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글쓰기 삶쓰기 ㉡ 글짓기랑 글쓰기


 《몽실 언니》라는 동화책 읽은 동무 있나요? 진작에 읽었다구요? 읽으라는 소리는 자주 듣는데 아직 못 읽었다구요?

 저는 《몽실 언니》라는 동화책을 1998년 1월에 처음 읽었어요. 1984년에 나온 《몽실 언니》인데, 아저씨는 자그마치 스물네 살 나이에 이 동화책을 비로소 알아보았답니다. 아저씨는 강원도 양구 산골짜기에서 군대살이 스물여섯 달을 보냈어요. 1995년 11월에 눈바람 맞으며 군대에 가서, 1997년 12월에 똑같이 눈바람 맞으며 군대를 떠났어요. 그런데 아저씨가 군대를 떠나 사회로 돌아온 1998년 1월은 새로운 대통령이 뽑힌 때이기도 하지만, 한창 국제통화기금이다 뭐다 하면서 편의점 알바이니 술집 알바이니 하는 일자리마저 없던 때예요. 군대에서 늘 하던 삽질 솜씨를 살려 막일꾼으로 일감을 찾아보고자 했지만, 이마저도 없었어요. 스물여섯 달 동안 산골짜기 깊은 데에서 외롭게 지내다가 사회로 돌아온 만큼 몸과 마음을 쉬고팠는데, 나라가 어수선하다 보니 여러모로 눈치밥을 먹어야 했어요. 군대에서 막 나온 몸으로 주머니에 돈이 있나, 집에서 돈 몇 푼 얻을 수 있나, 하는 수 없이 헌책방을 찾아가 여러 시간 조용히 책을 읽는데, 이때에 《몽실 언니》라는 동화책이 제 눈에 번쩍 뜨였습니다.

 우리 말사랑벗님들이라든지 말사랑벗님들 언니나 누나나 동생들은 《몽실 언니》를 초등학생 무렵에 처음 만나겠지요. 조금 늦으면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나이에 만날 테고요. 그런데 저는 스물네 살이 되어서야 만났어요. 이무렵 《몽실 언니》를 처음 만나며 다른 어린이책을 하나하나 찾아 읽었어요. 그리고 더없이 슬퍼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 나는 내가 열두어 살 나이에 이 책을 만날 수 없었을까? 왜 나한테는 내 나이에 걸맞을 어린이책 하나 쥐어 주는 어른이 없었나?’ 생각했어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어린 날부터 학교에서 끝없는 베껴쓰기 숙제와 글짓기 숙제에 시달렸습니다. 그런데 《몽실 언니》를 읽고 나서는 속에서 자꾸자꾸 무언가 터져나오더군요. 책을 다 읽고 맨 끝자리 빈 종이에 ‘책을 읽으며 북받친 느낌’을 깨알같은 글씨로 촘촘히 적바림했어요.

 누가 읽으라 건넨 책이 아니고, 누가 쓰라 한 글이 아니었습니다. 그예 눈길이 꽂혀 읽은 책이요, 그저 마음으로 우러나며 쓴 글이었어요. 바야흐로 ‘글쓰기’를 몸으로 깨달은 셈입니다.

 이제 거의 모든 학교에서는 ‘글짓기’라는 이름을 안 쓰고 ‘글쓰기’라는 이름을 써요. ‘글쓰기’라는 낱말은 ‘글짓기’라는 낱말과 함께 낱말책에 곱게 실려요. ‘글쓰기’라는 낱말이 낱말책에 실린 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동네 조그마한 학원조차 “글쓰기 학원”이라 하지 “글짓기 학원”이라 하지 않아요. 글을 짓는 일이 얄궂거나 나쁜 일은 아니지만, 이제는 어느 누구도 섣불리 ‘글짓기’라는 낱말은 안 쓰려 해요.

 왜냐하면, 아저씨가 초·중·고등학교를 거치며 지겹도록 해야 했던 억지스러운 ‘글짓기’ 숙제하고 맞물리기 때문이랍니다. 글을 짓는 일은 “억지스레 머리로 쥐어짜듯 뱉어내는 글”이 되기에, 이 글을 쓰는 어린이나 푸름이나 어른이나, 제 꿈과 마음과 넋을 오롯이 담지 못한다고 여기기 때문이에요.

 ‘글쓰기’는, 글을 쓰려는 사람 누구나 스스로 살아가는 넋과 꿈과 마음을 차근차근 적바림하는 일이라고 해요. 이 낱말은 지난 2003년에 숨을 거둔 이오덕 선생님이 1960년대에 처음으로 쓰면서 퍼졌어요. 이오덕 선생님도 1950년대에는 ‘글짓기’라는 낱말을 똑같이 쓰셨지만, 학교에서 벌어지는 억지스럽고 모질며 틀에 박힌 수업으로 짓누르는 ‘글짓기’는 아이들 마음밭을 살찌우지 못한다고 여기셨어요. 아이들 마음밭을 살찌우면서, 아이들이 스스로 한결 씩씩하고 싱그러운 얼을 키우는 슬기를 빛내도록 돕고 싶어, 낱말부터 ‘글쓰기’라는 이름을 새로 일구어서 쓰셨습니다. 옳고 바른 마음가짐으로 착하고 참다우며 고운 이야기를 나누려는 글쓰기 나누기를 마흔 해 남짓 한 끝에 우리들은 오늘날 즐겁고 홀가분하게 ‘글쓰기’를 할 수 있답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곰곰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해요. 이름은 ‘글쓰기’로 고쳤지만, 예전과 똑같이 억지스러우면서 모질고 틀에 박힌 채 벌어지는 글쓰기 수업이나 교육이라 할 때에는 ‘옛날 글짓기’하고 마찬가지예요. 이름은 허울이 아니거든요. 이름이 제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알맹이가 엇나가거나 비뚤어지면 도루묵이 되고 말아요. 이름부터 제대로 쓰도록 힘써야 하는 가운데, 속살 또한 제대로 여물도록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글쓰기’와 함께 ‘글짓기’ 마음가짐을 새삼스레 헤아릴 줄 알아야 하지요. 글쓰기는 이오덕 선생님이 얘기하고 나누며 뿌리내리도록 했듯, 꾸밈없는 삶이 꾸밈없는 넋이 되어 꾸밈없는 말글로 태어나도록 하는 일입니다. 글짓기는 글을 짓는 일이라고 했지요? 글을 짓는 일이란 무엇일까요? ‘짓는’ 일이란 또 어떤 일일까요?

 글쓰기와 함께 글짓기도 바른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고 느껴요. 우리들은 ‘마음쓰기’를 하듯이 ‘글쓰기’를 하고, ‘농사짓기’를 하듯 ‘글짓기’를 할 때에 더없이 알차며 아름다울 수 있지 않겠느냐 생각해요.

 한자말로는 ‘배려(配慮)’라고 하는데, 우리말로는 ‘마음쓰기’예요. 말사랑벗님, 낱말책에서 ‘배려’라는 한자말을 찾아보셨어요? 한번 찾아보셔요. 말풀이를 보면 “마음을 씀”이라고 적혔답니다. 남다른 뜻이나 느낌을 담은 낱말 ‘배려’가 아니에요. 누구나 쉽게 아는 말 ‘마음쓰기’를 한자로 옮겨적을 때에 바로 ‘배려’랍니다. 꾸밈없이 마음을 쏟아 이웃을 아끼거나 사랑한다 할 때에 ‘마음쓰기’예요. 이 매무새 그대로 글을 쓴다면 ‘글쓰기’예요.

 농사를 짓는 마음가짐을 곰곰이 헤아려 보셔요. 우리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끼는 넋 그대로 몸소 땅을 일구고 갈며 씨를 뿌려 건사하고 갈무리합니다. 이렇게 갈무리한 곡식을 찧고 일고 씻고 냄비에 안쳐서 구수한 밥을 짓습니다. 농사를 지어 밥을 짓고 글을 짓습니다. 농사짓기란 밥짓기로 이어지고, 밥짓기는 다시 글짓기로 이어가요. 저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글짓기’ 다음으로 ‘사랑짓기’로 이어 보곤 합니다. 다른 자리라면 ‘노래짓기’나 ‘옷짓기’, 또는 ‘책짓기’나 ‘마을짓기’로 이을 수 있어요.

 말을 살리는 길이란 넋을 살리는 길이고, 넋을 살리는 길이란 우리 삶을 살리는 길입니다.
 

(최종규 . 2011 -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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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글쓰기 삶쓰기 ㉠ 말을 가꾸고 글을 일구기


 말사랑벗님은 글쓰기 숙제를 얼마나 하는가요. 책을 읽고 나서 느낌글을 쓰라는 숙제나, 일기를 쓰라는 숙제나, 어디 현장학습 다녀와서 보고서 쓰라는 숙제 들을 하는지요?

 저는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를 다니는 동안 글쓰기 아닌 글짓기 숙제를 몹시 많이 하며 살았어요. 국민학교라는 이름이 붙은 초등학교 여섯 해를 다닐 때에는 무엇보다 일기쓰기가 가장 벅찼습니다. 그때 일기는 한 주에 세 번 넘게 써야 매를 안 맞았어요. 한 주에 사흘치를 썼더라도 일기를 쓴 길이가 일기장 한쪽 2/3를 넘지 않으면 안 쓴 셈치고 똑같이 매를 맞았고요. 한 주에 너덧새는 일기를 쓰라는 소리를 들었고, 한 주에 예닐곱 날치 일기를 쓴 아이들은 선생님이 따숩게 머리를 쓰다듬으며 저 같은 동무들한테서 부러움을 샀어요.

 다달이 느낌글 쓰기가 아닌 독후감 숙제를 해야 했고, 두어 달에 한 차례씩 반공 글짓기를 하면서 웅변처럼 발표를 해야 했습니다. 한 달 걸러 과학 글짓기를 하고, 군인 아저씨께 올리는 위문편지를 쓰는 한편, 부모님께 띄우는 효도편지를 써야 했어요. 게다가 한 해에 몇 차례씩 동시쓰기까지 했어요. 방학을 맞이하면 방학숙제로 여행글 쓰기까지 해야 했습니다. 제 둘레에는 가난한 동무가 많아 여름이고 겨울이고 방학이라 해 보았자 어디 나들이 다니지 못하는 아이가 많았기에, 다른 글보다 여행글 쓰기를 아주 힘들어 했습니다.

 한편, 날마다 받아쓰기를 하고, 교과서 베껴쓰기 숙제를 했어요. 히유, 이제 와 돌아보면 그때 학교를 어떻게 꾹 참고 다녔나 모를 일이에요. 숙제만 해도 한 가득인데요. 중학교에 들어서자 ‘깜지’라는 이름으로 손목이 달아날 만큼 힘겨운 베껴쓰기 숙제를 날마다 수없이 해야 했습니다. 초등학생 때에 교사들이 베푸는 매질은 가벼운 어루만짐이라 느낄 만큼, 중학생 때부터는 큼직한 나무몽둥이에 골프채에 밀걸레 자루에 곡괭이 자루에 야구방망이에 …… 선생님들은 매타작을 하러 학교에 나오는가 싶도록 ‘베껴쓰기 숙제 안 한 아이를 두들겨패며’ 하루를 보냈어요.

 열두 해에 걸쳐 학교를 다니는 동안 이처럼 매질하고 글짓기가 어우러지다 보니, 제 동무들 가운데 ‘글 좀 쓰라’는 이야기를 달가이 맞아들이는 녀석은 거의 없어요. 다들 몸서리를 쳐요. 글을 어떻게 쓰느냐는 둥, 글을 왜 쓰느냐는 둥 이야기합니다. 말사랑벗님들이 다니는 학교에서는 어떠한가 궁금하네요.

 가만히 돌아보면, 글을 써서 내 마음을 나타내는 일은 몹시 뜻이 있습니다. 쓸모가 있고 보람이 있어요. 그렇지만 글을 써서 내 마음을 이웃하고 나누도록 즐거이 이끄는 몫을 우리네 학교에서는 제대로 맡지 못했어요. 제가 학교를 다니던 때에는 한 반에 아이들 숫자가 지나치게 많기도 했고, 교사마다 주어진 행정업무 짐이 참 컸습니다. 그러나, 이와 맞물려 더 벅차며 무거운 짐이나 굴레는 대학입시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학교며 사회며 정치며 문화며 온통 ‘더 이름나고 훌륭하다는 대학교로 보내는 일’에 얽매였으니까요.

 저는 고등학생 때 릴케 시집이나 황순원 소설책을 선생님한테 빼앗기곤 했습니다. 학교에서는 교과서와 참고서 아닌 책을 가방에 넣고 다니면 모조리 ‘불온도서’로 여겼어요. 지난해였나, 우리나라 국방부에서 불온도서를 스물 몇 가지인가 꼽으며 이런 책을 군인한테 읽히지 못하도록 한 적 있는데, 이 불온도서 가운데에는 동화쓰는 권정생 할아버지가 쓴 《우리들의 하느님》 같은 책도 끼었어요. 그저 우리한테 ‘첫손 꼽는 대학교에 들어갈 생각만 하라’고 짓누르는 흐름이 아직까지 이어지는 모습이라 할까요. 초등학교부터 아이들을 짓누르고 길들이면서 홀가분하거나 너그러운 마음꽃이 피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다고 할까요. 아니, 초등학교에 앞서 어린이집이나 유치원부터 영어를 가르치고 갖가지 지식그림책과 과학동화를 읽히니까, 모두 똑같은 틀에 똑같은 생각에 똑같은 눈길로 살아가도록 옥죈다고 할까요.

 좋은 책 하나를 좋은 넋으로 읽으면 좋은 삶을 일구는 밑거름을 넉넉히 다스리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애 아빠인 저부터 학교를 다니는 말사랑벗까지, 누구나 좋은 책 하나로 좋은 넋을 보듬고 좋은 삶을 일구면서 하루하루 아름다이 여미면 즐겁습니다. 이처럼 좋은 삶이라 느끼며 하루하루 아름다이 여밀 때에, 이 같은 결과 무늬와 빛깔이 내 넋으로 곱게 아로새겨지고, 내 넋이 곱게 아로새겨질 때에 내 말 또한 곱게 아로새길 수 있습니다.

 글쓰기를 한다고 할 때에는, 머리로 이 생각 저 생각 쥐어짜서 글을 써서는 내가 읽어 보아도 따분하며 싱거운 글만 쏟아지지만, 나 스스로 내 삶을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가운데 꾸밈없이 한 줄 두 줄 적바림하노라면, 내가 내 글을 읽으면서 빙긋 웃거나 뚝뚝 눈물을 흘려요. 가슴으로 책을 읽듯이, 가슴으로 글을 씁니다. 가슴으로 책 줄거리를 받아들이듯이, 가슴으로 내 삶을 일구면서 이 이야기를 글로 담아요. 말을 가꾸는 일이란 삶을 가꾸는 일이고, 삶을 가꿀 때에 바야흐로 빛나는 말 하나 알뜰살뜰 얻어요. 글을 일구는 일이란 삶을 일구는 일이고, 삶을 일굴 때에 비로소 알찬 글 하나 기쁘게 얻습니다.
 

(최종규 . 2011 -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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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우리말 생각 ㉤ 새말


 《국어 실력이 밥 먹여 준다(문장편)》라는 책을 읽다가 “향기 나는 문장이니 하는 이야기까지 듣는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14쪽).”라는 글월을 보았습니다. 이 같은 글월이 잘못되었다거나 얄궂다거나 할 수 있는 한편, 이러한 글월은 오늘날 어디에서나 어렵잖이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글을 쓰고 싶으면 이와 같이 쓸 일이지만, 저보고 이 글을 다시 쓰라 한다면, “향긋한 글이니 하는 이야기까지 듣는다면 더없어 좋다.”처럼 쓰겠어요. 이 글월을 쓰신 분은 토박이말 ‘향긋하다’보다 한자말 ‘향기(香氣)’를 좋아하지만, 저는 ‘향기’라는 한자말보다 토박이말 ‘향긋하다’를 좋아해요. 그리고 ‘-일 것이다’ 같은 말투는 달가이 여기지 않아요. ‘것’이라는 말투는 아무 데나 쓰면 안 될 뿐더러, 이곳저곳에 함부로 쓸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덧붙여, ‘금상첨화(錦上添花)’ 같은 한자말을 꼭 써야 하는지 궁금해요. 바르고 알맞으면서 쉽게 글을 쓸 수 있잖아요. “비단에 꽃을 더한다”는 뜻이라는 ‘금상첨화’인데, 쉽게 말하자면 “더 좋다”는 이야기예요. “참 좋다”나 “한결 좋다”는 이야기이기도 해요.

 말사랑벗들은 이렇게 생각해 본 적 있나요. ‘금상첨화’라는 한자말은, 한자를 쓰며 살아가는 중국사람이 ‘새롭게 지은 낱말’이에요. 우리는 한글을 쓰며 살아가는 한국사람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이 땅에서 서로서로 살가이 나눌 만한 우리말을 새롭게 지을 만하지 않을까요?

 낱말책에 싣기는 어렵겠지만, ‘더좋다’ 같은 낱말을 지을 수 있어요. 새 낱말이 아니더라도 ‘더 좋다’ 같은 말마디를 써 볼 수 있어요. 학문하는 낱말로 관용구라고 하는데, ‘더 좋다’나 ‘한결 좋다’를 관용구로 삼아도 넉넉합니다. 또는 ‘비단에꽃’이라든지 ‘비단꽃’ 같은 낱말을 빚을 만해요.

 이렇게 보면, 이 글월은 “향긋한 글이니 하는 이야기까지 듣는다면 비단꽃이 아닐까.”처럼 새로 적어 볼 수 있습니다. “향긋한 글이니 하는 이야기까지 듣는다면 비단에 꽃을 얹는 셈이다.”처럼 새롭게 적을 수 있어요.

 학교를 다니는 말사랑벗이라면 “학교에서 입는 옷”인 ‘교복(校服)’을 입기도 하겠지요. 이 낱말을 그대로 써도 나쁘지 않으나 “학교에서 입는 옷”이라는 뜻 그대로 ‘학교옷’이라는 새 낱말을 빚어 써도 괜찮아요. 학교에서 부르는 노래는 ‘교가(校歌)’ 아닌 ‘학교노래’가 되고, 나라에서 부르는 노래는 ‘국가(國歌)’ 아닌 ‘나라노래’가 돼요.

 저는 집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살아간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저는 제가 하는 일을 가리켜 ‘아이키우기’라고 이야기해요. 이 낱말도 낱말책에 없을 뿐더러 ‘육아(育兒)’라는 낱말만 실리는데, 낱말책에 실리든 안 실리든 즐거이 쓸 만하다고 느낄 뿐더러, ‘아이키우기’라는 말을 쓰는 분이 나날이 부쩍 늘어나요.

 지난날에는 ‘독서(讀書)’라고만 얘기했으나 오늘날에는 ‘책읽기’라고도 함께 얘기해요. 어쩌면, 이제는 ‘독서’보다 ‘책읽기’라는 낱말을 훨씬 자주 많이 이야기할 텐데, 아직까지 이 낱말은 낱말책에 안 실려요. 낱말책에 안 실린 낱말은 우리나라 맞춤법으로는 띄어서 적도록 하지만, 사람들이 새로 빚는 낱말로 여기며 즐겁게 쓰면 좋아요. ‘책읽기’와 맞물려 ‘삶읽기’나 ‘마음읽기’나 ‘글읽기’나 ‘시읽기’나 ‘영화읽기’나 ‘정치읽기’나 ‘사회읽기’ 같은 새말을 마음껏 빚어도 되고요. ‘사랑읽기’라든지 ‘믿음읽기’처럼 새말을 빚어도 됩니다.

 새말이란 하늘에서 똑 하고 떨어지는 말이 아니라, 우리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며 저절로 일구는 낱말이에요. 내 삶을 북돋우며 알맞게 빚는 낱말이 새말이고, 내 넋을 곱게 여미면서 슬기롭게 짓는 낱말이 새말이에요. 이리하여, ‘꿈날개’나 ‘꿈나래’도 새말이고, 아저씨가 말사랑벗을 일컫는 ‘푸름이’도 새말이랍니다. 밤에 올려다보는 하늘을 놓고 ‘밤하늘’이라 일컬으면, 이때에도 새말이에요. 동무들이랑 걷는 길이 좁아 ‘좁은길’이라 해 보아도 새말이고, 우람하게 자란 나무를 바라보며 ‘큰나무’라 가리킬 때에도 새말이에요. ‘글쓰기’도 새로 태어난 말이고, ‘그림그리기’나 ‘노래부르기’나 ‘사진찍기’ 또한 새말이랍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지을 수 없는 말이니까요, 새롭게 빚은 낱말을 듣는 이웃과 벗을 헤아리면서 아기자기하면서 사랑스러운 마음을 담아 하나둘 곱씹어 보셔요.

 ‘새말’이 있으니 ‘새글’이 있고, 사람은 새롭게 태어난대서 ‘새사람’이며, 새로 사귀는 벗은 ‘새벗’이요, 새로 한 밥은 ‘새밥’이에요. 새로 내놓아서 ‘새책’이고, 새롭기에 ‘새뜻’인 가운데, 새롭게 맞아들여 ‘새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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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와 통하는 우리말>에 실을 네 번째 글. 

가. 우리말 생각 ㉣ 우리 겨레 말글


 아저씨는 네 살짜리 아이와 막 태어날 아이를 돌보는 어버이입니다. 둘레 분들은 저처럼 ‘어버이’라는 낱말을 쓰지 않습니다. 다들 ‘부모(父母)’라는 낱말만 쓰셔요. 저도 때에 따라서는 ‘부모’라는 낱말을 쓰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를 아울러 가리키는 우리말”인 ‘어버이’라는 낱말을 한결 좋아합니다. 저는 제가 좋아하는 낱말을 즐겨써요.

 그러고 보니, 저는 ‘즐겨쓰다’라는 낱말을 붙여서 씁니다. 말사랑벗들은 알까 모르겠는데, 동무들이 인터넷을 켤 때면 차림판 한쪽에 ‘즐겨찾기’라는 자리가 있어요. 인터넷이 처음 나오던 때에는 영어로 ‘favorite’이라고 적혔는데, 나중에 이처럼 한글이자 우리말 이름 ‘즐겨찾기’가 붙었어요. 누가 이 이름을 지었는지 모르지만 참 잘 지었다고 느낍니다. 이 이름은 처음에는 낱말책에 안 실렸지만, 이제는 떳떳하고 당차게 낱말책 올림말이 되었어요.

 인터넷을 켤 때면 늘 이 낱말 ‘즐겨찾기’를 생각합니다. “즐겨서 찾아가는 곳을 한 데에 묶었”을 때에 ‘즐겨찾기’라 하듯이, ‘즐겨-’라는 앞마디를 발판 삼아서 ‘즐겨먹다’나 ‘즐겨쓰다’나 ‘즐겨읽다’나 ‘즐겨보다’ 같은 새 우리말을 지을 수 있어요. ‘애용(愛用)하다’라 하기보다는 ‘즐겨쓰다’라 하면 좋고, ‘애독(愛讀)하다’라 할 때보다는 ‘즐겨읽다’라 하면 나으며, ‘애청(愛聽)하다’라 하지 말고 ‘즐겨보다’라 하면 훨씬 즐겁습니다.

 아저씨가 이 글을 쓰는 내내 네 살짜리 아이는 아빠 무릎에 앉거나 등에 업히거나 옆에 나란히 앉아 책을 펼쳐 놓고 아빠가 함께 읽어 주기를 바랍니다. 아빠 된 몸으로서 글만 쓸 수 없으니, 글 쓰던 손을 멈추어 아이와 함께 그림책을 넘깁니다. 가위 바위 보 하는 그림이 나오면 “감자에 싹이 나서 잎이 나서 가위 바위 보” 노래를 불러 주고, 공 차는 모습이 나오면, “공을 차네.” “공을 잡네.” 같은 말을 들려줍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언니가 댕기를 예쁘장하게 맸으면 “댕기를 맸네.” 말하고, 아이는 곧바로 “댕기 맸네.” 하며 따라합니다.

 말사랑벗들은 ‘댕기’라는 낱말을 들어 본 적이 있나 모르겠군요. 으레 ‘리본(ribbon)’이라는 소리만 듣지 않았나 싶어요. 얼마 앞서는, 옆지기하고 이야기를 하면서 아이한테 ‘세모뿔’이라고 가르쳐야 하느냐 ‘삼각뿔’이라 가르쳐야 하느냐를 놓고 머리를 갸웃갸웃했습니다. 우리말로 ‘세모’랑 ‘네모’를 가르치고 싶으나, 아이가 학교에 든다든지 여러 가지 책(수학책)을 익힌다든지 할 때에는 어김없이 ‘세모’나 ‘네모’라는 낱말은 없고 ‘삼각(三角)’과 ‘사각(四角)’이라는 낱말만 있기 때문입니다. 학교와 교과서와 사회를 헤아린다면 우리 아이 또한 ‘삼각’이랑 ‘사각’이라는 낱말로 배워야 할 테지요. 게다가 ‘삼각팬티’라고만 하지 ‘세모속옷’이라 말하는 사람은 없어요. ‘삼각관계’라 일컫지 ‘세모사이’라 일컫는 사람 또한 없고요.

 길에서도 비슷합니다. 우리 식구는 ‘세거리’와 ‘네거리’와 ‘건널목’과 ‘거님길’ 같은 낱말을 쓰지만, 다른 분들은 ‘삼(三)거리’와 ‘사(四)거리’와 ‘횡단보도(橫斷步道)’와 ‘인도(人道)’라는 낱말을 쓰셔요.

 《건방진 우리말 달인(기초편)》이라는 책을 읽다 보면 “경기 지방 사투리거든(19쪽).”이라는 대목이 나와요. 꽤나 많은 분들은 이처럼 엉터리 말을 아무렇지 않게 쓰는데, 말하는 사람이나 책을 내놓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조금도 깨닫지 못해요. 이 말마디가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몰라요. 그래서, 어떤 이는 “고통과도 같은 괴로움”이라 말하고, 어떤 분은 “나와 다른 타인”이라 말하기도 하며, “축제가 열리고 개최된다”라 말하는 사람마저 있습니다. “살다가 거주했습니다”라 말하는 사람이라든지 “쉽게 평이하게 쓴다”고 말한다든지 “길을 걸으며 하이킹을 한다”고 말하거나 “배려의 마음”을 이야기하기도 해요. 말사랑벗들은 이 말이 엉터리인지 아닌지 알겠어요?

 차근차근 짚어 볼게요. 먼저, ‘사투리’는 “어느 한 지방에서 쓰는 말”을 가리킵니다. ‘지방말’이나 ‘지역말’이 ‘사투리’예요. 어떤가요. 이렇게 풀이해 보면 알 만한가요. “경기 지방 사투리”라 적은 글은 “경기 지방 지방말”이라 적은 꼴이에요. “경기 사투리”라 적거나 “경기 지방 말”이라 적거나 “경기도 고장말”이라 적어야 올발라요. ‘고통(苦痛)’은 ‘괴로움’을 가리키는 한자말이에요. 그러니까 “고통과도 같은 괴로움”이란 얼마나 멋없는 말인가요. ‘타인(他人)’이라는 한자말은 ‘남’, 곧 ‘다른 사람’을 일컬어요. “나와 다른 타인”이란 말이 안 되는 말이랍니다. 자, 이제 다른 엉터리 말이 왜 엉터리 말인지는 말사랑벗들이 하나하나 살펴보겠어요?

 손수 낱말책을 뒤적이면서 말뜻을 찬찬히 헤아리다 보면, 어른이든 어린이이든 푸름이이든, 우리가 주고받거나 펼치는 말글 가운데 옳지 못하거나 어이없거나 알맞지 못한 대목이 지나치게 많은 줄 깨달으리라 생각해요. 우리들은 ‘한겨레’라고는 하지만 정작 한겨레답게 한겨레 말을 하지 못하는 판이에요. 겨레말을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고, 겨레글을 옳게 쓰지 못해요. 겨레말이 튼튼하게 자리잡지 못하니까 겨레얼을 한껏 북돋우지 못합니다. 겨레글을 알차게 가꾸지 못하니까 겨레넋을 싱그럽거나 슬기롭게 다스리지 못해요.

 동무들은 일본에서 살아가는 한겨레를 어느 만큼 아는가요. 일본에서 살아가는 한겨레인 유미리 님이 쓴 책을 읽어 보았나요. 나중에 한번 찾아서 읽어 보셔요. 사기사와 메구무라는 분도 있는데, 이분은 그만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요. 이름에서 엿볼 수 있듯 ‘일본 국적’인 분인데, 소설을 쓰던 어느 날, 자료를 찾느라 당신 할머니랑 할아버지 발자취를 알아보다가 당신 할머니가 북녘사람임을 알아채고는 깜짝 놀랐답니다. 당신한테 1/4만큼 한겨레 피가 흐르는 줄을 느즈막하게 알았는데, 당신 어버이는 이런 일을 몰랐거나 얘기를 안 했대요. 그러니 이름부터 아예 일본 이름인 ‘사기사와 메구무’였겠지요. 이분이 쓴 소설 가운데 《당신은 이 나라를 사랑하는가》라는 작품이 있어요.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며 눈물이 핑 돌고 가슴이 아팠어요. 유미리 님이 쓴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를 읽으면서도 가슴이 촉촉했습니다. 이분들, 이른바 ‘재일조선인’이라는 한겨레 문학을 읽다 보면, 남녘에서 살아가는 사람 가운데 ‘일본에 한국사람이 사는 줄 까맣게 모르는 사람’이 아주 많다는 대목이 얼핏설핏 나옵니다. 참 그럴까 하고 놀라다가는, 요즈음 사람들 말매무새와 마음밭을 들여다보면 참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우리는 남녘땅 사람들만 한겨레인 줄 알기 일쑤이고, 북녘땅이나 일본땅이나 중국땅이나 러시아땅에 똑같이 한겨레가 살아가는 줄 생각하지 못하거나 살피지 않기 일쑤예요. 더구나, 이 나라 바깥 한겨레만 제대로 모르는 우리들이 아니라, 이 나라 안쪽인 남녘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한겨레를 제대로 모르기 일쑤예요. 이제 ‘이웃사촌’이라는 낱말은 옛말입니다. ‘이웃’이라는 말조차 쓰기 멋쩍습니다. ‘동무’라든지 ‘벗’이라는 낱말을 쓰면서 사귈 만한 살가운 사람은 얼마나 되려나요. ‘어깨동무’나 ‘씨동무’라 할 만한 사랑스러운 사람은 얼마나 되나요. 남을 살피기 앞서 나 스스로 내 둘레 사람들한테 ‘이슬떨이’나 ‘길동무’나 ‘너나들이’ 노릇을 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말사랑벗님들을 비롯해, 저나 제 둘레 모든 사람들, 곧 우리 한겨레가 어깨동무하면서 즐거이 쓸 우리말이란, 남녘을 비롯해 북녘과 일본과 중국과 러시아에서 골고루 서로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넋으로 나눌 말입니다. 남녘땅 테두리에서 살핀다면, 대학교를 나온 사람들이라든지 기자나 법관이나 정치꾼이나 공무원이나 교사 같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저잣거리 장사꾼이랑 시골 농사꾼이랑 바닷가 고기잡이랑 공장 일꾼 누구나하고 사이좋게 나눌 말이 한겨레 우리말입니다.

 초등학교만 나온 사람이나 초등학교조차 못 나온 사람하고도 즐거이 나눌 수 있을 때에 아름다운 우리말입니다. 할머니 할아버지하고도 슬기롭게 나눌 만한 말이어야 좋은 우리말입니다. 어린 동생하고도 재미나게 나눌 만한 말일 때에 고운 우리말입니다. 우리들은 우리 겨레가 사이좋게 어깨동무할 ‘한겨레 말삶’을 헤아리면서 차근차근 일구어야 훌륭하면서 사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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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우리말 생각 ㉢ 말이랑 글이랑


 말사랑벗들은 말과 글이 어떻게 다른가 하고 이야기할 수 있나요. 말은 무엇이고 글은 무엇인지 가를 수 있는가요.

 ‘한글’은 글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우리말’은 말을 가리키는 이름이에요. ‘한글’과 맞물려 ‘한말’이라는 낱말도 써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곤 합니다. 말사랑벗들은 들어 본 적 있나요?

 말과 글이 다르니 마땅히 이처럼 이야기할 만해요. 이제 신문이든 잡지이든 방송이든 한자를 드러내어 쓰는 일이 없어요. 몇몇 신문사는 종이로 찍혀 나오는 신문에 적는 이름에만 한자를 쓸 뿐, 이제는 99.999% ‘한글만 쓰기’를 하는 이 나라 이 겨레예요. 2%가 아닌 0.001%가 모자라 ‘말과 글이 하나되지’는 못했으나, 2011년을 놓고 보면 거의 빈틈없이 말이랑 글이랑 하나로 모두었답니다.

 말이랑 글이랑 따로 놀던 지난날, 앞서 말했듯이 조선 나라일 때부터 일본한테 짓눌리던 때까지는, 사람들이 입으로 하던 말하고 종이에 적던 글하고 동떨어졌어요. 입으로 나누는 말은 지식인하고든 장사꾼하고든 농사꾼하고든 공장 일꾼하고든 생각을 주고받는 이야기였지만, 종이에 적는 글은 지식인끼리만 주고받는 이야기였어요. 이 때문에 ‘한자 섞어쓰기’가 끊임없이 말썽거리가 되지요. 왜냐하면, 한자를 잘 알거나 한자 지식이 많은 사람한테는 한자를 섞어서 쓰든 안 쓰든 아랑곳할 일이 아니에요. 그러나, 한자 지식이 많은데 이 한자 지식을 뽐낼 수 없으면 아깝다 생각하겠지요. 누구나 손쉽게 쓰는 말로 글을 적는다면, 지식 권위와 권력이 흔들릴 테고요. 이렇기 때문에 오늘날 대학생 논문이나 학문책은 죄다 어려운 한자말에다가 영어로 뒤범벅이랍니다. 지식 권력 울타리를 높여야 밥그릇을 지키거든요.

 말사랑벗들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말사랑벗들 할머니나 할아버지, 또는 어머니나 아버지, 또는 이모나 이모부, 또는 고모나 고모부가 ‘학교 문턱을 밟아 보지 못한 분’이라 할 때랑 ‘대학교에 대학원에 유학까지 거친 분’이라 할 때랑, 말사랑벗들이 쓰는 말이 어떠한가요. 일곱 살짜리 동생하고 이야기를 나눌 때, 나하고 나이가 같은 동무랑 이야기를 섞을 때, 나보다 두어 살쯤 위인 언니 오빠 형 누나랑 이야기를 즐길 때에는 어떠한 말을 쓰나요.

 저는 “언어구사능력”이라든지 “많은 버림이 필요하다”라든지 “악취는 가히 살인적”이라든지 “병역의 의무를 시작했다”라든지 “어떤 식으로 쓸 것인가 하는 것”이라든지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다”라든지 “세세한 관찰이 이루어져야”라든지 “동네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시각적 파노라마로 존재한다”라든지 “차 만들기 작업에 들어갔다”라든지 “우아한 얘기가 난무한다”라든지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같은 말마디를 들을 때마다 소름이 돋습니다. 이런 말마디를 읊는 어른들은 당신 어머니한테도, 당신 아이한테도, 당신 술동무한테도 이런 말마디를 읊으려나요. 우리 말사랑벗들까지 이런 말마디를 읊는다면 얼마나 슬프며 끔찍할까요.

 “말솜씨”라든지 “많이 버려야 한다”라든지 “냄새가 코를 찌른다”라든지 “군대에 들어갔다”라든지 “어떻게 쓸까”라든지 “몹시 고맙다고 말하다”라든지 “찬찬히 살펴보았다”라든지 “동네는 이야기가 넓게 펼쳐지는 곳이다”라든지 “바야흐로 차를 만든다”라든지 “아름다운 얘기가 쏟아진다”라든지 “깊이 생각하게끔 한다”와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테고, 이렇게도 말할 줄 알 텐데요.

 예부터 말을 적을 뜻에서 글을 만들었고, 우리가 쓰는 ‘한글’이란 ‘우리말’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말을 담는 한글이 아니라, 조선 나라일 때 나랏님부터 지식인이 쓰던 중국 한문에다가, 일본이 이 나라를 짓눌렀을 때에 스며든 일본 한자말이랑 일본 말투가 뒤섞이고, 여기에 영어가 잔뜩 넘나듭니다. 우리는 말이랑 글을 차분하게 가누지 못하는 나날을 보내는 셈이고, 여태까지 우리가 쓰는 말이랑 글을 알뜰살뜰 가누는 나날을 맞이하지 못하는 셈입니다.

 말이란 말재주가 아니라, 내 삶을 일구는 하루하루를 곱게 들려주는 이야기예요. 글이란 글솜씨가 아니라, 내 꿈을 이루는 어제오늘을 예쁘게 나누는 이야기예요. 입으로 읊어 말이고, 손으로 적어 글입니다. 말을 하듯이 글을 쓰고, 글을 쓰듯이 말을 합니다. 말과 글은 동떨어진 두 가지가 아니에요. 입으로 하는 말과 손으로 쓰는 글은 다르지 않습니다. 입으로 말할 때처럼 손으로 글을 써야 아름답고, 손으로 글을 쓰듯 입으로 말할 때에 어여뻐요.

 예부터 말과 글이 하나로 되어야 한다고들 했습니다. 학교에서 국어 수업 때 들었을는지 모르는데, 한문으로 ‘言文一致’를 이루어야 한다고 했어요. 지난날 지식인한테는 ‘言文一致’인데, 우리 말사랑벗님한테는 ‘말글하나’예요.

 그런데 말글하나란 무엇일까요? 입으로 하는 말과 손으로 쓰는 글이 똑같으면 그만일까요?

 말글하나가 되려면, 먼저 내 말과 내 삶이 하나여야 합니다. 내가 말을 하듯이 내 삶을 꾸려야 말글하나예요. 내가 글을 쓰듯이 내 삶을 일구어야 말글하나입니다.

 나 스스로 몸으로 옮기지 못하는 일을 말로만 들먹이면 말글하나가 아니에요. 내 말투가 제아무리 예쁘장하거나 빈틈이 없거나 맞춤법이랑 띄어쓰기를 잘 맞춘달지라도, 내가 하는 말대로 내가 살아내지 못하면 거짓이랍니다. 입으로는 착한 말을 하면서 정작 착하게 살지 못한다면 거짓이에요. 그런데, 설마, 입으로 나쁜 말을 하며 부러 나쁜 짓을 하지는 않겠지요? 나쁜 말과 나쁜 짓으로 말글하나가 되려는 말사랑벗님이 있으려나요.

 나쁜 말과 나쁜 짓으로 말글하나를 일삼는다면,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멍청이’라 하고, 이러한 삶을 가리켜 ‘바보짓’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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