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도 미술관도 도서관도

 


  유럽 어느 나라에 있다는 널따란 박물관은 몇 날 며칠 들여 돌아보아도 다 돌아보지 못할 만큼 볼거리 많다고 한다. 이 박물관 찾아가서 이 박물관에 깃든 유물을 후다닥 훑는다 하면, 박물관마실 자알자알 했다 할 만할까. 어느 미술관에 깃든 그림은 몇 날 아닌 몇 달 동안 들여다보아도 다 볼 수 없도록 많으리라. 이 미술관에 깃든 그림을 자가용 싱싱 몰아서 휘리릭 훑고 지나가면 그림마실 잘잘잘 했다 할 만할까. 도서관에 책이 100만 권이 있다 하든 10만 권이나 1만 권 있다 하든, 이 책들 꽂힌 책시렁 휘 둘러보면 도서관마실 실컷 했다 할 만할까.


  자가용을 타고 지나가면 박물관에도 미술관에도 도서관에도 스며들지 못한다. 자가용을 몰고 제주섬 한 바퀴 돈다 한들, 또 자가용을 몰아 서쪽 바닷가와 남쪽 바닷가와 동쪽 바닷가를 한 바퀴 돈다 한들, ‘돌았다’라든지 ‘보았다’라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르나, 어디를 어떻게 돌았다 할 만하고 어디에서 무엇을 보았다 할 만할까. 어딘가를 마실한다고 할 적에는 자가용도 자전거도 아닌 두 다리로 땅을 밟았다는 뜻이다. 두 다리로 땅을 밟으며, 오래도록 풀밭에 앉거나 드러누워 하늘바라기를 했다는 뜻이다. 어디에서 무엇을 보았다 할 때에는 하루 이틀 한 달 한 해 찬찬히 지켜보며 봄 여름 가을 겨울 물씬 느꼈다는 뜻이다.


  책을 한 차례 주욱 첫 줄부터 끝 줄까지 살폈기에 책읽기 마쳤다 할 만한가. 책읽기란 글자읽기인가 속살읽기인가 줄거리읽기인가 알맹이읽기인가. 아니면, 책 하나 빚은 사람들 삶과 넋과 꿈과 사랑과 믿음과 마음을 읽을 때에 책읽기라 할 만한가. 헌책방거리나 헌책방골목 죽 한 번 돌아봤기에 헌책방 구경 잘 한 셈일까. 헌책방 한두 곳에서 책 한두 권 장만해 보았기에 헌책방 맛과 멋과 내음과 무늬 흐뭇하게 받아먹었다 할 만한가.


  밥은 한 끼니만 먹으면 그만이지 않아. 날마다 꾸준하게 먹어야 밥이다. 숨은 한 번만 들이켜면 되지 않지. 숨은 날마다, 아니 때마다 들이쉬고 내쉬고 잇달아 해야 비로소 숨이다. 물은 한 모금만 마시면 끝이지 않다고. 내 몸을 살피며 알맞게 틈틈이 마실 때에 참말 물이다.


  책이란 무엇인가. 책 한 권이란 무엇인가. 책읽기란 무엇인가. 책을 갖춘 책방이란 무엇인가. 책방마실은 어떻게 해야 책방마실인가. 책읽기는 어떻게 할 때에 책읽기인가. 삶과 사랑과 사람은 서로 어떻게 맺고 이으며 어깨동무하는가. 4346.4.23.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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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이름쪽 선물

 


  헌책방을 다니면서 이름쪽을 그러모은다. 헌책방 이름쪽을 서른 장이나 쉰 장쯤 얻는다. 사진가방에 헌책방 이름쪽을 뭉텅이로 챙겨 들고 다니면서, 바깥에서 만나는 사람들한테 전국 곳곳 헌책방 이름쪽을 하나둘 꾸려서 선물로 내민다. 언제쯤 그분이 그 둘레로 마실을 갈는지 모르지만, 책을 좋아하는 분이라 하면 헌책방 이름쪽 하나 고이 모시며 나들이 즐길 수 있겠지. 어느 곳 어느 동네 어디쯤 헌책방 있다고 백 차례 천 차례 말한들, 사람들은 제대로 떠올리지 못한다. 헌책방 이름쪽 하나 건네면 된다. 전화번호와 주소 나오니, 가다가 헷갈리면 전화해서 여쭈면 되고, 헌책방 이름쪽 들여다보면서 헌책방 있는 동네로 나들이를 갈 때면 ‘그래 거기 한번 가 보자.’ 하고 생각할 수 있으리라. 4346.4.22.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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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한 그릇 되는 삶책

 


  밥 한 그릇이란 무엇일까요. 몸을 살찌우는 숨결이겠지요. 책 한 권이란 무엇인가요. 마음을 살찌우는 숨결이겠지요. 몸을 살찌우는 숨결이 밥이라 한다면, 아무 밥이나 먹으며 내 숨결 되도록 하지 않겠지요. 마음을 살찌우는 숨결이 책이라 한다면, 아무 책이나 읽으며 내 숨결 되도록 하지 않겠지요.


  가장 맛난 밥을 차려 가장 즐거운 눈빛으로 가장 기쁘게 먹습니다. 따사로운 손길로 풀포기를 뜯습니다. 정갈한 손길로 밥을 끓입니다. 보드라운 손길로 수저를 놓습니다. 싱그러운 손길로 아이들 머리카락 쓸어넘깁니다.


  가장 아름다운 책을 장만해서 가장 해맑은 눈망울로 가장 신나게 읽습니다. 밝은 눈빛으로 글을 씁니다. 맑은 눈망울로 책을 엮습니다. 환한 눈썰미로 책을 다룹니다. 반가운 눈짓으로 책을 장만합니다.


  삶이 흐르고 책이 흐릅니다. 사랑이 흐르며 이야기가 흐릅니다. 밥이 되도록 숨결 고이 돌보고, 책이 되도록 넋 곱다시 보살핍니다. 4346.4.17.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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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04-17 07:42   좋아요 0 | URL
'곱다시'라는 말, 눈에 담아갑니다. 이렇게 가끔 함께살기님 글에서 마음에 드는 말, 제가 업어간답니다 ^^

숲노래 2013-04-17 08:06   좋아요 0 | URL
저도 어느 시골에서 얻은 말이에요.
서로서로 예쁜 말 널리 나누면서
살아가는 좋은 이야기빛이리라 느껴요.
 

책꽂이 깊이

 


  책꽂이는 깊다. 책을 꽂으니, 책꽂이는 깊다. 책꽂이는 깊다. 책 하나마다 사람들 오랜 삶과 꿈과 사랑이 깃들기에, 책꽂이는 깊다. 책꽂이는 깊다. 손을 뻗어 책 하나 쥐면, 책마다 내 눈길 틔우고 내 마음 열어젖히는 이야기 쏟아지니, 참말 책꽂이는 깊다.


  책방에 서면, 맨 먼저 책방 일꾼한테 꾸벅 고개를 숙인다. 책방에 서면, 다음으로 책꽂이 앞에서 꾸벅 고개를 숙인다. 책방에 서면, 책꽂이마다 가득한 책을 손으로 쥐면서 꾸벅 고개를 숙인다.


  고개를 숙이며 비로소 헌책방 나들이를 한다. 골마루와 책방이 좁아서 고개를 숙이지는 않는다. 고개를 숙이며 비로소 헌책방 책꽂이를 만진다. 밑바닥부터 천장까지 책이 빼곡할 뿐 아니라 책탑 잔뜩 쌓였기에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고개를 숙이며 비로소 책을 읽는다.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책을 읽자면 외려 목아지 아프고 책 든 손 저리기 때문이 아니다.


  고개를 숙이니 헌책방이 보이고, 고개를 숙이니 책꽂이가 환하게 보이며, 고개를 숙이니 책마다 서린 아름다운 사랑이 해맑게 보인다. 4346.4.1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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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씨

 


  백만 송이 장미나 튤립이 한꺼번에 피어난다는 꽃잔치가 있다. 어떤 마음으로 이런 꽃잔치 꾀했는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꽃만 끝없이 심어 피어나게 하는 모습은 살짝 섬찟하다. 꽃송이 자라는 흙땅에는 틀림없이 다른 풀씨 날아와 앉을 텐데, 다른 풀꽃은 현호색이 되건 은방울꽃이 되건 둥글레꽃이 되건 꽃잔디가 되건 유채꽃이 되건 모조리 뽑힐 테니까.


  가을날 시골 들판 바라보면 노랗게 빛나는 나락이 물결친다. 참 예쁜 빛이로구나 싶으면서, 노란 물결 나락만 가득한 모습이 얼마나 싱그러울까 하고 곰곰이 헤아려 본다. 나락을 뺀 다른 곡식이나 풀포기는 논에 깃들지 못하게 하니까.


  봄날 봄논 바라본다. 수많은 풀포기 자라면서 온갖 풀꽃이 피어난다. 냉이도 나고 씀바귀도 나며 질경이도 난다. 별꽃이나 봄까지꽃이나 코딱지나물꽃도 나란히 피고, 유채꽃이랑 갓꽃도 피며, 자운영꽃에다가 꽃마리나 꽃다지도 얼크러진다. 민들레도 피고 갈퀴나물도 꽃을 피운다. 그렇지만 이들 들꽃은 모조리 갈아엎여야 한다. 오직 하나 나락만 모판으로 키워서 척척 꽂아야 한단다.


  감자밭에 콩이 함께 자라도 된다. 고추밭에 옥수수 나란히 자라도 된다. 무밭에 배추 같이 자라도 되고, 쑥이랑 할미꽃 어울려 자라도 된다. 모두 사랑스러운 씨앗이요 풀이며 꽃이다. 저마다 아름다운 씨앗이고 풀포기이자 꽃송이라고 느낀다.


  백만 권이 팔리는 책 있고, 십만 권이 팔리는 책 있다. 만 권이나 천 권 팔리는 책이 있고, 때로는 처음부터 백 권이나 쉰 권만 찍는 책이 있다. 백만 권 팔리는 책이 더 아름답거나, 딱 쉰 권 찍는 책이 덜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십만 권 팔리기에 흔한 책이 될 수 없고, 백 권 찍은 책이라 훌륭한 책이 될 수 없다. 다만, 가슴속으로 깊이 이야기밭 일구는 씨앗이 되는 책이라면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훌륭하고, 살가우며, 멋스러우리라 느낀다.


  꼭 한 사람 알아보더라도 좋다. 책 하나 알아보는 사람 손길은 이녁 마음밭에 생각씨앗 하나 심는 몸짓 되고, 이 몸짓은 자라고 자라서 차츰차츰 고운 사랑 널리 나누는 웃음꽃 되리라 본다. 책씨를 심는 책지기일 테지. 책씨를 뿌리는 책지기라 할 테지. 책방 일꾼도 책지기요, 책손도 책지기이다. 저마다 다 다른 빛깔로 책지기 되어 책씨를 심는다. 책씨는 한 톨 흙에 깃들 수 있고, 백 톨이나 천 톨이나 만 톨쯤 흙에 깃들 수 있다. 나는 책꽃 하나 만나 책씨 하나 심는 책지기로서 오늘 하루를 누린다. 4346.4.10.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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