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난 꿈이 한데 모여
서정홍 지음 / 나라말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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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100



시골사람이 일구는 투박한 꿈은 ‘사랑’

― 못난 꿈이 한데 모여

 서정홍 글

 나라말 펴냄, 2015.5.1. 1만 원



  거미 한 마리가 내 앞으로 줄을 드리우면서 내려옵니다. 거미를 바라보며 빙긋 웃은 뒤 마음속으로 말을 겁니다. 얘야, 네가 이리 내려오면 나는 이 집에서 아무것도 못 할 텐데. 손가락을 살그마니 뻗습니다. 거미가 줄을 드리우며 내려오다가 내 손가락에 톡 내려앉더니 깜짝 놀란 듯이 다시 줄을 당겨서 허둥지둥 위로 올라갑니다. 이 아이는 우리 집 한쪽에 거미줄을 치려고 한 듯합니다.


  거미를 눈여겨봅니다. 거미는 조금 뒤 다시 줄을 드리우고 내려오려 하지만, 나는 다시 손가락을 뻗어, 거미가 내려오는 자리에서 기다립니다. 거미는 다시 위로 올라갑니다. 거미가 집을 지을 만한 자리로 옮겨 줍니다. 집 안쪽에 줄을 치지 말고, 집 바깥쪽에 줄을 치기를 바라면서 거미를 더 지켜봅니다. 아무래도 이 둘레에는 줄을 치지 못하겠구나 싶은지, 거미는 다른 곳으로 사라집니다.



땅에 무릎을 / 수백 번 꿇지 않고서야 / 어찌 밥상 차릴 수 있으랴 (먹고사는 일)


이른 아침부터 감나무 가지에 / 온 동네 새들이 야단법석이다 / 찌뿌드드한 몸을 일으켜 나가 보니 / 아이구우, 이게 무슨! / 텃밭에 개미가 하도 많아 / 아내가 놓아둔 끈끈이에 / 개미는 안 붙고 / 참새 새끼 한 마리 붙어 파닥거리고 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서정홍 님이 일군 시집 《못난 꿈이 한데 모여》(나라말,2015)를 읽습니다. 경남 합천 황매산 언저리 멧골자락에서 흙을 일군다고 하는 서정홍 님은 ‘농사꾼 시인’입니다. 또는 ‘시인 농사꾼’입니다. 서정홍 님한테서는 ‘농사꾼’이나 ‘시인’이라는 이름을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공장 일꾼으로 지낼 적에는 ‘노동자’하고 ‘시인’이라는 이름을 떼어놓을 수 없어서 ‘노동자 시인’이나 ‘시인 노동자’였고, ‘아버지 시인’하고 ‘시인 아버지’라는 이름으로도 지내다가, 이제는 호젓하게 ‘농사꾼 시인’하고 ‘시인 농사꾼’으로 숲바람을 마시면서 지냅니다.



산골 마을에 남의 논밭 얻어 농사지으며 산 지 서너 해 지나서야 알았습니다. 바쁜 농사철이 되면 몸이 지쳐 밥 씹을 힘조차 없다는 것을. (달콤한 보약)


경운기를 몰고 / 산밭 아래 / 작은 샘을 지날 때마다 / 잠시 물 한잔하신다 // ―어이쿠우, 시원타! / 맨날 이리 고마워서 우짜노 // 보는 사람 하나 없는데 / 작은 샘한테 인사를 하신다 (산내 할아버지)



  시를 쓰는 서정홍 님은 시를 쓰려고 이 땅에 태어났을는지 모릅니다. 이 일도 하고 저 일도 하지만, 서정홍 님이 마주하는 모든 일은 언제나 ‘시’라는 이야기로 새로 태어납니다. 공장에서 붙잡은 기계도 시로 바라보고, 시골에서 맞잡은 연장도 시로 바라봅니다. 아이를 낳아서 곁님하고 함께 돌보는 동안 곁님하고 아이를 시로 바라볼 뿐 아니라, 들에서도 길에서도 집에서도 꿈에서도 언제나 시를 그립니다.



혼자서도 잘 노는 / 다섯 살 개구쟁이 다울이가 / 살며시 다가와 묻습니다 // ―시인 아저씨, 상추는 물을 주면서 / 강아지풀은 왜 물을 안 줘요? / 상추 옆에 같이 살고 있는데 (상추와 강아지풀)


나는 도시에서 태어나 / 도시에서 살다가 / 십 년 전에 산골에 들어와 / 농사지으며 살고 있으니 / 농사 나이로 열 살입니다 (산골 아이 구륜이 3)



  시골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예부터 누구나 노래를 부르며 살았습니다. 지구별에서 살아온 모든 사람은 먼먼 옛날부터 누구나 노래를 짓고 부르며 나누었습니다. 가수라서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삶을 가꾸면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들일을 하며 들노래를 부르고, 바닷일을 하며 바다노래를 불러요. 나물을 캐며 나물노래를 부르고, 길쌈을 하며 길쌈노래를 불러요.


  서정홍 님이 빚은 시집에서 흐르는 시는 모두 서정홍 님 스스로 날마다 새롭게 가꾸면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시인이기에 쓰는 시가 아니라, 삶을 짓기에 쓰는 시입니다. 흙을 만지면서 흙밥을 먹기에 쓰는 시입니다. 바람을 마시고 숲을 바라보면서 쓰는 시입니다. 햇볕을 쬐고 구슬땀을 흘리면서 쓰는 시입니다.


  시골에서는 시골을 노래하는 삶이 되어 시를 씁니다. 도시에서는 도시를 꿈꾸는 삶이 되어 시를 씁니다. 시골에서 노래하는 삶이든, 도시에서 꿈꾸는 삶이든, 저마다 제 삶을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바라보면서 시를 씁니다.



이른 아침부터 지게를 지고 / 이웃집 다랑논에 모판을 나르고 // 으스름히 해 질 무렵에 / 집으로 돌아와 몸을 씻었습니다 (유월)


산밭에서 처음 딴 오이라며 / 아내가 내게 주었습니다 // 힘든 농사일 하는 / 당신이 먼저 먹어야 한다고 // 내게 준 오이를 / 다시 아내에게 주었습니다 // 힘든 농사일 하는 / 당신이 먼저 먹어야 한다고 (여름날)



  한여름으로 접어들면, 시골에서는 낮에 땡볕을 쬐며 일하기 힘듭니다. 가만히 서거나 앉아도 땀이 흐르거든요. 한여름에는 새벽 서너 시부터 일손을 놀려 아침에 쉽니다. 낮에 고즈넉하게 한숨을 돌리고, 햇볕이 누그러지는구나 싶을 때에 다시 일손을 잡습니다. 일이 많거나 바쁘면 땡볕에 흙빛으로 까무잡잡하게 온몸이 타면서 일하지요.


  시집 《못난 꿈이 한데 모여》를 이루는 시에는 땀내가 흐릅니다. 땀을 식히는 바람결이 감돕니다. 바람결에 싱그러운 숨결이 깃들도록 북돋우는 꽃빛하고 풀빛이 함께 섞입니다.


  오이를 따며 오이를 생각하는 노래를 부르고, 고추꽃을 보며 고추를 그리는 노래를 부릅니다. 나락을 심으며 나락꽃이 피고 지며 나락알이 굵어지는 꿈을 꾸고, 나락을 베면서 나락알을 갈무리하여 겨우내 즐겁게 먹는 꿈을 꿉니다.


  노래는 고스란히 시가 됩니다. 꿈은 모두 시로 다시 태어납니다. 노래는 어버이 입을 거쳐서 아이들 몸으로 스밉니다. 꿈은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이야기에 살을 입히면서 새삼스럽게 피어나고, 아이들은 저마다 가슴에 새롭게 꿈씨를 심으면서 신나게 뛰놉니다.



지난 십 년, 내 가난한 삶과 함께 / 녹두밭으로 콩밭으로 수수밭으로 / 양파밭으로 마늘밭으로 생강밭으로 / 불평 한마디 없이 따라다닌 / 괭이가 비를 맞고 있다니! (괭이)



  마당에 천막을 칩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천막에서 놀고 싶다 하기에 천막을 칩니다. 천막을 치기 앞서 마당을 씁니다. 빗자루로 석석 쓰니, 여덟 살 큰아이가 “나도 거들어야지.” 하면서 빗자루를 가져옵니다. 다섯 살 작은아이는 “나도 도와야지.” 하면서 광에서 깔개를 꺼냅니다. 작은아이는 아버지하고 누나가 비질을 마칠 때까지 평상에 앉아서 놉니다.


  우리 아이들 멋지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비질을 마무리짓습니다. 설거지를 하고, 밀린 일을 조금 합니다. 이제 자전거를 손질해서 골짝마실을 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해가 하늘 높이 걸린 낮에 골짝물에 몸을 담그고 시원한 골짝노래를 부르자고 꿈꿉니다.


  아이들이 물놀이를 마친 뒤 갈아입을 옷을 챙깁니다. 멧새는 후박알을 따먹으려고 마당으로 찾아들고, 제비는 오늘도 바지런히 먹이를 잡아서 처마 밑으로 나릅니다. 시골사람이 일구는 투박한 삶은 언제나 사랑이리라 느낍니다. 황매산에서 부는 고요한 바람이 짙푸르게 골골샅샅을 보듬습니다. 우리 집 마당에서 부는 바람도 싱그럽게 이웃마을로 날아가고, 다른 고장에서 부는 상큼한 바람도 우리 마을로 반갑게 찾아옵니다. 4348.7.15.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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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5-07-17 08:17   좋아요 0 | URL
이 책, 지금 막 구입했습니다.

숲노래 2015-07-17 09:58   좋아요 0 | URL
풀내음에 땀내음이 섞인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곧 누리시겠네요!!
 
몽당연필도 주소가 있다 문학동네 동시집 16
신현득 지음, 전미화 그림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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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62



아이들을 지켜보면 시가 샘솟아요

― 몽당연필도 주소가 있다

 신현득 글

 전미화 그림

 문학동네 펴냄, 2010.12.8. 8500원



  다섯 살 작은아이가 문득 “그림 그리고 싶어.” 하고 말합니다. 여느 때와 달리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합니다. 그래서 물감판하고 그림종이를 내줍니다. 작은아이는 물을 쓸 수 있는 부엌바닥에 종이를 펼쳐서 그림을 그립니다. 큰아이는 작은아이가 그림을 그리도록 도와주다가 저도 함께 그림을 그립니다. 그런데 두 아이는 종이뿐 아니라 부엌바닥에도 그림을 그립니다.


  아이들이 그림놀이를 마친 뒤, 부엌바닥을 걸레로 훔칩니다. 부엌바닥을 더 깨끗하게 닦으라는 뜻으로 부엌바닥에 그림을 그렸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두 아이는 갓난쟁이였을 적에 사흘이 멀다 하고 이불이 쉬를 누거나 똥을 발랐습니다. 기저귀를 갈랴 이불을 빨랴 그야말로 손이 쉴 겨를이 없었어요. 아기를 돌보는 집은 깨끗해야 하니까 이불을 자주 빨라는 뜻으로 그렇게 쉴새없이 이불에 쉬와 똥을 발라 주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아시아 땅에서 / 뾰족 나온 / 우리나라 // 거기에 / 점 하나 찍으면 / 우리 마을 (점 속에 내가 있다)


한 바퀴 세계를 돌고 보면 / 돌아올 수밖에 없는 길 // 북극에서 오는 길도, / 로마에서 돌아오는 길도 이 길이라죠 // 우리 집 골목에서 / 끝나는 길 (우리 집 골목길은)



  신현득 님이 빚은 동시를 모은 《몽당연필도 주소가 있다》(문학동네,2010)를 읽습니다. 1950년대부터 동시를 쓴 분이 바라보는 2010년대는 어떤 모습일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1950년대에 어린이를 바라보는 눈길하고 2010년대에 어린이를 헤아리는 눈길은 어느 만큼 다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아무래도 할아버지 자리에서 바라보는 어린이 삶이 《몽당연필도 주소가 있다》에서 흐른다고 할 만합니다. 할아버지가 아이한테 옛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을 동시로 썼구나 싶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나라와 아시아와 지구별을 넓게 살필 수 있도록 북돋우고 싶은 마음을 동시로 그리기도 했다고 느낍니다.



이름만 듣고도 알 수 있지 / 이쁘다고 이쁜이 / 순한 아기 순단이 / 야무진 차돌이 / 힘이 센 센둥이 (이름이란 그런 것)


내 이름은 김개나리야 // 전학 서류 가지고 찾아간 / 학교 이름도 / ‘개나리초등학교’였지 (개나리초등학교)



  아이들을 지켜보면 시가 샘솟습니다. 아이들이 어버이나 어른더러 시를 쓰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아이들은 어버이나 어른이 함께 놀기를 바라고, 함께 놀지 않더라도 곁에서 든든하게 지켜 주기를 바랍니다. 어버이나 어른이 함께 놀면, 함께 노는 대로 즐겁습니다. 어버이나 어른이 함께 놀아 주지 않아도, 저희끼리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갖 새 놀이를 지어서 까르르 웃고 뒹굴고 달리고 뛰면서 지냅니다.


  아이들하고 시골에서 함께 놀면서 문득문득 생각합니다. 시라고 한다면, 또 동시라고 한다면, 굳이 꾸며서 쓸 일이 없습니다. 아이들하고 함께 노는 이야기를 쓰면 모두 동시가 됩니다. 아이들하고 함께 즐거이 바라보는 삶을 고스란히 쓰면 언제나 동시가 돼요.


  땀을 흘리면서 달리는 이야기를 씁니다. 함께 자전거를 타는 이야기를 씁니다. 마을 빨래터에서 함께 물이끼를 걷고 노는 이야기를 씁니다. 마당이랑 뒤꼍에서 풀을 뜯는 이야기를 씁니다. 철마다 달리 부는 바람을 마시면서 꽃을 보고 열매를 얻는 이야기를 씁니다. 심부름을 하고 살림을 거드는 이야기를 씁니다.


  아이들한테는 ‘학교’만 학교이지 않습니다. 집도 마을도 숲도 모두 학교, 곧 배움터입니다. 살아가는 터가 배우는 터요, 살아가는 터에서 사랑을 누립니다.



“어둠나라 개가 달을 먹네.” / 월식날 밤, 옛사람들이 / 달을 보며 말했지 (달을 먹는 개)



  《몽당연필도 주소가 있다》에 흐르는 할아버지 이야기를 찬찬히 돌아봅니다. 동시를 쓰는 할아버지는 아이들한테 어떤 마음밥을 건네려고 하는가를 되새깁니다. 옛이야기는 먼 옛날부터 할아버지가 아이한테 들려주고, 아이가 할아버지가 되면서 다시 아이한테 들려줍니다. 또 아이가 어느덧 할아버지가 되는 사이에 새로운 아이한테 들려줍니다. 달을 먹은 개 이야기도, 제비와 흥부 이야기도, 어린 개구리와 어미 개구리 이야기도, 베짱이 이야기도, 언제나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고이 들려줍니다.


  나는 오늘 이곳에서 아이들하고 아버지로 지냅니다. 우리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새로운 어른으로 우뚝 서면, 이 아이들은 새롭게 아이를 낳을 테고, 그때에 나는 할아버지로 지내면서 새로운 삶과 이야기를 지으리라 생각합니다. 바로 오늘 이곳에서 누리는 하루가 삶으로 모이고, 이러한 삶이 이야기가 되며, 이러한 이야기가 사랑이 되어 흐릅니다.



돋아난 / 새싹을 / 손끝으로 / 톡, / 건드려 봐 // 놀라서 / 옴싹 / 움츠리지 (새싹 간질이기)


장독대 돌봐 놓고 / 둘레에 맨드라미, 봉숭아 몇 포기도 / 만져서 피워 주고 // 해거름에 해님은 배고프다며, 휘딱 / 저녁 먹으러 가 버렸어요 (해님은 손으로 장맛을 들여요)



  해가 뜨는 아침에 해를 바라보면서 놉니다. 햇볕이 뜨거운 낮이 되면 구름이 와라, 바람아 불어라, 노래하면서 놉니다. 해가 뉘엿뉘엿 기우는 저녁이 되면 발그스름하다가 노르스름하게 물드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놉니다. 별이 돋는 밤하늘을 그리면서 놀다가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크게 하품을 하고는 잠자리에 듭니다.


  즐겁게 놀 생각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는 아이한테는 근심이나 걱정이 없습니다. 근심이나 걱정이 없이 신나게 뛰노는 아이를 바라보는 어버이나 어른한테도 근심이나 걱정이 깃들지 않습니다. 우리 어버이와 어른한테는 무엇이 깃들까요? 바로 사랑이 깃들어요. 어버이와 어른은 저마다 사랑을 가슴에 담고서 아이들을 어루만집니다. 이불깃을 여미면서 가슴을 토닥입니다. 입맛을 다시면서 자는 아이들은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받으며 가슴속에 꿈을 품습니다.


  어버이와 어른은 사랑을 헤아리면서 삶이 기쁘고, 아이는 꿈을 지으면서 삶이 재미납니다. 동시는 사랑하고 꿈이 만나는 삶자리에서 언제나 새롭게 태어납니다. 4348.7.5.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동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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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 창비시선 167
이경림 지음 / 창비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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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97



시와 삶

― 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

 이경림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1997.9.25.



  애벌레가 잎을 갉아먹을 적에는 잎만 바라봅니다. 다른 것은 하나도 안 봅니다. 햇볕이 내리쬐든 바람이 불든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애벌레한테는 잎을 배부르게 갉아먹어서 몸을 살찌우는 일이 가장 대수롭습니다. 몸집을 불리고 불린 뒤에 허물을 벗어서 더 큰 애벌레가 되려 하고, 다시 더 큰 애벌레가 되려 하며, 이윽고 밥먹기를 그치려 해요.


  밥먹기를 그치는 애벌레는 깊이 잠들고 싶습니다. 자고 또 자고 다시 자면서 고요히 꿈을 꾸고 싶습니다. 이리하여 애벌레는 고치를 짓습니다. 애벌레는 고치에 깃들어 먼먼 옛날부터 ‘저(애벌레)를 낳은 어미가 했’듯이 잠이 듭니다. 잠이 들면서 꿈을 꾸고, 애벌레가 꾸는 꿈은 새로운 몸으로 거듭나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지금 누가 실바람으로 잔가지를 지나간다 / 지금 누가 저 황원에서 쓸쓸히 노래하고 있다 (저 깊은 강)


내 속에 궁전 하나 있네 / 사이프러스 나무 숲에 둘러싸인 궁전 (내 속의 알함브라)



  잠에서 깨어나는 애벌레는 온몸이 간지럽습니다. 온몸이 간지러울 뿐 아니라 쑤십니다. 몽툭한 다리가 사라지면서 길고 가느다란 다리가 생깁니다. 더듬이가 생기고 날개가 돋습니다. 길쭉하고 통통하던 몸은 날렵하면서 가벼운 몸으로 바뀝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번데기를 벗고 밖으로 나오면서 나비로 다시 태어나는 애벌레는 한참 동안 몸과 날개를 말립니다. 첫 날갯짓을 하면서 날아오를 때까지 바람이 잠들며, 풀과 꽃과 나무는 새로 깨어난 나비를 기쁨으로 맞이합니다.


  풀밭이나 숲에 서면 온갖 나비가 날아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눈길을 모아 풀줄기나 나뭇잎을 들여다보면 조그마한 애벌레가 꼬물꼬물 기면서 잎을 갉아먹는 모습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나비가 날고, 한쪽에서는 애벌레가 자라요. 한쪽에서는 풀이랑 나무가 새 잎을 내놓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애벌레가 풀잎이랑 나뭇잎을 갉습니다.


  그리고, 나비뿐 아니라 잠자리도 하늘을 날고, 수많은 새가 저마다 다른 날갯짓으로 하늘을 가릅니다. 나비나 잠자리를 잡아먹는 새가 있고, 나비나 잠자리는 안 쳐다보는 새가 있습니다. 수많은 목숨이 서로 얼크러지면서 들바람이 불고 숲바람이 붑니다.



내가 사랑한 건 그 남자 / 가 아니라 담요였네 언 몸 녹여주던 담요! / 그것의 부드러움 그것의 휘감김 그 가벼움을 / 사랑했네 그 밑의 따스함 그 밑의 어두움 그 밑의 / 은밀함 그 알몸 덮어버리는 폭력! (내가 사랑한 담요)



  이경림 님 시집 《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창작과비평사,1997)를 읽습니다. 김정란 님은 시집 끝자락에 비평을 붙입니다. 김정란 님은 이경림 님 시를 놓고 “80년대에 등단했더라면, 그녀의 시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이경림의 시는 부서진 80년대의 대서사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부활한 90년대의 소서사의 한 전형이다(113쪽).” 하고 말합니다.


  김정란 님이 말하듯이, 참말 이경림 님 시는 1980년대에 살아남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시는 ‘똑같이 흘러야’ 하지 않습니다. 더 깊거나 넓게 알아보거나 사랑해 줄 사람이 적더라도, 마음으로 다가서면서 아끼거나 가슴에 품을 사람은 늘 있으리라 생각해요. 왜냐하면, ‘대서사’이든 ‘소서사’이든, ‘서사(敍事)’란 ‘이야기’입니다. 어떤 이야기인가 하면, ‘삶 이야기’입니다. 이름난 사람들 이야기뿐 아니라, 이름 안 난 사람들 이야기요, 권력자나 정치꾼 이야기뿐 아니라, 수수한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시골사람 이야기요, 도시에서 옹기종기 모여 어깨동무하는 골목사람 이야기입니다.



참 이상도 하지 산다는 건 / 마알간 잠의 밑바닥에는 바닥 모를 우물이 파이고 / 고통과 사랑과 그리움과 배반과……, / 진짜들은 늘 허공에서 머리채를 휘어잡는다 (토론토에서)


어머니를 속에 감춘 계집아이 하나와 / 계집아이를 속에 감춘 어머니 하나가 / 손잡고 갑니다 (숨은 모녀)



  삶은 대단합니다. 모든 사람한테 삶은 언제나 오직 하나이기에 대단합니다. 모든 사람한테 ‘똑같은 날’이란 하루도 없기에 삶은 늘 대단합니다. 1월 1일을 이틀쯤 누리거나 7월 1일을 안 누려도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루가 스물다섯 시간이거나 열네 시간인 사람은 없습니다. 아파서 자리에 눕느라 다른 일을 못 하더라도, 몹시 바빠서 쉴 겨를이 없더라도, 모든 사람은 똑같은 스물네 시간을 맞아들이고, 똑같은 삼백예순닷새를 맞이합니다. 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나날을 저마다 새로운 삶으로 누리니, 누구한테나 삶은 대단합니다.


  역사책에 남을 만한 일을 했기에 대단한 삶이 아닙니다. 신문이나 방송에 오르내릴 만한 자리에 서기에 대단한 삶이 아닙니다. 밥을 짓고 빨래를 하는 삶이 수수하면서 대단합니다. 아이들 이마를 쓸어넘기고 자장노래를 부르는 삶이 투박하면서 대단합니다. 거리낌없이 뛰노는 아이들 하루가 대단하고, 신나게 웃고 노래하면서 놀 줄 아는 아이들 삶이 대단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삶을 언제나 시로 쓸 수 있습니다. 사회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는 시만 써야 하지 않습니다. 문화를 북돋우거나 예술을 살찌우는 몸짓이 되어야 시가 되지 않습니다.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대로 쓰기에 시이지 않습니다. 문학상을 타거나 문학잡지에 글을 싣거나 이름난 작가한테서 추천을 받아야 시인이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즐거웁게 받아들이면서 기쁘게 이야기를 짓는 삶이 된다면 누구나 시인입니다. 스스로 즐겁게 가꾸고 기쁘게 일구는 삶을 노래할 줄 안다면 누구나 시를 쓸 수 있습니다.



덤프트럭은 시절 없이 오가고 방범대원은 골목골목 호루라기를 불어댄다네 / 상처들은 나무마다 환하고 그 사랑 가로등 아래 우울한 그늘 만드네 (상처들은 나무마다 환하다)


가은으로 가는 문은 마장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 사천원짜리 표를 사서 네시간을 달리면 있다 아니 / 가은으로 가는 문은 기억의 직행버스를 타고 슬쩍 / 눈 감으면 있다 거기 검은 마을을 안온하게 지키는 밝은 유리문이 있다 (加恩이라는)



  《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에는 어떤 삶이 깃들었나 하고 돌아봅니다. 바로 이 시를 쓴 이경림 님 삶이 깃들었을 테지요. 눈물이 흐르기도 하는 삶이 깃들고, 웃음이 번지기도 하는 삶이 깃듭니다. 아픈 삶이 깃들고, 설레거나 벅차는 삶이 깃듭니다.


  그늘을 바라본 삶을 시로 노래하고, 햇살을 마주한 삶을 시로 노래합니다. 도시에서 지내던 하루를 시로 읊고, 시골로 마실을 가거나 이웃나라를 다녀온 하루를 시로 읊습니다.


  시집을 덮고 고요히 생각에 잠깁니다. 책상맡에 촛불을 켜고 지긋이 바라봅니다. 새벽 일찍 일어나 저녁에 느즈막하게 잠든 아이들을 가까스로 재우고서 비로소 숨을 돌리는 깊은 밤에 가만히 생각을 기울입니다. 나는 오늘 이곳에서 어떤 시를 쓸 만할까요? 나는 오늘 하루 잠들고 나서 이튿날에는 어떤 시를 쓸 만할까요?


  시 한 줄에 흐르는 삶을 읽다가, 내 삶에서 흐르는 이야기를 돌아봅니다. 시 두 줄에 감도는 사랑을 헤아리다가, 내 삶에서 샘솟는 이야기를 되새깁니다. 밤오줌을 누려고 큰아이가 잠에서 살짝 깹니다. 쉬를 누고 다시 자리에 누운 아이를 다독입니다. 이불을 여미어 주고, 작은아이도 살핍니다. 이불을 걷어찬 작은아이는 반듯하게 누인 뒤 이불을 새로 여밉니다. 두 아이 사이에 누워 눈을 감으면 언제나 두 팔을 옆으로 뻗어 한손으로 한 아이씩 머리와 가슴과 배와 팔을 살살 어루만지면서 기쁜 꿈을 꾸자고 속삭입니다. 꿈을 꿀 수 있기에 삶이 즐거우면서 아름답겠지요. 4348.7.2.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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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딱삐딱 5교시 삐뚤빼뚤 내 글씨 문학동네 동시집 33
김은영 지음, 강전희 그림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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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61



오늘날 학교는 ‘배움집’ 구실을 하는가?

― 삐딱삐딱 5교시 삐뚤빼뚤 내 글씨

 김은영 글

 강전희 그림

 문학동네 펴냄, 2014.12.22.



  아침이 되면 거의 모든 아이들이 학교에 갑니다. 초등학교에 가고, 중학교에 가며, 고등학교에 갑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까닭은 배우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삶을 새롭게 배울 뿐 아니라, 또래동무를 널리 사귀면서 둘레를 더욱 넓고 깊게 바라보는 눈썰미를 키우고 싶습니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려는 뜻은 졸업장이나 자격증 때문이 아닙니다. 두 어버이가 맞벌이를 하느라 바빠서 아이들을 집에서 내보내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날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배워야 한다고 여겨서 학교라고 하는 ‘배움집’을 마련합니다.



선생님이 / 내 알림장에 / 입 모양 하나 그려 주셨다. // 내가 입이 두 개인 듯 / 수업 시간마다 떠들어서 / 입 하나를 그려 준 거랬다. (입 두 개)



  학교는 ‘배움집’입니다. 배우는 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늘 지내는 집은 어떤 곳일까요? ‘살림집’입니다. 먹고 입고 자는 집은 ‘살림집’입니다. 아이들은 살림집에서 먹고 입고 자는 살림을 어버이한테서 배웁니다. 그리고, 저마다 배움집을 드나들면서 삶을 노래하는 이야기를 배웁니다.


  학교가 맡은 몫은 배움집인 만큼, 학교는 아이들을 슬기롭게 가르치면서 아름답게 북돋우는 길을 닦아야 합니다. 학교는 아이들한테 졸업장이나 자격증을 주는 곳이 아닙니다. 학교는 모든 아이들이 저마다 다른 기쁨을 저마다 새롭게 누리거나 맞아들일 수 있도록 가꾸는 곳입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 꽃은 벌들이 다니는 학교야. / 꿀벌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있지? // 우리들은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 꽃은 벌들이 노는 놀이터예요. / 꿀벌들이 신나게 놀고 있잖아요. (꽃과 꿀벌)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며 동시를 쓰는 김은영 님이 선보이는 《삐딱삐딱 5교시 삐뚤빼뚤 내 글씨》(문학동네,2014)를 읽습니다. 이 동시집에는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이 부딪히거나 겪거나 마주하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아무래도 초등학교 교사 눈높이로 아이들을 보기 때문일 테고, 오늘날 거의 모든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기 때문일 테지요. 동시를 읽을 아이들도 거의 다 학교를 다닐 테니까, 동시집에서도 학교 이야기를 크게 다룰밖에 없으리라 느낍니다.



내가 복도에서 뛰는 건 / 발뒤꿈치를 들고 / 사뿐사뿐 걷다 보면 / 나도 모르게 / 발걸음이 가벼워지기 때문이다. (복도에서 뛰는 까닭)



  교사인 글쓴이는 “꽃은 벌들이 다니는 학교”라고 말합니다. 교사인 글쓴이를 마주하는 아이들은 “꽃은 벌들이 노는 놀이터”라고 말합니다. 아이들이 복도에서 뛰는 까닭을 노래한 동시는 교사 목소리일까요, 아니면 아이들 목소리일까요? 아무래도 아이들 목소리가 되리라 느낍니다. 아이들은 참말 그렇거든요. 아이들은 참말 가볍게 뛰거나 달려요. 아이들은 무겁게 뛰거나 달리지 않습니다.



바람이 심었어요. / 씨앗이 바람 타고 날아왔으니까. / 하늘이 심은 거야. / 바람은 하늘에서 부니까. / 땅이 심은 거야. / 씨앗이 땅에서 났으니까. (하늘 농사 땅 농사)



  아이들은 마음껏 놀면서 배웁니다. 놀지 못하는 아이는 배우지 못합니다. 놀지 못하면서 배우기만 해야 한다면, 아이들로서는 이보다 크고 끔찍한 불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문제집이랑 참고서만 손에 쥐고서, 학습도서나 추천도서나 명작도서를 줄줄이 읽고 독후감을 써야 한다면, 아이들로는 이보다 싫고 미운 불벼락이 따로 없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나마 초등학교에서라면 조금 쉬거나 뛰논다고 하지만, 중학교 문턱을 넘어서면 그예 죽어납니다. 중·고등학교 여섯 해는 입시지옥입니다. 입시지옥에서 아이들이 헤어날 길이 없으니, 아이들은 삶을 배우거나 사랑을 배우지 못하는 채, 이성친구 사귀는 데에 눈길이 뻗습니다. 삶도 사랑도 아닌 그저 이성친구일 뿐입니다. 또는 여린 동무를 따돌리거나 괴롭히는 바보짓으로 휘둘립니다.


  초등학교 어린이하고는 바람이 심고 하늘이 심으며 땅이 심는 씨앗 이야기를 동시로도 나누고 그림책으로도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학교나 고등학교 푸름이하고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는지요? 중·고등학교 운동장 한쪽에 ‘학교 텃밭’을 두는 데가 몇 군데가 될는지요?



외할머니 옆에 엄마가 누웠다. / 엄마 옆에 나도 나란히 누웠다. // 외할머니는 / 엄마 어렸을 적 이야기를 하고 / 엄마는 / 외할머니 젊었을 적 이야기를 한다. (외할머니 생신날)



  어린이 나이를 지나서 푸름이 나이를 보낼 적에 입시공부만 해야 한다면, 이 어리고 푸른 넋은 삶이나 사랑을 제대로 배우지 못합니다. 어버이 살내음이나 할머니 할아버지 살결을 느끼지 못한 채 학교에만 갇혀야 하는 아이들이라면, 아이들 앞날에 기쁜 삶이나 즐거운 사랑이 피어나기는 몹시 어렵습니다.


  학교는 배움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학교는 배움집으로 바로서야 합니다. 학교는 배움집답게 거듭나야 합니다.


  대학교라는 데에 가면 어떻고, 안 가면 어떠할까요. 대학교 졸업장이 없어도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자격증이나 저런 증명서가 없더라도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을 배워서 삶을 가꾸고 삶을 노래하는 아이들로 자랄 때에 아름답습니다. 사랑을 배워서 사랑을 가꾸고 사랑을 노래하는 어른으로 거듭날 때에 아름답지요.



앵두 한 움큼 / 한입에 먹으면 / 입 속에서 다디단 풍선이 / 퐁! 퐁! 퐁! / 터진다. (앵두 먹기)



  앵두알은 아이한테도 맛나고 어른한테도 맛납니다. 수박이나 참외는 아이한테뿐 아니라 어른한테도 맛납니다. 아이들이 가야 하는 학교 이야기를 동시로 다룬다면, 학교에서 겪거나 부딪히거나 마주하는 일뿐 아니라, 학교가 배움집다운 몫을 톡톡히 하도록 이끄는 이야기도 담을 수 있기를 빕니다. 교사 눈높이나 학생 눈썰미가 아닌, 삶을 사랑하는 숨결로 꿈을 노래하는 이야기가 동시로 태어날 수 있기를 빕니다. 4348.6.18.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동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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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철든 날 사계절 중학년문고 31
이수경 지음, 정가애 그림 / 사계절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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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60



철이 드는 어른은 동시를 노래한다

― 갑자기 철든 날

 이수경 글

 정가애 그림

 사계절 펴냄, 2014.6.18.



  고단한 아이는 갑자기 코피를 쏟습니다. 어른만 코피를 쏟지 않습니다. 아이도 코피를 쏟습니다. 어른은 몸이 힘든데 억지로 일을 하려니 코피를 쏟고, 아이는 몸이 고단한데 더 놀려고 악을 쓰다가 코피를 쏟습니다. 어른은 할 일이 많다는 생각에 눌려 코피를 쏟고, 아이는 더 신나게 놀고픈 마음에 잠을 미루다가 코피를 쏟습니다.


  오늘 아침에 작은아이 코피를 봅니다. 예전에는 큰아이가 코피를 자주 흘렸습니다. 코가 안 좋기도 했지만, 저녁 늦도록 잠을 안 자고 놀려고 하면, 하루 내내 개구지게 뛰놀고는 저녁에도 잠을 미루고 놀려고 하면, 어김없이 이튿날에 코피를 쏟습니다.


  코피를 쏟은 작은아이를 일으켜 얼굴에 묻은 피를 닦습니다. 작은아이는 “코피 다 닦았어?” 하고 묻더니 이부자리로 달려갑니다. 저도 몸이 힘든 줄 알 테지요. 장난감 몇 가지를 들고 이부자리에서 꼼지락꼼지락 춤추면서 놉니다.



마당에 쌓인 눈 / 다 녹던 봄날 // 왕 구슬 한 개와 / 누나 머리핀 // 햇살에 반짝반짝 / 빛나고 있더라. (술래가 찾은 것)



  이수경 님이 쓴 동시를 그러모은 《갑자기 철든 날》(사계절,2014)을 읽습니다. 《갑자기 철든 날》을 읽으면 여러모로 시골살이 모습이 흐르고, 시골집에서 수수하게 노는 아이들 모습이 흐릅니다. 눈밭이 봄볕에 스러진 뒤에 찾은 구슬이랑 머리핀을 놓고 살가운 이야기가 흐르고, 한껏 무르익은 봄에 바쁘게 일손을 놀리는 사람들 이야기가 흐릅니다.



나락 담그고 / 모판 내고 / 모 숨구고 / 들깻모 붓고 / 수수 모종 내고 / 깻모 안기고 (우리 마을 사람들)


바구니 / 옆에 끼고 / 터벅터벅 / 사랫길 걷다 보면 // 풍뎅이 / 사슴벌레 / 대벌레 / 사마귀 / 방아깨비 / 주홍박각시 애벌레 / 나비 번데기 (마중)



  이제 시골에서나 도시에서나 ‘바구니를 옆에 끼고 사랫길’을 걷는 아이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도시에는 사랫길이란 없고, 고샅길도 없으며, 오솔길이라든지 냇둑길이란 없습니다. 도시에는 골목길도 많이 줄었고, 풀밭길을 찾아보기도 어렵습니다. 곤충도감이나 그림책을 들추면 풍뎅이도 사슴벌레도 대벌레도 사마귀도 방아깨비도 애벌레도 번데기도 나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사는 도시 한복판에서 이러한 ‘벌레동무’를 만나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아이들이 도시 한복판에서 만날 수 있는 벌레는 바퀴벌레나 파리나 모기쯤입니다. 나비나 벌을 구경하기는 대단히 어려울 테고, 나방조차 좀처럼 구경하지 못할 수 있어요. 도시 아이들은 두 가지 하루살이가 있는 줄 알지 못할 테지요.


  그런데, 요즈음 도시 아이뿐 아니라 요즈음 도시 어른도 벌레동무를 잘 모르기 일쑤입니다. 《갑자기 철든 날》을 쓴 이수경 님은 여러 벌레동무와 꽃동무와 나무동무 이야기를 동시로 빚습니다. 요즈음 도시 아이들한테서 멀어지거나 잊혀지는 살가운 동무를 동시에 곱게 담아서 보여줍니다.



중간고사 준비하는 동안 // 쑥부쟁이 지나갔습니다. / 꽃향유도 지나갔습니다. / 개여뀌도 지나갔습니다. (본 척도 못한 가을)


“얘들아, 눈 왔어.” / 그 소리에 // 큰형 / 벌떡 일어납니다. // 나도 / 발딱 일어납니다. (우리를 일으키는 말)



  눈이 왔다는 소리에 벌떡 일어날 만한 아이들이 아직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비록 주차장 한쪽에서 눈뭉치를 겨우 굴리더라도,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눈이 올 적마다 길이 막힌다고 떠들더라도, 눈이 내리는 겨울을 기쁘게 맞이할 아이들이 도시에도 아직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비가 온다는 소리에도 벌떡 일어날 만한 아이들이 아직 있으리라 생각해요. 비록 도시에서 빗물놀이를 하기는 어렵더라도, 도시에서 빗물놀이를 하다가 자동차에 치일까 걱정하는 어른이 많더라도, 웅덩이를 찰방찰방 밟으면서 옷을 다 적시고는 까르르 웃는 아이들이 도시에도 아직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놀면서 자라는 아이요, 놀면서 꿈을 키우는 아이입니다. 놀면서 서로 아끼는 마음을 가꾸는 아이요, 노는 동안 서로 어깨동무를 하는 기쁨을 배우는 아이입니다.



외할아버지가 / 전화하시면 // 미역 딴 거 보냈다. / 끊자! / 뚝… // 물고기 몇 마리 보냈다. / 끊자! / 뚝… (이상한 전화)



  우리 어른은 모두 어른이면서 아이입니다. 아기로 태어나서 아이로 자라지 않고서는 어른이 되지 않습니다. 마흔 살이건 여든 살이건 모두 아기와 아이 나이를 지나왔습니다. 마흔 살 어머니나 아버지라 하더라도 여든 살 할머니나 할아버지한테는 그저 ‘아기’이거나 ‘아이’입니다.


  이리하여,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이녁 아이인 ‘아이들 어머니와 아버지’한테 시골에서 거둔 여러 가지를 틈틈이 보냅니다. 도시에서 돈을 잘 벌는지 몰라도, 밥은 제대로 챙겨서 먹는지 걱정스러우니 ‘마흔 살 아이’한테 이것도 보내고 저것도 보냅니다.


  《갑자기 철든 날》에 나오는 〈이상한 전화〉 같은 동시를 아이들은 얼마나 헤아릴 수 있을까요? 이 동시는 아이한테 재미나거나 사랑스러운 동시가 될 수도 있을 테지만, 아이보다는 어른한테 재미나거나 사랑스러운 동시가 되리라 느낍니다.



소윤이 네 단점? // 신경질 잘 부리고 / 짜증 잘 내고 / 불뚝불뚝 화 잘 내고 / 투덜투덜거리고 / 잘 삐치는 것 빼곤 / 없을걸? // 나 꼬집는 거 말곤 / 없을걸? (좋아하게 되면)



  곰곰이 따지면, 동시는 어린이한테 읽히는 노래가 아닐 수 있습니다. 동시를 쓰는 어른이 저마다 이녁이 어릴 적에 무엇을 하면서 놀았는가 하는 이야기를 풀어놓은 노래가 동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른이 저마다 ‘오늘날 아이들한테 물려주고 싶은 이녁 옛이야기’를 동시라는 틀에 담아서 이야기꽃을 피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새롭게 태어나서 자라는 아이들한테 ‘앞으로 마음에 담아 고운 꿈을 키우는 길에 밑거름이 될’ 수 있는 씨앗 한 톨을 이야기로 엮는 글을 동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를 사랑하기에 동시를 쓴다고 할 적에는, 이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란, 어른인 내가 아이로 뛰놀던 나날을 사랑하는 마음이요, 오늘 이곳에서 아이로 뛰노는 ‘이웃사람(몸이 작고 나이가 어린 사람)’이 걸어갈 길을 사랑하는 마음이지 싶습니다.


  철이 드는 어른이 동시를 씁니다. 철이 드는 어른이 아이들하고 어깨동무를 하면서 동시를 읽습니다. 철이 드는 어른이 아이처럼 폴짝폴짝 뛰면서 웃고 노래하기에 동시가 한 줄 태어납니다. 철이 드는 어른이 아이다운 마음으로 삶을 사랑하기에 동시가 새삼스레 두 줄 석 줄 넉 줄 자라납니다. 4348.6.12.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동시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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