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빛과 눈길

 


  해가 뉘엿뉘엿 기우는 저녁. 헌책방 책시렁으로 저녁햇살 살며시 스민다. 겨울 지나 봄이 되면서 해는 차츰 길어지고, 길어진 만큼 헌책방으로 들어오는 빛살은 한결 따사롭고 포근하다. 헌책 하나 만지는 헌책방 일꾼 손길에도 따사로움과 포근함이 스미고, 이 헌책 하나 헤아리며 고르는 책손 손길에도 따사로움과 포근함이 옮는다.


  따스한 빛은 따스한 이야기 되어 따스한 책에 담긴다. 포근한 볕은 포근한 이야기 되어 포근한 책에서 자란다. 고운 눈길을 사랑하고 싶어 책을 읽는다. 밝은 마음길을 살찌우고 싶어 글을 읽는다. 밭자락 한켠 삽으로 파서 구덩이 마련한 다음, 어린나무 한 그루 심는다. 밭자락마다 손가락으로 구멍을 쏙 내고는 씨앗 두 톨씩 심는다. 어린나무는 씩씩하게 자라고, 작은 씨앗은 튼튼하게 큰다. 사람들 마음밭에서도 즐겁고 신나는 이야기씨앗 무럭무럭 자라리라.


  이윽고 해는 지고 헌책방 등불 밝다. 하루일 마친 사람들 집으로 돌아가다가 헌책방에 슬쩍 들러 책 한 권 넘긴다. 가방에 넣거나 손에 쥐면서, 아직 읽지 못한 따끈따끈한 새 이야기 속으로 헤아리면서 기쁘게 웃는다.

  책 백 권을 읽어도 좋으리. 책 한 권을 읽어도 좋으리. 천 쪽짜리 책 한 권 백 날에 걸쳐 읽어도 좋으리. 백 쪽짜리 책 한 권 이레에 걸쳐 읽어도 좋으리. 하루에 한 줄씩 읽어도 좋고, 이틀에 한 쪽씩 읽어도 좋으리.


  생각을 슬기롭게 밝히는 책 하나가 된다. 마음을 넉넉하게 돌보는 책 하나가 된다. 해를 바라보면서 햇살과 같은 눈빛이 된다. 나무를 마주하면서 나무와 같은 눈결이 된다. 책을 마주하면서 책과 같은 눈망울이 된다. 4346.3.23.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문방구가 된 헌책방

 


  헌책방이 크게 줄었다. 초·중·고등학교 언저리에 한둘 쯤 으레 있던 헌책방은 거의 사라졌다. 이제 대학교 둘레에조차 헌책방 한 군데 서지 못한다. 아니, 대학교 둘레에서는 새책방마저 자취를 감춘다. 새봄 맞이해 새내기 대학생들 대학교 옆 술집에서 머리가 핑핑 돌게끔 술을 마시기는 하되, 또 대학교 2·3학년 선배들 후배들한테 술을 사 주거나 차 한 잔 사 주는 일이 있기는 하되, 새내기 대학생 스스로 책방마실 즐기면서 책을 장만하여 읽는다든지, 선배 대학생 스스로 책방나들이 누리면서 후배들한테 선물할 책을 고르며 읽는다든지, 하는 모습은 어느새 머나먼 옛날 옛적 일처럼 되고 만다.


  전라북도 남원시 용성초등학교 옆에는 ‘지난날 초등학교 옆 헌책방’이 옛 간판 그대로 건 채 문을 연다. 그러나, 간판만 헌책방일 뿐, 문방구나 구멍가게 구실만 한다. 이곳으로 찾아오는 아이들은 게임기를 만지거나 뽑기를 하거나 군것질을 하거나 준비물을 사거나 할 뿐, 한쪽에 조그맣게 웅크린 책을 살피거나 뒤적이거나 넘기지 않는다.


  책은 사람 손을 타면 먼지가 앉지 않는다. 책은 사람 손길 받으면 빛이 바래지 않는다. 책은 사람 손가락이 살살 건드리는 따사로운 기운을 좋아한다.


  너무 마땅한 노릇인데,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으니 책방이 문을 닫는다. 더없이 마땅한 일인데, 사람들이 삶 밝히는 책 골고루 읽지 않으니 작은 출판사가 문을 닫는다. 참 마땅한 셈이겠지만, 사람들이 사랑을 꽃피우는 삶을 일구려는 한길에서 책을 길동무 삼지 못하기에, 착한 삶 아끼는 글꾼들 살림살이 힘겹다.


  그저, 읽으면 된다. 그저, 즐기면 된다. 그저, 사랑하면 된다. 더 많이 읽어야 하지 않다. 첫 줄부터 끝 줄까지 샅샅이 훑어야 하지 않다. 마음을 살찌우는 책이라고 느끼면 된다. 사랑을 북돋우는 책을 깨달으면 된다. 읽은 만큼 삶을 보듬고, 읽으면서 살림을 꾸리면 된다. 꼭 이 책을 읽어야 하지 않고, 반드시 저 책을 장만해야 하지 않다. 마음을 살찌우는 책을 헤아리면서 날마다 조금씩 삶을 살찌우면 된다. 그러면 내 곁 여러 사람들은 ‘마음 살찌우는 책 읽어 마음 자라는 내 모습’ 바라보면서 ‘책 하나로 저렇게 아름다운 삶으로 거듭나는구나’ 하고 느끼면서, 책밭 일구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따사롭게 피어나는 삶꽃이 사랑꽃 되고, 글꽃으로 이어지면서 책꽃으로 영근다. 4346.3.2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카스피 2013-03-22 22:36   좋아요 0 | URL
남원에도 자주 간적이 있는데 그때는 헌책방을 못봤던것 같아요^^;;;

숲노래 2013-03-23 08:12   좋아요 0 | URL
헌책방을 자주 가는 분들도,
못 알아채고 말아
지나치는 데가 꽤 있지요
 

헌책방이 하는 일

 


  여기 한 사람 있어, 삶을 하나 짓는다. 삶을 짓는 한 사람, 이녁 삶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글을 하나 일군다. 글을 둘 일구고, 글을 셋 일구더니, 어느새 글을 꾸러미로 모으고, 타래처럼 엮는다.


  삶을 짓는 동안 글을 함께 일군 이야기를 곁에서 물끄러미 지켜보던 다른 한 사람, 즐겁게 글선물 받는다. 바야흐로 책 하나 새롭게 묶는다.


  사랑을 받으며 태어난 책을 다른 한 사람 기쁘게 알아본다. 따순 마음으로 종이 한 장 넘기고 두 장을 넘기더니, 이내 책을 다 읽는다. 마음 가득 뿌듯하고 아름다운 이야기 넘실거린다. 홀로 간직하기에는 아쉽구나 여겨, 기쁘게 읽은 책을 헌책방에 내려놓고 또 다른 한 사람 이 책 살뜰히 보듬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이제, 헌책방 일꾼은 책 하나가 또 다른 한 사람한테 이어질 수 있게끔 정갈히 모신다. 나무를 잘라 책시렁을 짜고, 등불을 달아 가게를 밝히며, 걸레를 쥐어 책에 낀 먼저아 더께를 닦는다.


  한 해가 지나야 할까, 열 해가 지나야 할까. 하루면 될까, 이레쯤이면 되려나. 또 다른 책손은 언제쯤 헌책방 한 곳 알아채어 가붓가붓 나긋나긋 발걸음으로 책마실 누리려나. 책 하나는 언제쯤 또 다른 한 사람 가슴속으로 포근히 안길 수 있을까.


  삶이 흐르고 책이 흐른다. 사람이 살고 책방이 산다. 이야기가 오가고 사랑이 오간다. 4346.3.21.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책골

 


  새책방이나 도서관에는 ‘책골’이 생기지 않습니다. 새책방이나 도서관에서 책골을 만들 까닭이 없겠지요. 책꽂이에 꽂을 책이 넘치는 바람에 바닥에 책탑을 쌓는 헌책방에는 으레 책골이 생깁니다. 새책방에서는 책꽂이가 넘치면 반품을 해서 책꽂이를 비웁니다. 도서관에서는 책꽂이가 다 차면 대출실적 적은 책부터 폐기 도장 찍어 버리며 책꽂이를 홀가분하게 합니다. 헌책방에서는 이 책도 저 책도 섣불리 버리거나 치우거나 반품하지 못합니다. 어느 책이건 언젠가 아름다운 책손 하나 찾아와서 아름다운 손길로 거두어 가리라 여겨, 고이 건사합니다.


  책 하나 고이 건사하는 손길이 책탑을 쌓고, 책탑과 책탑은 서로 어깨를 기대어 책골이 생깁니다. 책골은 반듯하기도 하지만 기우뚱하기도 합니다. 어느 책손은 책골이 무너지지 않게끔 다독여 줍니다. 어느 책손은 책골이 무너지거나 말거나 엉덩이로 툭 치든 가방으로 퍽 치든 합니다.


  책골 사이로 책이 보입니다. 책탑이 가린 뒤쪽 책들이 책골 사이로 고개를 내밉니다. 이 책골이 사라지도록 누군가 책꾸러미 잔뜩 사들일까요. 이 책골이 낮아지도록 누군가 책보따리 잔뜩 장만할까요.


  다 다른 책들이 다 다른 모양새로 꽂혀 다 다른 책손을 기다립니다. 4346.3.10.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다 다른 책이 다 다른 헌책방에

 


  다 다른 책이 다 다른 헌책방 책시렁에 꽂힙니다. 새책방이나 도서관이라고 해서 늘 다 같은 책을 꽂지는 않지만, 새책방 책시렁이나 도서관 책시렁은 한국 어디를 가나 엇비슷합니다. 십진분류법에 따라 책을 갖추고, 비매품은 거의 꽂지 않을 뿐더러, 널리 알려지지 못하는 작은 책은 안 꽂기 마련입니다.


  헌책방 책시렁에는 ‘예전 교과서’가 더러 꽂히기도 합니다. 헌책방 책시렁에는 ‘예전 맞춤법’으로 된 책이 곧잘 꽂힙니다. 헌책방 책시렁에는 ‘세로쓰기’ 책이라든지, 한자 가득한 예전 책이 으레 꽂힙니다.


  도서관 가운데 어린이책 도서관이 아니고서야 어린이책을 꽂는 일이 드뭅니다. 새책방에서도 이제는 만화책 제법 갖춘다 하지만, 아직 온갖 만화책 골고루 갖추는 일이 드뭅니다. 헌책방을 찾아가 보면, 어린이책도 만화책도 알뜰살뜰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즐겁게 읽던 책이 헌책방으로 들어옵니다. 저마다 아름답게 읽던 책이 헌책방으로 찾아옵니다.


  한 사람 손을 거친 책이 헌책방 책시렁에 놓입니다. 두 사람 손을 거쳐 쉰 해를 살거나 백 해를 살아가는 책 하나 헌책방 책시렁에 눕습니다.


  서울에 있는 헌책방과 부산에 있는 헌책방은 책 갖춤새가 다릅니다. 서울사람과 부산사람이 다르거든요. 순천에 있는 헌책방과 춘천에 있는 헌책방은 책 매무새가 다릅니다. 순천사람과 춘천사람 책사랑이 똑같지 않거든요.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책을 읽은 발자국을 헌책방 책시렁에서 읽습니다.


  알록달록 아기자기 앙증맞은 책이 헌책방 책시렁을 빛냅니다. 너는 너대로 고운 책이야. 자네는 자네대로 예쁜 책이지. 서로 어깨동무합니다. 함께 등을 기댑니다. 헌책방 헌책은 책손 한 사람 기다리며 조용히 숨을 고릅니다. 4346.3.3.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카스피 2013-03-03 13:13   좋아요 0 | URL
ㅎㅎ 서울 헌책방,부산 보수동 헌책방 거리 다 다녀왔네요.순천의 형설 서점도 다녀온 기억이 납니다^^
말씀하신대로 서울과 지방 헌책방의 책들이 다소 다른데 서울에는 많이 없어진 60~70년대 책들이 지방 헌책방에선 많이 본 기억이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