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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맡에 그림책



  밥상을 차리는데 밥상맡에 그림책이 하나 있다. 큰아이가 그림책을 보고 나서 그대로 두었나 보다. 혼자서 그림책을 즐겁게 보고 나서 제자리에 잘 꽂기도 하지만, 동생이랑 그림책을 보며 놀다가 다른 놀이로 옮기면서 그만 방바닥에 그림책을 놓고는 깜빡 잊곤 한다.


  밥상을 다 차린 뒤 아이들을 부른다. 수저를 놓기 앞서 큰아이한테 말한다. 책을 잘 보았으면 치워야지. 큰아이는 네 하고 외친 다음 콩콩콩 달려서 책꽂이에 꽂는다. 그러고 나서 수저를 놓도록 한다. 밥상맡에 장난감이나 책이 있으면 밥을 안 주지. 4347.9.14.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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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가 책을 읽을 때



  오늘날 한국에서 여느 살림집 여느 아줌마가 책을 손에 쥘 겨를은 거의 없다고 할 만하다. 오늘날 한국은 아직 민주와 평등하고 많이 동떨어지기 때문이다. 한가위에 오늘날 여느 아줌마는 무엇을 할까? 설날에 오늘날 여느 아줌마는 어디로 갈까?


  아침에 밥과 국을 끓이면서 책을 살짝 쥔다. 그야말로 살짝 쥔다. 밥물을 안치고 국에 불을 넣은 뒤 다른 찬거리를 마련하는 틈이 살짝 비는데, 이때에 한두 쪽을 읽을 수 있다. 찬거리를 모두 마련한 뒤 손을 새로 씻어서 행주로 밥상을 닦고 수저를 놓는 동안 두 손은 물기가 마른다. 밥과 국이 얼마나 익었는가 살피고 나면, 이때에 서너 쪽을 읽을 수 있다.


  넷이 먹을 밥 한 끼니 마련하는 동안 으레 열 쪽 남짓 읽을 수 있다. 그런데, 다섯이나 여섯이 먹을 밥 한 끼니라면, 일곱이나 여덟이 먹을 밥 한 끼니라면, 다문 한 쪽조차 읽지 못한다. 아니, 책을 거들떠볼 겨를조차 없다. 넷이 먹을 밥을 마련하더라도, 며칠 동안 비가 그치지 않다가 갠 아침이라면, 밥과 국에 불을 올리고 나서 바지런히 손빨래를 할 틈이 생긴다. 이런 날에도 손에 책을 쥘 틈이 없다.


  밥을 모두 먹이고 설거지를 마친 뒤 부엌 비질을 끝내면 살짝 기지개를 켠다. 이때에 하품을 하면서 손에 책을 쥘 만하다. 그러나 몸이 고단하지 않을 때라야 손에 책을 쥔다. 때로는 고단함을 털어내자 생각하면서 책을 손에 쥐어 보는데, 스르르 눈이 감기기 일쑤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여느 살림집 여느 아저씨는 무엇을 할까? 오늘날 한국에서 여느 살림집 여느 아저씨는 어떤 책을 읽으면서 어떤 지식을 쌓고 어떤 일을 할까? 식은밥이 있으면 10분, 새로 밥을 지어야 하면 30분, 꼭 이만 한 겨를에 네 식구 먹을 밥 한 끼니 차릴 줄 모르는 사내라면 사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4347.9.8.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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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값 에누리가 책마을 망가뜨린다



  2014년 11월에 새로운 도서정가제대로 책을 다루어야 한단다. 이를 앞두고 여러 ‘대형 인터넷책방’에서 출판사와 손을 잡고 ‘반값 에누리 책’을 선보일 뿐 아니라 ‘1000원 책’이나 ‘2000원 책’까지 선보인다. 그런데, 이런 책이 ‘헌책’이 아닌 ‘새책’이다. 사람들이 즐겁게 사서 읽은 뒤 내놓은 헌책이 아니라, 아직 아무 손길도 받은 적 없는 새책을, 책방에 들여놓는 때부터 반값으로 에누리를 하거나 ‘1000원 균일가’라느니 ‘2000원 균일가’로 밀어넣기를 하는 셈이다.


  조금이라도 생각해 볼 노릇이다. 책을 이렇게 팔아서 종이값이라도 건질 만할까? 책을 이렇게 팔면 작가나 번역가나 화가한테 글삯(인세)을 줄 수 있을까? 1만 원짜리 책이라면 글삯이 10퍼센트인데, 이런 책을 ‘1000원 균일가’로 팔면 종이값은커녕 글삯조차 줄 수 없다. 이게 무슨 책장사인가?


  책이 도무지 안 팔리는 나머지, 맞돈을 조금이라도 만져야 하기에 반값으로 에누리를 해서 책을 밀어야 할는지 모른다. 다문 ‘1000원 균일가’나 ‘2000원 균일가’로 마구마구 집어넣어야 출판사가 문을 안 닫을는지 모른다.


  그러면, 물어 볼 노릇이다. 이렇게 후려치기를 해서 파는 책은 ‘독자한테 얼마나 도움이 될’ 책일까? 제값대로 팔지 못하는 책이라면, 처음부터 ‘독자가 읽을 값어치가 없는 책’은 아닐까? 독자가 사랑할 책이라면, 반값으로 에누리를 할 때에 장만할 책이 아니라, 제값을 모두 치르면서 뿌듯하면서 즐거운 마음이 되는 책이어야 하지 않을까?


  대형 인터넷책방이 출판사에 ‘반값 에누리’를 하자고 먼저 말했을는지, 아니면 대형 출판사가 대형 인터넷책방에 ‘반값 에누리’를 하자고 먼저 말했을는지 알 길은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뚜렷하다. 두 곳에서 서로 한마음이 되어 하는 일이다. 책 하나를 반값 후려치기를 하거나 1000원이나 2000원에 밀어붙이기로 팔아치우려는 짓은, 작가와 독자 모두를 바보로 만드는 짓이다.


  이런 일이 있을 적에 독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출판사와 책방이 힘들어 보이니 이럴 때에 책을 더 사야 하는가? 이런 일이 없도록 반값 에누리 따위를 하기 앞서 즐겁게 책을 사서 읽을 노릇일까?


  한 가지 덧붙인다. 반값 에누리 따위가 갑자기 판을 치는데, 이러거나 말거나 반값 에누리는 아예 안 쳐다보는 출판사도 제법 많다. 모든 출판사가 모든 책을 반값 에누리로 밀어넣지 않는다. 그런데, 반값 에누리 따위가 워낙 판치다 보니, 제값을 제대로 받으면서 독자를 만나려고 하는 책들은 ‘독자가 알아보기 쉽지 않’다.


  어떤 책을 읽어서 스스로 어떤 삶을 가꾸려 하는가는 언제나 독자 몫이다. 이 책을 읽어도 좋고 저 책을 읽어도 좋다. 꼭 제값 치르는 책만 읽어야 마음을 살찌우지는 않는다. 그리고, 아주 마땅한 노릇인데, 반값 에누리 책을 사들여서 읽는다 하더라도 마음을 살찌울 수 있지는 않다. 책을 왜 읽는가? 값이 싸니까? 값이 안 싸면 책을 읽을 뜻이 없을까? 우리는 ‘책’을 읽는가, ‘값’을 읽는가? 4347.9.5.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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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히 읽다 보면



  들뜨거나 바쁘면 어떤 일을 해도 손에 제대로 안 잡힌다. 들뜨거나 바쁜 마음으로 책을 손에 쥐면, 책에 깃든 숨결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다. 마음을 차분히 다스려야 하고, 들뜨거나 바쁜 마음을 조용히 다스려야 한다.


  들떠 움직이는 사람은 생각을 슬기롭게 못 짓기 일쑤이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은 생각을 사랑스레 못 가꾸기 마련이다. 차분한 마음이 되고 차분한 몸가짐이 될 때에, 비로소 생각도 사랑도 슬기롭거나 사랑스레 보듬을 수 있다.


  천천히 쌀을 씻는다. 천천히 비질을 한다. 천천히 걸레질을 하고, 천천히 빨래를 복복 비벼서 헹군다. 천천히 걷고, 천천히 자전거를 달린다. 천천히 말하고, 천천히 들으며, 천천히 웃음을 짓는다.


  어떤 것이든 내 삶자리에서 차근차근 갈무리할 때에는 으레 마음이 천천히 차분해지지 싶다. 이때에는 내 마음에 새로운 힘이 붙어서 앞으로 다가올 일을 씩씩하게 맞이할 수 있구나 싶다. 그러니까, 차분히 가라앉힌 마음으로 책 한 권 손에 쥘 때에 빛을 먹고 숨결을 먹으며 이야기를 먹는다. 차분히 다스린 마음자리에 슬기로운 생각과 사랑스러운 꿈을 씨앗 한 톨로 심으면서 빙그레 웃음이 솟으면서 살며시 노래가 흐른다.


  차분히 읽다 보면 모두 이루어진다. 차분히 살다 보면 모두 이룬다. 차분히 걷다 보면 아름다운 바람을 쐰다. 차분히 일하다 보면 시나브로 씩씩하게 한길을 걷는 모습을 느낄 수 있다. 4347.9.4.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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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삯으로 받는 책



  어느 곳에 글을 하나 보냈더니, 글삯이라면서 그림책을 여러 권 보내 주었다. 토요일 낮에 택배 상자가 하나 와서 열어 보니 깜짝선물이라고 할 만한 그림책이 나온다. 지난 달포 사이 살림돈이 없어 새롭게 그림책을 하나도 장만하지 않았다. 마침 이럴 즈음 새로 나온 그림책 여러 권을 받으니 누구보다 큰아이가 기뻐하면서 반긴다. 상자에서 나온 새로운 그림책을 잽싸게 골라서 바로 마룻바닥에 펼치더니 종알종알 읽는다. 작은아이도 누나 곁에서 그림책을 하나 펼쳐서 그림을 훑는다.


  글삯을 돈으로 받으면 이 돈으로 책을 장만했겠지. 이때에는 내가 스스로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서 장만한다. 글삯으로 처음부터 책으로 준다면 어떤 책을 받을는지 모른다.


  재미있다. 내가 고르지 않을 법한 책을 받을 수 있고, 내가 미처 모른 예쁜 책을 받을 수 있다. 다만, 어떤 그림책을 장만하든, 책에 적힌 글을 한참 손질해야 한다. 예나 이제나 그림책을 한국말로 쓰거나 옮기는 어른들은 아직 ‘어린이가 눈으로 읽고 귀로 들으며 마음으로 새길 한국말’이 어떠한지 제대로 모른다. 한 권은 다 손질을 하고 두 권째 손질을 하다가 하품이 나온다. 저녁이 늦기도 해서 이튿날 마저 손질하기로 한다. 불을 끄고 아이들을 재운다.


  아이들이 많이 어릴 적에는 내가 ‘그때그때 눈으로 고쳐서 읽어 주’면 되었지만, 이제 큰아이가 스스로 글을 읽을 수 있으니, ‘그때그때 그림책에 손으로 글을 고쳐’ 놓아야 한다. 다른 어른들이 잘못 쓴 글을 바로잡는다. 아무쪼록 낮과 저녁을 새로운 책으로 넉넉하게 누린다. 4347.8.30.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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