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린 가시나무에도 겨울눈

 


  면소재지 초등학교 놀이터로 간다. 아이들이 하도 가고 싶다 말하니 마지못해서 간다. 놀이터는 좋지만, 학교는 달갑지 않아 딱히 가고 싶지 않다. 시골에 있는 학교조차 나무를 아무렇게나 베거나 비틀거나 괴롭히기 때문이다. 우리 보금자리 있는 시골하고 가까운 초등학교에서도 나뭇가지를 아무렇게나 자르고 나뭇잎을 아무렇게나 자른다. 이른바 ‘조경’과 ‘정원’과 ‘원예’라는 이름을 들이밀면서.


  고맙게도 아이들은 학교나무를 쳐다보지 않는다. 어쩌면 흘깃흘깃 보았을 수 있겠지. 아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마실을 다닐 적에 옆에 자동차나 오토바이가 지나갈 적마다 배기가스 냄새가 아주 고약하다고 느끼니까, 나무가 아파하는 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지 않으리라 본다.


  모양을 낸다면서 나무를 함부로 베고 자르고 다듬었다는 모습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다가, 가시나무 잘린 가지 한쪽에 돋은 겨울눈을 본다. 너는 용케 남았구나. 아니, 잘린 가지 끝에서도 너는 씩씩하게 겨울눈 내밀었구나. 이 겨울눈에서 곱게 새빛 베풀 테지. 아름답게 피어나는 봄을 부르겠지. 이 시골학교 어른들조차 너희들 고운 새빛을 깨닫지 못하는 나머지 새봄에 또 너희들을 마구 가지치기 할 텐데, 이곳 어른들이 깨닫지 못한다면 이곳 아이들이 부디 제대로 깨달아 나무가 아프게 하는 일이 사라질 수 있기를 빈다. 4347.1.26.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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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189] 좋아요

 


  서울시 공문서에 나오는 낱말과 말투를 알맞고 올바르며 쉽게 다듬는 일을 하면서 ‘수범’이라는 말을 자주 봅니다. 어떤 뜻으로 이 말을 쓰는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한국말사전을 뒤적입니다. ‘垂範’은 “몸소 본보기가 되도록 함. ‘모범’으로 순화”라 나옵니다.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모범(模範)’이라는 말을 다시 찾아보니, “본받아 배울 만한 대상”이라 나옵니다. 한국말사전을 덮고 어릴 적을 떠올립니다. 국민학교 때나 중·고등학교 때 학교에서는 ‘타의 모범이 되므로 이 상장을 수여함’과 같은 말투로 상장을 주곤 했어요. 중·고등학교 다닐 적에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지만 국민학교 다닐 적에는 ‘타의 모범’이 무슨 소리인지 몰랐어요. 어른들이 이렇게 말하니 그러려니 하고 여겼을 뿐이에요. 일제강점기 일본 말투인데, “남한테 좋은 모습을 보여주므로”라든지 “남이 배울 만한 훌륭한 모습이므로”를 가리켜요. 그러니까, 교사로서 아이들을 마주하는 어른들 가운데 이녁 스스로 어떤 말씨를 아이들한테 들려주거나 보여주거나 가르치는가를 제대로 깨달은 분이 거의 없던 셈이에요. 그무렵에 상장을 받은 아이 가운데 이 말뜻을 똑똑히 알아챈 동무가 얼마나 있었을까요. 네 몸가짐이 참 좋구나, 네 모습이 참 훌륭하구나, 네 매무새가 참 아름답구나, 네 마음씨가 참 곱구나, 하고 꾸밈없이 따사로이 이야기할 수 있을 때에 참다운 어른이리라 생각해요. 4347.1.26.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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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랑 네컷 만화
이랑 지음 / 유어마인드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308

 


즐겁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만화로
― 이랑 네컷 만화
 이랑 글·그림
 유어마인드 펴냄, 2013.11.15.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이 가장 즐겁습니다. 아무렴, 그렇지요. 즐겁게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은 즐겁지 못합니다. 참말, 그렇지요. 돈이 있기에 즐겁지 않습니다. 즐겁게 살아가려 하기에 즐겁습니다. 이름을 널리 떨쳤으니 즐겁지 않습니다. 즐겁게 살아가려는 마음일 적에 즐겁습니다.


  책을 한 권 썼는데 많이 팔아야 즐겁지 않습니다. 책을 즐겁게 썼으면 즐겁고, 즐겁게 쓴 책을 이웃들한테 즐겁게 읽히면 즐겁습니다. 노래를 한 가락 부르는데 많은 사람들이 몰려서 들어야 즐겁지 않아요. 노래를 부르는 사람 마음이 즐거우면서, 노래를 듣는 사람들한테 즐겁게 웃음과 눈물과 이야기를 들려줄 적에 비로소 즐겁습니다.


- “이랑 감독, 만화책 그리고 있다며?” “네.” “점점 여자들이 싫어하는 아이콘이 되어 가네. 음악에 영화에 만화에.” “헐.” “그것만 잘 어떻게 하면 잘 살아나갈 수 있겠네.” “헐.” “자, 회의 시작하죠.” (96쪽)


  즐거움은 스스로 빚습니다. 즐거움은 내 마음속에서 샘솟습니다. 남들이 나를 즐겁게 해 주지 않습니다. 내가 나를 즐겁게 합니다. 내가 차려서 먹는 밥이 내 몸과 마음을 즐겁게 합니다. 내 입으로 읊는 노래가 내 귀와 넋을 즐겁게 합니다. 내가 손을 뻗어 아이들 볼을 부비고 몸을 번쩍 들어 품에 따사롭게 안을 적에 즐겁습니다. 남들더러 안아 주라고 해야 즐겁지 않습니다. 아이를 남더러 돌봐 달라고 맡겨야 즐겁지 않습니다.


  나무는 스스로 푸릅니다. 나무는 스스로 푸르고 싶기에 푸른 잎사귀를 내놓아요. 여름에는 시원하게 그늘을 드리웁니다. 겨울에는 잎을 모두 떨구기도 합니다. 겨울이 되어도 짙푸른 잎사귀를 그대로 매달기도 합니다. 나무는 저마다 꽃을 곱게 피웁니다. 푸른 잎사귀와 똑같은 빛깔로 꽃을 피우기도 하고, 잎사귀와는 달리 발갛거나 노랗거나 하얀 꽃을 피우기도 합니다. 나무는 스스로 곱게 꽃을 피우면서 열매를 맺고 씨앗을 떨구어요. 스스로 즐겁게 자라면서 우리들한테 맑은 바람을 베풉니다.


  새들도 이와 같아요. 새들은 스스로 즐겁게 노래를 부릅니다. 풀벌레도 이와 같아요. 풀벌레도 스스로 즐겁게 노래를 부릅니다. 개구리도 맹꽁이도 저마다 스스로 즐겁게 노래를 불러요.


- “오, 오, 오. 드디어! 이창동 선생님께 (1집 앨범) 드릴 수 있겠어!” … “선생님 이거 제 앨범. 버리지 마시고 꼭 들어 주세요.” “그래 축하한다.” “‘졸업영화제’라는 곡에 선생님 이름도 나와요. 헤헤.” “허허 그런 짓을 왜 했니.” (118쪽)


  노래도 부르고 영화도 찍는 이랑 님이 만화도 그리면서 선보인 《이랑 네컷 만화》(유어마인드,2013)를 읽습니다. 이랑 님은 그저 스스로 즐겁고 싶기에 노래와 영화에 이어 만화를 즐깁니다. 노래는 다른 사람이 듣고, 영화는 다른 사람이 봐요. 그러나, 다른 사람이 듣기 앞서 스스로 부르는 노래입니다. 언제나, 다른 사람이 보기 앞서 스스로 수없이 되풀이하면서 보고 즐기는 영화입니다.


  사랑을 담아 부르는 노래일 적에, 이 노래를 듣는 사람들이 사랑을 누립니다. 꿈을 실어 찍은 영화일 적에,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꿈을 누려요.


  값진 요리를 차린 밥상이라서 더 맛있지 않습니다. 값지지 않더라도 따사롭게 사랑을 담아 차린 밥상이면 맛있어요. 값비싼 사진기로 찍은 사진이라서 더 멋있지 않습니다. 값비싼 사진기가 아니더라도 사랑을 고이 담아서 찍은 사진이면 멋있을 뿐 아니라, 아름답고 사랑스럽지요.


  대단한 그림 솜씨를 뽐내어 그리는 만화여야 하지 않습니다. 놀라운 그림 재주를 부려서 그리는 만화여야 하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담을 때에 만화입니다. 이야기를 선보일 때에 영화입니다. 이야기를 들려줄 때에 노래입니다.


- “오빠.” “응.” “내가 음악도 안 하고 영화도 안 하고 그림도 안 하고 아무것도 안 해도 좋아할 거야?” “응, 근데 안 할 수 있을까?” “안 할 수 있지. 안 하고 싶으면!” “그래?” “나 주부도 하고 싶은데, 나 청소 좋아하니까. 음식물쓰레기는 빼고.” “응응, 주부도 좋아.” (128쪽)


  알베르 라모리스 님이 찍은 영화 〈빨강 풍선〉이란, 페데리코 펠리니 님이 찍은 영화 〈길〉이란, 우리한테 무엇이라 할 만할까요. 멋진 영화요 대단한 영화일까요. 사랑스러운 영화요 아름다운 영화일까요.


  이진주 님이 그린 〈하니〉나 김수정 님이 그린 〈둘리〉는 어떤 만화일까요. 이 만화는 우리한테 무엇이 될까요. 어떤 넋으로 그린 만화요, 어떤 꿈과 사랑이 깃든 만화일까요. 아이들이 이 만화를 좋아하는 까닭이란,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어 새롭게 아이를 낳은 뒤에도 〈하니〉와 〈둘리〉를 한결같이 사랑하는 까닭이란 무엇일까요.


  이랑 님 첫 만화책 《이랑 네컷 만화》란 이랑 님이 태어나 오늘까지 살아오며 누린 즐거움과 사랑과 꿈을 담은 이야기책이라고 느낍니다. 이제 막 첫 만화책을 내놓은 만큼, 앞으로도 이랑 님 즐거움과 사랑과 꿈을 차근차근 이어서 예쁘게 선보일 수 있기를 빕니다. 남한테 보여준다거나 누구한테 드러내려는 만화가 아닌, 언제나 스스로 곱게 웃는 이야기를 들려주면 좋겠습니다. 멋진 작품이 되거나 대단한 상을 받을 작품이 아닌, 스스로 삶을 아름답게 가꾸면서 시나브로 그릴 수 있는 삶빛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4347.1.25.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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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4-01-25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싶었던 만화였는데 계속 미루고만 있네요.ㅠㅠ
나중에 꼭~ 봐야겠어요.ㅎㅎ

숲노래 2014-01-25 18:12   좋아요 0 | URL
머잖아 즐겁게 보실 날 있으리라 생각해요 ^^
 


  노래도 하고 영화도 하고 그림도 하고, 스스로 즐겁게 하고픈 삶을 누리면 된다. 밥도 짓고 빨래도 하고 걸레질도 하고, 스스로 즐겁게 꾸리고픈 살림을 보듬으면 된다. 아끼고 싶은 나무를 아낀다. 사랑하고 싶은 숲을 사랑한다. 달리고 싶은 길을 두 다리로 달린다. 드러눕고 싶은 풀밭이니 농약이나 비료 따위는 치지 않고 푸른 내음 가득하도록 돌본다. 풀벌레가 뛰고 개구리가 고르륵고르륵 운다. 누구나 스스로 살아가고픈 대로 살아갈 때에 이야기가 태어나고, 이야기는 노래가 되든 영화가 되든 만화가 되든, 무엇이든 될 수 있다. 4347.1.25.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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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랑 네컷 만화
이랑 지음 / 유어마인드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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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비

 


  겨울비가 내린다. 오늘 아침에 내리는 겨울비는 차갑지 않다. 그래도 겨울이니 여름처럼 시원한 비는 아닌데, 일곱 살 큰아이와 네 살 작은아이가 나란히 섬돌에 앉아서 비를 바라본다. 너희들 ‘비 구경’을 아는구나. 한참 섬돌에 앉아 둘이 종알종알 떠들더니, 긴신을 꿰고는 마당을 달린다. 마당을 달리다가 우산을 꺼내어 펼친다. 우산을 꺼내어 펼쳐 빙빙 돌리고 놀다가 비옷을 입는다. 비옷을 입으며 서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한다.


  겨울비 아닌 겨울눈이라면 훨씬 즐겁게 놀았을까. 아마 눈이어도 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놀겠지. 그리고, 겨울에도 포근한 이곳에서는 겨울비를 가만히 느끼면서 겨울내음과 빗소리를 듣는다. 아이들과 먹을 미역국을 끓인다. 곧 다 끓을 테니 따뜻하게 먹고 또 놀자. 4347.1.25.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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