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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장 쓰기 오늘의 사상신서 155
이오덕 지음 / 한길사 / 1992년 3월
평점 :
품절




이오덕을 읽는다



삶을 지을 때에 글을 쓴다

― 우리 문장 쓰기

 이오덕 글

 한길사 펴냄, 1992.3.30.



※ 책풀이 ※

1992년에 처음 나온 《우리 문장 쓰기》는 《우리 글 바로쓰기》를 1권과 2권을 펴낸 다음에 선보인 책이다. 《우리 문장 쓰기》에서는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글에 담는 길을 밝힌다. 여러 갈래로 나눌 수 있는 글이란 무엇인지 밝히고, 갈래에 따라 글을 어떻게 쓸 때에 제대로 ‘한국사람이 쓴 글’이 될 만한지 알려준다. 제아무리 손재주로 꾸민다고 해 보았자 글이 될 수 없고, 손수 짓는 삶에 따라 즐거움과 기쁨을 담으려고 할 때에 참다우면서 아름다운 글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이 책 한 권으로 들려준다.



..



  내가 하는 말은 모두 내 마음입니다. 내가 하는 말마다 그때그때 어떤 마음인지 환하게 드러납니다. 마음을 즐겁게 가누는 사람은 언제나 즐겁게 말을 하고, 마음을 맑게 가다듬는 사람은 언제나 맑게 말을 합니다.


  거칠게 말을 한다면, 마음이 거칠다는 뜻입니다. 짜증을 섞어서 말을 한다면, 마음이 짜증으로 가득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거친 말이든 짜증 섞인 말이든 나쁘지 않습니다. 좋지도 않으나 나쁘지도 않습니다. 그저, 그때그때 내 마음이 말로 드러날 뿐입니다. 그러니 나는 내 말을 찬찬히 살피면서 그때그때 어떤 마음인지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읽을 수 있을 적에 비로소 말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말은 언제나 마음을 나타내기 마련이니, 말을 하거나 글을 쓰면서 내 마음을 홀가분하게 나타낼 수 있습니다. 기쁨을 나타내고 슬픔을 나타내지요. 놀라움을 나타내고 아쉬움을 나타내지요. 서러움을 나타내다가는 쓸쓸함을 나타내고, 반가움을 나타내다가는 사랑을 나타내요.


  어떤 마음이든 나타낼 수 있는 말입니다. 어떤 마음이든 나타내는 말이기에 내 삶은 날마다 새롭게 빛납니다. 말 한 마디를 하면서 마음을 살피고, 말 두 마디를 하면서 마음을 북돋우며, 말 세 마디를 하면서 마음을 가꿉니다.



..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글을 함부로 쓰지 말고(꼭 할 말만 쓰고), 깨끗한 말로 쓰는 일이다 … 농민도 어민도 노동자도 상인도 공무원도 교원도, 누구나 써야 한다. 마치 말을 누구나 하듯이, 모든 사람이 쓰고 싶은 글을 마음대로 쓸 수 있어야 말이 살아나고 글이 살아난다. 사람이 살아나고 문학이 살아난다 … 대관절 ‘문학 문장’, 곧 문학이 될 수 있는 글이 따로 있을 수 있는가 … 글은 말보다 어렵게 써도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쉽게, 더 친절하게 써야 한다 … 될 수 있는 대로 중국글자말을 쓰지 말고 우리 말로 써야 한다 … 중국글자를 섞어서 쓴 글은 반민주의 글이다. 그리고 쉬운 우리 말이 있는데 그런 말을 안 쓰고 어려운 말, 보통 사람들이 잘 안 쓰는 말, 유식한 중국글자말이나 일본글에서 나온 말, 쓰지 않아도 되는 서양말을 쓴 글은 모두 반민주의 글일 수밖에 없다 ..  (14, 16, 18, 32, 198쪽)



  더 좋다 싶은 말을 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잘못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지 않아도 됩니다. 글을 쓰다가 띄어쓰기나 맞춤법이 틀릴 수 있습니다. 말을 하다가 혀가 꼬일 수 있으며, 때로는 헛말이 튀어나올 수 있습니다. 다 괜찮습니다. 아, 내가 이런 말을 이런 마음으로 했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이러한 생각을 슬기롭게 갈고닦으면 됩니다.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새파랗게 눈부신 하늘이기에 새파랗구나 하고 느낍니다. 매캐한 하늘이기에 매캐하구나 하고 느낍니다. 구름을 볼 수 있고, 해를 볼 수 있으며, 하늘을 가르는 새를 볼 수 있어요. 무엇이든 내가 스스로 보는 대로 느끼고, 이 느낌을 고스란히 말과 글에 담습니다.


  냇물을 바라보면서 냇물 빛깔과 냄새를 헤아립니다. 냇물에서 사는 물고기를 느끼고, 냇물에 있는 돌멩이와 모래를 느낍니다. 냇물이 흐를 적에 반짝이는 물결을 느끼고, 냇가에 찾아와 물을 쪼는 멧새가 몸을 터는 몸짓을 느낍니다.


  요모조모 짜맞추지 않아도 됩니다. 다른 사람 눈치를 보면서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런 틀이나 저런 짜임새를 살펴서 글을 써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마음을 나타내도록 말을 하거나 글을 쓰면 됩니다. 우리는 늘 우리 마음을 꾸밈없이 아끼고 사랑하면서 말과 글을 사랑하면 됩니다.


  그러니, 문예창작을 배워야 문학을 하지 않아요. 시론을 배우거나 이론을 익혀야 시나 소설을 쓰지 않아요. 대학교를 다닌 사람이 문학을 하지 않습니다. 문학을 바라는 사람이 문학을 합니다. 문학을 꿈꾸는 사람이 문학을 해요. 노래를 꿈꾸는 사람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꿈꾸는 사람이 춤을 춥니다. 흙을 꿈꾸는 사람이 흙을 짓고, 삶을 꿈꾸는 사람이 삶을 짓습니다.



.. 사물을 보는 그대로 나타내도록 해야지, 요란한 글 때문에 사물이 흐리게 보이도록 해서는 안 된다 … 좋은 글은 일하면서 살아가는 백성들에게도 쉽게 읽히는 작품, 그래서 감동을 주는 작품이다 … 글의 마지막 심판자는 백성들이다. 책과 학문과 추상논리와 관념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사물과 사실 속에서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닌 가장 소박한 느낌과 생각이 글의 가치를 매기게 되어야 한다 … 살아 있는 말이란 어떤 말인가? 사물과 사실을 바로 보여주고 바로 느끼게 하는 말, 바로 가슴에 와닿는 말, 진실이 차 있는 말이다 … 말이 없으면 글도 없다. 글은 없어도 견딜 수 있지만, 말이 없으면 사람이 살아갈 수 없다 … 말은 생각(의식)에서 나왔다. 생각은 삶에서 나왔고, 삶은 바로 살아 있는 목숨이다 ..  (24, 25, 40쪽)



  나무 한 그루를 심습니다. 씨앗을 심을 수 있고, 어린나무를 얻어서 심을 수 있습니다. 크게 자란 나무에서 가지 하나를 꺾어서 심을 수 있습니다. 벼락을 맞고 쓰러진 나무를 안쓰러이 여겨 작은 가지 하나를 잘라서 심을 수 있어요. 어떻게 심든 모두 나무입니다. 어떻게 심든 모두 아름답게 자라는 나무입니다.


  나무는 백 해를 살고 오백 해를 살며 즈믄 해를 사는 동안 우람하게 큽니다. 나무 한 그루는 열 그루로 퍼지고, 열 그루는 백 그루로 퍼집니다. 모든 숲은 나무 한 그루에서 비롯합니다. 지구별 푸른 숨결은 씨앗 한 톨에서 비롯합니다.


  사람들이 서로 아끼고 보듬는 사랑은 바로 말 한 마디에서 태어납니다. 내가 나를 아끼고, 내가 너를 아끼며, 내가 우리를 아끼는 따사로운 마음에서 말이 태어납니다. 이 따사로운 마음과 말은 따사로운 숨결이 되고, 어느새 따사로운 노래로 퍼집니다.


  아이와 나누는 자장노래가 아이한테 놀이노래로 거듭납니다. 놀이노래는 놀면서 부르는 노래이면서 언제 어디에서나 기쁜 내 마음을 드러내는 노래로 달라집니다. 자장노래는 놀이노래이면서 기쁨노래이고 삶노래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셔요. 내 말 한 마디가 노래로 거듭나서 퍼진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내가 하는 말 한 마디가 이웃과 동무한테 맑은 웃음과 노래로 스며들 수 있으면 얼마나 사랑스러울까요. 말 한 마디로 사랑을 짓고, 글 한 줄로 꿈을 지으면, 우리 삶은 얼마나 맑고 밝을까요.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까닭을 생각합니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니까 말을 하고 글을 써요. 서로 돌보고 보살피니까 말을 하고 글을 써요. 내 사랑이 내 말로 나타나고, 네 사랑이 네 말로 드러나요. 우리는 함께 어깨동무를 하면서 말을 나누고, 우리는 언제나 활짝 웃고 노래하면서 말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 글이 지배하는 사회는 그 글을 독차지하는 관리들과 지식인들과 돈 가진 이들이 움직이는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는 글을 모르면 사회에 나가 활동할 수가 없고, 여행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사람 노릇을 제대로 못한다 … 가정에서 살아 있는 말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면 더 철저한 글말을 배우게 된다. 교과서만 읽고 쓰고 외우게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아이들은 살아 있는 말을 배울 기회가 거의 없다 … 우리가 남의 나라 글을 따라서 쓰고, 그렇게 쓰는 글을 따라서 말을 하게 된다면, 그 말이 다시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고 우리의 삶을 움직인다 … 글이 이렇게 오염이 되고, 말이 글 따라 병들었는데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데, 우리들 생각이 병들고 삶이 변질된 것을 어찌 깨닫겠는가 ..  (41, 42, 44, 45쪽)



  이오덕 님이 쓴 《우리 문장 쓰기》(한길사,1992)를 읽습니다. 이오덕 님은 두툼한 책 한 권을 써서 우리들한테 ‘우리 마음을 담아서 나누는 글이란 무엇인가’ 하는 실마리를 밝히려 합니다. 글을 쓰는 즐거움과 보람이 얼마나 큰 사랑인가를 넌지시 보여주려 합니다. 글을 써서 나누는 기쁨과 뜻이 얼마나 예쁜 노래인가를 찬찬히 알려주려 합니다.


  《우리 문장 쓰기》는 ‘이렇게 써야 바로 쓴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문장 쓰기》는 ‘이렇게 써야 말과 글이 산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문장 쓰기》는 ‘우리 마음 쓰기’를 이야기하고, ‘우리 생각 밝히기’를 이야기하며, ‘우리 사랑 나누기’를 이야기합니다.


  《우리 문장 쓰기》는 ‘이렇게 해야 글을 잘 쓴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문장 쓰기》는 ‘이렇게 해야 삶을 잘 가꾼다’는 이야기입니다. 내 말과 글을 가꾸면서 내 넋을 가꾸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내 말과 글을 가꾸면서 내 넋을 가꿀 때에 내 삶을 어떻게 가꿀 수 있는지 찬찬히 밝힙니다.


  마음이 있으니 글을 쓰지요. 생각이 있으니 글을 쓰고 싶지요. 사랑이 있으니 글을 써서 책을 엮은 뒤 널리 나누다가 아이들한테 물려주고 싶지요. 말은 언제나 넋이 되고, 넋은 고스란히 삶이 됩니다. 말을 가꾸는 일이란 넋을 가꾸는 일이요, 넋을 가꾸는 일은 삶을 가꾸는 일입니다. 거꾸로, 삶을 가꾸는 일은 넋을 가꾸는 일이면서, 넋을 가꾸는 일은 말을 가꾸는 일이 됩니다.



.. 말을 살리는 글을 어떻게 하면 쓸 수 있는가? 한자말·일본말·서양말 같은, 밖에서 들어온 말을 안 쓰고, 쉬운 말과 순수한 우리 말을 찾아 쓰면 된다. 글을 모르는 사람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쓰면 된다 … 우리가 하는 말은 농사일에 쓰이는 말이 많고, 사람과 자연의 모습과 움직임을 나타내는 말이 중심으로 되어 있다 … 말이 이렇게 풍성하니 그 말을 적어 보이는 글자가 또 거기에 걸맞게 창조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배달글은 세종대왕이 지었다기보다 풍성한 말을 가진 우리 온 겨레가 지어냈다고 하는 것이 더 맞는 말일 것 같다 … 이야기하기에 알맞는 말, 노래하기에 알맞는 말이기에 영어같이 ‘과거완료’나 ‘과거진행완료’ 따위의 때매김이 소용없는 것은 당연하다 ..  (51, 52, 53쪽)



  토박이말을 살려야 하니까 토박이말을 쓰지 않습니다. 영어를 쓰지 말아야 하니까 영어를 쓰지 말아야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넋을 홀가분하게 살찌우거나 살려서 기쁘게 노래하고 싶기에 말을 깊이 생각하고 널리 헤아리면서 말을 합니다. 나는 내 얼을 아름답게 보듬거나 살가이 보살피고 싶기에 차근차근 생각을 짓고 삶을 일구어 글을 씁니다.


  밭을 가꾸면서 글을 씁니다. 아기를 돌보면서 글을 씁니다. 밥을 지으면서 글을 씁니다. 옷을 기우면서 글을 씁니다. 빨래를 하면서 글을 씁니다. 나무를 베거나 장작을 패면서 글을 씁니다. 길을 걸으면서 글을 씁니다. 자전거를 달리면서 글을 씁니다.


  풀벌레가 노래하는 소리를 귀여겨들어요. 그러고 나서 글을 써요. 나비와 새가 날갯짓하면서 하늘을 가르는 모습을 지켜봐요. 그러고 나서 글을 써요. 소나기가 내리고 무지개가 뜨는 마을에서 이웃과 오순도순 어우러져요. 그러고 나서 글을 써요.


  우리가 쓰는 글은 얼마나 고운가요. 우리가 주고받는 글은 얼마나 알찬가요. 우리가 빚어서 책으로 엮는 글은 얼마나 따스한가요. 우리가 읽는 글은 얼마나 값진가요. 글줄마다 이야기가 흐르고 노래가 감돕니다. 글월마다 꿈이 깃들고 사랑이 피어납니다.


  손수 씨앗을 심어 보셔요. 씨앗 한 톨이 어떻게 깨어나서 자라는지 바라보셔요. 깨어난 씨앗 한 톨이 흙을 어떻게 바꾸고, 둘레를 어떻게 바꾸는지 살펴보셔요. 씨앗 한 톨이 자라서 줄기가 오르고 잎이 오르는 동안, 둘레에 어떤 바람이 흐르는지 헤아리셔요. 씨앗 한 톨이 자라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적에 어떤 기운이 감도는지 느끼셔요. 말 한 마디는 씨앗입니다. 말씨가 생각을 짓습니다. 글 한 줄은 씨앗입니다. 글씨가 이야기를 짓습니다.



..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주고받는 말을 되찾을 수 있을까? 살아 있는 우리들의 말, 인간의 말을 할 수 있을까? 그 길은 단 하나뿐이다. 삶을 찾아 가지는 것이다. 기계가 되지 말고, 돈의 노예가 되지 말고,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이다 … 체험과 행동은 없고 책만 읽어서 이른바 ‘상상’이란 것으로 적어 놓은 말들이 살아 있는 겨레의 말이 될 수 있는가? 없다 … 오늘날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삶이다. 잃어버린 삶을 도로 찾아 가지는 일이다. 삶을 찾아 가지려고 하는 노력이 그 어떤 노력보다도 앞서야 하고, 그 노력을 바탕으로 해서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쓴 글을 다듬기도 해야 비로소 제대로 글이 씌어질 것이다 …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중국글을 우리 글처럼 생각했기 때문에 일본글 틀에 잡히게 되어도 그것을 깨달을 줄 모르고, 영어 틀에 빠져 있는 줄도 모른다 ..  (54, 55, 66, 80쪽)



  글을 쓰는 사람은 삶을 씁니다. 글쓰기는 늘 삶쓰기입니다. 삶이 있어야 글을 쓸 수 있고, 삶이 있기에 글을 쓸 기운이 납니다.


  글은 머리로 지어서 쓰지 못합니다. 때때로 머리로 글을 지으려 하는 사람이 있지만, 억지를 부려서 머리로 글을 쓰면, 이 글은 제대로 살지 못합니다. 삶이라고 하는 숨결이 없는 글은 힘도 기운도 사랑도 꿈도 없습니다. 삶이라고 하는 숨결을 담아서 쓰는 글일 때에 비로소 참다운 힘과 착한 기운과 맑은 사랑과 밝은 꿈이 깃듭니다.


  왜 그러할까요? 왜 머리로 짓는 글은 제대로 살지 못할까요? 머리로 짓는 글, 이른바 이론과 학문이나 지식으로 짓는 글은 아무것도 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료와 농약과 항생제는 흙을 살리지 않습니다. 비료와 농약과 항생제는 흙을 망가뜨리거나 괴롭히면서 곡식과 열매를 땅에서 더 뽑아내는 구실을 합니다. 그러니, 이런 것으로는 흙을 못 살리고 못 가꾸고 못 북돋웁니다.


  풀 한 포기에 바치는 사랑스러운 손길은 흙을 가꿉니다. 흙을 가꾸려는 손길을 받고 자란 풀포기는 겨울이 되어 시들 적에 흙으로 돌아갑니다. 나무가 떨구는 가랑잎은 흙으로 돌아갑니다. 풀줄기와 나뭇잎은 흙을 되살리면서 흙이 됩니다.


  우리가 쓰는 글은 풀줄기나 나뭇잎과 같이 마음을 살리거나 살찌우는 밑거름이 될 수 있어야 싱그럽습니다. 살아가는 결 그대로 글을 쓰고, 사랑하는 마음씨 그대로 글을 쓰며, 꿈꾸는 무늬 그대로 글을 씁니다.


  글을 쓰려는 사람은 따로 배워야 하지 않습니다. 글을 쓰려는 사람은 삶을 바라보고 느끼면서 가꾸면 됩니다. 글을 쓰려는 사람은 학교를 다니거나 책을 많이 읽어야 하지 않습니다. 글을 쓰려는 사람은 하루하루 기쁨으로 맞아들이면서 즐거움으로 노래할 수 있으면 됩니다. 살림을 다스리고 하루를 노래할 때에 비로소 글을 씁니다. 밥을 짓고 옷을 지으며 집을 짓는 삶이 그대로 글입니다.



.. 우리가 일본글을 배우지 않고 일본글에 빠지지 않았다면 진작 중국글자체에서도 벗어나 있었을 것이다 … 자기가 쓰고 싶은 절실한 생각이나 이야기를 자기 말로 아무 형식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쓰게 되었을 때 그 결과가 저절로 어떤 글의 맵시를 갖추게 된다면 그때는 그것을 가지고 문체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 눈으로 살펴보기만 할 것이 아니라 직접 일을 해 보고 몸으로 겪어 볼 필요도 있다. 그래야 마굿간에서 여물을 먹고 있는 소 한 마리도 제대로 볼 수 있고, 도랑에 버려진 농약병 이야기도 진실 그대로 꾸밀 수 있을 것이다 … 글을 쓸 때는 아주 결심을 단단히 해서 커다란 자기혁명을 한다는 몸가짐을 가져야 한다. 그런 몸가짐을 가지고 쓰는 글 속에 새로운 자기가 태어나게 해야 한다 … 서로 삶과 마음을 나누는 편지 쓰기를 하면 좋겠다 ..  (94, 157∼158, 179, 188, 477쪽)



  삶을 지을 줄 알 때에 비로소 글을 짓습니다. 군사독재 서슬이 퍼렇던 지난날 제도권 학교교육에서 억지로 시키던 ‘글짓기’가 아닌, “삶을 짓다”와 같은 “글을 짓다”일 적에 수수하면서 고운 글이 태어납니다.


  글은 짓습니다. ‘독후감 숙제 따위 글짓기’가 아닌, ‘삶을 노래하는 글짓기’입니다. 이오덕 님은 ‘글쓰기’라는 낱말을 따로 빚어서 쓰셨어요. ‘글짓기’라는 낱말이 나쁘지 않으나, 군사독재 총칼을 내세운 앞잡이와 꼭둑각시 때문에 아이들이 아프고 다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낱말에 새로운 숨결을 담아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기를 바랐기에, ‘글스기’라는 낱말을 빚었어요.


  그런데 오늘날 학교교육이나 사회를 보면, 낱말은 ‘글짓기 → 글쓰기’처럼 바뀌었으나, 속내는 예전과 똑같습니다. 삶을 쓰려고 하는 글쓰기가 아닌, 억지로 짜맞추거나 이론이나 지식으로 얽어매는 글쓰기입니다.


  글은 허울로 쓰지 않습니다. 글은 껍데기가 아닙니다. 글은 속내요, 알맹이입니다. 글짓기라는 이름이든 글쓰기라는 이름이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삶을 드러내고 사랑을 밝히며 꿈으로 나아가는 숨결을 담을 수 있는 글이면 됩니다.


  이리하며, ‘삶말’과 ‘삶글’이라는 낱말이 새롭게 태어나요. 삶을 그리는 말이기에 삶말이면서, 삶을 짓는 말이기에 삶말입니다. 삶을 노래하는 글이기에 삶글이요, 삶을 꿈꾸는 글이기에 삶글입니다.


  밥 한 그릇을 나누는 삶입니다. 나무를 심고 풀을 뜯는 삶입니다. 바람을 쐬고 햇볕을 쬐는 삶입니다. 냇물을 마시고 들을 돌보는 삶입니다. 아기를 낳고 키우는 삶입니다. 아이와 함께 뛰노는 삶입니다. 옷을 지어 함께 입고, 이불을 빨아 함께 덮는 삶입니다. 삶을 노래합니다. 삶노래이지요. 삶을 이야기합니다. 삶이야기입니다.



.. 원고료 수입이 많다 보니 삶의 현장에 나가 일할 필요가 없어지고, 그래서 늘 방안에서 제멋대로 장난처럼 글재주 놀이를 하기 쉽기 때문 … 일과 놀이가 따로 나누어진 오늘날 사회에서는 사람의 표현조차 순수한 자기 표현만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사회의 요구에 따라 한갓 직업으로써 하는 표현활동이 되어 있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고, 따라서 표현이 어떤 틀에 박히고, 기계로 찍혀 나오듯하여 표현하는 사람 자신의 마음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되어 있기가 예사다 … 자기를 정직하게 쓰면 마음이 후련해지고 기뻐질 터인데, 이렇게 겉모양만 괴상하게 꾸며 보이는 글을 무슨 보람으로 쓸까 … 글과 사람은 따로 볼 수 없고, 따로 보아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글과 사람이 다른 것처럼 보는 것은 우리가 글을 바로 보지 못했거나 사람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  (243, 318, 355, 425쪽)



  글을 쓰는 사람이 늘기를 빌어요. 삶을 쓰는 사람이 늘기를 빌어요. 글을 노래하는 사람이 늘기를 빌어요. 삶을 노래하는 사람이 늘기를 빌어요. 글을 슬기롭게 읽어서 생각을 슬기롭게 밝히는 사람이 늘기를 빌어요. 삶을 슬기롭게 읽어서 마음을 슬기롭게 밝히는 사람이 늘기를 빌어요.


  글만 잘 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삶을 잘 가꾸면서 추스를 적에 글을 잘 가꾸면서 추스릅니다. 글만 멋지게 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겉보기로 번드레하게 보일는지 모르나, 겉을 꾸미는 사람은 이내 시듭니다. 겉을 내세우려는 사람은 속이 곪습니다.


  사람은 쭉정이가 아닌 알맹이를 먹습니다. 사람은 밥알을 먹지, 쌀겨를 먹지 않습니다. 쌀겨를 가루로 빻아서 먹을 수 있겠지요. 쌀알과 쌀겨를 통째로 먹을 만하겠지요. 그러면, 달걀 껍데기와 달걀이 있을 적에, 껍데기만 먹으면 될까요, 달걀을 먹으면 될까요.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란 없습니다. 껍데기는 무엇인가 하면, 알맹이를 감싸는 옷입니다. 알맹이를 감싸는 옷은 옷대로 잘 가꾸면서 돌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알맹이를 감싸는 옷만 헤아리다가 정작 알맹이는 돌보지 못하거나 가꾸지 못하면 어떻게 될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문장 쓰기》는 바로 ‘알맹이’를 밝히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껍데기를 꾸미거나 치레하는 이야기에 휘둘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들려줍니다.



.. ‘사색’은 아주 깊은 생각이고 ‘생각’은 얕은 것이라 여긴다면 잘못이다. 사람들이 모두 어려운 말을 쓰고 싶어하는 버릇이 들어서 자꾸 그렇게 쓰다 보니 그만 쉬운 말은 뜻이 얕고 어려운 말은 고상하게 여기게 되는데, 이런 잘못된 버릇은 글을 쓰는 사람부터 깨뜨려 나가야 하겠다 … 꼭둑각시로 자라난 사람은 그 자식을 또 꼭둑각시로 만들고 싶어 한다. 이 나쁜 되풀이를 그만두도록 일깨우는 것이 글쓰기가 아닌가 … 어른들이 그릇된 교육으로 아이들의 삶을 파괴하고 그 심성을 병들게 하지만 않는다면, 모든 아이들은 마치 산과 들에서 자라나는 풀과 나무같이 바르고 싱싱하게 자라날 것이다 … 교회에서나 절에서 아이들에게 교리를 외우게 하고 예수님, 부처님을 넣어서 글짓기를 시키는 어른들의 신앙이란 것이 참으로 어리석고 거짓된 습관에서 하는 짓이라고 본다 … 땅에 떨어진 씨앗이 싹을 트고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고 잎을 피우고 하여 반드시 일정한 날과 달을 보낸 다음 꽃을 피울 만한 속 기운이 찬 때라야 비로소 피어난다 ..  (488, 541, 549, 558, 568쪽)



  어떤 글을 쓰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집니다. 겉을 치레하는 글을 쓰는 사람은 겉을 치레하는 삶으로 나아갈밖에 없습니다. 겉만 매만지는 글을 쓰는 삶은 겉만 매만지는 삶으로 흐를밖에 없습니다.


  눈을 감고 바라보아요. 내 이웃과 동무를 마음으로 바라보아요. 눈으로도 바라보되, 마음으로도 함께 바라보아요. 내 이웃과 동무가 어떻게 생겼는지 겉모습만 살피지 말고, 내 이웃과 동무가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열고, 어떤 마음으로 삶을 누리며, 어떤 마음으로 이 땅에 서는지 차근차근 바라보아요.


  마음으로 바라보는 눈썰미를 기를 적에 글을 쓸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바라보는 눈길이 될 적에 글을 빛낼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바라보는 눈매를 갈고닦을 적에 글이 아름다운 씨앗 한 톨로 이 땅에 드리울 수 있습니다.


  씨앗 한 톨을 심으려는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 사랑이라는 씨앗을 심으려고 글을 씁니다. 꿈이라는 씨앗을 심으려고 글을 씁니다. 삶이라는 씨앗을 심으려고 글을 씁니다. 글을 수수하게 쓸 수 있는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글을 착하고 참답게 쓸 수 있는 사람이 사랑스럽습니다. 글을 따스하고 너그럽게 쓸 수 있는 사람이 빙그레 웃으면서 노래합니다. 4348.1.17.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이오덕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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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슨 선생 노릇을 했다고 - 아이들을 살리는 이오덕의 교육 이야기
이오덕 지음 / 삼인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오덕을 읽는다

 


어버이 노릇이란
― 내가 무슨 선생 노릇을 했다고
 이오덕 글
 삼인 펴냄, 2005.11.25.


※ 책풀이 ※
2005년에 처음 나온 《내가 무슨 선생 노릇을 했다고》는 이오덕 님이 돌아가신 뒤 나온 유고모음 가운데 하나이다. 이 땅 교사와 어버이한테 들려주는 교육 이야기를 다은 책이다. 교사란 어떤 사람인가를 묻고, 이오덕 님 스스로 교사로 지낸 나날을 돌아보는 한편,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아이를 아끼고 사랑하면 아름다울까 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


  어버이는 아이를 낳아 돌보는 사람입니다. 어버이는 온 사랑으로 가득한 몸이 되어 아이를 낳아 돌보는 사람입니다. 어버이는 아이를 오롯이 사랑으로 돌보면서 옹근 꿈으로 보살피는 사람입니다.


  아이는 입시기계가 아닙니다. 더 높다는 대학교에 집어넣도록 담금질시킬 아이가 아닙니다. 아이들은 초·중·고등학교에서 입시지옥에 허덕여야 하지 않습니다. 어버이라 한다면, 아이가 입시공부에서 벗어나도록 이끌어야 올바릅니다. 어버이로 살겠다면, 아이한테 입시공부 아닌 삶빛을 보여주고 베풀며 함께 누려야 마땅합니다.


  어버이가 가르칠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아이가 배울 것은 오로지 하나입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을 가르치고 배울 뿐입니다. 다른 것은 가르칠 일도 배울 까닭도 없습니다. 사랑을 가르치면 다른 모두를 스스로 깨닫습니다. 사랑을 배우면 다른 모두를 스스로 깨우칩니다.


  사랑이 있어야 씨뿌리기와 풀베기와 밥하기와 빨래하기를 알뜰살뜰 꾸립니다. 사랑이 있어야 젖물리기 자장노래 부르기 함께 놀기를 살가이 합니다. 사랑이 있을 때에 집살림을 알차게 가꿉니다. 사랑이 있을 때에 늘 웃고 노래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 그 뒤 나는 정작 농사일을 배워야 했던 학교에 가서 지게를 지게 되었지만, 땀 흘려 일하는 삶이 사람으로서 가장 올바르게 살아가는 길이란 것을 깨닫지는 못했다. 그러고는 교원 생활을 한 것이다 … 나는 지금 생각한다. 내가 배운 학교 공부, 내가 읽은 책들, 도시와 문명이란 것, 그것이 얼마나 나를 해쳤는가! 내가 만약 보통학교에도 들어가지 않고 집에서 마을 사람들과 같이 땅 파고 짐 지면서 일을 몸에 붙이고 자랐더라면 나는 얼마나 자연스럽게 일찌감치 삶의 진리를 얻어 가졌을 것인가 … 나는 오늘날 사람 사회의 온갖 엉클어진 문제를 푸는 아주 손쉬운 진리를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사람이 즐겁게 일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모두가 평생을 온 정성을 기울이며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그 일을 한 가지씩 찾아내게 하는 것이 교육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일과 놀이와 공부가 하나로 된 아이들 삶을 어른이 되어도 그대로 이어가고, 그래서 평생을 그렇게 살아간다면 지금까지 우리 사람들이 개인으로나 사회로나 안고 있던 모든 문제들이 시원스럽게 풀어진다 …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자라나게 해야 사람다운 마음을 가질 수 있다. 나무가 없이 차가운 콘크리트 건물만 덩그러니 서 있는 큰 도시의 학교는 눈앞에 그리기만 해도 가슴이 탁 막힌다 ..  (12, 18, 233쪽)


  아이를 낳으려는 어른이라면 스스로 어버이 노릇을 하려는 사람입니다. 나이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아이는 열다섯 살에 낳을 수 있고, 서른다섯 살이나 마흔다섯 살에 낳을 수 있습니다. 저마다 마음가짐이 튼튼히 선 때에 아이를 낳습니다. 너무 어리니 아이를 못 낳지 않고, 너무 늙어서 아이를 못 낳지 않습니다. 아이는 오직 사랑으로 돌보고 키우는 만큼 나이를 따질 일이 없습니다.


  잘 살펴보셔요. 아이들은 제 어버이가 열여덟 살이든 서른여덟 살이든 쉰여덟 살이든 따지지 않습니다. 아이한테 어버이는 언제나 어버이일 뿐입니다. 잘생겼으니 어버이요, 못생겼으니 안 어버이가 아닙니다. 돈이 있어 어버이가 되지 않고, 돈이 없어 어버이로 안 삼지 않습니다. 내 재산으로 집이 한 채 있어야 어버이가 되지 않습니다. 전세나 월세를 살기에 어버이가 안 되지 않습니다.


  아이한테는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저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버이입니다. 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어버이가 못 됩니다.


  어버이도 아이를 바라볼 적에 오로지 한 가지 눈길이어야 합니다. 우리 아이를 사랑하고 아끼며 믿는 넋일 때에 비로소 어버이예요. 아이를 다그치거나 닦달하거나 들볶는 사람은 어버이 노릇을 못하는 바보입니다.


.. 먹기만 하고 할 일이 없는 도시 사람들은 산에 올라가고 공놀이를 하고 한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운동은 생산을 하지 않는 행동이다. 사람들이 일은 안 하고(일은 일하는 사람들에게만 맡겨 놓고) 먹기만 해서 몸에 힘이 오르니 그 힘을 어디에다 쏟아 놓을 곳이 없어 싸움을 걸고 싶어 한다 … 범죄의 가장 큰 뿌리는 돈과 물질을 골고루 나눠 가지지 못하는 데 있는 것이 너무나 환하다. 그리고 이런 사회를 만든 책임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 있고, 모든 어른들은 불행한 아이들에 대해 공범자란 생각을 해야 된다고 본다 … 가난이 부끄럽고 죄스럽다는 생각을 깨뜨리지 않고는 교육을 할 수 없다. 도 많이 가진 것, 큰집에 사는 것,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자랑스럽다는 생각을 깨뜨리지 않고는 무슨 재주고 기술을 아무리 잘 가르친다고 해도 교육은 될 수 없다. 바르게 살고 의롭게 살고 올바르고 참되게 살아가도록 하지 않고는 밥을 제대로 먹는 ‘사람의 교육’을 한다고 할 수 없다 … 나는 아이들이야말로 가장 깨끗하고 바르고 참된 사람이라고 봅니다. 아이들은 정직합니다. 거짓말을 하는 아이는 어른한테서 배운 것이고, 어른들이 만든 잘못된 환경이 거짓말을 가르친 것입니다 ..  (17, 38, 40, 56쪽)


  일곱 살 아이가 일곱 살 눈높이로 말합니다. 네 살 아이가 네 살 눈매로 종알거립니다. 일곱 살 아이는 일곱 살 몸짓으로 뛰놉니다. 네 살 아이는 네 살 몸가짐으로 뒹굽니다. 일곱 살 아이는 네 살 아이가 아니요, 네 살 아이는 일곱 살 아이가 아닙니다. 우리 아이는 우리 아이일 뿐, 다른 아이와 견줄 까닭이 없습니다. 잘 헤아려 보셔요. 아이들은 제 어버이를 남과 견주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제 어버이와 남을 맞대면서 윽박지르거나 꾸짖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모든 삶을 어버이한테서 배워요. 어버이가 슬기로우면 아이도 슬기롭습니다. 어버이가 바보스러우면 아이도 바보스럽습니다. 아주 마땅합니다. 거친 말을 일삼는 어버이는 언제나 아이한테 거친 말을 가르쳐요. 아이는 처음에 멋모르고 어버이가 ‘가르치는’ 대로 거친 말을 배워요. 이러다가 아이 스스로 철이 들 무렵, 어버이한테서 마음이 떨어집니다. 왜 저한테 ‘말다운 말’이 아닌 거칠고 메마른 말을 가르쳤는가 싶어 마음이 멀리멀리 떠나고 맙니다. 이때부터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안 배우고 스스로 배우거나 다른 ‘배움 어버이’를 찾아 떠납니다. 어버이부터 스스로 아이한테서 사랑이 떠났으니, 아이도 견디다가 끝내 떠나고 만 셈입니다.


  거친 말뿐이 아닙니다. 딱딱하거나 어렵거나 올바르지 않은 말을 아이한테 자꾸 늘어놓으면, 아이는 시나브로 어버이한테서 떨어지거나 멀어집니다. 사랑이 오가는 말이 아니니, 아이는 제 어버이가 참어버이인지 거짓어버이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어버이 곁에 머물지만 나이가 들수록 하루빨리 어버이 곁을 떠나야겠다는 생각(꿈)을 키워요.


  아이들은 어버이 곁을 굳이 떠날 마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를 사랑으로 낳은 님이 어버이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스레 어우러지는 삶을 바라는 아이들입니다. 홀로서기(독립)가 대단하지 않아요. 사랑살이가 대단합니다. 사랑살이를 바라는 마음이지, 홀로서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닙니다. 먼먼 옛날부터 아이들은 사랑스러운 보금자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어버이가 늙고 힘들면 늘 어버이 곁에서 한집살이를 하면서 바라지합니다. 어버이가 늙어서 죽으면, 어느새 어른이 된 아이가 낳은 아이가 새롭게 어른이 되고, 늙은 어버이를 보살피던 아이는 제 아이한테서 보살핌을 받아요. 언제나 사랑으로 아끼고 돌보며 흘러온 삶입니다. 요양원이나 경로원 같은 데가 있던 삶이 아니라, 보금자리와 집이 있던 삶입니다.


.. “나는 40년 넘게 아이들을 가르쳤지만 그동안 국어교육의 목표가 무엇인지 의문을 품어 본 기억이 없는데요. 우리 아이들에게 바르고 깨끗한 우리 말을 자유롭게 말하고 쓸 수 있게 하면 다 되는 것 아닙니까?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해요?” … 민중이란 누구인가? 나는 아주 쉽게 생각한다. 민중이란 ‘일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밖에 또 무슨 말이 있어야 하나 … 정치가 바로잡혀야 교육도 제대로 되겠지만, 한편 아이들에게 민주스런 삶을 가르치지 않고 민주사회를 이룬다는 것은 헛된 꿈이다 … 잘못된 교과서를 만들어 낸 사람만큼 큰 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그런 교과서를 비판하지도 못하게 하고, 교과서와 지시하는 것밖에는 다른 것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 또 그런 반민주 반생명 교육에 그대로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고 하여 아이들을 들볶는 짓을 오직 한 가지, 교사나 부모가 보여주어야 할 교육열이라 알고 있는 어른들의 죄도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다 … 한 교실 50명 가운데 단 한 아이도 일하면서 살겠다는 아이가 있다는 말을 어떤 선생님들한테서도 들어 본 적이 없다. 거의 모든 아이들이 운동선수가 되겠다, 가수가 되겠다, 이 지경이니 세상에 우리가 이런 교육을 하면서 자본주의는 또 어떻게 지킬 수 있겠는가. 모두가 일하기를 싫어하는 사회는 자본주의고 공산주의고 무슨 정치를 한다고 해도 절대로 제대로 될 수 없다 ..  (22, 23, 43, 50, 51쪽)


  예부터 어느 나라와 겨레에도 학교가 없던 까닭을 알아야 합니다. 학교란 데는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누구나 제 보금자리에서 즐겁게 살아가면 넉넉하기 때문입니다. 제 마을을 떠나서 서울로 가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서울로 가야 큰뜻을 펼치지 않아요. 사람들이 조그마한 고장에 모여서 복닥거려야 큰일을 이루지 않습니다. 참말, 큰일이란, 사랑 하나이지, 정치나 경제나 문화나 예술이 큰일이 될 수 없습니다. 대통령이 큰사람일까요? 아닙니다. 국회의원이나 시장이나 군수가 큰사람인가요? 아닙니다. 여느 마을 여느 보금자리 여느 어버이가 바로 ‘사람’입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옹근 ‘사람’입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사람이 되어 살아가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어버이한테서 사람다움을 배우고 싶습니다. 어버이는 아이들한테 사람다움을 가르치면서 ‘살아가는 보람’을 누립니다. 먼먼 옛날부터 지구별 어디에서나 ‘귀촌·이촌’ 따위는 없어요. 제 고장에서 나고 자라서 제 고장에서 삶을 잇습니다. 예부터 시골과 서울은 따로 없어요. 숲이 있고 들이 있으며 골짜기와 냇물과 바다와 못이 얼크러진 삶자리가 ‘시골’입니다. 스스로 삶을 짓고 살림을 꾸리는 터전이 ‘시골’입니다.


  이와 달리, ‘서울’이라고 하는 도시는, 사람들이 스스로 삶을 짓지 못하는 데입니다. 무엇보다 서울이든 도시이든 밥도 옷도 집도 스스로 지어서 살아가지 못하는 얼거리예요. 서울이나 도시는 모두 돈만 벌어서 돈으로 밥과 옷과 돈을 사들여서 살림을 이어야 하는 틀입니다.


  돈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곳은 보금자리가 못 됩니다. 오늘날 도시문명에서 부동산만 있고 집이 없는 까닭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돈으로만 굴러가는 도시문명에서는 집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 부동산입니다. 도시사람은 ‘내 집’이 없어요. 오직 재산과 부동산일 뿐입니다.


  ‘내 집’이란 보금자리요 마을입니다. 스스로 밥과 옷과 집을 지어서 살림을 가꿀 수 있는 데가 보금자리이면서 마을입니다.


  예부터 어버이는 아이한테 밥짓기와 옷짓기와 집짓기를 가르쳤습니다. 교과서나 교재나 책 따위는 없이 밥과 옷과 집을 아이한테 가르치고 물려주었습니다. 삶으로 보여주고 삶으로 배웁니다. 삶으로 들려주고 삶으로 받아들입니다. 삶으로 알려주고 삶으로 깨닫습니다.


  밥을 지을 적에 요리법으로 밥을 짓지 않습니다. 집을 지을 적에 건축법으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옷을 지을 적에 패션으로 옷을 짓지 않습니다. 지구별 어느 마을에서나 사람들은 스스로 아이가 되고 어버이가 되며 살았습니다. 지구별 어느 고장에서나 사람들은 스스로 보금자리를 가꾸는 아이이면서 어버이였습니다.


.. 누구든지 잠깐이라도 교단에 선 사람이라면 자기가 아이들에게 체벌을 준 다음에 그렇게 당한 아이들이 그 체벌로 말미암아 마음이 착해지거나 행동이 바람직스럽게 바뀐 일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 대관절 ‘사랑의 매’란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이런 속임수 말을 제발 교육자들만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더구나 시험을 쳐서 틀린 점수만큼 작대기로 때리는 짓, 이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이 야만스런 짓이다 … 유치원에서 글자를 가르치는 것도 아주 잘못이니, 그런 유치원에는 아이들을 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학교에 들기 전에 가르쳐야 할 것은 학교 공부가 아닙니다 … 일하면서 살아온 모든 부모들은 겨레말을 그 자식들에게 가르치는 훌륭한 교육자였다고 하겠습니다 … 아이들에게 좋은 책을 읽힌다는 것이 이렇게 어렵고 힘듭니다. 그러나 어른들이 아이들과 같이 공부한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이렇게 해야 희망이 있습니다.” … 교육이 진짜 교육이 되려면 아이들에게 삶을 가르쳐야 하고, 삶으로 세상을 깨닫고 이치를 알고 튼튼한 마음을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남으려고 한다면 다른 어떤 일보다도 먼저 아이들에게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가도록 가르쳐야 한다. 따라서 학교에서고 집에서고 아이들이 가장 먼저 배워야 하는 것이, 자기가 먹고 쓰고 놀고 한 결과가 땅을 다치거나 더럽히지 않도록 하는 삶을 몸에 배게 하는 일이다 ..  (83, 86, 101, 117, 119, 124쪽)


  학교는 어떤 곳인가 돌아봅니다. 오늘날 학교는 우리한테 어떤 곳인지 헤아려 봅니다. 한국땅에서 학교가 하는 일은 언제나 한 가지입니다. 대학입시 교육입니다. 대학입시 교육 한 가지만 하는 한국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생각을 못 뻗도록 가로막거나 짓누릅니다.


  학교를 스무 살까지 다니건 서른 살까지 다니건, 아이들은 밥짓기와 옷짓기와 집짓기 가운데 아무것도 못 배웁니다. 대단하다는 대학교를 마친 아이들조차 사랑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나라밖으로 무언가 배우러 다녀온 아이들마저 꿈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오늘날 학교에서는 삶을 안 가르칩니다. 오늘날 학교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오늘날 학교에서는 사람이 안 보입니다. 교사와 학생이 있고, 교칙과 규율은 있지만, 사람다운 넋이나 이야기가 없는 학교입니다. 이리하여, 제도권학교에서 사람답게 살기란 참 어려울 뿐 아니라, 사람답게 살 수도 없습니다. 제도권학교에서 여러모로 애쓰고 용쓰면, 몇 가지는 할 수 있어요. 이를테면 ‘교사답게 일하기’와 ‘학생답게 배우기’는 할 수 있습니다. 무척 애쓰고 땀흘리는 분들은 참교사가 되기도 하고, 아름다운 교직을 지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교사다움은 지키더라도 사람다움은 지키지 못해요. 왜냐하면, 학교라는 울타리에서 ‘처리해야 하는 공문서’와 ‘맡아야 하는 행정’과 ‘다루어야 하는 시험성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제도권학교는 사람다움을 짓밟거나 깔아뭉갭니다. 그래서, 제도권학교에서 사람다움을 말하기란 몹시 어렵습니다. 대안학교도 이러한 사회 틀거리를 제대로 못 깨달으면 ‘교사다움’에서는 제도권학교보다 살짝 나을는지 몰라도, 대안학교 또한 사람다움이 없으니, 아이들이 몹시 힘들고 아파요. 대안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홀가분하지 못하거나 사랑스레 웃지 못하는 까닭을 어른들이 슬기롭게 꿰뚫어보면서 짚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학교가 제도권이냐 대안이냐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학교는 그저 학교일 뿐입니다. 이런 학교냐 저런 학교냐를 넘어서, 보금자리가 되느냐 마을이 되느냐 삶터가 되느냐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스스로 삶을 짓도록 이끄는 ‘어버이와 아이’가 만나는 자리가 되느냐를 헤아려야 합니다.


.. 참말 아이들은 놀면서 자라납니다. 놀면서 서로서로 마음을 알고, 말을 배우고, 슬기를 얻고, 몸을 키웁니다. 놀지 못하는 아이는 병신이 됩니다 … 진짜 나라사랑은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과 이 땅에서 살아가는 풀과 나무와 곤충과, 그리고 이웃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동안에 저절로 가슴속에 새겨지는 사랑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아이들을 마음껏 뛰놀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 아이들과 함께 놀아 주십시오. 사람교육과 애국교육이 여기서 이뤄진다고 믿습니다 … 아무리 그럴듯하게 그렸더라도 개성이 없고 자기표현이 안 되어 있으면 칭찬하지 말 일이고, 아무리 서툴어도 자기 생각대로 그렸으면 칭찬해 주어야 합니다 … 아기들은 가르치기 쉬운데, 어른들이 잘못된 버릇을 고치지 않아 교육이 안 됩니다. 짐승들은 땅을 더럽히지 않는데 사람이 땅을 다 버려 놓고 있으니 이 일을 어찌할까요? 선생님들은 과자를 사 먹고, 비닐봉지를 아무 데나 버리면서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니 이래서 교육이 안 됩니다 … 아이들은 이것 읽어라, 저것 외워라 해서 지시하고, 어디로 어른들이 제멋대로 목표를 정해 놓고 이끌어 가는 대상이 아니다. 아이들은 가꾸어 주고 지켜 주어야 할 생명이다. 생명은 자연 속에서 풀같이 나무같이 스스로 자라나게 되어 있다 … 우리가 만약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자유와 창조의 삶이다. 그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  (60, 62, 65, 69쪽)


  2003년에 눈을 감은 떠난 이오덕 님은 한삶을 ‘교사’로 살았습니다. 마흔세 해 동안 교사 노릇을 하기도 했지만, 이녁이 한 일과 살아온 모습은 ‘누구한테 어떤 지식을 가르치거나 이끌지 않았’어도 교사 노릇입니다. 그런데, 이오덕 님은 교사 노릇을 하면서 늘 마음이 아프고 힘들었습니다. 제아무리 훌륭하거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교사 노릇을 하더라도 어딘가 켕기고 머리가 지끈거립니다. 참교사로 우뚝 서겠다고 다짐을 하고 애쓰면서, 1960년대 박정희 독재정권 무렵에도 제도권 울타리와 맞서기도 하지만, 언제나 큰 울타리에 부딪혀야 했습니다.


  이오덕 님은 스스로 ‘참교사’를 생각하며 교사 노릇을 하다가, 1986년에 교사 자리에서 떠밀려 학교를 떠나야 하는 일을 겪으며, 비로소 크게 깨닫습니다. 아하, 내가 교사 노릇에 매달리느라 한 가지를 못 보았구나, 하고 아주 크게 깨우칩니다. ‘참교사’ 아닌 ‘참사람’ 노릇을 하면 되었는데, 미처 이렇게 하지 못했다고 뉘우칩니다. 이러한 뉘우침을 속속들이 담아서 쓴 글이 《내가 무슨 선생 노릇을 했다고》(삼인,2005)라는 책에 깃듭니다.


  우리한테 무엇을 말하거나 가르치기 앞서, 또 글로 써서 이야기를 건네기 앞서, 이오덕 님은 누구보다도 먼저 몸소 해 보입니다. 남한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떠들지 않는 이오덕 님입니다. 스스로 삶으로 가꾸면서 넌지시 이야기할 뿐입니다. 이오덕 님은 우리를 나무란 적이 없고 꾸짖거나 다그친 적이 없습니다. 이오덕 님은 언제나 이녁 스스로를 꾸짖거나 다그치거나 나무랍니다. 왜 그동안 ‘참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을 바라보지 못했나 하고 스스로 꾸짖습니다. 이제부터 ‘참사람’이 되어 슬기롭게 살아가자고 스스로 다그칩니다.


  이리하여, 이오덕 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참 쉽습니다. 어려운 말도 없습니다. 참사람으로 살아갈 길을 이야기하니 쉽습니다. 참사람이 되려고 스스로 거듭나는 길에 섰기에, 우리 말과 글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를 똑똑히 깨우쳤어요. 어려운 말을 쓸 턱이 없습니다. 살갑게 사랑하는 말로 이야기를 펼칩니다.


.. 어떤 나이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 다만 살아 있을 때 돈을 많이 가졌다고 해서,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해서 대문짝만하게 광고가 된다. 그런데 아이들은 아무리 억울하게 죽어도 소식이 없다 … 성적이 나빠서 자살하는 것은 오로지 어른들이 그런 지경으로 몰아간 때문이다. 시험 점수를 서로 빼앗아 가는 싸움에 만족할 만한 성적을 못 올리는 아이는 이 세상에서 사람 노릇을 못하는 쓰레기 같은 아이가 된다고 학교에서 가정에서 밤낮없이 선생들과 부모들이 채찍을 치면서 부추기어 멀쩡한 아이들을 아주 바보 머저리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 의무교육을 마친 이 나라 착한 백성들이 신문을 읽을 수 없도록 온통 한자투성이 신문을 43년 동안 만들어 온 것도 상식을 벗어난 상태다 … 노동 시간을 선진국 수준으로 줄인다고 하더라도 노동하는 자체를 낮게 여기고 노동자를 깔보는 풍조를 만들어 내는 교육을 하고 있는 동안, 노동은 언제나 괴롭고, 될 수 있으면 꺼리고 싶은 것이 될 수밖에 없다 ..  (142, 153, 187, 194쪽)


  마음을 열면 됩니다. 뜬구름 잡는 허울 좋은 이름을 붙잡으려 하지 않으면 됩니다. 내 것으로 가로채려는 마음을 버리면 됩니다. 우리 모두 즐겁게 껴안고 부대낄 만한 길을 걸어가면 됩니다.


  남에게 하라고 시킬 까닭이 없습니다. 스스로 즐겁기에 즐겁게 합니다. 스스로 기쁘니까 기쁘게 합니다. 즐거운 삶을 즐겁게 가꾸면 됩니다. 기쁜 노래를 기쁘게 부르면 됩니다.


  정부에서 정책을 마련하지 않았기에 못할 일이 없어요. 정부에서 지원금을 안 주니까 못할 일이 없어요. 늘 우리 스스로 하는 일입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삶이 정부 복지정책으로 하는 일이 아니거든요. 아이와 사랑스레 꾸리는 살림살이가 정부 복지지원금으로 이루어지는 삶이 아니거든요.


  아이들은 값비싼 장난감이 있어야 놀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돌멩이 하나로 놀고, 작대기 하나로 놉니다. 아이들은 맨손으로 흙을 만지며 놉니다. 아이들은 온몸으로 뒹굴면서 뛰놉니다.


  아이들 곁에서 어른들은 돌멩이 하나로 일합니다. 작대기 하나로 일해요. 맨손으로 흙을 만지며 일합니다. 어른들은 온몸으로 땀흘리면서 일합니다.


.. 정신이 없으니 얄팍한 말재주나 부리고 싶어 한다. 우리 어린이문학은 갈수록 말재주나 부리고 싶어 한다. 우리 어린이문학은 갈수록 말재주가 더해져서 손장난 문학으로 타락해 가는 느낌이 든다. 정신이 없는 것은 바로 삶이 없기 때문이다 … 나는 내가 가르친 아이들이 이른바 출세란 것을 해서 이름난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저 평범한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농사를 짓든지 노동을 하든지 장사를 하든지,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이웃과 정을 나누면서 자연을 사랑하면서 넉넉한 사람다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 주기를 바란다 …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으로 해야 할 일은 자기가 먹는 밥을 자기 힘으로 생산하는 것과, 그 먹고 마시면서 나온 찌꺼기를 자기 힘으로 생산하는 일이다 … 산골 생활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이 세상 착한 사람들은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도시에서는 견디지 못하고 모두 밀려나와 산골에 들어가 산다는 것이다 … 산골에서 자연만을 상대로 살아가면 사람의 마음이 저절로 깨끗해지고 착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든다 … 자연과 삶을 잃어버리고 무시무시한 경쟁으로 자라난 사람들이 가장 큰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돈 많이 벌어 편안하게 사는 것’이다 ..  (197, 203, 219, 225, 226쪽)


  《내가 무슨 선생 노릇을 했다고》는 인문책이 아닙니다. 교육책도 아니고 이론책도 아닙니다. 교사 노릇을 하던 이오덕 님이 스스로 깨달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삶책입니다. 이오덕 님은 늘 입버릇처럼 “내가 무슨 선생 노릇을 했느냐” 하고 말씀합니다. 이녁 스스로 점잖거나 다소곳하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오덕 님은 참말 ‘교사 노릇’ 아닌 ‘사람 노릇’을 하고 싶었기에, 스스로 다짐하듯이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도 모두 같아요. 우리는 누구나 사람 노릇을 하면 됩니다. 어버이 자리에 섰다면 어버이 노릇을 하고, 아이 자리에 설 적에는 아이 노릇을 하면 돼요.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누이기에 어버이가 아닙니다.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누이기도 하지만,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누이는 손길은 늘 사랑입니다.


  기저귀를 가는 손길은 언제나 사랑입니다. 기저귀를 빨래해서 햇볕에 너는 손길은 늘 사랑입니다. 아기한테 젖을 물리고, 아이한테 밥을 먹이며, 아이가 갈아입을 옷을 마련하는 어버이 손길은 노상 사랑입니다.


  새삼스럽지만, 거친 말을 물려받는 아이는 어른이 되어 제 아이한테 거친 말을 다시 물려주고 맙니다. 사랑을 물려받는 아이는 어른이 되어 제 아이한테 사랑을 새롭게 물려줍니다. 꿈을 물려받는 아이는 어른이 되어 제 아이한테 꿈을 새록새록 물려줍니다.


.. 만약 권 선생의 글이 자기 한몸 살기 위한 생각의 표현이었다면, 그는 자기 개인의 앞날에 대해 아주 절망했을 것이고, 따라서 그의 몸도 그런 절망으로 하여 한층 나빠졌을 것이 틀림없다 … 자유가 없는 시대일수록 거짓스런 말이 세상을 뒤덮는다 … 알맹이가 없는 터무니없는 말에 끌려가는 사람은 그 자신이 알맹이가 없기 때문이다 … 학교교육이 언제 아이들에게 삶을 주었던가? 우리는 그 어린 아이들이 1학년에 들어오자마자 교과서만 가지고 끊임없이 머릿속에 무엇을 쑤셔넣으려고만 한다. 그것이 교육의 모두다 … 실업인들이란 대체로 모두 이렇게 노동자들의 삶을 모른다. 또는 알고도 모른 척한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바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이 그들이 마음치 배가 잔뜩 불렀는데도 더 먹으려고 욕심을 부린다고 생각하거나, 지금까지 자기들이 먹여살려 주었는데 이제 와서 은혜를 원수로 갚는 행동을 한다고 말한다. 그러고는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노동운동을 짓밟고 있다 … 점수가 으뜸이란 생각을 하게 하고, 점수 따기를 가장 큰 목표로 하는 교육은 그대로 돈과 권력이 으뜸이란 생각을 아이들 마음속 깊이 심어 준다 … 아이들 앞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아이들을 착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으로 키우는 일입니다 ..  (250, 255, 264∼265, 268, 276쪽)


  우리는 누구나 생각하며 살아야 사람입니다. 아름답게 생각하고, 착하게 생각하며, 참다이 생각할 때에 사람입니다. 어깨동무하는 삶을 생각하고, 품앗이와 두레로 피어나는 삶을 생각합니다. 오순도순 가꾸는 삶을 생각하며,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삶을 생각합니다.


  아이들을 섣불리 입시학원에 넣지 말아요. 입시학원 굴레에서 허덕여야 하는 아이들은 자꾸자꾸 삶하고 동떨어져요. 생각하는 깊이가 사라져요. 아이들한테 함부로 입시과외를 시키지 말아요. 입시과외를 받는 아이들은 차츰차츰 어버이 손길에서 멀어져요. 어버이가 투박하거나 수수한 손길로 가르치거나 보여주는 이야기가 반갑고 즐거운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은 비싼 요리집에서 맛있게 밥을 먹지 않아요. 아이들은 투박하고 수수한 어버이가 차려서 내주는 투박하고 수수한 밥을 맛나게 먹어요.


  생각이 자라고 사랑이 피어나며 꿈이 날갯짓할 적에 비로소 사람입니다. 아이도 어른도 다 같이 생각하고 사랑하며 꿈꿀 적에 바야흐로 사람입니다. 생각하지 않을 때에는 사람다움하고 멀어집니다. 지구별에 전쟁이 자꾸 터지는 까닭은 사람들 스스로 생각을 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니 사람다움을 등집니다. 우리 사회에서 끔찍하거나 슬프거나 아픈 일이 끝없이 터지는 까닭은 사람들 스스로 사랑을 잊기 때문입니다.


  남 때문에 생각이나 사랑을 잊지 않습니다. 언제나 우리 스스로 잊습니다. 입시학원과 입시학원 굴레에서 허덕이다가 입시시험에 얽매인 채 대학교에만 들어가니, 사람들은 늘 스스로 생각과 사랑을 잊어요.


.. 민주인을 기르는 교육은 그 방법도 민주다워야 합니다. 민주교육의 방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삶입니다 … 삶으로 하는 교육은 당연히 손과 발을 움직여 무엇을 만들고 가꾸고 기르는, 곧 일을 하는 교육이 됩니다 … 아이들을 억누르는 교육체제를 뜯어고치지 않고는 절대로 민주교육을 할 수 없습니다 … 진짜 애국심 가지게 하는 교육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아이들을 교실에 가두어 놓고 시험공부만 시키는 짓을 그만두고, 아이들을 풀어 놓아서 자연 속에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는지 저는 궁금합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무엇을 물려주어야 할까요? 어른들이 만들어 온 난장판 역사? 엉망진창이 된 사회?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만 가고 있는 과학? 정신을 어지럽히기만 하는 온갖 잡동사니 지식? 자기 핑계의 철학? 무슨 무슨 주의? 사상? 종교의 교리? … 지도자나 선각자는 필요합니다만, 그는 역사의 어느 한때에 잠깐 필요한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지, 그 이상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뭇사람의 앞장을 서서 일하는 사람을 그렇게 대단한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일은 밑에서 백성들이 하는 것이고, 역사는 민중이 밀고 나가는 것이지요 ..  (278, 279, 285, 296, 329쪽)


  어버이 노릇은 아름답습니다. 보금자리를 가꾸는 어버이 손길은 따스합니다. 아이를 어루만지는 어버이 눈빛은 사랑스럽습니다. 아이들은 어버이가 되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어머니 아버지로 자라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대학생이나 직업인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저를 낳아 돌본 어버이처럼 사랑스러운 어버이로 자라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저를 이 땅에 부른 어버이처럼 착하고 참다우며 맑은 눈빛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이들 마음을 읽어요. 어버이 넋을 살펴요. 우리는 저마다 아이이면서 어버이입니다. 아이를 낳은 사람만 어버이가 아닙니다. 아이이면서 어버이입니다. 아이다움과 어버이다움을 알뜰살뜰 보듬으면서 살아갈 적에 어른으로 거듭납니다. 나이를 먹은 사람이 어른이 아니에요. 아이답고 어버이다울 적에 어른입니다.


  즐겁게 살아가는 길을 찾으면서 즐겁습니다. 사랑스레 살아가는 빛을 누리면서 사랑스럽습니다. 아름답고 싶다면? 얼굴을 뜯어고치거나 화장품을 바른대서 아름답지 않아요. 아름답게 살아가는 꿈을 키울 때에 아름답습니다. 서로서로 어여쁜 어버이인 줄 새록새록 배우고 가르치면서 우리 보금자리를 스스로 가꾸기를 빕니다. 마음밭에서 자라날 눈부신 씨앗을 볼 수 있기를 빌어요. 4347.3.16.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이오덕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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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처럼 2015-01-20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말이 빛나는 아름다운 글을 읽게 되어 참 벅찹니다. 두고 두고 살피고 배울 수 있는 글이네요. 자주 와서 배우겠습니다.
 
아동시론 - 굴렁쇠 생각 3
이오덕 지음 / 도서출판 굴렁쇠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오덕을 읽는다 5

 


아이들을 사랑하는 시 한 줄
― 아동시론
 이오덕 글
 굴렁쇠 펴냄, 2006.11.10.

 


※ 책풀이 ※
1973년에 처음 나오고 2006년에 다시 나온 《아동시론》은 어른이 써서 어린이한테 읽히는 시와 어린이가 써서 어린이가 읽는 시, 이 두 가지를 찬찬히 살피면서, 어린이가 누릴 어린이 시문학이 어떻게 나아갈 때에 아름다운가를 밝힌다. 삶을 아름답고 즐겁게 가꾸는 밑거름이 되는 시쓰기를 이야기한다.


..


  아이는 ‘실험’할 아이들이 아닙니다. 아이는 ‘사랑’할 아이들입니다. 아이들한테 이것 해 보고 저것 해 볼 수 없어요. 아이들한테는 가장 따사로운 사랑을 베풀 노릇이고, 가장 너른 꿈을 들려줄 노릇이며, 가장 빛나는 이야기를 물려줄 노릇입니다.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아이한테 물려주어 아이가 이루도록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이루고 싶은 꿈은 내가 이룰 꿈입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새롭게 꿈을 꾸면서 살아갈 때에 아름답습니다. 먼먼 옛날 누구나 시골에서 흙을 만지면서 일구고 살더라도, 아이는 어버이 뒤를 똑같이 따르지 않아요. 짚을 엮어 짚신을 삼더라도 어버이가 삼던 짚신과 사뭇 다른 짚신을 삼습니다. 바구니를 엮거나 둥구미를 엮을 적에도 사뭇 다르게 엮습니다. 괭이질을 하거나 호미질을 해도 서로 같지 않아요. 씨앗을 뿌리거나 심을 때에도 저마다 조금씩 달라요.


  판박이가 아닌 새로운 숨결로 태어나는 아이입니다. 똑같은 틀로 짜거나 맞추는 아이가 아니라, 새삼스러우며 싱그럽게 자라는 아이입니다.


  이 아이한테 드리우는 빛을 생각해요. 아이가 짓는 웃음을 헤아리고, 아이가 읊는 노래를 들어요. 내가 아이였을 적에 어떤 빛이 감돌았는지 돌아봐요. 내가 아이였을 적 지은 웃음을 곱씹고, 내가 그동안 읊은 노래를 짚어요.


  어느 때에 즐겁게 누린 하루인가요. 어느 곳에서 즐겁게 노래한 삶인가요. 오늘은 어떤 삶을 짓고,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가요.


  어버이 스스로 아름답게 노래하면 아이들은 아름다운 노래를 물려받습니다. 어버이 스스로 사랑스레 일하면 아이들은 사랑스레 일하는 매무새를 물려받습니다. 어버이 스스로 착하게 어깨동무하면 아이들은 이웃하고 착하게 어깨동무하면서 두레를 즐기는 삶으로 나아갑니다.
 

.. 우리 어린이들에게는 시가 없다. 그들의 일상의 말과 행동과 마음속에 충만해 있는 참된 시의 세계는 그릇된 어른들에 의해 철저히 짓밟히고 봉쇄당하여, 대신 얼토당토않은 기묘한 흉내내기 놀이를 하고 있으니, 이런 사람답지 못한 원숭이 흉내가 곧 어린이들이 쓰고 있는 ‘동시’라는 것이다 … 교사들이 동요나 동시를 가르치고 어린이들이 동요를 쓰는 동기와 궁극의 목표가 백일장이나 글짓기 대회에서 당선되는 일이고 보면, 교육이란 행위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인간을 키워 간다는 그 본디의 자세는 철저히 망각 무시되고, 다만 그럴싸한 작품을 만들어 내는 일만이 최상의 관심사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 동요가 어린이들의 생활과 심정에 뿌리박은 자연스러운 감정의 유로(流露)가 아니라 치졸한 언어의 조합의 수공품으로서 백일장이나 글짓기 대회의 행사에서 소중히 여겨진 것이 이때부터다. 그리고 얼른 보아서 이러한 작품들은 윤석중 씨의 동요 세계의 일면을 그대로 반영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재미스럽고 귀여운 유아의 재롱, 세상 모르게 구는 어린애의 천진성 같은 것이 재치 있는 말의 기교로 만들어지는 윤 씨의 동요 세계는, 과도기에 처해 있는 우리 사회에서 각종의 문화 운동으로 선전 보급될 가능성이가장 많았으며, 이리하여 빈약한 문학 유산밖에 이어받지 못한 우리 어린이들에게 있어서는 거의 유일한 정서 표출의 세계로서 무조건 받아들이고 모방하였던 것이다 ..  (5, 14, 19쪽)


  어버이는 어버이입니다. 어버이는 교사가 아닙니다. 교사는 교사라 할 테지요. 그러나 교사도 어른이요 어버이입니다. 교사라는 이름에 앞서 어른이면서 어버이입니다. 아이들은 아이입니다. 학생 아닌 아이입니다. 아이들은 학교에 있든 마을에 있든 집에 있든 언제나 아이입니다.


  교사와 학생 사이가 아닌 어버이와 아이 사이입니다. 교사와 학생으로 만날 사이가 아닌 어른과 아이로 만날 사이입니다. 사랑을 물려줄 어버이요, 사랑을 받을 아이입니다. 사랑을 가르칠 어른이면서, 사랑을 배울 아이입니다.


  어버이나 어른이 아이한테 영어를 가르칠 까닭이 없어요. 아이가 스스로 영어를 쓰거나 영어로 된 책을 읽거나 영어를 쓰는 이웃나라 사람을 만나야겠다고 느낄 적에 영어를 알뜰살뜰 알차게 가르칠 수 있으면 됩니다. 어버이나 어른이 아이한테 수학을 가르칠 까닭이 없어요. 아이가 스스로 셈과 기호와 빛과 넋을 한 자리에 어울려 놓으면서 마음을 단단하게 다스리고 싶다고 느낄 적에, 이 아이가 참답게 셈과 기호와 빛과 넋을 한 자리에 그러모으면서 엮도록 도울 수 있으면 됩니다.


  어버이는 언제나 사랑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어른은 언제나 사랑을 말하면 됩니다. 아이는 언제나 사랑에 둘러싸인 채 살아가면 됩니다. 아이는 언제나 사랑을 들으면 됩니다.


  사랑받는 나무가 튼튼하게 자라요. 사랑받는 꽃이 곱게 피어요. 사랑받는 풀이 푸른 내음 듬뿍 베풀어요. 사랑받는 아이가 튼튼하게 자라지요. 사랑받는 아이가 아름답게 노래하지요. 사랑받는 아이가 착한 눈빛 밝히지요.


.. 아이들의 감동은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감동이다. 그리고, 이 새로워지는 감동은 마음속에 두고두고 간직해 둔 그것이 아니라 생활의 현장에서 발화되어 갱신되는 것이다 … 생활 현장에서 그때 그때 얻어진 감동을 대체로 소박 솔직하게 토해 내듯이 쓰면 시가 되는 것이 아이들의 시다 … 감동을 그대로 토해 내듯 쓰고 있는 어린이의 시에는, 더구나 저학년의 시에는 생략될 것은 거의 되고 있는 것이다 … 아이들이 자기 자신의 생활과 마음을 자기의 말로 쓰게 된다면, 거기 유사 모조품이란 거의 있을 수 없다. 천 명의 아이가 쓴 천 편의 시는 천의 얼굴처럼 다 다를 것이 당연하다 … 우리의 언어란 것이 완전한 것이라고 하면 시인은 노래하듯 시를 쓰면 될 것이고, 사실은 그런 상태가 이상이라고 본다 … 내가 배제하려고 하는 것은 이런 생활 감동의 효과적인 파악과 표현을 위한 기술이 아니라, 생활을 외면하고 감동이 없으면서도 기교만으로 작품(감동)을 만들어 내려고 하고 있는 현재의 그릇된 동시 제조의 방법과 태도다 ..  (22, 23, 27, 65, 74쪽)


  교사라 할 적에 굳이 ‘참교사’와 ‘거짓교사’를 가를 까닭은 없어요. 그렇지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참교사는 지식을 아이한테 가르치더라도 사랑스럽게 삶으로 녹여내서 포근하고 따사롭게 베푸는 사람입니다. 아니, 참교사는 아이한테 지식을 보여주지도 말하지도 않아요. 그저 사랑스럽게 삶으로 녹여내는 이야기를 들려줄 뿐입니다. 그저 따사롭고 포근하게 베푸는 사랑으로 환하게 웃을 뿐입니다.


  거짓교사는 시험점수를 아이 앞에서 팔랑거립니다. 거짓교사는 대학입시로 아이들을 옥죄어 놓습니다. 거짓교사는 시골에서 태어나 자라는 아이들을 몽땅 시골을 떠나 도시로 가도록 내몰거나 부추깁니다. 거짓교사는 아이들이 밤낮으로 시험공부만 생각하도록 다그칩니다. 거짓교사는 아이들이 제힘으로 씩씩하게 서도록 이끌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서지 못하면 교사란 무슨 뜻이 있을까요. 아이들이 스스로 서도록 이끌지 못하면 교사라는 자리는 무슨 보람이 있을까요. 그러나, 교사가 된 어른부터 스스로 서지 못하니, 아이들이 스스로 서도록 이끌지 못해요. 교사가 되어 월급 받는 어른부터 스스로 설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아이들이 스스로 아름답게 서서 착하며 참답게 삶을 빛내도록 가르치지 못해요.


  교과서 지식만 배워 교사가 된 어른은 아이들한테 교과서 지식만 집어넣어요. 교과서 지식으로 교사가 된 어른은 아이들한테 교과서 바깥으로 씩씩하게 나가서 스스로 삶을 붙잡도록 돕지 못해요, 교과서 지식으로 교사가 된 어른은 아이들이 교과서 지식으로 대학생이 되도록 밀어붙일 뿐입니다. 교과서 지식으로 돈 잘 벌 수 있는 길만 아이들한테 보여주는 교사입니다.


.. 재미스럽고 귀여운 것을 찾으려 하고 그러한 말을 흉내내려 하는 곳에는, 어른의 경우든 아이들의 경우든, 시와 생활의 창조가 아니라 파탄이 있을 뿐이다 … 본디 우리 동요에 나타는 이 ‘지요’ ‘해요’ ‘야요’의 ‘요’ 어미는 일본의 근대 동요에서 현저한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는 같은 음의 어미와 그 뜻이 어느 정도 비슷한 것으로, 일본 동요의 영향이라고 본다 … 아이들이 쓰는 말이 이렇게 획일적으로 된다는 것은 그들의 감각과 사고가 획일화된다는 것이요, 개성의 사멸을 의미하는 것이다. 동시는 우리 아이들의 개성, 곧 우리 민족의 생명을 학살하고 있다 … 모든 동요적 발상의 운문에 공통된 점은 치졸한 것, 혹은 어른스러운 것의 모방이요, 남을 비웃는 자세요, 자기 중심의 경망성이다. 그것은 곧 시와 생활이 거부된 세계요, 비참한 어떤 동물들의 모방 훈련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유행가, 그렇다. 동시는 아이들의 천박한 유행가로서 바야흐로 저널리즘과 교육계에서 상품의 선전으로 크게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  (32, 44, 56, 64쪽)


  학교가 있어야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어른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어른으로 살아온 나날을 바탕으로 아이들한테 삶을 가만히 보여주면서 온몸으로 가르칩니다. 교과서로 가르치지 않아요. 교과서가 있어야 가르치지 않아요. 삶은 그예 삶으로 가르칩니다. 삶은 그저 삶으로 보여줍니다.


  책을 읽혀야 잘 가르치지 않아요. 책이 있어야 잘 가르칠 수 있지 않아요. 먼먼 옛날부터 어느 누구도 책으로 시골일 가르치지 않았어요. 나물을 캐고 풀을 뜯으며 밥을 짓는데, 몸으로 보여주면서 몸으로 익히도록 할 뿐이에요. 어느 누구도 요리책을 들추지 않아요. 간을 맞추고 밥물을 살필 적에 두 눈으로 살피고 스스로 해야 익히지, 요리책을 본대서 알 수 없어요.


  요리책에는 계량기를 써서 하나하나 따지도록 하지요. 그런데 옛날에 어느 누가 계량기를 썼나요. 손으로 했지요. 손으로 살피고 눈으로 헤아리며 마음으로 느껴요. 식구들 머릿수에 맞추어 절구를 찧어 겨를 벗긴 뒤에 키질을 해서 부스러기를 날리고는 조리로 일어 돌을 고릅니다. 밥물을 맞출 적에도 솥에 담은 쌀을 살펴 알맞게 물을 붓습니다. 느낌으로 알아요. 지식으로 알 수 없어요.


  아이를 얼러 자장노래를 부를 적에, 어떤 가락과 노랫말로 몇 분 동안 불러야 한다는 법이 없어요. 짧게 부를 수 있고 길게 오래 부를 수 있어요. 대단한 노래꾼이어야만 자장노래를 부르지 않아요. 사랑으로 부르는 자장노래예요.


  아이를 안거나 업을 적에 어떤 법이나 규칙이란 없어요. 아이가 걷도록 가르칠 적에도 어떤 법이나 규칙이란 없어요.


  삶이란 삶일 뿐, 법이나 규칙이 아닙니다. 삶은 삶으로 물려주고 물려받을 뿐, 책으로는 가르치지 못하고 물려주지 못합니다. 책으로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합니다. 학교에서는 아무것도 못 느끼게 합니다.


.. 시인들은 언어로 시를 구축하지만 아이들은 생활에서 이미 얻은 시를 기술하는 것이다 … 아이들의 성장은 어디까지나 생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 아이들의 시는 작품으로서 완전한 것보다 그 시를 획득하는 노력과 자세를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이다. 시인의 시는 예술이요 문학이지만, 어린이의 시는 문학이기 전에 교육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 우리는 아이들이 시인이 되기를 원하고 있는가? 시를 쓰는 직업인이 되기를 원하고 있는가? 아니다. 우리는 마음이 정직하고 행동이 순진하고, 용감하고, 인간성이 풍부하고, 개성이 뚜렷한 창조적 인간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비 개인 하늘을 바라보았을 때 그 아름다움에 놀랄 줄 아는 사람, 발에 밟힌 한 마리의 곤충을 마음 아파하고, 절름발이 거지 아이를 보고 비웃고 놀리고 돌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리고, 불행한 사람이 있는 까닭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 괴로운 일을 하면서도 그냥 괴로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부모 형제와 남들과의 관계에서 그 무엇을 생각하는 사람, 그리하여 생활을 창조해 가는 사람, 이런 인간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  (66, 78∼79쪽)


  학교는 왜 있을까요. 학교에서는 아무것도 못 가르치는데 학교는 왜 있을까요.


  나도 참 궁금합니다.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참말 아무것도 없는데, 학교는 왜 이다지도 많고, 학교를 짓고 지키느라 왜 이렇게도 많은 돈을 들여야 할까요. 가만히 보면, 군대도 이와 같아요. 군대는 평화를 지켜 주지 않아요. 군대는 전쟁을 하려고 미리 갖추는 무기일 뿐이에요. 전쟁을 벌이려고 군대를 두지, 평화를 지키려고 군대를 두지 않아요.


  그러니까, 학교도 군대도 사람들을 바보로 만드는 것들 아니랴 싶어요. 잘 보셔요.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모두 도시로 갑니다. 시골에서 태어나도 도시로 가고, 도시에서 태어나도 도시에 남습니다. 학교를 다니며 시골에서 즐겁게 살아가거나 일하거나 사랑하는 아이가 아주 드물어요.


  학교에서는 오직 ‘도시에서 일자리 얻어 혼자 살아남는 법과 규칙’을 가르칩니다. 학교에서는 오직 지식을 다룹니다. 학교에서는 삶을 다루지 않습니다. 학교에서는 삶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학교에서는 사랑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학교에서는 사랑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학교에서는 꿈을 키우지 않습니다. 학교에서는 꿈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학교라는 곳은 시험공부만 시킵니다. 학교라는 곳은 대학교만 보여줍니다. 학교라는 곳은 시험점수만 따집니다. 학교라는 곳은 시험점수에 따라 아이들을 다룹니다. 학교라는 곳은 숫자와 시험과 점수와 대학교 아닌 다른 모든 것을 아이들이 못 보고 못 느끼고 못 누리도록 가로막습니다.


  삶을 배우려면 학교를 안 다닐 노릇입니다. 밥을 맛나게 지어 이웃과 나누고 싶다면 학교를 떠날 노릇입니다. 옷을 곱게 지어 식구들과 나누고 싶으면 학교와 멀어질 노릇입니다. 집을 튼튼하게 지어 내 사랑하는 곁님과 오순도순 살림을 꾸리고 싶으면 학교 아닌 보금자리를 찾아 내 빛을 가꿀 노릇입니다.


.. 시가 아이들의 생활에서 우러난 감정으로 씌어지는 것이라면, 일부러 시를 쓰려고 찾아다녀서는 안 된다. 그러니 집에서 밥을 짓다가, 혹은 심부름을 가는 길에서, 또는 동생을 등에 업고 들에서 돌아오는 어머니를 기다리며 보고 듣고 생각한 것을 그때 그때 감동이 식기 전에 시로 써 두는 일은 시를 쓰는 아이들에게 가장 바람직한 일이다 … 작품이 아무리 시에서 멀어져 있다 하더라도, 거기 좋은 점을 찾아낼 수 있으면 그것을 칭찬해 주는 것이 좋다 … 형식에 내용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용에 형식을 맞추어야 한다. 아니, 내용이 나타나면 그것이 그대로 형식이 되는 것이다 … 서정시는 단순한 마음의 색상을 뒤적거리는 모방과 유형에서 벗어나 생활을 노래하고 생활을 얘기하는 그 속에서 보다 건강한 세계를 전개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 시의 창조, 그것은 어린이의 경우 결코 꾀나 재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손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온몸과 마음으로 이뤄지는 행위인 것이다 ..  (93, 97, 103, 130∼131, 135쪽)


  숨을 쉬어야 목숨입니다. 사람도 짐승도 숨을 쉬어야 살아갑니다. 숨을 쉬지 못하면, 1분 아닌 10초만, 아니 1초라도 숨을 쉬지 못하면 모두 죽습니다. 바람이 없는 곳에 1초만 있어 보셔요. 바로 죽지 않겠어요? 숨을 몇 분 동안 참을 수 있다지만, 숨은 허파로만 마시지 않아요. 살갗도 숨을 마시고, 머리카락도 눈알도 발가락도 숨을 마셔요. 우리는 바람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살아가요. 바람이 없으면 커다란 궁궐이건 수십 억짜리 아파트이건,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물을 마셔야 목숨입니다. 사람도 짐승도 물을 마시며 살아갑니다. 벌레도 새도 물을 마십니다. 물이 없으면 어떤 목숨도 살아남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를 돌아보셔요. 오늘날 우리 도시를 바라보셔요. 깨끗한 바람이란 없어요. 맑은 물이란 없어요. 흐르는 바람과 물이어야 깨끗하고 맑은데, 우리 사회와 우리 도시는 바람도 물도 흐르지 못합니다. 바람은 자동차 배기가스와 공장 매연과 발전소 쓰레기덩이 때문에 더러워집니다. 물은 자동차에서 나오는 쓰레기와 공장이랑 발전소가 버리는 쓰레기와 골프장과 논밭에 뿌리는 농약 때문에 더러워집니다.


  경제개발 안 한대서 나라가 무너지지 않아요. 깨끗한 바람과 맑은 물이 없으면 나라가 무너져요. 수출을 많이 하거나 문화상품 많이 만들어야 나라가 발돋움하지 않아요. 바람이 깨끗해야 하고 물이 맑아야 합니다. 바람이 지저분하고 물이 더러우면, 수백억이나 수천억이 우리 손에 있다 한들 하루조차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아이들은 아름답게 살아갈 길을 배워야 합니다. 아이들은 사람답게 꿈을 키우는 빛을 배워야 합니다. 아이들은 착하게 사랑하는 살림살이를 배워야 합니다.


  아이들은 직업인이 되어야 하지 않아요. 아이들은 전문가나 학자가 되어야 하지 않아요. 아이들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살림꾼이 되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오롯한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 실제로 보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렇게 보고 생각한 것처럼 일부러 어린애 흉내를 내어 보이는 것이 ‘동시’라는 것입니다. 이런 거짓스러운 ‘동시’를 짓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해야 합니다 … 우리도 이와 같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을 눈에게, 바람에게, 구름에게, 나무에게, 새와 벌레에게 해 봅시다 … 이 시는 사실을 그대로 쓴 것뿐인데 지은이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실 그 자체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 터서 갈라져 피가 묻은 손 이야기가 이렇게 훌륭한 시로 된 것은, 거기 생활과 마음의 진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피가 나도록 일하던 그 손으로 이 시를 썼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겪을 수 있는 조그만 일, 지나가 버리면 곧 잊어버리고 말 조그만 마음의 움직임도 시가 될 수 있습니다 … 자기 몸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더라도 남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가치 있는 시를 쓸 수 없습니다 … 우리들에게 남겨진 단 하나의 희망인 이 어린이들은 지금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엇을 아름답다고 보고 무엇을 괴로워하고 무엇을 미워하고 있는가 ..  (161, 174, 178, 182, 189, 200, 246쪽)


  이오덕 님이 쓴 어린이문학 비평인 《아동시론》(굴렁쇠,2006)을 읽습니다. 어린이한테 시쓰기와 시읽기를 알려주는 길잡이책입니다. 시란 무엇인가 하고 밝힙니다. 시쓰기와 시읽기란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시를 쓰는 즐거움과 시를 읽는 기쁨을 찬찬히 들려줍니다.


  문학으로 해야 하는 시가 아닙니다. 문학을 누리자는 시읽기가 아닙니다. 문학을 창작하도록 이끄는 시쓰기가 아닙니다.


  삶을 밝히는 시쓰기입니다. 삶을 누리는 시읽기입니다. 삶을 보듬는 시입니다. 삶을 가꾸는 시예요.
  아이들한테 시빛을 건네면서 어른들도 스스로 시빛을 품자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동시론》이에요. 아이들은 아이답게 ‘아이 마음’을 곱게 가꾸고, 어른들은 어른답게 ‘아이로 태어나 자라서 어른 되어 살아가는 마음’을 곱게 살찌우자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동시론》입니다.


.. 생활 속에 시가 넘치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책상에 엎드려 시의 모조품을 만들기에 고심하겠는가 … 지금까지 아이들이 동시인들의 흉내를 내어 써 오던 동시란 것은 성장이란 것이 있을 수 없었다. 만약 무슨 변화란 것이 있었다면 늘어난 말재주와 잔꾀 부리는 기술이었다 … 어린 생명들을 위축 말살시키는 이 거짓 놀음의 동시 교육이란 것은, 겉치레와 선전만을 능사로 하는 입신출세주의 교육의 한 표본으로서, 그것은 수험 준비를 위해 단편적 지식을 암기하는 이상의 해독을 아이들에게 주는, 교육의 공해 지대가 되어 있는 것이다 … 명랑하고 배부른 시를 쓰는 것이 승리가 될 수 없고, 비통한 마음을 시로 쓴다고 패배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가령 농촌의 빈궁한 아이들이 도시의 부유한 아이의 작품을 흉내내는 것이야말로 패배라 할 것이다. 그것은 생활뿐 아니라 시까지 패배한 것으로 보고 싶다. 또한 현재의 도시 아이들이 옛날의 전원 풍경 같은 것을 어른들 따라 흉내내어 쓰는 것도 우스운 일임은 말할 것도 없다 … 도시적이라는 것과 농촌적이라는 것의 차이는 소비생활을 위주로 하는 안일한 생활 태도와 노동에 종사하는 인간의 생활적이고 합리적인 생활 태도의 차이다 ..  (211, 214, 215, 222∼223, 261쪽)


  문학을 읽지 마요. 문학이 아닌 삶을 읽어요. 문학을 하지 말아요. 문학이 아닌 삶을 일구어요. 문학을 쓰지 말아요. 문학이 아닌 삶을 써요. 문학상을 마련하거나 문학상을 주고받지 말아요. 삶을 빛내는 노래를 부르고, 삶을 밝히는 조촐한 두레와 품앗이와 잔치를 벌여요.


  어린이문학을 하지 말아요. 어린이와 함께 노래를 불러요. 어린이문학을 비평하지 말아요. 어린이와 함께 삶을 읽어요. 어린이문학이라는 껍데기를 내려놓아요. 어린이문학이 아닌, 어린이와 어른 모두 즐겁고 아름다울 삶을 바라보아요.


  아이들더러 학교에 걸어서 오도록 하면서 어른들은 자가용을 몰고 학교 안까지 들어오지 말아요. 어른들이 자가용을 몰고 학교 안까지 들락거리니까 아이들한테까지 노란버스를 태워 집까지 오가도록 시키는데, 제발 이러지 말아요. 어른도 아이도 두 다리로 걸어야지요. 학교를 다닌다면, 집과 학교 사이를 두 다리로 걸어서 다녀야지요. 두 다리로 걸어서 다니지 못할 만큼 아주 먼 곳에 집이 있다면 어떡해야 할까요. 학교 곁으로 집을 옮기든, 집 가까운 데에 새로운 학교를 마련하든 해야겠지요. 집과 마을과 학교를 온몸으로 부대끼고 마주하도록 모두 걸어서 다녀야지요.


  학교에 맞추어 아이들이 먼길을 다녀야 하지 않아요. 아이들한테 맞추어 학교를 두어야지요. 교과서에 맞추어 아이들이 따라오게 하지 말아요. 아이들한테 맞추어 교과서를 고쳐야지요. 입시지옥에 맞추어 아이들을 들볶지 말아요. 아이들한테 맞추어 우리 사회를 바로세워야지요.


  말랑말랑 말마디만 이쁘장한 글을 써서 동시나 시라고 아이들한테 읽히지 말아요. 아이들이 삶을 사랑하고 아끼며 노래할 수 있는 착하고 참다운 빛을 글로 담아서 함께 읽어요. 아이들 스스로 풀과 나무와 하늘과 비와 구름과 벌레와 짐승과 새와 바다와 들과 숲과 멧골을 아끼고 사랑하도록 북돋우는 이야기를 글로 엮어서 함께 읽어요. 아이들이 즐겁게 밥을 짓고 옷을 지으며 집을 짓는 길을 차근차근 보여주고 나누는 넋을 글로 담아서 함께 읽어요.


.. 경상도 어느 산골 아이가 쓴 시라면 경상도 그 어느 산골의 냄새가 나고, 전라도 어느 바닷가 아이가 쓴 시라면 전라도 어느 바닷가의 맛이 나는 것이다. 그러하거늘, 경상도 산골 아이가 썼는지 서울 아이가 썼는지 모르도록, 어느 곳의 아이라도 쓸 것 같은 얌전한 표준말로 쓴 것이라면, 그런 것은 도저히 시가 될 수 없는 무의미한 언어의 나열밖에 안 될 것이 뻔하다 … 저학년에서는 처음부터 줄이 짧은 시를 보여줄 필요가 없이 시를 읽어 주어서 감상시킬 필요가 있다 … 여기 어떤 상급 학년의 담임 교사가 있어 입신양명식 교육을 무시하고 비상한 노력을 기울여 아이들의 이런 자기를 외면하는 태도를 시정하는 참된 교육을 실천한다고 할 때, 그 아이들로부터 놀라운 시가 나올 수 있을 것이고, 그리고 그런 시에는 아이들의 일상 용어가 아무 두려움도 주저도 없이 자유롭게 씌어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  (228, 239, 245쪽)


  아이들을 사랑하면서 시 한 줄을 써요. 아이들을 사랑하면서 시 한 줄을 읽어요. 문학만 따로 하는 사람들이 쓴 시 말고, 삶을 가꾸는 우리 스스로 시 한 줄을 써서 아이하고 함께 읽어요. 시만 따로 쓰는 사람들이 쓴 시는 내려놓고, 삶을 사랑하는 우리 스스로 시 한 줄을 쓰고 나서 아이와 함께 정갈하게 옮겨적어 보고 가락을 입혀 함께 노래로 불러요.


  시는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누구나 마음속에 있는 시를 길어올리면 됩니다. 시는 우리 삶에 있습니다. 누구나 삶에서 시를 만나면 됩니다. 시는 우리 사랑으로 자랍니다. 누구나 사랑을 빛내면서 시를 밝히면 됩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시가 샘솟아요. 자전거를 타고 들길을 달리면서 시가 흘러요. 밥을 짓고 밥상을 차리며 도란도란 이야기꽃 피우며 밥을 먹는 사이 시가 감돌아요.


  문학잡지에 선보이는 시가 아니라, 살아가며 즐겁게 부르는 시예요. 문학상을 타야 하는 시가 아니라, 사랑하며 어깨동무하는 시예요.


  영양소를 아이한테 먹이지 마요. 사랑으로 지은 밥을 함께 먹어요. 졸업장을 아이한테 들이밀지 말아요. 사랑으로 살아가는 하루하루 다 함께 누려요.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한다는 말을 아이한테 하지 말아요. 돈은 언제나 넉넉히 있어요. 삶은 아주 많은 돈이 있어야 누리지 않고, 삶은 아주 많은 돈이 나한테만 있을 때에 아름답지 않아요. 능금 한 알은 햇볕과 빗물과 바람과 흙을 먹고 자라지, 돈을 먹고 자라지 않아요. 딸기 한 톨은 햇볕과 빗물과 바람과 흙을 먹으며 늦봄에 바알갛게 익지, 졸업장을 먹고 익지 않아요.


.. 농촌 사람들의 정신은 완전히 도시에 가 있다. 어떻게 해서라도 도시에 나가 사는 것이 그들의 소원이다. 아이들도 어른들 따라 그런 마음으로 살아간다 … 봄이 되어 마늘에 싹이 난다는 것은 아무것도 이상할 것이 없는 평범한 일인가? 아니다. 농촌에서 살아가는 아이들로서 그것은 커다란 놀라움이요, 즐거움이다 … 눈이 쌓이고, 얼어붙을 듯한 바람이 날뛰던, 그 말라죽은 잔디밭에 어느새 돋아났는지 짙은 자줏빛으로 피어난 할미꽃을 들여다보는 기쁨! 그 기쁨은 살아가는 목숨의 기쁨이요 생명의 신비와 존귀함을 느끼는 기쁨이다 … 음악은 살아가는 데 기쁨과 용기를 주는 것이어야 한다. 경망한 구호가 되어서는 안 되고, 지혜와 이성을 잠재우는 마취제 노릇을 해서는 안 되고, 열등의식을 조장하여 노예 감정을 길러도 아니 된다 … 생활이 없는 작품은 필연적으로 모조품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 우리는 끈질긴 인내와 노력으로 아이들을 인간스럽게 키워 가도록 해야 할 것이고, 그러기 위해 시 교육을 알뜰히 해 나가야 할 것이다 ..  (267, 270, 280, 287, 340, 341쪽)


  아이들은 사람으로 자랄 때에 아름답습니다. 어른인 우리들 또한 사람으로 살아갈 때에 아름답습니다. 어른인 우리들부터 사람으로 살아가면, 아이들은 우리 곁에서 사람다운 빛을 뽐내면서 무럭무럭 자랍니다. 어른인 우리들부터 사람으로 살지 않으면, 아이들은 입시지옥에서 시험기계가 될 뿐입니다. 어른인 우리들부터 돈에만 얽매인 채 어깨동무를 안 한다면, 아이들은 취업지옥을 잇달아 맞이하면서 삶은 온통 잊고 맙니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를 써요. 나와 곁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를 읽어요. 나와 곁님이 낳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를 나눠요. 우리 아이들이 씩씩하게 자라서 새로운 짝을 만나고 새로운 아이를 낳을 적에 사랑씨앗 이어질 수 있도록 시를 빛내요.


  시를 쓸 때에 삶을 사랑스레 씁니다. 시를 읽을 때에 삶을 사랑스레 읽습니다. 시를 쓰며 삶을 사랑스레 가꿉니다. 시를 읽으며 삶을 사랑스레 나눕니다. 4346.12.26.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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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글 바로 쓰기 1 우리 글 바로 쓰기 1
이오덕 지음 / 한길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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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길다 싶은 느낌글이니 느긋하게 읽어 주셔요.

후루룩 읽으려면... 굳이 안 읽어 주셔도 됩니다 ^^;;

차분하게 천천히

사랑 담아서 읽어 주실 분만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

 

이오덕을 읽는다 15

 


숲말에서 찾는 사랑·빛·꿈
― 우리 글 바로쓰기 1
 이오덕 글
 한길사 펴냄, 2007.9.10.

 

 

※ 책풀이 ※
1989년에 1쇄를 내고 1992년에 고침판을 내놓은 《우리 글 바로쓰기》. 이오덕 님이 쓴 《우리 글 바로쓰기》 첫째 권이 나오기 앞서까지, 한국사람 가운데 한국말을 언제나 새롭게 배우고 돌아보면서 말을 하고 글을 써야겠다 하고 생각한 사람이 아주 드물었다. 책으로 읽고 신문으로 살피며 학교에서 배우는 대로 말을 하거나 글을 쓰면 될 뿐으로 여겼다. 어릴 적에 어느 만큼 어버이와 둘레 어른한테서 말을 배우면, 앞으로는 다시 말을 더 배울 일이 없다고 여겨 버릇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몇 가지 일본말을 고치자는 대목은 이야기했지만, 막상 이마저도 제대로 고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바로잡을 생각마저 안 하는 사람이 숱하게 있었다. 겉보기로는 모두 ‘한국말’이거나 ‘한국글’로 보이지만, 속살을 들여다보면 ‘한국말’도 아니요 ‘한국글’도 아닌 줄 깨달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 《우리 글 바로쓰기》가 나온 뒤에는 달라지거나 나아졌을까? 글쎄, 모를 노릇이다. 생각을 연 사람은 지난날에도 생각을 열었고 오늘날에도 생각을 연다. 생각을 안 연 사람은 지난날이나 오늘날이나 생각을 안 연다. 게다가, 생각을 안 연 채 이러한 책을 읽으면 더더욱 스스로 삶과 넋과 말을 가다듬지 못한다. 어느 책을 읽더라도 생각을 열고 마음을 살찌우려고 해야 스스로 새롭게 거듭나서 아름다운 길을 걸어갈 수 있다. 《우리 글 바로쓰기》라는 책은 한국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사람들이 슬기롭게 말하고 마음을 기울이면서 아름답게 살아가기를 비는 꿈을 담는다. 이 책 읽으려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여러 차례 되읽으려는 사람이라면, 바로 이 대목, 이 책에 담은 꿈과 사랑을 헤아려서 받아먹을 수 있기를 빈다.

..


  1989년에 처음 나온 이오덕 님 《우리 글 바로쓰기》는 ‘우리 글(말) 바로쓰기’를 말합니다. 우리 글 바로쓰기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 보면, 무엇보다 이 말이 먼저 튀어나옵니다. “우리 글 바로쓰기 = 우리 삶 바로쓰기”가 될 테지, 하고.


  이오덕 님이 쓴 다른 책을 살피면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이 있습니다. 이오덕 님은 늘 ‘삶을 가꾸는’이라는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글쓰기를 하든 교육을 하든 문학을 하든 문학비평을 하든, 언제나 ‘삶을 가꾸는’을 앞에 붙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글 바로쓰기라 할 때에도 ‘삶을 가꾸는 우리 글 바로쓰기’입니다.


  그저 글만 바로써서는 글조차 바로쓰지 못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껍데기만 바로쓰는 듯 시늉을 하더라도 속내까지 바로서지 못해요. 우리 글을 바로쓰자는 이야기는 겉으로 드러나는 한글로만 잘 쓰자는 소리가 아닌, 우리 삶을 바로세우면서 우리 넋을 바로잡자는 뜻입니다.


  삶과 넋과 말은 하나이거든요. 삶 따라 넋이 살고, 넋 따라 말이 흐릅니다. 삶을 가꾸는 사람은 언제나 넋을 가꿉니다. 그렇겠지요. 스스로 삶을 아름답게 가꾸려는 사람이 넋을 아름답게 안 가꿀 까닭이 없어요. 사회운동을 하든 교육운동을 하든 정치운동을 하든, 삶을 바로세울 때에 넋이 바로서요. 그리고, 이 흐름이 고스란히 흐르고 또 흘러서 말을 바로세웁니다.


  다시 말하자면, 말을 바로세우지 않는 모든 운동은 거짓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삶과 넋을 바로세우지 않았기에 말을 바로세우지 못하거든요. 삶과 넋을 바로세우면 말은 저절로 바로섭니다. 말을 바로세우지 못한 매무새라면 아직 삶과 넋을 바로세우지 못했다는 뜻이요, 입으로는 이런 운동 저런 혁명을 외친다 하더라도, 몸과 마음과 속내로는 아무것도 안 한다는 뜻이에요.


.. 우리는 누구든지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부모로부터 평생을 쓰게 되는 일상의 말 대부분을 배웠다. 그러나 학교란 곳에 들어가고부터는 집에서 배운 말과는 바탕이 다른 체계의 말을 익혀야 했다. 그래서 부모한테서 배운 말을 부끄럽게 여기고 잊어버리게 하는 훈련을 오랫동안 받았던 것이다 … 이제 이 나라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모국어를 가르치는 일조차 아예 그만두었다. 날마다 텔레비전을 쳐다보면서 거기서 들려오는 온갖 잡탕의 어설픈 번역체 글말을 듣고 배우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진다 … 오늘날 우리가 그 어떤 일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이 외국말과 외국말법에서 벗어나 우리 말을 살리는 일이다 … 말이 아주 변질되면 그것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 한번 잘못 병들어 굳어진 말은 정치로도 바로잡지 못하고 혁명도 할 수 없다. 그것으로 우리는 끝장이다. 또 이 땅의 민주주의는 남의 말 남의 글로써 창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말로써 창조하고 우리 말로써 살아가는 것이다 … 먹는 것·입는 것·신는 것·잠자는 것, 그리고 보는 것·읽는 것·듣는 것이 모조리 서양 것이요 남의 나라 것이니, 말인들 어찌 우리 것이 남아 있겠는가? 이것이 모두 학교교육을 받았다는 신사 숙녀들의 꼴이다 ..  (6, 7, 8, 252쪽)


  한국말을 슬기롭게 쓰는 일이란,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땅에서 살아가는 내 하루를 슬기롭게 가다듬는 일입니다. 한국말을 아름답게 쓰는 사람은 한국사람으로서 아름답게 살아갑니다. 한국말을 사랑스레 쓰는 사람은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땅을 아름답게 가꿉니다. 오늘 이 나라가 아름답다면, 사람들이 말을 아름답게 쓰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나라가 아름답지 않다면, 사람들이 말을 아름답지 않은 모습 되도록 쓰기 때문입니다.


  그리 멀지 않던 지난날까지, 이 나라 찾아오는 나라밖 손님들은 이 나라를 아름답다고 말했고, 조용한 아침나라라고도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지난날에는 이 나라 사람들 거의 모두 시골에서 흙을 만지며 조용히 살아갔어요. 임금님이나 지식인이나 관리도 있었을 테지만, 이들 숫자는 겨우 한줌밖에 안 되었어요. 거의 모든 이 나라 사람들은 시골사람으로서 시골말 쓰고 시골살이 누리며 시골빛을 나누었습니다. 삶과 넋과 말이 오롯이 시골내음입니다.


  나라밖 사람들은 바로 이 나라 시골사람 시골빛과 시골넋을 읽으며 ‘아름답구나!’ 하고 노래했습니다.


  오늘날 이 나라는 어떤 모습일까요? 오늘날 한겨레는 어떤 빛일까요? 오늘날 한국은 어떤 삶과 넋과 빛일까요? 오늘날 이 나라는 아름다움하고 얼마나 가까울까요? 오늘날 우리들은 사랑스러움하고 얼마나 어깨동무를 하는가요?


  꼭 시골빛이라서 가장 아름답지 않습니다. 이제 이 나라 시골마을 가만히 돌아보면, 어느 시골에서나 농약과 화학비료 엄청나게 써요. 농약과 화학비료로 땅을 무너뜨리면서 더 많은 농약과 화학비료를 쏟아부어요. 더 거두고 더 뽑아올리려 합니다. 흙을 살리거나 살찌우는 길을 안 걷습니다. 흙하고 등지고 흙빛을 잃습니다.


  시골사람은 시골마을에서 시골노래 안 부릅니다. 시골에서도 도시사람과 똑같이 텔레비전 연속극과 뉴스와 스포츠를 봅니다. 시골 아이도 도시 아이와 똑같이 컴퓨터게임을 합니다. 요즈음 시골은 시골빛이 없어요. 시골빛이 사라지고 시골노래 사그라들었으며 시골사랑 자취를 감춥니다. 그러면 도시는? 오늘날 이 나라 도시에는 어떤 빛이 있을까요? 이 나라 도시에는 어떤 사랑과 꿈이 흐드러질까요?


  그러니까, 오늘날 이 나라 도시사람들은 어떤 ‘삶·넋·말’로 하루를 누리는가요. 어떤 ‘삶·넋·말’로 이웃을 사귀고 사랑을 속삭이며 아이들을 보살피는가요. 시골에서 도시로 아이들 보내는 어른들은 어떤 ‘삶·넋·말’을 아이들한테 물려주는가요. 도시와 시골에서 교사로 일하는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대학입시 아닌 어떤 ‘삶·넋·말’을 가르치는가요.


.. 나도 어린아이들의 말과 글에서 우리 말의 순수함을 배웠다. 그래서 어른들이 쓰는 글과 말이 잘못된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하여 이 책을 내게 되었다 … 글을 써 놓고는 언제나 《쉬운 말 사전》을 옆에 두고 글이 쉽게 읽히도록 고치고 다듬지만 그래도 수십 년 동안 길이 든 글장이의 못된 버릇이 자꾸 나와 어렵게 쓰고 잘못 쓰고 한다. 어찌 나뿐이겠나 … 누구나 다 그런데 하고 잘못 쓰는 것을 그대로 보아 줄 것이 아니라 기회 있는 대로 서로 잘못을 알리고 충고하고, 그렇게 충고하면 또 고맙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 … 누구든지 잘 알고 있는 중국글자말이라도 순수한 우리 말이 있으면 중국글자말을 피하고 순수한 우리 말을 써야 한다. 그 까닭은, 우리 말이 더욱 부드럽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리고 귀로 들었을 때나 글자로 썼을 때 더 알기 쉽기 때문이다 … 일제시대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일본말 ‘ほかならな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빤히 드러나는 일본말을 쓰지 않았던 것인데, 지금에 와서는 이런 괴상한 말을 써도 일본말인 줄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그래서 일본말을 잘못 직역한 글(‘다름이 아니다’)을 읽고는 그것이 우리 말인 줄 알고 그대로 또 받아 쓰니 이렇게 되는 것이다 ..  (9, 10, 55, 194쪽)


  삶이 일그러지면 넋이 일그러집니다. 넋이 일그러지니 말이 일그러집니다. 아이들 삶은 입시지옥에서 찌들고 다치고 아프고 시들어 괴롭습니다. 이 아이들 넋 또한 찌들고 다치고 아프고 시들어 괴로워요. 아이들은 그만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해요. 참 어처구니없어요. 푸르며 싱그러운 나이에 목숨을 끊다니요.


  삶이 없고 넋이 없으니 말이 없는 아이들이에요. 아이들 말이 왜 거친가요? 바로 어른들 말이 거칠기 때문입니다. 청소년범죄가 왜 생기나요? 바로 어른들이 범죄를 저질러서 이 모습을 고스란히 배우기 때문입니다.


  어깨동무하는 마을 일구는 어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어깨동무하는 꿈을 물려받습니다. 두레와 품앗이로 노래하는 마을 가꾸는 어른들 사이에서 자라는 아이는 두레와 품앗이로 노래하는 사랑 이어받습니다.


  입시지옥에 갇힌 채 아이들 키우는 어버이는 아이들한테 무엇을 보여주거나 가르칠까요. 이 아이들 자라 어른 되면 어떤 삶 누릴까요. 이 아이들 어른 되면 저희 어릴 때하고 똑같이 이녁 아이들을 입시지옥 쳇바퀴에 새삼스레 집어넣겠지요. 너무 뻔하고 너무 환하며 너무 마땅한 굴레입니다. 이런 쳇바퀴에서는 쳇바퀴와 똑같은 말이 흐릅니다. 이런 굴레에서는 꽉 막히거나 닫히거나 차갑거나 딱딱한 말이 흐릅니다.


  말만 예쁘게 쓰지 못해요. 넋이 예쁘지 않으니 말이 예쁘지 못해요. 말만 번드레하게 쓰지 못해요. 삶이 빛나지 않는데 말이 빛날 수 없어요.


  우리 글을 바로쓴다는 일이란, 우리 삶을 바로쓴다는 일입니다. 바르게 살고 바르게 생각하며 바르게 사랑할 때에 바르게 말합니다. 독재정권이 부르짖은 ‘바르게 살기’가 아닌 ‘참삶’ 가꾸는 바른 길이에요.


  참삶이란 참다운 삶입니다. 참다운 삶이란 착한 삶입니다. 착한 삶일 때에 고운 삶으로 이어요. 참다운 삶을 이으면서 참다운 넋 됩니다. 참다운 넋으로 참다운 말을 하지요. 참다운 말이란 참다운 사람으로 살아가며 나눌 말입니다. 이러한 말이 될 때에 착한 말이에요. 착한 말이란 착한 넋으로 주고받는 말이에요. 착하게 일하고 착하게 놀며 착하게 어깨동무하는 사람이 착한 말을 가꿉니다. 아이도 어른도 다 함께 착한 삶 되어 착한 넋 일구면서 착한 말 가다듬을 때에 즐겁게 웃어요. 착한 말에서 고운 말로 흐르면, 어느새 환하게 노래합니다. 고운 말이 고운 넋을 드러내고, 고운 넋으로 고운 삶 밝힙니다.


  이오덕 님은 《우리 글 바로쓰기》에서 참답고 착하며 고운 삶을 찾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를 찾아서 들려줍니다. 말만 그럴듯하게 꾸미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겉치레만 그럴싸하게 씌우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죽은 말 섣불리 되살리려 힘쓰지 말고, 한국말 아닌 한자말(중국말)에 기대지 말며, 일제강점기 찌꺼기와 몸통을 말끔히 털어낼 길을 씩씩하게 걸어가자고 얘기합니다.


  한국사람이니 한국사람답게 살아갈 노릇이에요. 중국말에 기댈 까닭 없이 한국말을 살찌우면 됩니다. 한국사람이니 한국땅을 가꿀 노릇이에요. 미국에 기댈 까닭 없이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땅 가꾸면 됩니다.


.. 우리가 몰아내어야 할 중국글자말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글자로 썼을 때나 입으로 말했을 때 그 뜻을 알 수 없거나, 이내 알아차릴 수 없는 말이다 … 이 ‘燒死’란 중국글자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 글자로 ‘소사’라고 쓰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타 죽어’ 이렇게 알기 쉬운 우리 말을 쓰지 않는 까닭이 어디 있는가 … 입으로 말했을 때 그 뜻을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중국글자말이 많다. 본래 중국글자말은 민중들이 일하는 삶 속에서 생겨나고 쓰인 것이 아니라, 양반이나 관리들·학자들이 읽고 있는 글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 상을 주는 것도 받는 것도 모두 ‘수상’이니, 이런 말은 이제 안 쓰는 것이 옳다. ‘상을 주다’, ‘상을 받다’로 쓰면 쉽게 분명해진다 … 그렇다면 (‘준용하천’을) ‘작은 내’라고 적어 놓으면 얼마나 좋은가? 이렇게 알기 쉬운 말로 적어 놓으면 행정과 행정관리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가 … 이 ‘조황’이란 말은 낚시꾼들이 쓰는 말인지 모르지만, 어느 사전을 찾아봐도 나오지 않는 이런 중국글자말은 안 쓰는 것이 좋겠다 ..  (19, 25, 30, 34, 49, 55쪽)


  우리가 이 나라에서 쓰는 모든 말은 맨 처음에는 시골사람이 지었습니다. ‘우리’라는 말도 ‘너’와 ‘나’라는 말도, ‘가다’와 ‘보다’와 ‘먹다’라는 말도 시골사람이 지었어요. 지식인은 ‘공동체’를 말하지만, 시골사람은 그저 ‘마을’을 말해요. 지식인은 ‘연대’를 말하지만, 시골사람은 그냥 ‘어깨동무’를 말해요.


  사람을 살리는 모든 말이 시골에서 태어나요. 밥과 옷과 집은 처음부터 시골에서 흙을 일구며 흙에서 얻었습니다. 흙에서 자란 곡식과 열매를 먹지요. 흙에서 자란 풀에서 실을 얻어 옷을 깁지요. 흙에서 자란 나무를 베어 집을 짓지요. 흙이 있어야 삶이 있고, 흙이 있기에 사람이 있어요. 흙에서 삶과 사람이 태어나니, 모든 말은 시골사람이 흙하고 사귀면서 지었어요.


  이와 달리 요즈음은 일본과 중국과 미국과 서양에서 들여오는 물질문명으로 삶이 바뀝니다. 이 흐름에 따라 말 또한 이러한 모습을 좇습니다. 삶과 넋과 말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 시골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꿈이 ‘도시로 가서 살기’입니다. 1960∼70년대뿐 아니라 2010년대에도 시골 아이는 시골에 남으려 하지 않아요. 도시로 가려 해요. 시골에서 지내도 도시사람과 똑같이 텔레비전 보고 자가용 타며 제도권학교 입시지옥 똑같아요. 시골 아이라 하지만, 요새는 시골일 거들지 않아요. 시골 아이 또한 나락을 언제 심고 돌보며 베는지 몰라요. 시골 아이 가운데 나락 말리기를 아는 아이 드물어요. 이삭이 무언지 아는 시골 아이가 아주 드물어요. 쑥꽃이나 부추꽃을 아는 시골 아이조차 드물어요. 이제 시골 아이한테는 시골삶도 시골넋도 시골빛도 없습니다. 시골말이 없습니다. 도시 아이와 똑같은 ‘도시말’ 씁니다.


  도시 아이도 도시말 쓸 테지만, 시골 아이건 도시 아이건, 스스로 어떤 말인 줄 깨닫지는 못해요. 뿌리가 없는 삶에 뿌리가 없는 넋이고 뿌리가 없는 말입니다. 이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면 어떤 말을 쓸까요? 이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어 아이를 낳으면 어떤 말을 물려줄까요? 어쩔 수 없이, 뿌리가 없는 말을 물려주고, 뿌리가 없는 넋을 물려줄 테며, 뿌리가 없는 삶을 다시금 물려주고 말겠지요.


.. ‘위치하고 있다’에서 ‘위치하고’란 말은 전혀 소용이 없는 말이다. ‘있다’고 하면 될 것을 왜 ‘위치한다’고 쓰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글을 유식하게 쓰려고 하는 헛된 몸가짐이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바탕을 병들게 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 ‘자유’란 말은 ‘-롭다’, ‘-스럽다’를 붙여 그림씨로 쓰지, ‘-한다’를 붙여 움직씨로 쓰지는 않고 쓸 수도 없다. 왜 이렇게 우리 말법에도 어긋난 말을 제멋대로 쓸까? 어쩌다 시인들이 ‘자유한다’를 쓰는 것을 보지만, 이 말이 우리 말로 될 수는 없다고 본다 … 이 ‘가열차게’는 쓰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 까닭은, 이 말이 민중의 입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어려운 글을 쓰는 사람들이 쓰기 시작한 말이기 때문이다 … 중국글자말 다음에 또 같은 뜻의 다른 중국글자말이나 우리 말이 붙는 것은, 중국글자말이란 것이 얼른 그 뜻을 알아내지 못하는 말이 되어 있어서, 저절로 그 다음에 알기 쉬운 말을 더 붙이고 싶어하는 심리에서 오는 현상이다 … ‘심도 깊은’은 ‘심도 있는’이라고 하면 되지만, ‘심도’란 말은 안 쓰는 것이 좋으니 ‘깊이 있는’이든지 ‘깊은’ 하면 될 것이다. 이런 잘못된 말들이 모두 중국글자말을 즐겨 쓰는 데서 온다 … 국민학생들이 ‘매일마다’를 많이 쓰고 있는데, 알고 보니 학교의 선생님들이 쓰는 것을 아이들이 그대로 따르는 것이었다 … ‘날마다’ 하면 될 것을 왜 ‘매일’이라 쓰는가? 그러니까 ‘매일마다’가 생겨나는 것이다 ..  (84, 87, 88, 89, 90쪽)


  삶을 가꾸는 길을 걸어야 삶을 가꿉니다. 생각만 해서는 삶을 가꾸지 못합니다. 몸을 움직이고 마음을 함께 쏟아야 합니다. 흙을 만지야 흙빛을 압니다. 나무를 돌보고 사랑해야 나무빛을 압니다. 풀을 쓰다듬고 즐겨 뜯어서 먹어야 풀빛을 압니다.


  고운 옆지기하고 마음으로 사귀어야 서로 ‘마음을 알’아요. 마음으로 사귀지 않으면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삶을 가꾸는 길은 그야말로 삶을 가꾸는 하루를 누리는 길입니다. 말을 가꾸는 길은 그야말로 말을 가꾸는 하루를 누리는 길입니다.


  생각해야지요. 생각했으면 움직여야지요. 움직였으면 거듭나야지요. 거듭났으면 새롭게 사랑해야지요. 새롭게 사랑했으면 활짝 웃으며 노래해야지요.


  지난날 시골사람이 처음 말을 지을 적에는 모든 말이 노래였습니다. 작곡가나 작사가나 가수 따로 없어도 모두 노래꾼인 시골사람이었습니다. 시골지기는 노래지기였으며 말지기였어요.


  마음속에서 샘솟는 노래가 시나브로 흐릅니다. 마음속에서 샘솟는 노래는 말로 태어나면서 새로운 웃음 터뜨립니다. 새로운 웃음 터뜨리는 말이 하나둘 태어나면서 아이들도 새로운 사랑을 깨닫고, 아이들이 자라며 꾸준하게 새로운 사랑으로 새로운 말을 빚습니다.


  과학으로 물질문명을 만드니, 학문으로 말을 만들기도 하는데, 과학이나 학문은 오래 버티지 못해요. 자꾸 바뀌지요. 그래서, 과학이나 학문으로는 말을 가꾸지 못하고 살찌우지 못합니다. 삶으로만 삶을 살찌우니, 이러한 삶 아니라면 새말을 지었어도 오래도록 쓰지 못합니다. ‘바람’과 ‘해’와 ‘흙’이라는 낱말을 얼마나 오래도록 썼을까요. ‘사랑’과 ‘꿈’과 ‘사람’이라는 낱말을 얼마나 오랜 나날 썼을까요. 그런데 이런 낱말은 앞으로 수억 해 더 써도 질리거나 물리지 않아요. 아름답게 삶을 일구며 저절로 지은 낱말이기 때문입니다. 과학도 아니고 학문도 아닌 오직 삶이기 때문에 오래오래 푸른 숨결 잇습니다.


.. 이 말을 바로잡는 더 좋은 방법이 있다. 그것은 ‘일체’란 말도 쓰지 말고 순수한 우리 말로 쓰는 것이다. 모든 것, 온갖 것, 아주, 도무지, 전혀 들과 같이 그때그때 알맞은 우리 말을 골라 쓰면 얼마나 깨끗하고 분명하고 좋은가? 아름다운 우리 말을 두고 중국글자말을 쓰자니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 말법이 비슷해서 그대로 직역해 놓아도 대강의 뜻은 짐작할 수 있다는, 게으르고 성의 없고 책임감 없는 태도가 화를 불러일으킨다. 일본글의 본뜻이 잘못 옮겨지는 것이야 우리로선 그 잘못이 거기에 그친다고 하겠지만, 우리 말이 일본글을 따라 괴상하게 씌어지는 것은 예사일이 아니다 … 중국글을 읽을 때도 우리는 이 ‘於’ 자를 ‘에’ ‘에서’ ‘에게’ ‘부터’로 읽지, ‘-에 있어서’라고 하지 않는다. 일본보다 우리가 중국글을 먼저 썼지만, 옛날 어디에도 ‘-에 있어서’는 없다. 또 지금도 글을 읽지 않는 시골사람들은 이 말을 결코 쓰지 않는다. 이 말은 일본제국이 이 땅에 들어온 뒤에 일본글 공부를 한 사람들이 쓴 글에서 비로소 나타나게 된 것이다 ..  (97, 104, 118쪽)


  흙에서 자란 곡식과 열매를 먹고, 흙에서 자란 풀에서 실을 얻으며, 흙에서 큰 나무로 집을 짓습니다. 흙은 숲을 이루는 밑바탕입니다. 숲을 이루자면 흙이 있어야 합니다. 흙은 햇볕과 바람과 물이 있어 이루어집니다. 햇볕도 바람도 물도 없다면 흙이 없고, 흙이 없으면 숲이 없어요.


  사람뿐 아니라 모든 목숨은 해와 바람과 비와 흙이 있어 태어나 살아갑니다. 어느 한 가지라도 빠질 수 없어요. 해가 바람을 낳고 바람이 비를 낳으며 비가 흙을 낳습니다. 흙은 풀을 낳고 풀은 나무를 낳으며 나무는 숲을 낳아요. 그리고, 숲이 태어나고서 사람이 태어납니다.


  시골말이란 숲말입니다. 왜냐하면, 시골이 이루어지자면 숲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거든요. 사람은 시골에서 흙을 일구어 밥과 옷과 집을 얻어야 하는데, 사람이 일굴 만한 흙이란 푸르게 우거진 숲에 있어요. 숲에서 사람이 나고, 숲에서 짐승이 나며, 숲에서 벌레와 새가 나요. 숲에서 사랑이 나고, 숲에서 꿈이 나며, 숲에서 이야기가 나요.


  먼 옛날 어떤 사람이 ‘숲’이라는 낱말을 혀에 얹어 입으로 톡 내놓았을까요. 먼먼 옛날 어떤 시골사람이 ‘숲’이라는 낱말을 마음속 가득 넘실거리는 사랑으로 노래하며 지었을까요.


  시골에서 숲을 누리며 흙을 만지는 사람들이 짓는 낱말은 푸른 숨결 가득합니다. 이 낱말은 쓰면 쓸수록 아름답고 싱그럽습니다. 숲말을 누리는 사람은 숲넋을 누려요. 숲넋을 누리는 사람은 숲삶을 누리지요.


  숲에서는 쓰레기가 없어요. ‘쓰레기’라는 낱말조차 없습니다. 숲에서 빚은 숲말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언제까지나 모든 사람들 마음속에서 사랑씨앗처럼 자라는 말입니다.


.. 우리 말의 특성을 없이 보고 남의 남의 나라 말에 따라가려고 할 때 우리 말은 죽는다 … 흔히 쓰는 쉬운 입말이나, 좀 논리를 세워서 쓰는 글이라도 입말체로 쉽게 써도 될 것을 공연히 남의 나라 말 번역한 글같이 함부로 ‘-의’를 넣어 쓰는 버릇은 우리 말을 죽이는 글쓰기라 아니할 수 없다 … 그래서 훌륭한 문학의 업적을 남긴 분도 아이들에게 잘못된 말을 가르쳐 우리 말을 병들게 했을 경우 그 잘못을 드러내어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 일본글에서나 우리 글에서 어찌씨(부사)로 쓰는 ‘보다(より)’란 말은 그 근원이 영어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어가 ‘세계어’처럼 되어 얼마나 많은 나라 말에 스며들고 영향을 주고 있는가를 깨닫게 된다. 그런데, 같은 영어의 영향을 받아도 일본사람과 한국사람의 태도가 크게 다르다 … 남의 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을 옳다고 볼 경우란, 남의 것을 바르게 알려고 애쓰면서 우리 것을 지키는 노력을 힘껏 한 다음에 받은 것이라야 하는 것이지, 처음부터 제것은 다 내버리고 남의 것에만 홀려 따라가는 짓을 옳다고 볼 수는 결단코 없다  ..  (131, 132, 189∼190쪽)


  우리 글 바로쓰기가 나아가는 길은 ‘숲말 쓰기’입니다. 숲말을 쓰자면 숲에서 살아야 합니다. 숲말을 쓰며 아름답게 삶과 넋과 말을 가꾸자면, 숲이 있는 곳에서 살아야겠지요. 시골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나라 시골은 시골빛을 잃어요. 시골빛이 시골에 없어요. 애써 시골에 간다 한들 시골빛을 누리지 못하니 시골말로 다시 태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면, 아무 말이나 엉터리로 써도 될까요? 우리 아이들한테 엉터리 삶을 물려주어도 되나요? 우리 아이들이 앞으로 엉터리 나라에서 엉터리 일을 하면서 엉터리 마음으로 바보짓을 일삼아도 되나요?


  숲이 사라진 시골이고, 도시에서도 숲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처럼 숲을 잃거나 잊은 오늘날이기에, 새로운 숲을 일구어야 해요. 새로운 숲을 찬찬히 가꾸고, 새로운 숲이 널리 퍼지도록 힘을 쏟아야 합니다.


  먼저 시골은 시골빛을 찾아야 합니다. 도시는 도시대로 곳곳에 조그맣게 풀숲 있어야 합니다. 빈터에 자가용 대 놓는 자리 늘리지 말고, 빈터에서 자가용 쫓아내어 나무를 심고 풀밭을 이루어야지요. 빈터를 차지하는 자가용 몰아내어 이 빈터에서 풀과 나무와 꽃이 자라면서, 어른들 쉬고 아이들 놀 자리가 되도록 해야지요.


  마을이 마을답게 다시 태어날 때에 삶이 삶답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삶을 가꾸면서 넋을 가꾸어야지요. 이렇게 삶과 넋을 가꾸며 말을 함께 가꾸어야지요. 학교에서 국어 수업 늘린들 말을 사랑하거나 가꾸거나 아끼지 못해요. 제도권학교 국어 수업이란 대학입시일 뿐이니까요. 대학입시 아닌 ‘삶을 가꾸는 말’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에 앞서 어른들부터, 스스로 삶을 가꾸고 넋을 가꾸며 말을 가꾸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어른들부터 아름답게 삶길·넋길·말길 되찾아야 아이들도 차근차근 아름다운 삶길·넋길·말길 찾을 수 있습니다.


.. 곧 ‘한테’ ‘한테서’란 말은 누구에게나 통하는 알기 쉬운 말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이거야말로 민중의 말이요, 진짜 우리의 말 아닌가? 이른바 표준이 되어야 할 말이 아닌가 … 대관절 사전에서 낱말을 풀이하는데, 널리 쓰이는 민중의 말을 두고 ‘통속적’이란 딱지를 붙이다니 이래서 되겠는가? ‘통속’이란 말에는 두 사전의 풀이에는 없지만 내가 느끼기로 속되다, 곧 ‘고상하지 않고 천하다’는 뜻이 들어 있다. ‘한테’ ‘한테서’가 통속적으로 쓰이는 말이라고 한 것은 분명히 이런 ‘고상하지 못하고 천한 말’이란 뜻으로 한 말일 것이다 … 통속적이 아닌 말, 고상한 말을 표준말로 삼는다고 중류사회의 말을 쓰다 보니, 농민의 말·민중의 말은 ‘통속적인 말’로 버림받고, 사전에까지 ‘통속적’이라 풀이해 놓는 것 아닌가 … 이 말(‘입장’)은 해방 직후부터 문제가 되어, 한글학회에서도 일본말이니 쓰지 말자고 하였지만, 워낙 일본말 버릇에 굳어져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다가 문화 전반에 걸쳐 남의 것을 흉내내고 따르는 병든 풍조가 수십 년 동안 사회를 휩쓸어 온 결과, 이제는 이 말이 일본말인 줄 아는 사람도 어쩔 수 없이 따라 쓰게 되는 데까지 와 버렸다. 모든 역사가 뒷걸음질을 쳐 온 자취가 이런 말 한 마디에도 엿보인다 ..  (182∼183, 201쪽)


  이오덕 님은 우리들한테 아름다운 선물 하나 남겼습니다. 《우리 글 바로쓰기》라는 책은 사람들마다 어떻게 ‘말과 넋과 삶을 찾느냐’ 하는 실마리를 풀어 줍니다. 과학이나 학문으로 밝히는 책이 아니라, 삶을 이야기하고 넋을 노래하며 말을 사랑하는 꿈을 보여줍니다.


  말마다 어떤 삶이 깃들었는지 알려줍니다. 말마다 어떤 넋이 배었는지 밝힙니다. 찬찬히 읽어 보셔요. 지식으로 읽으려 하지 말고 마음으로 읽어 보셔요. 책에 나온 대로 이 말은 이렇게 고친다든지 저 말은 저렇게 고치려 하지 말아요. 스스로 말과 삶과 넋을 되돌아보셔요. 오늘까지 살아오며 스스로 쓰는 말이 어떠한 넋에 따라 어떠한 삶을 걸으며 쓰는 말이었는지 짚어요.


  내 삶이 아름다운지 돌아봐요. 내 넋이 아름다운지 돌아봐요. 이러고 나서 내 말이 아름다운지 돌아봐요. 삶과 넋과 말은 한 줄기예요. 한 줄기인 삶과 넋과 말이 한결같이 환하게 빛나며 맑고 고운 이야기 담도록 마음을 기울여요.


  딱딱하게 굳는 삶이라면 넋도 딱딱하게 굳어요. 지식이나 재산이나 계급이나 학력 따위로 이웃 사이에 울타리 세우는 삶이라면 말도 차갑고 어렵지요.


  어머니가 아기한테 어떤 말을 쓰는지 헤아려요. 어머니가 아기한테 젖을 어떻게 물리고 자장노래 어떻게 부르는지 헤아려요. 어머니가 아기 똥오줌 어떻게 치우고 아기를 어떻게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씻기고 놀리면서 돌보는지 헤아려요.


  어머니 손길대로 흙을 돌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머니 손길대로 숲을 바라보면서 얼싸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머니 손길대로 지구별을 포근히 품으면서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소설이고 동화고 수필이고 할 것 없이, 지금 우리 글은 순수한 우리 말인 ‘웃는다’와 이 ‘웃는다’를 꾸미는 온갖 아름다운 어찌씨들을 다 쫓아내고, 대신 ‘미소짓다’ 한 가지만 쓰려고 하고 있다 … 일본제국은 이 땅을 식민지로 통치하면서 우리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문화와 전통까지도 강요했다. 또 어떤 것은 강요하지 않아도 일본말 일본글을 통해 지식을 얻고 생각을 이룬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본의 문화를 아무 비판도 없이 그대로 우리 것으로 번역해 제것인 양 그 속에서 살고, 다시 이것을 자라나는 세대에 물려주었다 … 우리들에게 말이 없는 것이 아니다. 말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말을 할 줄 모르고 남의 흉내만 내는 버릇이 들어 그렇다 … 이 말(‘입구’)을 바로잡기에는 벌써 늦었는지도 모르지만, 행정하는 사람이 마음만 바로 가지면 하루아침에 우리 말을 도로 찾을 수 있다 … 행정은 일제식민지 때뿐 아니라 아직까지도 중국글말과 일본말을 퍼뜨리고 순수한 우리 말을 없애는 일을 앞장서 하고 있다 … 옛날 우리 백성들은 중국글자를 모르면 사람 대접을 못 받았고, 왜정 때는 일본말 일본글을 모르면 아주 못난 시골사람으로 천대받았다. 그런 잘못된 역사는 아직도 그대로 계속되고 있다 … 걸핏하면 외국손님 보기에 부끄럽다는 식으로 말하는 버릇도 우리가 마치 외국사람들 위해 살고 있는 것처럼 알고 있는 종살이본성에서 나온 말이다 ..  (203, 204, 211, 217쪽)


  숲말에서 찾는 사랑입니다. 살을 부빈대서 사랑이 아닙니다. 살을 부비면 ‘살부빔’입니다. 입을 맞춘대서 사랑이 아닙니다. 입을 맞추면 ‘입맞춤’입니다. 사랑은 사랑입니다.


  숲사랑이라면 숲을 사랑하는 길이요 삶입니다. 숲은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4대강 막삽질을 하면 숲을 사랑하는 길이 될까요? 항공방제라는 이름으로 숲에 헬리콥터로 농약 잔뜩 뿌리면 숲사랑이 되나요? 국립공원 이름표를 붙이거나 관광객 끌어모으면 숲사랑이라 할 만한가요?


  숲은 숲일 뿐, 국립공원도 관광지도 아닙니다. 숲은 숲일 뿐, 자원이 아닙니다. 정부에서는 교육부 이름을 ‘교육인적자원부’로 바꾸기도 해요. 교육을 하는 관청이 아닌 ‘자원’을 다스리는 관청이라고 밝힌 셈입니다. 그러면, 교육부는 무엇을 교육할까요? 이 나라에 이는 국립국어원은 어떤 ‘국어’를 돌보려 할까요? 국민학교에서 ‘국민’이 천황폐하 섬기는 식민지 백성을 가리키는 이름이었으나 2000년대에 가까워서야 비로소 이 이름을 겨우 떨쳤어요. 그런데, ‘국민이 쓰는 말’이라는 뜻인 ‘국어’를 정부에서 아직 버젓이 써요. 교과목 이름도 ‘국어’이고, 한국말 담는 사전조차 ‘한국말사전’ 아닌 ‘국어사전’이에요.


  ‘국기(깃발)·국가(노래)·국조(새)·국화(꽃)’ 모두 걷어치울 일제강점기 찌꺼기입니다. ‘국가’라는 한자말부터 싹 걷어내야 마땅합니다. 그렇지만, 정작 나라일 하는 사람 가운데 이런 말들 걷어내는 일꾼 없어요. 보수에서도 진보에서도 똑같습니다. 말을 말답게 바라보지 못해요.


  정치를 하거나 교육을 하거나 숲을 모릅니다. 정치를 하든 교육을 하든 숲하고 동떨어진 시멘트 건물에 갇혀서 합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가운데 텃밭 일구는 사람 없어요. 교사 가운데 스스로 나서서 아이들과 텃밭 일구는 이는 몇이나 될까요. 교장이나 교감 이름을 얻은 분들 가운데 학교에 주차장 아닌 텃밭을 마련하려는 이는 얼마나 있을까요.


.. 우리 말로 쓰는 소설에 꼭 남의 나라 말같이 남녀를 구분해서 ‘그’ ‘그녀’로 해야 할까 … 농사꾼 할머니를 ‘그녀’라고 불러야 글이 씌어질까 … 사라져 가는 순수한 우리 말 대신에 어떤 말이 생겨나고 어떤 말이 남게 되는가? 도시 산업사회의 병든 소비문화는 판에 박힌 획일의 말과 삶에서 떠난 추상의 말에다가 천박한 기분을 나타내는 감각의 말만을 남겨 놓는다 … 아무리 아이들까지 입으로 말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말이 잘못된 교육으로 퍼뜨려진 말이라면 쓰지 말아야 한다 … 우리는 남의 말과 글을 쳐다보고 따르기 때문에 우리 것이 보이지 않고 불편하게 여기는 것이다 … 말을 살려서 쓰고, 살아 있는 말을 써야 하는 것이지, 사전에서 말을 찾아 거기에 맞춰 쓰려니 ‘꼭 맞는 우리 말이 없다’고 하게 된다. 어느 나라 말이고 완전히 같은 말이 어디 있는가 … ‘캠퍼스’‘채플’ ‘오리엔테이션’ 같은 말을 꼭 써야 대학의 권위가 서는 것일까? 대학이 서양말을 퍼뜨리는 데 앞장설 것이 아니라 순수한 우리 말을 쓰고 겨레말을 이어가는 데 앞장서 주었으면 좋겠다 … 우리 말글을 학대하는 사람은 무식한 시골사람이 아니라, 문인·예술가·학자와 같은 지식인들임을 새삼 생각하게 한다 … ‘아버지’ ‘어머니’ 이것이 우리 겨레의 말이지 ‘훤당’ ‘춘부장’ ‘대부인’ 같은 말이 우리의 모국어가 될 수 없다 ..  (213, 215, 221, 223, 225, 236, 238, 311쪽)


  숲말에서 찾는 빛입니다. 삶에는 빛이 있어야 밝습니다. 빛이 없는 삶은 어둡습니다. 빛이 들지 않는 집은 어둡습니다. 어두운 집에서는 삶뿐 아니라 넋도 어둡고 말아요. 그런데, 도시에서는 어두운 집을 자꾸 지어요. 어두운 집에 갇히도록 하고, 어두운 집에서 빠져나온다 하더라도, 나 혼자 빠져나올 뿐 이 어두운 집에는 다른 사람이 들어가서 살아야 합니다.


  숲빛은 모두한테 골고루 드리웁니다. 누구한테는 안 주고 누구한테는 더 주는 빛이 아닙니다. 말은 모두한테 골고루 깃듭니다. 이 사람한테는 이 말이 안 깃들고 저 사람한테는 이 말이 더 깃들지 않습니다.


  숲을 누리면서 빛을 누립니다. 빛을 누리면서 삶을 누립니다. 빛이 있는 삶이기에 삶빛이 맑아요. 빛나는 삶을 누리면서 넋빛이 곱습니다. 빛으로 어깨동무하는 고운 넋을 나누면서 말빛이 싱그럽습니다.


  삶빛이 그대로 넋빛이며, 넋빛은 다시금 말빛입니다. 아이들이 배울 한 가지라면 사랑 어린 빛입니다. 사랑빛을 배울 아이들입니다. 아이들한테 가르칠 한 가지라면 사랑 담은 빛입니다. 사랑빛을 가르칠 어른들입니다.


  빛나지 않는 말이라면 가르치거나 배울 뜻이 없어요. 빛나지 않는 넋이라면 책으로 읽거나 알릴 뜻이 없어요. 빛나지 않는 삶이라면 돌아볼 값어치가 없어요. 전쟁에 미친 삶을 왜 돌아보겠어요. 이웃을 아끼지 않는 어두운 사람들 삶을 왜 돌아보겠어요. 아름답게 빛날 때에 ‘삶’이나 ‘넋’이나 ‘말’이라는 이름을 쓸 수 있습니다.


.. 가을날 쳐다보이는 가지 끝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감은 하늘에 있는 감이니, 이것은 땅에 붙어 있는 땅감이지. 본래 우리 겨레는 이렇게 좋은 말을 얼마든지 만들어 쓰고 있었던 것이다 … 농민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땅의 이름을 짓고, 산과 내의 이름을 짓고, 마을의 이름을 지었다. 풀과 나무의 이름도, 짐승이며 벌레의 이름도 물고기의 이름도 지었다. 농사를 짓는 데 쓰는 여러 가지 연모의 이름도 지었고, 일을 할 때 필요한 말, 일을 하면서 느끼는 괴롭고 즐겁고 슬프고 답답한 마음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말을 지어서 쓰고, 사랑과 미움, 소망과 절망 등 온갖 마음을 말로 나타내었다 … 삶의 주인인 농민들이 스스로 말을 창조하고 쓰면서 즐기고 전하던 시대에는, 그들의 말밖에 따로 인간을 겁주고 짓누르는 말이 거의 없었다 … 농민의 말이요 백성의 말인 우리 겨레의 말과 글은 남의 땅에서 들어온 중국글자말과 일본말과 서양말에 시달려 ‘삼중고’의 병신으로 앓고 있다. 우리 말글이 앓고 있는 모습이 바로 우리 백성들이 앓고 있는 모습이다. 우리 말을 어떻게 해야 살릴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바로 우리 백성들을 어떻게 살리나 하는 문제가 된다. 나는 여기서 더구나 지식인들의 커다란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 말을 살린다는 것은 바로 우리 말을 백성의 말로 한다는 것이고, 우리 말을 백성의 말로 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를 백성의 사회로 만든다는 것이다 ..  (246, 253, 255쪽)


  숲말에서 찾는 꿈입니다. 꿈을 꾸면서 살아갈 기운을 찾습니다. 꿈을 꾸는 동안 사랑할 삶을 깨닫습니다. 꿈을 꾸고 찬찬히 이루면서 하루하루 얼마나 즐거운가 하고 느낍니다.


  말은 즐겁게 할 때에 빛납니다. 즐겁게 하지 않는 말은 빛나지 않습니다. 즐거움 없이 글다듬기만 한다면 재미없어요. 말은 사랑스럽게 할 때에 빛납니다. 사랑스럽게 하지 않는 말은 빛나지 않습니다. 사랑 없이 글쓰기만 한다면 따분해요. 따분한데다가 서늘하고 차가우며 매몰찹니다. 모든 글에는 사랑이 깃들어야 읽을 만합니다. 말은 아름답게 할 때에 빛납니다. 아름답게 하지 않는 말은 빛나지 않습니다. 아름다움 없는 글을 읽는 사람은 소금 아닌 염화나트륨 조합물 먹는 셈입니다. 사랑으로 키우지 않은 푸성귀나 곡식을 먹으면 영양분은 얻을 테지만 사랑을 얻지 못해요. 사랑으로 보살피는 어버이 품을 누리지 않은 아이는 몸은 클 테지만 마음이 깊지 못해요.


  숲말이란 푸른 숨결 깃든 말입니다. 꿈을 꾸는 숲말이란 푸른 숨결이 오물조물 흐르는 말입니다. 꿈을 사랑스레 담는 숲말이란 지구별에 푸른빛 감돌도록 이끄는 말입니다.


  지난날 세종임금은 ‘말을 담는 그릇’인 글을 빚었지만, 막상 이 글은 ‘시골사람이 주고받는 한국말’ 담는 그릇이 아닌 ‘중국글 모든 소리를 옮길 수 있는’ 그릇이었습니다. 시골사람은 글이 없어도 거리낌없이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오직 관청사람과 임금과 신하와 지식인만 한자로 이야기를 나누었어요(의사소통). 그래서, 지난날 세종임금이 ‘우리 글’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막상 ‘우리 글’로 글을 쓰지 않았어요. 우리 글로 정치나 문화를 펼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는 우리 글이 있어도 사람들이 영어를 더 즐겨씁니다. 영어를 써야 하는 자리라면 영어를 쓸 일이지만, 영어를 쓸 일이 없는 자리에 영어를 써요. 영어 모르는 사람은 생각하지 않아요. 한자 모르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어려운 한자말 쓰는 지식인처럼, 영어 모르는 사람은 헤아리지 않고 영어를 마구 쓰는 오늘날 사회 흐름이에요.


.. 내가 걱정하는 것은 소설가고 시인이고 실제로 그 삶을 체험하지는 않고 다만 말만으로 온갖 근사한 이야기, 허망한 이야기들을 다 꾸며 보이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그 말들이 모두 뿌리도 없이 생겨나고 피어난 꽃처럼 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 옛날부터 언제나 백성들 위에 버티고 앉아 있는 몸가짐을 버리지 않는 벼슬아치들은 될 수 있는 대로 그 말을 유식하게 하려 하고 글을 어렵게 씀으로써 그들의 권위를 유지하려고 했다 … ‘나는’ 하고 말을 시작하면 그 다음 말도 사람다운 말로, 적어도 사람다운 말에 가까운 말로 나오게 된다. 그런데 관리들은 그것을 도리어 겁내고 꺼리는 것이다. 그렇게 쉬운 말로, 보통 사람들이 하는 말로 해서는 우선 자기의 권위가 떨어지고, 다음에는 자기가 지금부터 지시하고 명령하고, 혹은 겁주기까지 해야 하는 말을 도무지 할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국민학생들은 1학년이고 6학년이고 그 말에 높낮음이 없고 평등하다. 그런데 중학교만 들어가면 한 학년만 달라도 한쪽은 높임말을 쓰고 한쪽은 낮춤말을 쓴다. 이런 말의 질서가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꽉 짜여 요지부동으로 되어 있다. 학교교육의 군대식 체제가 얼마나 뿌리깊이 파고 들어가 있는가 … 우리 소설은 우리의 삶을 보여주고 이야기한 글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삶을 말하는 글이 삶의 말이 아닌 글말, 남의 나라 글을 따르고 옮겨 쓴 말이 되어서 어찌하겠는가 ..  (261, 265∼266, 309, 407쪽)


  사람한테는 글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말이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요. 말이 없더라도 서로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눈다면 따로 말이 없어도 될 테지요. 그렇지만, 사람들은 서로 마음읽기를 안 해요. 마음을 꽉 닫아 겁니다. 이녁 마음을 꾸밈없이 읽지 못하거나 않으며, 내 마음을 스스럼없이 열거나 틔우지 않아요.


  글이란 대수롭지 않습니다. 말이 없이는 글이 부질없기 때문입니다. 글이란 대단하지 않습니다. 말이 있기에 글이 있기 때문입니다. 곧, 말을 가꿀 줄 아는 삶일 때에 글을 가꿀 줄 압니다. 말을 사랑할 수 있는 넋일 때에 글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오덕 님은 이 밑바탕을 바라보았어요. 글쓰기와 교육과 문학에서 언제나 ‘삶’을 맨앞에 놓고 이야기한 까닭은 삶에서 비롯하는 말이요, 말을 글이라는 그릇에 담아 사랑을 널리 나누는 흐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말이라면 삶말일 때에 말입니다. 글이라면 삶글일 때에 글입니다. 노래라면 삶노래일 때에 노래입니다. 춤이라면 삶춤이어야 하고, 사진이라면 삶사진이어야 해요. 일이라면 삶일이요, 교육이라면 삶교육입니다. 이 대목에서 이오덕 님은 ‘삶’이 무늬만 삶이 아닌 ‘참삶’이 되어야 한다고 밝혔고, 참삶을 밝히는 교육을 하면서 아이들을 살려야 하니, 교육은 ‘참삶교육’ 또는 ‘참교육’ 또는 ‘삶교육’을 이야기합니다. 말이라면 ‘참삶말’이 되어야 할 테고, 또는 ‘참말’이나 ‘삶말’이 되어야 하겠지요.


.. 여기서 풀이름, 나무이름, 벌레이름 들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해 보고 싶다. 산과 들에 나서 자라나고 있는 풀과 나무, 동물과 곤충의 이름들은 모두 농어민들이 지어 놓은 것이다. 그 이름들을 알고, 그 풀과 나무, 물고기와 새들을 가까이하며 산다는 것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가장 좋은 길이다. 그리고 그런 삶이 곧 이 땅을 사랑하는 마음이 된다. 사실 우리 선조들은 여러 천년의 세월을 그렇게 살아왔던 것이다 … 풀이름을 말할 때 울리는 그 소리의 느낌만으로도 그 풀의 모양이 눈앞에 나타난다 … 우리 나라의 작가들은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숨쉬고 있는 풀이며 나무며 새들의 이름을 너무 모른다. 모를 뿐 아니라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 교사들이 제발 선생님이란 틀 속에 갇혀 있지 말라는 것이다. 길이 들여진 버릇, 길이 들여진 말과 행동, 거기서 빠져나와서 살아 있는 아이들을 보고 살아 있는 말을 할 수 있어야 비로소 사람의 자식을 키우는 교육이 된다 … 생각은 민주주의로 앞서가고 있는데 그 생각을 담은 그릇이 되는 말은 백성의 것이 아닙니다. 그 까닭은, 이런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모두 책에서 지식으로 얻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 백성들은 글로써 살지 않고 몸으로 일하면서 살고 있고, 그 일 속에서 배운 말로써 살고 있습니다 … 지식인들의 말과 글이 백성들의 말이 아니고 남의 말글을 따르고 있다는 것은 그들의 생각이 남의 것, 즉 백성들 속에 살면서 그 삶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 책에서 얻은 지식이요 관념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 지식이나 관념만으로 자기의 관점을 세워 나갈 때 문제가 일어납니다. 책에서 얻은 사상은 자기의 삶에서 몸으로 가지게 된 생각과 하나로 될 때 비로소 그 사상은 제것으로 되지요. 제것은 없고 지식만 가지고 제것인 양 여긴다면 그것이 문젭니다. 말은 잘못되었는데 생각만은 바르게 가질 수 있는 것인가? 그럴 수 없다고 봅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 우리 말에 대해 끊임없이 반성하고 비판하는 몸가짐이 없이는 옳은 생각을 가질 수가 없다고 봅니다 … 여러분이 아무리 좋은 사상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남의 나라의 앞선 지식인들이 펼쳐놓은 사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앞선 지식인들은 모두 자기 나라 말로 자기 나라 글로 생각을 표현해 놓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  (272, 274, 275, 288, 328∼329쪽)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하지 않습니다. 학교를 반드시 다녀야 하지 않습니다. 책은 종이책이나 교과서만 책이 아닙니다. 사람 하나가 책이고, 나무 한 그루가 책입니다. 들과 숲과 바다가 책입니다. 하늘과 구름과 해가 책입니다.


  해를 읽지 못하거나 날을 읽지 못하면서 종이책 줄줄 꿰면 무얼 하겠어요. 구름과 눈과 빗물을 읽지 못하고 졸업장만 거머쥔대서 무얼 할까요. 풀빛과 풀노래를 모르면서 문학상 탔대서 어떤 글을 쓸까요.


  아이하고 눈빛만으로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풀벌레하고 가만히 이야기를 꽃피울 수 있습니다. 가랑잎에 아로새긴 가을노래 들을 수 있습니다. 구태여 종이책을 뒤적여야 하지 않아요. 종이책에까지 따로 더 담은 새로운 사랑노래 있을 때에 비로소 책을 손에 쥐면서 내 이웃들 삶을 읽을 뿐입니다.


  그러나, 현대 물질문명 사회가 되면서 사람들은 스스로 삶을 잃거나 놓습니다. 오랜 독재정권과 식민지 제국주의와 봉건제도에 짓밟히거나 짓눌리면서 ‘삶·넋·말’을 잊기까지 합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말을 찾으면서 넋과 삶을 찾아야 아름다운 이 땅 다시 깨어날 텐데, 사람들은 톱니바퀴 되어 쳇바퀴질을 그치지 않습니다. 이 흐름이 너무 슬프고 아파서 이오덕 님이 쓴 책이 《우리 글 바로쓰기》입니다. 우리 말을 살리면서 우리 넋 살찌우고, 우리 넋 살찌우는 힘을 바탕으로 우리 삶 깨다는 길을 걸어가야 아름다울 테지만, 아직 이 대목까지 이르지 못하니, 적어도 ‘우리 글’이라도 바로쓰면서, 말을 바로잡고 바로찾으며 바로세우는 길을 걷자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 ‘뒷간’은 순수한 우리 말인데, 일본사람들이 와서는 일본말 ‘벤죠(便所)’, 곧 ‘변소’를 쓰게 되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부터는 ‘화장실’로 바뀌었다 … 옛날 높은 양반들이나 거의 모든 선비들은 ‘밥’을 먹고 살지 않았다. ‘조반’을 먹고 ‘석반’을 먹었던 것이다. 머슴이나 일꾼들, 부녀자들이 먹는 것만이 ‘밥’이요 ‘죽’이었다 … 옛날 괭이와 삽으로 땅을 파내고 등짐을 져서 둑을 쌓아 만든 것은 ‘못’이었지만, 기계의 힘을 빌려 크게 만든 ‘수리시설’은 ‘저수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 농민들의 말은 ‘씨’요 ‘씨앗’이지 ‘종자’가 아니다. ‘씨를 뿌린다’ 하지 ‘종자 뿌린다’ ‘파종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 ‘어른’이라고 입으로 말하는 대로 쓰면 좋겠는데 왜 ‘성인’이라고 쓰는지 알 수 없다 … 참 얼마나 많은 말을 우리는 잃어버렸는가? 빼앗겨 버렸는가? 아니, 우리 스스로 짓밟아 버리고는 남의 나라 말 흉내내는 짓을 자랑으로 삼고 있는가 … 일제시대에 학교 공부를 한 사람들은 사상전집이고 문학전집이고 종교 서적이고 과학 서적이고 모두 일본 책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쓴 글을 보면 순수한 우리 말로 쓴 글이 없고 죄다 일본말을 번역한 글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8·15 후의 세대들은 그 일제시대의 지식인들에게 배우고, 그들이 쓴 책을 읽어서 지식을 얻고 말과 글을 익히게 되었다 ..  (349, 351, 360, 361, 369, 391쪽)


  말을 바로세우면 글은 저절로 바로섭니다. 넋을 바로세우면 말은 시나브로 바로섭니다. 삶을 바로세우면 넋과 말은 차츰차츰 바로섭니다. 앞뒤를 따지면 삶부터 바로세울 노릇입니다. 시골에서 살든 도시에서 살든 맨 먼저 할 일은 ‘삶 바로쓰기’입니다. ‘말 바로쓰기’는 맨 나중일 뿐 아니라, 삶을 바로세우면서 스스로 씩씩하게 바로세울 수 있어요.


  스스로 붙잡는 일이 어떤 일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일하는 곳이 우리 땅에서 어떤 구실을 하는지 헤아려야 합니다. 제도권 입시지옥 톱니바퀴를 그대로 달리는 내 모습이 이 나라를 어떻게 망가뜨리는가를 읽어야 합니다. 자가용 모는 삶이, 전기 매판자본이, 신문·방송을 그득 채우는 정치 소식이, 온갖 스포츠와 관청 문화잔치 행사가, 이 모두가 무엇인가를 또렷하게 살펴야 합니다.


  휩쓸리는 삶이 되면, 휩쓸리는 넋이 되고 말아요. 휩쓸리는 넋인데, 《우리 글 바로쓰기》뿐 아니라 다른 책을 제대로 읽지 못합니다. 휩쓸리지 않는 넋이어야 이 책을 바로 읽습니다. 휩쓸리지 않는 넋이어야 어느 책을 손에 쥐어 읽더라도 스스로 삶을 바로세웁니다. 휩쓸리는 넋이기에 대단하거나 훌륭하다는 어떤 인문책을 숱하게 읽었어도 삶이 달라지지 않아요. 휩쓸리기만 할 뿐이잖아요. 휩쓸리는 삶이니 스스로 삶길을 찾지 못하고 다른 사람 눈치에 휘둘려요.


  한겨레한테는 거울이 없어요. 이웃 다른 겨레한테도 거울이 없어요. 아무도 거울 안 보고 살았어요. 오직 권력자와 지식인만 거울을 보았어요. 스스로 얼굴과 몸을 가꾸려는 거울이 아니라, 다른 사람 눈치를 보는 거울입니다. 스스로 삶을 짓고 밥과 옷과 집을 지으며 씩씩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거울이란 참 덧없습니다. 시골에서 흙 만지는 사람이 왜 거울 보겠어요. 시골에서 아이들 돌보며 물 만지는 사람이 언제 거울 보겠어요. 마음을 비추며 사랑을 밝히는 거울이라면 모르되, 겉모습 꾸미거나 매만지는 거울로는 삶을 빛내지 못합니다. 마음을 비추는 말을 살려야 비로소 ‘우리 글 바로쓰기’가 되고, 마음을 살찌우는 말을 사랑해야 바야흐로 ‘우리 말 살려쓰기’가 됩니다.


.. 저희가 하고 있는 글쓰기 교육이란, 아이들에게 자기의 삶을 바로 보고 정직하게 쓰는 가운데서 사람다운 마음을 가지게 하고, 생각을 깊게 하고, 바르게 살아가도록 하는 교육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삶을 가꾸는 교육’이라고 합니다 … 아이들이 마치 풀이나 나무같이 자연스럽게 자라나도록 환경을 만들어 준다면, 아이들은 모두 착하고 바르고 건강하게 자라난다고 확신합니다 … 글을 말에 가깝게 하고, 살아 있는 말을 지키고 가꾸는 일을 글쓰기로 해야 합니다. 말을 지키는 일은 마음을 지키는 일, 혼을 지키는 일입니다 … 사회운동이 운동을 하는 사람을 위한 운동이 되어서는 안 되듯이, 글 또한 중국글자말과 번역투 문장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지식인을 위한 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지식인도 사실은 민중이 쓰는 살아 있는 말을 쓸 줄 알아야 이 시대를 밝히는 진짜 지식인이 될 것이다 … 도시 아이들의 말과 글을 생각해 본다. 자연과 노동과 심지어 놀이까지도 잃어버린 아이들, 이 아이들은 교과서와 시험지만 가지고 살아간다. 그밖에 있다면 텔레비전과 만화책이다. 이 아이들에게 살아 있는 말이 있는가? 행위가 없고 삶이 없는 아이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추상과 관념의 말이요, 획일로 된 말, 머리에 주입된 교과서의 말이다 ..  (371, 372, 380, 416, 431쪽)


  이오덕 님이 1989년에 처음 쓰고, 1992년에 고침판을 낸 《우리 글 바로쓰기》인데, 이 책을 꼼꼼히 읽은 분이라면, 이오덕 님 스스로 ‘바로쓰기 제대로 못한 대목’을 곧잘 만날 수 있습니다. 이오덕 님 스스로 말을 새로 배우고 넋을 새로 가다듬으며 삶을 새로 지으려고 애썼어요. 그래서 이 자국이 이 책 곳곳에 드러납니다.


  이런 말은 쓰지 말자 하는 얘기란, 이제부터 새로운 넋이 되고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자는 뜻입니다. ‘고루한 국수주의나 민족주의’가 아니라 제대로 삶을 밝히고 틔우는 아름다운 눈길이요 손길입니다. 스스로 새롭게 거듭날 때에 새롭게 쓰는 말이지, 지식으로 머리에 쑤셔넣는대서 쓸 수 있는 말이 아니에요.


  흙과 풀과 나무를 사랑하면서 꽃과 나비와 새를 아낄 줄 아는 땀방울을 흘린다면, 《우리 글 바로쓰기》를 안 읽어도 됩니다. 바람과 빗물과 해를 사랑하면서 들과 숲과 멧골을 얼싸안을 줄 아는 눈빛 밝힌다면, 《우리 글 바로쓰기》를 몰라도 됩니다.


  책은 삶으로 읽습니다. 책은 넋으로 아로새깁니다. 책은 말을 살찌우는 밑틀입니다. 숲말에서 찾는 사랑·빛·꿈이 있어 《우리 글 바로쓰기》가 태어났고, 이 빛노래 함께 부를 수 있다면, 시골에서든 도시에서든 아름답게 웃음꽃 피우리라 생각합니다. 4346.11.2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이오덕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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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를 먹으며 낮은산 어린이 7
이오덕 지음, 신가영 그림 / 낮은산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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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을 읽는다 10

 


마음과 몸을 돌보는 밥
― 감자를 먹으며
 이오덕 글
 신가영 그림
 낮은산 펴냄, 2004.6.25

 

 

※ 책풀이 ※
그림책 《감자를 먹으며》는 이오덕 님이 쓴 시 ‘감자를 먹으며’를 새롭게 엮은 책이다. 오랜 나날 시골사람 살아온 발자취가 이 시에 깃들고, 옛날과 오늘날 잇는 징검다리가 감자를 익혀서 먹는 손길에 있다. 감자를 먹듯이 고구마를 먹는다. 고구마를 먹듯이 보리를 먹는다. 보리를 먹듯이 감을 먹고, 대추를 먹으며, 참꽃과 찔레싹을 먹는다.

 

..


  고구마를 캤습니다. 우리 집 고구마는 아닙니다. 이웃 할매와 할배가 이녁 밭에서 고구마를 캐실 적에 일손을 거들어 함께 캤습니다. 먼저 고구마줄기를 낫으로 슥슥 걷어서 한쪽에 펼쳐 말립니다. 이런 다음 골마다 호미로 콕콕 찍은 뒤 살살 흙을 걷으며 땅속에서 크고 작게 알이 맺힌 고구마를 캡니다. 큰 녀석은 큰 녀석대로, 작은 녀석은 작은 녀석대로 나누어 자루에 담습니다. 할매와 할배는 이녁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릴 적에는 겨우내 고구마만 먹고 살았다 합니다. 아이들이 어릴 적에도 도시락은 으레 고구마였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밖에 쌀이란 드물고 모자랐을 테니까요. 또, 제법 잘사는 집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 땅을 부쳐서 살았으니, 쌀밥을 지어 끼니를 잇기 힘들었겠지요.


  겨울에는 고구마라면 여름에는 감자가 될까요. 늦가을에 고구마를 캐면, 감자는 봄에 심어 여름에 캐어 먹었겠지요. 그러면, 이 나라에 고구마도 감자도 들어오지 않았을 지난날에는 어떠했을까요. 1700년대에는, 1500년대에는, 1300년대에는, 900년대에는, 700년대에는, 지난날 시골마을 여느 사람들은 겨우내 무얼 먹었을까요. 여름날 무얼 먹으며 배를 채웠을까요.


  역사책이나 역사영화나 역사연속극에서는 여느 시골마을 여느 사람들 삶을 다루지 않습니다. 아주 마땅하겠지요. 한문으로 적은 역사책에는 궁중 언저리 이야기만 담을 뿐, 서울과 가까운 시골마을 시골사람 이야기조차 안 담아요. 서울에서 먼 전라도나 경상도나 함경도 시골마을 시골사람 이야기는 아예 안 담지요.


  중·고등학교뿐 아니라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책을 들추면, 온통 궁중 언저리 이야기입니다. 시골마을 시골사람 이야기는 ‘너무 무거운 세금 때문에 농사꾼이 낫과 쟁기와 대나무창을 들고 일어설 때’뿐입니다. 시골사람 먹던 밥을 역사로 다루지 못합니다. 시골사람 입던 옷을 역사로 보여주지 못합니다. 시골사람 살던 집을 역사로 밝히지 못합니다.


.. 이오덕 선생님은 어린 시절을 이렇게 감자를 통해 조용히 말씀해 주셨다. 안방과 정지 샛문으로 어머니가 젓가락에 찍어 주시던 감자가 아마도 선생님의 삶을 지켜 준 텃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에게 말씀보다 따뜻한 감자로 모든 걸 가르치신 것이다 ..   (머리말/권정생 씀)

 


  이오덕 님이 쓴 시에 신가영 님이 그림을 그려 빚은 그림책 《감자를 먹으며》(낮은산,2004)를 들춥니다. 감자 한 알 먹는 일이 뭐가 그리 대단하느냐고 할 수 있겠는데, 시를 읽고 그림을 읽으면서, 참말 감자 한 알 먹는 일이야말로 대단하고 대수롭구나 싶습니다. 시골마을 시골사람 작은 삶자락이 우리 마음을 밝히는 이야기가 됩니다. 시골마을 시골사람 작은 땅뙈기에서 우리 사랑을 빛내는 이야기가 자랍니다.


  마음은 지식이 아닌 삶으로 밝힙니다. 사랑은 권력 아닌 사랑으로 빛냅니다.


  임금이나 신하나 양반은 무엇을 먹습니까. 밥을 먹지요. 밥은 어디에서 나오나요. 쌀에서 나오지요. 쌀은 어떻게 얻나요. 볍씨를 심어 나락을 거두어야 얻지요. 볍씨는 어떻게 얻나요. 가을걷이를 해서 나온 나락 가운데 이듬해에 쓸 볍씨를 따로 씨오쟁이에 갈무리해야 얻지요.


  임금이나 신하나 양반은 흙을 일구나요? 안 일굽니다. 임금이나 신하나 양반은 흙을 알까요? 모르지요. 손에 흙을 안 묻혀요. 손에 물을 안 묻혀요. 오로지 정치와 행정만 하는데, 99퍼센트가 넘는 사람들이, 99.9퍼센트나 99.99퍼센트에 이르는 사람들이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데, 옛날 옛적에 정치와 행정을 하는 이들은 텃밭 돌보기조차 안 합니다. 그러면, 어떤 정치와 행정이 태어날까요. 시골마을이 어떠한 줄 모르고, 시골사람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집에서 어떤 밥을 먹는지조차 모르는 임금이나 신하나 양반이 어떤 아름답거나 올바른 정치나 행정을 할 수 있을까요.


  오늘날에도 똑같습니다. 오늘날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의사나 판사나 시장이나 군수나 경찰서장이나 장관 가운데 텃밭을 일구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을까 궁금합니다. 교사나 교수 가운데 텃밭을 일구어 이녁 밥을 얻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궁금합니다. 시골에서 시골 아이를 가르치는 교사나 교수 가운데 막상 시골마을에서 지내면서 시골일 함께 거드는 분이 얼마나 있을까 궁금합니다. 오직 서울에서, 오로지 도시에서, 여느 사람들 삶하고는 동떨어진 채, 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하나도 모르는 채, 바람과 물이 없으면 죽는 목숨이면서 정작 바람과 물을 깨끗하게 돌보는 길이 무엇인지 생각도 안 하는 채, 책과 교과서와 지식과 정보만 움켜쥐면서 정치와 행정과 교육과 문화와 경제를 이야기하는 모습 아닌가 궁금합니다.


겨울이면 정지 샛문 열고 내다보는 내 손에 쥐어 주며
꼭 잡아 꼭!
봄 가을이면 마당에서 노는 나를 불러
김 무럭무럭 나는 그 감자를 주며
뜨겁다 뜨거, 후우 해서 먹어!  (14쪽)


  말로는 아무것도 못 가르칩니다. 말로는 말조차 못 가르칩니다. 아이들한테 말을 가르치자면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몸으로 움직이는 삶을 보여줄 적에 아이들은 비로소 말을 익힙니다.


  어버이가 텔레비전을 보든 인터넷게임을 하든 자가용을 몰든, 삶을 아이들한테 보여주어야 아이들은 말을 배웁니다. 어버이가 밥을 손수 차리든 바깥밥 시켜서 먹든, 삶을 이루는 모든 이야기를 몸으로 보여주고 함께해야 아이들은 말을 배웁니다.


  감자 한 알로 삶을 보여줍니다. 감자 한 알로 말을 가르칩니다. 감자 한 알로 웃음을 보여줍니다. 감자 한 알로 사랑을 가르칩니다.


  감자를 심어요. 감자를 캐요. 감자를 삶아요. 감자를 굽지요. 그리고 감자를 서로 나누어 먹습니다. 둥글둥글 울퉁불퉁한 감자를 저마다 한 알씩 쥐고, 아뜨 아뜨 하면서 고픈 배를 채웁니다. 하하 호호 노래를 하면서 감자를 먹습니다. 허허 깔깔 춤을 추면서 감자를 먹습니다.


  푸욱 삶아서 젓가락으로 찌르면 쏘옥 들어갑니다. 이제 잘 익었구나 생각하며 불을 끕니다. 감자는 바닥에 물을 살짝 깔고 삶을 수 있습니다. 스텐냄비를 한참 달군 뒤 아주 작은 불로 맞추어 물 없이 찔 수 있습니다. 지난날에는 장작을 때어 솥으로 삶았겠지요. 바깥에서 불을 피워 구울 수 있어요. 삶거나 찌거나 굽는 길은 다 다르지만, 어떻게 먹든 맛난 감자요, 누구하고 나누어 먹든 즐거운 감자입니다.


후후 후우, 허어 허어, 냐음 냠
감자를 먹으면서 나는 자라났다.
밥을 먹기 전에 감자부터 먹고
가끔은 삶은 것을 점심으로도 먹고  (18쪽)

 


  감자를 먹는 아이는 감자와 같은 마음이 됩니다. 감자를 삶는 어른은 감자와 같은 마음을 담습니다. 감자를 먹은 아이는 감자처럼 몽글몽글 야무진 마음을 키웁니다. 감자를 삶은 어른은 앙증맞고 귀여운 감자꽃 같은 웃음으로 사랑을 나누어 줍니다.


  집집마다 감자맛이 다릅니다. 집집마다 밥맛도 다릅니다. 집집마다 사랑맛이 다르고, 손맛이 달라요. 집집마다 밭흙이 다르고 밭흙 일구는 손빛이 다릅니다. 그러나, 다 다른 맛이요 빛이지만, 다 같은 사랑이며 꿈입니다.


  감자씨는 묵은 감자를 심습니다. 토막토막 칼로 잘라서 심습니다. 한쪽에 재를 묻혀서 심습니다. 씨감자로 흙에 묻힌 아이들은 새 뿌리가 나고 새로운 싹이 돋을 때까지 별바라기를 하고 해바라기를 합니다. 흙속에서 살아가는 동무를 사귑니다. 천천히 실뿌리 나오고 굵은 뿌리 됩니다. 천천히 첫 싹을 올리고 이내 굵다란 줄기가 됩니다. 잎이 하나둘 나옵니다. 잎이 차츰 퍼집니다. 꽃대가 오르고 망울 맺히며 천천히 꽃잎 벌어집니다.


  하얗게 꽃을 피우고 볼그스름한 꽃을 피웁니다. 조그마한 꽃송이에 벌과 나비가 내려앉습니다. 개미도 꽃가루를 먹고 싶어 감자꽃잎으로 기어옵니다.


  수많은 벌레들이 감자꽃 둘레에서 꽃가루받이를 돕습니다. 감자꽃은 바람 따라 살랑이고, 감자잎은 햇볕을 먹으며 씩씩합니다. 씨앗이 된 작은 감자알은 차근차근 새 알을 흙속에서 품습니다.


이윽고 쑥 향기 물씬 밴 뜨거운 감자를 파내어
후우 후우 불면서 먹던 그 맛
잘 익어 터진 북해도 흰감자
껍질을 훌훌 벗기면 아이 뜨거!
야무진 자주감자 껍질을 벗기면서 아이 뜨거!
뜨거워서 이 손에서 저 손으로 공 받듯이 받다가
한입 가득 넣으면 입 안에 녹아드는 그 향기 그 맛
팍신팍신 달고소한 그 감자 맛
아른아른 여울물에 헤엄치는 피라미들의 이야기까지 들어 있는
그 모래쑥 향기 듬뿍 밴 감자 맛
그 맛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쳐다보는 머리 위 미루나무에선 이초강 이초강
이초강 이초강 이초강 이초강 이초강 이초강
보리매미들이 온통 사납게 울어쌓고  (27쪽)


  사랑으로 심어 돌보아 거둔 감자를 사랑으로 물에 헹군 뒤 불에 안치면, 달고소한 맛이 아른아른 피어납니다. 가게에서 사다 먹는 감자 아닌, 손수 밭에서 돌보아 거둔 감자를 삶거나 굽거나 익혀서 먹어요. 감자국을 끓이고 감자지짐을 해요. 감자밥을 짓고 감자볶음을 해요.


  메추리알이랑 감자를 함께 삶습니다. 멸치랑 감자를 함께 볶습니다. 고구마하고 잘게 썰어 지집니다. 뭉텅뭉텅 깍뚜기처럼 썰어 카레를 끓입니다.


  감자를 먹고 자란 아이들은 감자와 같은 웃음꽃을 피웁니다. 감자를 즐기며 자란 아이들은 감자와 같이 별바라기와 해바라기를 하며 살결 까맣게 익습니다.


  가을바람이 불어 들마다 들풀 시들어 눕습니다. 봄바람이 불어 시든 들풀 사이에 새로운 싹이 돋습니다. 겨울바람이 불어 들마다 눈송이 흩날립니다. 여름바람이 불어 들마다 들풀 빛깔 싱그럽고 짙푸릅니다.


  감자밭에 개구리 함께 살아갑니다. 고구마밭에 지렁이 함께 살아갑니다. 들쥐는 감자알도 고구마알도 갉아먹습니다. 사람도 감자를 먹고 쥐도 감자를 먹습니다. 멧돼지도 땅을 파헤쳐 감자며 고구마를 우걱우걱 씹어먹습니다.


  배고픈 모든 목숨 밭으로 찾아듭니다. 배고픈 이들 모두 밭에서 거둔 곡식과 푸성귀와 열매로 배를 채웁니다. 함께 먹는 밥으로 함께 나누는 사랑 됩니다. 함께 즐기는 밥으로 함께 북돋우는 삶 됩니다.


  콩 한 알 새한테도 주고 쥐한테도 주셔요. 콩 한 알 이웃한테도 주고 동무한테도 주셔요. 감자 한 알 멧돼지한테도 주고 쥐한테도 주셔요. 감자 한 알 이웃한테도 주고 동무한테도 주셔요.


  배고픈 이웃 있으면 등을 돌리지 말아요. 외로운 이웃 있으면 지나치지 말아요. 손을 내밀어요. 밥을 함께 먹어요. 웃음을 나누어요. 어깨동무하며 이야기꽃 피워요.


그렇게 사시사철 감자로 살아 내 몸도 마음도
이런 감자빛이 되고 흙빛이 되었지.

후우 후우 감자를 먹으면서
나는 또 책을 읽었다.
감자를 먹으면서 글을 썼다.

감자를 먹고 학교 선생이 되어서는
감자 먹고 살아가는 산골 아이들을 가르쳤다.  (28~32쪽)


  햇볕을 쬐면서 해님처럼 따스한 마음 됩니다. 빗물을 마시면서 비님처럼 시원한 마음 됩니다. 숲바람 들이켜면서 바람님처럼 푸른 마음 됩니다.


  마음속으로 햇빛을 담아요. 몸속으로 감자빛을 담아요. 마음속으로 들빛을 담아요. 몸속으로 풀빛을 담아요.


  감자가 자란 흙은 사람이 자라게 하는 흙입니다. 감자빛이란 흙빛이고, 흙빛이란 삶빛이며, 삶빛이란 우리들 모든 사람들한테서 흘러나오는 빛입니다.


  흙 한 줌을 아낍니다. 감자 한 알을 아낍니다. 쌀알 한 톨을 아낍니다. 물 한 방울을 아낍니다. 내 목숨을 아끼듯이 이웃 목숨을 아낍니다. 내 마음속에 사랑이 흐르기를 바라듯이 이웃 마음속에 사랑이 흐르기를 바랍니다.


  감알을 먹으면서 우리 몸은 감빛이 됩니다. 능금을 먹으면서 우리 몸은 능금빛이 됩니다. 나리꽃을 바라보면서 우리 눈은 나리꽃빛이 되고, 함박꽃을 바라보면서 우리 눈은 함박꽃빛이 되어요.


  무엇을 먹을 때에 아름다운 삶일까요. 무엇을 바라볼 때에 아름다운 사랑일까요. 어디에서 누구와 이웃이 되어, 아니 나 스스로 이웃한테 어떤 사람이 되어 살아갈 때에 우리 마을이 아름다운 보금자리요 삶터가 될까요.


나는 지금 할아버지 나이가 되었는데도
아직도 어린애처럼 후우 후우 감자 먹기를 좋아해서
감자 먹는 아이들을 생각하고
감자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마을에 가서
오두막집 지어 사는 꿈을 꾼다.   (37쪽)

 


  대통령도 밥을 먹어요. 임금님도 밥을 먹어요. 밥이 없으면 모두 죽습니다. 대통령도 바람을 마셔요. 임금님도 바람을 마셔요. 바람이 더러우면 모두 죽습니다. 대통령도 임금님도 누구나 물을 마시지요. 흐르는 냇물과 샘물을 마시지 못하면 모두 죽고 말아요.


  궁궐을 크게 짓기 앞서 흙을 기름지게 돌볼 줄 알아야 합니다. 아파트를 높이 세우기 앞서 시골을 아름답게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총칼이나 탱크나 미사일이나 전투기를 만들기 앞서 논과 밭을 정갈하게 보듬을 줄 알아야 합니다. 고속도로나 관광단지나 발전소나 골프장에 앞서 숲을 푸르게 어루만질 줄 알아야 합니다.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대단하지 않습니다. 밥과 바람과 물이 대단합니다. 대학교도 은행계좌도 자가용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들과 숲과 하늘이 대수롭습니다.


  넉넉한 밥을 먹을 수 없다면 정치는 덧없습니다. 싱그러운 바람을 마실 수 없다면 경제는 부질없습니다. 맑은 물을 들이켤 수 없다면 문화는 쓸모없습니다. 사람이 살아갈 길을 연 뒤에 비로소 정치나 교육이 있고, 사람이 사랑한 길을 가꾼 뒤에 바야흐로 경제나 문화가 있습니다.


내가 믿는 하느님도
그렇다.
감자를 좋아하실 것이다.
맑고 깨끗하고 따스하고 포근하고 부드러운
감자 맛을 가장 좋아하실 우리 하느님,
내가 죽으면 그 하느님 곁에 가서
하느님과 같이 뜨끈뜨끈한
감자를 먹을 것이다.  (41쪽)


  예배당에는 하느님이 없습니다. 감자 한 알에 하느님이 있습니다. 감자를 먹는 사람들 가슴속에 하느님이 있습니다.


  성경책에도 하느님이 없어요. 하느님은 바람속에서 싱그러운 풀내음을 타고 흐릅니다. 맑게 피어나는 구름이 뿌리는 빗물 사이사이 하느님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종교가 아닌 삶입니다. 하느님은 우상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풀포기에서 함께 자라고, 하느님은 무지개 끝자락에서 함께 빛납니다. 아이들 웃음 사이에 하느님 웃음이 묻어납니다. 어른들 노래 사이에 하느님 노래가 흐릅니다. 다 다른 하느님이 다 다른 하느님을 낳아 다 다른 사랑과 꿈으로 살아가면서 새로운 하느님을 마음속으로 밝힙니다.


  감자를 함께 먹는 들판에 하느님이 함께 있습니다. 무기공장이나 고속도로 한복판에는 하느님이 없습니다. 감자를 심는 밭뙈기에 하느님이 함께 있습니다. 핵발전소나 축구장에는 하느님이 없습니다. 4346.11.11.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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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처럼 2015-01-20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오덕 선생님 글을 읽다가 좋은 서재와 글을 만나 반갑습니다. 저도 같은 책을 읽었는데 이렇게 다르군요. 깊은 생각과 마음을 보고 많이 배우며 깨닫고 갑니다. 선생님 글을 하나 하나 찬찬히 읽어봐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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