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우리말 착하게 가꾸기 ㉡ 살려쓰면 좋은 우리말 : 삶말


 제가 살아가는 집은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덥습니다. 어쩌면 너무 마땅한 소리라 할 만한데, 참말 그렇습니다. 겨울에는 추워서 손이 곱습니다. 겨울이면 집에서 긴옷을 여러 벌 껴입으면서 지내고, 여름이면 집에서 거의 맨몸 차림으로 보냅니다. 봄에는 봄날대로 봄기운을 느끼는 집입니다. 여름이면 여름다움을 받아들이고, 가을에는 가을이구나 하고 헤아립니다. 겨울철은 겨울이란 어떠한 날씨인가를 새삼 깨닫습니다.

 모든 시골집이 우리 집마냥 춥거나 덥지는 않아요. 제가 집살림을 알뜰히 여미지 못하는 나머지 겨울에 제법 추운 채 지낸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 살붙이들은 한데에서 자지 않아요. 오늘날 우리네 삶터 곳곳에는 내 보금자리 한 칸 없어 길바닥에서 잠을 자며 먹고살아야 하는 사람이 무척 많아요. 우리는 고맙게 보금자리를 얻었고, 제법 춥다 하지만 길바닥 아닌 멧골자락 살림집에서 따스하게 이불을 덮으며 잠들 수 있습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인데요, 누구나 저마다 살아가는 터전에 걸맞게 말을 배우고 나눕니다. 고운 터전에서 고운 이웃과 어버이하고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은 고운 말을 듣고 익히며 쓰는 삶을 꾸립니다. 거친 터전에서 거친 이웃이랑 어버이하고 부대껴야 하는 사람은 거친 말을 듣고 받아들이며 쓰는 삶을 꾸립니다.

 경상도에서 태어난 사람은 경상도 삶터와 사람과 자연에 걸맞는 기운을 받아들이며 내 말을 돌봅니다. 강원도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강원도 삶터와 사람과 자연에 들어맞는 흐름을 맞아들이며 내 말을 살찌워요. 서울에서 어린 나날을 보내면 서울이라는 터전과 사람과 흐름에 발맞추는 말을 쓰겠지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 살아가는 결에 따라 말을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좋아하며 마주하는 사람들과 함께 말을 살피며 주고받습니다. 나는 내 동무랑 이웃한테서 말을 배우는 한편, 내 동무랑 이웃은 나한테서 말을 배웁니다. 내가 얄궂거나 짓궂거나 어설프거나 못난 말을 일삼는다면 내 동무랑 이웃은 나한테서 이런 말투에 차츰 젖어듭니다. 나부터 정갈하고 알뜰하며 넉넉한데다가 사랑스레 말을 한다면 내 동무랑 이웃은 나한테서 이런 말투에 하루하루 익숙해져요.

 이리하여 삶말입니다.

 삶말을 놓고 우리가 알차게 살찌울 만한 대목을 조곤조곤 짚어 봐요.


1. 네나라 : 학교에서는 ‘삼국시대’라고 배우지만, 가만히 살피면 고구려랑 백제랑 신라에다가 가야가 있어요. 말사랑벗도 알 만한 ‘가야금’이란 악기는 가야사람이 만들었어요. 가야는 아예 나라로 안 치며 일컫는 ‘삼국(三國)’인데, 한자말로 ‘사국’이라 할 수 있으나, 우리는 ‘네나라’라 하면 더 좋아요. 북녘에서는 ‘세나라시기’라는 낱말을 씁니다. 북녘도 ‘네나라시기’라 하면 한결 좋겠지요.
 

2. 살붙이 : ‘살붙이’하고 ‘피붙이’는 같은 낱말이에요. 두 낱말은 ‘한식구’를 가리켜요. 요사이는 일본 한자말 ‘가족(家族)’만 자꾸 써 버릇하지만, 우리한테는 우리 좋은 말 ‘살붙이’가 있습니다. 


3. 사랑놀이 : 학교나 동네 담벼락에 짓궂게 ‘sex’라고 흘겨 적는 짓궂은 동무들이 있어요. 교과서나 여느 책에는 으레 ‘성교(性交)’라는 낱말만 나오고, ‘짝짓기’는 짐승한테만 쓰는 낱말로 삼아요. 정 사람한테 ‘짝짓기’를 못 쓰겠으면 ‘사랑짓기’라 말하면 되고, ‘사랑놀이’나 ‘사랑맺기’라 할 수 있습니다. 


4. 새하늬마높 : 학교에서 ‘높새바람’이라는 바람이름 하나는 듣겠지요. 그러면 높새바람이 어떤 바람인지 아시나요? ‘높(북) + 새(동)’라서, 한자로 적을 때에 ‘北東’을 가리키는 우리말이랍니다. ‘하늬바람’은 서쪽에서 부는 바람이에요. ‘동서남북(東西南北)’을 가리키는 우리말이 ‘새·하늬·마·높’입니다. 


5. 하나둘셋 : 자동차 다니는 길을 놓고 ‘이차선(二車線)’이나 ‘사차선(四車線)’이라고 하는데, 우리말로는 ‘두찻길’이나 ‘네찻길’이에요. 전화번호를 말할 때 ‘영 셋 둘(032)에, 하나 둘 셋(123) 국, 넷 다섯 여섯 일곱(4567)이에요’ 하고 이야기하면 참으로 좋습니다. 


6. 이태 : “두 해”를 일컫는 ‘이태’예요. “지지난해”를 일컫는 ‘그러께’이고요. 이제는 어르신들도 이 같은 우리말을 쓸 줄 모르고 ‘이년(二年)’이라고만 합니다만. 


7. 밥버릇 : 좋아하는 밥을 즐겨먹을 수 있고, 먹기 싫은 반찬은 안 먹을 수 있어요. 골라먹기나 가려먹기(편식偏食)를 하면 몸에 안 좋다고 하고요. 그러니까 ‘고루먹기’를 해야겠지요. 온누리를 고루 살피고 내 마음을 고루 가꾸며 밥상에서도 고루 즐기면 아름답습니다. 


8. 살림돈 : 살림을 꾸리며 써야 할 돈이기에 살림돈입니다. 말사랑벗들은 아마 ‘생활비(生活費)’라는 낱말만 들었으리라 생각해요. 


9. 뜨개질 : 학교나 집에서 뜨개질을 배우는지 궁금하네요. 집에서 손수 옷을 지어 입는 사람은 몹시 드무니까요. 옷은 사서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나요? 우리들이 옷을 돈 주고 사 입은 지는 얼마 안 되었어요. 길쌈을 하고 뜨개질을 하며 바느질을 하던 우리 삶입니다. 


10. 방긋웃음 : 사람마다 웃는 모양새가 달라요. 같은 사람이라도 때와 곳마다 웃음짓는 매무새가 다르고요. 방긋 웃고 싱긋 웃으며 활짝 웃다가는 살며시 웃습니다. 음전히 웃고 얌전히 웃으며 다소곳하게 웃어요. ‘미소(微笑)’는 일본말입니다. 


11. 장님 : ‘장애자’를 ‘장애인’으로 고쳐 일컫다가 ‘장애우’라는 새말까지 쓰지만, 정작 장애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을 푸대접하거나 막대접하는 삶터는 달라지지 않아요. ‘장님’이란 우리말을 버리고 ‘시각장애인’이라 일컫는다 해서 복지나 문화나 사회나 교육이 달라지는지 궁금해요. 말은 바꾸지만 삶을 바꾸지 못하고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면 무슨 보람이나 뜻이 있는지 아리송해요. 


12. 손말 : 손으로 나누는 말이기에 손말입니다. 입으로 나누는 말이면 입말이고, 글로 적어 나눈다면 글말이에요. 입으로 소리를 내는 사람은 입말을 쓰고, 입으로 소리를 못 내는 사람은 손말을 씁니다. 


13. 쉼터 : 예전부터 ‘쉼터’란 말을 썼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하루하루 새로 거듭나는 누리에서는 ‘휴게소(休憩所)’나 ‘휴게실(休憩室)’이 아닌 ‘쉼터’로 자리잡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자리라면 ‘만남터’이고, 신나게 노는 곳은 ‘놀이터’이며, 땀흘려 일하는 곳은 ‘일터’예요. 즐거이 가르치고 배우는 곳은 ‘배움터’입니다. 


14. 씻는방 : 겨울이 되니 시골집 씻는방이 자꾸 얼어서 걱정이네요. 아파트라든지 빌라라든지 하는 곳에서는 한결같이 ‘욕실(浴室)’이라 하지만, 우리 집에는 씻는방만 있어요. 


15. 훔치기 : 걸레를 잘 빨아서 방바닥을 훔칩니다. 네살박이 딸아이는 돌쟁이였을 때부터 아빠 옆에서 ‘방바닥 훔치는 모습’을 말끄러미 지켜보았습니다. 물을 살짝 틀어 그릇을 부십니다. 우리 집 딸아이는 저도 설거지를 해 보고프지만 아직 엄마 아빠가 시키지 않습니다. 어차피 크면 알아서 다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칩니다. 날마다 집살림을 힘겹지만 즐거이 치러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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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우리말 착하게 가꾸기 ㉠ 왜 말하는가 돌아보고, 애써 글쓰는 삶


 우리 식구들 살아가는 멧골집 둘레에는 가게가 없습니다. 시골집만 있는데, 가까운 이웃집조차 꽤 멉니다. 도시에서 살다가 시골로 온 만큼, 우리 집 아이는 때때로 얼음과자나 까까 노래를 부르곤 하며, 애 아빠인 저는 보리술 생각이 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걸어서 다녀올 구멍가게나 편의점이란 아예 없을 뿐더러, 얼음과자나 보리술을 파는 곳까지 낮에 걸어서 찾아가자면 오가는 데에만 한 시간 반쯤 걸립니다.

 바라보기에 따라 다른데, 우리 살림집은 오늘날 문명하고 동떨어졌다 할 만하지만, 여느 시골은 다 이와 같아요. 굳이 가게에 들러야 할 일이 없고, 집에서 모든 일을 다 봅니다. 가게에 갈 일이란 때때로 오일장에 맞추어 읍내로 가면 넉넉합니다.

 가끔 아이랑 도시로 마실을 나와 보면, 길가에 가게가 끊이지 않는 모습을 보며 눈이 아프다고 느낍니다. 참말 도시에서는 가게를 꾸려야 살아남고, 가게에서 물건을 사야 살아갑니다.

 그런데, 가게마다 간판을 어떻게 붙이는지 찬찬히 살펴보신 적 있나요?

 얼마 앞서 아이하고 둘이 서울마실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인데, 창전동 골목 한켠에서 ‘커피가게’라는 찻집을 하나 보았습니다. 커피를 파는 집이라 ‘커피가게’일 텐데, 이곳은 아예 이름이 ‘커피가게’였어요. 흔히들 ‘커피숍’이라 하잖아요. 더구나 알파벳으로 ‘coffee shop’이라 적기 일쑤이고요. 어른들이랑, 또 동무들이랑 길거리를 다니면서 커피집 간판을 가만히 살펴보셔요. 하나같이 알파벳으로 간판을 적어 놓는답니다.

 이와 달리, 김밥집 가운데 간판에 알파벳 한 글자라도 적어 놓는 집은 없습니다. 한자조차 적어 넣지 않아요. 국밥집이나 분식집이나 여느 밥집도 마찬가지예요. 여느 밥을 파는 가게 가운데 간판에 영어나 한자를 적어 넣는 곳은 없어요. 그리고, 머리방이라든지 햄버거집이라든지 튀김닭집은 으레 영어를 많이 적어 넣습니다. 그러나, 시골마을 머리방은 오로지 한글로만 적어 놓더군요. 간판에 영어를 적어 넣는 집하고 간판에 한글만 있는 집하고 무엇이 다를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셔요. 그리고, 글만 한글인지 속뜻까지 우리말인지를 함께 헤아려 보셔요.

 저는 우리 말사랑벗들이 착한 마음과 참다운 넋과 고운 얼을 사랑하면서 살아간다면 고맙다고 여깁니다. “우리말이 온누리에서 가장 훌륭한 말이야.”라든지 “한글만큼 멋지며 알찬 글이란 없지.” 같은 생각으로 말과 글을 생각하거나 아끼려 하지 않으면 고맙겠다고 여깁니다. 그저 내 삶으로 받아들이면서 보듬어 주면 좋겠어요. 그예 내가 사랑할 삶이듯 내가 사랑할 말이라고 헤아리면서 껴안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나 스스로 마주하는 이웃이 누구인가에 따라, 또 내가 가게 임자라 할 때에 어떤 손님을 맞이하려 하는가에 따라 말과 글이 달라져요. 시골 읍이나 면에서 시골 농사꾼을 손님으로 맞이할 신집에서 ‘shoe’ 같은 말을 섣불리 간판에 적지 않겠지요. 서울 강아랫마을 같은 데 가게에서는 시골 농사꾼을 손님으로 맞아들일 까닭이 없을 테니까 갖가지 알파벳을 잔뜩 적어 놓겠지요.

 착하게 생각하며 착하게 살아가려는 사람이라면 착하게 말을 합니다. 참답게 생각하며 참다이 살아가려는 사람이라면 참다이 글을 써요. 곱게 생각하며 고이 살아가고픈 사람이라면 고이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최종규 . 2011 -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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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글쓰기 삶쓰기 ㉤ 내 마음과 삶이 좋아서


 《동경괴동》이라는 만화책하고 《이치고다 씨 이야기》라는 만화책이 있습니다. 말사랑벗들이 만화를 좋아한다면 한 번쯤 이름은 들었을는지 모르고, 만화를 좋아하지 않으면 이름이 낯설 수 있어요. 만화를 좋아하지만 《동경괴동》이나 《이치고다 씨 이야기》는 들추지 않을 수 있으며, 이 만화들을 읽었을지라도 이 만화가 말사랑벗들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려 하는지를 헤아리지 못할 수 있어요.

 《동경괴동》은 ‘일본 도쿄’에서 정신병 치료를 받는 ‘괴물 같은 아이’ 넷이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이치고다 씨 이야기》는 ‘인형 몸에 깃든 외계인’이 착하지만 외로움을 타는 아이(대학생)하고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동경괴동》은 일본이든 한국이든 매한가지인데, 도시에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이 복닥거리면서 사랑이나 믿음을 잃은 슬픈 마음밭으로 살아가는 아이들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이 아이들은 이 아이들이기 때문에 마음앓이를 하면서 힘겨운지, 이 아이들을 둘러싼 어른들도 마음앓이를 하지만 느끼지 못하거나 티를 내지 않는지를 가만히 짚습니다. 《이치고다 씨 이야기》는 숱한 사람이 복닥이는 가운데에도 착한 넋과 매무새를 예쁘게 건사하면서 조그마한 들꽃처럼 조그마한 꽃내음을 나누는 아름다운 삶자락을 보여줍니다. 이 착하고 외로운 아이를 알아채거나 헤아리는 둘레 어른은 드물지만, 이 아이는 홀로 꿋꿋하며서 씩씩하게 살아가요.

 누구나 한 번 선물받는 목숨이고, 누구나 한 번 선물하는 목숨입니다. 말사랑벗들은 말사랑벗 어버이한테서 목숨을 선물받았어요. 나중에 말사랑벗들이 말사랑벗 어버이들 나이 즈음 된다면, 말사랑벗 또한 좋은 어버이가 되어 내 살과 피와 뼈를 나누어 새로운 목숨붙이한테 선물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온 발자취는 이처럼 내 삶을 선물받는 가운데 내 삶을 선물하면서 고이 이어왔습니다. 앞으로도 사람이 살아갈 발자취는 이렇게 내가 선물받은 삶을 내 뒷사람한테 선물하면서 이어져요.

 우리가 ‘우리말 우리글’을 살피는 까닭은 바로 이 고마운 삶을 누리는 동안 어떠한 넋을 어떠한 말그릇과 글그릇에 담으면 즐겁고 좋을까를 헤아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아무렇게나 살아가며 내 고운 목숨을 망가뜨릴 수 있을까요. 아무렇게 말을 하거나 글을 쓰면서 내 고운 삶을 일그러뜨릴 수 있을까요. 착하게 살아가며 착한 말을 쓰면 좋을 텐데요. 예쁘게 살아가며 예쁜 꿈을 북돋우면 기쁠 텐데요.

 말 한 마디이든 글 한 줄이든 내 마음을 담아요. 말 두 마디이든 글 두 줄이든 내 삶을 실어요. 아프고 힘들 때에는 아프고 힘든 티가 말이랑 글에 묻어납니다. 기쁘고 신날 때에는 기쁘며 신나는 느낌이 말이랑 글에 스며듭니다. 애써 슬프지 않은 척하지 않아도 되고, 부러 기쁘다고 우쭐거리지 않아도 돼요. 느끼는 만큼 글로 담고, 생각하는 만큼 말로 나누면 좋습니다. 살아가는 결대로 서로를 마주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무늬대로 서로 오붓하게 나눌 이야기를 엮으면 돼요.

 말은 누군가 듣고, 글은 누군가 읽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듣는다 해서 ‘예쁘게 들어 주기를 바라며’ 하는 말은 아니에요. 누군가 읽기 때문에 ‘예쁘게 읽어 주기를 바라며’ 쓰는 글은 아니에요. 들어 주는 사람이 있거나 없거나 한결같이 예쁘게 살아가면서 하는 말입니다. 읽어 주는 사람이 많든 적든 꾸준히 어여삐 살림을 북돋우면서 쓰는 글이에요.

 이번에는 말사랑벗이 쓰는 글을 또 다른 갈래에서 살며시 들여다봅니다.


- 일기 쓰기
 저는 국민학교라는 데를 다닐 때부터 늘 학교에서 얻어터지며 일기를 썼다고 했잖습니까. 일기란 누구한테 보여준다든지 검사를 받으려고 쓰는 글이 아닌데, 아직 우리 나라에서는 이러한 틀이 깨지지 않아요. 하루를 돌아보며 내 삶을 얼마나 사랑하고 좋아했는가를 담는 글이 일기인데, 일기를 이렇게 쓰도록 이끄는 어른은 잘 안 보여요.
 그러나 어른들이 일기 쓰기를 숙제 검사 하듯 한다든지, 내 일기를 몰래 훔쳐본다든지 하더라도 주눅 들지는 마셔요. 내 일기는 내 하루 삶을 곱다시 적바림하는 사랑열매이니까요. 내 사랑열매를 알뜰히 일군다는 마음가짐을 살뜰히 이어 주셔요.
 일기는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앞서 쓸 수 있고, 꼭 공책(일기장)이 아니더라도 작은 수첩을 주머니에 늘 넣어 다니면서 틈틈이 내 삶자락을 적바림할 수 있어요. 하루하루 그때그때 일과 삶과 생각을 담으면 일기 쓰기입니다.


- 느낌글(독후감) 쓰기
 책을 읽고 쓰는 글이 느낌글이에요. 요사이는 영화를 보고 나서 쓰는 느낌글이 있고, 연극이나 공연을 보고 쓴다든지, 노래를 듣고 쓸 수 있으며, 춤을 보거나 나 스스로 춤을 추고 나서 느낌을 적을 수 있어요. 큰 테두리에서 ‘책을 읽으며 받은 느낌을 꾸밈없이 적은 글’을 느낌글이라고만 할게요.
 그런데 이 느낌글이란, 책에 어떤 줄거리가 담겼는가 하는 이야기를 적는 글은 아닙니다. 줄거리를 줄줄이 밝혀도 나쁘지는 않아요. 다만, 줄거리를 밝히든 안 밝히든, 책을 읽고 느낌을 글로 옮긴다 할 때에는, 책을 읽는 동안 내 넋과 삶이 어떻게 달라졌거나 거듭났거나 새로워졌는가를 밝혀야 알맞습니다.
 앞서 다른 글쓰기 이야기를 할 때에도 적었는데, 일기이든 산문이든 시이든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쓰는 글이 아니라고 했어요. 남 앞에서 자랑하는 글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나 스스로 내 삶을 돌아보면서 내 하루를 가다듬는 글이에요. 이렇게 나 스스로를 돌아본 글을 이웃이나 동무하고 함께 읽으면서 서로서로 생각이나 느낌이 사뭇 다르다고 깨우치는 한편, 즐거우며 고맙게 선물받은 삶을 다 함께 어깨동무하면서 힘차게 걸어가자는 뜻을 바로 이 느낌글에 담는다고 하겠어요.
 책을 읽으며 좋은 넋을 얻거나 느꼈으면, 이렇게 얻거나 느낀 좋은 넋이 나로서는 다시 태어나는 좋은 삶이 되는 가운데 저절로 샘솟는 글이 느낌글입니다.


- 생각글(논설문) 쓰기
 느낌글은 느끼는 그대로 쓰지만, 생각글은 생각하는 그대로 씁니다. 흔히 한자말로 ‘논설문’이라 하는데요, 어떠한 일이나 사람을 놓고, 나는 어떻게 생각한다 하고 밝히는 글입니다. 다른 한자말로는 ‘주장’이라고도 하는데, ‘논설’이든 ‘주장’이든 “내 생각”이에요. 다른 사람 생각을 빌지 않고, 내 줏대와 깜냥대로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밝혀서, 우리가 서로 어울리는 이 자리에서 한결 슬기로우면서 올바르거나 착하거나 참다운 길을 찾자고 하는 글입니다.
 일기나 느낌글은 처음부터 남한테 읽힐 마음이 없이 쓰는 글인데, 생각글은 처음부터 남한테 읽힐 마음으로 쓰는 글입니다. 생각글은 남들이 함께 읽어 주면서, 또 그냥 읽기만 할 뿐 아니라 속알맹이를 제대로 파헤쳐 읽어 주기를 바라면서, 우리가 다 함께 마주하는 일이나 사람을 한결 깊고 널리 살피자는 글입니다.
 일기라든지 느낌글을 쓸 때에는 ‘굳이 남한테 읽힐 글이 아니’니까 글씨를 삐뚤빼뚤 쓴다든지, 또는 글멋을 부리며 쓴다든지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생각글은 달라요. 생각글은 손으로 글씨를 적을 때에는 아주 또박또박 써야 합니다. 까다롭거나 알쏭달쏭하거나 여러 뜻으로 읽힐 만한 글을 쓰면 안 돼요. 아주 똑부러지게 써야 하고, 단출하게 써야 하며,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든지 어영부영 늘어지게 쓰면 안 돼요. 내 생각을 환히 밝히면서, 내 생각을 맞느냐 틀리느냐 하고 따지는 얼거리가 아니라, 나로서는 내 슬기와 깜냥으로 이렇게 생각하니까, 당신들은 당신들 슬기와 깜냥에 따라 이야기를 나누자면서 말문을 여는 글이 생각글입니다.


 

 일기하고 느낌글하고 생각글을 밝혔습니다. 이 세 가지 글을 쓰는 바탕은 꼭 한 가지입니다. 내 마음과 삶이 좋아서 쓴다는 바탕 한 가지입니다. 스스로 좋아하며 쓰는 글이요, 스스로 내 삶을 좋아하도록 일구면서 쓰는 글입니다. 겉치레나 겉발림으로는 글을 쓸 수 없어요. 좋은 동무를 사귄다든지 좋은 이웃을 둔다든지 할 때에도 겉치레나 겉발림으로는 만날 수 없어요. 속을 가꾸면서 속을 채우는 사랑 어린 따스함으로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최종규 . 2011 -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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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글쓰기 삶쓰기 ㉣ 말로 이룬 열매, 글로 빚은 꽃


 우리가 쓰거나 읽는 글은 여러 갈래로 나눕니다. 이른바 문학이라는 이름을 맨 앞자리에 놓은 다음, 시하고 산문하고 소설하고 희곡을 나눕니다. 산문은 수필이라고도 하며, 소설은 어른소설하고 청소년소설이 있습니다. 소설하고는 다른 틀로 어린이한테 읽히는 동화가 있으며, 연극이나 영화나 연속극을 올릴 때에 쓰는 희곡이나 대본이 있어요.

 갈래로는 이렇게도 나누고 저렇게도 나누는데, 글이란 다 똑같은 글입니다. 이 글을 이런 갈래에 넣든 저런 갈래에 넣든 딱히 다른 뜻이 없습니다. 남자가 더 나은 사람이 아니듯 여자가 더 나은 사람이 아니에요. 교사가 가장 거룩한 일거리가 아니듯 농사꾼이나 대통령이 더 훌륭한 일거리는 아니에요. 저마다 제 몫이 있으며 제 길과 자리가 있어요. 나 스스로 나한테 가장 알맞으면서 좋은 가운데 나와 내 이웃을 아름다이 보듬을 일거리를 찾을 때에 즐겁습니다. 흔히들 대통령을 가장 높은 자리로 두곤 하지만, 흔히 하는 말이 아닌 사람이 살아가는 틀에서 바라본다면 농사꾼이 가장 사랑스러운 자리라 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농사꾼은 높거나 거룩한 자리에 올라서려 하지 않으면서, 늘 나와 내 이웃을 먹여살리는 일꾼이거든요.

 글을 갈래로 나눌 때에도 이와 매한가지예요. 누구한테는 시가 가장 사랑스러울 수 있고, 누구한테는 산문이 가장 즐거울 수 있으며, 누구한테는 소설이 가장 기쁠 수 있어요. 희곡을 좋아하든 동화를 좋아하든, 모두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며,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이쯤에서 말사랑벗들이 하나 더 헤아려 주면 좋을 이야기를 해 보고 싶어요. 글쓰기를 시험으로 친다고 할 때에 100점을 맞아야 좋은 글이 아니에요. 0점을 맞는다고 엉터리 글이 아니에요. 우리가 쓴 글에는 점수를 붙일 수 없어요. 우리가 꾸리는 삶에는 점수를 매기지 못하거든요. 나 스스로 좋아하는 결을 찾고, 나부터 기뻐하는 삶을 보듬으면 넉넉합니다.

 글을 쓰는데 맞춤법을 잘 몰라서 받침이나 홀소리를 잘못 적었다고 부끄러워 하지 않아도 돼요. ‘찌개’로 써야 맞는지 ‘찌게’로 써야 맞는지, 또는 ‘빨래집게’하고 ‘빨래집개’하고 어느 쪽이 바른지를 몰라도 글쓰기를 하면서 걱정스러울 일이란 없어요. 맞춤법은 틀릴 수 있고, 띄어쓰기를 모를 수 있어요.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는 나중에 혼자서 새로 배우면 되고, 틀렸으면 바로잡으면 돼요.

 그런데 말사랑벗들이 쓰는 글에 알맹이가 없다면 나중에 어찌저찌 손을 쓰지 못합니다. 무언가 할 이야기가 없는 글이라면 값이나 보람이나 뜻이 없어요. 동무들도 서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할 말’이 없으면 서로 멀뚱멀뚱하거나 쭈뼛쭈뼛하겠지요. 속이야기나 참이야기가 될 알맹이가 있어야 합니다. 속마음이나 참마음을 나눌 고갱이가 있어야 해요. 내 동무랑 어버이랑 이웃이랑 오순도순 주고받을 깊은 사랑과 따순 믿음이 있어야 해요.

 모든 글에는 바로 이 사랑과 믿음이 깃들어야 글이라 이름을 붙일 만합니다. 사랑과 믿음이 깃들지 못하고 껍데기로만 시 모양을 갖추거나 소설 틀을 이루거나 산문 모습이라 할 때에는, 허울은 좋게 시요 소설이요 산문이요 하겠으나, 우리가 기쁘게 맞아들일 문학이라 하는 시나 소설이나 산문은 못 되어요.

 그러니까 서울대학교라든지 제주대학교라든지 대구대학교라든지 인천대학교 같은 곳에 들어가는 일은 크게 마음쓸 일이 아니에요. 어느 대학교를 바라보며 입시 공부를 하든지, 내가 가려는 대학교에서 ‘커다란 배움’을 맞아들여 아름다운 삶과 넋과 말로 학문꽃을 피우도록 마음쓸 일입니다. 조금 더 마음쓸 수 있다면, 굳이 대학교에 가지 않으면서 내 배움꽃을 피울 수 있어요. 텃밭을 일구거나 꽃밭을 돌보면서 배움꽃을 피웁니다. 도서관이나 헌책방을 다니며 책을 읽는 가운데 배움꽃을 이룹니다. 튀김닭이나 신문이나 우유를 나르면서 배움꽃을 얻습니다. 막일판이나 공장 일꾼으로 살아가면서 배움꽃을 깨달아요.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른 삶을 엿보는 가운데, 내가 쓰거나 읽는 글에 어떠한 빛줄기를 담아 어떠한 삶줄기를 이루면 좋을지를 몸으로 느끼지요.

 자, 그러면 문학 갈래에 따라 쓰는 글이 무엇인지 살짝 살펴봅니다.

 

 - 산문 쓰기
 모든 글은 산문에서 비롯합니다. 한자말로 ‘산문’이고 우리말로 ‘줄글’인데, 낱말책에서 풀이하는 ‘줄글’은 먼 옛날 한문으로만 글을 쓰던 이야기에 머무릅니다. 한문으로 글을 쓸 때에도 우리말 ‘줄글’로 가리키겠지만, 우리가 한문이 아닌 우리말을 한글이라는 그릇에 담는 글을 쓸 때에도 ‘줄글’이라 할 만해요. 따로 어떤 틀에 매이지 않으면서 줄줄이 쓰는 줄글이에요. 줄을 따라 한 줄 두 줄 써 내려 가는 글이 줄글이고요.
 따로 어떠한 틀에 매이지 않고 쓰는 글이 산문, 곧 줄글인데, 이렇게 쓴 줄글은 시가 되기도 하고 소설이나 동화가 되기도 합니다. 내 마음이 흐르는 결을 곱게 살피며 꾸밈없이 적바림할 때에는 산문이 돼요.


 - 시 쓰기
 모든 글은 시에서 태어납니다. 시는 한자로 ‘詩’라 적는데, 한자로 적지 않아도 시는 시예요. 어쩌면 앞으로 말사랑벗님 가운데 ‘시’를 갈음할 만한 새 우리말 하나 빚을 수 있겠지요. 이 시란, 내가 글을 쓴다고 할 때에 가슴으로 담아 나누는 말밥입니다. 고픈 마음을 살찌우는 밥 같은 말, 이리하여 말밥이라 할 만한 글이 시예요.
 시를 쓸 때에는 가락을 살린다거나 글자수를 맞춘다거나 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가락이나 글자수를 살피기 앞서, 내 마음이 흐르는 결을 제대로 읽어야 합니다. 산문은 내 마음이 흐르는 결을 꾸밈없이 적바림하면서 태어나고, 시는 내 마음이 흐르는 결을 꾸밈없이 적바림하면서 태어나기도 하지만, 더도 덜도 아닌 밥그릇 하나에 알뜰히 밥을 담듯, 잘 짜 놓은 틀에 걸맞게 담아내어 태어나기도 합니다.


 - 소설·동화 쓰기
 소설하고 동화는 따로 갈래를 나눌 수 있으나, 둘을 하나로 여길 수 있습니다. 어른이 읽는다고 꼭 소설이거나, 어린이가 읽는다고 반드시 동화는 아니에요. 소설이나 동화는 산문이나 시에서 ‘어느 만큼 길이가 되는 줄거리’라는 살을 입히면서 이러한 ‘줄거리 살결’에 여러 가지 옷을 입힌다든지, ‘옷을 입힌 줄거리 살결이 여기저기 마실을 다니듯 돌아보는 삶’을 골고루 담아내는 이야기잔치입니다.
 산문은 꾸밈없이 적바림하는 티없는 글이고, 시는 꾸밈없이 적바림하려는 티없는 넋을 밥그릇 하나에 담은 글이며, 소설이나 동화는 꾸밈없이 적바림하려는 티없는 넋을 날마다 고마이 즐길 밥상을 꾸준하게 차리듯이 두고두고 즐기면서 언제나 새로운 기쁨을 베푸는 이야기잔치 같은 글입니다.


 - 희곡·대본 쓰기
 희곡이나 대본을 처음부터 따로 쓸 수 있기도 할 테지만, 희곡이나 대본을 쓰자면 먼저 산문이랑 시랑 소설이나 동화랑 밑바탕을 다스려야 한다고 느껴요. 사람에 따라 한달음에 모든 일을 이루기도 하지만, 웬만한 여느 사람은 차근차근 발걸음을 떼면서 나아가잖아요.
 희곡이나 대본은 무대에 올려 ‘나 스스로 하든 다른 사람한테 맡기든 서로 다 함께 하든’ 몸짓과 목소리와 노래와 춤 들을 알맞게 섞으며 선보일 수 있도록 하나하나 풀이말을 달아 놓은 시나 산문이나 소설이나 동화라고 할 만합니다. 이 대목에서는 이 몫을 맡은 사람이 이런 목소리 높낮이와 어떠한 빠르기로 말을 한다고 풀이말을 달고, 저 대목에서는 무대 한쪽에 무엇을 꾸며 놓는다든지 하는 풀이말을 달아야 해요. 산문·시·소설·동화를 쓰거나 읽을 때에는 말없이 머리로 ‘이들 글로 이루는 이야기에 나타나는 모습’을 가만히 생각합니다. 희곡과 대본은 머리로 가만히 여러 모습을 생각하지 않고, 누구나 두 눈으로 바라보거 두 귀로 들으며 가슴으로 뭉클하게 느낄 수 있게끔 풀이말을 꼼꼼하며 알맞춤하게 달아야 합니다.


 

 앞서, 글쓰기는 삶쓰기라고 했어요. 삶쓰기로 나아가는 글쓰기는 말로 이룬 열매를 맺고, 글로 빚은 꽃을 피웁니다. 글을 잘 써도 좋고 못 써도 좋아요. 아니, 잘 쓴 글이란 없고 못 쓴 글 또한 없어요. 나 스스로 내 삶이랑 넋을 고운 말결과 글투에 담아 소록소록 새로 태어나도록 한다면 즐겁습니다. 말사랑벗님들 누구나 예쁘며 착한 말열매를 신나게 빚으면 좋겠어요. 말사랑벗님들 모두모두 참다우며 해맑은 글꽃을 꾸준하게 이루면 기쁘겠어요.
 

(최종규 . 2011 -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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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글쓰기 삶쓰기 ㉢ 삶짓기랑 삶쓰기


 말사랑벗님들한테만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저한테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이 글을 씁니다. 이렇게 한 글자 두 글자 적바림하는 글은 글쓰기로 이루는 열매일 텐데, 저는 글쓰기란 삶쓰기라고 생각합니다. 내 삶을 쓰는 일이 곧 글쓰기라고 여겨요.

 두 아이와 짝꿍 한 사람을 건사하는 아저씨가 하는 일은 글쓰기랑 사진찍기라고 했어요. 저는 글쓰기를 할 때에 내 삶을 쓰고, 사진찍기를 할 때에 내 삶을 찍습니다. 그래서, ‘글쓰기 = 삶쓰기’가 되고, ‘사진찍기 = 삶찍기’가 돼요. 말끝을 살며시 바꾸어 보면, ‘글읽기 = 삶읽기’가 되며, ‘사진읽기 = 삶읽기’가 됩니다. 사진은 담는다고 하니까, ‘사진담기 = 삶담기’가 되기도 해요. 글짓기를 헤아린다면 ‘글짓기 = 삶짓기’가 될 테지요.

 삶은 억지로 지을 수 없어요. 그러나 삶은 아름다이 지을 수 있어요. 농사를 지을 때에 조금 더 많이 거두거나 일손을 덜 생각으로 풀약과 항생제를 칠 수 있습니다. 요즈막에는 농사짓기 아닌 농약짓기인 곳이 많아요. 이때에는 억지스러운 짓기가 되니 ‘옛날 글짓기’마냥 하나도 안 아름다운 모습이 되겠지요. 사람들이 뭍고기를 즐겨먹으면서 집짐승을 커다란 우리에 잔뜩 집어넣은 채 항생제랑 ‘짐승 주검에서 거둔 내장’을 섞은 사료를 주며 싼값으로 더 빨리 살을 찌우려 하다 보니 조류독감이니 구제역이니 하는 일이 생깁니다. 모두 억지스레 돈만 빨리 많이 자꾸 벌려 하면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입니다. 글 한 줄을 쓸 때에도 이 글 한 줄로 돈을 벌거나 이름을 드날리거나 동무들한테 사랑받으려 생각한다면, 몹시 부질없습니다. 글이 글다울 수 없어요. 글이 글다우려면 내 글에는 내 삶을 담으면서 내 동무랑 이웃하고 사랑스럽고 살갑게 어깨동무하는 매무새가 되어야 해요. 글재주로 억지로 지을 수 없는 글이고, 글솜씨를 어설피 뽐낼 수 없는 글이에요.

 말사랑벗이랑 저랑 서로서로 아름다운 벗이나 이웃이나 살붙이라고 여긴다면, 제가 농사꾼이고 말사랑벗이 제 아이라 할 때에, 저는 우리 살붙이가 먹을 곡식을 일구면서 풀약이나 항생제를 쓸 수 없어요. 내 아이가 먹을 곡식뿐 아니라 내 이웃과 동무가 먹을 곡식에도 풀약이나 항생제는 못 씁니다. 어떻게 쓰겠어요. 참다운 농사짓기가 되도록 마음을 쏟아야지요. 다 함께 어여쁠 삶짓기를 하고 싶은 마음결로 농사짓기를 하고, 이러한 마음결 고스란히 글짓기를 하고픕니다. 이 글짓기를 이어 사랑짓기나 마음짓기나 생각짓기로 가지를 뻗고파요.

 공을 잘 차서 영국이나 스페인이나 독일에까지 날아가 돈도 잘 벌고 이름도 크게 얻는 선수들 이야기는 참 멋있구나 싶습니다. 말사랑벗 가운데에는 공차기를 좋아해서 이런 이야기를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신나게 나누기도 할 텐데, 이런 이야기를 글로 담아도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 못지않게 아무개만큼 돈을 못 벌고 이름 하나 알려지지 않았으나, 바로 내 이야기를 조곤조곤 글로 담아 보아도 재미있어요. 동네에서 공차기 한 이야기를 쓰면 재미있고, 동네에서 공차기를 하며 헉헉거리다가 0:10으로 졌다는 얘기를 쓰면 즐겁습니다. 내가 아는 내 삶을 이야기 한 자락으로 갈무리해서 글로 써 봅니다. 내가 아는 형이나 오빠나 동생 이야기를 갈무리하며 글로 담아 봅니다. 우리 어머니하고 아버지 이야기를, 우리 할머니하고 할아버지 이야기를 갈무리하면서 글로 엮어 보아도 좋아요. 나를 비롯하여 내 둘레 살가운 사람들을 하나하나 곱씹으면서 모두들 어떤 삶을 어떤 매무새와 꿈과 손길로 일구는가를 곰곰이 들여다보며 글로 담아 보셔요. 좋은 책이란 내 책이고, 내 책이란 내 삶이에요. 내 삶이 내 책이 되고, 내 책이 좋은 책이 돼요.

 자전거를 타고 온누리를 한 바퀴 돌거나 아르헨티나 끝자락부터 캐나다 끝자락까지 달린다면 매우 멋지다 할 만하겠지요. 체 게바라라는 사람은 오토바이를 타고 중남미를 달렸다고 했어요. 말사랑벗 가운데에는 일찍부터 오토바이 타기를 좋아할 동무가 있을는지 모르는데, 오토바이를 타고 이웃나라 일본을 훗가이도부터 류큐 섬까지 달려 볼 수 있습니다. 인천 앞바다부터 간성 앞바다까지 바닷가를 따라 죽 달려 볼 수 있어요. 자전거를 타고 강화섬부터 구비구비 돌아 제주섬까지 달릴 수 있습니다.

 자전거 유럽마실도 즐거울 테지만, 자전거 국내마실도 즐거워요. 시골길을 천천히 달리는 자전거마실도 즐겁고, 골목길을 느긋이 다니는 자전거마실도 즐겁답니다. 저는 충청북도 충주시 끝자락 멧골마을에서 살아가면서 서울로 책 사러 다닐 때에 자전거에 수레를 달아 끌고 다니곤 했어요. 요즈음처럼 짝꿍이랑 아이가 있던 때는 아니고, 혼자서 살 때 일이에요. 150킬로미터 길을 한 주에 한 차례씩 한 해 동안 자전거를 타고 오가면서 책을 사서 읽었답니다. 이렇게 다니는 동안 길에서 쉬엄쉬엄 다리를 풀어 줄 때에 수첩에 느낌을 몇 글자씩 끄적였고, 이렇게 끄적인 이야기를 그러모아 《자전거와 함께 살기》라는 책을 내놓기도 했어요. 남다르거나 대단한 이야기는 하나도 아니랍니다. 그저, 주마다 늘 오가는 자전거길에서 날마다 다르게 느낀 이야기를 그때그때 적바림하면서 저절로 책 하나가 태어났어요.

 말사랑벗이라면, 날마다 학교를 오가면서 날마다 마주하는 사람과 날씨와 길 들을 이야기 하나로 조금씩 꾸리면서, 이 이야기가 한 해치이든 두 해치이든 세 해치나 네 해치이든 모일 때에 시나브로 책 하나가 될 수 있어요. 마땅한 노릇인데, 이때에 억지로 꾸며서 쓰는 글이라면 책이 되지 않아요. 수수하거나 투박한 내 삶을 그대로 글 하나로 담을 때에 책이 된답니다.

 내가 좋다고 느끼면 내 삶은 좋은 삶이에요. 내가 나쁘다고 여기면 내 삶은 나쁜 삶이에요. 내가 즐겁다고 느끼면 내 삶은 즐거운 삶이고, 내가 슬프다고 느끼면 내 삶은 슬픈 삶이에요. 가난하다고 나쁜 삶이 아니고, 엄마 아빠한테 돈이 많다고 좋은 삶이 아니에요. 걸어서 학교를 다닌다고 슬픈 삶일 수 없고, 자가용으로 느긋하게 학교를 오갈 수 있어 기쁜 삶이 되지 않아요. 시험을 치러 1등이건 10등이건 꼴등이건 나 스스로 내 학교살이를 좋아하면 넉넉합니다. 키가 크건 작건, 몸매가 이러하건 저러하건, 나는 내 마음과 꿈을 아름다이 보듬으면 사랑스럽습니다. 착한 마음을 살가이 담은 편지가 애틋합니다. 글씨만 또박또박 예쁘장하게 썼대서 살갑게 주고받을 편지가 되지 않아요. 똑똑하다지만 마음이 차갑다면 사이좋은 동무가 되기 어려워요. 좀 어리숙해도 마음이 따스하다면 어깨동무하는 동무가 돼요. 글이란 내 사랑을 착하고 따숩게 담는 즐거운 삶 한 자락입니다.
 
(최종규 . 2011 -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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