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추꽃 터지는 마음

 


  몽우리를 맺은 부추풀은 천천히 꽃봉오리로 터뜨립니다. 날마다 아주 천천히 하나씩 꽃봉오리를 터뜨리면서 조그맣고 하얀 꽃잎을 보여줍니다. 따사로운 여름 햇살은 부추풀 푸른 잎사귀로 내려앉고, 따스한 여름 볕살은 부추꽃 하얀 잎새로 스며듭니다.


  작은 꽃봉오리가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차츰차츰 늘어날 테지요. 꽃을 보려고 심는 꽃부추도 있대서 꽃부추는 꽃잎이 아주 큽니다. 가느다란 꽃대에서 가없이 하얀 빛으로 널다랗게 피어나는 꽃부추 흰꽃 봉오리는 더할 나위 없이 맑습니다.


  부추풀에서 이런 꽃이 피는 줄 누가 알았을까요. 부추풀에서 피어나는 꽃송이를 기쁘게 맞이하면서 예쁘게 쓰다듬는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요. 온누리 모든 먹는 풀은 사람들이 누리는 푸성귀이기 앞서 들풀입니다. 온누리 모든 들풀은 뿌리를 내리고 새잎을 틔우고 줄기를 올려서 꽃을 피웁니다. 꽃이 지면 열매를 맺고 씨앗을 내어 이듬해 새봄에 새로 피어날 밑바탕을 흙에 내려놓습니다.


  부추꽃은 하얗게 터집니다. 내 마음 사랑꽃도 부추꽃과 함께 즐겁게 봉오리를 터뜨립니다. 부추꽃 둘레 돌울타리 언저리에는 호박꽃이 노랗게 터집니다. 내 마음 믿음꽃도 호박꽃과 함께 기쁘게 봉오리를 터뜨립니다. 내 마음에서 샘솟는 사랑과 믿음이 꽃송이 말간 빛깔로 드러납니다. 꽃송이 말간 빛깔을 바라보면서 내 마음밭에서 터지기를 기다리는 숱한 사랑과 믿음 씨앗을 떠올립니다. (4345.8.12.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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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을 죽이는 외마디 한자말
 (528) -화化 39 : 최소화 1

 

이 책은 디자인 결정과 디자인 프로세스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모든 환경문제를 인식하며 또한 환경적인 문제를 최소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디자이너의 역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도로시 맥킨지/이경아 옮김-그린 디자인》(도서출판 국제,1996) 7쪽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담은 책이라 하더라도, ‘좋은 말’로 손쉽게 이야기를 펼치지 않으면 즐겁게 읽다가도 이맛살을 찌푸리곤 합니다. 줄거리가 살뜰하다면 꾹 참거나 다른 생각은 않고 끝까지 읽어내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아쉽습니다. 찬찬히 마음을 기울여 쉽게 쓸 수 있고, 예쁘게 마음을 기울여 정갈히 쓸 수 있으며, 사랑스레 마음을 쏟아 알맞거나 바르게 이야기를 펼칠 수 있었으니까요.


  보기글을 보면 “디자인 프로세스”라든지, “환경문제를 인식하며”라든지 “환경적인 문제를 최소화하는 데 기여하는”이라든지 “디자이너의 역할에 대해 설명하고” 같은 대목이 얄궂다고 느낍니다. 이런 말을 꼭 써야 했을까 궁금합니다. 이런 말이 아니라면 글쓴이(옮긴이) 넋을 나타낼 수 없을까요. 사람들이 넉넉히 알아듣기 좋도록 풀어내기란 어려웠을까요. ‘디자인(design)’ 같은 낱말은 그대로 두더라도 “디자인 결정”과 맞물려 “디자인 프로세스(process)”는 “디자인 과정”이나 “디자인 흐름”으로 적을 수 있어요. “영향(影響)을 미치고 있는”은 “영향을 미치는”이나 “움직이는”이나 “건드리는”으로 손보고, ‘인식(認識)하며’는 ‘생각하며’나 ‘살피며’로 손봅니다. 보기글 한쪽에는 “환경 문제”라 나오다가 다른 한쪽에는 “환경적인 문제”라 나오는데, 둘 모두 “환경 문제”라고만 적으면 됩니다. ‘기여(寄與)할’은 ‘이바지할’로 손질하고, “디자이너의 역할(役割)에 대(對)해”는 “디자이너 몫을”이나 “디자이너가 할 일을”로 손질하며, “설명(說明)하고 있다”는 “들려준다”나 “이야기한다”나 “다룬다”나 “밝힌다”로 손질해 봅니다.


  ‘최소화(最少化)’는 “가장 적게 함”을 뜻한다 합니다. 이를테면 “부작용을 최소화하다”나 “홍수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같은 자리에서 쓴다고 해요. 뜻을 살피면 이런저런 자리에 쓸 만하겠구나 싶으나, 꼭 이처럼 ‘-化’까지 붙이는 한자말을 안 써도 되리라 느껴요.

 

 환경적인 문제를 최소화하는
→ 환경 문제를 가장 적게 하는
→ 환경 문제를 크게 줄이는
→ 되도록 환경에 적게 문제가 되는
→ 되도록 환경을 지킬 수 있는
→ 환경을 사랑할 만한
→ 환경을 보살필 만한
 …

 

  ‘최소화’라는 말씨를 생각해 봅니다. “최소가 되게 하다”라는 뜻을 담아서 ‘最少 + 化’로 적었을 테고, ‘最少’ 또한 “가장(最) 적게(少)”를 가리킨다고 할 테지요. 국어사전 말풀이 그대로 “가장 적게 함”이 ‘최소화’입니다. 낱말을 하나하나 뜯으면, “最(가장) + 적게(少) + 함(化)”입니다.


  이런 말짜임을 돌아본다면, ‘최소화­’라는 말씨는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쓰임직합니다.


  그러나, 한자로 ‘最 + 少 + 化’라고만 말을 지었어야 했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들은 한자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한글로, 한국말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쓰는 말 가운데 한자로 빚은 낱말이 많다고 해도, 우리 말 속살은 한국말이지 한자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서양옷을 입었어도 서양사람 아닌 한국사람이듯, 우리가 서양집에서 살더라도 서양사람 아닌 한국사람이듯, 우리 말에 한자말이 퍽 많이 깃들더라도 우리 말은 ‘한국말’로 이루어집니다. 한자를 드러내어 쓰는 한국말이 아니라, 한글로 적어서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하는 한국말입니다.

 

 부작용을 최소화하다 → 부작용을 줄이다 / 잘못을 되도록 줄이다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 피해를 줄이려고 / 피해를 덜려고

 

  보기글에서는 말뜻 그대로 “가장 적게 하는”이나 “줄이는” 같은 낱말로 다듬을 만합니다. 환경 문제를 적게 한다는 일이란 환경을 지키는 일일 테니 “환경을 지키는”이나 “환경을 보살피는”처럼 적을 수 있습니다. “환경을 사랑하는”이나 “환경을 아끼는”처럼 적어도 어울려요.


  말뜻을 옳게 살피고 말쓰임을 알맞게 헤아리면 말투와 말결이 한결 살아납니다. 뜻을 북돋우고 글흐름을 빛낼 수 있습니다.


  맨 처음에는 말뜻 그대로 “가장 적게 한다”고 하면 됩니다. 이 다음으로는 “크게 줄인다”고 하면 됩니다. “되도록(될 수 있는 대로) 줄인다”고 해도 어울리며, 이 뜻을 살려서 “알뜰히 지킨다”라든지 “기쁘게 돌본다”처럼 적을 수 있습니다.


  생각이 말을 열고, 말이 생각을 엽니다. 생각이 삶을 열고, 삶이 생각을 엽니다. 즐겁게 여는 생각으로 즐겁게 펼치는 말이요, 즐겁게 빛내는 말로 즐겁게 누리는 삶입니다. (4339.6.4.해./4341.10.1.물./4345.8.12.해.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이 책은 디자인을 고르거나 디자인 흐름을 움직이는 모든 환경 문제를 살피며, 또한 숲과 마을을 사랑하도록 이바지할 수 있는 디자이너 몫을 이야기한다

 

..

 


 '-화' 씻어내며 우리 말 살리기
 (141) -화化 141 : 최소화 2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되 학생들이 만화를 그리며 겪게 될 수많은 시행착오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이미 다 겪어 본 내가 가장 효율적인 길을 일러 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이두호-무식하면 용감하다》(행복한만화가게,2006) 266쪽

 

  ‘시행착오(試行錯誤)’는 ‘잘잘못’으로 다듬고, ‘효율적(效率的)인’은 ‘나은’이나 ‘좋은’으로 다듬습니다. ‘자신감(自信感)’은 그대로 두어도 되고, ‘믿음’으로 손질해도 됩니다.

 

 최소화할 수 있도록
→ 되도록 줄일 수 있도록
→ 어느 만큼 줄일 수 있도록
→ 웬만하면 줄일 수 있도록
→ 줄일 수 있을 만큼 줄이도록
→ 줄이고 또 줄이도록
 …

 

  ‘최소’를 말하고 싶고 ‘최대’를 말하고 싶다면, 이대로 말해도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최소로 하다”와 “최소가 되게 하다”처럼 적어야 올바릅니다. ‘최소화하다’나 ‘최소화되다’는 올바르지 않습니다.


  한자말을 쓰건 미국말을 쓰건 쓰고프니 쓴다고 하지만, 낱말은 낱말이라 하여도 말투는 어긋나지 않게 추슬러야 합니다. 말투까지 무너뜨리면서 ‘내가 좋아하는 낱말이니까 내 마음대로 쓸래’라 외쳐도 될까 궁금합니다. 아니, 찬찬히 헤아린다면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낱말이니까 내 마음대로 쓸래’라 하더라도, 알맞고 올바르게 써야 할 노릇입니다.


  좋은 넋을 북돋우고 예쁜 얼을 살리면서 고운 말을 빛낼 때에 즐겁습니다. 잘잘못을 줄이며 글을 써도 나쁘지 않으나, 이보다는 어여삐 나눌 사랑스러운 글은 무엇일까를 생각하면 즐겁습니다. (4342.3.24.불./4345.8.12.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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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니까 모른다고 말하되, 학생들이 만화를 그리며 겪을 수많은 잘잘못을 줄이고 또 줄이도록, 이미 다 겪어 본 내가 가장 나은 길을 일러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

 

 '-화(化)' 씻어내며 우리 말 살리기
 (176) -화化 176 : 최소화 3

 

아기가 태어난 뒤 다른 사람 손에 아기를 맡기는 걸 아예 막거나 최소화해야 한다
《메리 몽간/정환욱,심정섭 옮김-평화로운 출산 히프노버딩》(샨티,2012) 326쪽

 

  “아기가 태어난 뒤”처럼 적은 대목이 반갑습니다. 으레 “아기가 태어난 후(後)”라든지 “아기가 탄생(誕生)한 직후(直後)”라든지 “출산(出山)한 직후(直後)”처럼 적어 버릇하거든요. 이렇게 수수하게 적는 글이 가장 알맞으면서 가장 예쁩니다. “아기를 맡기는 걸”은 “아기를 맡기는 일은”으로 손볼 수 있습니다.

 

 아예 막거나 최소화해야 한다
→ 아예 막거나 줄여야 한다
→ 아예 막거나 되도록 안 해야 한다
→ 아예 막거나 멀리해야 한다
 …

 

  좋은 일은 즐겁게 합니다. 기쁜 일은 씩씩하게 합니다. 궂은 일도 즐겁게 합니다. 슬픈 일도 씩씩하게 합니다. 내가 느끼기에 좋은 말이 되도록 즐겁게 가다듬습니다. 내가 이웃이나 동무랑 나눌 때에 좋은 말이라고 느끼도록 기쁘게 추스릅니다.


  사랑은 곁에 둡니다. 사랑 아닌 것은 멀리합니다. 사랑을 생각합니다. 사랑 아닌 것은 아예 생각을 안 합니다. 참답고 착하며 곱게 주고받을 말을 생각합니다. 참답지 않고 착하지 않으며 곱지 않은 말은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까이할 말을 헤아립니다. 멀리할 만한 말은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살가이 나눌 말을 곱씹습니다. 손사래칠 만한 말은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맑게 빛내기에 좋은 말입니다. 밝게 가꾸기에 예쁜 글입니다. 한국사람 누구나 한국말을 슬기롭게 생각하면서 산뜻한 말밭을 일굴 수 있기를 빕니다. (4345.8.12.해.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아기가 태어난 뒤 다른 사람한테 아기를 맡기지 말아야 하며 되도록 다른 사람이 안 만지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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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량한 말 바로잡기
 (1578) 발상

 

자신들과 아기를 위해서 평화롭고 정상적인 출산을 원하는 부부라면 마치 공장의 조립 라인과도 같은 데서 아기를 낳겠다는 발상은 하지 않을 것이다
《메리 몽간/정환욱,심정섭 옮김-평화로운 출산 히프노버딩》(샨티,2012) 60쪽

 

  “자신(自身)들과 아기를 위(爲)해서”는 “어버이와 아기를 생각해서”나 “엄마 아빠와 아기를 헤아려서”로 다듬을 수 있습니다. “평화(平和)롭고 정상적(正常的)인 출산(出産)을 원(願)하는 부부(夫婦)라면”은 “근심없이 옳게 아기를 낳고 싶은 부부라면”이나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아기를 낳고픈 두 사람이라면”으로 손볼 수 있고, “공장의 조립(組立) 라인(line)과도 같은 데서”는 “공장처럼 끼워맞추듯 하는 데서”로 손볼 수 있어요. “않을 것이다”는 “않는다”로 손질합니다.


  보기글을 잘 살피면 앞쪽에서는 ‘출산’이라 적고, 뒤쪽에서는 ‘아기를 낳겠다’라 적습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출산’은 알맞지 않은 낱말이라 ‘해산(解産)’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나옵니다. 그러고 보면, 한겨레는 예부터 아이낳기를 한자말로 가리킬 때에 ‘해산’이라 했지, ‘출산’이라 하지 않았어요. 참말 언제부터 ‘출산’이라는 한자말이 들어와서 오늘날처럼 널리 퍼졌을까요. 그나저나, ‘출산’이든 ‘해산’이든 이런 한자말이나 저런 한자말 사이에서 헤매기보다는 쉽고 알맞게 ‘아이낳기’나 ‘아기낳기’처럼 쓸 때에 한결 좋으리라 생각해요. 아기를 낳으니 말 그대로 ‘아기낳기’예요.


  ‘발상(發想)’이라는 한자말은 “어떤 생각을 해냄”을 뜻한다 합니다. “발상의 전환”이라든지 “시대착오적 발상”이라든지 “그런 케케묵은 발상은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처럼 쓴다고 해요. 이 한자말 또한 쓸 만하니까 쓴다고 여길 수 있지만, 말뜻을 찬찬히 살피면 “생각을 해냄”입니다. 곧 ‘생각하기’를 한자말로 옮기면 ‘발상’이 되는 셈입니다.

 

 아기를 낳겠다는 발상은 하지 않을 것이다
→ 아기를 낳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 아기를 낳겠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아기를 낳겠다고는 하지 않는다
 …

 

  생각을 바꾸면 말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발상의 전환”이 아닌 “생각 바꾸기”나 “생각 돌리기”나 “생각 고치기”나 “생각 거듭나기”가 됩니다. 생각을 새롭게 북돋우면 새로운 삶을 일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대착오적 발상”이 아닌 “시대를 거스르는 생각”이나 “흐름을 거스르는 생각”이나 “새날을 거스르는 생각”이나 “거꾸로 가는 생각”이나 “엉뚱한 생각”이나 “엉터리 같은 생각”이 됩니다. 오래되었다고 낡지 않습니다. 새로 나왔어도 낡을 수 있고, 오래되었기에 아름다울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런 케케묵은 발상은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가 아닌 “그런 케케묵은 생각은 더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나 “그런 케케묵은 생각주머니는 이제 도움이 되지 않는다”가 돼요.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사랑스레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내 이웃과 동무랑 사랑스레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생각을 빛내며 말을 빛냅니다. 생각을 가꾸며 말을 가꿉니다. 생각을 빛내기에 삶을 빛냅니다. 생각을 가꾸기에 삶을 가꾸어요.


  저마다 슬기롭게 생각하고 슬기롭게 살아가며 슬기롭게 사랑합니다. 누구나 참다이 생각하고 참다이 살아가며 참다이 사랑합니다. 생각이 삶이 되고, 삶이 말이 됩니다. 말은 삶으로 다시 이어지고, 삶은 다시 생각으로 이어져요. 내 말 한 마디에 사랑을 싣기에 내 삶 한 자락 사랑으로 꽃을 피웁니다. 내 글 한 줄에 꿈을 싣기에 내 삶 한 가락 사랑으로 노래를 부릅니다. (4345.8.11.흙.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어버이와 아기를 생각해서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아기를 낳고픈 두 사람이라면, 마치 공장처럼 끼워맞추듯 하는 데서 아기를 낳겠다고는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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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삶, 책삶

 


  스스로 살아온 대로 생각하고 말하며 움직입니다. 누가 누구보다 더 나쁘거나 덜 좋지 않습니다. 내 모습이 어떠한가를 꾸밈없이 들여다보고 느끼면서 날마다 새롭게 거듭날 일입니다. 한결 아름답게 누릴 삶을 가꿀 때에 가장 좋습니다.


  나는 내 말을 꾸밈없이 바라보면서 내 말을 찬찬히 일굽니다. 나는 내 삶을 스스럼없이 돌아보면서 내 삶을 하나하나 추스릅니다. 아름답게 나눌 말을 생각하고, 아름답게 누릴 삶을 생각합니다. 아름다이 걸어갈 길에 동무가 될 책 하나를 곁에 둡니다. 내 좋은 책은 내 좋은 동무입니다. 내 좋은 동무는 내 좋은 사랑입니다.


  스스로 살아온 대로 책을 살피거나 장만하거나 읽습니다. 스스로 살아온 결하고 어긋나는 책은 알아채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며 읽지 못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새롭게 살아가고 싶다면 새롭게 바라보면서 새롭게 알아봅니다. 스스로 새로 태어나는 삶을 꿈꾼다면 새로운 책길을 찾아나설 수 있습니다.


  머리로 읽는 책이 아닌 가슴으로 읽는 책입니다. 머리로 꾸리는 삶이 아니라 가슴으로 꾸리는 삶입니다. 눈물도 웃음도 머리 아닌 가슴으로 터뜨립니다. 기쁨도 슬픔도 머리 아닌 가슴으로 맞아들입니다. 삶이 말이요 삶이 책입니다. 말이 삶이요 책이 삶입니다. (4345.8.11.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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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숲’
[말사랑·글꽃·삶빛 24] 마음을 빛내는 말

 


  언제부터인가 ‘자연보호(自然保護)’라는 말이 쓰였습니다. 자연을 돌보자, 자연을 지키자, 자연을 아끼자, 자연을 사랑하자, 이런 여러 가지로 쓰면 한결 좋았을 테지만, ‘자연보호’ 네 글자로 곳곳에 푯말을 세우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한자로 된 네 글자 말마디를 쓰는 버릇은 퍽 옛날부터 ‘고사성어’라는 이름으로 흘러들었습니다. 그러니, 아주 스스럼없이 ‘자연보호’를 외쳤겠구나 싶기도 합니다.


  ‘자연(自然)’이란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하고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거나 우주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나 상태”라 합니다. 그러나, 이 한자말 ‘자연’을 한국사람이 언제부터 썼는지 아리송합니다. 조선 무렵에도 이 한자말을 썼을까요. 고려나 백제나 신라나 고구려나 가야 무렵에도 이 한자말을 썼을까요. 예전 지식인이 한자로 삶과 생각을 나타내던 때에는 어떠한 한자말로 ‘자연이 가리키는 무엇’을 나타냈을까요.


  옛시조나 옛소설에는 ‘강산(江山)’이라는 한자말을 으레 쓰지 않았나 싶습니다. “강과 산이라는 뜻으로, 자연의 경치를 이르는 말”이라 하는데, 조선이나 고려 적 사람들이 ‘강산’이라는 한자말을 쓸 적에는 “자연의 경치”만 가리키지는 않았으리라 느낍니다. “자연의 경치”라기보다 “자연”을 가리켰겠지요.


  예전 지식인이 아닌 조선 무렵 흙일꾼이나 고려 무렵 흙일꾼, 또 고구려 무렵 흙일꾼이라든지 가야 무렵 흙일꾼, 여기에 옛조선 무렵 흙일꾼은 ‘자연’이든 ‘강산’이든 어떠한 낱말로 가리켰을까요. 옛사람이 바라보던 ‘자연’이나 ‘강산’이란 무엇이었을까요.


  한자를 받아들이지 않던 무렵에는 어떠한 낱말로 우리 둘레 터전을 가리켰을까 하고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말이 처음으로 생겨 사람들 삶터를 하나하나 일컬을 무렵에는 어떠한 낱말로 ‘오늘날 자연이나 강산이라는 낱말로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을까 헤아려 봅니다.


  머리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생각합니다. 2000년대를 살아가는 내 몸뚱이가 아닌 천 해나 이천 해나 삼천 해나 오천 해 앞서 살던 내 넋으로 생각합니다. 오만 해나 십만 해 앞서 살던 내 얼로 헤아립니다.


  그래, 그무렵에는 내 삶터이고 내 둘레 터전이고 온통 ‘숲’이었구나 하고 떠오릅니다. 국어사전 말풀이로 ‘숲’은 ‘수풀’을 줄인 낱말이요, “나무들이 무성하게 우거지거나 꽉 들어찬 것”을 뜻한답니다. 그런데, 나무가 우거진 곳이란 나무만 있는 곳이 아니에요. 풀이 함께 있습니다. 벌레가 함께 있습니다. 새가 함께 있고, 온갖 짐승이 함께 있습니다. 풀과 나무가 있는 데에는 돌도 있고, 냇물이 흐릅니다. 돌과 바위와 모래와 흙이 얼크러져 골짜기를 이룹니다. 멧자락을 이루고 멧골이 이루어집니다. 먼먼 옛날, 한자도 한글도 없던 옛날, 스스로 사랑을 빛내어 삶을 일구던 사람들은 ‘숲’에서 살았어요. 숲이 곧 지구요, 숲이 곧 온누리요, 숲이 곧 우주였어요.

  그렇다면 바다는? 하늘은? 바람은? 해는?


  과학자가 밝히기도 하지만, 바다는 바다 홀로 있지 않습니다. 뭍보다 너른 바다입니다만, 바다는 숲이 있어 바다 구실을 합니다. 숲에서 모래와 흙과 돌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바다로 흘러들어 바다가 싱그럽게 숨쉽니다. 낱낱이 따로 떼내어 가리키자면 ‘나무’이고 ‘돌’이고 ‘메’이고 ‘냇물’이고 ‘바다’라 할 테지만, 가만히 헤아리면 이 모두를 아우르는 ‘숲’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터는 숲으로 이루어졌으며, 숲이 있기에 사람 누구나 숨을 쉽니다.


  이 숲을 감싸는 하늘이 있고, 이 숲을 간질이는 바람이 있습니다. 이 숲을 살찌우는 해가 있어요. 하늘과 바람과 해를 찬찬히 헤아리고 보면, ‘숲’이라는 낱말로 가리킬 테두리가 참 작구나 여길 수 있지만, ‘자연’이라는 낱말이라고 해서 더 넓게 가리키지는 못해요. ‘자연’이라는 낱말로 ‘하늘’이나 ‘바람’이나 ‘해’를 아우를 수 없습니다. 달이나 우주를 ‘자연’이라는 낱말로 담을 수 없어요. ‘자연’이라는 한자말은 “사람 힘이 닿지 않고 이루어진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정작 ‘자연’이라는 낱말은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 테두리에서 가리킵니다. 곧, ‘숲’이에요.


  이렇게 살피고 나서 새삼스레 ‘자연보호’라는 외침말을 들여다봅니다. 정치권력을 손에 쥔 이들이 외친 ‘자연보호’는 ‘숲을 지키자’였습니다. 숲을 살리고 숲을 가꾸며 숲을 돌보자고 외쳤습니다. 한 마디로 간추리면, 정치권력을 손에 쥔 이들 스스로 ‘숲사랑’을 외친 셈입니다.


  한자가 한국땅에 깃들어 ‘글 권력’을 이루던 때에 ‘사자성어’나 ‘고사성어’도 태어납니다. 이러한 권력 언저리에서 가지를 치는 ‘자연보호’ 같은 낱말입니다. 글로도 정치로도 돈으로도 학문으로도 권력을 이루지 않으며 살아가는 여느 마을 여느 살림꾼 눈높이에서 다시금 짚어 봅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밟고 올라서지 않는 데에서는 ‘사랑’이 태어납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사랑합니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너는 나를 사랑합니다. 삶이란 서로 사랑하며 빛납니다. 이리하여, 어버이는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는 어버이를 사랑합니다. 사내는 가시내를 사랑하고 가시내는 사내를 사랑합니다. 나무는 풀을 사랑하고 풀은 나무를 사랑합니다. 저절로 샘솟는 말마디 ‘숲사랑’입니다. 스스로 거듭나는 말마디 ‘숲사랑’이에요.


  나무는 사람이 심는대서 널리 퍼지거나 자라나지 않습니다. 나무는 나무 스스로 씨앗을 맺습니다. 나무는 나무 스스로 꽃을 피우고 잎을 틔웁니다. 나무는 홀가분하게 살아갑니다. 나무는 씩씩하게 자라납니다. 나무는 사람 힘이 닿지 않아도 천천히 우거지며 숲을 이룹니다. 사람은 나무가 이룬 숲에 예쁘게 깃들며 서로 어깨동무합니다. 사랑입니다. 나무는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은 나무를 사랑합니다. 저절로 이루어지는 꿈입니다. 스스럼없이 빛나는 삶입니다. 홀가분하게 피어나는 사랑입니다. (4345.8.11.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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