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혜련의 미래일기 - 쓰는 순간 인생이 바뀌는
조혜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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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오늘’을 사랑해요
 [책읽기 삶읽기 120] 조혜련, 《조혜련의 미래일기》(위즈덤하우스,2009)

 


  2009년 10월 1일에 1쇄를 찍은 《조혜련의 미래일기》(위즈덤하우스,2009)를 읽습니다. 내가 산 책은 2011년 10월 14일에 찍은 20쇄입니다. 이태 사이에 20쇄를 찍을 만큼 널리 사랑받은 책이기는 한데, 조혜련 님은 이 책 첫머리에 나오듯 ‘옆지기하고 오래오래 사이좋게 지내지’는 못하고 맙니다. 2012년 봄부터 가을까지 무척 고단한 나날을 보내셨어요.


  조혜련 님은 2012년 봄에 겪은 일을 ‘그린’ 적 있을까요. 마음앓이를 하고 툭탁거리는 어느 한때에, ‘더는 옆지기하고 함께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 적 있을까요.


.. 상상력에 한계를 긋고 현실을 고려하다 보니 미래를 상상하는 일이 조금도 신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지금 이 프로젝트가 끝이 아니고 이 결혼도 골인점이 아니며 자식이 명문대학을 들어간다고 해서 그것이 결코 끝은 아니다. 매 순간이 시작이고 출발이다 ..  (7, 25쪽)


  ‘미래일기’란 늘 씁니다. 즐겁게 떠올릴 앞날도 언제나 쓰지만, 고단하게 숨죽일 앞날도 언제나 써요. 나도 모르는 사이 터져나오는 한숨이 바로 ‘미래일기’가 됩니다. 이런 걱정 저런 근심이 곧바로 ‘미래일기’가 됩니다. 옆지기하고 툭탁거린다든지, 아이들 얼굴을 거의 못 보는 채 바깥일로 바삐 돌아다니는 삶이 고스란히 ‘미래일기’가 돼요.


.. 돈보다 명예보다 인기보다, 나에게 자극을 받아 다시 멋지게 일어서는 한 사람의 팬을 위해 달리는 거야 …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도 이런 추억을 선물하고 싶다. 다른 어떤 공부보다도 자연을 느끼고 자연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고 싶다 ..  (57, 128쪽)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생각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대로 내 모습이 늘 달라집니다. 웃자고 생각하며 빙그레 웃습니다. 빙그레 웃으며 스스로 하루를 밝힙니다. 하루를 밝히면서 시나브로 삶을 빛냅니다.


  어떤 무대에 서서 이름값을 날려야 ‘삶 빛내기’가 아닙니다. 삶을 빛내는 일이란, 내 옆지기와 아이들하고 맛난 밥을 알뜰히 차려 즐기는 일입니다. 전기밥솥한테 맡기는 밥이 아니라, 내 손으로 짓는 밥이 ‘삶 빛내기’입니다. 값진 요리를 전화 걸어 시켜서 먹기에 ‘삶 빛내기’가 아니에요. 달걀 한 알을 손수 부치고, 두부 한 모를 손수 끓여서 밥이랑 맛나게 먹을 때에 ‘삶 빛내기’가 돼요.


  오프라윈프리쇼에 나가야 꿈을 이루지 않습니다. 아이들과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으면 꿈을 이룹니다. 한국과 일본을 넘나드는 일은 ‘말 그대로’ ‘한국과 일본 넘나들기’예요. 가시밭길 헤치며 이루는 꿈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 넘나들며 연예인으로 일해서 돈을 벌기’일 뿐이에요.


  돈을 번다거나 연예인으로 일하는 삶이 좋고 나쁘다고 금을 그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즐거울 수 있으면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즐겁습니다. 스스로 즐거울 수 없다면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안 즐겁습니다.


  미래일기란 언제나 ‘오늘일기’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내 삶을 바로볼 수 있을 때에, 내 어제를 바로보고 내 앞날을 바로볼 수 있어요. 오늘 이 자리 내 삶을 바로보지 못한다면 ‘오늘일기’도 ‘어제일기’도 ‘앞날일기’도 쓸 수 없어요.


  밝게 뜨는 ‘오늘 햇살’을 실컷 누리셔요. 시원스레 불다가 스산하게 불기도 하는 ‘오늘 가을바람’을 마음껏 누리셔요. 누렇게 물들어 떨어지는 ‘오늘 가을잎’을 아낌없이 누리셔요.


  오늘 하루 내 삶을 누리면, 천천히 사랑이 가슴속 깊은 데에서 샘솟습니다. 사랑이 찬찬히 샘솟으면서 내 앞날이 환하게 열립니다. 내 어제 또한 환하게 걸어온 숲길이었구나 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 각종 고정관념과 편견에 갇혀서 안 보였을 뿐이지, 우리 자신을 진심으로 믿어 준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스스로를 믿는 한 원하는 어떤 모습으로도 될 수 있다고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 나는 앞으로도 계속 상상할 것이다. 폭력이나 제압으로 인한 통일이 아닌 비폭력 평화 통일이 되는 아름다운 온전한 대한민국의 그날을 ..  (144, 195쪽)


  오늘 하루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려요. 오늘 하루 하고 싶던 일과 놀이를 신나게 누려요. 오늘 하루 활짝 웃고 펑펑 뛰며 훨훨 날면서 살아요. 흙땅을 맨발로 밟아요. 흙기운이 내 몸으로 스며드는 느낌을 떠올려요. 흙 한 줌이 나무를 살리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는구나 하고 깨달아 봐요. 빗방울이 풀잎을 푸르게 돌보고, 바람 한 줌이 내 숨결로 스며들어 목숨을 살찌우는 줄 느껴 봐요.


  조혜련 님이 쓴 《조혜련의 미래일기》는 참으로 예쁜 책이라고 생각해요. 스스로 어제와 오늘과 모레를 사랑스레 돌보고픈 꿈을 즐겁게 잘 적은 책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말예요, 정작 조혜련 님 스스로 ‘즐기고픈 사랑’은 거의 한 줄로도 못 적었지 싶어요. 조혜련 님 스스로 나누거나 받거나 어깨동무하던 ‘고운 사랑’ 또한 거의 한 줄로도 못 나타냈지 싶어요.


  이제 다른 누구보다도 조혜련 님 스스로 《조혜련의 미래일기》를 새로 써야지 싶어요. 모든 것을 훌훌 내려놓고 첫마음이 무엇이었나 곱씹으면서 ‘오늘일기’를 쓰셔야지 싶어요. 된장국에 밥 말아 먹으며 기운을 차린 다음 기지개 우두둑 켜고는 다시금 연필을 손에 쥐어 보시기를 빌어요. (4345.11.4.해.ㅎㄲㅅㄱ)

 


― 조혜련의 미래일기 (조혜련 글,위즈덤하우스 펴냄,2009.10.1./12000원)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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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힘들면 연락해
김수미 지음 / 샘터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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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꾸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
 [책읽기 삶읽기 118] 김수미, 《얘들아, 힘들면 연락해!》(샘터,2009)

 


  시골집에 손님이 찾아옵니다. 여느 때에도 늘 새벽에 일어나서 아침에 차릴 밥을 이것저것 미리 손질해 놓지만, 손님이 찾아온 만큼 이모저모 더 마음을 써서 손질을 합니다. 집식구끼리 먹는 밥이라면 엊저녁 먹고 남은 찬밥이 있어도 아침에 그대로 먹지만, 손님이 온 만큼 아침밥은 달리 해야지 생각합니다. 어쨌든 따순 밥을 끓이고, 한편으로는 찬밥을 볶든지 지지든지 어떻게 끓이든지 할 생각입니다. 손님이 들고 온 먹을거리를 더 맛나게 먹자면 어떻게 할까 하고 생각합니다. 함께 찾아온 아이들은 도시내기라 풀밥 먹기가 익숙하지 않은데, 우리 식구 먹는 대로 풀을 밥상에 차리자면 힘들는지 몰라요. 그러면 이 아이들이 풀을 맛나게 먹도록 이끄는 길은 무엇일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 나 자신 우울증과 빙의를 앓으면서 자살 직전까지 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에 인생 후배들의 아픔에 누구보다 동병상련을 느끼고 있다. 개미는 바늘로만 찔러도 치명적이지만 코끼리에게는 그저 따끔할 뿐이다. 하지만 돌려 생각해 보자. 절벽에서 떨어지면 코끼리는 치명적이지만 개미는 끄떡없지 않은가? 연약해 보이지만 강인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세상 모든 개미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  (16쪽)


  동이 틉니다. 날이 밝습니다. 마을을 드나드는 멧새는 으레 우리 집 후박나무와 산초나무에 앉았다가 갑니다. 멧새와 들새는 우리 집뿐 아니라 이웃집에도 빠짐없이 들르지 싶습니다. 새를 쫓는 집은 없고 새를 미워하는 집은 없어요. 새들은 감나무에 앉아 감을 쪼아먹기도 하고, 후박나무 열매를 먹기도 했고, 후박씨를 먹든 산초열매를 먹든, 저희 마음껏 이 나무 저 나무에 앉습니다. 나뭇가지에 앉은 새들은 곱게 뽑는 목소리로 나긋나긋 새벽노래를 들려줍니다.


  아침에는 아침나절대로 아침노래를 듣습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멧새와 들새가 새벽과 아침과 낮과 저녁과 밤을 이으며 들려주는 노랫소리가 다 다릅니다. 고운 결로 새삼스레 들려주는 노래입니다.


  하루 흐름으로 보자면 동이 트며 온 고을이 환하게 빛날 무렵 새들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 먹이를 찾으며 비비배배 노래한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르게 바라보자면, 새들이 이슬 내린 깃을 털고 힘차게 일어나서 비비배배 노래하기에 아침햇살이 새삼스레 우리한테 찾아온달 수 있습니다. 마을 할머니와 할아버지 누구나 아직 동이 안 튼 새벽부터 일어나 하루를 열기에, 이러한 숨결과 손길을 받으며 아침햇볕이 즐거이 찾아온달 수도 있어요.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이른새벽에 조용히 생각에 젖습니다. 아직 새근새근 자며 고단한 몸을 쉬는 아이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깁니다. 우리 아이들과 손님 아이들은 모두 저희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받아먹고 자랍니다. 사랑을 나누어 주는 어버이와 함께 살아가며 무럭무럭 자랍니다.


  나는 내 어버이가 베푸는 사랑을 받아먹고 자랐습니다. 나 혼자 튼튼하고 씩씩하게 자라지 않았어요. 내 가슴속에서 샘솟는 사랑이 있어 내 자그마한 사랑이 내 어버이한테 새롭게 기운이 되기도 했을 테지만, 내 어버이가 나누어 주는 사랑이 있기에 내 작은 몸뚱이는 천천히 자랐어요.


  아이들은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받아먹으면서 큽니다. 이동안 아이들 나름대로 가슴속에서 사랑씨앗 살며시 심으며 저희 어버이한테 조그맣게 사랑을 나누어 줍니다. 서로 주고받기에 사랑이요, 서로 나누기에 사랑입니다. 서로 즐겁게 웃는 사랑이고, 서로 기쁘게 북돋우는 사랑입니다.


.. 엄니는 매일 마당에서 꽃에 물을 주시면서 혼자서 구시렁구시렁 이야기를 하곤 하셨는데 내가 엄니를 꼭 닮았다. 집 안만이 아니었다. 끝이 안 보이는 깨밭에는 작은 주머니만 한 연보라색 깨꽃이 주렁주렁 열리고, 원두막 위에는 하얀 박꽃이 춤을 추고, 밭고랑 사이사이 노오란 호박꽃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밭에 올라가면 보리밭 사이에 몰래 심었다는 시뻘건 양귀비꽃도 보였다 ..  (65쪽)


  밥을 예쁘게 차려서 즐거이 먹은 다음 무얼 할까 헤아립니다. 마을 고샅을 살짝 걷다가 바다에 함께 갈까 싶습니다. 바다는 여름철에 물에 첨벙 뛰어들어도 재미나지만, 가을이나 겨울에 차디찬 바닷물에 살며시 손을 담그다가 모래밭에서 달리고 주저앉아 바람을 듬뿍 쐬어도 재미납니다.


  말없이 바라보아도 좋은 바닷바람입니다. 가만히 맞아들여도 기쁜 바닷햇살입니다. 들에서는 들바람과 들햇살을 누립니다. 멧골에 오르면 멧바람과 멧햇살 누립니다.


  이야기가 찾아옵니다. 한 올 두 올 이야기 실타래가 바람에 실려 나한테 찾아옵니다. 석 올 넉 올 이야기 꾸러미가 햇살 따라 아이들한테 찾아듭니다. 풀과 나무는 모두 바람과 햇살과 빗물과 눈송이를 받아먹고 자랍니다. 어른인 나도, 우리 아이들도, 손님 아이들도, 누구나 바람과 햇살과 빗물과 눈송이가 있기에 다부지게 하루를 열 수 있습니다.


  꼭 무엇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종이상자 하나가 놀잇감이 됩니다. 반드시 무얼 사야 하지 않습니다. 풀잎 하나 뜯어서 먹을 수 있습니다. 꼭 어딘가 가야 하지 않습니다. 내 조그마한 보금자리가 숲이 되어 집식구 사랑을 보듬을 수 있습니다. 반드시 어떤 일을 해야 하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꿈을 꾸어요. 내 모습을 꿈꾸고 내 얼굴을 꿈꾸어요. 따스하고 너그러운 눈길과 손길과 마음길로 하루를 빛낼 수 있는 내 삶을 꿈꾸어요.


.. 나는 주로 여성들 위주로 모인 강연에서, 나의 행동이 가족들과 주위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가 그것이 메아리처럼 나에게 다시 돌아온다고 이야기한다 ..  (239쪽)


  김수미 님 이야기책 《얘들아, 힘들면 연락해!》(샘터,2009)를 읽습니다. 김수미 님이 내놓는 이야기책은 한결같습니다. 늘 당신 살아온 이야기를 담습니다. 언제나 당신 하루를 글로 적바림합니다. 굳이 소설을 쓸 까닭이 없어요. 누구라도 스스로 이녁 삶을 적바림하면 글이고 소설이고 문학이고 이루어집니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귀담아들어야 이야기를 쓸 수 있지 않아요. 내 삶을 찬찬히 살피면서 적바림할 때에도 이야기를 쓸 수 있어요.


  누가 나를 사랑해 주어야 내가 예쁜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누가 나를 사랑해 주었기에 내가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지 않습니다. 아니, 꼭 입으로 말하거나 글로 적어야 사랑이 되지 않아요. “널 사랑해.” 하고 말할 적에 사랑이지 않아요. 삶을 함께 누리면 돼요. 함께 누리는 삶이 사랑이에요. 함께 나누는 밥그릇 하나가 사랑이에요. 김치 한 접시가 사랑이에요. 국 한 모금이 사랑이에요. 늘 마시는 바람 한 줄기가 사랑이에요. 나한테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 한 그루가 사랑이에요. 구름 한 자락이 사랑이에요. 아침저녁으로 드리우는 노을이 사랑이에요. 풀벌레 한 마리 노랫가락이 사랑이에요. 빗물 한 방울이 사랑이에요.


  김수미 님은 꿈을 꿉니다. 꿈을 꾸기에 글을 씁니다. 김수미 님은 사랑을 합니다. 사랑을 하기에 김수님은 이녁 삶을 가장 꽃피울 만하다고 여긴 ‘연기’를 하면서 이녁 이웃과 동무한테 고운 사랑을 방긋방긋 웃음꽃으로 나누어 줍니다. (4345.10.29.달.ㅎㄲㅅㄱ)

 


― 얘들아, 힘들면 연락해! (김수미 글,샘터 펴냄,2009.6.15./12000원)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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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삐라로 묻어라 - 한국전쟁기 미국의 심리전
이임하 지음 / 철수와영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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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과 경쟁은 왜 생기는가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54] 이임하, 《적을 삐라로 묻어라》

 


- 책이름 : 적을 삐라로 묻어라
- 글 : 이임하
- 펴낸곳 : 철수와영희 (2012.10.19.)
- 책값 : 25000원

 


  두멧자락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깊은 밤에 까만 하늘을 점점이 빛내는 별무리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크고작게 보이는 별은 저마다 다른 빛을 뽐냅니다. 지구에서 퍽 밝게 보이는 별이 있고, 지구에서 하나도 안 보이는 별이 있어요. 지구에서 보이는 별이라 해서 ‘있는’ 별이고, 지구에서 안 보이는 별이라 해서 ‘없는’ 별은 아니에요.


  먼먼 옛날에는 저 별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합니다. 밤하늘 반짝이는 작은 점을 언제부터 누가 ‘별’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바라보았을까 궁금합니다. 밤하늘 반짝이는 별들마냥, 지구도 저 별에 깃들어 바라볼 때에는 똑같은 ‘별’인 줄 느끼는 사람은 예나 이제나 얼마나 되랴 궁금합니다.


  과학자뿐 아니라 여느 사람도 때때로 궁금하게 여길 텐데, 저 숱한 별들 가운데에는 지구처럼 온갖 목숨이 얼크러진 곳이 있겠지요. 어쩌면 지구별처럼 끔찍한 전쟁과 경쟁이 춤추는 곳이 있을는지 모르고, 지구별과 달리 온통 사랑과 믿음으로 이루어진 곳이 있을는지 몰라요. 지구별처럼 기계물질문명이 판치며 숲을 망가뜨리고 사람 스스로 사람을 깔보는 곳이 있을는지 모르며, 지구별과 달리 다 다른 목숨이 다 다른 목숨을 서로 아끼고 돌보는 곳이 있을는지 몰라요.


.. 극동사령부는 전쟁이 발발한 지 24시간도 안 되어 주한 미국 군사 고문단이 사용할 삐라를 준비했다. 최초의 심리전 작전은 6월 28일 공군 C-46 수송기로 ‘미국이 국제연합에 전쟁 개입과 원조를 요구했으므로 그동안 참고 저항하라’는 내용의 삐라를 뿌리면서 시작됐다 … 미국에서 온 의복과 선물을 받고 웃음이 떠나지 않는 한국의 고아 강구라는 아이를 언급하면서 이는 미국의 오랜 관습이라고 말한다. ‘인정 많은 미국인’이라는 이미지를 쌓으려 〈자유세계〉는 미군이 아이들을 돌보는 사진이나 원조하는 사진도 종종 실었다 … 1950년 11월까지 뿌려진 삐라는 1억 2000만 장이었다. 1951년 12월까지의 누적된 삐라 살포량이 9억 6000만 장이므로, 1951년 뿌려진 삐라는 1950년도의 7배가 넘는 8억 4000만 장가량이 되는 셈이다 ..  (22, 104, 251쪽)


  사람이 살아가는 곳에는 보금자리가 있습니다. 보금자리가 있는 곳에 천천히 마을이 이루어집니다. 이웃이 없더라도 내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살림집을 차츰 넓혀야 해요. 때로는 새 살림집을 지어야 해요. 다 큰 아이들은 스스로 짝을 맺기도 하고, 짝을 맺으며 새 아이를 낳기도 하겠지요.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어떻게 배우며 크는가에 따라 달라질 테지만, 사랑을 먹고 자라는 아이들은 사랑을 누리고 사랑을 펼쳐요. 사랑으로 자란 아이한테는 미움이나 다툼이 깃들지 않을 뿐더러, 미움도 다툼도 몰라요. 사랑보다 경쟁과 전쟁, 시험공부와 지식외우기 따위로 길들인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서 어른 나이와 몸집이 된 뒤에 경쟁과 전쟁을 드러내요. 어릴 적부터 시험공부와 지식외우기로 길든 어른이 이녁 아이한테도 똑같이 시험공부와 지식외우기를 물려줄밖에 없어요. 이것 말고는 모르거든요.


  전쟁이 터지는 싹은 바로 나한테 있습니다. 내가 어릴 적부터 무엇을 보고 느끼고 겪고 자랐는가에 따라 삶터를 이루는 얼거리가 달라집니다. 내 마음속에 싸움이나 미움이 또아리를 틀면, 이 싸움이나 미움이 차츰 커지면서 바깥으로 번져요. 어떤 우두머리 몇몇이 일으키는 싸움이나 미움이 아니에요. 우두머리 몇몇이 일으키는 싸움이나 미움이라 하더라도, 내 마음속에 사랑과 믿음만 자란다면, 어떠한 싸움이나 미움에도 휩쓸리지 않아요.


  맹자 어머니는 아이를 생각하며 삶자리를 자꾸 옮겼어요. 맹자 어머니는 이녁 아이도 이녁 아이라 하지만, 맹자 어머니 당신부터 ‘옳고 바르며 착하고 고운 삶’을 스스로 누리고 싶어요. 맹자 어머니 스스로 옳고 바르며 착하고 고운 삶을 누릴 때에 당신 아이한테도 옳고 바르며 착하고 고운 삶을 이야기할 수 있어요. 스스로 누리지 못하는 삶이라면 아이한테 이야기하지 못하고 물려주지 못하며 알려주지 못해요. 스스로 누리고 즐기는 삶결이 고스란히 아이한테 이어져요. 스스로 좋아하며 사랑하는 숨결이 하나하나 아이한테 대물림되어요. 돌이켜보면, 맹자 어머니는 아이를 낳아 돌보면서 ‘아이를 잘 가르치는 일’보다 ‘스스로 잘 살아가는 일’을 깨달았다고 할 만해요. ‘아이를 잘 가르치는 길’을 찾았다기보다 ‘스스로 삶을 잘 가꾸는 길’을 찾았다고 할 만해요.


.. 육군본부 심리전과에도 만화가 김용환을 비롯해 문학가 윤석중·신태환·민병태·정상충·심정섭 등이 소속되어 선전 활동에 참여했다. 육군본부에서는 〈사병만화〉를 발행했다. 일본 교토 미술전문학교에 다니던 김종래도 정보 계통의 심리전 관련 부서에서 일했는데 그가 하는 일은 지리산 빨치산을 회유하는 삐라를 만드는 일이었다 …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의 명의로 뿌려진 이 안전보장 증명서는 위협과 고압적인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 나아가 투항은 정의와 대의를 위한 길이기에 귀순할 때 중국군을 잡아오거나 목을 잘라오면 특별히 후대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  (64, 110쪽)


  자동차 오가는 소리를 늘 듣는 도시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자동차를 아주 마땅하게 받아들입니다. 매캐한 바람이 가득한 도시에서 공장이나 아파트나 학교나 공공기관 시설을 늘 마주하는 아이들은 이 같은 건물을 아주 마땅하게 받아들입니다.


  숲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숲내음과 숲바람을 아주 마땅하게 받아들입니다. 바닷가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갯내음과 바닷바람을 아주 마땅하게 받아들입니다. 들판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신나게 뒹굴거나 구르는 들살이를 아주 마땅하게 받아들입니다.


  어린이집에서 영어노래를 부르고 영어만화를 보며 영어그림책을 배우는 아이들은 무엇을 몸으로 받아들일까요. 초등학교부터 시험공부에 얽매인 채 지식과 교과서를 머리에 한가득 집어넣는 아이들은 무엇을 마음으로 받아들일까요.


  아이들은 누구나 ‘내 어버이 대학교 졸업장’을 따지지 않습니다. 아기가 젖을 물며 ‘내 어머니가 무슨 대학교를 나왔을까?’ 하고 묻지 않습니다. 다섯 살이든 일곱 살이든 열 살이든, 아이들이 밥을 먹으면서 밥상 차린 어버이한테 ‘아버지는 어떤 대학교 어떤 학과를 다녔어요?’ 하고 묻지 않아요.
  무등을 타는 아이들이 어버이한테 어떤 책을 읽었느냐고 물을 까닭이 없습니다. 어버이 손을 잡고 들길을 걷는 아이들이 어버이한테 돈을 얼마나 버느냐고 물을 까닭이 없습니다. 깊은 밤 새근새근 잠드는 아이들이 자장노래 부르는 어버이한테 몸매 치수를 물을 까닭이 없습니다.


  어른들은 스스로 무엇을 알고 느끼며 살아야 즐거울까요. 아이들은 스스로 무엇을 알고 느끼며 살아가기에 즐겁게 뛰놀까요.


.. 해방 뒤 미 공보원은 〈월간 아메리카〉에 미국이 기존 자유방임주의적 자본주의와 전체주의적 공산주의를 극복한 체제라고 알리는 글들을 실었다. 이 글들은 미국을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하며 국민의 자유를 보장하고 복지를 책임지는 국가로 소개했다. 미국은 기업도, 노동자도, 연방정부도 경제제도를 독자적으로 농단하지 못하며 경제 발전을 위해 새로운 권력관계를 형성한 나라였다(고 스스로 밝힌 셈이다) … 1951년 심리전 비용은 3억 달러가량이 들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며, 삐라 살포량만을 비교하면 1억 8000만 달러가량이 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살포 방식에 따른 비용, 라디오 확성기 방송 이용 따위를 감안할 때 1951년 소요된 심리전 비용은 적어도 2억 달러를 넘어 3억 달러에 가까울 것이다. 심리전에 들인 단순 추정 비용도 2년 동안 유엔이 한국에서 사용했다는 원조와 재건 비용보다 많다 ..  (207, 252쪽)


  가을을 맞이해 온 시골마다 나락을 베어 털고 말리기에 부산합니다. 가을을 맞이한 시골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집에 들러붙을 겨를이 없습니다. 하루 내내 들판에서 들일을 하고 들밥을 먹습니다.


  가을 들판을 바라봅니다. 어느 들판에나 할머니와 할아버지만 보일 뿐, 젊은 가시내나 사내는 눈 씻고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어느 들판에나 어린이와 푸름이는 그림자조차 안 보입니다. 어린이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나 보육원으로 가고, 푸름이는 중학교나 고등학교로 갑니다. 시골마을조차 ‘시골아이’ 아닌 ‘학교아이’입니다. 아이들은 바쁜 가을일을 거들지 않습니다. 어쩌면, 바쁜 가을일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리라 느낍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치르는 중간시험이나 기말시험이나 학력평가나 수능시험이나 모의시험이 대수롭습니다. 날마다 먹는 밥을 갈무리하는 가을일은 아이들한테 대수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들판에서 일한다지만, 아이들 어머니와 아버지는 들판에 없거든요. 아이들 어머니와 아버지는 회사에 있거나 공장에 있습니다. 아이들 어머니와 아버지는 들판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채 살아갑니다.


  뿌리를 캐면, 아이들 할머니와 할아버지부터 이녁 아이들을 들판에서 내쫓고 학교로 보냈습니다. 아이들이 들판을 떠나 학교를 다녀 졸업장을 거머쥐어야 비로소 ‘고된 들일’에서 벗어나 느긋하게 돈을 많이 벌며 살아갈 수 있으리라 여겼어요. 아니, 이렇게 배웠습니다. 아이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학교 보내기’가 ‘아이키우기’라고 배웠어요. 나라가 이렇게 가르치고, 정부가 이렇게 가르쳐요. 사회가 이처럼 가르치고, 신문과 방송이 이렇게 가르쳐요.


  아이들은 반드시 제도권학교에 다녀야 하는 줄 여겨요. 아이들이 제도권학교에 들어가서 무엇을 배우는 줄 하나도 모르면서, 그저 아이들을 제도권학교에 넣어요. 아이들이 제도권학교에서 교과서 지식만 외우면서 시험공부만 하는 줄 헤아리지 못해요. 아이들이 학교 졸업장은 여럿 거머쥐지만, 정작 삶을 일구는 슬기는 조금도 살피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며 누리지 못하는 줄 깨닫지 못해요.


.. 귀환계획은 민간인을 포로로 다루고 억류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민간인을 포로와 같이 다룬 까닭은 근거 없는 의심에서 출발했다. 얼굴색만으로 적을 구분할 수 없었던 미군은 민간인을 근거 없이 의심했고, 이 의심은 한국전쟁 내내 일어났다. 피난민의 이동 금지나 피난민 심사와 수용소 운용은 모두 여기에서 출발했다 … 학교라는 공간에서 심리전은 다시 생산되고 심리전에서 말해진 가치들이 살아났다. 학교에서 심리전을 이용하는 방식은 아이들이 즐기는 노래나 놀이로 삐라를 살포하는 형태와 교과서로 하는 학습이었다 ..  (229, 267쪽)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되면, 나라에서 운동경기를 꾀하든 전쟁을 꾀하든 ‘내 편 이겨라!’ 하고 외칩니다. 나라에서 운동경기를 괜히 꾀하지 않습니다. 나라에서 제도권교육을 괜히 의무교육으로 시키지 않습니다. 나라에서 제도권교육을 나라돈으로 베푸는 줄 잘못 알지만, 나라돈이란 바로 ‘내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요, 나라님은 ‘내 돈’으로 이녁 일삯을 챙기고 이녁 큰집을 짓는 한편, ‘내 돈 가운데 부스러기 얼마쯤’으로 제도권학교 틀을 세웁니다. 그러니까,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교과서를 만든 사람도 바로 나요, 입시지옥을 만든 사람도 바로 나예요. 교과서 굴레에서 벗어나야 할 사람은 바로 나이며, 입시지옥을 털어낼 사람도 바로 나입니다. 한 마디로 간추린다면,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 벌어진다고 하는 전쟁은 ‘우두머리가 우리들 모두를 길들여서 우리 스스로 치고받도록 부추기는 일’입니다. 싸우는 사람도, 죽는 사람도, 다치는 사람도, 적을 만들고 적을 미워하는 사람도, 바로 나예요. 잃는 사람도, 빼앗기는 사람도, 슬픈 사람도, 괴로운 사람도, 바로 나예요.


  고속도로를 달릴 수 있기에 내 삶이 나아지지 않아요. 원자력발전소나 화력발전소가 들어서기에 내 삶이 좋아지지 않아요. 올림픽이나 월드컵을 이 나라에서 치르기에 내 삶이 발돋움하지 않아요. 경제발전을 이룬대서 내 삶이 훌륭해지지 않아요.


  나무 한 그루와 함께 풀 한 포기를 가꿀 때에 내 삶이 나아져요. 풀벌레와 멧새 노랫소리를 들을 때에 내 삶이 좋아져요. 들길을 아이 손 맞잡고 거닐 때에 내 삶이 발돋움해요. 낮하늘이 얼마나 파란가 느끼고 밤하늘이 얼마나 까만가 깨달을 적에 비로소 내 삶이 훌륭하게 거듭나요.


  제도권학교를 세워서 의무처럼 다니게 하는 정부란 곧 제도권정부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옭아매는 제도권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사랑하지 못하게끔 가로막는 제도권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돌보면서 가꾸고 북돋우며 아끼는 길을 틀어막는 제도권입니다.


  전쟁무기와 군대는 나라는커녕 마을이나 보금자리를 지키지 않아요. 화학방정식과 화학약품과 가공식품은 아이 목숨도 어른 목숨도 건사하지 않아요. 졸업장과 계급장과 신분증은 사람들 가슴에 깃든 사랑을 쳐다보지 않아요.


  사람이 태어나 살아가는 뜻이라면 오직 하나 사랑 때문이에요. 사랑을 누리기에 즐겁고, 사랑을 느끼기에 즐거우며, 사랑을 나누기에 즐겁습니다. 오직 사랑 하나를 누리고 느끼며 나누려고 저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요. 오직 사랑 하나 빛내고 빚으며 돌보려고 저마다 새로운 숨결을 받아 태어나요.


  내 이웃을 적으로 삼아 죽이려 하는 전쟁이나 경쟁은 사랑이 아니에요. 내 이웃 숨결을 끊는 사람은 내 숨결 또한 끊는 꼴이에요. 내 옆에는 적 아닌 이웃이 있고, 내 가슴속에는 하느님이 깃들듯 내 이웃 가슴에도 하느님이 깃들어요. 사람이 살아가는 길이란, 나를 옳게 바라보면서 나를 사랑하는 길이요, 나를 옳게 바라보고 사랑하듯 내 이웃과 동무 모두 옳게 바라보며 사랑하는 길이에요.


.. 교과서, 나아가 국가는 나라, 겨레, 국가 같은 추상적인 관념으로 포장하여 아이(국민)들로 하여금 끝없는 충성과 희생을 요구했다. 나라와 민족, 세계 같은 추상적인 거대담론을 끊임없이 들먹임으로써 비록 어리지만 대단히 중요한 일에 참여한다는 허위의식을 어린이들에게 심어 주고 현실에 대한 성찰과 비판의 계기를 제거하고 있다 … 삐라는 국가가 없으면 개인도 없기 때문에 국가를 위해 아낌없이 희생하라고 했고, 공산주의는 애국심이나 애국주의 사상이 없기 때문에 불쌍하다고 했다 … 어려서부터 남을 짓밟고 성공하는 것이 유일한 가치이자 생존 방법이라고 배우고 그 결과를 직접 눈으로 보게 되는 현실, 그런 상황에서 더 무엇을 기대하느냐는 반문은 나를 비롯한 대부분 사람들을 당황하게 한다. 왜 그럴까? 한국 사회는 무조건 1인자가 되어야 한다 … 남을 짓밟고 성공해 1인자가 되어야 한다는 가치가 지금 한국 사회에서 지지받는 까닭은 전쟁 경험과 학습받은 냉전 이데올로기 때문이기도 하다 … 냉전세대는 성인이 되어서도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진리로 알고 지내왔다 ..  (290, 313, 322, 437쪽)


  이임하 님이 쓴 인문책 《적을 삐라로 묻어라》(철수와영희,2012)를 읽습니다. 한국전쟁 무렵 미국 군대가 한국땅 곳곳에 뿌린 삐라를 들추어 냅니다. 이임하 님은 삐라에서 ‘삶 발자국’을 하나하나 읽어내고 되새깁니다. 나라와 나라, 또는 정부와 정부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쟁 속살 가운데 아주 작은 구석인 ‘심리 전쟁’, 이 가운데에서도 ‘삐라 뿌리기’가 어떠한 모습인가를 차근차근 밝힙니다. 전쟁에 휩쓸리거나 휘둘리는 사람들 머리와 마음이 어떻게 길들여지는가를 들려주고, 전쟁을 일으키거나 부채질하는 권력자는 무엇을 꾀하거나 노리는가를 슬그머니 보여줍니다.


  오늘날 제도권사회는 진작 만들어진 뼈대입니다. 갑자기 나타난 뼈대가 아니에요. 천민자본주의라 하든 신자유주의라 하든 자유무역협정이든 무엇이든, 하루아침에 짠 하고 나타나지 않아요. 먼먼 옛날부터 천천히 이빨을 드러내며 스며들어요. 오랜 나날에 걸쳐 사람들을 홀리고 이끌며 가두어요.


  시골사람이 왜 도시로 빠져나갈까요. 시골사람을 왜 도시로 잡아들일까요. 시골에는 왜 할머니 할아버지만 남길까요. 왜 젊은 사람은 흙을 안 만지면서 밥을 먹는 사회 얼거리를 만들까요. 왜 젊은이와 푸름이와 어린이 모두 흙일을 모르도록 교과서를 짜고 신문·방송을 엮으며 책을 만들까요. 왜 사람들 스스로 옷·밥·집을 못 빚고 못 누리도록 내몰까요. 왜 모든 일을 돈으로 하도록 만들고, 왜 돈이 없으면 굶어죽기라도 한다는 듯 가르칠까요. 왜 돈버는 일자리만 이야기하고, 삶을 짓는 꿈과 사랑은 조금도 이야기하지 못하도록 꽁꽁 틀어막을까요.


.. 삐라의 내용을 들으면 미국적 신조는 결국 ‘미국인’에게만 적용됨을 알 수 있다. ‘자유세계’에서의 최고의 모델로 선전하는 미국식 모델은 미국을 뺀 다른 곳에서는 선언의 수준에 머물렀다 … 한국전쟁을 필두로 해서 냉전에 기반한 그 어떤 전쟁도 인류가 지향해야 할 진보적 가치를 생산해내지 않았다 ..  (421, 429쪽)


  한국전쟁으로 한국땅이 짓밟히고 앓던 무렵, 미국 군대는 삐라로 한국땅을 덮었다고 합니다. 끔찍하도록 뿌려댄 삐라는 똥종이로도 쓰이고 편지종이로도 쓰였답니다.


  입시전쟁과 취업전쟁과 생존전쟁이 벌어지는 오늘날 한국땅은 누가 어느 곳을 어떻게 짓밟는다고 할 만할까 헤아려 봅니다. 오늘날 이 사회는 무엇으로 뒤덮였다고 할 만할까 생각해 봅니다. 여기저기 넘실거리는 돈은 어떻게 쓰이는가요. 곳곳에서 출렁거리는 졸업장과 자격증과 신분증은 무엇을 보여주는가요.


  《적을 삐라로 묻어라》를 쓴 이임하 님은 당신 아이가 ‘제도권학교’에 시달려 아파하는 모습을 아주 어렴풋이 느꼈다고 말합니다. 이 책을 내놓고 나서는 ‘어렴풋이’에서 ‘또렷이’로 달라졌을까 모르겠습니다. 이임하 님 아이가 제도권학교 아닌 대안학교를 다니고 싶다 스스로 말한다는데, 그러면 이임하 님이 살아가는 곳은 어떤 데인가 궁금합니다. 글쓴이 이임하 님은 ‘제도권’에서 살아가나요, ‘대안’에서 살아가나요. 이임하 님 아이가 찾아나서려는 ‘제도권’과 ‘대안’ 사이에는 어떤 삶이 있나요. 이임하 님은 스스로 어느 삶터에서 사랑을 일구며 누리고 나눌 수 있는가요. 사람은 ‘제도권’에서 살아야 사람일까요, ‘대안’에서 살아야 사람일까요, 아니면 ‘다른 어느 보금자리’를 느끼고 찾을 때에 사람일까요.


  온갖 무기가 춤추는 전쟁통에는 삐라에 묻힌 사람들이, 온갖 숫자와 성적이 판치는 사회에서는 돈에 묻힌 채 허우적거립니다. (4345.10.16.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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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10-16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졸업장과 계급장과 신분증은 사람들 가슴에 깃든 사랑을 쳐다보지 않아요."

요즘 대학생들은 졸업장에 자격증이 될 만한 이력까지 쌓느라 참 바쁘게 살고 진정한 친구를 갖기가 힘든 것 같더군요. 가까이 있는 친구들이 모두 경쟁자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불행한 학생들입니다.
다음의 글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나무 한 그루와 함께 풀 한 포기를 가꿀 때에 내 삶이 나아져요. 풀벌레와 멧새 노랫소리를 들을 때에 내 삶이 좋아져요. 들길을 아이 손 맞잡고 거닐 때에 내 삶이 발돋움해요. 낮하늘이 얼마나 파란가 느끼고 밤하늘이 얼마나 까만가 깨달을 적에 비로소 내 삶이 훌륭하게 거듭나요."

숲노래 2012-10-16 12:52   좋아요 0 | URL
사람들이 이러한 책을 '지식'이나 '정보'로만 여기지 말고, 왜 이러한 책을 써서 내놓아서 나누는가 하는 '밑뜻'을 잘 새겨서, 스스로 아름다운 삶을 일굴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쁘랴 싶어요...
 
변방을 찾아서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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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에서 태어나는 새 숨결
 [책읽기 삶읽기 116] 신영복, 《변방을 찾아서》(돌베개,2012)

 


  “‘변방을 찾아가는 길’이란 결코 멀고 궁벽한 곳을 찾아가는 것이 아님을, 각성과 결별 그리고 새로운 시작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바로 변방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144쪽).”고 하는 이야기로 마무리를 짓는 신영복 님 책 《변방을 찾아서》(돌베개,2012)를 읽습니다. 신영복 님은 당신 글씨가 걸린 ‘변방’을 찾아 먼길 나들이를 했다는데, ‘변방(邊方)’은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가장자리 지역”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 (괴산) 거리의 가로등에도 고추와 임꺽정이 올라서 있다. 정작 소설 《임꺽정》의 문학적 위상이 어떤 것인지는 관심이 없다. 고추를 먹으면 임꺽정처럼 힘이 넘친다는 마케팅의 소재로 남아 있을 뿐이다 ..  (11쪽)


  신영복 님은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뒤 서울에 있는 대학교로 들어갔고, 감옥에서 스무 해를 살다가 나온 다음에는, 내처 서울 쪽에서 살아가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곧, 신영복 님한테 ‘한복판(중심)’은 서울이 되고, 고향 밀양은 ‘변두리’가 되었겠지요.


  나는 인천에서 나고 자라 서울로 갔고, 서울에서 한동안 대학교를 다니거나 출판사에서 일했지만, 이내 대학교는 그만두고 책일 또한 모두 접고서 고향 인천으로 돌아갔다가, 고향에서도 멀어진 시골로 삶터를 옮깁니다. 곧, 나한테 한복판은 시골이 되고, 서울이나 인천은 변두리가 됩니다.


.. 우리가 찾아간 서정분교는 생각보다 아름다웠다. 놀라운 것은 학교 전체에서 풍겨 오는 풋풋한 흙냄새였다. 서울의 학교 운동장에는 없는 냄새였다 … (오대산 상원사) 종소리는 나를 깨뜨리고 멀리 오대산 전체를 품에 안았다 ..  (40, 100쪽)


  서울이나 인천에서 살아가는 사람한테 ‘내 삶터’는 변두리입니다. 부산에서든 대전에서든, 또는 춘천이나 순천이나 광주나 여수에서조차 ‘내 삶터 시골’은 변두리예요. 더욱이, 우리 식구 살아가는 전라남도 고흥군으로 칠 때에, 고흥읍에서 보아도 우리 식구 깃든 도화면 신호리 동백마을은 한참 깊숙하게 들어간 ‘외딴 곳(변두리)’이에요. 이제 우리 마을 앞으로도 군내버스가 다니지만, 그리 멀지 않던 예전까지 우리 마을 앞에는 찻길이 없어 어떠한 자동차도 못 들어왔다고 하더군요.


  시골에서 네 식구 오순도순 툭탁툭탁 살아가며 생각합니다. 우리들한테 시골자락은 ‘한복판’입니다. 우리들한테 서울이나 도시는 ‘외딴 곳(변두리)’입니다. 우리 식구는 한복판인 시골자락에서 웃고 떠들며 노래하며 살아가면 즐겁습니다. 굳이 외딴 데까지 찾아갈 일이 없어요. 햇살을 누리고 바람을 마시며 냇물을 즐기는 한복판 보금자리가 좋습니다. 풀을 뜯고 나무를 어루만지며 멧새와 풀벌레 노랫소리를 온몸으로 맞아들이는 시골자락 한복판 보금자리가 예쁘다고 느낍니다.


  시골에서 태어나는 새 숨결을 생각합니다. 시골에서 자라나는 새 목소리를 헤아립니다. 시골에서 무럭무럭 크는 새 사랑을 그립니다. 시골에서 시나브로 일구는 새 손길과 눈길을 돌아봅니다.


  깊은 가을날 좋은 볕과 바람과 소리와 빛깔과 내음을 마시고 먹습니다. 마을마다 천천히 익는 감알을 바라보며 배부릅니다. 날마다 더 짙고 환하게 무르익는 나락을 바라보며 흐뭇합니다. 내가 안 심고 내가 안 베는 나락이지만, 이웃 할머니 할아버지 나락논이 참 곱다고 느낍니다.


  누구인지 몰라도, 누군가 이 노오란 나락을 빻아 밥을 지어 먹겠지요. 누구인지 몰라도, 누군가 이 노오란 나락에 깃든 해님과 달님과 물님과 별님과 바람님과 흙님을 몸으로 받아들이겠지요. 시골에서 지내든 도시에서 지내든, 모든 고운 넋 깃든 나락 한 알을 먹으며 스스로 우주가 되고 스스로 빛이 되겠지요.


..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른 오죽헌은 그 규모부터 대궐같이 성역화되어 있었다. 주차장에 세워진 관광버스와 승용차들이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 (홍명희) 문학비는 주차장이 되어 있는 텅 빈 제월대 광장 가장자리에서 혼자 가을볕을 안고 있었다 ..  (56, 79쪽)


  이야기책 《변방을 찾아서》는 ‘변방’ 또는 ‘변두리’를 찾아간다고 글을 쓰지만, 시골사람 눈높이에서 바라보자면, 그예 ‘시골’ 나들이를 하는 셈이로구나 싶습니다. 그래요, 시골 나들이예요. “시골을 찾아서” 도시를 떠나요. 아주 살짝 시골에 머물다 도시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흙내음’을 맡고 ‘햇볕’을 쬐며 ‘바람’을 마시다가는 ‘냇물’에 손을 적시고 ‘나무그늘’을 누리려고 시골로 와요. 시골에 참말 살짝 머물다가 이내 도시로 간다 하지만, 시골에서 슬기를 깨우치고 생각을 빛내요.


.. 내가 그동안의 경험에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자료 수집과 집필 구상 등 준비를 많이 할수록 틀에 갇힌다는 사실이다 ..  (12쪽)


  뜻있는 이들이 참다운 한복판에 삶터를 꾸리면 기쁜 일이 되리라 생각해요. 겉치레나 겉꾸밈 같은 한복판이 아니라, 참답고 착하며 아름다운 한복판을 가슴 깊이 느끼면서 뜻있는 이들 좋은 보금자리가 좋은 마을이 되고 좋은 지구별 쉼터가 되도록 마음을 기울이면 기쁘리라 생각해요.


  도시가 복닥거리고 어수선하다고 말하면서, 정작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 모두 도시에서 스스로 복닥거리면서 어수선하게 살아가잖아요. 도시에서 사람들이 아웅다웅 치고박고 다툰다 하면서, 막상 이처럼 말하는 사람들 모두 도시에서 스스로 아웅다웅 치고박고 다투면서 살아가고 말아요.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기를 빌어요. 서로 믿고 아끼며 지내기를 빌어요. 서로 돕고 어깨동무하며 살아가기를 빌어요. 서로 좋아하고 서로 웃으며 지내기를 빌어요.


  시골에서 만나요. 나는 이쪽 시골에서 살아갈 테니, 당신은 저쪽 시골에서 살아가셔요. 서로서로 홀가분한 마음으로 마실을 다녀요. 나는 오늘 걸어서 당신한테 찾아갈 테니, 당신은 모레에 자전거를 타고 마실을 오셔요. 나는 또 글피에 당신한테 자전거수레에 아이들 태우고 마실을 갈 테니, 당신은 또 이레 뒤에 식구들과 들길을 천천히 노래를 부르며 걸어서 찾아오셔요. 환하게 밝는 아침햇살 맞으며 길을 나서요. 어둑어둑 땅거미 느끼며 밥 한 그릇 나누어요. (4345.9.25.불.ㅎㄲㅅㄱ)


― 변방을 찾아서 (신영복 글,돌베개 펴냄,2012.5.21./9000원)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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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09-25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저자의 책인가요? 이 책 좋았는데...

내가 그동안의 경험에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자료 수집과 집필 구상 등 준비를 많이 할수록 틀에 갇힌다는 사실이다 .. (12쪽)
...그런거군요.

"시골에서 네 식구 오순도순 툭탁툭탁 살아가며 생각합니다 "- 행복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집니다. ^^

숲노래 2012-09-25 18:01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밑줄을 그은 대목 몇 군데를 빼고는
'글쓴이가 있는 이곳(중심)'과 '글쓴이가 없는 저곳(변방)'이
어떻게 어깨동무하면서 함께 좋은 삶을 빚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러나지 않더라고요.

시골(변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도시(중심)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손님으로 맞이하는데,
시골(변방)에 올 때면 다들 시골(변방)이 좋거나 훌륭하다 말하지만,
정작 도시(중심)를 떠나 시골(변방)로 삶터나 일터를
옮기는 일은 없어요.

언제나 '여행 이야기'로만 남는다고 할까요.

여행 뒷이야기를 넘어
스스로 어떤 삶을 새롭게 빚는다 하는 느낌과 마음을
글에 드러내지 못한다면...
가볍게 읽고 덮은 다음에 그저 그렇구나... 하고 생각해요...
 
잃어버린 여행가방 - 박완서 기행산문집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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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잃어버린 글과 생각
 [책읽기 삶읽기 115] 박완서, 《잃어버린 여행가방》(실천문학사,2005)

 


  자가용을 몰지 않는 우리 식구는 다 함께 나들이를 갈 때에 언제나 커다란 가방을 하나 메고, 손에는 자그마한 가방을 듭니다. 커다란 가방에는 아이들 옷가지를 챙기고, 자그마한 가방에는 아이들 먹을거리를 챙깁니다. 등에 메는 커다란 가방에는 옷걸이를 잔뜩 챙깁니다. 우리 식구가 어디에 머무를 때에 작은아이 기저귀와 바지를 빨래해야 하고, 빨래한 옷가지는 옷걸이에 꿰어 널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크든 작든, 아직 아이들 스스로 저희 가방을 메면서 저희 옷가지를 챙길 만한 나이가 아니니, 어버이가 모든 짐을 알뜰히 꾸립니다.


  어디를 다니든, 내 옷가지는 아주 단출합니다. 웃도리와 반바지 한 벌만 챙깁니다. 겨울에 길을 나서더라도 내 긴바지는 안 챙깁니다. 겨울에는 아이들 옷가지가 두툼해지는 만큼 가방 자리를 더 차지해요. 내 옷가지를 되도록 줄이며 아이들 옷가지를 한 벌이라도 더 챙깁니다.


  애써 챙긴 아이들 옷가지라 하지만, 나들이를 마치고 돌아오기까지 ‘입히지 못한 옷’도 꽤 되곤 합니다. 그러나 이 ‘입히지 못한 옷’을 안 챙길 수 없어요. 아이들이 이곳저곳에서 개구지게 뛰놀며 언제 어느 옷을 얼마나 더럽힐는지 모르거든요. 나와 옆지기는 아이들이 어디에서든 마음놓고 뛰놀도록 두면서 지켜보기에, 아이들이 신나게 놀며 땀에 옴팡 젖거나 이래저래 지저분해지면 서슴없이 갈아입힙니다. 갈아입히는 옷이 많이 나오면 많이 나오는 대로 빨래하고, 갈아입히는 옷이 적게 나오면 이러한 대로 빨래해요.


  이제 여름이 저물고 가을이 찾아들며 선선한 날인 터라, 시외버스나 기차에서 에어컨 바람이 어떻게 나올는지 모르기도 해서, 두 아이와 옆지기가 덮어야 할 수 있는 담요를 석 장 챙깁니다. 하룻밤 묵을 곳에 손닦는천이 제대로 있을는지 모르니, 손닦는천을 넉 장 챙깁니다. 오줌을 아직 안 가리는 작은아이가 방바닥에 오줌을 지르면 닦을 때에 쓰자고 걸레를 두 장 챙깁니다. 천기저귀는 더 넉넉히 챙깁니다. 마실물은 두 병 챙깁니다. 여러모로 가방이 커다랗고 무겁습니다.


.. 시골 바람이란 소리가 어찌나 듣기 좋던지 선뜻 그러자고 했다 … 친구의 잘못이었는지 고의였는지 광주에서 해남까지의 장거리도 직행버스도 못 타고 수도 없이 정거하는 그냥 시외버스를 타게 됐다. 그러나 그동안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조금도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해 온 여행은 과정을 무시한 목적지 위주의 여행이었다. 그게 얼마나 바보 여행이었던가를 알 것 같았다 … 자연은 위대한 영혼을 낳기도 하지만, 위대한 영혼 또한 자연의 정기가 되어 자연을 빛나게 한다 ..  (9, 11∼12, 22쪽)


  나한테 옆지기도 아이들도 없던 지난날, 내 가방에는 오직 책이랑 사진기만 들었습니다. 홀로 살아가던 내 지난날, 집을 떠나 마실길에 오르면, 가방은 마실길에 읽을 책이 있을 뿐, 아직 홀쭉합니다. 마실길에 헌책방을 들르면서 가방은 차츰 무거워집니다. 홀로 다니던 지난날 내 마실길에는 언제나 자전거를 몰았습니다. 처음에는 가벼운 자전거 나들이라 하지만, 차츰 무거운 자전거 나들이가 됩니다. 그래도 나는 늘 씩씩하고 즐겁게 자전거를 달렸어요. 책으로 꽉 찬 커다란 가방을 빙긋빙긋 웃으며 짊어지고 자전거를 달렸어요. 오르막도 내리막도 즐겁게 달립니다. 집으로 돌아와 자전거를 세우고 가방을 내리면 등때기가 없는 듯하고, 다리도 없는 듯합니다. 찬물로 한 차례 씻고 드러누우면 이런 하늘나라가 따로 없네, 하고 생각합니다. 마실길에 장만한 새로운 책들을 하나하나 꺼내며 괜히 또 웃습니다.


  큰아이와 작은아이는 새근새근 잡니다. 하룻밤 밖에서 묵는 마실길이었는데, 오가느라 시외버스와 기차와 택시를 참 오래 타느라 모두 지쳤겠지요. 느즈막하게 넉넉히 자야겠지요.


  곰곰이 돌이켜봅니다. 아이들은 딱히 걱정을 하면서 다니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옷이 더러워지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냥 놉니다. 그냥 옷을 갈아입습니다. 그냥 씻습니다.


  홀가분한 넋이요 몸이기에, 어디에서라도 해맑게 웃으면서 뛰놀 만하리라 느낍니다. 나들이를 다니는 어른도 스스로 홀가분한 넋이 된다면, 가방이 제아무리 무겁다 하더라도 아이와 함께 홀가분할 수 있으리라 느낍니다.


  왜냐하면, 서로 즐기려고 다니는 나들이예요. 서로 웃으려고 다니는 나들이예요. 서로 사랑하고 좋아하려는 꿈을 키우는 나들이예요. 짐을 많이 짊어져서 힘들지 않느냐구요? 글쎄요, 어깨가 빠질 듯한 느낌은 들겠지요. 그러나, 짐이 무겁다뿐, 나들이가 고단할 까닭은 없어요. 설레는 마음과 두근거리는 몸입니다. 꿈꾸는 마음과 사랑하는 몸입니다.


.. 아침에 일어나 보니, 북경역이 바라다보였고, 큰길을 가득 메운 자전거의 흐름이 말할 수 없이 유연했다. 고요하고 느긋하면서도 생기가 넘쳐 보였다. 끝없이 흐르는 반짝이는 은빛 바퀴와 아침 바람에 나부끼는 머릿결과 색색가지 고운 치맛자락을 바라보면서, 만약 저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 대신에 자동차를 한 대씩 몰고 출근을 하게 된다면, 하고 상상하니 끔찍한 일로 여겨졌다 … 땅의 숨결이란 무엇인가. 나무와 풀과 푸성귀의 씨앗을 품고 싹트게 하고 밀어올리는 거대한 에너지가 아닌가 ..  (75, 107쪽)


  박완서 님이 쓴 글을 그러모은 《잃어버린 여행가방》(실천문학사,2005)을 읽습니다. 할머니 나이가 되어 ‘여행가방’을 꾸려 나들이 다닌 이야기를 적바림한 책입니다. 1997년에 한 번 나온 적 있고, 2005년에 다시 나온 이야기꾸러미입니다. 2012년에 이르러 이 이야기꾸러미를 비로소 펼칩니다. 할머니 박완서 님이 사랑한 나들이는 무엇일까 헤아리며 책을 읽습니다.


.. 나는 떡집에서 증편을 두 개 사서 먹으면서 다니다가 공원 잔디밭에 누워서 나무 그늘에서 연인들이 쌍쌍이 정답게 속삭이는 것도 보고, 노인들이 한가롭게 작대기 같은 걸로 공 굴리기를 즐기는 것도 구경했다 … 네팔에서 어쩌다 우리 나라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그는 걸으러 온 사람이다. 그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타는 사람보다도, 나는 사람보다도, 뛰는 사람보다도, 달리는 사람보다도, 기는 사람보다도, 걷는 사람이 난 제일 좋다 ..  (86, 252쪽)


  박완서 님은 “잃어버린 여행가방”을 이야기합니다. 책을 다 읽고 덮기까지, 나는 새롭게 한 가지를 생각합니다. 박완서 님이 할머니 나이가 되어 쓴 이 여행글은, 박완서 님으로서는 “잃어버린 글과 생각”이 되는구나 싶습니다. 여행글이라 하지만, 여행글답게 ‘이곳에서 저곳으로 다니며 스스로 느낀 이야기’라든지 ‘이곳과 저곳을 누리며 스스로 사랑을 누린 이야기’는 얼마 안 됩니다.


  나는 박완서 님 ‘여행글’을 읽으면서 ‘박완서 님이 주섬주섬 그러모은 티벳 지식’을 읽고 싶지 않습니다. 티벳과 중국이 서로 어떤 사이인가 하는 이야기는, 박완서 님 여행책 아닌 다른 역사책이나 인문책에 알뜰히 잘 나옵니다. 구태여 ‘박완서 님이 옮겨적은 글’로 읽어야 하지 않습니다.


  박완서 님은 무엇을 느끼려고 여러 나라로 나들이를 다녔을까요. 그저 몸이 얼마나 더 지치는가를 바라보려고 여러 나라로 나들이를 다녔을까요. 그저 아는 사람들과 돌아다니는 일이 도움이 되리라 여겨 여러 나라로 나들이를 다녔을까요.


  싱그러이 살아서 숨쉬는 ‘생각’을 읽을 수 있기에 여행글을 즐겁게 읽습니다. 맑게 빛나는 ‘넋’을 느낄 수 있기에 글을 고맙게 읽습니다. 스스로 지치는 몸이 되면 스스로 지치는 마음으로 달라지면서, 지친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고 맙니다. 스스로 기쁜 몸이 되면 스스로 기쁜 마음으로 거듭나면서, 기쁜 이야기를 오순도순 풀어놓기 마련입니다.


  교황 아무개 죽은 자리에 갈 수 있는 일은 얼마나 ‘빛’이 될까 궁금합니다. 콩나물 한 꾸러미 사려고 저잣거리에 다녀오는 일 또한 좋은 나들이요 마실이며 여행이 돼요. 좋은 동무랑 수다를 떨려고 버스를 타고 찾아가는 일 또한 재미난 나들이요 마실이고 여행이 돼요.


  어디를 가야 여행이지 않습니다. 누구하고 가야 여행이지 않아요. 무엇을 보거나 누구를 만나기에 여행이지 않아요. 스스로 느끼는 삶이 있고, 스스로 누리는 빛이 있으며, 스스로 깨닫는 꿈을 보살필 때에, 비로소 여행이 되는구나 싶어요.


  할머니 박완서 님은 여행길에 ‘여행가방’을 잃어버렸다 말씀하지만, 정작 할머니 박완서 님이 잃어버린 한 가지라면 ‘삶을 사랑하는 글’과 ‘사람을 좋아하는 꿈’이 아닌가 싶습니다. (4345.9.17.달.ㅎㄲㅅㄱ)


― 잃어버린 여행가방 (박완서 글,실천문학사 펴냄,2005.12.22./9800원)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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