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츠바랑! 13
아즈마 키요히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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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602



“아빠는 이담에 크면 뭐 해?”

― 요츠바랑! 13

 아즈마 키요히코 글·그림

 김동욱 옮김

 대원씨아이 펴냄, 2016.1.10. 5200원



  2016년 1월에 한국말로 나온 《요츠바랑!》(대원씨아이) 열셋째 권을 읽다가 문득 이 만화책 첫째 권을 떠올립니다. 《요츠바랑!》 첫째 권은 2004년에 나왔습니다. 어느덧 열두 해가 흐르는군요. 그런데 이 만화책에 나오는 아이는 열두 해 앞서나 이제나 거의 같습니다. 만화책 한 권을 통틀어서 헤아린다면, 만화책 한 권으로 ‘하루’ 이야기가 흐르기도 하고, ‘이틀이나 사흘’ 이야기가 흐르기도 합니다. 지난 열 몇 해에 걸쳐서 열세 권이 나왔다 하더라도, 만화책에 나오는 아이 ‘요츠바’는 그때나 이제나 엇비슷하다고 할 만합니다.


  《요츠바랑!》 첫째 권이 나올 무렵 우리 집 큰아이는 아직 안 태어났지만, 이제 우리 집 큰아이는 이 만화책을 재미있다고 여길 만한 나이까지 자랍니다. 우리 집 작은아이는 어느덧 ‘요츠바’하고 엇비슷한 나이로 자랍니다. 앞으로 이 만화책이 몇 권까지 나올는지 모르겠는데, 꾸준히 나오고 나와서 스무 권쯤 나올 때가 된다면, 어쩌면 우리 집 작은아이가 스무 살이 넘을 수 있으리라 느껴요.



“‘같이 모래놀이 하러 가고 싶다’고 해 봐!” “지금 좀 바쁘니까 담에 가자.” “엥? 엥? 에엥! 아빠는 모래놀이에 소질 있으면서.” (24∼25쪽)


“요츠바는 이담에 크면 뭐 할 건데?” “캠프.” “캠프가 재밌긴 했었지.” “아니면 우동 가게나 빵 가게! 아니면 요술쟁이나 주부.” “다양하네. 빵 가게는 처음 듣는걸.” “그치만 우동 먹고 싶은 날도 있고, 빵 먹고 싶은 날도 있잖아. 해파리 만들어 줘. 아빠는 이담에 크면 뭐 할 거야?” “응?” (57쪽)



  만화책 《요츠바랑!》에는 대단하다 싶은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아주 작은 이야기가 나와요. 요츠바라는 아이가 아버지랑 둘이 살면서 만나는 이웃 이야기가 수수하게 나오고요. 요츠바라는 아이가 때로는 심심하게 때로는 재미나게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기쁘게 누리는 하루 이야기가 흐릅니다.


  이웃 언니나 아주머니하고 노는 이야기가 만화책에 흐릅니다. 아버지랑 밥을 먹고나 몸을 씻으면서 나누는 짤막한 이야기가 흘러요. 열셋째 권에서는 먼 데에서 찾아온 할머니 이야기가 흘러요.


  그나저나 요츠바는 아버지한테 “아빠는 이담에 크면 뭐 할” 생각이냐고 묻습니다. 만화책에 나오는 아버지는 요츠바한테 무엇을 하고 싶다 하는 말을 딱히 안 합니다. 아니, 어쩌면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는지 모르나, 수다쟁이 요츠바가 혼자 신나게 말을 이어요.


  이 대목에서 우리 집 아이들을 떠올려 봅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나한테 “아버지는 이담에 크면 뭐 할래?” 하고 묻는다면, 우리 집 아이들은 아버지가 이 물음에 대꾸를 할 때까지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끝없이 묻습니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어떤 말을 들려줄는지 궁금하니까 끝없이 묻지요. 나는 아이들이 묻는 말에 깊이 생각하고 곰곰이 헤아리면서 말합니다. 때로는 곧바로 말하다가 나중에 더 생각해 보고서 다시 말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만 무럭무럭 자라지 않고 어른도 무럭무럭 자라니까요. 아이 못지않게 어른도 몸이며 마음이 새롭게 자라니까요.



“왜? 무서운 꿈 꿨냐?” “꿈, 꿈은 꿨어. 두랄루민이랑, 어라? 까먹었어.” (71쪽)


“이거 요츠바가 만들었니?” “응! 할머니 온다고 그래서!” “그랬니? 고맙다. 요츠바 마음씨가 참 곱기도 해라.” (92쪽)



  만화책 《요츠바랑!》이 아니어도 우리 집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수수한 하루야말로 온갖 이야기가 흐르는 삶’이라고 느낍니다. 달력이나 일기장에 오늘 하루 어떤 일을 했는가를 적바림하지 않으면 어영부영 잊으면서 지나가기 일쑤가 되지만, 달력이나 일기장에 오늘 하루 누린 기쁨과 재미와 보람을 가만히 적바림하면, 내 발자국은 어느덧 아름답고 알차며 신나는 삶이었네 하고 돌아볼 만해요.


  아이도 꿈을 꾸고, 어른도 꿈을 꾼다고 할 수 있지요. 아니, 아이만 꿈을 꾸는 삶이 아니라, 어른도 꿈을 꾸는 삶이라고 느껴요. 어른으로서 나부터 즐겁게 꿈을 꿀 때에 아이들한테도 즐겁게 꿈을 꾸는 길을 보여주고 들려주고 알려주면서 가르칠 수 있어요. 어른으로서 나부터 꿈을 즐겁게 꾸지 않으면, 아이들한테 아무런 꿈을 못 보여주고 못 들려주고 못 알려줄 뿐 아니라 못 가르치는구나 하고 온몸으로 느낍니다.



“할머니네 집에 있었을 때는, 맨날 아침마다 이 슥삭슥삭 소리가 들려서 좋았어!” “그럼 앞으로 요츠바가 이 소릴 내렴.” (122쪽)


“고맙지만 날씨가 좋아도 가 봐야 한답니다.” “그럴수가. 우우우. 우우우우.” “또 선물 갖고 올게.” “선물 같은 거 없어도 돼.” (196∼198쪽)



  아이들을 보러 오는 손님이 아이한테 꼭 선물을 해 주어야 아이들이 기뻐하지 않아요. 선물을 한다고 할 적에 값비싸거나 값진 것을 주어야 하지 않아요. 연필 한 자루나 지우개 하나라도 아이들은 ‘나(아이)를 사랑해 주는 분’ 손길이나 숨결이 깃든 것으로 여기면서 알뜰히 품습니다. 사랑을 받아서 사랑으로 자라는 아이들이기에, 대단한 선물이 아니라 고운 사랑을 바라요. 사랑을 먹으면서 사랑으로 무럭무럭 크는 아이들이기에, 더 큰 선물이 아니라 넉넉하고 따순 사랑을 반겨요.


  함께 놀 수 있어서 기뻐하는 아이들입니다.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어서 활짝 웃는 아이들입니다. 같이 밥상맡에 둘러앉아서 이야기꽃을 피우기에 까르르 웃으며 춤추는 아이들입니다. 새롭게 나들이를 다니고, 살가이 손을 잡기에 언제나 노래를 부르면서 놀 줄 아는 아이들입니다.


  만화책 《요츠바랑!》에 나오듯이 우리 삶도 무척 수수하기 마련이지 싶어요. 이 수수한 삶에서 모든 기쁨을 곱게 길어올릴 수 있지 싶어요. 수수하기에 아름답고 수수하기에 즐겁지 싶어요. 수수하기에 사랑스럽고 수수하기에 재미나지 싶어요. 그래서 나뭇가지 하나로도 신나게 놀 수 있듯이, 100원 한 닢으로도 해맑게 웃을 수 있습니다. 어떤 마음이 되느냐에 따라서 어떤 살림이 되느냐가 달라질 테고, 어떤 생각을 씨앗으로 심느냐에 따라서 어떤 꿈을 이루느냐가 달라질 테지요. 나도 아이들처럼 ‘이다음에 커서 어떤 사람이 될까’ 하고 새삼스레 돌아보면서 빙그레 웃는 하루가 흘러갑니다. 4349.1.27.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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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 Kitchien 7 - 완결
조주희 글 그림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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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맛을 내는 솜씨는 늘 네 손길에 있어

― 키친 7

 조주희 글·그림

 마녀의책장 펴냄, 2012.1.30. 1만 원



  조주희 님이 빚은 만화책 《키친》(마녀의책장)은 2009년에 1권이 나왔고, 2012년에 드디어 7권이 나오면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야기를 마무리짓습니다. 맛있는 이야기를 수수한 밥상에서 찾는 만화책 《키친》이기에 이 만화책이 7권에서 끝나지 말고 10권이든 20권이든 30권이든, 그야말로 오래오래 나올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래도 이 만화책이 일곱 권이나 나올 수 있었다는 대목으로 반가우면서 고맙다고 여기고 싶습니다. 요리 솜씨를 뽐낸다든지, 요리 대회를 겨룬다든지, 맛집 순례를 한다든지, 이런저런 흔하거나 뻔한 얼거리가 아니라, 삶을 사랑으로 짓는 살림이 되어 밥 한 그릇을 나누는 이야기를 만화로 담아낸 숨결이 더없이 고운 《키친》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비온 뒤의 죽순마냥 쑥쑥 자라고, 영감이 아직 듬직한 어깨를 가진 건강한 사내였을 땐, 두부로 온갖 음식들을 만들어냈다. 바싹 부쳐낸 두부를 간장과 갖은 양념으로 조려낸다거나, 호박과 양파로 달달하게 끓여내는 된장국에도 빠짐없이 자리잡았다. 영감에게 바가지를 박박 긁은 저녁에는 미안한 마음에 두부김치를 내놓았었다. (10∼11쪽)



  만화책 《키친》 일곱 권을 읽는 동안 늘 한 가지를 떠올렸습니다. 맛을 내는 솜씨는 늘 네 손길에 있다고, 또는 맛을 내는 솜씨는 바로 내 손길에 있다고, 어디 먼 데에서 맛이나 멋을 찾지 말자고 하는 이야기를 떠올렸어요. 남이 차려 주는 밥이 아니라 내가 손수 차리는 밥이 맛있고, 내가 온 사랑을 담아서 짓는 밥처럼 남들이 나한테 이녁 온 사랑을 담아서 지어 주는 밥이 맛있다는 대목을 이 만화책을 읽는 동안 새삼스레 되새겨 보았습니다.


  집일이 고단하다면 그야말로 ‘남이 좀 밥을 차려 주었으면’ 하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너무 고단하니까요. 그런데, ‘고단하다는 핑계’로 ‘남이 차린 밥’을 먹을 적에는 으레 뭔가 아쉽거나 섭섭하거나 모자라다고 느끼기 마련이지요. 왜냐하면 ‘돈으로 밥을 사다가 먹을 적’에는 밥맛에 마음이 깃들지 못하거든요.


  편의점 김밥이나 도시락을 사다가 먹더라도, 이 편의점 김밥이나 도시락을 밥상에 차리는 손길이 따스하거나 포근하다면, 이 편의점 김밥이나 도시락도 무척 맛있습니다. 공장에서 찍어낸 과자이기에 덜 맛있지 않아요. 《키친》 일곱째 권에 나오는 짧은 이야기처럼, 소년원에 들어간 제자(학생)한테 과자를 사식으로 넣어 주는 담임교사는 이녁(담임교사)이 나누어 줄 수 있는 가장 ‘사랑스러운 맛’을 아이한테 나누어 주는 셈입니다.



전학 온 첫 날 찾아온 아버지는 한눈에 봐도 알코올 중독자였다. 그 녀석은 사랑은커녕 밥조차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자랐겠지? (68쪽)


목록에 적힌 과자 항목을 모조리 체크했다. 같은 방 동료들이 환호성을 지를 만큼. 태어날 때부터 아무것도 주어진 것이 없었던 너에게 더 많은 것이 돌아가야 하지만, 달콤하게 반짝여야 할 유년의 세계, 너는 아직 알록달록한 과자들에 열광할 어린아이인걸. 잠깐이라도 행복감을 맛보았으면. (74∼75쪽)



  만화책 《키친》은 ‘밥맛’이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잘 밝히기 때문에 더없이 돋보입니다. 라면 한 그릇을 이야기해도, 과자 한 봉지를 이야기해도, 소주 한 잔이나 막걸리 한 잔을 이야기해도, 달걀을 삶거나 부친다고 하더라도, 밥맛이란 늘 ‘삶맛’이요 ‘사랑맛’이며 ‘살림맛’이라고 하는 대목을 찬찬히 잘 들려줍니다.


  가장 빼어난 요리사를 찾아내려고 하지 않는 《키친》입니다. 가장 훌륭한 요리 장인을 밝히려고 하지 않는 《키친》입니다. 수수하다면 수수하고 투박하다면 투박하지만, 우리가 늘 마주할 수 있는 이웃들이 저마다 즐겁게 삶을 사랑하면서 짓는 밥 한 그릇을 이야기하는 《키친》이지요.



“조선은 그저 유교의 감옥일 뿐입니다. 이 작은 계란처럼 꼭꼭 갇혀 있어 깨닫지 못하는 것이지요.” (36쪽)


“다들 선비님처럼 숨어서 불평만 한들 조선이 달라질 리는 없지 않습니까. 선비님 같은 양반들이 탁상공론만 일삼으니 조선이 이 모양이 된 겁니다.” “여전히 내가 알 속에 있다는 겁니까? 그렇다면 그대는 어떤가요. 대영제국이라는 강력한 힘을 가진 강대국이란 알의 껍질은?” (50∼51쪽)



  어버이는 아이한테 밥을 차려 줍니다. 밥을 잘 짓든 못 짓든, 어버이는 어버이 나름대로 가장 맛나게 밥을 차려서 줍니다. 할머니한테서 얻은 김치로 밥상을 차리든,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시켜서 밥상을 차리든, 소시지를 볶거나 된장국을 끓여서 밥상을 차리든, 아이들은 어버이가 나누어 주는 따스한 손길에 어린 숨결을 받아서 먹습니다. 어버이는 아이한테 밥을 징검돌로 삼아서 사랑을 주는 사람이에요.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밥을 다리로 삼아서 사랑을 받는 사람이지요.


  손맛은 먼먼 옛날부터 고이 흐릅니다. 손맛은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이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어서 더욱 살뜰히 가다듬습니다. 손맛은 내가 나부터 즐기는 맛이면서 내 이웃하고 동무한테 베푸는 맛입니다. 손맛은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가 손수 짓는 꿈과 사랑이 고스란히 담긴 맛입니다.



좋은 음식은 자식에게 내려오는 걸까? 독특한 향이 난다. 흙 냄새인가, 풀 냄새인가, 바람 냄새인가. 깊은 산의 모든 향기를 몇 년이고 안으로 안으로 담아둔 진한 향이 난다. 평범하기 짝이 없던 외갓집의 뒷산은 이런 보물을 조용히 키우고 있었다. (111∼112쪽)


“그럼 넌 성공한 거네. 가출했잖아.” “아니. 난 후회하고 있어. 엄마한테 미안해. 나름 엄마의 방식대로 너무나 사랑했어. 정말 날 사랑했어. 우리에겐 다른 방법들이 있었을 텐데.” (129쪽)



  밥 한 그릇마다 이야기가 있습니다. 빵 한 점에도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부 한 모에도 이야기가 있고, 콩 한 알에도 이야기가 있어요. 만화책 《키친》은 바로 이 같은 대목을 잘 살려서 보여줍니다. 밥 한 그릇에서 수수하게 이야기를 길어올리고는, 이 이야기로 따끈따끈한 사랑을 가꾸는 기쁨을 가만히 보여주어요.


  오늘 이곳에서 이 밥 한 그릇으로 새롭게 기운을 차리지요. 오늘 이 보금자리에서 이 밥 한 그릇으로 새삼스레 힘을 얻지요. 오늘 이 작은 집에서 이 밥 한 그릇으로 조촐하게 이야기꽃을 피우지요. 오늘 이 따사로운 살림터에서 이 밥 한 그릇으로 아기자기하게 웃음을 노래하지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그릇을 두 손을 모아서 쥐면서 나긋나긋 속삭입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국그릇을 두 손으로 아이들한테 건네면서 상긋상긋 속삭입니다. 우리 몸에 들어오는 이 고운 숨결로 새롭게 놀이를 즐기는 하루를 짓자꾸나. 4349.1.26.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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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소년 12
시무라 타카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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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600



내가 나를 밝히며 걷는 길

― 방랑 소년 12

 시무라 타카코 글·그림

 이상은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5.12.25. 5000원



  “벽장에서 나오다”를 가리키는 ‘커밍아웃’이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벽장에 스스로 갇힌 채 바깥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훌훌 털어내겠다고 하는 커밍아웃이라 할 만합니다. 영어로는 ‘커밍아웃’이나 ‘컴 아웃 오브 클로셋’이 될 테고, 한국말로는 ‘벽장열기’나 ‘빗장풀기(빗장열기)’가 될 테며, 때로는 ‘털어놓기’나 ‘나를 밝히기’나 ‘나를 말하기’가 될 테지요.


  시무라 타카코 님이 빚은 만화책 《방랑 소년》에는 초등학교를 다니는 나이인 때부터 ‘내가 누구인가?’를 스스로 돌아보면서 ‘내가 나를 밝히는’ 아이들이 나옵니다. 바깥에서 바라보는 눈길로 따지는 사내나 가시내가 아니라, 내가 나를 바라보면서 나한테서 느끼는 ‘숨결’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이를 씩씩하게 밝히면서 길을 걷는 아이들이 나와요.



“싫어, 애들이 놀릴 텐데.” “아무렴 어때. 어차피 이제 곧 졸업이잖아. 적당히 무시하면 돼.” (13쪽)


“둘 중 한 명이 남자래.” “뭐? 진짜? 누구?” “몰라. 둘 다 남자일지도.” “거짓말.” (20쪽)



  ‘사내스러운’ 가시내는 치마를 벗으면서 바지를 입곤 합니다. 그러면 ‘가시내스러운’ 사내는 바지를 벗으면서 치마를 입어도 될까요? 바지 입는 가시내를 놓고는 그다지 말이 많지 않은(그러나 말이 안 많다고 할 수도 없지만) 사회 얼거리라 할 수 있는데, 치마 입는 사내를 놓고는 대단히 말이 많은 사회 얼거리라 할 수 있어요.


  이를테면, 학교에서 ‘바지를 입고 다니는 가시내’가 있고, 학교에서도 이를 받아들여 주지만, ‘치마를 입고 다니는 사내’를 받아들여 줄 만한 학교가 있을는지 궁금해요. 회사라면 더더구나 ‘치마 입는 사내’를 받아들여 줄 만한 곳이 매우 드물다고 하겠지요.



“나는 줄 게 없는데.” “아니야. 그런 거 필요 없어. 선물 같은 건 됐으니까! 나랑 사귀자. 저기, 내 성격이 마음에 안 들면 고칠게. 무신경하게 굴지 않도록 조심할게. 좀더 의젓해질 테니까.” (40∼42쪽)


“눈이다.” “쌓이려나?” “집에 갈 때 어떡하지?” (91쪽)



  만화책 《방랑 소년》에 나오는 주인공은 딱히 한 사람이 아니지만, 이 만화책에서 한복판 자리를 차지하면서 이야기 흐름을 이끄는 아이는 ‘니토린’이나 ‘슈이치’라는 이름인 아이입니다. 어릴 적에는 어른들이 ‘귀엽다’면서 이 아이를 바라보았을 테지만, 이 아이가 누나 옷을 몰래 입어 볼 적에는 ‘싫다’고 하거나 ‘끔찍하다’고 여기곤 합니다.


  왜 그러할까요? 이 커다란 울타리는 무엇일까요? 벽장에서 나온다고 하는 일은 ‘나를 밝히는 아이’가 하는데, 어느 모로 본다면 울타리를 높이 쌓고서 ‘벽장에서 나오지 않는 사람’은 ‘나를 스스로 밝히는 아이’를 마주보는 다른 사람들이지는 않을까요? 한 아이는 그야말로 씩씩하고 의젓하게 벽장 문을 열고 나왔는데, 스스로 빗장을 풀고 바깥으로 나왔는데, 막상 이 아이를 둘러싼 다른 사람들은 이녁 마음자리에 단단히 빗장을 걸고서 외려 벽장으로 숨어들려 하는 셈은 아닐까요?



“나참,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그래도 좋아하잖아.” “음, 좋아해. 아마도. 하지만 고백하고 싶은 건 아니야.” (97쪽)


“‘빨강머리 앤’ 놀이? 너도 이제 고등학생이야.” “미안.” “그보다 이게 뭐니? 머리가 새빨개! 그런데, 앤이 돼서 어디 가려고?”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 (106쪽)



  만화책 《방랑 소년》 첫 권(2007)에는 초등학생인 아이들이 나오고, 열두째 권(2015)에는 어느덧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로 가는 아이들이 나옵니다. 이 만화책에 나오는 아이들은 저마다 ‘마음열기’도 하고 ‘빗장풀기’도 하고 ‘털어놓기’도 하면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갑니다. 더는 뒤를 돌아보려 하지 않으면서 한 걸음 두 걸음 차근차근 내딛습니다.


  마음을 열었다가 마음이 다치기도 하지만 다시 마음을 닫으려 하지 않습니다. 빗장을 풀다가 그만 괴롭거나 고단한 일을 겪기도 하지만 다시 빗장을 걸려 하지 않습니다. 씩씩하게 생각을 털어놓고, 의젓하게 나 스스로 어떤 숨결인가 하는 대목을 밝힙니다.


  가만히 본다면, ‘내가 나를 말하는 일’이란 나부터 스스로 거듭나려고 하는 몸짓일 뿐 아니라, 나를 둘러싼 사람들도 함께 새로운 숨결로 거듭나자고 외치는 목소리라고 할 수 있구나 싶어요. 혼자서 새로워질 수는 없으니까요. 다 같이 새로워질 때에 다 같이 홀가분하면서 기쁜 살림과 삶과 사랑이 될 수 있으니까요.



“초조해 하는 마음은 이해해. 나도 그랬어. 어른들이 하는 말도 안 듣고. 하지만 이제 나도 어른이니까, 안 된다고 할 수밖에 없어.” (134∼135쪽)


‘하지만 뿌듯했어. 그리고, 사람들은 의외로 남을 쳐다보지 않는구나.’ (156쪽)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러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건 이상하잖아? 사실대로 털어놓자.’ (161쪽)



  만화책 《방랑 소년》에 나오는 ‘니토리 슈이치(니토린 또는 슈이치)’는 고등학생이 된 뒤에 알바 자리를 찾아나섭니다. 이도 저도 다 막히다가 어느 찻집 한 곳에서 알바 자리를 얻습니다. 처음에는 누나 이름을 걸고 알바를 하는데, 언제까지나 이렇게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줄 스스로 묻고 되물은 뒤, 찻집지기한테 속내를 털어놓기로 해요.


  이제껏 수없이 새로운 걸음을 한 발짝씩 떼었다면, 여기에서 또 떼는 한 발짝은 더욱 무겁고 힘듭니다. 그렇지만 새로 떼는 한 발짝이니 더욱 새로울 뿐 아니라, 더욱 씩씩하고 의젓하게 거듭나는 걸음걸이라 할 수 있어요.


  아이들은 스스로 생각하면서 스스로 길을 찾습니다. 스스로 길을 찾다가 너무 괴로워서 ‘나하고 비슷한 길을 걸은 어른’을 찾아가서 물어보기도 하지만, 내 길은 언제나 내가 스스로 생각하고 부딪히고 찾고 열어야 할 뿐입니다. 남이 나를 도와줄 일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나를 도와야 할 뿐이에요.


  만화책에서뿐 아니라 삶자리에서도 온누리 아이들이 저마다 씩씩하게 기운을 내어 한 발짝씩 내딛을 수 있기를 빕니다. 마음 가득 꿈을 심고 사랑을 담아서 언제나 새롭게 한 발짝씩 나아가면서 내 삶부터 바꾸고, 나를 둘러싼 사람들한테도 새로운 숨결을 나누어 줄 수 있기를 빌어요. 4349.1.25.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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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3시의 무법지대 3
요코 네무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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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만화책 즐겨읽기 599



일도 사랑도 목숨을 걸고

― 오전 3시의 무법지대 3

 네무 요코 글·그림

 김승현 옮김

 대원씨아이 펴냄, 2010.4.15. 5500원



  네무 요코 님 만화책 《오전 3시의 무법지대》는 세 권으로 이야기를 마무리짓습니다. 이 만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제때에 일을 마치고 집에 갈 수 있는 하루가 드뭅니다. 회사에서 밤을 새거나 잠을 자기 일쑤이고, ‘제때’라고 하는 때가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마음이 맞는 짝을 만날 틈이란 없다고 할 만하고, 마음이 맞는 짝을 만나더라도 둘이 오붓하게 지낼 만한 틈을 내기가 힘들다고 할 만합니다. 밝은 낮에 팔짱을 끼면서 걷고 싶으나, 이런 나들이는 거의 꿈이라 할 만해요. 한밤을 함께 보내고 싶지만, 이런 일도 언제나 꿈과 같습니다.



‘어떡해. 조용히 혼자 있게 되면 자꾸 생각이 그쪽으로 쏠려. 수많은 ‘만약’.’ (33쪽)


‘밤샘을 한 사람에게도, 감기 기운이 있는 사람에게도, 실연한 사람에게도, 발주서는 평등하게 날아온다.’ (42∼43쪽)



  수없이 많은 가게가 있고, 수없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가게마다 광고종이를 뿌리고, 이 수없이 많은 광고종이를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된 일을 잊으려고 돈을 써서 노는 사람이 있고, 고된 일이 바쁜 나머지 돈을 쓸 겨를이 없지만 다달이 집삯을 내야 하니까 돈을 자꾸 벌어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쳇바퀴와 같은 일로 바쁩니다. 쳇바퀴처럼 도는 일을 하느라 몸이며 마음이 지치는데, 이러한 곳에서 만나는 반짝거리는 사랑은 새롭게 기운을 북돋아 줍니다. 마음속에 환한 웃음꽃이 피도록 북돋우는 짝꿍이 없다면 수없이 많은 가게마다 밤새도록 불빛이 번들거리는 이곳에서 버티지 못할 만하다고 할 수 있어요. 목숨을 걸듯이 일을 하고, 목숨을 걸듯이 사랑을 합니다. 온힘을 쥐어짜내면서 일을 하고, 마지막 힘까지 버티면서 사랑을 품에 안으려 합니다.



“그 자식, 한 대 패주고 와.” “네?” “그게 머리 자르는 것보다 훨씬 건설적일 거야. 이렇게 마냥 소화불량으로 끌어안고 살다간 위가 못 버텨.” (62∼63쪽)


“여유가 있으면 때려 보겠어.” “하하하. 때리는 건 여유가 없다는 증거 아냐?” “근데 나도 참 구질구질하다. 실은 멋지게 딱 포기하고 싶었는데.” “후후, 목숨 걸고 하는 사람들은 다 그래.” (66쪽)



  《오전 3시의 무법지대》에서 주인공으로 나오는 아가씨는 사랑과 실연 사이를 오락가락합니다. 이 만화책에서 주인공으로 나오는 아가씨하고 짝꿍으로 맺어지는 사내는 이혼과 새 만남 사이에서 오락가락합니다. 이들은 저마다 어떤 발걸음으로 새 길을 나아갈 사이가 될까요. 젊은 날에는 밤 세 시나 새벽 세 시에도 불을 밝히면서 일을 한다지만. 서른이 넘고 마흔이 넘고 쉰이 넘어도 이처럼 일을 하면서 둘 사이를 따사로이 이을 수 있을까요. 서로 얼굴조차 보기 어려운 채 멀리 떨어져서 지내야 하는 나날을 서른이 넘고 마흔이 넘고 쉰이 넘는 때까지도 이어갈 만할까요.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키스하지 않아도, 모든 게 납득되지 않아도, 진심은 늘 제자리에.’ (122쪽)


“모모코가 온 뒤로 너무 즐거워서, 그만둘지 말지 많이 고민했어.” (147쪽)



  내 새벽 세 시는 어떠한 때인가 하고 돌아봅니다. 나한테 새벽 세 시는 아이들 이불깃을 여미는 때입니다. 미처 마치지 못한 일이 있으면 이부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서 일감을 붙잡는 때입니다. 아이들이 깨어날 아침에 어떤 밥을 새로 지을까 하고 생각하며 쌀을 씻어서 불리거나 다시마 국물을 내는 때입니다. 엊저녁에 고단해서 끝내지 못한 설거지가 있으면 얼른 마무리를 짓는 때입니다.


  만화책을 덮으며 생각에 잠겨 봅니다. 사람들마다 새벽 세 시, 또는 밤 세 시를 다르게 맞이합니다. 이때까지도 일하는 사람이 있고, 이때까지도 술자리를 이으면서 고단한 마음을 풀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때에 아이들을 보살피는 사람이 있고, 이때에 홀로 쓸쓸히 밤잠을 못 이루는 사람이 있어요. 이때에 하루 일을 여는 사람이 있고, 이때에 하루 일을 기쁘게 마무리짓는 사람이 있어요.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저마다 다른 사랑으로 저마다 다른 삶을 짓습니다. 4349.1.24.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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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상경기
사이바라 리에코 지음, 김동욱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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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598



밑바닥 밑에서 기면서 만화가로 일어서다

― 만화가 상경기

 사이바라 리에코 글·그림

 김동욱 옮김

 AK 커뮤니케이션즈 펴냄, 2011.8.25. 9000원



  사이바라 리에코(1964∼)라는 일본 만화가가 빚은 《만화가 상경기》(AK 커뮤니케이션즈,2011)는 시골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서울(일본 도쿄)’로 가는 날만 손꼽아 꿈꾸던 이녁이 드디어 시골을 벗어나서 서울살이(도쿄살이)를 하는 이야기를 다루는 단편만화집입니다. 짤막하게 1화부터 53화까지 한 쪽에 한 가지 이야기씩 그립니다. 그러니까 쉰세 쪽짜리 만화책인 셈이니 무척 가볍고 작은 책이라 할 테지요. 그렇지만 모든 이야기는 무지개빛으로 그렸고, 한 가지 이야기마다 깊고 긴 나날에 걸친 땀과 눈물과 피가 고루 섞였어요. 쉰세 쪽짜리 만화책이지만 쉰세 해쯤 살아낸 이야기 같은 만화책이라고도 할 만합니다.




나한테는 얼굴 말고 다른 게 있을 거야, 그러니까 도쿄에 올라가자, 나는 매일 그렇게 속으로 되뇌었다. 도쿄에 올라와서 처음 깨달은 것. 그건 바로 내가 이날을 위해 마련해둔 예쁜 신발이랑 옷가지가 실은 죄다 엄청 꼴불견이라는 사실이었다. (1화)



  서울(도쿄)에서 사는 사람은 어쩜 그렇게 멋져 보이는 옷을 차려입을 수 있을까요? 서울(도쿄)에서 사는 사람은 그 비싼 물건값이랑 집삯에도 어쩜 그렇게 살림을 꾸리면서 먹고살 수 있을까요?


  ‘아직 만화가로 살지 못’하고 술집에서 접대원으로 일하면서 겨우 입에 풀을 바르는 사이바라 리에코 님은 지저분하고 좁으며 갑갑한 집에서 ‘내가 이 꼴이 되려고 겨우 시골집을 벗어났는가?’ 하면서 한숨을 쉽니다. 그런데 한숨을 쉬다가도, 이 까마득한 곳(도쿄)에서 전철을 타고 출퇴근(접대원으로 일하는 술집으로 오가는 길)을 하는데 전철바닥에 한가득 게우고는 몹시 부끄러운지 계단을 세 칸씩 성큼성큼 뛰면서 내빼는 회사원 뒷모습을 보면서 한숨을 고이 접습니다. 언제나 한숨만 가득한 나날이지만, 접대원으로 일하는 술집에서 여러 해 동안 상냥한 웃음으로 일하는 언니가 ‘연극단원’이었다는 얘기를 듣고는, 또 이 언니가 접대원 일을 그만두고 동물원 일자리를 얻었다고 귀띔하는 말을 듣고는, 또 이 언니가 접대원 일을 그만둔 뒤에 그 술집에 손님이 절반 남짓 뚝 끊어진 모습을 보고는, 삶이란 무엇인가 하고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참말 삶이란 무엇이고, 서울살이(도쿄살이)란 무엇일까요. 우리 둘레에는 어떤 사람이 있고, 나(와 너)는 어떤 사람일까요. 《만화가 상경기》를 보면, 시골에서 지낼 때이든 서울(도쿄)로 올라와서 지내든, 사이바라 리에코 님은 이녁 스스로 ‘나는 더없이 못난 꼴불견’이라고 되뇝니다. 참말 사이바라 리에코 님은 그저 ‘더없이 못난 꼴불견’이기만 한 사람일까요.




고양이는 친해진 지 일주일 만에 사라졌다. 우리 집에서 아픈 데도 다 돌봐 주고 깨끗하게 목욕도 시키고 또 사람도 잘 따르게 붙임성 좀 키워서 내보냈으니, 그래도 우리 집보다는 좋은 데서 거둬 줬겠지.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땐 정말 그 고양이가 부러웠다. (10화)


미술서가 잔뜩 쌓인 책방에 들렀다. 이런 책들은 비싸서 사진 못하고 그냥 그 자리에서 봤다. 정말 재미있었다. 그 순간, 왜 못 사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건 바로 이 책인데 왜 난 이런 옷이나 입고 있지? 내가 진짜 원하는 건 바로 이 책인데 왜 허구한 날 하는 일도 없이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는 남자랑 살고 있지? (16화)



  그림을 그리고 싶은 꿈이 있지만, 이 꿈을 언제 이룰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만화를 그리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이 마음을 언제 열는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어느 날 책방에 들러서 미술책을 서서 읽다가 ‘왜 이 책을 사지 못하나?’ 하고 스스로 물어요. ‘왜 이 책을 사서 집에서 느긋하게 읽지 못하나?’ 하고 스스로 물어요.


  바로 오늘 이곳에서는 주머니에 돈이 없을는지 몰라요. 그러면 돈이 없다는 까닭 하나 때문에 미술책을 못 사고, 만화가가 못 되었을까요? 아니면, 스스로 돈을 더 악착같이 벌겠다는 마음이 모자라지는 않았을까요? 아니면, 스스로 만화가로 살겠노라는 꿈을 제대로 못 꾸지는 않았을까요?


  사이바라 리에코 님은 술집 접대원으로 한창 일하던 어느 날부터 겨우 그림을 어느 잡지사에 내밀면서 ‘성인만화’를 그렸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성인만화를 그리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 테지만, 입에 풀을 바르려면, 또 만화를 그리려면, 사이바라 리에코 님으로서는 ‘할 수 있는 힘’을 다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어요. 부끄러움을 챙기거나 이것저것 가릴 살림이 아니었어요. 밑바닥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나날이었고, 밑바닥 밑에 또 어떤 밑바닥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나날이었다고 할 만해요.




그 뒤로는 제일 싼 맥주 하나 시켜 놓고, 가게에 오던 그 여자애들 흉내를 냈다. 크게 웃고 떠들도 다리도 몇 번씩 이리 꼬고 저리 꼬고 하면서, 조금이라도 더 예쁘게 보일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더 신나는 인생처럼 보일 수 있도록, 계속 그런 궁리만 하며 맥주를 들이켰다. (25화)


꼼꼼하게 한 장 한 장 살펴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제일 자신 있는 터치로 한 장만 더 그려 오시면 안 될까요?” 제일 자신 있는 터치라니, 그런 거 없다고요. (29화)



  밑바닥 밑에서 기면서 만화가로 일어서는 이야기가 흐르는 《만화가 상경기》라고 할 만합니다. 밑바닥 밑에서 기는 동안 눈물이 나면 눈물을 흘리고, 괴로우면 짜증도 부리면서 살던 나날을 고스란히 담되 ‘언제나 이녁 둘레에서 상냥하게 웃는 낯으로 이녁 마음을 달래 주던 이웃님을 떠올리면서 그린 만화’를 찬찬히 그러모은 《만화가 상경기》라고 할 만합니다.


  지나고 보니 다 괜찮아서 지나온 나날을 그린 만화라고는 느끼지 않아요. 이제 좀 걱정이나 시름을 덜었기에 《만화가 상경기》를 그렸다고도 느끼지 않아요. 사이바라 리에코 님은 만화책 끝자락에 만화를 그리는 까닭을 차분하게 밝힙니다. 쉰한째 이야기에서 이 까닭을 밝히는데, 힘들거나 괴롭거나 짜증이 날 적에 이녁한테 스승이 되는 분이 그린 만화책을 읽는다고 해요. 이 만화를 그리면서 마음이 풀리고 한바탕 웃음이 난다는데, 만화 한 권을 읽으면서 이토록 기쁜 마음으로 거듭날 수 있구나 하고 새삼스레 깨달으면서, 사이바라 리에코 님 만화가 이웃들한테 기쁨을 길어올리는 징검돌이 된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고 생각한다고 해요.




어느 날, 평소대로 성인잡지 4컷을 편집부에 가지고 갔더니, “그럼 사이바라 씨, 이건 이번 회로 끝냅시다. 아니, 그러니까, 사이바라 씨, 청년지에 연재 시작했잖아. 이제 성인지 연재는 그만해야지. 그래도 혹시 일이 또 끊어지면 언제든지 찾아와요. 이런 일쯤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 어느 큰 출판사의 유명한 잡지에서 연재를 시작할 무렵 일어난 일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동안 정말 신세 많았습니다. (41화)



  웃을 일도 울 일도 언제나 나 스스로 짓습니다.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언제나 내가 스스로 지어요. 반찬을 가득 올려야 맛있는 밥상이 되지 않아요. 반찬이 한 가지만 있어도 내가 스스로 맛있게 먹을 적에 맛있는 밥상이 돼요. 내가 스스로 맛없게 먹으면 수십 가지 반찬이 있어도 맛없는 밥상이 될 뿐이에요.


  밤마다 잠자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아이들을 재우며 가만히 생각합니다. 내가 어버이로 살면서도 스스로 골을 내며 자장노래를 안 부르면 아이들이 괴롭지 않아요. 어버이인 내가 괴롭지요. 스스로 활짝 웃으면서 아이들하고 신나게 자장노래를 부르다가 놀이노래를 부르면 다 함께 즐겁고 신나요.


  밑바닥에서도 또 밑바닥으로 나아가기만 하다가 어느새 밑바닥이 아닌 삶자리와 보금자리를 깨달으면서 만화를 그릴 수 있었다는 《만화가 상경기》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바로 ‘내가 나를 참답게 사랑하는 길’이지 싶어요. 어느 곳에 있어도 내 마음을 스스로 지키고, 어느 일을 맞닥뜨려도 내 꿈을 스스로 키우면, 스스로 맑게 짓는 웃음이 된다고 하는 이야기가 이 작으면서 앙증맞은 만화책에 흐르지 싶어요. 4349.1.24.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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