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아이, 더 작은 아이

 


  우리 집 대청마루는 우리 마을 이웃집 대청마루를 헤아리면 살짝 좁다. 그래도 아이들은 이 대청마루에서 잘 뛰어논다. 한여름에는 큰아이하고 이 대청마루에 드러누워 잠을 자곤 했다. 그러니까 우리 식구 살 만큼 널널하다.


  이웃마을 이웃집으로 마실을 가니, 대청마루에 따로 샤시문을 달지 않아 대청마루 아래쪽이 훤히 트인 그대로 있다. 새삼스레 대청마루가 꽤 높다고 느끼면서, 이런 대청마루라면 비오는 여름날 대청마루에 앉아 빗소리를 즐기고 비내음에 스며드는 시원스러운 바람을 느끼겠구나 싶다.


  아이들은 대청마루에 앉을 적에 발이 땅에 닿지 않는다. 이러한 대청마루에 아직 익숙하지 않던 큰아이는 그만 대청마루에서 지익 미끄러지며 아래로 한 번 굴러떨어지기도 한다. 그래 봐야 흙바닥이니 다칠 일은 없다. 한 바퀴 돌았으니 살짝쿵 놀랐을 뿐.


  큰아이라 하더라도 ‘작은’ 아이라고 새삼스레 느낀다. 작은아이라 하지만 참으로 ‘더 작은’ 아이라고 다시금 느낀다. 이 작은 아이들은 어버이 사랑을 받아먹으며 하루하루 무럭무럭 누릴 고운 숨결이다. 발그네를 하면서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맞아들이는 살가운 대청마루 살린, 묵은 시골 흙집은 이 땅에 몇 채쯤 남았을까. 4345.11.27.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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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껍질 먹는 사람

 


  오늘날 숱한 사람들이 돼지껍데기를 참 잘 먹는다. 일부러 찾아서 먹기까지 한다. 그런데 능금껍질이나 포도껍질을 냠냠 우걱우걱 씹어서 먹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감껍질이나 배껍질은 아예 먹을 생각을 않는다고 느낀다. 풀약을 치지 않은 귤이라 하면 껍질째 즐겁게 먹을 수 있으나, 이를 깨닫거나 느끼는 사람은 훨씬 드물다.


  집에서는 어떤 열매이든 으레 껍질까지 먹는 우리 아이들인데, 바깥에 나가면 다른 사람들은 으레 껍질을 벗겨서 열매를 내놓는다. 능금껍질을 벗기나 감껍질을 깎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큰아이가 말한다. “껍질 다 먹는 건데.” “껍질 다 먹어요. 깎지 마요.” 다른 사람들은 다섯 살 큰아이가 읊는 이 말을 들으면서도 껍질을 다 벗기거나 깎는다. 아이가 읊는 말을 한참 듣고서야 겨우 ‘옛날부터 껍질도 다 먹던 삶’이었다고 떠올린다.


  그런데, 오늘날 숱한 사람들은 밥을 먹을 적에도 씨눈까지 다 깎아 새하얀 쌀밥을 먹지, 씨눈을 살린 누런 쌀밥을 먹지는 않는다. 겨가 붙은 쌀이라면 못 먹는 줄 여기기도 한다. 곡식이든 열매이든 알짜를 도려낸다. 숨을 살리는 알맹이가 무엇인 줄 돌아보지 못한다. 곡식과 열매에서는 껍질이 껍데기가 아니요, 속엣것이 알맹이가 아닌데, 이를 옳게 바라보지 못한다.


  서울에서는 곡식 껍질과 열매 껍질은 몽땅 쓰레기통으로 간다. 그나마 시골에서는 곡식 껍질이나 열매 껍질이 흙으로 돌아가 거름이 되기는 한다만. 4345.11.26.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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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 이름’을 못 알아듣는 ‘어른 마음’

 


  큰아이는 제 이름을 씩씩하게 말할 줄 알 뿐 아니라, 제 이름을 야무지게 쓸 줄 안다. 이제 큰아이는 동생 이름도 어느 만큼 쓰기는 하는데, 아직 동생 이름은 제 이름만큼 예쁘게 쓰지는 못한다.


  사람들이 큰아이를 보며 이름을 묻는다. 큰아이는 “사름벼리!” 하고 얘기한다. 그러면 거의 모든 어른(사람)들은 이 이름을 못 알아듣는다. 큰아이만큼 어린 아이들도 이 이름을 잘 못 알아듣기 일쑤이다. 한 글자씩 또박또박 끊어서 들려주어도 못 알아듣는 어른이 아주 많다.


  어른들은 아이 이름을 못 알아듣는 까닭이 ‘아이가 말할 때에 소리가 새서 알아듣기 어렵다’고 여기지만, 어른들 스스로 ‘마음을 덜 열’거나 ‘마음을 안 연’ 탓인 줄 생각하지 못한다. 마땅한 노릇이지만, 스스로 마음을 덜 열거나 안 열었을 적에는 이러한 밑틀 때문에 아이들 말소리를 헤아리지 못하는 이녁 모습을 깨닫지 못하기 마련이다.


  어른들은 우리 아이가 제 이름을 말할 적에만 못 알아듣지 않는다. 다른 말을 할 적에도 잘 못 알아듣는다. 게다가 아이들이 무엇을 바라거나 생각하는지를 못 일기 일쑤이다. 곧, 아이들 생각과 마음과 꿈과 사랑을 읽지 못할 만큼 ‘스스로 마음을 열지 못한’ 어른들은 우리 아이가 읊는 말마디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이 읊는 말마디도 옳게 받아들이거나 맞아들이지 못한다.


  나는 큰아이더러 제 이름을 종이에 적어 보라고 말한다. 아이는 놀이를 하듯 이름을 적어 본다. 한 번 쓰다가 그닥 예쁘지 않다 여겨 다시 쓰고 또 다시 쓴다. 처음에는 작은 칸에 맞추어 이름을 넣으려 하다 보니, ‘너무도 마땅하고 홀가분하’게 ‘한글 풀어쓰기’를 하며 ‘ㄹㅡㅁ’을 쓴다. 어쩜, 한글 풀어쓰기란 처음에 이렇게 태어났구나. 아이한테 얘기한다. 굳이 칸 안에 글이 다 들어가야 하지는 않아. 내가 종이에 아이 이름을 조금 크게 적으면서 ‘칸 벗어나기’를 해서 보인다. 이제 아이는 칸을 살피지 않고 제 이름 예쁘게 쓰는 데에 마음을 기울인다.


  어른들이 아이들 마음을 슬기롭게 읽기를 빈다. 아이들이 얼마나 놀고 싶어하는가를 어른들이 제대로 읽고, 아이들이 푸른 숲과 메와 내와 바다와 들을 얼마나 바라는가를 어른들이 곱게 읽으며, 아이들이 돈과 이름과 힘 따위는 아예 생각조차 안 하면서 맑고 밝게 살아가는가를 어른들이 사랑스레 읽기를 빈다. 4345.11.25.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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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쁜 사람

 


  마을에서나 읍내에서나 면소재지에서나, 할머니들은 우리 아이들을 보면 으레 ‘이쁜 사람’이라고 부른다. “저 이쁜 사람 보소.”라 말씀하거나 “이쁜 사람이 무얼 먹나.” 하고 말씀한다.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우고 마실을 다녀오는 길에 수레에서 새근새근 잠든 모습을 볼 적에는 “이쁜 사람이 자네.” 하고 말씀한다. 언제나 말끝마다 ‘이쁜 사람’이다.


  집에서 아이들을 부를 적에 ‘똥벼리’나 ‘똥보라’처럼 부른다거나 ‘똥벼’나 ‘똥보’라 부르기도 하다가, 이러다가 아이들이 똥똥이가 되지 않겠나 싶어, 나부터 말을 고치기로 다짐한다. ‘예벼’나 ‘예보’처럼 부르기도 하고 ‘예벼리’나 ‘예보라’처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굳이 ‘예쁜 벼리’랑 ‘예쁜 보라’처럼 예쁘다고 부르지 않아도 예쁜 아이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름이 그대로 예쁘고, 삶이 그대로 예쁘며, 사랑이 그대로 예쁘다. 4345.11.24.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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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없이 아버지하고만 엿새

 


  이제 아이들 어머니가 ‘람타’ 공부를 마치고 오늘 시골집으로 돌아온다. 몇 시쯤 시골집에 닿을까. 저녁에 아이들 잠들고서 닿을까. 아무튼 아이들은 어머니 없이 닷새 밤을 자고 엿새째 맞이한다. 어머니 없는 허전함은 두 아이 모두 느끼지만, 작은아이가 훨씬 크게 느끼는구나 싶다. 이럴 때일수록 더 따스하고 살가이 맞이해야 하는데, 아버지 되는 사람은 아이들 칭얼거림을 조금 더 따스하거나 살가이 맞이해 주지 못한다.


  문득문득 내 말투에서 나 스스로 ‘훈육’과 같은 기운을 느낀다. 이런 기운을 느끼면서 생각을 다스린다. 나는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잖니. 그래, 아직 나는 나 스스로 사랑하지 못해서 아이들한테까지 어머니 없는 엿새 동안 ‘훈육’ 같은 말을 쏟아내지 않는가.


  아침놀을 바라본다. 저녁놀을 바라본다. 밤별을 보고 새벽별을 본다. 작은아이는 스물네 시간 아버지 바짓자락 붙잡고 달라붙는다. 똥을 누러 갈 수도 없고, 빨래를 널러 나올 수도 없다. 밥도 겨우겨우 짓는다. 밥하는 곁에서 구경하는 일은 좋으나, 불 옆에서 자꾸 손잡이를 돌리려 하니 쫓고야 만다. 불 곁에서 알짱거리는 작은아이 큰아이한테 마음쓰다가 커다란 냄비 뚜껑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아이들 어머니가 돌아오는 오늘, 옆지기가 오는 때에 맞추어 읍내에 나가 마중을 할까 싶기도 하고, 그냥 마을 언저리에서 마실을 다닐까 싶기도 하다. 밤새 잠을 이루지 않고 아버지 곁에 붙어 아버지도 잠을 못 이루게 하던 작은아이는 새벽 여섯 시 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잠이 든다. 아침 일곱 시를 넘기니 큰아이가 일어난다. 어떻게 해야 할까. 모르지. 큰아이는 큰아이대로 놀아야 할밖에 없고, 작은아이는 작은아이대로 밤새 못 이룬 잠을 달게 자도록 곁에서 토닥여야 할 테지. 이번 엿새 동안 작은아이가 젖을 뗄 수 있을까. 어머니가 다시 와도 젖을 안 물고 밥만 먹을 수 있을까. 젖이 없으니 물을 많이 마시고 밥도 바지런히 먹던데, 어찌 보면, 아이들은 개구지게 놀도록 지켜보다가 꽤 배가 고프다 싶을 때에 짠 하고 밥상을 차려야지 싶기도 하다. 스스로 배가 고파 노래노래 부를 때에 마지못해 주는 척하며 밥을 내주어야 다들 맛나게 밥그릇을 비우리라 본다. (4345.11.20.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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