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한 그릇 되는 삶책

 


  밥 한 그릇이란 무엇일까요. 몸을 살찌우는 숨결이겠지요. 책 한 권이란 무엇인가요. 마음을 살찌우는 숨결이겠지요. 몸을 살찌우는 숨결이 밥이라 한다면, 아무 밥이나 먹으며 내 숨결 되도록 하지 않겠지요. 마음을 살찌우는 숨결이 책이라 한다면, 아무 책이나 읽으며 내 숨결 되도록 하지 않겠지요.


  가장 맛난 밥을 차려 가장 즐거운 눈빛으로 가장 기쁘게 먹습니다. 따사로운 손길로 풀포기를 뜯습니다. 정갈한 손길로 밥을 끓입니다. 보드라운 손길로 수저를 놓습니다. 싱그러운 손길로 아이들 머리카락 쓸어넘깁니다.


  가장 아름다운 책을 장만해서 가장 해맑은 눈망울로 가장 신나게 읽습니다. 밝은 눈빛으로 글을 씁니다. 맑은 눈망울로 책을 엮습니다. 환한 눈썰미로 책을 다룹니다. 반가운 눈짓으로 책을 장만합니다.


  삶이 흐르고 책이 흐릅니다. 사랑이 흐르며 이야기가 흐릅니다. 밥이 되도록 숨결 고이 돌보고, 책이 되도록 넋 곱다시 보살핍니다. 4346.4.17.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hnine 2013-04-17 07:42   좋아요 0 | URL
'곱다시'라는 말, 눈에 담아갑니다. 이렇게 가끔 함께살기님 글에서 마음에 드는 말, 제가 업어간답니다 ^^

숲노래 2013-04-17 08:06   좋아요 0 | URL
저도 어느 시골에서 얻은 말이에요.
서로서로 예쁜 말 널리 나누면서
살아가는 좋은 이야기빛이리라 느껴요.
 

책꽂이 깊이

 


  책꽂이는 깊다. 책을 꽂으니, 책꽂이는 깊다. 책꽂이는 깊다. 책 하나마다 사람들 오랜 삶과 꿈과 사랑이 깃들기에, 책꽂이는 깊다. 책꽂이는 깊다. 손을 뻗어 책 하나 쥐면, 책마다 내 눈길 틔우고 내 마음 열어젖히는 이야기 쏟아지니, 참말 책꽂이는 깊다.


  책방에 서면, 맨 먼저 책방 일꾼한테 꾸벅 고개를 숙인다. 책방에 서면, 다음으로 책꽂이 앞에서 꾸벅 고개를 숙인다. 책방에 서면, 책꽂이마다 가득한 책을 손으로 쥐면서 꾸벅 고개를 숙인다.


  고개를 숙이며 비로소 헌책방 나들이를 한다. 골마루와 책방이 좁아서 고개를 숙이지는 않는다. 고개를 숙이며 비로소 헌책방 책꽂이를 만진다. 밑바닥부터 천장까지 책이 빼곡할 뿐 아니라 책탑 잔뜩 쌓였기에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고개를 숙이며 비로소 책을 읽는다.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책을 읽자면 외려 목아지 아프고 책 든 손 저리기 때문이 아니다.


  고개를 숙이니 헌책방이 보이고, 고개를 숙이니 책꽂이가 환하게 보이며, 고개를 숙이니 책마다 서린 아름다운 사랑이 해맑게 보인다. 4346.4.1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책씨

 


  백만 송이 장미나 튤립이 한꺼번에 피어난다는 꽃잔치가 있다. 어떤 마음으로 이런 꽃잔치 꾀했는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꽃만 끝없이 심어 피어나게 하는 모습은 살짝 섬찟하다. 꽃송이 자라는 흙땅에는 틀림없이 다른 풀씨 날아와 앉을 텐데, 다른 풀꽃은 현호색이 되건 은방울꽃이 되건 둥글레꽃이 되건 꽃잔디가 되건 유채꽃이 되건 모조리 뽑힐 테니까.


  가을날 시골 들판 바라보면 노랗게 빛나는 나락이 물결친다. 참 예쁜 빛이로구나 싶으면서, 노란 물결 나락만 가득한 모습이 얼마나 싱그러울까 하고 곰곰이 헤아려 본다. 나락을 뺀 다른 곡식이나 풀포기는 논에 깃들지 못하게 하니까.


  봄날 봄논 바라본다. 수많은 풀포기 자라면서 온갖 풀꽃이 피어난다. 냉이도 나고 씀바귀도 나며 질경이도 난다. 별꽃이나 봄까지꽃이나 코딱지나물꽃도 나란히 피고, 유채꽃이랑 갓꽃도 피며, 자운영꽃에다가 꽃마리나 꽃다지도 얼크러진다. 민들레도 피고 갈퀴나물도 꽃을 피운다. 그렇지만 이들 들꽃은 모조리 갈아엎여야 한다. 오직 하나 나락만 모판으로 키워서 척척 꽂아야 한단다.


  감자밭에 콩이 함께 자라도 된다. 고추밭에 옥수수 나란히 자라도 된다. 무밭에 배추 같이 자라도 되고, 쑥이랑 할미꽃 어울려 자라도 된다. 모두 사랑스러운 씨앗이요 풀이며 꽃이다. 저마다 아름다운 씨앗이고 풀포기이자 꽃송이라고 느낀다.


  백만 권이 팔리는 책 있고, 십만 권이 팔리는 책 있다. 만 권이나 천 권 팔리는 책이 있고, 때로는 처음부터 백 권이나 쉰 권만 찍는 책이 있다. 백만 권 팔리는 책이 더 아름답거나, 딱 쉰 권 찍는 책이 덜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십만 권 팔리기에 흔한 책이 될 수 없고, 백 권 찍은 책이라 훌륭한 책이 될 수 없다. 다만, 가슴속으로 깊이 이야기밭 일구는 씨앗이 되는 책이라면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훌륭하고, 살가우며, 멋스러우리라 느낀다.


  꼭 한 사람 알아보더라도 좋다. 책 하나 알아보는 사람 손길은 이녁 마음밭에 생각씨앗 하나 심는 몸짓 되고, 이 몸짓은 자라고 자라서 차츰차츰 고운 사랑 널리 나누는 웃음꽃 되리라 본다. 책씨를 심는 책지기일 테지. 책씨를 뿌리는 책지기라 할 테지. 책방 일꾼도 책지기요, 책손도 책지기이다. 저마다 다 다른 빛깔로 책지기 되어 책씨를 심는다. 책씨는 한 톨 흙에 깃들 수 있고, 백 톨이나 천 톨이나 만 톨쯤 흙에 깃들 수 있다. 나는 책꽃 하나 만나 책씨 하나 심는 책지기로서 오늘 하루를 누린다. 4346.4.10.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책을 읽는다

 


  책을 읽는다. 책에 담긴 사람들 이야기를 읽는다. 책을 읽는다. 책을 엮은 사람들 사랑을 읽는다. 책을 읽는다. 책을 다루는 책방 일꾼 마음을 읽는다. 책을 읽는다. 책에 서린 꿈 한 자락 살피면서 내가 오늘 하루 일굴 삶을 읽는다. 내가 읽는 책에서는 내가 누리고 싶은 환한 빛살 골고루 퍼져나온다. 4346.4.2.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묶어서 쌓은 책

 


  헌책방 일꾼이 책을 묶어서 쌓는다. 짝을 잃으면 안 되는 책일 때에 으레 묶고, 짝맞추기 할 책은 아니되 한 갈래로 묶을 만한 책을 묶어서 쌓는다. 그냥 쌓으면 책들은 어느새 섞인다. 한 사람이 만지고 두 사람이 만지면서, 그만 헌책방 일꾼으로서는 당신 책이 어디에 있는지 잃고 만다. 도서관 일꾼조차 사람들이 아무 데나 놓는 바람에 책을 한동안 잃어버린다고 하는데, 헌책방 일꾼도 이와 같다. 책손 가운데 이녁이 살펴본 책을 처음 꽂힌 자리에 고스란히 꽂는 얌전한 사람이 매우 드물다. 으레 아무 데나 척척 얹거나 꽂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새책방에서도 책을 아무 데나 꽂기 일쑤이다. 이 사람이 살피다가 아무렇게나 꽂는 바람에, 다른 사람이 와서 책을 살필 때에는 정작 못 찾곤 한다. 새책방 장부나 목록에는 틀림없이 그 책이 있으나, 끝내 못 찾아서 다시 주문하는 일이 생기곤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본다. 내가 초·중·고등학교 다니는 동안, 도서관이나 새책방이나 헌책방에서 책을 어떻게 살펴야 하는가를 가르친 적 없다고 느낀다. 내가 다닌 국민학교와 중학교에는 아예 도서관이 없었고, 고등학교에서는 겨우 조그마한 도서관이 하나 생겼지만, 열린 곳이 아니라 닫힌 곳이었다. 우리 스스로 책을 곱게 만져서 곱게 건사하는 길을 가르친 학교가 없었다.


  요즈음은 아이들한테 책읽기를 옳게 가르치려나.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는 아이들한테 그림책 읽히면서 책을 어떻게 건사해야 하는가를 똑똑히 가르치려나. 책장을 넘길 때에는 어떻게 넘기고, 책을 펼쳐 읽을 때에는 어떻게 책을 다루어야 하며, ‘내 책’ 아닌 ‘여럿이 함께 보는 책’은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려나. ‘내 책’일 때에도, ‘내 책’을 얼마나 알뜰히 보듬으며 오래도록 즐겨읽도록 북돋울 때에 즐거운가 하는 대목을 가르치려나.


  책이 다치지 않게 책장 넘기는 매무새를 가르치는 교사는 몇이나 있을까. 책방마실을 할 적에 몸가짐을 어떻게 하고, 목소리나 손전화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교사는 몇이나 될까.


  헌책방 책탑이 어수선하다는 말을 사람들이 참 쉽게 한다. 그런데, 왜 헌책방 책탑이 가지런하지 못하거나 어수선할까. 헌책방 일꾼이 게으른 탓일까. 헌책방 일꾼이 바보스럽기 때문일까. 헌책방 찾아오는 책손은 얼마나 바지런하거나 아름다울까.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거나 책을 사랑한다고 밝히는 사람들은 ‘책 다루는 손길이나 손끝’이 얼마나 정갈하거나 고울까. 4346.3.31.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