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야 본다



  골목을 알려면 걸어야 합니다. 이 골목 저 골목 천천히 거닐면서 햇볕을 쬐고 바람을 마시면서 다 다른 보금자리를 온몸으로 마주할 때에 골목을 알 수 있어요. 아파트를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파트는 걸어서는 알 수 없습니다. 높다란 아파트는 사람들이 걸어서 오가도록 일군 집이 아닙니다. 자동차로 이리 달리고 저리 지나가기 알맞도록 지은 덩어리입니다.


  골목집은 햇볕이랑 바람하고 함께 살아가는 터전입니다. 골목집을 읽으려면 햇볕을 함께 읽어야 하고, 골목집을 사귀려면 바람을 같이 헤아려야 합니다. 이웃집과 햇볕을 나누어 먹는 골목집이요, 이웃집과 어깨동무하면서 찬바람을 막고 시원한 바람을 골고루 누리는 골목집입니다.


  두 다리로 걸으면서 햇볕과 바람을 느낄 적에 골목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다리로 걷다가 대청마루나 툇마루나 마당에 앉아서, 때로는 담벼락에 기대어 해바라기를 하고 바람을 쐴 적에 비로소 골목을 읽을 수 있습니다. 골목집을 이루어 살아온 사람들은 해를 등에 지고 바람을 가슴으로 맞아들이면서 하루하루 새롭게 일구었습니다. 4348.1.9.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골목길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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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마을 보살피기



  마을이 있기 앞서 조그마한 집이 있습니다. 조그마한 집에는 조그마한 사람이 하나 있고 둘이 있습니다. 하나에서 둘이 된 집안은 셋 넷 다섯으로 차츰 늘어납니다. 한솥밥 먹는 사람이 늘어나지요. 조그마한 집은 보금자리입니다. 이러한 보금자리에 한솥지기가 늘고 또 늘면서 제금을 나는 새로운 집이 태어납니다. 새로운 집이 태어나고 또 태어나면서 어느새 마을을 이룹니다. 모든 마을은 처음에는 조그마한 집 하나에서 비롯합니다.


  조그마한 집 하나 있을 적에는 따로 길이 없습니다. 집 둘레가 온통 숲입니다. 냇물이 흐르고 나무가 우거지며 온갖 풀이랑 꽃이 짙푸릅니다. 집과 집이 모여 마을을 이루면, 숲 사이로 알맞게 길을 냅니다. 밭을 조금씩 일구어 들을 넓힙니다. 둠벙을 파기도 하고, 마을이 커지면 울력을 해서 못을 파기도 합니다.


  예부터 사람들은 책이 아닌 입에서 입으로 말을 가르치고 이야기를 대물림했습니다. 모시와 삼에서 실을 얻으면서 노래를 불렀고, 물레를 잣고 베틀을 밟으며 노래를 불렀으며, 바느질을 하면서 노래를 불렀어요. 아기한테 젖을 물리면서 노래를 불렀고, 두레와 품앗이를 할 적에도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먼먼 옛날부터 집집마다 이야기와 노래가 있었고, 마을마다 이야기와 노래가 넘쳤어요.


  오늘날 도시에는 아주 많은 집이 아주 다닥다닥 촘촘히 모입니다. 골목동네뿐 아니라 아파트에도 집이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집은 아주 많으나, 집집마다 따로 이야기나 노래가 흐르지는 않습니다. 텔레비전이 흐를 뿐이고, 학교에서 교과서를 배울 뿐입니다. 오늘날에는 아파트 단지나 골목동네에서 따로 ‘공동체 문화’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러는 동안 작은 보금자리가 흔들립니다. 작은 보금자리에서 노래가 흐르지 않으니 사랑이 싹트기 어렵습니다.


  학교를 다니거나 인문책을 읽는다고 해서 두레살이나 보금자리를 살리지 않습니다. 마음속에 사랑이라는 씨앗을 심으려는 생각을 지을 때에 비로소 두레살이와 보금자리를 살릴 수 있습니다.


  작은 보금자리는 작은 땅뙈기를 일구면서 태어납니다. 넓디넓은 땅이 있어야 배불리 먹지 않습니다. 서로 알맞게 지을 수 있는 땅이 있으면 되고, 나머지 땅은 드넓은 숲이나 들로 곱게 두면 됩니다. 갯벌을 메워야 하지 않습니다. 숲을 밀거나 멧자락을 깎아야 하지 않습니다. 모두 그대로 둬요. 모두 그대로 살려요. 이럴 때에 작은 집과 마을과 고을과 나라가 모두 새롭게 살아납니다. 4347.9.2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골목길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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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나무집 귀뚜라미



  서울에서 하루를 묵은 뒤 전철역으로 걸어간다. 음성 아버지한테 선물로 드릴 큰 사진판을 옆구리에 끼고 걷는다. 옆구리가 결릴 즈음 귀뚜라미 우는 소리를 듣는다. 어, 뭔가. 두리번두리번 살핀다. 어디를 봐도 아스팔트뿐인 이곳에 어인 풀벌레 노래인가.


  이윽고 저 앞에서 대추나무를 본다. 푸른 알이 잔뜩 맺혔다. 소담스럽다. 옆으로 호박넝쿨이 울타리를 휘감는다. 그렇구나. 이 서울 한복판에서 대추나무 감나무 건사하며 아끼는 집이 있네. 골목집 한 곳이 조그맣게 숲이네.


  귀뚜라미가 아침나절에 노래하는 집 옆으로 지나가는 사람들 가운데 고개를 돌려 노래잔치를 듣는 사람은 안 보인다. 저마다 귀에 꽂은 딴 노래를 듣는다. 귀뚜라미는 힘차게 노래한다. 바람이 맛있다. 4347.9.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골목길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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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거리정육점



  인천 배다리에 살던 때에 ‘삼거리정육점’에 곧잘 들렀다. 고기를 사러 들르지는 않고 꽃을 구경하러 들렀다. 이제 와 돌이키면, 왜 그때 고기를 살 생각을 안 했나 모른다. 그러나, 나는 고기를 즐겨먹거나 찾아서 먹지 않다 보니, 정육점 앞에까지 갔어도 “이것 참, 오늘도 꽃이 이렇게 예쁘네!” 하고 침을 질질 흘릴 뿐이었다. 고기에 침을 흘리지 않고, 꽃에 침을 흘렸다. 예쁜 꽃 앞에서 한참 서성였다. 아니, 예쁜 꽃을 물끄러미 바라보느라 뒤에서 자동차가 들어서며 빵빵거려도 못 알아채기 일쑤였다. 얼마나 아름다운 꽃집, 아니 정육점인가. 삼거리정육점이란. 4347.8.26.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골목길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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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4-08-26 07:39   좋아요 0 | URL
아 정말 조금 특별한 정육점이네요~~
가게 앞이 화분들로 가득해~ 색다르고 푸르른 느낌을 주는
삼거리정육점.^^

숲노래 2014-08-26 07:52   좋아요 0 | URL
가게 앞뿐 아니라, 가게 옥상과 둘레에도 나무가 한 가득이랍니다. 아주 멋져요.
철마다 가게 둘레 빛깔이 달라요.
 

저녁뜸



  저녁뜸에 동네 아재들 하나둘 모인다. 어디에 모일까? 동네가게에 모인다. 왜 모일까? 막걸리 한잔을 하러. 또는 소주 한잔을 하러. 혼자 마시면 싱겁고, 둘이 마시면 맛깔스럽다. 혼자 마시면 한두 잔도 벅차지만, 두엇이 마시면 막걸리나 소주 반 병쯤 구수하게 누린다. 딱 이만큼만. 오늘 하루 기쁘게 일한 보람으로 꼭 요만큼만. 그러고 나서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집으로 돌아가고, 이튿날 새롭게 기운을 내어 즐겁게 일한 뒤, 다시금 저녁뜸에 한 사람 두 사람 모여 또 딱 반 병쯤 마시고는 흥얼흥얼 노래를 부른다. 저녁뜸 골목길. 4347.8.26.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골목길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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