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을 지으면서 배우다



  제가 사전길을 걸을 줄 모르기도 했지만, 알기도 했습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모으기를 무척 사랑했습니다. 좋아하지 않고 사랑했습니다. 저는 무엇이든 모으려고 했습니다.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피우고 남은 담배꽁초에서 이름이나 무늬가 적힌 쪽종이를 뜯어서 모으려 했습니다. 껌종이도 모으려 했습니다. 병마개도 모으려 했습니다. 과자를 감싸던 비닐껍질을 모으려 했습니다. 버스표를 모으려 했습니다. 해마다 새로운 쇠돈을 몇 닢씩 모으려 했습니다. 새해에 절을 하고 받은 절돈마저 모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을 모으려 했고, 저를 둘러싼 이웃이나 동무가 어떤 생각이나 마음인가를 살펴서 모으려 했습니다. 구름을 눈에 담아 모으려 했고, 바람맛을 모으려 했어요. 꽃내음도, 꽃잎결도 모두 모으려 했습니다. 어릴 적에는 그저 모으면서 살았고, 열일곱 살이던가 비로소 책에 눈을 뜬 뒤로는 책을 모으려 했습니다. 열아홉 살이던가 바야흐로 통·번역 배움길에 나서면서 말을 모아야 하는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무엇이든 모을 적에는 가릴 수 없습니다. 이것은 좋거나 저것은 나쁘다고 금을 그을 수 없습니다. 마음을 모으는데 네 마음은 좋고 내 마음은 나쁘다고 쪼갤 수 없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모으는 동안 무엇보다 한 가지를 배우는구나 싶어요. 모을 수 있는 까닭이라면, 모두 아름답기 때문이에요. 모으는 까닭이라면, 저마다 사랑스럽기 때문이에요. 말을 엮거나 짓거나 그러모으거나 가다듬거나 갈고닦아서 내놓는 사전 한 권이란, 온누리 모든 말에 서린 아름다움을 읽을 뿐 아니라, 사랑스러움을 나누려고 하는 뜻을 담는 책이지 싶습니다. 2017.12.2.6.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은?



  “책은, 삶을 다룬 그릇입니다.” 하고 한 줄로 적어 봅니다. “책은,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 숲을 새롭게 살려서 생각을 슬기롭게 갈무리한 숨결입니다.” 하고 조금 살을 붙여 봅니다. 숲이 고스란히 책이고, 책이 그대로 숲이라고 느낍니다. 우리가 짓는 생각이 바로 숲이 되고 책이 됩니다. 우리가 짓는 흙이나 살림이 언제나 책이 되고 숲이 됩니다. 종이가 되어 준 나무를 헤아리면서 책을 읽습니다. 숲으로 살아가는 나무를 바라보면서 책을 읽습니다. 종이를 만지작거리는 아이들을 돌보면서 책을 읽습니다. 숲에서 까르르 웃으며 뛰노는 아이들하고 살아가며 책을 읽습니다. 나도 숲이고 책입니다. 그대도 숲이며 책입니다. 우리는 서로 싱그러운 숲이자 사랑스러운 책입니다. 2017.12.26.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참 다르지



  같은 책방에 들어서도 서로 보는 책이 다릅니다. 같은 갈래를 좋아한다고 하지만, 서로 책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참으로 서로 바라보고 집어들어 장만하는 책이 다릅니다. 나고 자라며 살아가는 결이 다르니 서로 다르게 책을 만나서 다르게 읽으며 다르게 삭이겠지요. 어울리는 이웃이 다르고, 돌보는 아이가 다르며, 내다보는 저 먼 앞길이 다르기에 오늘 두 손에 쥐어 읽는 책이 다르겠지요. 다 다른 이웃님이 다 다른 기쁨으로 다 다른 책방을 엽니다. 다 다른 발걸음이 책방에도 닿고 찻집에도 닿고 논밭에도 닿으며 숲길에도 닿다가, 어느새 보금자리 마당에 닿더니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구름이 어디에 있고 별이 얼마나 반짝이는가를 헤아립니다. 2017.12.22.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책을 사는, 아니 책만 산 하루



  어제 하루는 책을 산, 아니 책만 산 하루입니다. 그래도 찻집에 들러 글을 쓰느라 코코아 한 잔을 사기는 했네요. 길손집에서 하루를 묵다가 돌아보니 아침 끼니거리조차 장만하지 않았구나 싶어요. 한밤에 살짝 배고프네 하고 느끼다가도 아침이 되니 배고픈 줄을 잊습니다. 그나저나 어제 하루는 오롯이 책만 장만했습니다. 비록 헌책방 한 곳, 마을책방 한 곳, 이렇게 책방을 두 곳만 마실을 했으나, 가방이 묵직하도록 책을 장만했어요. 헌책방에서는 지난 열한 해 동안 손꼽아 기다리던 사진책을 드디어 찾았습니다. 이밖에 김대건 님 편지를 묶은 오랜 책이라든지 한국에 있던 외국인학교 도서관에 깃들던 책이라든지 재미난 책을 보았어요. 마을책방에서는 그림책이며 대전 이야기를 담은 책이며, 온누리 책방을 다닌 서양사람 이야기가 흐르는 책이며, 한국에서 여러 책방을 즐거이 마실하는 이웃님이 책으로 삶을 즐긴 이야기를 엮은 책을 만났습니다. 아침에 씻고 짐을 꾸려서 길을 다시 나서려고 생각하며 침대에 짐을 잔뜩 풀었더니 오직 책만 있습니다. 책무게로만 꽤 나갈 듯합니다. 오늘은 되도록 걷지 말자고, 버스이든 택시이든 탈거리에 몸하고 가방을 맡기자고 생각합니다. 2017.12.22.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배움삯



  이제껏 책을 사며 에누리를 해 본 일이 없습니다. 아마 십만 권이 훌쩍 넘는 책을 샀을 텐데 참말 한 차례도 에누리를 한 적이 없는 줄 요즈음 새삼스레 깨닫는데요, 왜 에누리를 안 하면서 책값을 치르나 하고 요 몇 해 동안 헤아려 봤어요. 어느 날 곁님이 문득 짚어 주어서 뒤늦게 무릎을 쳤습니다만, ‘책값 = 배움삯’이라고 여겼기에 책값을 에누리할 마음이 없던 셈이더군요. 한 줄을 읽으면서 배우든 통째로 다 읽으면서 배우든 늘 배울 수 있어 고마운 책이기에, 기꺼이 온돈을 다 치르면서 책을 사려고 했구나 싶어요. 삶을 배우고 살림을 배우며 사랑을 배울 수 있는데 값을 깎자거나 외상으로 달아 놓을 수야 없지요. 고마이 배우고 기쁘게 배우며 아름답게 배우는데 바로바로 온돈을 치를 뿐 아니라 우수리나 덤을 챙겨 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2017.12.21.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