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이루는 숲


 

  도시를 이루는 숲은 무엇일까. 나는 책방이 도시에서 사람들한테 푸른 숨결 베푸는 고운 숲 구실을 한다고 느낀다. 중학교를 다니고 고등학교를 다닐 적에, 또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교를 다섯 학기 다니는 동안, 학교 둘레에서 책방을 쉽게 만나거나 드나들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내 마음과 내 이웃들 마음은 사뭇 달랐다고 생각한다.


  도시에 책방이 있을 때와 없을 때는 크게 다르다. 도시에 새책방 여러 곳 있을 때하고 헌책방 한두 곳 있을 때 또한 크게 다르다. 새책방만 있고 헌책방이 없다면, 그 도시는 어딘가 허전하거나 쓸쓸하다. 새책방과 헌책방이 골고루 곳곳에 있으면, 그 도시는 여러모로 밝거나 산뜻하다.


  ‘기적의 도서관’이라 하면서 몇몇 도서관이 여러 지자체에 선다. 도서관을 세우고 책이야기 나누는 일은 반가우면서 고맙다. 그런데, 도서관만 있고 책방이 없다면? 사람들이 이녁 스스로 주머니돈 모아서 책 하나 살피며 장만하는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면?


  갓 나오는 책은 갓 나오는 대로 따스한 기운 느끼며 장만할 때에 즐겁다. 오래 묵은 책은 오래 묵은 대로 깊은 기운 느끼며 장만할 때에 즐겁다. 살가운 동무와 만나 이야기꽃을 피울 적에는 이대로 즐겁고, 할머니 할아버지하고 오순도순 둘러앉아 이야기열매 받아먹을 적에는 이대로 즐겁다. 아이들과 부대끼며 새로운 이야기샘 길어올릴 적에는 이대로 즐거울 테지.


  도서관 곁에 새책방이 있고, 새책방 곁에 헌책방 여러 곳 거리나 골목을 이루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도서관에서 낡은 책은 사람들한테 내놓으며 깨끗한 책을 새로 갖추고, 도서관에서 나온 책을 헌책방에서 받아들여 알맞춤한 값으로 팔 수 있으면, 또 새책방에서 새로 나오는 책들을 널리 알려 팔 수 있으면, 그리고 새책방과 도서관에서 다루지 못하는 책을 헌책방에서 정갈히 손질하며 팔 수 있으면, 참말 사랑스러운 책터가 이루어지리라.


  책방 곁에 나무로 이루어진 숲이 있으면 더 좋겠다. 사람들 살림집 사이사이에 풀숲이 있고 텃밭이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책은 나무를 베어 나무 숨결로 새로 빚는 이야기꾸러미인 줄 사람들이 고즈넉하게 느낄 수 있으면 참 좋겠다. 4346.2.1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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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3-02-14 02:09   좋아요 0 | URL
중-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인천에는 책방이 제법 많이 있었지요. 희망백화점 건너편의 희망서점, 주안-석바위 부근의 제일서점, 동인천의 대한서럼, 동아문고, 그 밖에도 수많은 동네와 학교 부근의 작은 서점들...책을 찾으러 이 서점, 저 서점 돌아다닌 기억도 이제는 가물가물해요. 그리고 이젠 도시의 숲은...아파트, 시멘트로 쌓아올린 형틀같은 엄청난 숫자의 아파트뿐이죠..

숲노래 2013-02-14 06:19   좋아요 0 | URL
음, 도시 숲이 이제 아파트라면, 도시 숲에 있는 나무는, 도시사람들인가요?
^^;;;;
에구구궁~
숲도 나무도 풀도 꽃도 모두 아름다울 도시가 될 수 있기를 빌어요...
 

 

책이 살아온 발자취

 


  일본에서 대정 13년에 1쇄를 찍고 소화 11년에 수정8쇄를 찍은 영어 교과서를 전남 순천 헌책방 〈형설서점〉에서 만납니다. 퍽 낡은 교과서로구나 싶고, 또 일본에서는 지난날 영어 교과서를 어떻게 엮었나 살짝 궁금해서 구경합니다. 그런데, 책 안쪽에 깃든 꽤 오래되었구나 싶은 도장 하나 봅니다.

 

― 우리들의 冊房 全南順天 大衆文化社

 

  전라남도 순천에 있었다는 책방 ‘대중문화사’는 어떤 곳이었을까요. 이곳을 아는 분은 아직 있을까요. 1936년에 일본에서 나온 영어 교과서는 언제 ‘전남 순천 대중문화사’ 책시렁에 놓였을까요. 일제강점기에 있던 책방일는지요, 아니면 해방 뒤에 있던 책방일는지요.


  누군가 책을 한 권 장만합니다. 책 한 권은 새책방 책시렁에 놓여 누군가한테 팔립니다. 즐겁게 읽힌 책이 오랜 나날 조용히 묻히다가 어느 날 헌책방으로 흘러나옵니다. 책 한 권 건사한 이가 이승에서 저승으로 건너간다든지,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떠난다든지, 살림을 줄인다든지, 집안청소를 한다든지, 책하고 멀어진다든지, 하면서 헌책방으로 들어옵니다. 서른 해 쉰 해 일흔 해 발자취가 헌책방에 살포시 남습니다.


  손으로 빚는 책을 손으로 갈무리합니다. 손으로 갈무리하는 책이 책방 책시렁에 놓여 책손을 기다립니다. 책손은 손으로 책을 쓰다담으며 책을 고르고, 고른 책을 주머니에서 손으로 돈을 꺼내어 책값을 치릅니다. 책값 치른 책을 손에 들고 들뜬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갑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두 손으로 책을 꼬옥 쥐기도 하고 펼치기도 하고 어루만지기도 합니다.


  우리들 책방 대중문화사는 이제 없지만, 우리들 책방 대중문화사에서 다룬 책 하나는 정갈한 도장 자국과 함께 오래오래 이어집니다. 헌책방에서 책 하나 고른 뒤, 주머니에서 볼펜 한 자루 꺼내어 오늘 날짜를 또박또박 적습니다. 1936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천천히 이어온 여러 사람 발자국에 내 발자국 하나 보탭니다. 앞으로 서른 해나 쉰 해나 일흔 해쯤 지나면, 또 누군가 이 발자국을 바라보며 새삼스러운 책삶을 더듬을 수 있겠지요. 4346.2.8.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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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서 만나는 책

 


  헌책방에서는 새책과 헌책을 나란히 만납니다.


  반듯반듯 나왔으나 제대로 사랑받지 못한 채 오랜 나날 먼지만 먹으면서 한 쪽조차 펼쳐지지 못한 책이 ‘새책’으로서 헌책방에 들어오곤 합니다. 갓 나온 새책이 보도자료 쪽글이 꽂힌 채 헌책방으로 들어오기도 합니다. 신문사나 이런저런 기관에 들어갔다가, 기자나 이런저런 관계자가 쳐다보지 않은 채 고물상으로 내다 버려 헌책방으로 들어오는 새책입니다.


  누군가 즐겁게 사서 읽은 뒤 헌책방으로 곱게 들어오는 헌책이 있습니다. 누군가 새책으로 사서 읽었으나, 집에서 버거운 짐으로 여긴 나머지 재활용쓰레기 내다 버릴 때에 종이꾸러미로 내놓아 고물상을 거쳐 헌책방으로 힘겹게 들어오는 헌책이 있습니다.


  헌책방에 들어오는 새책과 헌책을 들여다보면, 이 책이 어떤 손길을 거치고 어떤 사랑을 받았는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헌책이든 새책이든 그저 책입니다. 헌책이든 새책이든 나무한테서 얻은 숨결로 빚은 책입니다. 오랜 나날 먼지를 많이 먹어 쉬 바스라지는 책이라 하더라도 나무 숨결이 있습니다. 갓 나와 반딱반딱거리더라도 나무 숨결이 감돕니다. 책을 손에 쥐어 글을 읽는다 할 적에는, 나무를 손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이야기를 읽는 셈이라고 느낍니다.


  책은 새책방에서도 사서 읽고, 헌책방에서도 사서 읽으며, 도서관에서도 빌려 읽습니다. 이웃이나 동무한테서 빌려 읽기도 하고, 이웃이나 동무가 선물해서 읽기도 합니다. 내가 장만한 내 책을 두 번 세 번 되읽기도 합니다. 내가 예전에 장만한 내 책을 열 해쯤 뒤나 스무 해쯤 뒤에 다시 읽기도 합니다.


  누구라도 읽을 수 있고, 언제라도 읽을 수 있기에, 책이로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새책을 읽는 사람이나 헌책을 읽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책입니다. ‘새 사람’을 만나거나 ‘헌 사람’을 만나는 사람은 없어요. 모두 사람입니다. 어린이를 마주하건 할머니를 마주하건, 나는 ‘사람’을 마주하면서 삶을 듣고 사랑을 느낍니다. 기나긴 나날을 묵어 빛이 바랜 책을 마주하건, 인쇄소에서 나온 지 며칠 안 된 책을 마주하건, 나는 ‘책’을 마주하면서 삶을 읽고 사랑을 깨닫습니다.


  스스로 좋아하고 싶은 삶을 생각해요. 스스로 사랑하고 싶은 이웃을 헤아려요. 스스로 누리고 싶은 꿈을 떠올려요. 스스로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살펴요. 책이 된 나무를 마음속으로 그려요. 책이 되어 내 앞으로 찾아온 나무를 가슴속으로 받아들여요. 새책방에서나 헌책방에서나 도서관에서나, 내 앞에 오래된 숲이 펼쳐졌구나 하고 느껴요. 4346.2.7.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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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알과 책

 


  읍내 저잣거리에 마실을 갈 적에 읍내 버스역에서 내리곤 합니다. 읍내 버스역에서 내리고 보면, 이웃마을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만납니다. 광주나 순천이나 서울로 시외버스를 타고 나가려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때때로 만납니다. 이분들, 곧 시골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맨몸으로 도시로 가는 일이 없습니다. 상자나 보따리나 꾸러미가 참 큽니다. 시골에서 살며 당신이 일군 먹을거리를 바리바리 싸서 버스 짐칸에 싣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아주 느릿느릿 걷는 할머니가 커다란 상자 셋을 버스 짐칸에 싣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아니, 이 할머니는 저 상자들을 어떻게 버스역까지 싣고 오셨담? 작은 수레에 상자를 싣고 시골 버스역 앞까지 날랐을 테고, 군내버스 일꾼이 버스에 실어 주었을 테며, 이곳 읍내 버스역에서도 시외버스 일꾼 손을 빌어 짐칸에 실으시겠지. 도시에서 버스를 내린 다음에는 또 여러 사람 손길을 빌어 택시 타는 데까지 가실 테고.


  시골에서 살아가고 보니, 시골 살다 도시로 나들이 가는 할머니들 마음을 알겠습니다. 그래서 나도 도시로 볼일 보러 갈 적에 커다란 가방에 이것저것 주섬주섬 짊어집니다. 유자도 짊어지고 석류도 짊어지지만, 요즈음은 감알을 짊어집니다. 도시사람은 능금이나 배나 복숭아나 딸기나 바나나는 사다 먹어도, 감알 사다 먹는 사람은 퍽 드문 듯해요. 봄이고 겨울이고 바나나는 끊이지 않고 먹어대는 도시사람이지만, 막상 가을과 겨울 지나 봄까지 감알 신나게 즐기는 도시사람은 얼마 없다고 느낍니다.


  시골 버스역 언저리에 웅크리고 앉아 감알 파는 할머니를 바라봅니다. 쉰 알 한 꾸러미를 장만합니다. 시외버스를 타고 순천으로 가서 기차로 갈아탄 다음 서울에서 내려, 다시 전철로 갈아타 인천으로 갑니다. 내 오랜 단골 헌책방에 닿습니다. 가방에서 감알 천천히 꺼냅니다. 먼길 달리느라 힘들었을 고흥 단감을 헌책방 일꾼이 책 손질을 하는 자리에 올려놓습니다. 감빛 참 이쁘고, 곁에 있는 책빛 또한 이쁩니다. 감내음이랑 책내음이 곱게 어우러집니다. 4346.1.28.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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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중’한 책

 


  사람들이 못 알아보니 ‘귀중한 책’이 된다고 느낍니다. 사람들이 알아볼 때에는 ‘읽는 책’이 될 테지요. 사람들이 못 알아보니 ‘읽는 책’이 얼마나 ‘귀중한 책’인가를 못 느끼는구나 싶습니다. 사람들이 알아볼 때에는 ‘읽는 책’이 더없이 ‘빛나는 책’인 줄 깨달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 먼 나라에서 찾는대서 ‘귀중한 책’이 되지 않습니다. 제대로 사랑받지 못한 탓에 ‘귀중한 책’이 되었달지라도 ‘읽는 책’으로 거듭나지 못하면 ‘빛나는 책’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하나하나 돌아보자면, 모든 책은 ‘읽는 책’이면서 ‘귀중한 책’이요 ‘빛나는 책’입니다. 읽을 때에 값진 보배가 샘물처럼 솟는 책이 되고, 읽으면서 빛이 나는 책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읽지 않으면 값진 보배가 못 되고, 읽지 못할 때에는 빛을 누리지 못합니다. 4346.1.16.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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