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이 하는 일

 


  여기 한 사람 있어, 삶을 하나 짓는다. 삶을 짓는 한 사람, 이녁 삶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글을 하나 일군다. 글을 둘 일구고, 글을 셋 일구더니, 어느새 글을 꾸러미로 모으고, 타래처럼 엮는다.


  삶을 짓는 동안 글을 함께 일군 이야기를 곁에서 물끄러미 지켜보던 다른 한 사람, 즐겁게 글선물 받는다. 바야흐로 책 하나 새롭게 묶는다.


  사랑을 받으며 태어난 책을 다른 한 사람 기쁘게 알아본다. 따순 마음으로 종이 한 장 넘기고 두 장을 넘기더니, 이내 책을 다 읽는다. 마음 가득 뿌듯하고 아름다운 이야기 넘실거린다. 홀로 간직하기에는 아쉽구나 여겨, 기쁘게 읽은 책을 헌책방에 내려놓고 또 다른 한 사람 이 책 살뜰히 보듬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이제, 헌책방 일꾼은 책 하나가 또 다른 한 사람한테 이어질 수 있게끔 정갈히 모신다. 나무를 잘라 책시렁을 짜고, 등불을 달아 가게를 밝히며, 걸레를 쥐어 책에 낀 먼저아 더께를 닦는다.


  한 해가 지나야 할까, 열 해가 지나야 할까. 하루면 될까, 이레쯤이면 되려나. 또 다른 책손은 언제쯤 헌책방 한 곳 알아채어 가붓가붓 나긋나긋 발걸음으로 책마실 누리려나. 책 하나는 언제쯤 또 다른 한 사람 가슴속으로 포근히 안길 수 있을까.


  삶이 흐르고 책이 흐른다. 사람이 살고 책방이 산다. 이야기가 오가고 사랑이 오간다. 4346.3.21.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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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골

 


  새책방이나 도서관에는 ‘책골’이 생기지 않습니다. 새책방이나 도서관에서 책골을 만들 까닭이 없겠지요. 책꽂이에 꽂을 책이 넘치는 바람에 바닥에 책탑을 쌓는 헌책방에는 으레 책골이 생깁니다. 새책방에서는 책꽂이가 넘치면 반품을 해서 책꽂이를 비웁니다. 도서관에서는 책꽂이가 다 차면 대출실적 적은 책부터 폐기 도장 찍어 버리며 책꽂이를 홀가분하게 합니다. 헌책방에서는 이 책도 저 책도 섣불리 버리거나 치우거나 반품하지 못합니다. 어느 책이건 언젠가 아름다운 책손 하나 찾아와서 아름다운 손길로 거두어 가리라 여겨, 고이 건사합니다.


  책 하나 고이 건사하는 손길이 책탑을 쌓고, 책탑과 책탑은 서로 어깨를 기대어 책골이 생깁니다. 책골은 반듯하기도 하지만 기우뚱하기도 합니다. 어느 책손은 책골이 무너지지 않게끔 다독여 줍니다. 어느 책손은 책골이 무너지거나 말거나 엉덩이로 툭 치든 가방으로 퍽 치든 합니다.


  책골 사이로 책이 보입니다. 책탑이 가린 뒤쪽 책들이 책골 사이로 고개를 내밉니다. 이 책골이 사라지도록 누군가 책꾸러미 잔뜩 사들일까요. 이 책골이 낮아지도록 누군가 책보따리 잔뜩 장만할까요.


  다 다른 책들이 다 다른 모양새로 꽂혀 다 다른 책손을 기다립니다. 4346.3.10.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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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다른 책이 다 다른 헌책방에

 


  다 다른 책이 다 다른 헌책방 책시렁에 꽂힙니다. 새책방이나 도서관이라고 해서 늘 다 같은 책을 꽂지는 않지만, 새책방 책시렁이나 도서관 책시렁은 한국 어디를 가나 엇비슷합니다. 십진분류법에 따라 책을 갖추고, 비매품은 거의 꽂지 않을 뿐더러, 널리 알려지지 못하는 작은 책은 안 꽂기 마련입니다.


  헌책방 책시렁에는 ‘예전 교과서’가 더러 꽂히기도 합니다. 헌책방 책시렁에는 ‘예전 맞춤법’으로 된 책이 곧잘 꽂힙니다. 헌책방 책시렁에는 ‘세로쓰기’ 책이라든지, 한자 가득한 예전 책이 으레 꽂힙니다.


  도서관 가운데 어린이책 도서관이 아니고서야 어린이책을 꽂는 일이 드뭅니다. 새책방에서도 이제는 만화책 제법 갖춘다 하지만, 아직 온갖 만화책 골고루 갖추는 일이 드뭅니다. 헌책방을 찾아가 보면, 어린이책도 만화책도 알뜰살뜰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즐겁게 읽던 책이 헌책방으로 들어옵니다. 저마다 아름답게 읽던 책이 헌책방으로 찾아옵니다.


  한 사람 손을 거친 책이 헌책방 책시렁에 놓입니다. 두 사람 손을 거쳐 쉰 해를 살거나 백 해를 살아가는 책 하나 헌책방 책시렁에 눕습니다.


  서울에 있는 헌책방과 부산에 있는 헌책방은 책 갖춤새가 다릅니다. 서울사람과 부산사람이 다르거든요. 순천에 있는 헌책방과 춘천에 있는 헌책방은 책 매무새가 다릅니다. 순천사람과 춘천사람 책사랑이 똑같지 않거든요.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책을 읽은 발자국을 헌책방 책시렁에서 읽습니다.


  알록달록 아기자기 앙증맞은 책이 헌책방 책시렁을 빛냅니다. 너는 너대로 고운 책이야. 자네는 자네대로 예쁜 책이지. 서로 어깨동무합니다. 함께 등을 기댑니다. 헌책방 헌책은 책손 한 사람 기다리며 조용히 숨을 고릅니다. 4346.3.3.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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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3-03-03 13:13   좋아요 0 | URL
ㅎㅎ 서울 헌책방,부산 보수동 헌책방 거리 다 다녀왔네요.순천의 형설 서점도 다녀온 기억이 납니다^^
말씀하신대로 서울과 지방 헌책방의 책들이 다소 다른데 서울에는 많이 없어진 60~70년대 책들이 지방 헌책방에선 많이 본 기억이 나네요.
 

헌책방 돌보던 일꾼

 


  몸이 여려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지 못하지만, 몸이 받치는 대로 틈틈이 헌책방 한켠에 앉거나 서거나 기대어 책지기 노릇을 나누어 받던 분이 있습니다. 지난 2012년 여름에 여린 몸을 흙에 내려놓고 다른 누리로 가셨습니다. 처음 헌책방 사진을 찍던 때에는 사진에 안 찍히기를 바라셨지만, 우리 집 큰아이가 태어난 뒤로는 ‘큰아이와 어울리는 모습’이 내 사진에 곧잘 담겼습니다. 흙으로 돌아간 지 일곱 달이 지났고, 곧 한 해가 됩니다. 필름으로 찍은 사진과 디지털로 찍은 사진을 샅샅이 훑으니, 예전에 찍기만 하고 찾아 놓지 않은 여러 모습이 드러납니다. 책방에 즐겁게 깃들어 즐겁게 손길을 놀릴 적에는 즐겁게 웃고 일하며 쉴 수 있겠지요. 즐겁게 웃고 일하며 쉬는 사람 곁에서 책을 살피고 아이들과 책방마실을 하기에, 나도 즐겁게 웃고 생각하는 사진 하나 얻을 수 있었구나 싶습니다. 고운 마음은 한결같이 고이 이어지고, 어여쁜 넋은 오래도록 어여삐 이어갈 테지요. 4346.2.19.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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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02-19 08:23   좋아요 0 | URL
이렇게 사진에서 생전의 모습을 다시 만나면 각별하시겠어요.
저기, 박정희 할머님의 모습도 보이는 것 같네요.

숲노래 2013-02-19 09:17   좋아요 0 | URL
올여름에 추모자리 마련한다 해서 어제 눈이 빠지도록 열 몇 해치 사진 훑으며 이래저래 찾았어요 @.@ 박정희 할머님이 저희 식구를 두 번 그림으로 그리셨어요. 이때만 해도 걸어서 돌아다니실 수 있었지만, 요즈음은 집안에만 계실 뿐, 바깥마실은 조금도 못 하셔요.

카스피 2013-02-20 21:10   좋아요 0 | URL
인천의 아벨서점 같네요.저도 아벨서점 안가보진가 벌써 몇년은 되는것 같네요ㅡ.ㅡ

숲노래 2013-02-22 05:02   좋아요 0 | URL
느긋하게 마실해 보셔요
 

 

 

책방을 밝히는 책

 


  책시렁을 환하게 밝히는 책이 하나 있습니다. 책시렁에 수십 권이나 수백 권에 이르는 책이 꽂히는데, 여기에 어느 책 하나 살포시 깃들며 다른 책들 모두 환하게 밝히는 남다른 책 하나 있습니다.


  마을을 환하게 밝히는 책방이 하나 있습니다. 수백 수천 군데 가게가 줄줄이 늘어선 마을인데, 여기에 어느 책방 하나 조용히 깃들며 다른 가게를 모두 눈부시게 밝히는 남다른 책방 하나 있습니다.


  도서관이 마을에 수십 군데 있지 않아도 됩니다. 책방이 마을에 열 몇 군데씩 있지 않아도 됩니다. 책방거리나 책방골목이 없어도 됩니다. 꼭 한 군데 조그마한 책방이 있어도 넉넉하고, 꼭 한 군데 조그마한 책방에 책 하나 있어도 즐겁습니다.

 

  내 보금자리에 책이 십만 권이나 백만 권 있을 때에 뿌듯하지 않습니다. 내 보금자리에는 책이 한 권조차 없어도 됩니다. 내 보금자리에 책 하나 있기를 바란다면, 나와 살붙이 눈길을 틔우고 마음을 열도록 북돋우는 아름다운 이야기 깃든 책 하나이면 넉넉합니다. 수십 수백 권에 이르는 책이 삶을 빛내지 않아요. 스스로 사랑을 길어올리는 손길로 살그마니 집어들어 기쁘게 웃음짓도록 돕는 책 하나라면 즐겁습니다.


  햇살 한 조각이 따스합니다. 바람 한 닢이 시원합니다. 물 한 모금이 상큼합니다. 꽃 한 송이가 어여쁩니다. 말 한 마디가 반갑습니다. 돈 한 푼이 고맙습니다. 노래 한 가락이 신납니다. 춤 한 사위가 멋집니다. 이야기 한 꾸러미가 소담스럽습니다. 그리고, 책 한 권이 해맑습니다. 4346.2.1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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