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언어 정책과 자국어 보호 정책의 만남
피터 로드니 외 지음 / 피어나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80



쉽게 안 쓰면 말이 아니다

― 쉬운 언어 정책과 자국어 보호 정책의 만남

 피터 로드니·에바 올롭손·베네딕트 마디니에

 이건범·이상규·김슬옹·김혜정·이현주·김영명

 피어나 펴냄, 2013.12.16.



  쉽게 쓰는 말이 말입니다. 쉽게 안 쓰는 말은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일까요? 쉽게 안 쓰는 말도 그냥 말이라 할 수 없는 까닭이 있을까요?


  쉽게 안 쓰는 말은 폭력이나 권력입니다. 쉽게 안 쓰는 말은 이웃이나 동무를 헤아리지 않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말을 어렵게 쓸 일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어렵게 비비 꼬아서 못 알아듣도록 할 까닭이 없습니다. 사랑을 담는 노래를 내 이웃이 곧바로 느끼고 알아차릴 수 있도록 부르지, 아무도 못 알아듣도록 사랑노래를 부를 일이 없습니다.


  동무를 해코지하거나 따돌리려 하기에 어렵게 말을 합니다. 지식으로 권력을 쌓기에 어렵게 말을 합니다. 한편, 어렵게 쓰는 말은 폭력일 뿐입니다. 한자를 부려서 쓰든 영어를 섞어서 쓰든, 한자나 영어를 모르는 사람한테 한자나 영어를 함부로 쓰는 말은 그저 폭력입니다. 왜냐하면, 한자나 영어를 모르는 사람한테 이런 말을 자꾸 쓰는 일은 사랑이 아니니까요.



.. 한국의 근대 지식인들은 일본을 거쳐 번역된 서양의 근대 학문을 받아들였으므로 일상생활 용어와 전문용어는 전통적인 한자어 낱말과도 달랐다. 일본식 한자어 낱말이 지식과 정보의 주류를 이루게 된 것이다 … 이 한자어 낱말이 일상의 삶과 동떨어진 어려운 말이었기에 지식인층과 일반 국민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이런 까닭으로 한자를 배워야 한다는 주장이 아직까지 기세를 떨치고 있다 ..  (8∼9쪽)



  아직 한국 사회에서 공문서가 무척 어렵습니다. 정치꾼은 언제나 ‘서민’을 읊지만, ‘서민’이란 낱말부터 흐리멍덩합니다. ‘서민인 사람’이 ‘서민’이라는 한자말을 알까요? ‘서민이 아닌 사람’이 ‘서민’이라는 한자말을 쓰면서 자꾸자꾸 더 울타리를 높게 쌓지 않는가요?


  동사무소나 면사무소에 가서 등본을 하나 뗄 적에 써야 하는 문서를 보아도, 무척 딱딱하고 까다롭습니다. 출생신고서나 혼인신고서 서식은 아직도 많이 어렵습니다. ‘차상위계층인 사람’이 ‘차상위계층’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있을까요? ‘기초생활수급자인 사람’이 ‘기초생활수급자’라는 이름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만할까요? 기초연금이든 복지기금이든 신청할 사람들이 쉽게 알아들어서 쉽게 서류를 낼 수 있도록 쉬운 글로 서식이 있는지 무척 궁금해요.


  공무원들은 ‘비수급 빈곤층’이라는 말을 쓰고, 지식인은 ‘하우스 푸어’라는 말을 쓰는데, 이런 말은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면서 쓰는 말인지 궁금합니다. ‘가난한 이웃’을 얼마나 헤아리기에 이런 말을 지을까요. ‘집 없는 이웃’을 얼마나 생각하기에 이런 말을 지을까요. ‘시각 장애인’이나 ‘청각 장애인’ 같은 낱말은 어떤 지식인이나 공무원이 어떤 마음으로 지었을는지 무척 궁금하기도 해요. 왜 이렇게밖에 말을 쓸 줄 모를는지 참으로 궁금한 노릇입니다.



.. 1970년대 영국에서는 공공정보를 전달받아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 아니냐는 우려가 높아져 갔다 … 이들 기관이 보내는 정보는 무척 중요했으나 읽어도 무슨 뜻인지 불분명하기 일쑤였다 … 국민에게 전해져야 하는 정보 대부분은 애매한 말과 전문용어 범벅이었고 관료적 표현 천지였다 많은 사람이 이런 상황을 개혁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팔을 걷어부치고 나섰다가 단념하고 말았다. 정부와 대기업에게 국민과 소통하는 방법을 바꾸라고 설득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뼈저리게 느끼고서 물러섰던 것이다 … 법률 문서는 수백 년 동안 전통이라는 미명 하에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낡은 문체를 하나도 손대지 않고 유지해 왔다 … 법률가에게 왜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특정 법률용어를 고집하는가라고 캐물으면 법정에서 ‘무수히 사용되었고 검증되었다’는 변명을 듣게 된다. 달리 말해, 판사는 너무나 오랫동안 특정 법률용어에 특정 의미가 담겼다고 믿어 왔기에 거기서 벗어나는 용어는 다른 의미를 내포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  (17, 18, 19, 37, 46쪽)



  말은 언제나 내 삶에 따라 흐릅니다. 내 삶이 포근하거나 따사롭다면 내 말은 포근하거나 따사롭습니다. 내 삶이 고단하거나 힘들다면 내 말은 고단하거나 힘듭니다. 나 스스로 삶을 넓고 깊게 바라본다면 내 말은 넓고 깊을 테지요. 내 삶이 쳇바퀴 돌듯이 얽매인 굴레라 한다면 내 말도 쳇바퀴 돌듯이 얽매인 굴레입니다.


  오늘날 초등학교 교과서를 살피면,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쓰는 낱말하고 거의 비슷합니다. 1990년대로 접어들기 앞서까지는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쓰는 낱말은 되도록 ‘쉽고 바르며 아름답게’ 손보려고 했다고 느낍니다. 다만, 이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많이 모자라거나 아쉬웠지만, 적어도 초등학교 교과서만큼은 이 나라 아이들이 쉬우면서 바르고 아름답게 한국말을 익히도록 이끌려고 했어요.


  이제 오늘날 초등학교 교과서는 아이들한테 한국말을 제대로 가르치거나 보여주지 않습니다. 초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한자 지식을 외우도록 내몰 즈음부터 한국말은 그야말로 뒤죽박죽 엉터리로 지나칩니다. 한국말이 어떤 말인지 보여주지 못하고, 한국 말법과 말투와 말씨와 말결이 어떠한가를 슬기롭게 밝히지 않습니다. 대학입시지옥인 중·고등학교와 발을 맞추려는 초등학교 교육입니다. 쉬운 말도 바른 말도 아름다운 말도 아닌, 오직 시험문제와 얽힌 지식으로 가득한 얼거리에 갇히는 교과서요 학교이며 교육이고 문화입니다.



.. 스웨덴 정부가 언어학자와 협력하여 이 캠페인을 이끌었다. 이 캠페인이 추구한 분명하고 이해하기 쉬운 언어는 당시에 한창 진행 중이던 민주화 과정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 자국어의 포기는 비영어권 국가들의 교육의 질을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할 뿐 아니라 별도의 매개 수단이 없이는 과학 언어를 이해할 수 없는 일반 대중들의 지식 접근을 차단하는 결과를 낳는다 ..  (125, 185쪽)



  《쉬운 언어 정책과 자국어 보호 정책의 만남》(피어나,2013)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합니다. 한글문화연대에서 무척 힘을 써서 뜻있는 모임자리를 한국에서 마련했고, 영국와 스웨덴과 프랑스에서 뜻있는 이들이 찾아와서 뜻있는 이야기를 이녁 나라 말로 들려주었습니다.


  나라에서 말을 쉽게 쓰려고 할 때에 비로소 민주와 평화와 복지가 살아난다는 대목을 읽습니다. 사람들 스스로 말을 쉽게 쓰도록 북돋우고 애쓰면서 어깨동무를 할 때에 비로소 평등과 사랑과 두레가 이루어진다는 대목을 엿봅니다.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나라에서 어려운 말을 쓰면 어찌 될까요? 나라에서 일제강점기 찌꺼기 한자말을 자꾸 쓰면 어찌 될까요? 공공기관과 여느 회사와 학교에서 올바르지 않고 알맞지 않으며 아름답지 않은데다가 슬기롭지도 않은 말을 자꾸 쓰면 어찌 될까요?


  말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은 생각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생각을 담아낼 말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말을 슬기롭게 가꾸지 못하는 사람은 삶을 슬기롭게 가꾸지 못합니다. 말과 넋과 삶이 서로 맞물리지 못하면서 엇갈리는데, 어느 하나 제대로 엮지 못합니다.


  그러면, 한국이라는 나라는 어떤 모습일까요. 예전에 국립국어원 원장으로 있던 이상규 님은 스스로 국립국어원을 나무라는 말을 합니다.



.. 첫째, 《표준국어대사전》은 매우 조급하게 만드는 과정에서 기존에 나온 많은 사전들의 올림말과 뜻풀이를 수작업으로 조합한 사전이다. 따라서 기존의 개인이나 출판사에서 만든 사전 대부분이 일본 사전을 대거로 베껴 온 것이 그대로 《표준국어대사전》으로 이어진 악순환을 극복하지 못했다. 특히 전문용어는 일본의 《광사원》을 아무런 여과 없이 그대로 베껴 온 부분이 한두 곳이 아니다. 혹평을 하자면 ‘표절의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 (348쪽)



  이러한 이야기는 이상규 님이 국립국어원에서 원장을 맡기 앞서 여러 사람들이 꾸준히 했습니다. 그러나 지난날 국립국어원(국립국어연구원)에서는 이러한 이야기를 하나도 안 받아들였습니다. 게다가 아직도 꽤 많은 한국사람은 한국에서 나온 적잖은 ‘국어사전(한국말사전이 아닌 ‘국어’사전)’이 ‘일본사전’을 베낀 줄 모를 뿐 아니라, 일본사전을 베낀 탓에 ‘한국사람이 안 쓰는 한자말이 잔뜩 실려’서 ‘마치 한국말은 얼마 없고 한자말이 많은’ 줄 여기기까지 합니다.


  일본에서 조금 공부를 했다거나 일본책을 조금 살폈다면 알리라 생각합니다. ‘콘사이스’라는 이름을 붙인 사전은 일본사람이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에는 ‘콘사이스’ 사전이 있어요. 한국말 가운데 한자말이 2/3라느니 몇 퍼센트라느니 하는 통계는 모두 거짓이요 엉터리입니다. 왜냐하면, 일본사전을 베끼거나 훔쳐서 ‘국어’사전을 만들었으니 한자말이 엄청나게 많이 실릴 수밖에 없었거든요.


  무슨 소리인가 하면, 현대 사회로 접어든 뒤 한국사람은 아직 한국말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제대로 배운’ 적도 없으나 ‘배운’ 적조차 없습니다. 학교에서 ‘국어 교육’은 하지만 ‘한국말을 가르치거나 배우’지는 않습니다. 입시 과목 가운데 하나로 ‘국어’만 다룰 뿐입니다. 거의 모든 한국사람은 한국말이 아닌 ‘국어’를 시험 과목으로 외운 채 이야기(의사소통)를 나누고 글을 쓰고 말을 합니다. 이리하여 온갖 일본 말투와 일본 한자말과 번역 말투와 영어가 어지럽게 뒤섞입니다. 이렇게 어지럽게 뒤섞인 어설픈 말이 어지러운 줄 모르고 어설픈 줄 깨닫지 않으면서, 그냥저냥 ‘의사소통’을 합니다. 그냥저냥 문학을 하고 그냥저냥 기사를 쓰고 책을 내며 그냥저냥 학문을 하고 과학을 합니다.



.. 이들이 낸 소원의 핵심 내용은 공문서 작성에서 한글을 전용토록 한 국어기본법이 한자 문화를 누릴 수 있는 행복 추구권을 침해하고 있으며, 교과용 도서에 한자를 싣지 못하게 함으로써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의 학습권과 부모의 자녀교육권을 제한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원 청구인들 가운데 시장에서 배추를 팔고 어물전에 생선을 파는 이웃 사람이나 시골 농촌에서 열심히 일하는 평범한 분들의 이름은 눈에 띄지 않는다. 다들 이름 깨나 알려진 인사들이다. 소송 제기를 한 분들은 모두 자기의 눈높이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분들이 아닐까? 아직 입시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한 초·중·고 학교 아이들이 영어, 수학 등 과도한 학습 분량에 시달리고 있는 이 시점에서 다시 한자 교육을 부활함으로써 부과될 학습량은 얼마나 늘어날까? 학생들을 희생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지난 조선조 선비들은 평행을 한문 공부를 해도 해결하지 못했는데, 한문 원전을 조금이라도 읽어 본 분이라면 한자 몇 자 가르친다고 세상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다 알 수 있는데 말이다 ..  (323쪽)



  이 나라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자라면서 어떤 사람이 될 때에 아름다울까 하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나라 아이들이 앞으로 입시지옥에 사로잡혀서 시름시름 앓다가 취업전쟁에 휘둘리면서 거듭 시름시름 앓아야 하겠습니까. 이 나라 아이들이 스스로 아름다운 꿈을 사랑스럽게 품으면서 환하게 웃고 노래할 수 있는 터를 이루어야 하겠습니까.


  아이들을 사랑한다면 말을 쉽게 써야 합니다. 어른인 나 스스로를 사랑한다면 말을 날마다 새롭게 익히면서 삶을 새롭게 사랑하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어려운 말로는 모든 일이 그저 어려울 뿐이고 가로막힙니다. 쉬운 말로는 모든 일이 술술 풀리듯이 쉬우면서 활짝 열립니다. 마음을 열고 말을 살찌우면 됩니다. 가슴을 열어젖히면서 말꽃이 피어나게 북돋우면 됩니다. 4347.8.3.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말러, 그 삶과 음악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가 시리즈 6
스티븐 존슨 지음, 임선근 옮김 / 포노(PHONO) / 201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77



바람이 들려주는 교향곡

― 말러, 그 삶과 음악

 스티븐 존슨 글

 임선근 옮김

 포노 펴냄, 2011.1.15.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우고 마실을 갑니다. 여름이 한껏 무르익은 칠월 막바지 들길을 자전거로 지나갑니다. 바람이 불면서 볏포기가 눕습니다. 바람이 멈추면서 볏포기가 섭니다. 바람이 다시 불어 볏포기는 다시 눕고, 바람이 이리저리 불면서 솨르르 솨솨 스스 소리를 냅니다.


  자전거를 세웁니다. 들 한복판에서 바람노래를 듣습니다. 푸르게 일렁이는 물결이 펼쳐집니다. 눈으로는 푸른 물결을 바라보고, 귀로는 벼물결 소리를 듣습니다. 여름날 들에서 누리는 이 빛과 소리는 교향곡과 같구나 싶습니다. 들빛은 들노래로 되고, 들노래는 들빛이 됩니다. 서로 어우러지는 풀내음입니다.



.. 말러는 특유의 격정으로 답했다. “아니요. 교향곡은 세계와 같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포용해야 합니다.” … 왜 말러를 설명하면서 ‘자기 몰입적’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매혹적’이라고 했을까? 그의 음악이 너무나도 강렬하게 아름답고 생생하게 극적이며 뛰어나게 창의적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말러 음악에서 말러를 인식하는 동시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기 때문이기도 하다 ..  (15, 16쪽)



  볏포기가 그윽하게 노래를 베풀지만, 안타깝게도 풀벌레 노랫소리는 못 듣습니다. 아니, 군데군데 더러 풀벌레가 가늘게 노래를 합니다. 바로 어제그제 농협에서 항공방제를 했습니다. 이틀에 걸쳐 마을 들판 구석구석에 농약을 뿌렸습니다.


  지난해와 그러께에는 친환경농약을 뿌린다고 했으나, 이제는 ‘그냥 농약’을 뿌립니다. 무척 무서운 농약을 헬리콥터를 띄워 샅샅이 아주 많이 뿌립니다. 이러다 보니 풀벌레와 개구리가 거의 모조리 죽습니다. 논에 우렁이를 푼 곳이 있지만, 우렁이도 농약을 먹고 죽습니다. 나비와 벌이 자취를 감춥니다. 잠자리도 많이 줄었습니다. 날벌레와 애벌레를 먹고 살아가는 새도 여러모로 줄어듭니다.


  바람이 들려주는 노래는 있으나, 이밖에 다른 노래가 거의 없습니다. 무척 스산한 여름입니다. 시원하거나 싱그럽지 못한 여름입니다. 새와 개구리와 풀벌레가 노래하지 못하는 시골 들판이라면, 이곳에서 어떤 열매가 자랄까 잘 모르겠습니다. 바람이 나뭇잎을 간질이면서 찰랑거리기는 하나, 마을 언저리에서 나무를 구경하기도 어렵습니다. 마을 할매와 할배는 나무그늘을 싫어하기에 마을에 큰나무가 없습니다.



.. 그는 평생 동안 이렇듯이 자연에 열중했다. 오스트리아 알프스의 경치와 소리에 둘러싸여 작곡을 할 때 그는 가장 행복해 했다 … 아직까지 전해지는 이 작품들은 비록 가볍지만 앞으로 위대한 작품들이 탄생할 것임을 알리는 예고편이다. 이 곡들에서 이미 말러는 당대 표현 관습의 한계에 저항하고 있었다 … 슬픔은 말러가 진짜 자신의 목소리를 찾게 해 주었다 ..  (25, 35, 38쪽)



  자전거를 달려 골짜기로 갑니다. 그나마 멧골에 농약을 뿌리지는 않았으니, 숲으로 깃들 적에는 풀벌레 노래를 듣습니다. 여기에도 저기에도 풀벌레입니다. 귀뚜라미가 멧길에서 폴짝폴짝 뜁니다. 그리고 이곳과 저곳에서 멧새가 지저귑니다. 마을과 들에서 듣지 못한 다른 노래를 듣습니다.


  아이들과 골짝물에 온몸을 담급니다. 물이 흐르고, 바람이 불며, 나뭇잎이 서걱이는 동안, 풀벌레와 멧새가 웁니다. 바야흐로 큰 노래가 됩니다. 싱그럽게 살아서 숨쉬는 너른 교향곡이 이루어집니다.


  땀으로 옴팡 젖은 몸을 골짝물로 씻고 나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스티븐 존슨 님이 쓴 《말러, 그 삶과 음악》(포노,2011)을 읽습니다. 지휘를 하고 교향곡을 쓴 말러라는 사람을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말러라는 사람은 노래를 지으면서 “심판은 없다. 죄인도 의인도 없다. 대단한 것도 하찮은 것도 없다. 징벌도 보상도 없다. 벅찬 사랑의 느낌이 우리로 하여금 앎과 삶의 기쁨에 젖게 한다(75쪽).” 하고 글을 썼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직 그 누구도 이토록 오묘한 자연의 이면을 간파하지 못했어(95쪽).” 하고 말하기도 했답니다.


  《말러, 그 삶과 음악》을 읽으면, 말러라는 사람이 노래를 지으려고 혼자 들어간 조그마한 오두막 사진이 있습니다. 참말 자그마한 오두막인데, 오두막은 숲 한복판에 있습니다. 오두막 바로 앞에는 아주 커다란 나무가 우뚝 솟았습니다. 말러라는 사람은 이곳에서 노래를 짓다가 곧잘 바닥에 크게 드러누웠다는데, 크게 드러누워야 땅이 들려주는 기운을 잘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지요.



.. 이 해를 거의 빈 오페라 일에 매달려 보내면서 말러는 ‘세상의 소란’에 너무나 깊이 말려들어 있었다. 사랑과 음악과 조용한 땅에서의 평화에 자신을 내맡기고 싶어 하는 내용은 여름휴가가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말해 준다 … 제9번 교향곡에 죽음의 그림자가 떠돌긴 하지만 이것이 꼭 말러가 죽음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결말의 마지막 몇 마디에서 말러는 ‘우리는 아이들을 태양이 빛나는 언덕에서 다시 만나게 되리. 날씨 좋은 저 놓은 언덕 위에서’라는 가사를 담은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제4곡의 마지막 서정적인 프레이즈를 바이올린 선율에 실어 인용한다 ..  (122, 194∼195쪽)



  《말러, 그 삶과 음악》에는 시디가 두 장 함께 있습니다. 눈으로는 책에 적힌 이야기를 읽고, 귀로는 책에 깃든 시디를 틀어서 노래를 듣습니다. 말러라는 사람이 어떤 넋으로 노래를 지었는지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말러라는 사람이 가락에 담고 싶었다는 ‘숲노래’는 무엇이었을는지 가만히 귀여겨듣습니다.


  어디에서 바람이 불고, 어디에서 풀이 울며, 어디에서 풀벌레와 새가 지저귀는지 찬찬히 생각합니다. 어디에서 물이 흐르고, 어디에서 물결이 일며, 어디에서 구름이 흐르는지 하나하나 짚습니다.


  바람이 교향곡을 들려줍니다. 다만, 바람 혼자서 교향곡을 들려줄 수 없습니다. 바람을 쐴 풀벌레와 개구리와 멧새가 있어야 합니다. 풀을 아끼고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해님이 방긋 고개를 내밀고, 구름이 상긋상긋 웃으며, 비와 눈과 무지개가 골고루 어울려야 합니다. 달과 함께 별이 반짝이고, 아기를 달래는 어머니가 있어야 하며, 아이들과 숲놀이를 즐기는 아버지가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바람이 되어 노래를 짓습니다. 스스로 바람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노래를 듣습니다. 스스로 바람빛이 되어 노래를 부르고, 스스로 바람내음으로 거듭나면서 노래에 젖어듭니다. 4347.7.26.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꼬마요정 2014-07-27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날 우연히 말러교향곡 부활을 듣고 말러를 좋아하게 되었어요~ 몇 년전 지휘자 정명훈과 서울시립교향단이 말러2번 연주를 했는데 그 곳에 있던 친구가 그 연주를 들을 수 있어 행복하다.. 라더군요. 부럽게도 ㅎㅎ

숲노래 2014-07-27 10:44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시디로 듣고 나서
유투브로 알아보니
여러모로 노래를 듣기가 좋은 환경이 되었더군요~
인터넷은 이럴 때에 참 고맙구나 싶어요.


꼬마요정 2014-07-27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폰으로 처음 댓글 다는데 어렵네요ㅜㅠ 풀벌레도 없고 나무도 없다니.. 안타깝습니다.

숲노래 2014-07-27 10:44   좋아요 0 | URL
농약을 엄청나게 뿌려대니 풀벌레는 거의 다 죽고,
논이고 밭이고 마당이고 햇볕이 더 많이 들어오라면서
나무를 죄 베어서 없애니
길에도 마을에도 나무가 아주 드물답니다 ^^;;
 
낯선 정거장에서 기다리네
박원식 지음, 신준식 사진 / 리좀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76



간이역은 시골처럼 사라지네

― 낯선 정거장에서 기다리네

 박원식 글

 신준식 사진

 리좀 펴냄, 2005.9.13.



  지난해까지는 항공방제를 할 적에 이레쯤 앞서부터 면사무소에서 방송을 했습니다. 곧 항공방제를 할 테니, 항공방제를 하는 날에 장독 뚜껑을 닫고 창문을 닫으며 바깥에 돌아다니지 말라 했습니다. 그런데 올해에는 아무런 방송이 없이 항공방제를 합니다. 다만, 새벽 여섯 시에 마을 이장님이 방송을 합니다. 면사무소 방송이 아닌 마을방송입니다.


  지난해까지는 군청에서 ‘친환경농약’을 헬리콥터로 뿌렸습니다. 올해에는 우리 마을과 이웃한 여러 마을 모두 ‘친환경농업단지’에서 풀렸습니다. ‘기준치를 넘는 농약’이 나왔기 때문에 ‘친환경농업단지’에서 취소가 되었어요. 그러니, 올해에 농협중앙회에서 헬리콥터를 띄워서 뿌리는 농약은 ‘친환경농약’조차 아닌 ‘무시무시한 농약’입니다.


  무시무시한 농약을 뿌리는데 아무런 방송이 없습니다. 아마 그렇겠지요. 어느 시골에 가든 고추밭에 농약을 엄청나게 뿌립니다. 능금밭과 포도밭에도 농약을 엄청나게 뿌립니다. 감밭에도 농약을 뿌리고, 마늘밭과 배추밭과 파밭에도 농약을 끝없이 뿌립니다. 여느 시골사람이 ‘친환경조차 아닌 무시무시한 농약’을 뿌릴 적에 이웃집에 알리는 일이 없습니다. 이웃도 똑같이 그 무시무시한 농약을 아무 때나 뿌리니까요.



.. 하루 여덟 차례 열차가 멈추는 기차 정거장이다. 하염없이 작아서 하염없이 귀여운 간이역이다 … 상웅 유람을 한결 값지게 하는 건 마을 복판의 은행나무다. 6백여 년 풍진 세월을 쌩쌩히 견뎌 온 거목으로 하늘 가린 우듬지가 산덩어리만 하다 ..  (18, 63쪽)



  기차역이 줄어듭니다. 기차역이 서던 곳에서 살던 사람이 많이 줄었기 때문입니다. 늙은 사람도 줄고 젊은 사람도 줄며 어린 사람도 줄었기에 기차역이 줄어듭니다.


  이제 웬만한 군 하나는 웬만한 도시에 있는 아파트 단지 하나만도 못할 만큼 사람이 적습니다. 시골 군에서 면이나 읍에서 사는 사람 숫자는 그리 크지 않은 도시에 있는 그리 크지 않은 아파트 단지에서 사는 사람보다 훨씬 적습니다. 요즈음 시골에서는 면에 만 사람은커녕 천 사람조차 안 되기 일쑤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오늘날 시골에는 흙을 일굴 사람이 아주 모자랍니다. 오늘날 시골에는 논밭을 일굴 사람도 모자라지만,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다녀올 사람도 아주 크게 줄어듭니다. 게다가 기차역은 시골 면소재지를 지나가는 일도 드물고, 읍내에서 그리 가깝지도 않은 데에 있기 마련입니다. 늙어서 허리가 구부정한 할매와 할배가 기차역까지 걸어서 가기에도 벅찹니다.



.. 이런 승부역의 오지다운 고독을 노래한 어느 늙은 역원의 시 한 수가 전해진다. “승부역은 하늘도 세 평, 꽃밭도 세 평”이라 읊은 … 시장통 선술집에도 점심 겸 낮술을 펼치는 남자들 몇몇이 둘러앉아 뭔가 열변을 토한다. 차 꾸러미를 들고 나온 다방 여종업원이 오토바이를 타고 어디론가 급하게 내달린다 ..  (96, 152쪽)



  고흥에서는 기차를 타려면 이웃 순천시로 갑니다. 순천시 기차역은 꽤 크다 할 만합니다. 고속철도 지나가니까요. 그렇지만, 순천시 기차역을 드나드는 사람은 순천시 버스역을 드나드는 사람과 대면 아주 적은 듯합니다. 순천 기차역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도 얼마 안 돼요.


  우리 집 아이들이 버스 멀미를 고단하게 하느라 가끔 기차를 탈 적에 곰곰이 생각합니다. 아직 전라도에서 곡성이니 구례이니 남원이니 하는 데에서 기차가 서지만, 머잖아 이런 곳에 기차가 설 일도 없지 않을까 하고. 도시사람이 곡성이니 구례이니 남원이니 놀러가니까 기차가 서지, 그곳 사람들 숫자만으로 기차가 설 일은 참 드물지 싶습니다.


  이제 몇 군데 굵직한 기차역이 아니라면 모두 작은 역으로 바뀌는구나 싶습니다. 예전 간이역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작은 역은 간이역이 되며, 꽤 커다랗던 역은 작은 역으로 되지 싶어요.


  도시에서 사람들이 기차를 타고 간이역으로 찾아간다고 하는데, 간이역으로 나들이를 하면서 어떤 ‘정취’나 ‘추억’을 받아먹을는지 모릅니다만, 정작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 눈길로 보자면, 온통 도시만 키우는 개발정책과 문화정책과 교육정책인 흐름에서, 무엇을 바라나 아리송하곤 합니다.


  도시에서도 그렇거든요. 도시에 있는 예쁘장한 골목을 밀어붙여서 아파트로 바꾸려는 개발정책입니다. 작은 사람이 돌보는 작은 집이 있는 작은 마을 하나쯤 아무렇지 않게 없애려 하는 문화정책이고 사회정책이며 복지정책입니다. 이 나라 교육정책은 아이들이 도시로 가도록 내몰고, 더 큰 도시로 가도록 밀어붙입니다.



.. 이와 비슷한 사연을 가진 소나무가 강원도 정동진역의 ‘고현정 소나무’라는 물건일 것이다. 그런데 이 ‘고현정 소나무’는 관광 재료로써 기절할 만한 진가를 발휘해 정동진의 팔자를 일거에 뒤집어버렸다. 반면 ‘김영애 소나무’는 이렇다 할 이름값을 하지 못했다. 이렇다 할 이름값을 하지 못함으로써 오히려 이 지역의 평온을 유지케 하는 데 이바지했다. 둘레의 자연상을 온존시키는 데 기여했다 ..  (222쪽)



  박원식 님이 글을 쓰고, 신준식 님이 사진을 찍은 《낯선 정거장에서 기다리네》(리좀,2005)를 읽습니다. 그야말로 자그마한 간이역을 애틋하게 바라보는 눈길로 글과 사진을 빚어서 엮은 책입니다. 간이역처럼 참 이쁘장한 책이라고 느낍니다. 이렇게 작은 이야기를 읽히면서 우리 사회가 새롭게 태어난다면 아주 아름답겠구나 싶습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어디를 바라보느냐 하는 대목을 살피면, 고개를 젓고야 맙니다. 누가 누구를 바라보느냐 하는 대목을 읽으면, 고개를 갸우뚱하고야 맙니다.


  간이역이나 작은 기차역이 있는 ‘시골’은 어떤 곳일까요. 시골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굳이 간이역이나 작은 기차역을 사진으로 안 찍습니다. 굳이 간이역이나 작은 기차역을 문화유산으로 삼지 않습니다. 간이역보다 훨씬 오래된 집이 마을마다 많이 있습니다. 간이역보다 아주 오래된 우물과 샘터가 마을마다 있습니다. 간이역보다 엄청나게 오래된 나무와 숲과 들이 마을마다 있습니다.


  우리들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말하며 무엇을 남기려 하는가요. 우리들은 어디에서 살고 어디에서 사랑하며 어디에서 이야기꽃을 피우려 하는가요. 4347.7.2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집으로 가는 길 - 삶에 지친 한 남자와 일곱 천사의 이야기
리 캐롤 지음, 오진영 옮김 / 샨티 / 201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읽기 삶읽기 165



우리 집은 바로 이곳

― 집으로 가는 길

 리 캐롤 글

 오진영 옮김

 샨티 펴냄, 2014.6.30.



  우리 집은 늘 이곳입니다. 저곳도 그곳도 아닌 이곳입니다. 이곳은 바로 여기입니다. 저쪽도 그쪽도 아닌 이쪽입니다. 저 먼 나라가 아닌 바로 이곳에 우리 보금자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찾는다고 할 적에도 먼 곳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예배당이나 성경에서도 하느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바로 이곳, 그러니까 내 가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나는 내 하느님을 내 가슴에서 찾고, 너는 네 하느님을 네 가슴에서 찾습니다.



.. “나는 오직 당신이 보고 싶은 대로만 보일 거예요, 마이클 토마스. 나는 원래 인간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에, 당신이 편하게 느낄 수 있는 모습으로 나를 소개하고 있는 거예요. 하지만 모든 천사가 남성은 아니에요. 사실 우리에겐 성별이 없어요. 날개도 없고요.” … “당신은 자신이 정말 누구인지 전혀 모르고 있어요. 마이클 토마스.” 천사가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아름답게 보이나요? 당신의 참된 모습을 한번 봐야 해요! 언젠가는 보게 될 거예요.” ..  (25, 30쪽)



  언제부터일는지 모르겠으나, 꽤 먼 옛날부터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이들 하나하나는 모두 하느님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이라 하는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된 뒤에는, 이 어른을 두고 하느님이라 일컫는 이야기는 거의 없습니다.


  어릴 적부터 이런 말이 참 아리송했어요. 아이들을 하늘처럼 섬겨야 한다면, 어른들도 똑같이 하늘처럼 섬겨야 맞아요. 하늘과 같은 아이들이 자라 하늘과 같은 어른으로 살아야 맞아요.


  나한테는 우리 집 아이가 하느님과 같습니다. 아니, 나로서는 우리 집 아이한테 깃든 ‘네 하느님’을 마주합니다. 내 이웃 아이라면 이웃 어버이가 돌보는 아이한테서 ‘그 아이 하느님’을 마주합니다.


  아주 마땅한 노릇인데, 가슴속에 깃든 님을 읽을 수 있다면, 우리 삶은 언제나 사랑이요 평화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가슴속에 깃든 님을 읽지 않는다면, 우리 삶은 언제나 싸움이나 겨루기나 미움입니다.


  오늘날 흐름을 보셔요. 한국 사회나 경제나 교육이나 정치나 문화가 어떤 모습인가요? 사랑인가요? 평화인가요? 아닐 테지요. 한국에서 으레 보는 모습은 싸움이나 겨루기나 미움입니다. 그러니까, 한국이라는 나라는 아이를 아이 그대로 바라보지 않을 뿐 아니라, 어른한테도 어른인 숨결 그대로 마주하지 않는 셈입니다.



.. “대답은 당긴 가슴속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와야 해요. 그리고 당신을 비롯해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크게 말해야 해요.” … “당신의 의도가 현실을 바꾸고 있는 거예요.” … “인간이 깨달음을 얻는 데는 기본 원칙이 있지요. 우선 자신을 먼저 신경 쓰고, 그렇게 자신의 영적 여정을 존중하다 보면 주위 사람에게도 그런 일이 동시에 발생한다는 거예요. 한 사람의 의도는 항상 많은 이에게 영향을 미치니까요.” ..  (31, 34, 66쪽)



  아이들 가슴속에 깃든 빛이 하느님인 줄 알아차린다면, 아이들을 입시지옥으로 내몰 수 없습니다. 거꾸로, 아이들 가슴속에 깃든 빛이 하느님인 줄 알아차리기에, 이 아이들이 앞으로 이룰 사랑과 평화를 거스르고자, 아이들 가슴속에 깃든 하느님을 지우려는 제도권교육을 밀어붙일 수 있어요. 사회와 경제와 문화와 교육과 정치가 모두 쳇바퀴 같은 틀에 갇혀야, 비로소 권력이 생기고 자본주의가 불거지며 종교를 세울 만해요. 사람들이 우루루 예배당에 몰려들어야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이 커집니다. 사람들이 아이들을 그저 학교와 학원에 집어넣어야 사회권력과 문화권력이 활개를 칩니다.


  곰곰이 따질 줄 아는 머리와 가슴이 있다면, 우리 스스로 언제나 빛이요 님이며 하늘이기에, 우리가 우리를 스스로 제대로 읽는 하루를 누리면서, 삶을 날마다 새롭게 지을 수 있습니다. 내가 빛이니 늘 스스로 밝습니다. 내가 님이니 언제나 스스로 아름답습니다. 내가 하늘이니 노상 스스로 즐겁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좀처럼 깨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좀처럼 빛을 바라보려 하지 못합니다. 하느님을 나 아닌 다른 데에서 찾기만 합니다. 예배당에 끝없이 갇히려 하고, 성경에 끝까지 얽매이려 합니다. 학교에 안 가면 바보가 되는 줄 알지만, 정작 학교에 가기 때문에 바보가 됩니다. 사회에 내 몸을 맞추지 않으면 따돌림받는 줄 알지만, 정작 사회에 내 몸을 맞추려 하니까 따돌림받습니다. 책을 읽거나 대학교까지 마쳐야 지식을 쌓아 똑똑해지는 줄 알지만, 정작 책을 읽거나 대학교까지 마치기에 지식이 무엇인지 더 모를 뿐 아니라 더 ‘안 똑똑해’집니다. 돈을 벌어야 살림을 꾸릴 수 있는 줄 알지만, 정작 돈을 벌고 또 벌어도 자꾸 돈만 더 벌려고 할 뿐, 살림을 꾸리거나 이웃사랑이나 두레는 하지 못합니다.



.. “우리에겐 과거나 미래가 없어요.” … “지식이 있는 곳에는 어둠이 존재할 수 없어요. 빛이 있는 곳에 비밀은 있을 수 없고, 빛은 지식의 탐구를 통해 진리가 드러날 때 생겨나죠.” … “당신은 기회가 왔을 때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마이클 토마스. 그래서 스스로 교훈을 배워야 했죠.” …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는 건 그들과 함께한 순간의 에너지 때문이지 옛날의 물건 때문이 아니에요.” … “신은 거짓말을 하지 못해요. 신은 무언가를 싫어할 수 없어요. 신은 사랑밖에는 할 수 없으므로 사랑이라는 범위 바깥에서 공평한 결정을 내릴 수가 없어요.” ..  (80, 90, 111, 112, 218∼219쪽)



  리 캐롤 님이 쓴 《집으로 가는 길》(샨티,2014)을 읽습니다. 이 책은 스스로 안 깨달으며 바보처럼 톱니바퀴가 되어 제도권 사회에 노예처럼 길들여진 사람이 스스로 굴레에서 헤어나오려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바보처럼 길든 사람은 언제 굴레에서 헤어나오려 할까요? 언제일까요? 바로, 죽음을 앞둔 때입니다. 죽음을 앞두고서야 비로소 ‘두 손에 쥐었다’고 여긴 것 가운데 어느 한 가지도 손에 쥐지 않았고 쥘 수조차 없은 줄 깨닫습니다. 그런데, 죽음을 앞두었으니 아무것도 못해요. 그냥 죽을 뿐이에요.


  그냥 죽으면 어찌 될까요? 흙으로 갈까요? 몸뚱이는 흙으로 갈는지 모르나, 요새는 우리 몸뚱이가 흙으로 가지도 못해요. 이곳저곳 온통 막개발 막공사가 퍼지는 사회에서, 사람 몸뚱이는 흙으로 못 가고 한 줌 재가 될 뿐입니다. 그러면, 몸에 깃들던 넋은 어디로 갈까요? 갈 곳을 잃어요. 예배당에 얽매였던 사람이라면 예배당에서 시킨 대로 얌전히 저승 한쪽에 드러누운 채 ‘언젠가 찾아올 하느님’을 기다립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바로 우리 가슴에 있고, 우리 모두 스스로 하느님이니, 우리한테 찾아올 하느님은 없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깨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늘 잠든 몸이면서 마음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노예이면서 톱니바퀴 노릇만 합니다.


  죽음을 앞둔 자리에서조차 깨닫지 못하면, 똑같은 삶을 다시 되풀이해요. 똑같은 삶을 다시 되풀이하면서 괴롭게 지내다가, 다시 죽음 문턱에서 ‘내가 왜 살지?’ 하고 묻지만, 다시 죽고 다시 태어나면서 두고두고 고단한 흐름이 이어지기만 합니다.



.. “인체의 모든 세포에 신을 자각하는 의식이 있어요. 그래서 세포 하나하나가 깨달음과 사랑을 경험할 수 있고, 진동의 변화를 추구할 수 있는 거죠.” … “마이클, 내가 치유하도록 허락하지 말고, 치유 자체가 이루어지도록 허용해 봐요.” … 그는 신을 사랑했고 교회가 신성한 곳이라고 느꼈지만, 그는 늘 자신이 목자를 따르는 양이라는 소리만 들었다. 그 어떤 교회의 교사도 그에게 인생을 스스로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알려주지 않았다 ..  (123, 125, 188쪽)



  이야기책 《집으로 가는 길》은 모든 실마리를 밝히지는 않습니다. 아주 작은 한 가지만 건드립니다. 내 가슴속에 깃든 빛과 님과 하늘을 스스로 바라보지 않고, 느끼지 않으며, 깨닫지 않을 적에는 내 삶이 무너질밖에 없다는 대목 한 가지를 건드립니다. 더없이 작은 조각 같은 지식입니다만, 바로 이 작은 조각을 참된 지식으로 품을 수 있을 때에 눈을 뜹니다. 이 작은 조각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면, 어느 누구도 눈을 뜨지 못합니다.


  눈을 뜰 때에 집으로 갈 수 있고, 눈을 뜨기에 보금자리를 사랑할 수 있으며, 눈을 뜨는 날부터 삶을 새롭게 엽니다. 눈을 뜨지 않는 사람은 어디에 있어도 가시방석이면서 고단합니다. 눈을 뜨지 않기에 ‘사랑할 만한 보금자리’를 찾지 못합니다. 눈을 뜨도록 스스로 마음읽기를 하지 않으니, 새로 찾아오는 아침에 새로운 웃음으로 노래하지 못하고 자꾸 ‘지겹다’고 여깁니다. 4347.7.16.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이 책을 읽고 무언가 느낄 수 있다면, 무언가 느끼기 어렵다면, 《아나스타시아》(블라지미르 메그레) 일곱 권과 《람타 현실창조를 위한 입문서》(제이지 나이트)와 《람타 화이트북》(제이지 나이트)을 꼭 읽어 보기를 바랍니다. '아나스타시아'와 '람타'를 슬기롭게 마주할 수 있다면, 삶을 가꾸는 빛이 어디에 있고 어떻게 다스리는가를 제대로 익혀서 하루를 밝힐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로운 독재와 싸울 때다 -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 이야기 철수와 영희를 위한 대자보 시리즈 2
김인국.손석춘 지음 / 철수와영희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72



민주선거로 독재자를 뽑는 나라

― 새로운 독재와 싸울 때다

 김인국·손석춘 이야기

 철수와영희 펴냄, 2014.5.18.



  한국말사전에서 ‘독재(獨裁)’를 찾아보면 “특정한 개인, 단체, 계급, 당파 따위가 어떤 분야에서 모든 권력을 차지하여 모든 일을 독단으로 처리함”을 뜻한다고 나옵니다. 다시 ‘독단(獨斷)’이라는 낱말을 찾아보면 “남과 상의하지도 않고 혼자서 판단하거나 결정함”을 뜻한다고 나옵니다.


  이로 미루어 보면, 한국 현대사에서 이승만이나 박정희나 전두환이나 노태우 같은 이들은 틀림없이 독재입니다. 이들 뒤를 이은 김영삼이나 김대중이나 노무현 같은 이는 어떠할까요. 그리고 이명박이나 박근혜 같은 이는 어떠하나요. 한국 현대사에서 대통령 자리에 선 이들 가운데 너른 목소리를 귀여겨들으며 정치를 펼친 이는 몇이나 될는지요.


  더 헤아려 보면, 조선 왕조도 독재라고 일컬을 만합니다. 양반이라는 신분으로 계급을 나누던 사회도 독재라고 할 만합니다. 신분과 계급에 따라 질서를 세우는 정치나 사회란 틀림없이 독재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보지 않으면서 억누르거나 짓누르는 모든 틀은 독재입니다.



.. 교회가 바라는 바는 오직 한 가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투거나 미워하는 일 없이 다정하게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제발 아프게 때리고 찌르고, 뜨겁게 지져대지 말고 서로 도우며 착하게 살자는 것뿐입니다 … 원래 개도 안 물어 가는 물건이 돈인데, 돈 많은 사람들은 돈 때문에 “박근혜! 새누리!” 그러고, 돈 없는 사람들도 돈 때문에 “박근혜! 새누리!” 그런단 말입니다 … 1970년대에는 신부들만 해도 참 씩씩하고 자유로웠어요. 그런데 가난하던 교회 살림에 여유가 생기면서 신부들도 잘 안 움직이거든요.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겠어요? 돈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어요 ..  (5, 80, 81쪽)



  지난날에는 씨받이로 독재정권을 물려주었습니다. 지난날에는 사람들한테 ‘임금님 바라보기’만 시켰습니다. 오늘날에는 민주선거로 독재자를 뽑습니다. 오늘날에는 사람들한테 ‘대통령 바라보기’를 시킵니다.


  곰곰이 생각할 노릇입니다. 선거를 할 수 있기에 민주라고 할 만한가요. 선거하는 곳에 몽둥이나 총칼을 쥔 군인·경찰이 없으면 민주라고 할 만한가요. 국가보안법이 버젓이 있는 이 나라가 민주라고 할 만한가요. 이웃나라에서 핵발전소가 터지며 끔찍한 일이 벌어져도 핵발전소를 멈추지 않을 뿐 아니라, 새 핵발전소를 더 지으려 하는 이 나라 정치와 경제와 사회 얼거리가 민주라고 할 만한가요.


  주권이 사람들한테 있으니 ‘민주’라지만, 아직 한국에서는 주권이 여느 사람들한테 있지 않습니다. 아직 한국에서는 주권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시장이나 군수나 이런 권력자한테 있습니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주권이 재벌한테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주권이 건물임자나 집임자나 땅임자한테 있습니다. 여느 사람이 누리는 주권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더더구나 한국에서는 주권을 기자와 지식인과 작가와 교수가 거머쥐기도 합니다.



.. 그 사람들은 고엽제 피해가 우리 때문에 생긴 줄 아는 걸까요? 우리가 자기들 월남에 보내고, 자기들 머리 위에 살인적인 고엽제를 마구 뿌려서 그런 몹쓸 불행이 벌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물어 보고 싶어요 … “정의구현사제단은 사제복을 벗어라!” 이게 단골 구호예요. 그러면서 자기들은 여태껏 군복을 안 벗어요. 팔십 노인들이 말입니다. 제대한 지가 벌써 오십 년이 넘는데 … 사람들이 지금 선거부정을 몰라서 안 움직이는 게 아닐 겁니다. 저마다 크고 작은 욕망 때문에 안정을 희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난 선거에서도 나타난 결과입니다. 자기 작은 이익만 지키면 내어줄 수 있는 것 다 내어주겠다는 게 지금 민심인데 저희가 그런 마음에 일일이 보조를 맞출 순 없어요 ..  (14∼15, 15, 23쪽)



  한국에서 농사짓는 시골사람한테 주권이 없습니다. 농사꾼이 농협에 쌀과 곡식과 열매를 안 팔 수 있는 권리가 없습니다. 농사꾼이 시골에서 농약이나 비료나 항생제를 안 쓸 수 있는 권리가 없습니다. 농사꾼이 시골에서 비닐과 기계를 안 쓸 수 있는 권리가 없습니다.


  한국에서 공장 일꾼이나 사회 일꾼한테 주권이 없습니다. 공장 일꾼인 노동자가 파업을 할 권리가 없습니다. 노동자가 버스를 멈추거나 철도를 멈출 권리가 없습니다. 노동자가 가게를 닫거나 발전소를 멈추거나 전화국을 닫거나 수돗물을 끊거나 회사를 쉴 권리가 없습니다.


  한국에서 아이들한테 주권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학원에 안 갈 권리가 없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안 갈 권리가 없습니다. 아이들이 대입시험 지옥에서 벗어날 권리가 없습니다. 아이들이 교과서를 외우지 않아도 될 권리가 없습니다. 아이들이 텔레비전과 인터넷게임에서 홀가분할 권리가 없습니다.



.. 함부로 살아도 제 이익만 지킬 수 있다면 된다는 마음이 너무나 커졌어요 … 사제들은 대중이 듣고 싶어 하는 말보다, 대중이 들어야 할 말을 해야 하는 운명이라서 너무 앞질러간다는 소리를 듣더라도 할 수 없습니다 … 우리의 일차 임무는 대선 무효, 대통령 해고를 선언하는 일입니다. 대통령이 스스로 물러나든 권좌를 고집하든 그것은 당사자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각자 심판받을 일입니다 … 대통령이든 시민이든 나중에 역사의 법정 앞에서 책임져야 합니다 … 백성들이라고 힘없이 당하는 일방적인 피해자이기만 하지 않다는 거죠. 권력자들의 악행을 보았으면 대들어야 합니다 … 그런데 사람들이 진실을 들어도 그것을 마주하려고 하지 않아요. 이를테면 박정희가 친일을 한 사실, 애꿎은 사람들을 죽인 사실, 수많은 성적인 탈선을 한 사실, 뭐 이런 사실을 얘기해 줘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아요 ..  (39, 40, 82쪽)



  민주선거로 독재자를 뽑는 나라입니다. 민주선거로 독재자가 태어나는 나라입니다. 대통령은 청와대에 갇힌 채 바깥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국회의원이 달셋방에서 지내며 이웃을 사귀는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시장이나 군수가 다세대주택에서 층간소음을 겪으며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법관이나 변호사가 저잣거리에서 저잣마실을 하고는 집에서 아이들한테 밥을 차려 줄까요? 집에서 빨래는 누가 할까요? 집에서 청소는 누가 할까요? 어린 아이들은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척척 집어넣기만 하면 될까요?


  마을살림은 어떻게 돌보아야 할까요? 두레나 품앗이란 무엇일까요? 경제성장이나 경제발전이란 무엇일까요? 4대강 사업은 무엇을 하려는 짓이었나요? 시화호와 새만금은 어떤 지식인과 교수가 앞장서서 밀어붙인 짓이었나요?


  쌀개방이나 자유무역협정을 할 적에, 농사꾼 목소리를 한 마디라도 담은 적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새마을운동을 벌일 적에, 시골사람 목소리를 한 마디라도 들은 적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시골 젊은이를 죄 도시로 빼앗아 공장 일꾼으로 값싸게 부려먹은 사회와 정치와 교육 얼거리는 누구 머리로 지었는지 궁금합니다.



.. 지금 염수정 추기경은 복음이 갖고 있는 현실적이고도 사회적인 측면을 포기하라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 만일 추기경이 바라는 대로 살아가게 되면 우리는 교황이 개탄해 마지않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무관심의 세계화에 풍덩 빠지고 말 겁니다 … 송구스럽습니다만 추기경은 현실을 제대로 보시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속은 썩었는데 껍데기만 보고 좋다고 하시는 거지요 … 새 교황이 나왔지만 구태에 찌든 사람들은 여전히 곳곳에 포진하고 있습니다 … 교회 지도자들의 언어가 이상한 별나라에서 들려오는 말처럼 알아듣기 힘들 때가 많습니다 … 글 쓰고 말하는 언론인들도 사람인데 왜 무섭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언론인의 펜은 두 마리의 개를 감시하라는 펜이지 아부하라는 펜이 아닙니다 ..  (47, 49, 54, 64, 94쪽)



  《새로운 독재와 싸울 때다》(철수와영희,2014)라는 책을 읽습니다. 옥천성당지기인 김인국 님하고 대학교수 일을 하는 손석춘 님이 주고받은 이야기로 엮은 책입니다. 성당지기는 성당에서 사회를 읽고, 성당 바깥으로 나와서 사람을 읽습니다. 성당지기는 ‘새로운 독재’가 이 나라에 굳세게 버틴다고 느끼는 한편, 천주교회에서도 ‘새로운 독재’가 무시무시하게 버틴다고 느낍니다.


  독재란 무엇일까요. 독재를 하는 마음은 무엇일까요. 독재를 하면 독재자는 얼마나 즐거울까요. 독재를 하는 보람은 얼마나 누릴 만할까요. 독재자는 목숨이 다해서 죽는 날에 어떤 마음이 될까요.


  독재를 부추기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독재를 이끄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독재를 부르는 사람은 누구일는지요. 독재가 멈추지 않도록 불러들이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 교황이 아직도 교황궁에 들어가지 않고 여러 신부들과 함께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구중궁궐에 갇혀 세상과 영영 멀어질까 봐 안간힘을 쓰시는구나 싶던데요 … 123년 전에 이미 교회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걱정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세계에서 가장 고약한 천민자본주의 체제 아래 살고 있는 우리는 자본주의에 대해서 아무런 성찰을 안 했어요 … 찾아가는 곳마다 삼성을 비롯한 재벌들의 자본이 일을 벌이고 있는 거예요. 용산에서 삼성물산을 봤는데, 4대강 사업 공사현장에 가도 삼성, 제주 강정에 가 봐도 삼성이 있어요 … 경상도에 가서 새누리당 찍지 말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생활 안에서 되도록 삼성과 거리를 두도록 하자는 게 무척 어렵겠지요. 신자들이라고 다르지 않아요. 우리 일상 전반을 워낙 공고하게 지배하는 삼성이니까요. 삼성카드 쓰지 말자, 삼성 갤럭시 쓰지 말자고 하면 깜짝 놀라요 ..  (69, 71, 78, 79쪽)



  오월비가 내립니다. 오월에 내리는 비는 갓 모내기를 마친 논에 포근히 감겨듭니다. 오월에 내리는 비는 모내기를 앞둔 논에 살뜰히 스며듭니다. 오월에 내리는 비는 보리베기를 앞둔 들에 싱그러이 젖어듭니다.


  빗물은 어디에나 골고루 떨어집니다. 빗물은 들과 숲에도, 고속도로와 발전소 지붕에도 골고루 떨어집니다. 빗물이 흙으로 스며들면서 맑은 숨결이 되고, 빗물을 머금은 흙은 더욱 기운을 내어 풀과 나무가 푸르게 자라는 밑힘이 됩니다. 비가 그친 뒤 해가 나면서 들과 숲은 한껏 빛나고, 하늘과 구름은 한결 맑아요.


  삶이란 밝은 빛이고 맑은 숨결입니다. 사랑이란 밝은 노래이고 맑은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서로서로 아끼고 보살피면서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두레와 품앗이로 어깨동무하면서 살림을 가꿉니다.


  민주라 한다면, 참다운 민주라 한다면, 빗물과 같은 틀을 빚습니다. 착한 민주요, 아름다운 민주라 한다면, 햇볕처럼 따스하고 흙처럼 고소한 얼거리를 이룹니다. 즐거운 민주요 기쁜 민주라 한다면, 들과 숲처럼 사람살이를 살찌우는 밑바탕이 될 테지요.



.. 어머니는 지금까지 제가 세상 속으로 뛰어들 때마다 하느님이 시키신 일 하느라 고생한다고 격려하세요 … 강물처럼 유장한 역사 안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신앙이 켜켜이 쌓이고 쌓인 끝에 맺어진 열매가 예수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의 씨가 물려지고 물려진 끝에 가장 아름답게 싹튼 자리가 예수의 몸입니다 ..  (89, 91쪽)



  민주선거로 민주를 이루려면 우리 보금자리가 언제나 민주여야 합니다. 민주선거로 민주를 빛내려면 우리 살림살이가 늘 민주여야 합니다. 참다운 민주가 이루어지는 마을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가 어른이 될 때에 민주를 한껏 북돋웁니다. 착한 민주로 즐거운 마을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가 어른이 될 적에 민주를 더욱 살찌웁니다.


  훌륭한 지도자는 하늘에서 똑 떨어지지 않습니다. 수수한 사람들이 수수한 삶터를 수수하게 가꾸는 마을에서 아름다운 어른이 자라요. 수수한 사람들이 수수한 슬기롤 빛내어 일구는 마을에서 사랑스러운 어른이 살아요.


  민주를 이룬 마을이라면 우두머리가 없어도 됩니다. 모든 마을사람이 저마다 마을지기입니다. 민주를 이룬 나라라면 우두머리, 이를테면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한 사람조차 없어도 됩니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지기이고 님이며 하느님입니다.


  대통령은 아무나 할 수 없다지만, 대통령은 누구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황이나 추기경이나 주교나 신부는 아무나 될 수 없다지만, 교황이나 추기경이나 주교나 신부는 누구나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남산에서 돌을 던져 맞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도 아름다운 나라살림이 될 때에 나라가 아름답습니다. 지리산에서 돌을 던져 맞은 사람이 시장이 되고 군수가 되며 뭣뭣이 될 때에 나라가 사랑스럽습니다.


  무엇을 보아야 할까요. 무엇을 읽어야 할까요.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보아야 한다면 늘 하나를 보아야 합니다.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읽어야 하면 오직 하나를 보아야 합니다. 삶을 보아야 합니다. 알아야 하면 누구라도 하나를 알아야 해요. 사람을 알아야 합니다.


  꽃을 보아요. 풀을 읽어요. 나무를 배워요. 하늘을 보아요. 흙을 읽어요. 냇물을 배워요. 숲을 보아요. 들을 읽어요. 바람을 배워요.



.. 슬픈 일은 대통령만 〈조선일보〉의 논설과 칼럼을 보는 게 아니라, 우리 교회의 고위급 성직자들도 그렇다는 거예요. 그들에게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 되는 신문은 조중동 딱 세 개로 국한됩니다 … 사람들이 성경의 눈으로 신문을 보게 될까요? 아니면 신문의 눈으로 성경을 보게 될까요 … 텔레비전 드라마나 재미있는 프로그램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쌍용자동차나 기륭전자, 국정원의 대선개입에 관심 없게끔 만드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어 보여 안타깝습니다 .. (95, 97쪽)



  어리석은 독재 정치에 사로잡힌 나머지 즐겁거나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운 길하고 동떨어진 슬픈 이웃을 바라봅니다. 바보스러운 독재 정치에 길든 탓에 참답거나 착하거나 넉넉한 삶하고 등진 아픈 이웃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언제 웃을까요? 즐거울 때에 웃겠지요. 이웃이 아프거나 힘들 때에 웃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 노래할까요? 기쁠 때에 노래하겠지요. 이웃이 슬프거나 고단할 때에 노래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늘 웃습니다. 아픈 이웃을 달래면서 웃음을 되찾도록 웃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노래합니다. 슬픈 이웃을 다독이면서 노래를 되찾도록 노래합니다. 웃음은 웃음을 낳고 노래는 노래를 낳습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고 꿈은 꿈을 낳아요.


  왜 자꾸 독재자가 ‘민주선거’로 뽑힐까요. 우리는 왜 ‘민주선거’를 치르면서도 독재자를 뽑고 말까요. 바로, 우리 삶이 아직 민주가 아니고 평화가 아니며 자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삶을 민주와 평화와 자유로 가다듬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참민주로 선거를 하고, 참다운 이슬떨이를 뽑아서 일을 맡길 수 있습니다. 심부름꾼이 되려는 정치 지도자가 나오려면 온누리에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흐를 수 있어야 합니다. 4347.5.20.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극곰 2014-05-21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만 읽어도 마음이 아픕니다. -,.-!!

숲노래 2014-05-21 16:24   좋아요 0 | URL
이제껏 이런 '민주선거'를 되풀이했는데,
이번에는 그칠 수 있을는지 궁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