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시몬 연구실 2 - 완결
다이스케 테라사와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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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594



보는 눈, 아끼는 눈, 가꾸는 눈

― 나오시몬 연구실 2

 테라사와 다이스케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5.12.25. 4500원



  밤이 깊을수록 별빛이 밝습니다. 밤이 지나고 새벽으로 접어들 즈음이면 차츰 동이 트면서 별빛이 흐려요. 어느덧 저 먼 하늘이 차츰 밝아지면서 해가 올라올 즈음이라면 별빛은 거의 모두 사라집니다. 새로 떠오르는 해님은 햇살을 잔뜩 퍼뜨리면서 온누리에 무지개빛을 새삼스레 일으킵니다. 나는 새벽녘에 이를 무렵이면 마지막 별빛을 마음에 담으려고 곧잘 마당에 내려서서 찬바람을 쐽니다.



“요즘도 가끔 고향에 내려가면 유품을 수선하니?” “응. 하지만 아무리 유품을 복원해도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진 않으니까.” (13쪽)


“하지만 고작 손잡이 하나에 그렇게 공을 들이면 남는 게 없어서.” “남는 것 없고 품이 많이 드는 일이라도 그걸 찾아서 수십 년을 드나드는 손님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오래도록 이 가게의 자산이 된다는 걸 알아 주셨으면 좋겠군요.” (23∼24쪽)



  테라사와 다이스케 님이 빚은 《나오시몬 연구실》(학산문화사,2015) 둘째 권을 읽습니다. 이 만화책은 두 권으로 마무리짓습니다. 짧게 끝맺는 이야기입니다. 고고학 연구를 하는 주인공은 일본에서 언젠가 꼭 공룡뼈를 찾아내겠다는 다짐으로 일해요. 그런데 공룡뼈를 캐내는 일을 하려면 일꾼이나 심부름꾼을 많이 두어야 하고 오랫동안 땀흘려야 하니까 목돈이 들지요. 만화책에 나오는 주인공은 목돈을 모으려고 ‘오래된 물건을 손질하는 일’을 합니다. 이른바 ‘옛 문화재 되살리기’이지요.



“미안, 아빠. 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네.” “그래서, 그렇게 정성들여 만든 이 테이프는, 그 녀석의 보물이었을 거야.” (40쪽)


“아쉽지만 그런 대형 수리업체에는 일 잘하는 장인이나 재료를 쓰지 않고 안 보이는 부분을 대충 때워 비용만 싸게 매기는 곳도 많아.” “처음부터 진짜 장인에게 맡길걸. 내가 몇 푼 아끼겠다고 욕심을 부려서.” (96쪽)



  만화책 주인공은 ‘옛 문화재 되살리기’라는 일감을 맡을 적에 언제나 ‘오래된 살림살이를 손질한다’고 여깁니다. 그냥 옆에 놓고 눈으로만 쳐다보는 값지거나 값비싼 보물이 아닌, 늘 손으로 쓰다듬고 만지고 다루는 살림살이로 여겨서 손질해요.


  ‘손질’하고 ‘되살리기’는 다르지요. 손질을 한다고 할 적에는 ‘다시 쓴다’는 뜻입니다. 되살리기를 한다고 할 적에는 ‘그대로 모신다’는 뜻입니다.


  때로는 박물관 같은 데에 모시려고 유물이나 문화재를 건사하겠지요. 그런데, 어떤 살림살이가 유물이나 문화재가 된다고 하더라도, 모든 유물이나 문화재는 맨 처음에는 수수한 살림살이였어요. 임금님이 쓰던 왕관이나 노리개 따위를 뺀, 이를테면 돌칼이나 민무틔흙그릇 같은 유물은 모두 살림살이입니다. 민속박물관에서 건사하는 문화재나 유물도 처음에는 모두 살림살이예요.



“제례용 신여는 많은 사람이 짊어지고 이리저리 흔들면서 온 마을을 돌지. 그래야 신이 기뻐한다며 일부러 거칠게 다루거나 바다에 던져 버리기도 해. 당연히 끼워 맞춘 부분은 헐거워지고, 금구는 녹슬고 칠은 벗겨질밖에! 그걸 다시 쪼이고 금구에 다시 광을 내고 칠을 다시 해 가며 수십 수백 년을 쓰는 게 바로 신여란 말씀!” (106쪽)


“어떻게 된 겁니까? 어떻게 어르신들이 그렇게 쉽게 신여를 멜 수 있죠?” 호흡이 딱딱 맞으니까! 축제 신여는 모두의 마음이 한데 모이면 가볍게 들려 올라가거든!” (119쪽)



  수백 해에 걸쳐서 손질을 새롭게 하면서 쓰는 ‘제례용 신여’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만히 생각을 기울입니다. 한국에서는 이런 ‘문화재 살림살이’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아이들이 손으로 만지면서 물려받아서 아낀 뒤, 다시 새로운 아이들한테 물려줄 만한 ‘문화재 살림살이’를 찾아보기 어려워요.


  일제강점기나 한국전쟁이나 새마을운동이나 경제성장 따위가 흐르면서 그만 사라지거나 짓밟혔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우리 스스로도 마을살림이나 집살림을 알뜰히 건사하려는 마음을 잃었다고 할 만해요. 더 빠르거나 더 남다르다고 하는 새 물건을 장만하는 길에 마음을 빼앗겼다고 할 만해요.


  새 자전거도 좋습니다만, 오래된 자전거를 꾸준히 손질해서 물려줄 만한 살림살이(문화)가 우리한테 있을까요? 다시 말해서 자동차를 꾸준히 손질해서 쉰 해나 백 해를 건사할 만할까요? 집 한 채를 꾸준히 손질해서 삼백 해나 오백 해를 건사할 만할까요?



“우리가 만드는 칠기는 사람이 쓰라고 있는 게야. 장식용으로 찬장에 모셔두기나 할 바엔 아예 안 만들고 말지. 나는 지금까지 이 그릇들을 소중히 써 온 사람을 위해, ‘나오시몬’으로 평생을 마칠 셈이다.” (186쪽)


‘할아비는 언제나 자연을 잘 관찰한단다. 보는 눈을 키워야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거든.’ (207쪽)



  보는 눈, 아끼는 눈, 가꾸는 눈, 이렇게 세 가지 눈을 돌아봅니다. ‘보는 눈’이 ‘보는 눈’으로만 그치면 문화재를 만듭니다. 지식을 만들지요. 보는 눈이 ‘아끼는 눈’으로 거듭나면 이야기를 짓습니다. 노래가 흐르지요. 아끼는 눈이 새롭게 ‘가꾸는 눈’으로 거듭날 수 있다면 사랑을 짓습니다. 사랑스러운 손길로 살림을 지어요.


  먼저 볼 수 있어야 하고, 본 다음에는 아낄 수 있어야 하며, 아끼는 손길에 이어 가꾸는 숨결로 다시 태어나야지 싶습니다. 보고 아끼며 가꾼다고 하겠습니다. 바라보는 데에서 그치면 ‘비평’이나 ‘품평’은 할 테지만, 이래서는 아무것도 짓지 못해요. 맨 먼저 ‘보는 눈’부터 기를 노릇이요, 이 눈길을 키워서 손길과 몸짓을 갈고닦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만화책 《나오시몬 연구실》은 이 같은 이야기를 알뜰살뜰 잘 들려줍니다. 4349.2.3.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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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잭 창작비화 2 - 테즈카 오사무의 작업실에서
요시모토 코지 지음, 미야자키 마사루 원작 / 학산문화사(만화)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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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604



‘만화 하느님’ 곁에 있는 수많은 ‘하느님’

― 블랙잭 창작 비화 2

 미야자키 마사루 글

 요시모토 코지 그림

 김시내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4.4.25. 1만 원



  만화를 그린 하느님이라는 이름을 얻은 테즈카 오사무 님 이야기를 그린 《블랙잭 창작 비화》(학산문화사,2014) 둘째 권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테즈카 오사무 님이 숨을 거둔 지 스무 해 남짓 지났는데, 일본에서는 아직도 이녁을 기리거나 그리는 사람이 참으로 많구나 싶습니다. 이렇게 동료와 후배가 그리운 목소리로 되새기면서 빚은 《블랙잭 창작 비화》는 얼마나 따끈따끈한 사랑이 깃들며 태어났는가 하고 새삼스레 느낍니다.



“여러분, 일에 목숨을 걸어 주세요!” ‘네?’ ‘목숨이요?’ (6쪽)


“롯폰기의 콘소메 수프가 먹고 싶어!” “지금 당장 만화에 대해 잘 아는 중국어 통역을 찾아 줘요!” “멜론!” “카이메이 잉크를 사 와요!” “안경이 없어요!” “햄 없나요?” “케이크가 없으면 못 그려!” “의치가 또 없어!” “슬리퍼가 없으면 그릴 수 없어요!” “초콜릿!!” (19∼20쪽)



  《블랙잭 창작 비화》 둘째 권을 보면, 첫머리부터 좀 그악스럽다 싶은 한 마디로 엽니다. 테즈카 오사무 님은 도움이(어시스턴트)들한테 ‘그림(만화)’을 그릴 적에 목숨을 걸어 달라고 외칩니다. 도움이들은 가뜩이나 밤잠을 미루며 그림을 그리는데 그 말을 듣고 놀랄 뿐입니다. 잠도 못 자는데 목숨까지 걸어야 한다고, 하면서.


  그런데 테즈카 오사무 님은 이녁 목숨을 걸면서 만화를 그렸어요. 도움이는 며칠쯤 잠을 미루면서 그리고, 또 바탕그림을 그릴 원고가 넘어오기까지 살짝 쉴 겨를이 있지만, 테즈카 오사무 님은 쉴 겨를이 없습니다. 방송에서 만화영화가 나오거나 극장판 만화영화를 다 마무리짓고 다른 이들은 모두 쉬거나 뒤풀이를 가더라도 테즈카 오사무 님은 늘 ‘다음 만화’를 그리고 밑틀(콘티)을 짜야 했어요.


  《블랙잭 창작 비화》 둘째 권에는 ‘목숨을 걸며 만화를 그리다’가 그만 머리가 펑 하고 터지면서 갑작스레 트집이나 핑곗거리를 찾는 테즈카 오사무 님 모습이 잔뜩 나옵니다. 아마 이런 이야기는 이녁 자서전에는 안 나왔지 싶은데, 한겨울 한밤에 수박을 먹고 싶다고 외친다든지, 그림을 잘못 그려서 종이를 덧대야 하기에 본드를 사오라고 시킨다든지, 가까운 편의점 말고 멀리 있는 편의점에서 파는 컵라면을 사 달라든지, 초콜릿이나 케익을 노래한다든지, …… 어느 모로 보면 짓궂은 장난인데, 어느 모로 보면 이 ‘장난을 맞추어’ 주는 동안에는 펜을 손에서 놓으면서 쉴 겨를이 납니다. 이레나 열흘씩 만화가 곁에서 원고 마무리를 지켜보면서 기다리던 출판사 편집자도 이런 심부름을 하면서 한숨을 돌리거나 바람을 쐬기도 하고요.



테즈카 선생님은 작품에 관해서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습니다. 작품을 위해서라면 수고, 아이디어, 인재, 조직, 그리고 돈, 모든 것을 쏟아붓는 거예요! (35쪽)


계속 무리하면서 만화를 그리던, 테즈카 선생님의 안경이니, 이렇게 폭삭 삭았죠. 지금 생각해 보면, 테즈카 선생님은 자신의 몸에, 가장 억지를 부리셨던 게 아닐까요? (44∼45쪽)



  1928년에 태어나 1989년에 숨을 거두었으니, 예순을 갓 넘기고서 저승사람이 된 테즈카 오사무 님입니다. 그렇지만 숨을 거두는 날까지도 손에서 펜을 놓지 않았고 다음 작품을 떠올렸다고 해요. 다시 말하자면, 그무렵 테즈카 오사무 님 곁에서 도움이로 일하던 이들이 이제 와서 옛날 옛적을 돌아보노라면 ‘스스로 가장 억지를 부리며 만화를 그린’ 테즈카 오사무 님이라고 할 만합니다. 다른 사람은 잠을 자도록 해도 테즈카 오사무 님은 잠을 거의 안 자면서 만화를 그렸으니까요.



저희가 잠든 사이에도 테즈카 선생님은 주무시지 않고 계속 그리고 계셨어요. 돌이켜 보면, 도우러 간 닷새 간, 결국 한 번도 테즈카 선생님이 주무시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171쪽)


그 다음 날이 졸업식이었는데, 아버지가 ‘테즈카 오사무를 만날 일은 흔치 않으니 다녀와!’라는 거야. 졸업식도 흔치 않은데 말이야. 아하핫! (186쪽)



  밤잠을 달게 자면서 만화를 그렸다면, 테즈카 오사무 님은 일흔이나 여든이나 아흔까지 살았을는지 모르지요. 그런데, 어느 모로 보면, 자꾸자꾸 새롭게 그리고 싶은 만화가 떠오르기 때문에 도무지 잠을 잘 수 없다고도 할 만해요. 한꺼번에 열 가지가 넘는 만화를 이어서 그리는 동안에도 이 작품들에 이어 새로운 작품을 떠올리지요. 마감이 닥치면 열 가지가 넘는 원고를 모두 책상에 올려놓고서 한꺼번에 한 쪽씩 재빠르게 이야기를 채워 넣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도쿄를 떠나서 다른 고장으로 가서 마감에 쫓기며 만화를 그릴 적에 그 고장에서 만화가를 꿈꾸는 고등학생을 불러서 도움이 노릇을 해 달라고 할 적에, 고등학생들 어버이는 ‘졸업식보다 테즈카 오사무를 만나러 가라’고 말할 만하구나 싶습니다. 졸업식에 가지 못하더라도 며칠 동안 밤샘을 하면서 도움이 노릇을 하라고 아이들 어버이가 등을 떠민다고 할까요.


  이런 뒷이야기를 읽으며 곰곰이 돌아봅니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대접을 받을 만한 만화가가 있었을까요? 앞으로 한국에서 이만 한 대접을 받을 만한 만화가가 나올 수 있을까요? 졸업식도 입학식도 대수롭지 않으니 ‘그분’을 만나러 가라고 아이 등을 떠밀 어버이는 몇이나 있을까요?



특이한 사람들만 모여 있었지. 아니, 우연히 모인 게 아니고, 모은 거야. 난 테즈카 선생님이 사회에서 동떨어진 젊은이들에게, 있을 곳을 주신 거라고 생각해. (59쪽)


“당신이면 됩니다. 그런 당신이니 좋은 거예요! 제가 할 수 있으니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80쪽)



  만화 하나가 태어나려면 만화가 혼자서는 엄두를 낼 수 없습니다. 만화가 한 사람 곁에 수없이 많은 도움이가 있습니다. 테즈카 오사무 님처럼 한 주에 열 가지가 넘는 연재만화를 그린 만화가한테는 도움이가 스무 사람이나 서른 사람으로도 모자랍니다. 게다가 잡지 연재 만화뿐 아니라 만화영화까지 함께 그렸기 때문에, 한창 일꾼을 많이 둘 적에는 이백 사람이 넘게 도움이 구실을 했다고 해요. 한 사람 머릿속에서 태어나는 만화 이야기를 받치려고 그야말로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달라붙어서 땀을 흘린 셈입니다.


  그래서, ‘만화 하느님’ 곁에는 수많은 ‘도움이 하느님’이 있었다고 해야지 싶습니다. 수많은 ‘도움이 하느님’이 흘리는 땀방울로 ‘만화 하느님’이 태어날 수 있었다고 해야지 싶어요.


  테즈카 오사무 님은 언제나 “제가 할 수 있으니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말하면서 도움이를 북돋아 주었다고 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테즈카 오사무 당신이니까 하지요’ 하는 생각이 으레 떠오른다고 하지만, 참으로 온몸에서 새롭게 기운이 솟는다고 해요. 참말 우리는 저마다 다른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지치지 않고 만화를 그리니, 아니 새롭게 일어서면서 만화를 그리니, 이 만화가 곁에 수많은 사람이 즐겁게 찾아옵니다. 지치지 않고 만화를 그릴 수 있도록 다 함께 밤잠을 미룹니다. 그러고 나서 다 함께 활짝 웃으면서 ‘다 함께 흘린 땀방울로 태어난 만화책과 만화영화’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습니다. 4349.1.31.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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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슬란 전기 4 - 만화
아라카와 히로무 지음, 다나카 요시키 원작 / 학산문화사(만화)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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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603



‘종(노예)’이 아닌 ‘동무’가 되는 길

― 아르슬란 전기 4

 다나카 요시키 글

 아라카와 히로무 그림

 김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5.12.25. 5500원



  만화책 《아르슬란 전기》(학산문화사,2015) 넷째 권에는 ‘아르슬란’이 노예제와 신분제를 더 깊이 느끼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전제군주라 할 사람을 죽였으나 노예들은 오히려 ‘주인님’을 죽였다면서 길길이 날뛰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하거든요.


  왜 그러한가 하면, 종이 되어서 지내는 이들은 ‘시키는 일’만 하면 밥하고 잠자리를 마음껏 누립니다. 신분하고 계급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남이 시키는 대로 따라야 하는 종이 되더라도 ‘넉넉한 밥’하고 ‘느긋한 잠자리’라면 고맙습니다. 여기에다가 돈을 몇 푼 얹어 준다면 더욱 고맙지요. 게다가 전제군주 밑을 떠난다 한들 온누리는 온통 싸움터예요. 어디를 가더라도 목숨을 건사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이곳에서 종살이를 벗어나도 다른 곳에서 사로잡혀서 똑같이 종살이를 해야 하기 마련입니다.



“‘타인에게도 소중한 것이 있다.’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야만인이라고 나르사스가 그랬지.” (34∼35쪽)


“나는 그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다륜이나 나르사스를 버리고 내가 그대를 선택한들, 다음에는 그대를 버릴 날이 오지 않으리라 어찌 확신할 수 있나?” (49쪽)



  만화책 《아르슬란 전기》에는 피가 튀고 사람이 죽는 싸움터가 나옵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낌없이 죽습니다. 그야말로 아주 쉽게 죽고 죽입니다. 목숨을 건 싸움을 이겨내지 못하면 그냥 죽어야 합니다.


  오늘날 사회를 돌아보면 칼부림이나 총부림은 드뭅니다. 그렇지만 회사나 공장을 다니면서 일삯(돈)을 벌지 못하면 목숨줄이 쉬 끊어진다고 할 만합니다. 집삯을 치르지 못하면 집에서 쫓겨나야 하지요. 밥값을 내지 못하면 배를 곯아야 해요. 아르슬란이라는 사람이 살던 지난날에는 전제군주가 있다면, 오늘날 사회에는 돈을 휘두르는 권력자가 있어요. 오롯이 자급자족을 하지 않는다면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미리 말씀드렸다 해도 전하께서 수긍하지 못하셨을 겁니다. 세상에는 경험하지 않고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생각하였기에 일부러 만류하지 않았습니다.” (75쪽)


“관대한 주인 밑에서 노예로 살아가는 것, 이만큼 편한 삶은 없습니다. 스스로 생각할 필요도 없고, 그저 명령만 따르면 집도 음식도 나오니까요. 5년 전의 저는 그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77쪽)



  우리는 서로 동무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서로 믿고 아끼면서 보살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서로 어깨를 겯고 삶을 짓고 사랑을 지으며 살림을 짓는 동무로 지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싸움이나 전쟁이 아닌, 평화와 평등으로 나아가는 길을 걸을 수 있을까요?


  만화책 《아르슬란 전기》에서 아르슬란이 말하지만, ‘신분’을 따진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서로 동무가 되기 어렵습니다. 같은 신분이나 계급일 때에만 동무가 된다지만, 참말 같은 신분이나 계급일 때에 ‘동무 사이’로 지낼까요? 같은 계급이란 무엇일까요? 다른 신분이란 무엇일까요? 서로 노예 신분이어야 동무로 지낼 만할까요? 서로 임금이나 신하쯤 되어야 동무로 지내는가요?



“정의란 태양이 아니라 별과도 같은 것일지 모릅니다, 전하. 별은 하늘에 수없이 많으며, 서로 빛을 상쇄하고 있지요.” (78쪽)


“나는 너와 친구가 되고 싶다. 만약 내가 싫지 않다면 친구가 되어 줄 수 없겠느냐.” “저는 해방노예의 자식입니다. 친구라니, 전하와 저는 신분이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신분을 따진다면 나는 아무하고도 친구가 될 수 없어!” (182∼183쪽)



  대통령이 있는 나라에는 민주가 있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대통령이라고 하는 권력 꼭대기가 있기 때문이요, 대통령을 둘러싼 크고작은 숱한 권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통령을 건사하는 군대와 전쟁무기라고 하는 권력이 있어요.


  대통령이 있다고 하더라도, 신동엽 님이 쓴 시에 나오는 ‘막걸리를 자전거 꽁무니에 매달고 시인한테 찾아가는 대통령’쯤이 있지 않고서야 민주나 평화란 까마득한 노릇입니다. 청와대에서만 사는 대통령이 있는 나라에는 민주나 평화란 아득한 노릇입니다.


  함께 밥을 먹을 때에 동무입니다. 함께 웃고 노래할 수 있는 살림일 때에 동무입니다. 모시는 사람도 다스리는 사람도 섬기는 사람도 거느리는 사람도 없이, 누구나 한손에 호미를 들고 한손에 부엌칼을 쥘 적에 비로소 평화와 평등과 민주가 자랄 수 있다고 느낍니다. 4349.1.30.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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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iley 2016-01-30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겠어요!
그리고 제 친구신청 좀 받아주세요.

숲노래 2016-01-31 07:23   좋아요 0 | URL
2권은 살짝 재미없었지만 3권 끝자락과 4권으로 접어드니
다시 재미가 살아났습니다 ^^;;

알라딘서재에서는
친구는
신청만 하시면 서로 친구가 되어요 ^^ 고맙습니다
 
요츠바랑! 13
아즈마 키요히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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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602



“아빠는 이담에 크면 뭐 해?”

― 요츠바랑! 13

 아즈마 키요히코 글·그림

 김동욱 옮김

 대원씨아이 펴냄, 2016.1.10. 5200원



  2016년 1월에 한국말로 나온 《요츠바랑!》(대원씨아이) 열셋째 권을 읽다가 문득 이 만화책 첫째 권을 떠올립니다. 《요츠바랑!》 첫째 권은 2004년에 나왔습니다. 어느덧 열두 해가 흐르는군요. 그런데 이 만화책에 나오는 아이는 열두 해 앞서나 이제나 거의 같습니다. 만화책 한 권을 통틀어서 헤아린다면, 만화책 한 권으로 ‘하루’ 이야기가 흐르기도 하고, ‘이틀이나 사흘’ 이야기가 흐르기도 합니다. 지난 열 몇 해에 걸쳐서 열세 권이 나왔다 하더라도, 만화책에 나오는 아이 ‘요츠바’는 그때나 이제나 엇비슷하다고 할 만합니다.


  《요츠바랑!》 첫째 권이 나올 무렵 우리 집 큰아이는 아직 안 태어났지만, 이제 우리 집 큰아이는 이 만화책을 재미있다고 여길 만한 나이까지 자랍니다. 우리 집 작은아이는 어느덧 ‘요츠바’하고 엇비슷한 나이로 자랍니다. 앞으로 이 만화책이 몇 권까지 나올는지 모르겠는데, 꾸준히 나오고 나와서 스무 권쯤 나올 때가 된다면, 어쩌면 우리 집 작은아이가 스무 살이 넘을 수 있으리라 느껴요.



“‘같이 모래놀이 하러 가고 싶다’고 해 봐!” “지금 좀 바쁘니까 담에 가자.” “엥? 엥? 에엥! 아빠는 모래놀이에 소질 있으면서.” (24∼25쪽)


“요츠바는 이담에 크면 뭐 할 건데?” “캠프.” “캠프가 재밌긴 했었지.” “아니면 우동 가게나 빵 가게! 아니면 요술쟁이나 주부.” “다양하네. 빵 가게는 처음 듣는걸.” “그치만 우동 먹고 싶은 날도 있고, 빵 먹고 싶은 날도 있잖아. 해파리 만들어 줘. 아빠는 이담에 크면 뭐 할 거야?” “응?” (57쪽)



  만화책 《요츠바랑!》에는 대단하다 싶은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아주 작은 이야기가 나와요. 요츠바라는 아이가 아버지랑 둘이 살면서 만나는 이웃 이야기가 수수하게 나오고요. 요츠바라는 아이가 때로는 심심하게 때로는 재미나게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기쁘게 누리는 하루 이야기가 흐릅니다.


  이웃 언니나 아주머니하고 노는 이야기가 만화책에 흐릅니다. 아버지랑 밥을 먹고나 몸을 씻으면서 나누는 짤막한 이야기가 흘러요. 열셋째 권에서는 먼 데에서 찾아온 할머니 이야기가 흘러요.


  그나저나 요츠바는 아버지한테 “아빠는 이담에 크면 뭐 할” 생각이냐고 묻습니다. 만화책에 나오는 아버지는 요츠바한테 무엇을 하고 싶다 하는 말을 딱히 안 합니다. 아니, 어쩌면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는지 모르나, 수다쟁이 요츠바가 혼자 신나게 말을 이어요.


  이 대목에서 우리 집 아이들을 떠올려 봅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나한테 “아버지는 이담에 크면 뭐 할래?” 하고 묻는다면, 우리 집 아이들은 아버지가 이 물음에 대꾸를 할 때까지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끝없이 묻습니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어떤 말을 들려줄는지 궁금하니까 끝없이 묻지요. 나는 아이들이 묻는 말에 깊이 생각하고 곰곰이 헤아리면서 말합니다. 때로는 곧바로 말하다가 나중에 더 생각해 보고서 다시 말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만 무럭무럭 자라지 않고 어른도 무럭무럭 자라니까요. 아이 못지않게 어른도 몸이며 마음이 새롭게 자라니까요.



“왜? 무서운 꿈 꿨냐?” “꿈, 꿈은 꿨어. 두랄루민이랑, 어라? 까먹었어.” (71쪽)


“이거 요츠바가 만들었니?” “응! 할머니 온다고 그래서!” “그랬니? 고맙다. 요츠바 마음씨가 참 곱기도 해라.” (92쪽)



  만화책 《요츠바랑!》이 아니어도 우리 집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수수한 하루야말로 온갖 이야기가 흐르는 삶’이라고 느낍니다. 달력이나 일기장에 오늘 하루 어떤 일을 했는가를 적바림하지 않으면 어영부영 잊으면서 지나가기 일쑤가 되지만, 달력이나 일기장에 오늘 하루 누린 기쁨과 재미와 보람을 가만히 적바림하면, 내 발자국은 어느덧 아름답고 알차며 신나는 삶이었네 하고 돌아볼 만해요.


  아이도 꿈을 꾸고, 어른도 꿈을 꾼다고 할 수 있지요. 아니, 아이만 꿈을 꾸는 삶이 아니라, 어른도 꿈을 꾸는 삶이라고 느껴요. 어른으로서 나부터 즐겁게 꿈을 꿀 때에 아이들한테도 즐겁게 꿈을 꾸는 길을 보여주고 들려주고 알려주면서 가르칠 수 있어요. 어른으로서 나부터 꿈을 즐겁게 꾸지 않으면, 아이들한테 아무런 꿈을 못 보여주고 못 들려주고 못 알려줄 뿐 아니라 못 가르치는구나 하고 온몸으로 느낍니다.



“할머니네 집에 있었을 때는, 맨날 아침마다 이 슥삭슥삭 소리가 들려서 좋았어!” “그럼 앞으로 요츠바가 이 소릴 내렴.” (122쪽)


“고맙지만 날씨가 좋아도 가 봐야 한답니다.” “그럴수가. 우우우. 우우우우.” “또 선물 갖고 올게.” “선물 같은 거 없어도 돼.” (196∼198쪽)



  아이들을 보러 오는 손님이 아이한테 꼭 선물을 해 주어야 아이들이 기뻐하지 않아요. 선물을 한다고 할 적에 값비싸거나 값진 것을 주어야 하지 않아요. 연필 한 자루나 지우개 하나라도 아이들은 ‘나(아이)를 사랑해 주는 분’ 손길이나 숨결이 깃든 것으로 여기면서 알뜰히 품습니다. 사랑을 받아서 사랑으로 자라는 아이들이기에, 대단한 선물이 아니라 고운 사랑을 바라요. 사랑을 먹으면서 사랑으로 무럭무럭 크는 아이들이기에, 더 큰 선물이 아니라 넉넉하고 따순 사랑을 반겨요.


  함께 놀 수 있어서 기뻐하는 아이들입니다.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어서 활짝 웃는 아이들입니다. 같이 밥상맡에 둘러앉아서 이야기꽃을 피우기에 까르르 웃으며 춤추는 아이들입니다. 새롭게 나들이를 다니고, 살가이 손을 잡기에 언제나 노래를 부르면서 놀 줄 아는 아이들입니다.


  만화책 《요츠바랑!》에 나오듯이 우리 삶도 무척 수수하기 마련이지 싶어요. 이 수수한 삶에서 모든 기쁨을 곱게 길어올릴 수 있지 싶어요. 수수하기에 아름답고 수수하기에 즐겁지 싶어요. 수수하기에 사랑스럽고 수수하기에 재미나지 싶어요. 그래서 나뭇가지 하나로도 신나게 놀 수 있듯이, 100원 한 닢으로도 해맑게 웃을 수 있습니다. 어떤 마음이 되느냐에 따라서 어떤 살림이 되느냐가 달라질 테고, 어떤 생각을 씨앗으로 심느냐에 따라서 어떤 꿈을 이루느냐가 달라질 테지요. 나도 아이들처럼 ‘이다음에 커서 어떤 사람이 될까’ 하고 새삼스레 돌아보면서 빙그레 웃는 하루가 흘러갑니다. 4349.1.27.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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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 Kitchien 7 - 완결
조주희 글 그림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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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맛을 내는 솜씨는 늘 네 손길에 있어

― 키친 7

 조주희 글·그림

 마녀의책장 펴냄, 2012.1.30. 1만 원



  조주희 님이 빚은 만화책 《키친》(마녀의책장)은 2009년에 1권이 나왔고, 2012년에 드디어 7권이 나오면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야기를 마무리짓습니다. 맛있는 이야기를 수수한 밥상에서 찾는 만화책 《키친》이기에 이 만화책이 7권에서 끝나지 말고 10권이든 20권이든 30권이든, 그야말로 오래오래 나올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래도 이 만화책이 일곱 권이나 나올 수 있었다는 대목으로 반가우면서 고맙다고 여기고 싶습니다. 요리 솜씨를 뽐낸다든지, 요리 대회를 겨룬다든지, 맛집 순례를 한다든지, 이런저런 흔하거나 뻔한 얼거리가 아니라, 삶을 사랑으로 짓는 살림이 되어 밥 한 그릇을 나누는 이야기를 만화로 담아낸 숨결이 더없이 고운 《키친》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비온 뒤의 죽순마냥 쑥쑥 자라고, 영감이 아직 듬직한 어깨를 가진 건강한 사내였을 땐, 두부로 온갖 음식들을 만들어냈다. 바싹 부쳐낸 두부를 간장과 갖은 양념으로 조려낸다거나, 호박과 양파로 달달하게 끓여내는 된장국에도 빠짐없이 자리잡았다. 영감에게 바가지를 박박 긁은 저녁에는 미안한 마음에 두부김치를 내놓았었다. (10∼11쪽)



  만화책 《키친》 일곱 권을 읽는 동안 늘 한 가지를 떠올렸습니다. 맛을 내는 솜씨는 늘 네 손길에 있다고, 또는 맛을 내는 솜씨는 바로 내 손길에 있다고, 어디 먼 데에서 맛이나 멋을 찾지 말자고 하는 이야기를 떠올렸어요. 남이 차려 주는 밥이 아니라 내가 손수 차리는 밥이 맛있고, 내가 온 사랑을 담아서 짓는 밥처럼 남들이 나한테 이녁 온 사랑을 담아서 지어 주는 밥이 맛있다는 대목을 이 만화책을 읽는 동안 새삼스레 되새겨 보았습니다.


  집일이 고단하다면 그야말로 ‘남이 좀 밥을 차려 주었으면’ 하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너무 고단하니까요. 그런데, ‘고단하다는 핑계’로 ‘남이 차린 밥’을 먹을 적에는 으레 뭔가 아쉽거나 섭섭하거나 모자라다고 느끼기 마련이지요. 왜냐하면 ‘돈으로 밥을 사다가 먹을 적’에는 밥맛에 마음이 깃들지 못하거든요.


  편의점 김밥이나 도시락을 사다가 먹더라도, 이 편의점 김밥이나 도시락을 밥상에 차리는 손길이 따스하거나 포근하다면, 이 편의점 김밥이나 도시락도 무척 맛있습니다. 공장에서 찍어낸 과자이기에 덜 맛있지 않아요. 《키친》 일곱째 권에 나오는 짧은 이야기처럼, 소년원에 들어간 제자(학생)한테 과자를 사식으로 넣어 주는 담임교사는 이녁(담임교사)이 나누어 줄 수 있는 가장 ‘사랑스러운 맛’을 아이한테 나누어 주는 셈입니다.



전학 온 첫 날 찾아온 아버지는 한눈에 봐도 알코올 중독자였다. 그 녀석은 사랑은커녕 밥조차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자랐겠지? (68쪽)


목록에 적힌 과자 항목을 모조리 체크했다. 같은 방 동료들이 환호성을 지를 만큼. 태어날 때부터 아무것도 주어진 것이 없었던 너에게 더 많은 것이 돌아가야 하지만, 달콤하게 반짝여야 할 유년의 세계, 너는 아직 알록달록한 과자들에 열광할 어린아이인걸. 잠깐이라도 행복감을 맛보았으면. (74∼75쪽)



  만화책 《키친》은 ‘밥맛’이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잘 밝히기 때문에 더없이 돋보입니다. 라면 한 그릇을 이야기해도, 과자 한 봉지를 이야기해도, 소주 한 잔이나 막걸리 한 잔을 이야기해도, 달걀을 삶거나 부친다고 하더라도, 밥맛이란 늘 ‘삶맛’이요 ‘사랑맛’이며 ‘살림맛’이라고 하는 대목을 찬찬히 잘 들려줍니다.


  가장 빼어난 요리사를 찾아내려고 하지 않는 《키친》입니다. 가장 훌륭한 요리 장인을 밝히려고 하지 않는 《키친》입니다. 수수하다면 수수하고 투박하다면 투박하지만, 우리가 늘 마주할 수 있는 이웃들이 저마다 즐겁게 삶을 사랑하면서 짓는 밥 한 그릇을 이야기하는 《키친》이지요.



“조선은 그저 유교의 감옥일 뿐입니다. 이 작은 계란처럼 꼭꼭 갇혀 있어 깨닫지 못하는 것이지요.” (36쪽)


“다들 선비님처럼 숨어서 불평만 한들 조선이 달라질 리는 없지 않습니까. 선비님 같은 양반들이 탁상공론만 일삼으니 조선이 이 모양이 된 겁니다.” “여전히 내가 알 속에 있다는 겁니까? 그렇다면 그대는 어떤가요. 대영제국이라는 강력한 힘을 가진 강대국이란 알의 껍질은?” (50∼51쪽)



  어버이는 아이한테 밥을 차려 줍니다. 밥을 잘 짓든 못 짓든, 어버이는 어버이 나름대로 가장 맛나게 밥을 차려서 줍니다. 할머니한테서 얻은 김치로 밥상을 차리든,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시켜서 밥상을 차리든, 소시지를 볶거나 된장국을 끓여서 밥상을 차리든, 아이들은 어버이가 나누어 주는 따스한 손길에 어린 숨결을 받아서 먹습니다. 어버이는 아이한테 밥을 징검돌로 삼아서 사랑을 주는 사람이에요.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밥을 다리로 삼아서 사랑을 받는 사람이지요.


  손맛은 먼먼 옛날부터 고이 흐릅니다. 손맛은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이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어서 더욱 살뜰히 가다듬습니다. 손맛은 내가 나부터 즐기는 맛이면서 내 이웃하고 동무한테 베푸는 맛입니다. 손맛은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가 손수 짓는 꿈과 사랑이 고스란히 담긴 맛입니다.



좋은 음식은 자식에게 내려오는 걸까? 독특한 향이 난다. 흙 냄새인가, 풀 냄새인가, 바람 냄새인가. 깊은 산의 모든 향기를 몇 년이고 안으로 안으로 담아둔 진한 향이 난다. 평범하기 짝이 없던 외갓집의 뒷산은 이런 보물을 조용히 키우고 있었다. (111∼112쪽)


“그럼 넌 성공한 거네. 가출했잖아.” “아니. 난 후회하고 있어. 엄마한테 미안해. 나름 엄마의 방식대로 너무나 사랑했어. 정말 날 사랑했어. 우리에겐 다른 방법들이 있었을 텐데.” (129쪽)



  밥 한 그릇마다 이야기가 있습니다. 빵 한 점에도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부 한 모에도 이야기가 있고, 콩 한 알에도 이야기가 있어요. 만화책 《키친》은 바로 이 같은 대목을 잘 살려서 보여줍니다. 밥 한 그릇에서 수수하게 이야기를 길어올리고는, 이 이야기로 따끈따끈한 사랑을 가꾸는 기쁨을 가만히 보여주어요.


  오늘 이곳에서 이 밥 한 그릇으로 새롭게 기운을 차리지요. 오늘 이 보금자리에서 이 밥 한 그릇으로 새삼스레 힘을 얻지요. 오늘 이 작은 집에서 이 밥 한 그릇으로 조촐하게 이야기꽃을 피우지요. 오늘 이 따사로운 살림터에서 이 밥 한 그릇으로 아기자기하게 웃음을 노래하지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그릇을 두 손을 모아서 쥐면서 나긋나긋 속삭입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국그릇을 두 손으로 아이들한테 건네면서 상긋상긋 속삭입니다. 우리 몸에 들어오는 이 고운 숨결로 새롭게 놀이를 즐기는 하루를 짓자꾸나. 4349.1.26.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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