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못 읽는 책들을
 [‘사진책 도서관’ 함께살기] 도서관일기 2011.4.15.



 날이 제법 따뜻해진데다가 집에서 물을 쓸 수 있는 터라 모처럼 서너 시간 도서관에서 책 갈무리를 합니다. 아이는 이오덕학교 언니 오빠 들을 따라 조잘조잘 혼자서 노래하면서 학교로 올라갑니다. 널찍한 데에 자리를 얻어 넉넉하게 꽂아 놓는 책들인데, 집일과 학교일과 책 내는 일에 얽히다 보니 막상 도서관 책들을 찬찬히 꽂은 다음 자질구레한 짐을 치워 문간에 간판 하나 달고는 두루 알리는 일은 하나도 못합니다. 곧 둘째가 태어나면 아기 돌보랴 집일 하랴 하면서 도서관 살림 돌보기는 더 못할 텐데, 겨울이 지나갔기에 이불 빨래에도 마음을 써야 하는 만큼, 도무지 어느 하나 갈피를 못 잡는구나 싶습니다.

 그저 쌓인 채 겨울을 보낸 책을 뒤늦게 끌릅니다. 아직 못 끌른 책이 좀 있습니다. 끌렀으나 제자리에 못 꽂은 책이 꽤 됩니다. 책꽂이 바닥에 신문지를 한 장 깔고 책을 차곡차곡 얹거나 세우거나 눕힙니다. 오래도록 둘 책이라면 세우지 말고 눕히라는데, 눕히면 꺼내어 읽기가 좀 번거롭습니다.

 첫째가 조금 더 크고, 둘째가 곧 태어나서 첫째만큼 나이를 먹어야 이 도서관을 제대로 꾸린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오늘 하루부터 제대로 꾸리지 못하면 앞으로도 제대로 꾸리지 못하는 셈이 아닌가 궁금합니다. 집일을 하는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책은 무엇일까요. 집일을 안 해도 되는 사람들이 읽는 책은 무엇일까요. 애써 내 도서관까지 찾아올 사람들은 무슨 책을 집거나 살피거나 돌아볼까요. 사람들은 무슨 책으로 마음밥을 삼을까요. 사람들은 딱히 마음밥으로 삼을 책을 읽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나부터 내 삶에 마음밥 하나 살포시 놓는지 헤아려야지요. 나부터 바쁘거나 고되다는 삶 탓이나 투정만 하지 말고, 이렇게 바쁘거나 고된 나날에 어떠한 책을 손에 쥐면서 내 마음밥으로 삼는지 살펴야지요. 심심풀이 책도 틀림없이 있습니다. 마음밥 책도 어김없이 있습니다. 두 아이와 옆지기를 모두 보살피면서 살아야 하는 한 사람으로서 책까지 손에 쥐려 한다면, 집식구들 사람책 아닌 뭇사람 종이책에서 무엇을 느끼거나 얻거나 받아들일 만한가를 깨달아야지요.

 오늘 읽을 수 있으면 오늘 읽을 수 있어 반갑습니다. 오늘은 못 읽고 나중에 아이들이 대여섯 살 열대여섯 살 스물대여섯 살 즈음 될 때에 읽을 수 있다면, 그때에는 그때대로 내 마음도 한결 자라면서 더 깊이 읽을 수 있는지 모릅니다. 앞으로 열 해나 스무 해 뒤에는 어느 새책방이나 헌책방이나 도서관에서도 만나기 힘들 책을 이렇게 일찌감치 장만해서 시골마을 도서관을 꾸렸다는 뜻이라고 생각하자고 고개를 끄덕이며 봄날 한 자락 땀을 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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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하나 건사하기
 [‘사진책 도서관’ 함께살기] 도서관일기 2011.3.19.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니까 태어나는 책입니다. 알아보는 사람이 있기에 글로든 그림으로든 사진으로든 이야기를 담아 책 하나쯤 될 만한 부피로 빚습니다. 모든 책마을 일꾼이 알아보지는 못하나, 누군가 한 사람 알아보아 주기 때문에 종이에 이야기 하나 얹고, 이 종이얘기꽃은 책이라는 새 이름을 얻어 우리 앞에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나라밖 그림책이나 사진책은 누군가 나라밖 마실을 다녀온 다음 즐거이 사서 읽고 나서 어느 때인가 스스럼없이 내놓은 책입니다. 또는, 한국에 있는 외국인학교나 주한미군 도서관에서 흘러나온 책입니다. 어느 책이건 누군가 기꺼이 ‘좋은 책이라 여기며 장만’했기 때문에 흘러나올 수 있습니다.

 알아보는 사람이 만들고, 알아보는 사람이 읽으며, 알아보는 사람이 건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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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4-24 0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사람만큼이나 책들도 많잖아요.
사람과의 만남에도 인연이 있듯이, 책과의 만남도 인연이라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숲노래 2011-04-24 08:34   좋아요 0 | URL
모두들 좋게 만나면서 사랑하는 사람과 책이 아닌가 싶어요..
 



 빼쫑빼쫑 새와 책읽기


 새벽 세 시 오십삼 분에 일어난다. 텃밭 가장자리에 쉬를 눈다. 보름달은 기울고 하늘은 온통 잿빛구름이다. 앞 멧자락에서 새소리가 들린다. 그리 멀잖은 곳에 있다. 휘파람새라는 새일까. 밤에 지저귀는 소리가 참 남다르다. 이윽고 날이 차츰 밝으며 다른 멧새가 우짖는다. 삐이삐이 빼쫑빼쫑 우짖는 이 새는 종다리일까. 새벽 다섯 시에 접어들 무렵부터 한 시간쯤 우짖더니 조용하다.

 새를 다룬 도감이나 사진책이 곧잘 나온다. 많지는 않지만 드문드문 나온다. 새를 다룬 책에는 새가 날갯짓을 하거나 나뭇가지에 앉은 모습을 예쁘게 잘 담는다. 그렇지만 막상 새가 어떤 소리를 내며 노래하는지는 다루지 않는다. 새마다 어떠한 먹이를 즐겨찾는지를 알아보기는 더욱 힘들다.

 생각해 보면, 나 스스로 알아보거나 찾아낼 노릇이다. 새를 다룬 사진책이나 도감이 모든 이야기를 밝히기를 바랄 수 없다. 새벽과 아침과 낮과 밤에 따라 새소리가 어떻게 다르고, 먹이를 어디에서 어떻게 얻으며, 날마다 먹이를 어느 만큼 찾아서 먹어야 즐겁고 배부르게 하루를 마감하는지를 스스로 알아보거나 찾아낼 노릇이다. 배고플 때와 배부를 때 새소리는 어떻게 다르고, 막 일어났을 때하고 한창 움직일 때하고 잠들 무렵 새소리는 어떻게 다르며, 새끼일 때하고 어른일 때 새소리는 어떻게 다른가 또한 스스로 알아보거나 찾아낼 노릇이겠지.

 책을 아무리 뒤적이거나 살피더라도 제대로 알 길이란 없다. 스스로 숲속으로 들어가야 하고, 스스로 살금살금 새한테 다가서야 한다. 새가 우짖을 때에 이 소리를 가만히 귀담아들어야 한다.

 책을 아무리 펼치거나 넘기더라도 밥을 맛나게 할 수 없다. 스스로 밥을 차려야 한다. 지지든 볶든 굽든 삶든 스스로 물과 불과 간을 맞추어야 한다. 어느 밥책에도 물과 쌀을 몇 그램까지 맞추고 무슨 그릇으로 쓰며 어떠한 불을 넣고 몇 분 몇 초 끓여야 한다고 적을 수 없다. 스스로 알아내고 스스로 깨달으며 스스로 부딪혀야 한다. 책을 읽는대서 ‘장님 코끼리 만지기’조차 할 수 없다. 장님은 코끼리를 만지며 머리인지 다리인지 몸통인지 귀인지 모른다지만, 장님은 코끼리를 만져도 코끼리인 줄을 알 수 없다. (4344.4.23.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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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생각
― 사진과 돈



 돈이 있으면 더 나은 장비를 장만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퍽 많은 사람들이 들려줍니다. 돈이 없기에 더 나은 장비를 장만하지 못한다는 이야기 또한 꽤 많은 사람들이 들려줍니다.

 참말로 돈이 있지 않고서야 더 낫다는 사진 장비를 쓸 수 없습니다. 사진기 몸통이든 렌즈이든, 후드이든 필터이든, 세발이이든 가방이든, 빛살피개이든 필름이나 메모리카드이든, 사진 장비를 장만하자면 돈이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돈이 없는 사람으로서 사진길을 걷는다는 일은 터무니없다 말할 만한지 모릅니다.

 제가 사진길을 처음 걷던 때를 돌이킵니다. 저한테는 사진기가 없었습니다. 다섯 학기를 다니고 그만둔 대학교에서 처음으로 사진을 만나 사진길을 걸었는데, 이 대학교에서 보도사진을 배울 때에 강사를 맡은 분은 모든 학생한테 사진기를 하나씩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대학교 앞 신문사지국에서 신문배달을 하며 먹고살던 터라 그야말로 빈털털이였는데, 아버지가 예전에 쓰시다가 망가져서 집안 어디인가를 뒹굴거리던 낡은 자동사진기 하나를 생각해 냈습니다. 주말에 집에 가서 낡고 망가진 사진기를 찾았습니다. 사진관에 수리를 맡기니 한 주쯤 걸리고 삼만 원이 든다 했습니다. 다음 수업에는 사진기를 갖고 갈 수 없습니다. 저는 1회용 사진기를 사서 수업에 들어갔습니다. 이듬주에 두 번째 수업에 들어가 보니, 모두들 번들거리며 큼지막한 사진기를 가지고 옵니다. 1회용 사진기를 가지고 온 사람은 저 하나뿐이기도 했으나, 집에서 찾아내어 수리를 맡긴 낡고 값싼 자동사진기를 가져온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무렵 필름카메라는 수동사진기에서 전자동사진기로 크게 바뀌던 터라, 수동사진기를 쓰는 사람은 전자동사진기 앞에서 잔뜩 주눅들곤 했습니다. 까맣고 커다란 전자동사진기를 어깨에 걸치거나 큰 가방에 담고 작은 필름사진기를 비웃는 사람도 꽤 보았습니다.

 그렇다고, 없는 살림에 백만 원을 웃도는 사진기를 장만할 돈이 없을 뿐더러, 백만 원이 웃도는 값은 몸통 값일 뿐이요, 렌즈를 따로 사자면 더 어마어마한 돈이 든다는 소리를 듣고는 야코가 죽었습니다. 1998년에 한겨레신문을 230부(하고 스포츠신문·서울신문 곁들여 모두 260부) 남짓 돌리면서 신문배달 일삯으로 한 달에 삼십만 원을 받는데, 이 가운데 십육만 원을 적금으로 넣고 남은 십사만 원으로는 몇 해를 아무 데도 돈을 안 쓰고 모은들 꿈조차 꿀 수 없는 전자동사진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가장 값싸게 살 만한 수동사진기인 미놀타 엑스300마저 십삼만 원을 주어야 했으니, ‘내가 사진을 배우겠다고 나선 일은 참 턱도 없는 일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막상 사진기를 장만한다 하더라도 필름을 사야 합니다. 신문사지국 작은 방에 얹혀 지내는데 암실은커녕 현상하거나 인화할 장비조차 살 돈이 없습니다. 사진관에 현상과 인화를 맡겨야 하는데, 가장 싼 필름을 알아보아 한 통에 천 원짜리를 어찌저찌 찾기는 했는데, 한 통을 현상·인화 하려면 칠천 원쯤 들었어요.

 사진을 처음 배우던 때, 대학교 강의실에서 값비싼 사진기를 아무렇지 않게 장만해서 값비싼 필름을 아무렇지 않게 쓰는 사람들 웃음소리를 듣기가 몹시 거북했습니다. 이들은 으레 뒷자리에 앉고, 저는 맨 앞자리에 앉습니다. 나는 1998년 이해에 신문방송학과 모든 강의를 다 듣고 대학교를 그만둘 생각이라 모든 강의를 한 마디 한 마디 새겨들으려 했습니다. 등록금은 너무 비쌌고 대학 강의란 덧없다고 느꼈으나, 그만두기 앞서 ‘혼자 책을 읽어서는 알거나 배우기 힘든’ 실기수업은 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보도사진 강의를 들었어요. 이때에 보도사진 강사를 맡은 분은 무척 고맙게도 나처럼 1회용 사진기를 쓰거나 아주 싸구려인 낡은 자동사진기를 가진 사람한테 힘이 되는 말을 자주 들려주었습니다. 당신이 미국에서 사진을 배우던 일을 되새기면서, “미국 사진기자는 싸구려 자동사진기로도 특종을 찍지만, 한국 사진기자는 비싼 캐논과 니콘을 가지고 멀리서 망원으로 싸구려 사진을 찍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싸구려 자동사진기를 가진 미국 사진기자는 취재원 코앞으로 다가와서 사진을 찍지만, 비싼 캐논과 니콘을 가진 한국 사진기자는 멋없는 풍경 비스무레한 사진만 수없이 쓰며 필름을 버린다고 덧붙였어요.

 보도사진 강의는 한 학기로 끝납니다. 1998년 가을에는 따로 사진 강의가 없습니다. 더 들을 만한 강의를 찾을 수도 없기에 1998년 12월에 휴학계를 냅니다. 새벽에는 신문을 돌리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대학교 도서관과 학교 앞 새책방과 서울 시내 헌책방을 쏘다니며 혼자 책을 읽으며 배웁니다. 1999년 여름에 교육책과 어린이책을 내는 출판사에 영업자로 뽑혀 들어갑니다. 이듬해에 이곳을 그만두고 다른 출판사로 옮기는데, 다른 출판사 사장님이 저한테 큰 선물을 하나 해 줍니다. 제가 쓰는 값싸고 낡은 사진기를 보시더니 “얘야, 아무리 그 사진기로 사진을 훌륭히 찍는다 하더라도 장비가 뒷받침이 안 되면 안 된다. 앞으로는 네가 돈을 더 벌어서 더 나은 장비를 갖추더라도, 이제부터 십 년 동안 쓸 사진기를 하나 사 줄 테니까, 나중에 우리 회사를 그만두면 받을 퇴직금으로 생각하고 이 사진기를 써라.” 하고는 캐논 이오에스 5번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출판사에서는 신문사지국보다 일삯을 많이 받았습니다. 1999∼2000년에 출판사 영업자로 일하면서 62만 원을 받았습니다. 이 가운데 30만 원은 적금으로 떼고 32만 원을 내 몫으로 썼습니다. 신문사지국을 헤아리면 곱배기를 적금으로 부으면서도 살림돈은 곱배기로 남습니다. 그래도 새 사진기를 장만하기는 벅차요. 사진기를 선물해 주신 새 출판사 사장님은 일삯을 100만 원 주었습니다. 이제 100만 원 가운데 50만 원은 적금으로 부으며 50만 원을 살림돈으로 삼았고, 다달이 십만 원 안팎을 더 덜어 그러모은 다음 새 전자동사진기에 걸맞을 렌즈를 장만합니다. 처음에는 여러 해 손에 익은 사진기가 좋았지만, 차츰 새 사진기에 익숙해집니다. 사진기가 두 대가 되어, 하나는 빛깔사진을 찍기로 하고 하나는 흑백사진을 찍기로 합니다. 이제 막 새 사진기를 얻었기에 이무렵에는 ‘L렌즈’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퍽 값싼 렌즈만 쓰다가 28-105미리 엘렌즈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또 이 렌즈를 한 번 빌려서 몇 장 찍고 보니 ‘온누리가 달라 보였’어요.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그래, 그렇구나. 나 같은 사람들이 제아무리 값싼 사진기로 용을 쓰고 애를 쓰더라도, 돈이 있는 사람은 이런 장비를 손쉽게 턱하니 장만해서 내가 용쓰고 애쓴 사진을 어렵잖이 찍을 수 있구나.’

 그렇지만, 사진은 장비로 찍지 않습니다. 사진은 몸으로 찍습니다. 현장에 있는 사람이 사진을 찍지, 현장에는 없되 값진 사진기를 갖춘 사람이 사진을 찍지 못합니다. 넉넉한 돈으로 장만할 수 있는 더 나은 장비가 있을지라도, 나 스스로 어떤 사진을 어디에서 찍으려 하는가를 살피지 못한다면 부질없습니다. 사진기를 쥐어야 할 때를 알아야 하고, 사진기를 내려놓을 때를 알아야 합니다.

 제 사진감은 헌책방입니다. 예나 이제나 헌책방을 사진감으로 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헌책방으로 취재를 나오는 기자들을 만납니다. 이들 신문사 기자나 잡지사 기자는 캐논 이오에스 5번보다 훨씬 빼어나다는 몸통에다가 갖가지 값진 엘렌즈를 붙여서 사진을 찍습니다. 기자들이 헌책방을 취재한다며 사진 찍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불길이 치솟습니다. 이들 기자는 여느 때에는 헌책방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고, 헌책방을 다니지도 않으며, 헌책방이 어떤 곳인지를 마음으로 아로새기지도 않습니다. 슥 한 번 둘러보며 ‘그럴듯한 그림’을 신나게 만들어 냅니다. 값진 사진기와 장비와 렌즈는 ‘몸으로 제 사진감을 겪거나 치르거나 만나지 않’더라도 ‘그때그때 무척 빼어나다 싶은 그림을 손쉽게 선물해’ 줍니다.

 짧으면 5분이나 10분, 길면 30분쯤 ‘풍경 스케치’를 끝내는 사진기자가 돌아가고 난 자리에서 헌책방 책시렁을 뒤적이며 아픈 속을 달랩니다. ‘그래, 저들은 내가 이룰 수 없는 멋져 보이는 풍경 스케치를 놀라운 장비로 놀랍게 만들겠지. 내 사진기로도 어찌저찌 하면 틀림없이 나 또한 사람들한테 멋지게 보일 만한 풍경 스케치를 이룰 수 있는지 몰라. 그렇지만, 나는 풍경 스케치가 싫어.’

 필름을 마련하고 현상·인화를 하면서 다달이 십만 원 남짓 따로 모으려던 돈이 좀처럼 모이지 않습니다. 인화한 사진을 스캐너로 긁어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스캐너를 장만하니 목돈이 쉽지 않습니다. 두 해만에 드디어 ‘헌 엘렌즈’ 하나 살 돈이 모입니다. 그러고 또 한 해 다시금 푼푼이 돈을 모아 값싼 미놀타 엑스300을 캐논 에이이 1번으로 바꿉니다. 필름을 긁는 스캐너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거듭 돈을 추스르며 한 해 반이 지나 다른 스캐너를 장만했고, 다시 한 해 반이 지난 뒤에 캐논 9900에프 스캐너로 바꿉니다. 이러는 동안 몇 차례 사진기를 도둑맞아 적금을 깨서 사진기와 렌즈를 다시 사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사진기를 잃었을 때에는 이제 적금이 하나도 남지 않아 까마득했습니다. 그래도 나보고 사진길을 멈추지 말라는 고마운 뜻인지, 형이 살림돈을 보태 주어 디지털사진기로 캐논 450디를 마련하고, 고운 사진벗이 니콘 에프 삼번을 빌려줍니다.

 이리 되든 저리 되든 사진기를 쓰자면 돈이 있어야 합니다. 돈이 없고서야 사진기를 쓰지 못합니다. 내가 장만하든 남이 빌려주든, 누군가는 적잖이 돈을 치러 사진기를 장만해야 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붓이나 연필이나 물감하고 종이를 장만해야 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연필과 종이를 장만해야 합니다. 종이값이나 연필값은 사진기값하고 대면 아주 싸다 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종이값이나 연필값이 참말 싼지 잘 모르겠습니다. 없는 살림에는 종이값조차 비싸고 벅찹니다. 있는 살림에는 파노라마사진기마저 대수롭지 않습니다.

 없는 살림에는 종이 몇 장 장만하려면 더 많이 일해야 하고, 종이 몇 장에 글조각 끄적일 겨를을 어렵사리 마련합니다. 있는 살림에는 값진 사진기를 수월히 장만할 수 있고, 이곳저곳 마음껏 돌아다니며 온갖 모습을 담기 마련입니다.

 글을 쓰든 사진을 찍든 생각합니다. 틀림없이 더 나은 장비가 있고, 더 나은 장비는 틀림없이 더 빼어난 ‘풍경 스케치’를 베풀어 줍니다. 안젤 아담스가 빚은 사진을 십삼만 원짜리 수동사진기로 빚기란 힘들 뿐 아니라, 빚을 수 없다고 할 만합니다. 아니, 이래저래 따라해 볼 수 있는지 모르지요.

 그러니까, 값싼 사진기로는 ‘따라해 볼’ 수 있습니다. 값싼 사진기는 값진 사진기로 빚는 놀라운 풍경 스케치를 따라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진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사진은 낳지 못합니다.

 사진기는 ‘더 나은 장비가 빚는 더 놀라운 풍경 스케치’를 따라하며 똑같이 빚으라 하는 장비가 아닙니다. 연필과 종이는 ‘더 좋은 연필과 종이로 빚은 더 놀라운 글이나 그림’을 따라하며 똑같이 빚으라 하는 연필과 종이가 아니에요.

 1회용 사진기로는 1회용 사진기로 찍을 사진을 즐겁게 찍으면 됩니다. 십삼만 원짜리 사진기로는 십삼만 원짜리 사진기로 찍을 사진을 신나게 찍으면 돼요. 내 삶이 부잣집 사람들 삶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내 나름대로 내 즐거우며 아름다울 길을 찾는 삶이라면, 내 사진은 내 깜냥껏 가장 즐거우며 가장 사랑스럽다 싶은 아름다운 사진을 찾는 사진삶이 되면 됩니다.

 돈이 없으니, 돈이 없는 대로 나한테 가장 걸맞을 장비를 장만합니다. 나는 나한테 가장 걸맞을 장비를 장만하지 ‘온누리에서 가장 좋거나 훌륭한 장비’를 장만하지 않습니다. 자전거를 좋아하는 내가 ‘온누리에서 가장 좋거나 훌륭한 자전거’를 장만하지 않듯, 나는 내가 타고 다닐 가장 알맞으면서 괜찮은 자전거를 신나게 타고 돌아다닙니다. 돈에 맞추는 삶이 아니라 삶에 맞추는 돈입니다. 돈에 따라 꾸리는 삶이 아니라, 삶에 따라 마련해서 쓰는 돈입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을 쓰라고 하면 됩니다. 마음이 있는 사람은 마음을 쓰면 됩니다. 돈이 넉넉한 사람은 더 빼어나다는 장비를 홀가분하게 장만하면 됩니다. 사랑을 따스히 나누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사랑을 따스히 나누면서 내 삶을 누리면 됩니다.

 좋은 사진기로 사진을 찍는 사람이 더 좋거나 더 나쁘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저 좋다는 장비로 사진을 찍을 뿐입니다. 좀 허술하거나 값싼 사진기로 사진을 찍는 사람이 더 나쁘거나 더 훌륭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저 좀 허술하거나 값싼 사진기로 사진을 찍을 뿐이에요.

 우리 집 아이가 입는 옷은 거의 모두 얻어다 입힙니다. 아이 어머니가 뜨개한 옷이 몇 벌 있습니다. 아이는 어느 옷을 입어도 참 어여쁩니다. 아이 아버지는 날마다 아이 옷가지를 손빨래하면서 아이가 기쁘게 입고 예쁘게 뛰놀기를 바랍니다.

 저는 가장 사랑스럽게 손을 뻗으면서 사진을 찍고 싶습니다. 값싼 사진기를 쓰든 값진 사진기를 쓰든, 저마다 가장 사랑스럽게 손을 뻗으면서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가장 사랑스레 뻗는 손으로 사진기 단추를 누르면, 값진 사진기로는 참 훌륭하다 싶은 그림이 태어날 테고, 값싼 사진기로는 참 아리땁다는 이야기가 태어나겠지요.

 만 원짜리 안경을 쓸 때보다 십만 원짜리 안경을 쓸 때에 한결 잘 보일는지 몰라요. 삼천 원짜리 고무신을 신을 때보다 십만 원짜리 운동신을 신을 때에 훨씬 잘 달릴는지 몰라요. 온누리를 더 잘 볼 수 있으면 더 좋을 수 있고, 달리기를 더 잘 하면 더 기쁠 수 있습니다. 다만, 저는 아름다운 사람을 아름다운 눈길로 바라보며 아름답게 살고 싶습니다. 내 삶자락을 예쁘게 북돋우며 고운 넋으로 어여삐 살아가고 싶습니다. 1등이나 2등이나 3등이나 아무 뜻이 없습니다. 더 좋아 보이는 사진이란 아무 보람이 없습니다. 마냥 바라보면서 좋은 모습이라면 사진으로 안 담고 내 눈과 내 마음에 담으면 그예 좋습니다. 내가 찍었되 내가 다시 보아도 참 좋아서 틈틈이 다시 보는 사진이라면, 이렇게 사진으로 찍어도 좋지만, 내가 사진으로 찍은 그곳을 틈틈이 다시 찾아가서 맨눈으로 실컷 들여다보아도 좋습니다. 사진으로 찍힌 모습은 늘 한 모습이고, 맨눈으로 보며 마음으로 찍는 모습은 늘 새삼스러운 무지개빛 모습입니다.

 돈이 있으면 한결 돋보인다 싶은 사진을 쉽고 빠르게 얻습니다. 돈이 없거나 적으면 한껏 돋보일 사진을 땀과 사랑과 믿음을 들여 천천히 얻습니다. 어느 사진이든 사진입니다. 어느 쪽 사진이 더 낫지 않습니다. 돈이 많아 온누리 어려운 사람을 많이 돕는 사람이 더 훌륭하지 않습니다. 돈이 없어 늘 살림돈을 얻으며 살아가는 사람이 안 훌륭하지 않습니다.

 돈이 있어 하루아침에 값진 사진기를 쉬 장만할 수 있습니다. 돈이 적거나 모라자기에 여러 해에 걸쳐 조금씩 돈을 그러모아 값진 사진기를 장만할 수 있습니다. 돈이 적거나 모자란 나날을 보냈기에, 내가 그리는 값진 사진기를 꿈꾸며 여러 해에 걸쳐 돈을 그러모으며 지내다 보니 ‘여러 해가 흐르는 동안 내가 꿈꾸던 사진기보다 훨씬 기능이 나아진 새 사진기’가 나오기도 하더군요. 그래, 사진기란 돈으로 장만합니다. 돈으로 장만하는 사진기는 한두 해 쓰고 버리거나 바꿀 사진기가 될 수 없습니다. 돈으로 장만하든 선물로 받아서 쓰든, 내가 손에 쥘 사진기는 이제부터 쉰 해쯤 고이 돌보면서 쓸 사진기가 될 수 있으면 즐겁습니다. (4344.4.19.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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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근씨와 책읽기


 지난해 ‘아주 어설퍼’ 텃밭은 마감하고, 올해 ‘덜 어설퍼’ 텃밭을 꿈꾼다. 조그마한 텃밭에 거름 뿌리고 풀 뽑은 뒤 틈틈이 갈아엎어 때를 기다렸다. 밤나절에 너무 춥지 않은 날이 되면 씨앗을 심자고 생각했다.

 드디어 물골과 함께 고랑을 만든다. 이듬날 비가 온다는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하늘을 보니 비가 꽤 올 듯하다. 조그마한 텃밭이라지만 혼자 집일을 맡는데다가 이오덕학교에서 날마다 한 시간씩 아이들이랑 책이야기를 나누어야 하고, 밥벌이를 하는 글도 써야 하니까, 밭일을 하루 사이에 한꺼번에 마무리짓지는 못한다. 오늘은 반쯤만 골을 만들어 씨앗을 심자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쯤 만든 골조차 씨앗을 다 심지 못한다. 밭에서 씨앗을 함께 심던 아이가 졸립고 힘들다며 어서 들어가자고 자꾸 보채는 바람에 작은 세 골씩 이십일무와 당근을 심는다. 이십일무는 이름 그대로 스무 날만에 알이 굵어질까 궁금하다. 당근은 석 달을 기다려야 한다는데 이십일무는 참말 스무 날만에 거둘 수 있는지 궁금하다.

 씨앗을 심을 때면 언제나 새삼스레 느끼지만, 씨앗은 참으로 작다. 스무 날만에 큰다는 이십일무는 씨앗이 꽤 굵다 할 만하다. 어쩌면, 스무 날만에 크니까 씨앗이 이만큼 되어야 하지 않나 싶다. 당근은 이십일무보다 훨씬 크게 알이 굵을 텐데, 석 달이 걸려 굵는 만큼 이십일무보다 씨앗이 작겠지. 그런데 참 작다. 하늘거리는 작은 씨앗을 손바닥에 얹으면서 이 작은 씨앗에서 얼마나 작은 싹이 트고 얼마나 작은 뿌리가 내릴는지 지켜보고 싶다. 지난해에 무씨를 심을 때에도 무씨가 이렇게 작았구나 하고 비로소 깨달았지만, 당근씨는 더 작고 훨씬 가볍기까지 하구나.

 작은 아이가 작은 손바닥을 펼쳐 당근씨를 올려놓고 작은 구멍에 쏙쏙 넣는 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당근씨가 이만큼 작다지만, 이 작은 텃밭에서 자라던 갖은 들풀 또한 들풀씨를 냈을 때에 요 들풀씨는 훨씬 작겠지. 사람이 먹는 열매나 푸성귀쯤 되니까 씨앗이 제법 굵거나 크겠지만, 사람이 따로 먹지 않는 열매나 푸성귀라면 자잘한 모래알갱이만 한 씨앗이 아닐까 싶다.

 곰곰이 돌아보면, 사람을 빚는 씨앗 또한 몹시 작다. 사람을 빚는 씨앗은 더없이 작기 때문에 맨눈으로 들여다볼 수조차 없다. 그런데 사람 몸뚱이는 얼마나 크게 자라는가. 들풀이나 푸성귀와 달리 사람은 어른이 되기까지 오래 걸리니까 씨앗 또한 더 작다 할는지 모르리라.

 착한 넋이나 고운 얼이나 참다운 마음을 일구는 빛줄기가 서린 책이란 참으로 작다. 참으로 작은 책에 더할 나위 없이 작은 빛줄기가 서린다. 사람들은 아주 작은 빛줄기를 아주 조금씩 받아먹으면서 천천히 착하거나 곱거나 참다이 살아간다. (4344.4.22.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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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4-23 23:40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프라스틱 박스에 상추씨 심었어용^^

숲노래 2011-04-24 08:35   좋아요 0 | URL
싱싱하게 자라나서 즐겁게 맛보실 수 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