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쓸모 있을걸 창비아동문고 60
이오덕 지음, 이혜주 그림 / 창비 / 1984년 10월
평점 :
절판


이오덕 읽는 하루

― 씨앗을 심는 어린이



《이사 가는 날》

 이오덕 엮음

 창작과비평사

 1984.10.30.



  《이사 가는 날》(이오덕 엮음, 창작과비평사, 1984)은 어린이·푸름이 글모음입니다. 이오덕 어른이 가르친 아이들이 쓴 글도 모으고, 한국글쓰기연구회 길잡이로 지내는 분이 가르친 아이들이 쓴 글도 모읍니다. 1984년에 처음 나온 책에는 책자취(판권)에 “편자와의 협약에 의해 검인 생략” 하고 적었습니다. 그런데 펴냄터인 창작과비평사(창비)는 1990년에 바뀐 한글맞춤길에 따라 책을 모두 판갈이를 해야 하던 무렵부터 슬그머니 ‘저작권자 이오덕’을 지우고서 ‘저작권자 창작과비평사’로 바꿔치기를 했습니다. 이오덕 어른은 돌아가시는 날까지 창작과비평사(창비)가 이렇게 ‘저작권 훔침질(도용)’을 한 줄 까맣게 몰랐습니다.


  이오덕 어른은 1984년에 처음 글모음을 선보일 적에는 ‘책 끝에’라는 이름으로 어린이·푸름이가 쓴 글이 어느 꾸러미(학급문집)에 실렸는지 낱낱이 밝혔는데, 창작과비평사(창비)에서 ‘저작권자 이오덕’을 지우고서 ‘저작권자 창작과비평사’로 바꿔치기를 하던 무렵부터 ‘책 끝에’도 슬그머니 잘라냈습니다.


  이오덕 어른은 ‘창비아동문고’에 어린이글이 꼭 있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어른들이 쓴 글만 어린이한테 읽혀서는 안 되고, 어린이 스스로 어린이 삶을 밝힌 어린이 목소리를 여럿 꾸준히 선보여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손수 《이사 가는 날》을 비롯한 여러 글모음을 엮어서 선보였습니다. 이렇게 선보여서 받은 글삯은 모두 한국글쓰기연구회에서 펴내는 달책(회보)을 펴내는 밑돈으로 삼았어요. ‘글쓰기 회보’라고 줄여서 가리키는데, 이 글쓰기 회보는 바로 ‘어린이 목소리를 살리고 사랑하는 줄거리’를 담는 작은 책이었습니다.


  창작과비평사(창비)는 이오덕 어른이 엮은 글모음을 1984년에는 ‘매절 계약’으로 냈습니다. 그무렵에는 우리나라에서 저작권법을 제대로 지키는 곳이 없다시피 했어요. 그러나 예전에도 틀(법)은 버젓이 있었고, 2000년부터는 ‘세계저작권협약’을 지키기로 한 우리나라이니, 늦어도 2000년부터는 이 틀을 어겨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2000년 앞서 맺은 출간계약이라 해더라도 ‘매절계약은 무효이고, 그 뒤 새로 찍어서 매절 계약금을 넘게 나온 글삯(인세·저작권료)은 돌려받기(소급적용)를 할’ 노릇입니다.


  창작과비평사(창비)는 저작권법을 크게 어겼을 뿐 아니라 성명표시권(저작권자 표기)까지 ‘저작권자 이오덕’을 지우고서 ‘저작권자 창작과비평사’로 바꿔치기를 오랫동안 해왔습니다. 한두 해도 아닌 거의 스무 해를 이렇게 했지요. 그러나 창작과비평사(창비)에서는 이 말썽거리를 쉬쉬했고, 뉘우치지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창작과비평사(창비)에서는 이제 더는 이오덕 어른 책이 나오지 않습니다. 다 끊었거든요.


  어린이 숨결을 헤아리는 눈빛을 어린이가 스스로 쓴 글을 사랑어린 손길로 살펴서 여민 아름책인 《이사 가는 날》은 이제 다시 나오기 몹시 어려울 듯싶습니다. 헌책집에서 겨우 찾아볼 수 있는 책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헌책집이 있기에 새로 만날 수 있고, 헌책집이 있어서 두고두고 되읽히리라 봅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책숲(도서관)은 《이사 가는 날》처럼 오랜 책은 쉽게 버리거든요.


  1984년에 태어난 《이사 가는 날》은 1970∼80해무렵이라는 나날을 살던 어린 눈망울을 들여다보고 느낄 값진 이야기씨앗입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순이를 깎거나 낮추려는 고약한 틀이 단단했는데, 어린이가 조용히 남긴 글자락에는 ‘어머니를 때리거나 괴롭히는 아버지’를 나무라는 이야기가 줄줄이 흐르고, ‘딸을 하찮게 여기는 나라’에 눈물젖다가도 새로 기운을 내어 ‘어린 동생(순이)’을 언니로서 씩씩하게 돌보겠노라 다짐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른답지 못 한 사람들을 꾸짖는 착한 마음을 어린이 글자락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작고 수수한 어린이 글모음 《이사 가는 날》은 1970∼80해무렵에 어린이·푸름이로 살던 맑은 숨빛이 ‘나중에 내가 어른이 되면 이 나라 이 땅 이 마을 이 집을 이렇게 바꾸어 사랑이 흐르는 아름터로 바꾸겠노라’ 하는 따사로우면서 듬직하면서 상냥하면서 환하면서 고운 마음이 듬뿍 흘러나온다고 할 만합니다. 지난날에는 아이였으나 오늘날에는 어른이 되어 이 나라를 새롭게 가꾸는 손길을 이 글모음으로 돌아볼 만합니다.


  저는 1982∼87년에 어린배움터를 인천에서 다녔습니다. 어릴 적에 어머니랑 신포시장으로 버스를 타고 저잣마실을 다녀올 적에 ‘할머니나 할아버지를 안 태우고 내쫓는 버스일꾼하고 차장’을 곧잘 보았습니다. 참말로 그때 적잖은 버스일꾼하고 차장은 ‘버스에 타려는 할머니나 할아버지’한테 대놓고 “이그, 늙었으면 집에서 드러눕거나 자빠질 것이지 뭣 하러 돌아다녀? 언제 죽으려나 몰라?” 하고 떠들었어요. 어린 마음에도 이런 말을 들으면 소름이 돋고 참 싫었습니다. 그러나 따지지 못 했어요. 그무렵에 어린이가 이런 엉터리짓을 따지면 억센 주먹으로 얻어맞았거든요. 사납고 무서운 주먹에 눌려 끽소리를 못 하던 지난날 아이들이었어요.


  우리 어머니는 제가 새파랗게 질리면서도 말을 참는 줄 느꼈고, 이다음 저잣마실을 할 적에는 버스를 안 타고 한참 걸었습니다. “안 힘드니?” “네, 안 힘들어요. 해를 보고 바람을 쐬니 좋은걸요.” “그래, 그 사람들은 저희도 늙으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는 줄 모르나 봐.” “네.” 어머니는 더 말하지 않고 걸었습니다. 이러다가 버스에서 차장이 사라졌습니다.


  1984년이면 저로서는 어린배움터 3학년인 나이인데, 그때에는 《이사 가는 날》 같은 글모음이 있는 줄 까맣게 몰랐습니다. 이해에 《몽실 언니》가 나왔으나, 그런 책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창비아동문고’라는 책은 1994년에 열린배움터(대학교)에 들어가서 번역가·통역사가 될 꿈으로 네덜란드말을 배우던 무렵, 우리말을 우리말답게 제대로 익히려고 하면서 이오덕 어른 《시정신과 유희정신》이랑 《일하는 아이들》이랑 《삶과 믿음의 교실》을 만나면서 비로소 알았어요. 1994년 봄날 헌책집에서 《이사 가는 날》에 《우리 반 순덕이》에 《나도 쓸모 있을 걸》 같은 어린이 글모음을 만나서 읽으며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어요. 어린이일 적에 만나지 못 한 아름다운 글을 만나서 눈물이 흘렀고, 1984년 언저리에 ‘어린이가 스스로 제 목소리를 내도록 곁에서 사랑으로 보살핀 어른이 있었구나’ 싶어 놀랍고 반가운 마음에 울었습니다.


  어린이가 쓴 글은 대단하지 않습니다. 어린이가 쓴 글은 그저 사랑입니다. 어린이가 쓴 글은 훌륭하지 않습니다. 어린이가 쓴 글은 오롯이 마음을 담은 살림꽃입니다. 사랑을 놓고서 대단하다거나 안 대단하다고 가를 수 없어요. 살리는 꽃송이를 보면서 훌륭하다거나 안 훌륭하다고 나눌 수 없습니다. 사랑은 늘 사랑이고, 꽃은 언제나 꽃입니다.


  어린이는 늘 사랑이기에 어린이는 모두 ‘노래님·놀이빛’입니다. 구태여 ‘시인·가수’ 같은 허울스런 이름을 쓸 까닭이 없습니다. 어린이는 모두 노래하고 놀이합니다. 어린이는 모두 꽃으로 피어나고 마음밭에 꿈씨앗을 심습니다. 어린이는 천천히 자라나면서 나비처럼 날갯짓을 하기에 철이 드는 어른으로 섭니다.


  그래요, 철이 들기에 어른이고, 철이 안 들기에 늙은이입니다. 어린이를 사랑할 줄 알기에 어른이요, 어린이를 때리거나 괴롭히기에 늙은이입니다.


  오늘날에는 어린이 목소리를 고스란히 담아서 책으로 여미는 어른이 몇쯤 있을까요? 이 터전을 아름답게 사랑으로 가꾸어 내고픈 꿈을 씨앗으로 마음에 심는 어린이가 스스로 빛내면서 쓰는 글자락을 눈여겨보고 품는 어른은 몇쯤 있는가요?


ㅅㄴㄹ


무용이 다 끝나고 집에 와 보니 아버지께서 세수를 하고 계셨다. 아버지 얼굴을 가만히 살펴보면 굴 속에 들어가셔서 우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탄을 캐내고 월급은 조금밖에 없다는 것이 나타나 있다. (아버지―강원 사북국 5년 박영희/59쪽)


내가 1학년 때 부산 망미동으로 이사를 왔다. 나는 진주보다 부산이 더 좋은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인심도 없고 사치만 하고 돈밖에 모르고 자기들만 아는 체하고 옥에 갇힌 것같이 갑갑했다. (시골에 살다가 도시에 와 보니―부산 감전국 6년 정희웅/98쪽)


할머니께 “할머니는 무거운 것 들고 힘드실 텐데 왜 걸어가셔요? 차 타고 가시지요.”라고 여쭈었다. “뭐 오래 걸린다고 버스 타고 다니냐? 돈 아깝게…….” 어떤 아주머니는 짐 하나 없이 10분도 안 되는 거리를 차 타고 다니는데 우리 동네 할머니는 한 시간도 더 되는 거리를 걸어다니신다 … 그러면 왜 그러실까? 내 생각으로는 돈 때문이기도 하지만 차를 타면 마음이 편하지 않으셔서인 것 같다. 언젠가 버스를 타고 가는데 한 할머니께서 버스를 타려고 하니 차장 아저씨가 못 타게 하는 것을 본 일이 있다. 버스 안이 비좁기는 했어도 할머니 한 분이 탈 자리는 있었건만 “늙은이가 집에나 있지 왜 돌아다녀?” 하며 태워 주지 않았다. (우리 마을 아주머니 할머니들―충남 대천여중 3년 김선미/117쪽)


우리 소는 내가 소를 먹이러 가면 좋아서 펄쩍펄쩍 뛴다. 그렇게 해서 매일마다 간다. 우리 소는 연한 것을 좋아한다. 소가 어떻게 먹이를 먹는지 자세히 관찰하여 보니까 연한 것을 먹고 난 다음 가만히 있다가 다시 올려서 씹는다. (우리 집 소―성주 대서국 4년 유해정/182쪽)


내 동생은 “오늘은 저녁놀이 깊게 잠을 자는구나. 어제 늦게 동안 물이 들어 피곤해서 잠을 자는구나.” 하고 말했다.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로 우리들은 저녁놀을 좋아했다. 나는 저녁놀을 향하여 “저녁놀아! 저녁놀아! 아름다운 저녁놀아! 내일도 모레도 저녁놀이 끼어 내 마음을 기쁘게 해 다오!” 하고 힘차게 외쳤다. (해질 무렵―경북 의성국 5년 김희정/200쪽)


나는 죄인을 착하게 만드는 것은 감옥도 아니고 법률도 아니고 경찰관도 아니라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다만 사랑만이 가장 위대한 힘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도 학교에서 사랑에 대한 것을 배우고 노래도 부르는데 그냥 듣기만 하고 부르기만 한 것 같다. 그런 나에게 이 책은 많은 도움을 주었다. 장발장이 자베르 경감의 목숨을 살려 주었을 때 나는 정말 감동했다. 나에게 친절히 해 주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은 쉽지만 나를 괴롭히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레미제라블을 읽고―경남 거창 샛별국 5년 김성경/252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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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신 유희정신 - 어린이문학의 길 이오덕의 문학 1
이오덕 지음 / 양철북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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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읽는 하루

― 서울을 버리고 숲을 품기



《詩精神과 遊戱精神》

 이오덕

 창작과비평사

 1977.4.25.



  《시정신과 유희정신》(이오덕, 창작과비평사, 1977)이 어렵다고 얘기하는 분이 제법 많습니다. 1977년에 처음 나온 책은 “詩精神과 遊戱精神”처럼 한자로 적었기에, 이 한자를 못 읽느라 선뜻 손이 안 갔다는 분도 많습니다. 그러나 막상 책을 펴면 ‘한자를 드러낸 대목’은 없다시피 합니다.


  이오덕 님은 뒷날 《우리글 바로쓰기》를 펴냈지만, 전두환이 이오덕 님을 어린배움터에서 솎아내며 괴롭히던 때까지 글에 곧잘 한자를 썼습니다. 어린배움터에서 마지막까지 아이 곁에 있지 못 하고 떠나야 하고 나서, 열린배움터(대학교)에서 이태 동안 가르친 적이 있는데, 이무렵 우리나라 젊은이가 글을 너무 못 쓰고 말을 너무 모르는 줄 깨달았다지요. 우리 젊은이가 왜 이토록 말글을 모르는가 하는 뿌리를 파헤치면서 ‘우리말 우리글’부터 제대로 들려주고 배우지 않으면 이 나라가 통째로 썩고 뒤틀리고 흔들릴 수밖에 없겠다고 느꼈다고 합니다.


  1990년 앞뒤로 몹시 바쁘게 하루를 보내었고, 부르는 곳이 있으면 어디라도 이야기꽃을 피우려고 달려가다 보니, 어느새 여린 몸이 더 지치고 말아 끝내 드러눕다가 권정생 님보다 먼저 흙으로 돌아간 이오덕 님입니다. 그동안 써낸 책 가운데 《시정신과 유희정신》만큼은 쉬운 우리말로 고쳐쓰고픈 마음이었지만, 옛글을 고쳐쓰기보다는 새글을 쓰는 일에 더 힘을 쏟느라 《시정신과 유희정신》은 1977년에 나온 판 그대로 남았습니다.


  총칼을 휘두르는 우두머리가 춤추던 1977년 무렵, 이 나라 앞길을 헤아리면서 꿈씨앗처럼 남긴 두 마디인 ‘시정신’하고 ‘유희정신’을 오늘 우리 어린이한테 들려줄 쉬운말로 옮기자면 ‘노래얼’하고 ‘놀이넋’입니다. “시정신과 유희정신 → 노래얼이랑 놀이넋”입니다. 한자말 ‘정신’을 앞뒤에서 다르게 풀었는데, 노래를 부르고 나누는 숨결은 ‘얼’을 차리면서 스스로 ‘알아’가는 길입니다. 놀이를 하고 노느는 숨빛은 ‘넋’을 깨우면서 ‘너나’없이 하나로 가는 살림입니다.


  우리말 ‘노래·놀이’는 말밑이 같습니다. ‘노’는 ‘높다·노을’하고도 맞물리고, ‘노을’을 줄인 ‘놀’은 ‘너울’을 가리키기도 하고, ‘노느다·나누다’로도 잇닿아요. ‘놀·너울’이란 ‘널리’ 뻗는 길이자, ‘너머’로 가는 다릿길입니다. 노래하고 놀이를 하기에 ‘넉넉’히 마음을 가꾸고, 누구하고나 ‘나눌’ 줄 아는 착하고 참한 숨소리로 퍼져요. 높이높이 오르는 노랫가락은 어느새 하늘에 닿아 파랗게 물드는 바람으로 번지고, 이 바람은 휘파람으로 감기고, 바다로 물결치고, 바닥(땅)으로 내려와서 마음밭(마음바탕)을 이룹니다.


  노래하고 놀 줄 알기에, 나비처럼 날개돋이를 하면서 홀가분하게 날아오르는 ‘나’를 만나요. 노래를 잊거나 빼앗긴다면 놀지 못 할 뿐 아니라, 날개가 꺾이고 ‘나’를 잃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어린이가 노래하고 놀지 못 하도록 틀어쥐거나 억누르거나 짓밟으면서 셈겨룸(시험)으로 내모는 오늘날 배움터란, 어린이를 죽이는 수렁입니다. 모든 어린이가 시골에서든 서울에서든 마음껏 노래하고 놀도록 울타리를 걷어내고서 하늘빛으로 어울리는 ‘우리다움’을 찾을 적에 비로소 홀가분(자유)히 나래를 펼 수 있어요.


  《시정신과 유희정신》을 보면, ‘구경(완상玩賞)’이란 무척 무시무시한 짓이라는 대목을 낱낱이 밝힙니다. 구경꾼 어른이 어린이를 꼭두각시로 내모는 짓이 ‘동심천사주의’이고, 이 동심천사주의는 ‘윤석중·박목월·유경환’이 이끌었는데, 어느새 ‘동심천사주의 윤석중·박목월·유경환’ 같은 이들이 어린글밭(아동문학계)을 집어삼켰습니다. ‘구경 아닌 삶짓기’를 글(시·동화)로 담아내어야 어른일 텐데, 막상 우리나라에는 어른스레 글을 여미는 손길이 얕았고, 하나같이 돈(상업주의)에 팔려 ‘구경(완상)’하는 겉치레만 쏟아내었다고 여길 만합니다.


  그나마 《시정신과 유희정신》이 처음 나온 1977년 무렵만 해도 아직 시골에서 살림을 짓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 뒤 쉰 해 가까이 흐르는 동안 시골은 아작났습니다. 이제 거의 모두 서울(도시)에서 살고, 서울에서도 잿집(아파트)에서 삽니다. 큰고장에서 골목집 살림을 잇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손바닥만 한 텃밭이나 마당을 누리면서 풀꽃나무를 흙에 묻고 돌보는 손길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어느 풀꽃나무도 꽃그릇을 안 반깁니다. 꽃그릇은 나쁘지 않되, 풀꽃나무한테는 사슬터(감옥)입니다. 그릇 크기를 넘게 자라거나 뻗을 수 없으니, 풀꽃나무로서는 그릇에 심기면 ‘갇혀’ 버리는 꼴입니다.


  우리는 언제쯤 모든 꽃그릇을 걷어치우고서 맨땅에 풀씨랑 꽃씨랑 나무씨를 심을 터전으로 가꾸려나요? 우리는 언제쯤 높다란 잿집을 걷어내고서 누구나 ‘마당·텃밭을 누릴 조촐한 집’을 보금자리로 삼으려나요? 우리는 언제쯤 어린이를 ‘배움터(학교)란 이름인 사슬터(감옥)’에서 풀어놓을 수 있을까요?


  스스로 ‘서울에 갇혀’서 ‘풀꽃나무를 꽃그릇에 가두’는 손길이기에, ‘어린이를 울타리(학교·학원)에 가두어’ 놓고도 ‘가르침(교육)’을 시킨다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맙니다. 둘레를 봐요. 시골에도 서울에도 빈터랑 풀밭이 사라졌습니다. 어린이가 뛰놀거나 쉬거나 깃들 데가 사라졌습니다. 서울에서는 쇳덩이(자동차)가 모든 곳을 차지하고, 시골에서는 죽음물(농약)하고 비닐이 몽땅 뒤덮습니다.


  갇힌 어린이가 할 수 있는 ‘짓’이라고는 고작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는 손전화 빼고 무엇이 있을까요? 뛰놀 수도 쉴 수도 없도록 갑갑한 ‘꽃그릇 수렁(보기좋은 감옥)’에 갇힌 어린이를 알아보지 못 하는 눈길이니, 예나 이제나 숱한 글(동시·동화)은 ‘동심천사주의’에서 못 헤어나옵니다. 이뿐 아니라 ‘사실적 표현’을 한다는 글조차 ‘학교·학원생활 울타리’에서 못 벗어납니다.


  2020년을 넘어선 뒤로는 ‘이웃빛(동물권)’을 담는 글이 하나둘 나오고 배움책(교과서)에도 실린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숲에서 안 살고, 시골을 떠났고, 서울 높다란 잿집에서 쇳덩이를 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웃빛 글(동물권 문학)’을 쓸 수 있을까요? 흙을 밟지도 만지지도 않으면서, 풀꽃나무가 흙에 뿌리를 내리면서 해바람비를 마시는 터전에서 함께 살아가지도 않으면서, 참말 어떻게 ‘이웃숨결을 헤아리는 글’을 쓸 수 있을까요? 모두 겉발린 허울이지 않나요?


  오늘날처럼 온통 잿더미에 먼지투성이로 매캐한 판에서는 ‘그냥그냥 녹색·초록·그린·친환경·자연·생태’를 들먹이는 글이 아닌, ‘수수하게 숲을 품고 스스로 푸르게 하루를 노래하는’ 글을 쓰고 읽고 나눌 노릇입니다. 이제는 글을 쓰려면 서울(도시)을 떠나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어른’이란 이름을 밝히고 싶다면 모든 허울을 떨치고서 쇳덩이(자동차)를 버리고 잿집(아파트)에서 나와야 합니다. 맨몸으로 해바람을 쐬고, 맨손으로 빗물을 받고, 맨발로 풀밭에 서서 우리를 둘러싼 이 별빛을 오롯이 누리고 살림을 짓는 사랑을 일굴 노릇입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마당·텃밭이 있는 조촐한 보금자리’를 어린이랑 오순도순 열 해이고 스무 해이고 서른 해이고 가꾼 뒤에 붓을 들어야지요. ‘농사·농업’이 아닌 ‘여름지이·열매짓기·흙살림·들살이’를 해야지요. 돈바라기에 갇히는 ‘농사·농업’이 아닌 ‘손수 살림을 짓는 숨결로 손수 들숲바다를 맞아들이는 작은길’을 갈 적에라야 붓을 쥐어 글을 쓸 만한 사람인 어른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이오덕 님이 한숨을 쉬면서 나무란 ‘훔침글(표절작가)’ 이야기라든지 ‘겉치레글(위선·허례허식·가식적 문장)’은 우리 스스로 ‘어른 아닌 늙은이’인 몸으로 돈·이름·힘에 얽매였기에 불거집니다. 철이 들면서 어질고 참하고 착하면서 고운 사람이기에 ‘어른’입니다. 나이만 먹고서 나이를 앞세워 그저 윽박지르며 높낮이(위계질서)를 가르기에 ‘늙은이’입니다. 이른바 ‘선생·원로·기성세대’는 모조리 늙은이입니다. 우리가 어린이 곁에 서려면 ‘선생·원로·기성세대’ 같은 고리타분한 허물을 싹 털어내고서 수수하게 ‘어른’ 하나를 돌아볼 줄 아는 눈빛일 노릇입니다.


  《시정신과 유희정신》을 그냥 읽으면 그냥 못 알아봅니다. 《시정신과 유희정신》을 읽고 싶다면, 먼저 서울·쇳덩이·잿집을 버려야 할 뿐 아니라, 종잇조각(졸업장·자격증)도 버려야 하고, 이름값(선생·원로·기성세대)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 책을 쥐고서 들숲바다 가운데 한 곳으로 가기를 바랍니다. 멧골에 올라도 즐겁습니다. 풀벌레하고 새가 노래하는 곳에서 책을 펼칠 일입니다. 바다가 물결치고 바람이 일렁이는 곳에서 빗물수다를 들으면서 책을 넘길 일입니다.


  집안일을 하던 손으로 읽을 《시정신과 유희정신》입니다. 비질에 걸레질을 하던 손으로, 천기저귀를 갈고 빨래하던 손으로, 아기를 안고 젖을 물리던 손으로, 아이한테 자장자장 노래를 들려주는 눈망울로, 밤마다 별빛을 보고 낮마다 햇빛을 보는 눈짓으로, 두 다리로 걷거나 자전거를 달리는 몸으로, 껍데기를 버리고서 이웃이랑 어깨동무하는 매무새로, 천천히 읽고 새기면서 스스로 노래얼이랑 놀이넋을 밝힐 책 한 자락입니다. 같이 노래해요. 함께 놀아요. 나란히 이야기를 펴고, 새롭게 오늘을 써 봐요.


ㅅㄴㄹ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국이나 영국 같은 부유한 나라 사람들보다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큰 집을 지어 살려고 하는가? (9쪽)


아동문학이 아동을 위한 문학이라면 그것은 당연히 아동의 건전한 성장과 그들의 미래가 밝고 빛나는 세계가 되기를 염원하는 작가의 철학을 기반으로 창조되어야 한다. 따라서 작가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사회적 현실을 양심으로 파악하고 아동의 생활을 정직한 눈으로 보고 거기서 진실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24쪽)


그런 ‘인간적’인 것을 찾아내는 노력, 그런 인간적인 것이 짓밟혀 시들어지는 것을 애통히 여기고 그것을 지키고 키워가는 작업, 이것이 교육이고 문학임을 확인하자. (66쪽)


아동이란 존재를 사회와 역사 속에 살아가고 있는 생명체, 주인공으로서 작가의 온 인생관과 문학관으로 이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작품에 좀더 절실하고 진지한 주제를 다루어야 할 것이다. (104쪽)


동심주의 동요가 가져온 해독은 아이들이 참된 시의 세계로 찾아가는 것을 완고하게 방해하고 있는 일뿐만 아니다. 그것은 또 아이들의 정신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113쪽)


우리가 창조하는 아동문학, 그것은 미국의 것도 일본의 것도 중국의 것도 그밖의 어떤 나라의 것도 될 수 없는 바로 우리 한국의 것이다. 한국이란 땅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주는 문학이요, 한국이란 특수한 풍토에서 피어난 문학이다. (136쪽)


아동문학의 간판을 내걸어 놓고는 아동을 멸시하고 아동과 상관없는 글을 쓰는 작가들도 문제지만, 얕은 손재주를 팔고 있는 상업주의의 유행도 문제고, 위선과 호언장담을 유일한 문단 처세의 수단으로 삼고 있는 사람도 있어, 이들은 항시 정직한 작가의 발언을 봉쇄하기에 광분하고 이 땅의 아동과 민족의 앞날을 염원하는 양심적 작가들을 해치려고 하고 있다. (163쪽)


그토록 아이들을 사회와 절연된 세계에서 아무 생각 없이 귀엽게만 바라보는 것으로 작품을 쓸 수 있는 시인이 있었던가. (178쪽)


아이들은 철저하게 생활인인 것이고, 생활 속에서만 시를 느끼고 시를 생활하고 있는 것이 아동이다. (224쪽)


결국 동시는 시인의 세계와 아동의 세계가 하나로 일치되는 자리에서 비로소 참되게 씌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226쪽)


신현득의 동시는 사물을 달콤하고 아름답게만 보이려고 하는 순응주의로 하여 그 뜻한 바 교화적 의도조차 달성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물 미화의 작기 방법은 근본적으로 그가 동심주의적 아동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때문이라고 본다. (252쪽)


글짓기 교육을 예술작품 창작교육으로 오해하고 있다. (334쪽)


우리 자신을 찾아 가지는 일이야말로 민족의 역사적 과제요 아동문학의 나아갈 길이다. (351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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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의 글쓰기 교육 선집 세트 - 전9권 이오덕의 글쓰기 교육
이오덕 지음 / 양철북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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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읽는 하루

― 길들임 맘들임 꽃들임


《삶과 믿음의 敎室》

 이오덕

 한길사

 1978.12.20.



  《삶과 믿음의 敎室》(이오덕, 한길사, 1978)은 우리나라가 일본 총칼나라(제국주의) 쇠사슬에서 풀려난 지 서른 몇 해 즈음 될 무렵, 이 나라 배움터가 어떤 민낯인가를 낱낱이 밝힌 꾸러미입니다. 이오덕 님은 1944년부터 길잡이 노릇을 했습니다. 배움터에서 한글 아닌 ‘국어(國語)’란 이름으로 일본글만 가르치고 읽어야 하던 때부터 길잡이 노릇을 했고, 이듬해에 일본이 물러나면서 바뀌는 물결을 지켜보다가, 한겨레가 두 동강이 난 채 서로 삿대질을 하며 피비린내로 싸우는 수렁을 가로질러야 했고, 어느덧 다시 총칼나라에 갇힌 캄캄한 굴레에서 누구보다 아이들이 죽어나가는 꼴을 코앞에서 보아야 했습니다.


  다른 길잡이는 몽둥이를 하나씩 장만해서 아이들을 다그치고 때리고 막말을 일삼았습니다. 이따금 맨손으로 다니는 다른 길잡이는 맨주먹과 발길질로 아이들을 두들겨패고 밟았습니다. 다른 길잡이는 아이들이 돈(사납금·육성회비·성금)을 안 내면 또 두들겨패면서 닦달을 해댔고, 시골이나 멧골에서는 숱한 길잡이가 ‘사택’에서 허구헌날 술을 퍼마시는 꼴도 쳐다보아야 했습니다. 이오덕 님은 몸이 여리기도 했으나 술 한 방울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말과 우리글을 쓰지만, 정작 언제부터 우리말과 우리글을 마음껏 쓸 수 있는지조차 제대로 안 가르치고 안 배우는 판입니다. 조선 무렵 세종 임금은 틀림없이 ‘훈민정음’이란 글씨를 여미었습니다. 우리글인 훈민정음입니다. 그러나 훈민정음은 “우리말을 담는 글”이 아닌 “우리가 내는 소리를 담는 글”로 흘러왔습니다. 세종 임금 스스로도 중국 한문으로 글을 썼고, 조선 오백 해 내내 임금과 벼슬아치와 글바치 누구나 중국 한문으로 글을 썼습니다. “우리말을 담는 글”이 아닌, “중국 한문을 읊는 소리를 담는 글”로 오백 해를 보낸 굴레였어요.


  일본이 총칼로 억누르던 때에는 숱한 사람들이 중국바라기에서 일본바라기로 돌아서면서 ‘우리말 우리글’이 아닌 ‘國語(일본말 일본글)’에 갇힌 나라였습니다. 중국도 일본도 물러간 1945년 뒤에는 되레 중국 한문과 일본 한자말이 뒤범벅이었지요. 여기에 영어까지 섞여 ‘우리말 우리글’은 늘 꼬랑지로 밀렸으니, ‘우리 숨결과 생각과 마음’을 ‘우리말 우리글’로 담아내려는 사람은 너무 드물었습니다. ‘무늬만 한글이되 우리 넋도 숨도 얼도 없는 껍데기 글’인 채 참 오래도록 스스로 굴레에 옭매였습니다.


  조선 무렵에 ‘백성·백정·천민·종(노비)’이란 이름이던 사람들은 글이 없이 살았습니다. ‘백성·백정·천민·종(노비)’이란 이름이던 숱한 사람들은 붓도 종이도 먹도 벼루도 구경할 겨를이 없을 뿐 아니라 만질 수 없고 책은 어림조차 못 했어요. ‘백성·백정·천민·종(노비)’이란 이름인 들꽃같은 사람들이 붓먹벼루종이를 구경하거나 만질라 치면 그만 나리(양반)한테 붙들려서 볼기(곤장)를 얻어맞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틀림없이 세종 임금은 ‘우리글 훈민정음’을 엮었으나 “백성·백정·천민·종(노비)하고는 그저 동떨어진 머나먼 길”이었습니다.


  ‘무늬만 우리글’이 아닌 “참으로 누구나 스스럼없이 생각을 말하면서 담아낼 수 있는 글”이 되기까지는 한참 걸렸습니다. 주시경 님은 1913년 무렵에 ‘한글’이란 이름을 퍼뜨려 주었는데, 이분이 1905년에 《국문문법》을 써내기 앞서까지는 “우리나라에 우리말을 담는 우리글은 싹트지 않았다”고 해야 올바릅니다. 작은이 주시경 님이 새롭게 눈뜨고서 바지런히 ‘우리말 가르치기’를 펴면서 ‘우리말이 어떤 얼개인가를 갈무리해서 말틀(문법)을 처음으로 세우기’를 할 즈음에야 비로소 ‘우리말 우리글’이 싹텄습니다. 이때까지 우리한테는 “우리말은 ‘백성·백정·천민·종(노비)’ 사이에 늘 있기는 했되, 언제나 중국 한문에 짓밟혔을 뿐이고, 우리글이란 까맣게 없던” 굴레였습니다.


  《삶과 믿음의 敎室》을 읽으면, 이 나라 배움터 이야기 못지않게 ‘우리말 우리글이 짓밟히고 허덕이면서 몸살을 앓는’ 이야기가 그득합니다. 이오덕 님은 왜 ‘교육’을 짚는 글에 ‘우리말 우리글’ 이야기를 자주 폈을까요? 모든 가르침과 배움은 바로 ‘말’로 하거든요. 참다이 가르치고 배우는 길은 ‘참다운 말글’로 펴게 마련입니다. 늘 쓰는 말부터 참답지 않다면, 아무리 훌륭한 책을 손에 쥐더라도 슬기로이 못 가르치고 아름답게 못 들려주며 착하게 못 밝힙니다. 우리말을 우리글에 담을 적에 드디어 홀로서기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짓고 가꾸는 삶이기에 참말·참넋·참길을 이룹니다. 남(권력자·지식인)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기에 거짓말·껍데기·겉치레를 뒤집어쓰거나 내세웁니다. 겉으로 말쑥하게 차려입어야 어른스럽지 않습니다. 삶을 스스로 짓는 마음을 말에 담고, 이 삶말을 글로 고스란히 옮기면서 오늘 하루를 사랑하면서 꿈을 그릴 줄 알기에 어른스럽습니다.


  나이만 먹으면 늙은이일 뿐입니다. 철이 들어야 어른입니다. 나이만 먹은 늙은이였던 숱한 꼰대는 ‘선생(先生 : 먼저 태어난 사람)’이란 이름을 허울로 내세웠습니다. ‘먼저 태어났다’는 몽둥이를 마구 휘두른 그들이지요. 아이들을 짓누르면서 길들인 늙은이가 온나라를 뒤덮던 우리 민낯이에요.


  나이를 먹기보다는 철이 들기를 바라는 마음이기에 비로소 ‘길잡이’일 수 있고 ‘스승’으로 섭니다. 길을 잡아서 먼저 나아가는 참하고 착한 사람이 ‘이슬받이’입니다. 스스로 삶을 가꾸고 살림을 지으며 사랑을 나눌 줄 아는 아름다운 사람이 ‘스승’입니다. 가르치기에 스승이 아니에요. 스스로 삶·살림·사랑을 짓는 하루를 스스럼없이 보여주면서 손을 맞잡거나 어깨동무를 하기에 스승입니다.


  길잡이나 스승은 위에 올라서지 않습니다. 길잡이나 스승은 나란히 섭니다. 가시밭길이나 자갈길을 나란히 걷는 길잡이요 스승입니다. 앞으로 꽃길이 되도록 함께 가꾸려는 길잡이입니다. 머잖아 숲길을 이루도록 함께 땀흘리고 웃음짓고 노래하는 스승입니다.


  일본 우두머리만 총칼나라를 앞세우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우두머리도 총칼나라를 앞세웠습니다. 예나 이제나 임금도 나라지기도 벼슬아치도 글바치도 총칼(전쟁무기)을 너무 좋아합니다. 총칼을 물리치고서 오직 사랑으로 붓을 잡고 호미를 쥐려는 마음하고는 아주 등진 그들이자 우리들입니다. 모든 총칼은 사람들을 길들이려 합니다. 모든 풀꽃나무는 스스로 곱게 물듭니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마음을 들여야 사람다우면서 사랑다우면서 삶이자 살림다울까 하고 생각해야지 싶습니다.


  껍데기를 스스로 벗고서 아이하고 손잡을 수 있습니까? 허울을 기꺼이 벗고서 아이 곁에서 노래하고 춤출 수 있습니까? 겉치레를 말끔히 물리치고서 아이랑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우는 살림지기로서 오늘을 그리고 가꿀 수 있습니까?


  아이한테서 배우기에 눈이 밝은 어른입니다. 어른한테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넌지시 가르치기에 마음이 맑은 아이입니다. 참다운 사이라면 높낮이가 없습니다. 참답지 않은 사이라서 높낮이를 세우고 틀(질서·권위)에 가두려 합니다. 아이들은 틀에 가두면 죽습니다. 풀꽃나무도 틀에 가두면 죽어요. 물을 틀에 가두면 썩어버리고, 바람을 틀에 가두면 빛을 잃습니다.


ㅅㄴㄹ


20여 년 전 나는 ㄱ도 어느 중학교에 근무한 일이 있다. 그때 ㅂ교장 선생은 손수 ‘교양봉’이라고 쓴 1미터 길이의 몽둥이 하나를 직원실 한쪽 벽에 걸어 두었었다. 교육을 하려면 어느 정도 두들겨패야 한다는 것이 ㅂ교장 선생의 신념이었다. (33쪽)


나무심기만 하더라도 그것을 돈을 얻는 수단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무를 자연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생명의 모습으로 대하고 애정으로 심고 가꾸도록 해야만 비로소 교육이 되는 것이고 산림녹화도 참되게 이뤄질 것이다. (51쪽)


우리나라의 교사들은 어떤가? 유감스럽게도 내 동직자들은 기계로 전락해 있다. 단추를 누르면 돌아가고, 그만두라면 멈춰서는 비참한 기계다. 환경정리고, 청소고, 문서 처리고, 점수따기 시험준비 교육이고 시킴을 받아 마지못해 한다. 그래서 지시와 명령이 없으면 정작 해야 할 교육은 할 줄 모른다. (60쪽)


오늘날의 학교는 육체노동을 천하게 여기는 교육을 하고 있다. 인격으로 감화시키는 정신교육이 없고 일하는 즐거움을 맛보게 하는 노작교육을 등한히 하고, 그저 점수따기 경쟁을 시키고, 겉모양을 갖추는 것에만 신경을 쓴다. (101쪽)


교육자로서 교육 문제를 생각하는데 졸업장이니 자격증이니 학위니 하는 것만을 따진다는 것은 교육을 그르치는 결과밖에 가져올 것이 없다고 본다. (109쪽)


어린이들에게 바라고 싶은 것은 공부를 해서 장차 어른이 되면 돈벌이를 많이 해서 부자가 되거나 높은 벼슬자리에 앉는 것을 성공으로 생각하지 말아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125쪽)


일선의 교사들은 문인들이 쓴 이런 문학작품의 창작 이론이나 입문서 따위를 보고 그것을 그대로 아이들 교육에다 적용해서 지도하려 하였으니, 이것이 우리 글짓기 교육을 크게 잘못되게 이끌어 온 요인이 되었다. 그것은 산문 쓰기에서 생활을 떠난 거짓스런 얘기를 만들어내는 재주를 익히게 하여 어린이다운 순진성을 버리게 하고, 시가 될 수 없는 짝짜꿍 동요짓기로 저보다 나이 어린 아기들 흉내를 내게 하여 아이들의 정신을 퇴화시켰던 것이다. (159쪽)


문학교육(문학작품 감상 교육)은 생활을 정직하게 쓰는 글짓기·시짓기 교육과 병행해야 한다. 이것이 아이들로 하여금 장차 문학작가가 될 수 있는 소질을 닦고 인간적 기반을 쌓게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어릴 때부터 무슨 문학작품을 쓴다고 해서 어른들 흉내나 내는 사람은 결코 작가가 될 수 없고 참 시인이 되지도 못할 것이며, 건강한 마음을 가진 인간이 되기도 어렵다. (188쪽)


사투리나 순수한 우리말 땅이름도 귀한 문화재라고 하는 말들을 최근에는 더욱 듣게 되어 반갑다. 그러나 우리말이 이조 5백 년과 일제 36년에 이어 여전히 수난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은 우리말 교육이 보급되어 있는 오늘날이기에 더욱 한심스럽게 생각된다. (228쪽)


물론 이것은 전체의 아름다움을 보인다는 뜻이 강조될 것이다. 그러나 개인보다 전체가 우선되고, 그것을 고심해서 연출하는 아이들보다 구경하는 관중이 본위가 되고, 내면보다 겉모습이 중시되고, 인간적인 아름다움보다 기계적인 통제의 아름다움이 찬양된다고 할 때, 그런 사회는 창조의 샘물이 말라 버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230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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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더하기 - 아이들 글쓰기+ 이오덕의 글쓰기 교육 5
이오덕 지음 / 양철북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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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읽는 하루

― 놀고 일하면서 스스로



《글쓰기 더하기》

 이오덕

 양철북

 2017.9.25.



  《글쓰기 더하기》(이오덕, 양철북, 2017)는 예전에 나온 《와아, 쓸 거리도 많네》(1993)하고 《이렇게 써 보세요》(1993)를 하나로 묶었습니다. ‘지식산업사’에서는 “이오덕 글쓰기 교실”이란 이름을 걸고서 다섯 자락으로 책을 펴내었는데, 그동안 글삯을 제대로 안 치렀을 뿐 아니라, 얼마나 찍고 팔았는지 이오덕 어른한테 알리지도 않았어요. 참다 못한 이오덕 어른은 지식산업서한테 책을 그만 내라고 숱하게 알렸으나 지식산업사는 대꾸를 않고 자꾸자꾸 내놓기만 했습니다.


  이오덕 어른은 어린이 누구나 스스로 살피고 생각하고 가다듬어 글빛을 밝히도록 이끄는 꾸러미를 여미었습니다. 곁에서 어른들이 지켜보아도 나쁘지 않되, 어린이 누구나 아무런 눈치를 안 보면서 마음을 밝힐 수 있기를 바랐어요. 맞춤길이나 띄어쓰기를 따박따박 챙기기 앞서, 글에 담을 마음을 눈여겨보려 했고, 글로 새롭게 태어나는 삶을 어린이가 스스로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랐어요.


  남한테 읽히려고 쓰는 글이지 않습니다. 남이 잘 읽어 주어야 할 글이지 않습니다. 내가 쓰고 내가 되읽으면서 마음을 다독일 글입니다. 나 스스로 오늘을 아로새기는 동안 생각도 숨결도 차분히 추스를 수 있는 글이에요.


  병아리는 이따금 ‘삐약삐약·삐악삐악’ 울는지 모르나 늘 이렇게 울지 않습니다. 개구리는 가끔 ‘개굴개굴’ 울 수 있으나 늘 이렇게 울지 않아요. 아직 찬바람이 부는 이른봄이나 늦겨울에 멧개구리가 먼저 깨어나는데, 멧개구리 울음소리는 다릅니다. 풀벌레도 저마다 울음소리가 다르고, 같은 메뚜기나 귀뚜라미가 여치나 풀무치여도 서로서로 다르게 울어요.


  어른들이 소릿글로 옮긴 대로 울음소리나 노랫소리를 옮겨적을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 귀로 들은 대로 적으면 됩니다. 우리 눈으로 본 대로 그리면 됩니다. 우리 다리로 걸어다닌 대로 쓰면 됩니다. 우리 손으로 돌보고 가꾸고 보듬은 대로 담으면 됩니다.


  모든 하루는 달라요. 다 다른 하루를 고스란히 쓰면 되기에 쓸거리는 날마다 새롭고 흘러넘칩니다. 모든 삶은 새롭습니다. 언제나 새롭게 맞이하는 삶을 쓰면 즐거우니 스스로 느끼고 배우고 생각하면서 누린 나날을 차근차근 여미면 돼요.


  따로 길잡이가 있어야 글을 쓰지 않습니다. 글을 쓰는 내가 나한테 길잡이입니다. 글쓰기를 하고픈 어린이는 어린이 스스로 길잡이요 읽님(독자)이면서 글동무입니다. 걱정을 하기에 걱정이 피어나고, 골을 부리기에 골부림이 자라납니다. 생각을 하기에 생각이 자라나고, 마음을 기울이기에 마음이 빛나요.


  《글쓰기 더하기》라는 이름이 붙어 다시 나온 꾸러미에는, 모든 글빛은 스스로 지으니 늘 스스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늘 스스로 노래하고 꿈꾸면서 붓을 쥐자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다른 곳을 기웃거리지 말아요. 가르쳐 줄 어른을 찾지 말아요. 배움터(학교·학원)에 나가야 하지 않습니다. 이 책 저 책 많이 읽어야 글살림을 북돋우지 않습니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기에 오늘 이곳을 헤아릴 수 있어요. 어제 하루를 되새기기에 어제에서 오늘로 이어 모레로 가는 길을 알아볼 수 있어요. 새날을 꿈으로 그리면서 마주하기에 가시밭길도 꽃길도 스스럼없이 누비면서 마음 가득 빛줄기가 퍼집니다.


  글을 더 많이 쓰기보다는, 하루를 온통 신나게 놀 수 있기를 바랍니다. 책을 더 많이 읽기보다는, 집안일을 거들고 밥도 차려 보고 걸레질이며 비질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른들이 태워 주는 부릉이(자동차)에서 내려 느긋이 햇볕을 쬐고 바람을 마시면서 마을길을 걸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흙을 만지면서 풀꽃을 토닥이지 않은 삶이라면 풀도 꽃도 나무도 사귀지 못 하고 만나지도 못 할 뿐 아니라, 풀꽃이며 나무 이야기를 못 씁니다. 책이나 그림으로 만나는 새나 풀벌레로는, 새나 풀벌레가 사람 곁에서 어떤 이웃인지 알 길도 없을 뿐 아니라, 숲빛 이야기를 마음으로 삭여서 쓸 수도 있습니다.


  빗방울을 손바닥에 얹어서 가만히 보는 동안 비내음을 글로 옮겨요. 눈송이를 혓바닥으로 받아서 슬며시 맛보는 사이에 눈꽃을 글로 얹어요. 마음을 더하는 글이고, 생각을 더하는 글이며, 사랑을 더하는 글입니다. 어른스럽게 쓰는 글이란, 멋있는 글이나 똑똑한 글이나 자랑하는 글일 수 없습니다. 어른스러이 일구는 글이란, 삶을 그리고 살림을 담고 사랑을 노래하는 글입니다.


  아이 곁에서 함께 붓을 쥐고 종이를 펴 봐요. 어른으로서 어른답게 모든 시끌벅적한 부스러기는 내려놓고서 맨발로 풀밭을 디디면서 맨손으로 나무줄기를 쓰다듬는 하루를 살아내고서 글 한 줄을 써 봐요. 맨몸으로 비를 맞으면서 ‘바다에서 피어나 구름이 되어 찾아온 물빛’을 느끼면서 함박웃음을 지을 수 있을까요? 비가 와서 길이 막히지 않습니다. 비가 와서 온누리 티끌을 맑게 씻어 줍니다. 바람이 불어서 춥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어서 온누리 먼지를 훅훅 털어 줍니다.


  어른으로서 어린이한테 알려주고 읽힐 글이란, 햇볕을 담고 빗물을 싣고 바람을 품은 글이어야지 싶습니다. 어른으로서 먼저 스스로 읽고서 어린이랑 나눌 글이란, 풀꽃나무를 곁에 두면서 들숲바다를 사랑하는 마음이 새록새록 싹트는 글이어야지 싶습니다.


ㅅㄴㄹ


개구리가 당하는 고통을 생각하는 사람다운 마음이 이 글을 쓰게 한 것이지요. 사람다운 마음은 이와 같이 세상의 참모습을 보게 하고, 훌륭한 행동을 하게 합니다. (29쪽)


이런 모든 소리를 기계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 듣고, 그렇게 들은 것을 그대로 글에 옮겨 적으면 그 글은 살아납니다. (35쪽)


별난 일, 놀라운 일이라야 좋은 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날마다 겪는 평범한 일이 가장 좋은 글감입니다. (61쪽)


도시 문명을 만들어 살던 사람들은 “자연을 정복한다”고 했습니다. ‘정복’이란 말은 나쁜 것들을 쳐서 굴복시킨다는 말입니다. 자연이 왜 나쁠까요? 사람은 자연이 없으면 잠시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자연을 먹고 마시고 숨쉬고 그 자연에 안겨서 살다가, 죽으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사람입니다. (125쪽)


우리는 누가 쓴 글을 읽더라도 그 글을 쓴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어떤 태도로 살아가는가를 판단해서 그 글의 가치를 매겨야 합니다. (233쪽)


요즘은 어린이들도 어른들 말을 하는 것 아닌가요? 텔레비전과 신문과 책으로 어른들이 하는 유식한 말(이게 바로 병든 말입니다)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 아닙니까? 말을, 산과 들에서 뛰어놀고 일하면서 익히는 것이 아니라 책과 텔레비전으로 배우는 것 아닙니까? (290쪽)


아기들도 잘 알 수 있는 말이 좋은 말이고 깨끗한 우리말입니다. 이 ‘미소’란 말은 일본사람들이 쓰는 중국글자말을 따라 잘못 쓰게 된 말입니다. 어른들이 뽐내어 쓰는 유식한 말에는 이와 같이 잘못 쓰는 말이 아주 많습니다. (296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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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미마을 느티나무 아래서
이오덕 지음 / 한길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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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읽는 하루

― 죽살이 고갯길에서



《무너미마을 느티나무 아래서》

 이오덕

 한길사

 2005.8.24.



  《무너미마을 느티나무 아래서》는 이오덕 어른이 죽살이 고갯길에 쓴 노래(시)를 갈무리한 두 가지 꾸러미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오덕 어른은 마지막으로 이 땅에서 하루하루 누리는 동안 우리말·우리글을 갈닦는 눈빛을 추스르려 하면서, 어린글꽃(어린이문학)이 슬기롭고 참하게 서는 밑틀을 들려주려 하면서, 그동안 다른 일을 먼저 하느라 뒷전으로 놓던 노래쓰기를 바지런히 했습니다.


  이오덕 어른은 이원수 님이 들려준 이야기를 듣고서 오래도록 글꽃쓰기(문학창작)를 멈추고 글꽃보기(문학비평)에 마음을 쏟았습니다. 이원수 님은 우리나라 어린글판(어린이문학판)에서 글을 바르게 보고서 말을 바르게 하는 사람이 너무 적은 탓에 글꽃을 여밀 사람들이 눈빛이 흐리고 글빛마저 흐리다고 안타깝게 여겼어요. 이원수 님이 지켜보기로 이오덕 어른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곧바르게 글을 보고 말을 옮길 줄 안다고 생각했다지요. 1977년에 나온 《시정신과 유희정신》을 비롯하여 2002년 《어린이책 이야기》까지 쉬잖고 글꽃보기를 남겨 놓았습니다.


  곰곰이 보면, 이오덕 어른은 멧골에 깃들어 어린이 곁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던 무렵에 노래쓰기하고 글꽃쓰기에 힘을 쏟았습니다. 큰고장으로 나와서 말글을 살리고 어린글꽃을 북돋우는 길을 걸을 적에는 멧골도 멧꽃도 멧새도 멧숲도 곁에 둘 겨를이 없었어요. 더는 큰고장에서 지낼 기운이 없다고 여겨 멧골을 품은 시골로 옮기고서야 다시금 글꽃쓰기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를 보면, 멧골이나 시골에서 살며 글꽃(문학)을 여미는 분이 매우 적습니다. 들숲바다는커녕 흙빛이나 풀내음조차 모르는 채 글쓰기만 한다고 볼 만합니다. 여름짓기가 아닌 ‘농업·농사’는 온통 ‘비닐·농기계·풀죽임물(농약)·죽음거름(화학비료)’으로 물들었어요. 흙과 풀과 해바람비를 등진 채 ‘농업 ·농사’만 하는 길이라면 시골에서 살더라도 노래를 잊거나 등지게 마련입니다.


  비닐을 치는 일꾼은 노래를 안 부릅니다. 풀죽음물을 뿌리는 데에서는 입조차 벙긋할 수 없습니다. 죽음거름은 냄새가 고약하니 더더욱 입을 다뭅니다. 농기계가 시끄러운 데에서는 아무도 북이나 장구나 꽹과리를 치지 않습니다.


  또한 부릉거리는 쇳덩이(자동차)를 모는 이들도 노래하지 않아요. 쇳덩이가 가득한 시커먼 길을 내달리는 이들은 다른 쇳덩이를 쳐다보느라 마음을 기울여야 하니 노래를 생각할 겨를이 없어요. 스스로 노래하지 않고, 들노래도 숲노래도 바닷노래도 온통 잊어버리고 등지는 오늘날입니다. 이제는 들숲바다에 해바람비에 풀꽃나무를 모조리 잊고서 글만 쏟아내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판입니다.


  생각해 봐요. 들숲바다에 해바람비에 풀꽃나무를 잊은 이들은 아이들도 잊게 마련입니다. 아이들이 느긋이 놀다가 낮잠도 들고 나무타기를 하면서 하루를 소꿉잔치로 누빌 짬을 빼앗은 이들이 어떤 글을 쓰는가요?


  《무너미마을 느티나무 아래서》는 《고든박골 가는 길》하고 나란히 나오기로 했으나, 《고든박골 가는 길》이 2005년 4월 15일에 나오고, 《무너미마을 느티나무 아래서》가 2005년 8월 24일에 나옵니다. 처음에는 실천문학사 한 곳에서만 이오덕 어른 노래를 ‘유고 시집’으로 내려 했는데, 한길사 쪽에서 굳이 나눠서 같이 내자고 떼를 쓴 탓에 두 곳에서 따로 나왔는데, 한길사는 나눠서 ‘같은 날’에 내자는 다짐조차 어겼습니다.


  한길사는 2003년 11월 5일에 《살구꽃 봉오리를 보면 눈물이 납니다》를 함부로 냈습니다. 이오덕 어른이 한길사 김언호 씨한테 ‘이오덕·권정생이 주고받은 글월’을 보여주기는 했으나 책으로 내라고는 안 했는데, 몰래 챙겨서 때를 기다렸다지요.


  막짓을 일삼은 한길사였는데, 작가회의에 이름을 건 여러 글꾼이 한길사 쪽에서 부린 떼를 받아들여서 이오덕 노래책을 2005년에 두 곳에서 나란히 냈고, 이제는 판이 끊어졌습니다.


  책은 왜 쓰고 왜 읽어야 할까요? 노래는 누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부르는가요? 왜 이오덕 어른 책을 굳이 펴내어 그들 이름값을 높이는 길에 써먹으려고 잔꾀를 부려야 할까요?


  이오덕 어른이 피맺힌 목소리로 한 줄 두 줄 적은 〈죽어야 한다〉를 되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죽음은 안 나쁩니다. 죽음은 늘 삶하고 맞물립니다. 우리말은 ‘죽살이’라 합니다. 죽음을 앞에 놓고 삶을 뒤세웁니다. 떠나기에 찾아들고, 내려놓기에 일어섭니다. 잠들기에 깨어나고, 스러지기에 거듭납니다.


  모든 허울을 걷어치워야 아이들이 살아날 새터를 열 수 있습니다. 모든 껍데기를 쓸어내야 아이들이 꿈꾸고 노래할 숲누리를 이룰 수 있습니다. 모든 겉치레를 벗어던져야 아이들이 마음껏 생각날개를 펴면서 온누리에 아름다이 웃음노래가 퍼질 수 있습니다.


  밤이 깊을수록 낮이 따뜻합니다. 밤새 고요히 몸을 쉬면서 꿈을 그려야 한낮에 환하게 하루를 일구면서 즐거이 땀흘립니다. 밤은 밤빛이고 낮은 낮빛이에요. 밤은 밝은꿈으로 나아가는 밝은씨앗입니다.


  죽음터이자 잿터인 서울을 스스로 웃으면서 떠날 줄 아는 마음이라면 어른스럽습니다. 멧새가 노래하는 곁으로 보금자리를 옮기면서 웃는 숨결이라면 어른답습니다. 차디찬 서울에서 쇳덩이를 몰아내고서 나무 한 그루랑 풀꽃씨 한 톨을 심으면서 푸르게 바꿀 하루를 그리는 손길이라면 어른입니다.


ㅅㄴㄹ


아침마다 감나무 밑에 간다 / 감나무 밑에 깔려 있는 단풍잎은 / 이 세상에서 가장 고운 감나무 단풍잎은 / 하느님이 땅 위에 수놓은 고운 보자기 (감나무 단풍잎/15쪽 1999.10.)


설날은 떡국 먹고 술 마시는 날인가? / 윷놀이 화투놀이로 즐기는 날인가? 세배하고 인사하고 나이 한 살 더 먹었다고 / 좋아하는 날인가? / 아니다 / 그런 날이 되어서는 안 된다 // 설날은 지난해 지난 날 돌아보고 / 앞날 생각하고 앞길 바라보고 / 올해는 부디 잘 할 수 있기를 비는 날인가? (설날에 거는 전화―아이들에게/74쪽 1998.1.28.)


벼랑 끝까지 와서도 / 사람들은 미친 춤을 추고 있구나 / 춤을 추면서 외치는 소리가 하늘과 땅에 차고 / 넘쳐서 어지럽구나 멀미가 나는구나 / 더 빨리 달리는 차들! / 더 넓고 쭉 곧은 길을! / 더 높은 빌딩을! / 더 많은 구경거리를! / 더 맛좋은 먹을거리를! 더 달콤하고 / 향기 넘치는 마실거리를! / 그리고 아이들을 하루바삐 어른으로 / 만드는 교육을! (예언/88쪽 1998.11.5.)


농업이 죽어야 한다 / 축산도 죽어야 한다 / 담배도 인삼도 다 죽어야 한다 // 공장도 망하고 / 기업도 쓰러지고 / 학교도 문을 닫야 한다. // 방송과 신문―그 언론이란 것 / 싹 없어져야 돼. / 문학과 철학, 과학, / 또 무슨 무슨 온갖 학문도 / 종교와 예술 따위도 어디 부딪혀 박살이 나 버려라 / 벼락을 맞아라 … 소설, 시, 동화고, 에세이고 뭐고 / 무슨 주의 무슨 운동 / 다 망해라 망해. / 모조리 예자리 다 뻗어 버려라 // 그래야 사람이 살아나지 / 그래야 땅이 살고 하늘이 살고 / 아이들이 살아나지. (죽어야 한다/168∼169쪽 2001.1.6.아침)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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