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꽃 책읽기

 


  부산으로 아이들과 마실을 온다. 멧꼭대기에 깃든 오래된 아파트에 잠자리를 얻어 여러 날 지낸다. 아이들과 가파른 계단을 수없이 오르내린다. 길바닥은 모두 아스팔트 아니면 시멘트이다. 흙으로 된 땅을 아직 못 본다. 아이들은 부산으로 마실을 오고 나서 여러 날 흙을 구경하지 못한다. 흙을 못 만지고 흙을 못 보며 흙에서 자라나는 풀과 나무하고 동무하지 못한다. 흙이 없으니 흙에서 보금자리를 틀며 먹이를 찾는 들새나 멧새 또한 구경하지 못할 뿐더러, 들새와 멧새 노랫소리조차 듣지 못한다.


  어디에서나 온통 자동차 소리뿐이다. 가게마다 울려퍼지는 대중노래 소리뿐이다. 텔레비전 소리에다가 수많은 사람들 수다 떠는 소리에다가, 손전화 터지는 소리가 가득하다.


  큰아이가 문득 “저기 꽃 있어!” 하고 외친다. 나도 보았다. 아버지인 나는 작은아이를 가슴으로 안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오면서 골목꽃을 보았다. 아이도 저 꽃을 보았구나. 몹시 반갑다. 그런데 아이는 참 뜻밖인 말을 한다. “이 꽃은 안 꺾을래요.”


  시골에서는 어디에서나 꽃을 본다. 어디에서나 꽃이 가득가득 무리지어 핀다. 아이는 언제나 꽃을 꺾는다. 꽃을 꺾으면 꽃들도 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이는 이 꽃들이 꺾이더라도 흙으로 돌아가 다시 고운 꽃으로 피어나는 줄 마음으로 알까.


  그저 시멘트뿐인 골목동네 계단 가파른 한켠 아주 좁다란 틈바구니에 꽃그릇 몇 놓인다. 이 꽃그릇에서 발그스름한 꽃이 눈부시게 빛난다. 꽃 앞으로 다가선 큰아이는 얼굴을 들이밀고 꽃송이에 코를 박는다. “아버지, 냄새 좋아요. 내가 좋아하는 꽃이에요.”


  나도 네가 좋아. 나도 골목꽃이 좋아. 나도 꽃이 좋아. 나도 흙이랑 하늘이랑 바람이랑 햇살이랑 너희랑 모두 좋아. (4345.10.8.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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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보수아파트

 


  보수동 헌책방골목에서 택시를 타고 보수아파트로 갑니다. 보수아파트로 가는 길은 꽤 가파릅니다. 이 골목 저 골목 구비구비 돕니다. 멧꼭대기라 할 만한 자리에 아파트가 섭니다. 퍽 낡았구나 싶은 건물은 계단뿐입니다. 무거운 짐을 인 채 힘겨운 아이들을 걸려서 맨 꼭대기층까지 오릅니다. 끝까지 씩씩하게 따라온 아이들이 더없이 대견합니다.


  짐을 풀고 아이들을 씻깁니다. 더운물 없이 찬물만 있기에 아주 미안합니다. 다섯 살 큰아이가 춥다 춥다 말하면서도 잘 견디어 줍니다. 옷을 새로 갈아입히고 땀과 먼지에 절은 옷을 복복 꾹꾹 비벼서 빱니다. 밤새 잘 말라 주렴 노래하면서 툇마루에 넙니다.


  살림집에 뒷간이 따로 없는 보수아파트입니다. 참말 이런 아파트가 있구나 싶어 놀랍지만, 나로서는 이제서야 놀랍게 여길 뿐, 이곳 보수아파트에서 옛날 옛적부터 살림을 꾸린 사람들이 많겠지요. 이곳을 거쳐 다른 데로 삶터를 옮긴 사람들이 많겠지요. 보수아파트 둘레에서 ‘살림집에 뒷간 없는 채’ 살아왔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겠지요.


  우리 아이들은 어제 하루 겪고 밤잠 하루 누리는 보수아파트 삶입니다. 이 아파트에 깃든 사람들은 도시에서 일거리·놀거리·삶거리를 찾을밖에 없을까 살짝 궁금합니다. 다들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런저런 시골마을에 보금자리(고향)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돈을 더 벌거나 이름을 더 얻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돈을 더 벌면 어디에 쓰면 좋을까요. 도시에서 작은 살림집 건사하는 돈이라 한다면, 시골에서 작은 땅뙈기 건사하면서 스스로 먹고 입고 자고 하는 모든 살림을 누릴 만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저 꿈 같은 뚱딴지 소리일 뿐일까요. 50만 원 100만 원 벌려고 달마다 하루 열 시간 안팎 회사와 길거리에서 보내는 겨를을 돌아본다면, 시골마을에서 흙과 하루 열 시간 안팎 씨름한다면 어떤 삶이 될까 하고, 사람들 스스로 가만히 그려 보기를 빌어요.


  부자가 되어야 할 삶은 아니라고 느껴요. 아름답게 누릴 삶이라고 느껴요. 사랑스레 살아갈 삶이라고 느껴요. 예쁘게 노래하고, 멋지게 춤추며, 기운차게 활짝 웃을 삶이라고 느껴요.


  아까, 큰아이가 고단한 몸으로 아버지 손을 잡고 가파른 길을 걸으며 5동 건물이 어디인가 찾으며 걷다가, 보수아파트 한켠 재활용쓰레기 모으는 자리를 치우는 할머니를 보고는 “할머니 안녕하세요.” 하고 고개숙여 인사했습니다. 뜻밖에 인사를 받은 할머니는 아주 맑고 고운 목소리로, “그래, 너도 안녕하느냐.” 하며 웃음을 지었습니다. 멧꼭대기에 깃들어 하느님들이 이곳에서 살아가나 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4345.10.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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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고 싶은 마음

 


  하늘을 보고 싶습니다. 나무를 보고 싶습니다. 숲을 보고 싶습니다. 냇물을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보고 싶은 아름다움이 깃든 곳을 보금자리로 삼아 살아갑니다.


  이웃을 보고 싶습니다. 동무를 보고 싶습니다. 반가운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살가운 터전을 보고 싶습니다. 이리하여 나는 내가 보고 싶은 아름다움 머금은 사람들 살아가는 곳으로 나들이를 갑니다.


  내 아이들은 무엇을 보고 싶을까요. 내 옆지기는 무엇을 보고 싶을까요. 참말 나는 무엇을 보고 싶을까요.


  낮에는 구름과 파랗디파란 하늘을 보고 싶습니다. 낮에는 해와 새와 들과 메를 보고 싶습니다. 밤에는 별과 달을 보고 싶습니다. 밤에는 개똥벌레를 보고 싶고, 들판에서 웅숭깊게 노래하는 풀벌레를 보고 싶습니다.


  삶을 이야기하는 책을 보고 싶습니다. 삶을 노래하는 사람을 보고 싶습니다. 삶을 사랑하는 손길을 보고 싶습니다. 지식을 이야기하는 책은 따분합니다. 낯간지러운 노래는 그예 낯간지럽습니다. 돈만 바라보는 손길은 고약합니다.


  색색 고르게 울리는 아이들 숨소리를 듣는 깊은 새벽녘, 나는 이 고운 소리를 한귀로 예쁘게 들으면서 글 한 줄 적어 봅니다. 아이들 숨소리가 참 즐겁고 반갑구나 싶어, 이러한 숨소리를 내 글 한 줄에 담고 싶습니다. 어쩌면, 내가 보고 싶은 모습이란, 나 스스로 가장 아름답게 꿈꾸는 맑은 웃음빛이 아니랴 싶어요. (4345.10.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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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롤의 아이 -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그림책 4
셀마 라게를뢰프 지음, 심현경 그림, 이상교 엮음 / 안그라픽스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아이들이 하느님인 줄 안다면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99] 셀마 라게를뢰프·심현경, 《트롤의 아이》(이상의날개,2007)

 


  아이들은 하느님입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른은 누구나 하느님을 돌보는 셈입니다. 그리고, 나 또한 아이로 살다가 어른이 된 만큼, 나부터 하느님이요 내 어버이는 하느님인 나를 돌보며 살아온 셈입니다.


  ‘아이들은 하늘이다’라든지 ‘아이들 맑은 눈빛은 하느님이다’라든지 ‘아이들만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라든지 같은 말을 나도 어릴 적부터 들었습니다. 이런저런 말을 들으면서 ‘내가 하느님이라 말하는 어른들 가운데 나를 참말 하느님처럼 고이 섬기려는 어른은 왜 없을까’ 하고 궁금하곤 했습니다. 쉽게 때리고, 쉽게 꾸짖으며, 쉽게 다그치는데다가, 쉽게 소리를 질러요. 심부름이 아닌 고된 일을 시키고, 끔찍한 숙제와 체벌을 내리며, 제식훈련과 군사훈련까지 시켜요. 참말 하느님한테 이럴 수 있을까요. 참말 하느님한테 꾸중을 하면서 시험공부만 시킬 수 있을까요. 참말 하느님한테 입시지옥에 빠지라고 내몰 수 있을까요. 참말 하느님한테 영어지옥에 빠져 갓난쟁이 때부터 영어 노래에 영어 영화에 길들여지도록 내몰 수 있을까요.


  나는 어릴 적부터 ‘자동차’가 퍽 못마땅했습니다. 내가 살던 동네에 자동차가 많지 않아서 홀가분하게 놀기도 했지만, 나날이 자동차가 늘고 자동차 소리가 시끄러운데다가 자동차가 무시무시하게 내달리니까, ‘자동차는 어린이한테 가장 나쁜 녀석’이 되겠다고 느꼈어요.


  자동차는 골목길 아무 데나 섭니다. 우리 놀이터에 섭니다. 우리가 땅바닥에 금을 긋고 놀이를 하던 자리에 버젓이 서서는 “애들은 저리 가라!” 하는 소리마저 듣습니다. 자동차를 모는 어른들은 어린 우리더러 “길에서 뭐 하니!” 하며 소리를 지릅니다.


  1980년대에도 아이들 놀이터인 골목이요, 1970년대나 1960년대에는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 누구한테나 일터요 놀이터인 골목이며, 1950년대나 1940년대를 헤아리면 나라안 골골샅샅 모두 어른과 아이 누구한테나 호젓한 쉼터요 삶터인 땅인데, 고작 쉰 해나 예순 해만에 모든 땅덩이를 자동차한테 내준 꼴입니다. 하느님인 아이들이 놀 자리가 없고, 하느님 마음인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설 자리가 없어요.


.. 털복숭이 엄마 트롤이 아기를 등에 업고 걸어가고 있었어요. 그때 건너편에서 말을 타고 오는 농부 부부가 보였어요. ‘사람의 아기도 우리 아기만큼 예쁜지 보고 싶은걸.’ ..  (2쪽)


  어른인 나는 스스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내 아이들부터 하느님이요, 이웃 아이들 또한 하느님이라고 생각하려고 합니다. 아니, 스스로 생각하려 하지 않으면 그만 잊고 마는구나 싶어, 마음을 가만히 다스립니다. 아이들이 하느님이라고 여기는 마음이란, 나 또한 언제나 하느님이요 나부터 아름다운 하느님인 만큼 내 삶부터 참으로 하느님다운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건사하자는 마음입니다.


  내가 나를 참답게 아끼고 보살필 수 있을 때에, 내 아이들을 참답게 아끼고 보살필 수 있다고 느껴요. 내가 나조차 참답게 아끼거나 보살피지 못하면서, 내 아이들을 참답게 아끼거나 보살필 수 있으리라고는 느끼지 않아요. 스스로 사랑을 누릴 때에 사랑스러운 눈빛이 되고, 스스로 꿈을 이룰 때에 꿈꾸는 눈망울이 돼요.


  어버이인 나부터 나무 한 그루 따사로이 바라볼 수 있어야 아이들 또한 나무 한 그루 너그러이 어깨동무할 수 있다고 느껴요. 내가 나무 한 그루 업신여긴다든지 아랑곳하지 않는다든지 포근하게 쓰다듬지 못하면서 아이들더러 나무사랑 숲사랑 삶사랑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고 느껴요. 하느님다운 눈길로 하느님다운 손길을 펼쳐요. 하느님다운 마음씨로 하느님다운 사랑씨를 한 올 두 올 퍼뜨릴 수 있어야지 싶어요. 하느님답게 넉넉하게 이웃을 얼싸안고, 하느님답게 즐거이 웃는 낯으로 지구별을 아낄 수 있어야지 싶어요.


  그러니까, 나는 어린 날부터 ‘아이들은 하늘이다’ 하는 말에 한 마디를 붙이고 싶었어요. 아이들도 어른들도, 곧 사람들 누구나 하늘이라고, ‘사람은 모두 하늘이다’ 하고 말하고 싶었어요.


.. “그런데 저 아기는 어쩌죠? 그냥 두면 사나운 짐승들이 해치고 말 거예요.” “그렇다면 저 괴물의 아기를 데려가겠다는 거요?” 농부는 트롤의 아기를 데려가는 게 아주 못마땅했어요. 하지만 아내를 달래려면 트롤의 아기라도 집으로 데려가는 수밖에 없었어요 ..  (10∼11쪽)


  내 마음속 하느님이 나를 늘 지켜봅니다. 아이들 마음속 하느님이 나를 언제나 바라봅니다. 내 마음속 하느님이 노상 아이들을 살펴봅니다. 아이들 마음속 하느님이 한결같이 아이들 스스로를 톺아봅니다.


  서로서로 하늘사람입니다. 택시를 모는 일꾼도, 버스를 모는 일꾼도 하늘사람입니다. 흙을 일구는 일꾼도 고기를 낚는 일꾼도 하늘사람입니다. 국회의원도 군수도 면사무소 일꾼도 하늘사람입니다. 대통령도 공무원도 회사원도 하늘사람입니다. 청소부도 이주노동자도 하늘사람입니다. 하늘사람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평화란 서로서로 하늘사람인 줄 느끼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평등이란 서로서로 하늘사람인 줄 깨닫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를 하든 무엇을 하든, 금긋기나 편가르기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정치권력으로 다툴 사람이 아니라, 삶을 사랑할 사람입니다. 경제권력을 누릴 사람이 아니라, 삶을 누릴 사람입니다. 문화권력을 뽐낼 사람이 아니라, 삶을 꽃피울 사람입니다.


  1등이냐 2등이냐, 수냐 우냐, A냐 B냐, 하는 금긋기란 덧없습니다.


  아이들은 아름답습니다. 어른들도 아름답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아름답습니다. 아이들 마음속 사랑이 어여쁩니다. 어른들 가슴속 사랑도 아리땁습니다. 사름들 마음자리 사랑이란 그지없이 예뻐요.


  다툴 까닭이 없어요. 말싸움이든 말꼬리이든 부질없어요. 생각을 나누면서 새로운 삶을 날마다 즐겁게 열어젖힐 사람이에요. 저마다 선 자리를 돌아보면서 앞으로 나아갈 꿈을 헤아릴 사람이에요. 오늘을 신나게 누리면서 하루하루 고운 열매를 즐길 사람이에요.


.. “네게서 탄 냄새가 나는구나.” “그야 당연하지요. 아빠가 트롤의 아이를 불 속에 집어 던졌을 때 트롤도 저를 불구덩이 속에 던져 넣었거든요. 그때 엄마가 트롤을 구해 내지 않았더라면 저는 불에 타 죽고 말았을 거예요. 아빠가 트롤의 아이를 떨어뜨렸을 때 트롤도 저를 떨어뜨렸고, 엄마가 트롤의 아이에게 개구리와 거미를 주었을 때 트롤도 제게 버터 바른 빵을 주었어요.” ..  (32쪽)


  셀마 라게를뢰프 님 글에 심현경 님이 그림을 붙인 그림책 《트롤의 아이》(이상의날개,2007)를 읽습니다. ‘어머니 트롤’은 ‘어머니 사람’이 낳은 아기가 이녁 아기보다 예쁘장해 보인다면서 바꿔치기를 하는데, ‘아버지 사람’이 ‘아기 트롤’한테 하는 짓을 고스란히 ‘아기 사람’한테 합니다. ‘아버지 사람’이 ‘아기 트롤’을 윽박지른다거나 낭떠러지에서 떨어뜨려 죽이려 하거나 불구덩이에 던져 넣어 죽이려 하면, ‘어머니 트롤’은 이녁이 바꿔치기한 ‘아기 사람’한테 똑같은 짓을 해요. 이와 함께, ‘어머니 사람’이 ‘아기 트롤’한테 트롤이 좋아하는 밥을 마련해서 주고, ‘아기 트롤’도 ‘아기 사람’하고 똑같이 아끼며 사랑하고 돌볼 적에는 ‘어머니 트롤’도 ‘아기 사람’한테 고운 사랑을 나누어 줘요.


  그렇지만, ‘어머니 사람’도 ‘아버지 사람’도 당신들 ‘아기 사람’이 어디에서 어떻게 되었는가를 모릅니다. ‘어머니 사람’은 당신 아기를 빼앗겼어도 ‘아기 트롤’을 똑같이 사랑스러운 숨결로 여겨 돌보지만, ‘아버지 사람’은 온통 미움과 시샘과 슬픔과 골부림으로 ‘아기 트롤’을 모질게 굴 뿐 아니라 ‘어머니 사람’하고 헤어지기까지 합니다.


  모든 아이들이 하느님이듯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이요, 모든 나무와 풀과 벌레와 새가 하느님입니다. 모든 목숨은 하나요, 모든 숨결 또한 하나입니다. ‘아기 사람’한테만 잘 하고 ‘아기 트롤’한테는 모질게 할 수 없어요. 모두가 하느님이니 모두한테 똑같이 사랑을 나눌밖에 없어요. 그런데 왜 ‘아버지 사람’은 당신 아기한테서 하느님을 못 볼까요. 당신 옆지기한테서, 또 ‘아기 트롤’한테서, 무엇보다 ‘아버지 사람’인 당신 스스로한테서 하느님을 못 볼까요.


  아이들이 하느님인 줄 안다면, 어른인 나 또한 하느님인 줄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을 하느님으로 섬기려 한다면, 어른인 내 삶이 날마다 하느님 삶과 같도록 다스리면서 일구어야 합니다.


  예배당을 큼직하게 지어서 성경을 읽거나 찬송가를 부른대서 하느님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 스스로 이녁 마음속 하느님을 느끼며 사랑할 수 있어야 좋아합니다. (4345.10.7.해.ㅎㄲㅅㄱ)

 


― 트롤의 아이 (셀마 라게를뢰프 글,심현경 그림,이상교 엮음,이상의날개 펴냄,2007.5.2./9000원)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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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에서 책읽기

 


  두 아이를 데리고 부산으로 마실을 나온다. 길디긴 하루를 마감하며 잠자리에 든다. 큰아이도 작은아이도 곧 곯아떨어지는데, 막 잠들기 앞서 큰아이가 아버지한테 묻는다. “(바깥에) 무슨 소리야?” 창문 바깥에서 아스라이 온갖 소리가 크고 작게 울린다. 큰아이는 인천에서 태어났고, 큰아이가 아주 갓난쟁이였을 적 살던 인천 골목집에서는 언제나 자동차 소리와 전철 소리를 들었다. 데시벨이라 하는 소음측정으로 100이 넘어가도록 시끄럽게 들어야 하던 소리인데, 큰아이가 세 살이 될 무렵 도시를 떠나 시골로 옮겨 살아가며 이 시끄러운 소리들하고 헤어졌다. 큰아이로서는 두 해 반만에 듣는 소리라고 할까.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야. 우리 사는 시골에서는 풀벌레하고 새들 노래하는 소리가 들리지? 여기는 부산이라고 하는 되게 큰 도시야. 낮에도 많이 봤잖아. 도시에는 자동차가 아주 많아. 그래서 이렇게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크게 들려. 도시에서는 풀벌레하고 새들 노래하는 소리가 하나도 안 들려.”


  큰아이한테 자동차 시끄러운 소리를 이야기하며 나 스스로 슬프다. 어쩌다 한두 차례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아침부터 밤까지, 또 새벽 내내, 잠자는 동안, 온통 자동차 소리를 들어야 하는 도시이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동차 소리를 듣고 자동차 모습을 본다. 아이들과 부산으로 마실을 오면서 자동차 때문에 자꾸 아이들한테 빽빽 소리를 지르고야 만다. 시골에서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은 자동차 볼 일이 아주 적어, 찻길에서든 마당에서든 마을에서든 저희 마음껏 마구 뛰고 구르고 기고 달리고 논다. 찻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도시에서는 이와 다르다. 아이들은 거님길에서 달리다가 아무렇지 않게 찻길로 확확 내려서며 논다. 찻길에서는 커다란 버스며 생생 달리는 택시며 무시무시하다. 내가 무시무시하다고 안 느끼면 하나도 안 걱정스러울 수 있지만, 자동차를 모는 이들은 ‘갑자기 찻길로 뛰어내려와 노는 아이들’을 찬찬히 헤아리지 않는다. 자동차를 모는 어른들은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가려 하고, 자동차로 꽉 막힌 도시에서 요모조모 빈틈을 찾아 끼어들기를 하기 일쑤라, 아이들은 이 자동차한테 쉽게 치이고 쉽게 목숨을 잃는다.


  도시로 마실을 오니, 아이들한테 자꾸자꾸 소리만 질러대야 해서 어버이로서 아주 미칠 노릇이다. 내가 미치고 아이들이 미치겠다. 아이들이 소리 지르는 아버지 눈치를 봐야 하고, 아버지가 자꾸 소리를 지르니 자동차들 눈치를 봐야 하고, 아이들이 아이들답게 마음껏 개구지게 뛰놀지 못하고 만다.


  가게에서도, 골목에서도, 버스나 택시 같은 데에서도, 아이들이 아이들답게 마구 소리를 지르고 노래도 부르면서 뛰놀지 못한다. 아이들은 그저 꾹 참아야 한다. 아이들은 어른들한테 꾸지람을 들어야 하고, 때로는 엉덩짝이든 볼기짝이든 찰싹 얻어맞기도 한다. 나는 차마 이 아이들 궁둥짝을 때리지는 못하지만, 이맛살을 찡그리고 소리를 질러대니, 내 마음부터 메말라지고야 만다.


  도시에서 살아가며 마음 느긋해지는 길이란 무엇일까. 도시에서 살아가며 책읽기란 무엇일까. 도시에서 살아가며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믿고 보살피고 좋아하는 길이란 무엇일까. 도시에서 살아가며 서로 어깨동무하는 책읽기란 무엇일까. 기쁜 웃음으로 함께 마주할 도시살이란 무엇일까. (4345.10.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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