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저지른 성추행·막말을 잊었나요?

― 최영미 시인을 헐뜯는 이승철 시인한테




  지난 2016년 11월 30일에 쓴 글이 하나 있습니다. 다음 주소로 들어가면 그 글을 살필 수 있습니다. 그 글에 붙인 이름은 “술은 여자가, 없으면 젊은 사내가 따라야”입니다. 저는 그 글을 쓰기까지 열 몇 해 동안 속을 삭이면서 마음앓이를 했습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265579


  때린 사람은 잊었을는지 모르지요. 더듬고 삿대질하고 막말을 퍼부은 사람은 참말로 까맣게 잊었을는지 몰라요. 그러나 맞은 사람은, 더듬질을 받고 삿대질을 받으며 막말을 받은 사람은 좀처럼 못 잊습니다. 저는 이태 앞서 그 글을 쓸 적에 ‘사내이면서 사내를 더듬고 입맞춤을 하려고 한 그분 이름’을 굳이 안 밝혔습니다. 그분이 요즈막에 페이스북에 글을 쓰신 그대로, ‘가해자가 옛날얘기 때문에 오늘날에 피해를 안 받도록’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분 이름을 밝혀야겠구나 싶습니다.



최영미 시인이 갑자기 떴다. 미투라고 했다. JTBC 손석희ㅡ최영미 인터뷰를 보면서 내내 심기가 불편했다. 문단에 만연한 성추행이라니, 최영미는 참으로 도발적인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잣대로 마치 성처녀처럼 쏟아냈고, 천하의 손석희는 한국문단이 "아 이럴수가 있나" 하며, 통탄하고 있었다. 메이저 출판사와 무소불위의 평론가들의 묵계를 강조하면서 그녀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남발했다. 최영미의 그런 발언에 대해 절실성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왠지 내가 그녀의 가해자가 된듯 나도 모르게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최영미 인터뷰는 한국문단이 마치 성추행집단으로 인식되도록 발언했기에 난 까무라치듯 불편했다. 왜 그녀가 이 시점에서 자기 체험을 일반화해서 문단 전체에 만연한 이야기로 침소봉대해 쏟아내는지 조금 의아했다. (2018.2.7. 이승철 시인 페이스북)



  맞은 사람이 맞은 그자리에서 왜 때리느냐고 따질 적에, 때린 사람은 그자리에서 곧장 고개를 숙이면서 뉘우칠까요? 또는 맞은 사람이 왜 때리느냐고 따질 수 있을 만한 자리였을까요?


  잘 생각해 봐요. 때리는 사람은 권력이 있습니다. 맞는 사람은 권력이 없습니다. 성추행을 저지르는 사람은 권력이 있습니다. 성추행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권력이 없습니다.


  더 생각해 봐요. 예전에는 맞은 사람이 목소리를 낼 자리가 없었어요. 예전에는 맞은 사람이 목소리를 내도 그저 파묻혀 버렸어요. 목소리를 냈다가 더 얻어맞기까지 했어요. 때린 사람은 때리고 나서도, 또는 성추행을 저지르는 사람은 성추행을 저지르고 나서도, 하늘을 우러러 한 조각 부끄러움이라도 품으면서 ‘맞아서 아픈 이’를 달래거나 다독여 보았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이자면, 최영미 시인이 쓴 글을 놓고서 “심기가 불편했다”고, “최영미 인터뷰는 한국문단이 마치 성추행집단으로 인식되도록 발언했기에 난 까무라치듯 불편했다. 왜 그녀가 이 시점에서 자기 체험을 일반화해서 문단 전체에 만연한 이야기로 침소봉대해 쏟아내는지 조금 의아했다.”고 말씀하신 이승철 시인이 이녁보다 열세 살 어린 저를(제 나이 서른 살 무렵) 껴안고 쓰다듬고 입맞추고 엉덩이와 허벅지를 주무르고 했던 일을 잊으셨는지 묻고 싶어요. 아니, 그런 짓을 저질렀던 지난날을 떠올려 보실 수 있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최영미 발언이 용기 있다고 한다. 어허 그렇다면 한국문학의 상징, 우리 En시인은 어찌할꼬나. 물론 En 시인의 기행에 대해서 숱한 얘기를 들은적 있지만 먼먼 소싯적 얘기를 현재 진행형하여 매도하는 건 조금 납득할 수 없다. 남자의 성적 욕망이란게 얼마나 무서운가. 그리고 그 욕망의 피해자가 받는 고통은 또 얼마나 지속적이고 치유 불가능한가. 그걸 최영미 발언을 통해서 확인해본다. (2018.2.7. 이승철 시인 페이스북)



  먼먼 옛날얘기를 오늘날 섣불리 휘두르기는 어렵겠지요. 그런데 일제강점기를 우리가 왜 되새기는가를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왜 친일부역이나 독재부역을 따지는가를 헤아려 보면 좋겠습니다. 먼먼 옛날얘기로 잘못을 묻는다고 하소연하기 앞서, 먼먼 옛날얘기를 얼마나 뉘우치면서 고개를 숙였는가를 먼저 털어놓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승철 시인 스스로도 아는 듯한데 “남자의 성적 욕망이란게 얼마나 무서운가”를 참말 아신다면, 함부로 말하지 말고 함부로 움직이지 말아야겠지요? 이승철 시인이 2004년 무렵 저한테 들려준 말씀 몇 가지를 옮겨 보겠습니다. 제 머리에서 아직도 지우지 못한 이승철 시인 말씀입니다.



* 스스로 문단 어른이라 밝힌 이승철 시인이 나한테 들려준 말 *

ㄱ. 여자가 없으면 젊은 사내가 술을 따라야지, 너 뭐하니?

ㄴ. 술김에 쓰다듬고 뽀뽀하자는데 뭐 어때? 너도 좋잖아?

ㄷ. 여자가 없으니 너를 쓰다듬고 뽀뽀하자는데 왜 그래?

ㄹ. 니가 뭔데 ××야, 나이도 어린 게 입 닥쳐! 이 ×××야 얼른 자리에 앉아! 술이나 따라!

ㅁ. 왜? 뭐가 잘못됐어? 술은 이렇게 마셔야지!

ㅂ. 이 ×××아, 너 앞으로 문단에 나오기만 해 봐, 아예 문단에 못 들어오게 할 테니까. 어린 놈이 어디 건방지게 굴어!

ㅅ. 어디 가? 다시 여기 앉아서 술 대접 해! 어린 ××가 어른한테 술 대접도 안 하고 어딜 도망가려고 해!



  58년 개띠인 이승철 시인은 열 몇 해 앞서 어떤 젊은 사내한테 퍼부은 말을 까맣게 잊으셨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무렵 스스로 ‘문단 어른’이라고 일컬으면서 제 허리 엉덩이 허벅지를 실컷 쓰다듬고 주무르던 그 손길을 몽땅 잊으셨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지 말라고, 아무리 술김이라도 그러시면 안 된다고 손사래치니, 오히려 갖은 욕에다가 삿대질을 저한테 퍼부으셨고, 마지막에는 “문단에 못 들어오게 할 테니까” 하고 덧붙인 말씀을 하얗게 잊으셨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때 성추행이랄까 성폭력이랄까, 끔찍한 일을 겪어야 한 저로서는 열 몇 해가 지나도록 마치 그림처럼 그날 그 일이 떠오릅니다. 추행하고 폭력을 일삼는 분으로서는 아무것이 아닌 일일 수 있지만, 추행하고 폭력을 받아야 한 사람으로서는 ‘아무것이 아닌’ 일이 아니며, 아무리 긴 나날이 지나도 씻기가 어렵습니다.


  아실는지요? 느껴 보셨는지요?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요?



1994년이던가? 소설가 이문열이 <시인>이란 소설로 En를 매도하다가 자신의 소설을 폐기처분한 바 있는데, 이제 최영미가 다시 등장했다. 난 미투가 두렵진 않다. 나도 한때는 여자사람을 좋아했는데 누가 나를 이십년, 삽십년 전 일로 미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잠시 옛날을 되돌아 본다. 타인의 불행이 더이상 나의 행복은 아니다. 허나 미투 투사들에 의해 다수의 선량한 문인들이 한꺼번에 도매금으로 매도되는 현실이 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2018.2.7. 이승철 시인 페이스북)



  ‘착한 문인’이 한꺼번에 손가락질을 받는 일이란 슬픕니다. 얼결에 착한 문인까지 싸잡혀 손가락질을 받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있잖아요, 성추행이나 성폭력은 거의 모두 사내가 가시내한테 합니다. 같은 사내로서 부끄러운 줄 알면서, 같은 사내로서 앞으로 이런 일이 더는 불거지지 않도록 슬기를 모으고 마음을 고쳐먹을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는(피해자는) “미투 투사”이겠지요. 여태 짓밟히고 숨죽이며 살았으니, “이제는 말해야겠다”고 머리띠를 질끈 동여매고 일어서는 싸울아비입니다. 부디 고개 숙일 줄 알기를 바라요. 부디 상냥한 입으로, 글로, 손으로, 말로, 이야기로, 거듭나시기를 바라요. 이녁이 참말로 “문단 어른”이라면 이녁 두 손으로 앞으로 어떤 일을 하는 길을 걸어야 할는지를 곰곰이 차분히 조용히 생각해 보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겨울이 저물고 새로 찾아오는 봄날, 페이스북을 끄고 두 손에 호미를 쥐신 다음, 밭자락을 일구는 하루를 땀흘려 지으시기를 빕니다. 2018.2.11.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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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숲집 있는 마을



  책방은 커야 하지 않습니다. 책방에는 책이 많아야 하지 않습니다. 책방은 도시 한복판에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책방지기는 똑똑하거나 잘나거나 이름나야 하지 않습니다. 책방은 작아도 됩니다. 책방에는 책이 적어도 됩니다. 책방은 시골이나 골목에 있어도 이쁩니다. 책방지기는 수수하거나 투박하거나 조용해도 멋스럽습니다. 우리는 더 많은 책이나 더 값진 책을 찾아서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살찌우는 책 하나를 사이에 놓고 상냥한 이웃으로 이야기꽃을 펴는 기쁨을 누리려고 책집마실을 합니다. 아니 책숲마실을 한다고 할 만합니다. 숲에서 온 종이에 저마다 삶을 적바림하기에 책이 되고, 이러한 책을 둔 책방은 크든 작든 새책방이든 헌책방이든, 또는 도서관이나 서재이든 모두 책숲집이라고 느낍니다. 이러한 책숲집에, 책집에, 숲집에 깃들 수 있다면 참으로 아름답지 싶어요. 책숲집이 고장마다 고즈넉히 있어서 기꺼이 길을 나섭니다. 책숲집에서 살가운 숨결을 마주할 수 있어서 어제도 오늘도 모레도 책숲마실을 떠납니다. 2018.2.2.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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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찔한 책마을



  미국 제약업계 이야기를 그끄제 들었습니다. 마약하고 ‘마약 치료제’를 놓고서 슬그머니 곱절 돈벌이를 한대요. 한쪽에서는 여느 미국사람이 마약에 길들 수밖에 없도록 내몰면서 장사를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같은 제약회사가 마약 치료제를 팔아서 장사를 한다지요. 마치 한국에서 건설업계하고 정부가 짬짜미하듯 벌이는 ‘막공사+되살림’하고 엇비슷합니다. 4대강사업을 하느라 엄청나게 돈을 쏟아부었는데, 이를 도로 물리며 물길이 제대로 하도록 하자면 또 엄청나게 토목건설에 돈을 쏟아부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책마을에서도 비슷하게 불거져요. 책마을에서 큰손인 분들이 이쪽에서는 어떤 책장사로 떼돈을 벌면서 책흐름이 치우치도록 내몰고, 같은 큰손인 분들이 저쪽으로 가서 슬그머니 ‘출판계 위기’라는 이름을 들먹이면서 강의를 하거나 책을 내지요. 그 큰손인 분들이 말씀하는 ‘책마을 벼랑길(출판계 위기)’이란 바로 그분들이 큰돈을 들여서 큰물결을 일으킨 짓 때문에 불거지는데, 그분들로서는 이쪽에서는 이 장사로 돈하고 이름을 얻으면서 저쪽에서는 저 장사로 돈이랑 이름을 거머쥔달까요. 워낙 큰손인 분들이라 강의마당까지 넓고 크게 차지하면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시거든요. 그러나 책마을 일꾼은 모두 큰손이지 않습니다. 책마을에는 작은손인 일꾼이 많습니다. 비록 큰손이 큰돈을 벌고 큰이름을 얻으려고 큰짓을 하십니다만, 작은손인 책지기는 작은돈으로 작은이웃을 사귀면서 작은마을에서 작은책방을 사랑하는 작은길을 걸어요. 큰손인 분들이 꾀하는 아찔한 몸짓은 시나브로 마을책방지기가 눈치를 채거나 알아차립니다. 우리는 길도 무덤도 스스로 팝니다. 부디 큰손인 분들이 큰몸을 내려놓고서, 책마을이웃으로 상냥하고 목소리 낮추는 수수한 일꾼 노릇을 조그맣게 맡기를 바라 마지 않습니다. 2018.1.22.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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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우니 한 마디



  어버이로서 아이들한테 밥을 지어 먹일 적에 늘 생각합니다. 어버이인 제가 지은 밥을 아이들이 늘 맛나게 먹어 주어야 하지 않고, 고맙게 먹어 주어야 하지 않습니다. 어버이인 제가 지은 밥이니 그릇이나 접시를 싹싹 비워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하고 어버이 사이에는 이야기가 흘러야 합니다. 맛이 어떤가를 고스란히 들려주고, 짜거나 달거나 맵거나 싱겁지 않은지 제대로 알려주어야 합니다. 많은지 적은지 말해야 하고, 배부르거나 배고픈가를 밝혀야지요. 밥상맡에 앉은 곁님이나 아이들이 톡톡 읊는 말 한 마디가 밥짓는 살림지기인 저한테 늘 이바지해요. 잘 지은 맛밥인지, 좀 엉성한 밥인지 스스로 깨닫도록 이끌어요. 맛밥을 지었다면 다음에도 맛밥을 짓도록, 또는 한결 낫거나 새롭거나 다른 맛밥을 헤아려 봅니다. 엉성밥을 지었다면 다음에는 엉성밥 아닌 맛밥이 되도록 생각을 기울이고 이모저모 살펴봅니다. 이러한 얼거리 그대로 ‘책이나 글’을 놓고도 이야기를 해요. 제가 하는 일이 사전짓기이다 보니, 제 글을 비롯해서 이웃님 글을 늘 살피거나 읽습니다. 이때에 이웃님이 쓴 책이나 글에서 엉성한 대목을 만나면 그때그때 적바림해서 제 나름대로 손질해 봅니다. 한결 낫거나 새롭거나 다르게 쓸 수 있는 글길을 살핍니다. 고마운 책을 만날 수 있어 즐겁게 장만해서 읽는 책이기에 ‘고마운 책을 지은 이웃님’한테 아뭇소리 안 하고서 책이나 글을 읽을 수 없습니다. 고마운 책이기에 한 마디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생각해요. 제가 쓴 책이나 글을 놓고도 누구나 얼마든지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이웃님 누구나 쓴 책이나 글을 놓고도 누구나 어떤 이야기이든 널리 할 수 있어요. 우리는 마음을 활짝 열고 함께 배우면서 삶길을 다스리거나 갈고닦을 적에 아름다운 사람으로 설 수 있지 싶습니다. 2018.1.22.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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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위기’란?



  ‘위기(危機)’란 “위험한 고비나 시기”를 뜻한다 하고, ‘위험하다(危險-)’는 “해로움이나 손실이 생길 우려가 있다”를 뜻한다 합니다. 출판인이나 기자나 작가나 평론가 같은 분들이 흔히 ‘출판 위기’를 말하는데, 이는 “책을 내어 돈을 잃거나 출판사가 문을 닫을까 걱정스럽다”를 뜻하는 셈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렇다면 출판 위기란 옛날부터 늘 있는 셈입니다. 어쭙잖은 책을 내다가는 돈이고 뭐고 다 잃겠지요. 그러나 어쭙잖은 책도 잘 알리면 뜻밖에 잘 팔려서 돈을 얻기도 합니다. 이를 놓고 영어로 마케팅이라 하는데, 알맹이가 허술한 책을 껍데기를 잘 씌워서 돈을 많이 벌려고 할 적에는 마땅히 책장사가 어려울밖에 없다고 느낍니다. 다른 장사에서도 이와 같아요. 알맹이 없이 껍데기로 알려서 널리 팔면, 사람들은 어느새 알아보고서 등을 돌려요. 이때에는 속이거나 거짓을 편 셈이라 이 같은 일에 사람들 마음도 멀어집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책다운 책을 가까이하지 못한 채, 알맹이 없이 잘 팔리는 책을 손에 쥔다면 시나브로 책하고 멀어지겠지요. 다시 말해서 출판 위기라 할 적에는 그동안 책살림 아닌 책장사로 기울어진 우리 모습을 찬찬히 짚고 살펴야지 싶습니다. 아니, 위기이냐 아니냐 같은 모습을 따지지 말고, 책을 쓰거나 엮거나 펴내는 사람들 모두 알맹이를 고이 갖춘 책을 즐겁게 낼 노릇이라고 봅니다. 책다운 책을 알뜰살뜰 펴내어 사람들이 시나브로 책을 사랑하면서, 책에 깃든 아름다운 이야기를 제 삶으로 받아들여서 저마다 기쁜 삶짓기를 하도록 북돋우면, 우리는 넉넉하고 즐거운 책누리를 지을 수 있다고 여깁니다. 제대로 쓴 책은 사람들이 알아보기 마련입니다. 다만 일찍 알아볼 수 있고 뒤늦게 알아볼 수 있겠지요. 책이란 하루아침에 빨리 읽힐 슬기꾸러미가 아닙니다. 우리 몸을 살찌우는 바람은 숲에서 비롯합니다. 숲에서 온갖 풀하고 꽃하고 나무가 베푸는 바람을 우리가 늘 마시면서도 ‘숲이 있어 고맙다’고 생각하는 일은 드물어요. 그냥 숨을 쉬면서 우리 할 일을 합니다. 책은 숲에서 왔지요. 나무라는 숲이 책이 됩니다. 그러니까 책이란 숲처럼 우리 곁에 ‘있는 듯 없는 듯 느끼는 듯 마는 듯’ 늘 있으면서 우리가 새롭게 생각을 지피는 슬기를 가꾸려고 하는 길에 살며시 제 모습을 드러내면서 길벗이 될 수 있으면 넉넉합니다. 책을 반드시 사자마자 읽어야 하지 않고, 모든 책을 자꾸자꾸 되읽어야 하지 않습니다. 갓 나온 책을 바로바로 사야 하지도 않습니다. 배워야 할 때를 스스로 느껴서 기꺼이 장만하거나 손에 쥐어서 읽으면 될 책입니다. 내가 읽어서 오늘 즐거운 책이요, 아이들한테 물려주어 먼 모레에 아름다운 책입니다. 2018.1.16.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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