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게 만나는 말



즐겁게 만나는 벗은 얼마나 반가운가! 기쁘게 마주하는 이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네가 나한테 벗이 되고, 나는 너한테 이웃이 된다. 서로 즐거우면서 기쁜 걸음으로 삶을 짓고 싶으니까. 신문이나 잡지나 방송에서 이른바 ‘인터뷰’를 하겠다고 나설 적에도 이런 마음이 되면 사뭇 다르다. 생각해 보라. 그들이 조회수나 시청율이나 판매율을 헤아리면서 인터뷰를 딸 생각이라면 대단히 재미없다. 이때에는 도무지 벗도 이웃도 못 된다. 그런데 그들 아닌 너랑 내가 마주하는 사이로 한 자리에 모여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려고 한다면, 조회수나 시청율이나 판매율이 아닌, 마음하고 마음이 만나서 흐르는 이야기판을 벌이려고 한다면, 이때에는 ‘그들’에서 ‘우리’로 바뀌면서 노상 즐겁게 말을 섞겠지. 기자나 방송작가나 피디나 편집자라는 자리에 있는 이들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넌 나를 어떻게 보니? 난 너를 어떻게 봐야겠니? 네가 나를 찾아오려 한다면 네 손에는 무엇을 들어야겠니? 내가 너를 맞이하려면 나는 이 손을 어떻게 해야겠니? 너는 나한테서 무슨 이야기를 들으면서 네 마음을 북돋우고 싶니? 나는 너하고 무슨 이야기를 하면서 내 살림을 새롭게 가꾸는 슬기로운 사랑을 살찌울 수 있니? 즐겁게 만나는 말일 적에 비로소 ‘인터뷰’이다. 아니, 이런 말 ‘인터뷰’는 집어치우자. ‘만남말’이 되어야지. ‘사랑말’이 되고 ‘벗말’이자 ‘이웃말’이 되어야지.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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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를 본다



갈무리해 놓은 글을 묶으면 책이 된다. 누구는 갈무리한 글을 고스란히 책으로 묶고, 나는 갈무리한 글을 출판사로 보내기 앞서 여러 벌 손질하는데, 출판사에서 틀에 앉히면 이때에 거듭거듭 손질한다. 끝날 듯하지 않은 글손질은 출판사에서 겉그림을 마무리하고 인쇄소로 넘기면 드디어 마감. 이때까지 내가 할 몫이란 오로지 글손질에 다시금 글손질. 틀린 글씨를 찾으려고 글손질을 하기도 하지만, 이보다는 내가 나를 새롭게 바라보면서 더 거듭날 길이란 무엇인가를 알아보려고 글손질을 한다고 해야지 싶다. 글쓴이가 책쓴이로 거듭나는 길은 언제나 이렇다. 스스로 돌아보고 스스로 새로보며 스스로 다시보다가 어느덧 마음에 날개를 달고서 훨훨 바람을 타고 무지개를 노래하는 길을 가려고 한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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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까지 '지식인 여자'는 좀 다르리라 여겼는데

얼마나 터무니없는 바보넋이었는가를 새삼스레 깨닫는다.

'지식인 남자'하고 '지식인 남자'는

너무 닮았다.


+ + +


뭐, 이런 글도



  ‘한남’이라는 말을 엊그제 처음 들었는데, 이런 으름질(갑질)을 하는 이들이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몰랐으나 어렴풋이 알겠다고 느낍니다. 지난날 문화예술권력자이자 정치사회권력자이던 사내들이 신나게 해대던 그런 으름질을 오늘날 새롭게 문화예술과 정치사회 쪽에서 차츰 권력을 손에 쥐는 여성 지식인이 똑같이 그 으름질을 하는 맛을 보면서 저절로 일삼지 싶습니다.


  사내가 가시내를 때려도 주먹질이고, 가시내가 사내를 때려도 주먹질입니다. 둘이 무엇이 다를까요. 굳이 무엇이 다른가를 꼬치꼬치 따지면서 둘 모두 같은 주먹질인 줄, 권력을 쥔 이가 휘두르는 으름질이라는 대목이 아닌, 꼬투리를 붙잡을 적에는 무엇이 달라질까요. 그동안 맞았으니 이제부터 때린다는 으름질 아닌, 그동안 때리고 맞는 바보질을 했으니, 앞으로는 어깨동무하거나 손잡는 길을 간다는, 슬기로운 평화와 평등을 열 노릇이지 싶습니다.


https://blog.naver.com/hbooklove/221412623212


  어제(2018.12.5.) ‘한남몰이 책장사’를 하다가 스스로 제 발목을 잡은, 예스24 엠디들 이야기를 글로 다루었으나, 오마이뉴스에서 이 글은 기사로 다루지 않고 쳐내셨습니다. 그런가? 그렇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지웠습니다. 재미있는지 모르겠으나, 누리책집 알라딘에서는 알라딘서재 머릿글로 ‘한남몰이 책장사’ 글을 꽤 오랫동안 걸쳐 놓았습니다. 알라딘이 예스24하고 서로 다투는 누리책집이기 때문에 예스24 이야기를 굳이 그리 오래 머릿글로 걸쳐 놓았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그 글에서 함께 읽고 생각할, 앞으로 우리가 새로 나아가야 할 길을 읽어 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여깁니다.


  한남질은 그여자들만 할까요? 제가 보기로는 아닙니다.


  사회 곳곳에서 애쓰는 분들(사내 가시내를 가리지 않고서)이 많고, 이와 맞물려 사회 곳곳에서 ‘한남질·한녀질’을 하는 분도 꽤 많구나 하고 느낍니다.


  아이하고 먹을 밥을 짓는 한낮입니다. 다 지었고, 아이가 손수 밥상을 차립니다.


  먼 앞날, 우리 아이들이 스무 살 즈음 될 무렵 ‘읽을 만한 신문’을 알려 달라고 할 적에 한 가지쯤 알려줄까 생각하면서 그동안 이래저래 글을 썼지만, 아무래도 아이들한테 다음처럼 한 마디를 할 수밖에 없겠구나 싶습니다.


“얘들아, 한국에는 우리가 읽을 만한 신문이 아직 없어. 너희가, 또는 너희하고 우리(어머니 아버지)가 앞으로 새로 지어야 한단다. 신문을 읽고 싶으면 앞으로 새로 짓자.”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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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글이네



모두 글이 된다. 몸살이 나서 나흘 동안 물조차 마시기 힘들던 나날도, 몸살이 지나간다 싶더니 옆구리가 결려 엿새째 끙끙 앓는 나날도 글이 된다. 옆구리 결림을 더 적어 본다면, 옆구리가 결리니 숨을 쉬다가 아프고, 설 적에도 앉을 적에도 누울 적에도 허리를 굽히려 할 적에도 쪼그릴 적에도, 그러니까 뭘 해도 그때그때 칼로 옆구리를 푹 쑤시는구나 싶도록 아프다. 이렇게 아프구나 하고 새삼스레 느끼니, 이런 아픈 이야기는 얼마든지 글이 된다. 며칠 앞서 누리책집 예스24에서 ‘으름질’을 했다. 예전에는 사내들이 으레 으름질을 했지만, 요새는 가시내도 으름질을 한다. 사내만 으름질을 하지 않는다. 사내이든 가시내이든 ‘힘하고 이름하고 돈을 쥔 자리에 서되 스스로 슬기롭지 않고 바보스러운 넋이나 삶이나 몸짓’이라면 그만 으름질을 하고 만다. 생각해 보라. 성평등이란 무엇인가? 가시내가 손에 물을 안 묻히고 집안일을 안 하는 길이 성평등인가? 아니다. 사내이든 가시내이든 손에 물을 안 묻히고 집안일을 안 한다면 ‘누구인가 해야’ 한다. 이때에 그 ‘그 누구’는 누구인가? 아버지가 안 하던 옛날에는 어머니가 했다. 오늘날에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안 하니, ‘할머니’가 하거나 ‘가정부’를 비정규직으로 들여서 하겠지. 또는 돈으로 밥집에서 사다가 먹는다든지, 손전화를 눌러 먹을거리를 집으로 갖다 주도록 하면서 사다가 먹을 텐데, 이때에도 ‘손에 물을 묻히는 일’을 남들이 비정규직으로 하기 마련이다. 자, 이때에 무엇이 성평등이거나 평화일까? 으름질은 사내가 해도 볼썽사납지만 가시내가 해도 볼썽사납다. 다시 말해, 으름질이란 누가 해도 볼썽사납낟. 으름질은 어른이 해도 어린이가 해도 볼썽사납다. 신문사 우두머리네 집안 어린이가 으름질을 할 적에 이 으름질이 귀여워 보일까? 아니다. 똑같이 으름질일 뿐이다. 사내한테서 힘하고 이름하고 돈을 거머쥐는 자리를 빼앗은 가시내는 이 대목을 좀 헤아릴 노릇이라고 느낀다. 그 ‘권력’이라는 자리를 빼앗으려 하지 말자. ‘권력 없애기’를 하자. 권력이란 자리에 예전에는 사내가 들어앉았다면 요새는 ‘지식인 가시내’가 들어앉은 모습이다. 성별을 뛰어넘고, 인종이나 나라를 뛰어넘고, 어른이나 아이를 뛰어넘고, 학벌이나 지연 같은 쓰잘데기없는 줄긋기를 뛰어넘고, 몽땅 뛰어넘거나 내려놓고서 즐겁게 손잡고 노래하는 길을 가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이리하여 모든 이야기는 글이 된다. 꾸밈없이 바라보기에 글이 될 수 있다. 으름질을 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사랑하려는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어루만지기에 글이 된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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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부 앞으로



  보내신 글월 잘 읽었습니다. 지난 2018년 5월부터 ‘10만사람’을 끊은 까닭은 그때부터 오마이뉴스 글쓰기를 끊었기 때문입니다. 편집부에서 제 글을 썩 안 좋아하는구나 하고 깊이 느껴서 글쓰기를 끊었습니다. 예전에도 제 글을 썩 안 좋아한다고 느꼈지만 그냥 글쓰기를 했는데요, 저 스스로 더 버틸 수 없으니 끊었습니다.


편집부에서 제 글을 좋아하든 말든 10만사람이야 그대로 이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10만사람까지 굳이 끊고 글쓰기까지 끊은 까닭은 더 깊습니다.


  그때 오마이뉴스 글쓰기를 끊고서 11월까지 여섯 달 즈음 제 글결을 이모저모 손질했습니다. 여섯 달 만에 다시 글을 올릴 적에는, 이렇게 새로 가다듬어서 쓰는 글마저 싫어한다면, 앞으로는 더 글을 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막 새로 글을 쓰는 시민기자이든, 오랫동안 꽤 많이 글을 쓴 시민기자이든, 글 하나를 쓰기까지 어떤 마음이며 생각인가를 읽어내려는 뜻이 오마이뉴스 편집부에 없다면, 굳이 글을 쓸 까닭이 없다고 봅니다.


  저는 예나 이제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 제 글바탕은 오직 하나입니다. 홀가분하게 제 마음과 삶이 흐르는 결에 맞추어, 이 삶결과 마음결을 슬기로운 사랑으로 담아내는 글을 쓰려고 합니다. 이런 마음결하고 삶결로 글을 씁니다만, 오마이뉴스 편집부는 언제나 ‘최종규 시민기자가 쓰는 글은 너무 길다’고 싫어하더군요. 아무리 마음을 담아서 글을 써도 ‘길면 안 된다’고 하면, 어떻게 보면 장편소설이란 다 사라져야겠지요. 그런데 누리신문 누리글 가운데에도 무척 긴 글이 꽤 많습니다. 오마이뉴스뿐 아니라 다른 곳도 매한가지인데, 이야기가 많으면 이를 낱낱이 밝히려고 길게 쓰기 마련이에요. 이야기가 없는데 억지로 늘린 글하고, 이야기가 넘치기에 이를 갈무리하는 글은 다르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제가 모든 길을 길게 쓰지 않습니다. 길게 쓸 만하다 싶은 글이라면 마음껏 길게 쓸 뿐입니다. 책 하나를 놓고서 쏟아지는 이야기가 철철 흘러넘치면, 이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아내려고 할 뿐입니다.


  즐거운 이야깃거리라면, 새롭거나 사랑스럽거나 신나는 이야깃거리라면, 우리는 이 하나를 놓고도 며칠을 밤새워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림책이나 사진책이나 만화책 하나를 놓고 얼마든지 이런 이야기가 흐를 수 있어요. 모든 글이 비슷비슷한 길이에, 비슷비슷한 얼거리에, 비슷비슷한 책을 다루어야 할까요? 아니겠지요? 오마이뉴스라는 누리신문에 제가 쓴 글이 2018년 11월까지 4500꼭지가 넘고, 이 가운데 2000꼭지쯤이 책을 놓고 쓴 글일 텐데, 저처럼 온갖 갈래 책을 두루 다루는 시민기자는 아직 없다고 느낍니다. 그림책이나 동화책 이야기를 쓰는 시민기자도 제가 처음이었을 텐데, 예전(2000년대 첫무렵)에는 편집부에서 ‘왜 그림책이나 동화책 따위를 소개하는 글을 쓰느냐?’며 투덜거리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대놓고 투덜거리시는 분은 못 봤지만, 이런 느낌을 늘 확확 받았어요. 그무렵에는 오마이뉴스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그림책 비평이나 동화책 비평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아무튼 만화책이나 사진책을 소개하는 글을 쓸 적에도 편집부는 매우 싫어하는구나 싶더군요. 그도 그럴 까닭이, 편집부 일꾼 가운데 그림책이나 만화책이나 사진책을 곁에 둔다든지 챙겨서 읽는다든지 기꺼이 사서 읽는 분은 거의 없다시피 했을 테니까요. 그렇기에 이러한 책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는지, 이러한 책이 참말로 읽힐 만하거나 알릴 만한 책인지도 판가름하기 어려웠겠구나 싶기도 합니다.


  이러다가 그림책을 소개하는 시민기자가 늘어나는데, 그동안 적잖은 시민기자가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어린이책하고 그림책을 비로소 읽었기 때문’이에요. 그러고 보니 동화책을 소개하는 시민기자도 저를 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시집을 읽고서 소개하는 시민기자도 매우 드뭅니다. 아는 이웃이 낸 시집을 소개하는 시민기자는 가끔 있으나, 스스로 시집을 챙겨서 사읽고서 소개글을 쓰는 시민기자는 거의 볼 수 없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적고 싶은가 하면, 오마이뉴스 편집부에서 ‘책동네 갈래’ 편집을 맡는 분들이 아는 책이나 알려 하는 책이 매우 좁다고 느낀다는 뜻입니다. 시민기자 가운데 책동네 갈래에 글을 쓰시는 시민기자는 ‘편집부에서 뽑아 놓은 책’을 다달이 몇 권씩 받아서 소개글을 쓰기도 하는데, 모두들 그분들한테 익숙한 책만 뽑아서 쓰시기 마련이라 늘 엇비슷한 책만 다루는 흐름이 짙기도 합니다.


  인문책 중심, 이 가운데 정치·사회 쪽 인문책하고 여성학 쪽, 여기에 문학은 소설책, 이렇게 좁은 갈래로만 책을 바라보고 아는 틀로 오마이뉴스 책동네 갈래를 꾸리는 흐름이라면, 책을 말하는 글뿐 아니라 우리 삶터는 얼마나 재미없고 따분하고 심심하고 답답하려나 싶습니다. 책이란, 인문학하고 소설책만 있지 않은데, 열린 시민기자하고 열린 삶을 말하고자 하는 누리신문이라면 이러한 굴레를 이제라도 털어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렇게 적는다면, 오마이뉴스 책동네에 이 갈래 책만 다루지 않는다고 말씀하실 텐데, 이제는 품이 퍽 넓어졌습니다만, 그래도 아직 매우 좁아요. 더욱이 이렇게 좁은 품을 어떻게 늘려야 할는지를 여태 헤아리지 못하는구나 싶습니다. 때로는 책 하나를 깊이 다루는, 이른바 원고종이로 30∼50쪽쯤 되는 글이 있고, 때로는 원고종이로 3∼5쪽쯤으로 짧게 다루는 글이 있고, 때로는 여느 소개글로 원고종이 15쪽 안팎으로 다루는 글이 있을 만하겠지요. 요일마다 여러 갈래 책을 따로 깊이 다루는 글을 모아서 다룰 수도 있을 테지요. 이는 ‘원고료’라는 틀을 벗어날 때에 비로소 할 수 있으니, 편집부에서는 새길을 찾아내도록 마음도 생각도 더 쏟을 노릇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런 새길을 지난 스무 해 가까이 좀처럼 보여주지 않고서, 다른 데에만 자꾸 마음을 돌리셨지 싶습니다. ‘책동네’ 갈래 하나만으로도 독립하여 신문을 하나 낼 수 있습니다. 여행 갈래나 사는이야기도 이와 매한가지입니다. 책동네라는 갈래에서 책이 여러 갈래로 많으니 이 갈래를 제대로 나누어서 보여주도록 한다면, 이 하나로도 훌륭한 노릇을 할 테고, 이에 따라 출판사나 여러 곳에서 저절로 광고도 따라올 수 있겠지요. 애써 소개하는 책이 잔뜩 있지만, 출판사나 여러 곳에서 광고가 따라오지 못하는 까닭은, 이러한 기사를 살려낼 그릇을 키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터넷 환경이나 틀을 손보는 일이 그렇게 힘들까요? ‘책동네’ 기사에서도 ‘인문·어린이책·청소년책·그림책·만화책·사진책·시집·소설책·종교·과학·생태환경’ 들을 가르기가 그렇게 어려울까요? 예전에는 뭉뚱그려도 되었겠지만, 앞으로는 이렇게 갈래를 나누어 다룰 수 있는 길이 되어야지 싶습니다. 예전에는 자료나 글이 모자랐다지만, 이제는 어느 곳이나 자료나 글이 넘치기에, 이 글을 제대로 가르고 나누어 쉽고 빠르게 찾아볼 수 있도록 짜임새있게 놓지 않는다면, 독자가 다가오기 어려우리라 느낍니다.


  오마이뉴스는 ‘새로운 시민기자’를 어쩐지 더 반기려고 하는구나 싶은데, 아무리 새로운 시민기자가 들어와서 글쓰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꾸준히 글을 쓰는 ‘오래된 시민기자’가 설 자리를 밀어낸다면, ‘새로운 시민기자’가 머잖아 ‘오래된 시민기자’가 될 무렵, 어느새 저절로 이곳을 떠나는 흐름이 되풀이되리라 봅니다. 그리고 참말로 이런 흐름이 꾸준히 나타나지 싶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르고 다 다른 사람은 글결도 다르기 마련인데, 편집부에서는 이 다름을 보기보다는 오마이뉴스 틀에 맞도록 ‘다른 결을 똑같이 하기’를 너무 크게 바란다고 느낍니다. 아무래도 오마이뉴스 바탕틀이 더 넓게 찬찬히 갈래를 나누어 이모저모 새롭게 이야기를 담도록 하는 품이 아닌 채 그대로 흐르니, 새로운 시민기자가 오래된 시민기자가 될 무렵 설 자리를 저절로 잃어버리는 흐름이라고 느낍니다. 


  오마이뉴스가 스무 돌이라고 하는 잔치를 맞이하기 앞서, 오래된 시민기자한테서, 또 떠나간 시민기자한테서, 왜 더 글을 안 쓰는지를 묻고, 오마이뉴스에서 좋고 나쁘거나 반갑거나 아쉬운 대목을 귀기울여 듣는 자리를 마련하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을까요?

  이런 몸짓을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다면 언제라도 기꺼이 다시 ‘10만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되려고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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