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책 이야기 - 소년한길 어린이문학 5
이오덕 지음 / 한길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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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을 읽는 하루

― 누구나 쓰고 읽도록


《어린이책 이야기》

 이오덕

 소년한길

 2002.7.30.



  《어린이책 이야기》(이오덕, 소년한길, 2002)는 2000년 언저리에 나온 여러 어린글꽃(어린이문학)을 놓고서 줄거리와 얼거리와 말씨를 하나하나 짚으면서 우리가 어른으로서 어른답게 살아갈 넋은 무엇인가 하고 밝히는 꾸러미입니다. 재미만 흐르는 글이어서는 아이 눈을 버릴 뿐이요, 서울만 쳐다보는 글이어서는 서울아이도 시골아이도 몽땅 가두는 굴레일 뿐이요, 아이들이 쉽게 익히고 수월하게 생각을 펴도록 북돋우는 말씨를 글로 옮기지 않는다면 ‘글바치 힘자랑(문단 기득권 권력)’이 될 뿐이라고 거듭 밝히기도 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낱말을 하나하나 따질 노릇입니다. 토씨 하나까지 오래도록 헤아릴 노릇입니다. 둘레(사회·학교)에서 널리 쓰는구나 싶은 낱말이나 말씨라 하더라도 굳이 글에까지 써야 하는가 하고 생각할 노릇이면서, 둘레에서 널리 쓰지만 오히려 이 ‘둘레에서 널리 쓰는 말’을 바로잡거나 가다듬거나 고쳐서 새말을 엮거나 지을 길을 생각하기도 할 노릇입니다.


  누가 나라지기가 되더라도 그이가 나라지기로서 옳고 바르고 참하고 착하고 아름답게 나라살림을 펴도록 지켜보고 따지고 목소리를 낼 노릇입니다. 잘 하는 일은 손뼉을 치면서 북돋우고, 잘못 하는 일이라면 따끔하게 나무라면서 바로잡도록 새길을 알려줄 노릇입니다.


  어린이가 읽을 글은 어떤가요? 어린이한테 ‘아무 말씨’나 담은 글을 읽히려 하지는 않나요? 어린이 낱말책조차 ‘교과서에 실린 낱말’을 바탕으로 엮는 우리나라입니다. ‘어린이 자람결’을 바탕으로 엮는 어린이 낱말책은 아직 하나조차 없습니다. 숱한 그림책에 어린글꽃도 ‘교과서 학습진도 연계’에 얽매입니다. 더구나 ‘배움곁책(교과서·학습지)’을 내놓는 펴냄터에서 어린글꽃을 나란히 내놓고, 어린글꽃을 내놓던 펴냄터에서 배움곁책을 내놓기까지 하는 판이에요. 돈에 미쳐 돌아간다고 여길 만한 오늘날입니다.


  어린이한테 착하고 참하고 아름다운 새길을 들려주면서 북돋울 몫을 할 어른일 텐데, ‘어른다운 어른’은 자꾸 사라지면서 ‘나이든 사람’만 늘어납니다. 나이만 먹기에 어른이 될 수 없습니다. 나이만 먹을 적에는 ‘늙은이’입니다. 어린이가 참답게 읽으면서 착하게 살림을 꾸려서 아름답게 사랑을 꽃피우는 길을 밝혀야 비로소 어린글꽃입니다. 어린글꽃조차 ‘학습 보조도구’로 삼는 판이라면 이제는 어린이한테 아무 글을 안 읽힐 일이라고 느낍니다. 아니, 어린배움터(초등학교)조차 싹 걷어치워야 하지 않을까요?


  마침종이(졸업장)를 거머쥐도록 다녀야 할 배움터가 아닙니다. ‘서울에 있는 열린배움터(대학교)’에 철썩 붙도록 바탕을 다지는 어린배움터일 수 없습니다. 나중에 돈 잘 버는 일자리를 얻도록 읽는 ‘문화교양 인문책’일 수 없습니다. 온나라가 돈판으로 흐르고, 어린글꽃을 쓰는 사람조차 돈바라기로 기운다면, 어린이는 돈만 쳐다보고 돈만 아는 굴레에 갇히게 마련입니다.


  《어린이책 이야기》는 숱한 글꾼이 자꾸 놓치거나 잊거나 뒷전으로 내모는 대목을 찬찬히 짚으려고 합니다. 아이들이 읽고 느끼고 돌아볼 ‘삶’이란 그저 ‘먹고살기’에 그칠 수 없다는 대목을 짚어 줍니다. 어린이 누구나 ‘사랑으로 가꿀 삶’과 ‘숲빛을 품는 삶’과 ‘스스로 살림을 짓는 삶’과 ‘서로 푸르게 북돋우면서 나누는 삶’과 ‘참답게 어른스레 피어날 꽃송이로 걸어갈 삶’을 어린글꽃에 담자는 생각을 들려줍니다.


  어린글꽃뿐 아니라 어른글꽃도 아무 낱말이나 쓰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생각해 봐요. 아이들한테 아무 밥이나 먹여도 될까요? 아이들이 아무 데서나 살아도 될까요? 아이들이 아무 책이나 쥐어서 읽어도 될까요?


  가장 정갈히 다스린 밥옷집을 아이들한테 내어주고, 가장 알뜰히 여민 살림살이를 아이들한테 남겨주고, 들짐승과 새와 풀벌레가 넉넉히 어우러지는 푸른 들숲바다를 아이들한테 물려줄 노릇입니다. 가장 곱게 돌본 우리말과 우리글을 아이들한테 들려주면서 알려줄 때라야 비로소 ‘어른’이란 이름을 쓸 수 있습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아기였습니다. 사랑을 받고 자라는 길에 아이로 뛰놉니다. 어느덧 어린이로 우뚝 서면서 철이 들고, 팔다리에 힘이 붙을 즈음 푸르고 젊게 새길을 여미는 사람으로 피어나지요. 서로 사랑이란 눈빛을 마주하자면, 저마다 스스로 사랑씨앗을 온몸과 온마음에 새길 줄 아는 하루를 지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이가 스물이나 마흔이나 예순을 먹기에 어른이 되지 않습니다. 나이만 먹으면 그저 늙은이입니다. 나이를 잊고서 하루하루 새길을 닦고 새빛을 찾으며 사랑을 길어올려 나누는 숨결일 적에 고요히 맑은 어른입니다.


  어린글꽃은 스스로 어른으로 자라려는 마음인 사람이 쓸 글입니다. 문학상에 뽑히려고 발버둥을 친다거나 문학잡지에 내놓는 글이 아닌, ‘작가’ 따위 이름에 얽매이려는 사람이 써대는 글이 아닌, “나부터 사랑으로 돌보면서 어린이랑 함께 푸른씨앗을 온누리에 포근히 심는 손길로 문득 환하게 웃음짓는 기쁜 숨결로 쓸 글”로 나아갈 어린글꽃입니다.


  《어린이책 이야기》는 어린이책을 읽는 눈길을 보여주면서 어린이책을 쓰는 손길을 함께 이야기합니다. 어린글꽃을 읽고 싶다면 푸른눈길로 거듭나야지요. 어린글꽃을 쓰고 싶다면 푸른손길로 피어나야지요.


ㅅㄴㄹ


우리말에는 높이거나 낮추는 말의 등급이 많은 것이 문제가 되어 있다. 말이 이렇게 되어서 우리들의 생각이나 행동이 자유스럽지 못하고, 민주사회를 창조해 가는 일도 온갖 어려운 일에 걸리고 빠져들고 부딪히고 하여 제대로 안 된다 … 아이들이 쓰는 글을 보면 흔히 “아빠께서”라고 쓰는데, 아버지를 아버지라 하지는 않고 혀짤배기 소리로 된 ‘아빠’라 하면서 여기에다가 높인말 ‘께서’를 붙였으니, 이런 우스꽝스러운 말이 또 있겠는가. (29쪽)


정작 이 이야기를 읽고 가장 기뻐하고 힘을 얻어야 할 아이들에게는 이 작품이 절망을 안겨 주는 것으로 된다고 안 할 수 없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까? 어른들의 보호를 받고, 어른들에게 기대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어린이들이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제 힘으로 이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없더라도 온갖 어려움을 참고 이겨내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런 길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쓴다는 것이 대단히 어렵겠지만, 우리 아이들을 살리는 길이 그 길밖에 없다고 본다. (94쪽)


이렇게 말하면 많은 글쟁이들이 대답할 것 같다. “모두가 널리 쓰고 있는 말 가지고 뭘 그렇게 자꾸 따지는가? 무슨 말이든지 오랫동안 쓰면 저절로 우리말이 되는 것 아닌가?” 하고. 그런데, 이런 어거지말이 바로 왕조시대의 귀족 양반들의 논리요, 식민지 시대와 군사독재 시대, 그리고 신판 제국주의 외세 추종자들이 우리말과 우리글, 우리 얼을 팡먹는 글쓰기로 기득권을 지키려고 하는 속임수다. (110쪽)


무슨 말이든지 서울사람들이 쓰면 아주 앞선 말로 여겨서 요즘은 다른 지방의 어머니들도 많이 따라서 흉내내게 되었다. 이래서 모든 병든 말의 원천이 서울이다. (246쪽)


이밖에 그림에 대해서도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나 이만 줄인다. 부디 다음에 나오는 책은 좀더 조사와 연구를 많이 하고, 우리말도 더 올바르게 써서 우리 아이들에게 정말 유익한 그림이야기 책이 되도록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말한 의견에서 혹시 잘못 말한 것이 있을지 모르는데, 그런 것이 있으면 지적해 주기 바란다. (308쪽)


70년대 초, 그 암흑의 시대에 아무리 꽉 닫혀 있는 학교 안에서 공부만 해야 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고등학교를 나와 대학에 들어가려고 했던 나이라면 나라와 민족에 대한 생각은 어느 정도 있었을 터인데, 그런 고민을 했다는 이야기는 거의 없고 언제나 개인의 문제와 기분만으로 살았던 것 아닌가 싶고, 또 그때를 회상해서 글을 쓰는 지금에도 아무 생각 없이 그런 지난날 이야기를 쓰고 있다고 느껴지는데, 내가 글을 잘못 읽은 것일까? (348∼349쪽)


다만 여기서 존재한다는 말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고 싶다. “이 돌이 여기 존재한다”고 하는 말과 “이 돌이 여기 있다”는 말은 어떻게 다른가? … 아이들도 잘 아는 말 ‘있다’를 쓰는 것이 좋다. (373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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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 - 아이들 이야기글 모음 이오덕의 글쓰기 교육 9
이오덕 엮음 / 양철북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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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이들은 커서 어떤 어른이 될까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
 이오덕 엮음
 (1979.1.22. 청년사)
 (2018.2.2. 양철북)


어제 학교에서 돌아와서 점심을 먹고 나물을 뜯으러 가니까 우리 큰엄마 무덤 앞에 할미꽃이 예쁘게 피어 있습니다 그걸 보다가 내비 두고 딴 데 가서 나물을 뜯어 가지고 와서 집에 갖다 놓고 다시 우리 큰엄마 무덤 앞에 가서 할미꽃을 자세히 들여다보니까 하얀 털이 보얗게 묻어 있습니다(할미꽃, 상주 공검 2년 권명분 1959.2.27.)

노란 풀잎들은 이제 봄이라고 올라옵니다. 노란 풀잎은 아기처럼 부드럽고 작았습니다. 나는 풀잎을 만져 주었습니다. 풀잎들은 좋다고 웃는 것 같습니다. 그래 나는 그것을 보고 참 기뻤습니다(풀잎, 상주 공검 2년 임도순 1959.3.16.)


  시골을 떠난 이가 대단히 많습니다. 시골에서 먹고살 길을 찾을 수 없어 서울로 떠난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서울은 도시를 가리키는 이름이면서 한국에서 첫손 꼽는 도시 이름이기도 합니다. 전남 고흥이라는 시골에 살면서 마을 할매나 할배가 ‘서울’을 말할 적에는 행정구역 서울이기보다는 도시인 서울을 말하기 일쑤입니다. 다른 시골에서도 엇비슷해요. 예부터 시골이 아닌 곳을 서울이라고 했어요.

  우리는 지난날을 쉬 잊고 마는데,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이 서울에서 살지만, 지난날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시골에서 살았어요. 지난날에는 임금을 비롯한 몇몇 사람이 서울에서 살았어요. 또 궁궐이 서울에 있기 앞서 그 고을에서 흙을 부치며 살림을 이은 텃사람이 그곳에서 살았고요.


나는 동생을 보았습니다. 내 동생은 젖이 먹구져서 울었습니다. 달개도 안 되고 자꾸 웁니다. 나도 눈물이 나서 동생을 업고 가두둘 가서 동생을 젖을 먹여 가지고 왔습니다 (담배 심기, 안동 임동동부 대곡분교 2년 권순교 1969.5.25.)

오늘 소 뜯기로 가니까 어디서 논매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우리도 크면 저런 농부가 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 상주 청리 4년 최인모 1964.7.20.)


  시골에서 나고 자란 아이가 시골 어른이 됩니다. 시골 어른은 새롭게 시골 아이를 낳습니다. 시골사람은 시골살림을 가꾸고 시골노래를 부릅니다. 시골노래를 부르면서 시골살이를 누리는 동안 시골마을이 사랑스럽고 시골숲이 푸릅니다.

  시골이 가장 나은 삶터라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시골이든 서울이든 우리 스스로 사랑을 짓고 나누며 돌볼 줄 알면 넉넉하리라 여겨요. 그런데 왜 예부터 ‘서울 깍쟁이’ 같은 이름이 돌았을까요? 왜 예부터 ‘시골뜨기’라는 이름이 퍼졌을까요?

  ‘시골 깍쟁이’나 ‘서울뜨기’라는 말은 없습니다. 이런 말을 쓰는 사람도 없을 테고요. 이 얼거리를 헤아려 본다면, 서울에서 살면 깍쟁이처럼 된다는 뜻이고, 시골사람은 서울사람한테 등골이 뽑히는 어수룩한 모습이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서울사람이 무뚝뚝하거나 제 밥그릇만 챙긴다고는 여기지 않아요. 서울사람이면서 아름답고 착하며 너른 마음씨를 건사하는 이웃이 많아요. 시골사람이면서 씁쓸하고 얄궂으며 좁은 마음씨로 휘둘리는 이웃이 있고요.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라는 시골 어린이 글모음을 읽으면서 자꾸만 묻고 싶습니다. 이오덕 어른이 195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멧골자락 어린이를 마주하면서 삶을 읽고 살림을 바라보는 동안 어떤 이야기를 먼먼 뒷날 어른하고 어린이한테 남기고 싶었는가를 묻고 싶습니다.


오늘 아침을 먹고 나와 순희와 빨래를 했습니다. 내가 두 가지 빨 동안에 순희는 한 가지밖에 못 빨았습니다. 내가 일곱 가지, 순희가 여섯 가지 빨 때 또 순희네 새형님과 순희네 어머니와 빨래를 한 버지기, 한 세숫대씩 가지고 와서, 나는 우리 것을 다 빨고 순희네 것을 빨아 주었습니다 20가지 빨아 주고 내가 발을 씻으니 순희네 새형님과 순희 어머니가 고맙다 합니다 (빨래, 안동 임동동부 대곡분교 3년 김후남 1969.5.25.)

산 그림자가 마당에 들 때 저녁밥을 했습니다. 보리쌀을 씻고 또 씻어 가지고 물을 바개수에 부어 가지고 또 씻었습니다. 그래서 고만 씻고 솥에 물을 부어 놓고 앉혔습니다. 앉혀 놓고 불을 넣었습니다. 불을 넣어 놓고 밥이 퍼지나 상근 있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퍼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장재기를 꺼냈습니다. 한 가재이만 나두고 다 꺼냈습니다. (밥하기, 안동 임동동무 대곡분교 3년 성숙희 1969.6.)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라는 시골 어린이 글모음에는 어차피 우리는 시골지기가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어린이 마음이 환하게 드러납니다. 아무래도 시골지기가 되겠구나 하는 마음을, 나고 자란 터를 새로 일구면서 살자는 뜻이 드러나요.

  어린이로서 어른을 바라보는 눈길이 드러납니다. 어린이로서 어른한테서 느낀 아쉽거나 안타까운 생각이 드러납니다. 어린이로서 어른한테서 기쁘게 배우고 고마이 받아들이는 슬기로운 살림살이가 드러납니다.

  그래요. 그렇더군요.

  어린이는 모두 배웁니다. 즐거움도 배우고 미움도 배워요. 기쁨도 배우고 슬픔도 배워요. 사랑도 배우고 따돌림도 배워요.

  그렇지만 어린이는 어른하고 다르더군요. 어른들이 미워하거나 싸우거나 괴롭히는 짓을 보여주더라도 이런 모든 얄궂은 틀을 훌훌 털어버리는 몸짓을 보여주곤 해요. 그리고 어린이인 터라 어른이 보여주는 모든 얄궂은 틀을 고스란히 물려받아서 따라하는 몸짓을 보여줘요.

  더 파고든다면 어른들 모습이란, 이 어른들이 예전에 어린이였을 적에 옛날 어른한테서 보고 듣고 배운 모습이지 싶어요. 먼먼 옛날부터 흐르고 흐른 얄궂은 모습을 우리 어른들이 바로잡거나 고치거나 가다듬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이 이를 똑같이 따라할 수 있어요. 때로는 우리 어른들 어리숙한 짓을 털어낼 아이들이 있을 테고요.


교실에서 밖을 내다보니 아가시 꼭두배기가 고개를 들고 우리 공부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다가 바람이 불면 고개를 요리조리 돌립니다. 바람이 시기 불면 온 둥치가 막 날립니다. 가재이는 우리 교실에 걸어올라 카는 것 같습니다 (아가시아, 상주 청리 3년 김용구 1963.6.14.)

마늘밭 밑에는 샘물이 있고 옆에는 또 우리 밭이 있다. 위에는 논이 있고 논 옆에는 장길이 있다. 한참 하다가 땀이 하도 흘러서 물을 좀 먹고 또 시작했다. 작은누나는 삽가래로 뜨고 나는 흙덩어리를 털었다. 또 땀이 나서 낯을 씻고 물을 먹고 발을 적셔서 시작했다. 숙이는 물이 땀으로 되어서 나보다 더 많이 났다 (마늘 캐기, 안동 길산 3년 이상덕 1977.7.)


  여덟 살 나이라면 밥을 지을 줄 알던 예전 시골 어린이 모습을 읽습니다. 열 살 나이라면 어린 동생쯤 얼마든지 업고 다니면서 어를 줄 아는 예전 시골 어린이 모습을 읽습니다. 열두 살 나이라면 어른 못지않게 지게나 등짐을 짊어지고서 살림 한 자리를 톡톡히 맡던 예전 시골 어린이 모습을 읽습니다.

  오늘 우리 어린이는 어떤 모습일까요? 오늘 우리 어른은 어떤 모습인가요?

  떠난 어른은 어린이 글모음에서 군말을 안 붙입니다. 오직 시골 아이 글만 줄줄이 보여줍니다. 추운 겨울부터 새봄을 지나 여름하고 가을을 맞이하는 한 해 네 철을 가로지르는 이야기를 가만히 보여줍니다.

  눈물짓는 아이들 삶을 아이들이 손수 적도록 이끌어 줍니다. 웃음짓는 아이들 노래를 아이들이 스스로 활개치도록 북돋아 줍니다.

  글쓰기란 이렇군요. 잘남도 못남도 없는 있는 그대로가 아름다운 글쓰기로군요. 오직 고운 사랑 한 가지로 마음을 가꾸는 길을 우리가 스스로 여는 글쓰기로군요.


내캉 용한이와 미술이와 교문을 나왔을 때 미술이가 넌 엄마 물에 빠졌다고 했다. 용한이와 내캉은 울면서 집으로 왔다. 누나는 나가고 밖에서 울고 있으니 작은누나가 왔다. 나는 엄마 물에 빠졌다고 했다. 나는 누나보고 용한이와 강에 가 봐라고 하고 나는 할머니 못 나가게 한다고 했다. 누나와 용한이나 나가디만 또 집으로 오고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신 일, 안동 길산 6년 김요섭 1978.7.20.)

나는 어제 담배 조리를 하고 나니 손이 검었습니다. 또 손을 씻고 보니 담배 냄새가 났습니다. 엄마 손에는 냄새가 더 많이 났습니다. 나는 엄마한테 냄새가 왜 이렇게 나노 물어보았습니다. 엄마는 담배 조리를 또 했습니다. 방에 가서 시계를 보니 9시였습니다. 나는 그만 잤습니다. 하늘에는 별이 반짝반짝 놓여 있었습니다. 별이 예쁘게 보이는 것도 있었습니다 (담배 조리, 안동 길산 2년 이인경 1978.9.16.)


  아버지가 돌아가신 일을 아이가 쪽종이에 적습니다. 이윽고 어머니마저 돌아가신 일을 아이가 쪽종이에 적습니다. 이 아이는 오래지 않아 멧골집을 떠납니다. 맏이로서 어린 동생들을 홀로 건사할 수 없어서 텃마을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갑니다. 그때 이오덕 어른은 이 어린 제자한테, 학생한테 어떤 말을 건네고 어떤 손길을 보냈을까요. 두 어버이 죽음을 그야말로 차분히 적바림한 아이를 지켜보아야 한 이오덕 어른은 아이한테 어떤 말을 들려줄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오늘날 ‘제3세계 어린이 노동’을 이야기합니다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나라도 얼마 앞서까지 ‘제3세계’인 줄 잊기 일쑤입니다. 서울에서뿐 아니라 시골에서 여덟아홉 살 아이들이 ‘담배 조리’를 한 줄 잊거나 모르기 일쑤이지요. 새벽부터 밤까지 어버이 곁에서 쉴 틈이 없이, 아예 놀 틈조차 없이 일손을 거들던 시골 아이들은 먼먼 딴 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 이야기입니다.


돌미는 산에서 추워서 울고 있습니다. 소나무도 산에서 추워서 벌벌 떨고 있습니다. 소나무는 바람이 부니까 싫다고 떠드는 소리가 왕왕하고 들립니다. 돌미하고 소나무하고 친한 친구가 되어서 이야기를 하며 벌벌 떠는 것 같습니다 (산, 안동 임동동부 대곡분교 2년 김민한 1969.10.9.)

어제 점심때 새끼를 꼬고 있었다. 아버지는 짚을 많이 쥐고 하는데 보니 새끼가 아주 굵고 내가 까 논 것은 아주 가늘다. “아버지요, 왜 고키 굵기 까요?” “집 일 새낑깨 굵기 까지 웃째.” “나는 가만히 앉아서 깍까?” “그래 아문따나 깔라마.” 나는 짚뿍시기에 앉아 새끼 까 놓은 것을 붙들고 짚을 둘 집어 들고 양쪽에 끼어서 손으로 비비니 부시륵부시륵 한다. 그래 나는 막 빨리 깠다 (새끼 꼬기, 상주 청리 3년 깅경수 1963.11.18.)


  2000년대를 살아가는 한국에서는 ‘일하는 어린이’가 드물다 하지만, 이 얘기도 남녘 얘기일 뿐입니다. 한겨레인 북녘을 바라보면서 ‘일하는 북녘 어린이’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를 생각할 수 있어야지 싶어요.

  그리고 ‘일을 안 하는 남녘 어린이’는 앞으로 어떤 어른으로 자라날 만한가도 생각할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참말로 ‘일을 안 하는 남녘 어린이’는 앞으로 슬기롭거나 씩씩하거나 튼튼하거나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운 ‘마을일꾼·집일꾼·나라일꾼·누리일꾼’이 될 수 있을까요? 손에 물을 안 묻히고서 시험공부만 잘 하는 아이들이 앞으로 이 나라에서 어떤 몫을 맡을까요?

  밥을 할 줄 모르고, 옷을 기울 줄 모르며, 집을 지을 줄 모르는 아이들이 앞으로 이 나라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일을 고되게 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참말로 일을 고되게 해서는 안 되지요. 그러나 일을 모르기에 놀이를 모르지 싶어요. 즐거이 나누는 일하고 멀어지기에 즐거이 나누는 놀이하고도 멀어지는구나 싶습니다. 일할 줄 모르면서 살림할 줄 모르는 어른이 되고, 일하는 기쁨을 모르면서 사랑하는 기쁨을 모르는 어른이 되지 싶어요.


어머니가 “머심아를 해 입히야지 지집아를 해 입히마 되여?” 이캅니다. 그래 내가 “지집아는 머래여, 지집아나 머심아나 다 같지.” 이캉개 어머니가 “떠 줄라 캐도 돈이 있어야지.” 이캅니다. 그래 내가 “엄마 주머니에 있대.” 이캉개 어머니가 “내 주머니에 봐라, 돈 십 환도 없다.” 이카미 주머니를 보이줍니다. 그래 주머니를 보니 십환도 없습니다 (치마, 상주 공검 2년 정영자 1959.1.31.)

목화가 두 다물 남았는 것을 열심히 땄습니다. 목화를 따니 손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내가 돌배나무 밑에서 쉬다가 또 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손을 빨리 빨리 놀려서 따다가 목화나무에 똑바로 눈 밑에다 찔렸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따 가지고 내가 보따리에 싸 가지고 이고 다라기에 미고 큰언니는 홑이불에 이고 작은언니는 다라기에 봉실봉실한 것을 이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목화, 안동 임동동부 대곡분교 3년 심필련 1968.12.9.)


  상냥하게 웃고 싶은 마음을 가만히 읽어 봅니다. 상냥하게 이야기하고 싶은 뜻을 조용히 읽어 봅니다.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는 어른인 우리들이, 푸름이인 우리들이, 어린이인 우리들이 앞으로 크면 스스로 무엇이 되려 하느냐를 넌지시 묻는 책이지 싶습니다.

  지난날 멧골 아이들은 이오덕 어른한테 “그러면 이오덕 어른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나요?” 하고 물었지 싶어요. 마흔 살 어른이지만 쉰 살 어른이 되면 어떤 모습이 되겠는지 묻고, 쉰 살 어른이지만 예순 살 어른이 되면 어떤 몸짓이 되겠는지 물으며, 예순 살 어른이지만 일흔 살 어른이 되면 어떤 살림이 되겠는지 묻는다고 할까요.

  어린이만 큰다고 느끼지 않아요. 어른도 큽니다. 열 살 어린이는 무럭무럭 커서 스무 살에 어떤 꿈을 펴려는지 생각을 짓습니다. 자, 마흔 살 어른이나 예순 살 어른인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크려’ 하는지 돌아보면 좋겠어요. 서른 살 어른이나 일흔 살 어른인 우리는 앞으로 ‘커서’ 어떤 새로운 어른으로 우뚝 서려는지 차근차근 헤아리면 좋겠습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이오덕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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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이 좋은 공부 - 글쓰기 지도 길잡이 이오덕의 글쓰기 교육 2
이오덕 지음 / 양철북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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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배움책 44



작은 별님처럼 새로 태어나는 글

― 글쓰기, 이 좋은 공부

 이오덕 글

 양철북 펴냄, 2017.5.18. 16000원



  스스로 배우는 삶이 있기에 글을 쓸 수 있다고 느낍니다. 스스로 배우는 삶이 없다면 글을 쓸 수 없다고 느낍니다. 오늘 하루 새롭게 배우는 이야기가 있기에 어제 글을 잔뜩 썼어도 오늘은 오늘대로 새롭게 글을 쓸 기운을 얻는다고 느껴요. 어제하고 다른 오늘을 살아가기에 오늘은 어제 쓰지 못한 새로운 이야기를 쓸 수 있구나 하고 느낍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배우는 삶이 있기에 글을 쓸 뿐 아니라, 글이나 책을 읽을 수 있다고도 할 만할까요?


  저는 이 물음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스스로 배우려 하기에 글을 쓰기도 하지만 글을 읽기도 해요. 날마다 스스로 새롭게 배울 수 있는 삶이기에 스스로 새롭게 글을 쓰기도 하고 읽기도 한다고 느껴요.



글쓰기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저마다 쓰고 싶은 것을 쓰는 일인데 그것이 안 되고 있다. 쓰고 싶은 것을 쓰는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 (16쪽)


글쓰기 교육의 목표가 아이들을 소설가나 시인으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에 다른 의견을 제시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17쪽)


아이들이 글을 쓰는 행위는 밥을 먹는 행위와 같다. 먹고 싶어서, 배가 고파서 먹는 것이지, 먹기 위해 먹는 것은 아니다. (19쪽)


쓰고 싶은 것을 쓰게 해야 한다. 쓰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도록 해야 한다. 글을 쓰는 데 기쁨을 느끼는 아이만이 글을 쓰는 데서 성장한다. (20쪽)



  우리는 둘레에서 구경한 이야기를 글로 써 볼 수 있습니다. 둘레에서 구경한 이야기를 ‘관전평’이라고도 합니다. 스스로 겪지는 않았으나 두 눈으로 지켜본 느낌을 적는 글이에요. 이 관전평은 보는 자리마다 다 다른 글이 나옵니다. 가까이에서 볼 적하고 먼발치에서 볼 적하고 다를 테니까요. 다만 스스로 겪거나 하지 않은 채 구경하며 쓰는 글은 으레 벽에 부딪혀요. 손수 김치를 담가 보고 나서 글을 쓸 적하고, 김치를 담그는 사람을 옆에서 구경하고서 쓰는 글은 달라요. 손수 씨앗을 심어서 돌본 끝에 거둔 살림을 짓고서 쓰는 글하고, 씨앗심기나 거두기를 옆에서 구경하고서 쓰는 글은 다르지요. 아이를 돌보고 가르치면서 쓰는 글하고, 아이를 돌보는 어버이를 옆에서 구경하면서 쓰는 글도 달라요.


  요즈음 사회를 돌아보면 ‘구경글(관전평)’이 대단히 많습니다. 운동경기를 지켜보고서 쓰는 글은 모두 구경글(관전평)이지요. 연속극이나 책을 보고서 쓰는 글도 구경글에 들 만해요. 이러한 구경글이 ‘구경’을 넘어서려면 한 가지를 담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본 이야기를 스스로 삶에 녹여야지요. 즐겁게 보았구나 싶은 대목을 속으로 삭여서 삶으로 펼칠 적에는 ‘구경’이 아닌 ‘삶’이 됩니다. 이를테면 흙살림 이야기를 책으로 읽기만 했을 적하고, 흙살림 이야기를 읽고 나서 이를 몸으로 옮겨서 흙을 만져 새롭게 느낄 적에는 사뭇 달라요.


  아이를 돌보며 가르친 다른 어버이 이야기를 책으로만 읽다가, 비로소 우리 스스로 아이를 낳아 몸으로 부대끼며 돌보는 나날을 누려 본다면 이때에도 사뭇 다르구나 싶은 대목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몸으로 부대끼는 동안 ‘내가 내 나름대로 부대끼며 배운 이야기’를 ‘내 글’로 써 보자는 생각이 들곤 해요.



옛날부터 ‘글은 사람’이라고 했다. 글을 보면 그 글을 쓴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22쪽)


어린이들은 문학을 창조하지 않는다. 창조할 능력이 없다고 하기보다 그런 문학이란 것을 창조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왜 그런가? 어린이들이 어른들에 오염되지 않고 순수한 어린이의 마음 그대로라면 그들의 말과 행동은 그대로 진이요, 미요, 선이기 때문이다. (28쪽)


땅과 어린이의 삶이 또 너무나 비슷하다. 땅은 그것을 가꾸고 섬겨야만 거기 생명이 싹트고 풍성한 열매가 맺을 수 있듯이, 어린이의 삶도 그것을 지키고 가꾸지 않으면 결코 아름다운 생명이 피어날 수 없고, 살아 있는 글이 써질 수 없다. (39쪽)


농사짓기와 글짓기는 그 원리가 사랑이라는 점에서도 같다. 농사일은 땅과 곡식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잘될 수 없다. 이해타산으로 화학비료와 농약을 함부로 뿌려 땅을 혹사하고 오염시키고 땅에서 빼앗기만 할 때, 농토는 척박해져서 곡식은 병들고 결국 농사는 파멸의 날을 맞을 것이다. (41쪽)



  이오덕 님이 쓴 《글쓰기, 이 좋은 공부》(양철북,2017)를 읽습니다. 이 책은 1983년에 처음으로 나왔는데, 이오덕 님은 이 책에서 밝힌 이야기를 이녁이 2003년에 숨을 거두고 흙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고이 가꾸었어요.


  “글은 사람”이라고 하는 대목을 깊이 돌아보았고, ‘글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람됨’을 헤아리면서 한길을 걸으셨어요. 억지로 꾸미거나 매만지는 글이 아니라, 스스로 짓는 삶을 스스로 즐겁게 글로 옮길 수 있도록 이웃들한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할 수 있어요.


  《글쓰기, 이 좋은 공부》는 ‘글쓰기란 더없이 좋은 배움길’이라고 하는 뜻을 밝혀 주는구나 싶습니다. 글쓰기를 하면서 삶을 가꿀 수 있다는 뜻을 보여주기도 하고요. 삶을 가꾸기에 글을 쓰고, 날마다 즐겁게 배우며 좋은 살림을 짓기에 저절로 글감이 샘솟는다고 하는 얼거리를 찬찬히 알려주기도 해요.


  아이를 돌보는 어버이 삶을 놓고 말해 본다면, 아이하고 부대끼며 가슴 가득 샘솟는 사랑이 있기에, 이러한 사랑을 신나게 글로 씁니다. 남한테 보여주려고 쓰는 글이 아닙니다. 스스로 가슴이 벅차면서 터져나오는 글입니다. 굳이 책으로 묶겠다는 뜻으로 쓰는 글이 아닙니다. 스스로 마음에 기쁜 숨결이 넘실거리기에 밤잠을 잊으면서 쓸 수 있는 글입니다.


  여행길에 글을 쓰는 분들도 이러한 마음이기 마련이에요. 여행길에 새로 배우는 삶이 있기에, 이 좋은 배움을 차곡차곡 되새기려고 글을 써요. 날마다 새로 얻고 누리는 기쁜 삶을 누구보다 나 스스로 되돌아보려고 글로 쓰지요.



글이란 단순히 글자라는 부호를 집합시켜 놓은 것이 아니다. 글은 사람의 생각, 정신을 나타낸다. 글은 곧 길(진리)이다. (43쪽)


지금까지의 글쓰기 교육은 손끝으로 잔재주를 부리도록 가르쳐 왔다. 이러한 재주 부리기는 문예 교육이란 이름으로 초등학생들에게는 말장난을 일삼도록 하였고, 중고등학생들에게는 주로 애상과 회고 위주인 일부 문인들의 글을 흉내내도록 하였던 것이다. (63쪽)


어른들이 쓰는 글은 반드시 문학작품이어야 하는가? 문학이 아닌 글을 쓸 수는 없는가? 쓸 필요가 없는가? 문학작품이 아닌 글은 가치가 없는 것인가? (68쪽)


어른이 쓰는 시나 어린이가 쓰는 시나 다르지 않다. 시란 괴상한 말재주도 수수께끼 놀이도 아니고 가슴을 울리는 감동인 것이다. (85쪽)



  이오덕 님이 들려주려는 이야기에 가만히 귀를 기울입니다. 참말로 ‘글은 길’이라고 할 만하지 싶어요. 이 말씀마따나 ‘말은 마음’이라고 할 만할 수 있을까요?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요, 저마다 살아갈 길을 스스로 밝히는 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말’하고 ‘글’을 ‘마음’하고 ‘길’이라고 여길 수 있다면, 우리는 글쓰기를 따로 가르치지 않아도 될 만합니다. 글재주나 글솜씨를 굳이 안 키워도 되는구나 하고 느낄 만합니다. 그저 고운 마음이 되면 넉넉해요. 그저 즐겁게 삶길을 걸으면 되어요. 문학을 해야 글이 아닐 테니, 우리 스스로 시인이나 소설가나 수필가 같은 이름이 없더라도 흐뭇할 수 있어요. 따로 책을 써내지 않더라도 조용조용 우리 삶을 정갈하게 글로 옮기는 기쁨을 날마다 누릴 수 있어요.


  글을 쓰는 동안 생각을 갈무리합니다. 글을 쓰는 사이에 우리가 스스로 걷는 길을 씩씩하게 바라봅니다. 글을 쓰고 나서 우리 생각을 새롭게 보듬습니다. 내가 쓴 글을 내가 스스로 되읽는 동안 내 마음을 새삼스레 깨닫고 내가 걸으려는 길을 더욱 알차게 가꾸려는 몸짓이 됩니다.


  글을 쓰기 앞서 어수선해 보인 생각이라면, 글을 쓰는 동안 고요히 그러모아서 가꿀 수 있으리라 느껴요. 스스로 품은 생각을 알뜰살뜰 가꿀 수 있으면, 이 글쓰기란 배움이면서 기쁨이고 보람이면서 다짐이 되는구나 싶습니다.



어린이들에게 어른의 그림을 베껴 그리게 한다면 얼마나 어려워하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베껴 그리는 노릇을 몇 번쯤 시키고 나면 그다음에는 그전에 그렇게 재미있게 그리던 자신의 그림을 그만 못 그리게 되고, 언제까지나 남의 그림을 보고 흉내내는 짓밖에 할 줄 모른다. (101쪽)


어린이들에게 글을 쓰게 하는 까닭은 그들의 삶을 풍부하게 해 주기 위해서다. 삶을 가꾸는 일이 없이는 어떤 교육도 이루어질 수 없다. (109쪽)


말을 순화한다는 것은 겉도는 말이 아닌 살아 있는 말을 쓴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말은 살아 있는 사람의 창조성 있는 삶의 자세에서 나오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순수한 우리 자신의 마음을 찾아 가지는 것이 된다. (125쪽)



  ‘베껴쓰기’는 자칫 흉내내기로 그치기 쉽다고 느낍니다. 다른 사람이 쓴 훌륭해 보이는 글을 베껴서 적어 보는 일은 나쁘지 않을 터이나, 다른 사람이 쓴 훌륭하구나 싶은 글만 자꾸 베끼고 또 베끼는 동안 정작 우리 이야기는 한 줄도 못 쓰기 마련이에요. ‘다른 훌륭한 글’을 베끼다 보면 어느새 ‘내가 쓴 수수하거나 투박한 글’은 안 훌륭하다고 여길 수 있어요. 다른 사람들 글만 훌륭하다고 여기는 사이에 우리가 저마다 짓는 살림살이는 글로 쓸 만하지 않다는 생각에 젖어들기도 해요.


  이오덕 님은 《글쓰기, 이 좋은 공부》에서 ‘베끼는 그림’이 얼마나 고된 노릇인가 하고 이야기합니다. 아이들한테 ‘어른 그림을 베끼도록 시키’면 아이들은 이 짓을 괴로워하다가 어느새 이런 ‘흉내 그림’에 길든다고 이야기해요.


  아이들이 ‘어른 글’을 베껴서 쓰도록 이끈다면, 우리 어른들 스스로 우리 이야기를 수수하거나 투박하게 써 보기보다는 자꾸 ‘훌륭해 보이는 다른 사람들 글’만 베껴쓰기(필사)를 하다 보면, 참말로 자꾸자꾸 나를 나 스스로 낮보거나 얕보는 버릇이 몸에 붙으리라 느낍니다.


  잘 그리든 못 그리든 우리 그림을 우리 손으로 그릴 적에 즐거워요. 잘 쓰든 못 쓰든 우리 글을 우리 이야기로 엮어서 쓸 적에 즐거워요. 잘 찍든 못 찍든 우리 사는 이야기를 우리 손으로 상냥하게 사진으로 찍어서 나눌 적에 즐거워요.



시를 읽고 맛보는 재미, 시를 느끼고 시를 붙잡아 쓰는 재미는 마음이 따뜻해지고, 또는 뜨거워지고, 풍성해지고, 깨끗해지고, 긴장하게 되는 재미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이 착해지고 진실해지고 순화되는 데서 느끼는 기쁨이라 하겠다. (273쪽)


일기장을 ‘검사’한다는 말은 아주 나쁜 말이다. 검사할 것이 아니라, 읽어서 아이들의 마음과 생활과 가정환경을 알고 깨달아 교사가 배우는 것이다. (306쪽)


아이들의 글은 아이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한 것을 자기 말로 정직하게 쓴 것이다. 그러니 글이 있기 전에 말이 있었고, 말이 있기 전에 삶이 있었던 것이다. ‘삶→말→글’이지, ‘글→글’이 아니며, 삶이 없이 글은 써질 수 없다. (343쪽)



  살아서 싱그러이 숨쉬는 말을 글로 옮겨 봅니다. 꾸미지 않는 마음을 글로 담아 봅니다. 겉치레가 아닌 속가꿈이라는 생각으로 말 한 마디를 글 한 줄로 가만히 그려 봅니다.


  착한 길을 걸으려는 뜻으로 글을 씁니다. 꼭 시나 수필 같은 갈래에 들지 않더라도 오늘 하루 살아가는 이야기를 글로 씁니다. 대단한 문학이 아니라 하더라도 오늘 하루 새로 지은 살림을 일기로 꾸준하게 적어 봅니다.


  삶이 말이 되고, 이 말이 글로 되는 흐름을 되새깁니다. 나한테 없는 모습이 아닌 나한테 있는 모습을 스스럼없이 바라봅니다. 어제를 되짚으면서 오늘을 씩씩하게 가꾸려는 마음이 글꽃으로 피어나도록 담금질을 합니다.


  작은 들꽃을 마주하면서 기쁨을 배우기에 들꽃 이야기를 씁니다. 파랗게 눈부신 하늘을 가로지르는 구름과 제비와 왜가리를 바라보기에 구름과 제비와 왜가리 이야기를 씁니다. 아이를 돌보며 짓는 보금자리를 즐겁게 맞아들이면서 아이 이야기를 씁니다. 삶을 글로 쓰고, 살림을 글로 씁니다. 생각을 글로 쓰고, 사랑을 글로 씁니다. 서로 아끼는 기쁨을 글로 쓰고, 서로 나누는 웃음을 글로 씁니다. 서로 짓는 노래를 글로 쓰고,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를 글로 씁니다. 오늘 이곳에서 작은 별님처럼 새로 태어나는 글 한 줄입니다. 2017.6.6.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이오덕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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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 - 이오덕과 권정생의 아름다운 편지
이오덕.권정생 지음 / 양철북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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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을 읽는다



두 마음이 만나서 꽃 한 송이

―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

 이오덕·권정생 씀

 양철북 펴냄, 2015.5.1.



  그리운 사람이 있기에 마음을 띄웁니다. 그리운 사람한테 띄우는 마음은 구름을 타고 바람에 실려 훨훨 날아갑니다. 그리운 사람이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한들, 이 지구별입니다. 지구를 한 바퀴 빙 도는 구름과 바람은 먼먼 곳에 있는 그리운 사람한테 내 마음을 띄워 줍니다.


  바람에 마음을 실어서 보낼 수 있으니, 너와 나는 서로 떨어진 사이가 아닙니다. 바람은 언제나 지구별을 휘휘 감도니, 너와 나는 서로 한마음이 되는 사이입니다.


  내가 마시는 바람을 네가 마시고, 네가 내쉬는 바람을 내가 내쉽니다. 우리는 이 별에서 같은 하늘을 등에 지고 같은 바람을 마시면서 같은 별빛을 바라보는 이웃이요 동무이면서 한몸입니다. 서로서로 이웃이고 다 함께 이웃입니다. 지구마을에서 옹기종기 모여서 사는 이웃입니다. 지구별에서 오순도순 사랑을 속삭이는 벗님입니다.



- 이오덕 선생님, 다녀가신 후, 별고 없으셨는지요? 바람처럼 오셨다가 제(弟)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가셨습니다. 일평생 처음으로 마음 놓고 제 투정을 선생님 앞에서 지껄일 수가 있었습니다. (1973.1.30. 권정생)

- 남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저는 선생님의 작품을 참으로 귀하고 값있는 것으로 아끼고 싶습니다. (1973.2.14. 이오덕)

- 나에게 한국이라는 조상의 나라가 있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어머니의 무명 치마폭에서만이 느낄 수 있었을 뿐입니다. (1973.2.8. 권정생)

- 산골에 있어도 할미꽃 한번 못 보고, 진달래꽃 한번 찾아가 보지 못하는 일과입니다. 며칠 전에도 여기를 오다가, 어느 골짜기 양지 바른 산허리에 살구꽃 봉오리가 발갛게 부풀어 올라 아침 햇빛에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것을 보고 눈물이 날 뻔하였습니다. (1973.4.14. 이오덕)



  하늘을 바라보면서 마음을 띄우고, 종이를 한 장 꺼내어 글을 써서 띄웁니다. 바람에 실어 띄우는 마음은 언제 어디에서나 마음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종이에 적어서 띄우는 글은 여러 날에 걸쳐 천천히 찾아갑니다. 어느 날 문득 내 앞으로 온 글월 한 통은 새삼스럽게 가슴을 건드립니다. 그리고, 내가 띄워서 어느 날 문득 너한테 찾아간 글월 한 통도 새롭게 가슴을 톡톡 건드립니다.


  글월은 어른도 쓰고 아이도 씁니다. 글월은 할머니도 쓰고 할아버지도 씁니다. 글을 모르면 글을 아는 이웃을 불러 몇 줄을 적어 달라고 바랍니다. 글을 알면 두 줄이든 석 줄이든 두 장이든 석 장이든 마음 닿는 대로 적어서 풀을 바르고 우체국에 가거나 우체통에 넣습니다.


  내 마음을 띄우려고 글월을 씁니다. 네 마음을 글월과 함께 받습니다. 내 생각을 실어서 글월을 보냅니다. 네 생각을 글월에서 읽습니다. 내 사랑을 속삭이면서 글월을 날리고, 네 사랑이 글월에서 곱게 피어납니다.



- 선생님도 보고 들으시겠지만, 농촌의 그 순수한 생활 모습도 많은 변화가 있어 자꾸 정이 멀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당도 블록으로 담장을 쌓아 버렸습니다. 물질이라는 것은 철저하게 담을 쌓는 가장 죄악의 씨라는 것, 다시 한번 절감했습니다. (1973.6.9. 권정생)

- 우편환으로 7천 원 부쳐 드립니다. 또 어려우시면 편지 주십시오. 제가 직접 가지 못해 안됐습니다. 3월 중순까지는 틈이 안 날 것 같습니다. 우선 급한 대로 양식과 연탄 같은 것 확보하십시오. (1974.2.13. 이오덕)

- 백 번 죽었다 살아난대도, 저는 역시 가난하게 살면서 가난한 아이들 곁에 있고 싶습니다. 이대로 죽으라면 죽겠습니다. (1974.4.22. 권정생)

- 동화란 것을 심심풀이 오락물로 읽는 백만 명의 독자보다 단 백 명의 가난한, 그러나 슬기로운 어린이들과 진실한 삶을 찾는 젊은이들이 읽어 주는 것이 더욱 기쁘고 보람 있는 것이지요. (1974.4.30. 이오덕)



  이오덕 님과 권정생 님이 오랫동안 마음을 담아 주고받은 편지를 그러모아서 엮은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양철북,2015)를 읽습니다. 두 분이 주고받은 편지는 두 분이 서로서로 아끼는 마음입니다. 두 분이 나눈 편지는 두 분이 마음으로 깊이 사랑하면서 길어올린 이야기꽃입니다.


  슬프거나 아픈 일이 있을 적에 서로 편지를 씁니다. 기쁘거나 반가운 일이 있을 적에 찬찬히 편지를 씁니다. 언제라도 편지를 쓰고, 아침저녁으로 편지를 씁니다. 전화 한 통을 걸면 손쉽게 일을 맺고 풀 수 있을 테지만, 애써 연필을 손에 쥐고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냅니다. 꾹꾹 눌러서 쓰는 편지에 마음을 실어서 보냅니다.


  권정생 님은 이오덕 님을 만나지 않았어도 글을 쓸 기운을 낼 수 있었을까 궁금합니다. 이오덕 님은 권정생 님을 만나지 않았어도 사람을 믿고 삶을 버틸 수 있었을까 궁금합니다.


  글월을 몇 줄 적으면서 기운을 새로 냅니다. 글월을 한 통 받으면서 힘이 새로 납니다. 글월을 새롭게 적으면서 기운을 다시 차립니다. 글을 다시 한 통 받으면서 힘이 새로 솟습니다. 힘겨울 때에 서로 버티는 나무가 되어 줍니다. 기쁠 때에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에 글 한 줄을 쓰면서 마음을 다잡습니다. 눈보라가 차가운 날에 글 한 줄을 쓰면서 언손을 녹입니다.



- 일본 동요곡을 어엿이 표절해다 아이들에게 가르치면서, 문학작품에 나오는 주인공들 이름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일본 이름으로 등장되었다 해서 어려워한다니, 조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1974.8.6. 권정생)

- 절대로 함부로 책을 공짜로 주지 마십시오. 그냥 준다고 좋은 것 아닙니다. 피땀 흘려 쓰고 만든 책인 것을 아는 사람이 드뭅니다. (1974.11.23. 이오덕)

- 골덴 바지에 고무신이 제일 편합니다. 양복 입고 나서자면 또 갖춰야 할 것 있어야 되고. (1975.1.23. 권정생)

- 쓰신 것 아주 잘되었습니다. 작품을 올바로 보셨고, 보신 대로 소신을 썼으니 조금도 주저하실 것 없습니다. (1976.4.27. 이오덕)

- 서울 근처에 가면, 글을 발표할 수 있는 여건은 좋아지겠지만, 손해 볼 것 같습니다. 우선 건강이 견뎌 내지 못할 테고, 그 분위기에서 글이 써질 것 같지 않습니다. (1975.4.9. 권정생)



  비가 오는 날에 빗소리를 듣습니다. 빗소리는 바로 이곳, 내가 있는 이곳에서 듣습니다. 빗소리를 들으면서 생각합니다. 이 비는 내 그리운 님이 있는 저곳에도 내릴까 하고 생각합니다. 저곳에 있는 그리운 님도 이 비를 맞거나 이 빗소리를 들으면서 저녁을 보낼까 하고 생각합니다.


  빗물은 처마를 타고 흐르면서 주루룩 소리를 냅니다. 빗줄기는 들녘을 적시고, 늦봄에 개구리 노랫소리가 우렁차게 퍼집니다. 빗줄기가 굵으면 개구리 노랫소리가 잦아들고, 빗줄기가 잦아들면 개구리 노랫소리가 커집니다. 멧골에 깃든 조그마한 학교에서 일하던 이오덕 님은 멧골에서 퍼지는 빗소리를 듣고, 시골에 있는 자그마한 집에서 살던 권정생 님은 시골에서 흩어지는 빗소리를 듣습니다.


  한겨울에는 눈노래를 듣습니다. 눈노래는 고요하게 퍼집니다. 꽁꽁 얼어붙는 겨울에 갑작스레 온누리에서 소리가 사라진 듯하구나 싶을 무렵 바깥을 내다보면 눈송이가 날리기 마련입니다. 겨울에 내리는 눈은 숱한 소리를 잠재우는 노랫소리로 퍼집니다. 고요한 눈발입니다. 눈송이를 손바닥으로 받으면서 예쁜 무늬를 바라보면 어느새 녹아서 사라집니다. 이 곱고 멋진 눈송이가 그리운 님이 있는 그곳에도 똑같이 내릴는지 가만히 헤아립니다. 이 고운 숨결과 멋진 노래를 그곳에서도 함께 누리리라 여기면서 새삼스레 연필을 쥐어 글월을 씁니다.



- 사실 지금 아동문학 한다고 동시니 동화니 하는 것을 쓰는 사람들, 그리고 잡지 같은 것, 동인지 같은 것 만들고 있는 사람들의 하고 있는 일이란 참으로 한심스럽지요. 그러나 때가 되면 이런 불순물이 다 씻겨 없어질 것입니다. 고독을 영광으로 아는 지혜를 우리도 가져야겠다고 생각합니다. (1976.6.15. 이오덕)

- 삼동의 밤하늘 별이 금방 그리워집니다. 일직만 해도, 그다지 별빛이 아름답지 못합니다. (1975.8.14. 권정생)

- 어머니께서 어린 나를 안고 불러 주던 노래가 아직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이 애기 뉘집 애기 쓰레기통집 애기.” 이래서 끝내 쓰레기 인간이 되고 말았나 봅니다. 1976.11.26. 권정생)

- 선생님 동화집 초판을 2천 부 찍었다고 하면서 돈이 없으니 천 부 인세만 우선 주고 나머지 천 부는 훗날 주겠다고 사정을 해서 그리하라고 했는데, 사실은 2천 부를 찍었는지 5천 부를 찍었는지 모른답니다. (1979.5.23. 이오덕)

- 인간은 어디까지나 자유인으로 살아야 됩니다. 도덕이나 법률은 일시적인 악습을 막아 낼지 모르지만, 끝까지 인간을 참되게 이끌 수는 없습니다. (1979.9.29. 권정생)



  둘이 주고받은 글월은 둘이 주고받은 마음입니다. 따로 책으로 묶을 만한 글이 아닙니다. 책으로 묶으려고 주고받은 글월이나 마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오덕 님은 이 글월을 어느 날 문득 책으로 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두 사람이 조용히 따사롭게 주고받은 마음인데, 이 나라에 따순 바람이나 숨결이나 노래가 없다고 여겼기에, 두 사람 마음을 이웃한테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이오덕 님이 몸담았던 작은 멧골학교를 떠올려 봅니다. 나라에서는 그야말로 깊디깊은 멧골에까지 학교를 지었습니다. 멧골마을하고 시골마을에서는 저마다 땅을 내놓고 울력을 해서 학교를 지었습니다. 멧골사람과 시골사람은 이녁 아이를 학교에 보내어 하나라도 더 가르치겠다고 꿈을 키웠습니다. 그런데, 막상 학교를 지었더니, 학교에서는 월사금이나 온갖 잡비를 내라고 다그칩니다. 나라에서는 골골샅샅 학교를 지으면서 새마을운동을 퍼뜨리기에 바빴습니다. 멧골과 시골에서 학교를 다닌 아이들은 멧골과 시골에 튼튼하게 뿌리내리는 사람이 아닌, 하루 빨리 도시로 가서 돈을 더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키웁니다.


  이오덕 님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아프고 슬픈 마음이 차츰 커집니다. 권정생 님은 학교를 얼마 다니지 못했기에 글이나 책을 얼마 읽지 못했다고 여겼으나, 학교를 다니지 않고 삶을 스스로 일군 나날이었기에, 여느 작가하고 사뭇 다른 글빛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독재정권이 시키는 새마을운동을 거스르는 ‘거꾸로 사는 재미’로 나아가는 이오덕 님입니다. 아이들 마음에 깃든 넋이 어른들 마음에도 고스란히 깃들기를 바라면서 ‘우리들의 하느님’을 꿈꾼 권정생 님입니다.



- 장자같이 살아가는 것은 결과적으로 도피입니다. 우리는 루쉰을 배워야 합니다. (1979.7.6. 이오덕)

- 하느님 나라는 일만 송이의 꽃이 각각 그 빛깔과 모양이 다른 꽃들이 만발하여 조화를 이루는 나라입니다. 꽃의 크기가 다르고 모양이 다르고 빛깔이 달라도 그 가치만은 우열이 없는 나라입니다. (1980.7.24. 권정생)

- 농민의 생활은 그대로 하나의 시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1983.2.7. 권정생)

- 그런데 글자가 들어오기 전 말로써 얘기를 전하고 하던 그것도 훌륭한 문화가 아닐까요? 오히려 더 높은 문화일지 모르지요. (1983.2.12. 이오덕)

- 제 생각은 인간사를 돕고 싶지만, 거기는 이미 한 권의 원고가 가 있으니 창비에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창비 아동문고도 국내 창작물이 약하거든요. 창비도 도와야 하지요. 그래 결정을 못 내리고, 이 일은 권 선생 자신이 어느 쪽에 주시든지 결정해 주셔야겠다고 생각합니다. (1983.11.1. 이오덕)



  두 마음이 만나서 꽃 한 송이로 피어납니다. 두 마음은 고운 꽃송이로 어우러집니다. 바람 같은 마음과 햇볕 같은 마음이 만나서 꽃 한 송이를 피웁니다. 바람이 꽃송이를 살찌우고 햇볕이 꽃송이를 북돋웁니다.


  두 마음이 만나서 맑은 내음을 퍼뜨리는 꽃 한 송이가 됩니다. 두 마음은 맑은 숨결을 온누리에 나누어 주는 꽃송이로 자랍니다. 바람은 맑은 꽃내음을 골골샅샅 흩뿌립니다. 햇볕은 맑은 꽃내음이 더욱 맑도록 보살핍니다.


  글 한 줄을 쓰면서 나 스스로 꽃이 됩니다. 내가 쓴 글을 네가 받을 적에 네 마음에 맑은 꽃잎이 피어나기를 바랍니다. 글 한 줄을 읽으면서 나 스스로 활짝 웃음꽃을 피웁니다. 네가 쓴 글을 내가 받으면서 내 마음에 눈부신 열매가 맺는구나 싶습니다. 두 마음은 한곳에 모여서 새로운 씨앗으로 영글고, 새로운 씨앗이 이 땅에 드리우면서 오래도록 조용히 잠자다가 어느 날 문득 깨어나서 천천히 뿌리를 내리고 첫싹을 틔웁니다.


  이오덕 님과 권정생 님 글월을 엮은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를 읽으면, 두 사람은 언제나 서로서로 아끼고 섬기면서 깍듯한 말씨를 씁니다. 살구꽃과 참꽃과 할미꽃을 보면서 눈물을 짓다가 웃음을 짓는 마음이 흐릅니다. 풀 한 포기를 사랑하고, 나무 한 그루를 아끼며, 구름 한 조각을 보듬는 마음이 감돕니다. 이제 두 사람은 하늘사람이 되어 우리를 지켜보겠지요. 애틋한 글줄을 읽으면서 나도 하늘마음이 되고 하늘사랑으로 거듭나자고 생각합니다.



- 안동은 양반 도시라는 추상적인 이야기만 하더군요. 못마땅한 것은 양반이란 실체가 어떤 것인지 깊이 파고들지 않고, 왜곡되어 있는 점잖은 양반에 대한 은근한 우월감을 가진 것입니다. 양반이란 어디까지나 착취계급의 존칭어로써, 안동이 양반 도시라면서 그 몇몇의 양반 밑에 빼앗기며 종노릇을 했던 상놈들의 생각은 하나도 하지 못하더군요. (1985.10.19. 권정생)

- 그런데 제가 아주 불만스럽게 생각한 것은, 그 자리에서 들은 사람들이 모두 박 선생 글만을 문제 삼고 있고, 자신들은 별 관계가 없는 것같이 여겼다는 것입니다. 박 선생이나 그밖에 몇 사람만 그렇게 쓴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제가 그렇게 목청 돋우어 말을 하고 글을 쓸 필요도 없지요. 참 한심합니다. (1988.4.21. 이오덕)

- 자연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문제는 사람을 어떻게 보나 하는 문제가 되고, 그것은 그대로 문학관이 됩니다. 문학을 한다고 하는 요즘 젊은이들 가운데는 뜻밖에도 아주 사람답지 못한 천박한 자연관을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2002.11.22. 이오덕)



  2015년에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가 새로운 옷을 입고 태어났습니다. 이 책은 지난 2003년에 남몰래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에는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라는 이름으로 나왔고, 이오덕 권정생 두 분 뜻을 거슬렀습니다. 이오덕 권정생 두 분이 주고받은 글월을 보면, 권정생 님 책을 놓고 장삿속을 펼치는 출판사 이야기가 퍽 자주 나옵니다. 아름다운 마음을 아름다운 손길로 보살피면서 책으로 내면 될 텐데, 왜 이러한 몸짓이 못 되었을까요.


  이제 아름다운 손길로 책이 제대로 나왔으니, 오래오래 아름다운 마음이 퍼질 수 있기를 빕니다. 이 나라가 아름다운 꽃내음으로 가득하고, 온누리에 맑은 꽃빛이 고요하면서 그윽하게 퍼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4348.5.11.달.ㅎㄲㅅㄱ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54253&CMPT_CD=SEARCH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이오덕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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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사는 재미
이오덕 지음 / 산처럼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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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을 읽는다



착하고 참다우면서 곱게

― 거꾸로 사는 재미

 이오덕 글

 범우사 펴냄, 1983.5.25.



※ 책풀이 ※

1983년에 처음 나온 《거꾸로 사는 재미》는 2005년에 ‘산처럼’ 출판사에서 새롭게 나왔다. 거의 1970년대에 쓴 수필을 모은 책으로, 이 땅에서 교사가 되어 아이들과 지낸 이야기를 차분하게 들려준다. 삶을 사랑하고 숲을 어루만지려고 하는 꿈을 담은 이야기이다. 정치권력이 시키는 일하고는 늘 거꾸로 갈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길하고 함께 가려고 하는 숨결을 보여준다.



..



  ‘착하다’는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를 뜻한다고 합니다. ‘곱다’는 “눈이나 귀나 마음으로 받는 느낌이 좋다”를 가리킵니다. ‘상냥하다’는 “마음이 시원스러우면서 부드럽다”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착한’ 사람이라고 할 적에는, 이녁을 마주하는 느낌이 좋으면서, 함께 바른 삶길을 가는 한편, 시원스러우면서 부드러운 숨결이 흐르도록 이끄는 사람이라고 할 만합니다.


  착한 사람은 너그럽습니다. 잘잘못을 함부로 따지지 않습니다. 포근하면서 넉넉한 품으로 기쁘게 감쌉니다. 빙그레 웃고 즐겁게 노래합니다. 부드러운 말씨와 몸짓으로 아름다운 바람을 끌어들입니다.


  나쁜 짓을 안 한다고 해서 착한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나쁜 짓이란 무엇일까요? ‘착한 일’이 아니라면 ‘나쁜 짓’이 될 테니까, 포근하지 않고 넉넉하지 않으며 기쁘지 않을 때에 ‘나쁜 짓’이라 할 만합니다. 웃음이 없고 노래가 없을 때에도 ‘나쁜 짓’이 된다고 할 만합니다. 부드럽지 않으면서 아름다운 바람하고 동떨어질 적에도 ‘나쁜 짓’이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우리는 ‘나쁜 짓 안 하는 사람’으로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쁜 짓을 하지 말자고 하기보다는, ‘착하게 살면서 어깨동무하는 사람’일 때에 가없이 사랑스럽습니다. 착하게 꿈을 꾸면서, 착하게 노래를 할 때에 기쁩니다.



.. 유달리 포플러가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어째서인가? 그것은 울타리 안에서 사람들의 보호를 받거나 고고한 자리에 서 있는 나무가 아니라, 짓밟히고 버림받은 개울가에서 항상 우리들과 함께 있는 나무가 되어서 그런지 모른다 … 하늘은 잃지 말아야 하는 것, 빼앗기지 말아야 하는 것. 하늘은 어느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열 사람, 스무 사람의 것도 아니다. 모든 사람이 함께 가져야 하는 재산이다 … 아아, 붉은 벽돌집이 쳐다보이는 우리 속 얼어붙은 시멘트바닥에 갇혀 그 아무도 찾아 주지 않고 거들떠보지도 않는, 낮과 밤을 영원히 기다려야 했던 목숨 … 자연을 상품으로 사고판다는 것은 인간의 타락이다 … 과연 인간이 저 냇가에 굴러 있는 돌 하나를 멋대로 뒤집어 놓을 권리가 있는 것일까 … 인간적이라 함은 자연을 지각하는 인간의 가장 자연적인 삶을 말하는 것이다 ..  (16, 35, 66, 87, 88, 89쪽)



  마음씨가 고운 사람은 언제나 착한 말씨와 몸짓이기 마련입니다. 착한 사람이 곱지 않은 일이란 없으며, 고운 사람이 착한 마음이 아닌 일이란 없습니다. 착함과 고움은 언제나 함께 흐릅니다. 착한 기운과 고운 숨결은 늘 같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바라보면서 참 착하네 하고 느낀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고운 사람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바라보면서 참 곱네 하고 느낀다면, 그 사람은 어김없이 착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다만, 얼굴만 이쁘장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마음은 안 착하거나 안 곱지만, 얼굴만 이쁜 사람이 있을 수 있어요. 그저 얼굴만 보기 좋다고 할 만한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얼굴만 이쁜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몹시 힘들리라 느껴요.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얼굴만 이쁜 채 산다면, 마음은 안 착하고 안 고운 삶이라면, 스스로 얼마나 괴로울까요. 밉거나 막된 짓만 일삼느라 마음씨가 거칠거나 메마르다면, 스스로 얼마나 고단할까요.


  밉거나 막된 짓을 하기에 둘레에서 힘들지 않습니다. 누구보다 바로 한 사람이 힘듭니다. 밉거나 막된 짓을 하는 사람 스스로 가장 힘듭니다. 그러니, 우리는 스스로 밉거나 막된 짓을 하는 슬픈 사람이 되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누가 나를 괴롭히니까, 나도 다른 사람을 괴롭혀도 되지 않습니다. 누가 나한테 막말을 쏟아부으니까, 나도 다른 사람한테 막말을 퍼부어도 되지 않습니다. 누가 나를 때렸으니, 나도 다른 사람을 때려도 되지 않아요.



.. 자연과학은 자연을 사랑하고 키워가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정복하고 파괴하고 있으며, 그 자연 속에서 살고 있는 생명을 살생하는 방향으로만 달리고 있다 … 이들은 자연 속에서 살다 보니 그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다기보다 그런 것을 느낄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시의 피상적 문화에 정신이 팔리고 있는 것이다 … 긴 겨울 동안 험하고 추운 산길을 다니던 학교 아이들은 할미꽃을 보고 비로소 봄이 왔다고 좋아한다. 좋아한다는 것이 그것을 꺾고, 버리고, 짓밟고 하는 비뚤어진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다 … 평화와 공해 없는 사회는 그런 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건강한 인간의 사랑과 지혜와 선의에 넘치는 노력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열악한 정신으로 만들어진 물질문명과는 전혀 반대편에서 나타나야 할 새로운 정신문명만이 인류를 위기에서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  (19, 27, 40, 80쪽)



  ‘참’과 맞서는 ‘거짓’입니다. 참을 밝히면 거짓은 가뭇없이 사라집니다. 참답게 살지 않으면 거짓스레 사는 꼴이요, 참말을 하지 않으면 거짓말을 일삼는 셈입니다.


  참되게 사는 사람은 꾸미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참이기에 꾸밀 까닭이 없습니다. 못생겼으니 꾸며야 한다고요? 아니에요. 못생겼으면 그저 못생겼을 뿐이에요. 다리를 절면 그저 다리를 절 뿐이에요. 키가 작으면 그저 키가 작을 뿐이에요. 힘이 여리면 그저 힘이 여릴 뿐이에요. 노래를 잘 못 부르면 노래를 잘 못 부를 뿐이에요. 돈이 없으면 그저 돈이 없을 뿐이에요.


  없는데 있는 척하려고 하니까 꾸미고, 꾸미다 보니 거짓이 됩니다. 있는데 없는 척하자니까 꾸미고, 꾸미다 보니 거짓말이 늘어납니다.


  없다고 해서 나쁘지 않습니다. 있다고 해서 좋지 않습니다. 그저 스스럼없이 어깨를 펴고 활짝 웃으면서 기쁘게 노래하면 됩니다. 스스럼없이 이웃과 사귀고 거릴 것 없이 동무와 손을 잡으면서 신나게 춤추고 노래하는 삶을 지을 때에 아름답습니다.


  있는 것을 안 쓰면 고여서 썩습니다. 없는 것을 억지로 잡아끄니까 다툼이 생깁니다.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하니 스스로 괴롭습니다. 없는 그대로 홀가분할 마음이 못 되니 스스로 얽혀듭니다.


  참말은 참말을 낳고,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습니다. 참다운 삶은 언제나 참다운 삶으로 맑게 흐르고, 거짓스러운 삶은 언제나 거짓스러운 수렁에 허덕입니다.



.. 사람들이 고양이를 학대할 수는 있어도 고양이를 이겨낼 수는 없을 것이다. 고양이의 수난시대는 인간 문명의 막다른 시대일지 모른다. 살아 있는 것을 이토록 학대하는 사람들이 땅 위의 주인으로 언제까지나 복 받고 잘 살기를 어찌 바라겠는가 … 분명히 살아 움직이던 그 무수한 생명들은 어디로 가 버렸는가? 그 아무의 기억 속에도 슬픔 속에도 흔적조차 남김이 없이. 하늘 향해 구원을 청하는 소리 한 번 내어 보지도 못하고 사라져 버린 목숨들. 생명이란 이토록 허무한 것인가? 올챙이와 인간과 어떻게 다를 수 있는가 … 포플러는 포플러같이 키워야 하고 소나무는 소나무로 키워야 한다. 어린 생명을 천성 그대로 죽죽 뻗어나게 하라. 개성이 살아나게 하라 … 동물들은 아무것도 땅에 남기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이 먹는 음식의 포장물을 어디에 어떻게 처리할 계획도 생각도 없이 함부로 만들어 내기만 한다 ..  (59, 77, 96, 190쪽)



  이오덕 님이 쓴 수필책 《거꾸로 사는 재미》(범우사,1983)를 새롭게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이 책은 2005년에 스물두 해만에 새옷을 입고 다시 나오기도 했습니다(‘산처럼’ 출판사에서 새롭게 펴내 주었습니다). ‘똑바로’나 ‘반듯이’ 사는 재미가 아닌 ‘거꾸로’ 사는 재미를 말한다고 하는 책입니다.


  ‘거꾸로’라고 한다면,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하고 맞선다고 할 만한 몸짓입니다. 거꾸로 가는 길이란 똑바로 가는 길이 아니라고 할 만합니다. 그러면, ‘똑바로’는 무엇이고, ‘거꾸로’는 무엇이 될까 하고 돌아봅니다. 어떤 몸짓이 똑바로이고, 어떤 말짓이 거꾸로가 될까 하고 헤아립니다.


  이오덕 님이 “거꾸로 살기”를 하겠노라 다짐하던 때는 1980년대이고 1970년대이며 1960년대이자 1950년대입니다. 군사독재정권 총칼이 서슬 퍼렇던 무렵에 “거꾸로 살기”를 하겠노라 말씀합니다. 군사독재정권이 시키는 일을 “똑바로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새마을운동을 앞세워 정치와 행정은 제비집을 허물라고 시키지만, 이오덕 님은 왜 제비집을 허무느냐고 묻습니다. 나라에서 ‘자연보호’를 외친다면, ‘자연보호’에 걸맞게 제비집을 지키고 보살펴야 할 노릇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 정직은 어른이 아이들에게 가르쳐서 알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이들이 본래 가지고 있던 심성이다 … “교장 선생님, 제비집 있는 것 더럽게 생각하지 마시고, 오히려 자연스런 풍경으로 아름답게 보시면 안 됩니까? 뜯는 것도 여간 수고가 아니지요. 자연보호한다고 나뭇가지에 애써 새집도 만들어 달아 주는 판인데, 제비가 불쌍하지 않아요?” … 어린이의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인간 교육의 최고 최상의 목표다 … 자유당은 교육자들을 사람 가르치는 스승이 되게 하지 않고, 세금 징수 사무원으로 전락시켜 놓았다. 그러고는 온갖 지시와 명령을 내리고, 장부를 만들게 하고, 보고를 하게 하고, 행정 방침들을 외게까지 했다 ..  (265, 275, 286, 315쪽)



  군사독재정권은 언제나 ‘경제발전’을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이 경제발전은 온 나라 사람이 다 함께 넉넉하게 누릴 수 있는 ‘나아지는 살림살이’가 아니었습니다. 경제성장율이라고 하는 숫자만 높이려는 경제발전이었고, 시골에서 조용히 흙을 일구면서 스스로 삶을 짓던 사람들을 도시로 내쫓아서 ‘값싼 일꾼(공장 노동자)’이 되도록 내몰던 경제발전이었습니다. 사람을 바보로 만들면서 숫자놀음을 하던 경제발전을 외친 군사독재정권입니다. 어른과 아이 모두 바보스럽게 뒹굴도록 바보짓을 시키던 군사독재정권입니다. 어른들은 경제발전으로 치닫는 허수아비가 되도록 숫자놀음에 얽매이게 내몰고, 아이들은 입시지옥에 허덕이는 꼭둑각시가 되도록 숫자싸움에 얽어들도록 들볶은 군사독재정권이에요. 그러니, 이런 정치와 행정과 사회와 교육과 문화가 판치는 나라에서 “거꾸로 살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군사독재정권에서 “똑바로 살기”를 한다면, 정치 입맛과 독재 입맛에 맞추는 꼴이 됩니다.


  한국에서 정치와 사회를 주무르던 이들은 “바르게 살기”를 외치기도 합니다. 온 나라 곳곳에 커다란 돌을 세워서 “바르게 살기”라는 글씨를 새깁니다. 학교에서는 ‘바른생활’이랑 ‘도덕’을 가르칩니다. 그렇지만 막상 사람들이 ‘바른말’을 하지는 못합니다. ‘바른글’도 못 쓰고 ‘바른넋’이 되지 못합니다. 숫자놀음과 숫자싸움에 휘말리는 사람들은 입으로만 “바르게 살기”를 외칠 뿐, 참길이나 참말이나 참삶하고는 자꾸 동떨어집니다. 나라에서 “바르게 살기”를 시키면 시킬수록 사람들은 “거꾸로 살기”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 나는 그저 생겨난 대로 자연스럽게 정직하게 살고 싶을 뿐이다 … 서민적이고 토착적인 말이 중간층을 대표하는 말에 쫓겨나고, 그것은 다시 도시의 상업자본층을 중심으로 한 말로 바뀌어지는 것이다 … 젊은 사람들이 노인들에게 좌석을 양보해 주는 것은 아름다운 덕이요 예의다. 그러나 젊은이들의 자리를 빼앗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것은 평등한 인간의 권리를 무시한 시대착오의 우둔한 돌머리들인 것이다 … 교육자란 그 어느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보다 말에 대한 자각을 철저히 가지지 않으면, 그 영향이 곧 어린이들에게 미치는 만큼 깊이 유의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 콘크리트 안에 갇혀 시험점수만 따기 위해 서로 악착같이 다투어야 하는 이 아이들은 손가락에도 발가락에도 상처 하나 없이 고이 자라나지만,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에는 깊고 커다란 상처가 나 있을 것이다 ..  (111, 124, 133, 144, 161쪽)



  이오덕 님은 《거꾸로 사는 재미》라는 책을 내놓으며 머리말에 “내가 쓰고 싶었던 것은 사실은 노을의 얘기며 감나무나 새들의 얘기였는지 모르지만, 내 양심은 그런 것보다도 눈앞에 전개되는 삶의 아픈 얘기들을 쓰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자연을 말하더라도 괴로운 자연의 진실을 얘기하도록 했다.” 하고 밝힙니다. 그러고 보니, 《거꾸로 사는 재미》를 내놓은 지 스무 해쯤 지난 2002년에 《나무처럼 산처럼》이라는 책을 내놓으셨고, 이무렵에 이르러야 비로소 노을과 감나무와 새하고 얽힌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줍니다.


  노을 이야기를 얼마나 하고 싶으셨을까요. 감나무와 새 이야기를 얼마나 쓰고 싶으셨을까요. 아이들과 기쁘게 웃음꽃을 피우는 삶을 얼마나 노래하고 싶으셨을까요.


  그렇다고 1950∼90년대에 노을과 감나무와 새 이야기를 안 쓰시지는 않습니다. 쓰시기는 쓰시되 ‘아픈 나무’ 이야기를 씁니다. ‘슬픈 이웃’ 이야기를 쓰고, ‘괴로운 아이’ 이야기를 씁니다. 아이들이 웃음을 잃어야 하는 까닭을 쓰고, 아이들한테서 노래를 빼앗은 바보스러운 어른들 이야기를 씁니다.


  곰곰이 되새깁니다. 아픈 나무는 예나 이제나 똑같이 있습니다. 새마을운동 바람이 불면서 농약바람과 비료바람과 비닐바람과 기계바람과 시멘트바람이 불었습니다. 요즈음 시골을 보면, 어디에나 농약과 비닐을 아주 많이 씁니다. 낡은 비닐은 바람에 날려 나뭇가지에 볼썽사납게 매달립니다. 마을 어르신들은 비닐을 아무 곳에서나 태우는데, 농약병과 막걸리병도 함께 태웁니다. 플라스틱이 타는 연기가 마을을 덮습니다. 어느 집에서나 비닐과 플라스틱 쓰레기를 똑같이 태웁니다. 새마을운동 바람이 불 적에는 마을길을 넓힌다면서 큰나무를 베어 넘겼고, 요즈음은 큰나무 때문에 그늘이 지면 곡식이 덜 여문다면서 큰나무를 베어 없앱니다. ‘숲정이’는 옛말이요, 도랑에서 가재나 미꾸라지를 잡을 수 없습니다. 개똥벌레를 볼 수도 없습니다.


  슬픈 이웃은 예나 이제나 똑같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도시에서 철거민이 생겼다면, 요즈음은 시골에서 송전탑과 핵발전소와 핵쓰레기처리장과 군부대 때문에 사람들이 쫓겨납니다. 괴로운 아이는 외려 오늘날에 더 많다고 할 만합니다. 입시지옥은 나날이 더 커지고, 입시지옥을 가로질렀어도 일자리 얻기가 빠듯합니다. 노래를 빼앗긴 아이들은 신나게 어울려 놀지 못한 채 술과 담배와 게임과 스포츠 구경을 빼고는 딱히 할 수 있는 놀이가 없고, 배운 놀이가 없으며, 물려받은 놀이조차 없습니다.



.. 우리가 어떤 대상에게서 받은 은혜가 너무 넓고 크면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 마음속으로 자연스럽게 생활 속에서 절실하게 느낄 수 없는 것을 입으로만 말해서 머릿속에 지식으로 외우게 하는 것은 오히려 반발을 살 염려조차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다만 서로 도우면서 즐겁게 놀고 공부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효도고 나라사랑은 자연히 되는 것이다 … 아이들은 본디 옷차림에 관심이 없다. 아이들에게 사치와 허영을 강요하고 물들게 하는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거짓스런 옷으로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흙바닥에서 뒹굴고 햇볕에 살갗을 그을리게 하는 것이 좋다 … 외국에 가져갈 선물로 밤을 따고, 그 외국에서 호미를 사들고 가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야말로, 그 나라의 그러한 면이야말로 참된 선진국의 모습으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다 ..  (151, 153, 172, 183쪽)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 비가 멎고 바람이 잠듭니다. 철마다 새로운 꽃이 핍니다. 철 따라 바람결이 바뀌고, 언제나 새로운 날씨가 찾아옵니다. 아이들은 새롭게 태어납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어른한테서 놀이를 물려받지 못합니다. 요새는 ‘전통놀이 되살리기’ 같은 일을 꾀하기도 하지만, ‘죽은 놀이’를 문화재로만 바라볼 뿐, 여느 마을에서 여느 사람들이 ‘우리 겨레가 오래도록 물려주고 물려받은 놀이’를 기쁘게 즐기지 못합니다.


  둘레를 돌아보면, 도시나 시골 어디에도 너른 마당이 없습니다. 이른바 ‘광장’이 사라졌습니다. 도시나 시골 모두 너른 마당은 상업시설과 주차장한테 빼앗겼습니다. 도시에서는 상업시설과 주차장과 아파트가 너른 마당에 들어섰다면, 시골에서는 공장과 발전소와 골프장과 관광단지가 너른 마당에 들어섭니다.


  줄다리기 같은 놀이를 할 만한 너른 터가 없습니다. 고싸움을 할 만한 너른 터가 없습니다. 연날리기를 하거나 쥐불놀이를 할 만한 너른 들이 없습니다. 멧토끼를 잡거나 꿩을 잡으러 오르내릴 숲이나 골짜기가 없습니다.


  도시이든 시골이든 구슬치기나 돌치기나 고무줄놀이를 할 만한 손바닥만 한 빈터조차 사라집니다. 어디에나 자동차가 섭니다. 아이들은 자동차에 치이지 않도록 잘 살펴야 합니다. 아이들은 ‘놀이’를 배우지 못한 채 ‘교통안전 수칙’을 외워야 합니다. 아이들은 동무들과 신나게 뛰놀지 못하면서 ‘교통안전 생활화’를 해야 합니다.



.. 남의 과수원을 멀리서 구경하면 아름답지만 그것을 피땀으로 가꾸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이토록 괴로운 것이다. 도대체 아름다움이란 한갓 환상이 아니고 무엇일까 … 사물의 현상을 겉으로만 보는 눈은 대상에 파고들지 못하며, 그것은 보는 사람의 자기 중심으로 된 안이한 기분일 뿐이다. 그러나 사물을 내면에서 보는 눈은 그 사물의 생명을 붙잡는다 … 자기 자신을 열등시하는 교장들이 무슨 교육을 하겠는가? 모멸은 남들로부터 받기 전에 자기 스스로 하는 것이다. 맨 끝자리에 앉아 있더라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열등감을 갖지 않고 자랑스럽게 자기 일을 해야만 교육이 된다 … 교육자에게는 지식도 있어야 하고 그 지식을 전달하는 기술도 갖춰야 하지만,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들을 참된 인간으로 키워 보고 싶어하는 열성이다 ..  (179, 180, 231, 236쪽)



  이오덕 님은 학교에서 거꾸로 살기를 합니다. 이오덕 님은 어린이문학과 문학비평에서 거꾸로 살기를 합니다. 이오덕 님은 글쓰기와 한국말을 바라볼 적에 다시금 거꾸로 살기를 합니다.


  윗자리라고 하는 데에서 시키는 행정과 서류를 받아들이면 아이들이 괴롭습니다. 끼리끼리 어울리는 문단권력에 녹아들면 돈과 이름을 날릴 만하지만, 문학을 누릴 아이와 어른 모두 아름다움하고 동떨어집니다. 이냥저냥 지식을 자랑하거나 뽐내는 글을 쓰면 책을 잘 팔는지 모르나, 삶다운 삶을 찾으면서 말다운 말을 찾으려고 하니 온통 가시밭길입니다.


  권력과 돈과 이름값하고는 등을 지는 거꾸로 살기입니다. 아이들과 웃음과 놀이하고 어깨동무를 하는 삶입니다. 독재정권과 새마을운동과 행정서류하고는 등을 돌리는 거꾸로 살기입니다. 흙과 나무와 시골하고 손을 맞잡으려는 삶입니다.


  지구별 어느 나라를 바라보아도, 어느 곳에서나 어버이는 아이한테 ‘말’을 물려줍니다. ‘글씨’부터 가르치려는 나라는 없습니다. 미국이든 영국이든, 덴마크이든 핀란드이든, 베트남이든 스리랑카이든, 일본이든 중국이든, 칠레이든 브라질이든, 모두 ‘제 나라와 제 겨레가 먼먼 옛날부터 입으로 가르치고 입으로 배운 말’을 어버이가 기쁘게 아이한테 물려줍니다. 그렇지만, 한국을 돌아보면, 한국에서는 ‘말’을 물려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쓰는 말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말다운 말을 쓰는지 안 쓰는지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떠도는 말(유행말)을 아무렇지 않게 쓸 뿐이며, 딱딱하고 굳은 지식말과 한자말과 영어를 함부로 쓸 뿐입니다.


  학교에서도 아이가 말을 배우도록 이끌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아이들이니 ‘한국말’을 슬기롭고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레 배워야 할 텐데, 초등학교에서 하려는 몸짓은 고작 ‘영어 더 빨리 가르치기’와 ‘한자 더 많이 가르치기’일 뿐입니다. ‘한국말을 제대로 생각하면서 슬기롭게 쓰도록 가르치기’를 이끄는 교과서가 없고, 이러한 길을 걸으려는 교사도 매우 드뭅니다.



.. 문학은 민중들이 창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농민들이 소설은 읽지도 않는다. 도시의 서민들도 안 읽는다 … 인간 사회의 참모습을 파악해야 한다. 역사와 사회를 외면할 때 결코 인간답게 살 수 없다. 철학이 없이 동시고 동화를 쓸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 학생들이 농촌에 가서 농민들과 함게 땀흘려 일하는 기회를 갖는 것이 바람직한 것은 그런 체험을 통하지 않고서는 인간의 삶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 우리가 아이들에게 바랄 것은 인간스런 느낌과 생각을 가지고 개성과 창조적 재질을 발휘하는 일입니다 … 유교라는 것이 아이들 기를 죽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아이들이 이해할 수 없는 온갖 형식의 예법을 강요하면서 기를 죽여 놓는다 ..  (207, 208, 220, 245, 254쪽)



  이오덕 님은 “거꾸로 사는 재미”라고 이야기합니다. 거꾸로 사는데 무슨 재미일까요? 거꾸로 살면서 어떤 재미일까요? 독재정권을 거슬러서 거꾸로 사니, 독재하고는 등돌릴 테지요. 총칼을 앞세우거나 주먹으로 윽박지르는 몸짓하고는 등돌립니다. 이리하여, 자유와 평화와 아름다움이 자랍니다. 새마을운동 따위와 거슬러서 거꾸로 사니, 새마을운동은 손사래칠 테고, 경제개발이나 숫자다툼은 처음부터 따지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꿈과 평등과 사랑이 자랍니다.


  아이들을 입시지옥으로 그대로 내몬다면, 아이와 어버이가 모두 괴롭습니다. 입시지옥에 갇힌 아이들이 가장 괴로울 텐데, 아이들을 입시지옥으로 내모는 어른도 호젓하거나 홀가분하거나 기쁠 수 없습니다. 입시지옥을 그대로 두면서 학원강사나 과외교사가 되어 돈을 벌면 무슨 재미나 보람이 있겠습니까. 아이들을 입시지옥으로 내몰지 않고, 아이 손을 맞잡고 들노래를 부르고 들놀이를 함께 누리면, 아이와 어버이가 모두 즐겁습니다. 입시가 아닌 삶을 생각하고, 지옥이 아닌 사랑을 찾으려 할 때에, 아이와 어버이가 모두 기뻐요.


  다른 아이들이 모두 대학교에 간대서 우리 아이들이 꼭 대학교에 갈 까닭이 없습니다. 아예 초등학교부터 안 가도 됩니다. 굳이 학교나 학원에 보내어 영어를 가르쳐야 하지 않습니다. 조그마한 시골집에서 영화와 책으로 천천히 영어를 함께 배워도 됩니다.


  다른 어른들이 모두 도시로 떠나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나 공장 노동자가 된대서, 나까지 도시로 가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나 공장 노동자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시골에서 시골지기로 지내면 됩니다. 시골에서 시골일을 하고 시골노래를 부르면서 시골밥을 먹으면 됩니다. 시골바람을 마시고, 시골꿈을 꾸면서, 시골사랑을 아이들한테 물려주면 됩니다.


  삶을 찾아서 이 길을 걷습니다. 다른 사람 눈에는 거꾸로 간다고 보일 수 있지만, 나는 내 길을 씩씩하게 걷습니다. 사랑을 헤아리며 이 길을 걷습니다. 다른 사람 눈에는 거꾸로 달리는 듯이 보일는지 모르나, 나는 내 길을 튼튼하게 걷습니다. 이오덕 님이 《거꾸로 사는 재미》에서 들려주는 삶노래는 언제나 사랑노래요 꿈노래입니다. 4348.5.1.쇠.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이오덕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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