 손전화 가게는 몇 군데일까요? 셈틀이나 텔레비전 화면에서 늘 ‘블루 라이트’가 나와서 우리 눈을 갉아먹는 줄, 엘이디 전구도 우리 눈을 갉아먹는 줄, 어디에서 누가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들려줄까요? 안경집이 왜 엘이디 전구를 그렇게 눈이 부시도록 밝히는가 하는 속내를 제대로 짚는 이는 어디에 있을까요?

  소설은 그저 소설일 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삶이 있기에 소설이 있고, 삶을 그리기에 소설이라는 글이 태어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눈을 감거나 귀를 닫은 채 쳇바퀴질을 하느라 놓치는 삶을 소설이 담아내어 들려준다면, 찬찬히 눈을 뜨고 귀를 열 노릇이지 싶습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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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딸
재키 프렌치 지음, 공경희 옮김, 기타미 요코 그림 / 북뱅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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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책시렁 196


《히틀러의 딸》

 재키 프렌치

 공경희 옮김

 북뱅크

 2008.12.5.



“하이디도 전쟁을 하는 것은 알았어. 사람들이 전쟁에 대해 이야기했거든. 하지만 그것이 히틀러 잘못이라고는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어. 집안사람들은 모두 히틀러를 위해서 일하는 이들이었어. 그들은 히틀러를 훌륭하다고 여겼고, 하이디에게 그렇게 말했어.” (57쪽)


  우리는 서로 어떤 눈으로 바라보면서 부를까요? 우리는 때때로 ‘서로 다른 사람’이나 ‘저마다 다른 숨결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인 줄 잊은 채 부르지는 않을까요? 따지고 보면 “누구 아들”이나 “누구 딸”이기는 하겠으나, “누구 아들이라더라”나 “누구 딸이라지” 같은 껍데기를 자꾸 씌우기도 합니다. 이러면서 이름을 잊는달까요.


  어떤 사람 아들이나 딸이라 해서 어느 사람하고 똑같거나 닮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느 사람이 크게 잘못을 저질렀기에 그 사람 아들이나 딸이 그 잘못을 고스란히 덮어써야 하지 않아요. 다 다르거든요. 그리고 어느 사람이 크게 빛나는 일을 했어도 그 사람 아들이나 딸은 저마다 다른 길을 갈 뿐이겠지요.


“그렇지. 아들의 잘못은 아니겠지. 그러나 그가 아버지가 한 짓을 잘했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아버지의 악행을 똑바로 보지 않으려 한다면, 그건 안 될 일이지. 과거의 잘못을 똑바로 보지 않으면 되풀이할 수 있단다.” (114쪽)


  어린이문학 《히틀러의 딸》(재키 프렌치/공경희 옮김, 북뱅크, 2008)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첫째, 호주 아이들이 서로 이야기로 생각을 북돋우고 마음을 살찌우는 삶을 보여줍니다. 둘째, “히틀러 딸”인지 “하이디”인지, 어느 이름으로 부르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똑같은 사람을 아주 다르게 보거나 느낄 뿐 아니라, 이이는 이웃이나 동무가 될 수도 있지만, 아예 쳐다보기도 싫은 것이 될 수 있는 길을 보여주어요.


  다만, 이 책은 ‘지은 이야기’입니다. 히틀러란 사람한테 딸이 있는지 없는지 알 길은 없다고 해요. ‘히틀러한테 딸이 있다면, 그리고 그 딸이 전쟁통에 살아남아서 아버지하고 아주 다른 길을 조용히 걸어간다면,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할 만할까?’를 동화 얼거리에 담아서 묻습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히틀러 딸” 또는 “하이디”는, 이 이야기에서 짝을 만나 아이를 낳았다고 해요. 이때에 어느 아이는 “히틀러 손자!”라 말하지만, 다른 아이는 “하이디 아이!”라고 대꾸합니다. 자, 이때에도 또 다른 이름이자 삶입니다. 그리고 “누구네 아이”이기 앞서 “아무개”라고 하는 그 아이 이름이 있어요.


“의사랑 결혼해서 아이들도 낳았어.” “히틀러의 손자들이네!” 마크가 말했다. “아냐. 하이디의 자식들이야.” 안나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196쪽)


  우리는 서로 이름으로 부르기에 동무가 됩니다. 생각해 봐요. 동무하고 노는데 동무를 “누구 아들”이나 “누구 딸”이라 부를까요? 아니지 않나요? 우리는 동무 이름을 부르며 동무하고 놀아요. 오로지 동무 이름만 떠올리면서 동무하고 마음으로 사귀어요.


  서로서로 어떤 눈으로 보려나요?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마주하려나요? 우리는 어떤 삶으로 손을 잡거나 손을 뿌리치려나요? 우리는 서로 무엇을 보려나요? 기쁘게 어우러질 삶을 바라는지, 아니면 허울에 사로잡힌 채 스스로도 삶길을 못 보려는지, 찬찬히 돌아볼 노릇이라고 봅니다.


더피(히틀러)의 딸은 이제 없었어. 겔베르 선생님이 만들려고 애쓰던 착한 아이도 사라졌어. 남은 것은 하이디뿐이었어. 하이디의 마음속 깊이 있는 작은 씨앗뿐이었어. 살아남아야 했어. 그래야 씨앗이 자랄 수 있으니까. (184쪽)


  아이들이 저마다 생각을 새롭게 지피는 이야기를 다루는 《히틀러의 딸》에서 찬찬히 짚기도 하는데, 잘잘못과 사랑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는 서로 이웃이 되려는지 동무가 되려는지, 아니면 그냥 남남이거나 미워하는 사이가 되려는지를 자꾸자꾸 물으면서 생각을 북돋웁니다.


  우리가 한자리에 모여서 만난다면, 내가 너를 만나고 네가 나를 만난다면, 바로 너는 너요 나는 나이기 때문일 테지요. “누구네 집 아이”라는 껍데기를 헤아리면서 만날 수 있을까요? 이런 만남이 서로 즐거울까요?


  허울이 도사리는 삶이 될 수 있지만, 깊이 따스하면서 넉넉하게 어깨동무하는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이야기책은 “히틀러의 딸”을 다루는데, 한국이라면 “전두환 아들”을 떠올릴 만하겠지요. 그러나 살가이 만나는 고리가 아닌, 미움과 멍울이라는 고리는 이제 끊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다같이 끊어야겠지요. 그분도, 우리도. 그리고 다함께 새로운 사랑으로 이어야겠지요. 흙을 만지고 숲을 노래하면서.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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