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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 그해, 내게 머문 순간들의 크로키, 개정판
한강 지음 / 열림원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작은 이야기, 작은 삶, 작은 책
 [책읽기 삶읽기 83] 한강,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열림원,2003)



 소설을 쓰는 한강 님이 쓴 산문을 모은 책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열림원,2003)을 읽는다. 책 판짜임은 자그마한데 빈자리 많고 글씨를 아주 큼지막하게 박아서 나온, 종이를 참 많이 잡아먹으면서 쪽수를 잔뜩 늘린 책을 읽는다.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은 원고지로 치면 몇 장쯤 될까. 300장이나 될까. 300장은 넘을까. ‘작은 이야기’를 억지스레 책 하나로 꾸민 셈 아닌가 싶다. 굳이 책 하나로 따로 묶을 까닭은 없을 텐데, 왜 이렇게 내야 했을까 궁금하다. 반드시 이 이야기를 책으로 내놓아 사람들하고 나누어야 한다고 여겼을까 아리송하다.

 원고지로 몇 장 안 된다면, 말 그대로 작은 책으로 꾸미면 된다. 쪽수는 더 적고 부피는 더 적으며 책값은 훨씬 눅은 작은 책으로 엮으면 된다. 한 권에 5000원이나 3000원 값을 붙이는 자그마한 책으로 만들면 된다. 뒷주머니에 꼽을 수 있게끔 작게 만들면 된다. ‘작은 이야기’라 해서 책으로 만들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작은 이야기’는 작은 이야기대로 ‘작은 책’으로 일굴 때에 참말 아름다우면서 뜻깊으니까.


.. 우리는 버스의 중간쯤에 나란히 앉았다. 그녀는 한국어에 대해 물었고 영어를 중고등학교에서 배운다고 내가 설명하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한테도 영어는 모국어가 아냐. 보호구역의 미션스쿨에서 배웠지. 내가 아파치말을 쓸 때마다 수녀들이 날 때렸어……. ‘노 아팟치!’ ‘노 아팟치!’ 하면서. 한 수녀는 내 새끼손가락을 세 번 분질렀어.” ..  (10쪽)


 한강 님이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에 담은 이야기는 한강 님 삶이라기보다, 한강 님이 미국에서 문학을 새롭게 배울 때에 만난 사람들한테서 ‘얻은 삶 이야기’이다. 스스로 더 깊이 깨닫거나 느끼거나 헤아린 이야기는 아니다. 둘레에서 저마다 다 달리 살아가는 사람들 다 다른 말과 넋과 꿈을 담아서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곰곰이 돌이킨다. 한강 님 스스로 일구는 이야기조차 아닌, 다른 사람 입을 거쳐 나온 이야기로 가득 채우는 책을 ‘한강 산문모음’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가.

 이렇게 보든 저렇게 보든,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은 책 하나로서 그닥 아름답지 못하다. 예쁘지 못한 모습으로 태어나고 만 책이다. 글쓴이 삶도, 출판사 뜻도, 썩 사랑스레 어우러지지 못한 채 태어났다고 느낀다.


..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9·11 때 파괴된 게 무역센터가 아니라 센트럴파크였다면 뉴욕사람들은 결코 극복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 거대한 초록빛 허파가 아니라면 이 도시는 견뎌낼 만한 공간이 못 돼요.” 캐런만이 쓸 수 있는 편지, 솔직하고 쓸쓸한 문장들 앞에 나는 잠시 막막해졌다 ..  (26쪽)


 예쁘지 않은 꽃은 없다고 으레 말하는데, 옳게 말하자면, 이 말 “예쁘지 않은 꽃은 없다”는 터무니없는 소리이다. “꽃은 꽃 그대로 예쁘다” 하고 말해야 옳다.

 예쁘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모든 사람 그대로 예쁘다. 얼굴이 잘생기고 못생기고를 가르는 자리가 아니다. 사람은 사람이기에 이 결 그대로 예쁘다. 꽃은 꽃이기에 이 모습 그대로 예쁘다.

 책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어느 책이건 예쁘다. 한강 님 산문모음은 이 산문모음대로 예쁘다. 나는 오직 이 까닭 하나 때문에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을 장만해서 읽는다. 글쓴이를 더 좋아한다거나 출판사를 더 아낀다거나 문학을 더 즐긴다거나 하는 까닭이 아니다. 그예 예쁜 책 하나를 새로 만나 기쁘게 살아가고 싶기에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을 장만해서 읽는다.

 전라남도 고흥에서 일산을 거쳐 인천으로 갔다가 다시금 일산으로 갔다가는 고흥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을 금세 읽는다. 책은 인천에서 산다. 일산에서 시외버스 타러 전철을 먼저 타고 서울로 접어들 무렵 후루룩 읽고는 덮는다. 글이 짧다고 금세 읽어치우지는 않지만, 더디 읽을 수는 없는 책이다.


.. 외국어로 말하고 외국어로 읽고 외국어로 쓰는 생활. 밤과 아침이면 긴 일기와 편지를 썼지만 모국어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에는 부족했다. 모국어라는 것이 나에게 밥과 공기 같은 것이었다는 것을 나는 천천히 깨달아 갔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침대에 걸터앉아 어릴 때 부르던 노래들을 불러 보곤 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하고 부르다 보면 그 발음의 아름다움이 내 마음에 나직이 사무치는 것을 느꼈다 ..  (83쪽)


 다 읽은 책을 무릎에 얹는다. 고개를 든다. 메마른 낯빛 딱딱한 몸짓 어두운 옷빛이 감도는 서울 지하철을 함께 탄 내 몸을 돌아본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물결을 이루는 하나가 된 내 몸을 헤아린다. 시골사람 주제에 서울 지하철을 타고는 책 하나 읽은 내 몸을 곱씹는다.

 요새는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내 고무신 차림을 기웃기웃 훔쳐본다. 우리 보금자리 깃든 마을에서는 사람들 누구나 고무신을 신으니까 내 신차림을 기웃기웃 훔쳐볼 까닭이 없다. 면내나 읍내로만 나가도 초등학생이건 중학생이건 면사무소 일꾼이건 누구건, 아니 고등학교 교사이건 유치원 교사이건 고무신을 안 신는다. 흙을 밟고 일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고무신을 안 신는다. 서울처럼 커다란 도시에서는 고무신을 구경할 수 없다. 이 도시하고는 참 안 어울리는 고무신을 꿰고, 이 도시살이하고는 도무지 안 맞는 책읽기를 한답시고 가방에 책 여러 권 쟁여 바깥볼일을 보는 내 삶을 차근차근 되뇐다.

 그래, 사람들 스스로 흙을 안 밟으니까 고무신을 안 신는다. 아니, 예전에는 다들 짚신을 신었지. 흙을 밟는 사람이니까 짚신을 삼아서 신지. 흙을 안 밟을 뿐 아니라, 흙 있을 자리를 모두 시멘트로 밀고 아스팔트를 까니까 고무신마저 신을 수 없지. 값비싼 구두나 운동신을 신으려 할 테지. 아니, 구두나 운동신이 아니고서는 시멘트길과 아스팔트길을 어찌할 수 없겠지. 버스를 타거나 전철을 타거나 비행기를 타거나 구두가 어울리지 고무신이 어울리겠나. 외국출장을 가건 국내여행을 하건 등산신처럼 크고 두툼한 신을 꿰어야 걸맞지 고무신이 걸맞겠나.


.. 흙을 밟고 싶다, 나무들의 뼈대를 보고 마른 낙엽의 냄새를 맡고 싶다는 갈망에 시달리며, 나는 얼마간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이 공간을 혐오하게 되었다 … 그 삭막한 기다림 속에서 나는 수유리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 시내에서 돌아오면 맑은 공기가 코와 목구멍을 시원하게 뚫어 주었다. 마을버스로만 지하철과 연결되었으므로 교통은 불편했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 내킬 때마다 흙을 밟을 수 있고 나무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나는 그곳에서 미처 깨닫지 못하고 지냈다 ..  (134쪽)


 한강 님 산문을 처음 읽으면서, 한창 읽는 동안, 마지막 쪽까지 읽어내어 덮고 난 다음, 한강 님은 어느 동네 어느 집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몹시 궁금하다. 왜 스스로 수유리를 떠나 흙을 안 밟아야 하는 땅에서 살아가며 푸념을 늘어놓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왜 스스로 가장 좋으며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사랑스러우며 가장 빛나며 가장 거룩하며 가장 즐거울 길을 스스로 안 걸으면서 푸념만 쌓는지 더없이 궁금하다.

 뒤늦게나마 흙을 밟을 수 있는 곳이 고마움인 줄 알았다면, 흙을 밟을 수 있는 데로 옮겨야 마땅하다. 흙을 밟으며 흙을 만져야 한다. 나무를 쓰다듬고 풀을 어루만져야 한다.

 한강 님 산문모음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을 읽은 사람 가운데 흙사랑을 하거나 흙삶을 일구려 하는 사람이 얼마쯤 될까 모르겠다. 한강 님이 미국에서 문학을 새롭게 배운 젊디젊은 날 발자취를 책으로 묶은 일도 나쁘다고는 여기지 않으나, 한강 님이 ‘흙을 밟으며 느낀 사랑과 꿈과 믿음’을 따사로우면서 넉넉하게 글로 여민 이야기를 책으로 묶을 수 있으면 얼마나 멋지며 대단할까 하고 꿈을 꾼다. (4344.10.25.불.ㅎㄲㅅㄱ)


―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한강 글,열림원 펴냄,2003.8.14./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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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실이 - 김은미 에세이집
김은미 지음 / 해드림출판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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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고 아름다이 살아가고픈 꿈
 [책읽기 삶읽기 82] 김은미, 《꼬실이》(해드림,2010)



 우리 살붙이 새로 둥지를 틀 시골집을 계약합니다. 마을 어르신 네 분이 모여 지켜봅니다. 이튿날 아침, 등기이전을 하려고 집임자요 땅임자가 사는 동광양으로 버스를 타고 두 시간 길을 달립니다. 집임자요 땅임자인 분은 땅만 등기를 해 놓고 집은 등기를 해 놓지 않았습니다. 옛날부터 이와 같았는데 이제껏 몰랐답니다. 법무사를 찾아가서 서류를 마무리하려다가 이 대목에서 걸려, 집 등기를 하기 앞서 갖출 서류를 새로 만들어야 하기에 동광양에서 고흥읍으로 돌아오고, 도화면사무소를 찾아가며, 다시 고흥읍으로 갑니다. 아침 일곱 시에 시골마을에서 길을 나섰는데, 저녁 여덟 시가 넘어서 겨우 마을로 돌아옵니다.

 땅은 등기가 되었으니 집은 그냥 그대로 살아갈 수 있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내가 눈을 감거나 옆지기가 눈을 감은 다음, 이 집에서 우리 아이들이 고이 살아간다 할 때에, 또는 우리 아이들이 이 마을을 떠나 도시에서 살아간다 할 때에, 어버이 된 내가 집 등기를 제대로 마무리짓지 않으면 나중에 아이들이 또 골머리를 앓으면서 길에서 여러 날을 흘려야 합니다. 먼 뒷날을 곰곰이 그립니다. 아이들이 하루하루 슬프게 길에서 보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어버이인 내가 여러 날 길에서 보내자고 다짐합니다. 밥 먹을 틈 없이 버스에 택시에 군청에 면사무소에 설계사무실에 한전에 우체국에 몰아쳐야 하지만, 나한테 주어진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살붙이 살아가려는 도화면 신호리 동백마을로 돌아가는 군내버스를 타려다가, 고흥읍내 정류장 옆에 있는 조그마한 표파는곳 선간판을 봅니다. 저기에서 표를 끊는가 보구나. 맞돈 1900원을 내도 되지만 표를 끊고 싶습니다. 표파는곳에 섭니다. 안을 살며시 들여다보니 종이에 고무도장 찍은 표입니다. 표값은 1800원. 시외버스 타는 데에서 군내버스를 타면 1900원이고, 여기에서는 1800원입니다. 한 장을 끊습니다. 곧이어 석 장을 더 끊습니다. 석 장은 두고두고 간직하려고 끊습니다. 누리끼리한 똥종이에 고무도장으로 1800 숫자를 찍은 조그마한 종이표가 애틋해, 이 버스표 석 장을 예쁘게 돌보고 싶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스물이 되고 서른이 된 나이에는 이 종이표가 틀림없이 사라지고 없을 테니까, 그무렵 ‘얘들아 너희 아버지가 이 마을에 살려고 막 들어와서 바쁘게 돌아다닐 때까지 이곳에서는 이 종이표를 끊어 버스를 탔단다.’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요.


.. 식구 가운데 누구 하나 들어오지 않아도 굶는 꼬실이는 간밤 내내 자는 척, 사실은 기다리기만 했을 거다 … 어쩌다 아주 넓은 풀밭에 데려가면 그때야 사방을 뛰어다니느라고 잠시도 쉬지 않았지만 그럴 일이야 한 해 한 번이나 제대로 있을까 … 참 행복했다. 그리고 앞으로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며칠이건 몇 달이건 혹은 운 좋게 몇 해건 우리에게 허락될 그동안을 더 사랑하고 더 행복하자 … 언젠가는 헤어지고 말 것이지만, 추억으로 힘을 얻게 될 것이니 ..  (24, 100, 192, 201쪽)


 시골집 계약서를 쓰고 나니 마을 어르신들이 “잘 왔네, 축하하이. 이제 한 동네 사람이 된 거여.” 하면서 활짝 웃습니다. “마을에 살면 마을에 맞는 행동도 해야 하고 힘들 수도 있지만, 우리 마을이 보기보다 인심이 더 좋으니 걱정할 것 없으이.” 하면서 막걸리를 사발에 따릅니다. 마을에서 할머니로서는 가장 젊다는 이장님네 예순다섯 할머님이 술안주로 단감을 깎습니다. 단감은 이장님에 마당 가장자리 돌울타리 곁에서 자라는 감나무한테서 얻습니다.

 4일과 9일은 고흥읍 장날입니다. 10월 14일 어제, 새벽 세 시부터 빗방울이 들었습니다. 아침 여섯 시 무렵에는 주룩주룩 비가 내립니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이 되고 보니, 마을 분들은 들일을 나가지 않는답니다. 모두들 일할 때와는 다른 정갈한 옷차림으로 갈아입고는 이른아침부터 읍내 나가는 버스를 탑니다. 들일을 쉬니 바깥 볼일을 봅니다. 마침 장날이기도 하고요.

 “우리 마늘이 임자 잘못 만나 불쌍하다 불쌍하다 했는데 비가 오긴 오네.” 나락 베기 앞서 밭자락 푸성귀를 거두고 한 차례 갈이를 하고 조금 있다가 마늘을 심습니다. 마늘을 심을 때에는 마을 할머님들이 서로 품앗이를 합니다. 젊은 날부터 함께 일하고 서로 돕습니다.


.. 예의니 도리니 하는 것으로 눈막음은 하지만 기실 병약하거나 늙은 사람들에 대해 하찮게 여기는 마음이 왜 없겠는가 … 사람들은 죄다 한마디씩 한다. “어머, 이제 늙었나 봐. 하긴 오래 살았지. 확실히 늙은 티가 확 나네.” 등등 주절거리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다. 누가 자기한테, 자기 어머니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면 기분이 어떨까. 짐승에게는 도대체 배려라는 게 없는 게 인간이라는 동물이다 … 잠시 토닥토닥 두들겨 주다가 소파에 재워 놓고 눈을 감았다. 어떤 세상일까. 해가 눈부신 건 질색을 하는 나지만, 이렇게 완벽하게 깜깜한 것이 하염없이 지속된다는 게 쉽게 견딜 일 아니다 … 간혹 나를 난감하게 하는 고집, 부릴 만하겠다 싶다 ..  (37, 45, 118쪽)


 이장님 댁에서 사흘 묵습니다. 우리 살붙이 지낼 집을 계약하기까지 묵도록 작은방을 내어주십니다. 밥도 ‘한 그릇 더 놓을’ 뿐이라면서 함께 먹습니다. “우린 시골이라 이렇게 풀만 먹어요.” 하면서 늘 드시는 밥차림 그대로 함께 먹습니다. 이 밥상을 옆지기가 함께 받으면 얼마나 좋아할까 떠올립니다.

 꼭 알맞춤한 작은 집, 작은 마당, 작은 밭과 논, 작은 일손, 작은 마을입니다. 먼 옛날, 또는 가까운 지난날, 이 마을에 빈집이 없이 가득했을 때에는 사람들이 얼마만큼 북적였을까요. 마을 모든 집이 가득 찼다 하더라도 웬만한 도시하고 견주면 그야말로 조그마한 마을 아니었을는지요. 예나 이제나 이 마을은 그저 작은 마을이요 작은 사람들이면서 작은 사랑이라고 느낍니다. 나와 우리 살붙이는 이 작은 마을에 또다른 작은 사람이 되면서 작은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으면 즐거우리라 느낍니다.

 많이 벌어 많이 쓸 까닭이 없어요. 넉넉히 벌어 넉넉히 쓸 까닭이 없어요.

 꿈을 꿉니다. 알맞게 벌어 알맞게 알맞게 누리면서 살아갈 꿈을 꿉니다. 즐겁게 일해서 즐겁게 일한 만큼 버는 그대로 우리 살붙이랑 이웃이랑 동무랑 나누면서 살아갈 꿈을 꿉니다.

 나부터 좋은 넋으로 좋은 말을 즐길 때에 우리 아이들 또한 좋은 넋으로 좋은 말을 즐길 수 있으리라 느끼면서 살아가는 꿈을 꿉니다.


.. 슬프기는 하지만 살아 있는 목숨은 계속 살아지고 다시 다른 대상을 사랑하게 된다. 결코 잊지는 않지만 헤어질 그 즉시처럼 인생이 자근자근 아프지는 않다. 그리고 새로운 대상을 사랑하게 되면, 그런 마음을 다시 품게 된 것은 먼저 보낸 그 아이와 사랑을 나누었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는다 … 그 몫의 자리가 있고 그 몫의 사랑이 있다. 꼬실이가 죽고 나서 다른 개를 데려다 기르면서 꼬실이한테 미안한 마음을 품지는 않을 것이다. 최선을 다해서 사랑했으니까 … 특별한 능력을 타고났는지 계발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짐승들의 마음을 읽는다는 커뮤니케이터 아니더라도 나는 녀석의 마음을 대개 읽을 수 있다 ..  (128, 129, 151쪽)


 집살림을 하는 아주머니로 살아가는 김은미 님이 ‘막둥이 꼬실이’ 이야기를 적바림한 《꼬실이》(해드림,2010)를 읽습니다. 이야기책 《꼬실이》는 열여덟 나이까지 살아낸 꼬실이 마지막 삶을 돌아본 나날을 담습니다. 곁에서 사랑스러웠고 언제나 함께였던 막둥이가 조용하면서 얌전하게 눈을 감은 삶을 조곤조곤 들려줍니다.

 함께 살았으니 즐겁습니다. 서로 아꼈으니 사랑입니다. 나란히 밥을 먹고 잠을 잤으니 한식구입니다. 즐거운 삶에 따로 더 바랄 일이 없겠지요. 아끼는 사랑에 군더더기를 붙일 까닭이 없겠지요. 고운 한식구를 예쁘게 되새기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 새롭게 맞이할 수 있겠지요.


.. 그렇게 계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헌책을 떠올렸다. 닳은 겉장, 바뀌기 이전 맞춤법, 조악한 인쇄, 금방이라도 낱장이 흩어질 것만 같은 제본 등, 하지만 100년 가까운 시간이 그 안에 꼭꼭 박혀 있을 터였다. 아버지 젊은 날에는, 우리가 한창 자라던 중장년 시절에는 우리든 누구든 그 책을 들추고 읽었으면 하고 초조하신 적도 있었으리라. 이렇게 좋은 경험, 참고할 것, 깊은 생각이 많은데 왜 아무도 주의 깊게 읽으려 하지 않나 괘씸하기도 하셨을 게다. 그렇지만 그 한 해, 아버지는 당신 혼자 넘기고 되넘기면서도 충분히 만족하신 듯이 보였다 ..  (55쪽)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말이 퍽 널리 쓰입니다만, 나는 이러한 말이 퍼지는 일이 썩 달갑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으레 입으로만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욀 뿐, 정작 어느 누구도 스스로 작게 살아가려 하지 않거든요.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말하려면, 남녘땅 한강과 낙동강과 금강과 섬진강을 쇠삽날로 망가뜨리는 일을 하지 말아야지요. 작게 작게 살려야지요.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말하려면, 한미자유무역협정을 이루면 자동차나 전자제품을 얼마나 많이 팔아먹어 경제성장이 이루어지는가 따위를 읊지 말아야지요. 도시사람도 텃밭을 일구든 주말농장을 하든 스스로 흙을 만지고 아끼면서 내 먹을거리를 조금이나마 내 손으로 일구는 삶으로 바꾸어야지요.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말하려면, 자가용하고 헤어지거나 자가용을 좀 덜 타야지요. 두 다리로 걷거나 자전거를 타야지요.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말하려면, 아파트를 이제부터라도 작게 지어야지요. 적은 돈으로도 살 만한 아파트를 짓고, 높직하게 올려세우지 말며, 알맞춤한 돈으로 살림집 마련해 알맞춤한 돈으로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를 보살피면서 내 나날을 알맞춤하게 누려야지요.


.. 의지하고 믿고 사랑하는 아름다움에 대해 우리는 함께 배워 왔지요 … 막둥이 보낸 지 겨우 하루 지났다. 장난감이 부서진 게 아니라 사랑하는 식구가 죽은 거다 ..  (209, 260쪽)


 작은 아름다움이 아닌 큰 아름다움을 바라면서, 아니 아름다움조차 아닌 큰 것만 바라면서 ‘아름다움’이라는 낱말을 뒤에 붙이는 일은 몹시 슬픕니다. 아름다움은 크거나 작다고 가르지 못합니다. 큰 아름다움이 없고 작은 아름다움 또한 없습니다. 아름다움은 그저 아름다움이에요.

 작은 삶이 없고 큰 삶이 없습니다. 작은 사랑 또한 없으며 큰 사랑 따로 없어요. 그런데, 참말 이 나라에서는 어쩔 수 없이 ‘아름다이 살아가고픈 꿈’을 밝히기 힘듭니다. 따로 ‘작고’라는 꾸밈말을 앞에 달아 ‘작고 아름다이 살아가고픈 꿈’을 밝혀야 하는데, 이렇게 밝혀도 ‘작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어깨동무하는 길을 찾기가 만만하지 않아요.

 《꼬실이》를 적바림한 김은미 님이 막둥이를 아끼면서 사랑한 나날 그대로, 저마다 제 고운 옆지기를 아끼면서 사랑하는 나날을 누릴 수 있기를 비손합니다. 나는 내 옆지기와 살붙이를 곱게 아끼면서 사랑하는 길을 내 몸과 마음을 함께 살찌우면서 걷자고 헤아립니다.

 군말 한 마디 붙입니다. 이야기책 《꼬실이》는 애틋하고 아름다운데, 책 짜임새와 엮음새는 영 허술합니다. 출판사 일꾼이 제대로 마음을 기울이지 못해 퍽 서운합니다. 부디 사랑을 읽고 사랑을 나누어 주셔요. (4344.10.15.흙.ㅎㄲㅅㄱ)


― 꼬실이 (김은미 글·사진,해드림 펴냄,2010.12.31./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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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 - 디즈니 만화로 가장한 미 제국주의의 야만
아리엘 도르프만 외 지음, 김성오 옮김 / 새물결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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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을 수 없는데 느끼거나 좋아할 수 없다
 [책읽기 삶읽기 81] 아리엘 도르프만·아르망 마텔라르,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새물결,2003)



 책을 읽습니다. 글을 읽습니다. 신문을 읽고 잡지를 읽습니다.

 옆지기 마음밭은 어떠할까 가만히 어림하면서 마음읽기를 해 봅니다. 내 아이들 몸은 어떠한가 곰곰이 되짚으면서 눈빛읽기를 해 봅니다.

 읽으려 하기 앞서 느낄 일이겠지요. 무언가 알려고 하기 앞서 사랑할 일이겠지요.

 마음이 어떠한가를 읽는다면, 이렇게 읽은 마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때에 좋을까요. 마음읽기는 하지만 마음맺기를 하지 않는다든지, 마음읽기는 실컷 하면서 마음나눔을 하지 않는다면 무슨 값이나 보람이 있을까요.

 아이들 눈빛은 읽지만 아이들 눈빛에 어리는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무슨 뜻이 있을는지요. 아이들 눈빛을 알아채거나 느끼면서 아이들하고 사이좋게 어우러지거나 아이들을 스스럼없이 좋아하지 못한다면 무슨 빛줄기가 있을는지요.

 책읽기는 하나도 쉬운 일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책읽기를 한다 할 때에는 내 손으로 쥔 책에서 얻은 앎조각이 흩어진 부스러기로 남지 않게끔 알뜰히 그러모아 내 삶을 새로 다스리면서 남달리 거듭나도록 힘써야 한다고 느낍니다. 책읽기를 하면서 내 삶을 읽습니다. 내 삶을 읽으면서 내 삶을 북돋웁니다.

 옆지기나 아이나 동무 마음을 읽는다면, 마음읽기로 그칠 노릇이 아니라, 옆지기나 아이나 동무 마음을 읽으며 맞아들인 이야기를 내 마음밭에서 찬찬히 아로새기면서 다 함께 아름다이 살아갈 길을 찾아 소매를 겉어붙이며 힘써야 한다고 느낍니다.

 더 즐거이 살아가려고 읽는 책이고 마음입니다. 더 참다이 살아내려고 읽는 책이요 마음입니다. 더 어여삐 얼크러지자며 읽는 책이면서 마음이에요.


.. 진정한 지식을 얻으려면 맹목적인 시각에 사로잡히거나 딱딱하고 과장된 전문용어를 동원해 호된 신고식을 치르도록 하는 것을 더이상 지지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지고하신 영혼의 사제들은 다름아니라 그러한 신고식을 통해 사고와 표현에 대한 배타적인 특권을 합법화하고 보호하려 들기 때문이다. 심지어 널리 팽배해 있는 오류들을 고발할 때조차 연구자들은 혼자만 아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바로 자신들이 파괴하려고 하는 것과 똑같은 신비화에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 ..  (49쪽)


 읽을 수 있기에 느낍니다. 읽을 수 있기에 좋아합니다. 읽을 수 있기에 고개를 숙이면서 배웁니다. 읽을 수 있어 고개를 숙이면서 배우기에, 오늘 내가 살아가는 하루를 신나게 누리면서 밝은 꿈누리에 젖어듭니다.

 새벽나절 도랑물에 언손 녹이며 오줌기저귀를 빨래하는 동안 생각합니다. 아침나절 다시금 도랑물에 언손 부비며 똥기저귀를 빨래하는 내내 헤아립니다. 시월을 갓 넘긴 멧골자락 도랑물이 이러하다면 십일월이나 십이월은 훨씬 차갑습니다. 나는 오늘 하루만 이렇게 도랑 찬물에 기저귀를 빨며 손이 시리지만, 먼 옛날 사람들은 기저귀 빨래를 어떻게 해야 했을까 떠올립니다. 전쟁이 일어나 여느 사람들 보금자리가 쑥대밭이 되었을 때에도 갓난쟁이들은 똥을 누고 오줌을 눌밖에 없는데, 한국전쟁 같은 때에 기저귀 빨래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그려 봅니다.

 전쟁통에는 기저귀로 쓸 천이나마 있었을까 궁금합니다. 전쟁통에는 빨래할 물이나마 얻을 만했는가 궁금합니다. 전쟁통에는 애써 빨래한 기저귀를 어느 만큼 넉넉히 말릴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전쟁이 터져 괴로운 나라가 지구별에 있습니다. 이 괴로운 나라에서는 집과 마을을 잃고 떠돌아야 하는 사람들이 퍽 많습니다. 이들은 난민수용소라는 이름이 붙은 데에 모입니다. 난민수용소를 돕는다고 할 때에는 으레 먹을거리와 옷가지를 갖다 주는데, 난민수용소에서 새로 태어나 자라는 갓난쟁이들은 기저귀를 어떻게 쓰는지 궁금합니다. 난민수용소에서는 한 번 쓰고 버리는 종이기저귀를 구호품으로 줄까요. 난민수용소 갓난쟁이들은 며칠에 한 번씩 몸을 씻을 수 있을까요.


.. 월트 디즈니를 그저 사업가로만 생각했다가는 큰코 다친다. 우리는 모두 영화와 시계, 우산, 음반, 비누, 흔들의자, 넥타이, 전등 등 그의 캐릭터들을 이용한 대규모 상품 판촉에 익숙해져 있다 … 디즈니는 캐릭터들에게서 진짜 과거를 제거하는 동시에 현재 처한 곤경과 관련해 자성할 기회를 주지 않음으로써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게 해 주는 유일한 관점을 빼앗버리는 것이다. 처음부터 줄곧 그가 빠져 있던 세계와 다른 세계는 전혀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 동등한 인물들 사이의 연대는 금지되어 있는 까닭에 이들에게 유일하게 남은 것이라고는 경쟁뿐이다 … 디즈니는 어린이를 해방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속이기 위해서 동물을 이용한다 … 디즈니에 의하면 저개발 국가 국민들이란 어린애 같기 때문에 그에 걸맞게 다루어야 하고, 이러한 규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엉덩이를 까내려 흠씬 두들겨 주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말을 들을 테니까! ..  (53, 71, 80, 89. 107쪽)


 나는 대통령 후보 지지율이 궁금하지 않습니다. 나는 경제성장율이 궁금하지 않습니다. 나는 땅값이라든지 무슨무슨 운동경기나 문화예술이 궁금하지 않습니다. 나는 주식시세표나 방송편성표가 궁금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아이들과 살붙이가 사랑스레 몸을 누여 살아갈 만한 보금자리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돌아보는 일이 반가우며 즐겁습니다. 집식구 웃음꽃과 이야기꽃이 반가우며 즐겁습니다. 추위가 천천히 찾아들면서 풀벌레 울음소리가 잦아드는 시골자락 서늘한 바람을 느끼는 나날이 반가우며 즐겁습니다.

 아마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시월로 접어들어 뚝 끊긴 풀벌레 울음소리 이야기는 다루지 않겠지요. 구월까지 풀벌레가 얼마나 어여삐 노래를 베풀었는가 하는 이야기는 다룰 마음이 없겠지요. 나뭇잎이 하나둘 지면서 멧자락과 들판에 가랑잎이 뒹구는 이야기는 다룰 사람이 없겠지요.

 신문을 펼치든 방송을 켜든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어느 시골자락 어느 시골 할매가 나락을 말릴 때에, 옆에서 함께 일하는 시골 할배하고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더라 하는 이야기가 신문에 실리지 않습니다. 가을이 무르익는 때에 멧새는 어떤 먹이를 좋아하는가 하는 이야기는 방송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저는 신문을 안 읽습니다. 신문을 못 믿습니다. 시골자락 할매 이야기와 멧골 멧새 이야기를 다루지 않거나 다룰 뜻이 없는 신문은 손사래칩니다. 연예인을 꿈꾸는 아이들이 목청 높이 부르는 노래는 나오지만, 풀벌레가 곱게 부르는 노래는 다루지 않는 방송은 보고 싶지 않으며, 집에 텔레비전을 들이지 않아요.


.. 어린이들은 도널드 덕과 스스로를 동일시한다. 도널드의 처지가 아이들 자신의 삶과 연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도널드를 읽거나 접하게 되는 방식 자체가 바로 도널드 덕이 온갖 현안을 해결하며 살아가는 방식을 모방하고 미리 보여주기 때문이다 … 이 세계에서는 나이가 더 많거나 더 부자라거나 혹은 더 아름답다는 단순한 사실이 권위를 부여한다. 그리고 운이 나쁜 캐릭터는 복종을 당연시한다 … 어느 쪽이든 모두 남성에게 종속되어 있다. 즉 여자가 가진 유일한 힘은 전통적인 요부의 힘으로, 그녀는 교태라는 형태로 그것을 행사한다. 그리고 수동적이고 가정적인 본성을 벗어나는 어떠한 다른 역할도 허용되지 않는다 … 결국 디즈니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바로 겉모습이다 ..  (64, 75, 82, 196쪽)


 신문은 무슨 이야기를 담을 때에 신문이라 할 만할까요. 방송은 어떤 이야기를 다룰 때에 방송이라 할 만한가요. 신문이나 방송은 우리 삶과 사랑과 사람을 어느 만큼 차분히 짚으면서 살뜰히 보여주는가요.

 아리엘 도르프만 님과 아르망 마텔라르 님이 빚은 인문책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새물결,2003)를 읽으며 생각에 잠깁니다. 미국은 ‘도널드 덕’을 앞세워 신문과 방송을 거머쥔다고 합니다. ‘도널드 덕’을 바라보는 사람들 생각과 마음을 어느 한쪽으로 몰아세운다고 합니다. 길들이는 언론이요, 길들여지면서 눈이 머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도널드 덕’ 한 가지만 이야기하는데, ‘도널드 덕’뿐 아니라 ‘미키마우스’이든 ‘뽀로로’이든 ‘케로로’이든 이와 마찬가지예요. 모두들 사람들 눈과 마음과 생각과 몸을 길들입니다. 어느 한쪽으로 몰아세웁니다.


.. 유행의 첨단을 걷는 칠레의 부르주아 계급이 극도로 세련된 모델들에게 미니스커트와 맥시스커트, 핫팬츠를 입히고 번들거리는 부츠를 신겨서는 가난한 농촌 지역의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는 풍경’, 아니면 전원적인 풍경 속의 알라칼루페 인디오 부족 사이에 세워놓고 잡지 사진을 찍듯이, 미국에서 제작된 만화들은 도시 문명에 의해 파괴된 사회 조직 형태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강박관념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디즈니는 자신의 과거와 미래의 정복을 정당화함으로써 끊임없이 자기를 정화하는 정복자이다. 하지만 대도시의 이해를 대변하는 한편, 그러한 만큼 이 도시의 생산력 발전에 내재하는 여러 모순의 산물이기도 한 지배계급의 문화적 상부 구조가 어떻게 저개발 국가들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또 그와 같은 인기를 획득하는 것일까? 도대체 디즈니가 왜 그토록 위협적일까? ..  (232쪽)


 시골에서 흙을 만지며 살아갈 때에는 신문이나 방송은 부질없습니다. 애써 신문을 펼치지 않아도 됩니다. 굳이 텔레비전을 켜지 않아도 됩니다. 따사로이 사랑하며 어깨동무하는 사람들 고운 이야기가 흙땅과 흙집에서 솔솔 피어납니다.

 흙을 밀거나 짓밟으며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덮은 도시에서는 신문이나 방송을 안 살필 수 없습니다. 흙이 없어 먹을거리를 거두지 못합니다. 흙이 없기에 돈을 얻어 돈으로 먹을거리를 장만해야 합니다. 돈에 따라 움직이고 돈에 따라 생각하며 돈에 따라 살아갑니다.

 시골에서도 온통 시멘트와 아스팔트가 깔리면, 시골자락 사람들도 신문을 펼치거나 방송을 켜기 마련입니다. 시멘트는 신문을 부르고, 아스팔트는 텔레비전을 찾습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며 텃밭을 일굴 줄 안다면, 따로 신문이나 방송하고 사귀지 않습니다. 텃밭 흙을 사귀고 텃밭 푸성귀를 사랑할 테니까요.

 나는 흙과 바람과 물과 햇볕과 풀과 나무와 새와 벌레와 짐승을 사랑하는 조그마한 목숨붙이인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4344.10.5.물.ㅎㄲㅅㄱ)


―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 (아리엘 도르프만·아르망 마텔라르 씀,김성오 옮김,새물결 펴냄,2003.6.20./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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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탄생 - 한국어가 바로 서는 살아 있는 번역 강의
이희재 지음 / 교양인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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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말투’는 없고 ‘번역 말투’만 있다
 [책읽기 삶읽기 79] 이희재, 《번역의 탄생》(교양인,2009)



 나라밖 책을 한국사람이 읽도록 옮기는 일을 하던 이희재 님이 《번역의 탄생》(교양인,2009)이라는 책을 이태 앞서 내놓았습니다. 이태 앞서 이 책을 읽으면서 참 늦게 이러한 책이 나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이 2011년에 나왔다 한들, 또 2013년이나 2015년에 다른 책이나 비슷한 책이나 더 나은 책이 나온다 한들, 이 나라 번역 문화는 그닥 달라지지 않는구나 싶어요. 누구보다 번역을 하는 분이 읽을 《번역의 탄생》이지만, 이러한 책을 읽으면서 ‘번역말이 더 한국말다울 수 있도록 힘쓰는 분’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거든요.

 이희재 님은 “직역은 한국어를 살찌우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이 사실입니다. 외국어의 참신한 비유는 앞으로도 과감히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33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곧이어 “한국의 직역주의는 자기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보다는 그저 원문을 무작정 우러러보는 종살이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34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한국의 작가와 독자는 ‘-게 하다’라는 사역 표현에 무척 익숙합니다. 번역서에서 워낙 그런 문장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지요(108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세 마디를 가만히 놓고 생각합니다. ‘직역’이라는 번역 말투는 오늘날 이 나라에 아주 널리 퍼졌습니다. 이희재 님은 이 직역이 한국말을 크게 살찌웠다고 이야기하는데, 이희재 님 입으로 ‘한국사람은 서양말이나 중국말이나 일본말을 무턱대고 우러르며 쓰기만 하는 종살이’를 한다고 나무랍니다.

 몹시 궁금합니다. 스스로 내 삶을 다스리는 임자 구실을 못하는 한국사람이라면서, 종살이와 같이 말을 하거나 글을 쓴다면서, 이러한 ‘직역’으로 한국말을 어떻게 얼마나 살찌울 수 있을는지요. 아니, 살찌우려고 하기나 했을까요. 조금이나마 살찌웠다 할 만한가요. 소 뒷다리로 개구리를 잡는다 하듯, 직역 말투로 한국말을 살찌운 대목이 있을는지 모릅니다만, 제 나라말을 곱다시 여기지 못하는 매무새로 서양말·중국말·일본말을 섬기는 한겨레는 한국말을 하나도 살찌우지 못했다고 해야 올바릅니다.


.. 일본어는 한국의 사전에서도 끄떡없이 살아남았습니다. 한국의 사전 편찬자들은 해방 후에 영한사전을 만들 때도 영일사전을 전범으로 삼았습니다 … 일본어는 한자를 쓰기 때문에 같은 뜻이라도 한자로 어렵게 표현하려는 경향이 한국어보다 강합니다. 그런데 영일사전을 베끼다 보니까 영일사전에 나와 있는 한자로 된 딱딱한 풀이어들이 발음만 한국어로 표기되어서 영한사전에 그대로 들어왔습니다 … 한국어는 주어는 안 쓰더라도 문장은 될수록 능동문으로 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역동적이고 힘찹니다. 일본어는 될수록 수동문으로 만들려는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  (28∼29, 93쪽)


 《번역의 탄생》은 “번역이 태어났다”고 밝히는 책이 아닙니다. “번역이라는 새 말투가 태어났다”고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이제 웬만한 한국사람 누구나 익숙하게 젖어든 ‘번역 말투’가 어떠한가를 찬찬히 살피면서, ‘조금 더 한국말답게 말을 하거나 번역을 헤아리는 길’을 돌아보자고 이끄는 책입니다.

 《번역의 탄생》이라는 책에서 다루는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이 나라 한국에서 나오는 책은 하나같이 번역 말투입니다. 여느 문학책이든 인문책이든 다르지 않아요. 어린이책이라 해서 번역 말투에서 홀가분하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교과서는 좀 다를까요? 중·고등학교 푸름이가 읽어야 할 교과서는 좀 낫다 할까요?

 한국에서 태어나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싫든 좋든 초등학교부터 번역 말투로 교과서를 배웁니다. 더욱이, 초등학교에 앞서 어린이집에서도 번역 말투로 이야기를 듣거나 주고받습니다. 게다가, 어린이집에 들기 앞서 ‘아이를 낳은 어버이’라면 누구나 ‘아주 마땅하다’ 할 만큼 번역 말투로 생각을 나눠요.


.. 난해한 한자어를 쉬운 말로 바꾸는 것은 그 자체가 번역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 제가 한국어 번역에서 대명사를 명사로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영어가 자기 정체성을 지키려는 의지의 몇 분의 일이라도 한국어가 자기 정체성을 지키기를 바라는 균형 감각 때문일 것입니다 … 한국어는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아도 주어는 사람이라는 의식이 확고하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수동문을 쓰지 않습니다. 주어가 겉으로 드러나야 하는 언어일수록 수동태가 발달합니다. 영어가 그렇습니다 … 전치사가 들어간 영어 문장을 한국어로 번역할 때는 동사를 덧붙여 주어야 자연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전치사 자체가 강한 행동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  (31, 56∼57, 80, 236쪽)


 여느 인문책이나 문학책이나 학술책이 ‘번역 말투로 가득하다’고 걱정하거나 슬퍼하기 앞서, 이 나라 모든 교과서와 신문과 방송과 인터넷은 ‘일찌감치 번역 말투로 이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전문가나 학자나 여느 어버이나 교사 또한 ‘으레 번역 말투를 여느 삶말로 여겨’ 주고받아요. 연속극에서도 영화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말로 옮기는 나라밖 그림책도 이와 똑같습니다. 처음부터 한국사람이 빚은 한국 그림책 또한 이와 같아요.

 한국말다이 한국말을 돌보면서 한국말을 나누려는 어른이 없습니다. 한국말다이 한국말을 보듬으면서 한국말을 주고받으려고 땀흘리거나 애쓰는 어른이 없습니다. 이 나라 푸름이와 어린이는 ‘생각 안 하고 살아가는 어른들 번역 말투’를 고스란히 물려받습니다. 이 나라 푸름이와 어린이가 어른이 될 때에도 저희들이 어린 나날부터 익숙해지거나 길든 번역 말투로 저희 아이들을 낳고 기릅니다.


.. 한자는 아무런 뜻이 없는 고유명사를 적는 데도 불리합니다. 뜻글자는 의미 환기력이 워낙 강하다 보니, 그것을 차단하려면 될수록 의미가 이어지지 않는 글자들을 모아야 하고, 심지어 새 글자를 만들어 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같은 소리로 나는 수많은 한자어 중에서 어떤 한자어를 고유명사의 발음에 대응시킬지 막연합니다 … 그런데 왜 멀쩡한 ‘공약’이라는 좋은 말을 두고 ‘매니페스토’라는 말을 요즘 뜬금없이 쓰는 것일까요? 기존 영한사전에 manifesto의 풀이어로 ‘공약’이 안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manifesto는 그냥 공약이 아니라 책임 있는 공약이기나 한 것처럼, 흔히 말하는 ‘공약’과는 구별해서 써야 하는 말인 것처럼, 한국어 ‘공약’은 영어 manifesto의 뉘앙스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입니다 ..  (322, 344쪽)


 한국땅에서 번역 말투가 이처럼 널리 퍼진 지는 얼마 안 된 일이라 여길 수 있습니다. 참 짧은 햇수만에 번역 말투가 온누리 구석구석 퍼졌다고 여길 만합니다.

 이처럼 널리 쉬 퍼진 번역 말투가 ‘한국말을 살찌웠다’고 잘못 생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처럼 널리 쉬 퍼지는 ‘번역 말투 또한 한국말로 삼아야 한다’고 바보스레 생각하고야 맙니다.

 번역 말투가 아닌 한국말다운 한국 말투를 쓰는 일을 낯설게 여기는 요즈음이니까요. 이제는 번역 말투를 ‘번역 말투’ 아닌 ‘한국 말투’로 삼아야 한다고 여겨도 틀리지 않다고 할 만하니까요. 아니, 이제 한국사람들 한국 말투란 ‘번역 말투’라 해야 올바르겠지요. 지난 2000년대와 오늘 2010년대와 앞으로 맞이할 2020년대 한국땅 한겨레 말투란 ‘번역 말투’라 해야 하겠지요.


.. 한국의 번역 문화는 한국어의 논리보다는 외국어의 논리를 너무 숭상하는 풍토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그 외국어의 논리라는 것도 심도 있는 분석을 통해서 수미일관한 체례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즉물적이고 맹목적으로 따라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문화도 그렇습니다. 외국 문화의 방정식을 규명하기보다는 그때그때 유행하는 답만 열심히 받아적어 왔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을 좌는 좌대로 우는 우대로 외국 전문가와 외국 이론을 그대로 들여와서 한국 현실에 들이미는 풍토가 일제로부터 독립한 지 두 세대가 넘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  (402쪽)
 

 《번역의 탄생》을 쓴 이희재 님은 우리 모습을 찬찬히 살피면서 낱낱이 보여줍니다. 우리 모습이 나아지거나 거듭나거나 새로워질 길을 따로 밝힐 수 없습니다. 거듭나려고 애쓴다 한들, 둘레 다른 사람들 얄궂거나 슬픈 모습에 휩쓸리거나 휘둘리거나 다칩니다. 맑게 다시 태어나거나 밝게 새로 태어나려고 힘쓴다 한들, 내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말삶을 착하거나 참답거나 곱게 일구지 않습니다.

 말을 바르게 다스릴 길을 살피지 않는 이 나라입니다. 말을 아름다이 북돋울 길을 찾지 않는 이 나라입니다. 아니, 이 나라가 말썽이기 앞서,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내 매무새부터 내 말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나부터 내 말을 아끼거나 보살피거나 믿지 않아요.

 한국말은 없고, 한국글은 없습니다. 번역말과 번역글만 있습니다. 돈에 사로잡힌 말이랑 이름값이나 학벌이나 권력에 젖어든 글만 있습니다. (4344.9.18.해.ㅎㄲㅅㄱ)


― 번역의 탄생 (이희재 씀,교양인 펴냄,2009.2.10./17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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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머리 2011-10-29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본지는 오래 되었지만 번역의 예만 주의깊게 보고 배우느라 책에서 정말 말하고 싶은 문제의식은 그냥 넘기고 말았다는 생각을 이 글을 보고 해 보게 되네요...

숲노래 2011-10-30 02:36   좋아요 0 | URL
번역 보기 바로잡기는...
글쓴이부터 글쓴이 삶에서
제대로 녹아들면서 조금만 보여줄 수 있으면 돼요.

그러니까, '문제의식'은 나부터 내 삶에서
내 넋과 말을 아름다이 돌볼 줄 아는 길에서
실마리를 얻어요..
 
시사평론 알베르 카뮈 전집 20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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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 아끼면서 활짝 웃는 살붙이
 [책읽기 삶읽기 78] 알베르 카뮈, 《시사평론》(책세상,2009)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고 하는 일은 대단하지 않습니다.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 마음 또한 대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으로 태어난 목숨은 이웃인 사람을 좋아하면서 살아갈 목숨이니까요. 아주 마땅하면서 보드라운 흐름인 ‘좋아하기’와 ‘사랑하기’라고 느껴요.

 좋아하기 때문에 함께 팔짱을 낀 채 걷고 싶습니다. 좋아하니까 살을 부비고 싶기도 하고, 마냥 바라보고 싶기도 하겠지요. 좋아하기 때문에 이런저런 수다를 늘어놓고 싶기도 합니다. 좋아하기 때문에, 내가 이제껏 생각조차 하지 않던 이야기를 끝없이 털어놓아도 고마우면서 즐겁게 귀기울여 들을 수 있습니다.

 이 나라 삶터를 곰곰이 돌아봅니다. 퍽 많은 사람들은 썩 좋아하지 않으면서 일을 하거나 놀이를 합니다. 꽤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그닥 좋아하지 않으면서 글을 쓰거나 책을 내거나 학교를 다닙니다.

 나는 이 나라를 딱히 사랑하지 않습니다만, 딱히 밉게 여기거나 나쁘게 돌아보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태어난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나는 내 목숨을 사랑하고, 내 목숨처럼 내 이웃 목숨을 사랑할 뿐이라고 느낍니다. 나라는 그야말로 대수롭지 않아요. 정부나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하나도 대수롭지 않아요. 정부가 무너지거나 서는 일은 나라가 무너지거나 서는 일이 아니에요. 여느 살림집 어머니나 아버지 한 사람이 죽는 일이 곧 나라가 죽는 일이요, 여느 살림집에 아기가 태어나는 일이 바로 나라가 사는 일이에요.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에 제대로 힘을 냅니다. 내 옆지기는 내 옆지기대로 좋아하는 일을 할 때에 신나게 기운을 냅니다. 다른 사람 누구나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저마다 좋아하는 일을 해야 참말 힘이 나고 기운이 샘솟습니다. 좋아하지 않는 일을 ‘돈을 벌어야’ 하거나 ‘이름을 지켜야’ 하거나 ‘힘을 누려야’ 하기 때문에 한다면, 얼마나 고단할까요. 얼마나 슬플까요. 얼마나 안타까이 삶을 버리는 셈이 될까요.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벌어야 할 돈은 그닥 많지 않아요.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벌어야 할 돈은 따로 없어요. 우리는 돈을 벌려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서로를 아끼고 좋아하면서 살아갈 사람이거든요. 서로 아끼고 좋아하면서 살아가는 동안 내 살림을 일굴 만한 돈을 벌면 돼요.


.. 우리의 욕심은-많은 경우 소리 없는 것이었기에 그만큼 더 내심 깊은- 그 신문들을 돈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대중을 그들이 내면에 지닌 최상의 것의 높이로 끌어올릴 만한 어떤 어조와 진실성을 그 신문들에 부여하자는 데 있었다 ..  (38쪽)


 알베르 카뮈 님이 쓴 《시사평론》(책세상,2009)을 읽었습니다. 이태 앞서 나온 책을 이태 앞서 읽었습니다. 이태 앞서 읽고 이태에 걸쳐 묵혔습니다. 이태 동안 묵히느라 내 책꽂이는 아주 어수선합니다. 왜냐하면, 《시사평론》 하나만 내 책꽂이에서 이태를 묵지 않으니까요. 《시사평론》을 비롯해 500권쯤 되는 책이 이래저래 꽂히거나 눕거나 쌓이면서 묵습니다. ‘한 번 다 읽었다’ 하더라도 ‘한 번 다 읽은 그때’에 이 책들에 서린 넋과 삶과 말이 내 넋과 삶과 말로 고스란히 스며들거나 녹아들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기다려야 해요. 바라보아야 해요. 생각해야 해요. 이러면서, 살아내야 해요.

 밥을 먹은 곧바로 힘이 나지는 않습니다. 기다립니다. 어떤 밥을 먹었는가 제대로 깨달아야 합니다. 앞으로 어떤 밥을 먹으면서 살고 싶은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 앞길뿐 아니라, 옆지기와 아이들과 내 어버이와 옆지기 어버이와, 숱한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를 돌아보며 살아내야 합니다.

 착한 길을 걸어야 하고, 참다운 길을 돌봐야 하며, 아름다운 길을 나누어야 합니다.


.. 우리의 은밀한 소원은 악이 승리하여 날뛰고 신의 입에 재갈이 물려 있던 바로 그때 그 말을 해 주는 것이었다 ..  (73쪽)


 ‘알베르 카뮈 전집 20번’이 마무리되었다는 뜻으로 《시사평론》을 읽어치울 수 있습니다. 굳이 느낌글을 안 쓰고 소개글이나 추천글을 써도 되겠지요. 애써 내 삶과 넋과 말을 톺아보면서 이 책 하나를 받아들이지 않아도 돼요. 내 지식과 지성과 철학을 북돋우거나 자랑하려는 허울로 삼아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책 《시사평론》은 한국사람이 붙인 책이름이 ‘시사평론’이라지만, 정작 알베르 카뮈 님이 쓴 글에는 ‘사랑’이 감도는걸요. ‘사랑이야기’이지 ‘시사평론’이 아닌 《시사평론》입니다.


.. 아무리 봐도 스스로에게 편리한 것만을, 그것도 가장 유리한 때에만 공개하는 쪽을 선택한 것으로 보이는 정부는 책임이 크다. 그러나 그 책임이 아무리 크다 해도 기자들의 책임은 그보다 더 크다 ..  (145쪽)


 삶을 사랑하려는 카뮈 님 넋을 담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려는 카뮈 님 삶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무척 아쉽지만, 삶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말’이 제대로 살아숨쉬는가는 모릅니다. 알베르 카뮈 님이 프랑스말로 썼을 글은 프랑스사람들한테 ‘어떤 말’이었는지 모르거든요. 한국말로 옮겨진 《시사평론》에 담긴 ‘말’은 이 나라에서 ‘수수하게 살아가는 여느 사람들 말’하고 얼마나 가깝거나 이어지거나 맞닿는가를 알 수 없거든요.


.. 진정한 예술가들은 훌륭한 정치적 승리자는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상대편의 죽음을, 아, 나는 그걸 잘 알고 있다, 가볍게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말이다! 그들은 죽음의 편이 아니라 삶의 편이다. 그들은 법 쪽의 증인이 아니라 육체 쪽의 증인이다 ..  (276쪽)


 알베르 카뮈 님 책을 이제 와서 다시 읽는다면, 또 프랑스 아닌 한국에서 애써 알베르 카뮈 님 책을 새로 읽는다면, 지식이나 지성이나 진보나 개혁이나 사상이나 철학 때문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기나긴 나날과 머나먼 거리를 가로지르는 사랑을 담았으니, 이 사랑을 함께 나누는 아름다움을 빛내려고 다시 읽거나 새로 읽는 책이라고 느낍니다.

 그래요.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법이 아닌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렇지요. 예술을 모르는 여느 살림꾼 어머님들은 역사가 아닌 삶을 사랑합니다.

 나를 낳은 내 어머니는 역사에 이름이 남지 않습니다. 내 어머니는 이름값이나 돈이 아닌 ‘당신 아이 하나라는 어린 목숨’을 사랑했습니다. 알베르 카뮈 님을 낳은 어머님은 역사에 이름이 남을까요. 알베르 카뮈 님을 낳은 어머님을 낳은 어머님은, 또 이 어머님을 낳은 어머님은 역사이건 어디이건 이름을 남길 만할까요.

 사랑을 물려받아 사랑을 누렸기에 사랑을 글로 담습니다. 《시사평론》은 서로 아끼면서 활짝 웃는 살붙이들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4344.9.17.흙.ㅎㄲㅅㄱ)


― 시사평론 (알베르 카뮈 씀,김화영 옮김,책세상 펴냄,2009.12.10./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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