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아이가 똥 눈 바지를 벗길 때

 


  낮잠을 재우느라 기저귀를 채우고는 두툼한 바지를 입힌다. 작은아이가 낮잠을 달게 자고 일어난다. 저녁을 먹이는데 끙끙 소리를 내더니 솔솔 똥내음을 풍긴다. 바지 뒤쪽을 살짝 연다. 용하게 기저귀 안쪽에만 똥이 묻었다. 부디 두툼한 바지는 안 버리기를 빌며 씻는방으로 간다. 두툼한 바지는 아기 바지라 하더라도 빨래하는 품이 제법 들고, 무엇보다 말리는 데에 오래 걸린다. 여름철에는 두툼한 옷이 일찍 마르지만 여름철에 두툼한 옷을 입을 일 없다. 이래저래 보면 겨울빨래는 힘이 더 들고 말리기도 만만하지 않다.


  바지 한 벌 버리는 일이 대수롭지 않으리라. 아이 밑과 다리를 슥슥 씻기며 토닥토닥 재우는 일이 대수로우리라. 그러나, 자꾸 ‘빨래감 줄이기’를 생각하고 만다. 스스로 집일이 너무 빠듯하면서 바쁘다고 여기기 때문일까. 스스로 집일에 치인다고 느끼기 때문일까. ‘어머나, 똥 예쁘게 누었구나. 예쁘게 씻고 예쁘게 자자.’ 하는 생각을 선뜻 못 품는 까닭은 무엇일까.


  잠들다가 깨고 만 아이는 한 시간 남짓 놀며 밥을 조금 더 먹으며 지내다가 다시 잠든다. 깊이 잠든다. 그러나, 팔베개 하던 손을 새벽에 슬그머니 빼고는 조용히 내 일을 하려고 옆방으로 건너오니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 앙 소리내고 울며 달라붙는다. 품에 안아 재우고는 허벅지가 아플 때까지 있다가 자리에 눕히니 새근새근 잘 자는가 싶더니 또 10분쯤 지나서 앙 소리내고 울며 달라붙는다.


  나도 내 어머니한테 이처럼 달라붙으면서 잠을 못 자게 했을까. 나도 내 어머니한테 이렇게 엉겨붙으면서 볼일도 못 보게 했을까. (4345.11.19.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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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하고 스물네 시간을 살면

 


  아이들하고 스물네 시간을 살면, 이 아이들이 얼마나 작으며 여린가를 느낍니다. 그런데, 이 작으며 여린 아이들이 못 하는 일이 없습니다. 자그마한 손 몸 다리로 무엇이든 스스로 하고픈 것을 다 하고야 맙니다. 씩씩하고 사랑스러우며 튼튼해요. 아침에 잠에서 깨며 품에 안아 달라 엉겨붙고, 이내 배고프다 칭얼거립니다. 배고프다고 칭얼거리면서도 놀아 달라고 조릅니다. 그런데 조르다가도 어느덧 혼자서 재미나게 놀이를 만들어요. 굳이 어느 어른이 함께 놀아 주지 않아도 아이들은 스스로 꿈나라를 생각하며 놉니다.


  작은아이를 안고 달래며 밥을 차립니다. 밥을 차리기 앞서 그제 삶아 놓은 고구마를 조금씩 떼어서 먹였습니다. 두 아이 모두 몸이 후끈거리기에 세이겐 탄 물을 알맞게 데워서 함께 먹입니다. 작은아이는 밥을 다 차려 큰아이더러 먹으라고 할 무렵 까무룩 잠이 드는데, 잠이 든 아이를 자리에 눕히려고 하다 보니 똥내음이 솔솔 나요. 뭔가 하고 슬쩍 바지를 들추니 똥을 푸지게 누었습니다. 작은아이를 안아서 달래고 재웠는데, 아이는 아버지 품에서 똥을 누었을까요. 아이를 안기 앞서 똥을 누고는 아버지 앞에서 밑 씻어 달라고 ‘끙끙’거렸을까요.


  잠든 아이를 데리고 씻는방으로 가서는 바지를 벗깁니다. 그야말로 푸짐한 똥이 퍽석 떨어집니다. 이래 가지고는 잠든 아이를 살살 달래며 찬찬히 씻기기는 어렵습니다. 엉덩이부터 발끝까지 비누를 바르며 씻겨야 하거든요.


  밑을 다 닦자 작은아이는 잠에서 깹니다. 잠에서 깬 아이를 품에 안으며 밥을 먹여 봅니다. 작은아이는 아침부터 이래저래 고구마랑 여러 가지를 먹었기에 배가 안 고픈지, 차린 밥은 더 먹지 않습니다. 누나가 노는 곁에서 얼쩡거리다가는 이내 눈이 감기고, 아버지 무릎에서 새근새근 잠이 듭니다.


  잠자리로 아이를 옮깁니다. 기저귀를 댑니다. 아이는 잠에서 깨지 않습니다. 이제 큰아이 밥을 더 먹이고, 단감 꼭지를 따서 접시에 담습니다. 똥바지를 빨래해서 마당에 넙니다. 이른아침에 빨아서 넌 기저귀는 다 말랐기에 하나하나 걷습니다. 이제는 옷가지를 갤 때이고, 큰아이도 살살 달래서 낮잠을 재워야지요. 낮잠을 재우고 나서는 또 아이들이 개운하게 잠에서 깰 테고, 저녁놀이를 즐기다가는 작은아이를 품에 안고 밥을 차려야겠지요.


  하루는 짧고 하루는 깁니다. 하루하루 아이들 놀이와 몸짓과 웃음으로 보내고, 이 날 저 날 쌓여, 아이들과 누리는 삶이 알차게 여뭅니다. (4345.11.17.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빨래순이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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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근밥

 


  늦가을로 접어들면서 풀물 짜서 마시기는 끝난다. 이듬해 봄이 되어야 다시 풀물을 짜서 마실 수 있다. 이제부터 당근물 짜서 마시기로 바뀐다. 풀물을 짜서 줄 때에는 꽤나 힘들게 마시던 아이들이지만, 당근물 짜서 주면 낼름낼름 잘 마신다. 당근을 짠 물은 퍽 달콤해서 더 달라고까지 말한다. 그나저나, 당근물을 짤 적에는 당근가루가 많이 나오기에, 이 당근가루로 빵을 굽기도 하고 부침개를 하기도 하는데, 밥을 끓이면서 밥이 거의 다 될 무렵 잔뜩 들이부어 섞으면 당근밥이 된다. 겨우내 우리 식구는 날마다 당근밥을 먹는다. (4345.11.1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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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을 안고서

 


  아이들을 안고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글쎄, 나는 ‘글쎄’라는 낱말은 좋아하지 않지만, ‘글쎄’라는 말이 아니고는 무슨 말을 할 만한가 모르겠다. 왜냐하면, 아이들을 안고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참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아이들을 안든 업든 스스로 아무것이나 다 하며 살아간다면, 굳이 이것저것 생각할 까닭 없이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다.


  나는 아이들을 안고 밥을 한다. 아이들을 안고 밥을 차리며, 아이들을 안고 밥을 먹인다. 아이들을 안고 똥기저귀를 빨다가는, 아이들을 안고 살살 달래며 자장노래를 부른다. 아이들을 안고 그림책을 읽어 주고, 아이들을 안고 내가 읽고픈 책을 읽기도 한다. 아이들을 안고 글을 쓴다. 아이들을 안고 전화를 안다. 아이들을 안고 마당에 빨래를 널고 걷고 갠다. 아이들을 안고 대문까지 나가서 택배를 받는다. 아이들을 안고 응가를 누며, 아이들을 안고 밤하늘 별을 바라본다.


  아이들을 안고, 아니 아이들을 안기 앞서 큰가방 여럿을 메고 지고 걸면서 아이들을 안는다. 얼추 삼사십 킬로그램쯤 되는 짐을 짊어진 채 아이들을 안고 마실을 다닌다. 아이들을 안고 저잣거리 마실을 한다. 아이들을 안고 군내버스에 탄다. 아이들을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달린다. 아이들을 안고 멧길을 오르내린다. 글쎄, 아이들을 안고서 못할 일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술을 마시고프면 아이들을 안고 마시면 된다. 다만, 아이들을 안고서 지내고 보면, 굳이 술을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이들을 안고서 풀을 뜯을 만하고, 아이들을 안고서 꽃송이를 가만가만 쓰다듬으면 즐겁다.


  이 밤에 큰아이 토닥이며 얼른 아픈 몸 나으라고 빌다가, 작은아이를 무릎에 누여서 너도 얼른 나아서 아침에 개운하게 일어나 씩씩하게 놀렴, 하고 속삭인다. (4345.11.15.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빨래순이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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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차린 맛난 밥

 


  나는 내가 차린 밥이 참 맛납니다. 내가 차린 밥을 함께 먹는 사람이 ‘참 맛있네.’ 하고 말할 때면 어쩐지 사랑이 새롭게 샘솟아 다음에 밥을 차리면서 한결 맛나게 하자는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내가 내 밥을 스스로 차려 먹은 지 이제 열여덟 해쯤 됩니다. 1995년에 제금을 난 뒤로, 밥이랑 옷은 언제나 스스로 건사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내 밥을 차리며 ‘밥을 맛나게 해야지’ 하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그저 ‘밥을 하자’고만 생각합니다. 내가 할 줄 아는 밥을 하고, 이웃이나 동무나 살붙이한테서 듣거나 배운 대로 조금씩 새롭게 밥을 해 보면서, 차츰차츰 밥맛이 돌게 살아왔다고 느낍니다.


  그러니까, 나는 1995년부터 내 옷가지를 스스로 빨면서 살았습니다. 2012년 봄에 처음으로 빨래기계를 들여서 가끔 기계빨래를 하곤 하지만, 한 달에 한 번쯤 기계빨래를 할 뿐, 으레 손빨래를 합니다. 빨래를 하면서 문득문득 생각합니다. 빨래를 널면서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빨래를 걷고 개면서 또 한 번 생각합니다. 내가 하는 내 빨래이지만, 내가 한 빨래는 참 깨끗하고 보송보송 좋구나, 하고 느낍니다.


  옆지기와 아이들도 느낄까요. 느끼겠지요. 어쩌면 못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딱히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즐겁게 빨래를 하고 밥을 하는걸요. 내 모든 사랑과 꿈과 믿음과 생각을 쏟아서 밥 한 그릇 차리고, 빨래 한 가지 하는걸요.


  때로는 밥상에 찬거리가 얼마 없곤 합니다. 어느 때에는 국과 밥과 나물 한두 가지만 있곤 합니다. 어느 때에는 세 시간 즈음 품을 들여 여러 반찬을 올리기도 합니다.


  나는 늘 끼니마다 모든 밥과 국과 반찬을 새로 합니다. 묵은 밥이나 국이나 반찬은 거의 안 씁니다. 끼니에 먹을 만큼 밥과 국과 반찬을 해요. 요사이에는 아침에 한 밥을 저녁에 먹고 끝내기도 하지만, 으레 새 끼니 새 밥, 새 끼니 새 국, 새 끼니 새 반찬, 이렇게 생각해요. 그때그때 손품을 들이는 밥이 참말 맛있거든요. 내가 먹어 보기에 이러하니까, 나랑 같이 밥을 먹는 사람도 이 느낌을 함께 받아들이기를 바라요.


  빨래를 하루에 서너 차례 하면서 이와 같이 생각합니다. 나는 스스로 즐거워서 하는 빨래인데, 참말 스스로 즐거워서 하는 빨래이다 보니, 빨래를 하면서 마음씻기를 이루어요. 괴롭거나 힘들거나 슬프거나 아픈 일이 있어도, 빨래를 하며 사르르 사라져요. 밥을 할 적에도 그렇고요.


  아마 사라진다기보다 잊힌다고 해야 맞을 텐데, 사라지든 잊히든, 빨래하기와 밥하기는 내 삶에서 빼놓을 수 없습니다. 또, 아이들하고 함께 놀거나 마실을 다니거나 잠을 재울 적에도 더없이 기쁘고 아름다운 숨결이 나한테 스며든다고 느껴요.


  나는 내가 차린 맛난 밥을 먹습니다. 나는 남이 차린 밥도 맛나게 먹습니다. 밥집에서 사먹는 바깥밥은 조미료 냄새에 수도물 냄새에 온갖 ‘이야 이렇게 나쁜 걸 잔뜩 집어넣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지만, 숟가락을 든 뒤로는 상긋방긋 웃으면서 먹어요. 내 숨결을 살리는 고마운 밥이거든요. 조미료 듬뿍 들어가든 말든 내 숨결이 되어요. 소시지이든 세겹살이든 내 몸이 되고 피가 되며 살이 되어요. 그래서, 이런 걸 먹든 저런 걸 먹든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합니다. 똥으로 범벅이 된 아이들 옷을 빨든, 바닷가에서 놀며 온통 모래투성이 된 옷을 빨든, 나는 노상 기쁘게 옷을 빨래합니다. 옳거니, 이런 옷은 이렇게 빨아야 하는구나, 저런, 이런 옷은 이렇게 빨아도 때와 얼룩이 안 지네, 하고 깨닫습니다. 내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던 손길을 떠올리고, 내 어머니를 낳은 어머니가 내 어머니를 사랑하던 눈길을 헤아립니다. 나는 나와 내 아이와 옆지기를 어떻게 사랑하며 하루를 빛낼까요. 밥을 먹습니다. 빨래를 합니다. 비질을 합니다. 하루가 어여쁩니다. (4345.11.12.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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