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적·-화’ 없는 글쓰기



어렵다고 여기니 어렵다는 생각이 마음에 깃들어, 그만 스스로 그대로 하면 되는 일을 못하기 마련이다. 다들 어렵다고 여기기에 ‘-의’나 ‘-적’이나 ‘-화’ 같은 말씨를 그냥 넣어서 말을 하고 글을 쓰는데, 그냥 이런 말씨를 털어내려고 마음을 기울이면 저절로 다 떨어지기 마련이다. 어렵지 않다. 안 하니까 어려워 보일 뿐, 해보면 아무것이 아니다. 아이들 말씨를 헤아리면 된다. 아이들한테 “얘야, 말을 할 적에 굳이 그런 말씨를 붙이지 않아도 된단다. 그런 말씨를 붙이면 군더더기야. 그 말씨 없이 말해 보렴. 훨씬 짧고 부드럽지.” 하고 알려주면, 아이들은 한두 마디를 혀에 얹고는 이내 이 말씨를 받아들여서 잘 쓴다. 이와 달리 어른들은 그동안 책을 읽어 버릇이 들고, 방송을 보며 길이 들어서, ‘-의·-적·-화’를 좀처럼 털어내지 못한다. 게다가 앞으로 읽을 책에도 이런 말씨가 수두룩하게 나올 테니 그만 어질어질하다고 한다. 다시 말하지만, 어렵다고 여기니 어려울 뿐이다. 그냥 가볍게 털어내어 말하는 버릇을 익히면 아주 쉽게 한 마디도 없이 즐겁게 쓸 수 있다. 아이들이 말이나 글을 배우는 숨결을 생각하자. 우리 어른도 몸은 쉰 살이나 일흔 살이어도, 마음은 열 살이나 열다섯 살 싱그러운 숨결로 생각을 기울이면 된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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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읽었으면 못 쓴다



안 읽고서도 쓸 수 있을는지 모르나, 안 읽고서 쓴다면 헛다리를 짚기 좋다. 마음을 안 읽고서 어찌 마음을 안다고 할까. 마음을 읽더라도 찬찬히 삭이고 받아들이고 헤아려야 비로소 그 마음을 밝힐 만하다. 그러나 읽긴 읽었어도 겉만 보았다면, 마음은 읽지 않고 겉모습만 보았다면, 이때에도 읽기라고 할 만할까? 안 읽으면 못 쓰지만, 읽어도 못 쓸 수 있다. 눈으로만이 아닌 마음으로 같이 읽고, 사랑하고 삶으로 나란히 읽으며, 살림에다가 노래로 함께 읽을 적에, 비로소 새롭게 배우는 내가 되어 글 한 줄을 쓸 수 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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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고 삶이 다르다면



말하고 삶이 다른 사람이 있다면, 그이는 겉을 꾸미거나 속을 감추었으리라 느낀다. 말하고 삶은, 또 글하고 삶은 다를 수 없으니까. 말이나 글은 언제나 삶이나 살림이나 사랑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한 톨조차 감출 수 없다. 그런데 말하고 삶이 다른 사람이 있으면, 어쩌면 스스로 하지 못하면서 말로만 읊는 셈일 수 있다. 하지 않거나 해내지 못하는 일을 놓고 그저 말이나 글로만 떠벌일는지 모른다. 때로는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나 나아가려는 길을 쓸 수 있겠지. 비록 오늘은 못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앞으로 해내고 싶기에, 앞으로는 신나게 온몸으로 맞아들여서 하고 싶기에 먼저 말이나 글로 신나게 드러낼 수 있다. 가만히 보면, 우리는 스스로 말하거나 글쓰는 대로 살기도 하지만, 말하거나 글쓰는 대로 살고 싶은 모습이나 마음이기도 하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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쳇바퀴 글쓰기



누구나 스스로 사는 만큼만 글을 쓴다. 마땅하지. 누구나 스스로 사는 만큼만 바라볼 수 있고, 사는 만큼 바라보는 결로 생각하기 마련이고, 사는 만큼 바라보는 결로 생각하면서 다시 살림으로 드러낸다. 시이든 동시이든 글쓴이 삶만큼 쓰기 마련이라서, 어느 글을 놓고서 좋거나 나쁘다고 가르기 어렵다. 내 눈으로 보자면 요즈음 나오는 어른시이든 동시이든 하나같이 재미없구나 싶으나, 이런 글을 쓰는 그분들로서는 그런 시가 재미있을 테지. 바로 그분들 삶을 그분들 삶결 그대로 글로 옮겼을 테니까. 다만 “쳇바퀴 글쓰기”를 놓고는 한마디를 해보고 싶다. 동시를 놓고 본다면, 동시를 쓰는 분들이 “어린이 눈높이에 맞춘다”고 하면서 정작 학원 뺑뺑이하고 입시지옥을 그릴 뿐이다. 이런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은 아이들이 누리놀이(인터넷게임) 하는 얘기에, 동무들하고 다투어야 하는 하루, 아직도 어머니 혼자 집일을 도맡고 아버지는 집일을 안 한다는 얼거리 즈음. 요즘 동시라고 하는 글이 하나같이 이 테두리에서만 맴돈다. 이 삶터가 쳇바퀴라 하더라도 쳇바퀴인 모습만 마냥 동시로 담고 어른시로 담는다면, 시란 무엇일까? 글이란 무엇일까? 쳇바퀴인 삶을 그대로 나아가고 싶다면, 쳇바퀴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하거나 않는다면, 쳇바퀴 너머를 그리지 못한다면, 쳇바퀴 너머로 나아가려는 걸음을 한 발짝이라도 떼지 않는다면, 쳇바퀴 아닌 살림짓기라는 노래를 부른다면, 오늘날 동시나 어른시는 확 달라지리라. 어찌 보면 그렇다. “쳇바퀴도 ‘쳇바퀴’라는 삶”일 테니까, 그분들이 하는 쳇바퀴 글쓰기도 고스란히 ‘삶쓰기’인 셈이다.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살아가는 대로 글을 쓴다. 스스로 살아가고 싶은 대로, 사랑하고 싶은 대로, 살림을 짓는 꿈을 그리는 대로 쓰고 읽으며 다시 살아간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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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이쁘다면



사진이 이쁘다면, 찍힌 숨결이 이쁠까, 찍는 손길이 이쁠까, 보는 눈썰미가 이쁠까? 살림이 곱다면, 짓는 숨결이 고울까, 받는 손길이 고울까, 나누는 눈썰미가 고울까? 글이 참하다면, 짓는 숨결이 참할까, 읽는 손길이 참할까, 엮어서 책으로 내는 눈썰미가 참할까? 어느 하나만 이쁘지도 곱지도 참하지도 않을 테지. 다 같이 이쁘며 고우며 참할 테지.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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