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초 + 1초

 


  2월 19일 수요일 낮에 서울 망원역에서 전철을 타고 고속터미널역으로 간다. 그리 멀지 않을 듯했는데 막상 전철로 달리고 보니 그리 가깝지는 않다. 18시 20분에 순천으로 떠나는 시외버스를 탈 수 있을는지 없을는지 아슬아슬하다고 느낀다. 고흥으로 가는 시외버스는 17시 30분이 막차. 이 버스를 놓쳤기에 순천으로라도 가야 하는데, 순천으로 가는 18시 20분 버스를 놓치면 다음 버스는 있어도 고흥으로 들어갈 버스가 없다.


  고속터미널역에서 전철이 선다. 서울마실을 하며 장만한 책으로 꽉 찬 가방을 등에 짊어지고 두 손에도 책으로 꽉 찬 천가방을 둘 든 채 뒤뚱뒤뚱 달린다. 계단을 헉헉거리며 오르고, 자동계단에서는 살짝 숨을 돌린다. 표 끊는 곳까지 다시 달린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앞에서 표를 끊는 사람들이 아주 느긋하다. 줄을 설 적에는 모두 ‘앞사람이 언제 줄어드나’ 하고 생각하지만, 막상 제 차례가 되면 참 느긋하게 표를 끊기 일쑤이다. 시계를 보니 버스가 떠나기까지 3분 남는다. 천천히 표를 끊는 사람들이 모두 지나간 뒤 “예약한 표요.” 하면서 카드를 내민다. 바로 표를 끊어 준다. 표를 받아 입술로 문 다음 달린다. 순천으로 떠나는 시외버스가 막 문을 닫고 떠나려 했다. 등에 멘 가방은 짐칸에 얼른 넣는다. 천가방은 손에 들고 버스에 오른다. 내가 오르지마자 버스는 문을 닫고 부릉부릉 움직인다. 흔들흔들한 버스에서 맨 뒤에 있는 내 자리로 간다.


 18시 20분에 고속터미널역에서 빠져나오려는 시외버스는 좀처럼 못 움직인다. 서울에서는 퇴근 시간이다. 한참 걸려 고속도로로 접어든다. 이러다가 순천 버스역에 닿은 뒤 고흥으로 들어가는 시외버스를 놓치려나? 순천에서 고흥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시외버스는 22시 13분이다.


  서울에서 순천까지 달리는 시외버스는 3시간 45분 걸린다고 하는데, 서울에서 벗어나는 데에 퍽 힘들었기 때문인지, 순천 버스역에 22시 12분에 닿는다. 나는 곧바로 22시 13분 버스를 타야 하지만, 순천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갈 사람들은 시외버스에서 내릴 적에도 참 한갓지다. 아주 천천히 천천히 내린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내려 짐칸에서 가방을 내린 뒤 오른어깨에만 걸친 채, 천가방 둘을 왼팔뚝에 꿰고는 달린다. 고흥으로 들어갈 마지막 시외버스가 막 버스역을 벗어난다. 부리나케 달려 문을 콩콩 두들긴다. 버스가 멈추어 준다. 됐다, 멈추어 주기만 하면 태워 줄 테지. 그리고, 문을 열어 준다. “고흥 가지요? 표를 미처 못 끊었는데 고흥에 가서 끊어서 드려도 될까요?” “타소.”


  네 시간 가까이 달린 시외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다시 한 시간을 달릴 시외버스를 타니 엉덩이가 아프다. 그렇지만 버스를 잡았다. 나한테는 막차인 버스를 두 차례 잇달아 잡았다. 10초와 1초가 더 들었으면 둘 다 놓쳤을 텐데, 10초와 1초 사이로 둘 다 잡았다. 23시 훨씬 넘어 고흥읍에 닿은 뒤에는 택시를 불러서 탄다. 온몸이 쑤시지만 마음은 시원하다. 시골바람을 쐬면서 엉덩이를 살살 쓰다듬는다. 4347.2.20.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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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보 2014-02-20 19:23   좋아요 0 | URL
제가다 숨을 몰아쉬세 되네요 헉헉

숲노래 2014-02-20 21:13   좋아요 0 | URL
서울에 사는 분들은 17시 30분 '막차'를 느끼기 쉽지 않겠지만, 고흥으로 돌아가는 시외버스조차 16시 버스를 타더라도 읍내에 닿으면 모든 군내버스가 끊겨 어차피 이 버스를 타도 택시를 타야 한답니다 ^^;;;

아무튼, 참 먼길 달려서 돌아왔어요 @.@
 

그림책 《들공주》와 《내가 진짜 공주님》

 


  일본사람 나카가와 치히로 님이 1995년에 일본에서 처음 선보인 그림책이 있다. 이 그림책에 붙은 이름은 《のはらひめ》이다. 지난 2001년에 한국말로 옮겨서 한국 어린이도 이 그림책을 볼 수 있으며, 한국책에는 《내가 진짜 공주님》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우리 집 아이들과 한국 ‘번역’책 《내가 진짜 공주님》을 읽으며, 수수하며 예쁜 넋이 잘 드러나는 그림책이라고 여겼다.


  한국말로 나온 ‘번역’책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헌책방 나들이를 하다가 일본책으로 《のはらひめ》를 보고는 기쁜 나머지 냉큼 집어들었다. 일본책에 흐르는 결과 무늬를 헤아려 보고 싶었다. 그런데, 일본책에 적힌 이름 ‘のはら’을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のはら’는 ‘내가 진짜’가 아닐 텐데? ‘ひめ’는 ‘공주’를 뜻한다. 그러면 ‘のはら’는 무엇인가? 일본말사전을 살펴본다. 일본말 ‘のはら’는 ‘들’을 뜻한다고 한다. 무언가 뒷통수를 때리는 느낌이다. 일본책 간기를 살핀다. 일본책에는 영어로 “Princess of the Field”라는 말을 나란히 적는다. 한국책 간기를 들여다본다. 한국책 간기에는 “NOHARA Hime”라고 나온다.


  이런, “내가 진짜 공주님”도 아니요 “우리 집 공주님”도 아니잖은가? 한국 ‘번역’ 그림책을 보면, 이 그림책에서 고빗사위라 할 자리에서 주인공 가시내가 “우리집 공주님”이라고 글을 적는다. 공주 공부를 마치고 어떤 공주가 되고 싶냐고 물으니, 그림책 주인공 가시내는 씩씩하게 한 마디를 적는데, 한국 ‘번역’책에는 “우리집 공주님”이요, 일본 그림책에는 “のはらひめ”, 그러니까 “들공주”라고 적었다.


  일본 그림책에 나온 글을 죽 살펴본다. 아무래도 한국 그림책에 적힌 글하고 다르구나 싶다. 한국에서 이 그림책을 옮기면서 글 줄거리까지 바꾸었구나 싶다. 줄거리뿐 아니라 알맹이까지 바꾸었다. 그림책 주인공 가시내는 ‘들판에서 들내음 마시고 들꽃으로 꽃모자 만들어 쓰면서 노는 공주’가 되고 싶었구나. 다시 그림책을 들여다보니, 겉그림에도 온통 들꽃잔치이다. 겉그림에 나오는 가시내는 들꽃모자를 썼을 뿐 아니라, 치마 주머니에도 들꽃을 한 줌 넣었다. 이 아이는 “들공주”요 “들꽃공주”이다. “들빛공주”요 “풀빛공주”이며 “풀공주”이다.


  부아가 치민다. 일본사람 나카가와 치히로 님이 아이들한테 들려주려는 이야기를 아주 엉터리로 바꾸었을 뿐 아니라, 제빛을 망가뜨리고 말았다. 나카가와 치히로 님이 빚은 다른 ‘번역’ 그림책으로 《작은 새가 좋아요》가 있다. 이 그림책을 보면, 나카가와 치히로 님이 ‘숲·들·꽃·작은 숨결들’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가를 헤아릴 수 있다. 다른 그림책 ‘번역’도 엉망진창으로 바꾸었을까?


  아름다운 그림책을 아름답게 번역하고 편집해서 우리 아이들한테 베풀 때에 비로소 아름답다. 아름다운 넋이 무엇인가를 헤아리지 않고, 함부로 멋대로 아무렇게나 뒤바꾸는 일은 올바르지 않을 뿐 아니라 아름다울 수 없다. 아이들한테 ‘들꽃’을 이야기하려는 그림책 작가 넋을 송두리째 짓밟은 이 그림책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이런 그림책을 ‘번역’해서 내놓는 출판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나카가와 치히로 님 그림책을 애써 번역해 주어 무척 고맙지만, 이야기도 줄거리도 알맹이도 모두 뒤바뀌어 놓는다면, 어떻게 될까? 이 그림책을 빚은 나카가와 치히로 님한테뿐 아니라, 우리 아이들한테도 모두 잘못을 저지른 셈이니, 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루 빨리 《내가 진짜 공주님》을 절판하고, 《들꽃 공주》나 《들공주》라고 이름을 똑바로 바로잡아서 제대로 우리 아이들한테 선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4347.2.20.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과 함께)

 

 

 

 

 

 

 

 

 

 

 

 

 

 

 

+

 

표지를 가득 감싼 '풀꽃'을 보라.

이 표지 그림이 바로 이 그림책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안타깝지만,

이분 다른 '번역' 그림책도

'번역'을 믿을 수 없다.

아주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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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이 개는 졸졸졸

 


  서울마실을 하던 이른아침에 떠돌이 개가 졸졸졸 따라온다. 우리 집에 눌러앉아 한솥밥을 먹는 떠돌이 개가 내 뒤를 졸졸졸 따라온다. 읍내로 가는 군내버스를 타려고 우리 마을 어귀를 벗어나 이웃 봉서마을까지 걸어가는데 쉬잖고 따라온다. 얘, 나는 군내버스 타고 읍내로 가서 서울까지 가는 시외버스를 탄다구, 네가 따라올 수는 없어. 돌아가라고 말하지만 듣지 않는다. 뭐, 버스 타는 데까지 따라오려는 마음은 떠돌이 개 마음이지. 우리 동백마을부터 이웃 봉서마을까지는 지나다니는 차가 없다. 봉서마을에 이르니 큰길에서 지나가는 차가 있다. 큰길을 건너니 떠돌이 개는 더 따라오지 않는다. 멀거니 나를 바라본다. 그래, 너는 이곳에서 조용히 거닐면서 놀아라. 이곳이 가장 좋은 데야. 4347.2.20.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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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4-02-21 13:55   좋아요 0 | URL
아구, 이 녀석도 이젠 한솥밥을 먹는 식구인 줄을 아는군요~~
그런데 여전히 떠돌아 다니기는 해도, 이젠 함께살기님 댁에서 한솥밥도 먹고
머무르기도 하니 이젠 이름을 바꿔주심도 어쩌실지요~
'네맘대로야'라든지 '홀가분 개'로요.ㅋㅋ
'떠돌이 개'라는 말이 어쩐지 조금 쓸쓸하고 외로운 느낌이 들어서...소심하게
여쭙니다..^^;;

(보내주신, 도서관 소식지와 너무나 멋진 사진엽서들...너무너무 기쁘고 감사하게
잘 받았습니다. 고맙습니다~*^^* )

숲노래 2014-02-21 14:35   좋아요 0 | URL
맞는 말씀이에요.
곰곰이 생각해 보는데
아직 마땅한 이름을 짓지 못했어요.
어떤 이름이 좋으려나... 흠흠...
 


  ‘the ongoing moment’는 무엇을 뜻할까 헤아려 본다. ‘ongoing’은 ‘꾸준히 이어지는’을 뜻하고 ‘moment’는 ‘그때’를 뜻하니, ‘꾸준히 이어지는 그때’를 가리킨다고 할 만하다. ‘꾸준히’를 덜어 ‘이어지는 그때’라 해도 될 테지. 그러면, 무엇이 얼마나 왜 어디에서 이어지는가. 이어지지 않는 모습이란 무엇인가. 어제 내가 한 일은 오늘로 이어지는가? 오늘 내가 하는 일은 어제와 안 이어지는가? 어제 보았던 모습은 오늘과 이어지는가? 오늘 보는 모습은 어제와 이어지는가? 한국에서 내가 하는 일과 브라질에서 지구별 이웃이 하는 일은 얼마나 이어지는가? 러시아에서 지구별 이웃이 본 모습은 일본에서 지구별 다른 이웃이 보는 모습과 얼마나 이어지는가? 제프 다이어 님이 쓴 책을 찬찬히 읽는다. 이녁 책을 번역한 한국사람은 《지속의 순간들》이라 이름을 붙인다. 한자말 ‘지속’은 ‘계속’을 뜻하고, 한자말 ‘계속’은 ‘이어짐’을 뜻한다. ‘무엇 + -의 + 무엇’처럼 적는 글투는 일본 글투이다. 일제강점기부터 물밀듯이 들어온 일본 글투는 그무렵 지식인 손을 거쳐 오늘날까지 백 해에 이르는 나날 동안 깊이 뿌리를 박는다. 이런 글투를 일제강점기 아닌 1800년대 옛사람한테 들려주거나 1700년대 옛사람한테 보여준다면, 이 나라 옛사람은 이런 글이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 궁금하다. 예부터 이 나라에서 살아온 사람은 밥을 먹고 똥을 눈다. 서양사람은 빵이나 감자를 먹고 똥을 눈다. 밥이든 빵이든 목숨을 살리는 먹을거리이다. 어느 겨레나 서로 사랑을 나누어 아이를 낳고, 따사롭게 아이를 돌본다. 먼먼 옛날부터 고이 흐른다. 오랜 옛날부터 찬찬히 이어진다. 제프 다이어 님은 이녁 삶자리에서 이녁 이웃이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이야기를 꾸준히 잇는다. 우리는 우리 삶자리에서 우리 이웃이 찍은 사진을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꾸준히 이을 만하겠지. 그나저나, ‘the ongoing moment’인데, 왜 한국책에 ‘순간들’이라고 책이름을 붙였을까? 알쏭달쏭하다. 4347.2.20.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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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의 순간들
제프 다이어 지음, 한유주 옮김 / 사흘 / 2013년 1월
20,000원 → 18,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00원(5% 적립)
2014년 02월 20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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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왔습니다

 


  고흥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가방을 내려놓기 앞서 마당에서 뒹구는 자전거를 제자리에 갖다 놓습니다. 큰아이가 동생하고 놀다가 마당에 그대로 둔 채 잠들었나 봐요. 마루를 보니 아이들이 눈 오줌으로 오줌그릇이 철철 넘칩니다. 오줌그릇을 들고 집 둘레에 뿌린 뒤 오줌그릇을 물로 헹굽니다. 부엌은 아주 어지럽습니다. 부엌바닥을 신나게 걸레질을 한 다음 설거지를 조금 합니다. 이튿날 먹을 밥을 헤아려 곧 쌀을 씻어 불려야지요. 읍내에서 장만한 몇 가지 먹을거리를 냉장고에 넣습니다. 큰아이가 걷어찬 이불을 여미어 주고 머리를 쓰다듬습니다. 마당에 서서 기지개를 켜며 별을 바라봅니다. 그러고 나서 후박나무와 동백나무와 조그마한 장미나무랑 복숭아나무한테 “잘 다녀왔습니다.” 하고 인사를 합니다. 4347.2.19.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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