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 책빛



  꽃송이를 감싸는 고운 기운을 느끼면서 꽃을 바라본다. 꽃 한 송이에는 이 꽃이 피기까지 드리운 햇볕과 빗물과 바람과 흙이 골고루 섞인다. 꽃송이는 그냥 꽃송이가 아니라, 햇볕을 머금은 꽃송이요 빗물을 마신 꽃송이요 바람을 먹은 꽃송이요 흙으로 자란 꽃송이라 할 수 있다.


  책을 감도는 고운 손길을 느끼면서 책을 마주한다. 책 한 권에는 이 책이 태어나기까지 받은 사랑과 꿈과 이야기와 노래가 골고루 어우러진다. 사랑을 받아 태어나는 책이다. 꿈이 모여 태어나는 책이다. 이야기가 샘솟아 태어나는 책이다. 노래가 흘러 태어나는 책이다.


  고운 꽃빛은 우리 눈과 코와 살갗을 기쁘게 북돋운다. 고운 책빛은 우리 넋과 마음과 생각을 즐겁게 살찌운다. 고운 꽃빛은 꽃송이가 뿌리를 내린 흙을 더욱 기름지게 가꾸는 숨결이 되고, 고운 책빛은 이 책을 엮은 사람들한테 더운 웃음을 베푸는 숨결이 된다.


  책을 짓는 사람이 삶을 짓는다. 삶을 짓는 사람이 책을 짓는다. 책을 읽는 사람이 이웃을 읽고, 이웃을 읽는 사람이 책을 읽는다.


  꽃마다 다 다른 빛이 흐른다. 책마다 다 다른 빛이 춤춘다. 꽃마다 아기자기하게 하늘거린다. 책마다 사랑스럽게 팔락거린다. 오늘 태어나 눈부시게 맑은 잎을 벌리는 꽃은 앞으로 새로운 꽃이 태어날 밑거름이 된다. 오늘 태어나 눈부시게 밝은 슬기를 퍼뜨리는 책은 앞으로 새로운 책이 태어날 밑거름이 된다. 고운 책빛을 두 손으로 담으면서 눈을 뜬다. 4347.12.1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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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장만하지 못한 책



  책방마실을 하면서 책을 고른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을 고르고, 앞으로 읽으려는 책을 고른다. 그런데, 책방마실을 할 적마다 미처 장만하지 못하는 책이 꼭 있다. 오늘 내 주머니에 따라 책을 고르기 때문이다. 내 마음은 더 많은 책에 눈길이 가지만, 내 주머니는 홀쭉하기 때문이다.


  책을 어느 만큼 장만할 수 있으면 흐뭇할까. 새책방에서건 헌책방에서건 하루에 백만 원쯤 책값으로 쓸 수 있으면 흐뭇할까. 이백만 원이나 오백만 원쯤 날마다 책값으로 쓸 수 있으면 흐뭇할까.


  한 사람이 책방 한 곳에서 날마다 백만 원어치에 이르는 책을 장만한다면, 이 책방에 책이 남아나겠느냐 하고 물을 수도 있지만, 누군가 한 사람이 날마다 책방 한 곳에서 백만 원어치에 이르는 책을 장만한다면, 이곳 책방지기는 날마다 더 많은 책을 갖추려고 더 바지런히 힘을 쓰리라 본다. 그래서 날마다 백만 원어치에 이르는 책을 책방 한 곳에서 장만한다면, 이 책방은 나날이 살림을 더욱 북돋우면서 훨씬 많은 책을 갖추어 더 많은 사람한테 훨씬 많은 책을 선보이는 책살림이 되리라 느낀다.


  미처 장만하지 못한 책을 마음속으로 그린다. 다음에는 이 책들을 장만하자고 다짐한다. 다음에 찾아올 적에 이 책들이 이곳에서 사라질 수 있지만, 다른 예쁜 책손이 이 어여쁜 책을 기쁘게 장만할 수 있지만, 나중에라도 이 책들이 그대로 있다면, 아니면 다른 책방에서 이 책들을 만날 수 있다면, 내 주머니가 ‘책값이 끝없이 철철 흘러넘치는 멋스러운 샘물’이 될 수 있기를 꿈꾼다. 4347.12.1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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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날아온 책



  한낮이 되어 빨래를 하자고 생각할 무렵, 집에 책 한 권 날아온다. 내가 시킨 적이 없는 책이다. 누가 책을 보내 주었을까. 봉투를 뜯으니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라는 조그마한 책이고, 이 책을 한국말로 옮긴 분이 선물로 보내셨다. 이 책을 옮긴 분은 영국에서 다섯 식구가 오순도순 지낸다고 한다. 그러니까, 영국에서 일군 책이 하늘을 가르고 훨훨 날아서 우리 집에 온 셈이다. 그나저나, 이 책을 옮긴 분은 어떻게 나한테 이 책을 보내셨을까.


  책에 깃든 편지를 읽는다. 내가 예전에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님 책을 읽고서 느낌글을 쓴 적 있는데, 그 느낌글을 읽으셨구나 싶다. 고맙다. 고운 책을 읽은 느낌을 찬찬히 적었을 뿐이지만, 이 글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었구나.


  새롭게 태어난 책을 쓰다듬는다. 새롭게 태어난 책에는 어떤 숨결이 깃들었을까. 여러 해 앞서하고 오늘은 다르다. 사람도 삶도 마을도 이야기도 다르다. 지난날에 나는 도시에서 살며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를 읽었다면, 이제는 시골에서 살며 이 책을 새롭게 만나는 셈이다. 어디에 있든 나는 틀림없이 나일 텐데, 내가 보고 마시고 맞아들이고 느끼는 보금자리는 다르다. 아침저녁으로 나무와 인사하는 시골집에 찾아든 책을 기쁘게 읽자. 4347.12.10.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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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4-12-10 17:38   좋아요 0 | URL
참으로 아름다운 선물이고, 아름다운 책이네요~~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 책제목도 좋구요!
기쁘게 읽으시고, 즐거운 느낌글 부탁드립니다~^^*

숲노래 2014-12-10 21:31   좋아요 0 | URL
네, 아주 부드러우면서 사랑스럽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입니다.
어버이나 교사가
이런저런 교육책이나 육아책이 아닌
이러한 `이야기책`을 제대로 읽을 수 있기를 바라요.
 

시골 고등학교 도서관 만화책 ㄴ



  요즈음에는 어떠할는지 모르지만, 지난날에는 아이들이 학교로 만화책을 몰래 가져와서 서로 돌려읽곤 했다. 만화책이 있는 아이도 없는 아이도 학교에서 만화책 한 권을 같이 읽으면서 즐거운 이야기에 빠져들곤 했다.


  국립도서관이나 시립도서관이나 군립도서관에서는 만화책을 좀처럼 장만하거나 갖추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 만화책을 ‘책’으로 안 여긴다. 만화책 가운데 몇 가지는 도서관에도 들어가고 ‘추천 교양도서’ 이름을 받지만, 어여쁜 이야기와 그림으로 어여쁜 꿈과 사랑을 심도록 이끄는 멋진 만화책이 두루 알려지거나 읽히지는 않는다.


  지난날에는 학교에서 교사가 왜 만화책을 빼앗아서 찢거나 불살랐을까. 왜냐하면, 교사 스스로 만화책을 제대로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학교에서 왜 만화책을 먼저 장만해서 도서관에 갖출 수 있는가. 왜냐하면 오늘날 교사 가운데에는 어릴 적부터 만화를 보고 자라면서 ‘만화책도 아름다운 책 가운데 하나’인 줄 알아챈 어른이 있기 때문이다.


  숲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숲이 베푸는 기운을 모른다. 나무를 심어서 돌본 적 없는 사람은 나무와 함께 일구는 살림을 모른다. 풀을 손수 뜯어서 먹은 적 없는 사람은 풀내음이 우리한테 어떤 사랑인지를 모른다. 기저귀를 손수 갈며 빨래해서 말리고 갠 적이 없는 사람은 아기를 돌보는 하루가 얼마나 고되면서 즐거운지를 모른다.


  만화는 글과 그림으로 이야기를 엮는다. 문학은 오직 글로 이야기를 엮는데, 만화책은 글과 그림을 함께 쓰기 때문에, 만화책에서 흐르는 글은 문학과 같고, 만화책에 깃드는 그림은 예술과 같다. 문학과 예술이 한자리에서 어우러질 때에 어여쁜 만화책이 태어난다. 그냥저냥 따분하거나 이냥저냥 읽어치우는 만화책이 있지만, 두고두고 되읽는 아름다운 만화책이 있다. 두고두고 되읽는 아름다운 만화책은 문학과 예술을 고루 갖춘다.


  시골 아이들도 도시 아이들도 아름다운 숨소리를 만화책에서 배울 수 있기를 빈다. 시골 어른들도 도시 어른들도 사랑스러운 노랫소리를 만화책에서 얻을 수 있기를 빈다. 4347.12.5.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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뻘짓왕 2014-12-05 08:02   좋아요 0 | URL
상당히 공감이 가는 이야기입니다. 어른들뿐만이 아니라 젊은층들 중에서도 만화책은 그저 애들이나 읽는 수준 낮은 책에 불과하며, 그 만화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어떤 작품성을 띠는지를 전혀 알아보려 시도조차 않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비주류 도서의 서글픈 운명인 것 같습니다.

숲노래 2014-12-05 09:23   좋아요 0 | URL
슬픈 운명일 수도 있지만,
요즘 들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사람들 스스로 `아름다운 책 하나`를
스스로 등돌리면서
아름다운 이야기하고
스스로 멀어지는 셈이로구나 싶기도 해요.

누구나 스스로 `아름다운 책`을 찾아서 읽기도 하지만
아예 모르기도 하지 싶어요...
 

시골 고등학교 도서관 만화책 ㄱ



  시골 고등학교 도서관에 찾아간다. 이곳 아이들과 이곳에서 도란도란 이야기잔치를 누린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 마음속에는 어떤 씨앗이 있을까. 시골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동무를 사귄 아이들 가슴속에는 어떤 노래가 있을까. 시골에서 나고 자라 학교를 다니지만 모두 도시로 가고 싶다는 뜻을 키우는 아이들 머릿속에는 어떤 사랑이 있을까.


  시골 고등학교 도서관은 그리 크지 않다. 시골 고등학교 도서관이 갖춘 책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지만 이 작은 책터는 누구한테나 열렸고, 햇볕이 잘 들며, 아기자기하게 예쁜 책들이 쏠쏠히 있다. 도시에 있는 자그마한 책방보다 작으며, 시골 읍내에 있는 더 작은 책방보다 작은 시골 고등학교 도서관이지만, 이곳에는 ‘읽을 책’과 ‘읽힐 책’이 있다.


  그렇다. 도서관은 커야 하지 않다. 도서관에는 책이 가득 쌓여야 하지 않다. 도서관에는 ‘책을 둘러싼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도서관에는 아이와 어른 모두한테 ‘책으로 짓는 꿈을 키우려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도서관에는 ‘내 삶에서 몸으로 미처 겪지 못한 이야기를 배우도록 돕는 길동무’가 있어야 한다.


  만화책 《닥터 노구찌》가 아주 너덜너덜하다.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이 만화책을 읽었을까. 이 만화책을 읽은 시골 고등학교 아이들은 어떤 생각과 마음과 뜻을 가슴에 씨앗으로 심을 수 있었을까.


  내 어릴 적을 돌아본다. 내가 처음 만난 ‘학교 도서관’을 떠올린다. 고등학교를 두 해째 다니던 때에 비로소 ‘학교 도서관’을 만났다. 내가 다닌 국민학교와 중학교에는 ‘학교 도서관’이 없었고, 중학교에는 ‘학급문고’조차 없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도 ‘학교 문을 연 지 다섯 해’가 되어서야 ‘빈 교실’ 한 칸을 고쳐서 겨우 ‘도서관 시늉’을 낼 뿐이었다.


  예전에, 그러니까 나로서는 스무 해 남짓 앞선 지난날에, 낡거나 닳은 책이 있으면 겉종이를 새로 대고, 하얀 실로 꿰매었다. 책손질을 마친 뒤에는 무거운 돌로 며칠쯤 눌렀다. 겉종이를 새로 댈 적에는 붓으로 책이름을 정갈하게 새로 적었다. 그림까지 그려 넣지는 못했지만, 하얀 빛깔로 새 겉종이를 대었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두고두고 여러 사람 손길을 기쁘게 탈 수 있기를 바랐다.


  책 한 권을 새로 사자면 돈이 그닥 많이 안 든다. 만화책 한 권 새로 장만하자면 오천 원이면 넉넉하다. 낡고 닳은 만화책 《닥터 노구찌》를 손질하자면 며칠쯤 걸릴까. 두꺼운 종이를 대고 나무풀을 바르고 실로 꿰매고 하얀 종이를 덧대어 이름을 새로 적고 무거운 돌로 눌러서 책꼴을 새로 내도록 할 수 있는 책아이를 기다린다. 4347.12.5.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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