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00원, 또는 5000원



어제 고흥읍 우체국에 다녀왔다. 수원·서울·일산·서울·인천마실을 사흘 사이에 기차·버스·전철·택시로 거의 잠을 이루지 않으면서 하노라니, 고흥으로 돌아와서 하루 뒤인 2월 1일 금요일 아침에 무릎이 좀 시큰거리더라. 며칠 뒤에 설인 줄 뒤늦게 알았는데, 인천에서 고흥 돌아가는 버스를 알아보다가 ‘서울-고흥’ 찻길은 목요일부터 자리가 빡빡하기에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곧 설이 아니었으면 인천에서 하루를 쉬듯이 누린 뒤에 고흥으로 돌아왔을 터이나, 하루만 늑장부려도 고흥 돌아올 길이 없겠구나 싶어서 좀 서둘렀다. 이렇게 돌아와서 하루를 묵는데, 금요일이 지나 토요일이 되고 설이라며 여러 날 우체국이 안 열면 글월을 못 부치겠네 싶어 부랴부랴 몸을 추스르고 마음에 새숨을 담아서 큰아이하고 나들이를 나왔다. 글월은 두 군데에. 하나는 내 사진을 말없이 가져다가 쓰면서 마치 저희 것이라도 되는 듯 성명표시권까지 어긴 언론사에 보낼 내용증명. 다른 하나는 일본 도쿄 ‘책거리’로. 열한 해 이야기땀을 들여서 지은 《우리말 동시 사전》이기에 기쁘게 새 동시를 하나 써서 ‘책거리 + CUON’ 김승복 님한테 책을 띄운다. 책이 고흥에서 도쿄로 날아가는 데 드는 삯은 24500원. 그런데 사흘 동안 바깥마실을 하며 서울에서 우체국을 찾아 좀 헤매야 했다. 시골에서는 읍내에 가면 우체국이 있고, 조금만 걸어도 닿으나, 서울에서는 우체국이 어디에 숨었는가 알기도 어려울 뿐더러, 금융을 맡지 않는 곳이 꽤 있어서 여러 곳을 헤맸다. 그런데 서울에서 우체국을 찾아가서 ‘착불 택배삯 5000원’을 보냈는데, 고흥에 돌아오고 보니, 택배회사에서 손전화 번호를 잘못 알아 엉뚱하게 나한테 ‘착불 택배삯 5000원’을 보내라고 했단다. 이 돈을 낼 사람은 경기도 안성에 산다지. 그러니까 우리 집에 오지도 않은 ‘착불 택배’를 둘러싸고서 나로서는 참으로 뜬금없이 두어 시간 즈음 서울 시내를 헤매고 다니면서 5000원을 보내려고 용을 쓴 셈. 그렇다고 짜증이 났는가? 아니다. 서울 강남 골목길하고 한길을 두 시간쯤 걸었는데, 서울에서도 강남이라고 하는 넉넉마을조차 거님길이 엉망이더라. 돌돌돌 끌고 다니는 수레짐을 이끌고 강남 거님길을 걷는데 바닥돌이 깨지거나 기울거나 튀어나오거나 패인 데라든지, 턱이 높은 데라든지 얼마나 많던지. 서울 강남에서는 다들 자가용만 타고 다니느라 거님길이 엉망일까? 설마, 아닐 테지. 아무리 자가용을 오래 타더라도 차에서 내려 몇 걸음은 디뎌야 하지 않나. 엉뚱하게 5000원을 바람에 날리면서까지 헤맨 며칠 앞서, 참 재미있었다. 즐겁게 우표값 24500원을 들여 동시 하나 새로 써서 일본으로 책을 부친 어제 낮, 무릎은 시큰거리고 졸음은 쏟아지면서 길바닥에 드러누워 단잠이 들고 싶었는데, 큰아이가 아버지를 잘 이끌고 토닥여 주어서 보금자리에 잘 돌아왔다. 집이란, 사랑이 흐르는 집이란, 언제나 이야기가 피어나고 샘솟기에 글을 쓸 살림거리나 노래거리가 그득그득 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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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쩜 이렇게



이틀을 바깥에서 묵고 사흘 동안 바깥일을 하고서 보금자리로 돌아왔다. 시외버스에서 무릎셈틀을 켜서 쓴 글을 누리집에 올리고서 쉴까 했지만 손목이며 팔뚝에 힘이 없어 차마 올리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손목이랑 팔뚝으로 개수대에 가득한 설거지는 했고 부엌을 비로 찬찬히 쓸었다. 글을 쓰는 몸하고 부엌일을 하는 몸은 다르네. 자리에 눕기 앞서 며칠 사이에 하고 겪고 느끼고 배우고 받아들인 이야기를 곁님한테 짤막히 들려주려 했는데, 그만 네 시간이나 부엌에 나란히 앉았네. 고단해 쓰러지려고 하는 몸이랑, 이야기꽃을 펴는 몸도 다르네. 어쩜 이렇게 다를까. 같은 몸이면서 다른 몸이다. 다른 몸이면서 같은 몸이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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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마음



내가 글을 쓰는 마음은 딱 하나이다. ‘참마음’. 한자말로 옮기면 ‘진심’. 이밖에 달리 어떤 마음으로 글을 쓸 수 있을까? 참마음이 아닌 채 어떻게 글을 쓸까? 참마음이 아닌 채 어떻게 밥을 짓고, 아이들을 사랑으로 낳으며, 어떻게 하루를 누릴까? 참마음이 아닌 채 어떻게 동무나 이웃을 사귀고, 참마음이 아닌 채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 나는 이제껏 모든 자리에서 참마음일 뿐이었고, 오늘도 모레도 늘 참마음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감출 수도 숨길 수도 없다. 내 낯빛에 참마음이 그대로 묻어나고, 내 몸짓에 참마음이 고스란히 흐른다. 그래서 글을 쓰면서 나 스스로 속삭인다. 사랑해.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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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글을 읽으면서 울 수 있는가



나는 아직 따로 글쓰기 강의를 다니지는 않는다. 누가 우리 책숲집으로 찾아와서 이야기를 들으려고 할 적에, 또 다른 여러 일로 다른 고장에 강의를 갈 적에, 이웃님이 여쭈면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최종규 씨는 어떻게 그 많은 책을 다 읽고 날마다 그 많은 글을 다 쓰나요?” 하고 으레 물으면 다음처럼 대꾸를 한다. 


“저는 저 스스로 사랑하고 싶어서 삶을 배우는 길에 문득 책이 얼마나 깊고 푸른 숲이면서 바람을 고이 품는가 하고 스스로 알아차렸습니다. 그때가 열여섯 살인가 열일곱 살이에요. 그때 그 눈물이 샘솟는 기쁨을 날마다 맛보고 싶어서 날마다 참으로 숱한 책을 읽고, 그렇게 읽은 책 못지않은 부피로 글을 쏟아냅니다. 

그런데 저는 이제껏 똑같은 글을 쓴 적이 없어요. 늘 새롭다 싶은 이야기하고 줄거리로 글을 써요. 저 스스로 돌아보지요. 어떻게 나는 이틀이나 사흘 만에 책 하나 부피가 될 만한 글을 스물 몇 해째 날마다 쓸 수 있는가 하고요. 

저 스스로 마음에 물어보면 언제나 한 가지 대꾸가 흘러나와요. ‘너 있잖아, 네가 쓴 글을 네가 읽고서 눈물을 흘릴 수 있니? 너 말이야, 네가 쓴 글을 너 스스로 읽으면서 깔깔깔 까르르 하하하 호호호 웃을 수 있니?’ 

이웃님한테 글쓰기 이야기로 말씀을 여쭌다면 오직 이 하나예요. 이웃님 스스로 쓴 글을 이웃님이 스스로 읽으면서 눈물이 눈가에서 마구 샘솟아 볼을 타고 흐르다가 턱끝으로 방울이 져 톡 떨어져 발치를 적시는가요? 

우리가 쓴 글을 우리 스스로 읽으며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글이 아니라면 글을 쓸 일이 없다고 여겨요. 우리가 쓴 글을 남들이 아닌 바로 우리 스스로 읽으며 웃음을 피울 수 있는 글이 아니라면 구태여 글을 쓸 일이 없다고 생각해요.”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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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 보고 읽을 뿐



아이들한테도 말하고 어른들한테도 말한다. 우리는 서로 마음으로 볼 뿐, 마음 아닌 몸으로는 볼 수 없고 볼 까닭이 없고 볼 일조차 없으며 볼 뜻마저 있을 수 없다고. 글 한 줄을 읽을 적에 눈에 보이는 글씨를 읽는가, 아니면 연필이나 볼펜이나 붓으로 썼는가를 읽는가, 아니면 글쓴이가 이제껏 걸어온 삶으로 지은 살림이 묻어나는 사랑이 흐르는 숨결을 읽는가? 무엇을 읽는가? 책을 손에 쥐어 읽을 적에 책쏜이 이름값을 읽는가, 아니면 책을 펴낸 곳이 얼마나 알려진 곳이라 하는 이름값을 읽는가, 아니면 글쓴이나 펴낸곳 이름값이 아닌 책에 서린 이야기가 얼마나 참답거나 참한 기쁨이 녹아드는 꽃송이인가를 읽는가? 모든 자리 모든 때에 그저 마음으로 보고 읽을 뿐이다. 글을 읽으면서 마음을, 글쓴이 마음을 못 읽는다면 글을 안 읽거나 책을 못 읽은 셈이라고 여긴다. 사람을 만나면서 마음을, 내가 마주한 그이 마음을 못 읽는다면 우리는 사람을 안 사귀거나 못 만난 셈이라고 느낀다. 눈을 가만히 감고서 오롯이 마음으로 마주하며 바라보고 품에 안으려 할 적에 비로소 ‘읽기’이고 ‘쓰기’가 된다고, 나는 이제까지 살며 온몸이랑 온마음으로 느껴서 배웠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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