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집놀이터 220. 꿈 아닌 길



아이들하고 밤이랑 낮에 꿈을 꾸자고 이야기한다. 밤에는 밤잠을 누리는 꿈을, 낮에는 낮잠을 즐기는 꿈을 꾸자고 한다. 꿈을 꿀 적에는 몸을 고이 쉬면서 온몸에 새로운 숨결이 돌도록 하늘빛처럼 파랗게 거미줄처럼 튼튼하며 싱그럽게 빛을 고요히 그려 보자고 이야기한다. 하루에 밤이랑 낮에 한걸음씩 꿈꾸기를 하고 나서는 길을 짓자고 이야기한다. 우리 삶길을 생각길을 살림길을 노래길을 사랑길을 슬기로우면서 재미나게 짓자고 이야기한다. 아이들하고 ‘장래희망’이나 ‘미래직업’을 살피지는 않는다. 나 스스로도 이런 두 가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버이인 나부터 스스로 내 삶길을 신나면서 당차게 걸으려 한다. 스스로 튼튼한 몸이 되고 싱그러운 마음이 되어 삶을 짓는 길을 뚜벅뚜벅 상냥히 걸으려 한다. 이렇게 우리 길을 걸으면 우리 보금자리에 새롭게 빛나는 길을 우리 두 다리로 열 만하겠지.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집놀이터 219. 가리다



오늘날 우리 둘레에는 참으로 어마어마하게 많은 것이 넘치지 싶다. 그러나 이렇게 넘치는 것 가운데 무엇이 우리 살림을 북돋우거나 살찌우거나 사랑할 만할까? 어마어마하게 넘치지만, 정작 알뜰히 누리거나 받아들일 만한 것은 드물지 않을까? 우리를 망가뜨리거나 무너뜨리거나 흔드는 것이 잔뜩 생겨서, 우리 스스로 살림을 짓고 배움길을 나누는 자리를 가로막지는 않을까? ‘골라서 살’ 것이 넘치는 듯이 보이지만, 이 가운데 어느 것이 사랑스러울까? ‘돈이 있으면 골라서 살’ 것이 잔뜩 있다지만, 이 가운데 어느 것이 즐거울까? 땅을, 별을, 물을, 바람을, 숲을, 푸나무를, 우리 목숨을 돌보거나 아끼려는 마음이 깃든 것은 오늘날 얼마나 될까? 가려야 한다. 편식이 아닌 가려야 한다. 넘치는 것 사이에서 삶을 사랑하는 길을 스스로 찾도록 가려내야 한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배움노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집놀이터 218. 요일



우리는 요일에 맞추어 움직이지 않는다. 날마다 하늘결을 살펴서 움직인다. 다만 우체국에 가거나 읍내나 도시로 바깥일을 다녀와야 할 적에는 요일을 따져야 한다. 우리한테는 주말이나 휴일이란 이름이 따로 없다.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그리는 살림이 있고, 하는 일이 있으며, 즐기는 놀이가 있다. 어느 요일이라서 이렇게 해야 할 까닭이 없다. 가만히 보면 달력에 적힌 날이란 부질없다. 우리는 텔레비전 없이 얼마든지 살 수 있을 뿐 아니라, 달력 없이도 살 만하지 않은가? 졸업장학교나 공공기관 같은 사회 얼거리에서는 달력이며 요일을 따져야겠지만, 삶으로 본다면 요일이나 달력이란 없어도 된다. 우리는 달력을 너무 가까이하면서 철을 잊을 수 있다. 철을 잊으니 달도 날도 어떤 하늘결인가를 잃는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배움노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집놀이터 217. 처음부터



네 사람이 함께 마실길에 오른다. 아침 일찍 이리저리 짐을 챙겨서 나온다. 빠뜨린 것이 없는지 살피고 또 살피며 다시 살피고서야 집을 나선다. 끌짐을 둘 이끌고 나오는데, 마을 앞으로 시골버스가 지나간다. 오늘 따라 시골버스가 마을 앞을 일찍 지나가네. 코앞에서 버스를 놓쳤으니, 읍내에서 서울로 가는 고속버스를 타자면 택시를 불러야 한다. 택시를 부른다. 마을 어귀에 서서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처음부터 택시를 불렀으면 어떠했을까? 읍내에서 고속버스 탈 때를 맞추어 느긋하게 택시를 탄다면 어떠했을까? 네 사람이 움직이는 길이니, 집부터 읍내까지 이런저런 짐을 꾸려 택시로 움직여도 좋다. 큰짐을 끌고서 시골버스를 타면 버스 일꾼이 좀 거칠게 모느라 짐을 붙잡느라 바쁘기도 하겠지. 어떤 일을 하자면 처음부터 틀을 잘 짤 노릇이다. 코앞에서 한 가지 일이 어긋난 뜻이 있으리라. 이 뜻을 잘 새기자.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배움노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집놀이터 216. 보여준 다음



우리 집 아이들을 돌보면서도 늘 느끼는데, 아무리 멋진 동영상이나 영화를 보아도 아이들이 곧바로 다 잊어버리기 일쑤이다. 아이도 어른도 마음에 남는 몇 가지만 저마다 ‘마음대로’ 되새긴다. 모든 줄거리를 꿰지 못하기 일쑤이고, 줄거리마다 어떤 뜻이 흐르는가도 낱낱이 읽어낸다고 여길 수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동영상이나 영화를 보더라도 한걸음만으로는 다 알거나 배우지 못한다. 두걸음 세걸음뿐 아니라 열걸음 온걸음을 떼어야겠지. 자잘한 심부름도 이와 같으리라. 글씨를 익혀 반듯하게 쓴다든지, 숫자를 똑똑히 헤아리면서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에 이어 더 깊고 너른 셈길을 익힐 적에도 숱하게 다시 하고 거듭 해야 한다. 한걸음을 보여준다고 해서 다 배울 수 없다면, 두걸음 세걸음일 적에도 늘 한걸음을 보여주듯이 상냥하면서 즐거워야지 싶다. 무엇을 잘 해내거나 똑바로 맞추어야 하지 않을 수 있다. 무엇을 하는 길에서 어떤 몸짓이랑 눈빛이랑 말결로 마주하느냐를 돌아봐야지 싶다. 보여주기로 끝날 수 없다. 보여주고서 그 일이 곁에서 눈앞에서 벌어질 적에 어떻게 마주하느냐를 살펴야겠지. 애벌읽기로 책을 다 알아낼까? 세벌 네벌 열벌로도 모자라다. 스무벌이나 서른벌로도 모자라다. 그래 온삶으로 해야 한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배움노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