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주량’은 얼마인가



  고등학교를 마친 뒤 대학교라는 곳에 살짝 들어갔습니다. 나는 대학교라는 곳에 갈 마음이 하나도 없었으나, 대학교라는 곳이 어떤 데인가 살짝 궁금하기도 해서 그야말로 살짝 겪어 보자고 생각했기에, 대학교에 안 가려던 마음을 조금 누그러뜨린 뒤, 대학교에 아주 살짝 발을 걸쳤습니다. 이때 내 둘레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나하나 짚어 보지요.


 ㄱ. 너는 어느 대학교에 다니느냐?

 ㄴ. 너는 어디에서 왔느냐, 그러니까 네 고향은 어디이냐?

 ㄷ. 너는 몇 학번이느냐?

 ㄹ. 너는 술을 얼마나 마시느냐, 그러니까 네 주량은 얼마이냐?

 ㅁ. 너는 네가 사귀는 이성친구가 있느냐?


  이제 와 돌아보니 이런 물음은 하나도 우스꽝스럽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물음이 몽땅 우스꽝스럽다고 여겼어요. 어떻게 된 노릇인지, ‘살짝 대학교에 발을 걸친’ 나한테 ‘내가 누구인지’ 묻는 사람은 모조리 이 다섯 가지를 차례대로 물었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사회의식’에 스스로 갇혀서, 학교와 사회와 정치와 언론에 스스로 길든 사람들은 누구나 이 다섯 가지만 물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회의식에 덜 물든 사람은 다섯 가지 가운데 한두 가지를 안 묻기도 하고, 때로는 차례가 달라집니다. 이런 모습은 ‘사회의식에 덜 물든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사회의식에 제대로 물든 사람은 누구라 할 것 없이 바로 이 다섯 가지 차례대로 신나게 묻습니다. 하하하 웃음이 나올 노릇이지요.


  ‘주량’이라고 하는 ‘술그릇’을 헤아려 봅니다. 나는 내 ‘주량’이 없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나는 ‘내가 겪고 싶은 모습’이 있기 때문에 내 주량을 못박지 않습니다. 나는 늘 내가 마시고 싶은 대로 마십니다. 그래서, 어느 날에는 소주를 두 상자 마셨습니다. 이 경험은 아주 끔직해서 다시는 이 경험을 안 합니다. 어느 날에는 입에 술을 한 방울도 안 댑니다. 어느 날에는 맥주를 500들이 잔으로 마흔넉 잔을 마십니다. 이 경험도 지랄맞도록 끔찍해서 다시는 이 경험을 안 하기로 했습니다.


  사람들은 술을 마실 적에 미리 ‘술그릇(주량)’을 못박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못박은 술그릇에서 넘어가면 ‘스스로 넋을 잃고 해롱거리는 모습’을 참말 스스로 짓습니다(창조합니다). 웃기지요. 왜 스스로 술그릇을 못박나요? 누구나 소주 열 상자를 마실 수 있고, 누구나 맥주 백 상자를 마실 수 있습니다. 못 마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셔도 몸이 멀쩡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이러한 술그릇을 스스로 마음에 그리면 그대로 됩니다.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은 ‘슐 못 마시겠어’ 하는 마음을 스스로 못박았기 때문에 술을 못 마십니다. 4348.1.2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5)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가상 2015-01-21 13:38   좋아요 0 | URL
저는 술을 못 마신다고 하지 않고 안 마신다고 합니다.
이유를 물으면 맛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맛이 없어도)꾹 참고 마시면 맛있어진다고 합니다.
세상에 맛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맛없는 술을 꾹 참고 마셔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함께살기님 글을 읽으니 내 마음속에 술을 마시지 않겠다 못박았는지도 모르겠네요.

숲노래 2015-01-21 13:56   좋아요 0 | URL
그래요, 꾹 참고 마시는 일이란 얼마나 바보스러운가 싶어요.
온누리에 널린 수많은 아름다운 음식이 참말 아주 많은데요!
마셔도 되고 안 마셔도 되니
우리가 스스로 즐기는 마음이 되면
언제나 즐거우면서 맛날 수 있다고 느껴요.
그러니, 마셔도 좋고 안 마셔도 좋은
넉넉한 마음으로 무엇이든 마주하시기를 빌어요.
고맙습니다 ^^
 

배울 적에는 먹지 않는다



  나는 무엇을 배울 적에는 따로 아무것도 먹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서 배우려고 하면, 배우다가 배가 고파서 힘들지 않느냐 하고 묻는 사람이 있는데, 나로서는 무엇을 배울 적에 아무것도 먹을 수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밥은 몸을 살리는 기운이고, 배움은 마음을 살리는 기운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살리는 기운을 맞아들이면 때와 곳(시간과 공간)을 잊습니다. 마음을 살리는 기운을 받아들이면 때와 곳을 넘어섭니다. 이를테면, 마음을 살리는 기운을 배울 적에는 시간이 가는 줄 잊고, 내가 어디에 있는지 잊으며, 내 몸이 어디에 어떻게 있는가 하는 대목을 모두 잊습니다. 그러니까, 먹을 수 있는 몸이 없습니다. 내 삶을 가꾸는 길을 알려주는 슬기로운 이야기를 배운다고 할 적에는, 오직 내 마음만 있으니 ‘밥을 먹으려 한다 하더라도, 밥을 집어넣을 입이 없는’ 셈입니다. 4348.1.20.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삶과 글쓰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새로 배우는 재미



  손전화 기계에 스카이프라는 풀그림을 깐다. 어떻게 까는지 몰랐으나 두 사람이 도와주어서 기쁘게 깐다. 이러고 나서, 한 사람이 더 도와주어서 손전화 기계를 빌어 태플릿으로 인터넷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배운다. 몹시 고맙게 배운다. 하룻밤 지나면서 곰곰이 생각하니, 손전화 기계에 딸린 설명서를 읽으면 혼자서 다 알 수 있는 일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고 보니, 손전화 기계에 딸린 설명서를 안 읽었다.


  자전거를 새로 장만하면, 자전거마다 ‘자전거 설명서’가 붙는다. 자전거 설명서를 읽으면, 자전거를 혼자서 어떻게 손질할 수 있는지 찬찬히 알려주니, 이 얇은 책을 읽으면 스스로 씩씩하게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자전거를 바른 몸짓으로 즐겁게 타는 길도 설명서에 나온다.


  사진기를 새로 장만하면, 사진기자마 ‘사진기 설명서’가 붙는다. 사진기 설명서를 읽으면, 사진을 어떻게 찍으면 되는지 낱낱이 헤아릴 수 있다. 사진강의를 듣지 않아도 사진 찍는 이론이나 지식을 넉넉히 배울 만하다.


  책으로 배워도 재미있고, 이웃이 가르쳐 줄 적에 배워도 재미있다. 어떻게 배우든 모두 새롭다. 새롭기에 배우고, 배우기에 즐거우며, 이 즐거움은 내 삶으로 녹아든다. 4348.1.19.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삶과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길에서 들은 이야기



  서울에 얼추 다섯 달 만에 볼일을 보러 와서 고속버스역에서 신논현역 쪽으로 걸어가는데, 내 앞에서 걸어가던 아가씨 셋이 꽤 큰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이 이야기가 내 귀에 들어온다. 어라, 이 이야기를 내가 왜 듣지, 하고 생각하는데 고스란히 들린다. 찻길에서 자동차가 싱싱 달리며 시끄러운데.


  내 앞에서 걷던 아가씨 셋은 “아파트에서 하룻밤 잘 때하고 시골집에서 하룻밤 잘 때하고 얼마나 다른데. 진짜 좋다고.” “그런데, 아무 시골집에서 잘 수 있나? 시골에 아는 사람 있니?” 이 말까지 듣고 이들을 앞지른다. 뒤에 더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는지 이제 안 들린다. 다만, 한 가지를 곰곰이 생각한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면서 사는 아가씨들은 아마 시골집에서 하룻밤 묵은 듯하고, 이렇게 하룻밤 묵으면서 새로운 삶을 겪거나 맞아들였구나 싶다.


  그러면, 시골집이 왜 좋은지를 얼마나 알까. 시골집이 어느 대목에서 좋은가를 어느 만큼 알까. 시골집이 좋다면, 도시에 있는 아파트는 무엇이 안 좋고, 어느 대목에서 안 좋은가를 어느 만큼 알까.


  오늘날 수많은 도시사람은 도시에 있는 이웃을 많이 알거나 사귄다. 도시에서 아파트로 흔히 나들이를 다닐 테며, 온갖 까페나 밥집이나 찻집을 드나들리라. 도시에서는 이곳저곳 다니는 곳이 많을 테지만, 저녁이 되면 불빛 없이 깜깜한 시골집 가운데 ‘가까이 알아’서 가 볼 만한 데는 거의 모르리라. 하룻밤 아닌 여러 날 묵을 만한 집은 거의 모를 테며, 시골집에서 시골물을 마시고 시골바람을 쐬면서 지내기란 매우 어려울 테지.


  학교에서는 교과서로 하나도 안 가르치고, 방송에서 이런 이야기를 다루는 일이 드물며, 책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잘 안 나온다. 여름에 바지런히 나무를 해서 겨울에 나무를 지펴서 불을 때는 삶을 ‘말로는 들어’ 본다 한들, 몸으로 겪지는 못하리라. 4348.1.1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사랑스레 책읽기



  사랑스레 읽는 책은 언제나 사랑스레 스며듭니다. 사랑스레 읽지 않는 책이라면 사랑스러운 기운은 조금도 안 스며듭니다. 책 하나가 사랑스럽기 때문에, 어느 책 하나를 읽으면서 사랑스러운 기운을 얻을 수 있지만, 책을 마주한 사람들 눈길과 손길이 사랑스럽기에 어느 책을 손에 쥐든 사랑스러운 기운을 얻을 수 있기도 합니다.


  네가 사랑이기에 나도 너한테 사랑을 주지 않습니다. 내가 사랑이라면 나는 언제 어디에서나 누구한테나 늘 사랑을 나누어 줍니다.


  주고받기 때문에 사랑이 아니라, 언제나 기쁘게 나누기 때문에 사랑입니다. 사랑스레 책을 읽는 사람은 늘 새롭게 사랑을 길어올려서 내 몸과 마음부터 맑고 밝게 가꾸는 사람이면서, 둘레에 있는 이웃과 동무한테 늘 아름답게 웃고 노래할 수 있는 기운을 나누어 주는 사람입니다.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을 흔히 쓰면서도, 막상 스스로 사랑이 아니요 사랑스러움하고는 동떨어진 채 살기에 자꾸 서로서로 아프게 합니다. 사랑은 허울이 아닙니다. 사랑은 이름이 아닙니다. 사랑은 오롯이 사랑일 뿐입니다. 사랑스레 삶을 지으면서 사랑스레 책을 읽습니다. 4348.1.10.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삶과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