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테레츠 대백과 3
후지코 F. 후지오 지음, 허윤 옮김 / 미우(대원씨아이)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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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푸른책/숲노래 만화책

내가 배워서 새로 할게



《키테레츠대백과 3》

 후지코 F. 후지오

 오경화 옮김

 미우

 2018.6.30.



  어떤 이는 ‘이분법’이란 한자말을 쓰고, 어떤 이는 ‘가르다·둘로 가르다’ 같은 우리말을 씁니다. 비슷하지만 다른 ‘나누다’나 ‘쪼개다’를 쓰기도 합니다. 어떤 이가 쓰는 말은 어떤 무리에서는 알아듣는 말이 되고, 어떤 이가 쓰는 말은 누구나 알아듣는 말이 됩니다.


  우리는 어떤 말을 쓸 적에 즐거울까요? 우리는 어떤 말을 쓰면서 생각을 키울까요? 우리는 어떤 말을 쓰면서 동무가 될까요? 우리는 어떤 말을 쓰기에 서로 새롭게 하루를 짓는 슬기로운 마음으로 가다듬을까요?



“난 말이지, 부모님께 말도 없이 나가거나 하지 않아.” “어른은 안 따라가? 도대체 어딜 가는 건데?” “세계 일주.” “돌아올 때는 달에라도 들렀다가 오렴.” “농담으로 생각하는 건 엄마 마음인가, 뭐.” (10쪽)



  누구나 쉽게 알아들으면서 새롭게 생각을 지피도록 하는 낱말을 가려서 쓰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반갑습니다. 몇몇만 알아듣는, 이른바 ‘전문지식’을 ‘전문용어’에 담아서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늘 버겁습니다. ‘전문지식·전문용어’는 조금도 안 새롭습니다. 이런 말은 오직 외워야 합니다. 더 많이 외우는 사람이 더 많이 얻거나 누리거나 거머쥐는 길이 바로 ‘전문’이란 일본스러운 한자말을 내거는 모든 말이요 일이며 자리입니다.


  누구나 쉽게 알아들으면서 생각을 새롭게 북돋우는 말이란, 굳이 ‘전문’이란 허울을 안 씌워요. 누구나 알아듣기에 누구나 하도록 이끌지요. 누구나 알아들으니 외워야 하지 않고, 혼자 차지하거나 거머쥐는 일이 없습니다. 마음이 있다면 이 쉬운 말씨로 스스로 생각을 짓고, 삶을 지으며 사랑을 짓겠지요.



“다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구나. 돼지고릴라의 폭력은 어떻게 좀 해야 될 텐데.”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 “보고 있어 봐. 저 녀석의 인격을 싹 바꿔 놓을 테니까.” “그건 좀 무리 아닐까? 아무리 키테레츠라고 해도.” (75쪽)



  어려운 사투리란 없습니다. 이 대목을 알아야 합니다. 어려운 시골말이란 없습니다. 이 대목도 알아야지요. 어려운 숲말이란 아예 없습니다. 참말로 이 대목을 곱씹을 노릇입니다.


  ‘말’이 아닌 ‘용어’나 ‘어휘’나 ‘단어’란 한자말 옷을 입힐 때마다 ‘전문’이란 허울이 불거집니다. 이 ‘전문’은 끼리질을 하고, 울타리를 세우며, 돈·이름·힘이란 자리하고 맞닿습니다. 《키테레츠대백과 3》(후지코 F. 후지오/오경화 옮김, 미우, 2018)을 읽으며 ‘누구나·끼리끼리’ 사이를 헤아립니다. 모두 석걸음으로 마무리짓는 이 만화는 ‘누구나 삶을 넉넉히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스스로 새길을 찾는 어린이가 나와요. 으레 어른들한테 꾸지람을 듣지만, 어떤 꾸지람을 듣더라도 이 어린이는 의젓합니다. 스스로 더 새롭게, 더 즐겁게, 더 눈부시게 피어날 길로 나아가려고 해요.



“그때부터 50년 가까이 지나서 오랜만에 일본에 돌아왔는데, 정말 놀랐단다.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더구나. 마을도, 사람도, 들도, 산도 ……. 용궁에서 돌아온 우라시마 타로가 분명 지금의 나와 같은 기분이었겠지.” (151쪽)


“어릴 적의 내가 있고, 곤타도 있고 사부도 있어. 아버지도, 어머니도, 마을도, 들도, 산도 옛날 그대로 이곳에 있구나!” “키테레츠, 참으로 좋은 걸 만들었소이다.” (153쪽)



  사투리나 시골말이나 숲말은 하나도 안 어렵지만, 서울말(표준말)이나 맞춤길은 골머리를 썩인다지요. 왜 대학입시를 치러야 하나요? 왜 대학교를 다녀야 하나요? 왜 대학교재나 인문책에 적힌 말하고 어린이책에 적힌 말이 달라야 하나요?


  ‘전문’을 다룬다는 핑계는 대지 말 노릇입니다. ‘깊이’ 들어가거나 ‘넓게’ 짚는다고 할수록 더욱 쉽고 상냥하면서 부드럽고 단출히 풀어낼 노릇이지 싶습니다. 깊이 들어가는데 말이 자꾸 어렵다면, 제대로 모른다는 뜻입니다. 넓게 짚는데 말이 자꾸 까다롭다면, 제대로 모르는 터라 제대로 나눌 길조차 모른다는 뜻입니다.


  하늘에는 별이 있어요. ‘천체’가 아닙니다. 하늘은 하늘이요, 하늘은 파랗습니다. ‘창공’도 ‘공중’도 아니며, ‘창천’도 아닙니다. 바다가 너르면 ‘너른바다’이고, 바다가 크면 ‘큰바다’입니다. ‘대해’가 아닙니다. 들이 너르면 ‘너른들’일 뿐, ‘대평원’이 아닙니다.



“괜찮잖아. 뭐가 됐든 저만큼 열중할 수 있다는 건 훌륭한 거야.” (160쪽)


“그렇게 걱정하지 말라니까. 물론 위험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남자란 신념을 위해서 목숨을 거는 일도 있는 법이란 말야. 쑥스럽네. 멋진 말을 해버렸어.” (164쪽)



  어려운 말로는 못 배웁니다. 어려운 말로는 못 가르칩니다. 쉬운 말이기에 배우고 가르칩니다. 쉽게 풀어내기에 배우며 가르칩니다. 어렵게 비꼬아 놓으니 배우지도 가르치지도 못합니다.


  오늘날 온갖 책이 쏟아집니다만, 이 삶터는 좀처럼 나아지거나 바뀔 낌새가 안 보입니다. 속속들이 짚는다는 인문책이 너울거리지만 막상 이 인문책을 읽거나 곁에 두거나 대학교까지 다닌 분들이 슬기롭게 눈을 틔워서 푸르면서 아름답게 삶을 사랑하는 길을 가는지 아리송합니다. 오히려 인문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우물에 갇히고, 대학교를 다니면 다닐수록 수렁에 잠기며, 강의나 수업을 챙길수록 쳇바퀴에 맴돌지 싶어요.


  이제는 허울을 벗을 때이지 싶습니다. 그야말로 껍데기를 벗어야지 싶습니다. 1980년대 한복판에 《껍데기를 벗고서》란 책이 나와 불티나게 팔린 적이 있습니다만, 이 책도 이름은 “껍데기를 벗고서”라 말하면서 막상 쉽게 안 쓰고 어렵고 일본스러운 한자말이 가득했습니다. 먹물이 먹물에서 그쳤달까요. 한 손에 붓을 쥔 이가 다른 손에 호미를 안 쥐었달까요. 한 손에 붓을 쥐었다면, 다른 손에는 호미뿐 아니라 아기가 똥오줌을 눈 천기저귀도 쥘 노릇입니다. 부엌칼이랑 도마도 쥐고, 걸레랑 빗자루도 쥐어야지요. 자가용은 이제 내다버리고서 자전거를 달릴 노릇입니다. 버스나 전철도 줄이고 두 다리를 사랑할 일입니다.


  마을을 걷지 않고서 마을을 알지 못해요. 아이랑 손을 잡고 골목을 거닐지 않고서 이웃을 만나지 못해요. 하늘빛을 늘 마주하지 않고서나 밤낮이 어떻게 다른 바람결인가를 느끼지 못해요. 두 손으로 풀꽃나무를 어루만지는 여느 삶자락이 아니고서 풀밥(채식·비건)을 차린대서 풀꽃나무를 마음으로 품는 사랑이나 살림이 되지 않습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대백과》는 벌써 포기했다고. 앞으로는 케테레츠 사이 님한테만 의지하지 않고, 내 힘으로 훌륭한 발명을 하기로 했어. 그러려면 공부를 해야 되잖아.” (190쪽)



  쉬운 말로 쉽게 배워서 이웃이랑 쉽게 사랑을 나누는 길을 가면 좋겠습니다. 어려운 말로 어렵게 배우면, 이웃이랑 담을 쌓으면서 ‘전문스러운 울타리’에 스스로 갇힙니다. 자, 보셔요. 쉽게 배운 사람은 스스럼없이 나눕니다. 어렵게 배운 사람은 죽어도 안 나눕니다.


  노래하고 웃고 춤추고 사랑하면서 배운 즐거운 삶길이란, 언제나 이웃을 노래로 마주하고 웃음으로 맞이하며 춤으로 반기고 사랑으로 하나될 줄 아는 살림길입니다. 여태까지 어려운 말로 몸뚱이를 친친 감쌌다면, 오늘부터 한 올씩 풀면 좋겠습니다. 어려운 말이라는 ‘전문 권력’을 한 타래씩 털어내기를 빕니다. 정치꾼이나 장사꾼을 나무라 보았자 안 바뀝니다. 우리가 스스럼없이 즐거이 거듭날 적에 이 푸른별이 시나브로 풀빛으로 피어납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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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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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붉은 강가 1 - 애장판
시노하라 치에 글.그림 / 학산문화사(만화)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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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は赤い河のほとり #篠原千


숲노래 푸른책

별빛이 없이 달빛만 있는 서울이라면



《하늘은 붉은 강가 1》

 시노하라 치에

 최윤정 옮김

 학산문화사

 2010.1.25.



  별을 바라보는 사람은 별을 생각합니다. 달을 바라보는 사람은 달을 생각하지요. 꽃을 바라본다면 꽃을 생각할 테고, 책을 바라본다면 책을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이와 매한가지이니, 아파트를 바라보는 사람은 아파트를 생각하고, 자동차를 바라보는 사람은 자동차를 생각해요.


  대학입시를 바라본다면 대학입시를 생각할 테고, 대통령을 바라본다면 대통령을 생각하겠지요. 골목집을 바라보면 골목집을 생각하며, 나무를 바라보면 나무를 생각합니다. 우리 삶은 스스로 무엇을 바라보느냐로 갈리고, ‘무엇을 바라보는 자리’에 있으면서 ‘무엇을 생각으로 품어 마음을 지으려 하느냐’로 더 갈립니다.



‘하지만 정말, 입시 공부에서도 해방되고, 히무로하고도, 우후훗. 천벌 한두 개쯤이야 하나도 안 무서워.’ (11쪽)



  무엇을 보든 좋거나 나쁘지 않습니다. 그저 무엇을 볼 뿐입니다. 오늘날 이 나라는 거의 서울에 쏠립니다. 이제 경기도가 서울사람을 넘어선다지만, 경기라는 고장은 거의 서울바라기 얼개예요. 부산이나 대구처럼 큰고장조차 그 고장이 스스로 서려는 얼개라기보다는 서울바라기로 기울곤 합니다.


  부산조차 “서울로 올라간다”고 말하며, “부산으로 내려간다”고 말하지요. 이 말씨란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그저 서울에 가고 부산으로 가는 삶이 아니라, ‘서울로 가야 높’고 ‘서울에서 나가면 낮’다는 생각을 말씨에 고스란히 담아서 삶을 이루는 얼거리입니다.



‘사용한 능력은 같은 신관밖에 못 없앤다고? 그럼 그 기분 나쁜 황비만이 날 일본으로 돌려보낼 수 있다는 거잖아. 가까이 가면 틀림없이 위험할 테고, 제일 접근하기 싫은 사람인데. 돌아가기 위해선 싫어도 다시 한 번 황비를 만나야만 해.’ (98∼99쪽)



  서울에서 만난 여러 이웃님이 “고흥은 시골이라 달이 밝겠네요?” 하고 물어보십니다. “저는 달을 안 봐요. 별을 봅니다. 서울에 볼일 보러 올 적에도 달이 아닌 별빛을 어림해요.” “서울에서는 별이 안 보여서 달을 보는데, 그러고 보니 서울에 살며 별을 본다는 생각을 안 해 봤네요.” “비록 전깃불하고 달빛이 밝은 듯하지만, 우리가 마음을 기울여서 밤하늘을 바라보면 서울에서도 별빛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어요. 그리고 눈에 안 보이는 듯하지만 서울에도 틀림없이 별이 있어요.”


  달하고 별을 둘러싼 이야기를 새삼스레 떠올리며 《하늘은 붉은 강가 1》(시노하라 치에/최윤정 옮김, 학산문화사, 2010)를 읽었습니다. ‘고등학교 입시’를 마친 아이가 갑자기 ‘기원전 14세기’로 끌려가서 뜻밖이자 뜬구름을 잡는 듯한 일에 휘말리는 줄거리를 다룹니다. 얼추 3000해 남짓 가로지르는 삶인 셈인데, 만화이니 그리는 이야기라고만 여길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때하고 곳을 가로지를 수 있고, 꿈이며 삶에서 숱하게 가로지른다고 할 만해요.


  다만, 때랑 곳을 가로지를 적에 늘 되새겨야겠지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언제 어떤 꿈을 삶으로 옮겨 이루고 싶은지, 스스로 어떤 숨결로 피어나는 사람으로 서고 싶은지, 하나하나 생각할 노릇입니다.



“무슨 소리예요! 신분이란 건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지키기 위해 있는 것 아닌가요? 권력이 있다면 이런 때 쓰지 않고 언제 쓰나요?” (124쪽)



  낮에도 별이 있습니다. 햇빛이 우리 별에 훨씬 가까워 다른 별빛이 햇빛에 가린다고 하더라도, 낮이고 밤에고 온누리 뭇별은 이 별로 빛을 쏘아보냅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달빛은 달이 내는 빛이 아닙니다. 이와 달리 우리가 보는 별빛은 모두 별이 내는 빛이에요.


  서울을 비롯한 큰고장에서는 매캐한 하늘에서 전깃불빛 탓에 별빛을 보기 어렵다면, 이리하여 달빛만 바라본다면, ‘있는 빛’이 아닌 ‘튕긴 빛’인 ‘정작 있지 않다고 할 만한 빛’에 휘둘리는 눈길이리라 느낍니다. 바라보는 대로 생각하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는 우리 하루라면, ‘있는 빛’을 볼 줄 모르면서 생각조차 못하는 나날로 흐를 적에는, 남이 시키는 대로 휩쓸리기 좋겠지요. 이를테면 나라에서 시키거나 언론에서 흘리거나 학교에서 다루는 이야기에서 맴도는 몸짓이 됩니다.



‘목숨을 구해 줘서 고맙다고? 난 아무것도 한 게 없어. 나야말로 이런 일에 끌어들이고, 몇 번이고 도움을 받고…….’ (185쪽)


“진정됐나? 나는 티토를 포기한 게 아냐. 신분의 상하에 관계없이 생명은 똑같이 존중해야 한다. 그걸 잊는다면 나도 황비와 다를 바가 없어져.” (201쪽)



  참길을 밝히는 글이 있다면, 거짓길을 퍼뜨리는 글이 있습니다. 참길을 보여주고 나누려는 책이 있다면, 거짓길을 보여주고 퍼뜨리려는 책이 있습니다. 정치하고 신문·방송도 매한가지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볼까요? 우리는 무엇을 못 볼까요?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나요?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하나요?


  돈·이름·힘을 거머쥔 이들은 사람들이 깨어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돈·이름·힘을 거머쥔 이, 다시 말하자면 ‘부자·지식인·권력자’는 사람들이 참빛을 못 보거나 안 보면서 참생각을 안 하거나 못 하는 길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이들은 언제나 전문가 얼굴로 나서려 합니다. 이들은 언제나 전문용어, 그러니까 딱딱하고 어려운 말씨로 사람들을 길들이거나 가르치거나 이끌려고 합니다. 지난날 ‘부자·지식인·권력자’가 한문을 썼고, 일제강점기에 일본말을 쓰다가, 해방 뒤에 일본 한자말을 그대로 살린 채 영어를 끼워맞춘 얼거리를 읽어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깨어나지 못합니다. 말 한 마디하고 글 한 줄에까지 꿍꿍이가 깃든 줄 헤아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별빛 아닌 달빛만 바라보면서 바보스레 휩쓸리기 딱 좋습니다.


  달빛은 허울이거든요. 달빛은 눈속임이거든요. 달빛은 참길이 아니거든요. ‘달’은 “딸린(달린) 돌덩이”를 가리키는 오랜 이름입니다. 해에 매달리고 지구한테 매달린 돌덩이가 ‘달’입니다. 사람을 비롯한 뭇숨결이 어우러진 푸른별이 푸르게 내는 빛을 느끼고, 해를 비롯한 온누리 뭇별이 저마다 밝히는 빛을 헤아릴 적에, 우리는 비로소 스스로 깨어나리라 봅니다.



“세상엔 미녀가 별의 수만큼 많으니 결정하기가 참으로 힘이 듭니다.” (80쪽)


“이대로 돌아가도 끝이 아닌걸요. 틀림없이 이 일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아서 원래대로 사는 건 불가능할 거예요.” (241쪽)



  만화책 《하늘은 붉은 강가》에 나오는 아이는 ‘열여섯’이란 나이로 일본이란 나라에서 고등학교 입시를 마친 그날 그곳으로 돌아갈 길을 찾아낼까요? 아니면 ‘기원전 14세기’라고 오늘날 일컫는, 그리고 그날 그곳 사람으로서는 ‘오늘’을 살아가는 그자리에서 새롭게 삶을 짓는 길을 뚜벅뚜벅 걸어갈까요?


  우리가 우리 스스로이기를 내버리면 “딸린 돌덩이”인 ‘달’이 되어 아무 빛이 없이 맴돌고 맙니다. 내내 맴돌기만 하면서 맴도는 줄도 모르겠지요. 우리가 우리 스스로이기를 바라면서 생각을 세우고 꿈을 지으면 “스스로 빛나는 터”인 ‘별’이 되어 저마다 다르면서 새롭게 빛나겠지요.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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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꽃 이야기
오사다 카나 지음 / 미우(대원씨아이)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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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田佳奈 #つれづれ花譚


숲노래 푸른책/숲노래 만화책

들꽃 닮은 사람한테서는 들빛



《소소한 꽃 이야기》

 오사다 카나

 오경화 옮김

 미우

 2020.1.31



  인천에서 나고 자랐습니다만, 어린 날에는 골목마을에 핀 꽃을 눈여겨보지 못했습니다. 어린 날에는 노느라 바빴어요. 어린 날에는 인천에서만 살기에 다른 고장을 거의 몰랐어요. 곁에 있는 부천이나 서울뿐 아니라 부산이나 대구나 광주나 대전은 모두 머나먼 곳입니다. 동무가 사는 안산에 이따금 나들이를 다녀오는데, 자동차가 가득한 큰길이 아닌, 자동차가 거의 없는 조용한 골목마을은 참 포근하구나 싶더군요. 조그마한 골목집이어도 그 작은 마당 한켠에 나무를 심어서 가꿔요. 나무 곁에는 풀꽃이 돋고, 담벼락 귀퉁이나 골목 구석에는 어김없이 손가락만큼 작은 들꽃이 있기 마련이더군요.



“그치만, 좋은 걸 어떡해.” (10쪽)


‘또 만났으면 좋겠다.’ (34쪽)



  들꽃한테서는 들빛을 봅니다. 들꽃한테서는 들내음을 맡습니다. 들꽃한테서는 들넋을 마주합니다. 아무렴, 들바람을 먹을 테니까요. 숲꽃한테서는 어떤 빛이며 내음이며 넋을 느낄까요? 골목꽃한테서는 어떤 빛이며 내음이며 넋이 퍼질까요?


  서울이라면 서울꽃이겠지요. 시골이라면 시골꽃이에요. 저마다 다른 고을처럼 저마다 다른 사람이 저마다 다르게 피어나고 자라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서로 어떤 꽃빛이라고 여기면서 바라볼까요?



“지금은 고로코롬 자전거로 농가까지 안 가도 시장에 다 모여 있어 세상 편리하고 좋아졌슈.” “그러게요.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재미있어서 난 좋았어요. 또 가고 싶네요. 자전거 짐칸에 올라타 꽃 떼러.” “이러지 마셔유.” (24쪽)



  작은 꽃, 또는 수수한 꽃, 때로는 조촐한 꽃, 문득문득 앙증맞은 꽃, 새삼스레 귀여운 꽃이 하나둘 나오는 《소소한 꽃 이야기》(오사다 카나/오경화 옮김, 미우, 2020)입니다. 어디에서나 볼 만한 꽃을 다루고, 누구나 보았음직한 꽃을 들려주며, 다같이 노래할 꽃을 속삭입니다.


  가난한 살림이라면 밥이 먼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밥이란 무엇일까요? 밥으로 짓는 쌀이란 볍씨요, 볍씨란 벼꽃이 맺은 열매입니다. 그릇에 담아서 누리는 밥 한 그릇이란 ‘벼꽃이 낳은 열매’예요. 빵을 구워서 먹는다면 밀가루로 반죽을 할 텐데, 밀가루란 밀알을 빻아서 얻습니다. 밀알이란 밀꽃이 낳은 열매입니다.


  밥을 먹어도 꽃이요, 빵을 먹어도 꽃이에요. 밥 한 그릇을 나누는 사이란 꽃 한 다발을 함께하는 살림입니다. 벼꽃이건 들꽃이건 숲꽃이건, 모두 우리를 살찌우는 숨결이자 빛이에요.



“괭이밥! 하츠코는 튀김이 좋아!” “안 돼, 안 돼. 기름 아까워. 데쳐서 무침 해먹을 거야.” “무침?” (55쪽)



  몸을 살찌우는 밥이 있다면, 마음을 살찌우는 말이 있습니다. 즐겁게 주고받는 말로 마음을 살찌우지요. 기쁘게 생각해서 나누는 말로 마음을 북돋아요. 마음에도 없는 말에는 아무런 기운이 없어요. 어떤 빛도 안 흐르니 아무런 기운이 없을 만해요. 빛이 흐르는 말을 마음에 얹으면서 오순도순 아름다이 피어나는 삶이고, 빛이 감도는 말을 서로 이야기꽃으로 가꾸면서 사랑스레 깨어나는 하루입니다.



‘이 지강금은 옛날에 딸에게 사준 것이다. 병으로 자리보전하고 있는 생활이 조금이나마 밝아졌으면 하고. 딸은 항상 나더러 연주해 달라고 졸라댔다. 몇 개 되지도 않는 딸의 부탁이 하도 기뻐서 나는 핸들을 돌렸다. 물리도록 들었을 〈벚꽃〉을 딸은 매번 처음 듣는 듯한 표정으로 들어 주었다. 위로받은 것은 오히려 언제나 내 쪽이었다.’ (89쪽)



  겨울이 저물려는 즈음 봄까지꽃이며 제비꽃이 보랏빛으로 맑습니다. 이윽고 민들레에 냉이에 잣나물에 하얗게 들판을 덮으면서 눈송이마냥 고운 빛이 들에 그득합니다. 봄꽃이란 봄을 노래하는 빛살이에요.


  여름으로 접어들 즈음 딸기꽃에 이은 찔레꽃이 곱고, 곁에서 감꽃이 말갛습니다. 풀빛을 담은 뽕꽃은 그대로 검붉은 오디로 거듭나고, 쑥잎더러 모싯잎더러 갓잎더러 갯기름나물잎더러 푸르게 이 바람을 춤추자고 속살거려요.


  가만히 눈여겨본다면 느티나무가 맺는 느티꽃이며 초피나무가 맺는 초피꽃은 잎빛하고 다른 풀빛인 줄 알아차립니다. 가을날 줄줄이 매다는 모시꽃도 모시잎하고 다르면서 해맑은 풀빛입니다.


  적잖은 들꽃은 흰빛도 붉은빛도 노란빛도 보랏빛도 아닌 풀빛입니다. 잎처럼 꽃도 푸르면서 숱한 풀벌레를 풀밭에 품어요. 푸르게 품는 풀빛은 푸르게 일렁이는 푸른물결입니다. 이 푸른물결은 무더운 여름에 상큼하면서 즐거운 빛줄기를 나누어 줍니다.



“스짱이 처음으로 꽃집에서 산 나팔꽃. 꽃이 마지막 하나만 남자 스짱이 울먹울먹거려 압화로 만들어 줬잖아.” “울먹울먹거린 적 없거든?” “옛날의 스짱은 울보에다 귀여웠는데.” “안 울먹거렸다고.” (107쪽)



  우리는 어떤 꽃일까요. 우리들 사람은 어떤 꽃님인가요. 어린이로 자라나는 동안 어떤 꽃망울로 꿈을 품었는가요. 어른이란 자리에 서면서 어떤 꽃봉오리로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하는 나날일까요.


  네가 꽃이고 내가 꽃입니다. 네가 꽃빛이고 내가 꽃빛이에요. 다 다른 들에 다 다른 들풀이 다 다른 들꽃이 되어 들바람을 머금습니다. 바다에서 피어난 구름에 멧골을 덮으면서 빗물을 뿌리면, 이 빗물은 골골샅샅 스며들어 샘물이 되지요. 샘물은 냇물로 뻗으며 들풀을 적시고 온갖 나무를 어루만집니다. 그리고 천천히 넓게 모인 냇물은 갯벌을 지나 바다로 다시 돌아가지요.


  빗방울이란 모습으로 바다부터 바다까지 흐르는 길인데, 이동안 하늘빛을 헤아리고 풀빛을 마주하면서 한결 새롭게 이야기를 누리면서 이 별을 푸르게 밝히는 셈이로구나 싶어요. 이 삶길에서 사람은 저마다 어떤 빛님이 되어 무슨 이야기를 지을까요?



“우리 집에는 왜 산타클로스가 안 와?” “그건 할미도 잘 모른단다.” “할머니도 산타클로스가 오면 좋겠지?” “산타클로라.” “산타클로스라니까. 크리스마스는 산타클로스 외에도 집을 예쁘게 꾸며놓기도 하는데 되게 재미있어 보여.” (115쪽)



  “つれづれ花譚”이란 이름으로 나온 만화책은 수수한 꽃이면서 조촐한 꽃일 테고 가만가만 꽃이면서 차근차근 꽃입니다. 한 발짝씩 꽃걸음이요, 두 몸짓에는 꽃손길입니다. 아무리 고된 살림이어도 우리 눈길은 꽃밭으로 갑니다. 아무리 힘든 삶이라 해도 우리 눈망울은 꽃송이를 쓰다듬으려고 둘레를 헤아립니다.


  마음에 꽃이 핍니다. 마음이 꽃밭이 됩니다. 보금자리를 꽃누리로 일굽니다. 마을마다 꽃내음이 물씬 퍼집니다. 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봐요. 자, 땅바닥에 가볍게 앉아 풀씨가 깨어나려고 기지개를 켜는 소리를 들어요. 마음을 틔우면 언제나 씩씩하고 다부지면서 듬직하고 곱게 꽃길을 나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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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6
나카노 지음, 최고은 옮김, 미카미 엔 원작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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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Antique #SecretoftheOldBooks #ビブリア古書堂の事件手帖ㅡ #三上延 #越島はぐ #ナカノ


숲노래 푸른책/숲노래 만화책

- 헌책은 모름지기 손길책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6》

 미카미 엔 글

 나카노 그림

 최고은 옮김

 디앤씨미디어

 2015.9.21.



  사람마다 책을 보는 눈이 다릅니다. 다 다른 사람인걸요. 사람마다 책에서 얻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참으로 모두 다른 숨결인걸요. 똑같은 글씨라지만 오늘까지 우리가 살아온 길에 따라 다 다른 이야기씨로 맞아들입니다. 똑같은 책이더라도 오늘까지 우리가 지은 살림에 맞춰 다 다른 생각씨앗으로 삼습니다.


  저는 자동차를 안 몰 뿐 아니라 운전면허조차 안 땁니다. 제 또래 가운데 자동차를 안 모는 이는 없다시피 하고, 운전면허마저 안 딴 사람은 거의 못 찾습니다. 이제는 집에 텔레비전을 안 모시는 사람이 제법 있습니다만, 그래도 텔레비전을 안 보는 사람이 참으로 드문 이 나라예요. 더구나 신문조차 안 읽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자동차를 몰거나 운전면허가 있는 사람이 바라보는 책하고, 자동차를 멀리하거나 운전면허마저 등진 사람이 마주하는 책은 다릅니다. 같은 책을 읽어도 새겨내는 줄거리도 다르지요. 어느 쪽이 옳거나 맞거나 틀리거나 그를 일이 없습니다. 그저 다르게 걸어왔고 살아갈 눈썰미로 책을 맞이합니다.



“이시가키섬이래요. 부러워요. 남쪽 섬.” “시오리코 씨도 이런 데 관심이 있습니까?” “네. 어떤 고서점이 있을까요? 지역이 다르니 구비한 책들도 다르겠죠?” (8쪽)



  가난한 사람한테 헌책집은 빛입니다. 값 때문에 좀처럼 손에 못 넣은 책을 꽤 눅게 장만할 수 있거든요. 헌책집에서조차 값에 치여 손에 못 넣는 일도 흔합니다만, 새책집에서는 ‘손때가 묻을까 봐 만지지 못하게 막는’ 책을 헌책집에서는 퍽 홀가분하게 만질 수 있습니다. 책은 사랑하되 주머니가 가난한 이들은 ‘새책집 아닌 헌책집에 파묻혀서 책읽기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헌책집에서는 눈치가 덜 보이거든요. 아니, 아예 안 보이기도 합니다. 헌책집에서 책을 읽는다고 눈치를 받으면 ‘눅은 책 하나’ 장만하면 되지요.


  무엇보다도 헌책집지기는 알아요. 헌책집에 파묻혀서 어느 책을 깊이 읽는 사람은 ‘헌책집에 서서 읽은 책’을 사가려 하기 마련이에요. ‘읽은 책을 왜 사느냐’고 묻는 분이 많습니다만, ‘한 벌 읽고 집어치울 책’이라면 아예 안 건드릴 노릇이에요. 모름지기 책이라 하면, 한두 벌도 서너 벌도 아닌, 스무 벌이나 쉰 벌쯤은 가볍게 되읽을 만한 줄거리로 와닿아야지 싶어요.


  우리는 “나, 그 책 읽었다!” 하고 자랑할 책이 아니라 “그 책은 다시 읽을 때마다 새롭더라!” 하고 되새길 책을 손에 쥐어야지 싶습니다. 영화를 볼 적에도 이와 같아요. 다시 보고 또 볼 적마다 마음에 새롭게 이야기꽃이 피어날 만한 영화를 가려서 보아야지 싶어요. 적어도 온(100) 벌은 볼 영화를 가려야겠지요.



“아시즈카 후지오의 《UTOPIA 최후의 세계대전》의 매입 가격은 얼마입니까?” … “저희는 고서 만화책을 거의 취급하지 않아서 전문점처럼 비싸게 사들이지는 못하지만, 백만 단위의 금액이 될지도.” (14∼15쪽)



  갖은 책이 수두룩하게 태어나고, 온갖 책이 신나게 나옵니다. 이제껏 나온 책만 해도 엄청난데 어떻게 새롭다 싶은 책이 자꾸 나오느냐고 물을 만하겠지요. 그런데 책이란 새로 나오면 나올수록 더더욱 새롭게 갖가지 책이 잇달을 만해요. 저 사람은 저렇게 살아내면서 저러한 이야기를 길어올려 책을 엮었다면, 나는 나대로 살림을 지으면서 나다운 이야기를 가꾸어 책을 엮고 싶은 꿈이 피어나거든요.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6》(미카미 엔 글·나카노 그림/최고은 옮김, 디앤씨미디어, 2015)은 헌책집을 둘러싸고서 벌어지는 책삶을 다룹니다. 모두 여섯걸음으로 마무리짓는데, 그림결이나 짜임새가 살짝 엉성하기는 하지만, ‘책·헌책·새책’을 ‘삶·살림·사랑’이라는 자리하고 맞물려서 들려주려고 하는 줄거리는 돋보입니다.



“인터넷이 없던 시대라 고서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면 잘 아는 사람에게 묻는 방법밖에 없었죠. 아버님은 가르침을 구하기에 둘도 없는 상대였을 겁니다. 어른들 이야기라 저는 밖에 나가 있었지만, 오랫동안 이야기한 끝에 아버지는 원래 소장하고 계셨던 후지코 후지오의 초기 작품들을 〈비블리아 고서당〉에 파셨습니다.” (77쪽)



  새책이란 뭘까요? 새로 나온 책이겠지요. 아직 손을 안 탄 책일 테고요. 헌책이란 뭘까요? 예전에 나온 책이겠지요. 벌써 손을 탄 책일 테고요. 새로 나오거나 아직 손을 안 탔다면 이 책을 둘러싼 이야기는 아직 없습니다. 예전에 나오거나 뭇손길을 탔다면 이 책을 감도는 이야기는 ‘손길을 탄 만큼’ 있습니다.


  새책이란 언제나 한 가지 이야기만 도사린다면, 헌책이란 언제나 ‘손길 갈래’만큼 끝없구나 싶은 이야기가 춤춥니다.


  가난한 책벌레한테 헌책하고 헌책집은 아름빛인데요, ‘손길 갈래만큼 끝없는 이야기’라는 대목으로 바라본다면 헌책하고 헌책집은 가멸찬 책바보한테도 아름노래가 됩니다.


  모든 새책은 똑같지만, 모든 헌책은 다릅니다. 모든 새책은 똑같은 값이지만, 모든 헌책은 다른 값이에요. 모든 새책은 똑같이 다루지만, 모든 헌책은 그야말로 다 다르게 다룹니다.



“시오리코 씨는 어머님의 책을 보았을 때 어떤 마음이 책에 담겨 있는지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읽지 않고 처분했죠. 하지만 나중에 생각하지 않았나요? 어쩌면 책 속에 직접 메시지를 남겼을지도 모른다고요.” (152쪽)



  사고파는 값이라는 눈길로 보기에 ‘새책·헌책’으로 가릅니다. 읽어낼 줄거리로 본다면 그저 ‘책’입니다. 손길을 타서 이야기가 새롭게 깃드는 얼거리로 본다면 ‘손길책’ 같은 이름을 새로 붙일 만해요.


  영어로 ‘헌책집’을 ‘used bookstore’나 ‘secondhand bookshop’이라 하는데, 우리말로 새로짓자면 ‘손길책집’이라 할 만합니다. 손길을 담은 책을 다루는 곳이라서 손길책집이에요. 값으로만 보면 헌책이되, 이 책을 만난 사람들이 남기면서 두고두고 흐르는 이야기를 들여다보려 한다면 손길책이 됩니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낡은 책은 내용뿐 아니라 책 자체에도 이야기가 존재한다. (155쪽)


그 이야기가 반드시 아름다우리라는 법은 없다. 고개를 돌리고 싶어지는 추한 내용도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낡은 책에는 사람들의 ‘마음’과 ‘인연’이 담겨 있다. (156∼157쪽)



  헌책집은 언제나 ‘마을책집’ 노릇을 했습니다. 그 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읽고서 내놓은 책을 품는 헌책집이니, 이 헌책집은 ‘그 마을 이야기’가 흐르지요. 서울 헌책집하고 부산 헌책집은 서울 살림하고 부산 살림이 드러나기에 달라요. 광주 헌책집하고 제주 헌책집은 광주살이랑 제주살이가 나타나기에 다르고요.


  2015년 무렵부터 차츰 피어난 새로운 마을책집은 ‘새책 한 자락에도 이야기를 담으려’고 하는 손길이 있습니다. 지식·정보·작가 유명세·출판사 지명도 같은 껍데기가 아닌, 마을에서 애써 이 책 하나를 만나면서 나눌 이야기를 조촐하게 지피려고 하는 오늘날 새로운 마을책집입니다.


  자, 손을 뻗어요. 눅은 헌책에 흐르는 손길을 읽어요. 자, 손을 잡아요. 값싼 헌책에 맺힌 손빛을 읽어요. 자, 손을 씻어요. 먼지를 먹은 헌책이 들려주는 이야기로 마음을 씻고 생각을 씻고 사랑을 씻고 꿈을 씻고서 조용히 손을 씻어요. 이 손으로 우리 이야기를 이 책에 새롭게 담아요.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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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니스 7
오시미 슈조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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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푸른책/숲노래 만화책

- 깎아내린 사람은 바로 너야



《해피니스 7》

 오시미 슈조

 최윤정 옮김

 학산문화사

 2020.3.25.



  남이 나를 깎아내리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남이 얼핏설핏 깎음말을 읊기는 하겠는데, 그 말은 언제나 그이를 깎아요. 거꾸로 나는 남을 깎아내리지 못합니다. 내가 이냥저냥 읊는 깎음말은 노상 남이 아닌 나를 깎지요.



“이봐, 너희들! 이분한테 사과해!” “이분은 나의 오랜 친구다.”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용서를! 제발!” (46∼47쪽)



  말이 흐르고 생각이 흐릅니다. 이야기가 흐르고 손길이 흐릅니다. 바람이 흐르고 빗물이 흐릅니다. 여기에 우리 삶이 흐르고 새롭게 짓는 사랑이 흘러요.


  모든 흐르는 숨결은 흐르다가 멎기도 하고, 흐르다가 굳기도 하며, 흐르다가 넘치기도 해요. 미운 마음이 흘러넘칠 때가 있다면, 기쁜 노래가 흘러넘칠 때가 있어요.


  우리가 입으로 읊거나 손으로 적거나 생각으로 담는 ‘말’은 어떤 ‘생각’을 그리는 ‘씨앗’일까요? 우리는 왜 누구를 좋아하거나 싫어할까요? 우리는 왜 ‘나보다 남’을 더 쳐다보려 할까요? 우리는 왜 ‘남이 아닌 나’를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사랑하는 길하고 엇갈리기 일쑤일까요?



“그 지하실에는 특별한 인간만 들어갈 수 있어. 그러니 네가 그 특별한 인간이란 걸 모두에게 얘기할 수 있게 해줘. 나 혼자 멋대로 널 거기에 들였다간, 다른 사람들이 엄청 화낼 테니까. 오늘 밤 집회에서 말할 거야. 그 자리에 참석해 줘.” (67쪽)



  그리는 만화마다 아픈 사람이 으레 튀어나오는 오시미 슈조 님인데, 《해피니스 7》(오시미 슈조/최윤정 옮김, 학산문화사, 2020)을 보면서 이렇게 아픈 사람을 새삼스레 무더기로 만나는구나 싶고, 이 아픈 사람들은 왜 스스로 사랑하는 길로 못 갈까 아리송하기도 합니다.


  절집에 가 본들 절집에서 하느님을 못 찾습니다. 거룩책을 편들 거룩책에서 하느님을 못 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다 다른 숨결인 하느님인 터라, ‘나한테서 스스로 하느님을 찾지 않’으면 언제 어디에서나 하느님을 못 보기 마련이에요.


  우리가 아프다면 스스로 튼튼하게 마음이며 몸을 돌보지 않은 탓이에요. 우리가 튼튼하다면 스스로 마음이며 몸을 사랑으로 보듬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슬프다면 스스로 슬픈 길을 걸은 탓이요, 우리가 기쁘다면 스스로 기쁜 노래로 피어나기 때문입니다.



“저, 저기 뭐 하나 여쭤 봐도 될까요?” “뭔데?” “고, 고쇼 유키코 씨는, 아직도 신과 대화하고 계신가요? 벌써 5일이 지났는데요!” (121쪽)



  종교 무리는 종교 무리입니다. 정치 무리는 정치 무리입니다. 그저 무리입니다. 무리를 지어서 참나(참된 나)하고 등돌리도록 몰아세우지요. 우리는 어느 종교를 따라야 하지 않아요. 우리는 어느 정치에 기댈 까닭이 없어요. 오직 우리 마음에서 가만히 샘솟으면서 나비처럼 피어나는 꽃송이 같은 사랑을 바라볼 노릇입니다. 저 정치꾼이 잘하느냐 이 정치꾼이 못하느냐를 가를 노릇이 아닌, 우리 살림길을 스스로 바라보고 아끼면서 즐거이 춤추면서 하루를 맞이할 노릇입니다.


  대통령 지지율이나 정당 지지율이란 얼마나 덧없을까요. 지지율 눈속임이란 얼마나 부질없을까요. 저쪽을 믿거나 따르는 이하고 이쪽을 믿거나 따르는 이는 매한가지예요. ‘나’ 아닌 ‘남’을 바라보면서 믿느라 막상 우리 보금자리를 놓쳐요. ‘남’ 아닌 ‘나’를 바라보면서 사랑할 적에 우리는 스스로 가멸차면서 흐드러진 살림꽃으로 나아갑니다.



“불쌍해라. 그렇게 10년 동안 무시당하고 있었던 거예요? 꼴좋다. 개자식.” (133쪽)



  이웃을 괴롭히는 사람이란, 바로 스스로 괴롭히는 꼴입니다. 이웃한테 손가락질하는 사람이란, 바로 스스로 손가락질하는 셈입니다. 이웃을 억누르거나 휘두르는 사람이란, 바로 스스로 삶을 잊거나 잃으면서 헤매는 판입니다.


  깎고 싶다면 능금을 깎으셔요. 깎고 싶으면 모과를 석둑석둑 썰어서 달콤가루에 재우셔요. 깎고 싶다면 무를 깎으셔요. 깎고 싶으면 감자를 굵직굵직 썰어서 감자국이나 카레를 끓여요.


  남을 찌르려고 있는 칼이 아닙니다. 부엌에서 살림을 지으려고 있는 칼입니다. 남을 깎으려고 휘두를 붓이 아닙니다. 우리가 손수 지은 하루를 새롭게 바라보면서 즐겁게 아로새기려는 붓입니다.



“당장, 서두르지 않으면 죽을지도 몰라. 사쿠라네는, 너희 교주는, 예전에 고쇼 씨를 죽이려 했어.” “뭐?” “그 녀석은 사람을 몇이나 죽였다고. 모르고 있었어? 서두르지 않으면. 가르쳐 줘. 고쇼 씨는 어디 있지?” (154∼155쪽)



  누구보다 튼튼한 사람이 아프더군요. 누구보다 아프던 사람이 튼튼하더군요. 겉이랑 속은 같더군요. 속을 숨길 만한 겉옷은 없더군요. 《해피니스》는 섣불리 어린이한테 보여주기는 어렵습니다. 푸름이한테 쉬 보여주기 어렵다고도 할 만합니다. 적어도 스무 살은 되어야 이 만화를 펼 만하지 싶은데, 만화에 흐르는 사나운 몸짓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철드는 나이인 스물’에 이르러 ‘아픔하고 깎음질하고 사랑하고 손길’이라는 네 갈래를 찬찬히 돌아보면 좋겠어요.


  나를 사랑할 사람이란 바로 나이듯, 나를 깎아내릴 사람도 바로 나입니다. 어떻게 하겠나요? 나를 스스로 사랑하겠습니까? 아니면, 나를 스스로 깎겠습니까?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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