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늘쫑 뽑는 책읽기

 


  우리 집 대문을 열면 논이 넓게 펼쳐진다. 집 앞부터 논이요, 앞논을 지나 다시 논이고, 저 멀리 멧자락까지 그예 논이다. 왼쪽으로 이웃집을 지나 마을회관 옆으로도 온통 논이다. 논은 죽죽 돌로 쌓은 울에 맞추어 섬돌처럼 차곡차곡 포개어진다. 살림집에서 멧줄기 쪽으로 비탈이 진 자리에는 차곡차곡 밭이 이루어진다. 가을날 벼를 베고 난 뒤, 마을 안쪽 논은 마늘밭으로 바뀐다. 마늘이 한창 무르익던 오월 한복판, 마늘밭 할머님은 우리더러 마늘쫑 뽑아 가라 말씀한다. 나중에 마늘뽑기 일을 조금 거들며 살피니,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마늘쫑까지 따로 뽑아서 내다 팔 만큼 일손을 나누지 못한다. 할머니 할아버지 드실 만큼만 뽑고 나머지는 그냥 버린다. 마늘 꽃대라 할 마늘쫑을 뽑아서도 버리고 그냥 두었다가 마늘을 캐고.


  마늘쫑을 뽑을 때에는 땅속에 뿌리내린 마늘 알씨부터 올라오는 풀기운을 느낀다. 뽁 뽁 소리내며 뽑히는 마늘쫑 끝자락마다 물방울이 말갛게 진다. 마늘밭 둘레에 서기만 하더라도 마늘내음이 가득 퍼지는데, 마늘쫑을 뽑노라면 한결 짙은 마늘내음이 온 들판을 감돈다. 마늘쫑 뽑기는 다섯 살 아이도 어렵잖이 할 만하다. 한창 바쁜 일철에는 부지깽이마저 일손을 거든다 했으니, 다섯 살이든 여섯 살이든, 아이들은 얼마나 고마우며 놀랍고 멋스러운 두레 일꾼이었을까. 일을 한 가득 하지는 못하지만, 조금조금 일을 바라보고 익히는 동안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까르르 웃는다. 아이 몇이 논둑이나 밭둑에 얼크러져 서로 놀기만 하더라도 웬만한 장구잽이는 저리 가라 할 만큼 신이 나고 재미있다. 노래하는 손이 노래하듯 마늘쫑을 뽑는다. 춤추는 손이 춤추듯 마늘쫑을 뽑는다. 웃음 어린 손이 웃음을 품으며 마늘쫑을 뽑는다. (4345.6.17.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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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박또박 책읽기

 


  읍내 문방구에서 산 깍두기 공책에 첫째 아이가 한글 닿소리 하나하나 또박또박 새겨 적는다. 나는 글을 쓸 때에 이렇게 우리 다섯 살 아이처럼 또박또박 꾹꾹 눌러서 쓰지 못한다. 머리에 감도는 생각을 찬찬히 적바림하느라 손을 빠르게 놀릴 뿐이다. 그런데 우리 아이처럼 또박또박 꾹꾹 눌러서 새겨 적을 만한 이야기가 아니라 한다면, 나 스스로 내 삶을 아무리 사랑스럽게 적바림한다 하더라도 내 가슴부터 따사로이 품을 수 있을까 하고 헤아려 본다. 나는 어버이로서 아이한테 글을 가르치지 못한다. 아이가 제 삶을 글로 쓰는 길 하나를 보여주면서 어버이로 살아가는 내 하루가 얼마나 단단하고 씩씩하며 꿋꿋한가를 되돌아본다. 또박또박 읽고 또박또박 쓰며 또박또박 하루를 누린다. (4345.6.16.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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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밭에서 노는 아이들 (도서관일기 2012.6.14.)
 ―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 ‘서재도서관 함께살기’

 


  아이들이 낮잠을 거르면서 더 개구지게 놀고 싶어 한다고 느끼기에, 두 아이 모두 자전거수레에 태워 마을 논둑길을 한 바퀴 빙 돌고 나서 서재도서관으로 간다. 막바로 서재도서관으로 갈 수 있지만, 시골마을에서 살아가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으니, 천천히 논둑길을 돈다. 서재도서관으로 쓰는 옛 흥양초등학교 자리는 논 한가운데이다. 1960년대 어느 날, 이곳에 작은학교를 세우려 했을 적에, 시골마을 사람들이 저마다 땅뙈기를 조금씩 내놓고 품을 함께 들여 학교 터를 닦고 운동장을 마련하며 건물을 올렸겠지. 나무를 심고 아이들을 돌봤겠지. 학교 둘레로는 온통 논이니, 아이들은 학교에서 제 어버이와 이웃 어르신들 일 매무새를 언제나 바라보았겠지. 흙일로 바쁜 철에는 학교 교사 또한 마을 일손을 거들지 않았을까. 관사에서든 학교에서든 뻔히 둘레에서 일하는 모습을 지켜볼밖에 없는데, 가만히 구경만 할 수는 없었으리라 본다.


  둘째 아이가 씩씩하게 걷고 달릴 수 있을 무렵에는 이곳 운동장까지 우리가 쓸 수 있을까. 아직 건물 반쪽만 겨우 쓸 수 있으니 무척 아쉽다. 운동장과 빈터까지 우리가 쓸 수 있다면, 이 좋은 흙밭에서 아이들은 마음껏 구르고 뒹굴며 흙놀이를 할 텐데. 아이들은 이 너른 흙땅에서 나무를 타고 나무를 돌보며 나무와 하나가 될 텐데.


  오늘은 오늘 누릴 수 있는 만큼 누리자고 생각하며 책 갈무리를 바삐 한다. 자질구레해 보이는 것을 치운다. 틈틈이 바닥을 새로 닦는다. 나무바닥 자리는 걸레로 닦기만 해도 되는데, 돌바닥은 어떻게 해야 할까 망설인다. 곧 둘째가 걸어다닐 테니 덜 걱정스럽지만, 어디에서든 맨발로 폭삭 앉아 책을 누릴 수 있으면 더없이 좋겠는데.


  아버지가 이러거나 말거나 두 아이는 서로서로 좇고 쫓기면서 논다. 이곳에서 뛰고 저곳에서 긴다. 웃고 떠들고 노래하고 춤춘다.


  좋다. 따로 어떤 굴레나 틀에 아이들을 집어넣어 이것을 배우고 저것을 외우라 시키지 않을 수 있으니 좋다. 아이들이 부를 노래는 어버이가 먼저 즐겁게 익힌 다음 함께 부르면 좋다. 아이들이 뛰놀 자리는 어버이가 먼저 즐겁게 건사한 다음 서로 누리면 좋다. 어버이가 일하는 데가 아이들이 노는 데가 될 때에 아름답고, 어버이가 살아가는 곳이 아이들이 똑같이 살아가는 곳이 되면서 고향이라는 이름이 붙으리라.


  두 시간 남짓 책밭에서 놀던 아이들을 다시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이웃마을 한 바퀴 빙 도는데, 모두 스르르 잠든다. 집에 닿아 한 아이씩 살포시 안아 잠자리에 누인다. 오래도록 새근새근 꿈나라를 누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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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국꽃 책읽기

 


  첫째 아이와 읍내 마실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이가 마을회관 안쪽을 넘겨 보다가 “와, 여기 꽃 피었어요.” 하면서 마을회관 마당으로 들어간다. 나는 아이처럼 여기저기 두리번거리지 않는데, 아이는 참 잘도 두리번거리며 알아본다. 그러고 보면, 나도 이래저래 두리번거리다가 무언가 보기도 하고, 내 옆지기도, 또 둘째 아이도, 저마다 다 다른 눈높이에서 저마다 다 다른 무언가를 두리번거리며 서로 알려주고 서로 좋아한다.


  겨우내 마른 잎 모두 떨구어 앙상하더니, 봄부터 새 잎을 틔우고, 이제 알록달록 어여쁜 꽃봉오리까지 피운다. “와, 예쁘네요.” 하고 말하는 아이는 손가락으로 꽃잎을 살며시 만진다. 아이 키높이 즈음으로 피어난 꽃들은 더할 나위 없이 곱다. 마을회관 마당에 어느 분이 이 수국을 이렇게 심으셨을까. 머잖아 울타리 너머 들판은 한결 짙푸를 테고, 푸른 물결 넘실거릴 무렵 수국꽃은 더 환하며 곱게 흐드러지겠지. “나는 왜 꽃을 좋아할까요?” 응? 네가 꽃처럼 예쁘게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천천히 피어나니까 꽃을 좋아하겠지, 아이야. (4345.6.16.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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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12-06-16 10:01   좋아요 0 | URL
딱 그책이 생각나네요.
<비오는 날 또 만나자>그책요.
사름벼리 장화 신고,빨간 후드 옷 입은 모습이
딱 그책 주인공이에요.^^

숲노래 2012-06-16 11:42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아이들이 빨간 옷과 장화 신고
비 뿌리는 날 꽃잎 빗물 구경이 재미있나 봐요.

하늘바람 2012-06-17 10:59   좋아요 0 | URL
아이 사진 하나하나가 다 동화 한장면이네요
이뻐요

숲노래 2012-06-17 19:57   좋아요 0 | URL
아이가 바로 동화와 같은 삶이니까요~
 

사진읽기
― ‘찰칵’ ‘철컥’ 하는 사진 소리

 


  필름에 앉히는 사진기를 쓰는 분들은 ‘찰칵’이나 ‘철컥’ 하는 사진 소리를 듣습니다. 디지털에 앉히는 사진기를 쓰는 분들도 이 소리를 듣기는 하지만, 요즈음 디지털사진기는 ‘찰칵’이나 ‘철컥’ 하는 사진 소리가 안 나기도 합니다. 아마 앞으로는 이 소리가 없는 사진기만 나올 수 있으리라 느낍니다.


  예전 만화를 보면, 사진을 찍는다는 대목에서 으레 ‘찰칵’이라 적었습니다. 참말 사진을 찍을 때에 기계가 움직이며 빛이랑 그림자를 필름에 앉힐 때에 이러한 소리가 났으니까요. 요즈음 만화를 보면, 사진을 찍는다는 대목에서 거의 ‘아무 소리’가 없습니다. 으레 디지털로 찍으니까요. 더구나 손전화 기계는 사진을 찍으며 어떠한 소리도 안 납니다. 일부러 ‘필름사진기 쓸 때 나는 소리’를 흉내내곤 하지만, 디지털사진기나 손전화 기계는 ‘소리 없는’ 사진기라 할 만합니다.


  다만, 디지털사진기라 하더라도 렌즈를 갈아끼우는 기계는 소리가 납니다. 왜냐하면, 사진기 몸통에 따라 끼우는 렌즈를 쓸 때에는 빛과 그림자가 들어와 내 눈에 보이도록 하는 거울과 판이 있거든요. 막을 열었다 닫고 거울과 판을 톡톡 치면서 여러 가지 소리가 납니다. 또한, 손잡이를 돌려 필름을 감을 때에 여러 가지 소리가 납니다. 다 찍은 필름을 되감을 때에도 여러 가지 소리가 납니다.


  사진은, 눈으로 바라본 모습을 내 마음으로 삭힌 이야기로 빚는 삶입니다. 사진은 눈으로 보고 눈으로 찍으며 다시 눈으로 보며 눈으로 새깁니다. 사진은 소리를 찍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진은 냄새를 찍지 않는다고 합니다. 얼핏 생각하자면, 이와 같은 말은 한편으로는 맞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이러한 말이 마땅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소리가 떠오르고 냄새가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한테건 사진을 보는 사람한테건 소리와 냄새가 깊이 아로새겨집니다.


  이를테면, 내가 내 눈으로 바라보고 내 머리에 담은 어떤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어요. 내가 눈으로 바라볼 때에는 온갖 빛깔과 무늬를 비롯해 온갖 소리와 냄새가 한데 얼크러집니다. 내가 귀를 닫더라도 이 자리에서 이렇게 할 때에는 이런 소리가 나겠구나 하고 느낍니다. 저 자리에서 저런 밥을 끓일 때에는 저런 냄새가 나겠구나 하고 느껴요. 사진 한 장에도 풀내음이 배어요. 그림 한 장에도 풀내음이 깃들어요. 글 한 줄에도 풀내음이 감돌아요. 사진 한 장에도 새소리가 들려요. 그림 한 장에도 개구리소리가 울려요. 글 한 줄에도 벌레소리가 노래해요.


  이 글을 쓰는 2012년 6월 15일에 곰곰이 생각합니다. 2022년이 되고 2042년이 되면 온누리 삶터는 매우 크게 달라지리라 생각합니다. 또는 하나도 안 달라질는지 모르며, 또는 아주 뒤바뀔 수 있어요. 어떻게 될는지는 모르나 생각할 수 있어요. 1822년 사람들이 1922년 사람들 삶을 알 수 없으나 생각할 수 있었듯, 1912년에 사진을 하던 사람들이 2012년에 어떤 사진누리가 펼쳐질까 알 수 없으나 생각할 수 있었듯, 나는 2012년 사람으로서 2112년 사진누리는 어떠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앞으로 백 해인데, 백 해까지 바라보지 않고 고작 열 해나 스무 해 뒤만 바라보더라도, ‘사진 기계 문화’는 더할 나위 없이 바뀌거나 새롭게 거듭나리라 느껴요. 앞으로도 필름사진 찍는 분이 어김없이 있을 테지만, 앞으로는 사진을 말할 때에 디지털사진만 생각하리라 느껴요. 그러니까, 오늘날 사람들은 빨래를 한다 하면 기계로 하는 빨래만 생각해요. 기계빨래를 ‘기계빨래’라 말하지 않고 그냥 ‘빨래’라고만 말해요. 손으로 빨래하는 삶은 따로 ‘손빨래’라 말해야 알아들어요. 이제 사진을 찍는다 하면 누구나 ‘디지털사진’이라 여겨요. 스스로 ‘필름사진’이라 덧붙이지 않으면 이제는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어요.


  전남 고흥 시골마을에서 살아가는 우리 식구가 어쩌다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로 마실을 나가 보면, 이 작은 시골마을에서도 중·고등학교 푸름이들은 이른바 ‘반짝반짝하는 새 손전화 기계’를 씁니다. 어른도 이와 같아요. 새로운 손전화 기계 이름은 앞으로 수없이 바뀌고 또 바뀌리라 느끼는데, 인터넷도 하고 노래도 듣고 작곡도 할 수 있으며, 악기를 타고 켜는 소리까지 똑같이 나면서 사진뿐 아니라 영화마저 찍을 수 있을 만한 오늘날 손전화 기계는 그야말로 ‘아무 소리’도 없이 모든 일을 척척 해냅니다. 하루하루 지나고 더 지나면, 앞으로는 ‘아무 소리’뿐 아니라 ‘아무 무게’를 느끼지 못할 만한 손전화 기계나 사진 기계가 나올 만하다고 느껴요.


  이는 쉽게 알 수 있겠지요. 1912년이나 1888년에 사진을 하던 이들은 얼마나 무거운 기계를 썼습니까. 1952년 사진 기계도 그리 가볍지 않았어요. 2052년까지 아니더라도 2032년만 되더라도 ‘아무 무게’를 못 느끼도록 작고 가벼운 사진 기계가 나올 수 있어요. 나는 1982년 국민학교 1학년이던 때에 ‘안경 사진기’를 생각한 적 있어요. 겉보기로는 그냥 안경이지만, 내가 눈을 깜빡이면 사진이 찍히도록 하는 기계를 그무렵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안경 사진기’는 그야말로 ‘아무 무게’도 없이 내 눈길을 더 넓히는 연장이면서 사진까지 찍고, 동영상이든 영화이든 마음껏 찍을 수 있어요. 이렇게 하면서도 필름이나 메모리카드 같은 녀석이 없어도 돼요. ‘안경 사진기’에서 쓰는 저장장치는 모래알갱이보다 훨씬 작을 뿐더러 ‘원격 조정’으로 집에 있는 내 셈틀로 곧장 옮겨지니까요.


  천천히 생각을 하고 또 생각을 합니다. 오늘날 2010년대 사진은 ‘소리 없는’ 사진인데, 앞으로 2040년이나 2080년쯤 되면 어떤 사진이 될까 생각을 합니다. 사진을 말하는, 곧 ‘사진 비평’이나 ‘사진 평론’은 오늘날뿐 아니라 앞날에 어떤 노릇 어떤 몫 어떤 이야기 어떤 사랑 어떤 꿈을 들려줄 만할까 생각을 합니다.


  작품 하나를 말하고, 흐름 하나를 짚으며, 사상이니 철학이니 무엇이니 하고 밝힌다거나 이런저런 은유라느니 비유라느니 하고 들추는 비평이나 평론은 오늘날이나 앞날이나 얼마나 값할 만한가 생각을 합니다.


  나는 내 목숨이 얼마나 오래도록 살가우며 따사로이 이어질는지 모릅니다. 다만, 내가 쉰 살을 살건 백 살을 살건,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 살아가리라 느껴요. 내가 쉰 살이 될 즈음, 그러니까 2012년부터 헤아리면 열두 해 남은 2024년이요, 내가 백 살이 될 즈음, 그러니까 2012년부터 꼽자면 2075년이 될 즈음, 이때까지도 누군가 필름을 만들어 주면 나는 틀림없이 필름사진을 찍습니다. 이때까지도 ‘A/S’라고 있어, 내 낡은 캐논450D 기계가 또 망가졌을 때에 부속을 바꾸어 고쳐 주는 곳이 있다면, 나는 어김없이 낡은 디지털기계로 디지털사진을 찍습니다. 왜 ‘낡은’ 기계로 사진을 찍느냐 하면, 필름사진 뒤를 이은 디지털사진에서는 ‘필름사진 기계에 깃들던 눈썰미(화각)’를 살려 주지 않습니다. 오늘날 디지털사진 기계에 깃들 눈썰미(화각) 또한 새 앞날 디지털사진 기계에서는 살려 주지 못하리라 느껴요.


  같은 자리에서 같은 사진기로 여러 사람이 사진을 찍어도 똑같은 사진이 나오지 않아요. 같은 자리에서 필름사진기와 디지털사진기로 사진을 찍을 때에 똑같은 사진이 나오지 않아요. 저마다 눈썰미가 다르기 때문이에요. 몸도 마음도 삶도 다르기 때문이에요. 나는 내 삶을 사랑하면서 내 삶을 담으려고 사진을 찍기에, 케케묵었다 하는 필름사진기 한 대와 꽤나 낡고 닳아 또다시 해롱거리는 디지털사진기 한 대를 씁니다. 아이들 노랫소리를 좋아하고, 제비들 노랫소리를 좋아하기에, 나는 먼먼 옛날부터 아이들과 제비들이 어떤 결과 무늬로 노래했을까를 헤아리면서 내 오래된 사진기를 만지작거립니다. (4345.6.1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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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5 1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15 13: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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