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고 우는 아이들


  아이들이 웃습니다. 기쁘기에 웃습니다. 아이들이 웁니다. 슬프기에 웃습니다. 아이들은 모든 느낌(감정)을 홀가분하게 받아들이고 누립니다. 이와 달리 어른들은 느낌(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일이 드뭅니다.

  아이들은 부끄러움이나 수줍음이 없습니다. 그저 모두 받아들여서 신나게 누립니다. 이리하여, 아이들은 배울 수 있고, 자랄 수 있으며, 생각을 어떻게 지어서 삶을 누리는가 하는 대목을 깨닫습니다. 아이들은 어느새 사랑이 되고 아름다운 숨결이 됩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웃을 때에는 잘 웃고, 울 때에도 잘 울기에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나도, 웃을 때에는 잘 웃고, 울 때에는 잘 우는 아름다운 어버이로 삽니다. 서로 웃고, 서로 웁니다.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하루를 엽니다. 서로 노래를 부르면서 하루를 닫습니다. 아이들 모습은 바로 내 모습입니다. 4348.1.24.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아버지 육아일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큰아이 목소리 듣기



  밤이 깊은 열 시 사십 분에 큰아이 전화를 받는다. 아버지는 지난 15일부터 22일이 되도록 집을 비우고 공부를 하러 나왔다. 아버지는 앞으로 며칠 더 공부를 해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아버지하고 하루나 이틀쯤 떨어진 채 지낸 적은 더러 있으나 이렇게 오랫동안 떨어진 채 지낸 적은 없다. 누구보다 큰아이가 서운해 하고 쓸쓸해 하며 힘들어 할 수 있겠다고 문득 느낀다. 큰아이 목소리를 들으니, 이 모든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나는 모진 아버지가 아니다. 나는 사랑스러운 아버지이다. 그래서 여덟 살 큰아이한테 말한다. “벼리야, 아버지는 공부하러 왔어. 벼리한테 가르칠 것들을 배우러 공부를 해. 앞으로 며칠 더 공부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 아버지는 우리가 즐겁게 나눌 아름다운 이야기를 배우니까, 다 괜찮아. 동생하고 함께 웃고 노래하면서 잘 놀면 돼. 아버지가 보고 싶으면 아버지를 그림으로 그려.” “아버지 그림으로 그렸는데, 안 오잖아.” “우리 집도 그려 주고, 우리 숲도 그려 줘.”


  아이야, 네가 오늘은 울지만, 모레에는 웃으리라 느껴. 네 눈물과 울음이 바로 네 웃음과 사랑을 낳지. 기다리렴. 아버지가 그동안 너한테 노래는 가르쳤지만, 춤은 못 가르쳤지. 아버지가 그동안 너한테 자전거는 가르쳤지만, 물구나무서기는 못 가르쳤지. 아버지는 너한테 아주 새롭고 모두 새삼스러운 이야기를 사랑으로 가르칠 수 있도록 이끄는 배움길에 나섰단다. 그렇다고 이 배움길을 걷느라 집을 몇 달씩 비우지는 않아. 이번에는 열흘을 비우지. 열흘이 길다면 길 텐데, 짧다면 하염없이 짧아. 언제나 곱게 웃고 노래하면서 뛰노는 네 숨결을 잘 지켜보고 아끼기를 빌어. 씩씩하고 튼튼한 우리 집 사름벼리야. 4348.1.23.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아버지 육아일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아이는 늘 기다립니다



  아이는 늘 기다립니다. 기다리면서 지켜봅니다. 아이가 놀라운 넋이라고 하는 까닭은, 아이는 늘 기다리면서 지켜보는 숨결이기 때문입니다.


  어른인 내 모습을 돌아보셔요. 어른인 나는 무엇을 하는가요? 어른인 나는 기다리나요? 어른인 나는 지켜보나요? 기다리지 않고 지켜보지 않은 채 아이를 닦달하는 내 모습을 똑바로 똑똑히 느껴야 합니다.


  어버이로서 아이한테 이제껏 제대로 못했다면, 그저 이제껏 제대로 못했을 뿐입니다. 어버이로서 아이와 함께 삶을 누리지 못했다면, 그저 이제껏 제대로 삶을 누리지 못했을 뿐입니다.


  아이는 열 살까지 지켜보고, 스무 살까지 지켜보고, 쉰 살까지 지켜보고, 백 살까지 지켜봅니다. 늘 지켜봅니다. 어버이로서 아이와 무엇을 하면서 어떤 사랑을 나누고 싶은지 생각해 보셔요. 그러면 다 됩니다.


  어버이가 밥을 지으면, 밥내음을 맡으면서 기다리는 아이입니다. 어버이가 돈을 벌려고 일터에 가면, 어버이가 돈을 다 벌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이입니다. 어버이가 배움길을 떠나면, 어버이가 잘 배우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이입니다. 어버이가 저를 재우려고 잠자리를 마련해서 누이면 자장노래를 불러 주고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주기를 기다리는 아이입니다.


  사랑스레 기다리는 아이를 사랑스레 품어요. 사랑스레 꿈꾸고 지켜보는 아이하고 두 눈을 맑게 맞추면서 마음을 읽어요. 4348.1.2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아버지 육아일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과학실험



  국민학교에서 과학실험을 합니다.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때이니 1980년대 첫무렵입니다. 몇 년 몇 월 몇 일인지까지 떠오르지 않으나, 국민학교 여섯 해 내내 과학실험이면 언제나 이와 같았습니다. 어떠했느냐 하면, 과학실이라는 데에 가서 과학실험을 하는데, 맨 처음에는 교사가 ‘그저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지켜보면서 결과를 적으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는 실험 규칙과 차례에 맞추어서 하나하나 하되, 내 마음대로 지켜봅니다. 교과서대로 지켜보지 않고, 교과서는 모르는 채 아주 홀가분하게 지켜봅니다.


  과학실험을 마치고 나서, 그러니까 과학실험을 하는 내내 지켜본 결과를 모두 꼼꼼하게 적지요. 이렇게 적은 뒤 교사한테 보여주면 “뭐야? 이 터무니없는 숫자는?” 하면서 벼락처럼 소리를 지릅니다. 나만 이런 숫자가 나오지 않습니다. 다른 아이들도 죄 터무니없다는 숫자를 적었다고 교사가 꽥꽥 소리를 지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학실에서 커다란 몽둥이로 실컷 두들겨맞습니다.


  교사는 맨 처음에 우리한테 말했지요. ‘결과가 어떻게 나오도록 하지 말고,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지켜보고 나서, 이렇게 나온 결과를 적으라’ 하고 말했지요. 그래서 우리는 모두 ‘마음대로’ 실험을 했고, ‘마음대로’ 결과가 나왔으며, 우리가 한 결과에서 나오는 숫자는 모두 달랐습니다. 모든 아이가 그야말로 모두 다른 숫자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서너 아이는 ‘교과서에 나온 실험결과 숫자’가 나옵니다. 이때 아주 크게 놀랐습니다. 교과서에 나온 실험결과 숫자를 적은 아이는 교사한테서 칭찬을 받으면서 ‘한 대도 안 맞’습니다. 나를 비롯한 다른 모든 아이들은 엉덩이가 시뻘개지도록 커다란 몽둥이로 맞고, ‘아이 짜증 나. 과학실험 참말 싫어. 과학실 싫어.’ 하고 말합니다.


  나중에 동무한테 묻습니다. ‘교과서에 나온 실험결과 숫자’를 적어서 매를 안 맞은 동무한테 묻습니다. “야, 너 대단하다. 어떻게 너는 맞혔니?” “쉿. 다른 아이한테 말하지 마. 나는 전과에 나온 숫자를 외워서 적었어. 나도 실험결과 숫자는 전과에 나온 숫자하고 달라.”


  우리는 무슨 과학실험을 하는 셈일까요? 우리 사회는 아이한테 무엇을 보여주거나 가르칠까요? 우리 학교는 어떤 짓을 하는 셈일까요? 우리 학교교육은 아이를 어떤 넋으로 몰아세우거나 윽박지르면서 ‘터무니없이 아무것도 모르는 종(노예)’이 되도록 길들이는 셈일까요?


  그래서 나는 국민학교 여섯 해, 다음으로 중학교 세 해, 그 다음으로 고등학교 세 해, 열두 해에 걸쳐 ‘과학실험’을 해야 하는 때에는 늘 ‘거짓 숫자(전과나 참고서에 나온 숫자)’를 적어서 안 얻어맞는 길을 살폈고, 시험을 치를 적에도 ‘거짓 숫자’를 외워서 적었으며, 과학실험을 해야 하면 ‘내 마음 그대로 내 눈으로 지켜보는 숨결’을 몰래 지켰습니다. 4348.1.20.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람타공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밥맛



  집 바깥으로 나온다. 열흘에 걸쳐 배우는 곳에 있다. 이곳에서 배우는 사람은 ‘배우는 일’에 모든 마음과 기운을 쏟는다. 그래서, 밥은 다른 사람이 해 준다. 모처럼 열흘씩 ‘남이 해 주는 밥’을 먹는다고 할 텐데, 남이 해 주는 밥을 먹으면서, 이제껏 ‘밥맛’을 느낀 적이 드물다. 왜 그럴까?


  내 어머니나 곁님 어머니가 해 주는 밥에서는 밥맛을 느끼고, 곁님이 해 주는 밥에서도 밥맛을 느낀다. 그러나, 커다란 밥집이든 작은 밥집이든, 밥집에서는 좀처럼 밥맛을 못 느낀다.


  밥술을 들다가 생각한다. 나는 내가 손수 지어서 먹는 밥이 가장 맛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으나, 우리 아이들은 제 어버이가 차려서 주는 밥이 가장 맛있으리라 본다. 아니, 아이들은 제 어버이뿐 아니라 남이 차려서 주는 밥도 맛있다고 여길 테지. 왜냐하면, 아이들은 아직 손수 밥을 지어서 먹는 삶은 아니니, 다른 누가 무엇을 주더라도 고마우면서 반갑고 즐겁게 먹는다고 느낀다.


  나는 어떠한가. 다른 사람이 해 주는 밥은 무엇보다 ‘고맙다’고 느낀다. 그러니까, 내가 나한테 차려서 주는 밥, 손수 지어서 먹는 밥은, 내가 나한테 고마우면서 맛을 느낀다. 남이 나한테 차려서 주는 밥에서는 고마움을 느끼되 맛까지는 못 느낀 셈이다.


  너무 많은 사람한테 한꺼번에 차려서 주는 밥이기에, 누가 누구한테 주는지 모르는 채 짓는 밥이기에 밥맛을 못 느끼는 셈일까. 그러니까, 바깥밥을 먹는 자리에서도, 이 밥을 짓는 다른 사람이 나를 느끼면서 나를 생각해서 밥을 짓는다면 밥맛을 기쁘게 느낄 만하리라 본다. 그리고, 밥을 짓는 그분을 내가 마음속으로 그릴 수 있으면, 나로서는 밥맛을 새삼스레 느낄 만하리라 본다.


  이제껏 살면서 ‘남이 차려서 주는 밥’에서 맛을 느끼지 못했다면, 이제껏 나는 ‘나한테 밥을 차려서 주는 사람이 어떤 마음이요 숨결’인지 느끼려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4348.1.17.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아버지 육아일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