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함을 위하여
홍윤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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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114



시와 빈자리 (빈자리 든자리 난자리 보금자리)

― 쓸쓸함을 위하여

 홍윤숙 글

 문학동네 펴냄, 2010.6.28. 7500원



  “든 자리 난 자리”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어릴 적에는 이 말을 흔히 들으면서도 그냥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그 어릴 적에도 어머니가 하루쯤 집을 비우면, 어머니 한 분이 안 계신 집이 얼마나 쓸쓸한가 하고 깊이 느꼈어요. 마치 집안이 멈춘 느낌이라고 할까요. 어릴 적에 학교에서도 동무 하나가 하루를 거르면, 한 반에 쉰 남짓 바글거리더라도 꼭 그 “난 자리”가 허전했습니다. 한 자리라도 비면 어쩐지 제대로 차지 않는구나 싶었어요.



어떤 시인은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다 하고 / 어떤 화가는 평면을 보면 모두 일으켜세워 / 그 속을 걸어다니고 싶다고 한다 / 나는 쓸데없이 널려 있는 낡은 널빤지를 보면 / 모두 일으켜세워 이리저리 얽어서 집을 짓고 싶어진다 (쓸쓸함을 위하여)



  홍윤숙 님이 빚은 시집 《쓸쓸함을 위하여》(문학동네,2010)를 읽습니다. 1925년에 태어나고 2015년 가을에 숨을 거둔 홍윤숙 님은 2010년에 이 시집을 선보이면서 ‘마지막 시집’이 될 듯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렇지만 이 시집을 선보이고 나서 2012년하고 2013년에 새로운 책을 한 권씩 더 내셨어요. 마지막 책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제는 더 새롭게 시를 엮어서 선보일 수는 없습니다. 이 자리에서 떠나셨으니까요.


  떠나고 없는 자리를 고요히 돌아보면서 시집을 읽습니다. 아이들이 방에서 시끌벅적하게 뛰면서 노는 소리를 함께 들으면서 싯말을 하나하나 새겨 봅니다. 겨울이 저물고 봄이 다가오는 하루를 새삼스레 느끼면서 시집에 깃든 노래를 헤아립니다. 늦겨울 빗소리와 바람소리를 함께 들으면서 싯말마다 흐르는 이야기를 되새깁니다.



카랑카랑 마른 내 뼛속에는 / 고장난 바이올린이 숨어 있나보다 / 작은 바람에도 큰 소리 울리며 / 반음쯤 틀리는 소리를 낸다 (반음半音)


명아주 까마중 괭이풀 토끼풀 / 고만고만한 풀들이 서로 기대고 비비며 / 한 세상 모여 사는 마을에 들어서면 / 문득 어린 시절 잃어버린 꽃반지 하나 (풀밭에서)



  시집 《쓸쓸함을 위하여》는 홍윤숙 님이 아픈 몸으로 적바림한 노래라고 합니다. 아흔을 바라보는 늙은 나이에 느낀 쓸쓸함이 무엇인가 하고 스스로 물으면서, ‘시란 바로 쓸쓸함과 싸우면서 쓰는 글’이라고 여기는 마음으로 엮은 이야기라고 합니다.


  여든을 지나 아흔으로 나아가면서 어릴 적 꽃반지를 떠올립니다. 망가진 몸에서 나는 소리는 망가진 바이올린에서 나는 소리 같다고 합니다. 반음쯤 틀리는 소리가 난다고 하는데, 반음쯤 틀리더라도 이 소리는 ‘악기가 내는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노랫소리예요.


  낡은 널빤지를 세워서 집을 지으며 살고 싶다는 마음처럼, 아이들은 뭔가 있으면 하나하나 갈무리해서 새롭게 지으면서 놉니다. 아이도 어른도, 어린이도 할머니도, 참말로 누구나 새로 지으려는 몸짓으로 하루를 살아갑니다. 집을 짓든 장난감을 짓든, 살림을 짓든 밥을 짓든, 시를 짓든 꿈을 짓든, 우리는 저마다 마음에 품은 생각대로 하루를 지으면서 이 길을 걷는구나 싶습니다.



눈을 감으면 떠돌던 내가 / 내 안으로 돌아오고 / 온 세상 소요도 잠잠히 잦아들고 / 내 안의 물결치던 크고 작은 이랑들이 / 하나로 모여 허공을 만들고 (눈을 감고)


다복솔보다 키가 큰 그는 / 바다를 가리키며 / 언젠가는 바다로 가겠노라고 이야기했다 / 그리고 문고판 작은 헤세 시집 한 권을 주었다 (헤세의 시집)



  낮볕이 덥다던 아이들은 “아버지, 오늘 봄이야? 겨울 맞아?” 하고 묻습니다. 밤바람이 차다는 아이들은 “아버지, 아직 겨울이야? 봄인데 왜 이리 추워?” 하고 묻습니다. 나는 빙그레 웃을 뿐 딱히 아무 말을 안 합니다. 조금 뒤 “네가 스스로 생각해 봐.” 하고 말합니다. 달력에 적힌 숫자 말고 우리 몸으로 느끼는 날씨하고 철을 생각해 보면 봄인지 겨울인지 알 수 있으니까요. 날씨를 알려주는 방송으로는 봄인지 겨울인지 알 길이 없어도, 우리가 스스로 하늘을 바라보고 바람결을 느낄 수 있으면 오늘 이곳이 어떤 날이며 철인지 알 테니까요.


  눈을 감고서 바람소리를 듣습니다. 눈을 감고서 내 모습을 바라봅니다. 둘레에서 퍼지는 시끄러운 소리가 아니라, 마음속에서 번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할머니 시인이 스스로 이녁 마음속 목소리를 들으려 하듯이, 나도 아이들하고 우리 시골집에서 마주하는 바깥소리 말고 우리 마음속 노랫소리를 들어 보려고 합니다. 자, 자, 이제 손발낯 씻고 자리에 누워야지? 이제는 잠자리에 들어 신나게 꿈나라를 날아야지?


  이부자리를 반반히 깝니다. 아이들을 눕힙니다. 이불깃을 턱 밑까지 여밉니다. 토닥토닥 달래니 어느새 두 아이 모두 곯아떨어집니다.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고 볼에 뽀뽀를 합니다.



거울 속의 내가 / 거울 밖의 나를 / 탄식하며 고개 돌린다 / 거울 밖의 나는 / 거울 속의 나를 / 무섭고 낯설어 / 고개 돌린다 (거울 앞에서 1)


낙서로 가득한 / 빈 공책이다 // 문 앞에서 맴돌다 / 놓쳐버린 막차 (일생 2)



  밤이 지나고 아침이 다가올 무렵 아이들보다 먼저 일어나서 하루를 엽니다. 아이들이 언제 일어나든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늘 내가 일어나야 할 때에 일어나서 쌀을 씻어서 불립니다. 다시마도 알맞게 끊어서 불려 놓습니다. 아침에 아이들이 일어나서 재잘거리며 놀다가 배가 고플 즈음 되면 찬찬히 밥을 지어야지요.


  내가 짓는 하루는 내가 새롭게 쓰는 이야기입니다. 할머니 시인이 아흔 해를 걸어오며 적바림한 공책은 “낙서로 가득한 / 빈 공책”이라 하지만, 그 ‘낙서’란 바로 ‘숱한 이야기’이리라 느낍니다. 그때그때 휘갈긴 글이라 할 수도 있지만, 그때그때 새삼스럽고 기쁜 숨결로 맞이한 하루를 가만히 적바림한 글이라 할 만하리라 느낍니다.


  하루하루 새롭게 삶자리를 가꾸면서 기지개를 켭니다. 오늘은 오늘대로 새로이 꿈을 키우면서 보금자리를 일구자고 다짐합니다. 바로 이곳에서, 언제나 이 자리에서, 웃음이 퍼지는 웃음자리를 누리고, 노래가 흐르는 노래자리를 누리며, 사랑으로 어깨동무를 하는 사랑자리를 누리자고 생각을 다스립니다. 내 “든 자리”를 고이 돌보는 마음이 된다면, 나는 오늘 이 시골집에서 아이들하고 재미나게 새 노래를 부를 수 있으리라 봅니다. 2016.2.15.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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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을 더듬다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01
유종인 지음 / 실천문학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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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112



시와 주름살

― 얼굴을 더듬다

 유종인 글

 실천문학사 펴냄, 2012.9.19.



  아이들 손이나 볼을 살살 쓰다듬다가 문득 놀랍니다. 아이 손이나 볼이란 이렇게 보드랍구나 하고. 그렇다고 어른인 내 손이나 불은 꺼칠하거나 울퉁불퉁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음속에 근심이나 걱정을 담지 않으면서 밝게 웃으면서 삶을 짓는 사람이라면 나이가 많이 들어도 살결이 보드랍기 마련이라고 느껴요. 늘 물이나 흙을 만지는 할매나 할배여도 마음 가득 기쁨이 흐르는 웃음이라면, 주름살이 아닌 보드라운 살결이 되지 싶습니다.



하루는 눈물 글썽한 상거지가 다녀갔다 // 또 하루는 꽃도 없이 바위가 그늘졌다 / 오늘은 술이나 받게 (마음)


땅이야 나눈다지만 하늘을 나눌 순 없어 // 성북동 옛집 담장에 화분들이 올라 있다 (경계의 꽃밭)



  인천에서 나고 자라며 시를 쓰는 유종인 님이 빚은 《얼굴을 더듬다》(실천문학사,2012)를 읽습니다. 잠자리 이불깃을 여미면서 아이들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이 시집을 떠올리고, 밤에 아이들이 이불을 걷어찰 적에 주섬주섬 이불을 끌어모아 다시 덮어 주면서 이 시집을 돌아봅니다.


  ‘얼굴 더듬기’는 사람마다 달라요. 그냥 얼굴을 더듬어 볼 수 있고, 떠오르지 않는 모습을 더듬듯 그릴 수 있습니다. 따스한 손길로 살그마니 더듬을 수 있고, 아무 느낌이나 생각이 없이 그저 더듬을 수 있어요. 내가 내 얼굴을 문지르거나 비빌 적에도 아무 생각 없이 문지를 수 있고, 내가 나를 사랑하는 손길로 비빌 수 있습니다.



징검돌을 건너가는 여름 아이의 발뒤꿈치, / 바람에 멱을 감는 미루나무 휘인 허리를 / 저 해는 지지도 않고 첫날밤처럼 붉게 샜다 (이발소 그림을 보다)


꽃게에 물린 손가락 가만히 들여다보니 // 새만금 변산 앞바다 // 내 떠날 줄 미리 알고 // 썰물로 // 빠질 리 없는 // 이정표를 박았구나 (꽃게에 물린 자국)



  《얼굴을 더듬다》를 다 읽고 나서 보니, 이 책에 깃든 노래는 ‘시조’라고 합니다. 《얼굴을 더듬다》는 시조집이라 하는군요. 문득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시인들 시조인들 그리 대수로울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시도 시조도 모두 우리 삶을 기쁨으로 노래하고 슬픔으로 달래면서 빚는 글일 테니까요. 글 한 줄에 웃음을 싣고, 글 두 줄에 슬픔을 담으면서, 글 석 줄에 이야기꽃이 피어나도록 하는 시요 노래라고 느낍니다.



싸락눈이 내리치니 // 겹처마가 떠올랐다 // 싸락눈이 쳐대니 // 나막신이 걸어왔다 (싸락눈)



  겨울에 아침저녁으로 밥을 지을 때에는 손을 빠르게 문지릅니다. 아무래도 겨울에는 손이 곱기 때문입니다. 곱은 손을 비빔질로 녹인 뒤 불을 올리고 도마질을 합니다. 뜨거운 물을 틀어서 틈틈이 손을 녹이면서 푸성귀를 다듬고 국을 끓입니다. 행주로 밥상을 훔치고 수저를 올립니다. 바야흐로 밥을 다 차리면 큰 소리로 아이들을 부르지요.


  이제 아이들은 의젓하게 자라서 깔개도 스스로 놓고 손도 스스로 씻습니다. 한두 해 앞서까지만 해도 아이들 손이랑 낯을 모두 씻겨야 했으나, 이제는 말로만 타일러도 되어요.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아이들 몸짓을 바꿉니다. 내 손에서 태어나는 밥 한 그릇이 아이들 몸으로 스며듭니다.


  밥상맡에 다 같이 둘러앉은 뒤 국그릇을 두 손으로 고이 감쌉니다. 따스한 기운이 손바닥으로 들어와서 온몸으로 퍼집니다. 나는 이 두 손으로 일을 하고, 바람을 어루만지며, 기저귀를 빨았고, 이불을 건사하고, 살림을 돌봅니다. 귀가 간지럽다 하면 귀를 파 주고, 손톱이 자라면 손톱을 깎습니다. 나이에 따라 손에도 낯에도 몸에도 주름이 질는지 모르지만, 온누리 모든 어버이는 주름살마다 아이들하고 누린 삶이 사랑스러운 결로 깃들리라 느껴요.



아파트 육 층까지 비질 소리 올라온다 // 귀뚜리가 // 지구 위에 두 줄 수염을 내려놓고, // 뭘 쓸까 // 고민하다가 // 빈 마당에 // 소스라친다 (비질 소리)


누군가 내다 놓은 깨진 거울 속으로 // 문짝을 두드리듯 가만히 눈발 친다 (들판의 거울)



  새롭게 하루를 열면서 《얼굴을 더듬다》에 흐르는 노랫가락을 가만히 읊어 봅니다. 이제 겨울이 저물려 하고 봄이 오려 합니다. 아침에 마당에서 노는 작은아이가 묻습니다. “아버지, 이제 봄이야?” “음, 아니. 아직 겨울이고, 봄이 오는 문턱이야.”


  아이한테 ‘봄이 오는 문턱’이라고 말하다가 불현듯이 놀랍니다. 나는 이 말을 아주 오랜 옛날부터 들었다고 느껴요. 아마 내가 아기였을 무렵 둘레 어른들이, 또 우리 어버이가 ‘봄이 오는 문턱’이라고 말했을 테지요. 그냥 ‘봄이 온다’고 할 수 있는데, 누군가 ‘봄이 오는 문턱’이라 말했고, ‘봄이 문지방을 타고 넘는다’ 같은 말꽃을 피웁니다. ‘봄바람이 귀를 간질인다’라든지 ‘봄볕에 옷섶이 짧아진다’고도 해요.


  유종인 님이 아파트 육 층에서 비질 소리를 노랫소리로 듣듯이, 슥슥거리는 소리가 온 지구를 쩌렁쩌렁 울린다고 느끼듯이, 우리 삶자락은 온통 시로 태어날 소리요 결이요 무늬요 사랑이며 살림이지 싶습니다. 시골집 마루문을 때리는 눈발은 사라지고, 길게 드러눕던 겨울 그림자도 짧아집니다. 낮에는 처마 밑으로 햇볕이 들지 않아요. 해가 차츰 높아집니다. 나무마다 겨울눈이 봉긋봉긋 이쁘게 돋는 겨울 끝자락입니다. 4349.2.9.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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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애지시선 35
손병걸 지음 / 애지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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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108



아이는 빛노래로 아빠를 키우고

―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손병걸 글

 애지 펴냄, 2011.3.19. 9000원



  시를 쓰는 손병걸 님은 서른 살 즈음에 눈을 잃었다고 합니다. 서른 살 즈음까지는 언제나 ‘두 눈으로 몸소 본 것’만 믿고 살았다는데, 두 눈을 잃고 난 뒤로는 ‘두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믿고 살아야 하는 하루가 되었다고 해요.


  두 눈으로 보다가 두 눈을 쓸 수 없으면, 그야말로 삶이 뒤바뀌지요. 두 손을 쓰다가 두 손을 쓸 수 없어도, 또 두 다리를 쓰다가 두 다리를 쓸 수 없어도, 아니 손가락 하나만 다쳐도 삶은 뒤바뀌지 싶습니다.


  나는 두 눈으로 바라봅니다. 두 손을 쓰고 두 다리를 움직입니다. 빨래를 할 적에 빨래기계한테 맡기기도 하지만, 으레 두 손으로 복복 비비고 헹굽니다. 두 손으로 밥을 짓고, 두 다리로 자전거 발판을 구릅니다. 아이들을 이끌고 읍내로 저잣마실을 나가면 가방 가득 먹을거리를 챙겨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이들이 졸립거나 힘들다 하면 무거운 가방을 짊어진 채 한 아이를 한팔로 안고, 다른 아이도 다른 한팔로 안으며 걷기도 해요. 그런데 이렇게 눈이며 손이며 다리이며 온몸이며 쓰다가, 그만 어느 한 곳이 다치면 아무것도 못 하기 일쑤예요.



저수지 둑길을 걷는데 / 사람들이 던지는 돌멩이에 / 고인 물 일어나는 소리 / 천 년의 잠을 깨는 것 같아서 / 화들짝 귀가 열렸다 (소리를 보다)


들숨 날숨 몰아쉬며 / 숨이 넘어가도록 / 땀을 쏟는 일이겠지 (하모니카 소리)



  시집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애지,2011)를 읽으면서 가슴이 짠합니다. 손병걸 님은 처음 두 눈을 잃어야 하던 무렵, 그야말로 술로 하루를 보냈다고 털어놓아요. 하루 마시고 이틀 마셔도 허전함이 가시지 않았겠지요. 한 주 마시고 두 주 마셔도 아쉬움이 가시지 않았겠지요.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내처 마셔도 쓰라림도 아픔도 가시지 않았겠지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두 눈으로 보아야만 믿던 삶이었는데, 이제 두 눈으로는 볼 수 없다면, 오직 귀로 듣고 살갗으로 느껴야 하는 삶이라면, 그리고 두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아야 하는 삶이라면 어떤 길을 걸어야 할까요?



직접 보지 않으면 / 믿지 않고 살아왔다 // 시력을 잃어버린 순간까지 / 두 눈동자를 굴렸다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점자책을 펼치니 / 와르르 쏟아진다 / 놀란 가슴 쓸어내리며 / 흩어진 점자를 더듬어 가는데 / 들려온다, 별들의 이야기 (빛의 경전)



  우리 집 아이들이 틈틈이 피아노를 치거나 피리를 불 적에 가만히 눈을 감고 소리를 듣습니다. 아이들하고 마당에 서서 눈을 살며시 감고 바람소리를 듣습니다. 밤에 뒤꼍에 올라 별잔치를 올려다보면서 저 별에서 이 지구로 흘러오는 빛살뿐 아니라 소리는 무엇일까 하고 귀를 기울입니다.


  밥을 끓이면서 밥 끓는 소리를 듣고 밥 익는 냄새를 맡습니다. 밥상을 차리면서 이 밥을 맛나게 함께 먹을 아이들을 떠올립니다. 설거지를 하면서 ‘우리 집에서 설거지하는 물’이 되어 주기까지 골짜기를 흐르던 물줄기를 헤아립니다. 빨래를 마치고 마당에 널면서 ‘옷가지를 보송보송 말려 주는 햇볕’에는 어떤 기운이 서렸는가 하고 되새깁니다.



잊고 있었다 / 어둠 속에서도 숲은 / 묵묵히 자란다는 것을 / 모르고 있었다 / 왜, 저 빌딩들이 숲을 향해 / 서서히 기울어져 가는지 (어느 숲)


깨진 유리컵에 베인 손가락 / 점자책을 더듬을 때 아파서 / 며칠째 한 페이지도 넘어가지 못한 / 내 손가락 끝에 박힌 눈 (손가락 끝에 박힌 눈)



  손병걸 님은 시를 쓰면서 이녁 아이를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시집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에는 두 눈을 잃은 아픔도 드러나지만, 두 눈을 잃고서 새롭게 뜬 ‘마음눈’ 이야기도 흐르고, 무엇보다도 손병걸 님 딸아이하고 얽힌 기쁜 사랑이 새삼스레 흘러요. 이제까지 느끼거나 헤아리지 못했다고도 할 만한 새로운 사랑이지요.



아빠 식사해요 / 밥때만 되면 / 아이의 목소리 들린다 // 자식이라고는 단 하나 / 고작, 초등학교 3학년 / 생일이 빨라서 3학년이지 / 이제 아홉 살짜리다 // 밥상에 앉으면 / 이건 김치, 빨개요 / 요건 된장찌개, 뜨거워요 / 두 눈이 안 보이는 아빠를 위해 / 제 입에 밥알이 어찌 되든지 말든지 / 오른쪽에 뭐 왼쪽에 뭐 / 아이의 입은 바쁘다 (아이가 아빠를 키운다)



  밥때만 되면 아빠를 챙기는 아홉 살 딸아이 목소리를 들으면서 손병걸 님은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모르겠지요. 아홉 살 딸아이도 이것저것 알려주느라 ‘입이 바쁘’고, 이런 딸아이 사랑을 받으면서 숟가락을 드는 손병걸 님도 밥을 먹는지 사랑을 먹는지 눈물을 먹는지 웃음을 먹는지 모르도록 ‘입이 바쁘’겠지요.


  이 깜찍하고 상냥하며 착하고 어여쁜 딸아이 몸짓과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클까요. 이렇게 아름다운 마음씨를 베푸는 딸아이 숨결과 넋을 보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클까요.



먹먹한 사연이 끝나고 / 이어지는 출연자 소녀가장 / 사회자 : 올겨울 추위를 어떻게 해요? / 소녀 : 연탄불 구멍을 열면 돼요. (생방송)



  사랑은 눈으로 볼 수 있을까요? 사랑은 마음으로 볼 수 있을까요? 모름지기 사랑은 눈으로도 보고 마음으로도 볼 텐데, 두 눈을 감으면 한결 환하면서 고요하게 드러나지 싶어요.


  코앞에 잔칫밥을 차려야 사랑이지 않아요. 눈앞에 값진 선물을 늘어놓아야 사랑이지 않아요. 비싼 밥집에 찾아가서 밥술을 들어야 사랑이지 않을 테지요? 아홉 살 아이가 이것저것 알려주는 목소리에 맞추어, 김치요 된장찌개요 밥이요 반찬이요 물이요 하고 느끼는 손길로 받아들이는 수수한 밥 한 그릇에서 따사로운 사랑을 알아차리겠지요?


  두 눈을 잃은 손병걸 님이지만, 마음에 있는 눈을 새로우면서 크게 뜨는 삶을 짓는 손병걸 님이리라 생각합니다. 아니, 두 눈을 한동안 고요히 감으면서, 마음에 깃든 열 가지 눈동자뿐 아니라 스무 가지 백 가지 천 가지 그윽한 눈동자를 기쁨으로 새롭게 뜨는 손병걸 님 발걸음이리라 생각해요.


  오늘 하루도 아이들하고 기쁨으로 살림을 짓는 하루를 누리면서 이 보금자리를 돌아봅니다. 사랑은 우리 눈앞에 있다는 대목을 다시금 돌아봅니다. 먼발치가 아니라 우리 곁에, 저 먼 별나라가 아닌 우리 살림살이마다 고운 사랑이 흐른다는 대목을 찬찬히 돌아봅니다.


  눈을 떠야지요. 사랑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떠야지요. 사랑으로 하루를 누리려는 눈을 번쩍 떠야지요. 4349.2.4.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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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뼈들 삶창시선 42
김수상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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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111



시와 말뼈

― 사랑의 뼈들

 김수상 글

 삶창 펴냄, 2015.3.25. 8000원



  한국말사전에서 ‘말뼈’라는 낱말을 찾아보면 “성질이 고분고분하지 못하고 거세어 뻣뻣한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이라고 나옵니다. 다만, ‘말뼈다귀’라는 낱말은 올림말로 나오지 않아요. 문득 궁금해서 일본말사전까지 찾아보니, 일본말 가운데 ‘うまのほね(馬の骨)’가 있고, 이 낱말을 “말뼈다귀, 내력을 잘 모르는 시시한 자”로 풀이합니다. 일본말사전에 실린 보기글에는 “どこの馬うまの骨ほねだかわからない”가 있고, 이 글월을 “어디서 굴러먹던 말뼈다귄지 모르겠다”로 풀이해 놓습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오늘날 우리가 흔히 쓰는 ‘말뼈다귀’는 일본말에서 슬그머니 넘어온 말투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쩌면 일제강점기에 살그마니 건너온 말투일 수 있겠지요.



인생 한 방이면 돼, 홍콩 느와르 같은 대사를 몇 번이나 혼자서 씨부리는 저 여자, 한쪽 무릎 세우니 흘러내린 치마 밑엔 허연 허벅지 (폐경)


징을 만드는 장인을 만났다 / 손톱엔 쇳물 때가 새까맸다 / 이가리를 만들고 사개질을 하고 / 한밤엔 담금질을 했다 (풋울음)



  김수상 님이 선보인 시집 《사랑의 뼈들》(삶창,2015)을 읽으면서 문득 ‘말뼈’라는 낱말이 떠오릅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뼈’를 생각하면서 말로 집을 짓는 이야기가 흐르는 시집이기에 저절로 ‘뼈 + 말’이 떠오르고, ‘뼈가 되는 말’이나 ‘말이 되는 뼈’가 떠올라요. 단단한 얼음판을 지치면서 놀듯이 시를 쓰지는 못하고, 아슬아슬하다 싶은 살얼음판을 살금살금 걷듯이 시를 쓴다고 하는 김수상 님인데, 살얼음판을 걷는 말이란, 말뼈란, 뼛속으로 스미는 말이란 무엇일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계단을 올라오는데 비누 냄새가 났다 얼마 전 새로 단장한 놀이터에 아이와 엄마가 비눗방울 놀이를 한다 크고 작은 방울들이 공중에 떠다녔다 까르르까르르, 했다 (얇은 막)


막내놈 가방을 모조리 비우니 코발트색 튜브물감 하나가 찌그러져 책이며 공책이며 가방에 푸른 떡칠을 해놓았다 게임할 시간은 있고 가방 정리할 시간은 없냐고 등교하는 아침에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을 냈다 보내놓고 젖은 걸레로 책이며 공책을 닦는데 (구름의 문장)



  어떤 말이 내 몸을 이루는 뼈로 단단하게 굳었을까 하고 돌아봅니다. ‘말에 뼈가 있다’는 말처럼, 이웃한테 들려주는 말에 어떤 마음을 싣는 삶인가 하고 돌아봅니다. 시인 김수상 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말)에는 어떤 뼈가 깃들어 이 사회와 나라와 삶을 돌아보도록 북돋우는가 하고 돌아봅니다.


  단단한 뼈처럼 단단한 말이 있습니다. 무른 뼈처럼 무른 말이 있어요. 뼈다귀 같은 말이라고 해서 꼭 단단하기만 하지 않습니다. 단단한 뼈가 있으면 무른 뼈가 있고, 억센 뼈가 있으면 말랑말랑한 뼈가 있어요. 단단한 뼈가 있어서 살점을 받친다면, 물렁한 뼈가 있어서 뼈랑 뼈가 이어져서 몸을 움직일 수 있어요.


  그러니까 삶이란 ‘단단뼈’하고 ‘물렁뼈’가 맞물리는 이야기꾸러미라고 할 만합니다. 어느 때에는 단단하지만 어느 때에는 물렁하기도 하는 삶이라 할 만하고, 이러한 삶을 어느 때에는 다부지거나 야무진 말마디로 그릴 수 있지만, 어느 때에는 말랑말랑 물컹물컹 부드러이 그릴 수 있어요. 누군가는 그야말로 씩씩하고 힘차게 한길을 걷고, 누군가는 그야말로 흔들흔들 비틀거리면서 이 길 저 길 들쑤시면서 걸어요.



냉장고가 운다 내일이 입춘이라는데 한밤에 혼자 깨어 냉장고가 울고 있다 반쯤 남은 소주병이 울고 젖은 시래기가 울고 아버지가 먹다 남기고 간 간처녑도 벌겋게 울고 있다 (생활의 발견)



  삶이 여기에 있고, 시가 여기에 있습니다. 말뼈 같은 시가 있고, 소뼈나 닭뼈 같은 시가 있습니다. 양뼈나 개뼈 같은 시가 있고, 참새뼈나 박새뼈 같은 시가 있어요. 커다란 짐승을 받치던 뼈 같은 시여야 더 크지 않습니다. 자그마한 새가 하늘을 가볍게 날도록 받치던 뼈 같은 시이기에 하염없이 작지 않습니다.


  사회를 비평할 적에도 시가 되고, 삶을 바라볼 적에도 시가 됩니다. 사회와 부딪힐 적에도 시가 태어나고, 살림을 가꿀 적에도 시가 태어나요. 그러니까, 《사랑의 뼈들》을 쓴 김수상 님이 이녁 막내아이를 꾸짖는 하루를 보내면서도 문득 이녁 모습을 되새기며 시가 태어나고, 파란 물감으로 젖은 가방을 조용히 닦으며 시가 새롭게 흐릅니다.


  냉장고를 열다가 시가 태어나지요. 냉장고를 다시 닫으면서 시가 태어나요. 쌀을 씻거나 밥을 지으면서 시가 태어나고, 설거지를 하거나 그릇을 떨어뜨려 깨면서 시가 태어나요. 언제 어디에서나 삶이 흐르기에, 이 삶을 고스란히 바라보고 고이 껴안을 수 있다면 우리는 누구나 시인이 되어 기쁨과 슬픔을 골고루 노래할 수 있습니다.



척추도 지느러미도 없이 지식만 빨다가 얼마 전에 죽은 내 친구 시간강사는 죽어서도 대가리에 먹물만 잔뜩 넣고 응급실 시트에 널브러져 있었다 먹물 제대로 한 번 쏘지도 못하고 (어느 쭈꾸미의 죽음)



  쭈꾸미는 죽어서 바다로 돌아가기도 하고, 쭈꾸미는 죽지 않고 산 채로 잡혀서 사람들한테 먹히기도 합니다. 쭈꾸미가 죽은 바다에서 사람들은 헤엄도 치고 낚시도 하며 여행도 해요. 쭈꾸미를 먹은 사람은 쭈꾸미 숨결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서 새롭게 기운을 내요.


  시집 《사랑의 뼈들》에 흐르는 사랑이란 뼈란 노래란 삶이란 꿈이란 말이란 머나먼 별나라에 있지 않습니다. 언제나 김수상 님 삶자리에 있습니다. 김수상 님이 바라보는 대로 삶이 흐르면서 시가 흐릅니다. 김수상 님이 스스로 새롭게 가꾸려 하는 삶처럼 시가 한 줄 두 줄 흐릅니다.


  나는 두 아이를 밤에 살뜰히 재우면서 이마를 쓸어넘기고 볼에 뽀뽀를 하고 이불깃을 여미고 자장노래를 부르고 가슴을 살며시 토닥이고는 시집을 조용히 펼칩니다. 등불을 켤 수 없어서 촛불을 켜고 시집을 고요히 읽습니다. 고단하면서도 즐겁게 누린 하루를 마무리하기 앞서 두 아이하고 누린 살림 이야기를 짤막하게 수첩에 적어 봅니다. 내가 우리 보금자리에서 아이들하고 나누는 말마디도 날마다 새삼스레 노래가 되어 새롭게 거듭나겠지요. 4349.1.23.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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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괭이 앞발 권법 - 박경희 동시집 담쟁이 동시집
박경희 지음, 이휘재 그림 / 실천문학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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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78



동시에 욕만 잔뜩 쓰는 아이

― 도둑괭이 앞발 권법

 박경희 글

 이희재 그림

 실천문학사 펴냄, 2015.12.30. 12000원



  충남 보령에서 지내며 아이들한테 글쓰기를 가르친다는 박경희 님이 쓴 동시를 묶은 《도둑괭이 앞발 권법》(실천문학사,2015)을 읽습니다. 박경희 님은 시골에서 살며 시골 아이하고 느끼는 하루를 조곤조곤 동시로 묶어요. 시골 아이하고 어우러지는 이야기를 쓰고, 시골 할매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쓰고, 시골 아지매나 아재하고 부대낀 이야기를 써요.


  아이들하고 시골에서 사는 나도 이 아이들하고 어우러지는 하루를 곧잘 짤막하게 간추려 보곤 합니다. 이를테면, 두 아이가 서로 달리기 놀이를 하면서 겨루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 이야기를 적어 봅니다. 큰아이도 작은아이도 바람을 가르듯이 신나게 달리려 하는데 아무래도 키나 몸집에서 큰아이가 더 크니 작은아이가 뒤로 처져요. 이때에 작은아이는 누나더러 저보다 앞서 달리지 말라고 하기 일쑤인데, 어느 날 배시시 웃으면서 누나 신을 신겠다고 해요. 왜 그러한가 했더니 누나 신을 신으면 저도 누나처럼 잘 달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더군요.



빨간 휴지 줄까? / 파란 휴지 줄까? // 똥꼬에 불났네 / 내 꽁지에 불났네 (뒷간 귀신,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


“아무리 쳐 봐야 대답 안 해유.” // 수박 장사 아저씨 심드렁 심드렁 // 아까부터 수박 머리 두드리는 / 아줌마가 못마땅하다 (수박)



  어버이는 누구나 시인이 됩니다. 아이한테 말을 처음으로 터뜨려서 보여주는 어버이는 언제나 시인이 됩니다. 어버이한테서 말을 처음으로 배우는 아이도 시인이 됩니다. 늘 새롭게 배우는 말로 언제나 즐겁게 말을 터뜨리는 아이는 그야말로 시인이 되어요.


  박경희 님이 쓴 〈빨간 금붕어〉 같은 노래는 박경희 님을 고모로 둔 아이가 어느 날 문득 터뜨린 말일 테지요? 박경희 님은 아이가 터뜨리는 멋지고 사랑스러운 말을 고스란히 옮겨적으면서 새로운 노래로 짓습니다. 아니, 아이하고 함께 노래를 부르지요.


  여느 날 수수하게 아이하고 어우러져서 놀다가 노래를 부릅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아이하고 손을 맞잡고 노는 마음으로 노래를 부릅니다. 금붕어를 보다가, 매미 울음소리를 듣다가, 바람소리를 듣다가, 또 빗물을 맞고 눈송이를 맞으면서 새삼스레 노래를 부릅니다.



둥치에서 뜨릅매미 / 뜨름 따름 뜨름 따름 // 가지에서 각시매미 / 쯔응 쓰루응 즈응 쯔루응 (매미)


고모! / 내가 자꾸 쳐다보니까 / 물고기가 / 부끄러운가 봐! (빨간 금붕어)



  이 땅에 새로 태어난 아이는 외양간도 소도 처음 마주하기 마련입니다. 눈을 끔뻑거리는 소를 마주보는 아이는 소하고 아마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리라 생각해요. 곁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는 어른은 소랑 아이가 이루는 삶과 놀이를 가만히 마음으로 담아서 새삼스레 노래를 부릅니다. 그리고, 밥찌꺼기를 땅에 묻고 나서 만난 멋진 새싹(참외 싹)을 본 날에도 놀랍고 반가운 노래를 불러요.



외양간에 소를 처음 본 아이가 / 입김을 씩씩 불더니 / 소 눈을 들여다본다 (눈싸움)


음식물을 / 땅에 묻고 돌아선 지 / 일주일 만에 / 우둘투둘 씩씩하게 / 햇빛 뚫고 / 참외 싹이 났다 (참외 싹이 쑤욱!)



  《도둑괭이 앞발 권법》을 읽다 보면, 동시를 쓴 박경희 님이 만난 시골마을 아이들 삶이 찬찬히 함께 흐릅니다. 박경희 님한테서 글쓰기를 배우는 아이들이 ‘동시 쓰기’를 할 적에 욕만 잔뜩 쓰는 삶이 흐르고, 한국으로 시집온 이웃나라 사람들 삶이 흐릅니다.


  시골 아이는 왜 동시 쓰기를 할 적에 욕만 쓸까요? 아무래도 이 아이는 집이나 마을에서 늘 욕만 들었기 때문일 테지요. 이 아이를 둘러싼 어른들이 늘 욕을 해대니 아이 마음속에 어느새 욕이 잔뜩 들어왔을 테고, 이 아이는 이 욕을 얼른 털어내고 싶으니 동시 쓰기를 할 적에 이 욕꾸러미를 몽땅 뱉어낼는지 모릅니다. 그야말로 욕 빼고는 들은 소리가 없으니 욕꾸러미만 동시로 쓰는 아이일 텐데, 이 아이가 욕꾸러미를 다 뱉어내고 난 자리에 기쁜 노래가 한 가락이라도 스며들 수 있으면, 다음에는 이 조그마한 기쁜 노래를 동시에 쓸 수 있겠지요.


  한국으로 시집을 온 분들은 한국에서 아이를 낳습니다. 이 아이들은 모두 ‘한국 아이’가 됩니다. 그런데 한국으로 시집을 온 이웃나라 사람들은 아직 ‘한국 어른’으로 대접을 받지 못해요. “그냥 우리 동네 사람”일 텐데, 마을에서도 나라에서도 학교에서도 ‘이주 여성’이라는 눈길로만 바라봅니다.



동시를 쓰는데 / 용석이가 자꾸 욕을 쓴다 / 욕 쓰면 혼난다고 해도 / 자꾸 욕을 쓴다 // 그림도 게임에서 싸우는 / 그림만 그린다 / 칼을 들고 / 불을 내뿜는 용도 그린다 (동시 쓰기)


창준이도 / 배숙이도 / 윤진이도 / 성진이도 / 세환이도 / 다 엄마가 / 다른 나라 사람이다 (그냥 우리 동네 사람)



  시골에서 나고 자라는 아이들이 씨앗 한 톨을 손수 심어 볼 수 있기를 빌어 봅니다. 박경희 님한테서 글쓰기를 배우는 아이들이 새봄에 저마다 씨앗 한 톨씩, 또는 두 톨씩, 또는 밭고랑 한 줄씩, 또는 밭뙈기 한 가득, 손수 씨앗을 심고서 이 씨앗을 손수 돌보는 여름을 누리고 가을을 맞이할 수 있기를 빌어 봅니다. 동시 쓰기를 할 적에 욕만 쓰는 아이도 씨앗 한 톨을 손수 심어서 ‘관찰일기’를 동시로 써 볼 수 있기를 빌어 봅니다.


  작은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서 꽃이 피고 새로운 씨앗을 품은 열매를 맺어요. 아이들 가슴에 고운 씨앗이 사랑스레 자라서 웃음꽃이 피고 이야기꽃이 흐드러질 수 있기를 빌어요.


  두 손을 모아서 씨앗을 품을 수 있다면, 이 두 손을 모아서 짓는 노랫가락에도 사랑스러운 숨결이 흐를 수 있을 테지요. 두 손 가득 고운 꿈을 품을 수 있다면, 이 두 손을 새롭게 펼쳐서 기쁨으로 어깨동무하는 살림을 지을 수 있을 테지요. 《도둑괭이 앞발 권법》을 빚은 박경희 님이 보령 시골마을에서 앞으로도 새로운 이야기꾸러미를 기쁨으로 지어서 나누어 주시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4349.1.20.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동시 읽기/동시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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