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시인선 106
안명옥 지음 / 천년의시작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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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62



시와 먹구름

― 칼

 안명옥 글

 천년의시작 펴냄, 2008.11.30.



  일곱 살 큰아이 손을 잡고 길을 걷습니다. 마을에서 제법 떨어진 멧기슭에 자리한 이웃집에 마실을 간 뒤, 천천히 길을 걸어서 우리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웃집에서 면소재지까지 한 시간 오십 분 동안 걷습니다. 시골에서는 군내버스를 타는 데가 드문드문 있을 뿐 아니라, 시골에서도 읍내로 가도록 버스길이 뻗으니, 이웃마을에서 우리 마을로 돌아가자면 한참 걸어야 합니다.


  아직 뜨겁게 내리쬐는 팔월 십일일 햇볕을 받으면서 걷습니다. 구름이 살살 흐르면 햇볕을 가리면서 그늘이 집니다. 바람이 쏴아 불면 햇볕을 받으면서 걷더라도 시원합니다.


  해를 바라보면서 걸을 적에는 구름을 올려다보기 어렵습니다. 아주 눈부시기 때문입니다. 해를 등지고 걸을 적에는 구름을 올려다보기 수월합니다. 이맛살을 쫙 펴고 하늘을 올려다보아도 눈이 안 아픕니다.



.. 언니, 사는 게 너무 힘드네 / 그렇게 사는 게 다 네 업이야 ..  (무거운 도화지)



  구름은 여러 겹입니다. 구름은 높이마다 다릅니다. 아주 높이 뜬 구름이 있고 나즈막하게 흐르는 구름이 있습니다. 탁 트인 들길을 걸어가면서 온갖 구름을 만납니다. 온갖 구름과 이야기를 나누고, 온갖 구름한테 노래를 들려줍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해창만 들길을 걷습니다. 큰아이를 업다가 안다가 걸립니다. 일곱 살 큰아이는 무척 씩씩하고 튼튼하지만, 뙤약볕을 두 시간 가까이 걷기란 만만하지 않겠지요.


  아이를 안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걷습니다. 아이를 안고 걷는 동안 노래를 부릅니다. 아이가 그만 내려서 걷겠다고 할 적에는 손을 잡고 노래를 부릅니다. 두 시간 가까이 걷는 동안 이 길을 걸어서 지나가는 사람을 아무도 못 봅니다. 경운기를 달리는 사람 서넛, 자가용을 달리는 사람 스무 남짓, 짐차를 달리는 사람 열 즈음 만납니다.



.. 나무껍질을 벗긴다 / 대패질을 하면서 나무의 결을 만들어가면 / 조금씩 드러나는 나무 색깔, / 애무하듯 구석구석 정성을 들이며 / 결을 따라 부드럽게 사포질한다 ..  (바로크가구)



  예전에는 누구나 이 길을 걸었겠지요. 예전에는 누구나 이만 한 길을 걸어서 학교도 다니고, 면내나 읍내를 다녔겠지요. 예전에는 누구나 이런 길을 걸어가면서 노래를 불렀겠지요. 예전에는 누구나 이런 길을 걷다가 나무그늘에서 다리를 쉬고 도랑물에 목을 축였겠지요.


  오늘날에는 십 분 넘게 길을 걷는 시골사람조차 만나기 어렵습니다. 도시에서도 십 분 넘게 길을 걷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삼십 분 넘게 걷는다든지 한 시간 넘게 걸어서 학교나 회사를 오가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요. 걸어다니면서 노래를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귀에 소리통을 꽂고 노래를 듣는 사람은 있겠지만, 스스로 노래를 부르면서 걷는 사람은 참말 얼마쯤 있을까요.


  그래요. 이제 이 나라에는 노래가 없습니다. 텔레비전을 채우는 대중노래는 있습니다. 돈을 벌려고 부르는 노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삶을 지으려고 부르는 노래는 없습니다. 일을 하거나 놀이를 하면서 즐겁게 가슴에서 샘솟는 노래는 없습니다.



.. 오래전에 입었던 바지를 꺼내 입는다 //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살 ..  (구름바지)



  안명옥 님 시집 《칼》(천년의시작,2008)을 읽습니다. 안명옥 님 삶과 넋과 꿈이 깃든 시집을 읽습니다. 안명옥 님은 이녁 삶과 넋과 꿈을 ‘칼’이라는 낱말 하나로 갈무리합니다.


  칼이란 무엇일까요. 전쟁을 벌여 서로서로 죽고 죽이는 무기일까요. 부엌에서 통통통 고소한 도마질 소리를 내면서 살가운 숨결을 나누어 주는 밥을 짓는 살림살이일까요.


  나물을 다듬는 칼일까요. 물고기 대가리를 따는 칼일까요. 나무를 깎는 칼일까요. 능금알을 쪼개는 칼일까요.



.. 내 귓속에서 / 세상의 소리들이 하나씩 죽어가고 있다 / 소리는 쌓여서 무덤을 이룬다 / 빛을 향해 열려 있는 내 몸 / 조용히 흘러 들어와 내 몸 어딘가에 / 소리 그림자를 저장해 두는 것들 ..  (귀-2)



  오늘 나는 큰아이와 두 시간 가까이 들길을 걸어 군내버스를 타려 했는데, 그만 코앞에서 놓칩니다. 고단하고 발이 아픈 큰아이를 가슴에 안고 잰걸음으로 면소재지에 들어서려는 때에 군내버스가 우리 앞을 부웅 스치고 지나갑니다. 버스를 부를 겨를도 없이, 버스를 잡을 틈도 없이, 군내버스는 저 앞으로 멀리 사라집니다.


  버스를 탔으면 찻삯 1500원이 들었을 텐데, 택시를 불러 8000원 찻삯을 치릅니다. 그래도 아이와 함께 집에 잘 들어왔고, 큰아이와 작은아이를 함께 씻긴 뒤 새 옷을 입힙니다. 땀에 옴팡 젖은 두 아이 옷과 내 옷을 조물조물 주물러 빨래합니다. 기지개를 켜고 마당에 내다 넙니다. 아침에 빨아서 내다 넌 옷은 다 말랐습니다.


  파랗게 싱그러운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천천히 흐르는 구름을 바라봅니다. 한참 구름을 바라보면 구름빛은 찬찬히 바뀝니다.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구름은 없습니다. 올해까지 마흔 살을 살면서 이제껏 똑같은 구름을 본 적은 한 차례도 없습니다. 앞으로 마흔 살을 더 살아도 똑같은 구름은 볼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 혼자, 길을 간다 // 지도 한 장 펼쳐보아도 / 제대로 읽어낼 수 없다 / 어렴풋이 빛이 보이는 쪽으로 걷는다 / 이정표의 글자들이 흔들린다 ..  (먹구름)



  네 살 작은아이는 아직 ‘먹구름’이라는 낱말을 모릅니다. 네 살 아이는 먹구름을 볼 때면 “저기 까만 구름 있어.” 하고 말합니다. 그래, 너한테는 까만 구름이로구나. 그렇지만, 까만 구름도 ‘까만 빛’이라고 하기는 어려워. 잿빛이라고 해야 맞겠지. 때로는 짙은 잿빛일 테고 여느 때에는 옅은 잿빛인 구름일 테지.


  여름에는 구름이 흘러 시원합니다. 여름에는 구름이 흐르면서 바람이 산뜻합니다. 여름에는 구름이 끼면서 그늘이 드리워 더위를 식힙니다. 구름이 있으면 에어컨도 선풍기도 부채도 다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해가 따순 볕을 내리쬐고 틈틈이 구름이 흐르면서 숲과 들과 마을과 집이 모두 아름답게 빛납니다. 4347.8.11.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집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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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보관함 시인동네 시인선 14
이은림 지음 / 시인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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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74



시를 쓰고 싶어서

― 그림자 보관함

 이은림 글

 시인동네 펴냄, 2014.7.6.



  바람이 보고 싶어서 바람을 봅니다. 드센 바람이 태평양을 가로질러 한국으로 찾아왔기에, 마당에 서서 바람을 봅니다. 한참 바람을 보다가 아이들을 부릅니다. 얘들아, 우리 바람을 함께 보자.


  바람이 드세니 구름이 아주 빠르게 흐릅니다. 드센 바람을 따라 구름은 흩날리기도 하고 휘몰아치기도 합니다. 낮게 흐르는 구름과 높게 머무는 구름이 갈립니다. 얼마나 많은 구름이 태평양을 지나 한국으로 찾아왔을까 하고 바라봅니다.


  아이들과 마당에서 구름을 보다가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옵니다. 마을 고샅길에 서서 하늘을 봅니다. 마을 뒤쪽으로 펼쳐진 천등산 줄기를 빼고는 우리 눈을 가리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구름도 바람도 하늘도 한결 잘 볼 수 있습니다.



.. 유모차를 밀면서 우아하게 산책은 시작됩니다 / 공원묘지 옆은 미술관 공원묘지 뒤는 아파트 / 이곳에서 버스를 타면 어디든 갈 수 있지요 ..  (오후 세 시)



  마을 고샅길에 나온 아이들은 구름을 보다가 저희끼리 이리 달리고 저리 달립니다. 아이들은 달리기 놀이를 합니다. 그래, 너희는 그렇게 놀아라. 나는 구름을 볼 테니.


  구름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어릴 적을 떠올립니다. 나는 어릴 적에 구름바라기를 무척 자주 꽤 오래 했습니다. 한두 시간은 가볍게 구름바라기를 했습니다. 서너 시간쯤 구름바라기를 하다가 그만 하루가 꼴깍 지나가기도 했어요.


  참말 구름을 바라볼 적에는 다른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바람 따라 흐르던 구름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기도 하고, 이 구름과 저 구름이 하나가 되기도 합니다. 구름은 흐르는 동안 모양이 달라지고, 빛깔이 바뀝니다. 홀가분한 빛이 흐르고, 포근한 숨결이 감돕니다.



.. 상자 속에 갇힌 소리들이 음악이 되는 동안 / 누구는 또, 엄마가 되었고 / 누구는 건기의 나라에서 엽서를 보내온다 / 구름이 제멋대로 옮겨 다니며 / 뱉어내는 빗방울을 받아먹고 / 아이들은 시끌벅적 잘도 자란다 ..  (오르골 상자)



  높은 건물은 그늘을 만듭니다. 높은 건물이 만드는 그늘에 서도 시원합니다. 그런데, 높은 건물이 그늘을 만들면 풀도 나무도 제대로 자라지 못합니다.


  흐르는 구름도 그림자를 만듭니다. 구름이 만드는 그늘에 서면 무척 시원합니다. 그리고, 구름이 만드는 그늘은 풀과 나무를 쉬게 하고, 때때로 비를 뿌리면서 싱그러운 밥을 베풉니다.


  전기로 켜는 등불도 제법 밝아 저녁과 밤에도 환하게 지낼 수 있지만, 풀과 나무를 살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풀과 나무도 밤에는 잠을 자야 하거든요. 잠을 제대로 못 자는 풀과 나무는 시들시들합니다.


  해는 아침에 떠서 낮을 거쳐 저녁에는 집니다. 해는 아침과 낮에는 밝으나 저녁과 밤에는 사라지니, 어느 모로 보면 아쉽다 할 만하지만, 우리가 알맞게 움직이고 알맞게 쉬도록 합니다. 무엇보다 해는 지구별 모든 목숨을 살찌웁니다. 햇볕을 먹으며 풀과 나무가 푸르고, 햇볕을 쬐며 사람들은 새 기운을 얻으며, 햇볕을 받으며 흙과 물이 싱그럽습니다.



.. 오늘, 기분을 물었나요? 오우, 지금 난 아주 파랗거든요. 아침부터 계속 파란 상태죠. 그게 어떤 건지 설명까지 해야 하나요? 말 그대로 파랑이에요. 짐작해 보세요. 파랑이 뭔지. 그따위 질문이나 하는 당신은 내가 보기에 지독히도 빨갛군요. 며칠 동안이나 빨개지고 있었는지 당신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라니, 참 ..  (오늘 나는 아주 파랗죠)



  나는 골짝물을 마시고 냇물을 마십니다. 골짝물이 반갑고 냇물이 기뻐서 골짝물이랑 냇물을 마십니다. 도시에서 지내던 지난날에는 수돗물을 마셔야 했지만, 식구들이 함께 시골로 삶터를 옮긴 뒤에는 늘 골짝물이랑 냇물을 마십니다.


  예전에는 누구나 골짝물이나 냇물을 마셨어요. 예전에는 이 나라 어느 곳이나 시골이었어요. 오늘날에는 몇몇 마을에서만 골짝물이나 냇물을 마십니다. 게다가 이제는 시골 깊은 곳까지 수도관 놓는 공사를 합니다. 몇몇 마을에서마저 골짝물이나 냇물을 언제까지 마실 수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바람이 깨끗하지 못하고 흙이 싱그럽지 못한 곳에서는 골짝물이나 냇물을 못 마십니다. 자동차가 넘치고 시멘트와 아스팔트가 가득한 곳에서는 골짝물도 냇물도 없습니다. 온갖 건물과 아파트와 공장이 넘실대는 데에서는 골짝물이나 냇물에서 물고기조차 살아남지 못합니다.


  마음과 몸으로 이루어진 사람인데, 우리 몸은 뼈와 살갗과 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먹는 밥대로 뼈와 살갗이 이루어지고, 우리가 마시는 물대로 내 몸을 채웁니다. 그러니, 밥과 물을 싱그러우면서 맑고 즐겁게 받아들일 때에 몸이 튼튼합니다. 언제나 맑은 바람을 마셔야 맑은 마음이 되고, 늘 싱그러운 물을 마셔야 싱그러운 몸이 되어요.



.. 이 거리가 꽤 마음에 든다. 뒤로 걷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거리. 아기가 되어가는 속도는 유쾌하고도 엉뚱하다 ..  (끝나지 않는 이야기)



  이은림 님이 빚은 시집 《그림자 보관함》(문학의전당,2014)을 읽습니다. 어떤 상자이기에 그림자를 건사할 수 있을까요. 이은림 님은 어떤 마음으로 그림자를 건사할 상자를 마련하면서 살아갈까요. 그림자를 건사하는 상자에는 어떤 그림자가 깃들었을까요. 이은림 님이 상자에 건사하는 그림자는 어떤 빛이 드리우는 이야기일까요.



.. 거꾸로 묶인 돼지를 싣고 오토바이가 지나갑니다 / 붉은 드레스를 입은 신부는 사원에서 종일 결혼사진을 찍고요 / 테라스에서 햇볕을 쬐던 코끼리들은 서서히 돌이 되어갑니다 / 망고 주스가 되기 위해 망고들은 허둥지둥 익어가고 // 눈을 감거나, 뜨거나 / 모든 곳이 캄보디아입니다 ..  (캄보디아, 캄보디아)



  시를 읽습니다. 시를 읽고 싶어서 시를 읽습니다. 시를 씁니다. 시를 쓰고 싶어서 시를 씁니다.


  아이를 낳습니다. 아이를 낳고 싶어서 아이를 낳습니다. 밥을 짓습니다. 밥을 지어 나도 먹고 아이도 먹으려고 밥을 짓습니다.


  사랑을 합니다. 사랑을 하고 싶어서 사랑을 합니다. 마음 가득 즐거운 빛이 흐르기를 바라면서 사랑을 합니다. 온몸 가득 따사로운 빛이 감돌면서 활짝 웃고 싶어서 사랑을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살고 싶은 대로 삽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은 없어요. 살고 싶지 않은 대로 사는 사람은 없어요. 쳇바퀴를 도는 일을 한다면, 스스로 쳇바퀴를 돌고 싶기에 쳇바퀴를 돕니다. 쳇바퀴에서 빠져나오고 싶다면, 언제든지 쳇바퀴에서 빠져나올 수 있지만, 스스로 안 빠져나왔기에 쳇바퀴를 돕니다. 남한테 얽매이거나 고단한 수렁에 잠겼다면, 스스로 남한테 얽매이고 싶거나 스스로 고단한 수렁에 잠기고 싶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건사해 주지 않습니다. 언제나 나 스스로 나를 건사합니다. 밥은 내가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먹습니다. 내가 스스로 먹은 밥은 내가 스스로 몸속에서 삭힙니다. 스스로 밥을 먹어야 스스로 몸을 움직여요. 남이 먹어 줄 수 없는 밥이요, 남이 움직여 줄 수 없는 몸입니다. 그러니까, 내 삶도 내 꿈도 내 사랑도 언제나 나 스스로 빚어서 펼칩니다.



.. 잔뜩 부푼 눈구름 아래 조심조심 지나가는 시간들. 생각하면 나도 한 덩이 구름이네요. 예정된 시간을 향해 천천히 부풀어가는 구름 말예요 ..  (구름은 부푼다)



  사람들이 자가용을 몹니다.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더 빨리 달리고 싶어 합니다. 정부에서는 세금을 거두어 고속도로를 자꾸자꾸 놓습니다. 땅덩이가 참으로 작다는 한국인데, 찻길은 엄청나게 넓고 많습니다. 한국에 있는 숲에서 나무를 베어 종이를 얻지 않지만, 한국사람 스스로 숲을 가꾸어 나무를 베어 종이를 얻을 생각을 안 합니다. 다른 나라 숲을 무너뜨려서 종이를 얻는 한국 사회입니다. 이웃나라 시골에서 거둔 곡식과 열매를 값싸게 사들여서 먹는 한국 사회입니다. 이웃나라 땅속이나 바닷속에서 뽑아낸 석유를 값싸게 사들여서 자동차를 굴리거나 기름을 때는 한국 사회입니다.


  우리들은 무엇을 하고 싶을까요. 우리들은 아이들을 낳아서 어떻게 살고 싶을까요. 우리들은 아이들이 하루 빨리 대학생이 되고 도시에서 연봉 높은 일자리를 얻기를 바라는가요. 우리들은 아이들이 씩씩하고 튼튼하게 자라서 아름다운 눈빛으로 사랑을 나누는 삶을 바라는가요. 아이들에 앞서, 어른인 우리들은, 스스로 어떤 꿈과 사랑을 꽃으로 피어나도록 할 마음일까요.



.. 몇 년째 그대로 스물다섯 살인 / 너를 내려다보며 / 모르는 척 / 그저 아닌 척 / 후박나무보다 더 높은 데 사는 / 기분이나 설명해줘야지 ..  (후박나무는 키가 크다)



  《그림자 보관함》을 선보인 이은림 님은 스스로 시를 쓰고 싶기에 시를 씁니다. 시인이기 때문에 시를 쓰지 않습니다. 스스로 시를 쓰고 싶으니 시를 쓸 뿐이고, 스스로 삶을 가꾸는 시를 쓰기 때문에, 이 시가 모여 시집 하나로 태어나고, 이 시집은 보드라운 노래로 흐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는 어버이는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고 싶기 때문에 보냅니다. 아이들한테 텔레비전을 보여주는 어버이는 아이들한테 텔레비전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에 보여줍니다.


  아이들과 집에서 그림책이나 동화책을 읽으면서 생각을 함께 열어젖히는 어버이는 아이와 함께 어버이인 이녁 마음밭을 가꾸고 싶은 마음입니다. 아이들과 숲마실을 다니고 자전거마실을 다니며 방긋방긋 웃고 노래하는 어버이는, 아이들한테 푸른 넋과 맑은 꿈을 물려주고 싶은 뜻이 있는 한편, 어버이인 이녁 스스로 삶을 아름답게 누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스스로 가고 싶은 대로 갑니다. 시를 쓰고 싶으면 시를 쓰면 됩니다. 삶을 노래하고 싶으면 삶을 노래하면 됩니다. 바보스러운 정치꾼을 몰아내고 싶으면 바보스러운 정치꾼을 몰아내면 됩니다. 살림을 알차게 다스리고 싶으면 살림을 알차게 다스리면 됩니다. 언제나 상냥하면서 착한 말을 나누고 싶으면 스스로 언제나 상냥하면서 착한 넋이 되면 됩니다.


  바람이 휘 불어 우리 집으로 스며듭니다. 새근새근 자는 아이들 이마를 간질입니다. 아이들 사이에 눕는 내 몸을 조물조물 주물러 줍니다. 나는 바람을 맞이하고 싶어서 기쁘게 바람을 맞이합니다. 마당에 선 우람한 후박나무도 이 바람을 씩씩하게 맞으면서 한여름을 함께 누립니다. 4347.8.1.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집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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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긷는 집 문학과지성 시인선 348
한승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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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61



시와 시골빛

― 달 긷는 집

 한승원 글

 문학과지성사 펴냄, 2008.6.13.



  시골에서 살지만 시골이 즐겁지 않은 사람은 ‘아름다운 시골길’을 찬찬히 걷지 않습니다. 도시에서 사는데 도시가 기쁘지 않은 사람은 ‘예쁜 골목길’을 천천히 걷지 않습니다. 시골에서 살더라도 깜깜한 밤이 내키지 않아 곳곳에 등불을 밝히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도시에서 사는 동안 어두운 밤은 만난 적이 없고, 밝은 낮을 새롭게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봄은 따스한 바람이 불면서도 밤에는 쌀쌀합니다.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지만 햇볕이 쨍쨍 내리쬡니다. 가을에는 보드라운 바람이 불면서도 밤에는 선선합니다. 겨울에는 차가운 바람이 불면서도 곧잘 포근한 볕이 드리웁니다.


  철마다 다른 지구별입니다. 씨줄과 날줄에 따라 날씨가 달라지기도 하지만, 우리 겨레가 살아가는 이 터에는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있습니다. 철마다 빛이 다르고, 철마다 다른 빛은 늘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 우리 막내고모 가마 타고 시집에 간 첫날 상다리 휘어지는 신부상을 받았는데, 상 위에는 젓가락으로 집어 먹어야 할 것들뿐이었습니다. 처녀 시절 부뚜막에 앉아 바가지에 밥을 담아 먹곤 한 막내고모는 젓가락질을 할 줄 몰랐습니다 ..  (족두리 꽃)



  바람에 귀를 기울여 봐요. 바람이 우리한테 어떤 노래를 베풀고 싶은지 들어 봐요. 서양에서 어떤 이들이 지은 교향곡을 들어도 좋으나, ‘사람이 지은 모든 노래’는 가만히 내려놓은 뒤 ‘바람이 들려주는 노래’를 들어 보아요.


  바람이 풀잎을 건드리면서 부르는 노래를, 바람이 바닷물이나 냇물이나 골짝물을 건드리면서 부르는 노래를, 바람이 구름이나 무지개를 건드리면서 부르는 노래를, 바람이 비나 눈을 건드리면서 부르는 노래를 곰곰이 들어요.


  바람노래를 들었으면 바람빛을 바라봅니다. 아침에 흐르는 바람빛을 보고, 낮과 저녁에 흐르는 바람빛을 봅니다. 새벽과 밤에 흐르는 바람빛을 보며, 갠 날과 흐린 날에 흐르는 바람빛을 봅니다.


  바람노래를 듣고 바람빛을 보았다면 바람내음을 맡습니다. 숲에서 부는 바람이 실어 나르는 내음을 맡습니다. 들에서 부는 바람이 실어 나르는 들꽃내음과 들풀내음을 맡습니다. 바닷내음을 맡고, 마당에 넌 빨래를 건드리는 내음을 맡습니다.



.. 전원생활 하겠다고 서울에서 장흥 안양 산골로 이사 온 / 중년 남자가 숭어회에 포도주 한잔을 걸치면서 / 5백 평 산밭에 심은 콩씨 파먹어버린 / 비둘기와 꿩을 원망했을 때, 마주 앉은 / 풋늙은이는 토굴 연못가의 주렁주렁하던 황금색 살구를 모두 따먹어버린 / 어치와 물까치와 무당새를 저주했습니다 ..  (하늘 길)



  풀과 나무는 햇볕을 먹으면서 자랍니다. 풀과 나무는 바람을 먹으면서 자랍니다. 풀과 나무는 빗물과 눈송이를 먹으면서 자랍니다. 풀과 나무는 흙을 먹으면서 자랍니다. 그리고, 풀과 나무는 사람들이 베푸는 사랑과 이야기를 먹으면서 자랍니다.


  사람은 어떻게 자라는가요? 학교에 넣으면 알아서 자라지 않겠지요? 아이들은 어떻게 자라는가요? 학원에 넣거나 참고서를 풀라고 던져 주면 자라지 않겠지요?


  사람과 풀이랑 나무하고 똑같습니다. 사람도 햇볕과 바람과 빗물과 눈송이와 흙을 먹으면서 자랍니다. 사람도 이웃과 동무가 베푸는 사랑과 이야기를 먹으면서 자랍니다.


  햇볕이 없고 바람이 없다면, 숲이나 사람은 모두 죽습니다. 비와 눈이 없다면, 숲이나 사람은 모두 시듭니다. 흙이 없거나, 사랑이나 이야기가 없으면, 숲도 사람도 풀이 죽으면서 고개가 꺾입니다.



.. 꿈속에서 또 《조선왕조실록》을 펼쳐 보다가 / 이런! 쯧쯧! 하고 혀를 찼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의 갈피갈피에 우글거리는 / 하루살이들의 찬란하게 반짝거리는 날개들이 하도 덧없고 가엾어서 ..  (날개)



  한승원 님이 빚은 시를 엮은 《달 긷는 집》(문학과지성사,2008)을 읽습니다. 한승원 님은 이 시집을 이녁 시골인 전남 장흥에서 썼다고 합니다. 글을 쓰는 한승원 님을 키운 사람들 이야기를 싯말에 담습니다. 글을 쓰는 한승원 님을 이루도록 이끈 숲과 마을 이야기를 싯노래에 담습니다.


  시는 언제나 말입니다. 그러니 싯말입니다. 서로 오붓하게 어우러지면서 주고받는 말이 빛나기에 싯말입니다.


  시는 늘 노래입니다. 그러니까 싯노래(시노래)입니다. 나란히 오순도순 어깨동무하면서 나누는 노래가 흐드러지기에 싯노래입니다.



.. 나무숲이나 하늘이나 바다나 해나 달이나 별이나 구름이나 안개나 / 꽃송이나 천강의 물결이나 새들의 눈빛 속에 스며들어 / 저를 지켜보시는 당신 ..  (열꽃 피는 날의 기도)



  시골사람은 시골빛입니다. 시골마을에서는 마을빛입니다. 숲에서는 숲빛입니다. 바다에서는 바다빛이요, 멧골에서는 멧빛입니다. 하늘에서는 하늘빛이며, 흙에서는 흙빛입니다. 사랑을 속삭이고 싶은 사람은 사랑빛입니다. 꿈을 키우고 싶은 사람은 꿈빛입니다.


  어디로 나아갈 길인가요. 우리들은 저마다 어느 곳을 우리 보금자리로 삼아서 어떤 길로 나아갈 때에 아름다울까요. 어떤 밥을 먹고, 어떤 옷을 입으며, 어떤 집을 지을 적에 우리 삶이 즐겁거나 아름다웁거나 사랑스러울까요.



.. 평상에 누워 / 피어오르는 모깃불 연기 사이로 / 별 하나 꽃꽃 별 둘 꽃꽃 헤아리던 어머니 / 먼 마을에서 들려오는 어미 소 울음소리에 / ‘아야! 그래서 그랬던갑다.’ 하고 나서 / 큰댁 할머니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  (고향 노을)



  한여름 칠월 끝자락에 시집을 읽습니다. 한여름 칠월이 저물고 팔월을 앞둔 한낮에 아이들과 골짜기로 나들이를 가서 시집을 읽습니다. 우리 네 식구 깃든 전남 고흥 시골자락에서 골짜기까지는 가깝습니다. 걸어서 삼십 분 남짓이면 넉넉합니다. 자전거를 달리면 옷이 옴팡 젖도록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내립니다. 땀에 젖은 옷과 몸은 골짝물로 씻습니다. 한참 골짝물놀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개운합니다. 골짝물에 온몸을 담그면 골짜기에서 살아가는 물고기와 가재와 도룡뇽이 방긋방긋 고개를 내밉니다. 어떤 이는 골짜기까지 자가용을 몰고 찾아와서 고기를 굽느니 고스톱을 치느니 술을 들이붓느니 하고 시끄럽습니다. 우리 식구는 왈짜하고 멀찌감치 떨어진 골짜기에 깃듭니다. 골짜기에서는 바람소리를 들으려 합니다. 골짜기에서는 나뭇잎빛을 누리려 합니다. 골짜기에서는 물소리와 물빛을 마주하려 합니다. 농약도 비료도 비닐도 경운기도 아닌, 수수한 흙과 풀과 하늘이 어우러진 빛을 느끼고 싶습니다.


  골짜기에 그늘을 드리우는 커다란 나무가 푸른 잎사귀 하나 톡 떨굽니다. 나뭇잎은 톡 소리를 내면서 골짝물에 내려앉습니다. 골짝물에 내려앉은 가랑잎은 물살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흐릅니다.


  아이들이 까르르 웃습니다. 아이들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나도 아이들 따라 웃고 노래를 부릅니다. 여름이 더우면서 시원하고 싱그럽습니다. 4347.7.30.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집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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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지성 시인선 44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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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60



시와 껍질

―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김혜순 글

 문학과지성사 펴냄, 1985.9.1.



  아이들이 날마다 껍질을 깨고 일어납니다. 참말 아이들은 날마다 새로 깨어납니다. 이와 달리 어른들은 좀처럼 날마다 껍질을 못 깨기 일쑤이고, 못 일어나기도 합니다. 어른들은 날마다 새로 깨어나려는 생각을 안 품기도 합니다.


  삶이 따분할까요. 삶이 지겨울까요. 고단하거나 괴로워서 생각하기 싫을까요. 사회에 길든 탓에 마음속에 아무런 느낌도 빛도 일어나지 않을까요.


  어른은 누구나 아기로 태어났습니다. 아기로 태어난 목숨은 천천히 자라 아이가 되고, 다시 천천히 크면서 어른이 됩니다. 어른을 보면, 나이만 먹은 어른이 있고, 나이가 아닌 슬기를 키우는 어른이 있습니다. 나이만 먹는 어른은 삶을 재미없다 여기며, 슬기를 키우는 어른은 삶을 재미있게 나눕니다.


  아이들을 볼 적에도 이와 같습니다. 날마다 늘 재미나게 노는 아이들이 있으나, 새로운 날을 맞이했어도 좀처럼 놀 생각을 안 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학교에서든 학원에서든 놀 생각이 가득한 아이가 있고, 학교에서나 학원에서나 집에서나 공부 생각에 사로잡혀 아예 놀이를 잊는 아이가 있습니다.



.. 너는 보지 않지 / 나무들 어우러진 산봉우리들과 / 그 아래로 졸졸 흐르는 시냇물과 폭포들을 / 보지 않지 / 그것들을 보지 않고, 너는 / 나무뿌리 곁에 엎드리고 / 흘러가는 물 아래 엎드린 / 땅을 보지 / 수천 년 전부터 거기 살아온 / 흙을 보지 / 춤추고 일어서고 움직이는 / 대평원을 내려다보지 / 그것도 저 보름달쯤에서 보듯 / 바라만 보지 ..  (흙만 보는 사람)



  바람이 붑니다. 바람이 불어 구름이 흐릅니다. 구름이 흘러 그늘이 생깁니다. 칠월 무더위에 구름이 빚는 그늘은 더없이 시원하고 싱그럽습니다. 구름이 없더라도 나무가 있으면 나무가 드리우는 그늘이 몹시 상큼하면서 아름답습니다. 건물이 만드는 그림자로는 시원하다는 느낌이 안 들지만, 구름이나 나무가 빚는 그늘은 그야말로 시원합니다.


  비가 옵니다. 비가 오면서 풀과 나무는 한결 짙푸릅니다. 그런데 비가 열흘 내리 들이붓다가, 또 열흘 잇달아 퍼붓습니다. 끊이지 않는 비에는 풀도 나무도 수그러듭니다. 넘치는 빗물에 풀포기가 눕고 나무가 기운을 잃습니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풀과 나무는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물을 잘 준다 하더라도 풀과 나무는 빗물을 바랍니다. 감옥이 아무리 시설이 좋다 한들, 집과 마을이 사람한테 가장 포근하면서 아름다웁듯이, 풀과 나무한테는 ‘사람이 주는 물’이 아닌 ‘하늘이 내리는 빗물’이 가장 반가우면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풀과 나무는 빗물로만 살지 않아요. 빗물만 준대서 살 수 없습니다.


  무엇이 있어야 할까요? 풀과 나무한테는 빗물 말고 또 무엇이 있어야 할까요? 바로 해입니다. 햇볕과 햇살과 햇빛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흙입니다. 비료나 농약이 아닌 흙입니다.



.. 아버지가 허수아빌 세우신다, / 넓고 넓은 가을 들판에 / 아버지가 허수아빌 세우시고 / 넝마들에게 준엄하게 이르신다 / 황산벌에 계백 장군 임하시듯 / 늠름하게 쫓아뿌라, 잉 ..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사람은 밥을 먹어야 삽니다. 밥을 먹었으면 똥오줌을 누어야 삽니다. 밥을 먹고 일하면서 잠을 자야 삽니다. 그런데, 사람은 밥만 먹거나 잠만 잔대서 살 수 있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셔요. 감옥에 갇힌 채 밥만 잘 먹고 잠만 잘 잘 수 있다면, 사람으로서 즐거운 삶이 될까요? 아이들이 값진 옷을 입고 맛난 밥을 먹으며 자가용을 타면서 학교를 오간다면, 이러한 삶이 아이들한테 즐거울까요? 오직 시험공부만 해야 하면서 지내야 한다면 아이들은 삶이 즐거울까요?


  김혜순 님이 빚은 시집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문학과지성사,1985)를 읽습니다. 스스로 껍질을 깨면서 날마다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고 싶은 노래를 부르는 시를 읽습니다. 사랑을 꿈꾸고 싶은 노래와 같은 시를 읽습니다. 꿈을 펼치고 싶은 노래와 같은 시를 읽습니다.



.. 나는 엄마다 / 딸이 나를 엄마라고 부르고 / 내가 또 세끼를 근엄하게 훈계하고 / 먹여서 기르니 / 나는 엄마다 / 엄마이기 때문에 / 나는 엄마 행세를 한다 / 그건 안 돼! / 하지 마! / 때릴 거야! ..  (엄마)



  우리는 대학교에 들어가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회사원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국민연금을 받아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의료보험을 받아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국민투표를 해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대통령이나 군수를 뽑아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문을 읽거나 방송을 보아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삶을 지어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새롭게 맞이하면서 하루하루 웃음으로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삶을 가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숲을 누리고, 바다를 껴안으며 멧골에서 나물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 줄 것이 없어 나는 자식에게 별명을 선물로 준다. / ― 가시야, 실파리야, 거머리야 / 자식은 그런 가녀린 장난감은 갖고 놀 수 없다고 투덜거린다. // 그 다음 나는 좀 더 예술적인 선물을 준다. / ― 피아노를 울려라, 딩동댕. 풀피리를 불어라, 삘릴리. 작은북을 울려라 통통통 / 자식은 나는 당신의 악기가 아니라고 투덜거린다. / 그래서 나는 좀 더 딱딱하고 교훈적인 별명을 내 자식에게 수여한다. / ― 뭇솔리니! 흐루시쵸프! 마오쪄뚱! ..  (나의 詩의 발전사)



  아름답게 살 때에 아름다운 삶입니다. 돈을 잘 벌기에 아름다운 삶이 아닙니다. 이름을 드날리기에 아름다운 삶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삶이 되자면, 스스로 ‘아름다움’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스럽게 어깨동무할 때에 사랑스러운 삶입니다. 교수가 되거나 작가가 된대서 사랑스럽지 않습니다. 넓은 아파트를 내 것으로 삼거나 큰 자가용을 내 것으로 몬대서 사랑스럽지 않습니다.


  삶은 마음속에서 우러나옵니다. 삶은 날마다 껍질을 깨고 일어섭니다. 삶은 늘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삶을 읽으면서 노래가 흐릅니다. 노래가 흐르면서 이야기가 샘솟습니다. 이야기가 샘솟으니 시 한 줄을 쓸 수 있습니다. 4347.7.22.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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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의 힘 - 개정판 지혜사랑 시인선 69
반칠환 지음 / 지혜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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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73



멧새가 깃드는 집

― 웃음의 힘

 반칠환 글

 지혜 펴냄, 2005.9.26.



  낮에 자전거에 아이들을 태워 우체국에 다녀오려고 했더니 비가 옵니다. 저런, 오늘 우체국에 못 가겠네 하고 생각하는데, 비가 곧 그칩니다. 그러나 하늘은 꾸물거립니다. 곰곰이 날씨를 헤아립니다. 비가 그쳤다 싶은 이때에 얼른 자전거를 몰아 우체국에 다녀올는지, 아니면 우체국에 갈 일을 비가 그칠 때까지 미룰는지.


  멀리 하늘을 바라볼 적에 한 시간쯤은 괜찮지 싶습니다. 마당에 자전거를 내놓습니다. 작은아이가 마루에서 놀다가 아버지가 자전거를 끌어내는 모습을 보고는 얼른 마당으로 내려섭니다. 누나를 부르면서 함께 자전거 타자고 합니다.



.. 노랑제비꽃 하나가 피기 위해 / 숲이 통째로 필요하다 ..  (노랑제비꽃)



  아이들은 놀이터에 가거나 바다에 가거나 골짜기에 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오늘 같은 날씨에는 어디에도 가기 어렵습니다. 얘들아, 오늘은 어디에도 가기 어렵겠구나. 아침에 차려 놓은 밥을 아이들이 몇 숟갈 안 떴습니다. 아이들이 밥을 잘 먹었으면 면소재지 빵집에라도 들렀을 테지만, 우체국에만 들릅니다. 아버지가 우체국에서 소포를 부치는 동안 두 아이는 우체국 마당에서 땀이 나도록 뛰어놉니다.


  면소재지 놀이터에 가자는 아이들 말에 고개를 젓습니다. 저기 하늘을 보렴. 오늘은 비가 쏟아질 듯하니 못 가겠구나.


  신나게 집으로 돌아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자전거를 제자리에 놓고 마당을 살짝 치웁니다. 아침부터 자그마한 멧새 예닐곱 마리가 우리 집 마당에서 놉니다. 내가 가까이에 가도 멀리 날아가지 않습니다. 기껏 후박나무 가지 사이로 숨습니다.



.. 남산 산책로, 오래된 나무들이 자꾸만 제 이름을 까먹는지 사람들이 이름표를 달아 주고 있었다 ..  (경력으로 안 되는 일)



  몸을 씻고 빨래를 한 뒤 밥을 새로 차릴까 생각하다가, 몸만 씻고 밥을 새로 차립니다. 감자와 양파와 햄과 마늘을 물로 지진 뒤에 찬밥을 비벼서 양념을 합니다. 이러면 몇 숟갈 뜨려나.


  어제 낮 고흥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이도 어른도 바깥마실을 마치고 시골집으로 돌아오면 하루나 이틀쯤 밥맛이 없습니다. 아이들을 채근하거나 닦달할 수 없습니다. 으레 예닐곱 시간쯤 차에 시달리는 만큼, 어젯밤 느긋하게 잤어도 아직 몸이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았구나 싶습니다.


  아이들한테 낮밥을 새로 차려서 주고는, 복복 빨래를 합니다. 아이들이 어제 벗은 옷을 찬찬히 비벼서 빨래합니다. 아직 빗방울이 듣지 않기에 마당에 내다 넙니다. 아이들이 어느 만큼 밥을 먹을 즈음 빗방울이 듣습니다. 한 시간조차 바깥에서 말리지 못하고 집안으로 옷가지를 들입니다.


  이제부터 빗소리가 굵습니다. 비는 시원하게 내립니다. 지난해 여름을 돌이켜봅니다. 지난해에는 참말 비가 안 오는 남녘 여름이었습니다. 지난해 여름에 얼마나 더웠는지, 또 얼마나 가물었는지, 또 골짝물이 얼마나 가늘게 흘렀는지 새삼스레 헤아려 봅니다.



.. 봄이 꽃나무를 열어젖힌 게 아니라 / 두근거리는 가슴이 봄을 열어젖혔구나 ..  (두근거려 보니 알겠다)



  반칠환 님 시집 《웃음의 힘》(지혜,2005)을 읽었습니다. 2012년에 고침판이 나왔다고 합니다. 두 아이를 데리고 일산에 있는 치과에서 이를 고치고 시외버스를 달려 고흥으로 돌아오는 길에 읽었습니다.


  책이름을 생각합니다. 웃음은 힘이 있습니다. 웃음으로 삶에 힘을 얻습니다. 웃음 한 자락으로 사랑에 새롭게 힘을 담습니다. 깔깔 호호 웃으면서 밥을 맛나게 짓고, 하하 히히 웃으면서 밤마다 느긋하게 잠자리에 듭니다.



.. 치악산 능선마다 / 새똥, 곰똥, 달팽이 오줌 / 다 씻어 내린 계곡물이 / 맑다 ..  (시치미)



  헌 고무신을 들고 처마 밑에 섭니다. 빗물이 주르르 흐르는 곳으로 가려니, 작은 멧새 한 마리가 우리 집 처마에서 비를 긋다가 포로롱 날아갑니다. 처마 밑에서 뒤꼍 감나무 아래쪽으로 갑니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에 헌 고무신을 헹굽니다. 우리 집 복숭아나무가 올해에는 키를 얼마나 키울까 하고 생각하면서 바라봅니다. 해가 떨어지는데, 처마 밑 제비집에 제비가 돌아오지 않습니다. 우리 집 제비들은 모두 씩씩하게 크기는 했는데, 어디까지 갔을까요. 벌써 중국으로 돌아가지는 않았을 텐데, 어디에서 비를 그으면서 날개를 말릴까 궁금합니다. 시골마을마다 끔찍하게 치는 농약을 쐬지 않았기를 빕니다. 다른 제비집에서 쉬든지, 숲에서 쉬면서, 차근차근 몸을 돌보면서 지내기를 빕니다.


  그러고 보면, 작은 멧새 들은 우리 집 빈 제비집을 노리는지 모릅니다. 지난겨울에는 참새 두 마리하고 딱새 두 마리가 빈 제비집에 깃들면서 겨울을 났어요. 아직 칠월이지만, 작은 멧새는 빈 제비집에서 쉬고 싶을는지 몰라요. 빈 제비집에서라면 깃을 포근하게 쉬면서 새롭게 기운을 차릴는지 몰라요. 우리 집 마당에서 즐겁게 웃으면서 놀다가, 빈 제비집에서 즐겁게 잠들다가, 후박나무에서 열매와 애벌레를 먹으면서 즐겁게 새 하루를 누릴는지 모릅니다. 4347.7.15.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집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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